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흥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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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역대 국왕
23대 법흥왕 김원종24대 진흥왕 김삼맥종25대 진지왕 김사륜
시호진흥왕(眞興王) / 진흥태왕(眞興太王)[1]
연호개국(開國)
대창(大昌)
홍제(鴻濟)
김(金)
삼맥종(彡麥宗) / 심맥부(深麥夫) / 좌지리(佐利遲)[2]
생몰년도음력534년 ~ 576년 8월 (42세)
재위년도음력540년 ∼ 576년 8월 (36년)

1 개요

신라 최고의 정복 군주
신라가 백제고구려를 병합하는 데 가장 결정적인 주춧돌을 놓은 인물

이름은 삼맥종(彡麥宗) 또는 심맥부(深麥夫). 지증왕의 손자이자 법흥왕의 조카 겸 외손자. 법흥왕의 동생 갈문왕 입종(立宗)[3]과 법흥왕의 딸 지소부인(只召夫人)[4][5] 사이에서 출생했다. 아내는 사도부인(思道)이다. 자녀는 김동륜(진평왕의 부친)와 진지왕(김사륜), 김구륜(金仇輪)의 3남.[6] 남동생 숙흘종, 여동생 만호부인 등이 있다.

지금의 경상북도 전역과 경상남도의 동부 지역, 그리고 충청북도 남동부 지역[7]을 지배하던 신라를 물려받아, 북쪽으로는 지금의 함경남도 함흥과 영흥만으로, 서쪽으로는 한강 유역과 황해 연안까지, 배신당해 열 받은 성왕을 발라버리고 남동쪽으로는 가야를 완전 정복해 영토를 즉위 시점의 3배로 늘린[8] 진흥왕대에 점령한 영토는 춥고 생산력이 낮은 쓸모없는 땅도 아닌 한반도의 알짜 지역들로, 특히 교과과정에서는 신라의 한강 유역 점령 시점부터 삼국시대의 주도권이 신라에게 넘어오는[9] 신라의 전성기로 파악하고 있다. 먼치킨 정복군주로, 말 그대로 신라를 진흥시킨 왕. 단 주의해야 할 게 '진흥시키다'의 '진흥'은 振興이고 진흥왕의 진흥은 眞興이다. 법흥왕과 더불어 불교식으로 시호를 올린 예로 손꼽힌다.[10]

선대 지증왕, 법흥왕이 중흥의 기틀을 마련하자 대대적인 정복전쟁정책을 펼쳤는데, 이 분이 워낙에 여기저기 들쑤시고 갑자기 너무 커져버린 탓에 나라를 이어받은 진평왕, 선덕여왕 시기에는 고구려와 백제가 합작으로 신라를 겁나게 쪼아대 양면전쟁을 강요받아, 무열왕문무왕 시대 이전까지는 상당히 위기에 빠지기도 했다.

정복도 많이 했지만, 그 정복의 대부분이 진흥왕이 10대 후반~20대였던 시기에 이뤄졌다. 광개토대왕이나 알렉산드로스처럼 역사의 대표적인 청년 정복군주이다. 사실 진흥왕의 동시대 라이벌처럼 여겨지는 백제 성왕은 진흥왕보다 훨씬 나이가 많아 아버지뻘 이상이고, 심지어 성왕의 아들 위덕왕 부여창보다도 진흥왕이 열 살이나 어렸다.이쯤되면 성왕과 그 아들들이 진흥왕을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놈이라고 얼마나 깔봤을지 짐작할 수 있다 젊을 때 엄청나게 활약했지만 수명은 짧은 편이었다는 점도 광개토대왕이나 알렉산드로스와 비슷한 부분이다.

초기의 연호개국(開國), 이후에 태창(太昌), 홍제(鴻濟) 순으로 바꾸었다.

2 생애

2.1 즉위 초기

법흥왕의 뒤를 이어 즉위할 때 겨우 7세(...)였기에[11] 태후[12]가 섭정했다. 이후 큰 문제없이 훌륭한 군주로 성장했다.

2.2 영토 확장

548년까지만 해도 유효했던 나제동맹에 따라 백제를 도와서 독산성 전투에서 고구려군을 막아내고, 한창 북쪽에서 돌궐 상대하느라 후방이 허술한데다 마침 내정까지 문제가 있었던 고구려 방면을 백제와 함께 551년에 아홉 장수[13]를 시켜 공격해 백제는 한강 하류 지역을, 신라는 강원도 쪽의 한강 상류로 북진했다. 곧장 나제동맹군은 고구려의 수도 평양까지 진격할 절호의 기회였으나, 몽골 지방의 돌궐에 대비해야 하는 고구려로서는 남쪽 전선에 모든 전력을 투입할 수 없으므로 강화를 모색할 수 밖에 없었고, 이에 신라의 진흥왕이 화답,[14] 553년 백여년에 이른 나제동맹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백제가 점거한 한강 유역을 점령해 백제의 원한을 샀다.[15] 554년 이에 분개한 백제가 가야, 왜군을 동원해 신라에게 대대적으로 전쟁을 일으키지만 성왕[16]을 전사시키는 등[17] 백제군을 도리어 크게 격파했다(관산성 전투).[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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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 비봉 순수비. 국보 3호.[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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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진흥왕순수비를 옮기는 작업을 찍은 사진.[20]

이후 영토를 직접 순시하며 각지에 진흥왕 순수비를 세웠다. 북한산 순수비는 그 중 하나다.[21] 이로 인해 신라는 경상도에만 고립된 국가에서 한강 유역을 차지한 나라가 되면서 중국과 직접 통하게 되었다.[22]

남아있던 가야 소국들은 유사시 도움을 요청할 백제가 약화되자 신라 앞에 도미노처럼 무너졌다. 559년 아라가야, 560년에 비화가야가 항복했고 561년에는 신라의 명장 이사부에게 대가야를 침공토록 했고, 선봉 사다함의 활약에 힘입어 대가야를 멸망시켰다. 그러나 진흥왕은 우륵가야금으로 대표되는 가야 문화를 계승토록 했다. 아무튼 선왕인 법흥왕이 금관가야를, 진흥왕은 대가야를 정복함으로서 가야세력은 완전히 신라에 흡수되고 비로소 지금의 경상도 지역 전체를 신라가 차지하게 된다.

북쪽으로도 영토를 넓혀, 나중에는 옛 옥저 땅이었던 고구려의 함경도 남부[23]까지 한때 차지하기도 했다. 여기는 고구려의 수도 평양성보다 훨씬 북쪽이고, 옛 수도이자 압록강 북쪽에 있는 국내성과 위도가 비슷할 만큼 북쪽 지역이다. 다만 이 지역은 경주 인근의 신라 본토에서 너무 멀기도 하고 고구려도 가만 있지는 않았을테니 곧 다시 고구려가 되찾았다. 그런데 568년에 세워진 황초령비의 내용에 따르면 고구려는 신라의 영토 획득을 순순히 인정하고 오히려 축하하고 있는데, 당시 고구려에 속해있던 거란족의 일부가 중국 수나라에 투항해버리는 등 서북방에 어두운 정세가 드리워지고 있었고 고구려는 북방전선도 신경써야 하는 입장이라 일단 신라와 굴욕적인 화친을 맺었다가 나중에 되찾은 것으로 보인다. 일본서기 긴메이 덴노 조에 따르면 고구려는 570년부터 갑자기 일본에 무리해서 동해 바다를 횡단해 사신을 자꾸 보내기 시작하는데,[24] 이 역시 신라를 배후에서 견제할 우군이 필요했고 그만큼 고구려가 신라의 팽창을 우려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일본서기/긴메이 덴노 참조.

신라가 함경도까지 올라갔을 때 꽂아놓은 황초령비마운령비는 지금도 남아서 북한의 얼마 안 되는 신라 관련 국보함흥본궁에 보관하고 있다. 남한에는 탁본이 있다.

2.3 내치

거칠부를 시켜 역사서 <국사>를 편찬하게 한다. 불심이 깊어 황룡사를 창건하고 완성을 선덕여왕시기로 본다면 완공은 못봤다 다른 절도 많이 세웠다고 하며 인도에서 아소카 왕이 보낸 철과 금으로 나중에 신라삼보 중 하나로 꼽히는 불상 '장륙존상'을 주조하기도 했다. 물론 아소카 왕은 시대도 안 맞고 진짜로 인도에서 재료를 보내고 그걸로 만들었을 가능성은 거의 없지만, 어쨌든 장륙존상은 고려와 조선시대 기록까지 계속 나오므로 이 때 크고 아름다운 불상을 만든 것은 분명해 보인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원화화랑의 제도는 바로 진흥왕이 창설했다라고 전해진다. 다만, 최근 연구에 따르면 화랑 제도 자체는 진흥왕 이전에도 있었다고 한다. 당장 사다함만 해도 진흥왕이 원화 만들었다 폐지하고 화랑을 창설한 것보다 이전 시점에 활약했던 사람이다. 민간에 자치적으로 운영되었던 조직을 국가조직 안으로 흡수했다고 봄이 타당하다.

2.4 말년

위에서 언급했듯 불심이 깊어 말년에는 아예 머리를 깎고 승복을 입어 승려처럼 하고 다녔다고 한다. 자신을 전륜성왕으로 동일시했으며 두 아들 동륜, 사륜(진지왕)의 이름도 불교에서 기원을 둔 이름이다. 본인의 이름도 반야심경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서 따왔을지도 모른다.

즉위 37년째인 576년에 승하했다. 고작 40대 초반이었지만 워낙 어린 나이에 즉위했기 때문에 재위기간은 짧지 않은 편이다. 애공사 북쪽 봉우리에 장사지냈는데, 현대에 이 진흥왕릉이라고 전해지는 왕릉은 진흥왕의 업적과 위상에 비해 너무 작다. 그래서 근처에 있는 크고 아름다운 서악동 고분군이 진흥왕릉이라고 이미 조선시대부터 추정해왔기도 하고, 진흥왕릉 앞의 설명에도 서악동 고분군 진흥왕릉설을 같이 써 놓았다.

3 가족관계

장남인 동륜태자는 아버지보다 먼저 세상을 등졌고 후계자이자 차남인 진지왕은 행실이 막장이라 화백회의에 의해 폐위된다.[25]다만 진지왕이 능력이 아주 없었다고 보긴 그렇다. 일단 행실이 막장이라는 기록은 삼국사기에 나오지 않고 삼국유사에만 나오는 기록이며 이 시기 백제의 위덕왕이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서인지 3만 대군을 이끌고 신라를 침공했다 노리부[26]에게 대패하고 이로 인해 성을 새로 쌓는 등 업적이 제법 괜찮다.

진흥왕 때부터 신라에서 (왕족을 포함해)성씨가 쓰이기 시작했다. 중국측 기록에서 진흥왕은 김진흥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27] 결국 진흥왕 이전 왕과 귀족들의 성씨는 후대에 소급해서 기록한 것으로 생각된다.

4 평가

진흥왕이 고대사에 큰 영향을 끼친 것은 수 백년 가까이 한반도의 패권 싸움이 백제 대 고구려 위주로 돌아가던 틀을 부수었다는 것이다. 지증왕 - 법흥왕 때까지만 해도 신라는 겨우 경상북도 전역과 경상남도와 충청북도의 일부지역의 패권국가에 불과해, 근초고왕, 광개토대왕으로 대표되는 한반도 전체의 최강을 다투는 경쟁에서는 사실상 밀려나 있었다. 그런 와중에 이를 바꾼 것이 바로 진흥왕이다. 백제는 해상을 제외하고는 사실상 고립되어 버리고, 고구려도 한강 유역을 상실해 언제든지 국경을 위협당할 수 있는 처지가 되었다. 이 때문에 백제와 고구려는 이전까진 존재감이 별로 없다가 거의 새로 등장하다시피한 강국 신라에 온 국력을 쏟아 맹공을 가해야 했다. 특히 백제는 예전 정세로 바꾸기 위해 맹공을 가했으나, 도리어 성왕이 전사하여 도리어 어려움은 시기를 겪기도 했다. 온달 전설로 대표되는 고구려와의 전쟁에서도 줄곧 신라가 우위를 선점하는데, 이는 진흥왕 대의 영토확장이 시발점이 된 것이었다.

지증왕 이전의 신라는 가야와 같은 연맹왕국 단계였으나, 지증왕, 법흥왕, 진흥왕 대를 거치면서 신라는 중앙집권적 고대국가로 확실히 변모했다. 그리고 고구려, 백제와 대등하거나 더 나아가 이 두 국가를 흡수통일 할 수 있는 국가적 역량을 갖추어 나가는 강력한 정복국가가 된 시기도 진흥왕대이다. 이후 신라는 삼국통일을 위한 지난한 과정을 겪게 되는데, 고구려와 백제는 우왕 신라 많이 컸어 진흥왕의 영토 확장으로 인해 서로 동맹을 맺어 신라를 협공하는 구도가 되어 7세기 중엽까지 오히려 위기에 몰리기도 한다. 그리고 신라가 한강을 차지하면서 황해로 통하는 통로를 얻어 이때부터 중국과 직접 교역할 수 있게 되었기에, 넓게 보면 이후 삼국통일전쟁의 중국, 신라 연합 vs 고구려, 백제, 왜국 연합 구도를 열어 젖힌 것도 진흥왕이다.

5 삼국사기 기록

一年秋七月 진흥왕이 즉위하다
一年秋八月 크게 사면하고 문무관의 관작을 올려주다
一年冬十月 지진이 일어나다
二年春三月 눈이 한 자나 내리다
二年 이사부를 병부령으로 삼다
二年 백제가 사신을 보내 화친을 청하다
五年春二月 흥륜사가 완성되다
五年春三月 사람들의 출가를 허락하다
六年秋七月 국사를 편찬하다
九年春二月 백제를 침입한 고구려를 공격하다
十年 양에서 부처의 사리를 보내다
十一年春一月 백제가 고구려의 도살성을 빼앗다
十一年春三月 이찬 이사부가 두 성을 빼앗다
十二年春一月 연호를 개국으로 바꾸다
十二年春三月 우륵에게 음악을 연주하게 하다
十二年 고구려를 침입하여 10개 군을 빼앗다
十三年 우륵에게 음악을 배우도록 하다
十四年春二月 황룡사를 짓다
十四年秋七月 신주를 설치하다
十四年冬十月 백제 왕의 딸을 소비로 삼다
十五年秋七月 명활성을 수리하여 쌓다
十五年 백제가 관산성을 공격하다
十六年春一月 비사벌에 완산주를 설치하다
十六年冬十月 북한산에 순행하다
十六年冬十一月 북한산에서 돌아오다
十七年秋七月 비열홀주를 설치하다
十八年 국원을 소경으로 삼다
十八年 감문주와 북한산주를 설치하다
十九年春二月 귀족의 자제 등을 국원소경으로 옮기다
十九年 나마 신득이 포노를 만들다
二十三年秋七月 백제가 변경의 백성을 침략하다
二十三年秋九月 가야가 반란을 일으키자 토벌하다
二十五年 북제에 사신을 보내다
二十六年春二月 북제의 무성황제가 조서를 내리다
二十六年秋八月 아찬 춘부에게 국원을 지키게 하다
二十六年秋九月 대야주를 설치하다
二十六年 진에서 불경을 보내다
二十七年春二月 기원사와 실제사가 세위지다
二十七年 동륜을 왕태자로 삼다
二十七年 진에 사신을 보내다
二十七年 황룡사가 준공되다
二十八年春三月 진에 사신을 보내다
二十九年 연호를 태창으로 바꾸다
二十九年夏六月 진에 사신을 보내다
二十九年冬十月 남천주와 달홀주를 설치하다
三十一年夏六月 진에 사신을 보내다
三十二年 진에 사신을 보내다
三十三年春一月 연호를 홍제로 바꾸다
三十三年春三月 왕태자인 동륜이 죽다
三十三年 북제에 사신을 보내다
三十三年冬十月二十日 팔관연회를 열다
三十五年春三月 황룡사의 장육상을 주조하다
三十六年 봄과 여름에 가물다
三十六年 황룡사의 장육상이 눈물을 흘리다
三十七年 원화를 받들다
三十七 안홍법사가 돌아오다
三十七年秋八月 왕이 죽다

재위기간 만큼이나 기록도 많다. 중국에 사신을 보낸 기록이나 연호를 칭한 기록도 많다.

6 미디어에서의 진흥왕

드라마 선덕여왕에서는 배우계의 대부인 이순재가 맡았다. 중후한 연기에 대해 감히 뭐라 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다만, 43세라는 젊은 나이[28]에 병으로 죽은 진흥왕을 이 분이 맡은데다 분장도 노인으로 보이는 덕택에 상당히 진흥왕이 장수한 것처럼 그려진 것은 옥의 티. 그리고 1화에서만 등장하고 현재 주역들과는 그다지 마주치는 교집합이 없기 때문에 사실상 까메오라는 의견도 있다. 하지만 떡밥은 많이 남기고 가셨으니…

참고로 드라마 내에서 "진흥대제"로 불리고 있다. 그놈의 황제국 콤플렉스란… 다만 삼국사기나 금석문에 있는 , 선황(先皇), 황왕(皇王) 같은 표현들이나 연호와 묘호의 사용 기록을 볼 때 신라가 적어도 외왕내제를 했음은 분명하므로 황제, 대제, 폐하 같은 표현을 사용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물론 다른 표현보다는 당대에 사용했던 것이 가장 분명한 '태왕' 같은 칭호를 사용하는 게 더 자연스러웠을 것이다.

드라마에서도 한강 유역을 차지하고 신라의 최대 영토를 마련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다만, 한강 유역 시찰 도중 백제의 자객들에게 둘러싸여 위험에 처한 것을 당시 원화인 미실이 구출한다. 당시로써는 온갖 전쟁 풍파를 함께 겪은 미실을 호의적으로 봤는지 미실을 품은 첫번째 왕이 되었다.

허나, 말년에 미실의 독기를 발견해서인지 유언에 '미실은 불가에 귀의하라'는 글귀를 미실에게 직접 남기게 했다. 그리고 미실이 그것을 지키지 않을 것임을 생각하며 설원에게 미실을 제거할 것을 명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 설원을 비롯한 대부분의 측근을 미실이 갉아 먹은 상황이었고, 진지왕과 손을 잡은 미실은 진흥왕을 독살하러 쳐들어 왔다.

결국, 마지막이 다가오자 손자인 백정(후일의 진평왕, 장남인 동륜태자의 아들)과 함께 여러 얘기를 했고, 불행 중 다행인지 미실이 찾아와서 독약을 먹이기 직전에 세상을 떠났다.

미실에게 남긴 유언에서 그의 후계를 손자인 백정으로 잇는다고 명한 것으로 볼 때, 아들인 금륜 왕자(진지왕)는 그다지 믿음직스럽지 못했던 모양. 미실이 이 유언을 숨겨 금륜이 왕으로 추대되었으나, 곧 미실이 이 유언을 만천하에 공개해 진지왕은 자연스레 폐위되었다.

삼국사기 등의 정사에서는 진흥왕이 왕위를 손자 백정(진평왕)이 아닌 아들 진지왕에게 넘겨준 것으로 나온다. 드라마가 기반을 두고 있는 화랑세기에서 사도태후와 미실이 짜고 진지왕을 올린 것으로 묘사되었으니[29], 아무래도 화랑세기에서 따온 내용인 듯.

추후 제사를 지내던 문노에게 하늘에서 '미실을 대적할 사람은 개양자의 북두칠성이 8개가 될 때까지 나오지 않을 것이다.'는 예언을 내려 미실의 유일무이한 맞수 덕만의 출생을 예고한다.

그가 남긴 소엽도는 진평왕을 거쳐 덕만공주에게 넘어가 여러번 그녀의 목숨을 구했다.

작중의 주인공으로 박형식이 연기한다.

  • 기타 미디어

배기완 최영아 조형기의 좋은 아침에 따르면 신라를 통일한 왕이라고 한다

겁스 무한세계의 화랑 세계에서는 '진골정통'으로서 '대원신통'과 무녀들로부터 왕권을 독립시키기 위해 불교 포교를 지원하거나 화랑도를 개편하는 등(단, 화랑도 개편은 화랑들의 반발로 실패) 나름 노력했으나 정작 적인 대원신통의 정계 미실을 총애하는 삽질을 했다(…) 그 결과 다음왕 진지왕 때 신라 왕가는 망해버린다(…)
  1. 마운령비 등 비석에서 등장하는 존호.
  2. 일본서기에서 등장하는 시호
  3. 울주 천전리 암각화에는 사부지라고 쓰여있다. '사부'=서다=입, 존칭 "지"=종으로 추정하고 있다
  4. 삼국사기와 필사본 화랑세기는 그녀를 법흥왕의 딸로 말하지만, 삼국유사 '왕력'에서는 그녀가 박씨로 모량리 각간 영실의 딸이라고 하였다. 근데 박영실은 필사본 화랑세기에서 그녀의 남편 중 하나로 나오는 사람이다. 근데 또 삼국유사 '제1권 기이 제1'에서는 섭정하는 태후를 가리켜 법흥왕의 딸이자 입종 갈문왕의 비(妃)라고 하여 서술이 왔다갔다 한다.
  5. 김춘추의 딸이자 김유신의 부인인 지소(智炤)와는 다른 인물. 한자도 다르다.
  6. 필사본 화랑세기로 가면, 정실 사도부인을 포함한 7명의 부인에게서 6남 8녀를 두었다. 하지만 이쪽은 위서일 가능성이 높다.
  7. 470년 축조된 삼년산성이 위치한 충북 보은군과 옥천군 일대
  8. 지금의 행정구역으로 따지면 처음 왕이 됐을 때 경상북도와 기타지역 약간이었는데 → 정복전쟁 뒤에는 신라의 영토가 함경남도, 경기도, 강원도, 충청북도, 경상북도, 경상남도가 되었다. 이는 현대 대한민국(남한)보다 넓다. 나중의 일인 삼국통일전쟁 때와 비교해도 진흥왕 시대의 중북부지방 정벌이 비율상으로는 훨씬 급격한 영토 확장이었다.
  9. 4세기 백제 → 5세기 고구려 → 6세기 신라로 도식화해서 가르친다.
  10. 본래 시호는 사후에 올리는 것이지만 신라의 경우 살아 있을 때 올렸던 걸로 보인다. 진흥왕 재위기에 세워진 진흥왕 순수비에도 대놓고 진흥태왕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따라서 엄밀히 말하면 시호가 아니라 존호에 가까웠다고 봐야 할 수도 있다. 아니면 그냥 시호나 존호가 아니라 왕의 이름이라는 주장도 없지는 않다. 중국측 기록에 신라 왕의 성명이 김진흥, 김선덕(선덕여왕) 식으로 등장하기 때문. 물론 신라 왕들은 즉위 전에 본래 이름이 따로 있었기 때문에, 이름이라는 설이 사실이라면 왕위에 오른 뒤 새롭게 붙인 이름일 것이다.
  11. 선왕의 동생이자 진흥왕의 아버지인 입종갈문왕의 생몰년은 미상이지만, 울주 천전리 각석에 새겨진 내용으로 보아 진흥왕이 어릴 때 이미 죽었다.
  12. 이 태후가 법흥왕의 왕비이자 외할머니인 '보도부인'인지, 모친인 '지소부인'인지 논쟁이 있다. 삼국사기는 단순히 '왕태후가 섭정했다'고만 했고, 삼국유사는 법흥왕의 딸이자 입종갈문왕의 비, 즉 지소부인이라고 했으며, 화랑세기는 애초에 '지소태후'라고 서술했다.
  13. 대각간 구진(仇珍), 각간 비태(比台), 잡찬 탐지(耽知)ㆍ비서(非西), 파진찬 거칠부(居柒夫)ㆍ서력부(西力夫)ㆍ노부(奴夫), 대아찬 비차부(比次夫), 아찬 미진부(未珍夫)
  14. 황초령비에 인근 국가가 사절을 보내 강역확정을 축하했다는 언급이 있는데 이를 고구려의 사절로 본다. 그리고 상식적으로 나제동맹을 깨고 단독으로 한강을 차지한데다 나중엔 백제와 싸우기 위해 한강 방어군까지 남부 전선에 동원하는데 이러면 필히 원 주인이었던 고구려의 빈집털이 공격을 받을 우려가 큰데, 미리 고구려와 밀약을 맺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15. 다만 신라군이 백제군을 직접 뒷치기한 게 아니라 모종의 이유로 백제가 한강 하류를 포기하고 그걸 신라가 잘 먹겠습니다! 하고 낼름 차지했다는 설도 있다. 실제로 일본서기삼국사기 기록에서는 한자의 미묘한 의미 차이지만, 이 때 백제와 신라 사이에 전투가 없이 신라가 손쉽게 거뒀다는 식으로 표현되어있기도 하다. 포기한 정황에 대해서는 성왕(백제) 문서 참조.
  16. 553년에는 그의 딸을 소비(小妃)로 맞아들이기도 했다. 일단은 장인이지만…
  17. 진흥왕이 직접 참전한 것은 아니고 군대를 보낸 것.
  18. 일본서기의 분주에 따르면 성왕의 목은 신라 궁궐의 계단에 묻어버렸다. 빈집털이 부분에 왕까지 죽이고 목을 왕궁 계단 밑에 묻어서 두고두고 밟히게 했으니 백제 입장으로써는 불구대천의 원수가 되었으나 그렇다고 이후에 서로 교류가 없진 않았다(…)
  19. 단 오늘날 비봉에 있는 저 비석은 모조품이고 진짜 순수비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있지만 저 장소 자체는 사적 228호로 지정되어 있다(진흥왕 순수비 유지). 비봉(碑峯)이라는 봉우리 이름 자체가 진흥왕순수비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비봉의 저 장소는 그냥 하이킹한다는 생각으로 올라가면 피본다. 해발 560m 지점이지만 여기 올라가려면 거의 암벽등반을 해야 한다. 다만 저곳에 올라가면 서울 도심과 한강은 물론이고 날씨가 좋은 날에는 멀리 인천 앞바다까지 볼 수 있다. 저런데다 비석세울 생각을 어떻게 했을까
  20. 이후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이전한다.
  21. 순서대로 북한산비(555년), 창녕비(561년), 황초령비(이하 568년), 마운령비이다. 쪽 하늘()에 색 구름() 그리고 진흥왕 관련해서 언급되는 단양 적성비는 순수비가 아니다. 적성비란 명칭대로 성을 쌓은 다음에, 만일 무너지면 공사한 놈은 디진다라고 한 축성비. 삼국사기 내용을 토대로 545~550년 경 축성한 것으로 추론시 북한산비 보다 먼저이다. 단양 점령 뒤, 북상해 한강점령
  22. 순수비에 太王 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연구한 바로는 법흥왕 때부터 태왕 이라는 호칭을 사용했다고 한다. 다만 진흥태왕 이후로는 태왕이라는 호칭을 사용한 기록이 보이지 않아 의문이 제기된다.
  23. 이 지역은 신라가 진흥왕대에 획득했다 상실한 이후 다시 되찾지 못했다. 통일신라가 들어선 뒤에도(...)
  24. 대한해협을 건너는 항해 루트가 가장 안전하지만 전부 신라 땅이니 동해 바다 정가운데로 먼 바다 항해를 할 수밖에 없다. 573년에는 사신단에서 다수의 익사자가 발생했다.
  25. 화랑세기에 따르면, 미실에게 4년만에 쭃겨난다고 나오지만 문헌 자체의 신빙성이 의심되는 현 시점에서는 뭐라고 할 수 없다. 다만 이쪽도 행실이 막장이라는 단서는 붙어 있고, 모친인 사도태후와 미실이 짜고 폐위를 주도했다고. 화랑세기에 따르면 장자 동륜태자는 자기 후궁 보명궁주와 바람피우다 개에 물려죽었다. 단 삼국사기에서는 이런 내용이 나오지 않는다.
  26. 김유신의 큰 할아버지
  27. 무성제 하청 4년 2월 갑인에 조서를 내려 신라왕 김진흥을 사지절 동위교위 낙랑공 신라왕으로 삼았다.(북제서) 진흥왕의 아버지 법흥왕만 해도 남사, 책부원귀 등 중국기록엔 성을 모(慕), 이름을 진(秦)이라고 하였고, 신라 쪽 금석문울주 천전리 각석에는 무즉지태왕이라고 하여 성이 김씨라는 언급은 없다.
  28. 과거에 평균수명이 짧았다지만 그건 유아사망률이 높기 때문이며, 40대 초반이면 그 시대에도 충분히 팔팔한 나이이다.
  29. 진흥왕의 승하를 숨겼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