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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Attachment/expo93.jpg
행사 당시의 풍경. 1993년 8월 7일(개장 당일)의 모습이다.[1]
대전 엑스포 공식 기록 영화 《한빛은 세계로》
1993년 대전 세계 박람회
The Taejon International Exposition, Korea, 1993 [2]
목차
- 1 개요
- 2 설명
- 3 유치 과정
- 4 전시관 및 전시품
- 4.1 전시관
- 4.1.1 도약관
- 4.1.2 롯데환타지월드
- 4.1.3 미래항공관
- 4.1.4 번영관
- 4.1.5 북한물산관
- 4.1.6 소재관
- 4.1.7 시도관
- 4.1.8 우주탐험관
- 4.1.9 이매지네이션관
- 4.1.10 인간과 과학관
- 4.1.11 자기부상열차관
- 4.1.12 자동차관
- 4.1.13 자연생명관
- 4.1.14 자원활용관
- 4.1.15 재생조형관
- 4.1.16 전기에너지관
- 4.1.17 정보통신관
- 4.1.18 정부관
- 4.1.19 조폐문화관
- 4.1.20 주거환경관
- 4.1.21 지구관
- 4.1.22 테크노피아관
- 4.1.23 한국IBM관
- 4.1.24 한국후지쯔관
- 4.1.25 한빛탑
- 4.2 대전엑스포 참가국 및 국제전시관(1993년 철거 및 철수)
- 4.3 그 외
- 4.1 전시관
- 5 축제 이후
- 6 함께보기
1 개요
대전직할시(현 대전광역시)에서 열린 엑스포. 주제는 "새로운 도약으로의 길"이고, 부제는 "전통기술과 현대과학의 조화"와 "자원의 효율적 이용과 재활용"이다. 헌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실질적 주제는 부제쪽인 것 같다.[3] 1993년 8월 7일부터 11월 7일까지 정확히 93일 동안 개최되었다.
2 설명
공식 캐릭터는 꿈돌이. 공식주제가는 코리아나의 그날은으로 정해졌다. 그리고 '도우미'라는 단어를 처음 사용한 계기가 되는 행사이기도 했다.
개발도상국에서 최초로 열린 세계박람회기구 공인 엑스포이며, 1893 시카고 엑스포에 8칸 규모의 기와집[4]으로 참가한지 100년 만에 스스로 주최국이 된 엑스포이기도 하다. 또한 이 엑스포는 성숙된 민주주의 정권하에서 개최되어 대한민국의 새로운 이미지를 알렸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
세계 108개국과 33개 국제 기구, 대한민국의 200여 개 기업이 참가했다. 정부와 민간을 합쳐 1조 8천억 원을 들였고 1450만 명이 관람했다. 그야말로 대박. 말이 필요없다. 덧붙여 대기업들이 주요 전시장을 스폰서했다(LG전자의 테크노피아라든가, 삼성그룹의 우주탐험관 등). 이 엑스포 하나 한다고 조차장인 대전조차장역에 엑스포역이라는 임시승강장까지 놓았는데도 사람이 꽉 찼을 정도였다고 한다.
행사 당시에는 밤이 되면 밤마다 레이저 기둥을 쏘아 올리는건 기본이었다. 화려하다는 말은 이런 것을 두고 말하는 것이다. (게다가 당시 12시 넘어서는 심야영업규제가 전국적으로 실시되던 중이었으나 엑스포와 유성온천을 두고 있는 대전 유성구는 관광특구로 지정되어서 그런 규정에 해당되지 않았으므로, 12시 쯤 되면 서울 강남등지에서 원정을 내려와서 노는 사람들까지 더해져서 유성구 지역은 새벽까지 말그대로 불야성을 이루었다.)
엑스포 기간이 끝나고 나서, 엑스포과학공원이라는 이름으로 이름만 바뀐 채 운영해왔으며, 심지어 6차 과정 교과서에 표지 사진으로 들어가기까지 했다. 여기까지만 해도 참 기이한 일인데, 더 골 때리는건 개막하기도 전인 1993년 5월 발매된 사이버 포뮬러 비디오판에서 후지오카 서키트가 대전 서키트로 번역된 것. 그만큼 대전 엑스포 자체가 당시 얼마나 큰 관심사였는지 엿볼 수 있다.
또한 1990년대에 지리적으로 대전에 가까운 지역...을 넘어 전국의 국민학교[5]를 다닌 사람들은 많이들 가봤다.
특히 개최지인 대전은 정도가 너무 심했는데, 특히 엑스포 회장에서 바로 걸어서 10분, 5분 거리에 위치한 대덕초등학교(당시는 국민학교), 대덕중학교, 대덕고등학교는 소풍장소 50% 이상을 이 엑스포 과학공원과 근처 국립중앙과학관으로 배정하는 것으로 악명이 높았다. 엑스포가 열린 1993년부터 고등학교 졸업 때까지 약 7년 동안 엑스포 주변으로 소풍만 8번을 간 경우도 있을 정도[6]
당시만 하더라도 국내최초로 서울이 아닌 지역에서 개최된 세계구급의 행사로서, MBC 등에서 전야제를 생중계하고 그밖에도 지상파 뉴스에서 꾸준하게 소식을 다루었다.[7]
엑스포가 개최되던 때와 동시에 놀이동산인 꿈돌이랜드를 런칭했다. 그러나 본관과 마찬가지로 리뉴얼이 드물어서 낙후되어 보이는건 어쩔 수 없는 듯, 게다가 최근에 대전 동물원이 오-월드라는 이름으로 리뉴얼이 되어서 꿈돌이 랜드의 입지가 좀 위태해졌었는데...결국 폐장. [8]
대전시에서 폐부지를 개발사업관련으로 118억에 매입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보지 못하고 18억에 남은 부대시설을 매각했다(...)고 한다.
당시 꿈돌이안내에서 운영되던 키오스크는 Windows 3.1 기반이었으며, 터치스크린을 장착하고 있었다.[9] 이를 통해 개별 전시관 방문을 예약할 수 있었다.[10] 그리고 그 예약을 하기 위해 개장하자마자 사람들은 꿈돌이안내소로 우르르 달려갔다. 그리고 물론 관람객의 근성을 길러주기 위해 예약제도를 실시하지 않는 전시관들도 있었다.
대전엑스포기념화사업 홈페이지. 이곳에서 관련 자료들을 찾아볼 수 있다.
엑스포 재창조 사업으로 2014년 11월 부터 철거를 시작하여 지금은 철거를 완료하였다. 지금은 여러 건물을 짓고 있는데
그 부지에는 HD드라마 타운(2017년 예정)과 신세계컨소시엄의 사이언스콤플렉스, 기초과학 연구원 본원(2021년 마무리 예정)이 들어선다.
3 유치 과정
1988년 서울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개최한 노태우 정부는 바로 그 해 말 친구의 작품인 올림픽을 능가할 새로운 업적거리를 찾는 과정에서 박람회에 눈을 돌리게 되었다. 올림픽을 개최한 개발도상국이 대규모 박람회 개최를 통해 선진국에 진입하는 테크트리를 타기로 한 것이다. 이웃나라 일본에서 1964년 도쿄 올림픽을 개최한 후 1970년 오사카 만국박람회를 성공적으로 개최함으로서 명실상부한 선진국의 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을 따라벤치마크 한 것.
그래서 정부는 대한민국 역사상 최대 규모의 '국제무역산업박람회'를 1991년 개최하려고 하지만, 유례없는 대규모 행사를 위한 예산 배정에 대해 야당은 물론 정부 내에서도 반대가 심했다. 결국 개최를 반대하던 측에서 내놓은 조건이 국제박람회기구의 공인을 받으라는 것. 당연히, "공인을 받을 리가 없지. ㅋㅋㅋ"라는 생각에 그러한 조건을 내놓은 것이다. 그리고 과정에서 개최 년도가 2년 뒤인 1993년으로 늦추어졌다.
문제는, 당시 국제박람회기구는 엑스포 개최와 관련하여 1999년까지 엑스포 개최를 공인하지 않겠다는 모라토리엄을 선언해놓은 상태였다. 즉, 각 국가에서 경쟁적으로 엑스포를 개최하면서 그 비용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 회원국들을 압박[11]하는 한편으로 행사의 부실화를 초래할 위험성을 우려한 것이다.
그러나 조직위원회는, 당시 국제박람회기구가 저예산의 신개념(!) 엑스포[12]를 구상하고 있었다는 점에 착안하였다. 즉, 앞으로 시행될 저예산 엑스포인 인정박람회의 원형으로서의 대전 엑스포를 어필한 것이다.
물론, 모라토리엄의 원칙을 지켜야 한다는 반대 의견도 많았다. 특히 당시 국가 재정이 어렵던 미국[13]이 대표적인 국가였으며, 그러한 점을 각 국 대표들에게 적극적으로 설득하고 다녔다. 오명 대전엑스포조직위원장의 회고에 따르면 이전에 유럽에서 열린 몇 번의 엑스포들에서 미국관이 큰 호응을 얻지 못했기 때문에, 미국을 알아주지 않는 그런 행사따위!라는 측면도 있었다고 한다. 결국 미국은 1993년이 되어서야 대전엑스포 참가를 결정하게 되는데, 천조국의 기상으로 단기간에 쓸만한 전시관을 만들어냈다(!). #당시 SBS 뉴스보도(10초~26초 구간)를 보면 왜 저런 단신같은 뉴스가 헤드라인에 올라왔는지 의아해할 수도 있는데, 이런 속사정이 있었던 것. 반면, 당시 한국으로부터 금전적으로 많은 신세를 졌던 소련은 한국의 엑스포 개최를 반대하는 쿠바 대표를 조용히 구석(...)으로 데려가 찬성하기 싫으면 기권하도록 설득했다고 한다. 결국 기권한 국가를 빼고는 모두 찬성하여 국제박람회기구의 공인을 받는데에 성공했다.
당초 개최장소로는 안산시가 유력했으나, 지방균형발전 차원에서도 그렇고 이왕이면 전국에서 1시간 내[14]에 당도할 수 있는 곳에서 박람회를 개최하는 것이 좋겠다는 점, 그리고 마침 '대전에는 다른 곳으로 이전한 공군 기지의 활주로가 있으니 그 활주로에 천막을 치고 전시회를 열면 예산이 절약될 것 흠좀무이라는 생각으로 대전이 선택되었다고 한다. 물론, 결과적으로는 모두가 알다시피 활주로에 천막치고 박람회를 개최하지는 않았다. 덧붙여 그 공군 기지는 지금 대전의 중심인 둔산 지역으로 개발되었고, 엑스포 개최 기간에는 한참 공사중이었다. 참고로 그곳에 있었던 공군 기지는 다름 아닌 공군기본군사훈련단으로 1988년에 경남 진주로 이전.
저예산 신개념 엑스포의 원형이 될 것을 천명하여 국제박람회기구를 설득했지만, 결국 종합 엑스포의 규모를 가진 전문 박람회[15]가 되어버렸다. 즉 오늘날 인정 엑스포의 최대 전시규모인 25만㎡의 두 배에 해당하는 50만㎡의 전시공간 규모[16]로 완성된 것이다. 대전 엑스포가 전문 박람회가 된 것은 소규모 엑스포를 개최하고자 해서라기보다는 국제박람회기구의 공인을 받기 위한 측면이 컸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속아서(?) 한국 유치를 지지해준 인사들은 건설현장을 방문해서는 전시관의 반은 걷어버려야한다(...)거나 하면서 분노했다는 듯.
북한은 당연히 불참하였으며 엑스포 개최 1년 전에 벌어진 한-미 팀 스피릿 훈련과 북한의 핵개발 의혹, 1993년 NPT 탈퇴로 인해 남북관계가 급격히 나빠진 것이 크게 한몫했다고 한다.
4 전시관 및 전시품
4.1 전시관
편집은 가나다순. 2015년 10월 기준으로 한빛탑, 첨단과학관, 통일관, 번영관(무역전시관), 그리고 제주도로 해체 이전된 대한항공관을 제외한 모든 전시관 및 시설물은 철거되었다.
4.1.1 도약관
- 국내 5개 참가사가 공동으로 사용했던 전시관으로 당시 금강제화, 동아오츠카, 유한킴벌리, 데이콤(현재의 LG U+) 등이 있었다. 금강제화는 금강제화 전시관을, 유한킴벌리는 숲속의 극장을, 동아오츠카는 포카리수족관을, 데이콤은 데이콤관, 유호산업은 워터시스템관을 운영하였다. 현재는 철거되어 사라졌으며 폐막 이후 옛 정부관 건물로 자리를 이전하였다.[17]
4.1.2 롯데환타지월드
- 롯데에서 제공한 전시관으로 국제전시구역 안에 위치해 있었다. 물과 불을 이용한 공연인 '환상의 오딧세이'가 공연되었다.[18][19]
그런데 앞으로 엑스포 자리에 롯데 관련 시설이 들어선다. 어?특이하게도 롯데월드 캐릭터인 로티와 로리를 사용하였다.
4.1.3 미래항공관
- 대한항공[20]이 제공하였다. 격납고처럼 생겼다.(...) 입구에는 '창공-91'이라는 지금은 반쯤 흑역사가 되어버린 자체개발 항공기가 전시되어 있었다. 민항기 시뮬레이터를 체험해 볼 수 있었으나, 단 두 명만 탈 수 있는 구조상 선택받은(!) 어린이들만 조종사 시트에 앉아볼 수 있었고, 메인쇼로는 360도 원통형으로 생긴 슬라이드 영상물이 상영되었는데, SK그룹의 이매지네이션관 프리쇼(메인쇼 전에 보여주는 일종의 전채요리)와 비슷했지만 이매지네이션관의 경우 이음새가 없는 스크린이고 이곳의 스크린은 이음새가 있었다는 차이점이 있다.
- 상설관으로 건립되지 않았으나, 대한항공 측에서 건물을 버리긴 아까웠는지 폐막 후 제주도의 정석비행장에 해체 이전(!)하여 "정석항공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한편, 대한항공은 도우미들의 교육 및 운영도 맡았다.
4.1.4 번영관
-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 코트라)에서 제공한 전시관으로 국제전시구역 입구에 있었던 무역전시관이었다. 현재는 대전무역전시관으로 개조되어 현재까지 현위치에 그대로 있다.
4.1.5 북한물산관
4.1.6 소재관
4.1.7 시도관
- 국내 15개 광역자치단체[22]에서 제공하였다. 각 시도별로 부스를 만들고 홍보했다. 상설관이 아니므로 폐막 후 철거.
4.1.8 우주탐험관
삼성그룹(삼성물산)이 제공한 전시관이다. 공간을 도약('트위스터 점프'라 명명했었다.)해서 우주여행을 하는 체험형 영상물이 큰 인기를 끌었다. 전시관 주변에는 태양계의 행성들을 조각해둔 유성공원이 있었는데, 명왕성도 어엿히 태양계 행성의 일원으로 함께 하고 있었다.[23] 신기전의 복원에 삼성그룹의 지원이 있었는데, 우주탐험관 건립을 비롯한 삼성그룹의 엑스포 지원사업의 일환이었다. 물론 출구에는 삼성전자답게 HD TV라든가가 전시되어 있었다. 많은 관람객이 몰려들었지만[24] 전시관 내부를 효과적으로 배치하여 인원의 흐름을 조절하는 등 나름대로 운영을 잘했다는 평가이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테크노피아관과 함께 쌍벽을 이루던 곳이라 한창때던 8월달엔 4-5시간씩은 줄을 서서 봐야 했다. 당시 우주탐험관의 선장 로봇 '스타파인더'의 목소리는 성우 장정진이었다.
추가로 폐관이후에 천장 구조물이 떨어지고 녹이슬고 거의 흉가를 방불케 했다.
옆에있던 자동차관도 같이 폐관하자 자동차관 전시물로 쓰던차를 우주탐험관 건물안에 배치 했다(거의 창고 수준...)
대표적으로 세피아 EV,ㅅㅂ 자동차,세피아 컨버터블, 스포티지 랠리카 등이 알려져있다.
4.1.9 이매지네이션관
- 선경그룹(현재의 SK그룹)이 제공하였다. 대한항공관의 메인쇼와 비슷하지만 이음새 없는 스크린(...)의 슬라이드쇼가 프리쇼로 제공되었고, 메인쇼로는 제트추진연구소의 협조로 만들어진 옴니맥스 애니메이션 행성으로의 여행이 상영되었다. 선물코너에서는 SKC가 배급하던 패키지 게임을 판매했다.
폐관되기 전까지는 돔 영상관이라는 이름으로 운영되고 있었고 한국 최초이자 유일한 돔 아이맥스관이었다. 행성으로의 여행이 그대로 상영되고 있었다. 미국에 있는 무엇이랑 뭔가 모양이 비슷하다
4.1.10 인간과 과학관
- 대우그룹((주)대우)이 제공하였다. 인간의 마음속을 들여다보는(!) 입체 아이맥스 영화를 상영하였다. 현재는 대우그룹도 해체되고 한 마당이라...휴관.
4.1.11 자기부상열차관
- 현대그룹(현대정공[25])이 제공하였다. 현대정공(현재의 현대로템)이 개발한 자기부상열차를 타고 약 3㎞에 이르는 궤도를 이동하는 것이었다. 자기부상열차가 40인승이었던 관계로 많은 관람객을 수용할 수는 없었지만, 순수 국내 기술로 개발된 자기부상열차가 한국의 여름 날씨(장마 등 호우)에도 불구하고 무사고 운행하였다는 것은 의미가 있다. 한동안 운행을 중단하였으나 2011년 신형 열차로 교체되어 국립중앙과학관표를 소지한 예약자에 한해 탑승할 수 있었으며, 엑스포 과학공원이 철거됨과 동시에 엑스포역이 폐쇄되자 거리가 단축되어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에서만 탑승할 수 있다.. 국립중앙과학관 자기부상열차 이용 안내
4.1.12 자동차관
기아자동차가 제공하였다. 시뮬레이터 시설을 통해 서울 하늘을 시속 400㎞로 날아다니는 미래의 자동차(인지 비행기인지)를 체험할 수 있었다. 가장 특징적인 전시물은 로봇 카였는데 세피아가 로봇으로 변신하면서 지구는 후손으로부터 여러분들이 빌린 것입니다라고 설교명을 했다. 변신이라고 해서 오늘날의 트랜스포머같은 것을 생각하면 심히 곤란하다. 엑스포 이후에도 영구적으로 운영될 예정으로 건설되었으나 모기업인 기아자동차의 사정이 사정이라 지원도 없고 대전시의 구조조정 과정에서 철거크리. 자동차관과 별도로 서문에서 관람객들 대상으로 자동차 정비 서비스도 제공하였다.
그리고 2015년 9월 15일 현재 전시품들인 차량들은 엑스포공원 구석에 방치되어 있으며 현대기아차에 따르면 대전마케팅공사와 협의하여 기증한 것을 회수하여 사내에서 별도로 보존할 것이라 하였다. 2016년 현재 차량들은 전부 회수하고 없다.
4.1.13 자연생명관
- 한국담배인삼공사(현재의 KT&G)가 제공하였다.
담배관관람객들은 동물에 관한 담은 영상물을 상영하는 극장과 식물에 관한 담은 영상물을 상영하는 극장으로 각각 나누어서 입장하였는데, 각각의 영화가 끝나면 전동장치에 의해 객석이 반바퀴 돌아서 두 극장의 객석이 하나의 극장에서 만나게 된다. 그리고 그 하나의 극장에서는 생명에 관한 주제를 담은 영상물을 대형 스크린에서 관람하게 된다.
4.1.14 자원활용관
- 상공자원부(현재의 산업통상자원부)에서 제공하였다. 대전엑스포의 주무부서인 상공자원부에서 직접 납시어 건립한 전시관으로, 타 전시관의 모범이 되기 위한 규모(그래봤자 정보통신관의 1/2정도)와 전시물을 갖추었다. 가장 인상적인 전시물은 태양에너지가 지구에 도달하여 풍력 등 각종 에너지가 되는 것을 형상화한 로봇 조형물인 에너지 코스모스이다. 수력을 상징하는 부분에서는 물도 쏟아지고, 태양 부분은 빙빙 돌고, 태양전지판이 들렸다 내려갔다 했다.
- 에너지 절약을 체험해 볼 수 있는 기기라든가, 에너지 퀴즈 등 풍부한 전시물이 준비되어 있었다. 특히 헨들을 돌리거나 페달을 밟는 인력 발전기 종류가 이름만 달리한 채 곳곳에 산재해 있었는데, 에너지를 만드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몸소 체험해 볼 수 있었다.
- 현재는 에너지관리공단으로 이관되어, 에너지관이라는 이름으로 운영되고 있으며 무료로 개방되고 있다. 전시물들도 대체로 그대로 유지되고 있으나 위에서 언급한 에너지 코스모스가 빙빙 돌거나 물을 쏟아내거나 하지는 않는다. 자전거 페달을 밟아서 만든 전기로 철도모형을 움직이는 전시물이 있는데, 매우 힘들다.
4.1.15 재생조형관
- "자원의 효율적 이용과 재활용"이라는 엑스포의 부제를 살린 전시관. 4만여 개의 폐유리병으로 만든 지름 30m, 높이 15m의 원뿔형 구조물로, 내부에는 백남준 등 국내외 유명 작가들의 미술작품을 전시했다.
4.1.16 전기에너지관
- 한국전력공사에서 제공하였다. 3D 아이맥스 영화가 상영되었고, 전시물들도 매우 충실하게 갖추어져 있었다.[26] 전시물만으로도 관람객이 포만감(!)을 느낄 수 있었던 관계로 상영물을 보지 않을 관객들은 길게 대기하지 않을 수 있도록 유연성있는 운영을 하였다.
- 공기업인데다 규모도 있는 만큼 폐관되기 전까지 비교적 꾸준히 관리되어 왔으며 이름도 예전 그대로 유지되어 왔었다. 덕분에 최근 중앙정부가 역점을 두고 있는 사업인 원전 수출 사업에 대한 전시물도 업데이트되어 있고, 내부 전시관에 흐르도록 되어 있는 물이 아직도 흐르고 있다. 그리고, 엑스포가 폐회된지 15년이 지난 2008년, 300만번째 관람객 기념행사까지 열었다(!). 다만 관람객 수가 적은 것은 사실이고, 행사가 끝난지 오래 된 것도 사실이라 시설이 완벽하게 관리되고 있지는 않아 낡은 느낌이 있다. 2011년 8월, 영상관에서는 국내 창작 3D 애니메이션인 SEED LIGHT를 3D 아이맥스 영화로 상영하고 있었다. 내용은 에너지와 관련이 있다면 있지만.
4.1.17 정보통신관
- 한국전기통신공사(현 KT의 전신)가 공기업[27]의 본때(!)를 보여주고자 만든 당시 최대의 전시관.
- 두 개의 관으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주된 전시관은 정보통신주제관, 보조 전시관으로서 첨단통신전시관이 있었는데 첨단통신전시관에는 당시로서는 정보통신의 최첨단이라 할 수 있는 하이텔(...)의 체험시설이 있었다.
- 정보통신주제관은 총길이 405m에 이르는 순환궤도에 설치된 155대의 궤도차가 무한루프식으로 돌아가고, 관람객들은 궤도차를 타고 통신발전의 역사를 관람하게 되어있었다. 궤도차는 무한히 계속 들어오고, 느리나마 끊김 없이 연속적으로 관람객을 소화하는 구조로 최단기간 100만 관객 돌파는 물론 362만명의 관람객을 기록하여 최다관람 전시관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 당시 한국전기통신공사가 공기업이었던지라 폐막 후에도 전시관의 운영을 지원해왔으나, 2010년 엑스포 과학공원 재창조 사업의 일환으로 철거되고 지금은 잔디가 심어져 야영장 부지가 되어 있다. 그 부지에 게시된 대전시 측의 철거의 변을 들어보자면, 이미 당시 정보통신관에 설치된 전시물들은 현실이 되어버렸기 때문에(...)라고 하다. 사실, 카카오톡은 커녕 올레톡같은 것도 전시되어 있지 않은데다, 하이텔은 인터넷의 등장으로 얼마 안 가서 과거가 되어 버렸고, 그나마 하이텔 서비스의 명맥을 잇던 파란 마저도 사라져버렸으니...
4.1.18 정부관
- 국무총리비서실이 주관하여 중앙정부가 제공하였다. 대한민국 정부의 전시관으로서 대전엑스포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를 다루고 있는 주제관이었다. 길다란 복도 양편에 전시되어 있는 전시물들은 대한민국이 폐허더미 속에서 당시의 번영을 이루기까지의 과정과 미래의 비전을 관람객에게 보여주었다.
후에는 첨단과학관으로 바뀌었으며, 정부출연 연구기관들의 홍보관으로서 각 연구기관의 연구성과나 소개 내용 등이 전시되어 있다가, 2015년 10월 현재는 폐관되었다. 다만 철거되지는 않았다.
4.1.19 조폐문화관
- 한국조폐공사가 운영했던 화폐전문전시관으로 당시 존재해 있을 때는 500원, 100원, 50원 순의 동전들을 쌓은 모습을 본땄던 전시관이었다.
4.1.20 주거환경관
- 대한주택공사(현재의 한국토지주택공사)가 제공한 주택 및 주거관련 전시관이며 전시장 모습도 새둥지에 있는 알의 모습을 형상화하여 주거공간임을 알리기도 하였다. 국제전시장 구역에 있기 때문에 박람회 폐막 후 철거되었다.
4.1.21 지구관
- 지금은 공중분해된 쌍용그룹(정확히는 쌍용양회)이 제공하였다. 입구와 실내를 정글처럼 꾸며놓은 것이 인상적. 새 소리도 들리고 벼락도 치고 그랬다. 당시 세계 최대 크기의 아이맥스 영화 초록 약속이 상영되었는데, 쌍용그룹에서는 엑스포 기간이 끝난 뒤 이 영상물을 세계 각지에 판매해서 수익을 얻을 계획이었다. 2010년대에 와서는 내부 장비의 임대기간이 지나버려서 영화를 상영하거나 할 수는 없고, 행사가 있을 때만 개방하고 나머지 기간에는 휴관하다가, 2015년 10월 기준으로 철거되었다.
4.1.22 테크노피아관
- 럭키금성그룹(현재의 LG그룹)이 제공하였다. 우주탐험관이나 자동차관과 마찬가지로 체험형 영상물(테크노피아로의 여행)이 준비되어 있었는데, 500년 후의 평화로운 미래인 테크노피아를 관찰하다보니 느닷없이 악의 세력이 그곳을 침입하기에 쌍둥이 비행체 트윈스호(!)에 탑승하고 적을 무찌르는 내용이다. 그 외에도 사물놀이 로봇이나 기술의 상징 금성사(...)답게 HD TV, 반도체 속 한반도, 가상현실 체험 등이 준비되어 있었다. 프리쇼 구역에는 PC의 내부를 표현한 오브제들이 있었는데, GS80586(!)
펜티엄 L이라고 씌여 있는 칩도 있었다. 지못미 LG반도체... - 당시 우주탐험관과 함께 가장 인기있는[28] 전시관 중 하나였는데, 비슷한 인기의 우주탐험관보다 상대적으로 1회 수용인원이 적으면서도[29], 한빛탑 근처의 바로 눈에 띄는 곳에 있는 관계로 관람객들이 붐벼 테크노피아관의 대기는 악명이 높았다. 시골의 할머니도 알 정도였고, 반드시 테크노피아관은 보아야 한다는 의무감을 가진 관람객이 많았다. 덕분에 개장 초기인 8월달엔 오후 1시~2시정도에 행사요원이 와서 줄을 짤랐다. 더이상 줄 서봤자 폐장시간 전까지 못보니 포기하고 다른거 보러 가라고(...) 우주탐험관은 그래도 근성으로 줄을 서면 1회 수용인원이 좀 더 많기 때문에 한창때에도 5시간정도(...) 기다리면 관람할 수 있었지만...그저 안습. 작지만 알찼던 전시관[30]
- 현재폐관 전까지는 시뮬레이션관으로 운영되었으며, 영상물은 가끔씩 교체되어 왔다. 물론 테크노피아와는 별 관계가 없는 영상물들이다.
- [1] "테크노피아로의 여행" 전체영상.[31]
4.1.23 한국IBM관
- 한국 IBM이 제공하였다. 국제전시구역 내 전시관으로서 폐막 직후 철거되었다. 컴퓨터에 관한 내용보다는 자연보호에 관한 내용이 주였다. VIP들에게는 동서게임채널 패키지 게임 할인권을 제공하기도 하였고, 전시관 내부에 동서게임채널이 배급하는 게임(브레인 박사의 성)을 체험해 볼 수 있는 구역이 있었다.
4.1.24 한국후지쯔관
- 일본기업인 후지쯔(FUJITSU)의 한국지사격인 한국후지쯔가 제공한 전시관. 당시 후지쯔가 개발한 뉴로 컴퓨터를 이용한 뉴로 저글러라는 로봇이 저글링을 하는 모습을 본 다음, 3D 입체영화를 관람하고 나오게 되어 있었다.
4.1.25 한빛탑
이 문단은 한빛탑(으)로 검색해도 들어올 수 있습니다.
대전광역시의 상징이자 랜드마크
한화그룹이 제공하였다. 경주 첨성대의 모양을 기초로 한 엑스포의 중심건물로서 93m 높이.[32] 지금보면 별거 없지만 당시에는 미래를 향하는 상징같은 모습이었다. 볼거리는 별거 없었지만 상징성이 강하여 당시 인기를 누렸다. 원래는 60m 높이의 경제적인 건축물이 될 예정이었으나, 지역에서는 최소 200m(!)를 요구하였고 그 절충안이 93m. 디자인과 관련해서도 말이 있었는데, 감히 백제의 땅인 대전에 신라 유물인 첨성대라니!어차피 신라한테 먹혔지만 아아 고구려 하는 반대의견이 있었으나 조직위원장의 설득으로 어찌어찌 해결되었다고 한다. 어쨌든 지금은 대전의 상징. 전망대에 올라갈 떄 여전히 입장료를 받으며 2016년 7월 현재 성인 기준 2500원이다.
'엑스포 과학공원 특구개발계획'에 따라 2014년 3월 말부터 기존의 전시관들이 대부분 철거가 진행 중이다. # 2016년 7월 현재, 대전에 거주 중인 한 위키러가 한빛탑에 올라가서 확인해 본 결과, 꿈돌이랜드의 시설물 및 과학공원의 시설물은 모두 철거되었고, 테크노피아관은 철거가 진행 중이었으며, 카페테리아(중앙대식당)은 덩그러니 남아 있지만 철거될 것처럼 보였고, 한빛탑 및 첨단과학관, 통일관만 남아 있었다. 향후 과학공원 부지에는 HD 드라마타운(대규모 세트 촬영장)과 기초과학연구원이 들어설 예정이다.
파일:용가리.png
여담으로 심형래가 감독한 용가리의 마지막 장면에 잠깐 등장한다. 근데 용가리가 싸이커와 마지막 전투를 벌였던 곳은 분명히 뉴욕 비스무레한 마천루[33]인데 한빛탑이 등장한다니...
4.2 대전엑스포 참가국 및 국제전시관(1993년 철거 및 철수)
대전 엑스포에는 1993년 개최 당시 주최국 대한민국을 포함하여 108개국이 참가하였고 이외 UN, IOC 등의 국제기구가 참가하였다.
대전 엑스포 국제관은 1993년 8월 7일 공식 개장하여 엑스포 폐막일인 11월 7일까지 운영하였고 행사가 끝난 후에는 전시관이 모두 철거 및 철수하였으며 전시물들도 모두 본국으로 보내졌다.
국가별로 독립된 전시관이 있으며 이 중 일부 국가는 대륙별 공동관을 통해 공동 참가를 하였다.
4.2.1 참가국 및 전시출품국(1993년 당시 기준, 가나다 순)
4.2.1.1 독립 전시관
- 나이지리아
- 네덜란드
- 뉴질랜드
- 덴마크
- 독일
- 러시아
- 루마니아
- 말레이시아
- 모로코
- 몽골
- 미국
- 바티칸 교황청
- 베트남
- 벨기에
- 불가리아
- 브라질
- 브루나이
- 사우디아라비아
- 스리랑카
- 스웨덴
- 스위스
- 스페인
- 슬로바키아
- 영국
- 오스트리아
- 오스트레일리아(호주)
- 이란
- 이집트
- 이탈리아
- 인도 공화국
- 인도네시아
- 일본
- 자메이카
- 중국
- 체코
- 칠레
- 캐나다
- 콜롬비아
- 태국
- 파나마
- 파키스탄
- 페루
- 포르투갈
- 폴란드
- 프랑스
- 핀란드
- 헝가리
4.2.1.2 아시아 공동관
4.2.1.3 아프리카 공동관
4.2.1.4 중동 공동관
4.2.1.5 중남미 공동관
4.2.1.6 카리브 공동관
4.2.1.7 남태평양 공동관
4.2.1.8 독립국가연합 공동관
4.2.1.9 발트 공동관
4.2.1.10 국제기구
4.3 그 외
- 당시 상설전시구역은 월트디즈니 월드의 EPCOT Center를 많이 참고했다고 한다. 여러 가지 체험형 영상물들도 그 업그레이드형들이 많았고, 각 대기업들이 경쟁심에 서로 첨단 어트랙션을 도입하는 바람에 결과적으로 EPCOT Center보다도 더 많은 첨단시술을 갖추게 되었다고 한다.
덕분에 폐막후 관리비용 크리
- 각 전시관의 내용물에 광고기획사들이 깊이 관여하였다. 이전에는 그와 같은 전시관을 만들어 본 적이 없었기에, 각 전시관 건설을
떠맡게 된 기업들은 결국 광고기획사를 찾아갔던 것이다. 대전엑스포를 통해 축적된 이들의 경험치는 백화점 기타 상점의 상품 디스플레이의 고급화에 기여하였다. 즉, 오늘날 여러 상점들의 내부 인터리어/디스플레이는 대전 엑스포의 결과물이라는 것.
- 당시 연예계에 첫 발을 들였던 씨름선수 출신 강호동이 대전 엑스포 개막일 다음날인 1993년 8월 8일 행사장내 놀이마당에서 악수 오래하기 부문으로 기네스북 기록에 도전하기도 했다. 당시 엑스포 행사장의 하루 입장객이 20만명일 정도로 인파가 엄청나서 기록 도전에 최적의 조건을 갖춘데다, 중간 휴식없이 거의 1초에 한 번씩 악수를 해야 기록경신이 가능할 정도로 엄청난 체력도 요구되었는데, 강호동이 이미 5회씩이나 천하장사로 등극하는 등 씨름선수로서 체력은 어느정도 검증이 되었기 때문에 기네스북 기록경신이 예측되었다. 결국 강호동은 무사히 제한시간 8시간 동안 한 번도 쉬지않고 2만 8천 233명과 악수를 하여 악수왕으로 기네스북에 등재됐다. 기사링크
- 1993년 8월 10일에 한총련 국토순례단 소속 대학생 1백여명이 김영삼 정부에 남북기본합의서를 이행토록 하라고 촉구하는 대국민 서명을 벌이기 위해 서문과 남문을 통해 행사장으로 들어가려다 경찰에 의해 57명이 연행되었다. 참고.
- 엑스포전시장 내부를 돌아다닌 전기자동차는 한국전기연구소가 개발한 6인승 승합차 5대와, 기아자동차가 시설 참가한 기아 프라이드(물론 전기로 움직인다.) 4대, 기아 베스타(이것도 전기!) [36] .6인승 오픈카 3대였다.
- 한빛탑을 포함하여 볼거리가 풍부했던 몇몇 전시관들은 엑스포 당시에 관람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개장 후 30분만 늦게가도 2시간 기다리는 것은 기본이었다. 우주탐험관 등의 경우 7시간 이상을 기다리기도 했다.
- 각 전시관의 어트랙션들의 경우 외국의 기술을 수입해 온 것들이 많았다는 점에서 비판을 받았다. 다만, 그렇게 해서라도 국민 교육의 장을 열었다는 점에서, 그리고 건설 경기가 활성화되었다는 점에서는 의미가 있다는 견해도 있다. 일단 엑스포라는 행사 자체가 한국 자랑이 아니라 세계의 문명을 전시한다는 취지로 개최되는 것이므로 처음부터 번지수 잘못 잡은 비판이라고 할 수 있겠다.
- 각 전시관을 건설하는 데 기업별로 200억~300억을 투자하였다. 폐막 후 신문 기사에 의하면 삼성그룹의 경우 우주탐험관 방문자 1인당 3만 원의 투자(라고 쓰고 손실이라고 읽는다.)를 한 셈이라고 한다.
- 전시관을 따로 만들지는 않았지만, SK텔레콤의 전신인 한국이동통신도 버스 한 대에 전시품을 채워서 참가하였다.
지금의 SK 텔레콤의 위상이라면 버스 한 대로 때우고 대통령 앞에서 무사하기는 힘들겠지사실 이 때의 한국이동통신은 한국통신(현 KT)의 자회사였다. 모회사의 전시관이 이미 있었고 그 전시관에는 이동통신과 관련된 것도 있었으니 따로 전시관을 낼 필요까지는 없었던 듯하다.
- 이때는 경부고속철도 차량 최종 선정 직전이었기 때문에 최종 후보였던 TGV와 ICE의 홍보활동이 치열했다. 대전엑스포도 예외는 아니었고, 프랑스관에 가면 TGV의 목업과 홍보전시물을, 독일관에 가면 ICE의 목업과 홍보전시물을 관람할 수 있었다.
- 한국방송공사(KBS)에서 제작/방송한 하이라이트 비디오에서는 장정진이 해설을 맡았다.
- 여담이지만 엑스포 기간에 추석이 끼는 바람에 귀성길 + 엑스포 관람 차량이 겹쳐서 역대 최악의 교통 체증이 발생했다.
- 엄청난 숫자의 엑스포 도우미를 선발하여 전시장 곳곳에 배치했었다. 우리가 요즘 흔히 쓰는
노래방도우미 라는 단어가 처음쓰인것이 바로 대전 엑스포이다.
- 당시의 고속도로는 톨게이트 진입시 자신의 목적 톨게이트를 직접 말하여 표를 받는 시스템이였다. 엑스포 당시 톨게이트가 신설되어 각 고속도로 톨게이트에서 "대전 엑스포 한 장 주세요~" 하면 대전 엑스포 톨게이트 티켓을 검표원이 직접 주었다.
5 축제 이후
IMF 크리 이후로 거의 망했다. 국제전시장 재개발 계획도 지금과는 다른 형태가 되거나 지지부진하고, 근근히 몇 안되는 방문자가 있지만 대부분이 와서는 실망하는게 다반사. 화려했던 1993년 당시를 기억하던 사람이라면 폐허에 가까운 지금 모습을 보고 더더욱 슬퍼진다. 그야 2013년이 넘어간 시점으로는 20년이 넘은 낡은 시설이니... 현재는 아예 폐쇄한 시설도 몇 된다. 그리고 테크노피아관의 프리쇼 구역으로 가면 전시 당시 쓰였던 몇몇 오브제나 전시시설(거대한 키보드 등)이 수년째(?) 짱박혀 있는 것도 볼 수 있었다.
그래도 과학공원 안의 랜드마크인 한빛탑은 전망대 기능으로서 근근히 돌아가는 모양. 약간의 입장료를 낸뒤 엘레베이터 위의 전망대로 올라갈 수 있다.
개최 당시 한빛탑을 중심으로 동쪽의 국제전시구역만은 엑스포 폐막 후 철거하고 상설전시구역의 전시관들은 정비를 거친 후 계속하여 운영함으로서 국민 과학교육의 장으로 사용하겠다는 원대한 계획을 세웠다. 역대 엑스포의 경우 폐막 후 대부분의 시설물을 철거하는 것이 보통이었기에, 주요 전시관들을 모두 영구시설물로 건축하는 이와 같은 시도는 나름대로 참신한 시도였다.[37] 이에 따라 주무부처인 상공자원부(현 산업통상자원부)는 엑스포 폐회 후 상설전시구역의 운영권을 대교그룹[38]의 계열사인 (주)엑스피아 월드에 넘겼다. 동측은 현재 대전컨벤션센터와 TJB, 주상복합 아파트 등이 입지하여 엑스포의 흔적이 남아 있지 않다. 대전사는 1인:응? 거기까지 액스포 장소로 썼나?
조직위 추산 1,400만명의 관람객이 엑스포 기간동안 다녀갔으니, 대한민국 인구의 1/3은 이미 이 전시장들을 관람해버렸고 엑스포 폐회에 따라 당연히 엑스포의 열기는 식어갈 수 밖에 없다. 이에 불구하고 수익성을 가지려면 전시물의 지속적인 업데이트가 필요하지만, 엑스포 회장의 전시물들은 KT나 한국전력공사, 한국토지공사, 한국조폐공사,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 등 공기업은 물론 삼성이나 대우, 현대 등의 당시 유수의 기업들이 당시 돈으로 200~300억원을 투자하여 전시관 하나씩을 겨우 지은 것이었다. 그런데, 그 전체를 대교라는 듣보잡 기업[39]이 관리하게 되었으니 애로사항이 꽃필 수 밖에 없다. 그리고 그 무서움을 아는 삼성 등 대기업들은 일찌감치 손을 뗐지 물론 대교도 많은 노력을 했다. 번지점프 시설을 국내 최초로 엑스피아 월드에 설치한다던가... 그리고 KT(정보통신관)나 한국전력공사(전기에너지관) 중앙정부(정부관, 자원활용관)는 그 특성상 지속적으로 시설 유지에 노력을 기울여왔지만, 이미 200~300억의 비용을 지출한 민간기업들에게... 그것도 외환 위기 사태로 공적자금으로 연명하거나 공중분해된 그들로부터 전시관 유지 관리와 관련한 지원을 기대하기는 요원한 노릇이었다.
어쨌든 격감하는 관람객수에 1997년 금융위기사태가 겹쳐 경영은 더욱 어려워지고 노사분규까지 발생한 끝에, 결국 엑스피아월드는 엑스포 과학공원의 운영권을 반납하였고, 엑스포 과학공원의 소유권은 1999년 1월 대전광역시청으로 이전되었다. 대전광역시청에서는 엑스포과학공원을 관리하기 위해 1999년 9월 지방공사 엑스포과학공원을 법인으로 설립하게 되는데...대전의 보물단지[40]로서 대전광역시청이 인수하긴 했지만, 중앙정부에 비해 재정상태가 상대적으로 열악할 수 밖에 없던 대전으로서도 뾰족한 수가 없어서 1년에 50여억원의 적자를 내면서 결국 2008년 행정안전부(현 안전행정부)의 청산명령을 받기에 이른다.
안타까운 사실은 대교같은 중견기업이 아닌 삼성같이 잘나가는 대기업에서 개발을 모색했으면 어쨌을까 하는 아쉬움도 남는다. 대교그룹 인수후 그냥 그시설 그대로 운영을 했으니 잘될일이 없었을것이다.
엑스포과학공원이 청산명령을 받기는 했으나, 해당 공사는 대전마케팅공사로서 계승될 예정이고 2011년 8월 현재 엑스포과학공원은 계속하여 운영되고 있다. 다만, 엑스포 재창조사업이라는 이름의 구조조정으로 인해 현재 운영되고 있는 전시관은 다음과 같다.
- 시뮬레이션관 (구 테크노피아관)
- 에너지관 (구 자원활용관)
- 전기에너지관
- 돔영상관 (구 이매지네이션관)
- 한빛탑
- 첨단과학관 (구 정부관)
- 자기부상열차관[41]
현재 엑스포과학공원의 운명을 두고 대전광역시청은 절치부심을 거듭하는 중이다. 관심있는 기업들을 대상으로 재창조 사업을 위한 설명회를 개최하는 한편으로 상설전시관의 경우에도 필요하면 철거할 수 있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고, 파라마운트사의 투자를 받아 부지를 완전히 철거하고 영화 테마타운(실질적으로는 합천영상테마파크 비슷한곳) 을 건설하려는 계획도 밝힌 바 있다. 결국 2012년 7월 현재, 롯데그룹에서 테마파크 롯데월드를 비롯해 워터파크, 쇼핑센터를 결합한 사업계획서를 대전광역시청에 제출하여 사업승인이 났다.# 가칭 대전 롯데월드로 불리는 이 시설은 2013년부터 착공에 들어가 2016년에 개장을 목표로 사업이 진행중인데 기존 엑스포 시설을 거의 모두 철거하고 재개발에 들어가는지라 대전시민들의 여론이 그닥 좋지는 않다. 2015년 1월 신세계그룹이 사업권을 따내 2018년 개장을 목표로 복합몰을 건설중이다.관련기사. 다만 이쪽도 알력이 없진 않은듯
2013년 6월에는 엑스포 부지에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 사업의 핵심인 기초과학연구원 및 부속 중이온가속기 건립이 결정되었다. 관련기사 롯데월드는 토지 형질 변경에 막혀 진행이 흐지부지되는 듯. 재개발 계획중 과학산업진흥시설외의 유락시설은 없나 싶었는데, HD드라마타운은 꺾이지 않은채로 재개발 부지에 세워지는걸로 확정되었다. 그런데 2015년 1월 공사과정에서 조선시대 유물이 출토되어서 건설에 차질이 생겼으나 왜 춘천시 레고랜드도 그러더니만 유적의 중요성이 높지 않다는 판단아래 공사가 속개되었다.
어찌되었든 최종적으로 영구 보존하기로 한 엑스포 당시의 건물은 다음과 같다.
- 한빛탑
- 첨단과학관(옛 정부관)
- 전기에너지관(당분간 미운영)
-
인간과 과학관결국 철거된 듯.
600px
이제 한빛탑 정도만 빼면 한 시대로 저물어간 엑스포장이지만, 대전의 상징이나 마찬가지이다보니 2012년 제18대 대통령 선거 SBS 개표방송에서 대전광역시의 랜드마크로 선정되어 방영되었다. 2012 여수 엑스포는 전라남도의 랜드마크로 선정.
여담으로 엑스포 남문주차장의 경우 2000년대 중반까지만해도 충남,대전지역의 전의경 훈련에 사용되기도 했다.
흔히 볼수없는 크고 아름다운 주차장 부지에서 주민들의 민원걱정없이 훈련할 수 있는곳은 엑스포밖에 없었다고...(그만큼 오는사람이 드물었다...) 근데 대전에는 기동중대1개, 방범순찰대5곳뿐이라(기동중대 2개,방범대1개가 더있지만 대전이 아닌 기타지역에 배치돼 있어) 타중대는 진압검열때 빼고는 거의 못온다... 크고 넓고 인적이 드물어 훈련에는 최적의 장소였지만 날이 더워질수록 엄청나게 힘들어지는 단점이 있었다. 넓은 부지가 모두 아스팔트 포장되어있어 여름에는 극도로 뜨거워지고 그늘자체가 없다...
6 함께보기
- ↑ 참고로 지금은 엑스포다리가 자전거, 보행자 전용 교량이지만 과거에는 차량 통행이 가능했다.
- ↑ 1993년 당시 대전의 영문표기는 Taejŏn이었지만 이 행사의 공식 영문명칭에서는 반달표기가 생략되었다. 이후 2000년 7월 로마자표기법이 바뀌어 오늘날과 같은 Daejeon이 된 것. 여기에서는 공식명칭을 따라 Taejon으로 적는다.
- ↑ 하지만 후술하듯 개발도상국에서 최초로 열린 공인 엑스포이며, 서울 올림픽에 이어 대한민국의 발전상과 미래상을 보여주는 자리였기에 새로운 도약이라는 주제도 충분히 의미가 있었다.
- ↑ 기와집이래봤자, 당시 사진을 보면 오늘날 엑스포에 공동관의 일원으로 참가한 아프리카 소국같은 느낌이다(...) 물론 구한말이었던 당시 우리나라의 국력이나 국제적 위상은 지금의 아프리카 소국보다 별반 나을 것이 없었다.
- ↑ 이 당시는 아직 초등학교로 바뀌기 전이었다.
- ↑ 바로 앞에 있는 대덕중학교의 경우, 소풍을 가면 꼭 엑스포장으로 갔는데, 당시 소풍을 가면 사복을 함께 지참하였고, 아침에 엑스포장에 들어가면 가지고간 사복을 갈아입은 후 둔산동으로 가서 놀다가 귀가 전에 다시 들어와서 교복으로 갈아입고 귀가하는 식이었다. 물론 다시 들어오는 시간이 늦어 다음날 엉덩이에 불나는 학생도 있었다.
- ↑ 영화배우 소피 마르소가 방한하여 국제관 프랑스 부스에 방문한 뉴스가 보도되기도 했다.
- ↑ 네이버 지도나 다음 지도 또는 구글 지도에 들어가서 꿈돌이랜드가 있는 곳으로 커서를 옮겨봐라. 네이버에서는 폐장, 다음에는 폐업, 구글에는 폐점 또는 이전으로 적혀 있을 것이다...꿈돌이랜드 지못미.
- ↑ 그렇다고 멀티터치나 제스처가 가능했다는 건 아니지만, 당시로서는 터치스크린이라는 기술 자체가 일반인에게 사실상 처음으로 소개되는 것이었기에 그야말로 오버 테크놀러지였다.
- ↑ 2000년대에 등장한 여러 테마파크에서 개별 어트랙션에 대해 실시하는 예약제도의 시초라고 할 수 있다.
- ↑ 엑스포에 참가하는 각국은 자신들의 전시관을 자신들의 돈으로 만들어야 한다. 예컨대, 프랑스에서 열리는 엑스포에 한국이 참가한다면 한국관은 한국 정부 예산으로 짓는다. 모든 경기장을 개최국의 예산으로 건설하는 올림픽 등과는 다르다.
- ↑ 1988년 개정 규약에 규정되고, 1996년부터 시행된 인정박람회이다. 2012년 대한민국에서 개최된 여수 엑스포는 인정박람회이다.
- ↑ 당시 미국 의회가 미국의 대전 엑스포 참가 예산을 배정하는 데에 부정적이었다고 한다. 지금은 돈이 없어서 세계박람회기구에서도 탈퇴했다(...)
- ↑ 말은 1시간 내인데 도서지방을 제외해도 경기 김포, 강원 속초, 전남 해남, 부산에서는 2010년대에도 1시간 내 도달은 사실 불가능에 가깝다.
- ↑ 일정 주제에 한정되는 전문 엑스포가 종합 엑스포보다 규모가 작은 것이 일반적이다. 현재는 5년 주기의 World Expo와 그 사이의 International Expo로 나뉘어진다.
- ↑ 여수 엑스포의 두 배
- ↑ 당시 LG U+는 데이콤으로 불렸던 시절에는 당시의 럭키금성그룹(현재의 LG그룹)과는 인수 이전에 있었기 때문에 럭키금성그룹과는 관련이 없는 기업으로 그 당시까지는 럭키금성그룹이 운영했던 테크노피아관의 부속관으로 있지 않고 데이콤 기업독립관을 따로 운영하였다. 1995년 럭키금성그룹이 LG그룹으로 사명을 변경하고 2000년대 후반에 들어서 LG그룹이 데이콤을 인수하여 LG데이콤으로 사명을 변경하면서 LG그룹에 편입되었다.
- ↑ 행사 폐막 후에는 건물이 철거되었으며 '환상의 오딧세이' 공연은 서울 롯데월드에서 재개장되었다.
- ↑ 2012년 11월 11일 운영 종료. 서울 롯데월드에는 이 자리에 여수엑스포의 롯데관이 로티의 열기구 여행이라는 이름으로 들어왔다.
- ↑ 본래 대한항공공사라는 공기업이었으나 박정희 군사정권에서 적자덩어리라 골치가 아팠는지 반강제로 한진그룹에 넘겨버렸다.
까라면 까야지 - ↑ 이때는 국영기업이었으나 IMF여파로 민영화되어 외국인 지분이 확 늘었다.
- ↑ 1997년 울산광역시, 2012년 세종특별자치시가 신설된 이후로는 17개 광역자치단체다.
- ↑ 지금은 엑스포 과학공원 정문으로 이전.
- ↑ 8분마다 240명이 입장했다.
- ↑ 현재는 현대로템과 현대모비스로 분리되어 있으며, 모두 현대자동차그룹 계열사이다.
- ↑ 보통 영상물이 메인쇼인 곳은 전시물이 많이 준비되어 있지는 않았다. 물론 그렇다고 부실하지는 않았지만.
- ↑ 당시는 공기업이었지만 2002년 민영화와 함께 사명을 KT로 바꾸고, 2009년 자회사인 케이티프리텔(KTF)을 합병하여 오늘날의 KT가 된다.
- ↑ 총 관람객 수가 아니라 대기시간
- ↑ 1일 7,000명 수용이 가능했고 관람소요시간은 최대 45분. 우주탐험관의 경우 1일 1만 6,000명. 관람소요시간은 30분.
- ↑ 우주탐험관 등에 비해서 작다는 것이지 실제로 보면 매우 크다!
- ↑ 3D 그래픽은 우리나라가 아니라 당시 미국의 Boss Film에서 만들어 준것이다. 해외 90년대 그래픽 데모릴에서도 자주 보이는걸 보면 어느정도 CG 발전사에 중요한 역할을 한 영상인듯.
- ↑ 사실 별 모르는 사람이 보면 뾰족 고깔에 도넛을 끼워둔 모양(...)으로 첨성대와 관련이 없어 보이지만, 외벽을 잘 보면 첨성대의 계단식 회색 벽돌을 모방했음을 알 수 있다.
- ↑ 극중에선 정확한 배경이 명확하지가 않다. 심형래의 용가리는 서울의 강남과 뉴욕이 단 몇 컷만에 왔다갔다 하는, 다소 정신없는 영화다.
- ↑ 당시에는 '자이르'로 표기.
- ↑ 당시에는 'EC(유럽공동체)'로 표기.
- ↑ 이미 1986 서울 아시안 게임에서 선보인 전적이 있다.
- ↑ 실질적으로는, 당시 개발도상국이었던 대한민국에서 3개월만 쓰고 무너뜨릴 시설물에 200억을 투자한다고 하면 누가 납득했겠는가 하는 점도 고려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어쨋든 다 지었다. - ↑ 눈높이 교육으로 유명한 바로 그 기업
- ↑ 어디까지나 삼성 등에 비하면...
- ↑ 당시 대전직할시청 부시장을 하던 박성효가 그러한 말을 했다고 한다. 나중에 한나라당 후보로서 대전광역시장에 당선되지만 결국 2010년 지방선거에서 낙선.
- ↑ 이쪽은 유일하게 확장된 케이스. 원래는 주차장 부지에서 선로가 끊겼지만, 국립중앙과학관이 건립되면서 선로를 연장, 지금은 국립중앙과학관-엑스포과학공원간을 운행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 대덕대로를 건너는 자기부상열차 교량은 끊어진 상태이다. 현재 운행을 재개했지만 교량이 끊기기 전의 구간까지만 운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