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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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호
李昌鎬, Lee Chang-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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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년월일1975년 7월 29일
국적대한민국
출신지전라북도 전주시
학력충암고등학교
직업/ 소속바둑기사 / 한국기원
단급프로 九단
입단1986년
가족관계아버지 이재룡, 어머니 채수희,
형 이광호, 동생 이영호,
부인 이도윤, 딸 이소정, 이시연
최대 연승기록41연승(세계 1위)
누적우승경력140회(한국 바둑기사 2위(1위 조훈현))
타이젬바둑 닉네임swing(P), 내안의 神
공식 홈페이지

1 개요

신산(神算)[1]
한국에선 인간 국보(國寶), 중국에선 석불(石佛)로 불린 남자[2]

대한민국의 프로 바둑기사. 프로 九단이다.[3] 별명은 강태공, 신산, 돌부처. 중국의 언론에서는 '大李(큰 '이' 씨)'라고 부르기도 한다. (작은 '이' 씨, 小李이세돌 九단이다.)

2 바둑의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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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까지의 전성기 시절 이창호 대 주요기사 상대전적

조훈현-이창호의 10년 사제대결(1)
교체되지 않는 권력, 이창호

2016년 3월 기준 바둑기사 통산전적 레이팅 순위. 1분 48초부터.

90년대 부터 2000년대 중반까지 약 16년간 세계 랭킹 1위를 놓치지 않았다. 이런 가공할 지배력은 바둑 역사를 통틀어도 유례가 없다. 전세계의 모든 바둑기사들이 그의 기보를 붙잡고 파훼법을 찾아 헤맸지만 그렇게 그는 16년간 세계 정상을 지킨 것이다.

즉, 바둑 역사상 최고의 기사.

이런 평가는 그의 전성기만 국한해서 내린 것은 아니다. 이창호를 정당하게 평가하려면 당대성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바둑 역사의 전체를 통시적으로 바라보고 그의 실력과 업적을 견주어봐야만 한다.
현시점 이창호는 세계최강의 기사가 아니지만[4] 바둑사 전체를 놓고 봤을 때, 끝내기의 중요성을 각인시키며 현대바둑의 패러다임을 완전히 뒤바꾼 업적으로는 오청원에 비견되는 선지자였으며, 뛰어난 천재가 쏟아져 나오면서 무수한 연구와 새로운 정석이 난무하던 현대 바둑의 백가쟁명속에서 오로지 그 홀로 최정상에 우뚝 서 있던 십수년간의 전적으로는 사상 최강의 기사이기도 했던 것이다.

이렇게 바둑 역사의 통시적 업적과 당대의 경기력 양면에서 세계 정상에 오른 기사는 이창호가 유일하다. 이는 일본에서 주로 활약하던 오청원도 이루지 못한 업적이다. 이창호의 위명에 견줄만한 기사들은 몇몇 꼽을 수 있겠지만, 그들의 업적은 바둑역사의 분기점 마다 출현하여 바둑문화를 진일보시킨 "역사적 기념비"에 더 가까운 성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바둑 역사상 가장 위대한 기사를 꼽는다면 가장 압도적 지분을 차지할 기사는 이창호 하나 뿐이라는 사실에는 한중일 모두 이의가 없는 상황이다.

만약 20세기 초중반 동아시아 전체의 바둑문화가 지금처럼 균형있게 보급되고 발전되었어도 오청원이 일본 뿐 아니라 한중일을 넘나들며 최강의 전적을 올렸을 수도 있다는 주장이 나올 수도 있겠지만, 당시 일본 수준의 바둑문화가 한국과 중국에도 꽃피었다면 한국 중국 역시 오청원과 같은 기재가 나타나 팽팽한 세력 균형을 이룰수도 있다고 가정할 수도 있는 일이기에, 이는 사실 의미없는 보론에 불과하다.
이름이 비슷한 어느 누구와 헷갈리면 매우 결례이다

그러나 위의 주장은 한국인의 주관이 다분히 섞여 있는 의견이기도 하다. 세계 바둑계에서 오청원의 위명은 이창호보다 높았으면 높았지 결코 낮지 않다. 아무리 이창호의 끝내기가 대단하다 해도 신포석으로 인해 시작된 반상의 혁신과 현대바둑의 출발이란 위업을 넘기는 힘들다. 기력면에서도 오청원이 활동할 당시의 바둑은 수준으로보다 저변으로 보나 일본이 독보적인 최강국이었고, 그 일본의 내노라하는 고수들을 10번기에서 죄다 떡실신 시키며 치수를 고쳐버린 전적은 현대바둑에서 다시 나올 수나 있을까 싶은 엄청난 것이다. 게다가 당시의 10번기는 단순히 상금다툼이 아니라, 패배시 치수가 하향조정되어 "나는 당신보다 하수입니다."를 공식인증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야말로 프로기사의 명예가 걸린 진검승부였다. 그리고 오청원은 1939년부터 불의 교통사고를 당한 1956년까지 이창호 못지 않게 오랜 전성기를 보냈다.[5] 오청원의 전적이 일본에만 국한되어 있다고 이창호보다 뒤진다는건 MLB, NBA를 제패한 선수가 한국리그에서 활동안했다고 까는 것과 매한가지다.농구대잔치 우승 못해본 마이클 조던이 무슨 농구황제인가효?
다만 현대적인 기전이 안착되기 전이었던 시절이라고 하나 타이틀수나 객관적인 전적이 이창호에 비해 부족한 것은 사실이다.

3 생애

1975년 7월 29일, 아버지 이재룡, 어머니 채수희 사이에서 3형제 중 둘째로 태어났다. 현재의 조용하기만 한 이미지와 달리 어릴적의 이창호는 곱게 자란 부자집 도련님에 꽤 고집이 세고 식탐도 있던 성격이었다고 한다. 그의 동생의 인터뷰에 따르면 어릴적 이창호가 문구점에서 장난감을 사달라고 했는데 엄마가 안 사주자 아무말 없이 씩씩거리다가 그대로 문구점 유리에 머리를 박고 기절한 적도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한다. 물론 그런 고집이 후에 뚝심이 되어 천재라는 속성과 합쳐져 돌부처 바둑신 이창호의 근원이 되었을 수도 있다.

그리고 4살때가 되던 해에 할아버지였던 故 이화춘(86년 작고)[6]에게서 바둑을 처음 배운 이창호는 84년 두차례의 시험기를 거치며 이정옥 六단[7], 전영선 七단[8]을 사사하며 성장해 나간 그는 10살이 되던 해, 그 유명한 조훈현의 내제자[9]로 들어가, 11세에 최연소 기록 2위[10]로 프로에 입단했다. 바둑을 배운 지 4년만에 입단할 정도이니 대단한 기재를 소유한 셈. 그리고 입단 시험도 10살 때 한 번 보고 떨어진 후 다음 해인 11살 때 통과하였다는 것으로 보아 배운 지 3년만에 연구생 1조까지 올랐다는 계산이 나온다. 다만 조훈현은 이창호의 이런 좋은 성적에도 불구하고 생각보다 늦게 입단해서 정말 천재가 맞는가하고 의구심을 가졌다고 술회했다.대체 몇 살에 입단하길 바랬던 겁니까[11][12]

“바둑은 일단 천재가 나와야 한다. 그 다음, 그 천재가 피나는 노력을 해야 한다. 그런데 그런 재목이 보이지 않는다. 이세돌은 천재가 아니라 독특한 기풍을 가진 ‘천재형’이라고 생각한다.[13] 나의 사형 우칭위안(吳淸源·1914∼2014)은 천재이면서도 엄청난 노력가였다. 어린시절 얼마나 바둑책을 한손에 들고 많이 보았으면, 왼손 손가락이 기형으로 굽었겠는가. 한번은 세고에 선생님이 우칭위안을 머리 좀 식히라며 야구장에 보냈다고 한다. 그런데 우칭위안은 야구장에서 야구는 보지 않고, 고개를 젖혀 하늘만 보더라고 했다. 하늘을 바둑판 삼아 바둑공부를 했던 것이다. 그분은 올해 우리 나이로 백한 살이지만, 지금도 검토실에서 ‘이렇게 둬야지’하며 자신의 의견을 밝힌다고 한다. 바둑은 천재가 아니면 아무리 키워봤자 소용없다. 죽어라 공부해도 안되는 게 바둑이다.”

여튼 이창호는 프로기사가 된 후에도 남들을 훨씬 뛰어넘는 속도로 성적을 내기 시작하였고, 급기야는 13살의 나이에 바둑왕전 타이틀을 따냈다. 아무리 당시 한국기원의 선수층이 얇았다지만 조훈현, 서봉수 다음의 '도전 5강'(서능욱, 강훈, 김수장, 장수영, 백성호)이 10년의 도전 속에서도 단 하나의 타이틀[14]만을 딴 것을 감안한다면 이창호의 13세 우승은 놀라운 일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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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제18기 KBS 바둑왕전 결승국 실황. 빨간 옷이 이창호, 왼편은 김수장 七단.

이것은 단순한 이변이 아니었다. 14세 때 타이틀 수를 늘리더니 15세 땐 조훈현과의 번기 대결에서 연이어 승리하여 한국 최고의 다관왕이 된다. 프로기사로 입단해도 빠르다는 소릴 듣는 나이에 이미 한국 프로 기사의 정점에 섰으니 만화책에 나오는 주인공이 현존한다고 봐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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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제22기 명인전의 제3국. 왼쪽이 스승 조훈현이고 오른쪽이 이창호. 이창호는 내리 3판을 이겨 스승을 꺾어버렸다. 조 국수가 심란한지 기이한 자세로 앉아서 긁적인다. 조 국수 뒤의 앙상한 할아버지가 대한민국 유일의 대국수인 조남철.

이창호가 스승의 타이틀을 계속 빼앗아 오면서 집에 오면서 어색한 시간이 늘어 갔다.타이틀을 계승하는 중입니다, 스승님[15][16] 결국 조훈현평창동으로 이사를 할 때 분가하게 된다[17].

“푸하하, 맞아서 안 아픈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래도 제자한테 빼앗기는 게 낫다. 내 시대가 백년 천년 가는 것도 아니고. 그 시기가 생각보다 빨리 온 것뿐이다. 아내가 가운데서 가장 힘들었을 것이다. 창호는 원래 말이 없는데다가, 그런 날은 고개까지 푹 숙이고 있으니…. 보통 천재는 반짝반짝 금방 눈에 띈다. 그런데 창호는 ‘눈에 보이지 않는 천재’다. 창호는 자기 바둑수순도 잊어 먹는다. 세상에 그런 천재가 어디 있나. 게다가 창호는 당연히 치고나가야 하는 수순인데 갑자기 하수처럼 물러난다. 난 어이가 없어 야단을 친다. 그러면 떠듬떠듬 말한다. ‘그렇게 하면 싸움이 붙고, 그러다가 아차하면 역전 당할 수도 있다고. 하지만 물러서면 2, 3집밖에 못 이기겠지만, 결코 지는 일은 없다’고. 맞다. 끝내기는 정상급기사라면 누구나 잘한다. 하지만 창호는 반집을 지고 있는 상황에서, 보이지 않는 0.7집을 알고 그 수순을 밟아간다. 그래서 결국 한집을 만들어낸다. 평범한 바둑 같은데 볼 건 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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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도 어린 나이에 한국 바둑의 정점에 서자 일본에서는 '일본기원과 바꾸더라도 이창호를 사고 싶다'라는 말을 할 정도였다. 너무도 어린 나이에 두각을 나타낸 소년 이창호에 대해 일본 기사[18]들은 강한 호기심을 가졌고, 공교롭게도 린하이펑이라는 거물급 기사와 세계대회(제3회동양증권배) 결승에서 격돌하는데, 이 커다란 승부에서 이창호가 승리하였다(3:2). 그리고 당시 일본의 최강 기사였던 조치훈 九단은 이창호와의 5번기 결승을 앞두고 조훈현에게 "제자한테 너무 무기력하게 지는 것 아닌가? 그래 가지고서 뭘 배웠겠는가"라고 말하고 "그럼 한번 둬 봐"라는 대답을 듣는다. 그 뒤 벌어진 번기에서 초반은 조치훈이 좋았으나 중후반 이창호의 추격에 2, 3국을 반집으로 내주면서 조치훈은 이창호에게 0-3으로 무릎을 꿇게 된다. 이창호는 누구보다도 어린 나이에 아무도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난 실력을 가지게 된 것이다.

그 뒤 기복없이 꾸준히 성적을 내 당시 절대본좌였던 스승인 조훈현을 결국 무관으로 만들어 버리고 1994년에 13관왕[19]을 하는 등 독주하였다. 이런 독주는 그야말로 우악스러울 정도였고 기간 또한 8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무려 15년이 약간 안 될 정도로 긴 세월이었다. 이 기간동안 이창호는 승률왕을 독식하였으며 일 년에 한 명 나타날까말까 한 80%대의 승률을 수 차례에 걸쳐 달성한다. 이창호 평생 승률이 76%이니 이것만으로도 이미 전설인 셈.

우승 역시 통산 138번의 우승(비공식 기전인 타이다배와 세계최강결정전은 제외), 조훈현의 157번에 이어 2위를 기록하고 있다. 전 세계를 통틀어 가장 많은 국제대회 우승을 한 기사이기도 하다(2009년 통산 21회 우승).

어렸을 때는 국내에서와 달리 국제대회에서는 힘을 쓰지 못했다. 이창호의 사실상 첫 세계무대 데뷔였던 요다 노리모토와의 특별대국을 보았던 오오다케 히데오는 "이창호의 바둑은 분명 강하지만 스승 조훈현을 이기는 데 너무 특화되어 있다"는 평을 남기기도 하였다. 동생인 이영호 씨의 말에 따르면 보통 식사 문제가 많았다고 한다. 특히 기름기가 많은 중국요리를 먹고 나면 반드시라 할 만큼 탈이 났다고 한다. 초기에는 아예 굶기도 했으며 라면이나 김치를 챙겨 가기도 했다. 중국어에 능통한 이영호 씨가 중국에서 열리는 경기의 매니저를 자청한 이후부터는 대회장 주변의 패스트푸드점이나 일식집 등을 수소문해 이용한다고 한다.

그러나 해외 경력을 쌓아간 이후 (그래 봤자 20대 초반이었지만) 말도 안 되는 승률을 과시하며 세계 바둑계를 학살하기 시작한다. 이창호는 17세 때 국제대회 최초로 우승한 이후 20대 후반인 2002년까지 국제대회 결승에서 무패행진에 가까운 성적을 거두었다.(딱 한번 1회 춘란배 결승에서 조훈현에게 패한바 있다.) 즉 결승에만 오르기만 하면 우승은 따논 당상인 셈. 90년대 중국 최강의 기사였으며, '이창호 빼고는 다 이겼던' 마샤오춘 九단을 만날 때마다 안드로메다로 보내 결국 재기불능으로 몰아넣었다.[20] 일본이나 중국은 스승 조훈현은 물론 서천왕(天王)으로 불리며 중국 킬러로 군림하던 서봉수 九단 역시 벅찬데 더 괴물이 나타났으니 할 말을 잃게 된다. 중국에서는 이창호를 거의 신으로 모실 정도이다. "그에게 지는 것은 한국에게 지는 것이 아니다. 신은 인간보다 위대함을 알려줄 뿐"이라고 할 정도니. 심지어 자신이 외계인도, 터미네이터도 아니다고 직접 해명까지하였다!그리고 나중에 진짜 스카이넷이 나타나면서 이창호와 비교되고 있다 예언? 한 중국 네티즌은 '우리는 국가대항전에서 중국이 이기기를 너무나 간절히 원하지만 이창호가 지는 광경 또한 보고 싶지 않다.' 라는 표현으로 이창호에 대한 경의를 표했다. 참고로 이 표현이 나온 시합에서 이창호는 혼자 살아남은 한국 대표로 중국과 일본의 대표 다섯 명을 연달아 박살내면서 한국팀의 우승을 이끌어냈다(…).

전성기 때는 수많은 전설을 가지고 있다. 우승률(1등을 한 기전 수 / 출전한 기전 수)을 퍼센트로 기록했다거나(전성기 때의 우승률은 30퍼센트에 가까웠다고 한다.[21]), 한국바둑을 아웃 오브 안중으로 여기고 일본, 중국 그네들끼리 '슈퍼'대항전을 만들어 한창 잘 놀다가, 이창호 이후 한국바둑이 득세하게 되면서 그 일중슈퍼대항전이 2류대회로 전락하면서 슬며시 사라졌다든지.

현재 바둑계를 주름잡는 이세돌, 구리, 콩지에가 2000년대 후반에 와서야 세계 정상급이라는 평가를 듣기 시작하는 것은 이창호의 노화가 한 몫을 하고 있다. 이 세 기사들은 2000년대 초반부터 적수가 없었다는 평가를 받았으나 이창호가 건재했을 땐 이들마저 이창호보단 약했다는 것. 사실 많은 기사들이 20대 초·중반에 전성기를 맞이하는 것을 감안한다면 이들이 20대 후반에 들어서야 세계 바둑을 나눠먹는 것은 이창호의 노쇠 덕을 본 것이였다.

대표적으로 현재 구리, 콩지에에 이어 아슬아슬하게 우위를 점하고 있는 이세돌의 경우 1990년대 후반기인 17세 때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였으나 이창호에 의해 항상 1인자로 올라서지 못했고, 이창호가 노화로 인해 기량이 쇠퇴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본격적인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을 본다면 그만큼 이창호의 전성기 시절의 기량은 최정상급의 한 수 위에 있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또한 이세돌과 이창호의 상대 전적도 이창호가 아직 앞서며 가장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번기 대결에서도 이창호가 5승 2패로 우위라는 점은 이창호가 그만큼 강했다는 얘기.

단지 현재 바둑계의 추세상 대부분의 기전이 속기인데다 이창호의 강점인 정밀한 끝내기가 눈에 띄게 약해진 점을 감안한다면 30대 중반에 접어들어 성적을 내는 것은 무리로 보인다. 이창호와 비슷한 또래인 기사들은 한중일 통틀어 모두 한 물 간 것을 감안한다면 그나마 이창호니까 한국 랭킹 2위에 해당하는 성적을 유지하는 것이다.

여태까지 스승의 업적들을 거의 물려받긴 했지만 단 두 가지 물려받지 못한 기록이 있다. 첫째는 전관왕, 둘째로는 연속 타이틀 홀딩 기록. [22]94년 왕위전 타이틀을 유창혁이 방어에 성공함으로써 [23] 조훈현이 이룩한 전관왕 타이틀은 아직 그 후계자를 찾지 못하고 있다. [24] 그 때의 아쉬움 때문인지 그 이후로 왕위전 만큼은 한 번도 잃지 않고 계속해서 지켜왔다. 흠좀무 [25] 때문에 단일 기전 연속우승 기록이 현재 12연패. 이 기록은 조훈현의 패왕전 16연패 다음의 기록이다. 안타깝게도 지금 왕위전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가고 있기 때문에 이창호의 기록이 다시 한 번 스승을 넘기는 어려워 보인다.

그런 이창호에게도 천적은 있다. 바로 일본요다 노리모토. 상대전적이 좋지 않다. 첫 단추(1990년대 초 한일신예대항전이란 형식으로 5번기를 벌여 1:3으로 패배))를 잘못 채운 탓인지, 이후 이창호는 요다만 만나면 이상하게 바둑이 꼬이곤 했다. 한때 상대전적 1승6패를 기록하는 등 계속 헤매다가 2000년대 들어서 상당히 만회하여 둘 간 승률이 거의 대등해졌다. 그리고 8:8 상태에서 제7회 농심배 최종국에서 만났고 이제는 명실상부 우위로 올라서나 했는데, 그만 패배. 요다는 여전히 만만찮았다. 이창호가 직접 "요다는 내 약점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고 표현했을 정도니 말 다했다. 동률까지 갔지만 다시 패배하면서, 현재 8승 10패로 다소 열세이다. 요다 九단에 따르면 2000국이 넘어가는 이창호 九단의 바둑을 대부분 복기해 봤다고 한다. 요다 九단에게 지고 나서는 한때 중국의 마샤오춘 九단에게 약한 면모를 보여주기도 했지만 이후 다시 역전한다. 2000년대 후반에 와서는 강동윤에게 맥을 못 추고 있다.

2005년 농심 신라면배 국가대항 연승전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별 기대를 걸지 않았다. 당시 개인 기록이 꽤 부진한 시기였는데다가 한국팀의 나머지 인원들이 일찌감치 충격적인 광탈을 해 버린 나머지 한국팀에는 이창호 혼자만이, 중국과 일본팀에는 합이 다섯 명의 기사들이 남아 있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어느 신문에서는 혼자 남은 이창호가 다섯 명을 몽땅 박살내고 우승컵을 한국팀에게 가져다 줄 확률을 3% 미만으로 계산하기도 했을 정도. 오죽하면 한국팀 단장이 우승은 역시 어려울 것 같다는 인터뷰를 했겠는가….

그런데 혼자 남은 이창호가 정말로 나머지 다섯 명을 몽땅 박살내 버리고 우승컵을 한국팀에게 가져다 주고 말았다! [26] 그야말로 충격과 공포. 자세한 요약.

하지만 이 이후로 이창호의 부진이 꽤 길다. 무엇보다 전세계가 이창호의 바둑을 연구하기 시작하니 결국 중국의 구리 등의 기사나 한국의 최철한 등이 강력한 전투력을 앞세워서 이창호를 무너뜨리기 시작하였다. 이창호 이후 끝내기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져 현재는 신예 기사들의 끝내기 실력이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막강해진 것도 이유일 것이다. 또한 실수를 적게하는것을 모토로 삼는 그가 실수가 잦아지고 끝내기에서 미스가 속출하면서 예전처럼 둘 수 없는 이유도 있다.[27]

그럼에도 불구하고 2009년 제 13회 LG배에서 우승한 구리에게, 세계 1인자가 되기 위해 갖추어야 할 조건을 질문하자 이런저런 말을 하고 말미에 하는 말이, "이창호에 비하면 이세돌과 나는 아직 멀었다"는 것이었다. 또한 휴직하기 전 명실상부 국내, 세계 1인자였던 이세돌은 이제 그만 1인자임을 인정하라는 기자들의 질문에 그 거만한 이세돌이 "이국수에게는 안된다고 생각한다"고 두 차례 이상 답했다. 이창호의 위엄을 느낄 수 있다.

2010년 1월 16일 제2회 비씨카드배 월드바둑챔피언십 64강전에서 17세의 연구생에게 패배, 탈락했다.#관련기사 그냥 진 것도 아니고 100수도 못 채우고 불계패.[28] 아무래도 사이가 붙어있는게 틀림없다. 하지만 사이래봤자 이창호에겐 상대가 안된…

2010년 농심신라면배 세계바둑 최강전에서 혼자 남은 상황에서 중국의 류싱, 구리, 창하오를 꺾으며 3연승, 한국의 8번째 우승을 이끌었다.

2010년 11월 한국 랭킹이 6위까지 떨어지고, 승률도 60%가 안 나왔다. 입단한 이래 최악의 성적.데뷔 25년이 다되어가는데 아직도 6위인게 어디냐 이 때문에 2010 광저우 아시안 게임에 참가 멤버가 되었으면서도 우려하는 목소리가 많았으나, 11월 23일 광저우기원에서 열린 남자단체전 예선리그 2라운드에서 한국 남자팀의 승리에 일조, 특히 또 하나의 '이창호 킬러'로 불릴 정도로 근래 상대 전적이 우세하던 창하오 九단을 다시금 제압하여 역시 이창호다운 저력을 보여주었다. 형이 좀 져준다고 기고만장하지 말란 말이다! 그러나 25일 일본과의 대국에서는 이세돌과 함께 짜고 지는 바람에 대표팀은 최철한을 비롯해 나머지 3인이 분발하여 승리, 간신히 결승에 올라갔다.

2010년 11월 26일 광저우 아시안게임 바둑 남자 단체전 결승전에서 제1장으로 나서 중국 랭킹 3위 구리를 관광보내며, 금메달 획득에 일조했다. 오전 예선 6R에서 패해 부진에서 벗어나지 못한 게 아니냐는 우려를 점심 먹고 와서…구리 역시 이창호 못지않게 부진을 겪고 있긴 하지만, 대국의 내용은 전성기의 이창호 바둑을 연상케하는 묵직한 내용이었다는 것이 중계 해설의 평. 그러나 그와 같은 방을 쓴 다른 이기사는 콩지에에게 무릎을 꿇은 걸 보면 자는 동안 정기를 빨아드신 듯 하다

바둑 팬들은 부진한 때에도 진로배, 농심신라면배 등 단체전에서는 유독 강한 면모를 보였던(2010년 제11회 대회 포함 농심신라면배 성적 19승 3패, 승률 86%[29]) 이창호가 믿음을 깨지 않고, 이번에도 활약을 해줘서 '역시 이창호…'라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2011년 2월 14일 최철한 九단에게 패배하며 데뷔 이후 첫 무관.

2013년 1월 7일 랭킹 1위 이세돌, 떠오르는 신성 박정환을 연파하며 KBS 바둑왕전 결승에 진출했다. 만약 우승한다면 2010년 국수전 이후 3년여만에 우승컵을 추가하는 것.

2013년 2월 1일 패자조 결승에서 이세돌 九단을 격파하고 결승에 진출한 박정환 九단과 결승전을 치뤄 결승 1국에서 승리했으나 2월 2일 2국과 2월 4일 열린 최종 3국에서 패배해 준우승에 그쳤다. 이번 패배로 박정환 九단과의 전적은 6승 10패가 되었고 랭킹도 14위까지 떨어졌다.

2013년 4월 6일에 열린 제9회 한국물가정보배 예선 2회차에서부터 5월 6일에 벌어진 제18회 박카스배 천원전 예선 3회차까지 12연승을 달렸다. 랭킹도 10위권에 재진입.

2013년 7월 16일 벌어진 제15회 농심신라면배 세계바둑최강전 대표선출을 위한 예선에서 탈락했다. 이 대회에선 이세돌 九단도 탈락해 많은 이들이 이변이라고 할 정도.[30]

2014년부터 들이 커가기 시작하면서 이창호 九단의 활동이 크게 줄었다. 2016년 현재 아직 한국기원에 현역 프로기사로 등재되어있긴 하지만 시니어급 대회말고는 기전 출전도 크게 줄어 이제는 일선에서 한발 물러난 상황. 언론사와의 인터뷰도 거절하고 말 그대로 '평범한 가장'이 되고 싶다고 한다. [31]구글 딥마인드 챌린지 매치 1국 때 이세돌 九단을 응원하기 위해 잠깐 나왔었고, 2016년 3월 25일 황교안 국무총리 주재 바둑계 오찬 행사에도 유창혁 九단, 이세돌 九단 등과 함께 배석하기는 했다. 하지만 따로 언급은 않고 그냥 들러리 서는 수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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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2016년 갑자기 한국바둑리그에 정관장 팀 김영삼 감독에 의해 2지명(부장)으로 지명받아 바둑 현업에 복귀하게 되었다.[32] 김영삼 9단의 선택이 확 깨는 이유는 정관장 팀 1지명(대장)이 신진서 5단(최연소 주장, 만 16세)인데다가 2지명을 한동안 바둑계에서 떠나있던 이창호 9단을 지명했기 때문이다. 2016 한국바둑리그 화제의 팀이 될 듯. 그나저나 딸바보인 이창호 9단이 바둑리그 나오면 딸도 같이 데려오려나 신안천일염 팀은 이세돌 - 신민준 조인데 정관장은 이창호 - 신진서 조라니

조훈현과 분가한 이후에도 한동안 종로구 - 성북구 쪽에 살다가 2010년대 들어서 딸들 교육문제로 강남구 일원동으로 이사가서 살고 있다. 서울 지하철 3호선 일원역 바로 앞에 있는 아파트에 산다. 가끔씩 한국기원(상왕십리역)에 나타나서 후배들을 격려하고 방문 이후에 건대입구역이나 노량진역 근처의 오락실에 출몰한다.(...) 전성기인 시절에도 외국에 나가서도 오락실을 자주 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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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한국바둑리그 이창호 당선인九단 승리 세리머니. 돌부처답게 묵직하다

2016년 한국바둑리그에 나왔는데 리그를 씹어먹고 있다.(...) 8월 2일 현재 정관장팀 주장인 신진서 6단이 8전 전승을 기록하고 있는데 나이가 40세를 넘은 이창호 9단이 6승 2패를 달리고 있다.(...) 정관장팀을 뽑은 김영삼 9단이 보고 놀라고 있는 수준이다. 5지명으로 정관장팀에 턱걸이 입성한 박진솔 5단도 6승 2패로 리그를 씹어먹는 중.(...) 신진서(주장) - 이창호(2지명) - 박진솔(5지명) 3명이 20승을 합작했는데 정관장팀 총 개인승수가 25승이다. 이 세명이 리그를 나란히 씹어먹다보니 8라운드 중에서 정관장팀이 무려 7승 1패로 단독 선두 질주 중.

3.1 기풍

반집의 제왕, 바둑에서 종반 끝내기에 신지평을 연 기사.

이창호의 바둑의 가장 큰 특징을 말하자면 두터움, 침착함, 형세판단, 끝내기다. 강태공이라는 별명에 걸맞게 느려 보이나 두터운 행마를 주무기로 삼았다. 스승인 조훈현이 쾌속행마로 제비라는 별명을 얻은 것을 생각하면 극과 극은 서로 통하는 게 있다는 말이 사실인 듯하다. 다른 기사들이 아무리 유리해도 두텁고 침착하게 두어 정확한 끝내기로 마무리해 역전시키니 그 중압감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루이나이웨이가 "이창호 九단과 바둑을 두면 참 이상하다. 내가 원하는 대로 다 해 주는데도 바둑은 언제나 불리한 것 같다"는 말을 남길 정도.[33] 상대는 '초중반에 유리한 국면으로 만들지 않으면 후반에 밀릴 수밖에 없다'는 심리적 압박감에 무리수를 두고, 그러다가 후반에 이창호에게 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게다가 이창호가 늘 포커페이스를 유지하고 있어서 분명 형세는 자신이 앞서는데도 무표정한 이창호를 보며 자멸하는 경우가 많다.[34]

조훈현이 이창호의 전성기에 계속 당했던 패턴이 바로 이것으로, 초중반 조훈현 쾌속행마로 우세 -> 조훈현의 무리수 -> 이창호의 끝내기로 역전 식으로 계속 당했다. 아직도 끝내기와 형세판단에 있어서는 이창호가 최정상급임을 인정받고 있으며, 하물며 전성기 때는 말할 것도 없다. 한국기원 기사실에서 모여 관전할 때 끝내기 즈음이 되면, "창호 어디갔어? 창호한테 물어봐!"라는 말이 심심찮게 나왔다고 한다. 양재호에 따르면 이창호는 극초반부터 계가를 한다고 한다. 프로라면 모두 가능한 일이지만, 계가를 지루해하지 않고 종국까지 반복할 수 있는 사람은 이창호를 비롯해 몇 명 되지 않는다고 한다.

고수 치고는 실력 차이가 많이 나는 상대에게도 반집 승부가 많이 나는 기사 중 하나이다. 때문에 하수는 조금만 더 노력하면 승리할 수 있으리라는 부질없는 착각에 빠지곤 하는데 몇 번만 더 둬보면 그 반집 차이가 타 기사의 백집 차이보다 크다는 걸 깨닫게 된다. 반집 승부를 하는 이유는 반집으로 이기나 불계로 이기나 이기는 것은 똑같기 때문. 또한 절대 살릴 수 없는 대마를 잡지 않는 습관도 있는데, 그 이유는 대마를 잡으려다 보면 운과 실수로 판이 뒤집힐 수도 있지만 대마를 죽이지 않고 계가로 가면 반드시 이길 수 있어서라고 한다.

이는 스승 조훈현 九단도 언급한 적이 있는 부분인데, 이창호가 프로가 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부터 초반에 유리했던 경우에도 대마를 노리거나 큰 집 차이로 이기는 걸 노리지 않고 작은 집 차이로 이기는 승부를 많이 하자 혹시 어떤 연유로든 큰 집 차이 승부를 못 하는 게 아닌가 의심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창호와 그러한 대국들에 대해 복기를 하면서 넌지시 물어보았는데 이창호의 대답이 걸작이었다.

큰 집 승부를 하려면 대마를 잡아야 하는데 대마를 잡기 위해 준동하다간 상대에게 기회를 줄 수도 있어요. 하지만 대마를 살려주는 대신 다른 곳에서 차근차근 대가를 치르게 하면 작은 집 차이로 확실하게 이길 수 있습니다.

단순하게 생각해 보면 백 번 맞는 말이다. 그러나 이 같은 말은 반상에서 수십 년 정진한 노년 기사들이 새파란 신생 기재들에게 일러주는 충고에 알맞지, 중학생 정도의 어린아이가 스스로 깨우치고 실행할 수 있는 개념이 아니다. 어린 기사라면 당연히 싸움을 좋아하고 상대를 통쾌하게 누르는 대승을 원하기 마련이다. 이창호는 당시 승부의 본질을 꿰뚫는 확고한 눈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조九단이 신문 인터뷰에서도 한 적 있는 이야기이지만, 그가 바둑TV에서 해설을 하던 때에도 대국 중 잠시 쉬는 시간에 상대 진행자와 이창호에 대한 대화를 잠시 나누다가 직접 담담히 말한 적이 있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진 사람은 반 집에 땅을 치지만, 그런 상대를 보고 창호는 오히려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물러서서 그런건데, 억울해하실 것이 없는데?』 하면서 말이다.

ㅡ조훈현 (월간조선 02년 4월호)

그런데 2005년 이후 부진이 계속되면서[35] 기풍이 바뀌었다. 예전에는 먹잇감이었던 창하오에게 세계대회 결승에서 두 번 만나 두 번 다 준우승하기도 하고[36], 국내에서는 목소리가 이상한 후배나, 갑자기 나타나 대마를 때려잡는 후배 또는 이창호 잡는 기계가 등장하면서 닥치고 전투 이후 대마를 잡아먹는 바둑도 자주 보여주신다. 대단한 것은 기풍도 바뀌고, 예전처럼 정확한 형세판단을 보여주지 못하면서도 항상 정상권에 머물고 있다는 것이다. 누군가는, 이제 '이창호 스타일의 바둑은 계속 이겨서 재미없으니까 저렇게 둔다'고 말하기도 하고, 혹자는 부처가 아수라의 칼을 들었다고 표현하기도 했다.(…) 이런 기풍의 변화에 대해 본인의 자서전에서 기존의 기풍(초반에 안정적으로 두어서 불리하게 출발하더라도 중후반에 타개와 끝내기로 역전)을 유지하다가는 본인보다 끝내기가 더 정밀한 후배 기사들에게 밀릴 것 같아서 초반부터 전투를 통해 이득을 취하고 가는 방향으로 기풍을 바꾸었다고 한다.

2016년 이세돌 九단이 알파고와의 대국에서 3연패를 당하면서 그의 이름이 자주 언급되고 있다. 관전중 던진 한마디 당시 해설하던 그 어느 프로기사들 보다 정확한 것으로 결론이 났고, 2국에서 알파고의 수를 해설하던 기사들 조차도 "인간들 중에서 이런 수를 둘 만한 사람이 이창호밖에 없다!"라며 흥분하는 등 그가 남긴 족적이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 보여주고 있다. 전성기 시절의 이창호였다면 알파고를 발랐을지도 모른다는 아쉬움을 토로하는 사람들도 많다.

더 자세한 내용을 알고 싶으면 자서전인 이창호의 부득탐승('11년 8월 발간)을 읽어보길 바란다. 본인의 어린 시절부터 최근의 이야기까지 담아놓은 책이다.

2016년 현재에는 한국바둑리그에서는 대마를 때려잡는 바둑은 조금 지양하고 예전처럼 끝내기 공부를 하는 듯한 기풍이 드러나고 있다. 대신에 마샤오춘이나 구리처럼 초반에 포석을 잘 깔고 그 포석의 우세를 지키려는 바둑을 둔다. 문제는 창하오 九단한테는 약해졌다는 것.

3.2 바투#s-3

바투에서는 돌부처답지 않은 황당한 행동들과 이어지는 표정들로 많은 사람들에게 웃음을 주었다. 특히, 헤드셋을 거꾸로 끼거나 황당한 초읽기는 백미! 이런 모습을 선보이는 것에 대해 많은 사람들은 30대가 넘었는데도 귀엽다는 의견이 많다.

4 여담

  • 이창호의 명언을 모아놓은 페이지를 볼 수 있다.# 마지막 문장은 넘어가자 사실 타인들에겐 천재기사라고 불리지만 이창호 본인은 노력을 중시했다는걸 엿볼 수 있다.
  • 우스갯소리로, 이세돌 vs 알파고가 진행되던 때 바둑 팬들 사이에서는 "전성기 시절의 이창호와 알파고가 대결하면 누가 이길까?"라는 VS놀이를 하기도 한다. 이창호가 이긴다더라
  • 2016년 이세돌과 인공지능 알파고와의 대결중, 압도적인 수읽기로 승리를 따내는 인공지능 알파고의 기풍이 전성기 시절 이창호 九단과 가장 흡사한 것 같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철저하게 계산적이고 무난하게 흘러가는 듯 하면서도 어느새 이기고 있는, 위에 서술된 원하는대로 다 해주는데 이기는 스타일이 비슷하다는 평가. 한 마디로, 전성기 적의 이창호는 인공지능 수준을 방불케 하는 바둑기사였다는 거다.
  • 2015년 tvN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의 등장인물 최택모티브가 되기도 했다. 과묵하고 순진한 최택의 성격, 보석상을 하시는 부친, 상술된 농심배 5연승을 연상케 하는 대국, 중국 대국시 현지요리에 적응하지 못해 배탈이 나서 식사를 거르자 매니저(동생 대신 여기선 여주인 덕선이)가 주변 일식집에서 음식을 구해오는 등 여러 부분이 차용되었다. 물론 쌍문동과 연애 부분은 죄다 창작이다. 이창호 九단은 이 드라마를 보고 실제 자신은 어린 시절 바둑에만 전념했기 때문에 또래 친구가 거의 없었는데, 최택 六단은 동네단짝친구들이 있어 부러웠다고 소감을 전했다.

사실 이런 사진도 있을 만큼 소년기사 시절부터 격겜 팬이었다. 그가 18살 때 쓴 자서전(…)을 보면 스트레스를 받을 때 오락실에 가서 또래 기사들과 스트리트 파이터 2를 했다고. "제가 또래 고등학생들과 비슷한 건 오락실 가서 '스트리트 파이터'를 재미있게 한다는 것 정도"라는 인터뷰도 했고, 또 이후에는 철권 시리즈 역시 재미있게 했다고 한다. 연수로 따지면 격겜만 20년차. 다른 취미로는 탁구와 테니스, 보드게임을 즐겨 하는데, 동료들이나 지인들과 보드게임을 할 때도 생각을 엄청나게 많이 하는 편이라고 한다. 가장 자주 하는 보드게임은 부루마불. 생각이 필요한가 이때 배웠나보다 격겜 등장 이전에도 게임을 무척 즐겨한다는 소문이 났는지 우리나라 최초의 게임잡지인 게임월드에 이례적으로 장문의 인터뷰가 실리기도 했다.

  • 2016년 현재에는 강남구 일원동에 거주중인데, 강남에는 오락실이 제대로 된 곳이 없어서 왕십리역 근처의 한국기원에 출퇴근을 할 때 오락실을 간다. 건대입구역 근처의 오락실에서 출몰했다는 정보가 있다. 이창호 九단이 건대쪽 오락실에 나타나서 깜짝 놀란다는 후문도 있고, 연세가 40이 넘었는데도 여전히 철권 시리즈에서 꽤나 실력이 좋다는 경험담.
  • 한 분야의 천재라고 모든 방면에서 뛰어나진 않다는 사례의 표본이다. 조 국수의 부인 정미화씨의 증언에 따르면, 내제자로 들인 때, 머리조차 혼자 감지 못해 감겨줬어야 했다고 한다. 좋은 집에서 태어나서 애지중지 자랐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기본적인 성장이 늦은 편이었다. 물론 내제자로 처음 들어간 것이 10살 때니 그나이에 혼자 머리를 감지 못하는 아이도 있긴 하지만... 한편 1996년, 한국바둑의 국보에게 병역 혜택을 주느냐 마느냐로 온 나라가 떠들썩하던 시절이 있었다. 국회의원 105명이 연명으로 진정서를 내는 사건까지 발생하고 나서 사상 초유의 여야합일, 이창호는 사단 훈련소에 입소한다. 훈련소에서 기본 병영훈련을 받고 공익근무요원으로 복무한다는 조건이었고, 소속 부대는 한국기원, 부대장은 한국기원 이사장.(...)#[37] 여튼 훈련소에서 훈련하는데 집합을 할 때면 항상 이창호가 없었고 교관이 내무반에 가서 보면 군화끈을 못 매서 쩔쩔매고 있었다고 한다. 원래라면 바로 기합이었겠으나 천하의 이창호를 차마 기합줄 수 없어서 고민하던 교관이 결국 찍찍이 군화를 만들어 신겼다고.다른 훈련생들 지못미 조훈현의 집에서 지낼 때도 운동화 끈을 못매서 정미화씨가 찍찍이를 신기거나 신발끈을 대신 매줬는데 그게 군대 무렵까지도 이어졌던 듯. 바둑관계자들이 우스개로 하는 소리 중 스승인 조훈현은 무슨 일을 하든 성공했을 것 같은데 이창호는 모르겠다는 말도 있다. 물론 과묵하고 숫기가 없는 스타일이라 그렇지 사회생활 멀쩡히 잘한다. 오해하지 말자.
  • 스승인 조훈현과의 전적은 이창호가 훨씬 앞서지만 이창호와 조훈현의 대국은 언제나 최고의 관심사가 된다.[38]
  • 이영도의 장편소설 피를 마시는 새의 등장 인물 중 하나인 엘시 에더리의 바둑 행마 묘사는 이창호의 행마를 참고한 듯 하다. 하지만 엘시가 주장하는 전쟁의 진선미에 따르면 그의 바둑풍은 이창호가 아닌 쾌속행마 조훈현이나 무쌍 이세돌이 모티브에 더 맞을 것 같다. 물론 바둑을 두지 않는 사람이 현실적으로 그런 화풍까지 자세히 반영한다는 것은 힘드니 이상한 것은 아니다. 한편, 엘시 에더리 이름 자체가 이세돌 이름의 아나그램이라는 설도 있다.
  • 2010년 광저우 아시안 게임을 앞두고, 광저우 조직위에서 발행한 소식지에 한국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선수로 박태환, 장미란, 이창호를 꼽았다. 바둑팬이 아니라면 잘 이해가 되지 않을수도 있지만, 그만큼 바둑과 이창호의 중국에서의 큰 위상을 보여주는 바둑기사라고 할 수 있다.

4.1 말말말

"넷마블 팀의 주장이기도 하지만 약 15년간 한국바둑의 주장이기도 하죠."

ㅡ 2010 한국바둑리그에서, 당시 해설인 박정상 九단의 소개 멘트.

"이창호가 한국에서 태어난 걸 우리보고 어쩌란거냐?"

ㅡ 이창호와 한국바둑 전성기 시절, 중국 기사들의 연전연패에 항의하는 중국팬들에게 중국 기원이 한 답변.

"한국 기사를 모두 꺾어도 이창호가 남아있다면, 그때부터 시작이다."

ㅡ 2005년 농심신라면배에서 일본 기사 2명, 중국기사 3명을 모두 꺾고 충격적인 우승을 차지한 뒤, 중국의 창하오 九단이 내린 평가.#

"이국수에게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ㅡ 휴직하기 전 명실상부 국내, 세계 1인자였던 이세돌 九단이 1인자임을 인정하라는 기자들의 질문에 두 차례 이상 대답했다. 아, 마샤오춘은 빼주세요

"이창호는 눈에 보이지 않는 천재다."

ㅡ 조훈현 九단.[39]

"이창호에 비하면, 이세돌과 나는 아직 멀었다."

ㅡ2009년 제 13회 LG배에서 우승한 구리 九단에게, 세계 1인자가 되기 위하여 갖추어야 할 조건을 질문하자, 대답을 하는 인터뷰에서.

"이창호만이 보여줄 듯한 수를 두고 있다."

ㅡ2016년 이세돌알파고의 경기를 중계하던 김성룡九단이 알파고에 감탄하며...결국 바둑의 완성형은 전성기 이창호인가 ~~

4.2 어록

"노력을 이기는 재능은 없고 노력을 외면하는 결과도 없다"

- 드라마 미생과 원작 만화 미생에도 나온 이창호 九단의 가장 유명한 말. 이 말은 1990년대 최전성기때 대회 우승 뒤에 한 말이다.

"재능을 가진 상대를 넘어서는 방법은 노력뿐이다. 더 많이 집중하고 더 많이 생각하는 수밖에 없다. 바둑에는 '복기'라는 훌륭한 교사가 있다. 승리한 대국의 복기는 '이기는 습관'을 만들어주고, 패배한 대국의 복기는 '이기는 준비'를 만들어준다.
Q 요즘도 바둑 공부를 하는가.

집에서 가끔 바둑 공부를 하려고 하는데 쉽지 않다. 바둑 공부 좀 하려고 하면 첫째 딸 소정이가 와서 바둑알을 다 흩트려 놓는다. 그러면 딸과 바둑알 놀이를 하거나 다른 놀이를 해야 한다.”
Q 대국 시 감정 기복이 없기로 유명하다.
“어렸을 때는 확실히 그런 편이었다. 30대 중반이 지나고는 오히려 감정 변화가 많아졌다. 다른 사람들은 나이가 들면서 무던해지는데 나는 반대인 것 같다. 비정상적인 거다(웃음). 요즘은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서 눈물을 흘릴 때도 있다.”
Q 과거와 현재 중 어느 쪽이 더 마음에 드는가.
“지금이 더 만족스럽다. 마음이 편하다.”
Q 형세 판단할 때 실제보다 불리하게 보는 ‘비관파’다. 삶에서도 그런 편인지.
“그런 것 같다. 부정적인 시각이 건강에도 나쁘다고 하더라. 그래서 시각을 긍정적으로 바꾸려고 노력 중이다. 하지만 어렸을 때부터 바둑을 두면서 가진 사고방식이 몸에 배어서 쉽게 바꾸기 어렵다.”
Q 만약 바둑 기사가 아닌 다른 삶을 산다면 무엇을 하고 싶은가.
“평범한 삶을 살아보고 싶다. 초등학교 5학년에 입단했기 때문에 제대로 학창시절을 보내본 적이 없다. 정상적인 교우 관계나 추억이 없다는 게 아쉽다.”
Q 한국 바둑계가 많이 달라졌다고 느낄 때는.
“과거보다 방송 비중이 늘었다. 특히 방송을 위해 의무적으로 기사들이 인터뷰를 해야 하는 분위기가 있다. 물론 본인이 하고 싶으면 상관없지만 나 같은 경우는 강제로 하는 느낌이다. 나는 말을 잘 못하고 방송에 익숙하지 않아 부담이 크다.”
Q 앞으로 이루고 싶은 목표는.
“화목한 가정을 꾸리는 거다. 좋은 가정을 꾸려 나가는 게 행복하다.”
위 인터뷰 기사.

"스승님은 저에게 있어서 등대 였습니다. 조훈현이라는 거인의 어깨 위에서서 멀리 내다볼 수 있게된 작은 난쟁이에 불과합니다. 선생님이 빌려준 넓은 어깨가 아니었다면 그저그런 3류기사로 남았겠지요"

- 라이프맵 인터뷰 中 스승 조훈현에 대해

"따분해도 정수(正手)가 최선이다."

이창호 九단 인터뷰 中

"나는 늘 이기는 프로가 아니다. 언제나 진행형이다. 나에게도 천적이 존재하고 괴로운 상대존재하며[40] 그것은 내가 승부의 업을 마칠때까지 진행형의 형태를 바꾸지 않을것이다"

이창호 九단의 추천사 中

기자 인터뷰 中 "여러 여성팬의 사랑이 좋으냐 한사람의 사랑이 좋냐"

"한사람의 여인에게만 사랑받고싶다"
(이때 이창호 九단이 지금의 아내와 연애중일때)

"중요한 승부에서 패하고도 마음이 아무렇지 않다면 그것은 이미 프로가 아니다. 그것은 인품과 무관하며 승부사에게 패배의 아픔은 항상 생생한 날것이어야 한다. 늘 승자가 될수는 없지만 패자의 역할에 길들여져서는 안 된다."
"스스로 교만할 줄 모르는 것이 자만의 포석이고, 아예 겸손한 척하는 것이 자만의 중반이며, 심지어 자신이 겸손하다고 착각하는 것이 자만의 끝내기다."
"위험한 곳을 과감하게 뛰어드는 것만이 용기가 아니다. 뛰어들고 싶은 유혹이 강렬한 곳을 외면하고 묵묵히 나의 길을 가는 것도 용기다."
"영원한 성공은 없다. 상황이 극에 달하면 결국 변화하니, 그 변화에 맞서지 말아야 한다. 나아가고 물러날 때를 확실히 알아야 하고, 스스로 제어할 수 없는 형세를 거스르지 말아야 한다. 하지만 지금은 단지 멈추거나 물러날 때가 아니다. 나는 더 나아가고, 더 깊어져야 한다."
"겸손자존심은 대립하는 개념이 아니다. 꺾이지 않는 단단한 자존심을 가진 사람만이 겸손할 수 있다."
"저의 바둑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2011년 라이프 맵 인터뷰 中

“내가 이세돌 九단과 치열한 승부를 겨룬 끝에 패하면서 정상에서 내려온 것이 아니다. 그냥 시간이 흐르면서 이 九단이 1인자가 됐고, 나는 밀려날 때가 돼서 밀려난 것 뿐. 이 九단이 정상에서 오랫동안 활약해 주기 바란다.”

2012년 경향신문 과의 인터뷰. 기사

"느림에도 가치 있는 느림이 있다.가치 있는 느림은 스피드를 따라 잡을 수 있다"
"고정관념과 욕심을 버리면 사람은 성장한다"
"감정을 느낀다. 그러나 분노든 적개심이든 이런것들은 최선의 수를 찾는데 아무 보탬이 안된다. 투지를 높이기 보다는 오히려 시야가 가려지기 쉽다."
"욕심 없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나도 승부욕이 있다. 다만 욕심을 내면 전혀 모르는 길로 가서 큰손해를 볼수 있고, 욕심을 내서 강하게 부딪치면 반작용도 크기때문에 자제할 뿐이다."
"바둑은 줄기차게 이기지 않으면 우승할 수 없고 줄기차게 이기려면, 괴롭지만 정수가 최선이다. 위험을 느끼면서도 혹시나 하고 샛길로 갈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응답하라 1988' 드라마는 처음엔 안 봤는데 관련 질문을 많이 받다 보니 보게 됐습니다. 최택 六단과는 어늘한 점이 많이 닮은 것 같아요. 저는 최택만큼 연애를 잘 못하고요, 최택 六단은 아닌 듯하면서 (연애) 고수인 것 같습니다." 기사

이세돌과 달리 이창호는 인터뷰에서 항상 겸손한 태도를 보인다. 이창호 九단의 팬이 거의 신적으로 많았던 이유는 이창호 九단의 실력 뿐 아니라 항상 자신을 낮추는 인품에서도 나왔다.
(이거 편집하신분 출처 불분명한 어록 몇줄씩 보지말고 이세돌9단 실제 인터뷰도 직접 찾아보세요. 이세돌 9단 역시 자신감 있으면서도 겸손하게 인터뷰 잘합니다.)

4.3 약력

  • 조훈현 九단 문하.[41]
  • 세계 최연소 타이틀 획득(13세, 제 8기 바둑왕전)
  • 최연소 세계챔피언(17세, 제 3기 동양증권배).
  • 연간최다대국(1989년, 111국), 최다연승(41연승), 연간최고승률(78승 12패, 86.7%)[42], 연간최다승(90승), 국내 16개 기전 사이클링히트 달성(1994년, 제18기 기왕전 우승), 최다관왕 기록(13관왕).
  • 문화체육부에서 은관문화훈장(2등급) 서훈(1996년).
  • 5년연속 최우수기사(1995년~99년).
  • 그랜드슬램 달성(2003년, 제4회 춘란배 우승)
  • 2008년 2월 5일 현재 통산 135회 우승(비공식 기전인 타이다배와 세계최강결정전 포함)
  • 역대 최연소 1500승 달성(35세, 제 28기 KBS바둑왕전)

1986년 : 입단(11세 1개월, 조훈현 九단에 이어 최연소 입단기록 2위)
1988년 : 제8기 KBS바둑왕전 우승(첫 타이틀 획득, 세계최연소)
1990년 : 국수, 최고위, 신왕전 우승. TV바둑아시아선수권 준우승. 41연승. 78승 12패로 승률 86.7%
1991년 : 명인,최고위,대왕, 왕위, 박카스, 제왕 우승
1992년 : 동양증권배 우승(최연소 세계챔피언). 명인, 최고위, 대왕, 비씨카드,박카스, 제왕, KBS우승.
1993년 : 국수, 명인, 대왕, 기왕, 패왕, 국기, BC카드, 기성, 배달왕, 박카스, 제왕, SBS 우승. 90승으로 통산최다승 기록보유.
1994년 : 국수, 명인, 최고위, 기왕, 패왕, 국기, BC카드, 기성, 배달왕, SBS, KBS 우승. 국내 16개기전 사이클링히트 달성. 13관왕으로 통산 최다관왕.

1995년 : 국수, 명인, 최고위, 기왕, 패왕, 국기, BC카드, 기성, 배달왕, SBS, KBS 우승. TV바둑아시아선수권 우승.
1996년 : 九단 특별승단(세계대회 우승자 자격으로). 국수, 명인, 최고위, 대왕, 왕위, 국기, 기성, 천원 우승. 동양증권배, 후지쯔배, 세계바둑최강 결정전 우승.
1997년 : 국수, 최고위, 대왕, 왕위, BC카드, 배달왕, 기성, 천원, 테크론 우승

1998년 : 명인, 최고위, 대왕, 왕위, 기성, 천원, 테크론 우승
1999년 : 기성, KBS, 최고위, 명인, 왕위, 천원 우승
2000년 : 기성, 왕위, 명인, 우승
2001년 : 통산 1백회 우승. 응씨배 우승, LG배 우승. 기성, 패왕, 명인 우승
2002년 : 통산 1천승 달성. 농심신라면배 우승. TV바둑아시아컵 우승. 기성 방어. 패왕 우승, 왕위 우승. 도요타덴소배 결승진출, 명인 우승. KBS바둑왕전 우승. 제4회 농심辛라면배 한국대표(한국우승)

2003년

  • 제1회 도요타덴소배 우승, 제46기 국수전 우승. 제4회 춘란배 우승. 제2회 KT배 4강. 제7회 LG배 준우승(대 이세돌). 제14기 기성전 우승(11연패). 제2회 CSK배 바둑아시아대항전 한국대표.
  • 제22기 KBS바둑왕전 본선. 제8기 LG정유배 우승. 제37기 패왕전 준우승. 제16회 후지쯔배 3위. 제37기 왕위전 우승(8연패). 제8회 삼성화재배 8강. 제5회 * 농심신라면배 한국대표. TV바둑아시아 본선. 제5회 농심신라면배 한국대표. 제34기 SK엔크린배 명인전 우승.

2004년

  • 제5회 농심신라면배 한국우승(5연패).
  • 제47기 국수전 준우승(대 최철한, 2승3패).
  • 제8회 LG배 우승(대 목진석, LG배 통산4회 우승,세계대회 통산19회 우승 달성).
  • 제15기 기성전 준우승(대 최철한).
  • 2004한국바둑리그 본선(피더하우스 주장).
  • 제38기 왕위전 우승(대 이세돌 3-2, 9연패 달성).
  • 제9기 LG정유배 우승(대 박영훈 3-0, LG정유배 통산 5회 우승).
  • 제23기 KBS바둑왕전 우승(대 조한승 2-0, KBS바둑왕전 통산 7회 우승).

2005년

  • 제48기 국수전 준우승(대 최철한).
  • 제6회 농심신라면배 우승 리드(5연승, 한국 6연패).
  • 제5회 춘란배 세계바둑선수권대회 우승(2연패 달성).
  • 제2기 전자랜드배 왕중왕전 우승.
  • 제39기 왕위전 우승(대 옥득진, 왕위10연패 달성).
  • 제1기 한국물가정보배 준우승(대 박영훈 九단 0:2)
  • 제10기 GS칼텍스배 프로기전 준우승(대 최철한 九단 2:3)
  • 제10회 삼성화재배 준우승(대 뤄시허 九단 1:2)

2006년

  • 01.22 제1기 원익배 우승(대 박영훈).
  • 02.24 제7회 농심신라면배 한국대표(준우승, 대 요다 九단).
  • 03.02 제49기 국수전 우승(대 최철한, 탈환성공).
  • 06.27 제3기 전자랜드배 왕중왕전 우승(2연패, 대 박정상).
  • 07.19 제40기 왕위전 우승(11연패,대 이영구).
  • 08.11 제18회 TV바둑아시아 준우승(대 왕시 五단).

2007년

  • 01.24 제11회 삼성화재배 준우승(대 창하오 九단 1:2)
  • 02.09 농심신라면배 한국대표 주장 2연승(한국팀 우승)
  • 03.16 제50기 국수전 준우승(대 윤준상 四단 1:3)
  • 04.25 KB국민은행 2007한국바둑리그 주장(광주 kixx)
  • 07.09 제20회 후지쯔배 준우승(대 박영훈 九단 0:1)
  • 07.16 제4기 전자랜드배 왕중왕전 준우승(대 강동윤 五단 1:2)
  • 07.18 제41기 KT배 왕위전 우승(12연패, 대 윤준상 3:2)
  • 08.17 제3회 중환배 우승(대 박정상 九단 1:0)-세계대회 통산21번째 우승!
  • 12.03 제26회 KBS바둑왕전 우승(대 조한승 九단 2:1)

2008년

  • 02.02 제3기 십단전 우승(대 목진석 九단 2:0)-135번째 우승
  • 02.20 제9회 농심배 한국대표 출전
  • 00.00 KB국민은행 2008한국바둑리그 출전(광주 Kixx)
  • 07.08 제21회 후지쯔배 준우승(대 구리 九단 0:1)
  • 08.05 제5기 전자랜드배 왕중왕전 우승(대 목진석 2:0)
  • 10.21 제10회 농심신라면배 한국대표 출전
  • 12.11 제7회 춘란배 결승진출

2009년

  • 01.08 2008바둑대상 우수기사상, 남자인기기사상, 연승상 수상
  • 03.16 제27기 KBS바둑왕전 우승(대 이세돌 2:1)- 개인 통산 137번째 우승
  • 04.23 제6회 응씨배 준우승(대 최철한 1:3)

2010년

  • 01.18 역대 최연소 1500승 달성
  • 03.23 국수전 우승(대 홍기표 3:1)
  • 11.26 광저우 아시안게임 남자 단체전 금메달

2011년

  • 02.14 국수전 준우승 (대 최철한 1:3) 22년 만에 무관
  • 12.22 olleh배 준우승 (대 이세돌 1:3)

2012년

  • 02.15 LG배 준우승 (대 장웨이제 0:2)
  • 원미마오배 우승 (대 창하오 2:1)

2013년

  • 02.04 제31기 KBS바둑왕전 준우승(대 박정환 1-2)
  • 04.23 제18회 LG배 본선32강
  • 04.25 제9기 한국물가정보배 본선16강
  • 11.01 2013 olleh배 6라운드(4강)

2014년

  • KB리그 신안천일염 2지명
  • 2014 삼성화재배 본선32강(후원사 사전와일드카드)
  • 09.10 제10기 한국물가정보배 결선4강

2015년

  • 06.08 제20회 LG배 본선32강
  • 09.09 2015 삼성화재배 본선16강

2016년

  • 전자랜드배 한국바둑의 전설 대회 준우승
맥심커피배 입신최강전 16강

추가바람.

5 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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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호가 아직 6단이었던 1993년 쓴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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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계산의 신이란 의미이다. 바둑계에서 신이란 별명이 붙은건 이창호가 최초다. 전성기때 초반에 1집 반이라고 말하면 무슨 수를 쓰든 경기는 1집 반차이로 게임이 끝났다고 한다. 옛날 1집차이는 자신의 능력을 탓했지만 반집차이는 하늘을 탓했다라는 말이 있었다. 이창호는 이를 하늘에서 인간의 영역으로 끌고 왔다. 이 초인적인 계산능력을 토대로 "끝내기"를 바둑을 단순히 마무리하는 수준이 아닌, 전황 전체를 뒤집어 엎을 수 있는 치명적 전략전술의 지위로 끌어올렸다.
  2. 돌부처라고 불리기도 한다.
  3. 단급 표기는 아마추어의 경우 아라비아 숫자, 프로 기사의 경우 한자로 표기함을 원칙으로 한다.
  4. 바둑의 경우엔 전성기에 해당하는 나이는 10대 중반에서 20대 중반까지로 본다. 이것도 길게본것이고, 보통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까지를 최고 전성기로 보는게 일반적이다. 특히 요즘 바둑은 스포츠화되고 정점급 기사들의 기보들도 구하기 쉬워진 바람에 젊은층이 빠르게 성장할 환경이 있고 전성기에 해당하는 나이에도 충분히 수준 높은 기보를 바탕으로 실력을 쌓고 나오기 때문에 20대 후반만 되더라도 기력은 확연히 쇠퇴한다.
  5. 일본 바둑계에서는 저 시기를 아예 오청원의 시대라고 부른다.
  6. 그 지역에서 매우 유명한 유지였다. 사실 이창호도 금수저 이창호가 유명 프로 바둑기사에게 어릴 적부터 가르침을 받았던 건 천재적 재능 뿐만 아니라 부유하고 인맥도 넓던 할아버지의 영향이 크다. 그리고 본인 생애가 다할때까지 바둑에 재능을 보이던 손자 이창호에게 많은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7. 전주 출신 바둑기사로 이창호에게 1천판에 달하는 복기를 가르쳐줬다.
  8. 권경언 六단으로부터 소개받아 이창호를 1년간 사사했다.
  9. 집에서 숙식을 같이하는 제자.
  10. 1위는 9세에 입단한 조훈현 사제끼리 다해먹네
  11. 위 각주에 있다시피 조훈현 국수 본인이 최연소 입단 기록(9세)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남들과 전혀 다른 기준을 갖고 있었을 거라는 게 세간의 평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조훈현이 서로 사이가 영 좋지 않았음에도 서봉수 같은 경우 그를 타고난 천재로 칭하는 걸 주저하지 않음을 보면(서봉수 九단은 정규 바둑 교육을 받은 게 아니라는 점에서 타고난 것이 확실하기는 하지만) 조훈현의 눈높이가 높은 것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그가 생각하는 천재의 기준 자체가 창의적이고 번뜩이는 스타일에 좀 더 가까웠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실제로 이창호는 어린 시절엔 방금 둔 바둑도 잘 복기하지 못했다고 하는데 묵묵하고 생각이 깊지만 쉽게 그 지적 능력을 알아차릴 수 있는 영리한 스타일은 아니었다고 볼 수 있다.
  12. 번뜩이는 수와 같이 묘수를 잘 두는 사람을 천재로 보는 사람들은 이창호를 인내의 천재, 노력의 천재라고 생각하지만 천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하기도 한다. 사실 조훈현도 말했다시피 이창호의 천재성은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처음 조훈현같은 사람도 몰라봤는데 일반인이 알기는 더욱 어렵다. 그래서 사실 이창호의 천재성을 느낄려면 이창호와 대국을 해봐야 안다란 말도 있다. 허나 바둑 전문가 10명중 7명이 이창호를 최고라고 생각하는 점, 15세도 채 안되는 어린 나이부터 거의 20년 가까이 세계정상에 군림한점을 보면 천재가 아니라고 말하는게 더 어렵다. 사고방식도 애늙은이 수준으로 노련했다.
  13. 다만 마샤오춘 九단은 오히려 자기랑 이세돌을 천재라고 주장했다. 이세돌에게 도리어 뒤통수를 맞긴 하지만. 항목 참조.이세돌 : 아니 당신은 아니고
  14. 강훈이 한 번 우승
  15. 조훈현 九단의 부인인 정미화 여사의 회고에 따르면 이창호가 밤 늦게까지 복기를 하고 있을 때 창호 방에서 바둑둘 두는 소리가 들리면 그때마다 가슴이 철렁하곤 했다고 한다. '남편을 꺾기 위한 것인가'라고 생각될 때가 많았다고…. 더불어 승리한 제자와 패배한 남편을 한 차에 태우고 오는 날에는 만감이 엇갈렸다고 한다.
  16. 사실상 남편의 내제자라는 건 부인 입장에서 자식이랑 비슷한 것이었다. 실제로 정미화 여사는 부잣집에서 곱게 자라 입가 후 혼자 씻지도 못하던 이창호를 한동안 매일같이 씻기고 입히고 먹이며 아들처럼 키웠다고 알려져 있다. 그런 입장에서 몇년 만에 급격한 성장으로 자기 남편을 이기고 우승을 하기도 했으니 기분이 섭섭하며 착잡했을 수 있다. 그러나 이창호 역시 조훈현 부부를 부모로 생각했기에, 후일 바둑인들을 초청하지 않은 결혼식에 조훈현 부부만은 초청하였다.
  17. 원래 계획은 조훈현이 이창호를 五단 또는 성인이 될 때까지 데리고 있으려 했다. 이것이 일본에서 불문율로 정해진 내제자가 독립하는 시기이다. 하지만 둘 중 어느 것도 충족시키지 못한 상태임에도 이창호가 말도 안 되는 성장을 보이자 어쩔 수 없이 내보낸 것.
  18. 특히 고바야시 사토루 九단. 고바야시 사토루 九단은 이전부터 이창호와 붙어보고 싶다고 말한 바가 있었고, 1990년대에 사토루 九단이 주취폭력으로 일정기간 제명 처분을 받기 전까지 커리어 하이를 달리면서 기어이 이창호와의 대국을 몇번 가지게 된다.
  19. 이창호 기사가 전관왕을 달성하지는 못했다. 조훈현 국수의 전관왕은 1980년 9개 기전, 1982년 10개 기전, 1986년 11개 기전으로, 우승 타이틀 수에서는 더 앞섰으며, 이 기록은 2013년 현재까지 최대관왕 기록이다. 이창호의 전관왕 도전은 유창혁이 왕위전과 테크론배로 끝끝내 물을 먹여버리고 만다.
  20. 전체전적 31전 26승 5패를 기록하고 있다. 국제기전 결승전에서 4번 만나 4번 전승.
  21. 정확한 산정이 어떻게 되는 지 모르겠지만, 연간 단위는 아니고 통상인 듯 하다? 그 무렵 국내기전은 이창호가 최다관왕 기록을 세우고 있고, 국제기전은 1996~99 우승률이 20회 중 10회로 50%, 메이저는 16회중 9회로 56.3%라는 충격과 공포를 보면. 타 종목 선수 중에서 이런 식으로 우승률을 따져도 됐던 선수로는 타이거 우즈가 있다. 이들 정도 본좌면 우승률을 따질 만하다는 것.
  22. 최다승기록도 있기는 한데 이건 앞으로 따라잡을 가능성이 크니…전성기가 지난 지금 저 두가지 기록은 갱신하지 못할 듯하다.
  23. 당시 이창호가 13개의 타이틀을 손에 들고 있었고, 마지막 남은 타이틀이 왕위였다.
  24. 다만 조훈현이 전관왕을 이륙할 때보다 기전수가 늘어난 탓도 있다. 이창호의 13개 타이틀이 그 때 타이틀 수보다 많으며, 현재까지 최대관왕 기록.
  25. 유창혁은 91~94년까지 왕위, 95년부터 07년까지 이창호가 타이틀을 들어왔다. (07년을 마지막으로 왕위전은 중단되었음)
  26. 이창호는 이 대항전에서만 5연승, 농심배 통틀어 13연승을 기록했다.
  27. 팬들 사이에는 이창호가 이길 수 있는 경기를 상대가 눈치 못 채게 일부러 져 주는 것이라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혼자 다 해먹으면 한국 바둑계가 망하니까… 물론 세계적인 승부사가 그런 일을 벌일 리는 천부당만부당하다. 이창호도 흐르는 세월 앞에선 어쩔 수 없다는 걸 농담 삼은 이야기 정도로만 알아 두자.
  28. 이때 승리한 한태희는 그해 연구생 1등으로 입단하였다.
  29. 저 3패가 한국팀이 농심배를 가져가지 못한 2번의 기록과 일치한다. 19승이라는 기록도 혼자 남은 불리한 상황에서 연승하면서 쌓은 기록들, 특히 2006년 농심배의 폭풍 5연승은…참고로 이창호를 제외한 다른 한국 기사들의 농심신라면배 총전적은 45승 43패.
  30. 사실 이변이라 하기도 뭣한 게… 이창호 九단은 9회부터 계속 선발전 탈락 중이었으며 13회까진 와일드카드로 농심배를 출전하였다. 이세돌 九단 역시 10회, 12회를 제외하면 선발전을 통과한 적이 없었다.
  31. 사실 이것은 활동을 안해서 그렇다기 보다는 대회 예선 같은데 참가는 해도 과거와는 다르게 일찍 탈락해서 그런 것이 많다. 인터뷰 내용에서도 바둑 공부를 하기 어렵다고 하는 대목을 봐도 공부를 하려는데 어려워서 못한다는 얘기지 승부바둑을 포기하거나 은퇴 같은 것을 한 것은 아니라고 보는게 맞다.
  32. 엄밀히 말해서 복귀한 것이 아니다. 이창호는 바둑리그 출범 이래 매년 출전해왔고 2015년에도 마찬가지.
  33. 그리고 또 이런 점이 재미있게도 이창호 선수를 더욱 더 상대하기 어렵게 만드는 점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이창호 선수가 다 받아주니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조금 더 이득볼려고 과한 수를 두다 결국 이창호 선수의 반발을 당하고 무너지는 패턴
  34. 다만 바투에서는 표정변화가 조금씩 나타났는데 팬들은 대환호.(…)
  35. 부진이라지만 세계대회 우승 1회, 준우승 9회이다. 국내기전은 여전히 계속해서 우승하시는 중이다…
  36. 그런데 이 이후 2016년까지 이창호 九단은 창하오 九단한테 엄청나게 약해졌다. 창하오가 그동안 하도 얻어 맞다보니까 맷집이 굉장히 좋아진 듯하다. 2016년에도 이창호 九단은 창하오 九단한테 2:3으로 부진했다.
  37. 법적인 요건을 채우기 위한 몇 가지 조치도 취해졌다. 병무청에서 인정하는 국제 예술 대회 2위 이내에 든 예술가는 병역특례를 받을 수 있는데, 바둑을 예술로 보고 3개 대회(동양증권, 후지쯔배, 응씨배)를 병무청에서 인정하도록 한 것. 지금은 병무청에서 바둑을 예술이 아닌 체육으로 보고 있어서 아시안게임 우승하면 되나 광저우 때만 정식종목이었고 그 뒤로는 되지 않고 있다. 이창호는 1996년 후지쯔배에서 우승했기 때문이 이것이 직접적인 병역특례 자격 요건이 된다.
  38. 2010년에 KB바둑리그에서 사제 대결이 한 차례 있었는데 역시 이창호의 승이었다. 그러나 바둑 내용은 승부라기보다는 사제간 연구 대국을 두는 듯 신수가 난무했고, 해설을 하던 유창혁 九단은 "어허, 재미로 바둑 두나요"라는 말까지 했다. 대국 후 복기에서는 이미 30대 중반이 되었건만 이창호가 머리를 푹 숙인 채 조훈현의 "이러면 어떻게 돼?" "이게 더 좋지 않았나" 등의 물음에 모기만한 목소리로 "…예"로 일관하며 20년 전과 별로 달라지지 않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39. 상술했듯 조훈현은 처음엔 이창호가 천재 맞나란 의문을 가지기도 했다고. 이창호는 쉽게 말하자면 우주방어테란의 완성형이라고 한다. 초중반 유리하든 불리하든 열심히 막다 어느새 이기는 유형.
  40. 마샤오춘 九단은 이창호의 벽 앞에 완전히 무너져내려버렸고, 바둑 이외에 분야에 있어서는 이창호와 마샤오춘이 굉장히 친했다고 한다. 그래서 마샤오춘이 현업에서 은퇴를 선언했을 때 이창호 九단은 자기 때문에 친구를 잃었다며 엄청 괴로워했다는 후문.
  41. 조훈현 九단의 내제자 이전에는 작고한 故전영선 七단 문하였으며 전영선 七단이 이창호의 기재에 놀라 조훈현 九단에게 소개, 지도기 후 입문.
  42. 이는 역대 신기록인 41연승을 달성한 90년의 연간최고승률이라서 깊이 각인된 듯 하다. 아주 높은 기록이지만 사실 88년에 세운 연간최고승률이 75승 10패로 88.2%에 달한다. 88년도는 25연승으로 역대 5위 기록에 해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