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민정부

(김영삼 정부에서 넘어옴)

文民政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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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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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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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고건 권한대행 체제
이명박 정부박근혜정부
황교안 권한대행 체제
1993년 2월 25일 ~ 1998년 2월 24일

1 개요

문민정부 또는 김영삼 정부는 1992년 12월 18일 제14대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된 김영삼 대통령이 이끌었던 정부이다. 제6공화국 2기격인 정부로 1993년 2월 25일 출범해 1998년 2월 24일까지 5년간 존속하였다.

금융실명제 추진, 하나회 해체, 역사바로세우기와 같은 대한민국이 갖고있었던 문제점들을 개혁시킨 정부였으나 1997년 외환 위기로 경제 위기를 초래시켰고 성수대교 붕괴사고,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등으로 본 안전 관련의 문제로는 사고공화국이라는 표현이 나올 정도로 부정적인 평가를 받는 정부이다.

2 출범

1992년 12월 당시 민주자유당(약칭 민자당) 대통령 후보였던 김영삼은 당시 경쟁상대였던 민주당김대중, 통일국민당의 아산 정주영과 대선경쟁을 벌이게 된 끝에 압도적인 승리로 제14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리고 1993년 2월 서울특별시 여의도 국회의사당에서 제14대 대통령 취임식을 가지게 되었으며 과거 정부와는 달리 민주주의를 자임지향하고 청렴을 중시하며 민생을 생각하고 국가안보에도 힘쓰는 문민형식의 정부를 표방하며 임기를 시작하게 되었다.

3 임기중의 일들

임기 초기였던 1993년에는 금융실명제 제도를 신설하여 [1] 금융권에 새로운 방식을 불어넣었고 대통령 김영삼을 비롯해 모든 정부 각료들의 재산내역 전면공개와 정치자금 및 뇌물을 일체 받지 않겠다는 취지를 표방하였으며, 또한 공직자윤리법을 제정하여 공직자들의 윤리적인 행동 강화와 부정부패 척결 [2] 그리고 기강 바로잡기 등을 통해서 임기 초부터 공무개혁을 표방하였다.

또한 역사바로세우기 사업을 실시하여 이전 정부(특히 제5공화국, 제6공화국)에 가려져 있었던 정치사 및 과거사 문제해결을 적극적으로 강화하여 12.12 군사반란, 5.18 민주화운동에 대한 전면 재조사하고 하나회 숙청을 단행했으며, 그동안 광주직할시 주관으로 열렸던 5.18 기념일을 국가기념일로 격상시켜서 국가보훈처로 이관하고 유족들을 국가유공자로 승격시키는 등 과거사 청산에 힘썼으며 이를 계기로 전직 대통령 노태우, 전두환을 모두 구속시키는 사례를 그렸다. 대한민국 전직 대통령 구속사건 참조.

그리고 일제강점기에 대한 과거사 청산도 병행하여 1995년 8월 15일 경복궁에 남아있던 조선총독부 본청을 철거하였고 경복궁 복원정책을 추진하였으며, 제3, 4공화국 때 안가로 불렸고 대통령 박정희가 저격당한 비운의 장소였던 궁정동 안가를 철거하여 시민공원으로 개조하고, 청와대 앞길과 인왕산을 전면개방하여 국민들의 왕래를 추진하였다. 또한 국민학교국민학생으로 불렸던 어린 학생들의 호칭을 지금의 초등학교초등학생으로 개명하고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는데에도 힘썼다.

또한 정부기구를 일부 축소 및 통합하여 기존의 재무부와 경제기획원을 재정경제원으로 통합하고 건설부와 교통부를 건설교통부로 통합하였으며 체신부를 정보통신부로 개정하여 정보통신 분야에 대한 지위를 격상시키기도 하였다.

한편, 의약 분업을 실시했는데 논란이 많다.

국제대회상으로는 1993년 대전 엑스포를 성공적으로 개최하고 1997년에 열렸던 무주·전주 동계유니버시아드 대회도 성공적으로 개최하였으며, 1996년에는 2002 월드컵일본과 공동유치하는 데에도 성공하였고, 2002 부산 아시안 게임 유치에도 성공하는 등 국제대회에 대한 인지도도 남겼다.

외교적으로는 한미동맹을 강화하여 미국과의 군사적 동맹을 이어나갔고 일본과는 1996년 독도 영유권 문제와 일부 일본 정치인들의 과거사 및 위안부 관련 망언거리 등으로 악화일로가 계속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1995년에 국민 1인당 소득 1만 달러를 넘기고 이듬해인 1996년에 OECD 가입에도 성공하여 한국의 국제적 위상을 높이기도 하였다.

대북 정책의 경우 출범 직후에는 남북 대화에 비중을 뒀다. 김영삼 대통령의 취임사에도 남북정상회담에 대한 의지가 이전 정권에 비해 명확했으며 [3] 보수 세력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비전향 장기수였던 리인모를 전격적으로 북한에 송환시키는 등의 유화적 제스처를 취했다. 물론 북한의 버르장머리는 변할 기미가 안 보여서 몇 달 뒤 NPT 탈퇴에 이은 1994년 3월의 서울 불바다 망언[4] 등이 연달아 터지면서 사실상 대북 강경책으로 전환되었다. 그러다가 1년 뒤 1994년 6월 영리한 암살자 지미 카터의 방북으로 북핵 문제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고 김일성의 정상회담 제의를 수락하면서 분단 이후 최초의 남북정상회담이 성사되었지만, 김일성이 심근경색으로 급사하면서 무산되었다.
이후 김정일이 사실상 권력을 승계하면서 북한전쟁론 불사 등의 강경 일변도로 나오면서 결국 경색관계만이 남게 되었으며, 설상가상으로 1996년에는 강원도 강릉시에 북한 무장공비가 침투하는 바람에 관계가 악화되기도 하였다. 다만 고난의 행군으로 북한 전역이 개판이었던 것을 어느 정도 돕는다는 명분으로 쌀을 지원한다거나 경수로 건설을 지원하는 등의 제한적인 대북 협력은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문민정부는 역대 정권 중에서 사형 집행이 가장 활발했던 정부이기도 하다. 이름도 유명한 지존파온보현 등이 이 시기에 처형됐다. 굉장히 사형이 활발히 이루어져서 김수환 추기경이 사형 집행 자제를 촉구하기도 했지만 바로 다음날에 사형수가 이미 많다는 이유로 23명을 한꺼번에 사형에 처했는데 4공화국 때인 1976년 27명을 사형 집행한 이래로 가장 많은 수였다.

4 임기중의 실책

5년 동안의 임기 동안에도 실책이 꽤 많았던 편이었다. 1993년 구포 무궁화호 열차 전복 사고, 아시아나항공 733편 추락 사고, 서해 페리호 침몰사고, 1994년 성수대교 붕괴사고, 패륜아 박한상의 부모 살해사건, 지존파 집단살해사건,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등의 굵직한 사고로 "사고 공화국" 이라는 오명을 낳았으며, 임기 말인 1997년에는 안일하고 부실한 경제 집권과 정경유착 등의 문제로 [5] 국제통화기금 구제금융 신청이라는 최후의 선택을 하게 되면서 결국 경제면에서 대실패를 자초한 정부라는 오명과 단점을 안게 되었다.

특히 청렴을 강조했던 문민정부가 1996년 김영삼 대통령의 차남인 김현철의 비리와 한보그룹의 정경유착이 밝혀지면서 도덕성에 타격을 입었고, 집권 초반 불 같고 개혁적인 태도를 보였던 김영삼도 갈수록 무기력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또한 집권여당인 신한국당과 청와대간의 미묘한 갈등까지 겹쳐서 결국 대통령이 신한국당을 탈당하였으며 여야간의 대립과 갈등도 이어지는 등 전 정권의 구습을 벗어나지 못하였다는 단점도 안게 되었다.

파일:Attachment/ys clinton.jpg

한미 관계 역시 겉으로는 별 문제없어보였지만 1994년 영리한 암살자 지미 카터의 방북 직전 북한 핵 문제로 전운이 감돌 때 엇박자를 낸 것 등을 보면 빌 클린턴과의 상성은 그다지 안 좋았다는 평이 지배적. 오히려 다음 정부인 국민의 정부 시기에는 김대중빌 클린턴이 3년 정도 거의 밀월 관계였다는 것을 보면.

또한 대통령 선거당시 영남지역의 압도적인 지지에 등을 업고 출범한 정부라는 점 때문에 영남지역에서는 긍정적인 반응이 많은 반면 김대중을 지지하는 호남지역에서는 혐오적이고 부정적인 반응이 많았다.하기사 13대 대통령 선거 때 단일화 실패 사례도 있고(...) 다만 임기 초반에 하나회 척결이나 금융실명제 실시 등으로 지지율이 90%대를 넘나드던 시절에는 호남에서도 김영삼 대통령에 대해 상당히 우호적인 반응이 많았다. 하지만 김영삼 대통령의 지지율이 점차 떨어지면서 호남에서 혹평이 많아졌고 영호남간의 지역감정과 갈등도 이 때 들어서도 이어나가게 되었으며 대통령 김영삼 자신도 김대중과 갈등을 빚으며 사이가 멀어지고 나빠지는 아이러니까지 보였다. 그리고 호남 일부에서 호남 홀대론이 주장되어서 영남지역 인사만 관료직에 등용시키고 호남인사는 단 한 명도 없거나 극소수에 그치게 되었다는 악평까지 낳기도 하였다.

1980년 5월 광주의 유혈은 이 나라 민주주의의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분명히 말하거니와 오늘의 정부는 광주 민주화 운동의 연장선 위에 서 있는 민주 정부입니다. #

다만, 김영삼 본인이 대표적인 민주화 운동가였던지라 호남 지역의 울분이 서려있었던 5.18 민주화운동의 진상 규명에 대해서만큼은 적극적으로 나섰다. 취임 직후인 1993년 5월 13일 전격적으로 대통령 특별담화를 발표하여 진상 규명을 다짐했으며 특히 담화의 첫 부분은 당시까지만 해도 대놓고 발표하기 힘든 수준의 문장이었다.

5 주요 사건

사건/사고의 경우 굵은 글씨로 표기

5.1 1993년

5.2 1994년

5.3 1995년

5.4 1996년

5.5 1997년

5.6 1998년

6 기타

관련 정치인들 한정이겠지만 대통령 김영삼의 사저가 있는 서울특별시 동작구 상도동의 상도동계와 대통령 김대중 사저가 있는 서울특별시 마포구 동교동의 동교동계라는 말이 이 때부터 명확하게 출현하기도 하였던 시기였다. 당시 3김이라 불렸던 이들 거성들(김영삼, 김대중, 김종필)이 존재했던 시절을 따지자면 3김 중 유일하게 대통령이 되지 못하였던 김종필의 서울특별시 중구 청구동(당시의 신당4동) 사저의 청구동계라는 말도 존재하였던 편. 광역으로 따지자면 부산광역시,울산광역시,경상남도광주광역시,전라남도 그리고 대전광역시,세종특별자치시, 충청남도이라는 점이 있기도 하다.

그 외 김영삼의 부모가 멸치 양식업을 하다 보니 멸치가 정치 자금으로 대거 이용되기도 했었다.
  1. 하나회를 척결하고 금융실명제를 실시하는 등의 개혁적인 태도는 집권 초반 김영삼 대통령의 지지율은 높게 만들어주었다.
  2. 임기 초반 점심 식사를 국수로, 골프 안 치기 등의 조처를 내놓았고, 집권 첫날 청와대 집무실 내부 모퉁이에 있는 금고를 김영삼 대통령이 발견하고 어이없다 생각하여 기중기를 동원하여 금고를 떼어내라 지시했다고 한다.
  3. "김일성 주석에게 말합니다. 김 주석이 참으로 민족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면, 그리고 남북한 동포의 진정한 화해와 통일을 원한다면 이를 논의하기 위해 우리는 언제 어디서라도 만날 수 있습니다. 따뜻한 봄날 한라산 기슭에서도 좋고, 여름날 백두산 천지 못가에서도 좋습니다. 거기에서 가슴을 터놓고 민족의 장래를 의논해 봅시다." #
  4. 박영수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부국장이 개성에서의 회담 도중 "여기서 서울이 멀지 않습니다. 전쟁이 일어나면 불바다가 되고 말아요." 라는 발언을 했다. 사실 그 뒤에 " 이 회담에서 우리가 심사숙고를 해야 합니다." 라는 말을 한걸보면 저게 전쟁 위협이라기보다는 엄포 정도로 해석할 여지도 있으나, 남북 대치 상황하에서 서울이 불바다가 된다는 망언을 한 것은 명백히 전쟁 선포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박영수의 망언 직후 대한민국 국방부 장관이 "북한이 도발할 경우 통일의 기회로 삼겠다." 는 강경한 발언을 하는 등 상황이 심각해지자 그 뒤로 한동안 북한 대표단에서 빠졌다. 김일성조차 박영수의 망언이 도가 지나쳤다고 했을 정도니. #
  5. 한보그룹의 정경유착은 청렴을 강조했던 문민정부에 큰 타격을 주었다. 결국 1997년은 한보그룹의 부도를 시작으로 기아자동차 등등 많은 회사들이 부도났다.
  6. 부산직할시, 광주직할시, 대구직할시, 대전직할시, 인천직할시 등이 포함되었다. 당시 울산의 경우 아직 시였으므로 포함되지 않았다.
  7. 1996년 3월 1일부터 적용되었다.
  8. 1994년 개정 시 사라졌던 불고지죄 및 찬양고무죄 수사조항 부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