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바 롯데 마린즈

(치바 롯데에서 넘어옴)
(일본프로야구)
센트럴 리그(Central League) | 퍼시픽 리그(Pacific League)
65px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Tohoku Rakuten GoldenEagles)
55px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
(Saitama Seibu Lions)
65px오릭스 버팔로즈
(Orix Buffaloes)
50px치바 롯데 마린즈
(Chiba Lotte Marines)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
(Hokkaido Nippon-Ham Fighters)
65px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Fukuoka Softbank Hawks)
과거에 참가했던 팀들
170px230px
엠블럼[1]마스코트 마 군[2]
치바 롯데 마린즈
Chiba Lotte Marines
千葉(ちば)
ロッテマリーンズ
구단 법인명㈜치바 롯데 마린즈
(株式会社千葉ロッテマリーンズ)
창단1949년 9월 21일
연고지치바치바
현재 연고지로 이동1992년
구단 연고지 변천도쿄 도 (1950~1973)
미야기 현 (1974~1977)
카나가와 현 (1978~1991)
치바 현 (1992~)
구단명 변천마이니치 오리온즈 (1950~1957)
다이마이 오리온즈 (1958~1963)
도쿄 오리온즈 (1964~1968)
롯데 오리온즈 (1969~1991)
치바 롯데 마린즈 (1992~)
홈 구장고라쿠엔 구장 (1950~1962)
도쿄 스타디움 (1962~1972)
미야기 구장 (1973~1977)
가와사키 구장 (1978~1991)
QVC 마린 필드 (1992~)
2군 구장롯데 우라와 구장 (1989~)
모기업롯데그룹
모기업 변천마이니치 신문(1950~1963)[3]
나가타 마사이치(1964~1971)
롯데그룹(1971~)[4]
감독이토 쓰토무 (伊東 勤)
킷 스폰서데상트
일본시리즈 우승
(4회)
1950, 1974, 2005, 2010
퍼시픽리그 우승
(8회[5])
1950, 1960, 1970, 1974 후기리그, 1977 후기리그, 1980 전기리그,
1981 전기리그, 2005
퍼시픽 리그
클라이맥스 시리즈 우승
[6]
(1회)
2010
플레이오프 우승
(2회)
[7]
1974, 2005
아시아 시리즈 우승
(1회)
2005
홈페이지
롯데그룹 산하 스포츠단
파일:Attachment/lotte giants s.png롯데 자이언츠
(야구/KBO)
40px치바 롯데 마린즈
(야구/NPB)
롯데하이마트 골프단롯데마트 골프단
1950년 일본시리즈 우승 팀
-마이니치 오리온스1951-요미우리 자이언츠
1974년 일본시리즈 우승 팀
1973-요미우리 자이언츠롯데 오리온즈1975-한큐 브레이브스
2005년 일본시리즈 우승 팀
2004-세이부 라이온즈치바 롯데 마린즈2006-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
2010년 일본시리즈 우승 팀
2009-요미우리 자이언츠치바 롯데 마린즈2011-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2005년 아시아 시리즈 우승 팀
첫 대회치바 롯데 마린즈2006-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

1 개요

파일:Av1pfxa.gif
(치바 롯데 마린즈의 갈매기 마스코트)
가장 큰 갈매기가 마 군,
분홍색 옷을 입은 여캐가 린 짱,
작은 갈매기는 즈 짱 이다.[8][9]

33-4의 원흉[10]이자, 호랑이 잡는 갈매기.
일본프로야구 퍼시픽리그의 프로야구단. 연고지는 치바. 모기업은 롯데그룹으로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한국의 프로야구단인 롯데 자이언츠와 한 형제로 구단주도 롯데 회장인 신격호로 같다. 하지만 구단주가 야구단만 챙길 수는 없으니 구단주 대행을 신격호의 차남 신동빈씨가 맡고 있는데, 현재 신동빈은 일본 롯데도 아니고 한국 롯데를 이을 후계자가 된 상황이라서 부자가 쌍으로 구단에 손을 놓을 수밖에 없는 것이 문제.[11][12] 이 때문에 하단에 "구단 내부도 더러운 권력싸움"으로 시작되는 내용이 있긴 있다.(...) 그래도 자이언츠보다는 잘한다는 듯?

대한민국에서는 국립국어원 표준 표기법 때문에 바 롯데 마린즈 라고 표기하고 있다. 또한 일본 프로야구팀의 지역명 표기를 숨기려는 잘 안하는 한국 언론[13]에서도 이 팀과 요코하마 디엔에이 베이스타즈는 지역명을 잘 말해주고 있다. 혹시라도 롯데 자이언츠와 헷갈릴까봐 구분하기 위한 목적도 있다. 매년 비시즌 기간에 롯데 자이언츠와 지바 롯데가 연습경기를 치렀다는 기사가 심심찮게 언론에 보도되는데, 기사 표제에 롯데 자이언츠는 그냥 '롯데', 치바 롯데 마린즈는 '지바 롯데'라고 약칭을 표기하기도 한다(예1, 예2 등등).

중국어 표기는 롯데그룹과 다르다. 일반적으로 롯데그룹의 롯데는 樂天(乐天)으로 쓰고 있지만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때문에(라쿠텐이 한자로 樂天[14]) 혼동을 피하고자 羅德(罗德)[15]로 표기한다. 참고로 중국어권에서는 한국의 롯데 자이언츠도 지바 롯데처럼 羅德(罗德)으로 강제 개명하는 경우가 있다(...).[16]

물론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가 창단되기 전에는 치바 롯데 마린즈를 樂天(乐天)으로 표기했었고, 현재도 중국어권에서 종종 쓰이는 듯하다. 같은 이름(樂天)을 가진 프로야구단이 무려 세 개(한국에 1개, 일본에 2개)나 있다고 오해하기 딱 좋다.

2 홈구장 - QVC 마린필드

치바 마린 스타디움 항목 참조.

3 구단 역사

치바 롯데 시대 초기인 1992 ~ 1994 시즌까지 사용한 엠블럼.
떠돌아 다니는 자신들의 처지를 배로 승화시켰다.

1950년 마이니치 신문을 모기업으로 하는 마이니치 오리온즈로 창단했다.[17] 그리고 1958년 다이에이(大映) 영화사가 운영하던 다이에이 유니온즈를 흡수 합병해서 다이마이 오리온즈(다이에이+마이니치), 1964년 도쿄 오리온즈를 거쳐 1969년 롯데 오리온즈가 되었다가[18] 1992년 치바시로 연고이전하며 지금의 팀명으로 변경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1950년대 퍼시픽리그의 맹주로 마이니치 오리온즈 시절인 1950년 초대 일본시리즈 우승을 차지하였으며,[19] 이후 10년 단위(1960년, 1970년)로 퍼시픽리그 우승을 했다.[20] 저때까지는 나름 잘 나가던 시절. 가네다 마사이치가 감독으로 활약하던 1974년 후기리그를 우승. 그 후 플레이오프에서 전기리그 우승팀 한큐 브레이브스를 꺾고 이어 일본시리즈에서 요미우리 자이언츠센트럴리그 10년 연속 우승(겸 일본시리즈 진출-우승도;;)을 저지한 센트럴리그의 주니치 드래곤즈를 꺾고 두 번째 우승을 차지하였다.[21] 그 이후로 1977년 후기리그 우승, 1980년~1981년 전기리그 우승을 제외하곤[22] 롯데 자이언츠 마냥 쭈욱~ 하위권을 맴돌았다가 명장 바비 발렌타인 감독이 취임한 이후 1995년 퍼시픽리그 2위, 그리고 2차 집권기인 2005년 드디어 31년 만의 퍼시픽리그 우승과[23] 일본시리즈 우승을 차지한다. 그리고 상대팀 한신 타이거즈 에겐 33-4라는 지울 수 없는 상처가 생기고... 2010년, 전 해의 부진을 딛고 일본 야구계의 콩라인 주니치 드래곤즈를 4승 2패 1무로 꺾고 다시 한 번 일본시리즈 정상에 올라섰다. 하지만 정규 시즌 우승이 아니라 리그 3위를 차지한 뒤 클라이맥스 시리즈를 거쳐 일본시리즈에 올라갔기 때문에 일부에서는 우승이라고 인정할수 없다고 까이는 경우가 있다. 그리고 그 다음해 리그 꼴찌

유독 흑역사가 많은 구단으로 유명하다. 첫째,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즈 못지 않게 떠돌이 생활을 한 걸로 유명한데, 다이마이 - 도쿄 - 롯데 오리온즈 시절에 사용했던 도쿄 스타디움이 철거된 후 떠돌이 생활을 5년씩이나 했다.[24] 1973년부터 1977년까지 홈구장을 미야기 구장(現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즈의 홈구장)을 기반으로 고라쿠엔 구장,[25] 메이지진구 구장, 카와사키 구장 등을 떠돌아 다녔다. 이 때가 그 유명한 집시 롯데 시절. 1978년에 신축된 요코하마 스타디움을 차지하기 위해 타이요 훼일즈병림픽을 벌였는데, 결국 밀리는 바람에 타이요 훼일즈요코하마 스타디움으로 가고, 롯데 오리온즈는 타이요가 쓰던 낡은 카와사키 구장[26][27]을 전전한 흑역사가 있었다. 구단에서는 "TV로는 볼 수 없는 카와사키 극장"이라고 하여 광고도 하고 그랬지만...결국 비인기 구단이라 TV중계가 안 된다는 거 아냐 그거와 상관 없이 롯데는 낡고 기묘한 카와사키 구장에서 뛰며 리그에서 가장 기묘한 구단으로 바뀌어 버렸다.

둘째, 1995년 바비 발렌타인 감독이 팀을 리그 2위로 올려놓으니까 GM 히로오카 타츠로[28]가 이에 열폭했는지 몰라도 결국 두 사람간에 트러블이 생겨 결국 이듬해인 1996년에는 감독이 에지리 아키라로 바뀌었는데, 이 사람이 히로오카 타츠로의 와세다 대학 후배. 결국 1996년 리그 5위로 시즌을 마감하면서 둘은 동반 사임하게 된다. 그리고 콘도 아키히토 감독이 있었던 1998년에는 일본프로야구 팀 최다 연패기록인 18연패를 수립하였다[29].영상 이건 뭐 삼미 슈퍼스타즈도 아니고... 이 해에는 결국 18연패를 극복하지 못하고 최하위였는데, 충격과 공포인 건 이 해에 팀타율 1위, 팀 방어율 2위. 우승팀인 세이부 라이온즈와는 불과 9.5게임차 밖에 안 났었다. 실제로 이 연패직전까지는 A클래스(3위권)이었다. 연패도 경기때마다 상황이 꼬이고 꼬이다보니[30]기록하게 된 것.

4 팀 특징

원래 팀 컬러는 근성있는 플레이가 특징인 팀. 특히 9월 이후의 성적이 압도적으로 좋아서 가을의 롯데라는 별명으로 불린다. 한국의 봄데와는 정반대 또 상대팀이 우승을 결정짓는 경기일 경우 어지간해서는 지지 않는 끈끈한 야구를 구사하는 덕분에 퍼시픽리그의 대표적인 고춧가루 부대로 기억에 남았고, 승률 5할도 못 넘겨 쩔쩔매는 팀 치고는 상대적으로 컬트적인 인기가 있었다.[31] 대표적인 예가 1988년 10월 19일, 10.19라고 불리는 킨테츠 버팔로즈의 리그 우승을 저지한 시즌 마지막 더블헤더 경기나, 다음 해 세이부-오릭스-킨테츠의 퍼리그 우승 3파전에서 오릭스를 떨어트린 10월 13일 경기 등에서 고춧가루 부대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하였다. 성적은 4위가 제자리라는 평가가 지배적이었지만 21세기 들어와서는 좀 강해진 편.

주니치 드래곤즈 감독이었던 오치아이 히로미츠가 이 팀에서 처음 선수생활을 시작하였으며, 도끼투구법(マサカリ投法)으로 유명한 '일요일의 남자' 무라타 쵸지, 일본프로야구의 선인(仙人) 에노모토 키하치, 미스터 롯데 아리토 미치요 등이 유명하다.

이 팀에서 활약하고 있는 유명 선수는 일본프로야구에서 몇 안되는 언더스로 투수인 와타나베 슌스케, 시카고 화이트삭스에서 활약하기도 한 이구치 타다히토 등이 있으며, 이승엽도 2004년~2005년에 선수생활을 했었다. 2010~2011 시즌에 김롯데김태균이 이팀에서 활약하게 된다.

구단주가 한국계인지라 한국인 혹은 한국계 선수와 인연이 각별한 구단이다. 장훈 옹의 선수생활 마지막 팀이자 일본프로야구 유일무이의 통산 3000안타를 기록한 팀이었고, 백인천도 이 팀에서 몇년간 뛰었다. 카네다 마사이치는 이 팀 감독으로 1974년 팀의 일본시리즈 우승을 이끌었다. 또한, 롯데에서 18년 간 뛰며 1970년대 강타선을 이끌었던 '미스터 롯데' 아리토 미치요(본명 김유세), 현역으로는 니시오카 츠요시 등이 이 구단을 빛낸 한국계 선수. 2005년의 경우 이승엽을 포함한 주전라인업 선수 중 4명이 한국노래를 응원가로 썼을정도. 직접 들어보자. 이마에, 후쿠우라, 이승엽, 사토자키의 응원에 주목할 것. 후쿠우라 응원가 전에 부르는 히트콜도 두산의 응원과 흡사하다.[32] 노라조의 해피송도 자주 쓰이는 응원가 중 하나다. 2010년을 전후한 대부분 응원가들의 원곡이 정리되어 있는 페이지. 그리고 2014-15 오프시즌 때 마이너리그에서 활약하던 이대은을 영입하여 한국선수와의 인연을 잇고 있다.

2010년 시즌, 동방프로젝트BGMU.N. 오웬은 그녀인가? 가 응원곡으로 등장했다. 충공깽 신주는 뭐하나요 빨리 로열티 안 받고. 하지만 이 응원가가 대타, 대수비 요원인 코베 타쿠미 선수의 응원가다보니 실제로 1년간 이 응원가를 부른 횟수는 얼마 되지 않는다는 슬픈 현실이... 또한 2010년에는 아이돌 마스터キラメキラリ도 응원가로 썼다.# 이것으로 일본 갈매기 응원단 어딘가에 오덕군자가 계심을 알 수 있다. 아래에 나와있듯 생각보다 한국과 가까운 사람이다(...) 안타 쳤을 때 나오는 곡이라는듯.

롯데는 1992년에 이름과 연고지가 바뀌면서 여러가지 의미에서 큰 변화를 맞게 된다.(오리온즈, 마린즈로 나누기보다는 구장 이름으로 나누는게 일반적) 가와사키 시대에는 비교적 깨끗한 이미지의 팀이었....다라기보다는 워낙 인기가 없어서 아무도 신경을 안 썼기 때문에 딱히 떠오르는 이미지가 없었다고 보는 편이었다. 오히려 부진한 성적과 얌전한 선수들보다는 퇴장을 일삼는 감독이나, 한산한 구장에서 마작을 친다던가, 나가시소멘을 먹는다던가(...)[33]는 등 기행을 일삼던 관중들 때문에 여러모로 특이한 의미로서나 주목을 받는 팀이었다가, 마린 스타디움으로 넘어오면서부터 더러운 이미지로 가득찬 구단이 되어버렸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로는 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에 제기된 약물문제가 있다. 당시 롯데 선수들이 암페타민계열의 약물인 그리니(통칭:환경운동가)를 복용했다고 주간 아사히가 기사를 냈고, 구단은 반박은 했으나 끝내 고소는 하지 않아, 뒤가 구려서 그렇다는 말이 많았다. 실제로 2006년에 오릭스, 요미우리 출신의 노무라 타카히토가 약물소지로 걸리면서 증언한 덕분에 팬들도 거의 사실로 인정하는 분위기.[34] 이게 큰 스캔들로 번지지 않은 이유는 두 가지가 있는데, 마침 비슷한 시기에 터져나온 다이에사인 훔치기(그것도 팬까지 한패가 된...)덕분에 물타기되었고, 어차피 그 기간 동안 위에서 서술했듯 팀 성적은 개판이었기에 다른 팀 팬들도 크게 문제삼지는 않았다.(...) 약 먹어도 안되는 이런 구단이 다 있노?

약물 이외에도 12개 구단 중 가장 더티한 플레이로도 유명했다. 2009년 4월 세이부전에서 하야카와 다이스케가 포수를 향해 배트를 던진 악질적인 플레이는 많은 지탄을 받았다.[35] 이 외에도 볼 숨기기나 2006년에 이승엽의 홈런을 날려먹은 주루플레이 어필, 글러브 집어던지기[36], 스파이크 날 세우기, 상대팀 포수 메치기[37] 등 주옥같은 플레이가 많다.

여담으로는 '도시락의 저주'가 있다(...). 팀에서 선수들의 이름을 딴 도시락을 만들면 해당 선수의 선수생명이 꼬인다는 저주이다. 최신판으로는 김태균 김치버거가 있을듯 출처

2013년, 가까운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와 사이타마 vs 치바 라이벌 시리즈를 만들었다...고는 하지만 두 팀은 원래 서로 발목 잡는 구단으로 라이벌 역사가 깊은 편이다. 고춧가루 부대 때가 딱 세이부 황금기다 보니 아무리 세이부가 최강자라 해도 '롯데를 죽여야 결승 간다'는 이미지가 각인되었다. 황금기가 끝나도, 6강 클라이맥스 시리즈엔 사이타마 세이부와 치바 롯데가 세트로 올라갔다 떨어졌다 하고 있다. 오죽하면 치바 롯데 응원가 중에 세이부를 이기자고 하는 응원가가 있을 정도다.

센트럴리그와의 교류전을 맞이해서 구단에서 기념 광고를 냈는데, 센트럴리그 6개 구단에 대한 디스의 수준이 대단하다.참고.

나루세 요시히사FA 보상선수로 야쿠르트 스왈로즈마스코트를 지명했다!

그리고 센트럴리그한신 타이거스와 함께 일본시리즈 우승을 홈구장에서 맛본 적이 1번도 없다. 긴테츠는 해체됐으니 제외 기록을 보면.

우승 연도일본시리즈 우승 결정전이 열렸던 구장
1950년오사카 구장[38][39]
1974년나고야 구장
2005년한신 고시엔 구장
2010년나고야 돔

이것도 안습하다면 안습하겠다(...)

4.1 서포터즈

가와사키 시대와 마린 스타디움 시대를 나누는 또 한가지 특징은 바로 팬들의 성향. 가와사키 시대는 팬들이 적었기에 큰 문제가 없었지만, 마린 스타디움으로 넘어오면서 열성팬들이 늘어남과 동시에 매너는 최악으로 변하게 된다. 롯데 팬은 그 수에 비해 결속력이 강하다는 인상이 있고, 2000년대 초반에는 구장에서 쓰레기를 솔선수범해 줍는 등 좋은 매너로 지역에서 표창을 받기까지 했다고 한다. 반면 이러한 결속력은 (주로 상대 팀에 대해) 부정적인 형태로 나타나기도 하는데, 일반적으로 매너 나쁜 팬이라고 하면 역사와 전통의한신이나 주니치를 먼저 떠올리지만, 한신, 주니치는 보다 팬 수가 많아서 눈에 띄는 것이고 찌질함의 순도에 있어서는 롯데를 따라갈수가 없다고 한다. 바다건너 자매팀에게 전염된듯 싶다.

2009년. 치바 롯데 서포터즈의 리즈시절. 숫자부터가 어마어마하다. 바비 발렌타인 감독의 깃발이 보인다.[40]



2013년 5월 15일. 교진 전. 응원가가 싹 물갈이 된 이후의 응원.

2013년 6월 8일. 1회에 나온 퍼포먼스.
전투종족 소굴 한 복판도 두려워하지 않는 패기 지바 롯데 팬들한테는 한신이 우습거든

꼴리건롯데의 악질적인 팬의 특징은 대부분이 마린 스타디움 시대와 함께한 2, 30대라는 데 있다. 한신의 경우 대부분이 술 취한 아저씨라는 이미지이지만, 롯데의 경우는 잘 결집된 유럽축구나 J리그의 훌리건에 가깝다. 그 이유는 롯데의 독특한 응원문화에서 찾을수 있는데, 대개 다른 팀의 응원은 트럼펫, 플라스틱 메가폰/배트 등으로 이루어지는 '전통적인' 일본 야구의 응원이지만, 마린즈 팬들의 응원은 축구, 그 중에서도 일본 J리그 서포터들에게 깊게 영향을 준 이탈리아의 '울트라스'식의 응원문화를 적극적으로 차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응원 단장이 아니라 콜리더가 확성기를 들고 응원을 지휘하고, 플라스틱 메가폰/배트 대신에 박수를 이용하고, 응원가 자체도 일본 야구 특유의 '4소절의 응원가 - 2소절의 응원 구호'로 이어지는 응원가가 아닌 축구의 응원가에 가까운 4소절 내지 8소절의 응원가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또한 다른 구단에서 '시야 방해' 라는 명목으로 터부시되는 개인 깃발과 게이트기(머리 위로 들어올리는 정사각형의 깃발) 등이 종종 이용되며[41] 반데이라(남미 축구 문화에서 파생된, 관중석을 세로로 길게 덮는 천)가 이용되기도 한다. 전체적으로 봤을 때, 타 구단과는 응원 문화가 크게 다른 편.[42]

다만 2009년을 전후하면서 아래 서술할 구단 내부 권력 싸움(...)의 여파로 막장이 된 분위기에서 기존의 응원을 주도하던 외야 응원단[43][44]강도높은 프론트 디스를 벌임과 함께, 타팀 팬들과 충돌을 빚는 등 폭주하는 일들이 벌어지며 결국 시즌 종료 뒤 해산하게 된다.[45] 그 뒤 응원단이 전면적으로 물갈이[46]되었고, 기존의 응원가들이 대대적으로 교체되는 등의 홍역을 치루었다.[47]2010년에 롯데가 극적으로 우승한 뒤로는 매너 문제는 상대적으로 잦아든 듯. 오히려 그 해 일본프로야구에 가장 큰 공헌을 한 인물을 뽑는 쇼리키 마츠타로 상 후보로 거론되기도 하였다. 결국 같은 팀의 니시무라 노리후미 감독이 수상했지만, 좋은 지도력을 보인 감독이나 팀 리더급 선수가 주로 받는 상이니만큼 팬들이 후보로 거론되었다는 것부터가 이례적인 케이스라고.

어쨌든 일본 야구계에서도 열성적인 응원을 하는 것으로 (좋은 쪽이건 나쁜 쪽이건) 유명하다. 단 현재 들어서는 바비 발렌타인이나 그 이전 시절보다 응원 포스나 열기가 많이 줄어들었다는 얘기가 롯데 팬덤내나 타 구단에서도 자주나온다. 2009년 니시오카 사건으로 무기한 출입금지 당하고 해체한뒤 현재 사회인 야구단 "도쿄 메츠"의 응원단, 후원자로 있는 MVP의 복귀를 바라는 롯데팬들도 있었지만잠깐 위의 영상은 2013년에 나온 건데 그럼 다시 복귀한거 아냐?[48] 2009년 니시오카 사건에 대해 MVP는 2016년 지금까지 사과 한번 없고 오히려 자신들이 그렇게 응원하던 팀과 연고지를 버리고 도쿄 메츠란 팀으로 가는 RUN 짓거리를 저지르니 거기에 대한 배신감도 겹쳐 그들을 거부하는 팬들도 많다.. 여러모로 MVP는 일본 야구 응원 문화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지만 그만큼 호불호가 심하게 갈리는 집단인듯.

2016년에는 진 토시오 씨가 응원단장에서 물러나면서 어느 정도 화해가 된 건지 몇몇 이전 응원가들이 복귀했다. 프랜차이즈 스타인 후쿠우라나 사부로의 응원가, 스카 음악에서 유래한 찬스 응원가 등을 다시 들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우리들의 자랑'은 부활하지 않았다.

4.2 구단내 파벌 싸움

구단 내부의 권력싸움 역시 유명하다. 구단의 보스인 신동빈이 사실상 손을 놓고있는지라 사장인 세토야마를 중심으로 한 수뇌파와, 감독인 바비 발렌타인을 중심으로 한 현장파의 대립이 심하였다. 상술됐듯 발렌타인 1차 취임기(1995) 때 단장인 히로오카 타츠로와 파워게임을 벌이고 모양새 안 좋게 떠난 바 있는데, 이후 2차 취임기(2004~2009) 후반기 즈음에 똑같은 상황이 되풀이되고야 말았다. 2008년 신인드래프트에서 발렌타인이 초노 히사요시를 강행지명 한 것[49]을 계기로 그동안 쌓여있던 수뇌파의 불만이 폭발, 주간지에 발렌타인의 비리를 죄다 까발리면서 발렌타인이 2009년까지만 감독직을 맡게 되면서 사태는 끝을 맺었다.[50] 그리고 이 사실을 메이저리그 팬덤에서도 알고 있는지 2012 시즌을 앞두고 봑빠들이 발렌타인이 건수 하나 터뜨려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51]

5 최근 5년간 관중수 추이

2012년2013년2014년2015년2016년
연 평균1,239,168명 (-7.0%)1,260,439명 (+1.7%)1,223,915명 (-2.9%)1,322,004명 (+9.5%)1,526,932명 (+13.9%)
일일 평균17,211명17,506명16,999명18,620명21,207명

현재 센트럴 리그, 퍼시픽 리그 통틀어서 관중 동원력 꼴찌다. 하지만 2015년 기점으로 관중이 대폭 늘어나고 있다는 점은 긍정적이라고 볼 수 있겠다.

6 시즌 성적 및 이야기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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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즈미 코나타: 선생님, 롯데가 우승하면 과자값이 좀 싸질까요? (ㅠㅠ)

쿠로이 나나코: 니 머라카노? 내 선생되고 30년동안 못하고 있다 아이가.[52]

러키☆스타에 나타난, 30년간 우승 못한 팀의 비애가 드러난 짤. 컵스팬 : 뭐?! 리버풀 FC는 이 짤의 영국판 정작 이 짤이 나오고 다음 해 리그 우승+일본 시리즈 우승[53], 5년 뒤에는 사상 최대의 하극상을 일으키는 이변을 보여주며 일본시리즈에 우승하게 된다. 이 만화가 자극제가 되었나?? 그럼 한신과 한국 롯데도 그렇게 그린다면?? 근데 그 다음 해엔 리그 최하위 크리 특히 2005년에는 한신을 호구로 삼는 이승엽과 이마에 등, 투타의 기막힌 조화로, 한신 타이거스를 시리즈 4전 전승, 총합 스코어 33:4로 발라버리며 '33-4'라는 한신 놀리기용 관용어를 만들어 버렸고, 제1회 코나미컵에도 결승에서 삼성 라이온즈를 꺾고 우승.[54][55] 물론 마무리가 희극이라도 작가질한 건 논외
그러나 과자값이 싸지는 일은 없었다. [56]

6.1 2009년 시즌

어이없게도 시작하는 시점에서 이미 바비 발렌타인 감독의 해임이 결정 나 있었다. 당연한 얘기지만 팀 상태는 막장 of 막장. 팬들의 분위기도 흉흉하여 외야 응원단이 프론트 비난을 자제할 것을 팬들에게 촉구한 니시오카 츠요시를 디스하는 현수막을 거는 등의 해프닝들이 있었다. 결국 의욕없는 감독 및 코치진과 프런트와 현장의 갈등, 이 사이에 새우등 터져 갈팡질팡하던 선수들의 방황이 시너지 효과를 이루어 오릭스 버팔로즈와 함께 퍼시픽리그 꼴찌 경쟁을 하다가 62승 77패 5무로 오릭스 버팔로즈를 제치고 5위를 기록, 다행이 꼴찌만은 면했다. 휴우...

그나마 이 해에 건질 만한 기록이라고는 6월 10일 히로시마 도요 카프 상대로 한이닝 초최다 15득점 신기록 및 1이닝 타자일순 두 번 정도......

오프시즌에는 이러한 분위기를 타파해 보고자 하여 신 감독으로 프랜차이즈 스타 출신의 니시무라 노리후미 감독을 내정하였으며 한신 출신 스타급 선수인 이마오카 마코토를 비롯해, 타팀에서 방출되었지만 충분히 써먹을수 있어보이는 선수들을 위주로 대규모 전력보강을 하여 다음 시즌을 대비하였다. 또한 김태균이 FA풀리자마자 그날로 구단주가 달려가 계약서에 도장 받아오는 등, 다른해에 비해 발빠르고 정력적으로 움직였다. 진작에 그랬으면 우승했겠다

6.2 2010년 시즌

2010년 시즌 시작 전, 하위권을 예상한 반응이 많았으나 한국의 모 자매팀처럼 무시무시한 타력을 앞세워서 상위권 싸움을 벌였다. 투수진은 고만고만하지만 홈런-도루 만능 테이블세터 니시오카 츠요시와 무시무시한 도루 페이스를 보여주고 있는 신인 오기노, 쩔어주는 출루율에 2루타 머신인 이구치와 타점 우걱우걱 씹어먹는 김태균, 한방이 있는 오마츠까지의 1-5번 라인은 리그 최강의 득점력을 자랑했다. 심지어 요미우리 타선하고 비교하고 기록상으로는 밀리지 않는다. 2005년 일본시리즈의 주역들인 후쿠우라, 사부로, 사토자키, 이마에 등 베테랑들이 포진한 하위타선도 지뢰밭. 허나 시즌 후반으로 가면서 힘이 딸리는지 3위권으로 추락하고, 여기에 김태균이 체력저하로 후반기에 19타점밖에 못 올리면서 일조를 했다. 혹자는 석류버스에게 정기를 너무 빨려서 그렇다고 하기도. 결국 막판 뒷심을 발휘한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와 시즌 마지막 경기까지 끌고가는 접전끝에 0.5게임차로 간신히 3위에 안착. 클라이맥스 시리즈 1차전에 진출하여 2위팀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와 격돌한다. 재밌는 점은 닛폰햄과 0.5게임차로 클라이맥스 시리즈를 놓고 싸운것은 2년전 시즌인 08년에도 있었다. 그 때는 0.5게임차로 닛폰햄이 승리. 역사는 돌고 도는듯(...).

클라이맥스 시리즈 1차전에서는 시즌 막판 역전당해 우승 놓치고 헤롱헤롱한 세이부를 상대로 선발싸움에서는 밀렸지만 릴리프진들을 집중 공략하여, 2경기 모두 9회에 동점으로 따라붙는 뒷심을 발휘하면서 연속경기 연장 승리. 2연승으로 세이부를 제끼고 CS 2차전에 진출하였다.

그리고 CS 2차전은 정규시즌 우승팀인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어드밴테이지 1패를 먼저 안고 시작하며 전경기 원정이라는 악조건에 한때 1승 3패로 수세에 몰렸었으나, 시즌중 신나게 쳐맞던 막장 투수진이 갑자기 분발한 덕에그보다 소뱅 타선 캐삽질, 벼랑끝에서 3연승으로 기사회생. 우승팀을 제치고 퍼시픽 리그 대표로 일본시리즈에 진출하였다. 정규시즌 3위팀으로 일본시리즈에 진출한것은 클라이맥스 제도가 실시된 이후 이번이 처음.[57]

일본시리즈는 3년만에 진출한 주니치 드래곤즈와 대결.[58] 그런데 롯데나 주니치나 자기 지역에서만 인기 있고 다른데서의 인기는 시망인 팀들이라 일본시리즈 1,2,5차전을 공중파에서 중계하지 않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3,4,6,7차전은 중계예정이고 문제는 5차전이 불방이라 5차전에 우승팀이 정해지면 일본시리즈 우승순간을 공중파로 볼 수 없는 일이 벌어질뻔했다. 단 양팀 전적이 두팀모두 2승씩은 건진 덕에, 5차전에 끝날일이 없어져서 일본시리즈 우승순간 공중파 불방사태까지는 일어나지 않았다. 비인기 카드의 일본시리즈가 얼마나 초라한지 보여주는 단적인 예.

그러나 일본시리즈 내용 자체는 대단한 명경기였으며, 특히 6차전은 연장 15회, 경기시간 5시간 43분이라는 일본시리즈 역대 최장시간 경기 기록을 세우기도 하였다. 결국 이런 치고박는 명승부 끝에 7차전도 연장 12회까지 가는 혈전을 승리로 장식한 롯데가 2010년 우승을 차지하였다. 구단 역사상 4회째 우승.

이번 우승은 일본야구 사상 처음으로 3위팀으로 일본 시리즈 제패라는 사상 최초의 대기록이며, 이를 두고 일본 언론은 사상 최대의 하극상 이라는 표현으로 이를 기렸다.

6.3 2011년 시즌

그야말로 선발 부재, 타선 실종중. 전해부터 예견되었지만 투수 공백이 심해서 에이스급인 나루세와 카라카와의 1,2선발로 근근히 먹고 사는정도로 나머지는 처참한 수준. 전반기는 신선놀음 하는 2강 밑에서 12.5게임차로 간신히 3위로 통과했으나 시즌 뒤로 갈수록 전해 우승팀의 포스를 잃어가며 결국 최하위까지 굴러 떨어졌다. 전해에 3위 우승의 진기록을 세웠으니 이젠 우승팀에서 최하위까지 1년만에 돌파하는 새로운 기록을 써주실듯[59]

타선 역시 니시오카 츠요시의 공백과 거포 부재로 팀 전체 홈런이 홈런 1위 1선수보다도 못할정도로 물방망이 과시중. 이 시즌에 나카무라 타케야가 친 홈런이 48개였는데 마린즈 팀 전체가 친 홈런은 겨우 46개였다...김지바, 김마린 그리고 그 와중에 김태균마저 부상으로 퇴단하는 바람에 물배트화가 가속중.

6.4 2012년 시즌

2012년 4월 기준으로 20경기에 11승 8패 1무로 2위를 마크하고 있다. 뻘영입이라고 까이기까지 했던 세스 그레이싱어의 뜻밖의 회춘투가 크게 작용한듯 하다. 하지만 시즌 중반이 지나면서 전반적으로 팀 전체에 힘이 떨어져가면서 점점 내려가기 시작하여 결국 시즌 5위로 마감하고 말았다. 꼴찌까지는 안 한 이유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아뭏든 2000년대 초반 한국에 있는 자매팀의 체질이 이쪽으로 옮겨온 듯. 결국 니시무라 감독은 시즌 끝나고 재계약을 맺지 않는 방향으로 해임되었고 후임 감독으로는 두산 베어스에서 수석코치를 지내던 이토 쓰토무가 부임하게 되었다.

6.5 2013년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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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1 페넌트레이스

작년과 크게 다를 것이 없는 전력에도 이토 쓰토무 감독의 용병술이 잘 맞아떨어졌는지 분전하면서 전반기에는 퍼시픽리그 1위로 올라섰다. 그러나, 중반부에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에 리그 1위 자리를 내주었다. 설상가상으로 페넌트레이스 마지막 경기에서 리그 막바지에 무섭게 치고 올라온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에 패하여 괜히 발목 라이벌이 아니다 3위로 내려갔다. 어쨌거나 클라이맥스 시리즈에는 진출하였다.

6.5.2 포스트시즌

클라이맥스 시리즈 퍼스트 스테이지에서 2승 1패로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를 꺾었다. 그리고 클라이맥스 시리즈 파이널 스테이지에서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와 맞붙게 되었다.

클라이맥스 시리즈 파이널 스테이지에서, 10월 17일 1차전에서는 0:2로 패하였으나, 10월 18일 2차전에서는 4:2로 승리하였다. 10월 19일 3차전에서는 0:2로 패배, 10월 21일 4차전에서는 5:8로 패하여 부전패 포함 1승 4패로 일본시리즈 진출이 좌절되었다.

6.6 2014년 시즌

스토브리그에서 FA로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의 전 에이스이자 이토 쓰토무 감독의 애제자였던 와쿠이 히데아키를 영입하여 선발진을 보강하였고 외국인 선수로 채드 허프먼루이스 크루즈를 영입했다. 개막전부터 소프트뱅크 호크스에게 3연패를 하는 등 초반 5연패로 고전을 하였다. 다만 선발진의 부진이 매우 심각하여 선발진 중 유일하게 10승과 3점대 방어율을 거두며 신인왕을 차지한 이시카와 아유무를 제외하고 와쿠이와 기존에 에이스 노릇을 하였던 나루세 요시히사 그 외 선발 자원인 후지오카, 후루야, 카라카와 등이 죄다 부진한 시즌을 보냈다. 타선에서는 2루수 루이스 크루즈가 16홈런을 치며 팀 내 홈런 1위로 분전하였고 쿠바 출신의 특급 용병 알프레도 데스파이네가 도중에 합류하여 좋은 활약을 보였으나 그 외에는 부진했다. 최종적으로 팀은 퍼시픽리그 4위로 시즌을 마감하였다.

시즌 이후에는 FA 신분이 된 에이스 나루세 요시히사가 팀 개혁을 조건으로 협상을 했지만 팀의 태도에 크게 실망하여 FA 권리를 행사, 야쿠르트로 이적했다. 이후로는 시카고 컵스 산하 마이너 소속이던 한국인 투수 이대은을 영입하며 선발진을 보강했다.

6.7 2015년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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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내 청춘 러브코메디는 잘못됐다. 속과의 콜라보기획 기념 이미지
전반기를 다 마친 현재 37승 1무 42패로 파리그 4위에 랭크되어 있다. 본전 뽑아야 할 교류전에서도 막상 10승 8패로 큰 재미를 본 건 아니었다. 한신과의 고시엔 3경기가 지바 입장에선 매우 아쉬웠는데, 첫 경기는 오승환을 털어서 이겼지만 두 번째 경기는 0-8에서 8-8까지 따라잡고도 역전 못 시키고 동점만 만들어서 지고 말았다.[60] 놀라운 건 세리그 교류전 1위 한신 타이거스가 얘네들이랑 성적이 동일했다는 거 이후로 한 때 5할에 턱걸이하나 했더니 전반기 막판에 좀 미끄러진 상태다. 반도의 형제팀보단 사정이 나아 보인다 하지만, 세이부 라이온즈가 7월 15일부터 괴물같은 11연패를 당하면서 3위 자리를 차지, 5할 미만의 승률에도 불구하고 포스트시즌 진출을 꿈꾸고 있다. 8월 2일 부로 다시 5할을 찍었으나 4위 세이부와 2경기 차, 5위 라쿠텐과 4경기 차로 불안한 3위를 유지하고 있다.

9월 27일 기준으로 66승 1무 68패로 3위 세이부와 1.5경기차로 4위에 위치해 있다. 세이부가 3경기밖에 남아 있지 않은 상태에서 8경기나 남겨 두고 있는 상황이 롯데에게 유리할 지 불리할 지는 과연...

10월 1일 기준으로 롯데는 69승 1무 68패로 5경기를 남겨두었고, 세이부는 69승 5무 69패로 정규시즌의 모든 경기를 소화하였다. 따라서 자력으로 3위를 차지할 수 있는 상황. 2승 3패만 해도 규정에 의해 동률임에도 불구하고 세이부를 제치고 3위를 차지하게 되어 상당히 유리해졌다.[61]

상대팀 분석을 하면 라쿠텐의 경우 최하위가 확정적이기 때문에[62] 경기에 전력으로 임하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 닛폰햄의 경우 상황이 복잡한데, 클라이맥스 시리즈 퍼스트 스테이지에서 3위 팀과 맞붙어야 하기 때문에 세이부를 상대팀으로 원할 경우 전력으로 임할 가능성이 높고, 롯데를 상대팀으로 원할 경우 전력으로 임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거나 경우에 따라 져주기 게임도 할 수 있다. 만약 닛폰햄이 어차피 두 팀 모두 만만해서 상태팀을 신경쓰지 않는다면 클라이맥스 시리즈를 앞두고 체력을 비축하기 위해 전력으로 임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어쨌든 롯데로서는 2승만 하면 되는 상황이고 최하위인 라쿠텐과의 대결이 3경기이기 때문에 클라이맥스 시리즈 진출에 상당히 유리한 상황이다.

10월 2일 라쿠텐전은 선발 이대은이 4⅓이닝 4실점하면서 4-3 패배를 당했다. 3일, 라쿠텐을 2-0으로 이기며 어제의 패배를 설욕했다. 이제 남은 3경기중 1경기만 이기면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를 제치고 클라이맥스 시리즈 막차를 탈 수 있다! 4일, 니혼햄에 5-3으로 승리하며 클라이맥스 시리즈 막차 탑승에 성공했다. 세이부 지못미

10일 클라이맥스 시리즈 1차전, 롯데의 공인 천적 '괴물' 오타니를 2.2이닝동안 5자책으로 강판시키면서 승기를 잡았다. 이후 12연속 볼넷 등 볼질로 자멸한 니혼햄 투수들을 착실하게 털어먹으며 9-3으로 승리, 먼저 1승을 가져갔다. 그러나 2차전에서 8회까지 2대1의 박빙의 리드를 가져가다가 8회말 투수 교체 타이밍을 놓치고 털리면서 4대2로 역전패, 1승1패로 마지막 3차전까지 치르게 되었다. 12일 3차전, 에이스 와쿠이 히데아키가 1회부터 볼넷과 피안타로 만루를 만들며 1점을 먼저 니혼햄에 내줬다. 하지만, 2회초 이구치 다다히토가 솔로포를 날리며 1-1, 동점으로 팽팽한 분위기를 이어갔다. 그 이후 요시카와와 와쿠이의 투수전을 빙자한 잔루 범타 놀이이 이어지다 7회초, 데스파이네가 솔로포를 터뜨리며 2-1로 한점 달아나는데 성공했다. 그 이후, 마츠나가-오타니-우치의 불펜진이 닛폰햄 타선을 틀어막으며 2-1로 승리, 파이널 스테이지 진출에 성공했다. 닛폰햄은 10개의 안타를 기록했는데도 단 1점(..)을 올리며 6.5경기차가 나는 롯데를 맞아 자멸했다. 또한, 공동 다승왕 철강왕 와쿠이 히데아키는 무려 143개의(..) 공을 던지면서 4볼넷 10피안타를 허용했지만 물이 오른 경기운영 능력으로 6.1이닝 1실점 1자책을 기록하며 오늘 승리의 일등공신이 되었다.

그렇게 2위인 닛폰햄을 꺾고 기세좋게 적지인 후쿠오카로 들어와서 파이널 스테이지를 치르게 되었다. 클라이맥스 시리즈가 시작 되기도 전에 5년 주기설(...) 등을 동원해서 2005, 2010년의 기적을 재현한다면서 호기롭게 하극상을 선언했다. 퍼스트 스테이지에서 6.5게임 차나 벌어져있던 상대팀을 꺾고 올라오는 등 파이널 스테이지에 임하는 분위기는 꽤 좋은 편이었다. 교류전에서 센트럴 리그 상대팀들 상대로 사용하던 도발 포스터를 클라이맥스 시리즈 전용으로 제작[63]하는 등 상대팀을 도발하여 압박을 주는 작전도 동원했다. 그러나 상대팀은 정규시즌에서 무려 18.5게임이나 차이가 나는 2015년의 대정의. 적장 쿠도 키미야스는 롯데의 도발에 「한 경기도 내줄 생각은 없습니다만」이라는 말로 응수했다.

그리고 벌어진 1차전에서 상대팀 선발 다케다 쇼타의 제구 불안을 틈타서 키요타의 적시타로 3회초에 2점을 선취했으나 곧이어진 3회말에 상대 타선에게 계속 안타를 허용하던 선발 오미네 유타가 야나기타 유키에게 동점 홈런을 허용했다. 결국 이토 감독은 선발 오미네를 3이닝만에 포기하고 계투진을 짧게 이어가는 방식으로 전환했다. 적절한 타이밍에서의 교체로 상대팀 타선을 침묵시키는 데 성공했으나 5회초 무사 2, 3루의 찬스에서 다케다를 구원해서 올라온 센가 고다이에게 용병 두명이 잇달아 삼진으로 기회를 날린 후 9회까지 2안타로 틀어막히면서 연장전에 돌입했다. 연장 10회초를 삼자범퇴로 이어진 10회말 수비에서 시즌 막판 원래 마무리였던 니시노의 부상으로 임시 마무리로 기용된 우치 다쓰야가 선두타자인 대타 우에바야시 세이지를 스트라이크아웃 낫아웃으로 출루 시키면서 불길한 기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희생번트 뒤에 대타 하세가와 유야에게 안타를 허용해서 1, 3루가 되자 다음타자 야나기타 유키를 걸르고 만루작전을 썼다. 그러나 만루에서 우치카와 세이이치에게 끝내기 안타를 허용하고 1차전을 내줬다. 2차전에도 선발 후루야가 5회까지 1실점으로 버텼으나 6회 2사후 갑작스럽게 연속안타를 허용하면서 난타당하며 순식간에 5실점했고 결국 1대6으로 궁지에 몰리게 됐다.

더이상 물러설 곳이 없는 3차전에서는 선발 이시카와가 초반에 우치카와에게 적시타, 이대호에게 투런 홈런을 내주며 3대0으로 끌려갔고, 타선은 볼질 마왕 나카타 켄이치를 공략하지 못하고 1득점에 그치면서 5년만의 하극상을 호기롭게 선언했던 클라이맥스 시리즈에서 18.5게임차의 벽을 넘지 못하고 총 전적 0승 4패로 시즌을 마감했다.

그러나 대체적인 분위기는 현재의 전력으로 여기까지 온 것만 해도 최선을 다했다는 평이 대세이고, 이토 감독도 파이널 시리즈 내내 현격한 전력 격차를 실감한다는 듯한 뉘앙스의 발언을 거듭하는 등[64] 팀 전체적으로 파이널 스테이지에서의 패배가 그렇게 큰 충격으로 다가오지는 않은 모양. 구단에서도 전력 열세에도 불구하고 최대한의 성과를 낸 이토 감독을 유임시키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을 것으로 보인다.

6.8 2016년 시즌

6.8.1 스토브 리그

주전 2루수 루이스 크루즈요미우리 자이언츠행으로 인하여 그 대안으로 삼성 라이온즈에서 맹활약 했었던 야마이코 나바로를 영입하였고 NPB 통산 64승을 거둔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출신의 선발 투수 제이슨 스탠릿지를 영입하였다. 2005년 일본시리즈 MVP 이마에 토시아키는 FA로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로 이적하였다. 3루 공백을 두고 백업, 유망주 내야수들의 대격돌이 예상된다.

하지만 야마이코 나바로는 시즌 시작 전 실탄 소지 혐의로 총도법 위반 혐의로 체포되어 큰 우려를 나타냈다.삼성 의문의 1승 하지만 증거 인멸이나 도주 우려가 없어서 석방 되었고, 구단에서는 불기소 처분을 받았다고 발표하였다.

6.8.2 페넌트레이스

오랜만에 홈에서 맞는 개막전이며 개막 시리즈 상대는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이다. 롯데의 선발은 와쿠이 히데아키, 닛폰햄의 선발은 열도의 로나쌩오타니 쇼헤이이다.무게감의 차이는 있지만 전년도 다승왕들의 매치업이 성사되었다. 초반부터 롯데의 타자들이 오타니를 두들겼고 3점을 먼저 선취했다. 와쿠이는 7이닝 무실점 짠물투를 보였으며 8회에 2점을 내주긴 했지만 끝까지 리드를 잘 지켜서 3-2로 승리를 거두었다.

4월 13일 현재 퍼시픽리그 선두를 달리고 있다. 하지만 이 후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가 역대급 페이스를 기록하면서 추월당해 2위로 떨어졌다. 6월 17일 현재, 교류전에서 12개팀중 2위를 기록중이며 퍼시픽리그에서도 2위에 랭크되어있다. 교류전, 퍼시픽리그 선두는 모두 호크스. 6월 20일 현재, 교류전에서 12승 6패(승률 0.666)을 기록하며 소프트뱅크에 이어 2위로 마쳤다. 교류전, 퍼시픽리그 모두 콩라인 그러게 왜 요코하마한테 스윕을 당해서

투수는 '14년 퍼시픽리그 신인왕 출신의 이시카와 아유무가 두각을 나타내고 있으며, 리그 수위타자인 외야수 카쿠나카 카츠야가 공격진을 이끌고 있다.

오타니 쇼헤이를 앞세운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가 파죽의 15연승을 달성하며 3위로 처졌다.... 그래도 B클래스 걱정은 안해도 될거같다. 3위로 가을야구 해도, 롯데의 주특기는 뭐다? 게다가 퍼시픽리그 클라이맥스 시리즈는 6년 연속으로 3위팀이 2위팀을 이기고 파이널 스테이지로 진출했다. 2위가 사망플래그. 근데 2위가 너무 강해보이는 게 함정...

센트럴 리그 클라이맥스 시리즈 대진 팀이 확정된 9월 19일 기준으로 4위 도호쿠 라쿠텐과의 승차는 7.5경기이고, 남은 경기는 9경기다. 라쿠텐이 기적을 보이지 않는 이상 3위로 시즌을 마칠 확률이 높다. 2위는 13경기차라 들 수 없다. 결국 9월 24일 오릭스와의 경기에서 승리하고 라쿠텐이 닛폰햄에게 짐으로써 2년연속 클라이맥스 시리즈 진출에 성공했다.

그러나 정작 CS에선 호크스에게 2연패로 광탈당하면서(...) 늘 해왔던 하극상을 실현하지 못하고 시즌을 마감했다(...)

7 유니폼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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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니치 오리온즈 시절 유니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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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오리온즈 시절 유니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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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1972년까지 사용한 롯데 오리온즈 홈 유니폼. 참고로 원정 유니폼은 조금 짙은 회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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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1991년까지 사용한 롯데 오리온즈 유니폼.

KBO 리그롯데 자이언츠모기업이 똑같아서 오리온즈~마린즈 초창기 시절인 1973~1991년까지는 완전히 같은 디자인의 유니폼을 입었다. 다른 점이라면 자이언츠는 롯데의 L과 자이언츠의 G를 겹쳐쓴 로고[65]인데 오리온즈는 롯데의 L과 오리온즈의 O를 겹쳐쓴 로고(또 한국롯데완 달리 일본롯데엔 L과 O 사이에 오리온을 상징하는 별이 그려져 있었다.)를 사용했다. 롯데 자이언츠, 정확히는 실업야구 팀인 롯데 자이언트 시절부터) 2001년까지 오리온즈-마린즈의 유니폼을 공유했다.

1992년~1994년 유니폼으로 좌측이 원정, 우측이 홈.

다만 이 기간 중 예외인 기간이 치바로 연고 이전 후 마린즈로 이름을 바꾼 초창기인 1992~1994 시즌. 이 시기에는 초창기 팀 색과 똑같이 핑크색이 강조색으로 들어간 유니폼을 입었다.[66] 모자 로고는 앞글자를 딴 핑크색 'CLM'으로 되어 있었다. 사실 초창기여서 그런지 오리온즈 시절 유니폼과 상당히 비슷하다. 다만 변경점도 있긴 한데.

1. 단추형에서 V넥 스타일로 바뀌었다.
2. 유니폼의 줄무늬가 분홍색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어깨 줄무늬는 없어졌다.
3. 오리온즈 시절의 붉은 LOTTE 로고 대신 치바 롯데 마린즈 로고가[67] 들어갔다.
4. 원정 유니폼 색깔이 회색으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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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비 발렌타인 감독이 취임한 1995년부터 '메이저리그 스타일'의 심플한 유니폼이 적용되었다.[68] 단추형에 원정은 회색, 홈은 흰 바탕에 검은 핀스트라이프가 들어간 심플한 디자인으로 바뀌었다. 2000 유니폼은 원정만 상의 검정색으로 바뀌었으며, 홈 유니폼은 아직까지도 사용하고 있다. 비슷한 시기 롯데 자이언츠의 유니폼과도 비슷한 디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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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밋밋한 디자인에서 벗어나고자 원정 유니폼은 상의 검정+하의 흰색 조합으로 변경했고, 2005년부터 일명 사무라이 유니폼이라는 얼트유니폼을 도입했다(오른쪽 두 번째의 이마에 토시아키가 입은 디자인). 이 유니폼이 반응이 매우 좋아 시즌 후반부터 사실상 홈 유니폼을 대신했으며 이승엽과 2005 일본시리즈 우승으로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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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부터 얼트와 원정 유니폼을 변경. 다만 흰+검이 메인이었던 기존 얼트에 비해 흰+빨로 바뀐게 뭔가 썩 반응이 좋지 못했다. 원정의 경우 그라데이션이 들어간 스타일로 바꿔 호불호를 떠나 디자인 자체는 색다르다고 호평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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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측부터 순서대로 2010~2013 원정, 2010~2012 보조, 1995~현재 홈.

2010년 유니폼의 경우 원정 유니폼이 검정색으로 주로 이루어져 간지나는 유니폼이 되시겠다. 이 유니폼은 김태균과 2010년 일본시리즈 우승으로 유명하다. 서드 유니폼 역시 변화했다만, 홈 유니폼에 팔부분만 검정으로 칠한 느낌이 적잖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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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외에 2012년, 치바 현으로의 구단 이전 20주년을 맞아 입기 시작한 'CHIBA' 유니폼을 2013년 정식으로 서드 유니폼으로 채용해 간간히 입고 있다. 부산 갈매기는 BUSAN 유니폼 안 나오나 사이타마와의 라이벌 시리즈 6경기엔 홈/원정 상관 없이 이 유니폼을 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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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원정 유니폼(검정색+회색으로 복귀,빨간색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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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마린 페스타 유니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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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형 CHIBA 유니폼. 치바 현 캐릭터인 치바군에서 따온 빨간색을 사용한다. 완전 뜬금없는 건 아닌 게, 롯데 오리온즈 때에도 빨간색은 썼고, 2005년부터 간간히 빨간색을 섞어서 썼다.

8 주요 선수

8.1 현역

8.1.1 투수

8.1.2 포수

8.1.3 내야수

8.1.4 외야수

8.2 OB

8.2.1 투수

  • 나리타 후미오 (1965 - 1979)
롯데 재적 14년동안 통산 169승을 올린 70년대의 에이스. 1974년 일본시리즈 우승의 공헌자였다.
도끼투구법(マサカリ投法)으로 유명한 '일요일의 남자'로 오리온스 시절을 대표하던 에이스.
한국명 김말홍. 카네다 마사이치의 동생. 1974년 다승왕을 차지하면서 리그 우승, 일본시리즈 우승에 공헌하였다.
AKB48 멤버 쿠라모치 아스카의 아버지
마크 크룬 이전 일본프로야구 최고속 공인기록(159km/h) 보유자. 후에 메이저리그에 진출했다.
일명 고글맨. 빼어난 제구력과 다양한 변화구로 유명했다.
좌완투수로 아래의 우완 나리모토와 더블 스토퍼로 활약했다.
고바야시 마사히데가 마무리를 맡기 전까지 활약한 마무리 투수.
무라타 쵸지의 뒤를 이은 제2대 '일요일의 남자'로 별명이 '선데이 신고'였다.
별명 조니 쿠로키. 코미야마와 함께 90년대 롯데의 암흑기를 이끈 우완투수.
아래의 고바마사와는 달리 주로 선발 투수로 활동했다.
한때 일본프로야구 한 시즌 최다등판 기록을 가지고 있었던 좌완 셋업맨. 야부타-후지타-고바야시 마사히데는 'YFK'라 불리며 롯데의 2005년 일본시리즈 우승에 기여했다 반면 원조인 JFK(한신)은...
일본을 대표하는 마무리 투수 중 한 명임과 동시에, 팬들의 똥줄을 타게 만드는 장작쌓기와 방화로도 유명했다. ??? : 바카모노 고바야시! 그래서 붙은 별명이 '코바마사 극장'. 이렇게만 소개하면 불쇼만 저지른 형편없는 투수로만 생각되겠지만 롯데에 재적한 9년동안 8년연속 20세이브 포함 통산 227세이브를 올린 훌륭한 마무리 투수였다.
2005년 시즌의 에이스였던 우완투수.
공은 느리지만, 릴리스 위치를 늦게까지 숨기는 특유의 '마네키네코' 투구법의 디셉션을 무기로 활약했던 좌완 투수. 2014 시즌 후 팀과의 불화로 FA를 선언하고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로 이적했다.

8.2.2 포수

2000년대 두번의 일본시리즈 우승을 이끈 프랜차이즈 포수.

8.2.3 내야수

일본을 대표하는 콩라인 감독. 자세한 건 항목 참조.
오랜 선수생활과 기행으로 일본프로야구의 '선인'으로 불렸다. 카와카미 테츠하루에 버금가는 당대 최고의 선구안을 지녔다고 평가된다.
60~70년대 롯데의 2루를 책임진 공수겸장의 내야수.
한국명 김유세. 일명 미스터 롯데. 1970~80년대 롯데의 간판 3루수로 통산 2,000안타를 쳐냈던 강타자다. 오리온즈 시절의 프랜차이즈 스타. 선수 은퇴 후 바로 이나오 카즈히사의 후임으로 1987년부터 3년간 감독으로 재임했는데, 2년 연속 꼴찌라는 흑역사를 쓰면서 해임되었다. 이 사람의 등번호였던 8번은 현재 롯데의 준영구결번.(원래 영구결번이었으나 치바로 이전하면서 해제) 긴테츠 팬들에겐 자신들의 발목을 잡은 천하의 개쌍놈[69]
롯데를 대표하는 외국인 강타자. 통산타율 .320로 현재까지 일본프로야구 통산타율 1위에 랭크되어있다.[70]
레론 리의 동생으로 메이저리그 경력이 8년이나 되는 형과는 달리 메이저리그 경력은 없으나 형제가 같은 팀에서 활약하면서 둘 다 빼어난 활약을 했다. 롯데에서만 11년을 뛰면서 프랜차이즈급 외국인 선수로 활약한 형과는 달리 요코하마 다이요 훼일즈, 야쿠르트 스왈로즈등 팀을 옮겨다녔지만 일본에서 활동한 10년 동안 통산 타율 .308, 229홈런, 884타점으로 형 못지 않은 족적을 남겼다. 미국으로 귀국해서는 시카고 컵스의 아시아지역 스카우트 담당 등으로 활동했으며 후에 2003년 오릭스 블루웨이브의 당시 감독 이시게 히로미치의 해임으로 감독대행을 맡기도 했다. 그러나 꼴찌 최희섭을 스카우트 한 것과 데릭 리의 아버지로도 유명하다. 롯데 시절에는 이니셜이 형과 똑같기 때문에 형을 성인 「리」를, 본인은 이름인 「레온」을 등록명으로 사용하였다.
롯데 오리온즈 시절 3번이나 삼관왕을 차지한 전설의 대타자.
1986년부터 4년 연속 도루왕을 차지한 카와사키 시절 고유 1번. 2010년 일본시리즈 우승 감독. 그러나 다음 해인 2011년 최하위.[71] 2012년 5위란 처참한 성적을 남기고 퇴임. 2016년 현재는 오릭스 버팔로즈의 1군 코치로 재직 중.
1번부터 9번 타순까지 모든 타순에서 홈런을 날린 적이 있었고, 2루수를 중심으로 내 외야 가리지 않고 출전한 유틸리티 선수였다. 데뷔부터 은퇴까지 롯데에서만 활약했다. 롯데 오리온즈 출신으로서는 마지막 현역 선수.
일본야구 최초의 외국인 주장.
2005년 일본시리즈 MVP를 차지한 3루수. 2015년 오프에 FA로 라쿠텐 골든이글스로 이적.
기껏 데려왔으나(...)

8.2.4 외야수

이 팀에서 프로통산 3000안타를 기록했으며 마지막으로 선수생활을 보냈다.
1988년 수위타자. 이 해, 전설의 10.19 더블헤더 제2경기에서 우승 일보직전에 와서 경기를 확실하게 매듭짓기 위해 구원 투입된 긴테쓰 버팔로즈의 에이스 아와노 히데유키로부터 동점 홈런을 뽑아내어 긴테쓰의 우승을 물거품으로 만드는 결정타를 날린 것으로도 유명하다.
U.N. 오웬은 그녀인가?를 응원가로 쓰던 주인공. 2014 시즌 후 전력외통보를 받았다

등번호 3번 , 2016년 9월 은퇴식을 거침

8.2.5 감독

팀의 일본시리즈 우승이자 최초의 일본시리즈 우승팀의 영광을 안겨준 감독, 그러나 1952년 "헤이와다이 사건"[72]을 일으켜 해임당했다.
한국명 김경홍. 선수로서는 뛰지 않았으나 감독으로서 장기 집권을 했다. 1974년 일본시리즈 우승 감독.
니시테쓰 라이온즈의 전설적인 에이스. 평범함을 거부하는 것으로 유명했던 오치아이 히로미츠의 프로 초창기 시절 온갖 비판의 화살을 막아내며 오치아이가 자신만의 스타일을 고수할 수 있도록 후원자 역할을 해서 오치아이의 기량이 만개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27살의 나이에 데뷔한 늦깎이 신인이 일본프로야구의 레전드가 될 수 있었던 데에는 남들이 타격폼이 괴상하다고 지적할 때에도 억지로 수정하려 하기 보다는 본인이 뜻을 펼 수 있도록 배려해준 이나오의 역할이 절대적이었다. 웬만해서는 야구계의 선배들에게조차 별다른 존경심을 표시하지 않으며 자신만의 스타일을 고수해온 오치아이조차 이나오만큼은 프로에서의 스승으로서 진심으로 존경을 했으며 이나오의 퇴임이 주니치 드래곤즈로의 트레이드를 요청하게 된 가장 큰 계기였다. 또한 1995년에 롯데가 10년만에 A클래스에 들어가기 전까지 1984~1985년 2년 연속 2위를 기록하며 롯데 오리온즈 시대의 마지막 A클래스로 팀을 이끈 감독이기도 했다. 그러나 1986년 4위를 기록하며 물러났다.
33-4 당시 감독. 일본 프로야구 최초의 외국인 우승감독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8.3 구단 출신 메이저리거

9 관련항목

  1. 롯데 자이언츠도 예전에 사용했으나 2009년부터 사용하지 않는다. 엠블렘이 같았을 당시 한국 롯데 로고엔 MARINES 자리에 BUSAN이 들어갔고, CHIBA LOTTE 자리에 LOTTE GIANTS가 들어갔다.
  2. 대표 마스코트, 한국에 있는 아우 갈매기보다는 좀 더 매스미디어에 자주 출현하는 녀석이다.
  3. 58~63년의 다이마이는 다이에이 유니온즈와 합병해서 이름을 붙인 것. 딱히 다이에이가 경영에 참여했다든가 그런 것은 아니다.
  4. 69~70년은 네이밍 스폰서
  5. 전후기리그제 성적도 포함.
  6. 정규시즌 3위로 클라이맥스 시리즈를 통과하여 진출, 우승까지 달성했다. 1992년의 자매팀이 연상된다.
  7. 2005년 정규리그 1위는 소프트뱅크 호크스지만, 2004년에서 2006년까지는 클라이맥스 시리즈 우승팀을 리그 우승팀으로 간주했다.
  8. 롯데 자이언츠 마스코트도 이름만 바꿨지 사실상 얘들을 그대로 옮긴 거나 다름없는데, 이에 대한 비판이 있을때 해명하기를 먼 친척 관계라는 설정을 해놨다(...) 마군 린짱 즈짱의 재일교포설. 근데 롯데그룹을 보면 알겠지만 틀린 말은 아니다.
  9. 이 셋 외에도 '쿨'이라는 마스코트가 있는데, 연고지 이전과 얽혀있는 마스코트다. 롯데 자이언츠는 연고지가 바뀌지 않은 팀이므로, 쿨에 해당하는 마스코트가 없다.
  10. 2005년 일본시리즈에서 우승할 당시 치바 롯데-한신 타이거스의 양 팀 득점 수. 물론 시리즈 스코어는 4-0 스트레이트였다.
  11. 알려진 후계 구도대로는 장남 신동주가 일본 롯데를 맡고 차남 신동빈이 한국 롯데를 맡도록 되어 있다. 근데 기업규모는 한국롯데가 일본롯데의 10배가 넘는다.
  12. 신동빈이 롯데 자이언츠도 챙긴 적이 있다고 알려져 있는데, 그의 업적으로 제리 로이스터를 데려온 것이 전해지고 있다.
  13. 유독 야구만 심하다. 타 종목의 경우엔 지역명 + 기업명 표기를 한다.
  14. 일본에서 쓰이는 신자체로는 楽天이라고 쓴다.
  15. 쓸 일은 거의 없겠으나, 이것을 굳이 일본 신자체로 옮긴다면 羅徳이 된다(德에서 心 위에 있는 가로획 하나를 생략). 대체로 중국의 간화자(간체자)가 일본 신자체보다 간략한 경우가 많지만, 가끔은 반대인 경우도 있는데 德(徳) 자도 그 예이다.
  16. 현재 중국어 위키백과에서도 롯데 자이언츠 문서를 羅德巨人/罗德巨人으로 적고 있다.
  17. 참고로 이때 마이니치 신문의 창단을 요미우리 신문주니치 신문이 거세게 반발했고 그결과 일본야구연맹이 해체하면서 요미우리 자이언츠주니치 드래곤즈를 중심으로 창단 반대파가 뭉쳐 만든 리그가 센트럴리그, 창단을 지지하는 구단들이 모여서 만든게 퍼시픽리그이다.
  18. 정확하게는 마이니치가 구단 경영에서 손을 떼면서 오늘날의 넥센 히어로즈처럼 명명권 판매 방식으로 구단을 운영했는데, 1969~1970년에 네이밍 스폰서를 맡은 롯데가 70년 파리그 우승 뒤에 "이거이거 대박인데?" 하면서 아예 시즌 종료 후 구단을 사 들인 것.
  19. 이때 상태팀은 쇼치쿠 로빈스. 하지만 모르는 사람이 꽤 있을텐데, 그게 그럴만도 한게 1952년 승률 3할미만 팀 강제합병 정책 대상에 걸려버리는 바람에(...) 타이요 훼일즈와 합병당해 사라졌기 때문이다(...)
  20. 하지만 일본시리즈에서 타이요 웨일즈(1960)와 요미우리 자이언츠(1970)에게 지고 말았다. 그러고 보니 전부 그때 요미우리 출신이잖아?
  21. 그러나 당시 연고지였던 도호쿠에서 아무 행사도 안 하였기에 욕을 한바가지로 먹었다.
  22. 그마저도 전부 플레이오프에서 패배했다. 1977년엔 한큐 브레이브스, 1980년엔 긴테츠 버팔로즈, 1981년엔 닛폰햄 파이터즈에게 패배했다.
  23. 정확히는 정규시즌 2위, 그 뒤 플레이오프에서 우승. 당시엔 플레이오프 우승팀이 리그 우승팀이 되는 방식이었다.
  24. 사실 이건 자신들이 자초한 것이, 롯데가 다이에이한테서 구단을 인수할 당시 다이에이가 "야구장도 같이 사 가시죠?"라고 했는데 롯데가 "노"를 외쳤고, 이 후 다이에이가 부도가 나면서 구장이 제3자에게 매각되면서 철거 크리티컬을 맞은 것.
  25. 1974년 일본시리즈 홈경기를 여기서 치뤘다. 이유는 미야기 구장의 관중수용량이 2만 3천명밖에 되지 않아 일본시리즈 개최조건인 관객수용량 3만명에 맞지 못했기 때문. 다만 위에 보다시피 롯데그룹의 인수 이전에 고라쿠엔을 홈구장으로 쓴 적 있다.
  26. 1978년부터 1991년까지 제1홈구장으로 사용. 현재는 미식축구 경기장으로 리모델링되어있다.
  27. 장훈이 일본프로야구 역사상 전인미답의 3,000안타를 이곳에서 멋진 홈런으로 기록했다.
  28. 広岡達朗. 선수 시절엔 요미우리 자이언츠에만 뛰었으며 이 후 1976~1979년 야쿠르트 스왈로즈 감독으로 재직하면서 1978년 스왈로즈에게 첫 센트럴 리그 우승과 더불어 첫 일본시리즈 우승을 안겨주고, 1982년~1985년 세이부 라이온즈 감독으로 있으면서 라이온즈에게 1982년 24년만에 일본시리즈 우승을 안기고 그 뒤 1983년도 일본시리즈를 연속우승하며 세이부의 황금시대를 이끈 명감독이기도 하였다.
  29. 18연패 이전에는 쇼치쿠 로빈스가(첫 일본시리즈에서 맞붙은 그 상대 맞다.) 16연패를 기록한 게 최다 연패였다.
  30. 하도 연패가 안 끊기자 구단주가 사죄를 하기도 했고, 급기야 연패 타이기록 직전을 앞두고 액막이 의식(...)을 행하기도 했다.
  31. 물론 팀 성적에 비해 상대적으로. 당시 롯데는 비인기 리그였던 퍼시픽 리그 중에서도 손꼽히는 비인기 구단이었고, 아래에 서술하듯 카와사키 구장은 한산한 야구장의 대명사였다.
  32. 여담으로 이마에의 응원가 원곡은 이정현의 '와', 후쿠우라의 응원가 원곡은 조용필의 '해변으로 가요', 이승엽의 응원가는 '힘내라 힘', 사토자키의 응원가는 코요테의 '만남'이다.
  33. 비슷한 사례로 같은 퍼시픽 리그 킨테츠 버팔로즈의 홈구장이었던 후지이데라 구장에서 관중들이 스토브를 반입해(...) 고기 파티를 벌였던 적이 있었다. 어어??
  34. 이후 80~90년대 롯데-주니치를 거치며 활약한 팀의 OB 아이코 타케시도 은퇴 뒤 여러차례 안드로스텐다이온 등의 약물을 복용한 사실을 인정하였다. 이쪽은 노쇠화 뒤 주니치에서부터 약물복용을 시작했다고 증언했지만.
  35. 악동 하야카와는 2010년 시즌 요코하마 베이스타즈로 이적했으나 별달리 활약은 못 하다가 2011년 시즌이 끝난 뒤 은퇴했다. 이 후 2016 시즌부터 친정팀 오릭스 버팔로즈의 2군 외야 수비 주루코치를 맡는다.
  36. 보면 알겠지만 이익 본 건 없다. 희귀한 인정 3루타만 줬을 뿐(...)
  37. 앞에 언급한 배트 던지는 하야카와다. 사실 저런 포수 메치기는 MLB에선 흔한 풍경이으므로 일본 기준으로 험하긴 해도 완전히 이상한 건 아니다.
  38. 난카이 호크스의 홈구장. 호크스의 후쿠오카 이전 후 모델하우스 부지 등으로 쓰이는 안습한 신세가 되었다가(...) 1998년 철거.
  39. 당시엔 아직 프랜차이즈가 제도화 되지 않아서 각지의 구장에서 경기를 치뤘다. 이 해 일본시리즈는 4승2패로 우승했는데, 우승 결정전인 6차전은 오리온즈의 홈 경기였으나 당시 홈구장으로 쓰던 고라쿠엔 구장에서 열리지 않고 오사카 구장에서 열렸다.
  40. 이때가 바비 발렌타인감독 재계약건으로 한참 시끄러울때고 후술할 MVP라는 조직이 앞장서서 발렌타인 재신임운동을 하고있었다.
  41. 같은 리그의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도 자주 이용한다. 특히나 이 둘이 대결하면 외야석에서 장관을 볼 수 있다.
  42. 다만 마린즈 팬들에게 한정된 것은 아니고, 요미우리 자이언츠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 명색이 일본제일 축구현인데 이 팀이 빠졌겠나 등 타 구단의 응원에서도 종종 이러한 축구 서포터에 가까운 응원 문화가 존재하기도 한다.
  43. Marines Victory Productions(약칭 MVP), 치바 롯데 마린즈 외야 응원단 등. 축구와 유사한 롯데 특유의 응원 스타일을 주도했지만, 위에서 서술한 매너 문제와도 관련이 있었다. 대표적으로 일본프로야구에서는 터부시되는 견제 응원을 하다가 거센 비판을 받기도 했다. 정말 꼴리건에게 전염되었을수도
  44. 우연의 일치이지만, 견제 응원이 문제시되던 시기에 김성근은 치바 롯데에서 코치로 일하고 있었다. SK 와이번스에서 보여준 그의 견제 응원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는 이러한 분위기에서 영향을 받았을 수도?
  45. 이들은 2012년에 창단한 일본 사회인야구팀 "도쿄 메츠"의 서포터이자 후원자로 활동을 재개한다.
  46. 레이지본에서 활동했고 2005년까지 롯데 응원단 활동을 하다 구단 직원으로 일하던 진 토시오 씨가 응원단장으로 복귀해 중심적으로 활동하고 있다고 한다. 상술한 U.N. 오웬이나 キラメキラリ는 그의 선곡이라고 한다.(...)
  47. 이때 롯데 마린스 서포터들이 가장 좋아했던 "우리들의 자랑"이 금지곡이 된다. 단지 MVP가 이 노래를 만들었다는 이유만으로.
  48. 단지 서포터 주축이 갈려지고 친 구단성향의 서포터 그룹이 응원을 주도하고 있을뿐, 기본성향은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49. 그러나 초노는 결국 입단 거부, 이듬해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재지명되어 요미우리의 간판선수가 됐다.
  50. 프런트와 갈등이 심하긴 해도 팬들에게는 애증의 관계이기도 하다. 막장스런 '집시 롯데' 시대를 청산해 준 (마린즈 팬 측에서는) 명장이기도 하고 2차 취임기 때 포스트시즌 진출 단골팀(특히 2005년 일본시리즈 우승)으로 만들어 준 감독이기도 하다. 때문에 많은 팬들이 이 조치에 반발하였다.
  51. 간단히 설명하자면, 바비 발렌타인과 보삭스 선수들 간의 불화설이 시즌 내내 나왔다. 바람잘날이 없었던 셈. 자세한 내용은 보스턴 레드삭스/2012년을 참조바람.
  52. 이게 2004년이었다.
  53. 2005년 일본시리즈항목 참조. 이 짤방 유통기한이 꼴랑 1년밖에 안되었다는 훌륭한 증거.(??)
  54. 승리투수 : 와타나베 슌스케 / 패전투수 : 배영수 / 시리즈 MVP : 베니 야그바야니
  55. 이때부터, 2011년 AS에서 소뱅이 삼성에게 결승에서 3:5로 패하기 전까지, 일본팀이 AS에서 4연속 우승을 하게 된다.
  56. 파일:Attachment/치바 롯데 마린즈/Example.jpg
  57. 정확히 말하면 70년대 퍼시픽 리그에서는 플레이오프 제도가 존재했었기 때문에 처음은 아니다. 이전 플레이오프 제도까지 포함하면 1973년의 난카이 호크스가 최초.
  58. 이 두 팀은 1974년 일본시리즈에서 대결한 바 있다. 결과는 롯데 오리온즈의 승리.
  59. 한국 프로야구에서도 있던 기록으로 OB 베어스가 1995년 우승 뒤 다음 해 바로 최하위로 떨어졌다.
  60. 이 때 상대 선발 후지나미 신타로가 7회 1사 이후 실책이 나오며 급격히 흔들렸고 결국 대량실점을 하며 마운드 퇴갤. 그뒤로 불펜을 털어 동점은 만들었지만 더는 점수를 내지 못했다. 이 과정에서 오승환도 지바 타선에게 점수를 허락하지는 않았다.
  61. 2승3패를 하게 될 경우 동률이 되는데 이 경우 퍼시픽리그는 1) 맞대결 전적에서 우위에 있는 팀, 2) 1)로도 동률일 경우 교류전을 제외한 동일리그 소속팀과의 대결에서 승률이 높은 팀(즉, 교류전의 하위팀), 3) 1), 2)로도 동률일 경우 전년도 성적 상위팀의 기준으로 순위를 가르게 되어 있다. 2015년의 경우 세이부와 롯데의 맞대결은 13승 1무 11패로 롯데가 우위기 때문에 1)이 적용 되어 동률이면 롯데가 상위를 점하게 된다. 참고로 동률 팀의 순위를 가르는 기준이 양 리그가 다른데 센트럴리그의 경우는 동률일 경우 1) 승리수가 많은 팀, 2) 1)이 동률일 경우 맞대결에서 우위에 있는 팀, 3) 1), 2)까지 동률일 경우 전년도 성적 상위팀 순으로 기준을 정하게 된다.
  62. 10월 1일 기준으로 최하위 트래직 넘버 1. 즉, 라쿠텐이 전승하고 5위 오릭스가 전패를 해야 라쿠텐이 탈꼴지를 하게 된다.
  63. 도발 포스터에 적힌 내용은 다음과 같다. 퍼스트 스테이지 에서는 「매 사냥을 가기 전에 삿포로에 들러서 햄이나 먹고 가자」, 「퍼스트 스테이지? 네, 통과점입니다」, 「클라이맥스 시리즈 퍼스트 스테이지 통과율 100%의 충격」. 파이널 스테이지에서는 「마린즈 팬 100명에게 물어봤습니다. 공감할 수 있는 속담은 다음 중 어느 쪽? 삼세번 1명, 두번 있는 일은 세번 있다 99명」, 「기다려봐..., 이 상황. 좋은 기억밖에 없는 걸?」, 「클라이맥스 시리즈 호크스 상대 시리즈 패전 0%의 충격」. 2015 클라이맥스 시리즈 파이널 스테이지 0승의 충격
  64. 하지만 파이널 스테이지 내내 무기력한 모습을 보였던 중심타자 데스파이녜에 대해서는 팀의 사기를 꺾었다면서 이런 식이면 같이 있을 필요가 없다는 식으로 디스하기는 했다.
  65. 알다시피 롯데 자이언츠의 캡로고는 LG 트윈스가 생기자 '자이언츠'의 G로 바꿨다.
  66. 비슷한 예가 바로 타이헤이요 클럽 라이온즈.
  67. 물론 지금의 로고가 아닌 92~94년 쓰던 분홍색 로고.
  68. 비슷한 시기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역시 후쿠오카 돔에 입주하면서 보다 현대적인 스타일로 유니폼을 바꾸었다.
  69. 그 전설의 10.19 당시 롯데 감독이 바로 아리토였다. 그리고 아리토는 이 시합 때 8분씩이나 지연행위를 벌이며 경기를 무승부로 만들어버려 긴테츠의 우승실패에 제대로 일조를 했다(...) 자세한 건 10.19 항목 참조.
  70. 일본프로야구에서 통산타율 랭킹의 기준은 4000 타수이다. 한국의 경우는 3000타수가 기준이다. 이는 경기수가 적었던 80년대 초창기 선수(특히 장효조, 통산타수 3050)에 대한 배려의 성격이 짙다. 타수 기준을 그보다 더 높이면 장효조의 통산 타율(.331)이 그냥 참고기록으로 밀려나버리기 때문에 올드 야구팬들의 반발을 고려해서 기준을 낮춘 감이 있다. 참고로 일본인 규정타수 만족 통산타율 1위는 야쿠르트 스왈로즈의 레전드 와카마츠 츠토무. 이치로는 타석은 4000을 넘었지만 타수가 3619라 통산타율 랭킹에는 들어오지 못한다.
  71. 이렇게 일본시리즈 한 팀이 다음 해 리그 꼴찌인 사례는 1961년 미하라 오사무가 이끌던 다이요 훼일즈, 1979년 히로오카 타츠로가 이끌던 야쿠르트 스왈로즈(결국 히로오카는 도중 사임), 그리고 2011년 치바롯데, 2014년 호시노 센이치라쿠텐 이글스(호시노는 건강문제도 있어서 이 해 시즌 종료후 퇴임) 이외엔 없다.
  72. 1952년 7월 16일 니시테츠 라이온즈의 홈구장인 헤이와다이 구장에서의 원정경기 때 4대 9로 뒤지던 마이니치가 우천과 일몰 노게임(당시 헤이와다이 구장은 조명시설이 없었다)을 노리고 고의적인 경기 지연행위를 벌여 결국 5회초에 노게임 선언이 되자 분노한 니시테츠 팬 수천명이 그라운드에 난입한 사건. 이 때 니시테츠의 오시타 히로시와 노구치 마사아키가 둘이서 함께 팬들의 주먹과 발길질에 피투성이가 되어가면서도 관객들을 저지했고 결국 이날 소동은 3300명의 경찰 기동대가 투입되어 겨우 진정되었다. 이날 관객들의 소란을 저지한 공으로 오시타와 노구치는 연맹 표창을 받은 반면 지연 행위를 조장했던 유아사 요시오 총감독은 해임, 와카바야시 타다시 감독은 2군 감독으로 강등당하는 조치를 받고 벳토 카오루가 선수 겸 감독으로 취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