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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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구조사 영상. 특정 정당의 압승이란 점에서 완전 역대급 선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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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급 선거의 역대급 결과(...)

1 개요

2006년 5월 31일 시행된 대한민국전국동시지방선거. 3,706만 4,282명 유권자 중 1,911만 6,622명이 투표하여 투표율은 51.6%로 최종 집계되었다. 여러모로 역대급 선거인데, 한 정당이 이렇게 싹쓸이 한 전례가 없었으며, 집권여당이 이 정도로 참패를 당한 적 역시 없었기 때문이다(...)

한나라당이 그야말로 대승한 선거로, 이 선거를 발판으로 2007년 제17대 대통령 선거를 통해 정권을 빼앗아 오게 된다. 열린우리당은 이 선거로 완전히 그로기 상태에 빠져들었고, 17대 대선에서 대통합민주신당 정동영 후보가 30%도 얻지 못하는 대패를 하게 된 직접적인 원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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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40%를 상회하던 한나라당의 지지율 대비 열린우리당은 20% 언저리에 머물러 있었고, 다급한 마음에 급기야는 대한민국 선거 역사상 최초로 상대 당의 싹쓸이를 막아달라는 기상천외한 퍼포먼스를 하기에 이르렀다(...) 한편, 그러는 와중에도 열린우리당의 일부 의원과 당직자들은 이번에 패배해도 본선에서는 승리할 수 있다는 근거가 희박한 정신승리를 했으나 막상 그 본선에서는 더더욱 싱거운 결과로 이어지고 만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민주당계 정당의 암흑기(2006~2008)의 본격적인 시작.[1] 이는 이듬해의 17대 대선과 곧이어 치러진 제18대 국회의원 총선거까지 이어진다.

특별한 점으로는 이 선거를 통해 제주도제주특별자치도로 재편이 되었다는 것. 또한, 이 선거를 앞두고 민주노동당이 발의한 주민소환제가 통과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지방의원인 기초의원에 대해 정당공천제도와 유급제(봉급 지급제), 중대선거구제와 비례대표제가 시행되었다.# 2005년의 우리당-한나라당의 빅딜에 따른 것. 제6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논란이 된 기초의회 선거제도에 대한 여러 제도가 이때부터 시행된 것. 다만 광역의회 정당비례는 2002년부터 적용되었다. 또한 2005년 공직선거법 개정으로 인해 최초로 국내 장기 거주 외국인이 지방선거 투표권을 행사하게 된 지방선거이기도 했다.

다행인 건 투표율이 2002년 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의 투표율 48.9%보다 조금 높아 역대 최저를 면했다는 것?[2]

투개표 전부터 이미 판세를 예상해서인지 당일 편성표에서부터 MBC, SBS 개표방송은 밤 10시 종료로 나와 있었다. 10시 이후에 두 방송사는 뉴스 시간을 빼면 죄다 정규편성을 진행했다.(....)

2 대한민국 여당 역사상 최악의 참패

2004년 노무현 당시 대통령 탄핵 역풍에 힘입어 제17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299석 중 152석을 기록하는 압승을 거뒀던 여당 열린우리당은 2004년 총선 압승 이후에 사분오열하는 모습을 보이고 이슈 선점을 전혀 하지 못하는 무기력한 모습을 보여왔다. 2004년, 2005년 재보궐선거에서 참패한 것도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여당의 무덤이라는 지방선거가 도래했으니...

결국 여당은 노무현 정권의 내각을 맡던 각료들을 광역자치단체장 후보에 내보내는 극약처방으로 나섰다. 강금실 당시 법무부 장관을 서울특별시장 후보로, 진대제 당시 정보통신부 장관경기도지사 후보로, 김두관 당시 행정자치부 장관을 경상남도지사 후보로, 오영교 전직 행정자치부 장관을 충청남도지사 후보로 내보내는 등이었다. 그러나 공식 선거 기간에 들어가면서 그나마 팽팽하던 여론조사의 대결구도는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이들 후보들의 지지율이 30%를 넘지 못하고 있었을 정도로 여당의 지지율이 폭망했다(...) 결국 열린우리당 후보들은 선거전 내내 무기력한 모습만을 보였다. 열린우리당 측에서는 그러면서도 내심 반전을 기대했으나...

반전? 그런 건 없었다. 결국 이들 후보들은 개표 1%가 되기 전부터 떡실신 당하고 말았다. 다음해 정동영 후보가 개표 1%도 되기 전에 떡실신 한 걸 예행 연습했다. 선거전 내내 무기력하게 끌려다녔기 때문에 이 행태가 고스란히 선거 결과로 나와버린 것. 물론 다른 후보들 역시 20%나 넘었나? 할 정도로 엄청나게 저조한 결과를 얻었다. 선거전 초반 우위를 보이던 대전광역시도 막판 박근혜 테러사건으로 한나라당에 빼앗겼다.

수도권에서의 한나라당 후보 득표율이 영남권 한나라당 후보 득표율과 별 차이가 없었다.(...) 여당 열린우리당은 울산, 충남, 제주에서는 2위도 아니고 3위를 기록했다.[3] 거꾸로 영남지역 민주당계 득표율은 의미있는 수준은 아니었지만 이후 2010년 선거까지 통틀어 역대 최고를 기록했다(대구 이재용 21.8%, 경북 박명재 23.2%.). 경남지사에서도 김두관 후보는 4년 사이 16.9%에서 25.4%로 상승, 다음 지선에서의 당선의 발판을 닦았다.[4]

거기다 텃밭이라 생각했던 호남권 역시 전라북도만 간신히 건지고 광주광역시전라남도민주당에 압도적으로 탈탈 털렸다.(...) 출구조사 영상에서 광주광역시와 전라남도 부분을 볼 것.

3 선거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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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광역자치단체

한나라당서울특별시, 인천광역시, 경기도, 대구광역시, 대전광역시, 울산광역시, 강원도, 충청북도, 충청남도, 경상북도, 경상남도 12곳을 휩쓸었다.

열린우리당전라북도 한 곳을 건졌다.

청와대의 차출격이던 장관 출신 강금실 후보(서울시장)와 진대제 후보(경기지사)는 열린우리당 색을 탈피하려고 노력하였는데, 강금실 후보는 자신의 색인 보라색을 내세웠으며 나는 보랏빛이 좋아! 진대제 후보는 "진파랑"을 내세웠는데 이것이 한나라당과 색이 겹쳤다(...) 그러나 강금실은 초반 한나라당 후보 상대로 우위를 보이는가 싶었더만 오세훈이 출마하면서 결국 27% 대 61%라는 엄청난 표차로 광탈. 진대제도 30% 대 59%로 광탈했다. 또한 가상의 아이 보람이[5]를 행복하게 하겠다는 강금실 후보의 "보람이가 행복한 서울"은 전설적인 실패한 캠페인으로 잘 알려져있다(...) 더불어 일종의 전략공천 식으로 진행된지라 미리 준비하던 당내 후보들이 빛을 못보게 된 것도 있다. 가위바위보로 치면 맹형규, 홍준표 등의 후보군을 예상하고 내보낸 강금실 후보가 보자기를 이기는 "가위"였다면, 한나라당은 오세훈이라는 바위를 내보낸 셈이다(...) 훼이크! 선거 초반까지는 강금실 후보가 오세훈 후보를 43.1대 41.3으로 누르는 조사#도 있었지만, 선거기간에 들어가면서 여당 역시 참패의 대세를 확인하고야 말았다.

한편 국회의원이 당시 9명에 불과했던 민주당(구 새천년민주당)은 전라남도광주광역시 두 곳에서 열린우리당 후보를 너끈하게 누르며 당선되었다. 서울 시장에서도 박주선 후보가 무려 7.71%를 얻으며 나름 소기의 팀킬 목적은 달성했다.[6]

국민중심당충청도 정당을 표방했지만, 충청남도지사에 출마한 이명수[7] 후보가 27%로 2위에 그치면서 한 석도 얻지 못했다. 서울시장에 출마한 성악가 출신의 임웅균 후보는 토론에도 출연했지만 고작 0.35%를 득표.

민주노동당 역시 2002년 송철호 후보가 44%를 얻었던 울산광역시에서 25%에 그치면서 한 석도 얻지 못했다. 특히 서울시장으로 경선에서 김혜경 전 대표를 꺾은 김종철 후보[8]가 고작 2.97%를 얻은 것은 치명타였다.

3.2 기초자치단체

기초자치단체는 더욱 쏠림 현상이 심했다. 한나라당이 230곳 중 155곳을 쓸어가는 대승을 거뒀다. 무소속이 29곳, 민주당 20곳, 열린우리당 19곳(...), 국민중심당이 7곳을 차지했다. 민주노동당1998년 제2회 전국동시지방선거2002년 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당선자를 배출했던 울산광역시 동구북구에서도 참패하면서 한 석도 얻지 못했다.

한나라당은 서울특별시 25개 자치구를 모두 싹쓸이하였고, 경기도에서도 무소속 3곳과 열린우리당 1곳(구리시)를 제외한 27곳을 쓸어갔으며, 인천광역시에서도 한 석을 제외한 9석을 가져가는 등 대승을 하였다. 열린우리당은 광역자치단체장을 배출한 전라북도에서도 민주당의 5석에 못 미치는 4석을 확보하는 데 그쳤다.

열린우리당이 경남 밀양시함양군에서 승리했는데, 이는 이변으로 비쳐졌다. 하지만 밀양시장 엄용수씨는 이후 대통합민주신당을 거쳐 한나라당으로 입당하여 2010년 다시 당선되었다. 천사령 함양군수도 역시 통합민주당을 탈당하고 역시 한나라당에 입당했으며 2010년 임기를 마쳤다. 그외 열린우리당은 민주당계세가 강한 충청북도 보은군, 옥천군, 영동군의 남부 3군과 충청남도서산시, 서천군, 당진시에서 단체장을 건졌다.

3.3 지방의원

3.3.1 광역의원

733명을 뽑는 광역의원에서는 76%인 557명을 한나라당이 쓸어갔고(...), 민주당이 80명, 열린우리당이 52명, 민주노동당과 국민중심당이 15명씩, 무소속이 14명을 차지하였다. 원래 한나라당 세력이 약한 전라도 지역을 제외하면 광역의원 625명 중 약 90% 가량인 무려 557명을 한나라당이 쓸어갔다.

서울의 자치구 25개를 한나라당이 싹쓸이했던 것처럼 서울특별시 광역의원 지역구 96석(국회의원 48*2)을 홀로 싹쓸이했으며, 열린우리당은 비례 의석 2석(21.3%), 민주당과 민주노동당(각각 득표 10.4%, 9.97%)은 비례대표 의석 1석 씩을 얻는데 그쳤다(...) 한나라당은 여기에 추가로 비례 대표의석 6석(57.2%)을 확보했다. 이로서 한나라당이 차지한 의석은 무려 106석 중 102석.[9][10][11] 다른 지역도 사정은 마찬가지. 여당이 의석의 10% 이상을 얻은 곳은 전라북도와 제주도밖에 없었으며, 반대로 한나라당은 무려 7개 지역에서[12] 의석의 90% 이상을 쓸어갔다.

전국 정당별 비례 득표 합산은 다음과 같았다.

정당득표수득표율비고
한나라당10,086,354표53.76%전 지역 출마.
열린우리당4,056,340표21.62%전 지역 출마.
민주노동당2,263,051표12.06%[13]전 지역 출마.
민주당1,863,239표9.93%9개 지역 출마.[14]
국민중심당436,774표2.33%7개 지역[15] 출마.
희망사회당44,598표0.24%4개 지역[16] 출마.
시민당7,583표0.04%서울에서만 출마해 0.19% 득표.
한미준[17]5,112표0.03%서울에서만 출마해 0.13% 득표.

3.3.2 기초의원

2888명을 뽑는 기초의원은 이 선거부터 정당공천제도와 비례대표제도가 시행되었는데, 절반이 넘는 1621명을 한나라당이 가져갔다.(...) 열린우리당은 중선거구제 덕분에 간신히 1/4도 못되는 630석이라도 가져갈 수 있었다. 소선거구제가 시행된 광역의원에서 얻은 참패를 고려하면, 기초의원도 소선거구제를 했었다면 한나라당만 득을 보았을 것이다.

민주당은 276명, 국민중심당이 67명, 민주노동당이 66명을 차지하였다. 무소속은 228명이 당선되었다.

4 접전지

4.1 대전광역시

선거전 초반에는 한나라당에서 열린우리당에 들어간 염홍철 시장이 1위를 달리고 한나라당 박성효 후보(염홍철 밑에서 부시장)는 크게 뒤진 상태였다. 그러나 선거전 막판으로 갈수록 다른 지역들처럼 열린우리당 후보의 지지율이 떨어지고 한나라당 후보가 지지율이 올라가는 상태에서...

당시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가 서울에서 선거 유세를 하는 과정에서 커터칼 피습 테러를 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래서 병원으로 실려갔던 박 대표가 깨어나 한 말이 '대전은요?'였고[18], 이 말 한 마디에(?) 분위기가 반전되고 박성효 후보가 근소한 표차로 염홍철 후보를 누르게 된다.

4.2 제주특별자치도

이 선거를 통해 제주도에서 제주특별자치도로 개편되는 제주도 선거에서는 열린우리당에서 진철훈 후보, 한나라당에서 현명관 후보를 내세웠고, 당의 전략공천에 반발하며 한나라당에서 탈당한 김태환 지사가 무소속으로 나왔다. 진철훈 후보는 후보 등록이라도 했나? 싶을 정도로 듣보잡 취급받았고[19], 현명관 - 김태환 두 후보의 접전으로 선거전 초반부터 흘러갔다. 실제로 제주도의 투표율 상승에도 두 후보의 접전이 영향을 미쳤다.

개표 시작부터 투표함 하나마다 현명관 - 김태환 두 후보가 1위가 바뀌어 가며 접전이었으나, 개표 막판에 무소속 김태환 후보의 몰표가 나오면서 4000표 차로 간신히 김태환 후보가 당선되었다.

5 선거 이후

선거에서 승리한 한나라당은 본격적으로 지지율이 고공비행을 하기 시작한다. 이 선거에 불출마를 선언했던 이명박 당시 서울시장이 대선 도전을 선언하며 박근혜 대표와 경쟁을 하였다. 당내 경선이 대선 본선이라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당시 이명박, 박근혜 두 주자의 지지율은 높았으며 이후 경선에서 승리한 이명박 후보가 2007년 대선도 쉽게 따내며 정권교체에 성공한다. 결과적으로 이 선거의 결과가 다음해 치러진 제17대 대통령 선거의 결과를 거의 결정한 셈.

반면 안 그래도 차츰 내리막을 걷고 있던 열린우리당은 이 선거 이후 그나마 유지하던 20%대의 지지율도 추락하며 완전히 나락으로 빠져들게 된다. 지선을 책임졌던 정동영 대표는 사퇴하고 김근태 비대위 체제가 출범했으며[20], 이후 탈당쇼를 통해 당세가 위축된 뒤 대통합민주신당에 흡수되며 소멸하였다.

다만, 이렇게 집권한 한나라당 시장들 덕분에(?) 일부 자치단체의 시민들은 지나친 몰표를 던진 댓가를 혹독하게 치러야만 했다. 대표적으로 방만한 경영을 일삼아 후에 지방자치단체 최초의 모라토리엄 선언의 단초를 만들었던 이대엽 시장이 당선됐던 성남시[21]막장인 용인 교통을 살려보려고 무리하게 용인경전철을 추진하다 각종 비리를 저지른 서정석 시장이 당선됐던 용인시[22], 광역 화장장을 무리하게 유치하려다가 주민소환이라는 굴욕을 당한 김황식 시장이 당선됐던 하남시, 그리고 재정을 파탄내지는 않았지만, 성생활(...) 발언 문제, 호남비하하는 망언, 인종차별, 노무현 분향소 문제 등의 많은 물의 등으로 자신의 정치적 생명을 갉아먹은 이효선 시장이 당선됐던 광명시가 있었다.

그래도 성남시는 후임인 이재명 시장이 당선된 직후 2010년에 모라토리엄을 선언하고 2013년에 탈출해서 다행이긴 하지만, 용인시는 용인 경전철 개통 후에도 승객 수가 바닥을 기는 등 제대로 수익을 내지 못해 아직까지도 그 후폭풍이 이어지고 있다. 그쪽 주민이야 당시에는 어떤 참사가 생길지 모르고 투표를 했겠지만...또 모든 시민이 몰표를 던진건 아니었지만, 무능하고 부패한 자치단체장을 뽑으면 한 번에 지방정부가 망한다는 좋은 반면교사의 선례가 되었다. 게다가 민주당 김학규 시장도 용인경전철을 못막고 아방궁 행보를 계속하다가 선거법 위반으로 당선 무효가 되었고...

그리고, 서울특별시오세훈 시장은 '디자인 서울'이란 구호 아래 재선에도 성공하며 차기 대권주자로 승승장구하나 싶었는데, 고작 임기 1년이 지난 2011년에 본인이 내건 무료급식에 관한 주민찬반투표가 무산되면서 약속한 시장사퇴를 시행했고[23], 결국 직후 치뤄진 재선거에서 야권단일화 후보로 나선 박원순 시장이 한나라당 나경원 후보를 누르고 다시 서울을 탈환하게 된다.

  1. 사실 그 전에도 연이은 보궐선거 참패와 과반 상실 등으로 무언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감지되곤 했다.
  2. 1998년제2회 전국동시지방선거는 52.7%로 비슷했고, 다음 차례인 2010년제5회 지방선거는 투표율 54.4%였다.
  3. 울산은 민주노동당에(노옥희 25.2%>심규명 11.5%), 충남은 국민중심당에 밀렸다(이명수 25.4%>오영교 21.7%). 제주는 아래 참고. 사실 울산은 그래도 후보 자체를 못 냈던 4년 전보다는 나아진건데, 그래서인지 4년 후 2010년 지선에서도 민주당은 후보를 내지 않았다. 25.25%를 득표한 민노당 노옥희 후보는 이후 분당국면에서 진보신당에 입당하여 4년 후 재출마했으나 민노당에 밀려 9.48%를 득표했다.
  4. 민노당은 독자출마했으나 역시 득표율이 늘어 임수태 8.6%에서 문성현 10.05%로 증가했다.
  5. 광고 카피리스트 정철씨의 아이디어로, 미국식 캠페인을 들여 온 것. 여기서 보람이는 '서민의 자녀'를 상징한다.
  6. 다만 전략 공천에 따라 당시 출마를 노리던 김영환 전 의원이 민주당을 탈당했다. 이 두 정치인은 모두 2008년 민주당(2008년) 합당에 참여해 박주선 후보가 19대 총선에서 모바일 투표 사고 건으로 낙천 되어 무소속 당선되고, 김영환 후보는 2009년 재보궐선거 이래 민주당에 줄곧 당선 중이라는 점이 흥미롭다.
  7.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 총선거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총선거를 통해 재선 국회의원이 되는데 성공했다. 2014년 제6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충청남도지사에 후보로도 거론되었다. 재산이 적은 국회의원 순위권이란게 흥미롭다.
  8. 2014년 현재 진보신당(현 노동당) 전 부대표. 2006년 당시 김종철 후보가 36세의 젊은 나이로 당내 경선에서 김혜경 전 대표를 이긴 것(2651:2428)은 PD계의 파란으로 받아들여 졌으나 그 동력을 이어가지는 못했다. 이 경선은 당시 서울시장 후보들 가운데 유일하게 경선을 치른 사례였다. (민주당과 국민중심당을 포함한) 다른 모든 경우는 모두 전략공천. 여담으로 김혜경 대표 역시 진보신당으로 이적하여 통진당 합류 문제로 분당 될 때도 탈당하지 않고 비대위 대표 대행을 지냈다. 이 시점이 2011년 하반기 재보궐선거 시점이었다.
  9. 사실 4년 전 스코어도 한나라 87 : 새천년민주당 14였다(...)
  10. 그런데 2008년 재보궐선거(6월 - 상반기 선거)에서 2008년 촛불집회의 바람으로 서울 광진구 4번 선거구와 강동구 3번 선거구에서 민주당이 승리하면서 민주당 의석은 5석으로 불어났다. 물론 의미는 없었지만(...) 재보궐을 거치면서 한나라당 의석이 정확히 100석이 되었다. 100인대장 오세훈
  11. 거꾸로 4년 뒤의 지방선거에서는 민주당이 79석을 확보하면서 2/3를 장악하고 한나라당은 27석으로 크게 쫓겨나게 된다. Out 100
  12. 서울, 인천, 경기, 강원, 부산, 대구, 경북
  13. 이 득표는 2년 전 선거인 17대 총선의 13.0%와 큰 차이가 나지 않는 득표로, 이를 통해 17대 대선18대 총선에서도 의미있는 성과를 기대해 볼만 했지만 노선 갈등과 분당으로 이어지면서 12%의 반토막인 6%도 못 건지는 참혹한 결과를 낳았다.
  14. 강원, 대전, 충북, 충남, 대구, 울산, 경남에서 비례 불출마. 경북과 부산에서 출마했으나 2% 득표를 얻었다.
  15. 서울, 경기, 대전, 충북, 충남, 대구, 경북
  16. 서울, 인천, 경기, 광주
  17. 정식 명칭(?)은 한국의 미래를 준비하는 모임. 사실상 고건 전 총리 추대 모임이었으나, 고 전 총리는 거절하였다. # '짝사랑' 이용휘 대표의 경우 이후 희망한나라당까지 이어지는 신당 창당/재창당 행보를 계속했다.
  18. 일정상 대전 유세가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
  19. 득표율은 16.1%였다. 단적으로 말하면 아주 낮은건 아니지만 여하간 묻힐만한 득표. 다음 지선에서 탈당한 우근민 지사 대신 버리는 카드격으로 출마한 한겨레 출신의 고희범 후보도 18.0%를 득표하면서 민주당계 흑역사를 이어갔다.
  20. 역설적이게도 김근태 대행의 임기는 열린당 역사에서 가장 길었다.
  21. 게다가 이대엽 前 시장은 시장 재임 시절에 노무현 분향소 구둣발 문제(...)와 퇴임 이후 뇌물죄 및 많은 물의 등으로 비판을 받았다.
  22. 이정문 시장은 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당선됐다. 그 후임이 바로 서정석 前 시장.
  23. 당시 한나라당 홍준표 대표가 언제 사퇴한다고 기간은 말해둔게 아니니 버티라고(...) 그렇게 말렸지만 오세훈 시장은 그냥 자진사퇴한다. 이에 대해 쿨하다고 인정해준 지지자도 있는 반면, 한동안 오세훈 전 시장을 역적 취급하는(...) 사람들도 꽤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