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선(삼국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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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촉한의 제2대 황제

촉한의 역대 황제
30대 열조 소열제 유비31대 효회제 유선촉한 멸망
파일:유선.jpg
시호효회황제(孝懷皇帝)[1]
연호건흥(建興, 223년 ~ 238년)
연희(延熙, 238년 ~ 258년)
경요(景耀, 258년 ~ 263년)
염흥(炎興, 263년)
유(劉)
선(禪)
공사(公嗣)
재위기간223년 ~ 263년
생몰기간207년 ~ 271년
"후주는 현명한 재상에게 정치를 맡겼을 때는 도리를 따르는 군주였지만, 환관에 미혹됐을 때는 우매한 군주였다. 경전에서 이르길 '흰색 실은 일정한 색이 없고 오직 물들여지기에 달려있다.'고 했으니 확실히 그러하다!" - 진수

1.1 개요

삼국시대 촉한 제2대 군주이자 마지막 황제(재위 223년 ~ 263년)이다. 그는 선주인 유비를 계승했으므로 후주(後主)라는 명칭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이는 정사 삼국지에서 비롯된 명칭으로 저자 진수(陳壽)를 정통으로 썼기에, 촉한의 군주들에게는 제(帝)자를 붙이지 않았고, 대신 유비는 선주(先主) 그리고 유선은 후주(後主)라고 지칭했다. 참고로 손권의 경우는 오주(吳主). 그리고, 이는 어찌보면 진짜 무위의 치와 동등하다.

유비의 장남이자 감부인의 소생이며, 아명은 아두(阿斗)였다. 이는 태몽이 북두칠성과 관련된 꿈이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阿斗는 현대 중국어에서 어리석고 아둔한 사람을 지칭하는 비유적인 단어로 그 의미가 굳어졌다는 점에서 알 수 있듯이,(예를 들어 你真是个扶不起的阿斗 넌 정말 아무리 도와줘도 안되는 아두같은 놈이다.) 삼국지연의로 인해 중국사 최악의 암군으로 치부되는 인물. 그러나 분명 놀기 좋아하고 황제로서의 능력이 부족했긴 했지만 제환공에 비견되었던 것처럼 보필하는 신하가 제대로 된 신하라면 나라를 운영하는데 부족함은 없는 군주였으며 손오의 마지막 군주 손호마냥 사람을 함부로 해하는 군주는 아니었다. 분명 말년에 간신들을 총애하여 나라를 망친점은 실드칠만한 행적이 아니기에 분명 비판받을 점이 있으나 중국사 5000년의 긴 세월 동안 유선 이상의 폭군, 혼군이 많았음에도 유독 그가 욕을 먹는 이유는 삼국지연의로 인해 이 시대가 너무나 잘 알려진 시대였다는 점도 있을것이고 아버지인 유비와 신하인 제갈량과 비교되어 그런 점도 있을 것이다. 어쨌거나 18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동아시아권에선 암군(暗君)의 대명사로서 비난을 받아왔던 인물이다.

참고로 유봉의 이름인 봉(封)은 유비의 친자 유선의 선(禪)과 더불어 봉선(封禪)[2]이 되는데 여기서 두 아들의 이름을 이렇게 지은 유비의 야심을 알 수 있다는 이야기가 있다. 사실 유봉은 양자 출신이므로 애초에 봉은 유비가 지어준 이름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이 경우에는, 마침 양자의 이름이 봉이라, 거기에 맞춰서 친아들 이름을 선으로 지었다고 주장한다. 정사에서는 유봉이 먼저 양자로 들어온 뒤 유선이 출생하였으나, 연의에서는 순서가 바뀐 것도 미묘한 일이라며 유비가 개인적인 야심으로 아들의 이름을 지어줬다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연의에서 순서를 바꾸었다는 음모론도 있다. 물론 유비가 정말 봉선에서 이름을 지었다는 근거는 없다.

1.2 생애

1.2.1 어린 시절

207년 유비가 유표에게 의지하여 형주의 신야에 있을 때 첩 감부인으로부터 태어났다. 삼국지연의 초반부에서 아명인 '아두'로 등장한다. 태어날 때 푸른 무지개 기운이 주변에 어리는 신비한 이미지를 갖는다.

208년 조조가 형주를 공격했을 때, 장판파에서 조조군에 의하여 죽을 뻔 했으나 조운의 활약으로 목숨을 건졌다. 이는 정사에도 기록된 이야기며, 나중의 혼란을 설명하기 위해서인지, 이때 유비가 '하마터면 훌륭한 장수를 죽일 뻔 하였구나'하며 유선을 바닥에 내던졌다는 야사가 있다.

위략에서 그는 어린 시절에 위나라에 잡혀가서 노예로 팔려갔다가, 유비가 왕이 된 뒤에야 겨우 신분을 회복하고 태자가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다른 기록과 맞아 떨어지지 않기 때문에 보통 와전된 이야기로 추측된다.

손부인이 동오로 돌아갈 때, 어린 아두를 데리고 돌아가려다가 조운이 손부인으로부터 유선을 탈환한 사건도 있다.

유비가 한중왕이 되자 유선은 세자로 책봉되었다. 221년에 이릉대전에서는 유비가 성도에 부재하여 유선이 대신하여 성도를 지키게 되었다. 유비가 이릉에서 패배하자 익주에서 반란이 일어났지만, 제갈량 등의 활약으로 이를 진압하였다.

1.2.2 황제 즉위 : 후주 유선

223년 선주 유비가 붕어하자, 17세의 나이로 즉위했다. 어린데다가 정치적 경험이 없었던 유선은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제갈량에게 정무를 맡기고, 자신은 주로 황실의 제사 등 국가 의례 업무와 필수적인 결재(決裁)만을 담당하였다. 234년에 제갈량이 사망하자, 유선은 상복을 입고 3일간 애도하였다. (화양국지)

이후 장완, 비위, 동윤 등의 능신에게 국정을 맡겼으나, 후궁을 늘리려 하거나 놀이와 향락에 빠졌다는 기록이 나타난다. 동윤초주가 이에 대해서 간언하였다.

1.2.3 친정 실시와 황호의 대두

246년에 장완동윤이 지병으로 인하여 세상을 떠나고, 253년에 비의가 암살당하는 등 능신들이 하나 둘 사라졌다. 성품은 바르지 못했지만 능력은 있었던 진지마저 258년에 사망하자, 유선은 친정할 수 밖에 없었다. 후주는 대사령을 남발하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즐기며 또한 환관 황호를 총애하여 국가의 기강을 문란케하였다. 친동생인 유영이 황호를 비판하자, 후주는 유영을 멀리하였다. 249년에 하후패가 촉한에 망명해오자, 유선은 하후패와 회견하여 그를 칭송하였고 고대의고조 유방의 건국공신이었던 하후영을 들어 유씨와 하후씨의 인연을 강조하였다. 유선은 하후패를 극진하게 대해 작위를 높히고 높은 벼슬과 은상을 하사하였다.

이 무렵 강유는 대규모 북벌을 도모하여 적도에서 큰 승리를 거두기도 하였으나, 단곡에서의 패배가 단초가 되어 북벌을 반대하는 사람들로부터 원망을 샀다. 이에 258년에 염우가 황호와 결탁하였으며, 황호는 강유와 염우를 교체하려고 획책하였다고 한다. 제갈첨, 동궐 등은 강유가 공적이 없고 국내의 경제를 북벌로 인하여 소진되었다는 이유를 들어, 그를 소환하여 군권을 박탈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선은 끝내 강유의 직책을 유지토록 지시하였는데, 이는 당시에 강유를 대체할 만한 경험과 재능을 가진 사령관급 무장이 없어서이기도 했고, 더불어 유선이 관료들 사이의 세력균형을 유지하려고 노력했기 때문이다. 하필 그 세력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중용하고 총애했던 인물이 간신인 황호였다는게 문제였을 뿐이다.

260년에 관우, 황충 등 건국 공신들에게 시호를 내렸다.

1.2.4 촉한의 멸망

263년, 위나라 군대가 촉한으로 대규모 공세를 시작하고 강유는 "장익과 요화를 보내어 양안관구와 음평교두를 나뉘어 지키게 하여 미연에 방비해야 합니다."라는 표문을 보내 원군을 요청했다. 그러나 황호가 적군은 오지 않는다는 점괘를 유선에게 보여주고 유선이 이를 믿었기 때문에 유선은 방어에 태만하여 제대로 적에 대응하지 못했다. 결국 강유의 우려대로 등애가 음평 방면으로 우회하여 촉한 내지로 직접 공격해왔으며, 면죽에서 제갈첨이 이에 맞서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성도에서 저항할 수 없게 된 유선은 남방이나 오나라로 도망쳐서 훗날을 도모하려 했으나, 결국 초주의 의견에 따라서 항복을 선택하였다. 유선의 다섯째 아들 북지왕 유심이 자살하였지만 유선은 항복 결정을 굽히지 않았다. 스스로 몸을 묶고 관을 등에 맨 모습으로 위군 등애의 진영을 찾아가 항복하였다.

264년, 위군의 내분을 틈타 강유는 유선에게 촉한 재흥의 밀서를 전달했다. 하지만 강유의 반란은 실패하고 강유와 많은 신하들, 그리고 태자 유선을 잃었다. 유선은 살아남은 가족들과 함께 낙양으로 이송되었고, 그를 따르는 신하는 극정 등 몇몇에 불과하였다.

이후 유주 안락현에서 안락공(安樂公)에 봉해져서 안락하게 살다가 생을 마감했다. 서진에서 받은 시호는 사공(思公)이지만 기록에 따라서 혜공(惠公)으로 되어있다. 이후 전조의 유연에 의해 다시 효회황제의 시호를 받는다. 손호 등과 함께 낙양 북망산에 묻혔다.

1.2.5 낙불사촉 일화

촉한이 망한 이후 촉한의 유신들과 유선을 모아놓고 사마소가 베푼 잔치에서 사마소가 그를 위해 옛 촉의 가무를 짓게 했다. 주변의 촉한 유신들이 모두 슬퍼했으나 유선은 기뻐하고 웃으며 태연자약했다. 사마소도 어이가 없었는지 "저렇게 사람이 무정하니 (촉이) 망했을 것이다, 제갈량이 살아 있었더라도 힘들었을텐데 하물며 강유가 가능하겠는가?" 라고 가충에게 털어놨을정도. 다른날에도 태도가 똑같아서 사마소가 그런 그에게 '옛날 촉의 생활이 그립지 않소?'라고 물어보자 그는 웃으며 '이렇게 즐겁게 해주시니 조금도 촉이 생각나지 않습니다(樂不思蜀)'라고 대답했다 한다.

이에 극정이 보다 못해 유선을 만나길 청해 귀띔하기를 "사마소가 또 한번 묻는다면 '조상들 묘가 멀리 촉에 있어 마음이 서쪽을 향했고 비감하니 하루라도 생각나지 않는 날이 없습니다.'라고 말씀하시고 눈을 감으십시오."라고 말했다. 사마소가 이를 엿들었는지 아니면 사마소가 극정에게 지시해서 말한 것이었는지 다시 '촉이 생각나지 않소?'라고 묻자 극정의 말처럼 대답했다. 사마소가 "극정이 한 말 그대로네요?"라고 말하자 유선은 놀라서 쳐다보며 "그 말씀대로네요."라고 대답했다 한다. 이윽고 좌중은 웃음 큰잔치.

유선의 행동이 하도 한심하여 어떤 이들은 이야기의 진실성을 의심하는데, 이 이야기는 습착치가 지은 역사책 한진춘추에서 나오는 이야기를 배송지가 정사 삼국지에서 후주전의 주해로 인용해 전해졌다. 사실 중국 역사에는 이보다 더 한심한 황제들도 많았다. 예를들어 사마소의 손자가 그렇다.

이 에피소드를 한 쪽은 유선이 아무 생각 없는 최악의 얼간이라고 해석하고 한 쪽은 아버지 유비가 조조와의 술자리에서 번개를 두려워한 에피소드와 비교하여 처세를 위한 현명한 대답이라는 사람도 있다. 이유는 사마소가 유선에게 재기의 의지가 있는지를 떠보고 만일 그럴 생각을 갖고 있다면 제거하려고 시도한 것일 수도 있다는 것.

처세술이라고 긍정하는 측에선 사마소가 유선에게 재기의 의지가 있는지를 떠보고 만일 그럴 생각을 갖고 있다면 제거하려고 시도한 것일 수도 있다고 지적한다. 멸망한 나라의 군주가 살해당하는 경우가 많은건 그가 자신의 나라를 찾기 위해 겉으로는 충성을 해도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유선의 이런 태도는 '난 다른뜻이 없으니 굳이 사마소 니가 경계할 이유가 없는 행동만 하겠다'라는 것을 보이기 위한 유선의 처세술로 보기도 한다.[3] 실제로 강유 등이 촉한 부흥을 시도한 바 있고 설사 유선이 뭔가를 할 수 없다고 해도 시기 변화나 상황 변화가 이뤄지는데도 그러지 않으리란 보장은 없었고 혹은 반란군들에게 추대될 수도 있었으므로 의심이 가면 가차없이 제거할 생각으로 떠본 것일 수 있다. 어쨌든 유선은 군주였고 서진에서 일하고 있는 촉한의 구신들도 많았다. 당장 사마소의 손자 사마치가 이런 의심을 사서 죽었다. 사마치 입장에서는 딱히 뭔가를 시도한 것도 아니었는데, 옛 신하들이 수모를 못 참고 울었다가 덤으로 독살당했다는게 안습.

처세술일 뿐이라는 주장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실제로 똑똑한 사람이 처세술 차원에서 바보로 위장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라고 지적하기도 한다. 촉한의 황제이던 시절에 신하들 앞에서 같은 처세술을 보여야 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고, 따라서 촉한에서 온 사람들이나 이들과 교류한 많은 사람들이 유선의 실제 모습을 알고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현대인들은 지금까지 남은 몇몇 에피소드만으로 유선을 평가하게 되지만, 당대의 사람들은 그보다 훨씬 많은 정보가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당대의 사람들이 바보라고 판단했다면 단순히 에피소드의 재해석만으로 그러한 평가를 뒤집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물론 이때 다들 어이없어 한 것은 촉한의 구신들마저 지적 할 정도로 촉에서의 태도와 끌려온 후의 태도가 달랐기 때문으로도 볼 수도 있다.

그냥 처세술이 아니더라도 막장이고 처세술이면 더 오히려 까여야 하는거 아니냐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백번 양보해 처세술이 사실이더라도 유심이 자살한 것 때문에, 항복을 한건 백성들을 위해서라고 해도 왜 유심처럼 항복하겠다고 결정하고 유심처럼 자살하지 않거나 유선이 사마소가 촉이 그립지 않냐고 했을때 여기서 즐길 수 있다고 안 그립다고 한게 살아남기 위한 연기라는 주장에 대해 왜 그런 소리까지 듣고도 유심처럼 자살하지 않고 부끄러운줄도 모르고 구차하게 계속 살아있냐는 것. 실제로 유선에 태도에 어이없어 한 건 촉의 구신이나 인사들만이 아니라, 위(사실상 서진)의 인사들조차도 그랬다. 극정 등 신하들조차 나라를 잃은 군주면 좀 슬퍼하는 척이라도 하라고 까고, 적국의 수장인 사마소조차 망국의 군주면 그에 맞는 행동을 해야 하는거 아니냐, 나라가 망한 것에 대해 저리 태연자약 하다니 사람이 어찌 저렇게 무정할 수가 있냐? 라고 어이없어 했을 정도. 유선이 항복해서 가장 큰 이득을 본 그가 이럴 정도면 유선에 대한 평가는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한가? 항복론을 주장한 초주에 대한 평가긴 하지만 홍대용은 담헌서에서 '임금이 사직(社稷)을 위해 죽는 것은 천지의 대의(大義)가 아니겠는가?'라고 간접적으로 당시 유선의 행동에 대한 비판을 가했다.

그런데 정작 따지고 보면 유선이 다른 촉한의 관료들처럼 슬퍼했다고 해도 이는 애초부터 이런 모습이 나오길 기대한 사마소의 정복욕만 높여주는 행동일 뿐이다. 때문에 어떻게보면 유선이 태연하게 즐거운 듯 행동하는게 더 제왕다운 모습으로 보일수도 있다.[4]

어쨌건, 위진남북조 시대의 군주, 그것도 망국의 군주치고는 그 일생이 놀라울 정도로 안락(...)했기에 정말 보신의 처세를 잘하는 사람이라는 의견도 있다. 또 적어도 황실과 자신의 권위를 살리는 능력은 있지 않았느냐는 평가도 있다. 이에 대해선 제갈첨 문서의 각주에 설명되어 있으니 참고해도 좋을듯 하다. 어쨌건 이게 처세술이건 아니건 사마소는 촉정을 시작할때부터 유선을 우매하다 평가했고 이런 꼴까지 봤으니 유선을 자신에게 위협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했기에 놔둔 것 같다.

1.3 후일담

이후 유선의 후손들은 안락공의 작위를 이어 적당히 살다가, 오호십육국시대흉노유요왕미가 하북 지방을 유린할 때 몰살당하거나 흩어져 버렸다. 이때 헌제 유협의 후손도 대부분 몰살당했으며 일본으로 달아난 유하지만이 살아 남았다고 한다. 또 채모의 후손도 유연의 부하 왕여 일행에게 모두 몰살당했다. 다만 친족 중 한명인 유현이 촉땅으로 도망쳐서 당시 촉땅을 지배하고 있던 저족의 성한으로 망명했다. 유현은 유선의 동생이었던 유영의 손자다. 그는 거기서 촉지방의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해 환대를 받았고 동진의 역사가 손성과 만났다고 한다. 현재 유비의 후손은 모두 유현의 후손이라고 한다.

1.4 평가

워낙 그의 치세가 길었기도 했고 즉위기간 대부분은 무난했지만 말년의 행적이 비판받는 군주라는 점에서 촉빠 가운데서도 그에 대한 옹호론과 비판론이 존재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위의 악불사촉 일화만 해도 양측의 의견이 극명하게 갈리는 일화 중 하나고.

유선에게 촉한 멸망의 책임을 모조리 돌릴수는 없어도 결국 군주인 그에게 가장 큰 책임이 있는 것은 사실이기에 사람들은 그의 행적이 왜 그렇게 되었는지 대해 숱한 가설을 제기했는데, 그 중 가장 유명한 이야기는 연의에도 나오는 얘기로 조운이 장판파에서 기를 쓰고 구해왔을 때 유비가 땅에 내리치는 삽질을 하는 바람에, 그 충격으로 아둔해졌다는 것이다. 물론 정사의 근거는 없다. 위략에서는 유비가 여기저기 떠돌아 다닐 때 헤어져 노예로 팔려갔다가 입촉 후 아버지에게로 돌아갔다는 이야기까지 나온다.(...) 이른바 유선 벤허설. 촉과 에 대한 위략의 기록을 믿을 수 없는 이유 중 하나다. 조운 인생의 하이라이트였던 장판파에서는 미션 목표로 당당히 활약(?)했다.사실 이 부분은 정사엔 없는 부분이라 삼국지연의의 저자 나관중이 망한 촉나라에 이유라도 달아주기 위해 유선을 의도적으로 더 얼간이로 바꾸지 않았나 하는 의혹도 있다.

결국 진수 말따라 아주 얼간이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총명한 군주도 아니며, 자신에게 주어진 것을 누리며 권력을 부여한 신하가 잘났을때는 그럭저럭 괜찮은 군주였지만 그렇지 않았을때는 군주로서는 실패한 삶을 살았던 황제라고 할 수 있다.

1.4.1 비판론

흔히들 유선의 촉한은 아버지 유비가 이릉대전에서 다 말아먹은 관계로 어쩔수 없었다고도 한다. 실제로 이릉대전은 촉 7~8만 대 오 6만5천~7만 정도 규모의 전투로, 촉은 북벌을 위해 조련한 병마를 오로 돌려 아직 완전히 오에 복속되지 않은 형주를 탈환하기 위한 것이고 오는 국가의 존망을 걸고서 겨룬 대전이었다. 촉은 1년에 가까운 기간동안 전투에서 연승을 거두었으나 결국 육손에게 대패하고 이후 1세대 장수들을 대신하여 군부를 이끌 수많은 인재와 병력을 잃어 국력이 파탄날 지경은 아니었지만 큰 피해를 입었다. 이릉대전 항목을 참고하면 알 수 있듯이 이릉대전 직전에도 관우, 장비, 마초, 황충 등의 촉한 군부의 기둥들이 연이어서 죽고 그 외의 여러 인재들도 죽었는데, 그 뒤를 책임질 인재들은 이릉에서 사라져버렸다.

그러나 이후 당시 명성을 천하에 떨치던 유비의 죽음으로 국내외가 혼란하기는 하였지만 제갈량을 비롯하여 이엄, 이회, 장억 등에 의해 진압되고 몇 년동안 제갈량의 필사적인 노력으로 국력을 회복하여 유비 시절보다 더욱 발전하게 된다. 거기에 제갈량은 이후 장완, 동윤, 비의를 비롯하여 자신의 북벌을 대신 수행할 강유라는 인재까지 포섭해서 자신이 죽은 이후까지 잘 대비했다. 거기에 제갈량이 죽고 나서는 하후패라는 인재까지 강유의 휘하로 들어와 힘을 합쳤다.

게다가 위로서는 정통성 측면에서 촉과는 대립할 수밖에 없었는데[5], 40년이나 지나서야 촉을 정벌할 수 있었던 것은 단순히 공격해 들어가기가 힘들고, 혹여 들어갔다가 깨지면 장안까지도 위험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 년에 걸친 공작인 비의 암살과 준비 끝에 공격했던 것. 참고로 촉에는 위로부터의 투항 장수가 꽤 많았으며, 장억이 이들을 중히 여기지 말라고 비의에게 충고한 내용도 엄연히 있다.

강유를 훼방놓았느냐 아니냐 하는 문제 역시, 정사 강유전에 엄연히 '암살의 위험을 느끼고 농서의 답중으로 도망하여 기회를 노렸다.'는 내용이 뚜렷이 있다. 강유의 북벌이 성과가 지지부진했다는 점을 들어서 유선을 옹호하는 의견도 있는데, 강유의 북벌이 이전시대 제갈량의 북벌보다 규모가 작았다는 점은 일단 둘째치고 설령 그 규모가 커서 촉한에 경제적으로 부담을 준다면, 강유를 질책한 다음 다른 사람으로 교체하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제갈량 시대처럼 국가적인 재정비를 통해 소모적인 북벌을 유도하기 보단 한번에 성공 가능성을 높이도록 북벌군에 충분한 지원을 해 준다던가, 그것도 별로라고 생각한다면 아예 비의처럼 군사 1만 정도만 주고 위나라에 대해서 견제만 하도록 하던가...하여튼 '강유의 북벌을 어떻게 처리 할 것인가?'에 대한 방법은 많았고 '공식적인 절차'를 통해서 문제를 수정하는 것이 충분히 가능하며 황제 유선은 그럴 만한 권위가 있다. 그러나 유선은 우유부단하고, 국가의 위기에 태만한 태도를 취할 뿐. 적극적으로 정책 방향을 결정하고 결단하는 지도력, 리더쉽을 전혀 보여주지 못했다.

그러나, 이 문제에서 유선이 지닌 문제는 북벌을 지속하는 '정책'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그 의사를 결정하는 '정치' 차원의 문제다. 염우 같은 장군이 유선의 총애를 받는 환관 황호와 결탁하여 정쟁을 도모하거나, 강유 같은 인물이 암살 위험을 느낀다는 것 자체가 유선이 주도하는 정치가 비정상적으로 돌아가는 상황이었다는 반증이다. 이는 유선이 황호를 중심으로 한 비선 라인에 필요 이상의 힘을 실어주었고, 그 결과 과거에는 정상적으로 진행되던 정책 논의 활동이 마비되어버렸다는 상황을 드러내고 있다.

충분히 잘 했다고 봤건 아니건 기록으로 미루어 보면 딱히 똑똑한 사람은 아니었더라도 주변 환경에 의해 물들기 쉬운 인간이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는 정사 후주전(유선전)에서의 평에도 나오는 것으로, 현명한 재상이 있을 때는 도리를 따르는 군주였으나 환관에게 물들어 우매한 군주가 되었다고 나온다. 장완, 동윤[6], 비의 등이 보필할 당시에는 촉한의 국정이 크게 문제 없이 잘 돌아갔으나, 비의가 죽고 그나마 재주는 있던 진지가 죽으니 촉한이 제깍 막장테크를 타는 것을 보면, 결국 1차적 책임은 황호를 총애한 유선이 질 수밖에 없다.

역사에 남은 암군 중 상당수는 신하가 똑똑하면 훼방을 놓았던 것과 비교해 보면 제갈량, 장완, 동윤, 비의 대에는 재상들에게 권력을 맡기고 그들의 조언에 따라 정치를 했으니 그 점은 인정해 줄 만 하지만[7] 강유의 시대에는 훼방을 했다. 삼국지연의에서 강유를 제갈량의 후계자로 묘사해 오해를 사는 요지가 많은데, 강유는 위 셋과 같은 재상의 위치가 아니라 동오의 대도독과 비스무리한 장군의 위치였다. 비의의 뒤를 이은 것은 진지였고, 진지를 거쳐 황호가 중용되었기 때문에 강유는 발목을 잡히게 된다.

문제는 유선이 농부같은 일반 직업을 가진 일반인이었으면 문제가 없지만, 문제는 한 나라의 군주였다는 점. 어찌되었거나 결국 촉한 멸망에 대해서는 유선 본인이 가장 큰 책임을 질 수밖에 없다. 이것을 두고 서양적 사고관이라며 동양적 군주론에 의하면 유선보다는 보필할 인재등의 부족이 문제였다고 하는 사람도 있는데, 이견 역시 존재한다. 제갈량 생전에도 커다란 계획을 잡고 전투중이었던 제갈량에게 이엄의 거짓말을 듣고 다시 돌아오게해서 큰 작전을 망친적이 있었고 보필했던 인재나중에 아첨을 듣자마자 이를 갈면서 원망하고, 나중에 중용한다는 자가 아첨밖에 모르는 환관밖에 없는데, 이 자에게 나라의 권세가 집중되니 이쯤되면 인재가 모자랐다기 보다는 간신들에게 모든 힘이 돌아갔다고 밖엔 볼 수 없다, 강유를 고립시켜 말 뿐인 대장군을 시켰으며 그외에 다른 장수들도 방해가 심했으며 또 유선이 그들을 총애하여 이를 해결하려는 마음가짐이 없었던 탓이 크다. 도리어 강유의 급박한 서신을 황호의 말을 듣고 무시하고 덮었는데[8], 이는 인재가 없었다는 이유로 커버되지 않는다.

특히 멸망 직전인 260년에서 264년 정도까지의 행보를 보면 머저리도 이런 머저리가 없다. 이때 황호에게 휘둘리는 유선은 군주론에서 "군주는 충고를 잘 들어야 하지만 아무나 당신에게 충고를 하게 해선 안되며 최종 결정권자는 어디까지나 군주 자신이어야 한다."의 격언에 어울리는 인물일지도 모른다.

1.4.2 옹호론

그의 치세는 41년인데 삼국시대는 물론 위진남북조 시대에서도 독보적으로 긴 치세에다가 제갈량이 다 먹여살렸다는 세간의 인식과 달리 뒷 29년은 제갈량 사후의 기간이다. 물론 제갈량이 그 정도의 국력을 키워두고 자기 사후에 국가를 책임질 인재들을 잘 선택해 놓아서 가능했다. 실제로 촉의 사영의 마지막인 비의 사후 10년만에 촉은 황호 때문에 망한다. 촉한의 멸망 원인의 다른예로 진지의 예를 들긴 하지만 적어도 진지는 나랏일을 어느정도 처리할 재주는 있었으니 본격적인 막장은 진지 사후 황호를 더 이상 견제할 방법이 없어졌을 때라고 보는게 맞을것이다.

거기에 아무리 말아먹었다고 해도 말년에 인재를 잘 쓰지 못한 정도일 뿐 손오의 마지막 군주 손호마냥 딱히 폭정이나 학정을 한 내용은 없다. 적어도 사람은 확실히 착했고 아버지가 남겨준 인재들의 말을 신뢰하고 그들을 잘 써먹은 군주이긴 하다, 제환공의 풍모가 있었다는 평가처럼 군주가 이렇게 신하들에게 권력 상당수를 신뢰하고 맡기는건 그렇게 쉬운 일만은 아니다. 황호의 발호를 허용한 진지 역시 유선이 마지막 사영인 비의의 추천을 받아서 등용한 인재이고 적어도 진지는 아부를 잘하고 국정 운영에 황호가 발을 들여놓게 한 것 외에 무리수를 두진 않았다. 진지 생전엔 황호가 대놓고 국정을 농단하는 일은 없었으며 강유에 대해서 초주와 함께 견제가 들어가긴 했어도 황호시절 마냥 강유가 신변에 위험을 느낄 정도는 아니었다. 즉 말년 5년의 황호시절을 제외한다면 유선은 삼국시대 군주들 가운데 그렇게 악평만을 받을 군주는 아니라는 것이다.

실제로 즉위 초에는 탁고대신인 제갈량을 승상으로 임명하고 전권을 위임하여 전한 초기의 제도를 따랐지만, 제갈량이 죽자 더 이상 승상을 임명하지 않고 즉각 한무제 이후의, 황제가 직접 국정을 관장하는 제도로 변경했다. 백성들이 제갈량 사후 그의 사당을 짓는 것을 청하는 것을 들어주지 않기도 했었다. 국정의 대부분을 신하들에게 위임하긴 했으나 그렇다고 그가 동시기 위, 오의 군주들처럼 무력하게 군주의 권리를 놓친 적은 없었다는 점에서 자신의 권위를 세우고 왕실을 유지할만한 능력은 되는 군주임을 보여 준다. 물론 유선이 제갈량을 싫어했다는 얘기는 아니다, 제갈량 사후에 누군가가 제갈량을 비방하자 다소 유한 정치를 펼쳤던 유선은 크게 노하며 그 사람을 즉시 죽인다. 다만 군주 입장에서 유선은 위대한 대신에 대한 추종이 지나친 것을 경계 했을 공산이 있다는 것.

어쩌면 말기의 유선은 내정의 황호, 외정의 강유 이렇게 나누어서 생각했을런지도 모르는 일이다. 강유 등을 견제한 것에 대해서는 왕권을 강화시키기 위함이라는 의견도 있다만 유선은 결국 강유도, 황호도 둘 다 죽이지 않았다. 유선의 즉위 40년동안 제갈량과 강유는 30년에 걸쳐서 끊임없이 북벌을 행했고[9] 정말 유선이 강유의 북벌을 막을 생각이 있었다면 옹양주를 겸한다는 당초의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강유의 북벌을 언제든지 중단시킬 명분도 있었지만 북벌 자체를 유선이 그만두라고 한 적도 없었다. 인재 문제도 그런 것이 유선 말기 남아있던 유비-제갈량 시대의 구신들은 강유, 요화, 장익, 동궐, 곽익 정도였다. 모두 군부의 인물이었다. 황호를 총애한게 아니라, 그나마 써먹을 수 있는게 황호뿐이었을 가능성도 크다. 촉한이 무조건 인재가 척박한 땅이었다고 생각하는 것도 곤란하고 그렇게 인재가 없었다면 서진시기에 촉땅의 인재들이 천거받아 중앙정계에 들어갈 일도 없었을것이지만 강유의 고군분투를 보면 인재부족의 열악함은 심각한 수준이다. 아예 없지는 않았다 수준으로 봐야 할 듯하다. 단 여기서 서진시기 중용되었던 촉한 출신 인사들 상당수가 황호에 의해 중앙권력에서 배제된 인사들이나 그에 반대한 인사들이 꽤 있었다는 부분까진 부정하긴 어렵다.

어쨌거나...인재가 부족했든 아니면 신권을 견제하기 위해서였건, 문제는 그렇게해서 잘했으면 당연히 욕을 먹을 일이 없고 친정(親政)도 인재선정도 적절한 판단능력이 있어야 할 수 있다는 부분일 것이다. 유선시대 말기에 유선의 큰 실책이라고 평가받는 부분이 제갈첨, 동궐, 강유가 국정의 문란을 초래하는 황호의 계파에 속하는 인물들을 제거하라고 해도 받아들여주지 않았다는 점인데 재위기간 동안 큰 숙청없이 국정을 운영했던 유선 입장에선 이전에 해오던 대로 자기가 믿음직하다고 생각한 인물들을 중용한것이겠지만 문제는 이 시기 유선이 총애한 인물들이 국정에 믿음직한 인물들이 못 되었다는 점이다. 이 시대에 오나라의 사신으로 왔던 설후도 촉한 국정의 문란함을 유선과 대신들의 문제라고 판단했는데 분명 유선시대 말기의 인재 중용에서 유선의 방식이 어긋난 부분이나 인재를 고르는 안목의 문제는 어쩔수가 없다고 밖엔 볼 수 없다. 아무리 이전의 영명한 재상 가운데 한 사람추천한 인재그와 같이 일한 인물을 신뢰했다고 해도 분명 그 인물은 다른 영명한 재상이 엄하게 질책하고 가까이 두지 않길 권했던 인물이었는데 유선은 후일 이를 무시하고 오히려 그 사람을 원망하기까지 했다. 결국 그 인재가 어떤 인물인지 판단하고 어떻게 써야 하는가의 문제는 군주 자신의 판단으로 귀결 될 수 밖에 없다. 당장 촉한 멸망 당시 '적국이 공격한다는데 신하들 가운데 누구의 말을 더 신뢰하고 따를것인가?'의 문제를 가지고 단순히 총신의 말을 따르고 다른 신하들에겐 알리지도 않았다는 사실에까지 이르면 유선의 판단을 긍정할 수 있는 부분이 없다.

스스로도 촉한이 망하고 끌려갈때 극정을 보고서야 이런 신하를 진작에 못 알아본것을 후회했다고 하니 결국 통치기간 말기 유선의 선택은 스스로를 망친 선택이 되었던 것이다. 극정의 말을 그대로 따라주고, 극정을 일찌기 중용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는 모습을 보면 인재 부족에 대해서 그도 늘 안타깝게 여기며, 아버지만큼 적극적이진 않았으나 현자를 찾는 군주의 미덕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다만 그런 인재를 찾는데 있어서 그의 판단이 아쉬운 부분이 있다는것이 안타까운 부분이고 유선의 실책이라는 것을 부정하기 어려울 뿐이다. 극정은 몇십여년간 군주 밑에서 봉사하던 인물이었는데 그 능력을 일을 그르치고 나서야 알고 중용하지 못했다고 후회하는 부분을 보면 확실히 그렇다. 특히 아무리 좋게 봐주려고 해도 황호시대에 그나마 있던 인재들마저 황호의 눈 밖에 나면 한직으로 밀려나거나 하는 상황까진 옹호하기가 어렵다.

그래도 한 촉 멸망 10년 전 정도에 죽었다면 의외로 명군으로 남았을 여지가 있다고 예상된다. 촉 멸망 10년 전이면 253년. 비의가 그해에 유선 대신 암살당해 죽었고, 이 때까지만 해도 조금 놀기 좋아하긴 했지만 황호도 권세를 누리지 못했고, 정사의 언급처럼 훌륭한 신하가 있을때는 도의를 따르는 군주였기 때문에 가능성이 있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진지가 죽고 황호의 발흥이 이뤄지기 전에 죽었다면 말년 행적으로 좀 더 비판 받기야 하겠지만 지금처럼 한심한 군주 취급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괜히 진서(晉書)에서 제환공의 다음으로 평가받는게 아니다. 제환공 역시 관중 생전에는 매우매우 훌륭한 군주였지만, 관중, 포숙아 사후 망했다.

그러니까 곽순이 유선 암살에 성공하기만 했더라도 명재상 비의는 살아남고 유선은 나름 괜찮은 군주로 남아 지금같은 악평을 듣지는 않았을 것이란 이야기도 있는 편. 어쨌거나 확실한건 유선은 보필하는 신하의 재량에 따라서 그 행적이 매우 달라지는 타입의 군주라는 것이다.

1.5 기타

유선빠와는 별 상관없지만 이쪽도 모에선의 수혜를 피할수 없어서, 주로 여성향 쪽에서, '너무 위대한 아버지 때문에 비뚤어져버린 시니컬 미청년'이라든가 '천연 미소년'으로 미화되기도 한다. 과연 위대한 모에선. 이런 부분을 실제로 실현시킨 내용으로 나온게 진삼국무쌍 시리즈의 유선.

장비의 딸들로 자매덮밥을 실현했었다. 유선의 첫 번째 부인이 장비의 딸 중 언니인 경애황후, 두번째 부인이 동생인 장황후다. 경애황후가 죽자 이듬해 동생을 황후로 맞이하였다. 경애황후가 죽은 해와 장황후가 귀인으로 입궁한 연도는 건흥 15년(237년)으로 같으며 어느 쪽이 먼저인지는 불확실하다.

패러디에선 거의 항상 멍청한 캐릭터로 나오지만 특이한 예로 삼국지 도원결의 카페에서 연재되었던 대사 고친 조조전에선 더럽게 똑똑하다. 사실상 이 스토리에서 조조가 마왕 제갈량의 통제하에 있는 촉을 얻은건 유선의 계략 덕분.

상당히 오래 재위한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정치를 대부분 재상들에게 맡겨두고 자신은 의례적인 일만 맡았기 때문에 유선의 재위기간에 대해서는 후반부의 병크를 제외하면 별다른 설명 없이 넘어가는 경우가 매우 많다.

사마소와의 연회는 이문열이 본인의 소설 이문열 평역 삼국지에서 옹호하기도 했다. 유선을 옹호하다가 너무 극심해진 나머지, 김운회 교수 등 유선빠가 간혹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사람은 혼돈의 시대에서 평생 호의호식하며 살아간 진정한 럭키가이였다. 본인이 기억할 수 있는 한도에서는 고생을 해보지 않았으며, 생명의 위협도 어렸을때 빼면 없었다. 수없이 많은 잘났다고 하는 사람들이 서로 치고박고 싸우며 대치하는 100년 안되는 삼국지의 시간동안 이처럼 고생 안해보고 평생동안 잘 먹고 잘 살며, 적어도 허울만이라도 좋은 대접을 받은 사람은 삼국지 시대를 통틀어서 얼마 없다.

놀라운 것은 정조도 사마소와의 연회 부분에 대해 평가를 내리면서 유선에 매우 호의적인 태도를 보였다는 것이다. 유선이 정말로 사마소를 속이기 위해 연기한것인지 아닌지는 이미 몇백년전부터 꽤나 평가가 분분한 부분이었던거 같다.

후주(後主)가 촉(蜀)을 생각한다고 대답한 것은 천고의 비웃음거리가 될 만하다. 그러나 그 말의 뜻을 자세히 음미하면 혹 자신을 보전하려는 계책에서 일부러 이러한 말을 하여 속마음을 감추려고 한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대저 그 사람은 참으로 말할 것이 없고 평소 그의 사적(事蹟)을 살펴보더라도 진 혜제(晉惠帝)에 비할 수 없으니, 그렇다면 비록 극정(郤正)이 말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어찌 촉을 그리워하는 한 생각이 없겠는가. 이는 참으로 말을 해도 아무 소용이 없고 단지 저들의 의심만 야기시킬 뿐이기 때문에 하지 않은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극정이 말한 것에 대해서도 가부를 살피지 못했어야 하는데, 오히려 어떻게 극정을 너무 늦게 알았다고 한스러워할 수가 있겠는가.
유학 이지연(李志淵)이 대답하였다.

후주는 제 환공(齊桓公)과 같은 자품을 지녔음은 물론 그보다 더 뛰어난 점이 있습니다. 온 나라를 들어 공명(孔明)에게 맡긴 것은 제 환공이 관중(管仲)에게 위임한 것에 부끄러울 것이 없고, 장완(蔣琬), 비위(費褘), 동윤(董允) 등 제현(諸賢)을 들어 쓰는 것을 잊지 않은 것은 제 환공이 역아(易牙)를 써서 국난을 야기한 것보다 한 단계 높으니, 참으로 용렬하고 아둔한 자가 이와 같이 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촉을 생각한다고 대답한 것은 그가 진심으로 한 말이 아님을 참으로 알 수 있습니다. 그가 고향을 생각하는 마음이 전연 없다는 것을 보여 저들로 하여금 의심하지 않도록 하고 다시 자신의 진심을 토로하는 듯이 ‘삼가 분부대로 하겠다’고 하여 매우 어리석은 행동으로 자신의 진심을 숨겼으니, 이것은 자못 선주(先主)가 젓가락을 떨어뜨린 것과 같은 것 입니다. 출처

참고로 원본은 홍재전서 위 원제편이다.

참고로 제환공의 경우, 자신의 아들은 신의있는 인물에게 부탁했기 때문에 나라를 보존하고 아들에게 공위를 물려줄 수 있었지만, 관중이 자신의 후임자를 지정하지 않은 상태로 죽었고 이후 관중이 쓰지 말라고 한 신하들을 중용했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반면 유선은 비록 나라는 망하고 아들들이 자살하거나 살해당하는 불상사를 맞이했지만 현명한 재상이 살아있을 적에는 그에게 국사를 일임하고 그가 정해준 후임을 중용했으며 나라가 망한 뒤에도 처신을 잘 함으로써 망국의 군주치고는 평안한 삶을 살다 갈 수 있었다. 물론 누가 더 낫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참으로 대조되는 삶이라 할 수 있다.

중국 속담 중에서 '세워도 자빠지는 아두'라는 말이 있다. 하나마나 하는 일을 해보았댔자 허사라는 것을 빗대는 것으로, 유선에 대한 후대 사람들의 시선이 잘 나타난 속담. 그 때문인지 제갈량을 모신 무후사에 유선상을 가져다 놓은 적이 있었는데 사람들이 보이는 족족 부숴 버려서 결국엔 치워버렸다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경우가 많은데 소쩍새의 수많은 이름[10]들 가운데 하나인 귀촉도(歸蜀途)는 유선의 이야기가 아니다. 놀고 먹다가 신하에게 배신당해 죽은 촉의 망제 두우라는 황제를 다룬 이야기다. 촉하면 촉한의 이미지가 커서 유선으로 착각하는 사람도 있는데, 촉은 삼성퇴 유적으로 유명한, 엄연히 고대에 존재하던 국가 이름이다. 무엇보다 이 이야기가 나오는 '촉왕본기'는 유선은 태어나지도 않은 전한 시대의 책이다.

고우영 화백은 만화 삼국지에서 조자룡이 유선을 구해올 때 유비가 신하를 잃느니 아들이 죽는게 낫다며 아기인 유선을 내던질때 그 충격으로 바보가 되어버렸다는 의견을 보이기도 했다.

1.6 미디어 믹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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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솔 3, 무력 5, 지력 9, 정치 4(...)

참고로 유선의 이 능력치는 이스터 에그다. 능력치 3,5,9,4를 일본어식 숫자 읽기로 읽으면 산고쿠시. 즉 일본어로 삼국지와 같은 독음이 나온다. 삼국지 10부터 부여된 이 이스터에그는 삼국지 12까지 이어지다가, 삼국지 13에서 드디어 통솔34 무력19 지력30 정치35 를 받으며 백하팔인을 탈출했다!!]

2 촉한의 제2대 황제 유선의 아들

촉서 「이주비자전(二主妃子傳)」
감부인목황후경애황후유영유리유선

劉璿
(224년 ~ 264년)

삼국시대 촉한의 2대 황제인 유선의 장남이자 유심의 형, 는 문형(文衡), 어머니는 한때 경애황후 장씨의 시녀였던 왕귀인.

238년에 15살 때 태자로 책봉되었지만 아버지를 닮았는지 용렬하여 촉의 신하들은 우려를 표했다고 하며, 말타는 무예나 아버지처럼 정신없이 유희에 빠져 태자중서자가 된 곽익이 간했다는 내용까지 있다. 태자의 독서인 맹광이 그의 공부를 위해 극정을 찾아가 공부하는 책, 성정, 좋아하는 것에 대해 물었지만 극정이 신중하여 적당한 말을 하여 일부러 태자를 칭찬했지만 맹광이 자신은 직언을 회피하지 않는다면서 태자인 유선이 긴급히 지식을 배우는데 힘써야 된다는 얘기를 했다고 한다.

그러나 등애가 촉을 멸한 후 종회의 난 때 혼란기에 장익, 관이 등과 함께 위나라 군사들에게 살해당했다.

2.1 미디어 믹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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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9,10,11

삼국지 시리즈에서는 몇몇 시리즈에 등장한다. 일러스트는 상당히 문약한 이미지며, 능력치는 문약한 이미지 답게 좋지 않고 다행히 백하팔인수준까진 아니지만 그나마 높은 편에 속하는 정치나 매력도 50대에 불과하다.

삼국지 9에서는 무예를 즐겼다는 걸 감안했는지 제사 전법이 있으나 특기는 없어 써먹기는 힘들다. 굳이 쓰자면 정란 셔틀로 쓸 수는 있다.

삼국지 10에서는 9/21/39/44/55의 안습한 능력치에 아버지도 특기가 있는데 본인은 무특기다. 물론 아버지도 별 쓸모없는 주호 특기밖에 안가지고 있긴 하지만. 그래도 능력치 합은 아버지의 거의 2배.

모비일삼국지 3에서는 무력 20, 지력 21, 매력18 을 가지고있다 (..)

3 후한 말 형주자사 유표 수하의 문관

劉先

생몰년도 미상

후한 말의 인물로 유표의 신하로 영릉 사람으로 자는 시종(始宗). 위의 두 인물과는 관계가 없다.

박학하고 기억력이 좋으며, 노장 사상을 익혔다고 하며, 유표에게 기용되어 별가를 지냈다. 관도전투 무렵 유표가 원소와 동맹을 맺어 지원을 약속하고도 움직이지 않고 형세를 관망하고 있자 괴월, 한숭 등과 함께 조조에게 항복하도록 진언했다.

이 전후로 영릉선현전의 기록에 따르면 유표의 사자로 조조와 회견하던 일이 있었는데, 이때 조조가 유표가 하늘에 교사를 지내는 등 천자의 의식을 벌인 것에 대해 따져 묻자 유선은 흉악한 도적들이 길을 가로막고 있어 조정에 닿을 수 없자 무정부상태가 된 남쪽을 수습하기 위해 우국지심으로 내린 결단이라 옹호했으며, 조조가 흉악한 자들은 자신이 모두 토벌했는데 도적이 어디 있냐고 묻자, 눈을 들어 보이는 모든 자[11]가 도적이라는 의미심장한 발언으로 조조를 깠다.

이에 조조가 자신이 사명을 받들고 죄인을 벌주었으며[12] 10만 대군이 있는데 감히 복종하지 않는 자(=유표)가 있냐며 위협하자, 거드름 부리는 모습이 치우지백을 다시 보는 것 같다며 조조를 비웃었다.

거의 모욕에 가까운 수준으로 조조를 도발하고 면박줬지만, 조조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고 한다. 어찌보면 당시 유표 세력의 위세가 얼마나 강했는지 알 수 있는 일화. 삼국지연의에서 장송이 조조를 비웃는 장면은 아마도 여기서 따온 게 아닐까 싶다. 정사에서 장송은 그냥 푸대접받아서 열받았을 뿐이기 때문이다.

208년에 유표가 사망하자 강릉을 방어했지만 유종이 일방적으로 조조에게 항복하는 바람에 항복했다고 하며, 조조 휘하에서는 무릉태수를 역임한 후 상서령이 되었다.

삼국지연의에서는 형주의 별가로 등장하여 치중 등의와 함께 채모의 명령으로 형주를 지키다가 결국 유종이 항복하자 조조에게 항복한다.

삼국지 시리즈에서는 삼국지 3에서 등장하며, 잡문관으로 정치력이 그럭저럭 수준이니 상업투자를 시키면 좋지만 특이하게 다른 능력치들과 달리 매력은 70대나 될 정도로 높다.

4 전조의 황족

劉宣
(? ~ 308)

전조의 인물. 자는 사칙(士則). 유연의 종조부.

순박하고 우둔하면서도 말수가 적고 배우기를 좋아하면서 정제되고 정결했으며, 손염에게 배워 정밀히 살피면서 많이 생각해 밤낮을 가리지 않았고 모시, 좌씨전 등을 좋아했다. 손염이 유선에게 한무제를 만난다면 김일제를 뛰어넘을 것이라 칭찬했으며, 배우기를 마치고 돌아가 몇 년 동안 문 밖을 나가지 않았다.

늘 한서를 읽다가 소하전, 등우전에 이르면 항상 반복해서 읆으면서 대장부로서 두 조(고조, 광무제)를 만났다면 끝내 두 공(소하, 등우)이 앞서서 아름다운 이름을 독차지하게 내버려두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했으며, 병주자사 왕광이 사마염에게 추천하자 사마염이 그를 칭찬했고 유선은 우부도위가 되었고 유선은 관직을 맡아 청렴하고 삼갔다. 304년에 부의 사람들과 모의해 유연을 추대해 대선우로 삼기로 해 호연유에게 업성으로 가서 이를 알리게 했으며, 유연이 오자 유연이 우어륙왕 유경, 좌독록왕 유연년 등을 시켜 선비를 치려고 하자 사마씨들을 공격하라고 권했다.

좌국성을 도읍으로 삼자 대선우의 명호를 올렸으며, 또한 유연에게 존호에 오르라고 청했지만 유연은 사방이 안정되지 않았기에 한왕으로 칭하면서 우현왕을 지내던 유선은 승상이 되었다. 유연이 왕위에 오른 것은 유선의 모책이라 특별히 존중받아 공훈이 있는 친척 중에 그에게 비견될 자가 없고 군무와 정치의 일 중에 그가 전담하지 않는 바가 없었으며, 이후에는 도독중외제군사에도 겸임되었었다가 308년 11월 5일에 죽었다.

활동 시기는 삼국시대 시기가 아니지만 유연의 종조부라 출생시기나 청년기는 삼국시대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활동한 것은 진나라가 통일하기 전부터 활동했기에 이쪽으로 분류했다.
  1. 오호십육국 시대에 한(漢, 훗날의 전조)을 세운 흉노 출신의 유연(劉淵)은 자신이 한나라의 계승자임을 자처하면서 유선에게 효회황제(孝懷皇帝)라는 시호를 올렸다. 다른 한나라 황제식으로 읽으면 '촉한 회제 유선'이 되겠다.
  2. 흙을 쌓아 올려 하늘에 지내는 제사를 봉(封), 땅을 깨끗이 하고 산천에 지내는 제사를 선(禪)이라 하는데 중국의 역대 제왕이 정치상의 성공을 천지에 보고하기 위해서 태산에서 행한 국가적 제전이다. 이 봉과 선은 원래 별개의 유래를 가지는 제사였다가 양자를 합쳐 봉선이라는 이름으로 같이 지냈다.
  3. 고도의 처세술이라면 이 에피소드에서 극정의 역할이 은근히 의미심장한데 극정은 유선이 낙양으로 끌려갈때 '이런 신하를 진작에 못 알아봤다'고 탄식한 신하였다. 이 점은 하술하겠지만 후일 조선 정조도 지적한 얘기.
  4. 즐거워서 망한 나라는 생각도 안 난다며 헬렐레 풀어지는 것까지 제왕답게 보였을까? 고도의 처세술이든, 정말로 생각이 없었든 간에 남들 보기에는 사마소의 말마따나 '제갈량도 답이 없었을 한심한 인간'으로나 보였을 터. 차라리 정복자 앞에서도 깡다구가 살아 있던 이 사람이 더 제왕다워 보이지 않았겠는가. 행적 자체는 유선보다도 답이 없는 폭군이었을지언정....
  5. 선양은 조비가 받았지만, 유비도 황실의 후손으로서 국호를 한으로 선언했으므로
  6. 촉한의 간신배로 알려진 황호는 적어도 동윤이 살아있을 때는 동윤을 두려워했고 그래서 유선에게 접근을 못했었다. 황호의 전횡은 동윤이 죽으면서 시작되었고 진지가 죽으면서 브레이크가 풀린다.
  7. 애시당초 제갈량은 유비의 탁고대신이라는 입장에서 국사를 총괄하고 있어서 유선이 함부로 대할 사람이 아니긴 했다. 그래도 제갈량 이후의 유선의 행적을 보면 대체적으로 신하에게 의지하는 정치를 한 것은 분명하다.
  8. 들여다 보지도 않았다
  9. 이론의 여지는 있을수 있다. 제갈량조차 4차 북벌과 5차 북벌 사이엔 3년의 텀이 있었고 강유 자신이 계획을 수립한 북벌은 제갈량의 북벌 20여년 후이기 때문.
  10. 소쩍새는 전설이나 설화의 소재가 된 덕분에 이명이 많기로 유명하다. 이조년의 다정가에 등장하는 자규(子規), 여인에 빠져서 나라를 잃은 황제에 관련된 망제혼(望帝魂) 혹은 두우(杜宇), 불여귀(不如歸)또는 두견새. 솥이 적다라고 가난과 관련된 소쩍새, 의붓어머니와 관련하여 동생을 걱정하는 접동새가 죄다 한가지 새를 일컫는 말이다. 그리고 이들은 각각이 소설 또는 시의 소재가 되었다.
  11. 조조와 그 측근들을 의미하는 것이다.
  12. 아마 관도에서 원소를 격파한 것을 말하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