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위 문서: 6.25 전쟁
목차
1 전쟁의 영향
1.1 부정적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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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기간 동안 남북을 합쳐서 약 200만 이상이 사망 또는 실종된 것으로 추정되며 미군 사망자도 45,000명에 이르는 등 기간에 비해 사망자가 많다. 이후 베트남 전쟁에서도 그러했듯 전체 사망자 중 민간인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다. 게다가 그 대부분이 1950년의 남은 6개월 동안 발생했다. 지역별 인명피해로는 서울특별시/경기도 지역(특히 북부지역)이 제일 많고 그다음엔 강원도 지역, 나머지는 거기서 거기다. 그 이후 전투는 고지쟁탈전 위주라 사망자가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SBS에서 한국전을 배경으로 만든 다큐멘터리에서는 확인된 사망자만 600만이라고 방송하기도 했다. 1950년대 당시 남북한 합쳐 한반도의 인구는 2~3천만 명으로, 한반도 인구 중 이 전쟁으로 인해 죽은 사람만 낮게 잡아도 10~20% 정도. 이는 거의 2차대전 동안 소련, 폴란드, 나치 독일, 리투아니아, 라트비아가 입은 인구 대비 사망자 비율에 준하거나 맞먹는 급이다. 태평양대전에서 원폭이나 동경대공습을 맞았다고 하는 일본도 인구대비 2차대전 사망자 비율은 6% 가량 정도인 걸 보면 참 안타까운 일이다.[1] 과장을 섞자면 간신히 북한군으로부터 막아낸 지역 경상남도이나 제주도에 사는 사람들을 제외하면 당시 이 전쟁으로 가족, 이웃, 친지, 친척을 잃지 않은 조선인은 거의 없다시피했다. 거의 독일과 동유럽 국가들이 2차대전 동안 겪은 피해에 가까운 수준이다.
다만 인명 피해는 남한보다는 북한이 압도적으로 많다. 우선 남한의 경우 전쟁 초기에 집중적으로 피해를 본 뒤에는 인명 피해의 대부분이 군병력으로 국한됐고 그나마도 고지쟁탈전 위주라 장기간 지속되면서 병사들의 피를 말리기는 하지만 사상자는 정작 많지 않았다. 더욱이 북한 지역에서 월남한 인구도 많아서 전후 인구가 오히려 소폭 증가했다. 전쟁 전 남한의 인구는 2,050만 명인데 1955년에는 100만 명이 더 늘어났다.
반면 북한은 기존 사망자도 남한에 비해 많았던 데다 월남민이 워낙 많아서 실제 감소의 규모는 약 200만 명 정도로 추정될 정도로 심각한 편이었다. 전쟁을 일으킨 김일성이 전쟁 중반부터 포로의 일괄송환과 휴전에 목을 맨 반면, 정작 침략당한 이승만은 오히려 강경하게 휴전을 반대하는 입장이 된 것도 실상은 이런 사정 때문이었다.
정치적으로는 휴전 이후 김일성과 이승만이 자신의 반대파를 숙청, 탄압하는 대의명분을 얻으면서 양측의 권력이 공고화되는데 엄청난 공헌을 하게 되었다. 물론 안 좋은 의미로. 북한의 김일성은 소련파, 남로당파, 연안파 등 조선노동당 내부의 다른 파벌들을 거의 숙청하여 북한 지도부를 종전의 연립정권 형태에서 김일성의 직계인 만주파가 정권을 독식하는 구조로 바꿔버린다.
한국에서는 종전 이후 공산주의에 대한 증오를 바탕으로 국가보안법을 이용하여 야당 인사들을 탄압하였다. 특히 남한에서는 휴전 이전부터 발췌 개헌이 전쟁시의 혼란상을 이용해 이루어지기도 했다. 거기에다가 북한에서 현재까지 독재가 진행되고 남한에서도 1987년 6.29선언 이전까지 독재가 이루어졌다.
6.25 전쟁의 또다른 수혜자는 다름 아닌 일본이었다.
국제적으로는 태평양 전쟁 이후 경제적으로 심각한 타격을 받고 전후복구에 전념하던 일본은 한국 전쟁을 계기로 미국에서 대량의 보급물자 생산 및 수송을 발주받은 덕에 불황을 조기에 벗어나 경제 성장의 발판을 다졌다. 소독약만 팔아서 떼부자된 사람들도 존재했을 정도다.[2]
또 일본에서 차출된 미군 병력의 공백을 막기 위해 1954년 자위대의 전신인 경찰 예비대(警察豫備隊)가 신설되었다. 처음부터 군대가 아니였고 이를 계승한 자위대는 지금도 형식상 군대가 아니다.
다만 당시 일본 총리였던 요시다 시게루가 한국에서 전쟁이 나자 "일본은 살았다!"라고 외쳤다는 소문이 있는데 전혀 사실이 아니다. 다만 전쟁이 터지자 지지율이 큰폭으로 상승한 건 사실이며, 그런 소문이 날 정도로 일본에게 호재였던 것은 분명하다.
물론 일본이라는 국가는 당시를 기준으로 해도 메이지 유신 이래 이미 사회, 경제적으로 완성된 근대 국가였기에 한국전쟁이 없었다 해도 재건 자체는 시간문제로 경제대국으로 복귀하기는 했겠지만 그 정도를 크게 앞당긴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미국은 사실 종전후 일본이 다시금 잠정적 적대국으로 부활하는 것을 막기위해 일본의 공업력을 상당히 제한시켰고 상업활동에도 많은 제약을 계약을 가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미 군정령으로 발표된 '집단기업군 해체'였다. 경제민주화 문서 내 이론 사례 참고.
한편 중국은 국공내전에 승리하여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이후 1년 내에 잔존 중화민국을 쩝쩝쓱싹하기로 계획을 세워 놓았다. 그래서 1950년 5월 민국군 양대 거점지 중 하나인 해남을 정벅하고 최후로 10월에 타이완 침공과 중국 완전 통일을 계획했지만, 공격 개시 넉 달을 남겨두고 미친 김일성이 남한으로 쳐들어가는 바람에 미국이 달려와서 대만 해협에 캐리어항공모함을 박아버렸다. 일부는 시즈모드 정확히는 미국이 남한을 지원하려고 제7함대를 배치시켰는데 대만까지 작전 가능 범위가 닿은 것이다. 게다가 타이완 침공에 사용하려던 병력과 장비도 북한군이 잘 나가던 초반부가 지나면서 전황이 영 안 좋게 돌아가자 북한을 돕기 위해 전용되었고 이들은 한국군과 미군을 상대로 벌인 전쟁에서 차츰 소모되었다.
심지어 조선족들도 피해를 봤다. 북한군의 주력으로, 그리고 중공군에 참전하여 북한 공산정권을 위해 숱한 피를 흘렸는데 1952년 설립된 연변조선족자치구(延边朝鲜族自治區)가 전후 1954년 연변조선족자치주(延边朝鲜族自治州)로 바뀐것(...) 중국은 소수민족 자치구역으로 자치구가 1급이고 자치주가 2급이다. 비록 조선족자치구가 위구르나 티베트, 내몽골와 같은 동급의 자치구역은 아니었다고는 하나 명칭뿐이더라도 내려앉은 것. 그야말로 토사구팽
다만 한국전쟁 당시 UN군에 대해 겉으로 보기엔 대등 혹은 압도하는 모습을 보여준 덕에 중국의 국제적 위상이 오른 면이 있었으며, 이는 후에 중국이 UN 안보리 상임이사국 지위를 대만에서 빼앗아 오는 데 영향을 주었다.
다만 장제스 정권에 학을 뗀 친중파 미국관료들이 중공을 승인해서 중국을 유고슬라비아처럼 만들려던 계획이 틀어졌다는 설도 있다. 즉 1950년도에 될 상임이사국 지위를 1970년 넘어서야 획득하고 미, 소 사이에서 3세계의 대장으로 캐스팅보더의 역할을 잡을 수 없게 되어버렸다는 말이다. 이렇게 포기할게 많아져서야(...) 중공이 북한을 방치하고 한국전에 참전치 않았더라면 이미 대만까지 점거하여 벌써 완전한 중국통일을 이루었을 가능성이 높았을 것이고 북한을 포기한 대가로 국제사회에서 더 빨리 상임이사국 지위를 얻어 현재보다 더 빨리 강대국이 되었을 수 있다. 베이징이 아닌 난징에다 수도를 정했다면 아마 북한을 버렸을지도 모른다.
또한 국공내전 당시 생포한 국민당 포로 출신들을 전장에 투입하여 정리했고 UN군에게 잡힌 중국군 포로의 대다수였던 국민당군은 거의 송환을 거부하고 대만으로 돌아갔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공산당의 1당 독재를 공고히 하는 데 요긴하게 써먹기도 했다. 게다가 원래 북한을 밀어주고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소련이 간도의 지배권을 북한에게 넘겨주려다 북한이 전쟁에서 지자 중국에 줘버렸다는 설도 있다.
결과적으로 김일성이 한민족과 모택동에게 빅엿을 먹이고 장제스를 살려준 셈.물귀신 쩌네효 소련 : 우리들 가운데 스파이가 있는 것 같아 역시 북한은 그때나 지금이나 민폐다. 중국에게나 한국에게나. 결국 소련이 붕괴되고 냉전이 끝난 현대에 이르기까지 중국은 대만을 일통하지 못하고 한국과 더불어 유이한 분단국가로 남아있다. 김일성, 내 군단을 돌려다오!
한반도의 국민적 차원에서는 동족상잔의 비극이라는 말 그대로 전쟁을 겪었던 장년층들은 물론 그 이후에 중년층, 그리고 현재의 한국 청년들에게도 크나큰 시련을 만들어준 계기가 되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6.25 직전부터 지금까지 꾸준하게 이어져 내려오는 대한민국의 징병제로 한국의 현 징병제는 6.25 전쟁이 가장 큰 계기로 작용하였다.
대한민국 국군 창설 초기 미국은 이승만의 북진통일 주장 때문에 한국군의 규모를 약 10만명 선에서 제한을 두었는데, 전쟁이 터지고 전황이 UN군과 국군 측에 불리하게 돌아가자 대한민국 국회는 1951년 5월에 징병제를 부활시켰다. 그결과 종전후 국군 규모는 60~70만으로서 세계 4위 규모라고 종종 이야기 되곤 했다.
그 이전에는 모병제였다. 하지만 법을 다시 고치기 전까지 거리에서 청년들을 징집시키거나 가택수색까지 해서 청년을 군대에 넣었다고 하니 국회는 이러한 조치를 그나마 좀 그럴듯하게 돌아가도록 제도상으로 공식화한 것에 불과하다. 물론 남북대립이 징병제 도입의 직접적 원인이기는 하나, 남북분단이 없었더라도 징병제 자체는 도입되었을 가능성은 높다. 무엇보다 한국의 위쪽에 중국과 소련이 있었으니까. 그래도 지금에 비해 병력 규모가 상대적으로 적었을 것이고 이에 따라 징병제도 현재에 비해서는 좀 더 여유롭게 운영되었을 것이다. 또한 징병제뿐만 아니라 경제적, 사회적인 분위기 또한 과거는 물론 현재까지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나이 든 세대들이 빨갱이란 말에 어떻게 반응하는지 한번 생각해 보자.
대한민국 육군이 공군, 해군, 주한미군에 비해 휴가, 외박에 좀 더 보수적인 스탠스인 이유도 당시에 출타자가 지나치게 많아(농번기 휴가) 초기 대응에 실패한 데서 나온 영향이라 할 수 있다.
이 전쟁으로 인해 미국 등으로부터 받은 원조물자를 받는 등 많은 도움을 받았지만, 대신 농촌경제가 상당한 피해를 입었고 동시에 기초경제를 미국에 크게 의존하게 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GDP 감소 수치 자체는 무시할만했다. 1950년 한 해 동안에만 마이너스 성장을 했고 이후 다시 늘어난다. 이런 생산규모보다 눈여겨 보아야 할 것은 자산 파괴와 인플레이션 그리고 이에따른 기회 손실이다.
또한 이 기간 동안 엄청난 양의 전통 문화재가 파괴, 소실, 행방불명되었으며, 전국 산간 지역의 수많은 사찰들이 미군의 빨치산 토벌 작전 중에 파괴된 바 있다. 특히 108개의 절과 암자가 있었다고 할 정도였던 금강산 지역에서는 2개 빼놓고 모든 절이 소장하고 있던 엄청난 양의 자료와 유물들과 함께 소실되었다.
북한군 게릴라 토벌에만 신경 쓴 나머지 해인사 폭격 명령까지 내려왔으나 이 때 공군 조종사였던 고 김영환 장군이 이를 거부하고 설득 작업에 들어가 폭격을 막았다. 이때 이승만은 도리어 김 장군을 사임시키려 했다고 한다. 그러나 김 장군은 이후 금관문화훈장을 추서받았다.
또 빨치산 토벌로 유명한 차일혁 총경도 문화재 보호에 공이 있는데, 구례 화엄사를 불태우라는 명령에 차일혁 총경은 고민하다가 화엄사의 문짝을 떼어내 태워서 불지르는 시늉만 했다고 한다. 전후에 조계종에서 차일혁 총경에게 감사패를 전달했다고 한다. 그러나 차 총경은 화엄사 소각 명령에 불복종한 것과 1953년 9월 사살한 남부군 총사령관 이현상의 시신을 직접 수습하여 화장한 유골을 수목장시켜준 것이 화근이 되어 휴전 후 지방 경찰서장 등 한직만 전전하는 인사상 불이익을 당했다. 결국 공주 경찰서장으로 재직 중이던 1958년 8월 9일, 가족들과 함께 금강으로 피서를 갔다가 수영 도중 심장마비로 인해 향년 38세로 세상을 떠났다. 차 총경은 2011년에야 6.25 때의 공적이 인정되어 뒤늦게 경무관으로 추서되었다.
게다가 태조부터 순종까지 역대 조선 임금들의 어진과 왕실 인사들의 초상화가 공산군의 약탈을 피하기 위해 부산으로 옮겨졌는데 공산군의 공격이 아닌 전후(1954년) 관리부재로 인한 화재로 전주시, 함흥시 등에 다른 어진이 남아 있었던 태조 이성계, 유일하게 온전히 살려냈고 세자 시절을 그린 것 또한 겨우 살려낸 영조, 반만 탄 철종, 어진이 많고 사진 자료도 남아 있는 고종, 사진 자료가 남아 있는 순종 등 극소수 인물을 제외하고 전부, 그야말로 완전히 타버려 어떤 방법으로도 얼굴을 확실하게 확인할 수 없게 되었다 다만 왕실 족보인 선원보감에 어진이 남아 있는 왕들이 있긴 하나, 질은 당연히 소실된 어진에 비해 조악하다.
이 밖에도 이성계의 활 등 수 많은 국보급 유물이 전쟁통에 파손되거나 자취를 감추었다. 물론 당시에 남았던 어진은 태조, 세조와 숙종 이후의 임금들의 어진만이 있었다. 사실 어진 소실에는 임진왜란이 가장 치명적인 영향을 끼쳤다. 전쟁은 문화재의 적
한편 전쟁 중의 학살 문제에 대해서는 말이 많은데, 남북 양 측은 서로 상대편의 학살을 비난하며 이를 이데올로기 대립에 이용한 바 있으며, 그게 아니더라도 이 시기의 충격으로 이에 관련한 문학 작품도 많았다. 대표적으로 반공 문학. 때문에 남한에서는 민주화 이후 반공 이데올로기에 대한 반동으로 미군과 국군에 의한 학살이 비판 대상에 올라 정부와 사회각계에서 진상규명에 나서고 있고 피해보상도 해주고는 있지만 북한은 아직도 독재 체제라서 그런 거 없다.
주체가 누구냐를 떠나서 이러한 학살 문제는 결국 당시 국민들을 극도의 공포 상태로 몰아넣었다. 때문에 전후 문학에는 단순히 반공 문학뿐만 아니라 국군과 북한군의 사이에서 휘둘려야 했던 민중의 고통을 논하는 작품 또한 많다. 전란의 혼란상으로 인한 사회의 황폐화는 몽실 언니 등의 작품, 국군과 인민군의 학살로 인한 민중의 공포와 트라우마는 소문의 벽 등의 작품에서 찾아볼 수 있다.
가장 안 좋은 결과는 한반도의 분단 고착성을 강화시킨 전쟁이다. 일부 정신나간 사람들이 6.25전쟁은 통일전쟁이라고 헛소리 하지만 6.25전쟁은 그나마 전쟁전에 있었던 비공식 민간 교류도 금지될 만큼 한반도 분단을 강화시켰고 남북이 서로 적대적인 감정을 갖게되어 대화와 협상을 통한 통일 가능성을 제로로 만들었다. 독일 통일이 가능했던 이유도 상호비방하는 면과 소규모 무력충돌은 있었으나 6.25전쟁같이 대규모 전쟁은 없었고 그탓에 서로에 대한 적대감이 없었기 때문에 독일분단 기간내내 공식,비공식적인 인적-물적 교류가 가능하였고 이산가족 상봉과 상대방에 대한 여행도 비교적 자유로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일성과 박헌영의 잘못된 권력욕으로 인하여 벌어진 6.25전쟁은 서로간의 적대감을 강화시킴으로써 평화통일 가능성을 사실상 제로로 만들었으며 이 여파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1.1.1 민간인 피해
에 황해도 신천군에서 미군이 1950년 10월~12월 사이에 3~4만 명의 양민들을 학살했다고 북한에서 주장하는데, 이를 '신천대학살'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리고 북한에서 황해도 신천군에 '신천박물관'을 설립하고 반미주의 교육 장소로 활용하고 있다. 실제로 신천군에서 민간인들이 학살된 사건은 분명히 존재했었다. 그러나 학살의 주체는 미군이 절대 아니다.
당시 미군과 유엔군은 북진을 하면서 평양을 선점하려는 경쟁이 붙었기 때문에 황해도 신천군에 오랫동안 머물지 않았다. 또한, 북한 측에서 주장하는 '미군&유엔군 주도 주장'을 확증할 만한 증거가 없다. 자세한 설명은 신천군 사건 문서를 참조하기 바란다.
한국군과 미군도 북한으로부터 수복한 북한 및 남한 지역에서 공산주의와 공산당, 제5열에 대한 공포심과 복수심으로 인해 상당수 주민을 학살하였다. 의도하지 않은, 혹은 의도한 학살사건들이 여럿 있으며,이와 관련해서 알려진 사건이 바로 보도연맹 학살사건과 거창 양민 학살사건, 노근리 양민 학살 사건,전남 나주 경찰부대 학살사건 등이 유명하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 조사보고서에 따르면, 학살의 규모는 전국구로 벌어졌으며, 그 정도는 생각이상으로 매우 잔인했다. 공산주의와 공산당, 전쟁 중에 악질적인 행위인 피난민을 이용하여 후방에 침투해 교란작전을 펼치는 제5열에 대한 공포심과 복수심, 궁지에 몰릴대로 몰리던 당시의 전황이 만들어낸 비극이다.
또한 의무병으로 참전했던 박남식의 회고록 '실낙원의 비극'에는, 장군들이 시찰을 오면 사단장이 근처 피난민촌에서 민간인을 납치한 다음 처녀성 검사를 하고 성상납을 했다는 언급이 있다.
또한 한국군에서도 위안부를 운영했다.#. 물론 이것은 극한 상황에서 자행한 일이지 북한군처럼 국가적차원에서 여군들이 몸을 팔거나 기쁨조처럼 민간인을 대상으로 성범죄를 저지르진 않았으므로 착각하진 말자.
나비 연구로 유명한 석주명 박사#도 이 때 유명을 달리하였다. 평양 출신이었던 박사는 평소 말할 때 평안도 사투리를 썼는데, 수복된 서울에서 50년 10월 6일에 인민군으로 오인받아 총격을 받고 사망하였다.
한마디로 북한 서울점령 = 반공주의자든 오인해서 반공주의자로 몰린 것이든 학살 그러다가 남한이 다시 서울 탈환 = 어쩔수없이 공산주의자가된 이들과 공산주의자 학살 그러다가 또 북한 서울점령 = 반공주의자든 오인해서 반공주의자로 몰린것이든 학살 그러다가 남한 서울 다시 재탈환 = 어쩔수없이 공산주의자가된 이들과 공산주의자 학살
1.1.2 북한군에 의한 유명인사들 납북, 그리고 인민재판과 학살
북한군은 북으로 후퇴하면서 이광수, 안재홍, 김규식, 조소앙, 정지용 등 수많은 정치, 문화, 경제계 인사들을 납북하였다. 당시 유력한 중도파 국회의원으로 안재홍, 김규식, 조소앙, 조봉암이 있었는데 조봉암 빼고 모두 납북당하여 중도파는 조봉암 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이는 남한 정치의 커다란 손실로 평가된다. 물론 북한은 이것까지 전부 염두에 두고 있었고, "모시겠다"는 명분으로 이 사람들을 데려갔다.
납북된 중도파 정치인들(특히, 김규식, 조소앙, 안재홍)은 오랜 기간 동안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철저히 금기시당해 왔다. 제1공화국 정부 시기 동안 조소앙은 아예 '북한의 간첩'이라고 규정되었을 정도였다. 그의 가족들 또한 대한민국에서 오랜 기간 동안 소위 연좌제의 굴레를 받으면서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한다. 다행히도 나중에 훗날 체제경쟁에서 승기를 잡은 이후 1989년에 복권되었지만...
현대사 연구 권위자인 서중석 교수는 이 부분에 대해 '5.30 총선거(제2대 국회의원 선거)를 통해 중도파 세력들이 다수 점유했다. 그러나 한국전쟁 발발로 중도파 의원들 상당수가 납북당해 이승만과 친일파 세력들에게 정계의 커다란 입지를 주는 빌미를 마련했다'며, '한국전쟁이 발발하지 않았더라면 지금과 같이 극단적 반공국가로 가지 않았을 것'이라고 현대사의 비극으로 정의하고 있다.
이렇게 이름이 알려진 저명인사 외에도 북한군은 반공 인사, 경찰관, 공무원 및 그 가족을 대량 학살하였다.
최근 미군과 국군에 의한 학살이 재발견되고 있으나 이는 오랜세월 체제경쟁과 냉전으로 인해 언급 자체가 금기시되었기 때문에 40년 넘게 묻혀있던 사건이 한꺼번에 발굴되면서 갑자기 많이 언급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그러나 북한군이 저지른 행위가 그 잔학성이 훨씬 심각했다는 것을 잊으면 안된다. 애초에 전쟁을 일으킨 게 북한이다.
개전 3일만에 벌어진 서울대병원 학살사건(#)과 전남 영광군에서 일어난 민간인 학살(이 학살 규모는 약 5000여명의 규모[3]가 피해를 입었을 정도로 북한군에 의한 대표적인 민간인 학살 사건이다.)#, 전주형무소 학살, 그리고 경남 산청에서 북한군이 후퇴하는 과정에서 20~40대 연령층대의 젊은사람들 대상으로 학살벌인것# 등이 대표적이다.[4] 또 북한군 후퇴 와중에 벌어진 대전형무소 학살 사건의 경우 대전형무소 단 한 곳에서만 약 7,000여구의 시신이 수습될 정도였다.[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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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군은 처형할 때 대중을 동원한 공개 재판의 형태를 취할 때가 많았는데 이를 '인민재판'이라고 하였다. 이 '인민재판'이라는 용어는 한국 사회에서 '마녀사냥'과 비슷한 의미로 현재까지도 흔히 쓰이고 있다.
북한군이 낙동강 일대까지 물밀듯이 밀려들어왔을 때 사회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던 빈농계층의 젊은이들은 계급 해방되는 사회주의 세상이 오는 줄로 알고 북한군 밑에서 한자리 꿰찬 다음 그 동안 아쉬운 감정을 가지고 있었던 친일파, 지주, 경찰, 공무원, 서북청년단 등의 동네의 세력가들을 반동으로 몰아 인민재판에 회부해 처형하는 데에 적극 앞장섰는데, 이는 서울 지역에서 인민재판이 행해진 여파로 말미암은 것이었다. 문제는 세력가들 중의 상당수가 주변 민심을 얻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평소에 민심을 얻어놓은 세력가는 인민재판을 받았어도 죽음은 면할 수 있었지만 그래도 간신히 살아남는 정도였다고 한다.
북한군 낙오병이나 북한군에 협조했던 동조자들은 자신이 처형했던 사람들의 주변인들에게 그대로 보복당하거나 아니면 동네에서 도망쳐 빨치산이 되어 게릴라 전투를 수행하다가 죽거나 감옥에 가게 되었다. 결국 같은 동네나 이웃 동네 사는 사람들끼리 서로 씻을 수 없는 불신과 증오의 상처를 남기게 된 것이다. 이같은 가혹한 인민재판과 학살, 그에 따른 반목으로 인한 한 마을의 비극은 윤흥길의 소설 장마에도 아주 잘 드러나 있다.
이것과는 대조적으로 중국 공산군이 국공내전 때 보여준 행적을 상기해보자. 당시 마오쩌둥은 인민을 위한 공산주의를 표방하고 점령지역 주민에 민폐를 끼치지 말 것, 주민들의 고충을 상세히 듣고 해결할 수 있으면 해결할 것, 주민들의 소유물에는 손을 대지 말 것. 대신 부득이하게 쓰게 될 경우에는 그 대가를 반드시 지불할 것 등을 지침으로 삼아 휘하 공산군인들에게 훈육시켰다. 그 결과 대다수의 주민들이 공산군들을 환영했고 국민당의 부정부패에 염증이 난 일부 국민당 인사들까지 공산당으로 전향할 정도의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전쟁 초 북한군이 남진하고 있을 때는 북한군 지휘부의 승인으로 지역 동조자 또는 내무서(북한에서 경찰서를 부르는 말), 정치보위부 등 치안기구가 담당하여 인민재판을 행했으며 북한군이 자체적으로 나서서 저지른 짓도 많다. 즉 개전 초부터 이들은 학살에 직접적으로 참가하고 있었다는 것.
국군과 미군 포로 상당수는 북한군에 의해 직접 학살되고 시체도 마구 훼손된 경우가 흔했다. 국군의 경우 간부나 이북 출신자들은 거의 예외없이 고문당한 뒤 처형당했다고 한다. 부상자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인천 상륙작전으로 전세가 역전되어 북한군이 북으로 후퇴하는 과정에서 이들은 점령지 주민에 대해 대규모 학살을 자행했으며, 이는 RG 153의 미군 전쟁범죄조사국(The War Crimes Branch) 문서들에서 명백히 드러난다.
북한군이 군기가 엄정해서 점령지 주민들에게 신사적으로 대했다는 이야기는 완전한 거짓말은 아니지만, 유대인을 살려준 친위대나 정복지를 약탈안한 추축군처럼 개별적인 특수사례로 국한된다. 전쟁 전 기간으로 이를 넓혀 적용하면 말 그대로 코미디가 된다. 전쟁 초반부는 말할 것도 없고 특히 전면패주 중에 조직적으로 자행한 학살은 한국군이 개전 초에 패닉과 공황으로 저지른 학살보다 더하다. 즉 아무리 북한과 일부세력에서 한국군을 나쁜 놈으로 몰아가려해도 이미 북한이 저지른 짓이 너무 커 1:1 커버조차 되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개전 초기 한국군이 공포와 패닉에 질린 상태라 하더라도 잘못한 건 덮을 수가 없는 것을 포함해서이다.
사실 전쟁을 겪은 사람들의 증언에 따르면 중공군이 제일 매너가 좋았다고 한다. 중공군은 모택동의 대장정 시절부터 어떤 일이 있어도 민가에 피해를 끼치지 않고, "물고기가 물을 떠나면 살 수 없다"라는 비유로 유명한 인민과 함께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철칙이 있었기 때문에, 절대 민가에 피해를 주지 않았다고 한다. 이는 국공내전에서 모택동이 장개석을 이긴 큰 요인이다.
장개석 군대인 국부군은 사실 여러 군벌의 집합체인데다가 일본군이 들어오기 전까지는 자기네들끼리 싸우던 군대들이라 기강도 해이했을 뿐만 아니라 민가에 온갖 민폐를 끼치는 등 상태가 안 좋았기 때문에 민중들은 알아서 모택동을 도왔다. 당시 증언에 따르면 중공군은 잠을 자도 꼭 헛간이나 마당에서 잤고 음식을 얻어먹으면 돈은 못 줘도 하다 못해 일이라도 해주면서 꼭 보답을 했다고 한다. 이중 문식이 있는 중공군이 있으면 한자로 소통을 하거나 조선족 통역을 통해 주민들에게 자신들의 입장을 전달하며 민심 확보에 매우 주력했는데 이는 제법 긍정적으로 평가해줄 요소다.
또한 중공군은 포로들에게도 제법 신사적이라 겨울날 포로들에게 뜨거운 물을 주기 위해 폭격의 위협을 무릅쓰고 물을 끓여주기도 했는데 이 물은 마시라고 준 물이었다. 헌데 미군들은 이 물을 씻으라고 준 물인줄 알고 열심히 씻었고 중공군들이 격노하는 사태가 있었다고도 한다.
물론 사람이 모이다 보니 중공군 중에도 간혹 상태가 안 좋은 인간은 있었고 장진호 전투 당시에 포로들을 죽인 중공군이 있었다는 증언도 있지만 분명한 건 이는 언제까지나 일부의 일탈 행위일 뿐 군 상층부의 방침은 분명했다는 것이다.
미군은 어느 동네를 가건 초콜렛이나 과자, 스팸 등 먹을 것을 마구마구 뿌려댔기에 매너에 관계없이 인기가 좋았고 국군과 인민군은 전쟁이 진행되면 진행될수록 상태가 안 좋아졌다고 한다.
직접 학살은 아니지만 결국 관련된 사람들을 죽게 만든 명백한 잔학행위로는 점령한 남한지역에서 군인을 충원하기 위해 청년들을 의용군이라는 명목으로 징병해서 끌고 간 것도 있다. 물론 제1차 모집 때는 순수 지원자만 받았지만, 지원자가 원하는 숫자만큼 나오지 않아서 곧바로 강제동원으로 전환했다.
실제로 서울 함락 직후에 실시한 1차 의용군 참가 궐기대회의 지원자 수는 단 406명이었다. 북한군이 소백산맥을 넘기 시작할 때부터 시작한 제2차 모집부터는 강제징집에 가택수색까지 합쳐진 것이라서 이미 말만 의용군이지 자기 의사로 북한군이 된 사람은 별로 없었다. 북한의 낙동강 전선이 인천상륙작전 이후 급속하게 붕괴된 것은 바로 이런 병사들이 후퇴를 시작하자마자 남한으로 줄줄이 투항했기 때문이었다. 이들 대부분은 이후 국군에 편입되거나 반공 포로가 되어 그대로 남한에 남게 된다.
미군의 화력에 의한 북한군의 병력 소모가 엄청나다 보니 이를 보충하기 위한 남한에서의 의용군 징병은 엄청난 수에 달했고, 그러다 보니 낙동강 전투시에 북한군의 1/3이 남한 출신 의용군일 정도로 많았다. 북한군이 허겁지겁 패주하고 병력을 상실하면서 점령지에서 많은 숫자의 젊은이들을 징집해갔으며, 1.4 후퇴 당시 서울이 재함락되었을 때가 가장 심했다고 한다. 이런 식이었으니 필사적으로 북한군과 싸워 물리친 후에 전장을 청소하다가 북한군 옷을 입고 신음하는 동생을 발견하는 일이 낙동강부터 백마고지까지 다반사였다는 것. 이렇게 된 것은 전쟁이 장기화되고 월남민도 대거 나오면서 인력이 부족해진 북한이 남한 청년들을 강제 징집해서라도 수를 채우려 들었기 때문이었다.
2011년 출간된 '시골의사의 아름다운 동행'(박경철 저, 리더스북)에는 남자들이 떠나고 여자들만 남은 마을에 인민군들이 들이닥쳐 아이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여자들을 한곳에 몰아넣고 윤간하여 그 결과로 태어난 한 아이의 기구한 운명에 관한 실화가 등장한다.
2010년에 출간된 '마을로 간 한국전쟁'(박찬승 저, 돌베개)은 농촌 공동체 내에 잠재해 있던 갈등이 전쟁 상황에서 폭력적이고 무제한적으로 표출되었을 때 어떤 참극이 일어나는지를 다루었다. 이 책에서 다루는 사례는 모두 촌락 내 혹은 촌락간 상호 학살이다. 저자는 진도군 현풍 곽씨 동족마을, 영암군 영보리, 부여군의 두 동족마을, 당진시 합덕면, 금산군 부리면 해평 길씨 동족마을을 선정하여 일가친척, 혹은 이웃들이 서로를 죽고 죽인 비극이 어떻게 벌어졌는가를 살피고 있다.
1.1.3 한국정부의 산하 단체에 의한 학살
20세기까지 한국사회에선 그저 아무말도 않고 가슴속에 묻어야 했던 참혹한 사건들이, 노무현 정권에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가 설치되고 위원회에서 6.25 전쟁 당시의 자행된 학살기록을 발굴하게 되면서 비로소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외신에서도 보도될 만큼 큰 주목을 받았으나,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가 2010년 12월 31일 폐쇄됨에 따라 더이상의 자료조사가 되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 아래는 한국정부의 산하 단체에 의해 학살되었다고 판명된 사건들이다.
- 보도연맹 학살사건 - 이 학살사건은 전국적으로 벌어졌기 때문에 전부 정리하기 힘들다. 그래서 '그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대표적인 학살부분만 사례로 언급한다.
- 경산 코발트탄광 학살사건
- 대전 산내 골령골 학살사건
- 고양 금정굴 학살사건
- 나주 경찰부대 학살사건
- 남양주 민간인 학살사건
- 거창 양민 학살사건
- 강화 양민 학살사건
- 한강 인도교 폭파
- 국민방위군 사건[6]
- 산청・함양 양민 학살사건
- 함평 양민 학살사건
- 월미도 사건#
1.2 의의
6.25 전쟁은 동족상잔의 비극이자 다시는 일어나서는 안 될 참사이다. 이러한 막대한 인명피해와 국토분단이라는 생채기 때문에 의외로 6.25 전쟁이 가져다 준 긍정적인 면까지도 그동안 한국 학계에서는 논의하는 것에 입조심들을 해 왔다. 그러나 언론의 다양성과 의견표명의 자유도가 점차 높아지면서 상처만을 주었다고 인식되어 왔던 6.25 전쟁에 대한 긍정적 측면을 고찰하는 연구결과가 조금씩 나오고 있다.
1.2.1 현대식 전면전 경험
대한민국이 세워진 이후 대한민국 국군 최초의 전면전 경험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주변국들은 중국은 중일전쟁과 국공내전이라는 실전경험이 있고 일본은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이라는 실전경험이 있는데 반해 조선은 2차대전 시기 일본 점령하에 있어 우익세력의 광복군이나 좌익세력의 의용군으로서나 활동했지[7], 별 전쟁 경험이 없었다. 한국전쟁이라는 현대전의 경험을 통해 국군은 적지 않은 전훈과 전술 교리 체계를 얻을 수 있었고, 또한 국내에서 실전 경험을 보유한 지휘관들이 국군 창립 멤버로 자리잡아 후대에 지대한 영향을 끼칠 수 있었다. 해군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손원일 제독이 대표적으로, 손 제독과 한국전쟁 덕에 해군은 그 전과 비교가 안 될 만큼 급성장을 이루어 전쟁 당시부터 지금까지도 북한에 확실한 우위를 점하게 되었다.
1.2.2 대외관계 변화
대한민국을 도와주기 위해 세계 각국에서 지원병을 파병보내 한국의 여러 우방국들이 생겨났다.[8] 특히 한국과 미국과의 관계는 이 전쟁 이후, 단순한 혈맹국 이상으로 가까워졌다. 이런 양국간의 믿음은 한미상호방위조약으로 문서화되어 있다. 이 전쟁으로 미국은 36,000명이 넘는 전사자를 내고 상당히 많은 전비를 써야 했지만 8.18 도끼만행사건,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사건, 1993년 1차 북핵 위기 같은 남북간 전쟁 위협이 고조될 때마다 한국과 협력을 강화, 안전보장을 약속하고 실제 군사적 행동으로도 보여주면서 이를 입증하고 있다. 아울러, 태평양 전쟁 당시 육군지원용의 호위항공모함이나 가진 최약체 제7함대가 명실상부한 세계 최강의 함대가 된 계기로서 평가받기도 한다. 또한, 이는 남침 목적 실패에 따른 북한 입지 축소, 중소 갈등과 더불어 남침 가능성을 현저하게 줄이고 경제적 대결 패러다임을 여는데 기여하였다.
1.2.3 영토 변화
전쟁 전후의 남한이 실효지배하는 영토 크기를 비교해보면 38선이 그어졌던 때보다는 약간이지만 더 넓어졌다. 또한, 휴전선 길이가 훨씬 짧기 때문에 철책의 범위도 줄어들었다. 물론, 개성특급시, 연안군, 옹진군 반도를 상실하면서 서해에서 북한의 입김이 강해졌으니 개성은 대한민국으로 따지면 광역시에 해당되는 대도시였기 때문에 도시규모상으로만은 이 전쟁으로 인하여 남한 측이 손해를 봤다. 개성은 그냥 도시가 아니라 고려시대 시절 한민족의 수도였던 곳이며, 당시 대전광역시보다도 더 큰 도시였다. 하지만 이승만은 상징성 높은 도시인 개성을 잃은 것을 상당히 분통해하여 개성의 반환 없이는 휴전도 없다는 입장을 여러 차례 내비치기도 했지만 현실적으로(...). 그러나 북방 5도를 지켜내어 최소한의 전략적 요충지를 확보했고 반면 당시 동부 전선에서는 고성군, 인제군, 양구군, 화천군, 철원군 등 강원도 북단을 되물렸으니[9] 이 땅은 전술적 가치도 높은 땅이여서 전쟁 당시도 이곳의 고지에서 가장 격렬한 공방이 있었고 지금도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이 지역을 지켜내고 있다.
1.2.4 사회 변화
농지개혁 때문에 지주들이 토지를 급속히 매각하여 지주계급이 해체되었는데, 이 전쟁 중에 지가증권이 액면가의 40~80%로 처분됨으로써 산업가로 도약할 수 있는 기회가 분산되었다. [10]
전쟁과 피난, 양대 진영간의 학살과 반목으로 오랜 기간 뿌리내렸던 시골 공동체나 계급관계, 지주-소작인 관계가 붕괴되었다. 특히 양반-상민-천민의 계급의식은 일제강점기 내내 면면히 내재되어 왔다가 6.25 전쟁을 통해 완전히 해체 되었다. 이처럼 전근대적인 신분적 주종관계, 경제적 종속관계는 300만의 목숨을 앗아간 전쟁으로 완벽에 가깝게 분해되었으며 이는 라틴 아메리카처럼 지주들의 경제개발에 대한 적극적 저항이 한국에서 일어나지 않게 하는 데 기여하였다.
한국과 대만은 상대적으로 균등한 소득과 부의 분배로 인해 유리한 초기 조건을 형성하여 급속한 경제 발전이 가능하였다는 점[11]을 고려해보면, 이 전쟁이 비록 하향평준화를 불러왔지만, 실력주의 사회(meritocratic society)에 어느정도 기여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1.2.5 남한으로의 인적 자원 대이동
상대적으로 낙후되었던 38선 이남에 비해 상공업이 발달했던 북반부 지역에서는 전쟁 발발을 전후하여 일제시대 이래 부를 쌓은 지주나 상인 계층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과 재산 몰수가 행해졌으며 인민재판 등으로 즉결처분을 하는 일도 빈번히 일어났다. 이처럼 핍박받은 자본가나 지주, 상공인 계층은 탄압을 피해 전쟁통에 자신들의 생명과 사유재산을 보장받는 남한으로 많이 넘어왔다. 연구결과에 따르면 이렇게 자유를 찾아 남쪽으로 이동한 사람의 수가 최소 50만 ~ 최대 150만 명은 될 것이라 한다. 남한은 의도치 않았지만 전쟁을 통해 이처럼 적지 않은 '알짜배기' 인력들을 흡수하여 북한과의 체제경쟁에서 앞서나가고 경제를 효율적으로 부흥시킬 자원을 확보하였다. 이후 한국의 기적적인 경제 발전에는 이들 실향민 및 북의 구 지주 자본가 지식인 계층이 큰 기여를 하였다.
역으로 북한 입장에서는 발전에 필요했던 인적 자원을 대량으로 잃어버렸으니 전쟁으로 그 잠재력을 상당부분 상실했다고 표현할 수 있다. 위와는 반대로 남쪽에서 북으로 올라간 인물들은 주로 공산주의에 심취하여 유토피아를 꿈꾸던 사상가나 여기에 동조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고 월남 인구에 비하면 그 규모도 매우 적었다. 또한 그렇게 올라갔던 월북 인사들마저도 이후 북에서 적지 않은 수가 숙청 당하고 비참한 말년들을 보냈다.
1.2.6 전쟁특수
이 전쟁으로 대한민국은 많게는 국민의 1/20이 사망했고, 당시 내무부 통계국에 따르면 국부의 무려 1/4를 잃었으며 일제가 남긴 공업시설의 피해율은 50%를 상회하였다. 그러나, 전쟁이 격렬했던 1950년에만 마이너스 성장을 하고, 높은 출산율, 월남과 전쟁특수에 의해 남한의 인구와 국내총생산은 늘어났다. 다만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어남에따라 1953년 기준 소득이 67달러에 불과했다.
1.2.7 북한 공업기반 파괴
남한과 다르게 북한은 제공권을 장악하지 못해 엄청난 폭격에 시달렸다. 미군이 주축인 UN군의 폭격으로 인한 38도선 이북 지역의 궤멸적인 피해는 폭격의 역사 같은 외국 서적을 통해서나 겨우 알 수 있는 지경이다. 물론 한때는 전 국토가 전장이었던 만큼 오폭 등에 의한 피해는 불가항력이었으며 적 전력을 압도하기 위한 폭격 및 초토화 작전이 있었다는 것은 부정하기 어렵다. 대표적인 예로 B-29로 네이팜탄을 몇백 톤을 쏟아부었지만 정작 북한군에게 직접적으로는 별다른 피해를 입히지 못한 왜관-다부동 전투 융단폭격.
사실 한반도에는 이 전쟁이 일어나기 직전까지 일제시대의 여러 곳에 공장들이 남북에 1940년도 기준으로 4:6비율로 거의 온전히 남아있었다. 그런데, 제공 제해권을 장악하지 못한 북한은 평양폭격이나 원산폭격 등이 북한으로서는 굉장히 치명적이었고, 원산의 경우 공군력 뿐만 아니라 해군력으로도 같이 폭격을 실시하는 바람에 원산은 휴전협정이 맺어지는 그 순간까지 말 그대로 불지옥이었다. 이 당시에 미국의 폭격기사령부는 폭격기 수를 2차대전 이후로 크게 줄이지 않는 등 막강한 공군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전쟁 기간은 길었고 땅은 좁았으며 이런저런 난항을 겪었던 2차대전 때와는 달리 한국전쟁이 벌어지던 때에는 폭격 교리와 장비도 완성 이후 테스트까지 마친 상황이었다. 그리고 한국전쟁보다 훨씬 짧은 기간 안에 일어난 일본에서의 공습피해를 생각해 보면, 전쟁기간 중 상대적으로 북한에 훨씬 심한 폭격을 가했을 것이다.
전쟁 중의 보고 중에 전쟁 후 평양에 멀쩡한 건물이 2채 밖에 없었고 원산에는 함포사격까지 겹쳐서 남은 건물이 없었다는 말이 있다. 자료에 따르면 미공군은 전쟁이 시작된 그 주에 제공권을 확실히 장악했고, 부산으로 몰렸을 때에 이미 전략폭격 목표를 찾을 수 없다고 보고했다고 한다. 그러고도 공군은 계속 하늘을 날았으며, 전선고착 이후에는 철도와 저수지에 대한 폭격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자료들의 근거들은 폭격의 역사가 쓰여진 이후에 발견된 미군의 작전 보고서와 그 사진들이다.
이러한 폭격 때문에 북한 정부는 굴을 파고 지하에 공장, 시장 등등 모든 생활 기반들을 마련하여 버텼다. 베트남 전쟁에서의 월맹군과 비슷하게 산 듯. 이는 KBS에서 방영한 10부작 다큐멘터리 <한국전쟁> 중 7부에서 그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평양과 원산 등에 있는 대규모 공업단지들이 남한과는 다르게 모두 파괴됨은 물론 평양과 원산은 아예 허허벌판이 되었다. [12] 그리하여 전쟁 직후 소련과 공산권 위성국가들은 남한에 필적할만큼 북한에 대규모의 지원을 펼쳤고 1960년도까지 남한이 연평균 5% 성장에 머물때 1960년도까지 연평균 20% 성장을 해서 대체로 복구되었다고 한다. 특히 70년대초까지 북한 경제의 황금기로 남한에 비해 상당히 잘 살았다. 70년대에 비데를 호텔에 설치하고 컬러TV를 보급했다. 하지만 훗날 고난의 행군의 단초가 되는 병크중 상 병크인 주체농법은 70년초부터 시작했다.이와 관련해서는 북한/경제 문서를 참조하자.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6.25 전쟁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div></div>
- ↑ 태평양 전쟁 동안 일본은 본토에 전선이 만들어진 적이 없다. 제일 무서운 건 2발이 핵폭탄이나 공습/폭격보다 본토에 보병/전차가 돌아다니는 전쟁터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2차대전 러시아/독일/중국이나 한국전쟁 한국/북한을 생각하듯이 어마어마한 사람이 죽어나간다.
- ↑ 의리없는 전쟁 초반에도 야쿠자들이 '한반도에서 전쟁이 났는데 뭐 껀수 없나?'하고 잡담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후 한국이 베트남 전쟁 때 비슷한 방식으로 또 한 번 떼돈을 벌어먹었다.
- ↑ 이 사건이 처음 알려진것은 1951년 2월, 변진갑 의원이 국회에서 조사하고 밝히면서 알려지게 되었는데 그 당시 5만6천여명이 학살당했다고 기록되어있다. 그런데 두달 후인 1951년 4월 국회속기록의 변진갑 의원 발언을 보면 3만 8000여명으로 줄었다. 뒷날 참여정부 시기 발족한 진실화해위원회에서 직권 조사를 해본 결과, 1만명 이상은 아니라고 하였다. 하지만, 학살규모는 과장되있을지언정 커다란 규모나 잔학성면에서는 분명 존재했던 사건이었다.
- ↑ 이밖에도 북한군은 전라도 지방에서 학살을 특히 많이 자행했는데, 뒷날 대검찰청 공안부에서 작성한 '좌익사건 실록'에 따르면, 제일 큰 사건으로 강조되는 사건이 전북 옥구군 미면에서 발생한 학살사건이다. 이 사건은 지역 좌익들이 이틀에 걸쳐 600여명에 가까운 주민들을 학살하는 끔찍한 만행을 저질렀다.
- ↑ 대전형무소 (대전 산내) 학살은 인민군이 들이닥치기 이전 군경에 의해 3차례씩이나 학살이 자행되기도 했다. 그리고 인민군이 점령하면서 또 대전형무소(대전 산내) 같은 장소에서 학살을 자행한 것.
- ↑ 위키피디아 영문판에서 학살 리스트에 등재되어 있다. https://en.wikipedia.org/wiki/List_of_massacres_in_South_Korea 다만 피를 보려고 저지른 게 아니라 고위층 비리가 비참한 결과를 낳은 것.
고난의 행군 - ↑ 그마저도 우익은 장제스 산하, 좌익은 마오쩌둥 산하에 있어 중국의 힘 아래 있는 게 마찬가지였다.
- ↑ 터키
쿠르드족이반이상이었던거는.....는 타흐신 야즈즈 소장이 이끄는 1개 사단 + 1개 여단의 부대를 파병하여 미국과 영국 이외에 가장 많은 병력을 파병했으며 전사자도 미국과 영국 다음으로 많았다. 참고로 타흐신 야즈즈 소장은 이 전쟁을 마지막으로 제대했으며 정상적인 선거를 통해 국회의원이 되었는데 쿠데타 때문에 쫓겨났다. 그리고 한 많은 인생을 살다가 1971년 작고. 프랑스의 경우는 몽클라르 장군이 자신의 계급까지 스스로 강등시켜가면서 기어이 이 전투의 참전을 고집했으며 그 휘하 부하들도 총알이 빗발치는 전장에서 총검돌격을 불사하면서까지 매우 적극적으로 한반도를 방어하기 위해 노력했다. 에티오피아의 경우 셀라시에 황제가 자신의 친위대를 보내면서까지 대한민국을 지원했다.하지만 후에...그 외에도 뉴질랜드의 마오리족이나 여러 나라 또는 부족 사람들이 남한을 돕겠다고 서로 발벗고 나섰다. 전쟁범죄로 인하여 군대를 사용할 수 없는 서독이나 이탈리아, 일본은 기뢰제거 중 자위대원이 순직하거나 의료 또는 물자를 지원해서라도 대한민국을 도와줬다. 스페인의 독재자인 프란시스코 프랑코 총통은 2차대전 이후 파시즘 성향으로 세계 정가의 개천민으로 추락한 스페인의 위상을 반공을 빌미로 올리기위해 파병을 제안했지만 거부되었다. 또 대만의 장개석 총통도 대규모 파병을 제의했지만 확전이 우려되어서 거절 - ↑ 더 나아가 원산 이남까지 밀고 가기 위해 일단 고성군의 거진읍을 점령하고 금강산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이렇게 전쟁 초기보다 동부 전선이 상당히 올라가자 휴전 회담에서 북한은 전쟁 이전의 영토, 즉 38선으로 돌아가자고 주장하기도 했다. 당연하게도 UN군은 거부했는데, 그 이유는 한국전쟁 전과 같이 개성은 대한민국 영토가 되었을 것이지만 방어가 거의 불가능한 상태에 놓이며, 싸워서 쟁취한 강원도 북부 지역이 다시 북한의 영토가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 ↑ 김용삼, 한국인이 평등해진 건 李承晩의 농지개혁 덕분.
- ↑ Dani Rodrik, Getting Interventions Right: How South Korea and Taiwan Grew Rich, December 1994
- ↑ 이 때문에 북한은 오늘날까지도 방공망에 유독 집착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