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석규

60 연기대상 대상
고현정
(2010)
한석규
(2011)
손현주
(2012)
250px
이름한석규(韓石圭)
출생1964년 11월 3일, 서울특별시
신체175cm, 64kg, AB형
학력동국대학교 연극영화학과
데뷔1991년 MBC '우리들의 천국'
가족배우자 임명주[1], 슬하 2남 2녀
소속클로버컴퍼니

1 개요

90년대 흥행보증수표[2]
한국 영화계 르네상스기를 상징하는 아이콘
꿀을 바른듯한 목소리가 특징인 지적인 이미지의 배우.

2 데뷔 전

지금은 배우로 유명하지만 한때는 가수였고 성우 활동도 한 적이 있다.[3] 콧소리 섞인 미성에 성우 출신다운 정확하고 또박또박한 발음과 발성이 트레이드마크. 한석규의 얼굴을 모르는 사람은 있어도 한석규의 목소리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정도다. 광고 나레이션 등으로 많이 노출된 탓도 있겠지만…

1984년 제5회 MBC 강변가요제에 대학 동기들과 함께 '덧마루'라는 그룹을 짜서 '길 잃은 친구에게'라는 노래[4]를 불러 장려상 입상도 하였다. 이후 육군 병으로 입대하여 제27보병사단에서 박격포 주특기로 복무하며 강변가요제 입상경력 덕분에 분기에 한번씩 문선대 단원으로 차출되었다가 허리부상으로 의병 제대를 하였다.

원래 배우가 꿈이었으나 얼굴에 자신이 없어서(...)[5] 1990년 KBS 성우로 입사했다가 이듬해 1991년 MBC 공채 탤런트에 합격하여 본격적으로 배우의 길을 걷기 시작하게 된다. 1999년 씨네 21과의 인터뷰를 보면, 성우로 입사했을 당시 절친한 선배인 성우 故 장세준이 "넌 성우도 어울리지만 내가 보기엔 아무래도 배우가 더 어울린다."는 말에 도전하여 배우의 길을 걸었다고 한다.

3 1990년대 초반 MBC 공채 시절

데뷔는 드라마 우리들의 천국이었는데 큰 비중은 아니었고 지금으로 치면 시즌 1 마지막 부분에 잠깐 나왔다.

그 후 여명의 눈동자에서 서북청년단 역으로 단역으로 잠깐 모습을 비춘 한석규는 1993년에 역대 최고 시청률 7위 (61.1%)를 기록한 드라마 아들과 딸에서 부드러운 남자 이미지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극중 여주인공 김희애에게 의지가 되는 역할로 큰 인기를 끌며 인상 깊은 연기를 보여주며 성공가도를 달리기 시작한다. (원래 이 역할을 문성근이 할 예정이었으나, 연극과 영화 스케쥴로 하차했다.)
아들과 딸 직후, 최수종, 채시라와 드라마 파일럿에 캐스팅, 이 드라마 역시 40%가 넘는 시청률을 기록하며 확실하게 최고 스타로 군림한다. 파일럿의 대성공 이후 당시 MBC의 가족극이었던 한지붕 세가족의 출연진들이 교체되면서 새로 투입되었고[6] 다음 해 1994년, 학교 선배이자 한 때는 최고의 파트너였던 최민식과 드라마 서울의 달에 캐스팅되고 자체 최고 시청률 48.7%를 기록, 연타석으로 성공하며 자리를 굳힌다.[7] 그러는 도중 마지막 승부 후속드라마로 편성된 박형준, 이시은[8]의 미니시리즈 도전의 시청률이 영 나오지 않자 오연수와 함께 시청률 상승 카드로 중간에 투입된다. 요즘 같으면 한석규, 오연수 같은 스타들이 시청률 상승을 위해 중간 투입되는 경우는 없으나 이 때는 공채 시스템이었고 스타여도 방송국에서 하라고 하면 해야 하는 신세였다. 1994년 SBS모래시계에 대항하기 위해 제작된 까레이스키라는 드라마에 역시 상한가를 치던 한석규는 이 작품에서 단역중에 단역으로 나온다.[9]

이후 호텔을 둘러싼 형제 간의 갈등을 그린 MBC 미니시리즈 호텔을 끝으로 한석규는 영화계로 진출한다. 영화계로 진출한 그가 한동안 드라마판으로 돌아오지 않았던 이유는 "닥터봉호텔과 함께 찍으면서 체력적으로 상당히 힘들었고, 서로다른 캐릭터를 연기하는게 쉽지만은 않았기 때문"이었고, 그 이전에도 주말극 서울의 달, 일요아침드라마 한지붕 세가족, 수목미니시리즈 도전에 출연하며 무려 3작품이나 겹치기 출연을 하는 등 어려움을 겪었기 때문.[10]

4 1990년대 중, 후반 전성기

한국 영화계를 완벽히 지배하면서 한국영화의 르네상스를 일으키다[11][12]

드라마의 연속 성공으로 충무로에서도 한석규의 영화 진출이 꽤나 화제였는데[13] 영화계에 진출하자마자 곧바로 한석규의 전성시대를 열게 된다. 1995년부터 1999년 4년 동안은 한석규가 대한민국 영화계를 완벽하게 지배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데뷔작 닥터봉은 로맨틱코미디 영화로 그는 홀아비 역할을 완벽하게 소화해 내며 당시 서울 관객 기준 376,443명을 동원, 그 해 한국영화 관객수 1위를 기록하며 흥행에 성공한다.[14]
한석규가 데뷔작을 가벼운 코미디로 선택한 까닭은 너무 심각한 주제보다 본인에게 맞는 장르로 무난하게 시작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닥터봉'과 함께 출연을 검토했던 영화는 심혜진, 진희경이 출연하는 스릴러물 손톱이었다.[15] 덕분에 데뷔작이 성공을 거두게 되면서 그에게 들어오는 시나리오 수는 무려 40여개에 달했다.[16]

그 다음해인 1996년, 배우 박성미의 남편인 강제규 감독의 데뷔작이자 CG 및 특수효과가 화제로 비극적인 사랑이야기를 그린 은행나무 침대에 출연하며, 서울 기준 68만 5천명을 동원하며 영화배우로서 입지를 갖춘다. 그러나 배우로써의 입지를 갖췄다는 것일뿐 캐릭터의 매력도나 화제성은 다른 배우에게 모두 빼앗긴 유일한 영화이기도 하다.[17]

1997년에는 무려 세 작품에 출연했다. 이창동 감독의 데뷔작인 초록물고기(서울 기준 163,655명), 조폭연기가 인상적이었던 블랙 코미디 넘버 3(서울 기준 297,617명), 당시 유행하던 PC통신 채팅을 소재로 꽤나 폭발적인 반응을 이끌어냈던 접속(서울 기준 674,993명)을 연달아 히트시켰으며, 느와르(초록물고기), 블랙코미디(넘버 3), 멜로(접속)[18] 등 장르를 가리지 않고 캐릭터에 완벽히 녹아들며 최고의 연기를 보여 주었으며, 학교 선배인 최민식초록물고기에서 같이 출연했던 송강호넘버 3에 출연시키는데 크게 공헌하는 등 능력있는 배우들을 밀어주기도 했다.[19]

1998년에는 한석규가 출연한 최고의 작품이자 많은 영화 매니아들 사이에서도 최고의 멜로작품으로 꼽히는 8월의 크리스마스에 출연, 어찌 보면 뻔한 신파 멜로이지만 허진호 감독은 세련된 화법과 형식미로 신파조 멜로를 뛰어넘었다는 극찬을 받았다고... (네이버 영화 홍성진의 영화해설 인용) (서울 기준 422,930명) 참고로 한석규는 이 영화 OST 앨범에 들어가는 주제곡도 직접 불렀다.

다음 해인 1999년 강제규 감독의 쉬리로 전성기의 정점을 찍는다. 남북한을 소재로 순 제작비 24억원과 각종 특수효과와 총격전 등 많은 화제를 불러모은 이 영화는 타이타닉이 가지고 있던 대한민국 영화 관객 동원 1위의 기록을 깨면서 580만이 넘는 관객[20]을 동원, 110억원의 수익을 올리는 기록을 남겼다.[21]

그 해 말,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 호흡을 맞췄던 심은하와 함께 미스터리물인 텔 미썸딩에 출연, 서울 기준으로 73만명의 관객을 동원하면서 성공시켰으나 앞뒤가 뚝뚝 끊기는 스토리와 석연치 않은 결말로 썩 좋은 평을 얻지 못했다.

1995년 닥터 봉을 시작으로 1996년 은행나무 침대, 1997년 초록물고기, 넘버 3, 접속, 1998년 8월의 크리스마스, 1999년 쉬리와 텔 미 썸딩까지 8편 연속 대흥행을 기록하면서 1990년대 후반 한국영화계를 완벽하게 지배했던 한석규는 1990년대 마지막 작품인 텔미썸딩을 끝으로 서서히 하락세를 타게 되었다.

5 하락세

한석규의 하락세는 다른 배우들처럼 사회적인 문제나 치정관계등의 스캔들이 이유가 아니었다. 충무로 진출 이후 단 한번도 실패작에 출연하지 않았고 비평에서도 실패한 작품[22]이 거의 없다시피하여 90년대 중,후반은 원탑이었다.

1997년 ~ 1999년 씨네21에서 조사한 '충무로 파워 50인'에서도 한석규는 최소 10위권을 벗어나 본 적이 없다. 최고 순위는 1998년에 조사한 2위. 웬만한 유명 제작자와 감독도 한석규에게 감히 함부로 대하지 못할 정도로 그가 영화계에 끼친 영향력은 2000년대 배우들 중에서도 전무후무할 정도로 엄청났다. 이 때 대한민국의 모든 시나리오의 99%가 한석규에게 맨 먼저 갔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이 시기 왕성한 활동을 했던 탑배우들조차도 우선적으로 받아본 적 없이 좋은 시나리오가 한석규에게 가장 먼저 갔고, 그가 거절하면 다음 순서로 받아보는 건 업계에서도 당연시 여겨졌다. 하지만 "같은 배우로서 참 서글프더라."는 이야기도 있었다. 배우가 시나리오를 선별하는 능력은 중요하지만 그 까다로움이 너무 지나친 것이 문제였다. 거기다 언론노출을 극도로 꺼리고 CF에 전념하는 모습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는 사람들이 조금씩 늘게 되자 "8월의 크리스마스"가 개봉하는 1998년부터 한석규 자체를 고깝게 보는 사람들이 늘어나게 되었고, 그의 행동마저 조금씩 구설수거리에 오르게 된다.

이렇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당시 매니저를 맡은 친형 한선규씨 때문이었는데, 한석규에게 들어오는 시나리오를 1차 검토하는 역할도 맡았었다.[23] 시나리오를 판단하는 역할만 했으면 좋으련만, 매니저의 행동을 넘어 영화 제작에까지 신경쓰다 보니 정작 한석규 본인이 하고 싶었던 작품은 시나리오 선별작업에서 퇴짜를 놓거나[24] 충무로 입성초기 닥터봉이 크게 성공하여 수많은 시나리오가 들어올 무렵에는 사전에 한석규와 상의없이 무조건 출연한다고 했다가 나중에 출연번복을 하거나 개런티가 적다며 퇴짜를 놓기도 했다. 이 당시 발매된 영화잡지와 각종 신문들에 실린 한석규 관련기사가 "어느 영화에 출연확정되다." 이런 식이었다. 한석규에 대한 기자들의 평이 안 좋게 나온 시기가 1996년 무렵이라고 생각하면 될 듯.

심지어, 그동안 한석규가 벌어준 돈 수십억원을 날리기도 했고[25] 90년대 후반 영화잡지 월간 스크린에서 주최한 핸드프린팅 행사제의도 단칼에 거절하는 등[26] 오지라퍼 행동으로 한석규를 기피하는 제작자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그동안 한석규의 공백기가 길어지면서 하락세가 되자, 빛을 보지 못하던 다른 배우들이 조금씩 도약하기 시작했고, 그 결과 굳이 한석규가 아니더라도 연기나 흥행 면에서 좋은 결과를 얻을 만한 배우들이 점점 많아지게 되었다.[27] 한석규로써는 조금씩 설 자리를 잃게 된 셈이다.

6 2000년대 초반 휴식기

2002년 영화 이중간첩으로 복귀하기까지 3년이라는 공백기를 지난다. 하지만 3년 동안 마냥 쉰 것만은 아니었다. CF를 솔찮이 찍었음 SF물인 제노사이드, 80년대를 배경으로 한 차우, 그리고 소금인형이라는 작품에 출연하기로 되었었고 소금인형의 경우 4~50% 정도 촬영을 진행했음에도 불구하고 투자문제로 무산되어 본의 아니게 3년 동안 쉬게 된 것. [28]

그 3년 동안 송강호, 최민식, 설경구가 한석규의 자리를 대신하게 된다. 송강호는 반칙왕으로 주연 데뷔에 성공적으로 안착, 공동경비구역 JSA로 자리를 확실하게 잡았으며 최민식은 해피엔드와 파이란으로 최고의 스타로 떠올랐다. 설경구는 99년 박하사탕으로 데뷔, 2002년에는 1997년의 한석규처럼 공공의 적, 오아시스, 광복절 특사를 연속으로 히트시킨다.

7 2000년대 중, 후반 몰락

3년 간의 공백 끝에 2002년 영화 이중간첩으로 복귀하지만... 한석규는 첫번째 실패를 맛보게 된다. 69억이라는 제작비가 들었으나 흥행 기록은 서울 361,580명 전국 1,025,928명을 동원하는데 그쳤다.

흥미로운 인터뷰, 이중간첩 복귀 전 공백기간 동안 한 기자는 왜 공백기를 가졌냐고 묻자 답하길 지금은 한국영화의 거대한 거품이 낀 시기고 이 거품이 다 빠져나간 후에서나 진짜 작품 활동을 해야 할 것이라고 답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2002년과 2003년은 2000년대 이후 한국영화의 전성기를 이끌어 가는 감독, 작품, 배우들이 봇물 터지듯이 터져나온 시기였다(…). 특히 2003년은 박찬욱올드보이, 봉준호살인의 추억, 김지운장화, 홍련이 한꺼번에 출현했었으니... 결국 한석규의 말은 변명 아닌 변명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2014년 12월 손석희 사장과의 인터뷰에선 부흥기였지만 거품이 굉장히 많은 시기였다는 표현을 사용했다(...).

결국 2003년 프리미어에 손예진과 함께 과대평가된 배우에 선정되는 불명예를 안는다. #[29] 아이러니하게도 1996년 프리미어에서 선정한 한국배우 평가에서는 한석규가 당시 최고의 배우로 평가를 받았던 안성기, 박중훈, 문성근, 이경영을 제치고 1위를 차지했다.

2004년에는 스릴러물인 영화 주홍글씨와 2005년 블랙코미디 작품인 그때 그 사람들에 출연한다. 주홍글씨의 경우 첫 주에 흥행 1위를 기록하는데 초반의 흥행을 이어나가지 못하면서 하락세가 대폭 심해졌고 영화 역시 흥미진진한 초반과는 다르게 후반으로 갈수록 뚝뚝 끊기면서 영화 내적인 면이나 흥행면이나 용두사미적인 작품으로 끝났다. 서울 489,254명, 전국 1,437,549명으로 대흥행까지는 아니지만 손익분기점은 넘겼다. 주홍글씨 개봉시기에 평론가 하재봉이제 한석규의 시대는 갔다. 그는 한물 간 배우가 되었다고 대 놓고 깠다.

그때 그 사람들은 좋은 소재를 제대로 끌고 나가지 못한 면이 있었고[30] 서울 338,025명, 전국 1,083,962명(제작비 60억)을 동원하는데 그치면서 두번째 영화 실패작으로 남게 된다.

2005년에는 초심을 찾기 위한 것인지 안전해보여서 택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닥터 봉 이후 10년만에 코미디 영화 미스터 주부퀴즈왕에 출연하지만 배급사에서도 버린 카드라고 생각했던지 제대로 홍보도 안되었고[31] 개봉 얼마 후에 케이블에서 볼 수 있었다. 서울과 전국 합해 50만 명도 기록 못한 처참한 실패작.

복귀 이후 세 작품을 실패했지만 그래도 한석규라는 이름에 기대를 많이 했는지 2006년에는 세 작품에 연달아 출연한다. 그것도 단독주연이 아닌 공동주연으로..

영화 스캔들의 시나리오를 집필했던 김대우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음란서생은 서울 868,692명, 전국 2,576,022명을 동원하며 침체기에서 벗어나는가 싶더니 다음 작품인 영화 구타유발자들은 서울, 전국 관객 합쳐 20만 명도 기록하지 못한 망작으로 남게 되었다.[32] 그러나 구타유발자들은 상영한지 10년이 거의 다 되어가는 지금도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고 있다.

그 해 가을 개봉한 8년만의 멜로작품인 사랑할 때 이야기하는 것들은 현실적이고 공감이 간다는 평과 지나치게 밋밋했다는 평 두 가지가 크게 갈리는 작품이었고, 흥행에 실패했다.

2006년에 세 작품이나 출연하며 다작을 했던 한석규는 07년은 쉬고 08년 영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컴백한다. 당초 감독을 맡기로 했던 안권태 감독이 촬영 중반 곽경택 감독으로 교체되면서 대본이 수정되고 비중문제로 안 좋은 말이 나왔던 작품으로 촬영 자체가 험난한 작품이었다. 더구나 같이 개봉했던 작품이 다크 나이트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미이라3도 있었지만 그 틈바구니 속에서도 나름 선전 260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는데 성공, 손익분기점을 간신히 넘기는데 성공한다.

2009년에는 주연이 아닌 주조연.. 어찌 보면 조연으로 영화 백야행에 출연한다. 원작소설도 3권씩이나 되고 드라마로 나왔어야 할 분량을 2시간 짜리 영화로 압축했으니 작품완성도는 굳이 언급하지 않겠다. [33]

2010년, 한석규는 코미디 영화인 이층의 악당을 통해 다시 도전했다. 그 전과는 달리 이번엔 2005년 달콤 살벌한 연인으로 흥행과 비평 모두 성공한 손재곤 감독과의 작품이었는데 촬영 전부터 좋은 시나리오라며 호평을 들었고 또 평론가들역시 호평을 아끼지 않으며 좋은 평가를 받았고 기대도 컸지만 흥행에는 실패했다.[34]

한석규는 90년대와 2000년대 위상이 확연히 다르다. 이렇게 몰락하게 된 이유는 4년간의 공백으로 한석규의 역할을 대신 할 배우들인 송강호, 최민식, 설경구, 황정민 등이 급성장했고 한석규 역시 2000년대 선택한 작품들이 기대 이하의 모습을 보이며 많이 밀리게 되면서, 선구안에 문제가 있는게 아니냐 라는 소리까지 들었다.

한석규의 부진에 대해 너무 검증되지 않은 신인감독과 작품을 한다는 것을 원인으로 꼽는 사람들도 있는데 어느정도 타당한 이야기. 대부분의 흥행배우들을 보면 감독과 배우들이 인맥으로 같이 가는 경우가 많은데 한석규의 경우 신인감독과의 작품을 고집했다는 점이다. 이 점에서 박찬욱, 김지운, 이창동, 봉준호 감독 등 검증된 감독과 작품을 하는 최민식 ,송강호와 강우석, 윤제균 감독과 그 연출부 출신들과 작업을 하는 설경구와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한석규의 경우 데뷔작을 같이 했던 이광훈 감독은 닥터 봉 이후 패자부활전, 자귀모, 천년호라는 영화 팬들은 알만한 최악의 작품을 연속으로 연출하며 2003년을 끝으로 영화계에서 사라졌고 은행나무 침대와 쉬리를 같이했던 강제규는 현재 제작에만 전념하며 가뭄에 콩 나듯 연출하다가 마이웨이의 실패로 앞날이 어둡고, 초록물고기의 이창동 감독과 8월의 크리스마스의 허진호 감독은 활발하게 작업을 하는 감독이 아니고 접속과 텔미썸띵을 같이 했던 장윤현 감독은 그 후 썸, 황진이, 가비가 연속으로 실패했고 넘버 3의 송능한 감독은 영화계를 떠났다. 즉, 8편 연속 흥행으로 1990년대 전성기를 가져다 준 감독 중 현재에도 활발하게 작업을 하고 있는 감독들이 없다는 점이다.

이처럼 3년 간의 공백에도 2002년에는 당시 티켓파워 1위를 기록했던 그가 2000년대 침체기 이후에는 아예 언론에서도 거론조차 되지 않았으며 가끔 하는 설문조사에서도 순위권에 없었다.

8 2011년 화려한 부활, 그 후

이층의 악당까지 실패하자 한석규는 15년 간 하지 않았던 TV 드라마 영역에 발을 들이게 된다. 2011년 하반기 SBS 수목 드라마인 뿌리깊은 나무세종 역으로 복귀. 욕쟁이 세종(...)과 장난끼, 지랄하고 자빠졌네그리고 진지한 역할을 깊이있게 선보이면서 열연. 역시 한석규 어디 가지 않았음을 증명. 명실상부한 배우의 입지를 다시금 드러내 보인다.

그 결과, 예상대로 2011 SBS 연기대상 수상의 영예를 안는다.
3년만에 드라마에 복귀한다.
참고로 그 전에 드라마 스페셜 남자 최우수상 후보에도 올랐으나 정작 상을 타게 된 건 젊은 두 후배들. 제작진이 노렸는지 소감 발표 중 수상자와 전혀 상관없는 한석규에게 잠깐 카메라 단독샷이 잡혔다. 이에 본인은 그저 대인배의 뿌듯한 미소만 지을뿐... :)최우수상은,GE랄...곧 나의 대상 소식은 온 국민들에게...그래,역병처럼 퍼져나갈 것이다!

뿌리깊은 나무의 성공으로 화려한 부활을 하게 되며 모처럼 CF를 2편이나 계약했고 많은 시나리오를 받으며 다시 영화에서 명예회복의 기회를 노리고 있다. 2013년 류승완 감독과 하정우, 전지현과 함께한 영화 베를린이 개봉 3일만에 100만, 개봉 14일만에 500만 관객을 돌파하며 손익분기점 450만명을 넘기면서 710만명을 동원하는데 성공, 영화 쪽에서도 완벽하게 부활에 성공했다. 현재 이 수치는 2000년대 한석규의 최고 흥행이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주인공이 아니라서 최고 흥행이라고 보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다.

뒤이어 개봉한 파파로티이제훈의 군입대 및 7번방의 선물의 흥행호조 등등의 핸디캡에도 불구하고, 주연배우로써 성실하게(평소 거들떠보지도 않던 예능출연 혹은 언론 노출 등등)홍보한 덕에 간신히 손익분기점을 넘기게 되었다. 전성기처럼 원톱으로 주연으로 나오기는 힘들어졌지만, 선후배 배우와의 투톱으로 출연하여 시너지 효과를 내는 주조연급으로 수요가 많을 것으로 전망된다고는 하지만 지금도 출연제의가 그다지 많은 것은 아니라 한다(...)

덤으로 베를린에서 필모그래피 사상 최초로 크레딧 둘째 줄에 이름을 올렸다. 데뷔작 닥터봉부터 시작해서 한 번도 크레딧 첫째 줄을 놓친 적이 없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여러 가지로 기념적인 의미다. 그만큼 한석규가 극의 중심이 아니어도 극이 돌아가게 하는 배우들이 많다는 증거이기도 하고, 한석규 스스로도 주연만 고집하지 않는다는[35] 방증이기도 할 것이다.[36]

2012년 11월 영화 파파로티 촬영 이후 휴식을 취하던 한석규는 황우석 교수 사건 배경으로 만들어진 영화 제보자에 출연을 제의 받았으나 검토 후 거절하였고 2013년 11월,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를 집필했던 김영현 작가의 제의를 받아 드라마 파천황에서 정도전 역을 제의 받았다. 2014년 4월 경에 방영 예정이었으나 KBS 드라마 정도전과 시기가 비슷하고 정도전의 경우 먼저 방영한데다가 오랜만에 정통 사극이라는 점에서 시청자들에게 호평을 받은 반면, 파천황은 퓨전 사극이라는 것을 감안하여 MBC가 편성을 보류했다.[37] 그 이후 2013년 12월, 영화 '상의원' 출연을 확정지었다.#

동시에 비밀의 문에도 캐스팅 되어 한석규가 사극만 너무 고집한다는 평이 조금씩 나왔다. 문제는 상의원비밀의 문모두 절정의 연기력을 선보였다는 평에도 불구하고 시청률과 관객수에서 모두 참패를 거둔지라 조금씩 한석규의 자리가 좁아지고 있다는 점이다. 영조임금을 연기하고 싶어서 출연한 비밀의 문에서 조차 초반에는 발음문제까지 지적받은데다 '뿌리깊은 나무'에 이은 왕 역할을 맡아 질리다는 혹평도 받은지라 당분간 사극출연은 자제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2015년 두 편의 영화에 출연하기로 되어있었는데, 김훈 중위의 의문사 문제를 다룬 '아버지의 전쟁'은 투자자가 없어서 제작이 엎어졌고, 김래원과 함께 출연하는 영화 '더 프리즌'은 2016년 3월에 제작에 들어갔다.

9 기타

흔히 말하는 '잘생기지도 못생기지도 않은' 외모라서 특유의 순한 연기를 할 때는 정말 선량해 보이고 성질 더러운 연기를 할 땐 정말 그렇게 보인다. 스펙트럼이 꽤 넓다고 할 수 있는데, 요즘 들어 어둡고 지독한 연기를 많이 선보인다. 본인의 원래 성격은 내성적이고 가라앉아 있는 성격이라고. 젊을 때는 본인의 그런 성격에 굉장한 불만을 품었었다 한다. 아무래도 날고 기는 끼 많은 사람들이 넘치는 연극영화과에서 조용한 성격으로 버텨 내려니 비교도 많이 되었을 듯. 그래서 폭발적인 연기를 할 때 나름 대리만족을 느낀다고. 약간의 우울증이 있다고도 한다. 남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차분히 가라앉은 정도...

인터뷰를 꺼리고 sns도 하지 않는다. 작품 외적으로 자신을 노출하는 것을 몹시 싫어한다. 철저히 배우로 남고 싶어 하는 듯 싶다. 배우는 행동으로 말해야 하는 직업인데 인터뷰를 하면 말만 번드르하게 하는 것 같아 자괴감이 느껴진다고. 오죽했으면 뿌리깊은 나무 종영 뒤 인터뷰가 쇄도했을 때는 아예 도망다녔다고 인증했다. 덕분에 이미지는 굉장히 좋지만 팬 입장에서는 눈물이 날 지경. 영화 내려가면 떡밥 좀 달라고 아우성치는 팬이 부지기수. 연예계의 토가시 요시히로라고 평하는 팬도 있다.

JTBC 뉴스룸에서 단독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한국영화계에서 영향은 1990년대 한국영화의 흥행 전성기를 이끌었다는 면도 있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막동이 시나리오 공모전이다.[38] 1999년 사비를 털어 총 3,000만원의 상금을 걸고 시작해서 2010년 12회까지 이르고 있다. 영화배우가 자신의 사비로 이런 공모전을 하는 것은 국내외적으로 전무후무한 일이다. 씨네21과 손잡고 진행한 막동이 공모전을 통해 많은 시나리오와 작가들이 배출되었고, 몇몇 수상작의 영화화에는 직접 주연을 맡기도 했다.[39] 평소에도 시나리오의 중요성을 강조해 왔다고 한다. 좋은 시나리오에 명연기가 더해지면 명작이 되지만, 나쁜 시나리오로는 아무리 명연기, 명연출을 해도 졸작이 된다고... 이런 평소의 지론을 실천에 옮긴 것. 그러나 아쉽게도 2011년에는 열리지 않았다. 주최측 내부 사정이라는데, 공모전을 준비해 온 시나리오 작가 지망생들에겐 안습.



산사에서 찍은 광고로, 휴대폰 광고인 주제에 "잠시 꺼두셔도 좋습니다"라는 독특한 컨셉으로 인해 유명해졌다.[40] SK텔레콤의 잘 터진다는 이미지를 확고히한 광고.


계약기간 끝나자 LG텔레콤에서 귀신같이 영입해서 광고 찍었다. 늘 가던 길만 가다가 다른 길로도 가보자는 컨셉. 즉, 예전부터 쓰던 SK텔레콤만 쓰지 말고 LG텔레콤도 써보라는 의도.

광고 내레이션도 간혹 맡는데(커피, 통신사, 금융 관련 등) 성우 출신이라 그런지 전혀 위화감이 없다.

전성기가 1990년대 후반 즉, 지금처럼 영화관의 수가 많지 않았고 멀티플렉스에 의한 와이드 릴리스 개봉이라는 것 자체가 없었던 시절이라 관객수가 송강호,최민식 같은 라이벌 배우들에 비해 많이 적다. 또한 당시에는 전국관객은 집계하지 않았고 서울관객만 집계하던 시절이어서 한석규의 전성기 시절을 접하지 못한 세대들에겐 본의 아니게 폄하 당하는 부분이 있다. 미국의 경우 관객수가 아닌 흥행수입을 기록하고 또 인플레이션을 감안한 흥행 순위를 계산하여 30년대에 개봉했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가 2013년 현재 물가와 비교했을때 어느정도의 수입을 거뒀는지 비교라도 할수 있지만 우리나란 그런 체계조차 없다. 한석규가 전성기 시절 거뒀던 흥행 기록은 지금으로 치면 거의 300~500만 관객 정도 되는 기록이고 당시에 500만명이 왔던 쉬리는 지금으로 치면 1000만관객 정도 되는 작품이다. 더 이전에 개봉한 은행나무 침대,접속은 멀티플렉스 방식이 아닌 단관 상영 형식이었으므로 지금수치로 환산하면 각각 서울 240만, 200만명이고 전국적으로는 1000만명에 가깝다. ㅎㄷㄷ

시나리오를 주의 깊게 보는 만큼 캐릭터 연구에도 공을 들이는 편이라 현장에서 독자적인 아이디어를 내는 경우가 꽤 많다고 한다. 실제로 채택된 예도 꽤 많은데, 뿌리깊은 나무이만원신, 광평대군 사망 신, 구타유발자들문재가 침 뱉는 버릇[41],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의 백성찬 반장의 백발[42] 등등.

정신세계가 상당히 비범하다. 어릴 때 낚시를 하다가 비가 왔는데 옷을 죄다 벗고 비를 맞으면서 낚시를 했다거나 자기 영화 시사회에서 요즘 관심사에 대한 질문을 받자 진지하게 영조는 왜 사도세자를 뒤주에서 죽였을까라는 말을 하거나 버라이어티에 나와서 자기가 받은 질문을 역으로 MC에게 하거나 하는 식. 본인도 자각은 있는 모양으로, 버라이어티에 나올 때마다 왜 자신은 말할 때마다 진지해지지는지 모르겠다며 자책하는 풍경이 꽤 자주 보인다. 힐링캠프 기쁘지 아니한가를 반쯤 한석규의 철학캠프로 만들어 버린 것은 반쯤 전설급이다. 자신이 연기하는 배역에 대한 깊은 연구, 나아가서 인간의 감정에 대한 철학적 고민이 얼마나 좋은 연기로 나타날 수 있는지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거기다 이게 10년만의 예능 출연이었다! 예능출연이라고 해도 '이소라의 프로포즈'같은 음악프로가 전부였다. 석규 스님

은근히 입이 걸다고 한다. 사석에서 친근감을 표시할 때 편하게 육두문자를 쓰고는 한다고. 처음 피해를 본 배우는 은행나무 침대의 신현준. '은행나무 침대'를 신현준과 같이 하고 싶다는 말을 할 정도로 그에게 배우로써 호감을 많이 느꼈다고 한다. 게다가 당시 약간 여성스러운 분위기가 보였고 드라마 촬영과 겹쳐서 함께 출연하는 배우들과 잘 어울리지 못한 까닭에 일부러 한석규가 같이 친해보려고 '야..이 가시나야~'라고 놀렸다고..처음엔 많이 상처받았지만[43], 시간이 지날수록 둘은 많이 친해졌다고 한다. 최근에는 하정우..하정우는 만나자마자 한 시간 정도 육두문자를 들었다고 인터뷰 등지에서 거하게 인증했다. 하정우 왈 고급스러운 욕이라고… 실제로 연기할 때 보면 욕을 상당히 찰지게 한다.

커리어를 보면 알겠지만 첩보물 주인공을 세번이나 맡았다. 쉬리-이중간첩-베를린.

연기활동 및 CF외에는 그 흔한 화보촬영이나 인터뷰도 하지 않는다. 원래 매체 노출에 관심이 없는 성격이기도 하고, 아이들과 아내가 모두 미국에서 공부하고 있는 지라 휴식기에는 주로 미국에 머문다고 한다. 그래서 동료배우 및 유명인들의 결혼식 등에는 몰래 참석하는 정도.

말투가 상당히 구수하다. 사실 그의 말투는 서울 토박이 말씨이며[44] 부모님도 서울 출신인지라 부모님이 평소 쓰던 말투에 의해 습관화 된 거라고(...). 성우 시절에도 이러한 말투 때문에 조금 고생하기도 했다.[45]

10 필모그래피

10.1 영화[46]

연도제목활동관객수흥행
2014상의원주연79만명실패
2013파파로티주연170만명손익분기
2013베를린주연710만명성공
2010이층의 악당주연40만명실패
2009백야행조연140만명실패
2008눈에는 눈 이에는 이주연205만명손익분기
2006사랑할 때 이야기하는 것들주연21만명실패
2006구타유발자들주연16만명실패
2006음란서생주연257만명성공
2005미스터 주부퀴즈왕주연41만명실패
2005그때 그 사람들주연108만명실패
2004주홍글씨주연143만명손익분기
2002이중간첩주연102만명실패
1999텔 미 썸띵주연123만명성공
1999쉬리주연580만명성공
19988월의 크리스마스주연42만명성공
1997접속주연67만명성공
1997넘버 3주연29만명성공
1997초록물고기주연16만명성공
1996은행나무 침대주연68만명성공
1995닥터봉주연37만명성공
  • 90년대 흥행성적을 지금수준으로 어느정도 환산한 글이 있어서 링크를 걸어둔다.#

10.2 드라마[47]

연도제목활동시청률
2016낭만닥터 김사부주연
2014비밀의 문주연10.0%
2011뿌리깊은 나무주연25.4%
1995호텔주연36.5%
1994까레이스키단역7.5%
1994도전조연
1994서울의 달주연48.7%
1993한지붕 세가족조연
1993파일럿주연46.2%
1992아들과 딸주연61.1%
1991여명의 눈동자단역58.4%
1991우리들의 천국조연

10.3 CF

연도기업명브랜드명공동출연
2015한국야구르트헬리코박터 윌
2012~13LS네트윅스몽벨(아웃도어)
2012~14메리츠화재메리츠화재(보험)조여정
2009~10한국증권금융한국증권금융
2010던롭 코리아젝시오(골프용품)김희애
2010SK 에너지엔크릭솔룩스
2006삼성화재올라이프(보험)
2006LG유플러스LG텔레콤김주혁
2005교보생명교보생명(보험)
2004~2007기탄교육기탄교육
2002SK 텔레콤IMT 2000(통신)
2002SK 텔레콤모네타(통신)이요원,비
2000~2004LG전자엑스켄버스
1999~2003KEB 외환은행외환은행
1999펜텍 스카이스카이(휴대전화)
1998SK텔레콤넷츠고(PC통신)강성연,한고은
1998~2000동서식품맥심황수정(1999년),안성기-심은하(2000년)
1998~2002SK텔레콤스피드011장진영(1998년),황인영(1999년)
1998한국화장품파메스
1997GS칼텍스보너스카드
1996제일모직갤럭시
1996대우전자대우입체냉장고 탱크2유인촌
1996LG 텔레콤시외전화 082
1994~1995진로하이트
1994쌍용제지비바
1994LG생활건강죽염
1993해태음료썬키스트 훼미리주스김혜수
1993~1997선창산업선우드가구
1993현대자동차엑셀GS
1993삼성전자그린컴퓨터
1993제일모직빈폴

11 수상 기록

연도수상작품
2011SBS 연기대상 대상뿌리깊은 나무
2011SBS 연기대상 10대 스타상뿌리깊은 나무
2000제37회 대종상영화제 인기상-
1999제20회 청룡영화상 최고 인기배우상-
1999제1회 디렉터스컷 어워즈 올해의 연기자상쉬리
1998제3회 여성관객이 뽑은 최고 남자배우상8월의 크리스마스
1997제18회 청룡영화상 남우주연상초록물고기
1997제35회 대종상영화제 남우주연상초록물고기
1997제17회 영평상 남우주연상초록물고기
1997제20회 황금촬영상 인기 남자배우상초록물고기
1997제33회 백상예술대상 영화부문 남자 최우수연기상초록물고기
1996씨네21 영화상 신인연기상닥터 봉
1996제32회 백상예술대상 영화부문 남자 신인연기상닥터 봉
1995제6회 이천춘사대상영화제닥터 봉
1994MBC 연기대상 최우수 연기상서울의 달
1993MBC 연기대상 신인상아들과 딸
1984MBC 강변가요제 장려상길잃은 친구에게
  1. 전 KBS 21기 성우.
  2. 한석규말고 영화계에서 한 시대의 원톱을 차지한 배우는 70년대 신성일, 80년대 안성기를 제외하곤 없다고 봐도 좋다. 90년대 초반엔 안성기, 박중훈, 이경영, 최민수 등이 서로 돌아가면서 주연을 차지했던 춘추전국시대였으며 한석규 이후의 2000년대를 대표하는 설경구, 송강호, 최민식의 이른바 설송최 역시 3톱이었지 한 명이 압도적인 상황은 아니었다.
  3. KBS 성우극회 22기로 김승준, 김일, 홍성헌, 문선희 등과 동기.
  4. 훗날 '휘파람공주'라는 영화를 만든 이정황 감독 역시 한석규와 같은 대학 출신으로 이 노래의 가사를 썼다.
  5. 힐링캠프에서 한 얘기에 의하면 군대에서 허리 부상으로 의병제대를 한지라 몸을 많이 움직여야 하는 배우를 할 수 있을지 회의가 들어 성우 공채를 본 거라고. 시간이 지나면서 몸 상태가 꽤 많이 회복되어 본래 꿈이었던 배우를 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세월이 꽤 지난 지금까지도 그 때 부상 당한 허리 상태가 별로 좋지 않다고. 체중이 늘면 바로 생활이 불편해져서 옛날부터 지금까지 체중을 비슷하게 유지해 온다고 한다.
  6. 지금으로 치면 산 너머 남촌에는 같이 1기, 2기 출연진들이 바뀐 경우를 생각하면 된다.
  7. 원래는 유인촌이 하기로 되어 있었고, 작가 김운경씨는 한석규의 캐스팅을 반대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연기력에 반성했다고..
  8. 이 당시만 해도 유망주로 꼽혔지만 드라마의 실패 이후 오랜 세월 잊혀져 있다가 부부 클리닉 사랑과 전쟁의 단골 출연자로 다시 이름을 알리게 된다.
  9. 극 중 김희애검열삭제 하려다 눈알이 빠지는 일본 앞잡이 역... 그나마 김희애러시아야반도주 망명 후에는 드라마에서 퇴갤. 어차피 시청률 한자릿수를 기록하며 실패했다. 1990년대 초반에는 20%는 기본이던 시절에 시청률 한자릿수였으니 지금으로 따지면 소수점에 가깝다고 봐도...
  10. 1995년 호텔 이후 15년이 지난 지금까지 드라마로 복귀하지 않았다가 16년 만인 2011년 10월에 뿌리깊은 나무로 복귀했다.
  11. 실제로 한석규의 전성기였던 90년대 중후반 이전의 한국영화계는 과장을 좀 보태서 '영화는 보고싶은데 할리우드 영화는 개봉을 아직 안해서 돈아깝지만 어쩔수 없이 본다'라는 인식이 있을정도의 침체기였다. 그러던 도중 한석규가 흥행과 비평 두마리의 토끼를 잡으면서 그동안 외면하고 있던 국민들의 관심을 한국영화로 되돌려놓게 되고 멀티플랙스의 보급과 시너지 효과를 내며 한국영화계의 르네상스를 일으킨다.
  12. 그리고 그 동안 충무로를 장기집권하던 안성기가 서서히 내려오게 되고 배우폭이 좁아서 한동안 돌려막기식의 출연으로 희생양이 되었던 이경영,박중훈,최민수 대신 이 시기에 데뷔한 배우들이 점차 자기자리를 찾아가기도 한 시기가 바로 이 시기다.
  13. 이 때 그에게 들어온 시나리오 수는 10여개
  14. 이 시기 TV에서 인기를 얻은 배우들이 충무로에 진출했다 하면 흥행 성적이나 작품성 모두 실패해 버리는 경우가 많았다. 당시 TV에서 많은 인기를 얻었던 이병헌, 심은하를 포함한 톱스타부터 TV 드라마로 조금이나마 인기를 얻었던 배우들마저 충무로에 가면 추풍낙엽 신세가 되어 하락세테크를 타기도 했지만 유일하게 한석규는 충무로 진출에 성공하여 배우로서 자리매김을 할 수 있었다.
  15. 결국 이 작품은 거절하여 남자 주인공은 이경영이 맡게 되었지만, 여주인공들은 다음 영화이자 강제규 감독의 은행나무 침대에서 다시 만난다.
  16. 어떤 언론에서는 100여개가 들어왔다고 했다
  17. 이 상황은 3년 후 쉬리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나지만, 다행인 건 쉬리가 제작한 시점에서는 한석규가 확실하게 대세였던 시기였던 덕도 있고, 그 자체가 화제성이 아주 큰 배우였기 때문에 은행나무 침대처럼 완전히 가리워지지는 않았다.
  18. OST는 70만개가 팔려나갈 정도로 웬만한 대중가요보다도 인기가 많았다. 이 영화로 한석규 신드롬이 본격화된다.
  19. 다만, 이때 송강호최민식은 한석규의 형인 한선규가 운영하는 회사 소속이기도 해서.. 요즘도 자주 하는 대형기획사의 유명스타+회사 소속의 신인을 출연시키는 끼워팔기 식으로 보면 된다. 하지만 한선규씨의 이러한 행동이 너무 지나친게 동생의 앞날을 가로막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밑에서 자세하게 후술한다.
  20. 2009년 이 영화 10주년을 기념한 씨네 21 기사에 따르면 당시 제작진들이나 배우들조차도 150~200만 전국관객을 예상했는데, 서울 관객만으로도 230만이 넘었다.
  21. 당시 한석규는 대한민국 배우로서는 최초로 러닝 개런티 계약을 체결했다. 기본 출연료 2억 5천만원+관객당 500원으로 계약했는데 그로 인해 12억원의 수입을 올렸다.
  22. 닥터봉은 예외로 작품성보다는 배우에게 호평이 쏠린작품이다. 초록물고기는 흥행에 실패했다는 사람들이 많지만, 당시 단관개봉 시스템이었던 서울에서 20만명에 가까운 흥행스코어를 기록했다.
  23. 이 당시 한석규가 시나리오 보는 눈이 탁월하다는 평도 많은데, 사실 이 것은 형 한선규씨의 덕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한다. 2000년 들어 한석규 본인이 고른 영화들이 흥행과 작품성에서 어긋나는 작품들이 상당수 나오는것만 봐도..대표적인 작품이 2000년에 개봉된 영화 '박하사탕'이다.
  24. 그래서 좋은 작품들을 다른 배우들에게 빼앗겨버려 한동안 형과 많이 싸우기도 했다고 한다.
  25. 2004년 소금인형과 2001년 제노사이드.
  26. 처음엔 한석규가 '형과 상의해서 제게 말씀해주세요'라고 해서 형 선규씨에게 제의했더니... 이런 건 박신양같은 애들이나 해야 한다며 실명거론까지 해 소문이 퍼진 덕분에 한석규가 언론의 도마 위에 오른 적도 있었다. 참고로 언급한 박신양은 당시 최고의 멜로배우였고, 톱스타였다.해당 기사는 실제로 1999년도 영화잡지 '스크린'에 기재되기도 했다.
  27. 송강호, 황정민, 차승원, 최민식, 이병헌... 등등으로 거론 할 수 있다.
  28. 이 때 한석규의 형인 한선규와 함께 본인이 영화제작을 하려다가 투자문제가 여의치 않아 쉬게 된 탓도 있다.
  29. 그 이전 2001년도에 조사한 설문에서도 한석규가 과대평가받은 배우 상위권으로 뽑혔으며 기자들끼리 선정한 최악의 배우 순위에서도 상위권을 차지했다. 참고로 이 분야 1위는 같은 영화에 출연했었던 신현준. '최고의 배우'순위 1위는 바로 최민식.
  30. 이 점에 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있는데 정통 역사극이라기보다는 블랙코미디 풍자극이자 미시사를 다룬 작품이었고 이 측면에서 훌륭한 성과를 이뤄냈다. 한 유명 평론가는 이 작품을 걸작이자 임상수 감독의 최고작이라 칭했다. 한석규의 연기도 훌륭했고.
  31. 이 영화의 배급사는 '쇼박스'다. 추석연휴에 개봉시킬 영화로 '..주부 퀴즈왕'과 '가문의 위기'를 선정하여 두편 모두 개봉시키려고 했으나 시사회 결과 '가문의 위기'가 흥행력이 좋다는 평가를 받아 '..주부 퀴즈왕'은 '가문의 위기' 상영이 끝나면 바로 개봉시키려고 했었다. 그러나 의외로 '가문의 위기'가 흥행 대박을 터트려 쇼박스에서 이 영화를 밀어주는 바람에 사실상 '..퀴즈왕'은 찬밥신세가 되었다.
  32. 제작비가 21억. 영화를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영화의 99%가 계곡에서 진행되고 기껏해야 오토바이 5~6대, 자동차 1대가 끝인데 어디에 돈이 들어갔는지. 21억이나 쓸 이유가.... 배우들도 개런티를 대폭 낮췄다던데 말이다. 그 자동차 1대가 벤츠였다.
  33. 실패작이라면 실패작이지만 영화는 한석규가 주연이 아니므로 뭐 굳이 책임질 필요가..;;;;;; 어차피 주연은 고수손예진이었으므로..
  34. 함께 개봉한 외국영화 홍보사 알바들의 공격과 연평도 포격 사태로 인해 나라 분위기가 다운되어 개봉시기를 잘못 잡은게 주 원인이었고, 영화 데뷔작 '닥터봉'을 기억하는 지금의 영화관객들이 많지 않은데(그것도 1995년 개봉작인데..), '닥터봉'의 커플이었다고 병맛 홍보로 밀어부친 것도 실패의 원인이다.
  35. 백야행에서는 예외적으로 조연이었지만 크레딧 맨 윗줄. 감독이 출연을 부탁했을 때 고사했다가 감독의 정성어린 설득으로 수락한 유일한 작품이었다고 한다.
  36. 그렇다고 베를린에서 주인공은 아니기 때문에 즉, 자신이 90년대 최고배우였다는 자존심을 완전히 내려놨다는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37. 이후 파천황은 SBS로 이동하여 육룡이 나르샤로 방영된다.
  38. 막동이는 1997년 출연작 초록물고기에서의 작중 이름으로 본인이 가장 애착을 가지는 캐릭터라고 한다. 1회 당선작이 김지운조용한 가족이다.
  39. 위에 언급된 검증되지 않는 신인감독과의 작품활동도 사실 이부분과 연관이 있다.
  40. 2010년에 엄기준이 재현했다! http://weeknt.tistory.com/109
  41. 호흡기가 좋지 않다는 설정이라고 한다.
  42. 이것 때문에 백발로 염색하고 집에 갔더니 자녀가 갑자기 왜 이렇게 늙었느냐며 놀라서 아빠 돈 벌어야 해서 힘들어라고 응수했다고…
  43. 일례로 '은행나무 침대'에서 진희경과 도망가는 장면을 촬영할때 ng가 너무잦아 체력적으로 지친 와중에 혹시나 드라마 촬영 때문에 늦을까봐 서둘러 영화 촬영장으로 온 신현준을 보고 '왜 일찍왔어 가시나야..라고 놀렸다 한다.
  44. 가끔 나이 드신 분들 말투를 생각하면 된다. 신구, 이순재 등.
  45. 같은 성우 출신인 고 장세준도 이같은 말투 때문에 고생이 많았다고 한다.
  46. 2000년대 이전에는 제대로 집계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2000년대 이전 관객수는 서울기준으로 작성
  47. 최고시청률 기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