프랑스 혁명

(테르미도르 반동에서 넘어옴)

프랑스어: La Révolution française
영어: French Revolution

(1789년~1793년)

파일:Attachment/프랑스 혁명/French Revolution.jpg
바스티유 감옥 습격을 묘사한 그림

1 개요

Liberté, Egalité, Fraternité(자유, 평등, 박애 [1] 연대)


18세기 말, 프랑스 왕국에서 발발하여 테르미도르 반동 이전까지 지속되었던 혁명[2]. 프랑스에서 일어났던 다른 혁명들과 구분하기 위하여, '프랑스 혁명'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17~18세기에 걸쳐 일어난 여러 시민 혁명들 중에서도 가장 의의가 깊은 것으로 꼽히며, 내부적으로는 연이어 즉위하는 무능력한 왕들과 사치와 권력 유지에 급급한 귀족들과 구체제의 모순을 뿌리뽑았고, 외부적으로도 나폴레옹 전쟁의 여파로 프랑스 혁명의 영향력이 주위 국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면서 19세기 이후 각국의 시민 혁명의 촉발제로 작용하였다.

사실 프랑스에서 일어난 굵직한 혁명하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대표적으로 들라크루아의 그림으로 유명한 1830년 7월 혁명도 있고, 1848년 2월 혁명도 있으며 무력으로 진압당하기는 했지만 보불전쟁 직후 파리 코뮌이 세워지기도 했고, 넓게 보면 나치 치하 레지스탕스의 활동이나 1968년 68혁명 같은, 다른 혁명'들'이 수두룩하다. 혁명의 나라 본 문서는 1789년 삼부회 사건부터 나폴레옹의 집권까지 계속된 혁명을 다룰 것이다.

2 혁명 전야

2.1 이론적 배경

혁명의 이념적 기초는 장 자크 루소, 볼테르, 몽테스키외, 드니 디드로 등의 계몽주의자들과 백과전서파들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는데 특히 프랑스 혁명의 뿌리를 만든 사람은 루소로서 루소의 사회계약설과 인민주권론은 왕권신수설을 주장하던 프랑스의 전제왕권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이론적 배경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 가운데 사회계약설은 왕이란 존재는 신께서 정해주신 직업이 아니며 한 사회와 국가가 안정적으로 운영되고 번영하기 위해 백성님들께서 계약하듯이 옹립해준 자리라는 것. 이는 왕권신수설과 정면 배치되는 이론이다. 근데 다소 안습인 건 원래 이것이 발표된 취지는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를 지키기 위해 현재 사회(왕정)를 지켜야 한다!'는 논지였다.이 당시 사회가 왕권에 반하면 강력한 규제를 받았기 때문에, 루소가 처벌을 피하려고 끝부분에 왕권을 찬양한다는 말을 넣은 것. 혁명이 안 일어났으면 존 로크의 사회계약설에 묻힐 뻔 했다

2.2 경제적 위기와 수탈

프랑스 혁명 직전, 앙시앵 레짐 프랑스는 여러 정치, 경제적인 난제들에 시달리고 있었다. 특히 경제적으로는 이미 산업 혁명이 시작되어 비약적인 경제성장을 이루고 있던 영국과는 달리 루이 14세 때 낭트 칙령의 폐기로 산업을 일으킬 만한 능력을 가진 위그노들이 프랑스를 떠났고 경제발전이 정체된 상황에서 뒤를 이은 루이 15세루이 16세는 나라의 어려움을 타개하기 보단 더 악화시키는 데 일조했다.

자세히 설명하자면 루이 14세는 부족한 예산들을 순수히 으로 충당했는데, 이것을 끝끝내 갚지 않고 증손자인 루이 15세에게 원금만 20억 리브르에 이르는 막대한 부채를 남기고 승하한다. 루이 15세 정부 역시 마찬가지로 쌓여가는 빚을 돈을 더 많이 빌리는 것으로 해결하려고 했다. 이것이 쌓여 루이 16세 치세에 가면 국가예산의 반 이상이 선대 왕들이 남긴 빚을 갚는 데 쓰이는 지경에 이르렀다.[3][4] 설상가상으로 하인들의 제복 제정과 사냥, 연회 등 점점 늘어나는 왕실의 사치, 그리고 귀족들도 이 사치에 동참하면서 국채는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이런 귀족들의 행각의 마이너 그레이드 버전이 상공업자들에게서 벌어졌다. 도시 수공업자들은 장인-도제 관계를 통해서 길드를 이루는 지극히 폐쇄적인 구조를 형성하고 있었는데 기술 발전과 판로 문제 등으로 도제가 장인으로 올라가는 길이 막히기 시작했다. 때문에 도제는 예비 장인이 아닌 수공업 노동자 계층을 형성하면서 도시 수공업자 층의 문제를 가져왔다.

이 즈음에 닥친 것이 멋진 가뭄과 흉년. 1785년에는 극심한 가뭄이, 2년 뒤인 1787년에는 큰 홍수가 닥쳤고 다시 1788년에는 가뭄과 우박, 벼락, 그리고 1788년~1789년 사이 겨울에는 기록적인 추위가 프랑스를 강타한다.[5]

상황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밑에서 설명할 세리, 즉 징세청부업자들은 이삭줍기권과 같은 생존에 관한 전통적 권한들도 무시하고 농민들을 가혹하게 수탈하고 있었다. 이삭 줍기란 유럽 농촌에서는 밀을 수확한 다음에 떨어져있는 밀 이삭은 밀 주인이 아니어도 가져가도 된다는 식의 전통적 권리다. 유럽만 아니라 동양에서도 떨어진 낱알은 주워가는 것은 묵인하는 전통이 있었다. 가난한 이웃을 배려하는 농부들의 전통인 셈. 밀레의 그림 '이삭줍기'가 다루고 있는 대상도 이것이다. 평온한 목가적 풍경이라기 보다는 치열한 생존의 현장인 셈인데 이런 권한 마저도 부정당한 것이다. 당연히 농민 봉기가 수도 없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 시기를 즈음해서는 식인에 대한 기록까지 보였다. 프랑스의 식인에 대한 기록은 비교적 최근인 19세기까지 등장하며 이 시기 정도 되면 이동 중이던 여행자 일행이 마을 주민들에게 먹히거나 농민 봉기 이후에 영주 일가가 바비큐가 되었다는 식의 기록이 심심치 않게 보인다. 이러한 심각한 상황이 뒤에 언급할 대공포로 이어진다.

가장 큰 문제는 세금을 걷는 구조 자체에 있었다. 당시 프랑스의 조세수취 구조를 살펴보면, 예산은 만들어야겠으나 돈이 없는 왕실이 돈 많은 귀족 내지 부르주아에게 돈을 꾸어오고, 그 대신에 지정한 연도 동안 일정한 영지의 세금에 대한 수조권을 주는 식으로 처리했는데, 이렇게 수조권을 확보한 세리(稅吏)는 왕에게 바친 돈의 본전을 뽑기위해 농민들을 가혹하게 쥐어짰다. 그 유명한 라부아지에도 이러한 족속들 중 하나. 당시 프랑스 전체의 절반 이상의 수십 년 분의 수조권이 이런 식으로 넘어갔다. 이미 이 세금문제 때문에 저항이 일어난 적도 있었다.

이러한 재정 상태를 타개하기 위하여 당시 재무총감 네케르는 '파산을 인정하지 말고, 세금을 인상하지 않으며, 빚을 더 지지 말자'는 선대 재무총감 튀르고의 금언을 받들어 강력한 중상주의 정책을 펼치려고 했다. 그러나 워낙 심각했던 위기였던지라 이정도의 노력으로는 이미 씨알도 먹히지 않는 상황이었고, 결국 네케르는 사임하게 된다. 이후 왕비의 추천을 받아 재무총감에 임명된 칼론은 귀족들도 세금을 내자는 평등과세론을 들고 나왔고, 1787년 명사회(144명)를 소집해서 이에 대한 협조를 구하려 했다. 그러나 명사회는 재정문제는 중대한 사안이므로 자신들보다는 전국 삼신분 대표회의에서 결정해야 한다는 그럴듯한 명분을 내세워 결정을 거부했는데, 이는 허울좋은 말에 불과했고 실상은 이제까지 면세특권을 누리다가 갑자기 평민들처럼 자신들도 세금을 내면 본인들의 위신이 떨어진다는 매우 기득권적인 의식의 발현이었다. 결국 그들은 국왕과 국민들을 배신하고, 1614년 이후 단 한번도 소집된 적 없는 전국 삼신분 대표회의 의회에서 이 문제를 미룬 채 상황을 해결할 의지조차 보이지 않았다.

칼론이 해임된 후 그 후임을 맡은 재무총감 브리엔은 명사회와 고등법원의 허락을 받고 우선 6700만 리브르를 차입해 이자와 빚의 일부를 탕감하려 했다. 그러나 개신교도들에 대한 공민권 부여, 인지세 신설, 귀족과 성직자들의 과세를 내용으로 한 그의 개혁안에 기득권층인 명사회와 고등법원이 반대하지 않을리 없었고, 브리엔의 개혁안이 무산되자 루이 16세는 1792년 전국 삼신분 대표의회를 소집하겠다고 공포하고 4억 2000만 리브르의 차용을 승인해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사촌 동생 오를레앙 공이 불법이라고 항의하자 왕은 그를 추방하고 추종자들을 모두 투옥시켰다. 이것을 고등법원이 불법이라고 선언하면서 들고 일어났고 성직자와 대검귀족이 이에 합세했다. 위기를 느낀 왕은 고등법원을 해산시켰고, 정국은 더욱 요동치게 되었으며 신흥 부유층인 부르주아까지 가세하게 되었다. 위기를 느낀 브리엔은 왕의 재가도 받지 않고 전국 삼신분 대표의회를 다음해 5월 1일에 소집한다고 공포했다. 또한 국가 파산을 막겠다는 일념으로 국가의 부채와 이자에 대한 지불정지 명령을 발표했다. 화가 난 왕은 브리엔을 8월 25일 파면했고 재정문제의 해결은 더더욱 묘연해져갔다. [6] [7]

이런 와중에 프랑스는 미국 독립전쟁을 지원했다. 영국을 견제하려는 목적이었는데 결과적으로 미국은 독립하고 얄미운 영국에게 한 방 먹일 수 있었다. 그러나 프랑스가 20억 리브르의 지출을 들여 얻은 건 자존심밖에 없었고 결국 국가 재정이 파탄 직전에 이르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실은 여전히 호화스러운 사치를 누리고 있었다. 비록 각주에서 언급했듯 이러한 사치가 이러한 재정난의 결정적인 원인은 아니었지만, 결론적으로 왕실이 사치를 부리지 않았더라면 프랑스의 경제 사정은 조금이나마 희망적이었을 수도 있다. 물론 그것이 '프랑스 혁명이 일어난 건 다 왕과 귀족들의 사치 때문이다.'라는 식의 말로 귀결된다는 것은 아니다.

2.3 부르주아의 부상

루이 14세는 자신의 왕권을 강화하고 귀족층을 약화시키기 위해 귀족을 더 늘리는 방법을 생각해냈다. 따라서 루이 14세는 부르주아들이 귀족이 될 수 있는 길을 열어두었고 이에 루이 14세 시대에는 수많은 부르주아들이 귀족층에 합류했다. 이렇게 귀족이 된 이들은 광범위한 면세 특권을 누렸다.

의 권력이 하늘을 찔렀던 루이 14세 치세에 귀족들은 왕의 권력에 눌려 단지 왕권이 제공하는 열매들만을 누렸을 뿐이지만 루이 15세 치세에 이르러 수가 비약적으로 늘어난 귀족들은 당시 전체 인구의 3%에 달했다. 옆나라 영국은 작위를 가진 귀족들이 전체 인구의 0.1%에 불과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전체 인구에 비례해서 아주, 매우 많은 수이다. 그리고 이렇게 수가 불어난 귀족들은 루이 15세 시대에 이르면 허수아비 왕 아래에서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몇십 년 혹은 수년 전 자신들이 속해 있었던 부르주아 계급들이 더 이상 귀족층에 합류하지 못하도록 그들의 신분 이동을 막았다. 그리고 이미 이전부터 존재하였던 이들을 대검 귀족, 이렇게 신흥 귀족으로 떠오른 구 부르주아들을 법복 귀족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또한 본래 귀족이었던 자들에 비해 이러한 신흥 귀족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더 애썼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예전에는 부르주아 계급이었던 귀족들과 성직자들이 특권층으로서 세금을 내지 않고 호사스런 생활을 누리는 반면 시민 계급(부르주아)과 평민 등은 국가 재정을 떠받쳐야만 했다. 이를 앙시앵 레짐(Ancien Régime), 즉 구체제라 부른다. 그런데 Ancien Régime은 프랑스어로는 그냥 '옛날(Ancient) 체제'라는 뜻이다. 앙시앵 레짐이 구체제의 모순으로 둔갑하게 된 이유는 옛날의 것=구닥다리라는 선입견 때문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세금이 하층민들에게 집중되어 있었다는 점 자체는 확실히 모순이었다.

이런 구체제의 모순으로 각각의 계층들의 불만은 고조되고 있었다. 이전 시대에만 해도 귀족이 될 수 있었던 시민 계급은 정치 권력에서 소외되는 것에 불만을 품었으며 평민들은 점점 늘어만 가는 세금으로 고통받고 있었다. 18세기에 프랑스의 세금은 200% 이상 늘었지만 노동자들의 임금은 100% 정도밖에 늘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볼 때 이를 더욱 잘 알 수 있다. 가장 큰 문제는 이 세금이 프랑스 정부로 들어가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배경은 역시 앞서 언급한 수조권 문제. 실제로 프랑스 직할령에 있는 사람들은 그럭저럭 먹고 살 만한 정도는 되었다. 문제는 빚 대신에 수조권을 받은 이른바 징세청부업자들의 대상이 된 영지에 사는 사람들로 세금 상승은 이쪽에서 주도했다고 봐도 된다.

이에 상술했듯 루이 16세의 재정총감 칼론은 1787년 2월, 명사회를 열어 귀족, 성직자 등의 특권 계층에게 임시로 과세하는 것을 재정 위기의 타개책으로 제시했다. 그러나 특권 계층은 이것에 저항하여 고등법원의 권한을 이용해 어떻게든 특권 계층의 임시 과세안을 막으려 했다. 이때 특권 귀족들은 삼부회에 비견될 만한 회의를 별도로 열려고 국왕에게 압력을 넣기에 이르렀고 이의 반발로 열린 것이 뒤에 언급되는 삼부회였다. 삼부회의 구성이나 명사회의 소집 등도 특권 세력과 왕실의 대립 과정에서 결정되었다. 때문에 프랑스 혁명의 초기 트리거는 구 특권 세력들이 제공한 것과 마찬가지이고 프랑스 혁명의 1단계 혹은 0단계는 구 귀족들의 왕에 대한 반발이라고 보기도 한다. 물론 이 반발은 국민의회가 엇나가서 귀족들이 루이 16세에게 달려가면서 바로 끝났다.

결국 칼론과 그 후임자인 브리엔이 특권 계층과의 파워 게임에서 밀리며 실각하고 후임 재정총감으로 복귀한 네케르는 1614년 이래로 열리지 않았던 삼부회의를 개최할 것을 제안했다. 그리하여 1789년 5월 5일, 베르사유 궁전에서 삼부회가 개최된다. 그리고 루이 16세는 귀족과 성직자들을 견제할 생각으로 원래는 한 신분당 같은 의석수였던 삼부회에서 제3신분인 부르주아 의원의 수를 두 배로 늘렸다. 재정위기 타개를 위해 열린 삼부회였으나 투표안에 대해 격렬한 논쟁이 일었다.

이 삼부회의 투표안은 이렇다. 제1신분 의석 200, 제2신분 의석 200, 제3신분 의석은 400이다. 귀족층은 여기서 각 신분간 같은 투표수를 주장했다. 한 신분 의석에서 의결된 하나씩의 의견을 결정하자는 식이다. 각 의원당 한 표씩을 가지게 되면 특권층은 질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귀족층의 일부가 부르주아 계층을 지지했고 고위 성직자들이 아닌 일반 사제들은 특권층보다는 시민 계급의 이익에 더 공감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프랑스 가톨릭 교구의 헌금은 지방 사제들로부터 걷어져서 일단 파리 대주교까지 올라간 다음에, 다시 아래로 내려오는 구조였다. 그런데 고위 귀족들이 이미 수도원 레벨을 장악했기 때문에 지방까지 내려올 돈이 없었다. 때문에 지방에서 사목하던 사제들은 프랑스 혁명의 초기 과정에 참여하게 된다.

반대로 부르주아 계층은 여기서 1인당 1표제를 주장했다. 그 이유는 위와 같이 1인 1표제를 시행한다면 머릿수로 이길 테니까. 여기에, 부르주아 계층은 가난한 성직자와 귀족 등 자신에게 우호적일 수 있는 사람들을 포섭하기도 했다. 따라서 이 문제는 절대 평화적으로 해결될 수가 없었다.

6월 17일, 부르주아 의원들은 1인 1표제와 영국식 의회 체제를 골자로 하는 삼부회 개혁안을 내놓았지만 격렬한 논쟁 끝에 결론을 내지 못하고 삼부회가 끝났다. 그들은 단독으로 국민 의회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영국식 의회를 선언했다. 놀란 루이 16세는 부르주아 의원들의 이런 불법 행동들을 제압하려 했고 결국 삼부회 회의장을 군대를 동원해 폐쇄시켰다. 부르주아 의원들은 이에 맞서 20일, 테니스 코트에서 헌법 제정까지 의회를 절대 해산하지 않겠다는 이른바 테니스 코트의 맹세로 저항했다.

여기에 시에예스를 중심으로 하는 일부 성직자들과 라파예트를 중심으로 하는 일부 귀족층들이 국민의회에 가세한 데다 미라보 백작의 폭탄발언[8] 때문에 루이 16세도 어쩔 수 없이 국민의회를 인정하고 전 계급 의원들이 참여하여 헌법위원회를 창설해 본격적인 헌법 제정 작업에 들어갔다. 그러나 영국의 찰스 1세처럼 왕이 의회에 눌려 처형당하기까지 했던 전례를 염려한 루이 16세는 국경 수비를 담당하던 군대를 베르사유와 파리 일대로 진군시켜 파리 시민들의 공포와 분노를 자아냈고 이는 프랑스 혁명의 도화선이 된다.

3 바스티유 감옥 습격과 혁명의 시작

루이 14세 이후로 왕가와 귀족들이 베르사유 궁전에 거주함으로써 파리는 사실상 수도의 지위를 잃은 데다 당시에 닥친 경제적인 어려움, 국경 군대의 파리 진군으로 파리 시민들의 민심은 격앙된 상태였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루이 16세는 삼부회 의장인 네케르를 파면시켜버린다. 네케르에 대한 파리 시민들의 지지는 상당한 수준이었고 곧 네케르의 파면이 파리에 알려지자 파리는 분노와 혼란에 휩싸였다. 파리 시민들은 국왕의 군대로부터 자신들을 지키기 위한 목적으로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하여 본격적으로 프랑스 혁명의 소용돌이가 시작된다.

바스티유 감옥의 습격 소식이 알려진 뒤 프랑스 전역에서는 농민 봉기가 일어나 영주, 귀족들이 살해되고 토지대장들이 불타는 상황이 발생한다. 이 무렵 '대공포' 현상이란게 있었다. 혁명을 전후하여 농민 봉기가 잦았고 타격을 입은 귀족들이 군대를 이끌고 돌아와서 농민들을 학살할 것이라는 소문이 전국적으로 돌았다. 이에 농민들이 화들짝 놀라서 극단적인 대응을 보였는데 이를 대공포라고 부른다. 그런데 대공포와 혁명의 관계는 좀 애매하다. 이미 대공포의 성격은 혁명 전부터 불 붙고 있었고 이후 혁명 정부도 이를 감당 못하는 모습을 보였다. 봉건제 폐지 선언은 이 대공포가 파리로 번지는 것을 막으려는 의도가 강했다.

들불처럼 일어나는 봉기에 결국 루이 16세는 백기를 들고 만다. 5일만에 네케르가 재정총감으로 복귀했고 권력은 루이 16세에서 국민의회 쪽으로 넘어오게 된다. 국민의회는 헌법 제정 작업을 하는 한편으로 국가를 안정시키고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봉건제를 폐지할 것을 검토하게 된다. 결국 8월 4일, 노아유 백작의 제안으로 전격적으로 봉건제 폐지가 발표된다. 이런 봉건제 폐지의 이면에는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헌법제정의원들의 의도가 깔려있기도 했다. 그런데 문제는 사전적 의미의 봉건제는 이미 예전에 끝났다는 것이다. 정치적으로도 봉건영주가 중앙정부를 무시하던 시스템과는 거리가 멀었고 경제적으로 이미 중상주의의 영향을 받을만큼 받고 있었다. 문제는 프랑스 농민들에게는 외부의 억압을 봉건제로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9]. 때문에 청원에 봉건제 언급이 넘쳐났고 대공포와 연계되어 있었기 때문에 상징적 의미에서 봉건제 폐지 선언이 나오는 것이다.

8월 26일에는 시에예스라파예트가 기초한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Déclaration des droits de l'Homme et du citoyen)이 국민의회에서 가결된다. 천부인권, 인간의 자유와 평등, 주권재민, 사상과 표현의 자유, 사유재산의 자유 등을 골자로 한 본 선언은 현대 민주주의의 근간이 된 중요한 선언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농촌에서 일어난 대공포 상황 등으로 인해 파리의 식량 공급이 원활치 못하여 빵값이 뛰자 분노한 파리의 하층계급 주부들이 베르사유까지 행진하여 시위를 벌였다. 이들은 루이 16세에게 파리로 귀환할 것을 요구했으나 루이 16세가 거절하자 베르사유 궁전으로 난입해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를 포위하여 강제로 파리 튈리르 궁으로 끌고간다. 이를 국왕의 파리 복귀 사건이라 한다. 이후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는 파리 시민들의 엄중한 감시를 받게 된다.

이런 가운데 국민의회는 국가 재정 위기를 해소하기 위해 탈레랑 주교의 과격한 제안을 수용한다. 그것은 가톨릭교회의 재산을 국가가 몰수하여 재정 위기 해소에 사용하고 성직자들은 교황청이 아닌 정부에 충성을 맹세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성직자들은 교회 재산의 몰수에는 동의했으나 성직자가 정부에 충성을 맹세하는 것에 대해서는 거부하여 많은 성직자들이 국민의회를 떠났다.[10] 이는 반혁명운동의 토대를 놓는 계기가 된다. 그리고 혁명 정부는 이 성직자들에게 강제로 국가에 대한 충성 맹세를 요구하면서 강압적 방법까지 동원하고 정부의 강요에 거부하는 성직자들과 신자들을 심지어 단두대로 처형[11]까지 하면서 정부보다 교구 성직자를 더 신뢰했던 방데 지방을 비롯한 지방 농민들의 반발을 사게 된다.

4 바렌느 배신 사건과 혁명 전쟁

1791년 4월, 국민의회의 중요인물이었던 미라보가 급사하면서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의 불안감은 커지게 된다. 미라보는 혁명 세력이긴 했지만 입헌군주제와 왕실의 보전에 우호적이었고 또한 마리 앙투아네트는 미라보를 매수하여 확실한 자기 편으로 세우기도 했었던 탓이었다. 결국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는 국외 탈출을 결정하고 6월 20일, 파리 튈리르 궁을 몰래 빠져나와 동쪽의 국경지대로 향했지만 바렌느에서 혁명군에게 체포되었다.

국민의회는 왕과 왕비의 처벌을 하지 않기로 결정하지만 민중들은 이에 반발했고 파리 시민들 사이에서는 왕정 폐지 주장이 힘을 얻게 된다. 7월 17일, 자코뱅 주의자들과 코르들리에 클럽이 주축이 되어 파리 마르스 광장에서 왕정 폐지와 공화정 수립을 주장하는 시위가 열렸고 국민의회는 라파예트가 지휘하는 국민군을 보내 이를 무력 진압한다.

국민의회는 프랑스 최초의 헌법으로 불리는 1791년 헌법을 공포했는데 입헌군주제와 일정이상의 직접세를 내는 성인 남자에 한해 참정권을 허용하는 등의 내용이 골자였다.국민의회는 헌법 제정 후 해산되고 뒤를 이어 입법의회가 10월 1일에 수립되었다. 지롱드파는 해외로 망명한 귀족들에게 2개월 이내로 복귀할 것을 명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는데 이는 망명 귀족들이 해외에서 외국 정부와 결탁하여 프랑스를 혼란스럽게 할 것을 우려한 결과였다.[12]

한편 프랑스 혁명으로 유럽 각국은 혁명 열기에 휩싸였는데 각국은 전제왕권과 봉건체제의 붕괴를 우려하고 있었고 특히 독일에서는 프랑스 혁명을 지지하는 분위기가 커져가고 있었다. 결국 프로이센오스트리아는 프랑스로 침공하며 프랑스 혁명전쟁이 벌어지고 입법의회는 10만의 국민군을 파병해 프로이센, 오스트리아군과 맞서 싸웠지만 연전연패하고 국내 왕당파들의 정보유출과 장교들의 태업으로 국민군은 붕괴 일보직전까지 내몰렸다.

이러자 다시 파리 시민들이 들고 일어났다. 시민들은 패전 책임자의 처벌과 왕정 유지를 주장하는 보수파 의원들의 축출을 요구하고 나섰고 1792년 6월 20일, 파리 시민들은 대규모로 파리 튈리르 궁으로 몰려가 루이 16세에게 퇴위를 요구했으나 루이 16세는 의연한 태도로 맞서 시민들은 물러갔다. 결국 입법의회는 의용군을 모집해 이 난국을 타개하려 한다. 그러나 이것은 공화정주의자들에게는 시민 봉기를 일으킬 절호의 기회로 여겨지게 된다.

5 1792년 8월 10일 봉기

개별적으로 보았을 때 프랑스 혁명의 국민공회 의원들은 평화로운 관습을 지닌 계몽된 시민들이었다. 그러나 군중이 되자 몇몇 선동가의 영향을 받아 가장 결백한 사람들까지 단두대로 처형하는 데 망설이지 않았고, 그들의 이익과는 정반대로, 자신들의 신성불가침 권리를 부인하고 서로 많은 사람들을 죽였다. -귀스타브 르 봉, <군중심리학>

사회심리학과 정치심리학의 효시라고 볼 수 있다. 이는 프랑스 혁명의 영향이 매우 컸다.

1792년 8월 9일, 프랑스 민중의 대표를 자처한 지구의원들이 파리 시청을 점령하고 파리 코뮌(자치시회)을 수립하며 파리 전 지구의 민중 봉기를 호소했다. 이에 호응한 파리 시민들은 8월 10일 전면 궐기하여 튈리르 궁으로 쳐들어갔다. 왕실의 호위를 맡았던 스위스 용병들이 결사항전하였으나 결국 몰살당하고 루이 16세 일가는 의회로 도망쳤지만 시민들은 의회까지 포위하자 결국 의회는 루이 16세 일가를 코뮌측에게 넘겨주고 만다.

이후 파리는 한 달여간 정부, 의회, 코뮌의 세 세력이 충돌하여 극도로 혼란스러운 상황이 지속되었다. 그런 가운데 9월에는 오스트리아의 대군이 쳐들어온다는 유언비어가 퍼지고 성직자들을 중심으로 한 반혁명주의자들이 봉기한다는 소문이 퍼지자 반혁명 용의자들이 대량 학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6 국민공회와 루이 16세 처형

이런 가운데 프랑스군은 프로이센군을 격파(발미 전투)하여 위기에서 벗어났고 9월 20일, 입법의회가 해산되고 새로이 국민공회가 수립되었다. 국민공회는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정 수립을 선언한다(제1공화정). 입법의회에서는 좌파에 해당되었던 지롱드파가 국민공회에서는 우파로 돌아섰고 좌파에는 막시밀리앙 드 로베스피에르를 중심으로 하는 산악파가 새롭게 등장하였다. 지롱드파는 본래 영국식의 입헌군주제를 지지한 만큼 의회중심주의적 성향과 시민 계급을 대변했고 산악파는 중소시민, 농민 계층을 대변하여 오늘날로 치면 사회민주주의적 공화국을 수립하려는 경향을 보였다.

이런 가운데 지롱드파와 산악파는 루이 16세 처리 문제를 둘러싸고 격한 대립을 보인다. 지롱드파가 루이 16세의 처형에 반대한 반면 산악파는 확고한 혁명의 완수와 공화국 체제의 완비를 위해서는 루이 16세를 처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산악파는 파리의 자코뱅주의자들과 과격한 민심을 등에 업고 지롱드파를 몰아붙여 결국 의회에서 벌어진 투표 끝에 승리하게 된다. 이때 나온 유명한 말이 "국왕이 무죄라면, 혁명이 유죄가 된다." 루이 16세의 유죄 판결은 극도로 표가 갈렸는데 심지어 국왕의 재판에 투표한다는 것 자체를 불경스럽게 여겨서 기권한 사람까지 나올 지경. 그런데 그 사람들 표 덕분에 유죄로 확정. 차라리 사형은 결론이 쉽게 나온 편이다.[13]

그리하여 1793년 1월, 루이 16세는 국고 낭비와 국가에 대한 음모 등의 죄목으로 단두대에서 처형된다. 루이 16세의 처형은 혁명의 과격화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렇게 되자 프랑스 안의 반혁명세력들은 혁명 정부에 저항하는 반란을 곳곳에서 일으켰다. 대표적인 사례가 서부 방데에서 일어난 반란이다. 또한 프랑스를 고립화시키기 위해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의 연합에 영국, 네덜란드, 스페인, 나폴리, 교황청 등이 가담하여 대프랑스 동맹이 결성되었다. 여기에는 국민공회의 벨기에 침공도 한 몫을 했다. 바야흐로 유럽은 이제 혁명 대 반혁명의 구도가 되었다.

7 공포정치

국민공회 안에서는 지롱드파가 갈수록 산악파에 밀려 기세를 잃어갔다. 거기에 지롱드 계열의 뒤므리에 장군의 쿠데타 음모가 발각되면서 지롱드파는 갈수록 궁지에 몰렸다. 결국 지롱드파는 국민공회 안에 "12인 위원회"를 설치하고 정치범을 단속한다는 명분으로 산악파의 근거지라 할 수 있는 파리 코뮌에 대한 탄압을 가했다.

그러나 파리 코뮌에 대한 탄압으로 부당한 체포가 연이어 일어나자 분노한 파리 시민들은 1793년 5월 31일, 국민공회를 포위하고 "12인 위원회"의 폐지와 반혁명 용의자 체포등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국민공회 안에서는 산악파와 지롱드파 사이에 격론이 계속되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6월 2일, 국민군 사령관 앙리오가 칼을 빼들고 의회에 난입하여 시민들이 요구하는 지롱드파 의원들의 제명이 이뤄지지 않으면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겠다고 위협했다. 결국 앙리오의 협박에 지롱드파 의원 29명이 제명되어 지롱드파는 사실상 무력화되고 만다.

이로써 국민공회는 산악파가 장악하게 된다. 그러나 힘을 잃은 지롱드파가 지역에서 반란을 도모했고 전쟁으로 인한 물자부족 등으로 경제난이 닥치는 등 프랑스의 국정은 혼란 속에 있었다. 산악파는 혼란을 안정시키고 농민들을 지지 기반으로 확보하기 위해 봉건적 의무의 무상폐지와 농민들의 토지 무상분배를 내용으로 하는 법을 통과시켰다. 프랑스 혁명 정부는 처음 혁명을 성공시킨 다음에 모든 프랑스의 토지를 국유화했다. 그리고 그 땅을 도로 팔아서 경제적 기반을 만들려고 했다. 즉, 무상몰수 유상분배를 하려고 했으나 기본적으로 땅을 되살 수 있었던 것은 기존 귀족들이나 수도원들이었기 때문에 땅은 잘 안 팔렸고 그 가격은 계속 하락. 결국 잔존하는 기존 세력들이 도로 사들였고 평민들은 그 득이 없었다. 이후 토지 무상분배는 계속 선거판 공약으로 등장했으나 실제로 실행된 것은 나폴레옹 정부 시기. 앞서 언급한 것처럼 봉건제가 이미 오래 전에 사라졌다는 것을 고려하면 이 시기까지 봉건적 의무가 남아있다는 것 자체가 문제였고 토지 무상분배가 실행 안 되었던 것은 결정타였다. 따라서 나폴레옹에 대한 지지도는 여기서 나오고 혁명 정부의 수많은 병크 중 하나로 기록되었다.

그러나 1793년 7월 15일, 산악파의 정신적 지주이자 과격 혁명가였던 장폴 마라암살당했다. 이를 다룬 유명한 그림이 다비드의 '마라의 죽음'이다.
이렇게 되자 로베스피에르는 "방종한 자유의 폐기"를 선언하며 국민공회 안에 공안위원회를 설치하고 자신은 공안위원회 의장을 맡았다.

1793년 8월 이후 프랑스의 전세가 불리해지고 경제난이 심화되자 최고가격제 시행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졌고 귀족 계급 뿐만 아니라 악덕 독점 상인과 부르주아들을 공격하는 목소리가 드높았다. 이런 가운데 자코뱅당 좌파의 에베르는 반혁명 용의자를 즉각 숙청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로베스피에르가 이에 동조하면서 본격적인 공포정치가 시작되었다.

공안위원회는 혁명재판소를 강화하고 통제경제를 시행하여 국가를 비상체제로 전환한다. 혁명재판소에서는 반혁명의 죄목으로 다수의 사람들을 단두대로 보내게 된다. 지방으로 숨어든 지롱드파의 지도자들과 지롱드파의 지주였던 롤랑 부인이 처형되었다.[14] 본래 혁명 이전 사교계는 귀족 부인들의 살롱을 중심으로 형성되었고 이 살롱에서는 유명한 철학자, 사상가는 물론이고 과학자, 수학자들의 수업이나 토론까지 벌어졌다. 귀족출신 공화주의자들이 등장하는 배경이 여기에 있다.

아울러 마리 앙투아네트 역시 사형 판결을 받고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다. 그리고 공포정치는 약 1년여간 무려 1만여 명의 희생자를 냈다.

8 산악파의 분열과 테르미도르 반동

공포정치는 산악파 내부의 권력 다툼에도 이용되었다. 자코뱅당 좌파의 자크 르네 에베르파와 조르주 당통을 주축으로 하는 우파, 로베스피에르파의 세 파벌로 나뉜 산악파는 끊임없는 권력 다툼을 벌였다. 이런 가운데 에베르가 1794년 3월, 파리의 식량 사정 악화를 이용하여 시민 봉기를 일으키려다 발각되어 기요틴에서 처형되었고 그 다음 달에는 조르주 당통이 반혁명 용의로 처형되어 산악파는 로베스피에르파가 장악하게 되었다. 파리 시민들의 지지를 받던 당통의 처형은 로베스피에르의 정치 생명의 사실상 사형 선고를 내린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실제로 그나마 브레이크를 걸어주던 당통이 사망한 이후로 로베스피에르는 더욱 극단으로 나간다. 그리고 당통은 로베스피에르에게 있어서는 단순한 혁명 동지가 아니라 오랜 친구였다.

이 시기에 유명해진 인물이 혁명의 대천사 또는 죽음의 천사장, 심하게는 단두대의 천사라고도 불렸던 생 쥐스트. '빵은 인민의 권리'라고 말하던 사람이 '자유는 먹고 살 걱정이 없는 사람들이나 누리는 것'이라고 하다가 결국 '혁명의 반대파 뿐만 아니라 중립을 지키는 자들도 처벌해야 한다'는 극단적 흑백논리까지 나가서 프랑스 혁명의 극단적 변질을 상징하게 된다. 유명한 학살자 로베스피에르가 우유부단하다면서 보다 열심히 사람 목 날리는 데 노력한 인물이다. 상당한 미남이어서 여성들의 인기는 있었다고 하지만 워낙 단두대의 화신이어서 기본적으로 인기는 최악이었다. 결국 테르미도르 반동 때 로베스피에르와 함께 단두대 직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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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로베스피에르는 공포정치와 국민 생활의 통제로 민심을 잃었고 혁명가들도 초심을 잃고 권력의 남용에 맛을 들이게 되었다. 결국 반로베스피에르 성향의 국민공회 의원들은 은밀히 음모를 꾸몄고 1794년 7월 27일, 국민공회에서 로베스피에르와 그의 세력들에게 유죄를 선고하고 그 다음날 처형시켰다. 이를 "테르미도르 반동(Thermidorian Reaction)"이라 한다.

테르미도르 반동 당시 반대파들은 그냥 사람 몰고 다니면서 집집마다 찾아가서 한 명씩 잡아왔다고 한다. 시민들도 자발적으로 자코뱅당원들의 행방에 대해 신고했다. 혁명 정부의 지지 세력이자 보호막이 되어야 할 파리 시민들이 철저히 외면한 덕분. 로베스피에르는 자살을 시도했는데 실패해서 턱이 날아간 처참한 형태로 잡혀있다가 결국 단두대행. 하지만 로베스피에르 항목에서 알 수 있듯이 로베스피에르는 공포정치와는 거의 연관이 없었던 인물이었고 그의 사조직이라 알려진 공안위원회 역시 실상 그의 사조직이 아닌 데다가, 테르미도르 반동의 주동자들 중 상당수가 공안의원회 출신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냥 마녀사냥식 피의 정치에 싫증이 난 나머지 허수아비를 제거한 셈 그가 체포된 이튿날 파리 코뮌들이 로베스피에르를 구출하려고 했으나 실패했다.

9 부르주아 공화정과 나폴레옹의 등장

로베스피에르의 처형 이후 국민공회는 부르주아(시민 계급)가 장악하게 된다. 산악파의 통제경제 정책이 폐지되고 시민 계급의 자유로운 상업 활동을 보장하게 되면서 상류 계층의 자유가 확보되었다. 그러나 무산 계급의 생활은 더욱 악화되었고 왕당파들 또한 호시탐탐 혁명의 성과를 뒤엎으려는 시도를 했기 때문에 부르주아 공화정은 양측에서 끊임없는 공격을 당해야 했다.

이런 가운데 왕당파가 반란을 일으키고 국민공회가 최대의 위기를 맞이하자 이를 진압하면서 등장한 인물이 바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다. 나폴레옹은 혁명으로 악화된 교황청과의 관계를 이탈리아 원정(오스트리아 격퇴)으로 회복하는 등의 업적으로 국민적 영웅으로 떠올랐다. 본격적으로 나폴레옹이 주목받기 시작한 계기는 방데미에르 사건 당시 파리 시내에서 대포를 쏴갈긴 사건이었다. 나폴레옹은 이후 이집트 원정 중 총재정부를 뒤엎고 통령정부를 세워 차츰 제정으로 나아갔다(브뤼메르 18일의 쿠데타). 나폴레옹은 통령정부를 수립한 후 "혁명은 끝났다"라고 선언하였고 이로써 프랑스 혁명은 완전히 종식된다. 이후 나폴레옹에 의해 프랑스 제1제국이 건국된다. 왕을 끝장냈더니 황제가 탄생했다

10 혁명의 여진

하지만 프랑스 혁명의 전통은 나폴레옹 정부 이후로도 계속되었다. 혁명을 부정하려 했던 왕정복고 시대에도 프랑스 혁명과 유사한 파리 시민 봉기와 정권 타도는 반복되었고, 이러한 봉기가 종말을 맞은 것은 파리 코뮌이 처참한 최후를 맞고 난 이후였다.

11 뒷이야기

  • 프랑스 혁명으로 인한 공화정이 운 좋게도(?) 추분날 성립된 덕에 잠시 쓰였던 프랑스 공화력에서는 천문학적으로도 의미가 깊은 추분이면서 혁명이 일어난 날이기도 한 그 날을 공화력의 시작점으로 삼기도 했었다. 물론 공화력 자체가 실패했지만. 뭔데 이거
  • 사족으로 혁명 이전까지 프랑스인들은 영국인을 "군주를 처형하는 과격하고 무도한 놈들"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17세기 청교도 혁명으로 찰스 1세가 처형). 그리고 혁명 초기에는 영국인들은 프랑스인들을 보고 "너희도 우리 따라하네 뭐"라면서 좋아했다. 심지어 일부 영국 왕족들과 귀족들도 학살당하는 프랑스 귀족들을 보면서 고소해하면서 좋아하기도 했다. 물론 초기부터 혁명의 과격성을 지적했던 영국인들도 있었다. 대표적으로 보수주의의 성전(聖典)인 <프랑스 혁명에 관한 성찰>(1790년)을 저술한 에드먼드 버크(Edmund Burke). 하지만 왕족과 귀족들은 혁명이 자국에 퍼질 것(즉, 자기네도 기요틴 행될까봐)을 두려워했고 이는 혁명 이후에 프랑스가 프랑스를 제외한 유럽과 싸워야 했던 이유였다.
  • 현대 프랑스의 매우 엄격한 세속주의적인 풍토도 이때 성립되었다. 앙시엥 레짐과 가톨릭은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던데다 이신론자, 무신론자, 그리고 위그노 개신교도들이 이끌었던 혁명이 프랑스 혁명이었던지라 이때 가톨릭교회조인트를 많이 까였고 방데 지방에서는 무리하게 가톨릭 까다가 그쪽 지방 농민들한테 대규모 반란까지 먹었다. 이때 프랑스 혁명 정부가 진행한 진압 작전을 가지고 근대사 최초의 대규모 학살이라고까지 부르는 역사가들도 있다. 혁명군의 만행은 엄청난 수준으로 귀족이든 성직자든 농민이든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대략 17만 명이나 학살했다. 나폴레옹 시대 때 돼서야 이곳에 혜택을 주는 정책을 주어 겨우 안정시켰다. 프랑스인들은 혁명의 당위성만을 강조하며 이 학살에 대해선 대체로 언급하지 않거나 방데 반란, 방데 지역 반혁명파의 난동 등으로 폄훼하다가 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 때인 2012년이나 돼서야 이걸 인정했을 정도.
  • 혁명파의 광기 및 병크는 농민의 딸로 프랑스를 구했던 영웅 잔 다르크도 피해갈 수 없어서 그녀를 왕당파와 가톨릭의 상징이라고 낙인찍어 오를레앙동레미 라퓌셀 등 그녀와 관련있는 지방에서 그녀를 기리는 기념행사의 폐지는 물론이고 조각상 등의 기념품을 파괴하거나 불에 태우는 만행을 저질렀다. 나폴레옹 때야 전국민적인 영웅으로 다시 올라서게 된다.
  • 미국 독립전쟁과 함께 아이티와 남미가 독립하는데 영향을 크게 끼친 사건이 바로 이 프랑스 혁명이다. 그러나 정작 아이티의 독립혁명은 자유, 평등, 박애를 주장하던 그 프랑스가 아이티 흑인 민중들의 적으로 등장해 진압과 학살을 일 삼았다가[15] 결국 독립을 허가하는 대신 어마어마한 배상금을 요구하며 아이티를 계속 억압했고, 프랑스 혁명의 영향을 받은 시몬 볼리바르호세 데 산 마르틴에 의해 남미 지역 대부분이 스페인의 압제에서 해방되었지만 정작 해방된 국가를 가지게 된 백인 혈통인 크리올들이(순혈 백인은 물론 혼혈도 포함된 주민도 포함된다.) 미국이 그랬던 것처럼 아메리카 원주민을 스페인 식민정부보다 더하면 더 했지 결코 덜 하지 않을 정도로 탄압하고 학살했다는 건 아이러니이자 흑역사다.
  • 단지 귀족들이 키우고 사랑받았다고 비숑 프리제라는 품종의 개들도 무수히 학살당했다. 물론 평민보다 더 잘 대우 받는 개를 보면서 민중들이 분노하지 않을 수가 없긴 했지만 죄없는 동물들에게 분풀이를 했으니 흑역사. [16] 비슷한 사례로 러시아 혁명 때는 황실의 보호를 받던 코카서스 바이슨이라는 들소 종류가 구체제에 대한 분노가 섞인 것과 식용 등의 이용 등의 이유로 혁명군과 민중들에게 학살당해 멸종한 사례가 있다.

12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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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그림은 외젠 들라크루아(Ferdinand Victor Eugène Delacroix)(그림에서 여신 왼쪽에 서서 모자를 쓰고 소총을 든 사람이 작가이다)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부제는 '1830년 7월 28일')이라는 그림으로 1789년의 혁명이 아니라 1830년 7월 혁명을 기념하기 위해 그려진 그림이다.[17] 때문에 엄밀히 따지자면 시대적인 고증에는 맞지 않으나 그림이 워낙 인상적인 탓인지 1789년 프랑스 대혁명에 관해서 언급할때도 인용되는 경우가 많은 편이다. 사실 이때도 1789년때처럼 가톨릭이 조인트를 많이 까였었고 소위 '기적의 메달'이라는 가톨릭 성물도 이 사건과 관련이 있는 것이다. 자세한건 파리의 성모를 참고할 것. 200년전에도 아킴보가 있었다

2013년 2월에 반달리즘의 피해를 입었다. 관련 기사.

이 시기를 다룬 픽션 작품으로는 일본 만화가가 그린 만화 베르사이유의 장미가 있는데, 프랑스 혁명이 직접적으로 다뤄지는 건 작품의 후반부이고, 작품의 대부분은 발발 직전의 사회상이 그 배경으로 하고 있다.

또 다른 작품으로는 테르미도르가 있고 이 작품은 프랑스 혁명 시기를 테르미도르 반동 시기까지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다.

게임으로는 어쌔신 크리드: 유니티가 있다. 그런데 본편에선 의외로 암살단이 아니라 성전기사단이 프랑스 혁명을 주도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여성향 연애 AVG인 장미에 숨겨진 베리테도 이 시기를 다루고 있다.

찰스 디킨스두 도시 이야기 또한 프랑스 혁명 전후의 사회상을 잘 나타내고 있다. 어째 영국 작가라 혼란상을 까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당통의 죽음은 혁명 이후 자코뱅 파 내부의 로베스피에르와 당통의 대립을 보여주는 수작이다.


이 그림은 영국의 록밴드 콜드플레이의 노래 'Viva la Vida'의 앨범 사진이다. 노래 가사의 배경이 유명한 역사 사건으로 프랑스 혁명, 신항로 개척시대, 예수(로마시대) 등 다양하다.

12.1 관련 항목

  1. 사실 박애는 오역이다. 자세한 내용은 박애 참조
  2.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일으킨 브뤼메르 18일의 쿠데타를 기점으로 잡는 경우도 있으나 총재정부 시기는 중도적인 노선을 앞세웠기 때문에, 역사학계에서는 테르미도르 반동이 실질적으로 대혁명이 끝난 시기라고 보는 것이 통설이다.
  3. 1788년 3월 작성된 재정보고서(compte rendu)를 보면 수입은 5억 300만 리브르였는데 지출은 6억 2900만 리브르. 즉 1억 2600만 리브르의 적자가 나고 있었다. 그러나 왕실의 향락과 사치가 주된 적자의 원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통념과는 달리 왕실의 경비는 사실 그리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았다. 구체적으로 전체 예산 중 왕실의 경비로는 3500만 리브르가 할당되었는데, 이는 총 지출의 6%밖에 되지 않았다. 물론 6%가 적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우리나라의 한 해 예산이 300조 원 정도 되는데 6%면 약 18조 원(...)을 왕실이 가져갔던거다. 현재 영국 왕실이 2천~3천 만 파운드 정도를 왕실 경비로 할당 받는 것을 감안하고 보면 실로 놀라운 액수. 그러나 현대의 잣대로 당대의 일을 평가할 수는 없는 노릇인데다가, 어려웠지만 그래도 수 세기 간 유럽의 맹주로 군림하던 프랑스의 위신 측면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4. 그 외로는 일반 회계 지출이 19%, 국방비 및 외교 관련 지출이 26%. 하지만 국채의 상환과 이자 상환에 들어가는 비용은 놀랍게도 전체 예산의 절반에 육박하는 3억 1008만 리브르를 차지했다. 이 시기 프랑스 왕실의 절망적인 재정 상태를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 중 하나.
  5. 사실 진짜로 심각했던 대기근은 혁명이 시작되기 전에 끝난 상황이었지만 역사적으로 혁명이나 폭동은 원래 가장 기근이 심할 때는 잘 일어나지 않는다. 이에 대해 피에르 각속트는 "빈곤은 폭동의 원인은 될 수 있으나, 혁명의 원인은 될 수 없다."라고 말한다. 이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실제로 프랑스 혁명 시기는 기근이 조금씩 나아지다가 다시 조금 하락할 기미가 보이는 바로 그 절묘한 시점이었다.
  6. Duc de Croy,<journal inédit du duc de croy>,1718년에서 1784년까지 모음집,p220-228
  7. 서정복, <살림지식총서 291 프랑스 혁명> p5-9
  8. "장관 각하! 국왕에게 전하시오. 우리는 인민의 의사로 이곳에 앉아있는 만큼 총검에 밀리지 않는 한 퇴장하지 않을 것이라고!"
  9. 이걸 근거로 봉건제가 잔존했다고 보는 입장은 이미 사실상 소멸한 상황
  10. 이렇게 종교인들과 종교의 신자인 민중들에게 종교, 신앙의 자유와 교리보다 국가와 공공사회의 준법을 우선시한다는 구실로 정권에 억지로 충성을 서약하게 하고 응하지 않을 때 잔혹하게 고문하거나 처형하면서 탄압하는 방법은 이후로도 사회주의 국가와 군사독재국가들이 써먹던 방법이다.
  11. 이들 중 일부는 20세기에 교황청에서 순교자로 인정하여 시복하였다.
  12. 다른 얘기를 하자면 이때 최초로 우익, 좌익이란 말이 생겼는데 의회의 우편에 앉은 푀양파와 좌편에 앉은 지롱드파로부터 유래한 말이었다.
  13. 그리고 여기서 기권표를 던졌거나 왕을 변호했거나 왕에게 유리한 내용의 증언을 한 사람들은 결국 단두대로 가게 된다.
  14. 이때 그녀는 처형 직전 그 유명한 "자유여, 너의 이름으로 무슨 죄악이 저질러졌느냐?"를 외쳤다.
  15. 사실 아이티 독립혁명은 프랑스와 싸운 건 맞지만, 엄밀히 말하면 프랑스 혁명 정부만이 저항 대상은 아니고 시간에 따라 동맹 대상과 적이 바뀌기도 했기에 애매하긴 하다. 혁명 시절 이전부터 아이티의 흑인들은 불평등한 대우에 봉기를 해서 프랑스에서 진압을 하긴 했지만 혁명 이후 저항이 더욱 거세졌는데, 혁명이 일어난 뒤의 프랑스 정부는 처음에는 주모자를 처형하며 진압을 하긴 했으나 국내 문제만으로도 정신이 없기에 강경책은 더 이상은 무리라는 걸 알고 흑인들에게 노예제 폐지와 백인과 동등한 대우를 약속하며 유화적으로 나서기 했으나 영국과 스페인의 개입, 신분이 다른 흑인들끼리의 갈등으로 아이티는 여전히 혼란에 빠졌다. 그러다가 나폴레옹이 집권하던 때에 들어서 아이티 흑인들에 대해 대대적인 진압과 학살을 일 삼아 흑인들이 뭉치게 만들었다.
  16. 다만 학살 당했다는 표현은 한국어 웹에서만 나오는 표현으로 영어로 검색하면 학살당했다는 표현이 나오지 않는다. 정확히 아는 위키러 내용 추가바람.
  17. 때문에 등장인물들의 복장 등에 고증도 대혁명 시기와는 맞지 않는다. 차라리 레미제라블의 배경시대와 더 가깝다고 볼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