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 The Attack on Pearl Harbor, The Battle of Pearl Harbor
일본어 : 真珠湾攻撃しんじゅわんこうげき, ハワイ(布哇)海戦
진주만 공습 | ||
제2차 세계대전 중 태평양 전쟁의 일부 | ||
공습을 받고 화염에 휩싸인 USS 애리조나 | ||
날짜 | ||
1941년 12월 7일 | ||
장소 | ||
미합중국, 하와이 준주 오아후 섬 진주만 | ||
교전국 | 미국> | 제국]] |
지휘관 | 허즈밴드 킴멜 월터 쇼트 | 이소로쿠]] 나구모 주이치 겐다 미노루 구사카> 류노스케 |
결과 | ||
일본군 해군의 기습 성공 및 미군 태평양 함대의 전함 전력 상실 | ||
영향 | ||
미국의 제2차 세계대전 참전 태평양 전쟁 발발 | ||
병력 | 전함 8척 순양함 8척 구축함 30척 잠수함 4척 기타 함선 50척 전투기 390대 | 항공모함 6척 전함 2척 순양함 3척 구축함 9척 전투기 441대 소형 잠수함 5척 |
피해규모 | 총 사상자 - 3,581명 전사, 1,247명 부상 - 민간인 103명 사상 전함 4척 침몰[1], 1척 좌초, 3척 손상 순양함 3척 손상 구축함 3척 손상 기타 함선 2척 침몰, 3척 손상 항공기 188기 손실, 155기 손상 | 항공기 29기 손실 잠수정 5척 침몰 64명 전사 포로 1명[2] |
목차
1 개요
영상 후반부를 보면 알겠지만 진주만 공습이 아닌 미국의 참전이 사상 최악의 참사라고 말하는 것 같다.[3] |
Remember Pearl Harbor! Remember December 7th!진주만을 기억하라! 12월 7일을 기억하라!
일본 제국 사상 최악의 정치적, 전략적 실책[4]의 일부이자, 본격적인 항공모함 시대의 개막을 알린 해군 군사 작전상의 역사적 이정표[5]
1941년 12월 7일, 항공모함 중심의 일본군 해군 연합함대가 미국 태평양 함대의 기지 하와이 오아후 섬 진주만에 공습을 가한 사건. 이는 태평양 전쟁의 시작이었다.[7] 우익들이 넘쳐나는 일본 위키피디아에서는 진주만공격이라고 쓰여져 있으며 전쟁 당시에는 하와이 해전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2 원인
자세한 내용은 해당 문서 참조.
2.1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한 이유
일본 제국은 미국과 전쟁을 결정했고 이런 상황에서 당시 야마모토 이소로쿠 연합함대 총사령관은 '그나마 현실적으로 미국과 싸울 방법'으로 하와이의 진주만을 기습해서, 거기에 기지를 둔 태평양 최강의 함대인 미국 태평양 함대를 전멸 또는 최소한 괴멸 직전 상태로 몰아가는 것이었다.
그러면 미국이 힘을 회복하는 동안 일본에게 없는 석유를 얻을 수 있는 동남아를 점령하고 섬들을 요새화해서 미국의 공세의지를 꺾고 가능하면 더 이상의 결전 없이 어떻게든 평화협상을 성사시키는 거고, 정 안 되면 태평양을 종심(縱深)[8]이 깊은 전장으로 삼아 미국의 공세전력을 소모시켜 최종 결전에서 그들을 격멸하고 어떻게든 평화협상을 성사시키는 것이었다.
"미국의 싸대기를 맛깔나게 후리면 감동먹어서 나와 협상하겠지"라는 일본의 근자감으로 요약할 수 있다는 의견도 있으나 사실과는 전혀 다르다. 어차피 둘 사이의 전면전은 피할 수 없는 상황이었고, 미국은 유럽 전선의 상황이 정리되는대로 태평양 전선으로 모든 여력을 돌릴 예정이었으며 일본의 점령지는 절대로 그대로 놔둘 생각이 없었다. 그 목적의 달성을 위한 태평양 함대의 건조도 착착 진행되어 가고 있는 상황이라 일본의 입장에서는 어느 쪽의 승리로 끝나든 유럽전선이 결착지어지기 전에 미국과의 전쟁을 시작한 뒤, 적절히 협상하여 끝내고 싶었던 것이다. 당시의 유럽전선은 추축국이 매우 유리한 형세였으므로 그대로 종전된다면 러시아와 불가침조약을 맺은 일본은 미 대륙을 고립시켜 협상을 유리하게 이끌어나갈 수 있었다. 혹여라도 추축국이 패배할 것이라 하더라도 조금이라도 병력이 분산될 때 결착을 지어야 유리한 것은 자명하다. 즉, 미국과의 결전 자체는 충분히 정치적이며 전략적인 결단이었다는 것이다. 다만 히틀러가 미친 짓을 시작할 것이고 미국이 그런거 다 씹어먹을 수준의 경제력을 가졌다는건 그 당시로서는 절대 예측하기 힘든 바였다.
지형적 특성상 서로간에 타격을 주려면 긴 장창이 필수 불가결했고 반대로 이것만 없으면 일본은 상당힌 기간동안 식민지의 점령을 공고히하고 국제사회에서 이를 인정받을 기간을 벌 수 있었다.[9] 어차피 피할 수 없는 싸움이라면 적어도 적이 준비를 끝마치기 전에 적이 나를 공격할 유일한 수단을 미리 잘라놓는 것이 전략적으로 유리한 것은 말할 필요가 없다. 즉, 화를 돋구기만 할 뿐인 싸대기를 맛깔나게 후리는게 아니라 나의 공격을 막을 수단이자 나를 공격할 도구인 적의 팔다리를 잘라놓고 회복되기 전에 결정적 타격을 주려는 전략이었던 것이다. 다만 팔다리 회복에 생각보다 빠른 시일이 걸렸고 피지컬 부족으로 본체에는 닿지도 못했다 일본의 진주만 공습은 이러한 배경 속에서 이루어졌지, 절대로 아무 생각없이 가만히 잠자는 사자의 콧털을 건드려 나라를 파국으로 몰고간 것은 아니었다. 설사 적이 협상할 마음이 없다고 하더라도 전면전에서 상대방의 전력을 줄여놓는 것은 초반 전세의 승기를 잡고 후에 교착상태가 되었을 때 좀 더 우위를 가져갈 수 있다는 점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령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생각이 전략적으로 최선의 선택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오판이었던 이유는 세가지로 요약해볼 수 있다. 첫째는 1941년의 형세와는 반대로 추축국이 결국 패배하여 정치적 우위를 가져올 수 없었다는 점, 둘째는 미국의 경제력이 그정도의 손실은 전혀 상관하지 않을 정도로 쩔어줘서 전략적으로 크게 우위를 차지하지 못했다는 점, 마지막으로 선전 포고도 하지 않고 뒤통수를 친 일본의 행동이 생각보다 큰 미국 국내의 공분을 사서 전멸전을 강요당하는 것 외에 협상이 전혀 불가능했다는 점이다. 이외에 결정적이라 볼 수는 없으나 원하는 만큼 시간을 끌지 못한 전략적 오판 중 하나로 항공모함과 유류창고를 파괴하지 못했다는 점도 들 수 있을 것이다.[10]
3 전개
3.1 일본의 준비
미국과의 결전이 불가피하다고 판단한 일본군 수뇌부는 귀싸대기를 존내 맛깔나게 후릴 준비로 남방작전을 수립하여 동남아시아 지역의 유전을 확보하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정하였다. 하지만 일본 연합함대 총사령관 야마모토 이소로쿠 제독은 남방작전 이전에 미국 태평양 함대를 먼저 공격해두지 않으면 남방작전 내내 두고두고 골칫거리가 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야마모토 제독의 주장은 일본군 수뇌부 내에서도 논란이 있었다. 당시 일본해군의 기본적인 대미작전 개념은 점감(漸減)전법으로 개전 후 서진(西進)하는 미군 함대를 잠수함과 항공기로 위치를 파악하고 잠수함과 항공기로 이들에게 1차 손해를 준 후에 이어서 순양함과 구축함 전대를 동원하는 야간전투에서 2차 손해를 준 후 전함간 포격전으로 미군 함대를 최종적으로 격퇴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작전안의 문제는 미군이 일본군의 예상대로 움직인다는 보장이 전혀 없다는 것이었지만 어처구니없게도 미 해군도 일본 해군과 유사한 작전개념안을 가지고 있었다. 즉 선전포고를 먼저 하고 실제 전투는 나중에 진행할 경우 미군도 일본군과 비슷하게 공세적으로 행동했을 가능성이 높았다는 이야기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미군이 일본이 예상한 경로 그대로 진격하지 않고 남방작전을 하러 떠나는 일본군을 측면에서 때린다든지 하는 방향으로 진격할 가능성도 높았다. 하지만 일본 해군의 머리가 굳으신 분돌대가리들은 이걸 인정하지 않았으며 게다가 어디까지나 대구경 함포를 장착한 전함이 해군의 주력이라는 사상을 지녔던 다른 제독들도 반대 의사를 표시하였다. 하지만 야마모토 제독이 강한 자신감을 보였고 무엇보다 승인을 해주지 않으면 연합함대 사령관을 사퇴하겠다고 나오는 바람에 결국 수뇌부도 야마모토 제독의 의견을 수용하여 남방작전과 동시에 진주만 공습을 실시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일본이 진주만 공습에 앞서 연구한 것은 바로 영국군이 실시한 이탈리아의 타란토 공습이었다. 그 결과 진주만과 타란토의 조건이 거의 유사하기 때문에 어뢰를 통한 공격이 가능하며 400기 정도의 항공기와 숙련된 조종사만 동원한다면 진주만 공습도 성공할 것이란 결론을 도출했다. 이에 따라 일본해군의 조종사들은 여름부터 철갑탄을 이용한 폭격과 뇌격훈련에 돌입하였다. 더불어 진주만의 지형을 그대로 옮긴 모형을 보여주면서 지형을 익히도록 하였으며 정확하게 미국의 전함과 항공모함을 식별할 수 있는 훈련도 병행하였다.
이와 동시에 일본군 정보계통도 분주하게 움직이면서 태평양 함대의 정보를 수집하였다. 하와이에는 요시카와 다케오라는 해군 소위 출신 첩보원[11]이 상주하여 어디에 항공기지가 설치되어 있고 어느 군함이 어디에 정박하고 있는가에 대한 정보까지 모두 전달되었다. 게다가 태평양 함대의 모든 군함이 토요일에 입항한다는 사실을 확인하면서 가장 최적의 공격시간이 일요일 새벽이란 보고서를 올릴 수 있었다. 이상 수집된 정보를 바탕으로 일본군 수뇌부는 1941년 11월 17일에 공격하기로 결정하였으나 몇 가지 사정이 겹쳐서 결국 12월 7일이 최종적인 공격일로 확정되었다.
작전일이 확정되자 야마모토 제독은 제1항공함대를 주축으로 나구모 주이치 제독이 지휘하는 항공모함 기동부대를 조직하였다. 무엇보다 작전이 노출되면 안 되었기 때문에 11월 22일까지 외부에 거의 알려지지 않은 쿠릴 열도 부근의 히도카푸 만으로 집결할 것을 명령하였으며 항해 중에는 절대 무선교신을 해선 안 된다는 엄중한 경고가 내려졌다. 게다가 승무원들에게는 어디로 가기 위해 모인다는 정보조차 제공하지 않았다. 더불어 집결지인 히도카푸는 미국 첩보원들이 전혀 파악하지 못한 조그만 항구였다.
11월 26일, 군함들이 한 척씩 따로 빠져나가는 방식을 채택하여 진주만을 향해 닻을 올렸다. 더불어 항로 역시 민간상선이 전혀 다니지 않는 곳과 미국 정찰기가 비행하지 않는 곳 위주로 선정하여 항해했으며 선박이 배출하는 배기가스로 인해 발각될 수 있다는 이유로 모든 군함의 연료로 경유를 사용하는 철두철미함을 보였다.[12] 태평양을 우회한 함선도 있고, 동해를 지난 함선도 있으며 전파 발신을 통제하고 전신키를 봉인 할 정도로 신중하였다.
제1항공함대 비행대가 철수한 큐슈 남부의 각 기지에는 다음날 바로 큐슈 북부 방면 소재의 제12연합 연습항공대의 교육부대가 이동하여 바로 다음날 부터 쉬지 않고 연습하며, 항공함대의 비행대 이동이 없는 것 처럼 위장하였다. 또한 통신 방첩도 고려하여, 각 기지는 그 전날 까지의 통신량과 차이가 없도록 동일한 호출 부호로 연습문을 주고 받았다. 기동부대 편지는 모두 밀봉하여 그대로 두고, 진주만 기습 성공 소식이 전해 진 이후에야 배달하는 등 보안이 철저하였다. 이토록 철저한 군대가 왜 하필 미국을...
히도카푸 만에 집결한 병력은 항공모함 6척, 전함 2척, 중순양함 2척, 경순양함 1척, 구축함 9척, 잠수함 3척, 급유함 8척등 총 31척이였다. 이제는 누설될 우려가 없다고 판단된 11월 22일 나구모 사령장관은 기동부대 모든 승무원에게 공격의 목표가 진주만이라고 알렸다.
각 항모의 탁재기 대수는 1항공전대 아카기, 카가에는 각 60대. 2항공전대 소류, 히류에는 각 50대. 5항공전대 쇼카쿠와 즈이카쿠에는 각 70대로 합계 360대였다. 모든 탑재기가 한번에 발진 할 수 없기 때문에 제1파 189대, 제2파 171대의 파상 공격을 하기로 하였다. 첫 발진은 일출 30분전으로 정했다.[13] 1차와 2파는 45분의 간격을 두고 발진하기로 하고, 발진 지점은 오아후 섬의 정북쪽 230해리.
1차 목표는 하와이 방면에 있다고 예상되는 항모 2척, 전함 8척이며, 2차 목표는 갑 순양함 10척, 을 순양함 6척, 구축함, 잠수함, 기타 보조함정이었다. 또한 미군의 항공 병력을 봉쇄하기 위해 하와이 방면의 6개 항공기지 공습을 제2항공전대가 담당하기로 하였다.
더 이상 미국과 협상의 여지가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 일본군 수뇌부는 작전시작을 결정하였고 12월 2일 나구모 제독에게 '니타카 산(타이완 섬의 최고봉 : 현재의 옥산)에 등반하라 1208(ニイタカヤマノボレ一二〇八)' 암호문이 전달되었다.
12월 6일 현지시간 10시 30분. 야마모토 연합함대 사령장관이 전보를 보내왔다.
황국의 흥망이 이 정전(征戰)에 있으니, 분골쇄신하여 각 자 그 책임을 완수하라
각 함의 돛대에는 Z기가 게양되었다. '용전분투'를 뜻하는 깃발로, 러일전쟁때 동해 해전 이후 무려 36년만에 게양된 것이다.
3.2 미국의 준비
미국은 비록 태평양 함대를 진주만으로 전진배치시켰지만, 이는 일본을 압박하기 위한 카드였을 뿐 전쟁을 하기 위한 카드는 아니었다. 하지만 협상이 뜻대로 진행되지 않고 일본과의 전운이 감돌기 시작하자 태평양의 주요 거점을 요새화하고 필요한 군수물자들을 비축하는 작업에 착수하였다. 특히 필리핀에 주둔 중인 연합군과 일본 본토와 근접한 주요 섬들이 공격대상으로 예측되었기 때문에 해당 지역에 작업이 집중되어 있었다. 그러나 일본과의 전운이 감도는 시기는 개전되기 직전에 가까웠던 터라 긴급히 작업을 시작했어도 공사기간 등의 문제로 개전 당시 제대로 된 준비가 된 지역은 하나도 없었다.
게다가 대서양에서 독일군의 유보트가 악명을 날리자 태평양 함대의 항공모함 요크타운과 일부 전력을 차출하여 대서양 함대에 편입시켰다. 태평양 방면의 전력 강화도 진행되고는 있었지만 어차피 현재 보유한 전력과 무기만 있어도 일본군 따위는 상대할 수 있을 것이라 판단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다지 열성적이지 않았다. '곤조가 없어서' 미국이 금방 협상 테이블로 나올 거라고 생각한 일본이나 '쬐끄만 뻐드렁니쟁이들이 뭐 대단하겠어?'라고 일본을 얕잡아 본 미국이나…. 어차피 전쟁은 잘 싸우는 쪽과 못 싸우는 쪽의 대결이 아니라 삽질하는 쪽과 더 많이 삽질하는 쪽의 대결이라는 말도 있으니.
특히 일본 해군의 목표인 진주만의 미군은 "어차피 걔네들 여기까지는 공격하러 못 와."라고 생각하면서 모두들 퍼져 있었다. 게다가 전쟁이 터지면 필리핀이나 태평양 섬에 있는 아군들이 좀 고생할 거고 거기서 지원 좀 해달라고 무전 때리면 그때 가서 일본군과 좀 놀아주다가 오는 수준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나마 위협적으로 생각하고 있던 것이 일본에서 보낸 첩보원이나 하와이에 체류 중인 일본인들, 특히 당시 하와이 인구의 30%가 일본계였으므로 이들이 벌이는 사보타주가 문제였다. 이에 따라 몇 가지 조치를 강구하였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병크. 가장 대표적인 것이 여러 매체에서 사골로 등장하는 항공기들을 특정 장소에 빽빽하게 배치하고 감시병을 둔 사례가 있다.
11월에 접어들면서 일본이 분주하게 움직이자 미국도 슬슬 붙을 때가 됐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그리고 일본군의 주력이 서서히 인도네시아 방면으로 집결하자 미군은 일본군이 그들의 예상대로 남방으로 움직이고 있다면서 나름대로 만족하고 있었다. 하지만 일본의 항공모함 기동부대가 어디론가 사라졌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다소 경계를 하고 있었는데 대부분 인도네시아 방면 지원을 위해 출정했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물론 소수 관계자가 일본군이 진주만을 공격할지 모른다고 주장하였지만 완전히 묵살되었다. 어쨌든 일본의 공격이 임박했다고 판단했기에 전방기지에 항공기와 병력, 물자를 배치하는 일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하였다.
12월에 접어들면서 일본군이 진주만을 공격할지도 모른다는 징후가 여러 차례 포착되었지만 태평양 함대에서는 인도네시아 방면 작전에 앞서 태평양 함대의 동향을 정찰하는 것 정도로 치부하였다. 그리고 12월 7일 새벽이 다가오고 있었다.
3.3 선전포고 없는 전쟁
국제 외교사에 보기드문 사례, 미국이 빡친 결정적인 이유 중 하나. 그리고 원폭투하에 대해 일본이 내부적으로 잘못된 일이네, 민간인 피해자 보상하라네 운운하면서도, 미국에 공식적으로 사과하라고 주장은 고사하고 찍소리도 못하는 이유.[14]
선전포고 없이 벌인 공격이긴 한데 그래도 일본군이 이 당시에는 아주 맛이 간 건 아닌지 야마모토 제독은 선전포고를 한 후에 진주만 공습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것을 받아들인 일본 정부는 "미국 및 영국에 대한 선전의 조서(米国及英国ニ対スル宣戦ノ詔書)"란 이름의 선전포고문을 일본어 원문 발표한다. 그리고 따로 미국을 위한 선전포고문을 진주만 공습 직전에 주미일본대사관으로 보내지만[15] 정작 노무라 주미일본대사가 14 Part Message라 불리는 5000여자 분량의 선전포고 번역문을 들고 미 국무장관 코델 헐에게 찾아갔을 때는 하와이 기준으로 8시 50분인지라 이미 헐 장관이 1시간 전에 진주만 공격 소식을 들은 뒤였다. 이렇게 된 이유는 선전포고문이 5000자나 되는 장문이라 암호해독이 늦었고 보안인가를 받은 타자기를 다룰 인원이 없어서 보안인가가 있는 고위 관료가 직접 독수리 타법으로 방금 해독한 선전 포고문을 느리게 타자했기 때문이다. 원래 타자기를 다루는 사람이 외국인이었는데, 기밀문서란 이유로 관내의 모든 외국인들을 다 내보낸 상태였기 때문에 이렇게 되어버린 것. 거기에 가장 중요한 일본군이 전쟁을 선포한다는 내용은 선언문 가장 마지막에 써넣어 버려서 일본 대사관 직원들도 해독이 끝날 시점에야 전쟁이 시작된 것을 알 수 있었다. 야마모토 제독은 진주만 공격 당시에도 선전포고가 된 것으로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선전포고문을 보낸 암호 해독이 늦어져서 공습 뒤에 미국 측에 선전포고문이 전달됐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격노했다고 전해진다.
... The Japanese Government regrets to have to notify hereby the American Government that in view of the attitude of the American Government it cannot but consider that it is impossible to reach an agreement through further negotiations.일본 정부는 미국 정부[16]에게 미국 정부의 태도로 비추어볼 때 협상을 통하여 합의점을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어쩔 수 없이 도달하였음을 유감스럽게 알리는 바이다.
December 7, 1941. (1941년 12월 7일.)
(일본의 선전포고문 마지막 문장.)
거기에 선전포고문인 14 Part Message도 읽어보면 알겠지만 대단히 엉망진창인데다(문맥이 안 맞는다든가 이리저리 헛소리만 잔뜩 들어있다든가…) 결정적으로 선전포고문이 성립하려면 꼭 필요한 전쟁을 시작하겠다는 직접적인 언급[17]이 단 한 단어도 없다. 앞뒤사정을 모르고 보면 외교에서 말하는 엄중한 경고로밖에 볼 수 없는 문장이다. 미군 측은 일본으로부터 오는 무선을 당연히 도청하고 있었고 14 Part Message를 일본 대사관보다 먼저 해독하는 데 성공했지만, 구체적인 내용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에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라는 경고밖에 내릴 수 없었다. 그리고 경고가 발령된 때는 이미 진주만이 공습을 당하고 있던 시점이었다.
I must say that in all my conversations with you...during the last nine months I have never uttered one word of untruth. This is borne out absolutely by the record. In all my fifty years of public service I have never seen a document that was more crowded with infamous falsehoods and distortions--infamous falsehoods and distortions on a scale so huge that I never imagined until today that any Government on this planet was capable of uttering them.▷ 진심으로 말하건대, 지난 9개월 동안 본인은 거짓된 말을 한 적이 없으며, 이는 기록으로 증명할 수 있습니다. 공직 생활을 50년 동안 해 왔지만 이런 문서는 본 적이 없습니다. 이런 악질적인 거짓과 왜곡으로 가득 찬 나머지 지구상에 이런 문서를 낼 만한 정부가 있다는 걸 믿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이런 상식에서 벗어난 작태를 목격한 헐 장관은 노무라 앞에서 분노에 차서 이렇게 일갈해 버린다. 그리고 축객령을 내려 버렸다.그리고 비오는 날 개쳐맞듯 먼지 날리도록 맞았지.....
반대로 미국 측은 일본부터 시작해서 추축국의 각 국가에게 차례차례로 선전 포고를 하고, 선전 포고 권한이 있는 의회는 루즈벨트 대통령의 서명을 받아 정당성을 확보하였다. 의회가 대통령에게 제출한 전문을 읽어보면 필요 없는 헛소리는 하나도 없이 짧고 단도직입적임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이전에 벌인 청일전쟁과 러일전쟁도 선전포고하기 전에 일본이 선빵 날리면서 시작한 걸 보면 그냥 일본군의 전통 아닐까?[18] 게다가 진주만 공습 당시 일본이 날린 선전포고문은 전쟁을 개시한다는 직접적인 문구가 없는 등 국제법상 선전포고문의 요건을 갖추지 않았으므로 설령 시간에 맞추었다고 해도 국제법상 선전포고를 한 셈이 아니다. 거짓말은 하지 않는다 이와는 별개로 나머지 연합군인 영국, 네덜란드에는 진짜 선전포고도 안 하고[19] 전쟁을 벌여버렸다.
한편 야사에 의하면 독일에서 이 소식을 들은 아돌프 히틀러는 "이런 게 바로 전쟁이다. 우선 공격부터 하고 선전포고는 나중에 하면 된다"고 크게 기뻐했다는 카더라가 있다(…). 그런데 히틀러는 선전포고를 안한 수준이 아니라 불가침 조약이나 평화협정같은것도 다 무시하고 처들어갔었다. 참고로 바르바로사 작전이 진주만 공습보다 먼저이므로 저 야사는 사실일 가능성은 그렇게 크지 않다.아니면 자기가 한 짓에 자부심이 넘쳐서 반쯤 자화자찬으로 한 말이거나..
4 불타오르는 진주만
12월 7일 새벽 일본 연합함대는 하와이에서 북서쪽 370km 해상에 도착하였다. 이미 모든 준비를 마친 일본군은 공격개시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태평양 함대의 항공모함이 한 척도 보이지 않는다는 최신 정보를 받았다. 당시 일본군은 미군의 태평양 함대에 항공모함 요크타운, 엔터프라이즈, 렉싱턴, 새러토가가 소속된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요크타운은 미국과 영국 사이에서 깔짝대는 유보트 잡으러 대서양에 가 있었고 새러토가는 샌디에이고 해군기지에서 정비를 받고 있었으며 렉싱턴은 미드웨이 섬에 전투기 배달하러 간 상황이었고 엔터프라이즈는 웨이크 섬에 전투기 배달하고 전날인 12월 6일에 진주만에 입항예정이었는데 중간에 열대폭풍 때문에 우회하느라 입항이 하루 늦어졌다. 실로 천우신조. 2차대전 최고의 강운함(强運艦)답다.
나구모 제독은 미국이 공습을 눈치 채고 항공모함을 진주만이 아닌 다른 곳에 배치한 것 아니냐는 걱정을 했지만 미국 항공모함의 정보를 확인한 후에 움직일 정도의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진주만에 대한 공격을 지시하였고 이에 따라 1차 공격대가 이륙하였다. 그리고 한 시간 후 2차 공격대가 준비를 마치고 이륙하였다.
사실 당시 미군 태평양 함대는 일본군의 이상징후를 두 차례 감지했으나 이것을 진주만 공격의 전조로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 첫번째 징후는 일본군 잠수함으로 공습직전 일본군은 갑표적을 파견하여 항공대의 공습작전에 호응하여 어뢰 몇 발 쏘고 튈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한 척은 좌초했고 최소 2척이 공습이 시작되기 전 진주만에 접근하다가 초계(哨戒)중이던 구축함위든과 소해정 콘돌에 걸려서 꼬르륵. 하지만 사령부에서 그 보고 자체를 대수롭지 않게 판단하는
미식별 표적은 가끔 있는 일이니까바람에 1차 기회를 날려먹었다. 당시 보고를 들은 사령관의 명령은 "그 풋내기 함장한테 다시 한 번 확인해 본 다음에 다시 보고하게."
당시엔 어느 나라건 자국 해군 기지에 접근하는 미확인 잠수함은 무경고 공격하는 것이 원칙이었고 외국 영해 내에서의 잠수 자체가 국제법 위반이라 진짜 공격을 받았어도 일본은 할 말이 없었다.[20] 여기에 전장에 대한 예측이 안 되어 있을 뿐 개전 자체는 머지않았음은 확실했으므로 일본 잠수함의 접근을 발견했다 해도 그것이 진주만을 목표로 한 대규모 기습에 대한 경고로 이어지기는 쉽지 않았다.
- 두 번째 징후는 당시 진주만에 갓 설치한 육군의 방공용 레이더였다. 당시 전탐병들은 무수히 많은 점이 북서쪽에서 다가오는 장면이 포착된 것을 확인하고 이에 대한 보고를 하였지만 때마침 미 본토에서 B-17 폭격기 편대가 오고 있었으므로, 그들이 예정보다 빨리 날아오고 있는 것으로 판단하고는 무시되었다. 이때 남은 명대사가 통제실 당직 장교의 "별거 아냐, 신경 꺼(Well, Don't worry)." 얼핏 보면 미국이 안이하게 대처한 것으로 보일 수 있으나 당시의 담당자의 해당 상황에선 그런 판단을 내리는 게 합당하다는 결론이 나와서 후일에도 문책을 받지는 않았다. 이런 결론이 나온 이유는 진주만 공습이 그만큼 의외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괜히 전략적으로든 전술적으로든 완벽한 기습이라는 평을 듣는 게 아니다.
목적부터가 기괴하기 짝이 없으니 예측이 가능한 게 이상한 거다.[21]
12일 7일 오전 6시 00분. 각 항모의 해군비행사들은 머리에 하얀색 '하치마키'를 질끈 동여매고 하나 둘 출격하기 시작하였다. 약 15분간 제1파 공중공격대 183대가 이륙하였고, 공격 대형을 갖춘 후 오아후 섬으로 향했다.
최선두에는 비행총대장인 후치다 미쓰오 중좌의 빨간 바탕에 3개의 황색 줄이 그려져있는 비행기가 있었고, 뒤이어 그가 직접 이끄는 수평폭격대 49대가 위치하였다. 우측 500미터 떨어져 고도 200미터 아래로 무라타 소좌가 이끄는 뇌격대 40대, 좌측 500미터 떨어져 고도 200미터 위로는 다카하시 카쿠이치 소좌가 이끄는 강하폭격대 51대, 그리고 이타야 소좌가 이끄는 제공대 43대의 제로센이 공격대의 상공을 경비 엄호 하였다.
당시 일본기에는 레이더가 없었고, 총대장기에만 미국에서 직수입한 '크루시(Kruesi)'라는 라디오 방향 탐지기 1대가 있었다. 후치다가 라디오 스위치를 키니 호놀룰루 방송국의 경쾌한 재즈가 크고 명료하게 들려 왔다. 안테나를 이용한 방향 측정으로 무선 항법을 하였다. 이어진 호놀룰루 방송은 아침 일기예보를 하였다. "오아후 섬 날시는 개었다 흐렸다 하겠으며, 산에는 구름이 끼겠지만 구름 높이는 3,500피트, 시야는 양호하며 북풍 10노트"라는 중요한 항공 기상 정보를 제공하였다.
오전 7시 30분. 비행대는 한대의 낙오도 없이 순조롭게 예정된 계획에 따라 비행 방향을 크게 우회하여 섬의 남서쪽에서 진주만 방향으로 접근하였다. 비행총대장 후치다가 전개 명령으로 1발의 신호탄을 쏘자 강하폭격대는 고도를 높여 급강하 준비를 하고, 뇌격대는 고도를 낮춰 어뢰발사 준비를 하였다. 또 수평폭격대는 맞바람이 좋기에 바람 아래쪽에 위치하였다. 단 제로센 제공대는 속도를 올려 앞으로 나가 제공작전을 하여야 하나 신호를 보지 못하여 움직이지 않았다. 이에 후치다가 다시한번 1발의 신호탄을 쏘자 그제야 제공대는 앞으로 나갔다.[22]
오전 7시 49분. 후치다 비행총대장은 전군 돌격을 명령하였다. 태평양 전쟁의 시작이였다. 도쿄시간으로는 12월 8일 오전 3시 19분이였다.
제로센 제공대가 먼저 나아갔지만 공중전의 기미는 없었다. 지상의 대공포화의 움직임도 없었다. 기습 성공이다.
도라 도라 도라아...아... 호랑이를...
오전 7시 53분 비행총대장의 명령으로 후방 전신석에 앉은 통신사 미즈기 토쿠신이치 1등 비행병조장은 진주만 기습에 성공하였다는 그 유명한 암호명 "도라 도라 도라"를 사령부에 발송하였다.[23] 해당 암호는 호랑이란 뜻도 있지만 사실은 돌격을 뜻하는 '토츠게키(突撃)'와 뇌격을 뜻하는 '라이게키(雷撃)'의 앞글자를 따서 만든 말이다. 돌뇌 돌뇌 돌뇌 항공기에 탑재된 소형 전신기의 출력으로는 3000해리는 기대할 수 없었지만 모함인 항모 아카기는 물론, 도쿄 대본영에서도 직접 수신했다고 한다.
7시 55분. 다카하시 소좌가 이끄는 강하폭격대 51대는 두팀으로 나눠 있었다. 대장이 직접 이끄는 쇼카쿠대는 히컴과 포드 섬 양 기지를 공격하고, 사카모토 아키라 대위가 이끄는 즈이카쿠대는 휠러 기지를 공격하였다.
7시 57분. 무라타 소좌가 이끄는 뇌격대는 전함 웨스트 버지니아 명중탄을 시작으로 계속해서 어뢰 공격을 하였다.
8시 정각. 비행총대장이 이끄는 수평폭격대 50대는 10개 중대로 구성되어 있었다. 기존에는 9대가 각 1발씩 발사하면 1발쯤은 맞추겠지. 하는 생각으로 9대가 1개 팀이였지만, 명중률의 상승으로 5대면 충분하다고 판단되어 1개 중대 5대 편제였다. 비행총대장이 소속된 제1중대가 포드 섬 동측 계류장 가장 북쪽에 있던 전함 네바다에 명중탄을 냈다. 그 순간 제2중대가 북쪽에서 2번째 위치한 전함 애리조나의 2번 포탑에 명중탄을 냈다. 화약고가 위치한 자리라 대폭발이 일어났다. 다른 편대에 진동이 올 정도의 대폭발이었다. 이어 3번째 위치한 웨스트 버지니아와 테네시도 타올랐고, 4번째 위치한 오클라호마와 메릴랜드와 5번째 캘리포니아도 타오르며, 포드섬 동측 계류장 북쪽의 8대중 무려 7대에 명중탄이 났다. 포드섬 남쪽에서는 펜실베니아 함만 타격을 입었다.
8시 30분. 이타야 소좌의 제공대는 적 전투기가 나타나지 않아 할일이 없었다. 이에 6개 반으로 나눠 각 항공기지에 기관총을 난사 하였다.
오아후의 북쪽에 있는 할레이와 비행장에서 제47전투비행대대 조지 웰치 소위와 케네스 테일러 소위가 탑승한 P-40 전투기가 이륙하여 에바 해병대 비행장 부근에서 일본기와 조우하여 웰치 소위는 급강하폭격기 2대를 격추 테일러 소위는 급강하폭격기 1기를 격추했다. 휠러 비행장에 내려 무장과 연료를 채우고 다시 이륙하여 웰치 소위는 급강하폭격기를 2기 추가로 격추 테일러 소위는 급강하폭격기를 추가로 1기를 격추했다. 그 외 해리 브라운 소위가 P-36을 타고 이륙하여 제46전투비행대대 말콤 무어 소위와 짝을 이루어 일본기를 요격 브라운 소위는 이 과정에서 테일러 소위보다 먼저 오아후 섬 북쪽에서 일본기 1기를 격추하여 태평양전쟁에서 미군 조종사로서 최초의 격추를 기록했다.
8시 40분. 시마자키 시게카즈 소좌가 이끄는 제2파 공중공격대 167대가 도착 하였다.
휠러 비행장에서 8시50분에 제46전투비행대대 소속의 P-36 전투기 4기가 이륙했다. 이들은 카네오헤 기지 상공에서 제로기 8기와 교전하여 제로기 3기를 격추하고 전투기 1기를 손실했다. 휠러 비행장에서는 이날 약 25회에 걸쳐 전투기들을 출격시켰다.
8시 54분. 제2파에서 에구사 소좌가 이끄는 강하폭격대 78대가 공격 개시하였다. 진주만은 이미 불바다여서 검은 연기가 자욱해 목표물 확인이 어려울 지경이였다. 이때 1차공격에서 살아남은 일부 미군함이 발포하였는데 강하폭격대는 이 포격 불빛을 보고 공격하였다.
벨로우즈 기지에 일본기가 공격해 왔을 때 제44전투비행대대 소속의 P-40 전투기 12대 중 3대만 발진준비가 갖추어진 상태였고 조지 화이트맨 소위는 이륙하다가 격추되어 전사, 한스 크리스티안 소위는 전투기 탑승 중 기총소사를 받아 전사, 새뮤얼 비숍 소위도 이륙 직후 공격을 받아 격추되어 다리에 부상을 입었지만 해안까지 헤엄쳐 돌아오는데 성공했다.
2파 대장 시마자키 소좌가 직접 이끄는 수평폭격대 54대는 히컴 비행장 격납고, 일부는 포드 섬과 카네오헤 격납고를 공격하였다. 격추된 일본기는 없었지만 20대가 탄환에 맞어 반복 공격시에는 사용할 수 없을 정도였다.
2파 신도 사부로우 대위의 제공대 35대는 1파의 제공대와 마찬가지로 할일이 없었기 때문에 미군 항공기지에 기관총을 난사 하였다.
1,2파 전투가 모두 끝나고도 비행총대장 후치다의 기체는 계속하여 진주만 상공을 돌고 있었다. 전과 확인 때문이였다. 전과 여부는 불분명 하지만 공격해오는 미군기는 단 1기도 볼 수 없었다. 귀환한 후치다는 일단 전함 4척 격침은 확실하며 나머지 4척도 대파하였다고 보고하였다.
- 당시 상황에 대한 증언 및 묘사들
"진주만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더군요. 그래서 후방사수한테 말했죠. "육군 새끼들은 대체 일요일 아침부터 뭔 짓을 하는 거야?" "ㅡ 2차대전 다큐멘터리 『배틀360』 중에서.
"우린 이렇게 말했지. "해군 새끼들 훈련 한 번 요란하게 한다"고."ㅡ 참전용사 증언
갑판에 있던 난 모든 게 불타는 것을 보고 소령님께 배가 불탄다고 보고했다. 소령님은 배를 버리라고 명령했다. 난 마지막으로 배를 떠났다. 시체가 산처럼 쌓여있고, 온몸이 불이 붙은 병사들이 후갑판으로 달려가 뛰어내렸다. 그 결과 모두 죽거나 크게 다쳤다.-애리조나호의 수병 '얼 나이팅게일'
"기체번호 적어놔! 나중에 군법회의에 회부해야 되니까."ㅡ 영화 도라 도라 도라 중에서.
"야, 이게 뭔 소리냐?""몰라. 오늘 일요일이야…"
ㅡ 영화 진주만 중에서.
"저런 미친놈이! 훈련하다가 폭탄을 어디에 떨구고 X랄이야?"ㅡ 게임 메달 오브 아너: 퍼시픽 어썰트 중에서.
당시 미국 수병들은 일본 전투기가 진입하고 있음에도 상황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다. 이는 영화 도라 도라 도라에서도 묘사되었듯, 상당수 수병들이 일본 항공기의 기습을 하와이 주둔 육군 항공대가 훈련 비행을 하는 거라 생각했기 때문. 폭격이 시작됐을 때도 어떤 수병은 "와!! 훈련 한 번 존내 맛깔나게 하네!!" 라고 감탄하다가 본격적으로 폭탄이 떨어지자 그제야 적의 공격을 인지하고 반격에 나섰다.
포드 섬 항공기지가 제일 먼저 폭탄에 얻어맞았으며 곧 포드 섬 인근에 정박 중인 전함—이것이 일명 전함 열(Battleship's row)—들이 폭탄과 어뢰를 얻어맞았다. 폭탄이야 어쩔 수 없다고 해도 어뢰의 경우 평상시의 군항(軍港)에는 주요 함선 주변에 어뢰 방지용 그물이 설치된 경우가 많은데 이때 진주만의 군함에는 어뢰 그물이 없었다. 어차피 진주만은 수심이 얕아서 어뢰를 쏴도 어뢰가 자세를 잡기 전에 진흙에 처박히기 때문에 안심하고 달지 않았지만 일본은 이걸 알고 어뢰에 목재 부품을 장착하여 어뢰가 중간에 흙에 처박히는 문제를 해결했다. 이때 해군 항공대 참모 램지 중령은 방송실로 뛰어 들어가 총원전투배치(General quarters) 신호와 함께…
"Air raid on Pearl Harbor, This is not drill." |
"진주만 공습, 이건 훈련이 아니다." |
훗날 역사적으로도 유명한 위 내용을 방송으로 내보내며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에게까지 전문이 그대로 전달된다.
제일 먼저 5발의 어뢰[24]를 얻어맞은 BB-37 오클라호마는 20분 만에 전복됐으며 비슷한 시각 BB-48 웨스트 버지니아도 2발의 폭탄과 7발의 어뢰를 맞아[25]필사의 데미지컨트롤로 전복은 면했지만 침수가 심하여 착저(着底) 중이었다. 그나마 BB-38 펜실베니아가 1발의 폭탄 명중, BB-43 테네시,[26] BB-46 메릴랜드는 비교적 가벼운 피해를 입었고, 메릴랜드의 경우 공격당한 미전함들 중에서 가장 먼저 복귀하였다.
BB-36 네바다의 경우 어뢰 한 발을 맞았지만 신속한 조치로 피해확산을 막았으며 필사적으로 응전하면서 어떻게든 진주만을 빠져나가려 하고 있었다. 하지만 상황을 지켜보던 태평양함대 기뢰부대 사령관인 윌리엄 펄롱 소장은 네바다가 탈출하다가 수로상에 있을지도 모를 일본군의 기뢰나 항공기의 공격에 격침될 경우 오히려 진주만으로 드나드는 진입로를 봉쇄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결론을 내리고 좌초를 지시했으며 네바다는 이 지시에 따라 폭탄을 얻어맞으며 자력으로 좌초했다가 바닥이 단단한 곳으로 옮기기 위해 2척의 예인선이 다가가 네바다를 끌어내어 바닥이 단단한 곳에 재좌초 시켰다. 어쨌거나 항구가 봉쇄당하는 상황은 면했다. 실제로 일본군은 항구의 봉쇄를 노리고 진주만을 탈출하려는 네바다에게 급강하폭격기를 집중시켰으므로 당시 펄롱 소장의 판단은 매우 적절했다.
전함 네바다와 예인함 호가 |
더불어 진주만 공습의 상징이 되어버린 BB-39 애리조나도 이 무렵 4발 폭탄을 맞았는데 철갑탄[27]이 하필이면 탄약고에서 폭발해버리는 바람에 유폭으로 아예 배가 두동강이 났고 2번 포탑과 함교 사이 구간이 통째로 날아가면서 내부의 모든 기자재도 완전히 파괴되었다. 그 폭발은 근처에 있던 BB-44 캘리포니아에도 영향을 주어 복구 작업에 방해가 되어 침몰하고 말았다.
애리조나 유폭 순간, 5분 34초부터. AH-5 솔러스에서 촬영.
전함 이외에도 순양함, 구축함, 기타 함선 등 여러 척이 피해를 입었으며 주요 항공기지들도 공습을 당해서 많은 비행기를 잃은 상황이었다. 그나마 상태가 좀 멀쩡했던 몇몇 지상 기지에서 항공기를 날려 보내기는 했지만 미군 전투기들은 수적 열세로 인해 제대로 상대하지 못하고 격추당했으며 이미 정신줄을 놔버린 대공포들이 마구잡이로 쏴대면서 오히려 팀킬도 벌어졌다(…). 게다가 다른 곳은 공격을 받고 있는데 조금 외진 곳에 있는 비행장은 늦게야 상황을 알아차리는 등 이래저래 막장행보가 계속되고 있었다. 그나마 2명의 육군 중위가 조종하는 P-40 전투기 두 대가 일본 해군 폭격기 몇 대를 격추하고 무사히 귀환했다. 이들이 바로 영화 진주만에 나오는 두 주인공이다 기타 육상의 육해군 및 민간 시설, 차량 등도 공격받았고[28] 태평양 함대 사령관 허즈번드 킴멜 제독도 사령부 건물에 날아온 딱 한 발의 기관총탄에 죽을 뻔 했다.[29]
1차 공격대가 철수하고 약 30분 만에 2차 공격대가 진주만 상공에 돌입하였다. 원래 항공모함을 처리하기로 계획되어 있었지만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당시 일본군으로서는 미 항모들이 죄다 어디 갔는지 알 수 없었던 관계로 1차 공격대가 처리하지 못한 잔여 함선과 비행장을 공격하는 것이 임무였다. 이 무렵 미군은 이미 한 차례 공격을 받았으므로 운용 가능한 얼마 안 되는 전투기도 이륙시키고 대공포도 쏴대면서 맹렬히 대응하였고 그 결과 일본군은 예정된 목표물들은 공격하지 못하고 공격 가능한 임의의 목표물을 공격하는 수준에 머물렀다.
여담으로, 당시 서쪽에서 진주만으로 오던 엔터프라이즈는 남쪽을 수색하여 일본 함대를 공격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이는 일본 항공기가 남서쪽에서 접근했기 때문이었지만 정작 일본 해군은 북서쪽에 있었던 관계로 실패. 이런 일이 가능했던 이유는 일본기들의 엄청난 항속(航續)능력 때문이었다. A6M의 경우 7시간의 비행이 가능했을 정도였는데 이 장거리 비행능력을 이용해 일본군은 전투기들이 일부러 빙 둘러 다른 방향에서 접근하는 방법으로 항모의 위치를 숨겼다. 이러한 장거리 비행능력은 전쟁 후기까지 일본기들이 가진 유일한 이점이었지만 대신 저속으로 장시간 비행해야만 하므로 조종사가 피로로 인해 전투력 자체가 떨어지게 하는 문제점이기도 했다.[30]
5 진주만 공격 이후
독일 : 아 망했다 근데 히틀러는 혼자 좋아했다
한편 일본 함대는 기대 이상의 성과를 올린 것에 기뻐하고 있었으며 3차 공격을 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고 있었다. 제2항공전대를 이끌던 야마구치 다몬 소장과 몇몇 참모, 조종사들은 3차 공격의 필요성을 주장하였으나 나구모 제독은 미군들이 정신 차리고 대비를 하고 있으므로 기습의 효과가 줄어들어 오히려 피해가 증가할 것이란 점과 미국 항공모함의 행방을 알 수 없다는 점을 이유로 들어 공격 중지를 결정하였다.
모든 항모가 출항해 있다는 점으로 보건데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이었지만 결과적으로는 대실패가 된다. 나구모로서는 도상 연습에서 일본 함대에도 반수의 피해가 나올 거라는 결과도 있었고 야마모토 이외의 거의 모든 지휘관들이 반대하는 작전을 수행했지만 운이 좋게도 함선의 피해가 없는 이 정도의 전과로도 충분하다고 여겼을 것이다. 상술했듯이 해군 군령부에서 진주만 기습 계획을 계속 반려하자 야마모토는 총사령관직을 사퇴하겠다며 반협박을 한 끝에 겨우 승인을 얻어냈었다. 사실 항공부대 지휘 경험이 전무한 나구모가 기습함대 사령관으로 임명된 것도 그가 수뢰전의 전문가이면서 동시에 해군에서 손꼽히는 조함 전문가라는 이유였다. 요는 작전은 실패한다 해도 배는 어떻게든 살려서 끌고 오라는 생각으로 그를 임명했던 것.
나구모의 이런 결정은 전후에 두고두고 비판의 대상이 되었고 나구모는 현재 일본에서는 전범 혹은 역적과 비슷한 위치다. 당장 일본의 태평양 전쟁 관련 서적에서 나구모를 긍정적으로 묘사하는 경우는 거의 없고 겁쟁이 혹은 새가슴 정도의 인물로 묘사된다. 그러나 당시 월등한 생산력을 가진 미국과 대결하는 일본군의 입장에서는 항모(航母)를 한 대라도 잃으면 큰 타격을 입는 데다가[31] 원래부터가 일본군은 강화를 목표로 전쟁을 시작했기 때문에 결과론적으로는 몰라도 당시의 판단은 나름대로 합리적인 것이었다고 할 것이다. 레이테 해전과 같은 이후의 일본군의 작전을 봐도 이 판단은 나구모의 오판이 아니라 일본군이 가진 단기결전사상에 기반한 것이다.
부하들은 "좋다. 대장이 그만 하고 돌아가자고 하면 따르겠다. 그런데 돌아갈 때는 올 때 처럼 빙 돌아 가지 말고 중앙 항로를 타고 직진하자"고 건의하였다. 항공기 정찰을 통해 돌아가면서 진주만에서 보지 못한 적 항모 2척을 찾아 격멸 하자는 것이였다. 그러나 이것도 기각 하였다. 나구모 장관은 정찰을 경시하였다. 그냥 전력을 보존한채 왔을 때 처럼 빙 돌아서 퇴각하였다.
나구모 제독의 지시에 따라 일본 함대가 신속하게 퇴각하면서 진주만 공습은 종료되었고 이 결정이 알려지자 일본 연합함대 사령부는 발칵 뒤집어졌다. 이참에 태평양 함대를 완전히 궤멸시켜야 된다고 주장하면서 야마모토 제독에게 새로운 명령을 내려야 된다고 진언했지만 야마모토 제독은 현장에서 지휘하고 있는 나구모 제독의 결정이니 그게 최선일 것이란 이유로 묵살해버렸다.
기지로 복귀한 후 진주만 공격대원들은 그야말로 국민적인 영웅이 되었다. 신문에서는 대서 특필하였고 천황은 직접 치하하였다. 그에비해 연합함대 사령부에서는 뜨뜻미지근한 반응을 보였다.
비교를 하자면, 진주만 공격 당일 별도로 출격한 특수 잠수정 10명중, 사망한 9명의 전사자[32]는 2계급 특진 해주고 그들을 9군신(軍神)으로 모시며 기로 하며 장례도 국장으로 치뤘다. 다만 이들이 전과가 0인것이 문제가 되기 때문에 공중 공격대의 최대의 전과였던 아리조나 함 격침을 특수 잠수정의 전과로 돌렸다. 제3국을 통해 들어온 뉴스 사진에 애리조나 격침 사진이 들어왔고 이것을 바탕으로 전 국민이 열광하는 가운데 성대한 국장이 치려졌다. 여기에 결정적으로 연합함대 사령장관 야마모토 이소로쿠는 2월 11일 표창장을 수여하며 이들에게 "무훈발군"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다.
그에 비해 공중공격대 55명에 대한 2계급 특진 소식은 없었다.(일본군은 전사자에 한하여만 특진이 가능하였다.) 최대의 전과인 애리조나 격침을 빼았기는 수모를 당하였다. 잠수정 공격대의 전과는 전혀 없었고, 공중 공격대는 1개 함대 자체를 괴멸시킨 대전과였음을 생각해 봤을 때 도저히 이해가 안가는 차별이였다. 설마 이정도 전과가 이후 전쟁 기간 종종 나올 것이라고 생각한 것인가? 여기에 연합함대 사령장관 야마모토 이소로쿠의 표창장이 한참이나 지난 4월 15일에 나왔고, 그것도 잠수정 공격대 보다 한단계 낮은 "무훈현저"였다.
알고 보니 연합함대 참모였던 미와 요시타케 대좌가 "무훈발군"으로 상신 하였으나, 야마모토는 "나구모 장관이 더 적극적으로 연속 공격을 가했더라면 당연히 '무훈발군'이었는데, 한 번에 끝냈기 때문에 '현저'로 하라"고 한 것이다. 그외에도 참모장 우가키 마토메 중장이 자신의 일지에 "도둑이 작은 성공에 만족하여 달아나는 것 같은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불과 30대를 손상한 수준에서는 전과의 확대는 매우 중요함"이라고 기록하는등 연합함대 사령부에서는 나구모가 한번의 공격으로 끝낸 것에 대해 매우 강한 유감을 갖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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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격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 미 해군 장병들이 불타는 BB-48 USS 웨스트 버지니아 함에 접근하고 있다. |
한편 진주만에서는 일본군이 상륙작전을 펼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미군들이 잔뜩 경계태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현재 활동가능한 군함들을 바다로 내보내서 일본함대에 대한 수색을 반복하였다. 그리고 공습에 대한 노이로제가 생겨서 비행기만 지나가면 피아식별은 일단 뒤로 미뤄두고 대공사격부터 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그 때문에 아군의 대공포에 파손되거나 격추된 전투기도 여럿 있었다.(…)
미국이 조금만 생각했다면 그렇게 철벽같이 요새화된 섬에 일본군이 제정신이면 상륙할 리가 없다는 걸 생각할 수 있었겠지만[33] 애초에 일본군은 제정신이 아니므로 옳은 판단일 수도... 결과는 상륙이 아니라 공습이었다. 당시 기습을 당한 미국의 충격은 정말 어마어마했다.
5.1 무사했던 전함 외 시설물들
일본 해군은 태평양 함대가 한동안 전함 전력을 굴리지 못할 정도로 막대한 피해를 입혔지만 정작 뻔히 보이는 데 있는 태평양 함대의 유류저장시설은 멀쩡했다. 사실 당시 이 시설에는 고작 두 달 치 분량의 연료만 있었기 때문에 큰 의미가 없었을지도 모른다는 의견이 있지만 이건 전시에 미국 태평양 함대 전체 필요 연료량의 두 달 치가 어느 정도 양인지 모를 때나 나오는 이야기가 아닐까? 그리고 설령 아주 적은 양의 연료가 있었더라도 이거 날리면 그 순간 잔존한 태평양 함대 군함들은 연료가 없어서 항구에 주저앉게 된다. 이럴 경우 미국 군함들은 공격은 고사하고 다시 공습이 날아와도 탈출도 못하고 항구에서 그대로 고철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을 것이다. 그리고 당장 필요한 연료도 미국 본토에서 느린 수송선으로 호위도 별로 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위험하게 운송해야 한다. 거기다 유류저장시설이 살아 있으면 나중에라도 연료를 채워서 보급에 충분히 사용할 수 있으니 일본군 입장에서는 완전히 불씨를 꺼뜨리지 않고 남겨뒀던 셈.
이는 일본군이 사용했던 지도가 낡은 것이라서 유류탱크가 표시되지 않았다는 점도 있고[34] 폭격대가 철저하게 미군 전투함만을 목표로 했다는 것도 있다. 실제로 오클라호마 옆에는 항공유를 가득 실은 유조선 네오쇼가 있었지만 기총 사격 한 번 안 당하고 무사했다. 이건 전투함에 우선순위를 두다보니, 순위가 낮은 지원함 등은 무시한 결과다. 참고로 해당 유류저장시설 근처에 지하화된 유류저장시설이 완공 직전이었고 진주만 공습으로 크게 데인 미군에 의해 1주일 이내에 지상에 있는 유류저장시설에 있는 모든 기름이 지하로 이동했다.
게다가 해군 공창과 잠수함 기지(니미츠가 태평양함대 잠수함대 지휘관 시절 본토에서 잉여 물자를 끌어다가 지었다)도 아주 멀쩡했다. 사실 일부 드라이 독에 들어가 있던 배들은 폭격을 받았으나 독 자체는 무사했다. 게다가 잠수함 기지는 처음부터 폭격을 염두에 두고 설계되어서 공격 받아도 별 타격이 없었을 거라고 한다. 이 점도 치명적이었는데 격침된 애리조나와 오클라호마를 제외한 모든 전함들은 인양되어 수리를 마치고 다시 전열에 복귀했기 때문에 사실상 진주만에서 침몰당한 전함은 5척이 아니라 2척이 된다.[35] 격침된 전함인 애리조나는 완전히 아작나서 21세기인 지금까지 바닷속에 가라앉아 있고 오클라호마는 전복되면서 상부 구조물이 완전히 망가져서 인양된 후 해체를 위해 본토로 이송되다가 풍랑에 침몰되었다. 그리고 산호해 해전에서 중파당한 미 항모 요크타운이 신속하게 전열에 복귀할 수 있었던 것도 이 살아남은 드라이 독 덕분. 한편 이때 살아남은 미 해군의 잠수함들은 이후 사방에서 일본군의 보급선을 끊어버렸다. 복수의 칼날을 갈고 있던 요크타운과 잠수함 함대가 미드웨이 해전, 마리아나의 칠면조 사냥 등의 전장에서 일본 해군에 엄청난 손실을 입힌 걸 생각해보면….
그렇지만 미드웨이 해전에서 70기가 넘는 함재기들의 공습에도 불과하고 미드웨이 비행장이 마비되지 않았던 것을 생각해보면 해군 공창 같은 대규모 기반시설을 폭장량이 낮은 함재기들의 1회성 공습으로 파괴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진주만의 대규모 기반시설들을 파괴하려면 적어도 어느 정도 폭장량이 보장되는 중/대형 폭격기들로 지속적인 공습이 가해져야만 효과를 볼 수 있다. 중유 또한 끓는점이 높은 관계로 불이 붙기 어려워서 연쇄적인 유폭을 기대할 수가 없으며 미군의 대공포화와 남아있는 전투기들의 요격을 감안하면 충분한 타격을 주기란 무척 힘들다. 또한 3차 공격을 감행하고 나면 겨울인지라 해가 빨리 지는 관계로 야간 착함을 해야 하는데 필리핀해 해전에서 미군이 등화관제까지 무시하고 모든 수단을 동원했는데도 야간 착함 과정에서 80기가 넘는 함재기 손실이 난 것을 보면 3차 공격을 감행할 경우 일본군의 함재기 손실이 엄청날 것임을 생각해볼 수 있다.
종합해서 정리하면 분명히 전술적, '단기' 전략적으로는 매우 완벽했다. 괜히 완벽한 기습이라는 말이 나오는 게 아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태평양 함대의 전함을 불구로 만든 것은 좋았으나 운이 나쁘게도 항공모함이 거기에 없었는데 당시엔 몰랐으나 나중엔 이게 거대한 실책으로 돌아왔다. 더불어 미국에게 반격의 가능성을 제공함으로써 이는 나중에 미드웨이에서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하였고 항공모함의 가능성을 깨닫게 하는 최악의 상황까지 초래함으로써 '장기' 전략적으로는 대실패라고 말할 수 있다.[36]
6 뒷이야기
6.1 미국의 분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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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만화로 일본군의 멍청함을 디스하는 패기
- 흔히 "격노한 미 정부가 국력의 10%를 태평양 전선에 썼다"고 알려져 있고 일본보다 독일을 떄려잡는데 더 많은 국력을 쏟아부은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소련이라는 막강한 동맹의 존재에도 독일을 때려잡는 데 투입된 물자와 병력, 피해도 훨씬 많았다. 그러나 인터넷에서 떠도는 국력 10%설은 거짓이다. 태평양 방면 미군이 "유럽으로 보내지만 말고 우리한테도 보내주세요, 징징"거리는 근거로 댔던 게 15%의 지원만 받는다는 거였는데 이것도 정확한 산출이 아닌 왜곡이 살짝 들어간 수치였다. 그런데 그것이 이리저리 굴러다니더니 10%로 변질되어서 사실인 양 통용되고 있다. 물론 왜곡이나 진실이나 전력을 다하지 않은 미국에게 일본이 패한건 사실이지만 미 해군의 주력함들은 거의 태평양쪽에서 작전을 수행했고 전쟁 발발 이후 해군은 오히려 대서양 방면의 전력을 태평양으로 차출하기도 했으니[37] 적어도 해군의 경우에는 오히려 태평양이 주 전장이라고 봐야한다. 대서양에는 크릭스마리네가 잠수함을 제외하면 별볼일 없는 상대인데다가 동맹인 영국 해군이 크릭스마리네를 압도하는 전력을 가지고 있었으니.
10초로 요약한 미국의 선전포고.[38]
"Yesterday, December 7, 1941 — a date which will live on in infamy —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was suddenly and deliberately attacked by naval and air forces of the Empire of Japan."(어제, 1941년 12월 7일 — 이 날은 치욕의 날로 기억될 것입니다 — 미합중국은 일본 제국 해군과 공군에 의해 고의적인 기습 공격을 당했습니다.)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이 1941년 12월 8일 대일선전포고성명을 내면서 의회에서 한 연설의 첫 부분. 흔히 '치욕의 날 연설(Day of Infamy Speech)'이라고 부른다. 프랭클린 D. 루스벨트 항목 참조. 참고로 이 부분은 콜 오브 듀티 : 월드 앳 워 인트로 영상에도 나온다.
물론 스킵해서 모르겠지. 흠칫유튜브 자동재생
"Before we're through with them, the Japanese language will be spoken only in hell."(이 전쟁이 끝나면, 일본어는 지옥에서나 쓰는 언어가 될 것이다). [39]
ㅡ진주만 공습 전날에 진주만에 입항할 예정이었다가 열대폭풍으로 하루가 늦어져서 공습이 끝나고 나서 도착한 후 진주만의 참상을 직접 목격한 윌리엄 홀시 제독의 말.[40]
우리는 일본군을 다시는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진주만 공습 직후 니미츠 제독의 말.
공습 전까지는 무의미한 전쟁은 안 된다는 고립주의자들의 주장이 지지를 받았다. 루즈벨트를 중심으로 히틀러가 얼마나 또라이인지 아는 사람들은 추축국과 싸워야 한다는 의견을 폈지만, 대다수의 미국 국민들이 20년전 유럽에서 지옥과 그 지옥불에 딸려온 연옥을 겪어봤기에 고립주의자의 의견에 더 동조하고 있었고, 미국 전통의 외교정책인 먼로 독트린에 따라 "우리한테 직접 피해를 주지 않는 이상 괜히 끼어들 필요없다"라는 주장이 강했다. 그러나 일본이 선전포고 없이 진주만에 선빵을 날리면서 미국 국민들에게 제2차 세계대전은 고립주의자들이 말하던 "무의미한 전쟁"에서 "정의를 수호하는 전쟁"으로 인식이 바뀌었다. 그야말로 잠자던 거인을 '잠에서 깨운' 정도가 아니라 아예 빡돌게 만든 셈.
공습 다음 날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은 의회에서 "치욕의 날 연설"로 일컬어지는 유명한 연설로 일본의 불법 기습을 공식발표했고, 연설 직후'전쟁 참가법'이 상원에서 만장일치, 하원에서 388:1로 가결되며[41]미국은 "나한테 이런건 니가 첨이야" 라며 감동먹고 공식적으로 참전을 선언한다. 그리고 분노한 미국 국민들은 계층을 총망라해서 앞 다투어 입대해서 제2차 세계대전에서 미군의 자진입대율은 90%에 이르렀는데 특히 공수부대나 해병대 같은 일부월급이 빵빵한[42] 전투병과는 지원율이 100%에 육박했다. 심지어 신체검사를 통과하지 못해 입대불가 판정을 받은 청년이 낙담한 나머지 자살한 사건까지 있었다. 자원입대한 사람들 중에는 배우나 운동선수그리고 캡틴 아메리카 같은 유명인사들도 많았는데, 조 디마지오처럼 위문공연을 다녔던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폭격기 승무원이였던 클라크 게이블, 제임스 스튜어트[43]이나 밥 펠러[44]처럼 최전선에서 복무했다. 거기에 상당수는 그냥 상징적인 퍼포먼스였겠지만 금배지 몇 명이 항해국(당시 미 해군의 인사사령부 역할도 맡는 부서였다.)장이던 니미츠 제독을 찾아와 해군에 입대시켜 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니미츠 제독은 정중하게 "바빠 죽겠는데 민폐 끼치지 마시고 해군을 위한다면 입대 대신 의사당으로 돌아가 우리를 위한 예산을 배정해 달라"며 거절했다. 다만 일부 국회의원들은 진짜 참전했는데 대표적인 사람이 훗날 미국 대통령이 되는 린든 B. 존슨(전쟁 이전에 하원의원 재직중에 해군소령으로 복무했는데 진주만 공습이 터졌고 주로 감독관으로 활동했다.)[45] 거기에 쇼미더머니와 물량공세가 더해졌다.
- 유일한 참전 반대표는 공화당의 지넷 P. 랜킨(Jeannette P. Rankin)이 던졌다. 미국 최초의 여성국회의원이자 반전주의자였던 랜킨은 이전임기인 1917년때도 제1차 세계대전 참전에 반대표를 던졌던 4명 중 하나였다. 1940년에도 이전임기처럼 랜킨은 "전쟁에 찬성하는 표를 던질 수는 없습니다"는 말과 함께 반대표를 던졌는데 이때는 국민적인 분노가 1차 세계대전에 비해 훨씬 컸던 상황이라 생명이 위험할 정도라서 신변보호를 받아야 했다고 한다. 당시에는 많은 비난을 받았으나 "민주주의란 만장일치가 있어서는 안 되는 정치제도"라며 맞섰고 한국 전쟁과 베트남 전쟁 시기에도 반전운동을 이끌었다. 결국 이런 의미 있는 반대도 기려져 사후 미국 국회의사당 입구에 랜킨의 동상이 건립되었다.
태평양 함대의 사령관이 체스터 니미츠 대장으로 교체되어 일본 해군과의 일전을 준비하게 되었으며 전함들이 죄다 상실된 까닭에 항공모함을 위주로 작전을 펼쳤다. 하지만 진주만에서 너무 심하게 털려버려 쓸 수 있는 전력이 빈약한데다 항공모함조차 상실하게 될까 봐 휘하 제독들의 반대가 극심해서 니미츠 제독은 이들을 무마하고 작전을 입안하느라 고생을 많이 했으며, 일본군의 대응도 거의 없어서 전과다운 전과는 거의 거두지 못했고 일본의 남방작전에 아무런 영향력을 미치지 못했다. 그 영향으로 미드웨이 해전까지 태평양 함대는 아무 짓도 못했다고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사실 없지는 않았다. 일본의 호주 침공 가능성을 없앤 산호해 해전이 당시 미 해군의 대표적인 활약이다. 하여간 이때의 충격이 무척 강렬했던 탓인지 지금도 미 해군은 항공모함 중심 편제와 함께 강력한 대공망을 강조하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진주만 공습 이후 미 해군은 항공모함의 가능성에 눈을 뜨게 되었지만 정작 항공모함으로 진주만이라는 대성과를 거두었던 일본군은 점점 항공모함의 활용도가 줄어들기 시작한다. 미드웨이 해전과 과달카날 전투로 대변되는 솔로몬 전역에서의 소모전을 거치면서 항모와 함재기들과 숙련병들이 다 수장되는 바람에….
진주만 공습으로 인한 미국의 분노는 부정적인 모습으로도 나타난다. 일본계 미국인을 죄다 수용소로 끌고 가버린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항목 참고
여담으로 이승만이 1939년 11월에 집필을 시작하여 1941년 여름에 내놓은 《일본 내막기(Japan inside out - the challenge of today)》라는 책을 통해 '조만간 일본이 미국에 도전하여 미국과 전쟁을 벌일 것'이라는 주장을 했다. 출판 직후에는 무시당했지만(《대지》의 작가 펄 벅 등 아시아에서 오래 거주한 경험이 있는 극소수의 사람들이 극찬한 것 이외에는 대부분 '우리 일본 쨔응이 그럴 리 없다능' 식의 반응이었다.), 진주만 공격 이후 이 책은 예언서이자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이승만이 미국에서 인지도를 쌓는 데 매우 큰 역할을 했다.
6.1.1 음모론
그 외에도 진주만 공습 당시 항공모함들이 모두 자리를 비우고 있었기에 이것은 루즈벨트가 일본군의 진주만 공습 작전을 미리 알고 있었으며 2차대전 참전 명분을 얻기 위해 진주만을 방치했다는 식의 음모론이 생겨났다. 이 음모론은 루즈벨트의 4선 저지를 위해 공화당의 토머스 듀이 후보 진영에서 주장한 것이었는데 정작 이 주장을 들은 미국민들의 반응은 이뭐병.[46] 당연히 선거도 관광당했고 다음 선거에서도 민주당 해리 S. 트루먼에게 또 발렸다. 훗날 데즈카 오사무의 아돌프에게 고한다에서도 정설로 등장해서 엄청나게 까였다.
우선 중요한 항공모함들을 미리 빼두었다는 주장은 앞뒤가 바뀐 주장으로 항공모함이 주력이 된 이유는 진주만에서 전함들이 다 털려서였다. 그 당시 미군의 태평양 함대 소속 항공모함들은 전부 다른 곳에서 정비나 임무 중이라 흩어져 있었으며 진주만에 들어올 예정이던 항공모함 한 척은 예정대로라면 공습 전날에 들어왔어야 했으나, 도중에 폭풍을 만나서 우회하느라 공습 당일에도 못 들어왔다.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 항공모함은 해상작전의 보조격으로만 활동했고 해군력의 주력은 진주만에서 가라앉아 버린 전함들이었다. '즉 항모가 중요하니까 빼놓은 게 아니라, 비행기 수송이나, 수리를 이유로 당시 진주만에 항모가 없었고, 박살난 태평양 함대가 굴릴 수 있는 게 항모뿐이라 항모만 굴렸는데 의외로 항모가 무지막지하게 뛰어난 전력이었던 것. 천대받던 항모들이 항공기의 발전으로 성능이 올라갔고 실전을 치르며 자신의 가치를 증명한 것이다. 여담으로 일본 역시 야마토와 무사시 같은 대형 전함들을 아끼기 위해 꽁꽁 숨겨두고 항모를 들이밀었는데 훗날 미군은 일본 해군의 항모전력을 모조리 털어먹고 강제로 전함 위주 교리에 태워준다.
다른 걸 제쳐두고라도 명분이 필요했다면 진주만 털리는 것보단 차라리 태평양에서 대기하다 일본 함대 수장시키고 안전하게 일본 밟으러 가는 게 더 상식적이라서 일고의 가치도 없다. 실제로 미군은 통킹만에서 미군 구축함이 공격받아 경미한 피해를 입은것을 과장해서 베트남전에 참전할 명분으로 삼았다. 그리고 진주만 공습으로 태평양 함대가 박살나서 6개월간 패전을 거듭 필리핀 등지에 지어놓았던 요새, 장비, 병력을 신나게 날려먹고 엄청나게 후퇴하게 된다. 이후 미드웨이 해전으로 겨우 공세를 저지시키고 쇼미더머니 신공으로 일본군에게 반격을 시작하기까지 1년은 걸렸는데 루즈벨트가 아무리 명분이 필요했어도 이런 도박을 했을 이유는 없다.
거기다 만약이지만 미함대가 일본군을 발견하고 반격했어도 전함들은 저속이고[47] 운용가능한 항모는 엔터프라이즈 뿐이어서 합계 190대 가까이되는 공습부대 항공기 등에 제대로된 피해는 주기 힘들었을 거다.
6.2 일본의 설레발
진주만 공습으로 태평양 함대의 견제가 사라진 일본은 남방작전으로 동남아시아의 미국과 영국의 식민지를 점령한다. 이후 미국에게 귓싸대기를 맛깔나게 후려갈겨 충격을 선사했다고 본 일본은 향후 전략에 대해서 논쟁을 하기 시작했다. 진주만 공습 직후부터 일본 외무성에서는 미국과의 평화협상에 대한 준비작업을 시작했고, 이에 대본영, 육군, 해군, 이소로쿠 제독 모두 일본이 먼저 평화협상을 제안하는 것에는 반대하면서 미국이 평화협상을 먼저 제안해오면 받아줘야 한다는 김칫국을 아주 사발로 들이마셨다. 하지만 위에서 본대로 미국은 역사상 전례가 없던 분노를 보여주면서 협상 테이블 대신 일본의 관짝을 짜기 시작했고(...), 이에 일본은 더 큰 충격을 줘서 미국을 협상장에 끌고 와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고 그 방법을 두고 논쟁을 벌인다.만약 그랬으면...
우선 일본육군은 자기들이 점령한 동남아에서 버티면 미국은 협상하러 나온다였고[48] 해군은 호주 점령을, 이소로쿠 제독은 하와이를 점령하여 미국을 큰 충격에 빠뜨린 다음 협상 테이블로 끌어내자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호주는 처음부터 점령을 위한 병력 및 물자가 모자랐고 하와이는 보급선 유지가 안된다는 문제가 있었다. 결국 육군, 해군, 이소로쿠 제독이 각각 자기들의 주장을 내세우며 옥신각신하고 있는 와중에 미 항공모함은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면서 공습을 하고 있었고[49] 이 모습을 본 이소로쿠 제독은 미 항공모함이 가장 큰 적이라 결론을 내리고 미 항모를 유인하여 섬멸하기 위해 미드웨이를 공격하나...
6.3 추축국(樞軸國)의 대미 선전포고
일본과 동맹관계이던 독일과 이탈리아는 4일 후에 미국에 선전포고를 하였고 이 사태는 추축국 최대이자 최후의 병크로 역사에 길이 남았다. 이 선전포고가 없었다고 해도 미국은 참전했을 가능성이 크지만 적어도 수개월은 지연되었을 것이라는 게 역사학계의 중론이다. 사실 루즈벨트는 처칠에게 이미 참전하기로, 그리고 태평양보다 유럽 전선을 우선시하기로 밀약을 한 상태였다. 그런데 진주만 공습이 있는 상황에서 독일과 이탈리아의 선전포고가 없었다면, 미국이 일본보다 독일과의 전쟁을 우선시하는 것은 미국 국민들을 납득시키기 어려웠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반대로 이른 선전포고가 오히려 미국의 대(對)일전 수행노력을 방해하고 대(對)독전 수행에서도 제한적인 혼선을 빚었다는 견해 역시 있다.
어찌되었건 진주만 공습이 터지고, 아돌프 히틀러는 환호작약하며 선전포고를 했다.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는 일본이 직접 공격을 받을 경우에만 독일이 나서서 일본을 도울 의무가 있다는 점을 강조했지만 히틀러는 곧바로 카이텔과 요들에게 달려가서 환호하면서 이렇게 소리쳤다. 신난당♪
"이제 우리는 질 리가 없다. 이제 우리에겐'" 3,000년 동안 한 번도 패한 적 없는동맹국[50] 이 생겼다."[51]ㅡ 존 키건 《2차세계대전사》360P
독일은 이 선전포고로 일본이 소련을 공격해주길 바랐지만, 일본은 소련이 1945년 8월에 공격해 올 때까지 계속 평화를 유지했다. 웃긴 건 독일은 중일전쟁 당시 중국에 무기를 팔아 일본군을 골탕 먹였다는 것. 아예 장제스 휘하 부대는 중일전쟁 전부터 독일식으로 무장하고 있었고 군사고문관으로 한스 폰 젝트 장군까지 파견된 판이었다. 팀킬 돋네.[52] 물론 동맹을 맺고 일본의 요청에 따라 위의 조치는 동맹을 맺은 1936년을 전후하여 거의 시정되었으니 동맹을 의도적으로 엿먹인건 아니기는 하다.
일반적으로 군사 동맹은 동맹국이 3자로부터 공격받았을 경우 원조의 의무가 부여되지만 동맹국이 3자를 공격했을 때 원조의 의무를 부여하지는 않는다. 독일이나 일본이나 각자 선제공격했기 때문이지 주축의 동맹이 연합에 비해 특별히 약했던 것은 아니다. 게다가 소련의 경우에는 폴란드 분할 때까지만 해도 사실상 독일의 우호국이었으니…. 즉 '동맹의 수준'이 문제가 아니라, 군사와 외교가 따로 놀았다는 것이 문제. 거기다 6호 전차 티거 항목을 봐도 알겠지만, 유럽에 있던 독일, 이탈리아와 완전히 반대편인 아시아에 있던 일본 사이에는 소련이라는 장애물이 있어 어떻게 상호 지원을 할 방법이 없었다(...) 그렇다고 바다로 가자니 보급 문제도 문제인 데다가 자칫 잘못하면 연합군의 해상 세력에 완전히 궤멸될 판이었다.[53] 그리고 일본은 이전에 소련과 불가침조약을 맺은 상태였다. 일본은 독일과 달리 불가침조약을 맺은 상태에서 처들어가는 짓 따위는 하지 않았다. 물론 이건 일본이 착해서는 당연히 아니고 소련군한테 크게 데인 적도 있었고 이미 중국, 미국과 싸우는 상황에서 더 이상 전선을 늘릴 상황도 아니었던것이 크다. 그래도 양국은 동맹국이랍시고 어떻게든 기술지원을 해 주었지만[54] 양쪽 다 이를 제대로 활용하지는 못했다.
6.4 관련인물들의 후일담
한편 눈 뜨고 당한 허즈밴드 킴멜 대장은 별 두 개 떼고 소장으로,[55] 월터 쇼트 육군 중장도 별 하나 떼고 둘 다 불명예 전역당했다. 그래도 소련 같았으면 형벌 부대감인데 이후 이들은 자신들을 변호했는데 본인들 뿐만 아니라 그들 사후에 유족들도 명예를 회복해달라며 계속 대통령에게 청원을 냈다. 이들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차라리 그들이 군사재판에 회부되었으면 무죄가 되어 명예를 회복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 둘은 회고록을 펴내서 자신들을 스스로 변호했고 이들이 희생양에 불과하다는 르포작가들의 책도 자주 나왔다. 그래서 1999년 미국 상원은 이를 받아들여 투표에 부쳤는데 찬성 52 반대 47이라는 아슬아슬한 결과가 나와 이들의 계급을 회복시켜주도록 대통령에 권고했으나 당시 대통령인 빌 클린턴은 물론 후임 대통령인 조지 워커 부시도 이를 간단히 씹어주었다. 그래서 이들은 아직 예비역 소장 신분으로 제대한 것으로 되어 있다.
나구모 사령관은 진주만 공격과 연이은 남방작전에 항모부대를 지휘한 공을 세웠지만, 야마모토와 달리 일본 군부 내에서의 영향력은 전혀 늘어나지 않았다. 그러다 6개월여 뒤 미드웨이 해전의 패배라는 최악의 결과를 거두면서 나구모는 항모부대 지휘관 자리에서 물러나게 된다. 이후 다시 복귀하여 과달카날 전역에 참가했지만 산타크루즈 해전에서 상처뿐인 승리[56]를 거둔 끝에 결국 항모 기동부대 지휘관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었고, 이후 수상함대 사령관직을 이어가다가 사이판 전투에서 자살한다.
- 이 이면에는 연합함대 사령관 야마모토 이소로쿠와의 불편한 관계가 있었다. 애초부터 나구모는 전함을 중시하는 함대파의 핵심 인물중 하나였던 터라 조약파의 핵심 인물이었던 야마모토와는 이전부터 대립하던 사이였다. 항모기동부대 지휘관의 자리는 어디까지나 연공서열 때문에 앉게 된 것이어서[57] 나구모 스스로도 이 자리를 불편해 했고, 그를 그 자리에 임명한 야마모토 역시 이런 상황을 그리 내켜하지 않았지만 연공서열이 지배하는 당시 일본 해군내에서는 어쩔수 없는 선택이었다. 이러한 불편한 관계는 진주만 공습을 전후로 더욱 심해졌다. 진주만 공습을 강하게 반대했던 주역 중 한 명이 바로 나구모였으며, 이후 진주만에서 3차 공격을 포기하고 돌아온 나구모에 대한 야마모토의 시선은 더욱 차가워져 버렸다. 야마모토는 나구모를 바로 해임해버리고 싶었지만 승리한 장수를 그런 식으로 대했다가는 커다란 후폭풍이 닥칠게 뻔했고, 이후 남방작전의 공이 더해지자 나구모를 끌어내릴 명분은 아예 사라져 버렸다. 이러한 속사정 때문에 연합함대 내에서 나구모의 발언권은 사실상 없는 셈이었으며, 남방작전 이후의 전략적 행보에 대해 육군에서 주장하는 수세적인 전략을 지지했다가 연합함대 내에서 완전히 무시당하고 말았다. 그나마 나구모가 항공전 분야에 무지했던게 역으로 야마모토의 명령에 달리 반박하지 못하고 고분고분 따르는 모습으로 이어지자 야마모토도 이 상황이 그리 나쁘지는 않다는 선에서 만족하던 터였지만...
항공참모 겐다 미노루 중좌와 진주만 공격을 공중에서 실질적으로 총지휘한 후치다 미쓰오 중좌[58]는 모두 전후까지 살아남았다.[59] 이들은 미드웨이 해전에도 참가했다가 아카기가 격침될 때도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다. 겐다는 항공자위대의 막료장(참모총장)까지 지냈고 후에 자유민주당 소속 의원이 되기도 했다. 그러다가 록히드 스캔들로 수뢰혐의로 욕을 바가지로 먹기도 했다.
후치다는 미드웨이 해전에서 중상을 입었고 이후 종전 때까지 지상근무를 하게 되었다. 당시 일본 군부는 미드웨이 해전에서 일본이 패한 사실을 숨기기 위해 허위 보도를 하는 한편 귀환한 부상병들에게 연금생활을 강요했으며 이에 후치다는 전쟁에 회의를 품게 되었다고 한다. 패전 후 진주한 미군 조종사에 의해 기독교를 접하고, 선교사로 변신해서 간증하러 70년대 한국도 방문하여 일본의 식민 지배를 사죄하는 연설을 하였다. 한편으로는 미드웨이 해전에 대한 회고록을 펴내면서 태평양 해전사 연구에 오랫동안 영향을 끼치기도 하였다. 또한 <진주만 공격 총대장의 회심>이라는 회고록을 내어 진주만 공습의 준비와 전투 과정을 잘 증언해 놓았다.[60]
한편 이 계획을 실질적으로 입안한 연합함대 참모장 쿠로지마 카메오 대좌는 소장으로 전쟁을 마쳤고 전후 기업가로 변신했다.
지금도 정신 나간 극우꼴통이나 역사의식이 부족한 일본인들은 이 공습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지금도 2ch 등에선 혐한초딩들이 "우린 전함과 전투기를 가지고 세계최대 규모의 전쟁을 치른 자랑스러운 역사가 있다!"라고 자위하는 꼴을 자주 볼 수 있다. 세계 최대 규모의 대패를 당한 것은 기억하지 못하는구먼[61]
6.5 소련
흥미로운 점으로는 진주만 공습의 정확한 일자가 소련으로 새어나갔다는 사실이 있다. 소련의 전설적 스파이 리하르트 조르게가 진주만 공습의 정확한 일자를 알아내 소련에 보냈기 때문. 조르게는 독일침공도 미리 알고 보고했었던 성과가 있으니 보고 자체는 믿었겠지만 이오시프 스탈린이 진주만 공습과 미국참전의 시작에 대해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는 불명이다. 당시 미국이 유럽전쟁에 대해 중립적인 입장이었고 소련은 독일군이 모스크바 바로 앞까지 진격하는 등, 제 코가 석자라서 신경 쓸 겨를이 없었을 것이다. 혹은 연합군의 영원한 물주의 참전소식을 듣고 환희의 비명을 질렀거나… 혹은 독일의 동맹국인 일본이 블라디보스토크를 공격해서 자신들의 랜드리스 보급선을 막는 것을 우려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조르게가 빼낸 일본군 남방작전은 소련에 큰 도움이 됐다. 조르게는 "모스크바가 함락되지 않는 한은 일본은 중립을 지킬 것"이라고 타전했다. 소련은 그 정보를 접하고 시베리아에서 일본군과 대치하고 있던 정예사단중 일부를 열차로 실어 와서 모스크바 공방전에 투입하였고 이들은 독일군을 저지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7 관련 어록
"임시뉴스를 알려드립니다. 임시뉴스를 알려드립니다. 대본영육해군부 12월 8일 오전 6시 발표. 제국육해군은 본 8일 미명[62]에 서태평양에서 아메리카, 이기리스[63]군과 전투상태에 들어감. x2
임시뉴스를 알려드립니다. 임시뉴스를 알려드립니다. 제국 해군은 하와이 방면의 미 함대 및 항공병력에 대하여 결사의 대공습을 감행한 한편, 싱가폴도 대폭격하였습니다.
대본영해군부 금일 오후 1시 발표・하나. 제국 해군은 금일 8일 미명, 하와이 방면의 미 함대 및 항공병력에 대하여 결사의 대공습을 감행함. 둘, 제국 해군은 금일 8일 미명, 상하이에서 영국 포함(砲艦) '페트렐'호를 격침하였으며, 미국 포함 '웨이크'호는 동시각 우리에게 항복함. 셋, 제국 해군은 금일 8일 미명 싱가포르를 폭격하여 큰 전과(戰果)를 거둠. 넷, 제국 해군은 금일 8일 이른 아침 '다바오', '웨이크', '괌'에 있는 적 군사시설을 폭격함"그리고 4년 후 같은 방송국에서는…-태평양 전쟁을 알리는 NHK라디오 방송.
우리는 진주만을 향해 진격했고, 나는 암호를 크게 외쳤다. 도라, 도라, 도라
우리 황국의 운명은 이 일전에 달려있다.- 나구모 주이치
"어쩌면 우린 잠자고 있던 거인을 깨운 것인지도 모른다."ㅡ 진주만 공습의 성공을 보고받은 후 야마모토 이소로쿠 제독이 한 독백.
"이제 우리 연합군이 이겼다"- 진주만 공습을 듣고 난 처칠의 반응[64]
"그래 난 이리 될 줄 알았어!"- 진주만 공습을 부관으로부터 보고 받은 어니스트 킹 제독의 반응
- ↑ 웨스트버지니아와 캘리포니아는 인양 후 수리하여 복귀, 애리조나는 폭침으로 손실 오클라호마는 인양 했으나 복귀 포기하고 스크랩을 위해 이동중 태풍에 손실
- ↑ 사카마키 카즈오(酒巻和男)라는 인물로, 태평양 전쟁 중 최초의 일본군 포로라는 타이틀(?)을 지닌다.
- ↑ 아닌 게 아니라 시작부터 The raid was a total disaster for the empire... of the Japan.이라고 말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후반부 구성이 '왜 일본이 진주만에서 전략적으로 패배했는가'를 중심으로 원인을 파악한다. 사상 최악의 참사에서 보기 드물게 피해자가 피해를 덜 본 이유를 찾는 구성. 밑에도 서술된 내용을 지적하고 있는데 1. 제1목표인 항모를 파괴 못했고 작전직전 이를 알고도 나구모가 무시하고 진행했다는 점. 2. 연기 때문에 시야가 가린다며 유류 시설을 파괴하지 않아 미군이 향후 보급에 곤란하지 않았던 점. 3. 암호가 개판인 점(...)+선전포고문이 엉망으로 전달된 점. 4. 수리시설이 멀쩡해서 실질적으로 격침된 함선이 소수였다는 점. 5. 잠수함을 목표로 삼지 않아 이들이 열심히 일본의 보급선을 끊어먹은 점 등. 일본측 관계자가 당시 일본군의 갖은 삽질에 대해 언급하면서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비웃음이 끊이지 않는 것이 백미.
- ↑ 정확히는 남방작전을 포함하여 여기에 이르기까지의 각종 국제정치적 고려 결여가 실책에 해당한다. 물론 이 공습이 없었더라도 미국이 결국은 참전했을 것이나, 일말의 협상의 여지가 남아있었을 것이다. 사실 작전을 입안한 야마모토 이소로쿠 또한 진주만 공습이 정치적으로 무슨 의미가 있는지는 뼈저리게 알고 있었으며, 그 밖에 여러 측면에서 연합군에 대한 적대 행위 중에서는 의외로 가장 일본군이 공을 들인 축에 속한다. 사실 전술적으로는 성공한 작전이었고 전쟁을 피할 수 없었으니 전략적으로도 먹혀들어갈 작전이었다. 그러나 더 큰 국제정치의 레벨로 보면 전술.전략적으로 이득을 봐도 결코 이길 수 없는 전쟁이라...
- ↑ 일본 역시 일단은 항공모함을 해전에서 이전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쓰게 되었고, 미국이 항공모함 중심으로 함대 편제를 짜게 된 데는 이 때 전함들이 대부분 박살난 게 크다.
- ↑ 대공황 때문에 10년 넘도록 침체된 미국경제가 전시체제로 돌아가면서 뉴딜정책으로도 해결하지 못한 생산과 소비의 불균형을 일거에 날려버렸다.쉽게 말하자면 심하게 체한 미국을 일본이 등을 쾅 때리면서 고통과 동시에 소화불량이 단숨에 해결된거다.
- ↑ 다만 시간상으로 볼 때 태평양 전쟁의 시작은 일본군 육군의 말레이 반도 코타발루 상륙이 맞다. 여기서 영국군과 교전한 게 진주만보다 약 2시간 일찍 일어났으며 따라서 일본은 선전포고를 하려면 미국이 아닌 영국, 네덜란드 등에 게도 했어야 했다. 개중에는 '그 늦게 보낸 선전포고조차도 영국이 아닌 미국에 보냈다'라며 진주만을 개전 타이밍으로 잡는 것에 대해 '일본의 선전포고 없는 선제공격에 대한 책임회피 언플'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는 모양. 어쨌건 일본에서는 동시다발적인 침공을 계획했고 그 중에 가장 임팩트가 큰 전투가 진주만이어서 대부분 진주만을 태평양 전쟁의 개전으로 보고 있다.
- ↑ 군대의 전방에서 후방까지의 거리.
- ↑ 어디까지나 추축국이 패배하지는 않았어야 하지만
- ↑ 유류창고는 시야 방해를 이유로 파괴하지 않는 뻘짓이 있었지만, 항공모함의 경우는 의도한 것은 아니었고 오히려 진주만 공습의 최우선 목표물 중 하나에 그들이 있었다. 그저 작전 당일까지도 그 위치를 파악하지 못했고 마침 당일에 모두 진주만에 없었을 뿐.
- ↑ '모리무라 타다시'라는 가명을 사용하였으며, 관광객으로 위장하여 진주만 일대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여 일본으로 보내 공습이 성공하는 데 일조하였다. 행정명령 9066호에 의해 수용소로 끌려간 이후에도 정체를 들키지 않고 종전 후 일본으로 무사히 귀국하였다. 더 자세한 정보는 링크 참조.
- ↑ 참고로 제2차 세계대전 시기에 활동한 군함들의 연료는 중유를 많이 사용했다. 이는 당시 군함의 주기관이던 증기터빈에 증기를 공급하는 보일러가 중유 사용을 전제로 설계된 데서 연유한다. 무엇보다도 중유는 경유에 비해서 불순물이 상대적으로 많아서 가격도 저렴했기에 디젤기관에 비해서 많은 연료를 소모하는 증기터빈기관에 안성맞춤이었다. 덤으로 보일러와 경유는 상성이 상대적으로 좋지 않아서 2차대전 후 세계 각국의 해군이 중유 대신 경유를 연료로 사용할 때 보일러 사고가 빈발하여 상당히 골치를 앓았다. 당시 해군에서 경유는 디젤-전기추진을 채용한 잠수함에서나 사용했다.
- ↑ 12월 초 하와이의 일출 시간은 현지 시간으로 오전 6시 30분. 도쿄시간 오전 2시
- ↑ 도쿄 대공습에 대해서도 피해자 행세를 함부로 할 수 없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 ↑ 전달 시간이 중요한 문서를 원문으로 던져줬다는 사실에서 일제 관료주의의 경직성을 확인할 수 있다.
- ↑ 구어체 표현으로, 중대한 외교 문서임을 감안하면 엄청난 결례이다. 선전포고문 전체에서도 "United States of America"라는 정식 국명 대신 "United States"와 "American Government"와 같은 비형식인 명칭만이 적혀있다. 대사관에 남아있던 직원 혼자서 낑낑대며 번역한 것이라 후반으로 갈수록 문장 구조와 표현이 점점 붕괴되는 것을 볼 수 있다.
- ↑ Declare, War, State of War 등.
- ↑ 더 거슬러 올라가보면 임진왜란도 그렇다..
- ↑ 자국에서는 미국과 영국에 대한 선전 포고를 발표했지만 선전 포고문을 영국측에 전달하지 않았다.
- ↑ 동맹국 잠수함이라도 훈련 등의 이유로 사전 합의를 거치지 않았다면 영해에 들어온 순간부터 부상하여 수상 항해를 해야 한다.
- ↑ 기괴하기 짝이 없는 원인을 가진 기습이 전략적으로든 전술적으로든 완벽한 기습이 되었으니 참 아이러니한 일이다. 그런대 "기습"으로서만 완벽했을 뿐 정작 중요한 목표물을 박살내는 데에는 실패했다는 게 또 함정…. 물론 당시 일본군 입장에서의 중요 목표물은 다 격파했다. 뭐가 우선 파괴대상이 무엇이 되어야할지 모른 일본군이 문제일 뿐.
- ↑ 그런데 강하폭격대가 이걸 신호탄 연속 2발로 착각하였다. 신호탄 연속 2발은 공격 개시였다. 뇌격대가 먼저 공격을 개시해야 하지만 이 착각으로 뇌격대와 강하폭격대는 동시에 공격에 들어갔다.
- ↑ 49분에 있었던 공격 개시 신호인 '도 도 도'랑 헷갈려 표기하는 경우도 있는데 일본 모스 전신부호상 장음은 "쓰", 단음은 "도"였다. '도라 도라 도라'와는 전혀 관계 없다.
- ↑ http://www.navsource.org/archives/01/37a.htm The Honorable Brad Henry, Governor of Oklahoma, delivers his remarks during a joint Oklahoma Memorial Committee/National Park Service dedication ceremony for battleship Oklahoma (BB-37) on historic Ford Island. The memorial honors the 429 Sailors and Marines aboard who lost their lives after being hit by five torpedoes and capsizing at Pearl Harbor on 7 December 1941.
- ↑ http://www.navsource.org/archives/01/48a.htm West Virginia (BB-48) shown here on 17 June 1942 being made seaworthy for the trip to the mainland for permanent repairs. The extent of the damage to the port side above the armor belt is evident in these two photos. The shallow depth running of the torpedoes and the initial list of the ship concentrated most of the damage above the side protective armor belt of the ship. A total of seven torpedoes and two bombs (modified 16"armor piercing naval shells fitted with fins) struck the ship during the Japanese attack.
- ↑ 테네시는 피해가 적었음에도 대개장을 받아 1943년 5월에 복귀했다.
- ↑ 일반적인 급강하에 쓰이는 철갑폭탄으로는 관통이 불가능하여 나가토에 사용된 철갑탄을 개조하여 급강하가 아닌 수평폭격으로 관통시켰다.
- ↑ 사상자 명단에는 민간인도 대거 포함되어 있다.
- ↑ 7.7mm 총탄 한 발이 유리창을 뚫고 들어왔는데 그게 킴멜 제독의 가슴을 툭 치고는 바닥에 떨어졌다. 말 그대로 툭 하는, 지나가던 사람과 살짝 부딪힌 정도의 충격이었다고 한다. 이후 후임 사령관인 니미츠와 대화하다가 이때를 회상하면서 "차라리 그 때 총탄 맞고 죽는 게 나았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함대 사령관으로서 일본군의 기습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금쪽같은 전력을 날려먹은 책임감에서 나온 말로 추정된다.
- ↑ 일본군의 대표적인 에이스인 사카이 사부로조차 이런 장기간 비행으로 인한 피로 때문에 적 전투기의 종류를 잘못 파악하여 죽을 뻔한 적도 있을 정도다.
- ↑ 고대이건 현대이건 보급은 전쟁의 승패를 좌우한다. 미국의 생산능력은 당시에도 넘사벽이었다. 무기 자체의 기술력만 놓고 보면 당시 세계 최고였다는 독일의 패전 원인들 중 하나가 미국의 압도적인 생산능력에 기반한 물량공세라고 하는 의견도 있는 판이니.
- ↑ 이때 공격대의 사카마키 가즈오 소위가 포로로 잡혔다. 그러나 포로는 일본군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니 없는 셈 치고, 공격대 정장 5명이 서명한 서장에서 서명을 지우고, 출격전 10명의 단체 사진에서도 삭제해 버렸다.
- ↑ 모바일 턴제 시뮬레이션 게임인 장군의 영광:태평양 전쟁에서는 게임 승리 조건 상 진짜로 상륙까지 해야 하는데, 실제로 해 보면 2번째 미션 치고는 굉장히 빡세다.
그런데 애초에 저 겜에선 역사와 달리 미국이 방심을 안 하잖아 안될거야 아마 - ↑ 일본 정보부가 파악은 했는데 일선 함대에게는 이야기를 안 해줬다고…
- ↑ 미국과 영국 해군 항공대가 공동으로 구레를 두들겨서 일본의 잔존 군함들 거의 대부분을 갈아버린 1945년의 구레 군항 공습을 갖고 정신승리하는 것도 이것과 대조해보면 그냥 정신승리 이상도 이하도 아니게 된다.
- ↑ 같은 섬나라임에도 전투에선 자주 패배하지만 전쟁에선 이긴다는 영국과 비교되는 일본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긴 하다.
- ↑ 이 때문에 처칠이 킹이 영국을 말아먹는다고 킹을 비난하기도 했다고 한다.
- ↑ 어덜트 스윔의 로봇 치킨 중 미니 에피소드인 <li'l hitler>.
- ↑ Before we're through with them라는 문구는 '이 전쟁이 끝나면'이라고 알려져 있는 문구지만 앞부분의 시제 표현을 감안하면 이 전쟁이 끝나기도 전에라고 번역하는 것이 맞다.
- ↑ J. Bryan (1947). Admiral Halsey's Story. Whittlesey House. pp. 75–76. ISBN 978-1-4325-6693-7.
- ↑ 후술하겠지만 모든 의원이 전쟁에 동의하는 이 와중에 혼자 반대를 누른 이 의원은 1939년 제2차세계대전이 일어난 이래 내내 전쟁을 반대해온 여성의원.
- ↑ 한달 월급이 100달러가 넘었고 수당까지 합치면 한달에 300달러는 벌 수 있었다. 당시 미국 평균 월급이 100~150달러 수준인걸 생각해보면 상당한 봉급
- ↑ 폭격기 승무원으로 전후 준장까지 진급했다.
- ↑ 해군 대공포 사수
- ↑ 물론 그렇다고 병역비리를 안 저지른 인간이 없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자진 입대율이 엄청나게 높다는 걸 이용해 군대를 빠진 놈들도 있다. 그 때문에 전후에 엄청나게 거센 비난을 받아야 했다.
- ↑ 위의 선전포고문에 대한 설명에서 언급되지만 선전포고문을 먼저 입수하고 먼저 해독하는 데 성공한 미군도 문서 내용이 워낙 애매모호해서 별다른 대응책을 수립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 ↑ 일본군은 급유함과 잠수함 말고는 28노트의 카가가 가장 느린함이었다 미국 전함은 거의 21노트 정도
- ↑ 정확하게는 육군은 더 이상 태평양 전선에서 작전을 확대하는 것이 싫었고 중일전쟁을 마무리 짓고 싶어서 이런 주장을 했다. 태평양 전선은 바다를 끼고 작전을 하기 때문에 해군이 주연이고 육군은 조연 취급을 받는 반면 중일전쟁을 승리한다면 온전히 육군의 공적으로 남을 수 있기 때문.
- ↑ 대표적인 게 항공모함에서 육상 폭격기를 발진시킨다는 기상천외한 발상으로 백주대낮에 도쿄를 공습한 둘리틀 특공대가 있다..
- ↑ 역사상으로 보면, 그 무서운 몽골 제국도 어쩌지 못한 일본이었고, 러일전쟁도 뒤가 어찌되었든 일단 이겼으니 당시로서는 얼씨구나, 불패국 일본이구나 하고 판단해도 당장 크게 이상할 건 없었다. 그런데 알다시피 여몽연합군의 일본원정은 거의 운빨로 이긴 것에다가 임진왜란 역시 엄밀하게 따지면 일본의 패전이다.
- ↑ 처칠은 동일한 소식을 듣고서도 상반된 결론에 도달해서, "3천년동안 한번도 진 적이 없다고? (징크스란게 원래 깨지라고 있는거니)그렇다면 이번엔 우리가 이길 때가 한번 되었군"
원래 스포츠에서도 연승하다보면 언젠간 깨지고 그게 연패로 이어질 수도 있다이라고 말했다. 사실 처칠은 이전부터 어떻게 해서든 미국이 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만들려고 기를 쓰고 있었다. - ↑ 심지어 중국군이 슈탈헬름(흔히들 나치독일 철모 하면 떠올릴 그 철모)까지 착용한 사진까지 있다! 후일 중국군이 한국 광복군을 원조하면서, 광복군이 독일군의 장비를 들고 나오는 해프닝까지….
- ↑ 일 해군이 가장 잘 나가던 시절에도 인도양 동쪽의 제해권을 확보하는데 그쳤다. 물론 그정도라도 영국은 똥줄이 타들어갔지만(...). 정확히는 양쪽 다 더 싸울 상황이 아니었다는것에 가깝기는 하다. 일본은 다시 태평양쪽으로 공격하려고 하고 있었고 영국도 유럽전선이 급하다보니...
- ↑ 믿기 힘들지만 일본도 군함 건조기술을 독일에 전수해주기도 했다. 바로 그 유명한 그라프 체펠린. 근데 하필이면 이녀석의 원 모델이 아카기라....
- ↑ 킴멜 제독은 본래 소장계급이었고 대장이 부임하는 자리인 태평양함대 사령관에 부임시키기 위해 임시로 대장으로 진급시킨 것이었다. 어차피 사령관에서 다른 직책으로 이동하면 다시 소장으로 환원될 것이었으므로 일반적인 의미의 강등과는 다르다. 후임인 체스터 니미츠 제독 역시 소장 계급에서 임시 진급해 부임했다가 이후 정식 대장 계급이 되고 원수까지 달았다.
- ↑ 함정 피해는 미군이 컸지만 항공력의 피해는 일본군이 더욱 컸고, 이후 일본 항모부대는 재건에만 매달려야 했다.
- ↑ 연공서열만 아니었으면 나구모보다 먼저 항모 기동부대에 앉았어야 할 사람이 있었다. 레이테 만 해전에서 윌리엄 홀시 제독을 항공모함 즈이카쿠로 낚은 오자와 지사부로 제독이 그다.
- ↑ 아카기의 비행대장. 항모에서 지휘하는 비행단장은 중좌, 직접 비행하며 지휘하는 비행대장은 소좌이다. 후치다는 소좌 계급으로 항모 아카기의 비행대장이였다. 그러나 기존의 함장/비행단장이 비행대를 지휘하던 방식 대신, 공중에서 항모 4척의 비행대 전체를 통합지휘할 필요성 때문에 후치다가 실질적으로 비행대를 총 지휘하였고, 공습 직전에는 중좌로 승진하였다.
- ↑ 둘은 해군병학교 동기였고 매우 친한 친구로 영화 도라 도라 도라에서도 이것이 잘 묘사되어 있다. 둘다 진주만 공습 직전인 10월 15일자로 중좌로 승진하였다.
- ↑ 후치다는 회고록 초안에 '전 진주만 공중 공격대 총지휘관, 현 기독교 평신도 전도사'라고 직함을 썼는데, 출판사 측에서 '공중'이라는 단어를 빼놓아 "진주만 공격 총대장은 나구모 주이치인데? 얘는 누구?"라는 의구심을 같게 만들었다. 출판사 측의 네이밍 마케팅? 책에는 다른 중요한 순간에는 하느님이 직접 자신에게 나아갈 바를 귀뜀해주어 난관을 해쳐나갔다고 했는데, 유독 진주만 공습에만은 이러한 하느님의 도움이 없었다(...)
설마 하느님이 미국 공격하는 방법을 알려 줬을라구 - ↑ 당장 그네들이 자랑하는 전함대와 전투기는 그다지 높은 신뢰성을 자랑했던 것도 아니다(제로센과 야마토 항목을 참고할 것). 그렇다고 전술이라도 제대로 된 것을 채택했느냐면 그것도 아니다. 혐한빠돌이들이 자랑하는 것 같이 무기라도 좋든지 전술이라도 좋든지 두 가지 중 하나였어야 했지만, 당시 이 양반들은 둘 다 개판이었다.
- ↑ 날이 채 밝지 않아 어두운 상태를 말함.
- ↑ 영국을 뜻하는 Inglez(포르투갈어)에서 온 말.
- ↑ 진주만 공습으로 미국이 막대한 피해를 입자 전세계가 미국을 안타까워 했지만 유일하게 처칠만이 미국이 참전하게 된 것을 기뻐하였고 그의 예상은 정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