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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월 21일 (토) 22:42 기준 최신판

촉서 「장완비의강유전(蔣琬費禕姜維傳)」
장완비의강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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姜維
(202 ~ 264)

1 개요

후한삼국시대 , 의 장수.

는 백약(伯約). 천수군 기현 사람이다. 제갈량 사후 삼국지연의의 실질적인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인물이다.[1] 제갈량으로부터 "마량 이상의 재능의 소유자, 양주 최고의 인물이자 기린아"라고 불리는 절찬을 받았다. 위나라 출신의 항장 출신이나 촉의 대장군까지 오른 인물이기도 하다.

촉한의 마지막 사령관이자 거대 낭만 서사, 사실상 마지막 주인공.[2] 그리고 30년 동안의 나홀로 북벌로도 유명하다. 이를 제갈량의 육출기산(六出祁山)과 대비하여 구벌중원(九伐中原)이라 하기도 한다.[3] 이게 없었다면 제갈량 사후 삼국지 이야기가 평범해졌을 것이다.

2 생애

2.1 촉 귀순 이전

어린 시절에 강인과의 전쟁 중에 아버지를 잃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아버지 강경은 강인의 침입 때 태수를 보호하려다 전사하였고, 이에 강유가 아버지의 직책을 물려 받아 군에서 중랑으로 임명되었다. 강유의 어린 시절에 해당하는 시기 중(대략 206년 - 217년 무렵) 이 정도로 강인들이 침입했던 사건은 213년 마초가 강인들과 연합, 조조를 공격했을 때 외에는 기록된 사건이 없다. 만약 이 당시 강경이 기현 태수를 보호하려다 전사했다면, 마초 연합군에 의해 강유의 부친이 죽은 셈이다. 다만 이 외에도 다른 종류의 강인들의 기현 침입이 대대적으로 있을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으니 정확하게는 알 수 없다.[4]

이 무렵의 강유에 대해 정사 삼국지 강유전에서는 "維為人好立功名,陰養死士,不脩布衣之業"라 기록하고 있는데, 대강 해석을 해보면 "강유는 입신 양명에 관심이 있어, 은밀히 자신을 위해 죽을 수 있는 병사들을 키우고[5], 평범한 일에 관심이 없다"는 의미다. 강유가 나이는 어려도 나름대로 자신의 미래에 대한 생각, 특히 무관계열에 생각이 있었던 듯하다.

다만 완전히 무관일만 한 것은 아닌 듯 한데, 주의 종사로 임명되었으며 또한 상계연으로 일한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종사는 주에 새로운 자사 등이 임명되었을 때, 각 군현의 인물들을 현지 정보 입수 차원에서 채용할 때 주어지는 자리였으며, 상계연은 중앙 정부에 해당 지역의 인구 및 특산물의 통계를 내어 중앙 정부에 보고하는 직책이다. 이 일은 문관 계통이니 중랑, 즉 무관 계통이었던 강유가 문관 계통으로 일을 바뀌었거나 능력이 뛰어나 양 쪽을 겸업했을 수도 있다. 또 강유는 정현의 학문을 좋아했다고 하니[6] 문관직에도 무리는 없었을것이다.

여담으로 이 무렵 옹주자사 대리는 곽회로, 강유가 얼마나 오래 일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한 때 그는 곽회의 부하였다. 이후 강유의 북벌 당시 강유와 곽회가 지겹도록 서로를 적으로 대하는 점을 감안한다면 둘의 운명도 꽤나 얄궂은 듯. 더불어 촉의 제갈량의 위나라 1차 침입 당시 곽회는 기현에서 상규로의 후퇴를 감행하여 강유가 촉에 투항하게 되는 빌미를 제공하기도 한다.

2.2 촉으로 귀순

제갈량의 1차 북벌 당시 촉에 귀순하였다.

귀순 과정이 삼국지 정사(이하 정사)와 삼국지연의(이하 연의) 기록이 상이하다. 연의에서는 제갈량이 자신의 계책을 두 번이나 간파한 강유에게 감탄하여 계략으로써 강유를 갈 곳 없게 만든 후에 항복시켰다고 나온다.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제갈량이 계책을 써서 안정군 태수인 최량을 죽인 이후 같은 방법으로 천수군 태수인 마준을 죽이려 했는데, 이 때 강유가 그 계책을 꿰뚫어봐서 마준이 말려들지 않게 했고 이를 역이용하여 조운을 끌어들인 뒤 물리쳤다. 이후 제갈량은 다시 한 번 계책을 펼쳤지만 강유가 직접 조운과 일기토를 벌인 뒤 쫓아버렸다. 이에 조운도 그의 창 솜씨에 감탄하는 한편 제갈량 역시 "군사란 많다고 좋은 게 아니라 어떻게 쓰느냐가 중요하다(김홍신 평역판)."란 말을 하며 군사를 물렸다.

이후 강유가 효심이 깊다는 것을 이용, 기현을 공격하여 강유를 그 안에 묶어놓았고 다른 곳들 역시 그렇게 고립시켰다. 한편 붙잡았던 하후무를 풀어주되 그가 가는 길에 난민으로 위장한 촉군과 마주치게 하여 강유가 촉에 항복했다는 소문을 뿌렸다. 또한 하후무가 들어간 기성을 공격하되 강유와 비슷한 사람을 앞세워서 진짜 강유가 항복한 것처럼 보이게 했다. 한편 갇혀 있는 터라 군량이 부족해진 강유에게 일부러 허술하게 무장한 군량 수송대를 보여줘서 강유를 성 밖으로 끌어내고 성을 점령한 뒤 다른 곳으로 도망가게 했다. 하지만 마준은 물론 양건도 강유가 항복했다고 여기고 쫓아냈다. 이에 강유가 홀로 장안을 향해 달리자 제갈량이 군사를 이끌고 나타나 포위한 뒤, "그 정도까지 위나라에 수고를 보였으니 이제 항복해도 수치스럽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하자 결국 제갈량에게 항복한다. 그리고 제갈량은 항복한 강유에게 "이제서야 나의 지식을 물려줄 사람을 찾았다"라고 말한다.

다만 위의 내용은 정사엔 없다. 즉, 연의 버프로 아마도 제갈량 사후 촉을 책임질 핵심 인물이기에 제갈량의 지략과 조운의 무력을 겸비한 인물로 포장된 듯 하다. 정사에서는 천수 주변 고을들이 촉군에게 호응한다는 소식을 접한 천수태수 마준이 강유를 의심하고 자신을 따라오지 못하게 한 탓에 강유는 갈 곳이 없어 항복했다고 적고 있다.

자세히 설명하자면 227년에 제갈량이 천수를 공격했을 때 천수태수 마준은 마침 밖으로 나와 순찰하고 있었고 강유, 양서, 윤상, 양건 등이 함께 수행했다. 그런데 여러 현이 제갈량에게 호응하니 마준은 이들이 딴 마음을 품었다고 의심하자 혼자 상규성으로 도주한다. 이들은 다 같이 상규성으로 가서 들여보내 달라고 요청했지만 거부당해 결국 촉에 항복한다.

그러나 강유가 항복한 이후 제갈량이 젊은 항장에 불과했던 강유를 장완에게 기재로 극찬하고 유선에게 보여야한다는 등 매우 호의적으로 대한것은 역사적 사실이며 진짜 제갈량의 후계자인 장완비의처럼 직접 지명하지는 않았는데도 후일 제갈량의 후계자로서 여겨진것은 이런 사실에서 비롯된 것일수도 있다.

강유가 귀순한 이후 위에 있던 강유의 부모형제 조정으로부터 강유를 다시 귀순시키라는 압력을 받은 듯하다. 위나라 법은 투항자의 가족에게 매우 엄격하다고 알려져 있다.[7] 강유의 어머니당귀를 강유에게 보냈다고 알려져 있다. 당귀는 한약의 약재로서 當歸(마땅할 당에 돌아올 귀자)이다. 이에 숨겨진 뜻은 '조국으로 돌아와야 하지 않겠느냐, 얘야.'라는 정도. 즉, 강유에게 위나라로 오라고 하는 메세지.

답신으로 강유는 "100경의 밭에 1무도 없는데 당귀는 없고 원지만 무성하다."라 적어 보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런 내용의 시[8]를 써서 보냈다고 한다.

良田百頃/양전백경/liáng tián bǎi qǐng/좋은 밭이 백경이 있으나
不在一畝/부재일무/bú zài yì mǔ/일 무도 남은 바 없으니
但有遠志/단유원지/dàn yǒu yuǎnzhì/원지는 있으되
不在當歸/부재당귀/bú zài dāngguī/당귀는 없나이다.

저 글 중 원지는 당귀와 마찬가지로 한약의 약재이다. 글자는 遠志, 멀 원 자에 뜻 지 자를 쓴다. 숨겨진 뜻은 원대한 뜻. 강유가 그 뜻이 무엇인지까지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고 있으나 '자신의 원대한 뜻(遠志)은 촉에 있지 위에 있지 않으며 그렇기에 당연히 돌아가는 일은(當歸) 없다'는 의지를 분명히 보인 것이다. 덕택에 강유의 위나라 가족들은 강유가 죽기 전즉, 촉 멸망 때까지 사면받을 수 없었다.

2.3 촉 귀순 & 제갈량 시대 (228년 ~ 234년)

촉으로 귀순한 강유는 봉의장군 당양후 창조연에 임명된다. 봉의장군에서 봉의(奉義)는 옳은 것을 받들었다는 뜻으로서 한 때 이엄이 맡았던 자리다. 당양후에서의 당양은 장판파가 있는 당양. 유선조운 덕에 살아난 그 당양 맞다. 후한서 백관지에 따르면 창조연이라는 관직은 태부 소속의 관직으로 창조연이 양곡 창고 관리인 점을 고려한다면, 북벌군의 군량 보급 쪽을 담당하고 있지 않았을까 정도로 추정할 수 있다. 즉 촉에 귀순한 직후 강유는 문관 쪽에서도 일한 듯. 이때 그의 나이는 27세였다.

창조연의 경우 강유가 위나라에서 하던 일인 상계연과 비슷한 위치로 역시 중앙 정부에 인구 및 특산물을 통계하여 보고하는 자리다. 즉, 창조연이나 상계연이나 군량 보급 못지 않게 통계처리가 필요한 직책이니 창조연은 촉에 적응해야 하는 강유에게는 비교적 익숙한 일이라 할 수 있다. 요약하자면 촉에 새로온 강유에게 제갈량이 예전에 하던 일과 비슷한 역할을 주어 배려했다는 것이 타당한 해석일지도. 물론 촉이 익주 하나라고는 하나 국가이고 양주는 한 주이니 수행하는 업무는 같다고 해도 품계로만 따지면 촉의 창조연이 위의 양주 상계연 보다 훨씬 높을 것이다. 또 봉의장군은 과거 이엄이 맡았던 자리라는 게 중요한데, 제갈량은 북벌을 앞두고 이엄을 가장 믿을 수 있는 인물이라면서 후방과 보급을 맡길 정도로 신뢰하였던 인물이니만큼 이엄의 옛 관직과 업무를 맡긴 것으로 보아 강유를 상당히 신임하지 않았을까 추측된다.

강유에 대한 제갈량의 신임은 상술했듯이 제갈량이 막하 사람들에게 편지를 보내 강유를 칭찬한 것에서도 드러나는데 촉서 강유전에 제갈량이 유부장사 장예와 참군 장완에게 편지를 보내어 강유를 칭찬한 내용이 쓰여있다.

"강백약은 그 시대의 일을 충성스럽고 근면하게 하며 사려가 정밀하며, 그가 갖고 있는 재능을 살펴보면, 영남(이소의 자) 및 계상(마량의 자) 등의 사람들도 그에게 미치지 못합니다. 그 사람은 양주의 상사(上士,뛰어난 선비)입니다. 반드시 먼저 중호보병 5, 6천 명을 그에게 훈련시키도록 해야 합니다. 강백약은 군사에 매우 능수능란하며, 도량과 의기가 있으며, 병사의 뜻을 깊이 이해합니다. 이 사람의 마음은 한실에 있으며, 재능은 일반 사람을 넘으므로 군사 훈련을 끝마치고 나서 궁궐로 보내 군주를 만나도록 해야 합니다."

장예와 장완은 승상부의 중요한 업무를 담당하는 사람들이었고 무엇보다 장완은 제갈량 다음 후계자로서 제갈량에게 지명받은 인물이다, 그런 그들에게 서신을 써가며 강유의 재능을 인정해주고 있는 것이다. 거기다가 중호보병은 중호군으로서 조운이 맡았던 황실 경호군를 뜻하는 것인데[9] 한나라를 총괄하는 재상이 일개 항장의 재능을 보고 자신의 군주와 만나게 하고 중앙군을 맡겨야 한다고 하고 있는 것이다. 어찌되었거나 이런 일화들은 제갈량이 강유를 자신의 후계자로 삼지는 않았더라도 차세대 촉한을 이끌 주요 유망주 중 하나로 보고 있었다는 증거는 될 것이다.

촉 귀순 후 한동안 문관일을 하던 강유는 230년 무렵부터 본격적으로 무관임무를 맡게 된다. 230년, 이 해에 촉 장군직의 대대적 개편이 이루어지면서 강유는 정서장군으로 임명된다. 이무렵 위연이 정서대장군에 임명된다. 제갈량 사후 정서장군이 대위 전선을 맡았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이 무렵부터 강유는 제갈량의 북벌에 직접적으로 참여한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정서대장군인 위연이 있었던 것을 고려한다면 직속 부대를 이끌고 단독 작전에 임했다기보다는 고정된 보직 없이 제갈량이 이리저리 투입하면서 이 임무 저 임무 다 맡기던 기동대장 정도로 다른 장수들의 보조 역할이 아니었나 추측된다. 혹은 정서대장군이자 한중독이었던 위연이 양주로 원정을 나갔을 동안 정서장군 강유가 한중의 수비를 맡았을 수도 있다.

강유의 이름이 단독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제갈량의 마지막 북벌 무렵으로 사마의의 건벽거수에 대하여 제갈량과 문답한 내용이 정사 제갈량전에 남아있다. 또한 제갈량 사후 위연이 후퇴를 거부하자 제갈량의 유지에 따라 양의와 더불어 전군 후퇴를 지휘하고 위나라의 추격을 저지한 기록이 있다. 이때 급작스러운 반격태세를 통해 사마의를 물러나게 만든것도 강유의 지휘였다.

2.4 장완 시대 (235년 ~ 246년)

234년, 제갈량 사후 장완이 촉의 대장군으로 임명된다. 승상은 촉 멸망 때까지 영구결석. 그리고 235년부터 238년 무렵까지 대사마직을 겸하면서 한중에 머문다. 이때 강유가 감군 겸 사마가 되어 장완을 수행하며 장완과 235년 - 237년까지 한중에 머문 듯 하다.

그리고 강유는 238년 이후부터, 양주 서쪽을 침입, 이민족들과의 전투에서 전과를 올린다. 다만 247년 이후, 강유와 강족들과의 관계를 살펴보면 나름 협력관계였던 듯. 이 무렵 위나라 옹주 자사 곽회 역시 강족과의 회유에 관심을 기울였다는 것을 감안한다면(정사 곽회전), 강유의 작업은 촉 편을 드는 강족의 숫자를 늘리는 동시에 위나라 쪽 강인들을 공격하는 일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아무튼 238년 무렵부터 강유는 본격적으로 사령관 역할을 맡는다. 거의 비슷한 시기에 장완은 한중이 아닌 부현으로 이동, 북벌을 준비한다. 이른바 그 유명한 상용급습작전.

장완전에는 상용급습작전에 대하여 여러가지로 설명되어있지만 내용을 요약하자면 양주에 있던 강유가 선봉으로서 한중을 거친 뒤 형주의 상용을 급습한다 & 강유가 상용을 점령한 뒤 이 지역을 방어하는 동안 장완이 부현에서 장강을 거슬러 올라가 상용을 최종 점령하는 것이다.

그러나 작전 자체는 장완의 병으로 인해 흐지부지된다. 더불어 이 와중에 강유는 양주 자사로 임명된다. 이후 244년, 위의 조상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한중을 침입했을 때 왕평이 흥세산에서 조상을 발라버리는 동안 장완 대신 비의가 총사령관에 임명, 본대를 이끌고 조상을 전멸시킨다(정사 왕평전). 강유전에는 낙곡대전 당시 강유의 참전 여부에는 침묵하고 있는데, 강유의 위치로 보나(부현 혹은 답중), 강유의 지위로 보나(양주자사), 강유 역시 이 전쟁에는 참전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주둔 위치나 여러 기록[10]을 반영해보면, 강유는 비의와 함께 중앙군을 지휘하면서 조상군 본대가 아닌 기산 쪽에서 별도로 온 곽회군과 교전한 것으로 보인다.

246년, 장완이 사망하고 비의가 장완의 대장군 지위를 이어받으면서 동시에 녹상서사이자 익주자사로서 재상의 위치에 오른다. 비의가 상대적으로 장완보다 북벌(위나라 침공)에 소극적이었던 탓에 장완이 계획한 상용급습작전은 거의 흐지부지가 되었고[11], 더불어 북벌은 사실상 강유 혼자 감당해야 할 일이 되었다.

2.5 비의 시대 (246년 ~ 253년)

장완이 사망한 이후 강유는 위장군으로 승진한다. 동시에 대장군 비의와 함께 녹상서사에 오른다. 시중수상서령이었던 비의의 자리는 동윤이 맡았으나 1년 뒤 사망, 진지가 물려받는다. 정확히는 비의는 대장군으로서 한중에 주둔하며 성도를 오갔고, 성도에는 진지가 머물게 된다. 덕택에 강유 역시 녹상서사였지만 자연스레 내정에서 멀어진다. 더불어 이 시기는 황제 유선이 친정을 선언한 시기이기도 했으니, 제갈량과 장완 시대보다는 재상의 역할이 약해지기도 했다. 유선의 능력이 좆망급이기는 해도

강유가 위장군이 된 직후 247년부터 약 249년까지 양주와 옹주 지역에서 강인들의 발호가 심해지고 옹주 자사였던 곽회는 이들을 토벌하기 위하여 출병한다. 강유 역시 이 무렵부터 위나라 군을 타겟으로 하여 양주와 옹주 지방으로 출병하지만 곽회, 하후패, 진태, 등애에게 막힌다.

정사에 의하면 당시 강유는 본인의 재능과 무력, 풍속의 익숙함, 주변 호족과의 친분관계 등에 대해 자부심을 가졌으므로[12] 대의를 가지고 항상 대병력을 이끌고 출병하려고 하였으나, 대장군인 비의는 "승상도 하지 못한 일(북벌)을 우리가 어찌 하겠는가, 내정을 튼튼하게 하고 승상급의 인재가 나오기를 기다리는 것이 낫다"(정사 강유전)라며 강유가 대병력을 이끌고 출진하는 것을 저지하고 만 명 안팎의 병력만을 내주었다고 한다.[13]

결국 위장군 강유는 대장군 비의의 명령에 따랐으니 그의 총 병력은 최대로 잡아야 1만 명 정도다. 결국 강인 부족들은 곽회에게 죽거나 곽회의 수중으로 넘어가고(곽회전) 서평 쪽에서 활약했던 치무대의 1만호 정도가 강유에 의해 촉으로 귀순했다(후주전).

강유 입장에서는 엎친데 덮친 격으로 곽회는 옹주 지역의 행정력 확장에 적극적이었다. 즉, 건벽거수(벽을 쌓고 수비를 튼튼하게. 한마디로 우주방어)로 일관하던 사마의와는 달리 곽회는 적극적으로 위나라의 행정력 확장에 방해가 되는 세력들을 토벌한다. 위나라에 있어서 촉도 토벌 대상이니 예외가 아니었다. 예를 들어 249년, 강유는 구안에게 명하여 국산성 부근에 성을 쌓으라 명하였으나 곽회, 진태 등에 의하여 토벌되는 사건이 벌어진다. 사마의 식의 건벽거수를 위나라에서 정책으로 삼았다면 벌어지지 않을 일.

즉, 이 시기 강유가 적극적으로 북벌을 했다고 보기엔 어렵다. 강유로서는 강인들과 연합하여 북벌을 하려고 했으나 비의의 만류로 제대로 되지 않았으며, 오히려 곽회의 적극적 공세에 수성하기에도 바빴던 시절이었다. 양주 서부를 두고 위나라의 행정력을 양주 서부까지 넓히려던 옹주자사 곽회와, 역시 한중으로부터 양주 서부로 북벌 전진기지를 옮기려던 강유가 국지전을 벌이던 시절이라 보는 게 타당할 것이다.

이렇듯 위와 촉이 티격태격하던 시절, 253년, 작년에 유선으로부터 부를 설치할 것을 명령받았던 대장군 비의는[14] 신년연회에서 곽순에 의해 암살당한다.[15] 비의의 죽음으로 인해 촉은 다시 한번 정치, 군사적 변화를 겪는다.

2.6 진지 & 강유 시대 (253년 ~ 258년)

대장군 비의가 죽었으나 내정 파트 진지와 군사 파트 강유 중 그 누구도 비의의 자리를 물려받지 못한다. 녹상서사는 강유도 비의가 죽기 전 비의와 함께 맡고 있었으나 강유 자체가 원정 중이었으니 달리 권한을 행사할 수도 없었다. 또한 비의의 자리였던 대장군과 익주자사는 그대로 공석이 되었다. 덕택에 내정의 진지와 군정의 강유라는 이원체제로 촉이 운영된다. 문제는 진지가 황호와 친했다는 것(...). 황호가 황제의 뜻을 받드는 내시임을 감안한다면 신하의 권력과 황제의 권력이 융합했다고 보아도 좋을 텐데, 문제는 유선 자신이 내정에 크게 관심이 없었다는 점. 딱히 문제를 일으킨 것도 없지만 그렇다고 치적이 있는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이 시기 이후 대사면이 증가하는데(사실상 비의 시절부터 느슨해지긴 했지만) 이 점으로 보아 제갈량 시대의 엄격했던 법치주의가 약해졌을 것이라 추측된다.

문제는 강유가 이 시기에 내정이고 군정이고 신경 쓸 여력이 있었을 지가 의심스러울 상황이었다는 점. 비의가 정월에 사망한 직후 오의 제갈각(제갈근의 아들)이 신성으로 출병한다. 비의가 죽기 직전 유선의 명령을 받아 한중에 대장군부를 개설한 후 군사를 이끌고 한중으로 갔다는 기록을 본다면(비의전), 오와 촉의 연합 공격을 상상할 수 있는 부분. 강유 본인이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강유는 오의 출병을 외면할 수 없었던 듯 하다. 해서 강유 역시 출병하여 남안을 포위한다. 그러나 곽회에 이어 옹주자사가 된 진태를 상대하다 오가 신성에서 위나라에게 막히면서 곧바로 퇴각한다.[16]

강유가 북벌 전문으로서 확실하게 전과를 올리기 시작한 때는 254년 출병부터이다. 이 시기의 강유는 적도로 출병하여 대승을 거둔다. 적도현의 장 이간의 밀서를 받은 후 군사를 움직여 양무를 포위하고 이에 대응해 나온 대촉 전담군인 기병대, 정촉호군을 격파하고 지휘관인 서질의 목을 베는 데 성공한다. 또한 적도현, 하관현, 임조현의 세 현의 많은 성들을 함락시킨다. 그리고 이 무렵 옹주자사에서 정서장군이 된 진태가 도착하기 전 퇴각하며 큰 전과를 올렸으나 이 전투로 인해 촉군의 선봉이었던 탕구장군 장억이 서질과의 교전 중 전사한다.

정촉호군을 전멸시킨 강유는 255년, 다시 한 번 적도로 출병한다. 이 시기 출병에 앞서 강유는 북벌에 대한 반대 여론에 부딪힌다. 반대파의 대표 주자는 장익인 듯 한데, 장익전에 따르면 강유는 이들과 설전을 벌여 모두 묵살시켰다. 더불어 반대했던 장익은 강유의 북벌에 종군하게 되었다.

255년, 강유는 장익까지 끌고 다시 한 번 적도로 갔는데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야전을 통해 옹주자사 왕경을 격파하여 적군 수만 명을 죽여 사람 잡은 수로만(…) 계산을 하자면 제갈량의 북벌 이상 가는 성과를 거뒀다. 당시 위나라의 패배는 정사 등애전에 따르면 "옹주 전체가 함락 직전의 상태"에 이르렀다고 하며 등애는 아예 적도에서 철수하고 기회를 봐서 다시 싸우자고 했을 정도이다. 거기에 당시 진태의 표현에 따르면 강유의 보병은 경장보병이고 왕경의 군대는 잘 무장된 정예보병이었으니 강유의 전과가 어느정도 였는지 짐작이 가능하다. 하지만 진태가 강유군이 보급이 없고 공성 장비도 없어서 공성에 시간이 걸릴 것이라며 진군을 감행하여 강유군의 적도 포위를 풀어버리는 데 성공한다.

다만 적도를 지키던 옹주 자사 왕경이 열흘만 더 늦었다면 옹주가 강유에게 넘어갈 뻔했다니(진태전) 위나라의 피해가 정말 막대했던 듯. 이 해의 전공으로 강유는 위나라 영토의 좀 더 깊숙한 곳, 종제까지 진출할 수 있었으며 더불어 비의 사후 공석이었던 대장군으로까지 승진한다.

256년 대장군으로 승진한 강유는 당시 보리 수확기였던 여름에 재차 원정에 나서며 한중도독 호제에게 상규에서 만날 것을 약속한 후 출병한다. 당시 위나라는 강유가 재침하리라 생각을 못했고, 적도에서 강유의 포위망을 푼 진태마저 강유가 오지 않으리라 생각했으니 강유의 공격을 절호의 기습이 될 수도 있었으나, 하필 강유의 공격을 예측한 단 한 사람이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등애였다.

당시 등애는 안서장군 대리로 임명되어 적도, 농서, 남안 및 기산에 병력을 배치하고 강유와 대치했다.[17]

등애는 앞서말한 네 곳에 군사를 나누어 지키고 종제에 주둔하던 강유는 등애가 기산을 지키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남안 쪽으로 진군한다. 남안에 이르기 전 강유는 무성산에서 등애와 접전을 벌이다 무성산을 우회, 위수를 건너 상규로 향한다. 적도, 농서, 무성산, 기산에서 군사를 나누어 방어 중이던 등애는 군사를 거두어 강유를 쫓는데, 강유를 상규로 몰아넣는다 정도가 보다 정확한 표현일 듯.

다만 강유 역시 상규 일대에서 등애와 회전을 시도한 듯 하다. 왜냐하면 호제와의 사전 약속에 의하여 만나기로 한 곳이 상규이기 때문이다(강유전, 등애전). 256년 전투에서 강유가 택한 루트를 따라가면 상규를 중심으로 강유는 서쪽에서 상규로 접근하고, 호제는 한중을 거쳐 기산 또는 목문도를 따라 상규로 오게 되므로 남에서 북진하여 상규로 진격하게 된다. 강유는 이를 통해 그때까지의 전투 중에 상실한 전력을 보충하고 한중군이라는 적지 않은 규모의 증원군의 힘을 합처 상규로 추격해오는 등애를 격파하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호제는 제 시간에 도착하지 못했고 결국 강유는 후퇴한다. 기록에 따르면 이 전투로 인해 촉장 20명이 전사하였고 많은 병사들이 강유를 원망하였으며, 강유 본인도 스스로 대장군에서 후장군으로 관직을 낮췄다고 한다.

호제와의 연합 작전이 실패한 이유로는 여러 추측이 있다. 호제가 연공 서열상 위인 강유에게 삐쳤다[18], 호제가 위군에 의해 사전 저지되었다, 호제가 진군해야 하는 루트인 기산-한중이 300km가 넘으며 설사 호제가 강유와의 연합 작전을 위해 전진 배치되어있다 하더라도 대략 촉 경계선부터 기산까지 100km이니 거리 문제도 상당했을 것이고, 더불어 강유가 위치했던 종제와 호제가 위치했던 한중 부근은 무려 600km가 넘어가니 양자간 연락 문제도 연계 작전에 실이 될 지언정 득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강유의 옹호론자들은 강유는 곧바로 다음해에 장성을 습격한다는 걸 고려하여 강유군의 피해가 생각보다 많지 않았을 것이라 주장하나, 위에 언급했듯이 촉장 20명이 전사하고 많은 병사들이 강유를 원망했다는 기록을 보아 피해가 적었다고 하기는 힘들다. 게다가 제갈량전에 따르면 북벌 당시 촉군은 일정 수가 중앙군과 교체된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강유는 중앙군과의 로테이션을 통한 병력 보충을 통하여 단곡에서의 상실된 병력을 어느 정도 보충할 수 있다. 때문에 이듬해, 위나라의 제갈탄 반란에 맞추어 마음이 급해진 강유가 이듬해에 북벌에 나섰던 것으로도 해석 가능하다. 즉, 이듬해에 있었던 강유의 장성 습격이 단곡에서 강유의 피해가 적었다는 주장의 확실한 근거는 되지 못한다.

결론적으로 256년, 강유와 등애 두 사람은 상규에서 전투를 벌였다. 이 곳에서 어떤 이유로 한중독 호제의 지원을 받지 못한 강유 쪽이 등애에 의해 단곡까지 밀려 대패한 것으로 보인다.

촉의 군사 규모와 강유군의 규모 및 장수의 손실 정도로 보았을 때 강유의 단곡 전투의 패배로 인한 군사적 손실은 결코 적지 않았다.

2.7 유선 및 황호 시대(…) (258년 ~ 263년)

단곡 전투의 결과로 등애는 양주 서쪽 지역의 방어 시스템을 안정적으로 갖출 수 있게 된다. 등애의 방어 시스템은 이후 진나라에서 이용, 강인들을 막는 데 사용할 정도였다(등애전). 이는 단곡 전투 이후 강유가 등애의 방어 체계 구축을 효과적으로 방해할 수 없을 정도로 관서 지역에서 강유의 영향력이 약화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또한 단곡 전투의 결과 농서 지역에 소동이 있었다는 정사 기록으로 볼 때, 255년까지 강유가 구축했던 이 지역에 대한 안정 확보 및 주민들과의 연계가 상당 부분 끊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는 262년의 북벌이 의도는 적도 출병이었으나(요화전), 결과는 후화에서 등애에게 막힌 점(강유전)을 보았을 때 짐작할 수 있다.

257년에 강유는 제갈탄이 반란을 일으킨 틈을 타 수만 명을 이끌고 장성을 습격했지만 사마망등애는 방어만하고 싸움에 응하지 않았다.

<자치통감>에 따르면 이 해, 연이은 출병으로 촉한사람들이 근심하고 고뇌해 초주진지의 협조 하에 <구국론>을 짓는다. 내용인 즉슨 위나라가 비교적 안정적이고 백성들도 전쟁에 피곤을 느끼니 변란이 생길 때까지 촉나라가 기다려야 한다는 내용. 그런데 정작 <화양국지>에 따르면 초주의 구국론은 당시 사람들이 주의깊게 살피지 않았다고 한다. 이것이 강유 북진 이전인지 이후인지는 다소 애매하지만, 아무튼 강유는 북진했다. 그러나, 위는 제갈탄의 난에도 불구하고 양면 전쟁을 수행하는데 무리가 없었고 촉은 전력이 부족했다.

258년 제갈탄의 패배 소식을 듣고 강유는 병사를 물린다. 그리고 성도로 돌아와 다시 대장군에 오른다. 강유의 대장군 복귀에 대해 대장군으로부터 후장군으로의 강등 자체가 강유 스스로가 자신에게 책임을 물은 형식적이라는 주장도 있으나, 257년 장성 습격 당시 자신을 비판하는 양희에게 강유가 반론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아 완전히 형식적이라고 보기에는 힘들다. 참고로 정사 양희전엔 강유가 당시 대장군이라 적혀있는데 후장군이다. 정사 서술자 진수가 착각한 듯.

문제는 258년, 강유가 대장군에 복귀할 무렵 진지와 거기장군 하후패가 같이 죽는다.[19] 문제는 강유가 대장군에 복귀하기 전의 직책으로만 본다면 진지가 내정 1인자, 하후패가 군정 1인자인라 내정과 군정에 모두 공백이 생긴 셈으로 강유가 맡는 것이 합당하나...

그렇더라. 이 때는 이미 황호 세상이었다. 언제인지는 알 수 없으나 강유는 유선에게 황호를 죽이라 건의까지 했으나 유선이 거절하면서 성도에도 있기 어렵게 된다(강유전). 즉, 대장군이자 녹상서사, 위나라로 치자면 사마소/사마사 형제와 같은 지위였던 강유였지만 사실상 황호 때문에 정치에 참여하기 힘들었다.[20] 실제로 파성넷에 번역된 강유전의 주석을 보면 황호를 살해할 것을 유선에게 주창하자 오히려 유선이 '황호는 소인배일 뿐이데 뭘 걱정하냐. 동윤이 황호를 견제하는 게 참 보기 그렇더라.'는 식으로 옹호하자 돌아올 보복을 우려해 답중에서 보리농사(둔전)를 하겠다면서 몸을 피했다는 말이 있다. 연의는 여기에 약간 살을 붙여서 묘사한다.

그리고 이 무렵 강유는 후에 엄청난 결과를 초래하게 될 일을 하게 되는데... 바로 한중의 방어 시스템을 바꾼 것이다. 원래의 시스템은 유비가 과거 한중을 조조에게서 뺏은 후 위연이 시작했고 이후 왕평이 확립했던 것인데 이 제도에 강유가 손을 댄 셈이다. 위연, 왕평이 오랜 시간 구축하고 유지해온 한중 방어라인은 위군에게 큰 피해는 주기 힘드나 매우 견고해 방어가 쉬우며 들어가기조차 힘들어팔각진 위군이 함부로 침입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오랜기간 동안 위나라로부터의 침입이 거의 없었다. 물론 대군을 이끌고 침입해 온 적이 있으나 병력 차이가 굉장히 컸음에도 불구하고 왕평의 방어시스템이지스에 막혀 전혀 전진하지 못하고 오히려 성도에서의 원군이 오자 역공을 당해 대패를 하여 위나라에 어마어마한 손실을 가져온 낙곡대전이 대표적이다. 허나 강유 자신의 설명은 과거의 시스템으로는 한중에 들어온 위군을 포위 섬멸할 수 없기 때문에 시스템을 바꾸어 한중으로 들어온 위군의 포위 섬멸을 노리겠다는 거다. 일단 정사 강유전에 나온 강유 자신의 설명을 보자면

여러 진영을 교차시켜 수비하는 것은 방어할 수는 있지만 큰 이익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21] ……만약 적이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들으면 여러 진영에서 모두 군사를 거두고 곡식을 모아 한성과 낙성으로 물러나 적이 평지로 들어오게 하고[22], 중요한 곳에 병사를 주둔시켜 수비하도록 하는 것만 못합니다…… ……적군은 관소를 공격해도 함락시키지 못할 것이고 들에 흩어져 있는 식량이 없어 천리 떨어진 곳까지 식량을 운반해 와야 되므로 자연스레 피폐해질 것입니다. 적군이 퇴각하는 날, 여러 성에서 일제히 나와 유격대와 함께 힘을 합쳐 치도록 하십시오. 이것이 적군을 전멸시키는 방법입니다.
이에 독한중 호제는 물러나 한수에 주둔하게 하고, 감군 왕함은 낙성을 수비하고 호군 장빈은 한성을 수비하게 하였다.

이에 대해 <<한진춘추>>의 예를 들어 관서지방이 텅텅 비었으므로 이전의 방어 시스템이 작동했기에, 강유가 별 문제 없는 방어 시스템을 바꾼 거라 강유를 비판하는 의견이 있다. 가장 큰 문제는 조상의 대대적인 침입으로 유비의 방어 시스템을 작동시켜야 했던 243년, 당시 한중에는 주둔 병력이 3만 내외였기에 대부분의 장수들은 한중 기존 방어 시스템을 포기하고 낙곡까지 후퇴하여 적을 맞아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왕평이 분연히 야전을 주장하며 한중 내부 요새들의 방어 병력 및 자신 직속의 3,000명으로 유격전을 벌여 발라버리고 비의와 함께 개발살 낸 것이다. 그런데 강유 시대애 왕평은 당연히 없다. 더불어 한중 지키는 사람은 예전에 단곡 전투에서 작전 말아드신 호제.

게다가 한진춘추의 내용과는 달리 관서 지방은 텅텅 비지 않았다. 왜냐하면 당시에 옹주 자사로서 정촉군의 선봉에 섰던 곽회가 낌새채고는 흥세산 전투 개시 전에 위나라로 튀어버렸다. 덕택에 옹주군 약 3만 명 정도는 흥세산 전투 이후에도 이상없이 보존되었다. 즉, 텅텅 비었다는 옹주의 군부는 전투 후에도 쌩쌩 돌아가고 있었으니 적을 전멸시키지 못했다는 강유의 말이 사실에 근접하다.

아무튼 바뀐 방어 시스템의 개념과 이전 시스템의 차이를 설명해보면...

지도를 보면 왕평이 만든 방어선(정군산 부근이다)보다 강유의 방어선(한중 남쪽이다)이 남쪽에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정촉 당시 각군의 배치 및 맡았던 임무가 달라졌음을 뜻한다. 왕평이 한중독을 맡고 있을 때 일어났던 낙곡전투 당시 한중군은 외곽 방어선 유지 및 후방 교란을, 비의가 이끌고 올라온 중앙군은 위군의 포위 섬멸이라는 임무를 맡았다. 그러나 강유의 변경된 방어선에서 한중군은 주요 거점의 수비를, 중앙군은 측면 엄호 및 기동로 확보의 임무를 수행했고 위군의 포위 섬멸을 맡은 것은 강유가 직접 이끄는 답중의 직속부대였다. 축구로 치면 수비수(한중군)은 골문 앞에 버티고 있고, 미드필더(중앙군)가 수비하다 치달로 공격에 나서는 것이고, 원톱(강유)이 상대 골문 앞에서 버티는 형국

이는 전선 위치의 이동으로 인한 한중지역의 전력 감소가 고려된 방어선 재배치로 보인다. 왕평 시절까지만 해도 한중은 최전방 사령부에 가까웠지만 강유 시절에는 한중에서 서쪽으로 음평을 지나야 있는 답중이 최전방 사령부이며 북벌부대 본진의 성격을 띄었다. 한정된 촉군의 규모(9~12만)를 생각하면 답중으로 전력이 집중될수록 한중지역 전력은 감소할 수밖엔 없기 때문이다. 이점을 감안한다면 왕평 시대의 한중 수비 시스템과 강유 시대의 수비 시스템 사이에는 큰 개념적 차이는 없으나, 위를 맞을 전선의 위치 및 한중군, 중앙군, 답중군의 역할 변화라는 차이는 있다.

문제는 그 영향이 좀 컸다는 데 있다. 답중군과 한중군간의 역할 변화가 일어난 만큼 수비로 인해 답중군의 부담이 가중된 상황이니. 더불어 기존의 방어 시스템에 따르면 한중에서 적을 저지해야 할 임물은 다름아닌 호제인데, 호제는 앞서 말했듯 단곡에서의 실수(?)로 인해 작전 하나를 화끈하게 말아먹은 인물(...)이니 강유 입장에서는 그를 신뢰하기도 좀...

시스템 변경 덕택에 답중 강유군의 부담이 엄청 늘어났다. 당연히 위나라에서는 강유만 막으면 된다라는 의견이 나올 정도였고(진서 문제기) 실제로 그러했다. 정촉 당시 등애가 강유를 막은 틈에 종회는 한중까지 일사천리였으니.

그러나 사실 이 방어책이 무너진 가장 큰 원인은 황호의 커뮤니케이션 방해로 인한 수비시기를 놓친 것. 정확히 말하면 황제 유선이 종회 + 등애의 촉 연합 공격 당시 음평을 봉쇄하고 양안관구 등 각 진영의 병력을 추가해야 한다는 강유의 진언을 무시한 탓에 위의 공격에 대한 촉의 대응이 늦었던 탓에 방어막이 뚫렸으니 강유보다는 유선의 탓이 더 크다고 볼 수 있다.

258년, 수비 시스템을 바꾼 강유는 262년까지 답중에서 둔전하며 지낸다. 황호를 죽이라고 건의하지만 거절하는 유선 덕택에 감히 성도로 가지 못했기 때문이다(강유전). 덕택에 답중에 있던 강유는 262년, 마지막 북벌을 감행했으나 등애에게 또 다시 대패한다. 강유의 주요 패배에 '단곡', '후화'가 함께 언급될 정도이니(종회전) 단곡의 패배 규모를 감안한다면 후화 전투에서의 강유군 패배 규모 역시 작지 않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후화 전투는 이상할 만큼 기록이 미비할 뿐더러[23] 전장도 그때까지의 북벌과는 다르게 촉 국경 근방에 가까운 지역이다. 때문에 후화 전투가 대패라는 것은 과장된 기록이며 실제로는 국경 근처에서 소규모 접전을 벌여 패했거나 상황이 불리해서 큰 전투 없이 그냥 물러난 정도가 아니겠냐는 의견도 존재한다.

2.8 촉의 멸망 및 직후 (263년 및 264년)

262년 무렵, 사마소는 자꾸 귀찮게 구는 세력을 없애 사마 씨 왕조를 만들 목적으로 본격적으로 촉을 치기로 결심한다(종회전). 사마소는 선박을 건조하여 를 치러가는 척 하며, 종회를 도독, 등애와 제갈서로 하여금 촉 정벌 군단을 편성한다. 종회는 이 시기부터 배를 만들어 오를 친다는 소문을 내고, 이 때 즈음에 강유가 후화 전투를 벌인다. 물론 오를 친다는 소문은 거짓이었다.[24][25][26]

이 무렵 사마소의 정촉 계획을 파악한 강유는 유선에게 요화장익을 각각 음평교두와 양안관구(연의에서는 양평관)[27]에 파견해 달라고 요청한다. 특히 한중과 답중을 잇는 통로인 음평교두의 확보는 강유군의 기동로를 유지하기 위해 필수적이었다. 그러나 유선과 황호는 이 요청을 씹어버린다. 그것도 황호가 잘 아는 무녀가 위가 절대 안 처들어온다는 예언을 했다는 이유로(...) 여러분 여기 병신과 머저리가 있어요! 물론 중신들은 이런 요청이 있었는지도 알지 못했다.

263년 여름, 사마소는 정촉(征蜀)을 개시한다. 촉후주는 등애가 답중으로, 제갈서가 음평교두에서 강유의 뒤를 차단하기 위해 기산에서 무가로, 종회가 낙곡으로 진격한 이후에야 뒤늦게 요화장익, 동궐을 출발시킨다. 일단 요화는 답중에서 등애를 상대중인 강유를 돕도록 하고[28] 장익과 동궐은 양안관구를 지원토록 하도록 했다.

강유는 등애를 상대하며 음평을 통해 종회가 처들어 온 한중으로 가려고 했으나 제갈서가 음평교두를 이미 점령한 사실을 알게 된다.[29] 순식간에 강유는 답중에선 등애의 3만, 뒤에선 제갈서의 3만을 상대해야 하는 처지에 몰린 것이다. 촉의 주력을 지휘하고 있던 강유군은 그대로 포위된 상태로 여기서 섬멸당한다면 검각이고 뭐고 곧바로 게임오버일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포기를 모르던 강유는 그 길로 공함곡, 즉 답중과 옹주가 연결된 곳으로 북진한다. 당시 옹주 자사였던 제갈서는 강유의 움직임에 당황, 음평교두에서 공함곡으로 향한다. 30리가량 이동했던 강유는 곧바로 회군해서, 제갈서군을 기만하고 포위망을 빠져나와 한중을 지원하기 위해 움직인다. 강유의 본대를 고립시키고 본인의 주력이 허술해진 방어진을 통과하여 입촉한다는 종회의 전략이 거의 성공했을 무렵에 순간적인 강유의 기지는 완벽해 보였던 종회의 전략을 어그러놓았다. 결과적으로는 전황에 큰 영향을 주지 못했다고 할 수 있지만 이런 강유의 기지는 촉한 최후의 명장이라는 명성에 뒤지지 않는다.

그러나 겨우 하루 차이로 제갈서의 포위망을 돌파한 강유는 기뻐할 순간도 없이 원래 플랜대로라면 버티고 있었어야 할 양안관구가 이미 내부의 배신으로 종회의 8만 대군에 의해 돌파된 사실[30]을 알고는 한중을 포기한다, 강유전에 따르면 강유가 요화와 함께 음평에서 퇴각할때, 장익, 동궐이 이제 막 한수(가맹관)에 이르렀는데[31] 이들은 군사를 합쳐 익주의 검각에서 농성한다.[32] 검각에서 강유와 종회는 약 1개월에 걸쳐 지리한 공방을 벌이는데, 공방 끝에 불리해진 종회는 잠시 퇴각한다. 종회는 안 되겠다 싶었던지 강유를 회유하기 위해 편지를 보내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공후(公侯)는 문무의 덕을 갖추고 세상을 초월한 지략을 품고 공을 세워 파(巴), 한(漢)을 구제하여 화하에까지 명성을 드날렸으니 멀고 가까운 이들 중 그대의 명성에 귀복하지 않는 이가 없었소. 늘 지난날을 생각하면 일찍이 (그대와 나는 위나라의) 큰 교화를 함께 입었으며 오찰과 정교가 우리의 우호에 비유될 수 있을 것이오.”

강유는 대꾸할 가치가 없다고 느꼈는지(...) 서신에 답하지 않고 군영을 벌려세우고 검각을 수비하였다. 이렇게 되고 보니 최초의 전략이 어그러져 당초 예측했던 손쉬운 입촉이 불가능해진 종회는 곧 이전부터 정촉을 시도할때 가장 큰 문제였고 강유 역시 예측했던 정촉군의 문제인 한중으로부터 이어지는 험한길을 통한 군량보급의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에 종회는 어쩔수 없이 군대를 물려 귀환할 것을 의논하였다. 이때 제갈서가 자기계획대로 안 되자 빡친것으로 추정되는 종회의 모함에 체포되어 끌려간건 덤.[33]

한편 등애는 검각을 죽 둘러 산을 넘어서 강유성과 면죽관을 공격하기로 결정한다. 루트는 음평으로부터 작은 길을 달려 한의 덕양정을 지나 부성을 공략하는것. 그 곳들을 공격한다면 강유가 검각에서 나와 파와 부현을 통해 성도로 나올 수 밖에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산악 돌파로 많은 손실이 있었지만 강유성의 수장인 마막이 저항없이 항복(!)[34]하자 군을 재정비 할 시간을 얻은 등애는 요충지를 점하지 않고 단기결전에 나선 제갈첨 부자를 격파하고 성도까지 진격한다. 때는 263년 겨울, 그리고 곧 황제 유선이 한번 싸워보지도 않고 항복하는 바람에 촉은 멸망하고 만다.[35]

실제로 지도를 그려보면 검각에서 나와 파로 향하는 강유는 먼저 종회의 11만 군을 제압한 다음 성도를 뜯고 있는 등애의 약 2만 군사를 공격해야 하는 상황이다. 하지만 종회의 군대만 해도 11만[36]으로 강유가 이끌던 7만의 군대를 능가하는 상황이고[37], 종회 본인의 기량이 형편없었으니 이걸 궤멸시키는 데 성공한다고 쳐도 사마소가 직접 군대를 몰아 내려올 수도 있다.[38]

그러나 당시 상황이 촉에 불리한 것만은 아니었는데, 우선 등애의 2만 군사가 위협적이라지만 성도의 유선 측이 효과적으로 등애를 잡고 있다는 전제가 불가능한건 아니라는 것이다. 성도 같은 거대한 성을 단기간에 공략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고 등애 본인도 명장이고 군사도 정예였지만, 길도 없는 음평의 산 타고 와서 뭐 빠지게 달려온 군대가 제대로 공성 준비를 갖췄으리라 기대하긴 어려운데다가 이미 제갈첨과의 전투에서 등충과 사찬이 한번 패한적이 있었으니 그 손실이 없었다고 하기도 못하다.[39] 거기에 등애가 성도에 들이닥친 시점에서 이미 동오의 원군이 오고 있었으며, 곽익이 다스리던 건녕에서의 원군도 기대할 수 있었다. 실제로 곽익은 위나라 군대가 온다는 소리를 듣자, 성도로 곧장 가려 했으나 유선이 이미 방비가 튼튼하다는 이유로어디가 그 청을 씹어버렸다, 결국 곽익은 좀 더 버텨봤다가 항복했다.[40] 때문에 유선이 버텼다면 촉한의 멸망만은 막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주장[41]도 있다.[42]

아무튼 유선은 성도를 치고 있던 등애에게 항복한다. 그리고 등애에게 항복한 유선은 강유에게, 종회에게 항복하라는 조서를 내린다. 명령을 받은 강유는 파 지역으로 흩어져서 종회의 남진을 막던 각 진의 장수들에게 직접 다니면서 황제의 항복 명령을 전한다. 이 명령을 받은 촉장들은 모두 자신의 을 들어 바위를 내리쳤다고 한다. 괜히 요코야마 미츠테루 삼국지 마지막 부분에 그런 장면이 나오는 게 아니었던 것이다.

촉 멸망 이후 종회는 강유를 열렬히 환영하며 강유의 수레와 깃발 등을 돌려주고 항상 함께 다니며 강유에게 의견을 물었다.[43] 앞서 검각에서 보낸 편지도 그렇고 종회가 강유에게 항복을 받을때 "왜 이리 늦은거요?”라고 말하자 강유가 정색하고 눈물을 흘리며 "이 사람을 오늘 보는 것만도 빠른 것입니다!"라고 말하니 종회가 그를 매우 높게 여겼다는 기록을 보면 종회는 강유에게 상당한 호감을 품고 있었던 듯하다.

이후 강유는 종회가 일으킨 반란에 가담하였으나 실패했다. 위군이 몰려들자 강유는 종회의 병사들을 인솔하여 저항했다. 당시 63세였던 그는 몰려든 병사들을 상대하여 직접 대여섯 명을 죽이며 분전하지만[44][45][46] 끝내 종회와 더불어 살해된다. 강유의 시신은 죽은 뒤 쓸개가 꺼내어져 그 크기가 되나 될 정도라는 기록이 남겨질 정도로 위군에 의해 참혹하게 훼손되었다. 정사나 정사에 배송지 주석으로 적힌 한진춘추, 화양국지와 소설인 연의 둘 다 끝내는 종회를 이용하여 촉한을 부흥시키려 한 것으로 묘사된다. 이 때문에 종회를 회유하여 반란을 일으키도록 하였는데 기록을 종합하면 강유를 비롯한 촉장들은 종회로부터 옛 촉한군의 인호절개(지휘권한)을 돌려받았고 종회의 계획에 동참해 위장들뿐만 아니라 그들이 이끌고 있던 직속병력들을 촉병들에게 들려준 수천개의 곤 등의 무기로 기습하여 차례대로 살해할 계획이었던 걸로 보인다. 어쨌거나 이 난리로 인해 이때 촉의 양대 노장 중 하나인 장익도 휘말려 사망하며, 다른 노장인 요화는 낙양으로 압송되어 가는 도중 사망한다.

그 밖에 역시 정사에 주석으로 달린 파촉 지방의 역사만을 다루고 있는 화양국지에는 강유가 유선에게 보낸 밀서의 내용도 전해지는데, 이 자료에 의하면 강유는 그 난장판인 상황에서도 마지막까지 촉한의 부흥을 꾀했던 걸로 보인다.

폐하께서는 며칠만 고생을 참아 주십시오. 신이 위태로운 사직을 다시 세워서 어두워진 일월(日月)이 다시 빛나도록 하겠습니다.

3 강유가 촉에 남았던 이유

앞서 말한 듯 강유는 위로 돌아오라는 가족들의 권고에도 불구하고 촉에 남는다. 정사의 서서전이나 정욱전에서 보듯 당대에는 가족의 요청이라면 적국에 있던 자라도 넘어 오는 것이 상례였다. 그럼에도 강유는 거절하고 촉에 남는다. 아니 촉에 남는 정도가 아니라 원래의 소속 국가였던 위나라를 끊임없이 침공하다 못해서 마지막까지 촉을 부흥시키기 위해 온 힘을 기울이기까지 한다. 촉 입장에서는 충신이겠지만 위의 입장에서는 제 1역적.

당대의 풍습과 어긋나게 강유가 왜 촉에 남았는지, 또한 촉에 충성을 다했는지는 미스테리이다. 왜냐하면 강유 자신이 자신의 행동을 해명하기 위해 남긴 문헌이 없기 때문이다.

다만 전후 상황으로 볼 때 다음과 같은 추측이 가능하다.

  • 1. 강유가 자신을 위가 아닌 한의 신하로 생각했을 가능성
  • 2. 제갈량의 이상을 따르고 그를 위해 충심을 발휘했다는 설
  • 3. 천수 귀환을 위해 북벌을 이용했다는 설
  • 4. 촉이 익주에 갇히지 않기 위해서 강유 본인이 사적으로 원하든 원하지 않았든 북진이라는 임무를 수행할 수 밖에 없다는 설

이에 대해선 다음과 같은 말들이 나온다.

  • 1. 유교적 백그라운드를 가진 강유가 위에 있을 당시에도 자신을 한의 신하로 생각했을 가능성인데, 천수 시절 마준에게 디스당하기 전 마준을 어떻게든 따라가려 했던 흔적을 보면 자신을 처음부터 한의 신하로 생각했을지 의심스러운 면도 있다.[47]
  • 2. 촉 귀순 당시 27세나 된 인간이 제갈량이라는 한 인간을 좋아해서 따라다녔을까 의문이라는 시각이 있긴 하고 강유가 하도 연의나 민간설화, 후대 매체에 제갈량 바라기(...)로 그려진 탓에 '에이 아무리 그래도 설마 그것 때문이었을까' 하는 의문이 제기되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연의와 달리 그 당시 딱히 특출나지 않은 위나라 출신 항장 강유를 두고 관중 최고의 인재에 마량 등을 뛰어넘는 인재이며 황제를 만나게 해야 한다며 극찬해서 장예와 장완한테 계속 언플해 비의 등과 함께 중심 권력에 편입하게 한 것도 제갈량이다. 사실 강유가 큰 뜻이 있었다는데 그 뜻을 이루도록 열렬히 서포트한게 제갈량이다. 즉, 자신을 알아주고 순조롭게 뜻을 펼칠수 있도록 이끌어 준 제갈량을 따르고 그의 이상을 실현시키기 위해 계속 북벌에 나선것이라면 이것이 마냥 허황한 말은 아니라는 것. 게다가 제갈량도 비슷한 나이에 유비와 만나 그 뜻을 이어 북벌한 셈이니...
  • 3. 강유가 어머니한테 받았다는 당귀 받고 걍 위로 리턴하면 되는 일. 참고로 당시에는 비록 적국으로 아래 사람이 넘어간다 하더라도 그 이유가 부모를 모시기 위해서라면 윗 사람이 용서해 주는 것이 관례(효>충)였다. 잘 모르겠으면 삼국지 정사의 <정욱전> 참조. 당장 유비가 형주 시절에 서서를 떠나보낸 이야기도 있고.
  • 4. 곽회가 강인들을 흡수해가며 서부쪽으로 행정력/군사력 넓히기에 여념이 없었다는 점을 들어 추측할 수는 있겠으나 역시 정확하게 사서에 언급된 부분은 없다. 게다가 촉에 왜 있었는지를 묻는데, '촉을 위해 익주 이외의 땅을 얻으려 했다'는 답은 뭐란 말인가.

강유 자신이 남긴 기록이 없다는 점을 고려하고 정사의 <강유전>이나 <자치통감> 등 관련 문헌 역시 이 점에 대하여 침묵하고 있으니 강유가 왜 그리 제갈량 사후 30여 년을 나홀로 북벌하느라 애썼는지는 강유 본인이 남긴 문헌이나 주변의 증언이 없는 한, 미루어 짐작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그러나 일개 항장이 6~7년 간 최고권력자한테 내부 세력의 인재풀과 비교해서도 뛰어난 인물이라 인정받고 기회를 받았으며 그런 기회를 준 사람이 어느 권력 집단에 대해 세대를 뛰어넘는 권위를 가질 수 있었던 인물이고 향후 차기 권력 1순위자[48]에까지 자신의 재능을 적극적으로 추천해 줄 수 있던 사람이라면? 강유 본인이 남긴 문헌이나 주변의 증언이 없는 한, 어떤 설을 대입하더라도 강유가 촉에 남아 북벌을 지속한 이유에 대한 만족스러운 설명은 어렵겠지만 이것도 하나의 설명은 될 수 있을 것이다.

4 평가

4.1 과거의 평가

정사의 저자 진수는 동시기 사람 극정의 말을 빌려 강유에 대하여 항상 배우려 하고 근면하며 첩을 두지 않고, 검소하여 먹고 살 만할 정도로 족한 살림을 했으며, 재물을 탐하지 않고 매사에 솔선수범 했다고 평함과 동시에 자신의 평을 들어 강유는 대체로 문무를 갖추고 공명을 세우는데 뜻을 두었으나 군사들을 경시하며 군대를 남용하고 분명하게 결단하였으나 주밀하지 못하여 끝내 죽었으니 작은 나라에서 요란하게 일을 벌인것 때문이다라고 비판했다. 이렇듯 정사의 평은 좋은 평과 나쁜평이 갈린다. 애초에 정사 자체가 진나라에 우호적인 시각을 주로 반영한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강유에 대한 정사의 평가가 유난히 우호적일 이유는 없다. 오히려 깎였으면 깎였을 테지.[49] 당장 강유와 직접 대적한 동시대의 등애나 종회도 강유를 일세의 영걸로 평가했기 때문에 강유 당대의 평가는 정사보다 높았다고 짐작은 할 수 있다. 또 손성의 진양추에 따르면 환온이 촉을 평정할 때에 촉의 여러 나이든 이들을 만났는데 그들이 말하길 강유가 이미 항복한 뒤에 은밀히 유선에게 표를 올려 ‘종회에게 거짓으로 항복하여 섬기고 이를 틈타 그를 죽이고 촉 땅을 회복하고자 한다.'라고 말했으나 때마침 일이 이루어지지 못하여 마침내 멸망되기에 이르렀으니 촉인들이 지금도 그를 안타깝게 여긴다고 하였다고 한다. 살아생전 촉한 사람들에게 비난도 받았던 강유였지만 그래도 그의 죽음은 촉한 사람들을 안타깝게한 듯하다.

동진의 간보는 임금이 모욕을 당하고도 살았으면서 나중에야 죽었으니 애석하다 정도로 평가했지만 비슷한 시기 인물인 손성은 강유를 비난한것이 가장 심하였다. 참고로 손성은 잡기의 저자로서, 강유의 당기-원지 일화의 출처가 잡기다. 손성의 강유평은 다음과 같다.[50]

극정의 말은 잘못되었다. 무릇 선비란 백 가지의 행동과 많은 일을 처리하는 것이 뛰어나더라도 충(忠), 효(孝), 의(義), 절(節)을 다하는 것을 최고의 행동으로 삼는다. 강유는 위를 채찍질한다는 명분으로 촉왕조를 바깥에서 분주하게 만들었으니 군주의 뜻을 어기고 자신에게 유리한 일만 했으니 충이라고 말할 수 없다. 어머니를 버리고 살 길을 찾았으니 효라고 말 할 수도 없다. 자신이 섬겼던 위나라를 해쳤으니 의라고 말할 수도 없다. 패하고도 죽음을 피하려고 했으니 절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 또 덕정을 베풀지 않고 전쟁을 자주 하여 백성들을 피로하게 했으며, 어명에 따라서 임무를 맡았으나 적을 막지 못했으니 지혜와 용기가 있었다고 말할 수도 없다. 이 여섯 가지 가운데 강유는 하나도 지키지 못했다. 그는 사실 위에서 살 길을 찾아 도망친 신하에 불과했다. 이러한 망국의 혼란을 초래한 인물을 다른 사람의 모범이 된다고 했으니 사람들을 혼란하게 만든 말이 아닌가? 강유가 배우는 것을 좋아하고 청렴하게 살았다고 하지만, 이는 도둑이 훔친 재물을 나누어 주면서 의롭다고 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손성의 평은 극정의 평에 대한 답이라 할 수 있으니, 극정의 평을 보아야 할 차례다. 극정은 강유에 대하여 우호적으로 평하였다.

강백약은 상장(上將)으로서의 중임을 맡았지만, 초라한 집에 살면서 불필요한 재산을 모으지 않았다. 별당에 첩을 두어 난잡한 행동을 하지 않았으며, 의복과 음식은 검소하기 짝이 없었다. 관에서 지급하지 않는 비용은 모두 자신의 손으로 마련했다. 이러한 행동은 남을 질책하거나 자신의 욕망을 버리려고 했던 것이 아니다. 그는 만족을 알던 사람이었다. 사람들은 성공한 사람만 칭찬하고 실패한 사람은 비난한다. 또한 높은 사람에게 기대고 낮은 사람은 무시한다. 많은 사람들이 강유가 종회와 같은 하찮은 인간에게 의지하여 자신과 종족을 멸망시켰다고 비난하고 그의 다른 측면은 생각하지 않는다. 이는 《춘추》에서 그릇된 사람을 폄하하는 것과 전혀 다른 짓이다. 강유는 배우기를 좋아했으며, 성실, 청렴, 소박, 검소를 행동의 준칙으로 삼았으니 한 시대의 모범이라 할 만하다.

요컨대 강유 당대마저도 평이 갈린다. 평이 극에서 극을 오가는 걸 보면 요즘 뿐 아니라 과거에도 어지간히 강유는 논란의 대상이었던 듯.

참고로 송대의 배송지는 다음과 같이 손성과 극정의 평을 종합한다:

신이 보건대 극정의 이 평가는 칭찬할만한 것을 취했지 강유가 모든 측면에서 사람들의 모범이 되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한 시대의 모범이 될 만한 것은 그가 학문을 좋아했고 검소하게 살았다는 것뿐입니다. 또 강유전이나 위략에선 강유가 본디 배반하려는 마음이 없었지만 내몰려서 촉에 귀순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손성이 어머니를 저버렸다고 비난한 것은 옳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나머지는 지나친 비난이므로 손성이 극정을 비판할 이유는 없습니다.

자치통감의 주를 단 호삼성은 진수, 간보, 손성 등의 평을 보면서 다음과 같이 주를 달았다.

강유가 실로 지혜로워 족히 종회를 손바닥과 허벅지 위에서 갖고 놀 정도였으나, 시세에 핍박당하고 운명에 제지되었으니 어찌하겠는가! 강유의 마음은 처음부터 끝까지 한(漢)을 위하였으니 천년의 세월 동안 단(丹)처럼 밝게 빛나는구나. 진수, 손성, 간보가 그를 폄하한 것은 모두 잘못된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강유가 군부에서 일하였음에도 그의 군사적 능력에 자체에 대한 평가는 드물고 주로 군대를 동원한 것에 대한 비판이나 성품, 그에 대한 반박이 주가 되고 있다. 즉 이에 첨부된 강유에 대한 평가는 어디까지나 강유의 성품 및 윤리적인 측면에 대한 평가들이니 저 평을 강유의 군사적(혹은 정치적) 능력에 대한 평이라 착각하지 말 것.

한편 조선의 문신 홍대용의 <담헌서>에서도 강유를 평한적이 있다. 다음은 해당 내용.

강유(姜維)는 무후(武侯)의 재주는 없으면서 무후의 사업을 하려고 했으니, 그 뜻은 충성스럽지만, 그가 자신의 힘을 헤아리지 못하여 결국 멸망하게 되었던 것이니, 그것은 또한 마땅하지 않겠는가?[51] 요화(廖化)가 이른바 ‘지모(智謀)도 적(敵)만 못하고, 병력(兵力)도 적보다 적으면서 용병(用兵)하기를 싫어하지 않으니 어찌 생명을 보존할 수 있겠느냐?’라는 말은 참으로 알고 하는 말이다. 또한 모사(謀事)를 잘하는 자는 그 근본부터 먼저하고 끝은 나중에 하며, 안의 일부터 급히 하고 바깥일은 천천히 한다. 소인(小人)이 안에서 일을 주선하는데, 장수가 밖에서 성공(成功)한 자는 있지 않다. 그런데, 강유는 정권을 제 마음대로 하는 황호(黃皓)를 능히 억누르지 못하고 저 억센 적에게 뜻대로 하려고 했으니, 지혜롭다 할 수 없다.

강유(姜維)는 양안(陽安)과 음평(陰平)을 방비하고자 했으나 황호(黃皓)에게 저지(沮止) 당했다. 만약 강유의 계획대로 했다면 등애(鄧艾)가 음평으로 한 걸음도 들어올 수 없었을 것이다. 등애가 들어오지 않았다면 종회(鍾會)는 스스로 달아나게 되었을 것이니, 촉한(蜀漢)이 이같이 빨리 멸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강유(姜維)가 죽을 임시에 꾀한 것은 뜻만은 독(毒)하였으나 계획은 소루(踈漏)했던 것이다. 그러나 한(漢)나라에 충성한 마음은 죽을 때까지 변함이 없었고 무후(武侯)가 인정하던 것도 손상시키지 않았으니, 또한 아름답다 하겠다.

한 마디로 '제갈량의 능력도 없이 북벌을 하려고 했던 것은 무모했다, 하지만 간신배 황호 같은 무리 때문에 그 계책이 쓰이지 않았던 점도 있고, 마지막까지 노력했던 그 충심은 끝까지 아름다웠다고 할 만하다.'쯤 될 것이다. 또 보면 홍대용은 변경된 강유의 한중방어선 전략에 대해서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4.2 현대의 평가

과거와 마찬가지로 현대에 있어서 강유에 대한 평가 역시 극에서 극이다. 일단 충신이었다는 건 누구나 인정한다. 단 국력이 약한 촉한을 말아먹은 전쟁광부터 촉한의 마지막 사령관이자 유일한 희망까지 행적에 대한 평가가 극단적으로 엇갈린다.

강유까들은 주로 다음과 같이 강유를 비판한다.

  • 자신의 실력을 과대평가했다. 미약한 국력과 내치를 고려하지 않은 채 제갈량보다도 더 많이 나아간 무리한 북벌(9차례)탓에 촉은 급속히 피폐해졌다.
  • 한 나라의 수장이 되기에는 정치력이 부족했다. 강유는 환관 황호의 발호를 누르기는커녕 오히려 참소를 당해 곤경에 처했다.
  • 강유는 전략적 식견이 부족했다. 애초에 유비는 한중으로 들어오는 모든 길목을 철저하게 차단하는 방어전략을 수립해 위연-오의-왕평으로 이어진 제법 튼실했던 한중 방어라인을 이후 작은 공에 눈이 먼 강유는 적군을 한중으로 유인해 격멸하는 것으로 작전을 변경했다. 이 때문에 종회의 20만 대군은 아무 저항도 없이 한중에 입성할 수 있었으며 이는 촉 멸망의 결정적 계기가 됐다. 능력도 없으면서 호전성만 높았던 그로 인해 촉의 멸망이 재촉됐으니 강유는 망국의 충신이 아니라 나라 멸망의 원인을 제공한 망국의 원흉이었다.

이처럼 강유에 대해 가차없이 비판하고 있다.

반면, 강유빠들은 위나라 출신의 항장이었음에도(가족도 모두 위에 남아 있었다.) 제갈량의 유지와 촉한 건국의 이념에 따라 부족한 전력에도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내외적으로 험한 조건에도 북벌의 의지를 꿋꿋이 이어간 만고의 충신으로 평가하고, 당연히 상단의 강유까들의 비판 역시 반박한다.

  • 하단에서 언급되지만 제갈량 사후 강유의 북벌 규모 자체도 제갈량 시대보다 적게 편성되었고, 9차례나 북벌을 했다고는 하지만 애시당초 이건 연의 설정이고 실제로는 6~7번 정도며 이는 15년에 걸쳐 행한 숫자로 7년간 5번의 북벌을 시도한 제갈량에 비해 더 자주 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 황호의 발호를 누르지 못한 것 역시 비의가 암살당하면서 권력체계가 붕 떠버려 촉의 사상(제갈량-장완-비의-동윤) 시절만큼의 위상을 확보하지 못한 상태에서 진지유선의 비호를 받고 있어서 강유가 손을 쓰기 힘들었다.
  • 방어전략의 변화의 경우는 촉과 위의 국력 차이가 상당히 큰 상황이기 때문에 꾸준히 방어하고 힘을 모으며 내치에 신경을 쓰며 기회를 노리는 전략은 효과를 보기 어렵고(위도 그동안 잠자고 있을 리는 없으니), 상대를 끌여들여 큰 타격을 입히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다. 기존의 방어 전략에 변화도 없이 다시 공격하는 건 하후무조상 같은 멍청이들이나 할 짓이며, 이때 당시 위나라 장수들이 그런 부류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차라리 황호가 이런 중요한 상황에서조차 방해를 놓을 정도로 답이 없는 개막장이라는 것을 간과한게 문제라면 문제지
  • 위나라는 대촉방면에 엄청나게 신경쓰고, 인재풀을 쳐발라(...) 놓았다. 대촉용 스페셜부대 정촉호군과 제갈량 대부터 이어온 장합-곽회-진태-등애 대촉방면 라인과 이 사이사이를 채워주는, 수성 스페셜리스트 학소, 음평등반 멤버인 등충, 사찬, 견홍, 양흔, 막판에 가세한 종회와 위나라 마지막 맹장 호열까지, 위나라는 강유의 능력을 절대 깔보지 않았기에 최고급 인재들로 빵빵한 지원을 대촉방면에 넣어줬으니... 어찌보면 북벌실패는 당연한것... 솔직히 쟤들 다 뚫고 북벌을 성공한다면 그게 더 무서운거다

뒤떨어지는 국력, 암군 유선과 환관 황호의 환상적인 태클, 뛰어난 정치가였으나 북벌에 관해선 의견이 달랐던 비의의 딴지 등을 짊어지고 장익, 요화등과 고전분투하며 늙어가는 모습에 수많은 촉빠들의 눈물과 지지를 받고 있는 편. 또한 제갈량이 인정한 자신의 후계자라는 점도 그의 인기상승에 한몫했다. 그래서인지 삼국지 관련 최대 까페인 네이버 삼국지 도원결의의 인기투표에서는 가후, 육손등의 쟁쟁한 인물들을 재치고 13위를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다.[52] 실제로 삼국지를 배경으로 하는 게임(ex 코에이삼국지 시리즈 등엔 주유와 마찬가지로 언제나 젊은 얼굴로 매력이 쩔어주신다. 게다가 올라운드 플레이어니 인기투표가 수긍되는 대목이다.

본인에 대한 평가 뿐만 아니라, 라이벌 등애와의 누가 낫냐는 논쟁 또한 삼국지의 대표적인 얘깃거리 가운데 하나다.

일단 정사 기준으로 봤을 때 강유는 등애에게 패배하기만 한 걸로 나온다. 정사 강유전과 등애전 및 후주전에서 대패와 그 여파가 자세히 묘사된 단곡 전투를 비롯한, 많은 전투에서 등애는 강유의 앞길을 가로막는 역할을 한다. 아무리 승자의 역사라고는 하지만 연의 및 후세 매체에서의 라이벌 이미지 치고는 강유가 일방적으로 당한 감이 없지 않다.

그렇기에 강유의 북벌에서 승리의 가능성이 있었느냐에 대한 질문에 대하여 일관적으로 예스라 답하기는 어렵다. 물자, 병력, 병종(촉은 보병 위주인데 비해 위는 정촉(征蜀) 기병을 따로 편성하여 운용할 정도였다), 원정 거리 등 물리적인 조건에서 어느 것 하나 위군보다 우세할 것 없는 촉군으로 전쟁을 하기 위해서라면 기동력을 이용, 특정 시점에 특정 지점으로 군의 전력을 이동 & 공격을 집중시켜 상대의 수비를 무너뜨려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강유가 수로를 이용, 촉군을 이동시켰기에 강유의 촉군이 기동력의 측면에서는 위군보다 뛰어난 전력을 보유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진태, 등애 등의 방어를 볼 때 그가 자신이 원하는 지역에서 효과적으로 전력을 집중, 공격을 감행했다 보기에는 어려운 점도 있다. 일례로 255년의 적도 전투의 경우, 진태의 거짓 소문에 속은 강유가 복병을 엉뚱한 곳에 배치하면서 진태의 적도 구원을 막지 못해 점령을 포기해야 했으며(진태전) 256년의 경우 등애의 방어에 강유가 말렸다고 추측 할 수 있다.

결국 강유가 진태와 등애보다 불리한 객관적 요건을 뒤엎을 정도로 뛰어난 점을 갖추고 있다고 판단하기는 어렵다. 정사 촉서 종예전에서 강유와 동시대인이자 여러 전투에 함께 참전했던 요화가 262년 무렵의 강유의 후화 전투를 보며 "강유는 적보다 병력과 지모가 뛰어나지도 않으면서 용병(출진)이 끊이지 않으니 스스로를 태울 것이다."라 평한 것도 이를 어느정도 뒷받침하고 있다.

허나 그렇다고 하여 무조건 강유가 등애와 진태에 비해 뒤떨어진다 볼 수는 없다.

북벌에 있어서는 공명의 시대에 비해 강유의 시대는 인재난이 더 심해져서, 위연, 왕평, 오의 등 숫적으론 부족해도 질적으로는 크게 밀리지 않았던 제갈량 시절의 명장들이 죽거나 노쇠하여 시간이 흐를수록 강유는 총사령관 겸 야전사령관 겸 야전지휘관적인 존재가 되어 홀로 군부를 지탱해 나가야 했다. 인재가 얼마나 부족했으면 촉 내부에서 상당히 아니꼬왔을 항장 출신+외지인+젊은 나이였던 강유에 전적으로 의지해야 했다. 왕평 역시 강유와 비슷한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 인재 풀이 중간만 됐어도, 왕평과 강유의 능력이 아무리 뛰어났어도 쉽게 중용되지 못했을 텐데 둘은 중용을 넘어 군에서 최고위직에 올랐으니 인재가 진짜 부족한 것을 새삼 느낄 수 있다.그다지 세지 않았던 팀에서 그나마 유명한 주전 선수들이 죄다 빠져나가는 바람에 유망한 연습생을 급히 올려서 에이스로 내세운 격

또한 강유는 과거 제갈량이 받았던 바와 같은, 촉의 전 국력을 기울인 지원을 받은 적이 없다. 비의 생전에는 1만 명을 한도로 하는 소수 전력만을 부여받았고 비의 사후 대장군직에 오른 이후에도 강유가 지원받은 병력 규모는 '수만 명'을 넘지 못한다.[53] 북벌을 수행했던 제갈량이 동원한 '최소 병력'이 진창 공격 당시의 '수만 명'이었고 최대 10만까지 동원했던 걸 생각하면 본국의 지원 규모는 현저히 적다. 이 시기 촉의 내치를 봐도 비의 사후 전반기에는 유선을 등에 업은 진지황호를 끌어들인 형태였고 후반기에는 유선을 등에 업은 황호 단독으로 정국을 주도했다(진지는 258년 사망). 진지 사후엔 그 아래에서 국정은 더 어지러워졌고 강유 자신도 황호가 장악한 성도로 돌아가는 것을 꺼렸다. 그리고 촉 사람들은 매년 전쟁에 시달리느라 심신이 지쳤고, 이기지도 못하는 싸움에 자꾸 끼워넣으니 피곤할 법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언제나 적은 병력으로(1만에서 기껏해야 수만) 몇 배의 물량으로 등애, 진태, 곽회 등 군부 실세들이 죄다 포진한 위군과 싸운 것들을 보자면 진태나 등애 등이 강유보다 압도적으로 뛰어났다고 주장하기 위한 근거가 미흡하다.

강유의 이용 가능한 자원을 진태나 등애가 이용할 수 있던 자원과 비교해보면 강유의 어려움을 이해할 수 있다. 강유의 적도 전투 당시 정서장군 진태가 등애에게 합류, 신속하게 구원하는 것 이외에도 강유의 적도 공격 소식이 전해지자마자 사마사는 양주군과 사마망군을 합류, 적도로 진군하도록 명령을 내린다. 문제는 이 과정, 즉 적도의 상황이 사마사에게 전하여진 뒤 의사결정이 내려져서 군사 행동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이 단 20여 일만에 이루어졌다는 점. 게다가 사마사의 경우 600리의 거리 이상에서 하게 되는 군사 행동은 하나하나 보고하지 않겠다는 진태의 말을(진태전) 허락할 정도로 진태에게 많은 자율권을 준 상태였다. 음평과 한중 일대를 막기 위해 요화장익을 보내달라는 요청을 성도에 하고서도 1년을 기다려야 했다는 강유의 상황과는 다르다.

등애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등애의 요청 역시 사마사사마소는 적극 지원했으며, 적어도 등애가 정촉(征蜀)하여 올린 상소문에 대하여 사마소가 거부의 의사표시를 하기 전까지는 등애는 사마 집안으로부터 지원을 받았다. 위와 촉의 국력 차이와 더불어 상관과의 관계에까지 진태와 등애가 위 조정 및 사마 가문으로부터 받았던 지원은 강유와 유선과의 관계와는 비교할 수 없다. 한 마디로 강유는 스스로 처음부터 끝까지 없는 것도 만들어 내가며 싸워야 했던 입장이었으며, 진태와 등애는 자급자족에는 신경 쓸 필요 없이 충분한 지원을 토대로 하여 자신들의 모든 역량을 강유와의 싸움에 쓸 수 있었다. 즉 진태와 등애, 강유간의 전적 차이를 가지고 세 사람의 능력상 우열을 논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결론적으로 현대에서 강유와 등애의 능력 비교에 대한 물음에 대하여 등애빠들은 주로 정사에서의 결과를 내세워 등애를 우월하다 주장하고, 강유빠들은 주변 상황 등이 불리한 위치에 있었던 것을 고려했을 때 개인의 능력은 강유가 등애보다 위였을 거라 주장하는 편이다.

다만 빠와 까를 떠나서 삼국지연의가 쓰이기 이전. 당과 송대에 무성왕에게 제사를 지내며 안진경등이 무성왕에게 배향시킬 역대 명장 70여명, 즉 '공식적으로 중국 역사상 최고의 명장들의 명단 70여명을 뽑았을 때' 등애는 계속해서 뽑혔지만 강유는 뽑히지 않았으며, 삼국지 후기 인물로는 등애 이외에도 양호와 육항이 뽑힌걸 생각하면 당, 송대의 인물들은 강유를 제갈량, 관우, 장비, 장료, 등애, 황보숭, 주유, 여몽, 육항, 양호과 함께 중국 역사상 역대 최고의 명장으로 뽑을 만한 레벨은 아니었다고 생각한 듯. 물론 강유의 스승인 제갈량은 백기, 한신, 이정 등과 함께 상석에 배향되었다. 70여 명 뽑았는데 10명이 삼국지의 인물인걸 보면 당대에도 삼국지의 인기가 얼마나 좋았는지를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듯.[54] 여담으로 이해응(李海應)이 작성한 <계산기정>의 기록에 따르면, 조선 순조 시기에는 강유도 청나라 태공묘에 배향되어 역시 명장으로 인정받았던 모양이다.해당내용

위의 논쟁에 대하여 강유나 등애나 능력은 비슷하였다로 결론을 내면 그만이기는 하지만, 과연 이것으로 만족할 사람이 얼마나 될 지... 위의 논쟁을 아무리 읽어도 이해가 안된다면 정리해준다. 강유는 능(能)은 되나 여건이 받쳐주지 않은 사람이고, 등애는 능도 되고 여건도 잘 받쳐준 사람이라고.

아무튼 이쯤되면 정사이든 연의이든 삼국지의 독자들 입장에서는 제갈량 시절보다 군사적, 정치적으로 암울했던 촉의 상황 하에서도 북벌의 의지를 관철했던 강유의 신념, 또는 자신감은 어디서 온 것이었을까 대단히 궁금해진다. 촉에 대한 충성심인지 제갈량 개인에 대한 충성심인지 천수로 돌아가기 위한 사적인 필요성 때문인지 아니면 이공위수(以功爲守), 즉 선제공격을 행함으로써 위를 견제하고자 전략인지.

북벌의 목표였던 옹양주 겸병이 가능했는지 아닌지를 떠나서 북벌을 약 30여년 동안 홀로 지속하고 63세 일기로 죽기 전까지 촉을 부흥시키려고 했던 강유의 의지와 충심은 정말 대단한 듯. 그만큼 촉한에서 강유를 빼놓을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딱 하나 옥의 티가 있었는데 그것은 하필이면 촉의 재건을 위해 손잡은 사람이 종회였다는 점이다. 종회는 위나라 최고의 공신 중 한명인 허저의 아들인 허의를 함부로 참수했다. 이 때문에 종회는 부하들에게 원한을 산 상태였으며 강유는 하필이면 이런 종회와 손잡는 바람에 패하자 항복할 겨를조차 없이 끔살당하고 말았다. 강유와 종회가 패하자마자 끔살당한 대목에서 휘하 병력들이 종회에 대해 얼마나 불만이 컸는지를 알 수 있다.

다만 강유가 종회와 손을 잡은 것은 사실상 다른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미 성도 및 전 촉 지역이 점령당하고 촉장들은 군권을 잃어버리고 유선도 위군의 수중에 넘어간 상황에서 강유가 할 수 있는 방법은 다 포기하고 조용히 여생을 마치던가, 아니면 빠른 시일 내에 위나라 세력을 이용해 내분을 일으켜 촉의 부활을 시도하는 도박 뿐이었다. 시간을 오래 끌 수도 없었다. 오래 끌면 국력이 넘사벽인 위 정부에 의해 촉 영토 전체가 완전히 통제되고[55] 유선을 비롯한 황족들은 위로 갈 테니까. 실제로 성도반란 이후 촉의 구신들과 황족들은 낙양으로 끌려 가고 남아있던 촉장들은 진나라 장수로서 서촉을 다스리는 처지가 된다.

결국 강유는 도박을 선택했고, 이런 강유와 함께 도박에 뛰어들어 위군에서 내분을 일으켜 줄 만한 사람은 종회밖에 없었다. 종회가 아니라면 등애나 위관 급은 되어야 일을 꾸며볼 만 했을 텐데, 등애나 위관이 강유와 편먹고 반란을 일으킬 리 있겠는가(...). 실제로 강유는 종회를 만나자 마자 그의 야심을 꿰뚫어보고 종회를 꾀어 반란을 일으키도록 교묘하게 설득하고 위장들을 다 죽이라고 종용하고 군권을 다시 자신의 손에 들어가게 만드는 등 종회를 철저하게 이용했다.[56]

5 미디어 믹스

삼국지삼국지연의를 제외한 기타 창작물에 등장하는 강유. 항목이 길어져 따로 분리한다.

  1. 이문열 평역 삼국지나 모종강본 삼국지연의에선 제갈량 사후의 비중이 적어서 매우 조금 나오지만, 황석영 삼국지나관중본 삼국지연의에선 제갈량 사후 한 권 반을 차지하는 독보적인 주인공으로 나온다.
  2. 제갈량이 출사한 나이인 27세에 촉한에 와서 유비가 승하한 나이인 63세에 세상을 떠났다는 것도 우연치곤 상당히 드라마틱 하다.
  3. 연의에서 묘사되는 구벌중원은 다음과 같다. 1차 : 249년 우두산(국산), 2차 : 253년 철롱산(적도), 3차 : 255년 조수, 4차 : 256년 단곡, 5차 : 258년 장성, 6차 : 258년 기산, 7차 : 260년 야곡, 8차 : 262년 조양, 9차 : 263년 답중. 이 중 6차, 7차 북벌은 완전히 창작이고, 9차 북벌은 실제로는 그냥 가서 주둔하고 둔전한 게 다다(...). 정확히는, 성도의 정치 싸움을 피할 겸 새 북벌을 하느라 가서 군량과 무장을 마련하는 중이었지만.
  4. 참고로 최훈삼국전투기 중 기 전투(2)가 이 설에 근거하여 그려졌다.
  5. 이렇게 말하면 그냥 용맹한 병사 정도로 생각할 수 있는데, 고대 중국에서 이런 "사사"들이 목숨을 거는 일은 단순히 전장에서 위험한 임무를 수행하는 정도가 아니다. 특별히 훈련받아 대상을 향해 목숨을 아끼지 않는 자들, 한국식으로 하면 결사대 쯤으로 볼 수 있다. 또 사사가 중국어로 협객과 뜻이 통하는데 이는 강유가 어떤 유협집단의 지도자였을 가능성이 있다는것을 시사한다.
  6. 정현의 학문은 공자가 표방하던 것과 같은 이상적인 복고주의 또는 원칙주의에 가까웠다. 강유의 성격이나 태도, 촉한에서의 행적에도 이것이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7. 사실 뭐 어느 시대 어느 나라도 적대 세력에 귀순한 사람의 연고자를 가만둘 리는 거의 없지만, 이때는 사람을 사람으로 보는 시대도 아니었으니.
  8. 손성의 잡기, 정사 강유전에 주석으로 재수록.
  9. 그래서 제갈량의 이 중호보병 발언은 당시 중호군에 있었고 군부인사 권한이 있던 조운의 의견이나 평가를 토대로 상의하여 반영되었다는 추측이 있다.
  10. "옛날 자오의 역에서, 병사가 수백 리를 행군하여 긴 비를 만나, 교각이 파괴되고, 뒤의 군량은 썩어, 전군이 핍절했다. 강유가 깊숙히 쳐들어오니, 치중을 기다리지 못하고 병사들이 굶어 군을 상규로 물렸다."(정사 왕기전)
  11. 사실 계획의 현실성과 성공 가능성이 별로 높지 않았기에 입안자인 장완이 죽은 이상 폐기될 수 밖에 없었다. 저 계획이 얼마나 뜬금없었냐면 오의 주연이 촉이 오를 기습하려는 걸로 오해했을 정도였고 손권이 오해를 풀었다.
  12. 당시 촉한 자체가 강족과 친분관계가 깊었다, 이 무렵 문산태수로 재직하던 왕사가 강족들과 후의가 깊었고 이 덕분에 강유가 강족들의 지원을 받고 싸울 수 있었다고 한다. 왕사는 이후 강유의 북벌에 참가했다 화살을 맞고 부상을 입어 순직한다.
  13. 곽회전에 기술된 강유와 강인들과의 관계를 설명한 내용을 보자면 곽회는 "내부의 흉악한 강인을 평정할 수 있고, 외부의 적의 음모를 꺾을 수 있다고 했다."라 하며 강인들의 배후를 우려하고 있다. 강유의 출병 및 강인들의 반란 시기가 대충 맞아 떨어지는 것과, 저 당시 강인들을 제외하고는 위에 위협을 줄만한 세력이 강유 뿐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강인들의 배후에는 강유가 있었다 풀이해도 무리는 없을 듯 하다.
  14. 장완시절에도 북벌을 위해 부가 설치되었고 비의가 암살당한 장소가 한중의 한수였기에 북벌을 준비하고 있었음이 분명해 보인다.
  15. 본디 유선을 암살하려다가 비의로 바꾼것이다.
  16. 촉장인 장억은 제갈각의 출진이 실패 할 것이라 예견하였는지 제갈량의 아들이자 제갈각의 사촌 동생인 제갈첨(성도방어전 때 죽는 그 사람)에게 오에 편지를 쓰라고 해 제갈각의 출진을 막으려 하였으나 제갈각은 이를 듣지 않았고 결국 대패한 뒤 손준에게 구족이 멸족당했다.
  17. 당시 진태는 군사만 상규에 남겨두고 낙양으로 간 상태였다.
  18. 이 설은 신빙성이 낮다는 평가를 받는게, 단곡 전투는 사망자 수로만 따지면 가정 전투도 아득히 뛰어넘는 것으로 추정되는 최악의 패전이었다. 그런데 호제는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았다. 개인감정 때문에 이 정도로 일을 그르친 놈이 과연 무사할 수 있었을까? 고명대신이라는 왕조국가 최강의 빽을 가지고 있던 이엄도 사욕 때문에 북벌 말아먹었다 관직 생활 종 친 것을 감안하면...
  19. 다만 하후패의 죽음은 약간 복잡한데 이는 하후패 항목 참조.
  20. 애초에 대신 자격으로 성도에 머무를 기회&내부 협력자가 없었고, 북벌 실적도 못 올린 강유가 무슨 수로 내부 세력을 뒤집겠는가. 창업공신이자 유비 사후 실질적 1인자였던 상국 제갈량마저도 성도에 문제가 생기면 북벌을 그만두고 달려올 수밖에 없었는데.
  21. 그렇다면 낙곡대전은...? 다만 낙곡대전은 조상 일파가 촉을 호구로 보고 멋대로 병력을 들이부었다 대 참사를 당한거고, 제정신 박힌 지휘관이라면 뚫을 가능성도 없는 험한 방어망에 병력을 함부로 들이붓지는 않을 가능성이 높다. 게다가 낙곡대전 자체가 위가 촉을 대대적으로 공격하지 않는 원인이 되었기도 하고.
  22. 자치통감 기준, 정사 삼국지엔 적이 평지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라고 되어 있다.
  23. 단곡 전투때는 호제가 안 오는 바람에 강유가 단곡에서 털리고 군사도 많이 죽고 장수도 여럿 죽고 강유에 대한 원망이 높아졌다는 식으로 상세히 기록되었는데 그것과 비견되는 패전이라는 후화 전투는 어떻게 패했다던가 얼마나 피해를 입었다는 기록이 전무하다.
  24. 본디 위의 방침 자체는 내부적으로 막장 테크를 신나게 타고 있던 오를 먼저 치고, 촉 전선은 방어에 전념하는 것이었다. 사마소가 정촉으로 방향을 튼 것은 강유의 연이은 북벌에 질린 나머지 일단 공세라도 꺾자는 생각으로 단행한 것으로 보는 게 맞다. 이에 종회가 정촉의 가능성을 언급하고 등애를 설득시켜서 정촉이 이루어진 것.
  25. 실제로 오나라는 이 죽어나가 정치적으로 혼란기였고 포리당 건설 등 토목 공사로 인해 국력이 많이 약해졌다. 그에 반해 촉은 강유가 멸망 직전까지 위를 침범했으므로 겉으로는 오에 비해서는 사정이 상당히 나았다. 하지만 이것은 겉으로 보기에 그렇다는 거지 촉도 황호파와 동궐, 제갈첨파의 분열로 정치권에선 막장을 향해 달리고 있었으며 사마소는 유선이 어리석어 검각만 돌파하면 촉을 정벌할 수 있으리라 여겼다. 당장 오의 사신 설후가 손휴에게 보고한 것만 해도 촉의 중신들은 자기 보신에 바빠 바른말을 하고 있지 않으며 백성들의 사정이 궁핍하다고 했을 정도였다.
  26. 재밌는 부분은 설후는 촉한 조정 내부에서 군주와 신하들의 잘못을 지적하고 있지만, 정작 강유의 북벌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강유의 북벌로 인해 국력이 소모되었다고 하면 백성들의 궁핍에 강유의 북벌을 원인으로 지적했겠지만 그것보다 내정타격의 문제로 군주의 타락과 중신들의 자기보신을 언급한다는.것이 흥미롭다.
  27. 지도상에서 표시된 두 곳이 다르다. 양안관구는 한중을 지나서 남쪽 길목에 있는 관문이며, 양평관은 한중에 도달하기 전에 위치한 관문이다. 연의에서는 양평관으로 통일되어 나오며, 자치통감도 양평관으로 통일되어 있으나, 정사 삼국지에서는 이 두 관문을 따로 표기하고 있다. 만일 이 두 곳을 같은 곳이라고 한다면, 조조가 장로를 칠 때와 종회가 부첨과 싸울 때의 설명이 모순된다. 조조는 한중으로 가는 상황이었고, 종회는 한중을 지나쳐서 진군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28. 라는데 정사 등애전 기술을 보면 강유는 답중에서 요화의 구원을 받은 행적이 없고 강유전에 따르면 강유가 음평에서 요화와 합류한다. 강유전에 보면 '음평(陰平)에 당도할 무렵 위의 장수 제갈서가 건위로 향한다는 소식을 들었으므로 이에 대처하기 위해 주둔하며 기다렸다.'는 기술이 있는데 정사로만 보면 당시 답중으로 가기위해 음평으로 가고 있었을 요화일 가능성이 있다.
  29. 양안관구가 위험해지자 순간적으로 음평쪽 병력이 한중 방향인 백수쪽으로 빠진것일수 있다.
  30. 장서가 성을 열고 나와 항복했고, 부첨은 저항하다 전사했다.
  31. 사실 이 부분이 정사와 자치통감이 모순되는 부분 가운데 하나다, 자치통감에 따르면 장익과 동궐은 음평에서 제갈서의 움직임을 보고 근처에 주둔하였다고 하는데 정사 강유전은 이들이 이제서야 한수에 도착했다고 하고 있는 것이다.
  32. 당시 종회는 한중의 낙성을 공격했으나 함락시키지 못하였는데 양안관구가 이미 함락되었다는 말을 듣고는 낙성공략을 내버려두고 이를 통해 전진했다. 한 마디로 양안관구 함락 이후 강유가 먼저 도착하느냐, 종회가 먼저 도착하느냐의 싸움이 된 셈인데 여기선 강유가 먼저 도착한 것이다.
  33. 결국 양안관구가 뚫리긴 했어도 최후의 관문인 검각을 넘지 못하면 근본적으로 위군은 촉군의 전략인 '내지로 들어와서 곤궁해진 적을 후퇴케하고 이를 통해 섬멸을 기도한다' 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사실 한중은 처음부터 촉에서 주요 지점을 빼고 넘겨준 미끼에 가깝고 양안관구, 검각이 뚫리지 않으면 종회의 위군은 한중이라는 우리에 갇힌 꼴이 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강유의 답중군을 막고 그 사이 허술해진 양안, 검각방어선을 돌파하려 했던 것인데 그게 어그러졌으니 종회 입장에선 제갈서에게 빡칠만 했다. 물론 앞의 취소선은 웃자고 하는 소리고 근본적인 목적은 자기가 독자적으로 군대를 장악하려고 모함한거지만.
  34. 연의에서는 등애가 넘어왔을 때 술을 마시다가 부인에게 한 소리 듣지만, '어차피 촉이 망할 것 같고 적들이 성 안에 들어왔으니' 그냥 항복. 부인은 자결한다.
  35. 강유 같은 일부 무장만 피 터지게 싸우고 있었지, 황호의 무리들은 한실 부흥이고 뭐고 관심도 없었다. 북벌을 몇십 년 동안 했는데도 위 멸망은커녕 병사와 물자만 축내고 있으니 '반전주의'가 강해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만.
  36. 위에서 각주로 언급했듯이 종회는 낙성공략을 그만두고 곧장 양안관구를 돌파했는데 이때 호군 장빈이 지키는 한성과 감군 왕함이 지키는 낙성에 각각 1만명의 군사를 남겨 두어 포위했으므로 제갈서의 군사를 합쳐도 11만이 되는게 맞다. 한성과 낙성은 각각 5천의 촉군이 주둔하고 있었으므로 종회는 일단 이곳들을 바로 함락시킬 생각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37. 다만 이때 이미 종회의 군사는 위에서 언급했듯 군량문제에 시달리고 있었다. 당시는 겨울인데다가 촉 내지로 진격할수록 보급선이 길어지므로 종회 입장에서도 상황이 그렇게 녹록한것만은 아니었다.
  38. 당시 사마소는 장안에 머물고 있었는데 이 시점에 이미 종회의 야심을 눈치채고 직접 군을 이끌고 장안에 머물던 상황이라는 추측도 있다.
  39. 성도에 군사가 적었다지만 백성들을 징발하는 등의 방법도 동원할 수 있다.
  40. 곽익이 위가 처음 정촉을 시작할때를 듣고 한 얘긴지, 검각까지 밀렸다는 소식을 듣고 미연의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가겠다고 한 건지 면죽함락 전에 등애의 위군이 나타났다는 소리를 듣고 성도로 가겠다 한건지 아니면 면죽함락 이후에 가겠다고 한건지 이 얘기가 나온 시점이 확실치 않은데 유선이 적에 대한 대비가 되어있다고 연락을 하는게 가능한 상황이였으면 일단 면죽함락 전일 공산도 있다. 만약 면죽함락 이전이었다면 곽익이 제갈첨을 구원하거나 처음부터 지원하는 시나리오도 가능했을 것이다.
  41. 대표적으로 원자袁子에선 '등애가 1만 명으로 강유성의 험지로 들어갈때 종회가 20만 군사로 검각에서 머물며 진격하지 못하고 삼군의 군사들은 이미 굶주리고 있었으니 만일 유선이 며칠만에 항복하지 않았다면 곧 두 장수의 군은 돌아오기 힘들었을 것이다.'라고 적고 있다.
  42. 삼국전투기에선 아무리 그래도 촉한의 백그라운드라는 점이 있다며 이 설을 채택하고 있다. 등애의 반응도 '세상에 이런 로또가 연속적으로 터지는 때도 있구나' 하는 반응으로 그렸다.
  43. 재밌는 것은 이때 종회가 강유를 제갈탄, 하후현과 비교하며 강유를 띄워주는데 저 둘이 모두 사마씨에게 대적하다 사망한 걸 보면 종회가 애초에 반란의 뜻을 품고 의도적으로 저 둘을 언급했다고도 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종회는 이들 둘보다 강유가 뛰어나다는 점을 강조, 위의 입장에서 이미 한 번 위를 배신한 강유가 위를 다시 배신하진 않을 거라는 식으로 쉴드를 쳐주었다고도 해석할 수도 있다. 종회가 정말로 정촉(征蜀) 이전부터 반란의 의도를 품었다면 자신의 반란 의도를 비유로 쉽게 드러내리라고는 믿기 어렵다.
  44. 연의에서처럼 조운과의 일기토가 없었어도 강유 개인의 무력은 상당히 뛰어났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유비와 조조가 죽었을 무렵 강유와 비슷한 60대였는데 이들이 병사할 무렵 강유는 직접 무쌍을 벌이며, 병사 몇 명을 처리했다는 것은 강유의 뛰어난 무력을 증명한다. 오히려 이 비장미 넘치는 일화는 연의에서 등장하지 않고 단순히 자결한다. 물론 연의에서는 이 과정에서 두 차례 심병(심장발작)이 일어났다는 묘사를 하고 있지만.
  45. 권중달 역 자치통감에서 "강유는 종회의 좌우 사람들을 거느리고 싸웠는데 손으로 5~6명을 죽이니"라는 대목 중 '손으로' 부분이 오역되었다. 원문에서의 수살(手殺)이란 표현은 주먹질이 아닌 직접 죽였다는 내용으로 보는게 더욱 정확하다.
  46. 루리웹의 어떤 사람이 창작 만화에 이 일화를 그린 만화가 있다.
  47. 다만 촉에 투항하고 나서는 제갈량의 편지에서 나오듯 한실을 중시했고 마지막까지 촉한의 부흥을 꾀했다는 점에선 적어도 촉에 온 이후엔 그의 충성심을 의심할 이유는 없어보인다.
  48. 제갈량과 비교 당해야 했던 촉한 권력자들의 실상과 장완 스스로도 그 점을 인정했다는 점을 아울러 생각해보면, 장완이 자기 독단만으로 강유를 최고권력층에 진입시켜줬다고 보기에는 어렵다.
  49. 게다가 강유는 초주와 사이가 안 좋았는데 초주는 진수의 스승이다. 더 이상의 설명은 생략한다.
  50. 손성은 진양추에서도 촉인들이 강유를 안타깝게 여긴다는 얘기를 듣고 강유는 어리석은 인간이라며 비웃었는데 배송지는 손성이 강유를 비난하는 말이 또한 합당하지 않으며 강유는 그 상황에서 최선을 다한것이라고 반박했다.
  51. 화양국지의 저자 상거와 비슷한 평가인데 상거는 '강유의 재주는 제갈량에 필적하지 못한데도 뜻은 그 넓은 법도를 계승하였으니 (志繼洪軌) 백성들이 그 수고로움을 싫어하여 집과 나라를 잃었도다'는 평가를 내렸다. 아이러니하게도 현재 사천성 검각 강유 사당인 평양후사 현판에 쓰인 글이 바로 지계홍궤(志繼洪軌)이다.
  52. 그리고 라이벌인 등애는 143위로 랭크돼서 아주 제대로 발라버렸다. 지못미 등애
  53. 일반적으로 '수만 명'의 최대 한도는 3~4만 정도로 예측된다. 5만이 기준선이 되는 경우가 보통. 5만을 넘어간다면 과장해서 10만을 일컬을 수도 있을 정도이다. 적벽대전의 백만대군을 봐도.
  54. 조조 등은 언급되지 않았는데 이는 그의 군사적 재능이 과소평가받았기 때문이 아니라 조조가 장군, 즉 군사 지휘관이 아닌 군주급 인사로 인식되었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조조보다 더한 괴물들인 전한 건국황제 유방이나 후한 건국황제 유수 등도 명단에 없는 것을 보면...
  55. 실제로 등애는 익주를 통해 동오를 칠 구상을 벌써부터 하고 있었으며, 강유, 종회의 난을 틈타 익주를 침공한 보협, 육항, 유평, 성만의 오군도 나헌에 막혀 퇴각한다.
  56. 오죽했으면 배송지가 '종회는 위장들을 모두 구덩이에 파묻어 죽이고 강유에게 대군을 주어 선봉으로 삼고자 하였다. 만약 위장들이 모두 죽고 병사가 강유의 손에 주어졌다면 종회를 죽이고 촉을 회복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까지 평가했을 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