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불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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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프랑스의 관계.
Relations entre la Corée du Sud et la France

1 역사

1.1 조불관계

프랑스대한민국외교관계를 맺어왔던 서유럽의 국가 중 사실상 최초로 한국과 외교 접촉을 하였다. 1835년 프랑스인 모방 나 베드로[1] 신부가 처음 방한(訪韓)하게 된 것을 계기로 이후로 앵베르 범 라우렌시오[2] 주교프랑스인 사제들이 잇따라 방한하였다.

그러나 서양에 매우 보수적이고 반감적이며 특히 청나라에 우호적이었던 조선의 외교적 정서 때문에 천주교를 박해하여 프랑스인 사제들이 순교하게 되자, 프랑스 정부는 자국 군대를 통해 조선 침공을 강행하였다. 이를 계기로 흥선 대원군의 척양(斥洋) 정책이 더욱 강화되었고, 양국의 관계는 멀어진 듯 싶었다. 이때 외규장각 도서를 도난당했다.[3]

김옥균을 죽인 홍종우프랑스에 유학했고(최초 사례), 그 때문에 춘향전조선의 역사에 대한 개략을 최초로 프랑스어로 번역해 내기도 했다. 그가 대한제국이 지향해야 할 이상국가 모델 역시 나폴레옹 3세 시기의 프랑스였다는 해석도 있다.

하지만 1876년 일본강화도에 자국 군대를 이끌고 들어와 강화도를 습격하여 불평등 조약까지 맺게 되고 흥선 대원군청나라로 끌려가게 되면서 마침내 1886년 한불수호통상조약[4]이 체결됨에 따라 양국 관계가 복원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제주도에서 이재수의 난이 일어나 또 프랑스인 신부가 살해되자 이를 빌미로 군대를 보낸 적도 있다. 당사자인 이재수가 재빨리 백기를 들었기에 망정이지 안 그랬다면 프랑스군제주도에서 대한제국 민중들을 학살하여 한국사에서 이 갈리는 역사로 남았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다가 1905년 일본에 의해 을사늑약이 체결됨에 따라 외교관계가 단절되었다.

1.2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한민국 임시정부상하이의 프랑스 조계지 안에 있었기에, 윤봉길 의사의 폭탄 의거가 있기 전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보호해 주었다. 대표적으로 조계지라는 점을 이유로 일본 경찰을 막아주거나 임정에게 위험한 일이 있으면 미리 연락을 해 주었다. 그리고 중화민국, 폴란드와 더불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국가로 승인해 준 몇 안 되는 나라들 중 하나였다.

지식채널e에 나와있다. 영상 2분 40초 정도.

1.3 광복 후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일본의 식민지배를 받던 한국광복을 맞이하고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1949년에 대한민국과 공식 외교관계를 수립하였다.

이듬해인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프랑스UN군 자격으로 랄프 몽클라르 장군[5]을 필두로 전투지원 병력을 파병하여 한반도의 전체 공산화를 막아내는 데 기여하였다. 한국에 대한 정보가 없어서 베트남처럼 더운 나라겠지, 하고 베트남 주둔군 일부를 한국에 보냈다가 추위에 기겁하고 방한용품을 부랴부랴 공수한 일화가 있다. 나폴레옹이 러시아 원정을 갔을때 추위에 대한 대비를 안 했다가 쫄딱 망한 거랑 비슷해 보인다만 남한은 당연히 온대기후냉대기후러시아보다 당연히 따뜻하다.

국제적으로는 한국의 입장을 지지하고 있다. 그리고 미국, 일본, 중화민국과 함께 북한을 승인하지 않는 나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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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프랑스 수교 130주년을 기념해 에펠탑에서 태극기 색깔로 조명쇼를 펼치고 한국 국기를 걸기도 했다.

한불관계는 박근혜 정부가 들어선 이후 더욱 가까워진 면이 있다. 이는 박근혜 정부가 전 정부들과 달리 친프랑스 외교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해 왔고, 일본을 제외하면 아시아 지역에 특별히 가까운 국가가 없던 프랑스가 이를 큰 호재로 보아 한국의 친프랑스 정책들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실제로 박근혜 대통령은 취임 이후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과 네 번이나 정상회담을 가졌으며, 이는 어느 전직 대통령들의 임기중 한불 정상회담 횟수보다 많은 횟수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유학 갔다온 국가여서 개인적인 호감을 갖고 있나? 박근혜 대통령이 프랑스 유학 생활 중에 지냈던 그르노블을 방문하기 위해 온갖 수를 냈었던 것을 보면 그게 억측만은 아닐 수도 있다.# 그리고 박근혜 정부는 한국의 파리클럽 가입을 성사시키고 프랑코포니 참관국 가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또한 박근혜 정부 들어서 수년간 중단되었던 한불 간의 고위급 국방회담이 재개되었으며, 문화 및 산업•기술의 면에서의 한불간 교류도 크게 증가하였고 지금도 증가하고 있는 중이다. 일각에서는 박근혜 정부 들어서 한불관계가 주변 4강 관계 중 하나인 한러관계와 비슷하거나 오히려 그 이상으로 커지고 가까워졌다는 분석도 나온다. 이렇게 정치, 경제•산업, 국방•안보, 문화 등 여러 방면에서의 한불간 교류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이상 한불관계는 앞으로 더욱 친해지고 가까워질 것이며, 한국 외교에서의 프랑스의 비중은 갈수록 더욱 커지고 중요해질 것임이 분명하다.

2 반불

서래마을 영아 살해 사건에 대한 대응[6], 개고기 반대로 유명한 브리짓 바르도 여사의 추태, 외규장각 도서 스캔들 등으로 인해 한국에서 일부 불까가 생기기도 했다.

제국주의 때문에 불까가 되는 경우 한국을 알제리에, 프랑스를 일본에 대입하는 사례도 많으며 밑 문단의 진보진영에서 프랑스의 과거사 청산을 고평가할때마다 보수나 중도측에서 반론으로 내세우는 게 바로 알제리 식민통치 문제이다.

다만 이러한 반불감정은 심각한 오해에 기초한 것이 대다수이다. 브리짓 바르도 여사의 혐견육 성향은 그야말로 그녀 개인의 성향일 뿐이며, 대다수 프랑스인들은 타국의 식문화를 갖고 이래라 저래라 할 정도로 꽉 막힌 사람들은 아니다. 또 외규장각TGV, KTX사업이 맞물려 있다는 것은 완벽한 도시전설. 자세한 것은 프랑스의 역대 사기 행각 전설 참조바란다.

또한 프랑스란 나라에 대한 '어딘가 우아하고 고상하면서도 오만하고 위선적인' 이미지가 미국 혹은 일본을 경유하여 한국에 여과없이 전달된 탓도 크다. 일본은 그러한 고상떠는 이미지를 매우 좋아하여 불빠들이 많다. 하지만 그런 일본에서도 영빠와 독빠한테 밀린다 실제로는 프랑스인들도 다 똑같은 사람이다. 파리 출신들의 경우에는 조금 그런 자부심이 있을 수도 있겠으나, 프랑스인이라는 카테고리로 그들의 성격을 하나로 다 묶기에 6,500만이라는 인구수는 턱없이 많은 숫자다. 병신도 있겠지만 호인도 있을 것이고, 천치도 있겠지만 천재도 있을 것이다. 섣불리 한 나라의 전체 인구에 대해 호감이든 비호감이든 어떠한 성격을 부여하는 것은 위험하고 섣부른 행위다.

영미권에 우호적인 경우 무턱대고 프랑스를 싫어하는 경우가 많은데, 실제로 영미 앵글로색슨인들이 프랑스를 '우리 편이지만 안 좋아하는' 문화를 그대로 답습한 것으로 보인다. 국내의 메이저급 학자나 교수, 정치인, 언론인들 가운데도 이런 사례를 찾아보기 쉽다. 와패니즈가 무턱대고 중국, 한국 까는것과 뭐가 다르냐?

특히 미국 유학이 출세의 기본 조건인 교수나 학자, 관료들은 이런 사람들이 많다. 그 중에서도 순수하게 미국적 학문이라고 할 수 있는 경제학 등에서는 이런 인물들이 매우 많다. 국내 유럽사 관련 강의나 서적에서 중세 가톨릭은 '암흑시대를 만든 악의 축'에 가깝게 그려지는 경우가 많고 개신교는 근대화와 산업 혁명의 일궈낸 주역으로 그려지는데, 이 역시도 영미의 반가톨릭 성향과 무관하지 않다. 실제로도 불까들 중에는 프랑스가 여느 라틴계 국가들처럼 가톨릭 위주의 문화에 극단적인 세속주의가 공존한다는 이유로 싫어하는 개신교인들도 많다.[7]

하지만 실제로 독일프랑스/영국의 차이는 국내의 친미적 인사들의 생각보다 크지 않다. 일례로 2014년 IMF자료에 의하면 GDP 기준으로 세계 3위인 일본이 4조 6천억 달러, 4위 독일이 3조 8천억 달러, 5위 프랑스는 2조 8천억달러이다. 일본-독일의 편차와 독일-프랑스의 편차와 비슷하다. 한국은 1조 4천억 달러이다. 결국 프랑스-일본-독일의 차이는 인구의 차이일 뿐이고, 대체로 기술력이나 1인당 생활수준은 거의 비슷하다고 생각된다. 한국밀덕후들을 중심으로 퍼진 프랑스 기술열등론은 허구다. 어디까지나 미국에 비해서 손색이 있는 것이지 프랑스만큼 다방면에 기술력을 갖춘 나라는 흔치 않다. 그리고 미국이 열악한 분야는 찾아보기 매우매우 힘들다...

즉 국내 지식인들의 미국 편중[8][9][10]이나 정치적 문제 때문에 프랑스가 평가절하되는 경우가 많이 있는데, 프랑스경제문화, 외교적 지도력, 역사 등에서 충분히 선진국이자 강대국이고, 프랑크 왕국 이후로 서유럽의 패권국가 자리에서 내려온 적이 단 한번도 없다. 프랑스가 유럽짱깨라는 비하적인 명칭으로 국내에서 불리지만, 사실은 중국을 무턱대고 까는 와패니즈와 국내의 불까들이 오히려 더 통하는 면이 많다.

3 친불

반대로 반미 성향이 짙은 사람들에게는 친불 성향이 짙은 사람이 의외로 많은데, 이는 소련중국반미라고 해도 한국통일에 직접적인 방해를 했다는 점이 크기 때문이라는 점이고 또한 홍세화의 영향 때문인지 반미주의자들 중에서 똘레랑스(Tolérance)의 나라 프랑스를 선호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먼나라 이웃나라에서도 긍정적으로 다루기도 했다. 하지만 현실은 시궁창이라.

또한 프랑스나치 친독파 청산을 예로 들며 반일 성향의 한국인들 중 프랑스를 옹호하는 사람도 있다. 이들은 프랑스의 경우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군에게 부역했던 친독파 부역자들 처단하여 국가기강을 바로잡았는데, 한국의 경우 친일파와 야합해서 정부를 세우는 바람에 국가기강이 엉망이 되고 정치ㆍ사회가 부정부패의 악순환에 빠졌다고 주장하기도 하는데 프랑스의 친나치청산 또한 그리 성공적이지 않았다는 걸 감안하면 그렇게 맞는 주장은 아니다.

피에르 라발이나 필리프 페텡 같은 주역들을 사형, 종신형에 처하고 사법적으로 처벌을 내리는데는 성공했지만, 이 과정에서 수많은 문제가 있었다. 힘 없던 서민이나 무고한 사람들을 정당한 재판 없이 친독파로 몰아 잡아 무차별 학살했고, 공산주의계 레지스탕스들을 우익들이 친독으로 몰아 죽이기도 했다. 해외로 도주한 사람들은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해외로 도주한 나치 전범자들 쫓아가 잡듯이 잡아다 본국으로 압송, 처벌하지도 않았을 뿐더러, 나치 밑에서 고위직을 역임하며 전황을 신속히 파악하고 재빨리 연합군측에 양다리 걸친 인사들도 빠져나갔다. 게다가 사법숙청이 시작되던 시점에선 유대인 학살에 관심이 없어서 이에 대한 처벌은 수십년 뒤에나 이뤄졌다.

게다가 경제인&기술자&군경 등 국가 운영에 필요한 사람들은 대체로 봐주고[11] 없어도 나라 운영하는데 지장 없는 기자, 작가, 예술가 등 문돌이와 예체능 위주로 처벌했으며 그나마도 1950년대 들어서면 나치 부역자들에 대한 사면령이 떨어져 50년대 말에는 수만명에 달하던 부역자들이 다 사면되고 이미 공식적인 부역자가 수십명밖에 남지 않은 상태였다. 정계에서도 프랑수아 미테랑 前 대통령의 경우 1990년대 초에 제2차 세계대전나치 독일군에게 부역했던 사실이 폭로될 정도로, 종전 후 친독 부역 사실을 숨기고 처벌을 피한 사람도 꽤 있었다.

4 문화

프랑스유럽 제일가는 동아시아 문화 덕후다.그래서 약탈을 꽤나 많이 했다. 자포네스크에서도 알 수 있듯이, 프랑스일빠성향은 그 역사가 유구하다. 그러니 당연히 일본 문화와 친연성이 있는 한국 문화에도 끌릴 수밖에 없다.

프랑스 내에서도 한류 붐이 존재한다. 물론 아시아처럼 폭발적인 인기는 아니지만 그래도 유럽 국가들 중에서는 그나마 좀 활발한 쪽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유럽에서 프랑스는 아직 문화대국이기 때문에 프랑스를 매개로 한류 붐이 다른 유럽 나라들로 전파되는 경우도 있다. 대체로 프랑스 일덕들이 일본 것을 검색하다 한류 컨텐츠를 우연히 발견하고 한류 팬이 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또한 프랑스의 어느 도서관에 가도 한국 만화가 반드시 몇 권은 있다는 점도 특기할 만하다. 북미에서 한국 만화를 내주던 출판사들은 대부분 망했다.

한국 관련 만화를 그린 프랑스 만화가로는 오로르가 있다.

5 북한과의 관계

북한과는 아직까지 외교관계가 없으나 수도 파리에 주불(駐佛) 북한 대표부가 상주해 있으며, 현재까지 일반대표급 외교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제2세계(동유럽 + 소련)에 우호적이었던 프랑스치고는 쌍방 수교국이 의외로 아닌 나라.[12]

프랑스는 공식적으로 북한을 적국으로 규정하며, 북한 미사일과 핵 위협을 우려하는 나라이다. 노동3호 미사일은 프랑스령의 일부 오세아니아 섬 지역을 가격권으로 설정하고 있기도 하다. 그리고 북한의 각종 도발행위에 있어 규탄 성명을 내었고 국제사회의 대북제재에도 동참하고 있는 반북 국가이다.

  1. 최초로 한국 땅을 밟은 프랑스인 선교사. 김대건 안드레아, 최양업 토마스, 최방제 프란치스코를 신학생으로 뽑아 교육, 마카오로 유학보냈다(최방제는 도중에 병으로 죽었다). 1839년 기해박해 때 순교했고,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복자품,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김대건 안드레아, 정하상 바오로와 101위 동료 순교자 항목 참조.
  2. 천주교 서울대교구 제2대 교구장. 샤스탕 정 야고보 신부, 모방 나 베드로 신부와 함께 순교, 복자품, 성인품에 올랐다.
  3. 이거 때문에 현대에는, 당시의 프랑스인 선교사제들을 제국주의의 앞잡이 취급하는 시선이 존재한다. 그러나 당시 프랑스인 선교사제들이 본의 아니게 병인양요 등의 원인을 제공한 것은 맞지만, 이들의 선교 자체가 제국주의에서 비롯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사실 이들이 한 행동은 간첩질이라기보다는 "본국에 도와달라고 하자"에 더 가깝기도 하고. 물론 이러한 행동이 본의 아니게 끔찍한 결과를 불러왔다.
  4. 이때부터 가톨릭 신앙의 자유가 허용되었다.
  5. 실제로는 중장 계급이었으나 당시 참전한 부대가 대대급이라 중령으로 계급을 일부러 낮추고 참전했다.
  6. 실제로 이때 프랑스의 대응은 프랑스 내에서도 언론 및 지식인들에 의해 상당한 비판을 받았다.
  7. 반대로 비슷하게 세속화 경향을 띔에도 독일과 네덜란드는 개신교 문화가 강하다는 이유로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다.
  8. 다만, 이는 분야마다 차이가 있다. 법학계에서는 비록 독일이나 미국에는 밀리지만 그래도 대표적인 대륙법계 국가로서 어느 정도의 지분은 가지고 있다. 한국법은 기본적으로 대륙법 체계이므로(대부분이 독일스타일이긴 하지만) 미국보다는 프랑스 법이 국내 도입하기에 훨씬 유용하다. 그래서 프랑스 유학 출신의 법학자들도 많다. 철학계 중 포스트모더니즘이나 구조주의 관련 파트는 거의 이 쪽이 장악하고 있다시피 하다.
  9. 사실 이쪽 애들은 영미권에서도 세를 떨치긴 했다. 덕분에 앨런 소칼같은 사람들이 나오긴 했지.
  10. 이전 글에서는 경제학이 프랑스에서 영향력이 없다고 했는데, 일단 장 티롤같은 노벨경제학상 수상자를 배출한 동네이고 그 외에 블랑샤같은 학자도 있다. ideas.repec.org의 랭킹 기록을 보더라도 영미권 다음으로 독일과 더불어 상위권을 차지하는 동네다. 물론 영미권의 패권은 밀덕 업계에서 미군+러시아군의 위상이나 라면 업계의 신라면 이상인데다 프랑스 지성계의 이념적 경향상 반경제학적 정서가 강해서 그렇지.
  11. 특히 경제인들은 프랑스의 산업기반을 유지해야 했다는 핑계로 죄다 빠져나갔다.
  12. 이는 프랑스북한과의 수교를 시도할 때, 한국중국과 수교하는 것을 돕는 것을 조건으로 내걸었기 때문. 결국 프랑스북한과의 수교를 단념했고, 한국은 나중에 중국과 수교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