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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배우에 대해서는 김용희(배우)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롯데 자이언츠 감독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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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라이온즈 바지 감독 감독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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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0월 23일 감독 취임식장에서. 190cm이라는 키를 증명하듯 어마어마한 기럭지를 자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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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흑역사로 남아버린, 15년만에 감독으로 복귀한 SK 와이번스 감독 시절.
끄덕끄덕
롯데 자이언츠 역대 감독 | ||||
강병철 (1991~1993) | → | 김용희[1] (1994~1998) | → | 김명성[2] (1999~2001) |
삼성 라이온즈 역대 감독 | ||||
서정환 (1998~1999) | → | 김용희 (2000) | → | 김응용 (2001~2004) |
SK 와이번스 역대 감독 | ||||
이만수 (2012~2014) | → | 김용희 (2015~2016) | → | 트레이 힐만 (2017~) |
이름 | 김용희(金用熙) |
생년월일 | 1955년 10월 4일 |
국적 | 대한민국 |
출신지 | 부산광역시 중구 |
학력 | 동광초[3] - 경남중 - 경남고 - 고려대 |
포지션 | 3루수 |
투타 | 우투우타 |
프로입단 | 1982년 창단 멤버 |
소속팀 | 롯데 자이언츠 (1982~1989) |
지도자 | 롯데 자이언츠 1군 플레잉코치 (1989) 롯데 자이언츠 1군 타격코치 (1990~1992) 롯데 자이언츠 감독 (1994~1998) 삼성 라이온즈 1군 수석코치 (1999) 삼성 라이온즈 감독 (2000) 롯데 자이언츠 1군 수석코치 (2001~2002) 롯데 자이언츠 2군 감독 (2004~2005) 롯데 자이언츠 1군 수석코치 (2005) 롯데 자이언츠 2군 감독 (2006) SK 와이번스 2군 감독 (2012~2013) SK 와이번스 감독 (2015~2016) |
프런트 | SK 와이번스 육성총괄•스카우트 팀장 (2014) |
종교 | 불교 |
역대수상 | |||||
1973년 청룡기 전국고교야구 선수권대회 MVP | |||||
1982년 1984년 한국프로야구 올스타전 미스터올스타 | |||||
1982년,[4] 1983년 한국프로야구 3루수 골든글러브 수상자 1985년 한국프로야구 지명타자 골든글러브 수상자 |
목차
1 소개
롯데 자이언츠의 초대 주장이자 원조 프랜차이즈 스타. 미스터 롯데, 미스터 올스타, 미스터 자이언트
스타 선수는 유능한 지도자가 될 수 없다는 속설의 산증인.[5]
롯데 자이언츠의 프랜차이즈 출신 스타 내야수, 前 SK 와이번스의 감독이자 끄동님. 김응용, 김성근, 백인천, 김재박 등의 감독들에 비해 인지도가 낮아서 그렇지 그 또한 한국프로야구의 초창기를 화려하게 장식한 슈퍼스타이자 감독으로서도 좋은 모습을 보여 줬다. 적어도 1995년까지는.... 구단의 대우를 떠나 선동열 이전 원조 588을 찍은 감독이기도 하다. 엄밀히 말하면 1998년도 중도 해임되어 故 김명성 감독이 유지를 이어받았다. 어찌됐건 롯데는 1996년 5위-1997년 8위-그리고 1998년 8위를 기록하여 롯데 자이언츠는 쌍방울 레이더스 이후 사상 두번째로 2년연속 꼴찌를 기록하고 말았다.
하단에도 나오겠지만 선수 시절부터 지금까지 대내외적으로 잡음이라는 것이 잘 나오지 않은 성격으로도 유명하다. 강헌주 기자의 기사와 김은식 작가의 칼럼이 그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2 선수 경력
2.1 아마추어 선수 시절
현역 시절 별명은 '미스터 롯데'. 롯데 자이언츠의 프랜차이즈 선수이자, 롯데 선수 출신으로 롯데 감독에 오른 첫 인물. 그 전임 감독들은 모두 프로야구 출범 이전 세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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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포항제철 야구단 선수시절.[6] |
경남고 시절부터 이미 주목받았던 촉망받던 인재였다. 1973년 경남고의 청룡기 우승을 이끌면서 타격과 타점 부분 1위, 그리고 MVP에 선정될 정도로 이미 엘리트 코스를 밟았다. 고려대에 진학한 무렵부터 국가대표로 발탁, 프로에 진출하기 전까지 계속 국가대표로 활약한다. 현역 시절 포지션은 주로 3루수였고, 가끔 유격수를 봤다. 키가 190cm로 당시로서도, 그리고 지금으로서도 상당히 큰 키였지만 괜찮은 수비력과 타격 실력을 자랑하면서 한 시대를 풍미했다. 포항제철 야구단의 창단 멤버로 입단해서 주전 4번타자 자리를 꿰찼었고, 이후 1982년 롯데 자이언츠가 데려갈때까지 포항의 간판으로 활약했다.
특히 한국프로야구의 원형이 된 야구대제전[7] 에서 모교인 경남고 소속으로 나와 후배 최동원과 함께 팀을 이끌면서 우승을 안기고, 그 자신은 최다안타상과 타격상, 대회 MVP에 오른다.
그리고 1980년 세계야구선수권에서 주전 3루수로 출전하기 시작, 그 대회에서 일본 전 역전 적시타를 쳐내면서 대한민국의 준우승에 큰 기여를 하는 등, 최고의 활약을 펼치면서 대회 베스트 9에 선정된다. 이때부터 시작된 인생은 한방 참고로 그에게 밀려서 대회 베스트 9에서 빠지게 된 일본의 3루수가 하라 타츠노리 전(前) 요미우리 자이언츠 감독이다.
2.2 프로 선수 시절
1982년 프로 출범 이후, 롯데 자이언츠에 입단했다. 한국에서 열린 세계야구선수권 대회 대표로 묶이지 않은 것에 대해 최동원, 심재원 등이 대표로 뽑히면서 프로 입단이 1년 늦어져 전력에 타격을 입은 롯데에 대한 배려라는 말과 이미 당시에 대표로 뛰기에 몸 상태가 좋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실제로 김용희의 몸 상태는 당시 디스크로 좋지 않은 상황이었다고 한다.
엄청난 기럭지! 190이라는 키는 지금도 그렇지만, 80년대 초반 한국인들의 표준에서는 더더욱 어마어마한 장신이었다. 그야말로 팀 이름(자이언츠)에 어울리는 선수.
그럼에도 1982년 초대 KBO 올스타전 MVP로 선정된다. 당시 3차전까지 열린 올스타전에서 2차전까지 3홈런을 치며 맹활약한 김용철을 제치고 선정된 이유는 그가 3차전에서 날린 역전 만루홈런의 힘이 컸다. 역시 인생은 한방. 역전의 사나이! 그리고 1984년에도 4타수 4안타를 치면서 다시금 올스타전 MVP의 영광을 안는다. 부상으로 받은 차만 두 대. 미스터 올스타로 뽑힌 후 동, 서군 선수와 코칭스태프 전원에게 한턱을 쏘고, 남는 차 한 대는 후배가 달라고 졸라서 그냥 줬다는 대인배스러운 일화를 남겼다. 결국 상으로 받은 차는 그냥 자기 돈으로 산 거나 마찬가지가 되었다고(...). 아울러 실업야구 시절은 1980년에도 실업야구 올스타전 MVP를 받았다니, 올스타전과 인연이 깊은 선수라고 하겠다. 당시 실업야구 올스타전 부상은 전축이었다고.
골든글러브를 세 번 받았을 정도로 활약이 나쁜 것은 아니었지만 허리가 좋지 않았기 때문에 프로 무대에서는 아마시절처럼 슈퍼스타로 군림한 것은 아니다. 일곱 시즌 동안 뛰었지만 3할을 넘긴 시즌이 있는 것도 아니고, 풀시즌을 제대로 소화하지도 못했고, 20개 이상 홈런을 친 적도 없다. 하지만 최초로 롯데를 상징하는 선수였고 롯데의 실질적인 리더이자 후덕한 인품과 원만한 대인관계로 구단 고위층부터 팀 동료와 후배까지 믿음을 산 선수였다. 축구로 따지면 FIFA 발롱도르 초대 수상자인 스탠리 매튜스와 비슷한 이미지라 할 수 있다.
최동원, 유두열 등 당시 잘나가던 팀 동료들과 함께 모기업인 롯데제과의 빼뺴로 광고에 나왔다.
3 지도자 경력
역대 감독 전적 | |||||||
연도 | 팀 | 경기 | 승 | 패 | 무 | 정규리그 | 포스트시즌 |
1994 | 롯데 자이언츠 | 126 | 56 | 67 | 3 | 6위 | - |
1995 | 126 | 68 | 53 | 5 | 3위 | 준우승 | |
1996 | 126 | 57 | 63 | 0 | 5위 | - | |
1997 | 126 | 48 | 77 | 1 | 8위 | - | |
1998 | 55 | 20 | 32 | 3 | 8위 | - | |
통산 | 559 | 249 | 292 | 12 | | ||
년도 | 소속팀 | 경기수 | 승 | 패 | 무 | 정규리그 | 포스트시즌 |
2000 | 삼성 라이온즈 | 133 | 76 | 57 | 0 | 3위[8] | - |
통산 | 133 | 76 | 57 | 0 | | ||
연도 | 팀 | 경기 | 승 | 패 | 무 | 정규리그 | 포스트시즌 |
2015 | SK 와이번스 | 144 | 69 | 73 | 2 | 5위 | 5위 [9] |
2016 | 144 | 69 | 75 | 0 | 6위 | - | |
통산 | 288 | 138 | 148 | 2 | | ||
총계 | 980 | 463 | 497 | 14 | |
3.1 롯데 코치 부임: 지도자 1기 시작
현역 은퇴 시즌 플레잉코치를 겸업했고 은퇴 다음해부터 바로 롯데 타격코치로 부임했다. 특히 92년 남두오성이라고 불리는 3할타자 5명을 배출하는 성과로 팀의 한국시리즈 우승에 상당한 기여를 했다. 이 당시 김용희의 손에는 항상 선수들의 타격과 관련된 자료들이 종이 뭉테기 단위로 들려 있었다고 한다.
한국시리즈 우승 후 지도자 공부를 더 하길 원해 재계약 대신 미국 연수를 희망했고, 당연히 구단서는 만류했지만 결국 자비로 연수를 가게 됐다.
3.2 롯데 감독
강병철 감독이 예상을 깨고 빙그레 이글스로 이동하면서, 롯데 구단은 고민 끝에 김용희의 감독 승격을 발표한다. 본인은 이르다고 고사했지만 당시 구단주대행 신준호가 다 도와줄테니 무조건 맡아달라고 밀어부쳤다고 한다. 첫 감독 취임 당시 나이가 39세라 다소 이르다는 이야기는 있었지만,[10] 어짜피 차기 감독감 1순위였던 탓에 야구계에선 크게 놀라워하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다만, 괜찮은 인재이기 때문에 너무 일찍 감독 데뷔를 시키기 보다 좀 더 경륜을 쌓는 것이 어떻냐는 이야기는 나왔다고.
미국 연수를 경험해서인지, 그의 모토는 자율야구였다. 김용희의 자율야구는 팀훈련시간을 대폭 단축하면서 선수들에게 집중력있고 생각하는 야구를 요하는 것이 그 특징이었다. 제리 로이스터 체제가 등장했을 때, 그가 지지를 보낸 것은 그가 추구하던 야구와 유사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감독 첫해 롯데는 1군 붙박이 주전이 무려 8명이나 방위복무를 해 전 시즌보다 전력이 많이 약화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즌 중반 잠깐 4위 싸움에 뛰어들 정도로 선전했다. 최종순위는 6위.
1995년에 이 자율야구 시스템이 비로소 성공을 거두는데 윤학길과 주형광이 팀의 주축 투수로서 활약하고, 마해영의 합류와 박정태의 재기로 팀 전력이 비약적으로 상승, 3위로 PO에 진출한 것이다. 7전 4선승제로 열린 PO에서 1차전 강성우의 활약으로 이상훈을 무너뜨리면서 이변을 연출하더니 주형광의 역투 속에 4승 2패로 한국시리즈에 오른다. 당시 준PO는 3위와 4위의 게임차가 3.5게임 이상이면 무산되도록 규정되었기 때문에 무산되었다. 당시 4위는 해태. 한국시리즈에서도 굉장히 선전해서 1, 4, 5차전을 잡고 먼저 3승에 오르지만, 6차전 진필중에게 완투패를 당하고, 7차전 2:0으로 뒤지던 3회말 2사 2,3루 상황에서 박정태가 치명적인 실책을 저질러 2점을 더 내주는 악재가 겹치면서 아쉽게 OB에게 우승을 내주고 만다. 이 때 만일 우승했다면 장기집권도 가능했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11]
1996년부터 주전 선수들의 부상 돌림병으로 인해 주전 투수들을 제대로 가동하지 못했다. 염종석은 전 시즌을 마치고 팔꿈치 수술을 받아 아예 개점휴업했고, 박동희도 부상으로 부진했으며, 윤학길은 노쇠했다. 신인 차명주는 먹튀였고, 문동환은 계약금 문제로 현대 피닉스에 입단했다. 4위와 큰 차이로 5위를 기록하며 포스트시즌에도 진출하지 못하는 실망스러운 시즌을 보냈지만, 1995년 한국시리즈 준우승의 성과 때문에 3년 재계약에 성공했다. 이게 좀 흠좀무한게 롯데 역사상 최초이자 유이하게 재계약에 성공한 감독이었다는 점.[12]
그러나 이듬해 1997년, 롯데 프런트는 개막을 불과 며칠 앞둔 시점에서 문동환을 데리고 오겠다고 전준호를 현대 유니콘스로 주는 최악의 트레이드를 단행한다. 여기에 신인 손민한도 부상으로 쓰러지고, 팀 내부적으로도 많은 선수들이 단체로 사기를 당하는 바람에 팀분위기가 뒤숭숭해지면서 이 시즌은 일치감치 꼴찌로 내달렸다. 아울러 프런트가 원정 기록원도 돈이 없다고 짜르는 등, 슬슬 막장 지원을 줄이더니, 1998시즌도 여전히 꼴지에 머물다가 2년 연속 최하위에 머무른다는 이유로 해임되어 롯데 감독과의 인연을 마치게 된다. 롯데는 해태에서 김응용을 데려오려고 애를 썼지만 데려오지 못해 당시 롯데의 투수코치였던 김명성을 감독 대행으로 임명하였다. 선동열 이전에 588을 최초로 찍은 선임
3.3 롯데를 떠나 삼성 감독으로
찾기 정말 힘들었다 꽁꽁 숨겨두신 김감독님
롯데 감독에서 해임된 후, 실업팀 시절의 팀 동료였던 서정환의 추천으로 1999 시즌 삼성 라이온즈의 수석코치에 임명된다. 1999 시즌 PO에서의 패배 책임을 지고 서정환 감독이 사퇴하자, 2000 시즌 그 후임으로 내부 승진한다. 그러나 당시 그의 권위는 강할 수 없었다. 바지감독
이미 삼성은 김응용 해태 감독을 영입하기 위해 노력하던 중이었고, 일단 김응용 감독이 한 해 더 해태에 남기로 하자 대타로 땜방으로 임명된 것이었다. 어째 후임이 항상 김응용으로 거론되네 그 증거로 2군 감독에는 김성근, 타격 인스트럭터에는 백인천, 사장 보좌역으로는 전 시즌 감독에서 물러난 서정환이 임명되는 등 감독으로서 힘을 실어주지 않았다. 바지감독 무슨 지거리야[13] 물론 삼성 프런트도 이강철과 김동수를 FA로, 외국인 선수로 MLB 레전드급 선수인 훌리오 프랑코[14]를 영입해서 할 만큼 했다고 할 수도 있지만, 선수단을 장악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지 않은 것은 분명 잘못된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양대리그 체제에서 드림리그 3위를 기록해, 당시 매직리그 2위였던 롯데보다 승률이 좋아서 준PO를 거친다. 여기서 승리하고 PO에 오르는데, 이 당시 91승을 거두면서 최강 팀이었던 현대 유니콘스와의 대결에서 4연패로 깨지고 말았다. 그리고 무기력하게 재계 라이벌에게 4패로 물러났다는 점 + 김응용 감독의 영입이 확정되었다는 점으로 인해 자연히 감독에서 물러나게 된다. 여태껏 혹사당하던 임창용도 관리해 주는 등 무리하지 않고 상식적으로 운영했지만, 삼성의 실적 제일주의 앞에서는 어쩔 수 없었다. 성적이 그리 좋은 것만은 아니기도 했고. 참고로 1990년 한국시리즈에서 전자업계 라이벌에게 4연패로 졌다는 이유로 정동진 감독이 짤린 적이 있다. 삼성의 전과는 화려하다! 그리고 10년 뒤에는 선동열 감독이 SK와의 한국시리즈에서 4연패하고 감독직에서 짤렸다. 10년 주기설?
스트레스가 많았던지 평소 모습과는 다르게 이해 6월 25일 김용희 감독은 심판의 멱살을 잡고(…) 항의한 탓에 최고 제재금 200만원을 물어야 했다. 그리고 12년 뒤 김기태가 최고액을 경신했다
잘 한 점이 있다면 임창용의 투구 이닝을 조절해 주며 임창용이 풀타임 주전이 된 후 처음으로 100이닝에 미달하도록 이닝 소화를 배려해 줬다는 점이다. 임창용이 해태에서 김응용에게, 트레이드로 삼성에 온 첫 해에 서정환에 의해 마무리면서 3년 연속 규정 이닝을 충족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이때에 와서야 임창용은 제대로 된 관리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임창용이 2000년마저 계속 전처럼 굴려졌다면 메이저리그나 일본 진출은 고사하고 재기불능 수준으로 망가졌을 가능성이 컸다는 평가를 듣는다.
3.4 다시 롯데로
그 뒤 양상문 체제에서 롯데 자이언츠 2군 감독, 강병철 3기 체제에서 롯데 자이언츠 수석코치로 잠시 활동하기도 했다. 롯데 감독이 바뀔 때마다 단골로 후보로 거론되지만, 아무래도 이제는 감독으로 복귀는 쉽지 않을 듯 싶었다.
3.5 해설가 시절
롯데를 나간뒤에는 SBS ESPN의 해설가를 지냈다. 타격 부분에 대해서는 상당한 이론과 식견을 보여주는 해설을 했으며 현역 시절에 인품이 좋은 걸로 유명했던 것 답게, 까는 해설보다는 조용히 칭찬하는 해설자 타입에 더 가깝다. 가끔 들리는 부산 사투리와 롯데에 대한 어쩔 수 없는 애정이 보이기도 한다. 사직 구장에서 중계를 할 때 마다 구장이 배 모양이라고 설명해주는게 일종의 패턴화 되었다.
2011 시즌에도 새롭게 영입한 양준혁과 안경현의 안정성이 아직은 높지 않기 때문에 케이블에서는 주역으로 뛰고 있다. 그리고 올스타전에서 임용수, 양준혁과 함께 신개념 개그 해설을 선보였다.
목소리와 억양, 해설 톤이 씨름의 이만기와 비슷하다. 옆방에서 들으면 씨름중계인지 야구중계인지 헷갈릴 정도. 그래서 포털 사이트에서 "김용희 이만기" 검색해보면 '김용희는 이만기 보이스' 혹은 '오늘 야구 해설은 이만기' 등의 글을 많이 찾을 수 있다.
2011년 7월 20일 경남고 대 군산상고 레전드 매치 촬영. 경기 때는 허구연이 감독이고 김용희가 수석코치였다. 이 경기가 최동원이 살아 생전에 대중들에게 마지막으로 모습을 드러냈던 경기였다.
3.6 SK 2군 감독 부임: 지도자 2기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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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수가 감독 대행을 맡게 되자 2011년 9월 7일 SK 와이번스 2군 감독으로 선임되었고, 추석연휴가 지나간 후 선수단에 합류했다. 퓨처스 개막전 때는 고양 김성근 감독과 배우개그 감독개그를 주고받았다. 박재홍과 카톡으로 연락을 주고받는 등 세련된 감각으로 소통하고 선수들을 챙겨주는 모습에 과연 덕장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있다. 민경삼의 파워협박은 부록
처음 부임 당시만 해도 회의적인 시선이 있었는데, 이는 SBS 해설위원 시절 김성근 감독 체제 하의 SK를 많이 깠던 것에서 비롯한다. 그러나 2013년까지의 모습을 보면 이만수 감독에 비해서는 지도력이 낫다는 평가를 받게 되었다.실제로 계형철 감독이나 이만수 감독이 2군 감독하던 시절의 성적에 비하면 상당히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1군과 2군 성적 등가교환 SK 퓨처스 팀은 2007년 2위를 한 이후 줄곧 하위권을 맴돌았다. 2007년 우승 이후 상위권 독주로 상위 라운드 신인지명에서 계속 밀린데다, 김성근 감독의 스타일 상 조금이라도 가능성 있는 신인은 2군 경기장에서 직접 컨디션을 확인한 후 군입대도 한계 시점까지 연기하고 1군에서 뛰도록 하는 편이었기 때문에 2군의 전력이 좋다고는 할 수 없을 수준이었다.
조범현 감독이 kt 위즈의 감독으로 선임된 비하인드 스토리를 다룬 기사에서 당초 물망에 올라 제의까지 받았으나 "현재 팀에 집중하고 싶다는 이유"를 들어 고사한 2군 감독 K씨로 추정되었다. 2013년 당시 퓨처스리그 감독 중 이니셜을 K로 쓸 수 있는 사람은 김 감독을 제외하면 롯데의 권두조, 넥센의 김성갑 감독 정도였다.여기에 '이미 이만수 감독은 시즌 후 경질이 확정적이고, 후임 감독을 내부승격으로 처리할 것'이란 살이 붙어서 여러가지 말이 오고가는 상황. 결과적으로 이 말들은 사실이 되었다.
3.7 SK 육성총괄 겸 스카우트 팀장 부임
시즌 종료 후 은퇴한 박경완이 바로 SK 와이번스 2군 감독에 선임됨에 따라 김용희 감독은 새로 설치한 육성군 총괄 겸 스카우트 팀장으로 보직이 이동되어 신인지명과 육성을 전담했다.
3.8 SK 와이번스 감독
3년만의 가을야구에 성공했지만, 결국 쌓이고 쌓였던 SK 와이번스 팬들의 불신을 지우는 데에는 실패하다.
나름대로의 구실은 했지만 경기 운용 등 여러 가지 부분에서 롯데 자이언츠 감독 시절의 커리어를 그대로 답습하고 말았던 임기[15]
2군 감독, 육성총괄로는 다 좋았는데 왜 1군 감독 시절엔...
그리고 2014년 시즌 후 계약이 만료된 이만수 감독의 뒤를 이어서 SK 와이번스의 후임 감독으로 내정되었다는 뉴스가 보도되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SK 프런트 쪽에서 아직 내정된 바는 없다고 해명기사가 나와 아직 확정된 것은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하지만 며칠 지나지 않은 10월 21일, 계약기간 2년, 총액 9억 원에 SK 와이번스의 5대 감독으로 공식 선임되었다.
2000년 삼성 라이온즈를 1시즌 맡은 이후 1군 감독으로는 자그마치 15년 만의 복귀다. 내심 김경기 타격코치나 박경완 2군 감독을 신임 감독으로 기대하던 SK 팬들은 다소 뜻밖이라는 반응이 다수. 다만 시즌 종료 직후부터 SK의 후임 감독은 내부 승격이 유력했다는 점에서 김용희 육성팀장 역시 감독 후보군으로 오르내리고는 있었다.
김용희 감독이 발표되고, 일단 그분이 아닌, 새감독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많은 응원과 기대를 받고 있다.
롯데와 삼성에서 감독을 맡았던 시절과는 이제 강산이 한번 반 바뀔 10여 년 이상 흘러가 버렸기 때문에 감독으로서의 감각과 역량이 살아날 수 있을지 미지수란 점에서 불안 요소는 어느 정도 상존하는 상황. 물론 2011년부터 2년 간 SK 와이번스 2군 감독을 맡으며 이전까지 하위권을 맴돌던 퓨처스 팀을 맡아 2위까지 올려놓은 적이 있는 만큼 김응용처럼 지도자로서의 감이 완전히 녹슬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특히 소속 선수들의 해외 진출과 FA로 인한 전력 유출이 확정적인 2015년 시즌을 앞두고 김경기와 박경완을 섣부르게 1군 감독으로 앉히는 불확실성보다는 그나마 감독을 경험해 본 김용희 쪽이 당장의 리빌딩을 맡기기에는 더 적합하기도 하다는 점에선 현 상황에서의 차선책으로 보아도 괜찮을 듯. 취임 후 인선에서 김경기 타격코치가 수석코치, 박경완 2군 감독이 육성총괄로 확정된 것으로 미루어 보면 김용희 감독 체제에서의 2년은 김경기나 박경완 체제로 전환되기 전의 과도기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
지나간 다른 팀이나 현 소속팀 2군 감독 시절에도 덕장으로 인품이 좋았던 지도자이지만 2군과 1군은 또 다른 만큼, 남은 마무리캠프와 내년 스프링캠프, 2015년 시즌에 그의 행보가 주목된다. 전통적인 메이저리그식 '매니저'에 가까운 스타일의 지도자이므로 FA를 다 잡는 등의 프런트 지원만 충분하다면 기본 전력만큼의 성적은 가능할 것이라는 의견이 많다. 솩런트가 그 시절 꼴런트보다는 좀 낫겠지만 그 지원이 가능할 지는 두고 봐야지 그리고 민경삼 단장이 박동희와 진행한 인터뷰에서 사실 만수감독 재신임 할까 생각도 했음 ㅋ이라고 해서 팬들의 속을 또 뒤집어 놓았다(...)
한편 1군 감독으로 선임되고 나서 SK 와이번스 갤러리에서 얻은 별명은 용감이다.
감독 취임부터의 행보는 김용희/2014년에서.
감독으로 취임한 후 LG 트윈스의 타격코치로 있었던 김무관을 SK 와이번스로 불러들였다.
3.8.1 2015 시즌
아직 부임 초반이긴 하지만 김용희 감독에 대한 전반적 평가는 긍정적인 평가보단 부정적인 평가가 더 많은 편. 5월까지의 행보는 SK를 왕조 시절로 다시 돌려놓고 있다고 평가받았다,[16] 그러나 귀신같이 5연패(...)를 당함과 동시에 투타 밸런스 붕괴로 좀처럼 5위 이상으로 치고 나가지 못하고 부진하면서 다시 까이고 있다. 부진했지만 시즌 막판에 나름대로 비축해뒀던 전력으로 다른 5위 경쟁 팀보다 한 발 더 나가는 데에 성공하면서가을야구 니가가라 결국 3년만의 가을야구에 성공했다. 좋지 않은 수비가 발목을 잡으면서 와일드 카드 매치에서 패배를 하면서 와일드 카드에 만족을 해야 했지만. 한 경기라도 더 한 것에 만족해야지...
김용희/2015년 문서 참조. 끄동님으로도 들어올 수 있다
SK 팬 중에서는 경질을 바라는 팬들도 소수 있었지만 평가가 엇갈리는 상황에서 SK 와이번스는 2016 시즌 또한 김용희 감독과 같이가기로 결정. 애초에 2년 계약이였다보니 경질 가능성도 낮은 상황이였다. [17]
김성근과는 매니징 타입이 완전히 극과 극. 김성근 감독이 이런저런 혹사로 오늘날에 안 좋은 쪽으로 재조명이 되고 있었지만, 김용희는 서진용 등 일부 선수를 제외하면 좋지 않은 여론에서도 이렇다할 혹사 논란이 없었다는 점이 가장 큰 차이점.
포스트시즌에 진출하기는 했지만 좋지 않은 수비가 발목을 잡으며 결국 이 수비로 인해 시즌을 마감해야 했다는 점에서는 아쉬움이 많았다는 반응. 다만 "팬 여러분에게 죄송합니다." 라며 시즌을 마감짓는 말을 한 것에선 전임 감독과는 큰 차이를 보였다. 좋지 않은 여론에서도 감독 본인이 입을 잘못 놀려서 구설수에 오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기에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긴 했지만.
3.8.2 2016 시즌
계약 2년차이자 마지막이 될 수도 있는 해. FA 자격을 얻은 선수들이 대거 팀을 떠나면서 작년보다 더 험난한 시즌이 예상된다. 어찌 보면 강제 리빌딩 시즌이라고 할 수 있을듯. 신진 선수들을 발굴하고 성적까지 낼 수 있다면 감독으로서의 평가도 반전될 수 있을 것으로 보여졌지만... 후반기에 엄청난 삽질으로 인해 평가가 바닥을 치고 있다. 특히 9월 89연패. 마지막 임기라는 압박감에 따른 조급증이 결국 발목을 잡을 수도 있게 된 현 상황.
결국 SK 구단에서 재계약을 하지 않는 쪽으로 결정을 하였다고 한다.
김용희/2016년 문서 참조
4 감독으로서의 평가
2군 감독을 포함한 육성 분야에서는 두드러진 성과를 드러냈으나 1군 감독으로의 능력은 한계가 너무 뚜렷하게 드러난 감독
전 소속팀에서의 팀 운영 스타일을 벗어나지 못한 한계
SK 와이번스 임기 시절 한정으로는 전임 감독들까지 다시 끄집어내게 만든, 그의 감독 이력 최악의 흑역사.[18]
인품만 좋아서는 명장이 될 수 없다는 또다른 케이스[19]
김끄덕, 끄동님
한화전 한정으로 킹갓희이자 크보의 영웅[20]
김용희 감독의 제일 큰 특징은 시스템 야구. 즉 모든 것이 알아서 돌아가는 야구인데, 이는 현 SK 와이번스의 팀 사정에는 맞지 않다는 평가가 있다.
김용희 감독의 시스템 야구의 가장 큰 문제점은 현재 고척을 연고로 하는 옆 구단과는 다르게 SK 와이번스에는 2군 유망주의 풀이 넓지 않다는 점이다. 실제로 김용희 감독의 시스템 야구는 '모든 선수가 1군 즉시 전력감으로 활용될 수 있는 야구' 를 모토로 한 것인데, 2015년 부임 시기까지 SK 와이번스는 주전과 비주전의 기량차가 굉장히 심한 것이 문제가 되고 있는 팀이었다. 김용희 감독의 시스템 야구를 구사하기엔 현 SK 와이번스의 2군 팜이 그만큼 녹록치 않다는 이야기이며, 현 SK 와이번스의 팀 사정을 고려했을 때 이는 만화에서나 나올 수 있을 법한 야구와 같은 맥락으로 해석될 수 있다는 의미. [21]
그리고 2군에서는 크게 대두되지 않던 선수 기용이 1군에서는 큰 문제를 드러내고 있다. 정우람을 마무리로 내리고 윤길현을 다시 주먹구구식으로 그 자리에 넣은 것은 김용희 감독의 시스템 야구에는 분명히 어긋나는 형태의 선수 기용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며, 갓 군에서 제대한 서진용을 필승조로 무리하게 쓰다가 결국 팔꿈치가 나가게 된 것,[22] 현재 구위가 불안정하면서 과부하의 조짐이 보이는 문광은을 계속 필승조로 쓰고 있는 것은 김용희 감독의 선수 기용의 문제가 맞다.[23] 진해수가 다시 1군에 등록된 이상 지켜봐야할 것 같지만, 현재 SK 와이번스 팬들 사이에서 김용희 감독의 선수 기용에 대한 의견은 상당히 좋지 않다. 이럴 거면 윤길현을 왜 마무리로 썼니 [24] [25]
따라서 김용희 감독의 시스템 야구가 SK 와이번스에서 확실하게 정착하려면 꽤 오랜 시간이 걸리며 길게는 5시즌 이상까지도 걸린다는 이야기인데, 성급하게 시스템 야구를 도입하려고 한 것은 김용희 감독이 2군 감독과 육성총괄 시절 때와는 다르게 1군 감독으로는 SK 와이번스의 1군 팀 사정을 폭 넓게 보지 못한 것이 크다는 것이다. 15년의 공백이 여기에서 굉장히 크게 작용한 것. 역으로 보면 감을 잡기 시작하면서부터 필승조를 아끼는 등 나름 전략적인 운용을 하기 시작했고 그 결과는 9월부터 의외로 선전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SK는 분명 2015시즌 최상위 전력을 보유하고 시작했으며 삼성과 함께 2강을 달릴 것으로 예측되었는데, 안정되지 못한 운용으로 1위와의 승차를 20 가까이 벌려버린 기대이하의 감독으로 평가될 수밖에 없다. 팀 안팎에서 모두 동의하는 그의 최대 단점으로는 경기를 너무 쉽게 던져버리는 듯한 운영을 한다는 것.[26] 본인 나름대로는 길게 보고 당장의 한 경기에 연연하지 않는다는 생각인 것 같지만, 보는 입장에서는 영 맥이 빠진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최상위권 전력을 가지고 시작해서 상위권을 달리다 4위와의 승차가 8, 1위와의 승차가 17이 되도록 하며 프런트의 기대에 전혀 부응하지 못한 감독의 입장은 상당히 난처하게 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내일이 없는 경기를 하면 SK는 붕괴될 것이 분명하다. 팀의 미래를 생각하면 김용희의 판단은 현명하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시즌 초기 서진용의 조기 아웃과 관련해 혹사 논란에 시스템 야구의 무용론 얘기가 나왔던 상황까지 갔음에도 김용희 감독이 자랑하던 혹사없는 시스템 야구는 결국 후반기 5위 경쟁에서 그 진가를 드러냈고, 결국 5위를 차지하면서 오랜만에 팬들에게 포스트시즌 경기를 선사해 준 업적은 높게 평가할 수 있다고 봐야한다. 경기 종료 후에도 "팬 여러분에게 죄송합니다." 라는 언급을 하면서 전임 감독과는 다른 인성을 보여준 것도 어찌보면 팬들 입장에선 미워할래야 미워할 수 없는 존재가 된 것의 가장 큰 요인.
요약하자면 세세한 경기 운영 면에서는 아쉬운 점이 많지만 그래도 감독으로써 나름대로의 역할은 하고 있다는 것이 총평이다. SK에서 이렇게까지 무너진 가장 큰 요인은 이전 소속팀 감독 시절의 스타일에서 벗어나지 못한 데다가 2군 감독 시절이나 육성총괄 시절의 명성에 비해 1군 감독으로는 한계가 굉장히 뚜렷하게 드러난 것. [27]
결론적으로 2015년 와이번스 팬들의 총평은 대체로 기대에는 못미치는 감독이지만 그렇다고 딱히 싫지도 않은 감독. 실제 2015시즌 종료 이후 비판이 많았지만 대부분 임기를 지켜줄 것을 주장했고, 구단도 받아들였다. 다만 2016년에는 재계약으로 인한 조급증 때문인지 서서히 문제가 생겨났다. 시스템이 망가지면서 성적이 하락하는데에 대한 대처가 부족하고 타선은 뻥야구 일변도가 되면서 부침이 심해지고 투수진도 롤러코스터에 혹사는 그나마 적던 감독이 시즌 중반부터 채병용을 필두로 조짐을 보이고...어느 정도 한계가 뚜렷한 감독이란 것을 다시 한 번 스스로 보여준 셈이다.
상술한 SK 시절의 경력 이전의 롯데나 삼성 시절을 되돌아보더라도 이 시스템이란 것을 꽤나 강조했는데, 그 당시의 표현을 빌리자면 '순리대로 돌아가는 야구'이다. 시즌 초에 구상된 전력을 토대로 플랜이 짜지면 그에 따라 시즌을 소화하면서 부족한 부분을 세세하게 채운다, 변칙없이 순리대로 간다는 식의 행동원리인데, 이것이 잘 구현된 경우가 1995년 롯데 자이언츠의 경우이다. 이 해 롯데는 승률 .560을 마크하며 한국시리즈 준우승까지 차지할 정도로 강팀이었는데 이는 김용희 감독의 플랜대로 부상 등으로 인한 선수 이탈이 없으면서 시즌 중후반부 박정태의 복귀 등 굉장히 순탄하게 시즌을 소화할 수 있었다. 즉, 플랜을 구성하고 변수가 없다면 나름 괜찮게 돌아간다는 뜻이다. 문제는 이러한 계획, 플랜 A가 잘 돌아가면 괜찮은데 각종 변수로 인해 그 계획이 틀어졌을 때의 대처 능력이 상당히 떨어졌었단 점에 있다. 흔히 말하는 '플랜 B'에 대한 준비가 미흡하다는 뜻인데 그 이후의 롯데 성적이 688이라는 것이 이에 대한 증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1996년만 봐도 전해 한국시리즈 준우승팀인 만큼 시즌 초 전력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지만 잦은 부상으로 인한 선수 이탈 및 부진과 그로 인한 운용 미스 등으로 인해 타자들이나 투수들의 세부 스탯 자체는 그렇게 나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5할 승률에 미달되었고, 1997년이나 1998년 역시 부진을 거듭한 결과 2년연속 최하위라는 참담한 성적을 받아들여야 했다.
뭔가 계획이 틀어질 때 '아직은 순리대로 간다'라고 거듭 인내하다가 도저히 계획이 정상대로 돌아오기 힘든 지경이 되어서야 무언가 해 보려고 하는데, 그 시점은 이미 늦어버려서 시즌 전체를 망쳐버렸었다는 것이다. 시스템 야구를 표방하지만 그 시스템의 모든 것이 정상이라 전제된 플랜 A만 있을 뿐, 부진이나 부상처럼 시스템에 문제가 생겼을 때 대처가 굉장히 미흡했다는 문제는 이미 과거부터 안고 있었다는 것이다. 또한 롯데 시절 내내 부상이나 선수의 부침이 잦았다는 것도 되돌아 볼 문제이기도 하다. 눈에 보이는 혹사가 많은 감독은 아니지만 선수 관리 측면에 있어서는 어느 정도 약점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는 의미이다.
삼성 시절 역시 마찬가지이다. 물론 김응용 부임 이전까지의 땜빵 성격이 강한 부임이긴 했지만 적어도 시즌내내는 순리대로 풀어나갔고 임창용은 선수 생활 최초로 심하지 않은 기용으로 그나마 관리받았다. 다만 투수진 문제는 심각해서 정규시즌까지는 그럭저럭 풀고나가던 것이 포스트시즌에 현대를 만나서 합산 스코어 26:4로 말 그대로 처참할 정도로 당하는 동한 손도 쓰지 못했다. 적어도 정규시즌에선 이 정도까지 처참할 정도로 당하지도 않았고 그 해의 현대 유니콘스는 역대급 팀이었기도 하지만 그에 대한 대처가 너무나도 부족했다. 단지 누구나도 알고 있는 1년짜리 땜빵 감독이었기 때문에 많이 회자가 되지 않을 뿐.[28]
정리하자면, 감독 경력 내내 일관적으로 시스템과 순리를 강조하는 편이다. 심한 무리는 하지 않고 주어진 전력 구상에 공을 들이며 그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타입이라는 것. 하지만 이 전력 구상에서 무언가 틀어질 경우에 대한 대비가 미흡하고 그 대처 역시 심하게 떨어진다. 어떻게 보면 대처없이 팔짱끼고 끄덕끄덕 아직은 순리대로 가자만 되뇌이다가 이미 늦은 시점에서 뭔가 해보려하지만 이미 틀어진 상태에서 그것이 악영향을 주기도 하는 등 단점도 굉장히 극명하게 드러난다. 즉 이러한 점이 2군 감독으로는 큰 능력을 발휘했으나 1군 감독으로는 한계가 굉장히 뚜렷한 모습으로 드러난 가장 큰 이유였다는 것.
5 기타
롯데 감독 시절 마산아재들이 경기 후 즉석 청문회를 연 적이 있었다.
아재들 웃통까고 버스 나오는 길 앞에서 가부좌 틀고 앉아서 대기하고 있음.다른 아재들이 버스 존나 두들기면서 "감독 나와본나! 어이! 감독 나와본나!"
이러니까 김용희 나옴...ㅋㅋㅋㅋㅋㅋ
김용희 "와예?" (존나 개좆밥 새끼 내가 프로야구 감독만 아니었어도 척추를 접어버렸을거라는 짜증 섞인 표정)
아재1 "마! 우예 된기고? 박정태 절마저거 살 와 저렇게 마이 찌가 게임 뛰는데???"
김용희 "살 아입니더, 다 근육입니더"
아재2 "내 어제 호프에서 박계워이 봤는데, 선수들 관리 안하는갑제?"
김용희 "아이라예...잘못보신깁니다."
아재2 "내가 봤는데?"
김용희 "따블헤다 하고 오늘 새벽에 내려왔다 아입니꺼...지금 부상선수가 쪼매 있어가 이라지 쪼매만 참고 기다려주이소"
아재3 "아따 근데 김용희 미남이네~키 메시고?"
김용희 "90입니더" (곧 끝날것을 직감하고 씩 쪼갬, 버스기사 반 시동 걸음)
아재3 "어이 아재들요, 우리 롯데 잘하라고 화이팅 함 해주입시더 으이? 자! 롯데 화이팅! 김용희 화이팅!"
아재들 일동 만세 삼창하고 젤 앞에 서 있던 아재랑 김용희랑 악수하고 김용희가 버스에서 생수 가져와서 아재한테 주니까 모세가 바다 가를때보다 더 빠른 속도로 길이 쫙 생김.
PC 통신 시절부터 돌아다니던 글이었는데, LG가 상위권을 찍다 처참하게 무너지던 2011년 8월 잠실 청문회 사건이 용두사미로 끝나자 이 해프닝에 비교되는 사례로 다시금 발굴되어 야구 커뮤니티를 비롯한 도처에 글이 퍼졌고, 이후 롯데의 상황을 제대로 표현한 명문(…)으로 인정받고 있다. SK 감독 취임 후 다시 회자되는 중. 해당글은 국내 야구 갤러리의 나이 많은 고정닉 유저가 처음 작성했으나 원 출처는 표기가 안 되고 글만 돌아다니고 있다. 카더라가 아닌가 싶은 의혹도 제기되었지만 이태일 NC 사장이 기자 시절에 벌어진 일이었다고 증언도 한 만큼 실제로 벌어졌다는 건 확실했던 것으로 보인다.
엄청난 주량을 자량한다. 고대 신입생시절 3시간만에 소주 24병을 마셨다는 전설이 ㄷㄷㄷ
노안에다가 한국프로야구 초기부터 코칭스탭을 해서 나이가 굉장히 많은 줄 알지만, 1955년생으로 2015년 현재 대한민국 나이로 61세밖에 안 되었다.저 정도 경력에 나이 60이면 엄청 젊은 것이다.
SK 와이번스 감독으로 부임한 후 흠잡힐 곳 없는 인터뷰 스킬과 무난한 행보로 인해 용감등의 애칭으로 불리고 있다. 팬들의 마음을 훔치겠다는 발언 때문에 루동님, 도동님 등으로도 불리기도 한다. 하지만 현실은 끄동님 인터뷰 스킬 만렙으로 유명한 염경엽과 입터는데 전문인 입동님과 인터뷰로 붙으면 누가 이길까나??
190cm가 넘는 장신때문인지 최훈 프로야구 카툰에서는 얼굴이 길쭉하고이문세?? 안경 쓴 비룡으로 묘사되어 있다. 물론 에피소드 상 쌍댕이가 안경을 쓰고 비룡 옆 에서김용희가 양상문보다 5살 많은 형이라서 형님 형님 거리는 묘사가 LG와 SK가 만나면 유난히 감독들의 병림픽이 벌어지기 때문에많다.
- ↑ 1998년 올스타전 직후 해임.
- ↑ 2001년 7월 24일 심장마비로 사망.
- ↑ 현재의 부산광일초등학교. 1998년 남일초교와 동광초교가 통합되어 광일초등학교가 되었다.
- ↑ 이 시즌만 수비율로 선정했다. 1983년부터 베스트 10과 통합 시상.
- ↑ 롯데 자이언츠 시절에는 한국시리즈까지 가지 않았냐 라고 반론을 할 수 있겠지만, 결국 롯데에서도 임기를 못 채우고 떠난 걸 생각하면 육성 능력도 있었으면서 덕장이긴 했지만 명감독이라고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거의 없는 편. 롯데 자이언츠 감독 시절에는 그 성적에도 현재처럼 이렇게 비호감이지 않았던 이유는 후술할 하단 내용 참조.
- ↑ 그의 나이 24살이었다.
뭐요!? 42가 아니고? - ↑ 실업과 대학을 망라해 모든 선수들이 모교의 유니폼을 입고 벌이는 대회. 프로야구의 원형 격이고, 이 대회를 주도한 이용일, 이호헌은 뒷날 KBO의 초대 사무총장과 사무차장이 된다.
- ↑ 드림리그
- ↑ 와일드카드 결정전 敗
- ↑ 허구연 다음으로 빠르다. 참고로 그 다음이 염경엽, 김기태로 둘 다 45세 때 감독이 되었다.
- ↑ 본인은 당시 한국시리즈에 대해서 최선을 다했기에 후회는 없다고 한다. 다만 상대팀 감독이 산전수전 다 겪은 김인식이었고, 자신은 겨우 감독 2년차라 지략적인 면이 모자라 여러 경우의 수나 경험 등에서 자신은 우승까지 시간이 더 필요했던 거였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 ↑ 롯데 감독으로 재계약에 성공한 나머지 한 사람은 제리 로이스터.
- ↑ 이 세명은 전부 당시 삼성 1군 감독 경력이 있었다.
- ↑ 참고로 공식 프로필은 1958년생이라서 당시 주루 코치였던 이순철(1961년생)보다 나이가 분명히 많은데 출생신고가 늦어서 실제로는 1956년생이라고 하며 심지어는 김용희와 동갑인 1955년생, 심지어는 1954년생이나 그보다 더 일찍 태어났다는 말도 있다.(...) 이렇게 나이가 많은 탓인지 당시 후배들한테 타격 기술 과외를 가르치며 코치들이 불만을 품었다고 하며 삼성 시절 프로필은 1961년생으로 등록.(...)
- ↑ 감독 임기 내내 선수들과의 이렇다할 잡음이 없었다는 점, 포스트시즌 진출 이후 두 번째 임기에서도 아쉬운 경기 운용과 그로 인해 성적에서 롤러코스터를 탔다는 점이 유사하다.
- ↑ 2015년 개막 때 SK는 우승전력으로 평가받았기 때문에 오히려 초반에 안좋은 것이 더 이상할 것이다.
- ↑ 현 KBO의 추세상 감독 계약은 2년 계약이 로우리스크 하이리턴이라고 보는 시각이 많기 때문이다. 구단 입장에서도 2년 계약으로 지켜보는 것이 중도 경질을 최소화하고 구단 운영 비용의 손실을 절감할 수 있기 때문.
- ↑ 그 이만수 당시에만 해도 선수단 문제, 구설수 문제로 논란이 크게 두드러진 것이지 김용희 감독 임기 시절처럼 경기 내적인 문제로 이렇게까지 이야기가 나온 경우는 손에 꼽았다.
- ↑ 아이러니하게도 이 범주에서 거의 예외가 되는 케이스는 롯데 자이언츠 시절 그의 후임 감독이었던 김명성 감독이나 현 대한민국 국가대표 전임감독인 김인식 정도밖에 없다는 점.
- ↑ 특히 살려조의 주요 투수들은 2016년 시즌 내내 SK 상대로 성적이 상당히 좋다. 그 중에서도 특히 장민재와 권혁이 중심에 있었으며, 권혁은 시즌을 거의 공쳤던 2014년을 제외하고는 삼성 라이온즈 시절부터 꾸준히 SK를 상대로 매우 강한 모습을 보여왔다. 2016년 기준으로는 SK 상대 1점대의 ERA를 기록함과 동시에 2년만에 SK 킬러 기질을 다시 보이고 있는 송창식 도 2016년 한정으로는 저 범주에 해당될 수도.
킬성근이 죽이려던 것을 예토전생 - ↑ 아이러니하게도 현재 김용희 감독이 추구하는 시스템 야구를 가장 잘 구사하고 있는 구단은 바로 저 고척을 연고로 하는 옆 구단이라는 것이다. 4월 서건창의 부상 이후 김지수, 서동욱 등의 선수가 재등장했으며 송성문이라는 유망주까지 등장한 상태다. 그리고 최근 이택근의 부상이라던가 혹은 기존 주전 외야수의 휴식시 누가 그 자리를 훌륭하게 메웠는지 생각해 봐라. 바로 고종욱, 박헌도를 그 예로 들 수 있다. 그리고 군에서 제대한 홍성갑, 현재 2군에서 몸을 만드는 중인 거포 유망주 강지광도 있는 이상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한지 ?
- ↑ 서진용은 결국 토미 존 서저리를 받고 2016년 후반기에서야 복귀할 수 있었다.
- ↑ 단 이는 필승조로 등판을 자주 하다보니 과부하가 걸린 것일 수도 있는 것이, 현재 문광은이 먹은 이닝이나 투구수 모두 올 시즌이 커리어 통산 최다라는 점이다. 정우람이 주자를 삭제한 덕이 있었음을 감안해도 평균자책점이 한 달만에 2 가까이 수직 상승한 것은 과부하가 가장 큰 요소임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
- ↑ 단 이는 윤길현이 블론세이브는 단 2개밖에 기록하지 않았다고 해도 이것은 현 SK 와이번스의 불펜투수진을 생각하면 어쩔 수 없는 결정이었음을 감안해야 한다. 실제로 5월 윤길현이 마무리를 보던 시절 윤길현의 기록을 살펴보면 블론세이브는 딱 2개뿐이었지만, 이는 수비의 도움을 많이 받았기에 가능했던 것이 5월 당시 윤길현의 평균자책점과 WHIP 수치는 각각 2점대 후반과 1.5대의 WHIP로 10개 구단 마무리 투수 중 최하위에 해당되는 기록이었으며, 당시까지 5개의 블론세이브를 기록했던 윤명준보다도 더 나쁜 기록이었다 ! 수비의 도움이 없었으면 윤명준보다 더 심하게 당했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 김용희 감독이 아무 생각없이 윤길현을 마무리에서 내린 것이 아니다. 세상에 어느 구단의 감독이 1.5라는 높은 수치의 WHIP가 나오는 불펜투수를 마무리로 믿고 맡기겠는가 ? 불펜투수는 한 점도 내주지 않는, 거기에 마무리 투수라면 한 명도 내보내지 않으려고 하는 피칭을 해야 한다.
- ↑ 참고로 현 10개 구단 마무리 투수 중 정우람을 제외한 마무리 투수의 WHIP (이닝당 출루 허용율).가 가장 낮은 선수는 공교롭게도 양대극장
미미극장의 봉꽃놀이는 어째서...이 둘의 7월 현재 WHIP 수치는 단 1.11밖에 되지 않는다. 정우람의 WHIP는 7월 현재 0.91인데, 문제는 마무리를 그래도 믿고 맡길 수 있는 수치인 1.20대를 기록하고 있는 선수는 공교롭게도 이재영과 채병용 단 두 명뿐이다. 이재영은 정우람의 도움을 받아서 저 정도로 기록하고 있는 것은 말할 것도 없으며, 실질적으로 남는 것은 채병용 단 한 명이라는 사실인데 채병용은 밴와트가 전력에서 이탈한 현재는 대체 외인 선발이 등록되기 전까지는 임시 선발 전환이 불가피한 상황이며 평시에도 롱 릴리프를 거의 유일하게 맡고 있는 상황. 쉽게 말해 정우람을 제외하고 WHIP 수치상으로 마무리를 믿고 맡길 선수가 SK에는 현재 단 한 명도 없다는 이야기다. 게다가 2016시즌 그 정우람이 한화로 떠나면서 아예 한명도 믿을 수가 없게 되었다. 박희수가 건강하게 돌아온 것이 다행이지만, 지금도 박희수까지 가는 과정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는 상황. - ↑ 물론 시즌 후반에는 당연히 그런 거 없었지만, 그때는 5강 다툼 하는 상황이라...
- ↑ 사실 지금 SK에서 이 정도를 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용하다고도 의견을 낼 수 있는게, 이 팀은 프런트가 만악의 근원인지라...프런트가 경영을 제대로 못 하는 구단은 성적이 따라올 수 없다는 것을 지금 SK 와이번스가 잘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재미있는 점은 그가 처음으로 감독 커리어를 시작한 롯데 자이언츠도 이 시기엔 막장 프런트로 유명했다는 점.
- ↑ 이 해에는 실제로 삼성 라이온즈 구단에서 김용희 감독에게 동기부여를 제대로 제공하지 않은 점도 감안할 필요가 있다. 당시 삼성 구단이 김응룡 한 명을 잡기 위해 사활을 걸었던 사정을 생각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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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은 감독, 박철순은 선수인 시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