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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관
유신의 인사들 중 일본군을 창설한 인물들은 구미, 유럽 등지에서 근대 군사 사상과 개념을 일본 사회에 맞게 변형시켜 들여왔다. 그러나 이것이 과거의 폐습[1]과 결합하여 시너지 효과를 내며, 결국 태평양 전쟁에서 그 비참한 결과를 만들었다.
사실 태평양 전쟁 이전인 중국 전선에서는 일본군이 많은 승리를 거두었으나, 몽고-만주 접경에서 소련군을 얕보고 선빵을 날렸다가 엄청난 피해가 났다. 이것이 바로 할힌골 전투. 이때 바로 정신을 차려야 했지만, 일본군은 자신들의 패배로부터 학습을 하지 못했고, 별 다른 개선점 없이 그냥 여태까지 하던 그대로 쭉 밀고 나가기만 했고, 이것은 인류역사상 가장 참혹한 재앙의 시작이었다. 여기에 대해서 일본은 당시에 투입된 소련군은 매우 정예였다는 말을 하는데 실제로는 대숙청의 영향을 받아서 당시 상황에서는 정예급이라고 보기에는 문제점이 많았고, 이후 대숙청에서 살아남은 장교들이 훈련을 했으며, 모스크바 전투때는 다른 정예병력이 초토화된 후라서 유일한 정예병력으로 남았기 때문에 원거리에서 동원된 후 나치 독일군을 패퇴시킨 전력으로 성장한다.
일본군이 아시아를 재패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다른 아시아 국가들의 군대가 제대로 근대화/조직화되지 못했기 때문이고, 일본은 당시 아시아에서 가장 탄탄하고 강대한 경제력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은 1910년, '독점자본주의' 단계로 넘어가게 될 정도로 경제력이 커진다. 여기에 제1차 세계대전을 정점으로 엄청난 경제성장을 이룩한다. 당장 1919년의 일본의 경제성장률이 20%까지나 됐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은 '연합국'측으로 가입했었으므로 이러한 이점을 누렸으며 이는 일본이 소위 '문화'통치를 할 정도의 여유를 가지게 된 것.
명목 GDP 자체는 중국이 아시아 1위였지만 그게 일본처럼 제대로 근대화되고 기업화된 경제력이 아니라 단순히 인구가 많아서 1위였다는게 문제였다. 중국은 청대부터 내부의 문제와 열강의 침략정책으로 국력이 약화되어있었고, 이러한 문제점으로 인해 중국의 국력은 지방별로 분열되어 중일전쟁 발발때까지 해결되지 못했다. 결국 중국은 실질적인 경제력면에서는 일본에 비해 현저히 떨어졌다. 특히 이런 오합지졸 군벌들이 심지어 중일전쟁 중에도 완전히 따로국밥으로 놀았던지라 중일전쟁 당시의 중국은 사실 하나의 나라로 엮어서 보면 안되는 수준이었다.
일본군은 일단 아시아에서는 최강이었다. 이미 언급했던 것이지만 1919년의 일본의 경제성장률이 20%였다. 청일전쟁이나 러일전쟁에서 보여준 판단력 역시 그렇게 나쁜 수준은 아니었다. 물론 203 삽질같은 사건이 있었지만, 당시 시점에서 육군 선진국인 프랑스, 독일도 훗날 참호전에서 병사들이 녹아내린 것을 보면 정상참작의 여지는 있다. 그래도 이 때는 언플이나 포로에 대한 대접, 보급로 확보 측면에서 괜찮기라도 했다. 심지어 적에게 포로로 있다 잡힌 병사들에 대해 딱히 기밀을 분 게 아니라면 터치하지 않았고, 칭찬할 게 있으면 훈장도 줬다.
그러나 일본은 지속된 승리로 스스로의 역량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자국의 역량을 과신했다. 보통 그 시점을 대략 1919년 시베리아 출병으로 잡는다. 그러나 일본은 급격한 근대화의 여파로 이어진 군국주의 체제에서 정상적인 판단력을 잃어가기 시작했고 결국 일본은 중국에서 이들의 역량으로는 소화할 수 없을 정도로 전선을 늘렸으며, 끝내는 끝판대장 진주만 공습을 해버리며 급격히 그 허실을 드러내게 되었다.
태평양 전쟁 초기의 일본군은 그래도 다른 나라에 비해서는 오히려 상태가 좋았던 편에 속한다. 본격적으로 보급이 후달리거나 이러는 것도 아니었고[2] 기술격차도 그리 안 심했다.[3] 대전 발발 시점만 하더라도 십수척의 전함, 항공모함이나 중일전쟁으로 단련된 우수한 파일럿을 포함해 그동안 쌓아둔 해군 전력이 좀 되기도 했다.
태평양 전쟁 직전 당시에 영국은 나치 독일과 영국 본토 항공전을 치르는 탓에 외부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고, 미국도 본격적인 전쟁은 아직 안 생각했다. 네덜란드는 아예 본국이 나치 독일에게 점령당한 상태였다. 중국군은 비록 여러 난관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분투했지만 사실 장제스의 중앙군같이 중국군에서 우수하다고 취급받는 부대들도 따지고 보면 그냥 좀 싸울 줄 아는 알보병이었다.(직속군 중에서도 뛰어났던 독일식 사단들도 인원와 장비가 완편되진 않았다.) 즉, 전차, 항공기, 함포, 포병 등지에서 녹아내리긴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중국군이 좀 더 버티게 된 때는 그런 우수한 알보병을 대포 사료로 던지기를 그만두고 험준한 내륙으로 숨어들어가 지형, 민심의 힘+더 저질이긴하나 여전히 많은 보병+플라잉 타이거스+더 나아진 대일 전략으로 버텼을 때다. 그리고 그 장제스 중앙군도 전체 병력은 몇 개 사단에 불과했기 때문에 이들 역시 수세에 처했다.
오송 크리크 전투에서 일본군이 1개 사단이 날아가는 등 커다란 피해를 입었다고는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일본군의 예상에 비해 큰 피해였지 실제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략적 포위 등에 힘입어 오히려 중국군이 대패했다. 사실 중국군 입장에서 보더라도 이전에는 진짜 오합지졸이었던 중국군이 그래도 좀 싸울 줄은 아는 군대라는 점이 확인된 것 빼고는 이건 좋게 쳐주긴 어렵다. 태아장 전투, 백단대전도 결과론적으로 볼 때 전략적 의미가 있다 보기도 어렵고. 그러나 그 이상으로 중국으로의 보급이 일본군 기준으로 심각한 애로사항이었다.
게다가 일본군은 난징 대학살과 신멸작전을 일으켜 광활한 중국 본토에서 민중의 지지를 전혀 못 받게 되었다. 따라서 아무리 많은 병력을 넣어봐야 연안지대의 점과 선, 그것도 상하이, 천진 같은 대도시와 각 도시 사이를 연결하는 철로 주변 정도만 점령할 수 있었다. 이에 후방의 드넓은 농촌지대에선 마오쩌둥의 공산당이 게릴라전으로 일본군을 괴롭혔고, 장제스의 국민당은 깊숙한 내륙지대에서 버텼다.
결국 일본군은 국민당, 공산당, 군벌을 섬멸해서 전쟁을 끝내기엔 중국 땅이 너무 큰 관계로 병력부족과 병참선의 압박이 심하고, 그렇다고 철수하기엔 이미 너무 많은 것을 쏟아부은 그야말로 막장상황을 맞이하게 된다. 그렇다고 중국 안쪽으로 진군하면 할 수록, 보급선이 길어져서 차단당할 위험이 있었고, 지형지물도 모르는 곳에서의 전투는 게릴라에게 기습당하기 딱 좋았다. 또한 아무리 교환비가 우월하다 해도[4] 중국군을 상대로 끝도없이 싸우다가는 일본의 인적자원이 먼저 고갈될 지경이었다.[5] 따라서 이러한 막장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태평양 전쟁 이전에 서구의 중국 지원을 차단해 중국이 제풀이 나가 떨어지게 하는 것이 일본의 주 전략이었고, 이를 위해 하이난도를 점령하고, 인도차이나로 진출해 하노이 루트를 차단하고 결국에는 태평양 전쟁 시점에서 버마까지 갔다 문제는 이 전략으로 인해 전선은 이미 일본군이 감당이 어려워질 정도가 되었다는 것이다.
한편 아시아에 주둔한 영국군은 그 식민지군을 구성한 병력들의 사기가 영국군의 제국주의 등으로 인해 그닥 높지 않았다. 꼭 식민지군이라 해도 2선급만 보낸 건 아니다. 당장 스페인의 아프리카 군단만 해도 당시 스페인군 최정예부대였다. 그리고 미군의 경우도 필리핀 주둔 미군은 당시 기준으로 상당히 정성을 들인 축에 속했다. 당장, 일본군의 경우도 관동군이나 조선주둔군 등이 본토 주둔 병력에 비해 질적으로 떨어졌다 보기도 어렵다. 그 영국군도 북아프리카 식민지 주둔 병력이 그리 질이 떨어졌다 보기도 어렵다. 다만, 식민지인으로 구성된 동아시아권 주둔 영국군 부대의 질이 좋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다.
심지어 이 때의 영국군은 대전차 장비도 부실했다. 그나마 해공군 지원을 받았다 치더라도 그것은 일본군만큼 압도적이지는 않았다. 다만, 말레이, 싱가포르 등지에서의 화교들은 사기가 충만한 축에 속했고 수적 우위 측면에서 그렇게 일본군에 밀리지 않았다는 점, 그리고 제법 먹고 사는 싱가포르가 꽤 든든한 요새였다는 점이 위안거리였다. 다만 영국의 경우 전황이 호전되고도 적어도 무장에서는 그리 바뀌지 않았다. 영국은 2차대전 내내 아시아 전선을 퇴역 병기의 처분장으로 봤다. 당장 현역으로 굴러다니던 처칠 같은 전차 말고 마틸다 전차가 굴러다녔던 걸 보면... 마틸다 전차는 보병전차라는 괴악한 컨셉에 의해 탄생되어 초기에 전차전만 할 줄 알고 철갑탄만 싣고 다녀 고폭탄이 하나도 없어 대전차포 등에 허무하게 박살나는 게 다반사인 전차여서 이미 2차세계대전 중반기엔 장갑 좀 두꺼운 것 외엔 장점따위 없음.이라고 평가받고 일선에서 물러난 전차였다. 그리고 태평양 전선에 건너와서 일본군이 뭘 하든 멀쩡한 사신으로 둔갑했다(...).[6]
유럽에서는 그다지 호평받지 못한 2파운더로 치하를 저지 가능했던 사례처럼, 태평양 전선에서는 평균적인 무기체계의 위력이 유럽 전선에서보다 낮은 수준이었던 것은 확실하며, 그 낮은 정도가 연합국보다 추축국 쪽에서 훨씬 심했을 뿐이다. 게다가 일본군 측 기록을 보면 마틸다가 전선에 굴러 다니고 있어서 공격했더니 대전차 포를 쏴도 튕겨내고 자폭돌격을 했는데도 옆 장갑 구멍나고 멀쩡하게 공격해대서못 격파하고 물러났다는 기록이 존재한다! 더 기막힌 것은 이 마틸다는 영국군측 기록에 보면 그 다음날 멀쩡히 수리되어 다시 일본군을 짓밟고 다녔다...
최종보스 미군도 진주만 공습[7] 직후에는 눈앞의 피해가 막대한 터라 잠시 제 역할을 못했다. 그래도 필리핀 주둔 미군은 제법 공군세력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그나마도 진주만의 뒤를 따라 박살났다. 그리고 필리핀군의 전력이 그리 좋지는 않았으며 영국군만큼 공중, 해상 지원도 없었다. 그나마 드럼 요새와 바탄 반도 지형의 우세 덕에 힘입어 태평양 전쟁 초기에는 웨이크와 더불어 가장 일본군을 엿먹인 축에 속했다.
그러나 중후반 들어서면서 슬슬 일본군의 한계가 눈에 띄기 시작했다. 영국군이야 45년이 지나서야 다시 아시아에 발을 들였으니 상관없고, 중국군은 그 열악한 상황에서도 대륙 타통작전 등을 통해 어찌어찌 대처를 좀 한 축에 속하긴 했다. 그러나 사실상 미군에게 물량, 무기의 질, 전략, 기타 인프라 측면에서 압도당하게 되었다.
물량이야 일본 당사자들도 다 알고 있던 사안이었고, 무기의 질도 일본은 초기에 좀 나은 축에 속했던 병기조차도 업그레이드가 현저히 디딘 축인데다 그나마 그럴싸한 후속병기들도 미군에 미치진 못했으며 기존분에 비해서도 물량이 딸렸다. 반면 미군은 최고 혹은 그에는 약간 못 미치지만 그래도 몇 년 사이 엄청난 업그레이드를 거쳐 양질의 무기들을 소시지마냥 뽑아대고 있었다. 인프라를 보더라도 일본은 보급에 대한 마인드나 인프라가 현저히 부족했다. 정보전에서도 미국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이에 더해 심지어 오키나와인도 고기방패 취급하던 일본에 비해 미국은 점령지역 주민들과 차라리 사이좋게 잘 지낼 줄 알았다.
이에 더해 일본군은 같은 추축국인 독일과 제대로 협력하기는커녕 자기네 육해군 대립도 컨트롤 못했다. 반면, 미군은 자군 내 컨트롤에는 별 지장이 없었을 뿐더러 오히려 전세계적으로 영국, 소련, 중국, 프랑스, 폴란드 등과도 잘 연계했다. 비록 서부전선에서는 영국군에게 한 수 접고 들어가고 소련에게 호구처럼 굴었으며 중국을 너무 몰랐지만 그래도 일본에 비하면 팀웍도 좋았다. 마지막으로 전략을 보더라도 미국은 통상파괴나 잠수함 운용 분야에서 일본과는 비교를 불허했으며 항모 운용은 완전히 역전했다. 또, 전함 운용을 보더라도 일본군은 전함을 거의 놀리다시피했지만 미군은 전함을 수송작전이나 해군 함포지원 등에 적극 활용했다.[8] 육군이야 반자이 돌격이나 정신주의 일색의 1차대전형 군대였던 일본군과 유럽에서 몸소 최신식 기술을 연마한 미군의 기량 차이는 말할 것도 없다. 딱 하나 우세한 것이 있다면 일본군이 방자의 위치에서 개별 지점을 그럭저럭 잘 요새화해서 버틸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걸 좀 잘 한 축이었다고 여겨지는 것은 중반의 타라와 전투나 막바지의 이오지마나 오키나와 전투다. 공군이야 심지어 일본이 가장 전성기였던 시점에도 둘리틀 공습을 당했고 당시 영미권은 폭격기 운용에 관해서 최강의 역량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래서 일본군은 중국군에게 계속 이겨왔지만 미군이 점차 전투력을 회복하고 보강하여 달려들자 전사자 교환 비율은 심하면 1:10, 1:20, 후반기 맥아더의 필리핀 탈환전에서는 1:26에 육박했다. 다만, 이오지마 전투와 비슷하게 전상자를 기준으로 한다면 해당 비율은 훨씬 줄어든다. 출처에 따르면 사상자는 미군쪽도 루존섬에서만 10만은 넘어간다. 루존섬에만 한정하면 일본은 23만 가량이라고 하고.[9] [1][2] 그리고 이전 서술과 달리 일본군은 국제연맹을 탈퇴한 이래 위임통치령으로 보유한 마리아나를 포함해서 주요 지역들을 요새화했다. 여력이 되는한 펠렐리우, 타라와같은 다른 점령지역도 요새화했고. 애초에 일본은 태평양을 쓸어담고 독일이 유럽에서 이겨주길 기다리면서 버티는 것이 기본 전략이었다.
한편 초반에 뜨거운 맛을 본 미군 사이에서는 일본군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슈퍼맨, 정글의 스페셜리스트라는 인식이 컸지만 수기나 포로들의 고백을 통해서 이놈들도 인간이구나라 생각했다고 한다. 물론 미군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일본군의 저항은 그야말로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이어진 때문에 미군은 가면 갈수록 엄청난 화력을 쏟아부었고, 결국 그것은 일본군의 피해를 늘리는 원인으로 작용한다.
일본군이 어찌어찌 반자이 돌격으로 미군의 진지에 돌입하는데 성공한데다, 또한 운 좋게 미군이 일본군과 별반 다를 게 없는 무장을 한 상태였더라도 일본군이 후나사카 히로시가 아닌 이상 육박전으로 돌입하면 미군들이 평균적으로 일본군보다 체격이 더 좋았고, 더 잘 먹고, 훈련 수준도 뛰어나 주먹질과 야전삽만으로도 칼을 든 일본군을 쉽게 제압했다. 심지어는 군도를 든 일본군 병사가 미군 진지를 야습했는데 오히려 맨손의 미군 병사에게 멱살잡혀서 내던져졌다는 극단적인 실례까지 있다(...).
오히려 미군이 야밤에 반자이 어택을 펴서 일본군 진지를 날려버린 적도 있다. 더욱 기가 막힌 것은, 일본군의 정식 작전교리가 "미국, 영국 놈들은 겁쟁이. 작전 계획을 바꾸려는 놈들은 참모감이 못 됨. 닥치고 착검돌격. 일본은 신이 지켜주는 나라다. 근성으로 어떻게든 된다!"였다.어떻게 되긴 개뿔
한편 일본에 징병자원인 남성은 그럭저럭 충분히 있었지만 정작 군인으로 육성할 만한 제대로 자질을 갖춘 사람이 적었고, 일본 경제 자체가 농업의 비중이 상당히 높아서 평소 종사하는 산업 인력의 징집이 산업 자체의 약화로 이어지기 십상이었으니 문제였다. 일본군이 식민지에서까지 지원병을 모집하고 학병 제도를 실시하여 조선인 청년들을 강제로 전장에 끌어낸 것은 다 이런 이유 때문이다. 에초에 일본에 쓸만한 인간이 부족하니 식민지의 인재들까지 끌어다가 총알받이로 내몰았다. 게다가 농사짓는 농부를 전장에 무작정 끌어다 총을 쥐어주면 당근 잘 싸울리가 없다. 전쟁을 어떻게 하는지조차 이해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일본군의 상징으로까지 여기는 일본군도와 긴 총검은 일본군의 기관총 편제와 1만 정만 생산한 1차대전식 기관단총, 75mm 야포가 주력이었던 사단 포병연대의 편제를 따져보면 왜 그랬는지 추론이 가능하다. 참고로 미군과 독일군의 2차대전 중 포병연대 편제는 105mm 견인곡사포가 주력이었고, 155mm 견인곡사포나 150mm 중포를 상설편제에 넣었다.
2 시대에 뒤떨어진 사관학교의 교육과정
결론만 추려서 말하자면 총 든 사무라이를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일본군 육군은 육군사관학교, 일본군 해군은 해군병학교라고 하는 장교 교육기관이 있었지만 교육과정은 시대에 뒤떨어진 내용이 많았다. 이는 "장교 = 사무라이니까 전통 사무라이 교육을 토대로 장교 교육을 펴야 한다."는 고리타분한 인식 때문이었다.
우선 정신교육을 한답시고 교과과정의 상당 부분이 군사학이나 군사기술이 아닌 17세기 사무라이들이 공부한 사서오경류를 가르쳤는데 조갑제의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를 보면 일본 육사 교과 과정의 반 이상이 이런 유학공부였다고 한다. 그나마 이렇게 가르친 유학도 제대로 된 유학이 아닌 유교+군국주의를 섞은 사이비 종교 같은 유학이었고 그 결과 주자어류에 나오는 정신일도 하사불성(精神一到 何事不成) 같은 유교경구를 장교들의 머리 속 깊히 박아 두고 전선에서도 어구에 기반을 둔 작전을 적절히 실현해서 종전에 큰 도움을 주었다. 사서오경을 배웠다면 자연스럽게 배우는 손자병법에서 손무가 첫 장부터 '전쟁이 최선이 아니며,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최선이니 명분이 없거나 국력이 뒤진 상태에서 전쟁을 하는 것은 극력 피하라'고 가르친다. 하지만 일본군은 이것을 상큼하게 씹어먹었고 전쟁은 단기로 끝내서 장기전이 되는것은 최대한 피하라는 가르침이나, 불리하면 자리를 피하라는 가르침은 머리속에서 깨끗하게 지워버렸으며, 오히려 그 가르침을 왜곡해서 보급이란 적에게서 얻는 것이라는 말한 사람도 있었다.
일본군 해군은 그나마 기계를 다루는 일이 많아서 이런 병맛나는 짓은 안...한 듯하지만, 지나치게 기술 과목을 중시한 나머지 리더십이나 위기 대처능력을 기르는데 소홀했다. 해군이라는 군종 특성상 육군 정도까지는 막장이 아니었다고 하지만, 오히려 서구 문물을 잘못 받아들여 자기네들의 편협한 시각으로 잘못 해석해 다른 방향의 병크를 일으키는 등 결국 피장파장이었다.
일본군 공통으로 사관학교 출신에 대한 엘리트주의는 심각해서, 비사관학교 출신에 대한 차별은 엄청나게 심했다. 당시 기술직 장교들은 학사장교 형태로 배치했는데, 더 웃긴 사실은 비사관학교 출신 장교는 아무리 계급이 높아도 사관학교 출신 장교의 명령을 받아야 했다는 것이다. 비사관학교 출신의 영관급 장교조차 사관학교 출신 소위의 명령을 받아야 했다. 이렇게 되니 토목공사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사관학교 초짜 소위가, 수많은 공사판에서 경험을 쌓은 비사관학교 출신 영관급 공병장교를 지휘하는 경우도 벌어지는 등 군대라기보다는 조폭에 가깝게 운영되었다. 사관학교 출신의 차별이 심한 한국군도 이 따위 짓거리를 시도라도 했다가는 닥치고 하극상으로 군법회의 감이다. 아니 그 전에 계급이 낮은 부사관에게도 막 대했다가 상관한테 박살나는 것이 현실이다.
사관학교 외에도 육군대학과 해군대학이라는 고위장교를 위한 교육기관이 있었는데, 여기에서도 기본 교육 방침 자체가 같은 출발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군의 문제점은 자체적으로 고쳐질 가능성이 애초부터 0%에 수렴하고 있었다.
3 일본군의 무기체계
더 자세한 내용은 일본군/무기체계와 일본군/무기 참조. 그런데 무기 체계가 문제점 항목에 있다. 그만큼 문제가 많다는 뜻.
4 문제 많은 인사제도
일본 해군의 경우 졸업 후 모든 인사고과를 임관한 뒤의 근무성적이 아니라 사관학교 성적으로 결정했다. 즉, 졸업 성적만 좋으면 특별히 큰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 한 대령 정도는 승진을 보장했다. 특히 사관학교에서 포술 같은 병과가 아니고서야 장성진급은 하늘에 별따기였다. 이 때문에 장교들은 튀는 행동을 삼갔기 때문에 승진에서 누락되지 않으려고 소극성과 보신주의를 보여주었다.
사실 이런 보신주의 경향은 모든 군대에서 평시에 자주 보인다. 일례로 대한민국 국군만 해도 공군의 경우 전투기 조종사 출신이 아니면 장성되기가 거의 불가능하고, 육군의 고급 장성은 국군의무사령부 같은 특이한 경우를 제외하면 대부분 전투병과 출신이며, 해군은 거의 모든 장성이 해사 함정병과, 그것도 수상함 출신이다. 일본군의 문제는 이런 인사 고과를 전시에도 했다는 것.
처음부터 성적이 나쁜 사람들은 "내가 요즘 군 생활을 하면서 느낀 게, 최대한 열심히 해야겠어. 근데 나는 성적이 나쁘지? 나는 안 될거야 아마" 하면서 스스로 더 이상의 출세를 포기하고 시간만 때우며 밥벌이만 하려고 드니 적극성을 보일 자세 자체가 없었다. 실패하기만 하면 쪽박인데 성공해도 그대로 현상유지하는 상황이니 누가 나설까? 진주만 공습이나 미드웨이 해전에서 항공함대 사령관 나구모 주이치 제독이 보이던 소극성과 보신주의는 이러한 분위기를 배경으로 한다.
이에 반해 일본 육군은 해군에 비해 성적보다는 적극적인 행동을 하는 사람을 높이 평가했고, 그런 사람들이 승진에 유리했다. 물론 어디까지나 상대적으로라는 거지 일본 육군의 기본적인 방침은 육군대학을 졸업한 사람을 우선 진급시키는 것이다. 비육대 출신은 잘해봤자 최대 중좌까지고 그 이후는 꿈의 영역. 물론 전시에는 달라서 비육대출신이라도 대좌까지 가능하고 참사관 같은 명예직이라면 소장도 바라 볼 수 있다.
또한 군사작전에서 무조건 적극적인 건 절대 좋은게 아니다. 일례로 상대가 진지와 방어선을 구축하고 만일 휘하 부대에 그런 방어선을 돌파할 전력이 부족하다면 그것을 돌파할 수 있는 포병, 항공전력을 참을성 있게 기다리다가 합동해서 돌파하는 것이 가장 기본적인 교리인데, 얘네는 그냥 닥치고 돌격하는 만행을 저지르기 일수였다. 일본군이 무모하게 닥돌을 감행한 반자이 어택과 지하 요새를 건설하여 기다렸다가 방어전을 한 이오지마 전투의 전력교환비를 비교해 보자.
만주사변을 획책한 이시와라 간지, 정부의 명령도 무시하고 조선주둔군을 동원해 관동군을 지원해 만주를 침략한 하야시 센쥬로, 그리고 츠지 마사노부나 무타구치 렌야 등은 무모함을 적극성으로 포장해 높이 평가한 일본육군의 승진고과 시스템이 낳은 기형아들이었던 것이다. 물론 도미나가 교지는 사관학교나 육군대학 성적도 개판이었다. .
이러한 시스템에서 육성된 일본 육군의 고위급 인사들은 대부분 제대로 된 전쟁을 수행하지는 못하면서 하극상, 쿠데타 등 내부의 적 수준의 병크나 일으키는 떨거지들이었다. 정작 고위급의 자리에 올랐어야 할 진정한 실력자들은 이런 떨거지들 아래에서 복무하며 말도 안 되는 명령을 받아야만 했다. 무능한 인간이라도 인맥이나 사상만 맞으면 사고를 쳐도 넘어가고 오히려 멀쩡하고 유능한 자를 잡아다가 일선에서 내몰아버리니 조직이 제대로 굴러갈 수가 없었다.
일본군 똥별의 전통이 면면히 이어져 내려온 것은 이러한 사정 때문이었고 이에 맞물리며 병영부조리도 심각한 수준으로 계속되었다. 물론 모든 조직에서 무능한 상사는 일부 있기 마련이고, 모든 군대에서 병영부조리는 늘 나왔다. 하지만 일본군은 무능한 상사가 적시에 해임되지 못하였고, 이러한 악습들을 오히려 권장하는 쪽으로 갔다. 결국 일본군의 병영부조리는 거의 정신병적 수준으로 커졌다.
육해군이 각기 보유한 항공대의 경우 장교와 부사관과 병이 모두 조종사에 지원할 수 있는 것은 타국과 동일하였으나, 문제는 임관한 조종사들은 거의 대부분 훈련 전의 계급을 유지했다. 훈련을 이수하고 임관한 시점에서도 계급이 그대로니 병 계급의 조종사가 나타났다. 그 병 계급 달고 있던 조종사 중에 하나가 다름 아닌 사카이 사부로.
설상가상으로 진급에도 대단히 인색하여 병 계급의 조종사가 부사관 계급으로 진급하거나, 부사관 계급의 조종사가 장교 계급으로 진급하는 일이 사실상 불가능했다. 앞서 언급한 사카이 사부로도 많은 상급자들이 자발적이고 적극적으로 승진 신청을 넣어준 덕분에 전쟁 말기에 소위로 진급했는데, 이렇게 진급한 사례가 그 이전까지 단 1건에 불과했다.[10] 그래서 주변 사람들은 물론 사카이 사부로 스스로도 일본에서 2명 밖에 못 누린 영광을 누렸다고 말했으니 정말로 말 다했다. 그래서 같은 조종사 동기간에도 계급 격차가 심하므로 조종사 내부에서의 차별과 멸시가 심했다. 이런 점 때문인지 일본산 창작물들을 보면 이등병 전투기 조종사가 당당하게 등장하는데 이것은 실제 일본군의 사례를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어쨌거나 일본군이 이런 삽질을 하는 사이 영국과 같은 다른 나라에서는 조종사로 임관하면 무조건 최소 부사관 계급을 부여했으며, 미국, 영국, 독일 등은 일단 전투기 조종사가 되면 계급이 낮더라도, 심지어 이등병이라도 기본적으로 소위로 임관을 시켜줬다. 이렇게 조종사들에게 타국이 대접을 해준 이유는 어려운 싸움을 하는 격려차원 뿐 아니라 비행기를 정비하는 쪽이나 작전을 명령받는 쪽에 발언권을 준다는 의미도 있었다.
또한 평소 일본군같이 병사들에게 가혹한 갈굼을 하는 곳에서 값비싼 전투기를 이등병에게 주면 전투기째 들고 탈영이 발생할 가능성이 무지막지하게 높다. 이런 무기를 운영하는 사람에게 장교 계급을 주는 것은 앞서 말한 이유 외에도 대접을 해줌으로서 이런 문제를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실제로 각종 전쟁에서 값비싼 무기를 가지고 투항하면 포로수용소에 잡아넣지도 않고 막대한 상금과 함께 영웅으로 대접하는 국가가 많았으며(이웅평 참고) 삐라등을 통해 적군에게 적극적으로 해당 행위를 권장까지 했다. 하지만 일본군은 그걸 무시했기에 조종사들은 불합리한 명령을 받았고, 자신의 희망에 맞는 적절한 정비도 못 받은 비행기를 몰고 사투를 벌여야 했다.
일본군과 같은 추축국 독일 국방군만 보아도 독일 제국 시절부터 독일군, 특히나 참모진영은 철저한 실력주의를 고수해온 덕에 장교가 4천명으로 제한되었던 전간기 시기에도 독일군은 유능한 자원들을 보유했고, 이는 재무장 선언 후 빠르게 군세를 확장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당시 세계에서 손꼽히는 강대국들인 미국, 소련, 영국을 상대로, 그것도 양면 전쟁을 치루면서 한 때나마 모스크바, 런던까지 위협하며 6년이나 전쟁을 끌고 간 건 독일군 사령부와 지휘관들의 능력을 빼놓고는 이야기 할 수 없다.
반면 일본 육군은 그나마 몇 안되는 유능한 지휘관들은 대부분 기껏해야 군단장 정도에 머물렀다. 그 이상의 제대를 지휘하더라도 대부분 후방에서 뒤치닥거리나 하거나 무능한 인간들이 더 높은 자리들에 있었으니 뭐라도 해보고 싶어도 못 그럴 상황이었다. 해군은 그래도 나았지만 육군보다 낫다 정도의 수준이다. 이런 환경에서 아돌프 갈란트나 커티스 르메이 같은 파일럿 출신 지휘관이나 장군이 나올 확률은 거의 없었다. 또한 파일럿의 경험을 통한 효율적인 공군 전략의 수립도 사실상 못했다.
거기에 육군성과 해군성, 그리고 전시에 이 둘 위에 같이 설치한 대본영도 무능으로는 일본군 제일이었다. 거기다 그도 모자라서 관동군과 연합함대까지 끼어 넷이어 파벌 싸움을 하기까지(...) 참고로 현대 일본인들은 오만방자하고 자기만 옳다고 우겨서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을 가리켜 '대본영 참모'라고 하고, 무슨 일이 생겼을 때 물어보거나 보고하지 않고 자기주장대로만 하는 사람을 '관동군'이라고 부른다. 즉 육군 내에 말 안 통하는 대본영과 보고 없이 사고부터 치는 관동군과 한판 붙는 양상이라는 것.
여기에 육군의 경우 육군대학을 졸업해야만 대좌 이상으로 승진 할 수 있었다. 이후 승진은 육군대학의 성적순으로 결정되었고 이것은 어떠한 경우에도 바꿀 수가 없었다. 그런데 육군대학을 가려면 일본육군사관학교 졸업 성적 상위 20%안에 들어야 응시라도 할 수 있었고, 육사에 가려면 유년학교를 나와야 했다. 전혀 예외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즉 비육사, 비육대 출신이라면 어떠한 대공로를 세워도 이 구조를 깨트릴 수가 없었다. 비육대 출신이 대좌로 승진하려면 중좌에서 전사하여 1계급 추서받는 방법 밖에 없었다.
5 일본군의 육해군 대립
일본군은 봉건적인 문화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집단이었다. 당시 일본군을 이끌던 대부분의 구성원에게는 국민개병제를 시행하는 근대국가의 군대로서 국민과 정부를 대신해 무력을 행사하여 국가의 권익을 보호한다는 개념보다 자신이 속한 파벌의 안녕과 이익이 더 먼저였다. 싸움을 적을 이기기 위해서라기보다, 상대 파벌을 이기기 위해서 했다.
전쟁에서 승리하는 전략보다 '우리 파벌이 주역을 맡고 적대 파벌은 그저 거드는' 전쟁 상황을 연출하려는 노력이 우선이다 보니 실효성 없는 작전계획으로 설전이 오갔고, 군 상층부의 정당성에 의문을 표하는 '양심적이고 상식적인 발언'이 있으면 곧 반대 파벌 입장에서는 축출의 좋은 건수가 되었다.
기록만 살펴보면 일본군의 전장 확대는 이따금 굉장히 충동적이고 무계획적으로 저지르고 보자는 식으로 한 듯 보이는데 그 실상을 따지고 보면 결국 "우리 파벌도 뭔가 한 건 올려야겠다!"는 의도에서 시작한 경우가 많다. 진주만 공습 역시 마찬가지다. 크게는 해군과 육군의 대립 문제부터 작게는 옆 부대간의 알력다툼에 이르기까지 이 파벌 문화는 전쟁 시작부터 끝까지 일본군의 발목을 붙들고 늘어진 커다란 약점이었다. 사실 이러한 파벌 문화는 일본군만이 아니라 일본 사회 전체에 만연해 있었으며, 현대에도 기업이건 정부 기관이건 정당이건 일본의 조직을 묘사하는 작품에서 파벌에 대한 내용은 빠지지 않는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항목 참고.
6 전투교리와 훈련의 막장성
육군의 기본 훈련 기간은 24주로 미군의 14주에 비해 길지만 일본군 교관들은 병들에게 총검이 필수적인 공격무기라고 가르쳤다. 총이 아니라! 총검술 자체는 다른 국가에서도 가르쳤으나 당시 일본의 총검술은 근접전 때의 격투술이 제외된 구식적인 총검술이었다. 또한 파일럿과 기관총에도 검을 적용할 정도로 그 정도가 타국 이상이다.[11] 또 개개인의 조준사격보다는 부사관이 분대의 사격을 지휘하는 공동 소총 사격을 강조했다. 위에서 나온 교리를 봐서 알겠지만 제대로 싸울 만한 군인이 아니었다. 참고로 국군 훈련소에서는 피치 못해 총검술로 근접전을 하더라도 기회가 온다면 사격하여 적을 처리하는 게 최선이라 가르친다(...)
정글에서 행군을 할 때는 무조건 분대장이 앞서고 그 뒤로 병사들이 한 줄로 나란히 걸었다. 이 때 적과 정면으로 마주치면 당연히 맨 앞의 분대장이 죽고 분대장의 위협으로 간신히 유지하던 부대는 병사들이 도망치며 순식간에 와해됐다. 군대에서 이동 방식을 배울 때 안전한 후방에서 이동할때나 신속히 빠져나갈 때는 종대로 이동하고 앞에 뭐가 있는지 알 수 없을 때, 정밀한 수색이 필요할 때, 적이 앞에 있음이 확실할 때는 횡대로 이동한다[12]는 걸 생각하면 일본군의 방식은 유사시 분대장은 그냥 죽으라고 한 행동이다. 사실 이 때에도 분대장은 대열의 중간위치에 있어야 되고, 대열의 선두는 부분대장이 위치하는게 기본이다.
일본의 조종사 훈련 과정은 훈련내용이 어려워서 수료에는 50-64개월이 필요했고, 매년 졸업하는 수송기 조종사는 100명에 불과했다. 이 훈련이 성적순으로 잘라서 소수정예의 초인적인 실력을 가진 조종사를 양성하려는 의도...였기는 한데 20여 명을 일렬로 앉혀놓은 뒤 "비행기로 이륙한다고 생각하고 뛰어봐라."며 훈련생을 서전트 점프로 날게 만든다는 황당한 과목도 당당히 정식 훈련과정으로 있었다.
또한 훈련생에게 행하는 신체 검사 중에는, 손금과 골상학 검사도 있었다. (사카이 사부로의 자서전에서 인용) 다만 이것은 당시 파일럿에 지망하는 훈련병들이 일본군으로서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나게 많았던 것이 원인으로 모집인원이 100명인데 후보생 2~3백명의 성적이 A급이라면 그 중에서 정말 사소한 부분이라도 남들보다 우수한 병사를 뽑을 필요가 있었다. 그렇다고 손금까지 보는건 지나치게 오컬트지만(…). 당연히 전쟁 전후로 파일럿의 수요가 늘어나게 된 이후로 이러한 오컬트는 폐지되었다.
진짜 압권은 이렇게 힘든 훈련을 마친 조종사 후보생들을 아주 사소한 규정 위반에도 "정신머리가 썩었다!"면서 퇴교시켜버린 점이다. 사카이 사부로의 자서전 대공의 사무라이에는 "단추를 잘못 잠궜다"고 복장 불량으로 퇴교시키는 일이 다반사였고, 졸업 전날 몰래 술을 마셨다는 이유만으로 퇴교당한 사례가 언급된다. 한 마디로 똥군기 잡느라 자질이 우수하고 열심히 훈련받던 훈련생들을 무더기로 내쳤다.
이 때문에 미드웨이 해전과 필리핀 해 해전 등을 거치며 숙련한 조종사를 대량으로 잃은 뒤에는 훈련과정을 극단적으로 줄여야 했다. 얼마나 시간을 줄였는지 잠깐 살펴보면 1943년 이전 : 700시간, 1943년 이후 : 500시간, 1944년 : 275시간, 1945년 : 90시간이다. 2년 사이에 훈련 시간이 1/8 정도로 급감한 셈이다. 설상가상으로 연합군 쪽은 일단 조종사들 인원도 늘어났고, 어느 정도 경험을 쌓은 조종사는 교관으로 활동하면서 자신의 노하우를 전수했으며, 전쟁 후반기쯤 가면 그동안 양성한 조종사의 숫자가 충분하다고 보고 양성속도를 약간 줄이는 대신 훈련을 크게 강화해서 조종사들의 기량이 상향 평준화했다. 이러니 상대가 될 리가 없다. 생각해보자. 하늘을 나는 라이터(제로센)에서 100대중 몇명이나 살아 남을것인가? 반면 미국은 비행기가 격추되도 조종사 생존률은 상당히 높다. 조지 허버트 워커 부시도 비행기가 격추되서 해상에 불시착했으나 잠수함에 구조되었다. 제로센으로 격추되어 포로가 된 사람은 신의 선택을 받은 사람일 것이다. 그렇게 생존한 조종사는 다시 와서 조종간을 잡지 못하는 부상을 입지 않는 이상 재투입된다. 생사의 기로에서 살아 돌아온 조종사의 경험치는 귀중하고, 자신의 기술을 최대한 초보 조종사들에게 가르칠 수 있지만, 이렇게 가치가 큰 조종사를 일본군은 일회용품처럼 소모했다. 이러니 공중 교전에서 일본군이 연합군에게 밀리는 것은 너무 당연한 것이다.
중일전쟁부터 참전한 고참 of 고참인 사카이 사부로 역시 한쪽 눈의 시력을 거의 잃어버리자 출격이 금지됐고 훈련교관으로만 있을 것을 명받았으나 얼마 지나지도 않아서 조종사 수가 딸리자 직속상관들에게 가장 믿음직한 에이스 취급을 받으며 실전에 출격했다. 이때 앞서 말한 같은 책에서 대전 후반에 보충으로 합류한 애송이 조종사들 그 누구보다도 해군 비행학교 시절 퇴교당한 자신의 동기들이 더 뛰어난 조종사였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문구로 일본군을 깠다.
조종사가 아닌 일반 병사들을 징집할 때도 막장이었는데 가령 병사들을 징집할 때 도시보다는 농촌 출신을, 고학력자보다는 학력이 상대적으로 낮은 자가 더 좋은 인적자원으로 간주했고 대학생 이상의 고학력자들은 징집에서 배제했다. 이는 국가에 대한 충성심과 상명하복을 위해선 학력이 높은 게 쓸모없다고 여긴 것이다. 쉽게 말해서 '배운 놈'들은 체제에 반항하고 군기를 따르지 않을까봐 꺼렸다는 것이다. 미국이나 영국, 독일 등에서도 대학생 등을 징집하지 않은 사례는 있었지만 이는 국가를 위한 귀중한 인재를 보존하기 위해서였고, 정 고학력자들이 참전할 때는 가급적 정규 군사교육을 시켜서 장교나 부사관 등으로 임관하도록 했다. 게다가 일본군은 전쟁 막바지에 병력이 부족해지자 부랴부랴 대학생들까지 징집했는데, 정작 이 때는 위의 미국이나 독일처럼 제대로 교육시키지 않고 반자이 어택용 총알받이나 카미카제로 내몰았다.
7 적이 바보라는 전제하에 만든 작전계획[13]
손자병법에도 나오듯이[14] 적을 경시하면 얼마나 위험한 지는 누구나 알 만한 상식인데도 일본군은 애써 그걸 무시했다. 적은 바보라고 계속해서 스스로를 세뇌했고, 그런 전제 하에 작전을 세웠다. 이런 식으로 스스로를 세뇌하는 모습은 1943년 3월 1일 삼간사우의 맴버이자 육군성 군무국장인 사토 겐료 소장이 의회에서 중의원의 질문에 미군을 상세히 해부했다면서 한 답변에서 엿볼 수 있다.
1. 미 육해군은 정말로 실전훈련이 떨어진다.2. 대규모 병단을 상당히 졸렬하게 운용한다.
3. 미 육군의 전술은 전근대적인 나폴레옹 전술로 많은 결점이 있다.
4. 정치와 군사와의 연계가 불충분하다.
읽어보면 알겠지만, 미군만 일본군으로 바꾸면 정확한 일본군 4줄요약이다.
맞고 틀리고를 떠나서 육군 군무국장이 외국 군대에 대해 의회에서 보고하는 것치고는 지나치게 추상적이고 무의미한 내용들이다. 정보 분석 내용이라기보다 미군은 바보라는 것을 토 달지 말고 믿으라는 일종의 선언인 셈이다.
게다가 해군이고 육군이고 애초에 지나칠 만큼 초기 계획에 매달리는 경향이 있었다. 따라서 적이 예상대로만 움직이는 상황을 상정해 놓는 실로 안일하고 심하게 낙관적인 작전 계획이 현장에서의 보고나 정보로 수정될 기회도 없었다.
예컨대 일본 해군의 작전계획에는 야간에 적 함대를 기습하는 내용이 있었는데 이는 적 함대는 야간에 회피나 기만 없이 원래의 진로를 유지하며, 일본해군은 적의 위치를 파악했지만 적은 일본군의 접근을 눈치채지 못한다는 전제로 작성했다. 미군은 레이더를 운용한 것을 감안하면 터무니없는 전제였던 셈이다.
이런 일본군의 작전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일본 함정들은 적에게 발각되지 않도록 서로의 통신을 전혀 않으면서도 자신의 위치와 적 함대의 위치, 그리고 다른 일본 함정들의 위치를 정확하게 파악해서 포위망을 형성한 뒤 정확한 타이밍으로 정확한 지점을 향해 공격을 시작하는 불가능한 묘기를 펴야 했다. 그러나 일본군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할 방안을 고안하는 데는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으며, 오히려 포위망을 더 복잡하고 정교하게 디자인하는 작업에만 골몰했다. 그야말로 쓸모없는 설정놀음 그 자체였다.
일본군의 야간작전계획 같은 것은 그나마 실전에서는 쓸 일이 없어서[15] 그렇다고 넘어가겠지만 진짜 문제는 일본군이 미 해군과 결전을 벌이기 위한 작전의 핵심인 점감요격작전에 있었다.
이는 미국 함대가 접근할 때 동남아시아 여기저기에 매복해 있던 항공기들이 일정한 시간차를 두고 발진해서 미 해군 함정들과 함재기들은 한쪽에서의 공격에 대응하다가 다른 쪽에서 다시 공격을 당하는 식으로 우왕좌왕하다가 큰 피해를 입게 되고 그렇게 만신창이가 된 미국 함대를 함대결전을 통해 결정적으로 격파한다는 것이었다. 듣기에는 그럴 듯하게 들린다.
하지만 일단 준비 과정부터 문제인 것이 일단 비행기를 매복시키고 써먹으려면 활주로가 필요한데 비행기야 숨긴다 치고 활주로를 어떻게 숨긴단 말인가? 과달카날 전투가 시작된 계기가 과달카날섬에 건설 중인 활주로를 보고 그 기지가 완성될 경우 미국-호주 간의 보급선을 위협할 수 있다고 판단되어 서둘러 공격한 데서 시작했으니, 활주로를 숨기기란 어렵다. 물론 나름 숨겨보겠다고 활주로 한가운데 나무를 심었다가 뽑고 이동식 위장 가옥을 이동시켜서 촌락처럼 보이게 하는 등 여러가지 꼼수를 고안했지만 그래봤자 들키는 것은 그냥 시간문제일 뿐이다.
설상가상으로 이 작전을 하려면 미군은 일본군의 위치를 아직 모르는 상태에서 일본군이 미군 함대의 위치를 먼저 파악한 후 각지에 흩어져 있는 기지들이 유기적으로 연합해서 작전을 펼쳐야 하는 것이 기본 전제이다. 즉 미군은 그 많은 항공기를 가지고도 정찰조차 안 하고 무작정 진격하고, 일본군은 고질적인 통신 문제나 지휘권 문제에도 불구하고 사방의 일본군 전체가 정확한 타이밍으로 미군의 위치를 찾아서 공격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 기본 전제가 되는 셈이다.
실제로 도상연습에서 점감 요격 격파 연구(!!)만 하는 장군으로 유명한 나카무라 료죠 중장이 미군을 맡아 연구한 대로 움직이자마자 일본 연합 함대가 일본 근해까지 밀려서 전멸하는 결과가 나왔다. 이 때문에 장교들이 항의하자 그는 구 일본군 2대 명언 중 하나[16]인 "미군이 우리 뜻대로 움직인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문제다!"란 명언을 남겼다고 한다. 이후 나카무라 중장은 2.26 사건 이후 파벌싸움에 얽혀서 퇴역했다.
또한 이러한 사건에도 일본군은 정작 미군 함대를 어떻게 먼저 찾아낼까, 기지들이 어떤 수단으로 통신을 하고 누가 어떻게 작전을 지휘할까도 제대로 고려한 적이 없다. 단지 어떤 타이밍에 어떤 식으로 공격하는 것이 좋을 지만 예술적으로 다듬었을 뿐이다. 그 결과 결전을 위해 준비한 기지들은 미군이 먼저 발견하고 선제공격을 받아서 변변한 저항조차 못하고 처참하게 각개격파를 겪었다.
상식적으로 말해서 넓은 지역에 흩어진 부대들이 지휘권이나 통신 등의 문제로 유기적으로 협력할 수 없다면 부대를 산개시키지 않고 전투력을 집중해야겠지만 일본군은 기묘할 정도로 "한 부대가 적의 주의를 끄는 동안 다른 부대가 작전목표를 달성한다."는, 보기에는 예술적이나 매우 복잡하며 스스로의 힘을 분산시키는 작전을 좋아했다. 이런 복잡한 작전은 적군이 우리 예상대로만 움직여주거나 아군이 우월한 정보력과 기민한 대응능력을 가지고 있을 때나 효과가 있는 것인데, 일본은 정보 수집 능력은 등한시하면서도 적군이 우리 예상과 다르게 움직이는 경우에 대한 대책이 없는 작전을 세워대고 있었던 것이다.
위의 점감 요격 작전도 그렇지만 해전에서도 나구모 주이치가 동솔로몬 해전에서 경항모를 미끼랍시고 따로 떼놓았다가 무의미하게 격침시키는 삽질을 했다. 또한 미드웨이 해전에서도 미군의 수색 및 탐지를 회피하기 위해 함대를 상호 지원이 불가능할 만큼 광범위하게 분산했다. 그 결과 야마모토 이소로쿠의 본대는 나구모 주이치 기동부대가 얻어터지는 사이 아무 것도 못하고 손가락만 빨다가 되돌아왔다. 그러고는 미군의 주의를 끈답시고 알류샨 열도를 공격해서 귀중한 전력을 무의미한 곳에 박아놓고 나중에 구출하러 가느라 고생했다. 게다가 알류산 열도 점령은 원래 계획상으로도 미끼용으로 공격만 하는 것일 뿐 점령할 필요는 없었고, 더군다나 원래 계획마저 어그러진 상황에서는 전혀 점령할 필요가 없었는데 미드웨이의 패전을 가리기 위해 점령을 강행한 것으로, 아무런 전략적 가치가 없었다.
레이테 만 해전에서는 그나마 미끼 작전은 성공했지만, 그것이 성공했다는 것을 다른 함대에 알리지 못해서 물거품이 되었다. 더 정확히는 알리긴 알렸는데, 그 다른 함대가 받지도 못했고 해당 함대는 자신들의 후방에 미군 함대가 매복해 있다는, 전혀 엉뚱한 정보를 받고 돌아가버린 것이다. 이게 레이테 만 해전의 삽질인 구리다 턴.
적의 탐지를 회피하기 위해 함대를 무작위적으로 널리 분산시키는 것은 현대 미군 항모전단 운용전술에도 쓰는 기본적인 전술이다. 다만 상호지원이 가능할 정도로는 가까워야 하고, 현대 미군은 데이터 링크를 통해 모든 함정이 전황을 잘 파악하고 있다는 차이가 있다.
8 적이 지는 걸 전제로 하는 훈련
훈련할 때도 처음부터 적이 지는 것을 전제로 한 훈련이라는 말도 안 되는 상황이 일상다반사였다. 애초에 훈련이라는 것이 실제 전쟁을 대비하기 위함이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훈련의 의미 자체가 사라지는 뻘짓이다. 설상가상으로 이런 훈련을 하면서 결과가 불리하게 나오면 판을 뒤집어엎는 수준의 조작질을 공개적으로 했다. 애초에 자신들이 이기는것을 전제로 하고서도 불리하게 나오는데 그게 이상하다는걸 아무도 눈치못챘다
미드웨이 해전 직전 벌어진 워게임을 예로 들자면 미국 항공모함에 의해 4척 뿐인 일본 항모 중 2척이 침몰하고 2척이 대파하는 결과가 나오자 그런 일이 벌어질 리 없다며 도로 부활시키는 사태까지 벌어졌다.[17] 이는 당시 대항군 지휘관이자 판정관을 겸했던 연함함대 참모장인 우가키 마토메가 자신에게 불리한 결과가 나오자 "폐하의 정강인 항모에 기량이 엉망진창인 미군기가 감히 폭탄을 떨어뜨릴 수 있을 리 없다."라고 어거지를 쓰는 동시에 "미군의 폭격 명중률은 우리 군의 명중률의 1/3 수준이다. 그러니까 피해량도 1/3로 계산해야 한다."는 괴상망측한 논리를 내세워 결과를 뒤집었다. 다만 미드웨이 해전의 경우 당시 일본 육군,해군, 연합 함대 제독의 의견이 다 달랐고 연합 함대 제독이 자신의 의견을 관철시키기 위해 그랬다는 말도 있다. 그러나 전투 감행을 위해서였더라도 적이 지는걸 전제로 한 훈련을 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18]
대략 이런 짤 수준의 작전계획을 세웠다 보면 된다.
9 항복하는 자가 없는 이유
일본군/포로 항목 참조.
10 반자이 어택
자세한 것은 항목 참고. 그리고 일본군 육군에 반자이 어택이 있다면 일본군 해군에는 카미카제가 있다. 그리고 카미카제를 해군만 했다고 아는 사람이 많은데, 일본군 육군 항공대도 했다. 단적인 예로 카미카제용 무기 중 하나인 Ki-115 츠루기. 이건 해군이 운용한 MXY-7 오카와 달리 육군과 해군이 공동으로 개발한 자폭 전용 항공기다. 참고로 저 기체라고 쓰고 미사일이라고 읽기를 육군에서는 츠루기(劍, 검)라 불렀으나, 해군에서는 토카(藤花, 등나무 꽃)라고 불렀다.역시 같은 무기 쓰면서 이름도 다르게 부르는 육해군 대립
11 물주와 영혼의 맞다이
"국방은 군인의 전유물이 아니다. 또한 전쟁도 군인만 수행하는 것이 아니다. 만에 하나 국방비가 미국에 맞먹을 수준이라 할지라도, 러일전쟁 시기와 같은 소액의 재정으로는 미국과 전쟁을 펼칠 수 없다. 그리고 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돈이 어디서 나오느냐를 곰곰히 생각해본다면 미국 이외에 국채를 사줄만한 나라는 없다. 그런데, 그러한 미국이 적이 된다 하면, 그러한 방법은 조기에 차단될 것이다. 결론적으로 미국과 일본과의 전쟁은 불가능에 수렴한다.기본적으로 국방은 국력에 상응하는 무력을 갖춤과 동시에 국력을 함양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외교적 수단에 의해 전쟁을 최대한 피하는 것이, 현재 세계정세의 국방의 본의에 따르는 것이라고 굳게 믿는다."
21대 내각총리대신 원수 해군대장 정2위 공1급 자작 가토 토모사부로
일본은 석유 연료의 92%를 수입에 기댔다. 물론 정밀 공작 기계의 대부분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그 석유와 기계를 공급하는 미국과는 사이가 갈수록 나빠졌다. 끝내 이것이 진주만 공습의 원인이 되었다. 한 마디로 생필품과 자금을 대주는 물주에게 자기 능력도 안 생각하고 한판 붙은 격이었다. 이렇게 자신의 나라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종주국을 선제공격한 광란행위를 두고 ,자칭 일본인에 의해 만들어진 반일 밀덕 사이트, 구일본군약소열전에서는 이 당시의 일본의 멘탈을 매우 훌륭하게 요약했다.
"(전략)...국제사회에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일본이 거슬린 미국이 일본의 말살을 획책했다는 음모론을 주장하는 인간들까지 나타나는 실정입니다. 일본을 말살하고 싶었다고? 그 따위 일은 미국이 일본의 아킬레스건을 모두 쥐고 있었으니, 맘만 먹으면 아이 손을 비틀듯이 할 수 있었습니다. 생각해보면 일본은 사춘기였나 생각합니다. 자만심만 강해서, 자기 실력이나 자신의 진짜 모습을 일체 이해하지 못하고 그저 어른이 하는 말에 반발하고 싶었던 것일 뿐이었나 싶군요. 더글러스 맥아더는 이런 일본인의 치졸함이나 유치함을 이렇게 평했습니다. "일본의 정신연령은 12세 소년과 같다." 말 그대로 사춘기의 반항심이 절정에 이르른 애새끼였다는 얘기죠. 게다가 문제의 미국 자신도 조금 일본을 꾸짖어 주제를 알게 해주려고 했더니 돌연 빡돌아서 후원자인 자신의 뒤통수를 금속빠따로 까버릴 줄은 예상 못했던 듯했군요. 아무래도 소년의 마음 속 어둠은 상당히 깊었던 듯합니다."
참고로 마음 속 어둠이라는 표현은 일본에서 1990년대 초 빈발한 청소년 흉악범죄를 설명할 때 즐겨 쓰여 유행어가 된 구절이다.
게다가 물주와 굳이 붙을 생각이었으면 그 전에 미리 물자를 비축하고 군대를 훈련시키며 자금을 융통하고 수입이 필요한 물자를 얻을 다른 수입원을 강구한 뒤에 붙어야 했다. 그런데 이미 중국과의 전투로 물자와 인원을 보충하기는 커녕 날로 소모했고, 미국 아닌 다른 국가간의 관계도 나쁘고 돈도 달랑거리는 상황에서 개전을 결심했다. 이는 그냥 "자살하고 싶어요!"와 동일어다. 자기 딴에는 한타 싸움에서 이겨 굴복시켜 협상해서 끝내자!!였지만 미국 눈에는 헛바람들어 날뛰어대니 자살하고 싶은 것으로 보인 셈이다.
이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 전비다. 2차 대전 전 기간을 통틀어서 일본군의 총 전비는 미국의 1/8도 안 된다. 게다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군이 투입한 전비의 80% 이상은 유럽에 투입되었다고 한다. 물론 실제로 유럽에 비해서 태평양에 투입한 전비가 적기는 하지만 해군의 경우 주력함들은 거의 태평양쪽에서 작전을 하기는 했다.대서양에는 주력함이 할 일이 없으니까
다시 말하면, 일본은 아무리 열강이라도 지구 반바퀴를 돌아와 상륙전까지 감행하는 원정은 상당한 지출과 시간을 요구하니 적당히 방어만 잘하면 우리가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 일본도 미국이 강대국임은 알았겠지만, 그들은 이런 거리적, 지리적 이점을 믿고 개전했다고 볼 수도 있다. 실제로도 상륙전은 일반적인 지상전에 비해 비교도 안 되는 많은 전비와 자원소모를 유발하는데, 일본도 전간기 식민지들을 다 상륙해서 점령해 봤으니 이 점을 매우 잘 알았다.
실제로 해군이 빈약한 소련 상대로도, 미국만큼의 물량은 안 됐던 영국 상대로도 이 전략은 매우 훌륭했다. 실제로 영국은 독일과의 전쟁에 바빠 상대적으로 부실한 Z함대, 일명 '영국 동양함대'를 보냈다가 말레이 해전에서 말아 먹으면서 일본의 이런 확신만 굳건하게 만들어놨다.
문제는 미국의 힘이 일본의 상상 이상이었다는 것이다. 미국이 강대국임을 알던 일본이라도 설마 수송함을 하루에 1척씩 찍어내고, 호위항공모함을 일주일에 1척씩 찍어내어 수평선을 새까맣게 덮으며 몰려올 줄은 몰랐을 것이다. 그래서 오키나와 전투에서 미 함대를 발견한 일본군 초병이 "바다가 3, 적이 7"[20]이란 보고를 올리는 사태를 맞이하고 만다.
결론은 다 좋은데 말이야, 미국만 아니었으면 좋았겠군. 그래서 <조선을 떠나며>란 책을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온다. 종전이 되어 남한에 미군이 주둔하게 되자 당시 남한에 남아있었던 일본인들이 주둔한 미군들의 개인장비를 보고 "세상에, 우리가 이런 나라와 전쟁을 벌였다고!?"라고 말했다고 한다.
12 후방의 상황
애초에 이들은 전쟁에서 지면 어떤 결과인지, 혹은 자기들이 틀렸으면 어떤 결과가 나오나 따위는 신경조차 쓰지 않은 인간들이었다. 그들은 애초에 질 리가 없다고 믿었다. 아니, 질 수 있다는 생각을 않도록 스스로를 세뇌하였다.
전세가 기운 후에는 군부나 고위 관료들도 일본이 전쟁에서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패배에 대해 말이나 생각을 하는 것은 금기로 취급했기 때문에 제대로 논의를 못했다.
그나마 이들의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한 말이 일단 국지전에서 승리한 다음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종전협상을 유도하기 위해서였다는데 정작 상황이 나빠지자 군부나 고위 관료 모두 종전에는 입을 다물고 1억 총 옥쇄까지 부르짖으며 총력전을 주장했다. 그런데 정작 총력전이 뭔지를 몰라서 귀중한 인적 자원을 다 날려먹는 삽질만 저지르고 망했어요.
총력전에서는 무엇보다도 전쟁 물자와 식량, 연료 등의 필수적인 요소의 생산을 유지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데 일본군에서는 오히려 숙련공들을 군인으로 징집하고 그 자리를 정신대 여학생 등으로 메웠기 때문에 생산되는 물자는 질과 양 모두 하락하기만 했다. 더구나 미국의 생산력의 10%도 안 되는 일본은 부족한 자원과 인력을 최대한 관리하고 효율적으로 사용해도 장기전이 힘든 상황인데, 오히려 정신력으로 모든 것을 극복할 수 있다는 헛소리를 하며 엉망인 장비조차 제대로 지급하지 못했다. 현실은 냉혹한 법, 설령 병사 개인의 자질이 아무리 뛰어나다 해도, 제대로 된 장비가 없으면 전투효율이 떨어지며, 보급이 충분하지 않다면 치열한 전투 후 파손된 장비와 부족한 탄약, 굶주림, 부상 등으로 인해 급속도로 전투력이 감소할 수 밖에 없다. 한마디로 가지고있는것을 효율적으로 쥐어짜기는 커녕 아무생각없이 죄다 털어넣은 것이다.
이것 때문에 가장 피해를 많이 본 분야가 항공기, 특히 전투기 분야인데, 갖고 있던 주력기 A6M 제로센은 물론이고 이후 겨우 뒤늦게 개발된 신형기들이 많은 피해를 입었다. 그나마도 각종 카미카제 등등으로 남아나지 않던 파일럿들까지 잡아 잡수셨으니, 어떻게 보자면 일본 패망의 가장 큰 결정적 원인 중 하나를 제공한 셈.
물론 육해군의 다른 병과들 역시 생산과 보급을 등한시한 전략으로 전투력이 떨어지고 심각한 인명 피해를 입었다. 좋은 사례로 육군은 무타구치 렌야의 임팔작전, 해군은 지속적인 보급을 등한시하고 한탕만을 노리는 방식에 찌들어 써먹지 못한 야마토급 전함을 들 수 있겠다. 육군의 임팔작전은 보급과 장비의 부족으로 제대로 싸우지도 못한 병사들을 정글에서 희생시켰고, 해군의 야마토급 전함은 보급능력 부족으로 지속적인 전투가 불가능해 결국 항구에만 처박혀있다보니 야마토 호텔이란 놀림까지 받았다. 야마토급 전함을 항공모함으로 개조한 시나노도 역시 유지보수능력과 숙련공의 부족으로 빠듯한 건조 기한을 맞추다 보니 결국 부실 공사를 하게 되었고(...) 어뢰 피격시 내부를 차단하는 격벽 등의 공사 자체가 부실했기 때문에 잠수함의 어뢰피격 후 우왕좌왕 하다 함재기 한 번 제대로 못 날려보고 용궁행(...).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남성들이 대량으로 징병된 빈 자리를 미숙련된 여성인력으로 채우는 것 자체는 그리 드문 일은 아니었고, 여성운동이 활발해진 게 이 당시의 여성의 사회진출 때문이라는 설도 있을 만큼 보편적이었다. 영국이나 미국은 정밀기계와 표준화된 품질관리 덕에 미숙련된 여성인력을 동원해도 일정한 품질의 제품을 만들었다.[21]
그러나 당시 일본은 공업분야에서 표준화된 품질관리가 불가능해서 숙련공의 중요성이 대단히 높았다. 일본은 숙련공의 세심한 마무리로 품질이 관리된 만큼 숙련공의 부재는 물자의 품질과 양에 바로 타격을 주는 요인이었다.
게다가 자체적으로 만들어내는 공작기계의 품질은 유럽 기준으로는 저급품이었기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원래 정상적인 너트는 육각형인데 너트도 조악하게 만들어서 '오각형 볼트, 너트(숫 나사, 암 나사)' 같은 것이 정식 출고된 장비에 다닥다닥 붙었다. 오죽하면 독일에서 수입한 공작기계를 적재한 공작함 아카시(明石)의 작업능률이 국산 공작기계가 주류인 본토 해군공창 보다 훨씬 좋았을까? 그래서 아카시가 격침되자 일본 해군의 보수 및 보급능력이 격감했다.
사실 제1차 세계대전 초기에 유럽 각국도 비슷한 삽질을 했지만 유럽에서는 몇 주 내에 실수를 알아채 기술자들을 공장으로 돌려보내고 오히려 공장주들에게 군인들을 선발해서 일하게 할 권한을 주는 식으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다. 1차 세계대전 초기에는 유럽 각국 정부가 모두 전쟁이 단기간에 끝날 것으로 예상했기 때문에 생산에 신경쓰지 않았을 뿐이며, 몇 주가 지나면서 전쟁이 장기화되고 소모적으로 변한 것을 깨닫고는 곧바로 본격적으로 생산량을 높이기 위한 조치를 취한 것이다. 그러나 일본은 이미 장기화된 소모전을 치르고 있는 상황에서 저런 삽질을 한 것이다.
일본군에도 이러한 문제를 인식한 사람들이 있었지만 전투원만을 우대하는 문화 때문에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다. 군인의 정신력보다 물자가 더 중요하다는 발언을 하는 것 자체가 반역으로 간주되고, 기술자 등을 특별 취급하는 것은 장병들의 사기를 떨어뜨릴 수 있다는 식으로 받아들이는 판국이었다. 그와 달리 미국은 전선에 나와있던 수십만 명의 장병이 아닌, 본국의 공장에서 일하던 수천만 명의 시민이 엄청난 양의 전시 물자를 만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 엄청난 물자를 토대로 장병들이 막대한 전과를 올릴 수 있었던 것이다. 당연히 미국이 올린 전과의 밑바탕에는 하루에도 몇 천발의 포격을 몇 주일씩 퍼붓는 포탄, 항공지원, 용감하게 전진하는 병사들을 지원해 줄 신뢰성 높은 전차, 1분당 일본군의 몇 배 이상의 총탄을 뿜어내는 일선부대에 계속 지급되는 탄약과 병기, 식량, 각종부품, 의약품의 보급과 후송지원이 있었다. 그리고, 미국의 보급능력은 체계적 생산관리에 기반한 대량생산과 일선의 의견이 반영된 정책, 숙련공과 연구원을 우대하는 문화가 있어서 나올 수 있었다.
그리고 일본군은 전투원만을 우대하고 비전투인원을 무시하는 성향 때문에 라바울에서 철수할 때 전투기만 파일럿과 함께 날아가버리고 정비인원은 그냥 방치했다. 물론 이 때 현실적으로 정비원들을 철수시킬 수단이 별로 없었던 것도 사실이기는 하다. 하지만 전설적인 에이스 파일럿 에리히 하르트만의 일화에 따르면 전황악화로 포위된 비행장에서 탈출할 때 전투기의 무전기 등 비행에 필요없는 장비를 버리고 생긴 공간에 정비병들을 태워 이륙하여 무사히 탈출한 일화가 있다. 게다가 애당초 저 지경까지 간 것 자체가 여차하면 정비원들은 내버려두고 가도 된다는 암묵적인 인식 때문이었다. 덕분에 대량의 정비원이 전쟁터 한가운데 고립돼서 전투가 끝난 후에 고스란히 포로가 되었기 때문에 일본군은 얼마 지나지도 않아 숙련된 정비원이 부족해서 고생했다.
게다가 정비병이라고 하니 전문성이 낮아 보이지만, 일본군은 조종사 수업 낙오자들을 정비병으로 육성했기 때문에, 이들은 급하면 약간의 교육만으로 바로 조종사로 사용이 가능한 수준의 고급인력이었다. 이런 사람들이 육성되는 수에는 한계가 있었다는 것까지 감안한다면, 답이 없다. 게다가 이런 막장 사례는 나열하자면 한도 끝도 없다. 이에 대해 일본 해군의 에이스 사카이 사부로는 자서전 '대공의 사무라이'에서 개전 전 일본군이 조종교육생 과정 중 아주 사소한 행위마저도 군기위반으로 간주하고 퇴소시키거나 다른 특기를 부여해 전용한 사람들을 제대로 써먹었다면 전쟁 후기의 조종사 부족 문제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뿐만 아니라 전쟁하고 전혀 상관없는 일반 일본 국민이나 당시 일본 내 식민지 출신이었던 조선인, 중국인 등을 포함한 엄청난 숫자의 민간인이 고위층들의 이러한 태도 때문에 희생되었다. 그 예로 오키나와 전투에서 오키나와 사람들이 엄청나게 희생되었다. 이 전투에서 많은 민간인이 참전을 강요받고 희생되자, 미국은 일본 본토에서도 이러한 일이 연속적으로 일어날 수 있다는 생각에 히로시마&나가사키 원폭 투하와 올림픽 작전을 계획했다.
연료 사정은... 참담하다. 정어리 기름을 윤활유로 쓰고, 송근유를 연료로 쓰는 상황이었으니... 그나마 쓰겠다고 만들어논 저 송근유도 원유는 20만 킬로리터나 뽑아 놓고서는 폭격 때문에 500킬로리터 정도밖에 정제 못했다고 한다(...). 만들어 놓은 것도 거의 야매로 만든 지경이니 뭐, 송근유 항목 참조.
13 숭숭 뚫리는 암호
암호화 기계 B 형(퍼플)의 미국 복원품 |
일본은 전쟁 전 독일의 에니그마를 베낀 '암호화 기계 B 형'을 각국 대사관과 본토에 두고 최고위 암호를 만드는 데 사용했다. 97식구문인자기(九七式欧文印字機: 유럽 알파벳을 쓰는 97형식의 타자기)라 불리던 '암호화 기계 B형'은 에니그마보다 우수해서 에니그마의 약점인 반사판 장치가 없었다. 덕택에 독일에서도 이 기계의 암호를 못 깼다.
서방측은 일본 최고위 암호인 97식을 뚫기위해서 97식에 퍼플(PURPLE)이란 암호명을 붙이고 해독하는 데 노력했다. 결국 전직 유전학자 윌리엄 프레더릭 프리드먼을 중심으로 SIS는 1930년대부터 연구를 거듭한 끝에 이들 휘하에 있는 프랭크 로렛이 퍼플을 뚫는데 성공하고 여기에 Magic이라는 코드명을 붙인다. 게다가 이 암호를 뚫기 위해서 아예 퍼플을 상상해가며 위 사진같은 모조품을 만들었는데 나중에 1945년에서 1952년 사이에 찾아낸 퍼플 원본을 미국에 가져와 비교해보니 놀랍게도 짝퉁 주제에 연기가 좀 나고 조잡했다는 걸 빼고는 원판과 거의 비슷했다고 한다.
덕분에 태평양 전쟁 때 미군은 맵핵을 켜고 전쟁을 하는 상황이였다. 당장 진주만 공습 직전 일본은 미국대사관에 선전포고문을 보냈고, 이후 미국도 일본과 동시에 일본 대본영이 보낸 선전포고 암호문을 해독했는데 비록 벌써 진주만에 폭격을 맞은 뒤였긴 했지만[22] 일본대사관보다 먼저 해독은 했고[23]. 전보 내용을 다 알던 미국 쪽에선 일본 대사가 공습 이후에나 선전포고를 한 점을 비꼬아 비난을 실컷 퍼부었다.
이후 미국의 쇼미더머니의 쿨타임이 덜 찼던 미드웨이 해전때는 AF에 일본군이 공격할거라는 상세한 계획까지 파악했고, 이후 암호해독반의 지략으로 일본군의 목표가 미드웨이인 것을 알아냈다. 그리고 빈사상태의 요크타운을 간신히 수리하는 등 미드웨이 방어에 전력을 집중했고, 결국 일본군 항공모함 4척을 용궁으로 보내버렸다. 거기에 연합함대 사령관인 야마모토 이소로쿠의 솔로몬 제도시찰의 목적지와 도착 시각을 알아내서 P-38 라이트닝을 보내 G4M에 타고있던 이소로쿠를 벌집으로 만들어 버렸다. 전후 의회에서 벌인 조사에서 조사단은 암호해독이 전쟁을 몇 년 앞서 끝낸 주역으로 평가하고 이를 계기로 국가암호전담기관인 NSA가 만들어지게 된다
덕분에 아이러니하게도 미군이 가장 푸는 데 어려움을 겪었던 것은 일본군이 머리를 짜내 고안해낸 암호가 아니라 일반 시민들이 쓰던 가고시마 사투리였다. 가고시마 사투리는 독일에서 잠수함 U-511(일본 제식명 ロ500)을 도입할 때 처음으로 사용되었으며, 당시 미군에 있었던 가고시마(가지키) 출신 2세 데이비드 아키라 이타미가 해독하였다. 사실 미군도 비슷하게 나바호족 원주민들을 무전병으로 써서 적군이 감청해도 못 알아 듣게 했다. 영화 '윈드 토커'를 보면 나온다.
일본군은 야전암호관리는 상당히 허술해서 일본도 자신들의 97식 암호가 뚫린다는 걸 어느 정도 눈치채고 있었지만, 멍청한 일본군은 "양키놈들이 우리 거 읽고 있다는 의심이 드니까 조심해~!"라고 전문을 보내고 암호기계에 "이건 국가기밀임!"이란 에나멜 딱지를 붙이는 것 말고는 아무런 조치를 안 했다. 앞서 말했듯 자기도 못 깨고 독일도 못 깨니 안심한 것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로 저런 짓을 한 이유는 자기네 "일본어가 엄청나게 어려운 물건이기에 코쟁이들은 절대로 못 풀 것이다!!!"고 생각한 것이지만, 불행히도 이건 엄청난 착각이었다. 이미 미국에는 재미 일본인들이 바글바글대고 있었다. 여기에 진주만 공습이후 오히려 적극적으로 미군에 입대해서 100대대처럼 유럽전선에서 활약하기도 했다. 거기다가 미군은 재미 일본인에게 의존하지 않고 일본어 통역장병을 양성해서 1년도 안되는 기간에 수십명에서 1만명으로 늘렸고, 이렇게 양성된 일본어 통역장교들을 몇 명씩 전방사단에 배치했다. [24][25]
암호책 같은것은 없어져도 걍 없어졌다라 치고 신경꺼버릴 정도로 관리가 허술했다. 뉴질랜드군의 소해함정HMNZS Kiwi가 1943년 1월 29일 과달카날 근해 순찰 중 자기보다 덩치가 더 큰 일본군 잠수함 I-1을 발견하고는 오클랜드에서 외박이나 따자는 생각으로 다소 무리를 해서 잠수함을 겨우겨우 격침시켰다. 그런데 이 잠수함에는 코드북 및 각종 기록이 페이지로 무려 총 20만 페이지나 있었다.
보통 이런 암호 해독문서는 유사시 긴급폐기하기 위해 겉표지에 납이 있어서 바다에 던지면 돌덩이처럼 가라앉는다던지, 물을 뿌리면 잉크가 확 번져서 알아보기 어렵게 만들다던지, 아니면 기름 먹인 종이에 인쇄를 하여 잘 타게 만들다던지 하는 조치가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일본군은 기본적인 조치는 게을리 했다. 결국 일본군은 멀쩡한 암호책만 연합군에게 넘겨주었다. 그나마 일부 승조원이 암호책중 당시 쓰이던 부분만 들고 도망쳤지만, 이미 쓴거나 나중에 쓸 부분은 남기고 갔기 때문에 당시 쓰이던 암호책 부분도 쉽게 패턴을 파악할 수 있었다. 이를 뒤늦게 알아챈 일본군에서 폭격을 했지만 너무 늦었고, 연합군에선 배를 건져 올린 뒤 암호북을 다 쓸어갔다. 그리고 그냥 외박 바라고 잠수함을 격침한 기뢰 제거선은 소 뒷걸음질 치다 쥐 잡은 격으로 전원 해군십자장을 받았다.
또한 암호를 사용할 때도 적들을 도와주기 위해서 암호내용을 평문으로 재전송하거나 높은 암호라고 준 걸 낮거나 시간이 지난 암호로 전송하거나 문서에 쓰이는 상투적인 말투를 그대로 암호화를 하거나 쓸데없는 말까지 모조리 암호화했다. 이런 행위들을 보면 일본군의 암호는 적들을 도와주기 위한 것으로 봐도 무관하다.
물론 일본에서도 대응책을 마련했다. 일단 일본군도 특수 코드북을 만들었다! 이렇게 만든 특수 코드북을 A-GO 작전에 써먹으려고 들고 왔지만 하필이면 기함에 직격타를 맞아 코드북은 증발하고 이 코드북으로 보낸 모든 전신은 다 무용지물이 되어버려서 끝내 미군에게 졌다. 이 코드북 얘기도 그렇지만 암호를 만들려는 일본군의 삽질은 계속 이어졌다.
일본군의 암호해독능력은 개판이였다. 적국은 일본군 최상급 암호전문도 해독하는 판국에 일본의 암호 해독실은 미군의 중급 정도의 암호 메시지조차 못 풀었다. M-138-A로 만들어지는 최상급 암호는 아에 건드릴 생각도 못했다. 결국 일본군이 해독을 하려고 제일 공들이던 물건은 미 해군에서 가장 낮은 암호 체계로 간주하던 물건이었다. 나중에 이것도 못 풀어서 암호 쪽은 GG쳐버리고 통신 분석에 힘을 쏟기 시작했다. 심지어 오래되고 푸는 방법도 있던 플레이페어 암호도 못 풀어서 쩔쩔 매는 바람에 어느 한 사람이 살아 남아 훗날 미국 대통령이 되었다. 결국 일본군은 전파 위치탐지와 감청에 집중했고 어느 정도 공을 세우기도 했지만 그것만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게다가 이런 병크 짓은 동맹국인 독일에게도 어마어마(?)한 손실을 안겨다 주었다.[26] 당시 주독 일본 대사 오시마 히로시(大島 浩)는 퍼플 암호기로 독일의 전쟁 상황을 본국에 보고하였다. 이중에는 대서양 방면에서 연합군의 상륙작전을 저지하기 위해 어떤 전략을 할지에 관한 정보도 있었다. 평문이나 다를 바가 없는 비밀전문을 바탕으로 연합국은 상륙지점으로 노르망디를 택하였다. 이런 이유로 인해 오오시마 히로시는 3국 동맹 결성으로 전범 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아야 할 몸이었으나, 이런 공로(?)로 감일등 되어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물론 일본군을 위해서 약간의 변명을 하자면 이건 연합군이 암호 해독을 너무 잘한것도 있기는 하다. 당장 동맹국인 독일의 암호도 영국 본토 항공전떄 이미 줄줄 세고 있었지만 역시 자신들의 암호가 줄줄 세고 있다는걸 끝까지 알아차리지 못했다.[27] 일단 일본도 자기들 나름대로는 신경을 쓰기는 써서 난수표를 교체하는 정도의 조치는 취하고 있었다. 야마모토 이소로쿠가 격추되었을때 일본군이 추가적인 근거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던것도 미국이 난수표를 변경한지 2주도 안된 암호를 해독할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28] 거기에 암호를 해독하고 있다는것을 들키는것을 막기 위한 미국의 치밀한 기만작전과 추가적인 증거를 확보하려는 자신들의 시도가 실패로 돌아갔다는 점이 겹쳐서 암호가 새어나가는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던것. 물론 미국의 사기적인 암호해독능력과 치밀한 기만작전을 감안하더라도 같은 짓을 계속하면서도 미국이 계속 비슷한 어려움을 겪을거라고 생각했다는 점에서는 상당히 부주의했다는 지적을 피하기는 어렵다.
14 폭주하는 군사비
어느정도 상식적인 운영을 하던 메이지 정부 시절(1868~1877)에는 국가예산(일반회계)의 15.9%를 군사비에 투자했다.
하지만 점차적으로 군사비 비율이 증가하기 시작하더니 나중에는 국방비가 국가예산의 대부분이 되어버리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1870년 | 10.32% |
1875년 | 18.49% |
1880년 | 19.02% |
1885년 | 25.38% |
1890년 | 28.02% |
1895년 | 27.59% |
1900년 | 45.47% |
1905년 | 8.20% |
1910년 | 32.53% |
1915년 | 31.23% |
1920년 | 47.78% |
1925년 | 29.10% |
1930년 | 28.43% |
1935년 | 46.81% |
1940년 | 37.99% |
1944년 | 98.67% |
출전: 일본, 군비확장의 역사 19P ~ 23P
예산 추이를 보면 1800년대까지는 국가예산 대비 국방비가 균형을 이루고 있지만 1900년대에 들어서 급증하기 시작했고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 이후 감소했다가 조약이탈을 결정하고 전쟁준비를 시작하기 시작하자 급증하기 시작한 것을 알 수 있는데 전시가 아닌 상황에서도 국방비가 국가예산의 20~30%을 점유하고 있고 군비 증강시에는 40%까지 치솟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북한의 예에서 알 수 있듯이 이런 국력을 생각하지 않는 무리한 군사투자는 경제성장여력을 깎아먹어 오히려 군사력 증강에 악영향을 줄 수 밖에 없다.[29]- ↑ 과거 문화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는 그릇된 무사도나 할복, 근대화 과정에서 생긴 것으로는 육군과 해군의 문화의 차이를 꼽을 수 있다.
- ↑ 이는 점령지에서 저항세력이 활동하고 바다에서 미 해군 잠수함이 수송선을 격침시켰을 때 심화된다.
- ↑ 단적으로 그 종이 비행기 취급받는 제로센도 매서슈미트나 스핏파이어같은 최우등 기체에 비해서나 한 수 처지지 당시 미군 기체도 그와 비슷하거나 좀 처지는 레벨이었다. 소련군도 그와 비슷하거나 그 이상 종이비행기였고. 이탈리아, 중국, 프랑스는 말할 것도 없다. 산뢰도 아직은 건재했고.
- ↑ 중일전쟁 전 기간을 통틀어 중국군과 일본군의 교환비는 6:1 수준이었다.
- ↑ 실제로 중일전쟁 기간 중에도 중국은 대학생에 대해서는 징병을 하지 않았다.
- ↑ 다만, 마틸다가 전혀 무쓸모한 건 아니다. 나치 독일만 해도 2호 전차나 2차대전 초기 경전차들을 대전 말까지도
그 격전 속에서 그 때까지 살아남아 있었다면주저없이 투입했고, 전차도 아니라고 조롱받던 치하조차 남방작전처럼 대전차무기가 없는 적에게는 전차로서의 위용을 유감없이 과시했다. - ↑ 진주만 공습은 분명 국제정치적 측면에서 비열한 행위였지만 군사적으로 볼 때는 차라리 괜찮은 성과를 거둔 행동이었다.
- ↑ 사실 2차대전 당시에 전함의 쓸모가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었고 이런 용도로 쓸 수 있었다. 오히려 일본은 야마토 이후 전함 건조를 접었지만 미국과 영국은 태평양 전쟁 발발 이후에도 전함을 수 척 건조했으며 이런 함포지원 용도로는 한국전, 심지어 먼 훗날 베트남전 때도 써먹었다.
- ↑ 물론 필리핀 전역이 루존섬에서만 치러진 것도 아니고 특히 레이테 해전도 필리핀 전역에 포함된다면 양쪽 모두 수치가 증가한다.
- ↑ 이 유일한 사례가 도조 히데키의 아버지인 도조 히데노리인데, 이 케이스는 일본 육군사관학교 설치 전인 서남전쟁 시기의 일이라 이후 일본군의 진급 병폐와 직접적으로 비교하기는 상당한 무리가 있다. 그리고 히데노리는 이후 일본육사가 개교하면서 입교, 수석졸업 후 정식으로 임관했다.
- ↑ 도검제일주의 참조
- ↑ 소총수들의 화력이 어떤 대형에서 극대화되는지는 말할 필요도 없거니와 종대로 수색하면 수색 가능한 범위가 확연히 줄어든다.
- ↑ 이 부분은 해군에 대한 서술이 주를 차지하고 있다.
- ↑ '지피지기(知彼知己) 백전불태(百戰不殆)'가 바로 이런 바보짓을 하지 말라고 적어놓은 구절이다.
- ↑ 사보섬 해전이나 타사파롱가 해전같은 경우에는 저런 전제가 실제로 적용되서 상당한 성과를 올린 사례가 있는건 사실이지만 매번 그런 일이 일어나기를 바랄 수 있는건 아니다. 그리고 과달카날 해전처럼 먼저 발견하였음에도 오히려 패퇴한 경우도 있다.
- ↑ 나머지 하나는 만주사변의 주역이자 전쟁 초기에 큰 전공을 세웠던 이시하라 간지가 육군대학 시절 "기관총의 가장 현명한 운용요령은 무엇일까?"라는 문제에 "기관총을 항공기에 장비시켜 술주정꾼이 걸으면서 소변을 보듯 전방위 화망을 형성해 적 행군 종대에 퍼붓는다"라고 구술한 것.
- ↑ 그리고 실전에서 맞붙자, 오히려 미국 항공모함이 부활해서 일본군을 엿먹였다는 게 함정.
- ↑ 미드웨이 해전 참조
- ↑ 몽환의 군함 야마토에 등장하는 장면
- ↑ 이건 영화 격동의 쇼와사 오키나와 결전 (激動の昭和史沖縄決戦 오카모토 기하치 감독의 1971년작)에서 나온 것이고 실제로 그렇게 불렀는지는 미지수. 다만 오키나와 사람들은 이 전투를 정말로 '철의 폭풍(鉄の暴風)'이라고 부르고 있다.
- ↑ 1인당 자본 투입량이 월등하다면 미숙련 노동력으로 양질의 제품을 대량생산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 ↑ 그래서 일본은 선전포고를 다 내지 않았다는 이유로 전범 재판 때 가중처벌을 받는다.
- ↑ 출처 Toland, 『Infamy: Pearl Harbor And Its Aftermath』, 1983
- ↑ 모든 군대는 동맹군은 물론 적군의 언어를 해독해야되기 때문에, 당연히 동맹군의 언어외에도 적군언어를 배운 통역장병을 양성하는것이 상식이다. 현재 한국군의 어학병 중에서는 영어, 중국어, 러시아어, 일본어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당장 미군 역시 해당 작전지역의 언어를 교육하는 것에 많은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것이 그 이유다. 암호는 기본이지만 작전지역의 대민업무를 위해서라도 필요하다.
- ↑ 더 웃긴건 정작 일본군에서는 태평양 전쟁같은 전시상황에 적국어를 배우거나 구사하면 간첩이나 반역으로 처벌을 받는다고 했었다.(...) 그리고 이는 훗날 북한의 도서정리사업의 여파로 인한 영어, 일본어등의 적국어 금지로 이어지게 되었다.
- ↑ 사실 암호가 뚫리는건 독일도 마찬가지여서 영국 본토 항공전당시에도 이미 줄줄 세고 있었으나 역시 끝까지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나마 크릭스 마리네의 암호는 좀 더 오래 버텼다.
- ↑ 그나마 크릭스마리네의 암호가 좀 더 오래 버티고 중간에 한번 방식을 바꿔서 연합군을 엿먹이기는 했다.
- ↑ 실제로 이전에는 미국에서 해독하는데 1~2달정도 걸렸었다고 한다.
- ↑ 왜냐 하면 군사분야만큼 비생산적인 분야도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