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위항목: 영국 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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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 문서에선 영국 요리가 왜 까이게 되었나를 집중적으로 분석할것이다. 사실 산업혁명기~2차대전 직후까지는 정말로 일반인들이 즐기는 영국 요리가 헬이었던 시기도 존재했다.
오늘날 영국요리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은 이 시기에 기인하며 마치 일제 강점기~한국 전쟁 직후의 한국 요리가 막장가도를 달렸던것과 유사하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요리를 향유하는 계층이 좋은 요리를 향유할수 있는 기반이 상실된 시기였던 것, 역사적으로나 당시를 다룬 문학들이나 이 시기 영국 요리에 대한 증언은 하나같이 지옥이기 때문에 영국 요리가 막장이었다는 사실 자체는 사실이라고 볼 수 있다.
2 산업 혁명
영국은 다른 나라보다 빠른 산업 혁명으로 인해서 많은 농민들이 도시로 이주를 하였다. 이로 인해 농촌 사회에서 전통적인 식단은 자연스럽게 단절되었고 중세시대의 농노만도 못한 삶을 강요당했던 도시 노동자들의 생활환경은 맛있는 음식에 대해서 신경을 쓸 경제적, 시간적 여유를 아예 빼앗아가 버렸다. [1]
또한, 국제경제학자 폴 크루그먼의 설명에 따르면, 당시의 도시는 천연재료의 산지와 멀리 떨어져 있는 데다 겸하여 신선한 음식을 싼 가격에 대량으로 생산하여 운송을 하는 수단이나 오랜기간동안 식료품을 신선하게 보관할 수 있는 냉장고같은 물건이 존재하지 않았었다. 그래서 빅토리아 여왕 시대의 런던은 100만 이상이 넘는 인구가 살고 있었지만, 여전히 운하를 통해서 마차가 끄는 운반선으로 실어온 음식을 먹어야만 했다. 따라서 런던의 도시 사람들은 장기간 보관할 수 있는 식품에 주로 의존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를테면, 절인 채소류와 고기, 그리고 냉장할 필요가 없는 근채류가 그것이다. 이런 식재료만으로 일정 수준 이상의 식문화를 향상, 유지하는 것은 당연히 어려울 수 밖에 없었다. 신선한 식재료를 구하기 어려웠던 문제가 조리법에도 영향을 주었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고기건 야채건 선도가 떨어지는 탓에 말라비틀어질 정도로 바싹 굽는 습관이 생겼다는 설이 있다.
그리고 런던 사람들이 남부럽지 않게 신선한 음식을 먹을 수 있는 기술이 나올 무렵에도, 그들은 이미 빅토리아 시대의 형편없는 식습관에 익숙해져 버린 상태였다. 그리고 식재료에 들어갈 돈으로 영국의 희석식 소주라고 부를 수 있는 싸구려 술인 진(Gin)을 사서 마셨다. 칵테일 중에 진을 베이스하는 종류가 많은 것은 맛없던 진을 맛있게 먹고자 했던 노력의 산물이라고. 맛없는 식사를 먹을 돈으로 기분 좋게 마실 술을 사마시는 격으로 이 당시의 정신나간 사회상은 "진의 거리" 라는 삽화로 묘사되기도 했다. (그 당시 영국 노동자의 평균 수명을 40세로 만든 원인이기도 하다. 1820~1830년대 맨체스터, 리버풀 등 공업도시에 살았던 노동자의 평균수명은 겨우 15~19세였다고 한다.)[2]다만 이 때 평균 수명이 매우 낮았던 것은 사실이지만 여기엔 약간의 통계적 오류도 포함되어 있다. 당시 열악하다는 말로는 부족할 정도로 처참한 위생 환경 및 식습관, 과도한 아동 노동[3]으로 인해 아동 사망률이 극도로 높았기 때문이다.
다만, 산업화 과정은 굳이 영국뿐만 아니라 미국, 프랑스, 독일 등 어지간한 나라들은 다 거친 것이다.[4] 이 부분에 대해서도 국가간의 비교가 요구된다.
3 금욕적이고 변태적인 교육 방식[5]
사실 중세 시대부터 영국은 유독 그리스도교, 특히 청교도의 영향으로 금욕주의가 매우 성행했다. 이 때문에 풍족하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매우 좋지 않게 여겼는데 특히나 요리 쪽에서는 이게 매우 심했다고 한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영국인들이 이러한 인식을 넘어 음식을 맛있게 요리하는 행위 자체부터 '망신스러운 수치'나 '용서할 수 없는 반역'으로 국가적 차원으로 매도한 것이다.
이런 극단적인 인식이 공식적으로 엘리자베스 1세 시대부터 있었는데, 당시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이 시행한 '부랑자법' 에서 파생된 정책이 있었다. 그런데 그 정책이라는 게 바로 요리사들마저 허가받지 않은 부랑자로 간주하여 사형 선고를 받게 되어있는 정책이라는 것이다!!! 이건 그야말로 국가적인 차원으로 작정하고 영국의 '요리' 라는 문화 그 자체를 말살시키려는 것이 아닐 수가 없다. 문화대혁명의 원조 실제로 그 시대의 영국에서는 이런 이유로 많은 요리사들이 가톨릭 신자들과 더불어 처형되거나 해외로 도피하는 일이 매우 성행했다고 한다.이런 풍조가 얼마나 심했는지 제이미 올리버가 영국 정부에게 찍혀가지고 미국이나 프랑스로 망명했다는 루머도 있었다... 이는 후술할 '식문화에 대한 경멸' 의 근본적인 원인이 된다.[6]
영국의 식문화가 본격적으로 나락에 떨어지게 되는 계기는 빅토리아 시대 영국인들의 아동학대가 의심스러운 '금욕주의적이고 변태적인 교육 방식'에서도 큰 원인이 있다. 금욕주의적이었던 당시의 교육 풍토에서는 "사리를 올바르게 판별할 수 없는 아이에게 맛있는 음식을 일찍 주는 것은 죄악이다." 이라는 이상한 사고방식이 팽배했다. 일례로 감리교의 창시자인 존 웨슬리는 아이들에게 자신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무지하고 미약한 존재라는 사실을 스스로 깨닫게 하게 위해서 "즐거움을 안겨주는 맛있는 음식을 처음부터 먹지 못하게 해서 식탁에서의 기대감을 아예 꺾어놓는 방법이 특히 바람직하다."고 여겼다.
이런 그의 경향은 그의 어머니에게서 기인하는데(그리고 그 어머니는 당대 문화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그의 어머니 수잔나가 그에게 참고하라고 보낸 그 자신의 양육 방침에 대해 상세히 기록한 편지글[7]을 보면,
"아이 스스로 골라 먹는 것은 불가능하고 어른들이 골라준 것으로, 그것도 반드시 어른들 앞에서 하루 세 끼만 먹어야 하고 언제나 유동식만, 오로지 1가지 음식만으로만 배를 채우는 것을 허용한다."
"그 외 간식이나 기타 추가적인 음식을 입에 대는 것은 그런 일을 시도했을 시 그에 동조한 식모까지 덩달아 매를 맞을 만큼 철저히 금지한다."
"이런 식으로 애들을 기르면 애들이 무엇이라도 다 먹게 되고 맛없는 약도 잘 먹게 될 것이다."
"아이가 무지하고 악한 존재라서 그 고집을 아주 어린 시절부터[8] 어른이 강력한 처벌로 꺾어놓아 회초리를 두려워하게 만들고 우는 소리조차 내지 못하게 만들어 집 안이 아이가 사는 것 같지도 않게 아주 조촐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 당시, 그리고 현재에 이르러서도 영국의 성인들이 티타임을 빙자해서 하루에도 몇 번씩 간식을 먹어대는데 집착하는 문화가 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사실상 아이들의 영양 불균형을 방조하는 아동학대와 다를 게 없는 교육 방식이었다.
또한, 웨슬리는 존 로크의 인식론[9]의 인식에 기인해 '어린 시절에 매우 강도 높은 교육을 실시해야 성인이 되었을 때 이상적인 인간이 될 것이라 여겼다'. 당시 영국의 상황은 가히 무정부적인 상황으로 하루에도 수없이 교수형이 집행되고 법질서 체제가 무색할 정도로 강력 범죄와 폭동, 대규모 소요 사태가 빈번히 벌어지는 것이 일상이었다. 자연히 종교적 도덕관은 이러한 상황에 반비례해서 더욱 보수화되고 금욕적이며 엄격해지는 것이 필연적이었다.
이렇게 금욕적인 방침으로 키워지고, 로크의 사상을 수용한 웨슬리가 감리교를 창시하고 위인이 되면서 그 어머니가 행했던 금욕적인 양육 방침이 이상적인 본보기로 내세워지고 사상적으로 정당화됨에 따라 그 이전에도 종교적 기준하에 금욕적인 가치를 강요하던 사회에 쐐기를 박듯이 자리매김하게 되어버렸고 거기에 한술 더 떠서 소위 소박하다고 칭해지는 시궁창 음식이 아닌 다른 맛있는 식재료들은 정신에 나쁘고 더 나아가 건강에도 좋지 않다는 마조히스트적인 말도 안 되는 미신까지 퍼졌던 것이다.
파이 헨리 채버스(Pye Henry Chavasse)[10]가 1839년에 펴낸 <아이를 키우는 어머니들을 위한 조언(Advice to mothers on the management of their offspring)>을 보면[11]
물론, 종교적 이유로서 수행에 방해가 된다든지 하는 이유로 자극적 음식을 피하는 경우는 있을 수 있겠지만... 도대체 갓 태어난 아기는 무슨 죄가 되는 건지..
이러한 양육방식을 빙자하여 영양실조를 방조하는 아동학대는 실제로는 매우 위험한 방식인데 치아가 나기 전부터 이미 모유나 우유만으로는 영양보충이 힘들기 때문에, 조금씩 여러 가지 음식을 골고루 섭취하여 영양보충과 더불어 아이가 건강한 식습관을 갖도록 여러 가지 입맛을 들여주는 것이 좋다. 특히, 태어난 지 1년 전후의 잘못된 이유습관은 편식으로 인한 더욱 편중된 영양을 주기 충분한데, 저러한 이유식은 어떤 음식이든 골고루 먹이기는커녕 오히려 편식하는 습관을 들이기 딱 좋은 잘못된 방식이며, 그에 따른 발육부진은 덤이다. 아니, 그것보다 학령기가 되기 전까지 영양실조로 인해서 생존을 절대로 보장하지 못한다!
10살이 넘으면 이제 고기를 먹여도 되지만, 8년 이상 사육된 양고기[12]를 먹여야 한다.돼지고기나 쇠고기는 먹게 되면 성질이 더러워진다고 여겨, 여전히 금지다. 그렇지만 역시 고기보다는 '1주일 이상 묵은 딱딱한 빵을 가루로 빻아 하루 이상 묵은 우유와 그 2배 분량의 물을 타고 3시간 동안 뭉근히 삶은 것을 3끼 먹는 것이 가장 좋다'고 되어있다. 맛이 없어서 안 먹으면 어떻게 하느냐고? 그런 상황에 미리 대비해서 책에서는 "다른 음식은 주지 않고 그것만 준다면 분명히 먹을 것이다." 라는 공포스러운 강경 대처법을 적어놓고 있다. 게다가 이는 당대의 베스트셀러였다는 것이다.[13]
더군다나 법적으로도 1336년 영국에서는 사치금지법을 통해 식탁에 오르는 요리의 수를 2가지로 제한까지 하는 상황이었다.[14]
이런 쓰레기만도 못한 음식들만 먹고 자란 영국인들이 도대체 무슨 입맛을 알겠으며, 자신의 아이들에게는 무엇을 먹이겠는가? 게다가 성장기에 필요한 필수 단백질 및 미량원소와 무기염류의 섭취가 불가능하므로 아이들의 올바른 성장에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한다. 이는 산업 혁명 시기의 아동 노동과 더불어서 영국 청년들의 신체에도 영 좋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이에 카를 마르크스는, 이 시기 영국군에 입대한 청년들이 전 시대보다 체격조건이나 질병저항력이 매우 좋지 못함을 기술한 바가 있다.
동시기 작가였던 찰스 디킨스의 《올리버 트위스트》는 학대에 가까웠던 영국 아동들의 양육 실태를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디킨스, 마르크스가 살던 시대는 영국 노동자들의 삶이 가장 막장이었던 시절로 당시 영국인들의 평균 수명은 고작 28세였다! 같은 시기 중국인들의 수명보다 짧았다는 것이다! 더 기가 막힌 것은 노동자의 수명은 평균 17세, 어느 정도 먹고 살 만한 중산층까지도 평균 50세에서 38세까지 떨어져있던 때였다![15] 이런 상황이다보니 아이들에 대한 혹사(당시 5살 아이의 평균 노동시간은 15시간이었다)와 학대에 가까운 영양섭취는 다른 유럽인들은 물론이고, 당시 동인도 회사에 있던 영국인들까지 우려를 했을 정도였다.
마르크스 사상이 예견하는 자본주의의 미래와 웰즈의 <타임머신>이 묘사한 미래 영국, 아예 몰록과 엘로이로 분화한 두 계급의 미래는 저런 현실에서 나왔다고 보면 그렇게 틀리지 않으리라. 제2차 세계대전 때도 독일의 청년들의 평균적인 건강과 신체능력이 영국의 청년들보다 훨씬 나았다고 한다. 비록 독일은 독재를 위해서 한 짓이긴 했지만, 그나마 학교에서 아동/청소년들의 식사와 운동을 국가에서 체계적으로 관리했으며 전쟁에 나가서 싸워야 하는 젊은 인재들의 영양불균형을 절대로 방관하지 않았다. 단적인 예로, 독일의 중ㆍ고등학교를 뜻하는 단어인 '김나지움(Gymnasium)' 은 고대 그리스어로 체육관을 뜻하는 '김나지온(Gymnasion)' 에서 모티브를 따왔다. 독일의 학교에서도 체육 활동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청년들의 체육 활동을 장려하려면 건강한 신체가 중요하므로, 당연히 올바른 영양 섭취에 크게 신경을 썼던 것이다.[16] 하지만, 영국은 노동환경은 나아졌을 망정, 아이들의 영양상태는 그다지 나아진 것이 없었던 듯하다.
그리고, 이 미친 짓의 절정은 보어전쟁 시기에 일어나는데, 보어전쟁 당시 영국군은 보어인 난민들을 위한 캠프를 세워 보어인 민간인들을 반강제로 수용하였다. 게다가 그들에게 주어진 식단은, 위에 서술된 음식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나마도 1900년 키치너가 부임한 이후로 식량 공급을 중단시키고 민간인 수용을 강제화하여 강제수용소가 되었다. 대체 난민들이 무슨 죄를 지었길래 쓰레기를 먹인단 말인가? 사실 음식물쓰레기를 수거하는 용도다
4 아아! 전쟁(제2차 세계대전)전 좋았던 옛날이여!
Oh, the Glories of Pre-War Days![17]
1939년대 후반 2차대전 독일의 유보트 공격으로 인해서 해상 운송이 줄자 영국은 배급제를 시작했고 얼마뒤 1940년대 부터는 고기, 시리얼, 비스킷, 설탕, 버터, 홍차, 베이컨, 잼, 유제품 등 거의 모든 필수 식료품으로 확대되었다. 후술하겠지만 전시에 식량 증산 운동을 한다고 난리법석을 떨어봤지만, 결국 도시에서는 제대로 된 식자재가 항상 부족했으며 (당시 농부들이 배급제 하에서 몰래 작물을 빼돌린 것은 논외로 하더라도) 외곽에서 작물을 생산하는 농부들을 제외하고는 정상적인 요리를 만들 재료조차 모자랐다. 덤으로 수많은 식당과 카페들이 식료품의 부족으로 인해 폐업을 하게 되면서 영국 요리가 더욱 창궐하는 원인이 되었다. 당시 배급제에서 빠진 품목이라면 피시 앤드 칩스 정도인데, 예외없이 영국 요리의 새로운 전설을 창조하고 현재까지 내려오게 된 것이다.
우리는, 전후에도 욕조에 완전히 앉지 않으면 무릎까지 차오르지 않는 물에서 목욕을 했어요. 당근을 씹으면서 달다고 생각하며[18] 우리는 부모님에게 전쟁 이전에 대해 말해달라고 조르죠. 그리고 그들이 말해주었던 담배 모양의 초콜릿과 통조림이 아닌 진짜 파인애플에 대해서 생각해보곤 했죠.당근만 있고 과일은 없는 현실에 한이 맺힌 영국인들은 당근을 과일 대신 케익에 넣기 시작했다. 물론 당근 케이크가 본격적으로 완성되어 먹을만해진 것은 미국으로 건너간 후이다.[19][20]영국작가 수잔 쿠퍼(Susan Cooper)
(전후) 인생이란 살아남는 것, 있는 것을 가지고 최선을 다하는 것이었다. 1948년에는 배급량이 전시 때보다도 떨어졌다. 빵은 분필을 씹는 것 같은 맛이었다.[21] 그리고 으깬 감자에 돼지기름, 약간의 설탕, 말린 과일과 밀가루를 넣고 후식(dessert)이라 부르는 것이 평범한 레시피였다.세라 라이얼(Sarah Lyall) The Anglo Files: A Field Guide to the British, 2008, P. 212)
게다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나서도 승전국인 주제에 배급제가 1954년 7월 4일까지 계속되어 한국전쟁중에도 영국은 배급제를 유지하고 있었다. 미국은 전쟁이 끝나자마자 매몰차게 돈줄을 끊어버렸고, 덕분에 영국의 경제는 끝없이 나락으로 추락했다. 미국이 승전이후 1가정 1자동차가 가능해질 정도로 호황을 누리고, 패전국들인 독일과 일본이 미국의 원조로 호황을 누리고 있을 순간에도 영국정부는, 아직도 버터의 양이나 고기의 무게 같은 것이나 따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 쯤 되면 정말 막장이 아닐 수 없다. 덕분에 영국 국민들의 생활은 헬렌 한프의 <채링크로스 84번지>처럼 처절했다. 얼마나 심각한 상황이었냐면 당시 나이 어린 학생들이 겨우 식빵 2조각으로 하루를 연명하는 사례도 있었다고 한다. 일부 영국인들은 15년 전(대공황 당시)의 서민경제가 훨씬 더 나았다고 말한정도였다.
게다가 50년대 이후에도, 영국의 경제상황은 다른 유럽국가들과 비교해서 낙제점을 면치 못했다. 광산업계의 파업은 끊이지 않았고, 1979년의 이른바 불만의 겨울(Winter of Discontent; 영국병 참조) 때에는 사회 전체가 파업에 들어간 것으로 보일 정도로 나라 전체가 스톱했다. 아니 후진한 건가? 그 당시에는 묘지를 파는 인부들까지 파업해 내각은 쌓이는 시체를 어떻게 하면 좋을지 고민했다고. 오죽하면 1976년에 국제통화기금으로부터 금융구제를 받았을까?
(...) 최근에 경작이 끝난 땅에 콜리플라워를 심습니다. 이런 유리 온실은 신선한 야채가 모자라는 겨울에 채소를 제공해주는 귀중한 자산이었죠.-The Wartime Kitchen & Garden, BBC2
직접 채소를 길러먹으라고 권하는 당시 포스터 |
아이러니한 사실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고기류의 배급이 모자랐던 탓에 없는 땅까지 쥐어짜서 곡물과 채소류를 자체적으로 경작해서 먹어야 했는데, 이 때문에 당시의 영국인들은 영양학적으로 가장 균형잡힌 식사를 했다는 점이다. 이런 상황에 맞는 요리법도 개발되었다. 가정학자 마거릿 패튼[22]은 배급제에 시달리던 워킹맘의 고민을 해결하기 위한 레시피 개발에 앞장섰다. 가짜 크림, 분말 달걀, 다람쥐 고기 같은 걸 썼다고.
2차대전 종전 후 영국은 미국의 푸들 똘마니 혹은 세컨드 보스 정도 취급이지만, 그 이전까지는 윈스턴 처칠이 프랭클린 D. 루스벨트, 이오시프 스탈린과 함께 얄타 조약을 맺는 세계구급으로 놀았던 거대한 대영제국이었다. 그러니까 이러한 악독하고 영양가도 없을 것 같(지만 그래도 배는 차니까)은 음식들은 30~40년대를 겪었던 사람들에게는 "그래도, 그 때는 우리가 어마어마했었지?" 라는 자부심을 불러일으키는 촉매제 역할도 한다는 것이다. 비단 음식뿐만 아니라 전쟁을 겪은 이 세대의 사람들의 생활자체가 영광스러웠던(?) 전쟁시절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사라 라이얼에 의하면 이들은 해가 완전히 져서 자연채광이 없어질 때까지 집안의 전등을 켜지 않고, 욕조에 펜으로 선을 그어 그 위까지 물이 넘치지 않게 하고 또 목욕한 물을 쓰지 못할 때까지 재활용을 한단다. 오죽하면 엘리자베스 여왕(그녀도 전쟁 당시 전차정비공으로 활약한 전쟁세대이다)까지 지금도 버킹검 궁내의 화장실을 돌아다니며 쪼끄매진 비누들을 모으고 전등 전구들을 일부러 희미한 걸로 바꾸고 다닐까? 이게 단순히 일시적으로 그친 일화가 아니라, 2013년에도 궁전에 비치된 너트류를 경비병들이 너무 많이 먹지 않도록 접시에 줄을 그었다는 일화가 기사로 전세계에 게재되었을 정도니 말이다.
5 결론
즉, 이 시기 영국 요리가 몰락하게 되는 과정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산업 혁명으로 인한 급격한 산업화, 도시화 과정에서 영국의 국민들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노동자 계층은 도시 이주와 열악한 노동환경으로 인하여 전통 농촌사회에서의 식문화를 상실하고 이를 회복, 유지할 기회조차 얻지 못했다. 또한, 엘리자베스 시대부터 시작해서 빅토리아 시대까지 이어진 금욕주의를 무조건적으로 강조하는 교육제도는 열악한 식문화를 개선하기는 커녕 오히려 이를 권장하고 합리화하게 되었다. 제 1차, 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영국의 경제는 극도로 침체되어, 식문화가 개선될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게 되었다. 결국, 전쟁을 겪었던 세대는 열악한 수준의 악독한 음식들을 계속해서 아이들에게 먹일 수 밖에 없었고, 그들의 아이들도 별로 좋아지지 않는 경제에다 또 이러한 싸고 질이 나쁜 음식을 그들의 자식에게 먹였고, 결국 이 아이들은 자라나면서 이러한 음식에 미묘한 향수를 느끼게 된 것이다.- ↑ 실제로, 한국 역시 근대화를 거치면서 일반인들 대상으로 하는 식당에서는 3첩반상과 같은 기본 상차림조차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다. 국밥처럼 아예 밥이 말아서 나오는 경우도 태반이었고, 간장 대신 소금, 이후에는 간을 할 필요조차 없는 고추장 양념일색으로 바뀌었다는 점도 상기해보기 바란다. 재밌는건 일본 또한 비슷한 시기가 있었고 결과적으로 규동과 초밥이 만들어졌다. 물론, 초밥은 에도 시대 이전부터 거슬러올라가면 원류가 있다.
- ↑ ('맥주 거리 / 진 거리', 윌리엄 호가스, 1751. 2차출처 위키피디아)
- ↑ 10세 전후의 어린이들이 하루 10시간 이상 일하는 경우가 흔해 빠졌다.
- ↑ 저장기술이 발전하지 않은 19세기 한정.
- ↑ 악마의 정원에서 - 스튜어트 리 앨런 저 中 인용.
- ↑ 이게 농담 같아 보인다면 7대 죄악 중 폭식이 있는 데서도 알 수 있듯, 먹을거리에 탐닉함이 지나친 욕심이라는 시각은 그리스도교 사회에서 오래된 전통이며, 그래서 종종 중세시절에 거룩한 인물로 추앙받은 사람은, 적어도 전해오는 바에 따른다면, 이러고도 살 수 있을까 싶을 만큼 극단적으로 음식을 적게 먹었다. 그런데 왜 영국이 특히 문제가 되느냐면 유럽 대부분 나라에서는 중세 중후기만 되어도 덕목은 덕목이고, 거룩한 사람은 거룩하게 살겠지만 보통 사람은 좀 적당히 하자는 식으로 넘어갔는데, 정작 헨리 8세가 성공회를 만들면서 뛰쳐나온 영국이 이게 심해진 것이다. 다만 진짜 문제의 원인이라고 한다면 성공회가 아니라 바로 한국에서도 주류 개신교 교단으로 널리 퍼진 칼뱅주의(장로교)가 문제라 할 수 있다. 이 쪽은 실제로 취리히 등에서 주말 예배 안 나왔다고 교수형에 처할 정도였다.
- ↑ 퍼시 파커, '존 웨슬리의 일기', 크리스천 다이제스트, 1984.
- ↑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고 기록되어 있다.
- ↑ 새로 태어난 아이의 지성은 마치 아무것도 쓰여있지 않은 백지와 다름없다. 비모순의 법칙을 포함한 모든 지식은 경험을 통해 습득된다. 그러므로 모든 지식은 선험적이 아니라 후천적이다.
- ↑ 직업은 외과 의사. 귀족 혈통이며 1810년에 출생하여 1879년에 사망했다. 총 12권의 육아 관련 서적을 저술했으며 그 중 몇 권은 부인 Frances lzon과 공동저술이다. 그 중 2권은 사후에 출간되기도 했다. 그의 후손들은 아직도 영국에 있다. 다만 파이 헨리 채버스의 외아들 Reverend William Izon Chavasse는 아버지처럼 의학이 아니라 예술 분야에 종사했고 두 아들 중 막내 John Evelyn Chavasse가 2살의 나이로 죽자 그 충격으로 신부가 됐다. 그가 부모의 육아법을 따랐는지는 불분명하다.
- ↑ 구글 도서에서 무료로 볼 수 있다.
- ↑ 양이 이렇게 늙으면 노린내가 상당하다.
- ↑ 물론 이런 변태적인 사고방식이 다른 나라에도 없는 건 아니었는지 그 유명한 장 자크 루소도 에밀에서 육식이 영양분도 불충분하고 면역력을 떨어트리는 등 악영향만 끼친다고 써 놓았다. 하지만 루소는 18세기 사람이다. 위로 올라가서 저 책이 나온 연도랑 비교해 봐라. 결정적으로 루소는 채식까지 까지는 않았으며 오히려 유모와 아이 양쪽에 채식을 권장했다! 이것만 봐도 당시 영국인의 식재료에 대한 관점이 전 세기의 사람만도 못한 막장이라는 걸 알 수 있다.
- ↑ lbid.,P152; 이지은, 감각의 미술관' 2012, p167 참조.
- ↑ 저렇게 된 이유? 저런 쓰레기만도 못한 식생활에 의한 영양실조에 가까운 불균형 상태와 더불어 지독한 환경오염, 거기에 부족한 위생관념에 의한 전염병까지 겹쳐 그야말로 서민들은 싸그리 죽어나가던 때였다.
- ↑ 사실, 교육의 역사를 보면 알 수 있지만, 고대 그리스 때부터 젊은 청년들의 교육을 담당한 시설은 신체를 단련할 수 있는 체육관이었다. 체육관에서는 우수한 군인들을 양성하는 것에 주된 목적이 있었으며 체조, 격투, 레슬링, 검술, 마장술 등을 익히는 것이었다. 대표적인 예로, 뜀틀은 말에 올라타는 기술을 익히기 위한 실내운동이었다. 그렇게 체육관이 생기게 되자, 자연스레 땀을 씻을 수 있는 목욕탕 같은 시설과 책상이나 의자같은 교육에 필요한 도구와 시설들도 같이 필요로 하게 되었으며, 숙련된 기술을 가르칠 수 있는 사람. 즉, 교사가 필요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더욱 우수한 군인들을 양성하기 위해서 역사, 군사학, 철학, 예법, 언어, 문자, 과학 등등도 같이 교육을 해야 할 필요가 있었고, 오직 신체단련만 담당했었던 체육관은 어느샌가 아이들의 기초교육을 담당할 수 있는 교육시설인 학교로 기능이 확장하게 된다.
- ↑ 제목은 "오, 전쟁 이전 (기간)의 영광이여!" 라는 뜻이다. "해가 지지 않는 나라" 라고 자부하던 대영제국을 그리워하는 의미라 할 수 있다.
- ↑ 설탕과 유제품 비축량이 계속 부족해지면서 아이스크림 생산이 엄격하게 통제되자, 정부에서는 '아이스크림보다 당근이 건강에 좋다'고 선전하면서 나무 막대기에 아이스바 대신 생당근을 꽂아 팔도록 했다.
- ↑ 아가사 크리스티의 전후 작품에도 비슷한 분위기가 자주 언급된다.
- ↑ 사실 당근 케이크는 영국 요리가 아닌 스위스 요리였지만 영국으로 건너가면서 뭔가 이상한 물건(?)으로 둔갑했고 그게 유명해진 것이다
- ↑ 실제로 대영제국 시대 때 빵의 표백을 위하여 분필이나 백반을 섞었다고 한다.
- ↑ 2015년 6월, 99세로 별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