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 아카데미 평생공로상 수상 후 조지 루커스(좌측), 스티븐 스필버그(우측)와 함께 |
1990년 05월 10일 칸 영화제에서 |
(1910년 3월 23일 ~ 1998년 9월 6일)
일본의 영화감독. 국내에서도 저명한 영화감독이며 공식 언론 노출도 많았던만큼 국립국어원 표준 표기법에 따라 구로사와로 표기하며 이는 당 문서에서 언급되는 그의 모든 작품에도 공통된다.[1]
목차
1 개요
오즈 야스지로, 미조구치 겐지와 더불어 일본이 배출한 3대 영화감독으로 꼽히며 그 엄청난 영향력으로 인해 일본 영화의 천황이라는 별칭도 붙었을 정도의 거물 감독.[2] 좀 더 넓게보자면 인도출신의 감독이신 사트야지트 레이와 더불어 아시아 최고의 고전영화감독이란 평가를 받는다. 많은 작품을 만든 감독이 대개 그러하듯 흥행에 부침도 겪었으나 인지도와 인기면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감독인 것만은 확실하다.
다만 일본내 평론가들은 오즈나 미조구치보다는 평균적으로 잘 안 쳐주는 경향도 있다. 이는 구로사와 감독의 스타일이 일본적이라기 보단 서구적이기에(뒤에 보듯 셰익스피어의 《맥베스》를 원작으로 작품을 만들기도 했다.) 서구권 영화인들에겐 사랑받으나 정작 일본 본토에선 제대로 인정받지 못 하는 것과 상통한다. 하지만 이를 근거로 구로사와가 고전적인 할리우드 스타일을 표방했다는 것 역시 성급한 일반화라 할 수 있다. 일례로 영화학자 스티븐 프린스는 구로사와의 영화 스타일이 얼마나 서구의 고전적 영화 만들기 방식과 다른지, 그리고 얼마나 일본 전통 예술의 특성을 추구하였는지를 밝힌 바 있다.
2 생애
2.1 출발과 전성기
1910년 일본 도쿄 근교에서 태어났다. 본래는 화가를 지망하여 한때 화가로서 활동하기도 했으나 재능이 없다고 스스로 판단, 26세에 화가 생활을 접고 [3] 오늘날 토호(東宝) 영화사의 전신인 P.C.L 영화제작소에 입사하여 야마모토 가지로 감독 밑에서 조감독으로 영화감독의 경력을 시작했다.
젊은 시절. |
1943년 흑백영화 '스가타 산시로'를 통해 감독으로 데뷔하여 그 특유의 영상 표현력이 높은 평가를 받으며 흥행에도 성공. 이후 주로 인간적인 휴머니즘을 다룬 《가장 아름다운 자》(1944년), 《우리 청춘 후회 없다》(1946년) 등을 제작하며 토호의 간판 감독으로서 활약한다. 그러나 토호가 공산당 계열의 노조로 인해 혼란한 상태가 되자 토호를 퇴사하고 나루세 미키오 등과 함께 '영화예술협회'를 설립, 다이에와 함께 1950년에 만든 영화 《라쇼몽》이 1951년 베니스 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를 수상하며 구로사와 아키라는 일약 세계적인 감독으로 급부상한다.
이 시기, 구로사와 아키라를 말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자 그의 페르소나로 불리는 배우 미후네 토시로와 만났다. 야마모토 가지로의 영화에 오디션을 보러왔다가 떨어진 미후네를 보고서 소위 필이 꽂힌 구로사와가 야마모토를 적극 설득해서 캐스팅했으며 1948년 자신의 영화 《주정뱅이 천사》에 미후네를 캐스팅하여 스타의 반열로 밀어 올렸고 이후 구로사와와 미후네는 찰떡 콤비로 활약하게 된다. 그리고 1954년, 미후네가 주연으로 활약하였으며 구로사와에게 불멸의 명성을 가져다준 영화 《7인의 사무라이》가 개봉. 이 영화는 베니스 영화제 은사자상을 수상했으며 단순히 한 영화로만 끝난 게 아니라 이에 지대한 영향을 받은 할리우드 감독들에 의해 이후에도 그 아우라를 드리운 작품이기도 하다. 대표적으로 스티븐 스필버그, 조지 루카스 등의 이후 작품에서 그런 모습이 드러나며 자세한 사항은 항목 참조.
1957년에는 셰익스피어의 비극 맥베스를 일본풍으로 바꿔 만든 《거미집의 성》을 만들어 호평을 받았고 1958년에는 《숨은 요새의 세 악인》을 만들어 흥행 성공. 이 성공 이후 아예 독립 프로덕션인 '구로사와 프로'를 설립하고 1961년 《요짐보》, 1962년 《천국과 지옥》 등을 만들며 대감독의 명성을 쌓아 나갔다. 다만 이 독립 프로모션은 사실 구로사와 본인의 의도가 아니라 그에게서 단물만 빼먹고 싶었던 토호의 계산에서 나온 것으로, 《숨은 요새의 세 악인》의 제작 예산이 당초 예상을 훨씬 웃돌자 토호는 구로사와에게 제작비 초과에 따른 리스크를 떠넘기기 위해 독립 프로덕션 설립을 유도한 것. 결국 1965년 개봉한 《붉은 수염》이 촬영 기간과 예산면에서 대대적인 초과로 인한 불협화음을 빚고 원래부터 계산적이었던 양자의 관계는 극도로 악화된다.
2.2 굴곡과 재부상
이무렵 헐리우드에서 감독직 제안이 들어오자 구로사와는 미련없이 미국으로 건너가 《폭주 기관차》의 감독을 맡아 작품 제작에 들어갔다. 그러나 원래 각본을 맘에 들어하지 않은 구로사와가 각본을 뜯어고친 데다가 흑백 35mm 촬영을 원한 미국 프로듀서와 컬러 65mm 촬영을 원한 구로사와와의 갈등으로 결국 영화제작이 무산.[4] 1968년에는 미일 합작으로 진주만 폭격을 다룬 영화 《도라 도라 도라》의 총감독을 맡았지만 미국측 제작사인 20세기 폭스 사, 일본측 제작사인 토에이 영화사와 촬영 일정 등의 문제로 대립했고 결국 감독에서 강판되고 말았다.[5] 이 때의 정신적 타격에다 다른 여러가지 문제들이 겹쳐 1970년에 자살 미수 사건을 일으키기도 한다.
1970년대에 접어들면서 일본 영화는 쇠퇴의 길을 걷게 되고 구로사와처럼 이미 대감독으로서 명성이 자자한 감독 역시 5년에 한 편이나 영화를 내놓을수 있을까말까할 정도로 여건이 열악해졌다. 이에 그는 1975년 소련으로 건너가 소련과 일본 합작 영화 《데르수 우잘라(Дерсу Узала)》의 제작을 주도하고 감독을 맡았고 이 영화가 국제 영화제에서 호평을 받고 수상하면서 다시 재기의 발판을 마련했다. 이후 구로사와는 해외 자본을 끌어와 영화를 만드는 합작영화 제작방식으로 예술성에 치중한 여러 작품들을 만드는데 1980년 조지 루카스와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이 프로듀서로 참여해 구로사와에게 제작비를 조달해 준 대작 《카게무샤》(당시 일본 영화 사상 최대의 제작비인 600만 달러가 투입)가 26억엔의 수익을 올리며 완벽히 재기에 성공, 화려한 귀환을 알렸다.
2.3 말년
손가락 하트?
1985년에는 프랑스와 합작하여 셰익스피어의 《리어 왕》을 일본풍으로 각색한 영화 《란》을 제작, 이 역시 평단의 호평을 받았으며 1990년에는 워너브러더스가 제작을 맡고 스티븐 스필버그가 프로듀서를 담당한 영화 《꿈》을 만들어 호평 받았다.
이후 80세에 접어든 90년대에도 《8월의 광시곡》, 《마다다요》를 감독하긴 했지만 8월의 광시곡은 후술하는대로 그 내용으로 인해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으며 유작이 된 93년 영화 마다다요는 범작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리고 차기작의 각본을 집필하던 중 교토의 여관에서 골절에 따른 부상으로 요양생활에 전념하다 1998년 8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3 제작 스타일
구로사와 아키라는 처음에는 저예산 영화를 주로 만들었는데 일례로 초기의 걸작인 《라쇼몽》도 열명 가량의 배우들이 제한 공간에서 촬영했다. 하지만 점차 그의 영화에 드는 예산은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우선 그는 아래에도 서술하는 기행으로 유명한 만큼, 굉장히 까다로운 제작 방식을 고수했다. 일본어 위키백과의 내용에 따르면 1. 타협을 허락하지 않는 연출로 유명하고, 2. 몇개월에 걸쳐 진행하는 배우들의 연기 리허설은 물론, 3. 스태프들과 배우들을 대기시키면서 연출 의도에 따른 적절한 날씨를 며칠씩 기다리기도 했으며, 4. 카메라가 찍히지 않는 곳까지도 세심하게 디테일에 신경썼던건 기본. 거기다 말을 빌리지 않고 몇십마리를 통째로 구입해 장기간 다시 조교하고 사용했다던가 촬영지의 민가가 방해된다는 이유로 예산으로 사들인뒤 철거를 강요하기도 했다. 여러개의 카메라를 동시에 돌려 촬영한다는 멀티캠 수법까지도 사용.
이들 모두 돈이 무수하게 들어가는 일로 7인의 사무라이 이후 블록 버스터급 영화들의 제작비는 예산 초과는 기본이었고 이에 일본내에서 제작비를 조달하기 어렵자 해외 자본을 끌어들이는데 적극 나서게 되었다. 참고로 이에 관련된 일화로, 구로사와 아키라는 그의 손으로 고지라 영화를 만들고자 평생 스폰서를 구했지만 실패했다.[6] 그 발단은 어떤 배우가 구로사와에게 "감독님도 한 번 고지라 같은 거 찍어보시면 어때요?"라고 농담삼아 묻자 구로사와는 "한 번 만들어볼까?"라고 대답한 것으로 시작했는데, 나중에 토호의 촬영소장이 그 이야기를 듣고 "구로사와 씨가 진지하게 고지라를 만들면 토호가 망할지도 모른단 말야!"라며 다시는 그런 이야기를 하지 말라는 주의를 줬다고 한다.(고지라는 토호가 판권을 가진 작품이다.)
한편 영화 제작의 신기술 도입에 적극적이긴 했지만 특수촬영(특촬)에 대해서는 심드렁했다. 상술한 토호의 '고지라'에 대해서도 긍정적으로 평가하긴 했지만 토호의 장기였던 미니어처 세트 촬영에 대해선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나 후기 작품인 《란》과 《꿈》에서는 미니어쳐 세트 촬영과 특촬기술을 도입하기도 했다.
구로사와는 카게무샤 직전에는 일본에서는 분명 거장이지만 거장 대접을 제대로 못 받는 천덕꾸러기 신세였다. 해외에서는 거의 레전드가 된 상황인데도 제작비와 규모가 너무 커서 일본 영화계에서는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 카게무샤의 경우도 결국 미국에 건너가 조지 루카스,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의 도움으로 20세기 폭스사의 제작비 지원을 받아 완성되었다고 한다. 난데없이 나타나 거액을 투자하겠다고 제안하는 두 거장에게 구로사와가 놀라서 이유를 묻자 "헤헤 우리가 님 팬인데 다음 영화 나올때까지 도저히 못 기다리겠어서요"라고 답했다고. 덕업일치 그 덕분에 미국 자본으로 만들어진 영화로서 미국 영화(?)로 개봉하려고 한 바 있었다. 그러다 무산되고 결국, 일본영화 개방후 국내 정식개봉된 두 번째 일본영화(1998년 12월)가 되었다. 원래 첫 개봉작으로 예정되었으나, 프린트를 다시 뜨는 작업에 시간이 걸려 버려, 기타노 다케시 감독의 'HANA-BI'에 최초개봉의 영광(?)을 넘겨주었다. 영화적인 완성도나 인기는 카게무샤 쪽이 더 높지만 정작 감독 본인은 후속작인 란을 위한 서막 정도로 생각했다고. 실제로 두 영화는 인간성에 대한 불신이나 허무주의 같은 테마를 공유하고 있다. 란 쪽의 테이스트가 너무 지독해서 문제지만…[7]
4 평가
구로사와의 영화는 그 서사와 강렬한 영상 임팩트가 강점으로 꼽히며 특히 독특한 표현으로 많은 사람들을 사로잡았다. 서양화가 생활을 한 경력 덕인지 그의 영화에는 화면속의 운동감, 회화적인 색채감, 구조가 매우 뛰어나다. 또한 적절한 몽타주, 롱테이크를 통해 관객들의 몰입도를 높이는 것 역시 특징으로 특히나 《쓰바키 산주로》, 《천국과 지옥》에서 보여준 자연물을 통한 인물의 성격, 내적인 심리 변화, 상황의 분위기를 전달하는 연출이나 뛰어난 운동감은 높은 평가를 받는다. 다만 이러한 스타일을 모두 구로사와 본인이 직접 만든 것은 아니다. 일례로 《요짐보》를 무단으로 번안한 세르조 레오네의 《황야의 무법자》가 문제가 되자 레오네는 《요짐보》도 원래 소설 《피의 수확》[8]의 모방이 아니냐고 따진 바가 있다.[9] 하지만 이를 감안하더라도 다른 감독들의 스타일들을 자기 것으로 완벽하게 소화하여 내놓는 것만 보아도 구로사와가 뛰어난 능력을 가진 감독임을 부정할 수는 없다.
한편으로 그의 영화에 보편적으로 흐르는 주제는 인간에 대한 깊은 통찰에서 오는 휴머니즘 의식이다. 비록 지나치게 감상적이라는 비판도 있지만 순수함에 대한 본질을 찾으려는 노력이 아낌없이 드러나며 공감을 불러 일으킨다는 평가. 예를 들면 《라쇼몽》같이 끝없이 비극적인 상황을 펼쳐주다 마지막의 마지막에 나오는 희망적인 낙관 등은 그 백미로 꼽히며 소위 시대극에 있어 매우 독특한 서사구조를 남겼다. 물론 이는 비단 시대극뿐만 아니라 현대물에서도 드러나는데 특히 세대간의 갈등, 반전 영화에서도 자주 나타난다.
이러한 특성은 헐리우드의 감독들에게도 엄청난 영향을 주어 그에게 깊이 감명받았음을 항상 언급했던 조지 루카스는 스타워즈 에피소드 4를 만들면서 구로사와의 《숨은 요새의 세 악인》의 오마주를 캐릭터나 오프닝, 엔딩 등에서 숨김없이 드러냈다. 이외에도 윌리엄 프리드킨의 《프렌치 커넥션》의 전철 장면은 구로사와의 《천국과 지옥》의 기차 시퀀스를 참고했다고 하며, 스티븐 스필버그는 《미지와의 조우》에서 《거미집의 성》의 한 장면을 따라했고, 레이더스에서는 인디아나 존스의 얼굴이 드러나지 않고 뒷모습만 보이는 장면을 《요짐보》에서, 《쉰들러 리스트》의 컬러 부분은 《천국과 지옥》에서,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 나오는 오마하 해변의 전투신은 《란》의 전투신에서 본떴음은 공공연한 이야기. 아울러 피터 잭슨은 《반지의 제왕: 두 개의 탑》에서 전투신 중에 활을 당기는 장면을 《7인의 사무라이》에서 활을 당기는 장면에서 따왔다고 하며, 톰 크루즈 주연의 《라스트 사무라이》에서도 여러 장면들이 구로사와의 영화에서 인용되어 온 것들이다.
단지 《요짐보》의 경우, 레오네의 《황야의 무법자》가 이를 리메이크했다고 하지만 사실 구로사와의 동의를 받지 않은 무단 번안이기에 말썽이 되자 결국 흥행수입의 15%를 구로사와에게 주고 구로사와는 이 영화가 리메이크라는 것을 동의하는 것으로 타협을 보았다고 한다.[10] 여담이지만 지금은 사라진 영화관련 사이트 nKINO에서 칼럼니스트 김정대가 쓴 세르조 레오네 관련 칼럼에 따르면 구로사와가 《황야의 무법자》를 본 뒤 레오네에게 "당신의 영화를 재미있게 잘 보았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제 영화더군요."라는 편지를 보냈다고 하는데, 이 편지를 받은 레오네는 환호하여 주변인들에게 "구로사와가 내 영화를 재밌게 봤대!"라고 자랑했다고.(…) 또한 같은 칼럼에 따르면 결국 표절 판결이 난 뒤 흥행 수입의 15%가 아니라 《황야의 무법자》의 아시아 배급권을 넘겨주는 쪽으로 결론이 났으며 여기에는 아이러니하게도 구로사와가 《요짐보》로 번 돈보다 《황야의 무법자》로 번 돈이 더 많았다는 안습한 후일담이 덧붙여진다. 그리고 요짐보는 이후 월터 힐 감독의 《라스트맨 스탠딩》을 통해 정식으로 리메이크되기도 했다. 한편 《7인의 사무라이》도 존 스터지스 감독의 서부극 《황야의 7인》으로 리메이크된 바 있다.
다만 세계적으로 알아주는 거장임에도 일본내에서는 그 독선적인 스타일 때문에 여러 영화 관계자와 마찰을 빚었으며 당시 영화 제작자나 감독에 대한 낮은 인식도 한몫하여 상당히 무시당했다고 전해진다. 비난을 하던 인물도 있었고 심지어 일본영화 관련 기구가 부정적으로 보며 해외영화제 시상을 딴지걸던 일까지 있었을 정도.
특히 1950년대 《라쇼몽》이 비평에서 대박을 거두고 《7인의 사무라이》가 흥행과 비평으로 세계적 대박을 거둘 때조차도 그는 제작자들에게 별별 모욕을 다 당했는데 일례로 《라쇼몽》 같은 경우 제작사 관계자가 얼마나 돈 아끼라고 끼어들었는지 스스로 포기하려다가 참았으며 다 만들고 나서 제작자를 두들겨패줄까 생각까지 했다고. 참고로 《라쇼몽》은 등장인물이 10명도 안 되고, 배경도 한정한 나름 저예산 영화다. 헌데 항상 구로사와를 험담하던 그 관계자가 정작 라쇼몽이 베네치아 영화제 대상을 받으면서 유명세를 타자, 내가 없었더라면 이 영화가 있었겠느냐? 라는 투로 공로를 자랑하는데 바빴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이외에도 《7인의 사무라이》 역시 제작비 문제로 일부 수정을 가할 수 밖에 없어 매우 안타까워하기도 했다. 이쪽은 제작자들이 아주 반협박("당신 영화계에서 아주 매장시킨다?"든지)하면서 끼어들어 어쩔 수 없었다고. 게다가 목과 손목을 그어 자해하며 자살 파동을 일으킬 당시, 일본 극우 일부에게도 정신나간 감독이라고 억울하게 까이기도 했었으며 이후 한동안 해외 자본 투자로 영화를 만들 때도 일본 영화계에서 비판이 끊이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다만 구로사와 역시 보수적인 사람이라[11] 좀 아이러니하기도.
결론적으로 '일본 외 국가에서 대감독이자 예술인으로 인정받았지만 정작 조국에서는 감독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던 인물.' 오죽하면 1990년에 그와의 인터뷰를 게재한 한국 월간 영화잡지 로드쇼 기사에 의하면 "해외에서도 알아주는 감독님이신데 일본에서는 뭔가 어려운 점이 있었나요?" 라는 질문에 "해외에서만큼, 아니 그 절반이라도 일본에서도 인정했더라면 더욱 좋을텐데 말이죠."라고 대놓고 말했을 정도이다. 명배우 우디 앨런이 인터뷰에서 "당신은 젊은이들을 싫어하나요?"라는 질문에 "네, 나는 젊은이들을 싫어합니다. 그들은 진정한 가치도 모릅니다. 구로사와 아키라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사람들을 내가 왜 존중해 줘야 합니까?" 라고 말하기도 했을 정도로 그에 대한 일본내 시각이 대개 저러했다.
5 일화
5.1 출연 배우들
구로사와 감독의 작품에는 대개 주성치의 주요사단처럼 같은 배우가 계속 나온다. 상술한대로 그의 페르소나라고까지 불린 미후네 토시로(16작품)가 그 필두로 보통 미후네는 건달 깡패 떠돌이 사무라이 등 강자 역할을 맡으며 얼굴과 이름을 알렸다.
한편 가장 많은 작품에 출연한 배우는 《7인의 사무라이》와 《살다》에서 명연을 펼친 시무라 다카시로 무려 21작품이며 그는 보통 스승, 지도자, 나약한 인간을 맡았다. 이외에는 《백치》, 《나쁜 놈일 수록 잘 잔다》와 《라쇼몽》의 모리 마사유키나 초중기작품 모두에서 주요 조연을 맡은 지아키 미노루, 히다리 보쿠젠 등이 있다. 보다 자세한 사항은 참조.
5.2 기행
그의 영화에 얽힌 기행은 이전에도 유명했지만 특히 할리우드 진출작인 《도라 도라 도라》에 이르러 극에 달했는데, 사실 이러한 그의 행동은 의도된 것이었다. 당초 구로사와는 영화사로 부터 《도라 도라 도라》의 미국 쪽 연출을 《콰이강의 다리》, 《아라비아의 로렌스》 등으로 유명한 데이비드 린 감독이 맡을 예정이라고 들었다. 하지만 데이비드 린은 애초부터 프로젝트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속았다는 것을 안 구로사와는 영화사로부터 해고되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했는데 아래는 그 중 일부이다. 이 영화의 촬영은 구로사와 본인과 계속 작업하던 토호 영화사가 아닌 토에이 영화사 촬영소에서 진행되었는데...
- 일본 최대 화학회사 사장에게 야마모토 이소로쿠 제독역을 맡기고, 연기 경험이 전혀 없는 저명한 일본 사업가 15명을 주요 배역에 캐스팅할 것을 요구. 네오 리얼리즘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비전문 배우를 고용하는 것 자체는 잘못이라고까지 할 수 없으며 감독의 목적하는 바에 부합할 수도 있다. 다만 구로사와가 돈 많은 기업 사장들에게 아부하여 차기작의 재정지원을 받으려 했다는 의혹이 있다.
- 모든 실내 장면 촬영은 오후 4시에서 자정 사이에만 해야한다. 그리고 모든 스태프들은 해당영화의 제목이 쓰여진 맞춤복과 해군모를 똑같이 착용해야 한다. 그리고 배우들이 지나갈 때마다 인사를 해야한다.
- 한번은 몹시 화가 난 구로사와가 딱따기(촬영 시작과 종료를 알리는 소품)를 치는 스태프의 머리를 종이로 말아서 때렸고, 조감독이 말리니 그를 구타한다. 그러더니 조감독에게 전체 스태프들 머리를 때리라고 했으며 조감독이 당연히 거절하자 그를 해고했다.(…) 결국 영화사에서는 다음날 촬영을 취소하며 구로사와가 안정을 찾아야한다고 질타.
- 해고 위협에 시달리자, 화장실 갈 때마다 보디가드를 보내주며 세트장에 철모에 리무진에 방탄유리 설치를 부탁했다. 그리고 저격수가 있다고 생각해 차를 탈 때는 시트 아래로 몸을 구부렸다. 제작사에서는 정신과 의사를 보내고 진정제 수십 알을 처방했다.(…)
- 기어이 크리스마스 며칠전, 새벽 2시에 프로덕션 코디네이터인 스탠리 골드스미스를 불러들여서 스탭 전원을 해고해달라고 했지만 오히려 자기가 해고당한다. 언론에는 피로 누적으로 감독에서 강판되었노라고 발표되었다.(…) 이 일련의 23일간의 촬영분 중, 단 8분만이 이용가치가 있었다. 그후 감독은 마스다 도시오와 후카사쿠 긴지로 교체.
- 《거미집의 성》의 마지막 씬 촬영에서는 정말 실감나는 연출을 위해 배우(미후네 토시로)에게 진짜로 화살을 쐈다. 그것도 그냥 활로 쏘는 게 아니라 확실히 벽에 박히게 공기압축장치를 써서 여러발을 쐈다! 이 사실을 알고 영화 마지막 장면을 보면 그 처절함이 배가 되는데 당연히도 당사자인 미후네는 그 장면에서 정말 실감나는 연기를 보여줄 수 있었다.
이 장면이 과연 연기였을까-...
- 촬영이 끝난 후에 미후네는 불같이 화를 냈지만 일단은 참고 귀가를 했다. 하지만 집에 돌아가서 혼자서 술을 마시던 중에 촬영시의 생각이 떠오르자 갑자기 울화가 치밀어서 술김에 산탄총을 들고 구로사와 감독의 자택에 찾아가서 난동을 부렸다고 한다.[12]
5.3 《8월의 광시곡》 논란
《8월의 광시곡》(八月の狂詩曲 Rhapsody In August, 1991년)은 구로사와 감독의 작품중에서도 동서양을 막론한 비평가 평이 바닥이며 평화운동가들에게도 혹평을 받은 작품이다. 이 영화의 줄거리는 나가사키의 피폭자 친척을 일본계 미국인(리처드 기어 분)이 방문하여 미군의 잔인한 원폭투하에 대해 죄책감을 느낀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그려지는 일본인 피폭자들에 대해서는 홀로코스트 피해자처럼 묘사한 반면, 전쟁의 원인이나 일본군의 잔혹행위에 대해선 일언반구도 없다는 것. 때문에 이 영화만 보면 미국만 나쁜놈이고 일제는 그런 미국을 용서해주는 대인배로 착각할 수 밖에 없다.
이는 이 영화의 1년전에 개봉한 전작 《꿈》에서 나오는 한 에피소드에 2차 대전 당시 옥쇄를 명령하지만 부하들은 죄다 죽게 하고 홀로 살아남은 장교가 일본으로 돌아오던 길에 부하들의 원령이 나타나 절규하고 원망하는 모습을 보이자 그 장교가 울면서 사죄하며 "미안하다! 전쟁을 일으킨 우리가 미쳤다."고 말하는 장면이 담겨 있었던 것과는 너무나 대비되어 비평가와 관객들에게서 충격과 공포 수준으로까지 받아들여졌다. 본인 역시 이 영화에 대해서는 언급을 꺼려 이 엄청난 돌변에 당시 한국 영화기자가 인터뷰에서 "《꿈》을 만들고 극우파에게 살해협박이라도 받아서 이렇게 만들었나요?"라는 비꼬는 듯한 질문을 하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을 정도.정말 그랬나보다
하여간 이 영화는 구로사와 감독에게 호의적이던 미국에서도 무수한 비판에 휩싸였으며, 한국에서는 아예 상영 자체를 꺼렸을 정도로 당시 로드쇼를 비롯한 영화지에서도 호되게 비난 받았다. 1991년 칸 영화제에도 출품되었으나 한 중국계 관중에게 미국이 나치라는 식의 선전영화를 만들었냐는 분노어린 비난을 들었으며, 유럽에서도 구로사와의 실패작으로 무시당하고 있다.
이 때문인지 그의 마지막 영화 마다다요는 영화 자체가 범작 수준이긴 해도 2년 뒤 칸 영화제에서 상영할때 무시 수준 평가를 받았다. 당시 국내 영화월간지 로드쇼에서 1990년 칸 영화제 특집 기사에 구로사와의 꿈을 엄청 크게 분석, 기사를 싣어주던 거랑 달리 8월의 광시곡은 악평으로 분석(우리 눈으로 봐도 기분나쁘지만 칸 영화제 상영회에서도 관객들은 비아냥적인 반응을 보였다고 당시 본 기자가 썼다)하고 마다다요는 정말 작게 구석 기사로 사진 1장과 같이 싣었을 정도.
5.4 황당한 청혼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이 짙어지자 일본인들은 집단자살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시기에 구로사와는 여자친구인 야구치 요코(여배우)에게 청혼했는데 그 청혼문이 뭔가 대단하다.
"일본이 패전할 것 같다. 만일 일본국민 전체가 집단 자살해야한다면, 우리 역시 죽어야해. 죽기전에 결혼생활이 어떤지 경험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그런데 놀랍게도 이 어이없는 편지가 효력을 발휘하여 두 사람은 결혼. 이후 집단 자살도 없었고 부부는 39년을 해로했다.구로사와의 자살기도는 예외로 치고
5.5 관동대지진
1923년 일본 관동지방에서 발생한 대지진은 구로사와 집안에도 직격탄을 날렸다. 집은 무너져 내렸고, 혼란 중에 그가 살던 마을에도 조선인들이 범죄를 저지르고 다닌다는 루머가 돌아 집집마다 보초를 내기에 이른다.
하루는 어른들이 우물에 조선인들이 독을 탔다며 그 증거로 흰색 분필로 휘갈겨 놓은 낙서를 지목했는데, 그것은 당시 13살이던 구로사와가 별 이유없이 장난으로 쓴 것이라고.
조선인을 잡아 죽이기 위해 결성된 자경단은 수염을 기른 사람[13]을 무조건 조선인으로 지목하고 뒤쫓았는데, 구로사와의 아버지도 수염을 길렀기 때문에 일가족이 미친 자경단에게 포위당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구로사와의 형은 무리를 비웃고 있었고, 어린 아키라는 겁에 질려 벌벌 떨고 있을때, 아버지가 애워싼 무리를 향해 '바보자식들!' 이라고 호통치자 어리둥절한 자경단은 하나 둘씩 사라졌다고 한다.
5.6 기타 트라비아
- 일본인 치고는 고기를 무척 많이 먹는 독특한 식습관이 있었고 그 육식 체질에 기타노 다케시도 크게 감탄했다고 한다. 구로사와는 기타노에게 "식사는 밸런스가 중요해."라고 말했는데 이는 야채나 과일도 먹어야 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돼지고기, 닭고기 등의 다양한 고기를 먹어야 된다는 의미였다고.(…) 그리고 이런 식성 때문인지 1910년대 출생 일본인으로서는 보기 드물게 182cm의 엄청난 거구였다. 본 문서에도 실린 아카데미 영화제 공로상 시상식에서 루카스, 스필버그와 나란히 서있는 사진을 보자면 그 덩치에 깜짝 놀라는 사람이 다수.
- 술도 엄청나게 마신 애주가. 이에 관련된 일화로 이란의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이 일본에 방문해서 구로사와를 만났을 때 그가 웬일로 술을 안 마셔서 그 이유를 묻자 "더 마시고 싶었지만 주변에서 '더 이상은 안돼요!' 라고 신호를 보낸 탓에 어쩔수 없이 끊어야 했다."라고 말했다는 키아로스타미 감독의 회고도 있다. 젊었던 시절에는 워낙 말술을 마시는 탓에 미후네 토시로는 구로사와가 취한 듯 하면 도망쳐 버리고 대신 다른 배우가 구로사와에게 붙들려 고생 좀 해야 했다는 이야기도 회자된다.(…)
- 미야자키 하야오를 《루팡 3세》를 통해 알고서 열렬한 팬이 되었다고 한다. 장녀 구로사와 가즈코의 말에 의하면 《마녀 배달부 키키》를 보고 눈물까지 흘릴 정도로 감동했다고 하며 《이웃집 토토로》를 제일 좋아했다고. 다만 《반딧불의 묘》를 미야자키의 작품으로 착각해 찬사가 담긴 편지를 보내는 바람에 미야자키가 일순 굳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14]
- 대한민국의 거장 임권택 감독에게 호감을 지니고 있었으며, 그의 영화를 재밌다면서 즐겨보곤 했다고 한다. 각기 한일 양국 영화계에서 거장의 대우를 받고 있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재미있는 사실이다. 1990년 월간 로드쇼에서 인터뷰를 했을 때에도 그 중에서도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임권택 3대 걸작'을 뽑을 정도였다고 한다. 만다라와 씨받이, 아벤고 공수군단 등이 바로 그것이다.
-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랑도 절친한 사이였다고 한다. 둘이 술을 마시면서 7인의 사무라이 주제가를 합창할 정도였다고.
6 필모그래피
제목 번역은 모두 국내 개봉명 혹은 수입명을 따른다. 다만 공동 감독을 맡았으나 후에 자신의 이름을 빼달라고 요구한 明日を創る人々(미국 개봉명 Those Who Make Tomorrow)의 경우 국내 번안 제목이 확인되지 않아 임의 번역으로 기재한다.
한국 제목 | 원 제목 | 개봉년도 |
스가타 산시로 | 姿三四郎 | 1943 |
가장 아름다운 자 | 一番美しく | 1944 |
스가타 산시로 2 | 續姿三四郎 | 1945 |
호랑이 꼬리를 밟은 사나이 | 虎の尾を踏む男達 | 1945 |
우리 청춘 후회 없다 | わが青春に悔なし | 1946 |
내일을 만드는 사람들 | 明日を創る人々 | 1946 |
멋진 일요일 | 素晴らしき日曜日 | 1947 |
주정뱅이 천사 | 醉いどれ天使 | 1948 |
조용한 결투 | 静かなる決闘 | 1949 |
들개 | 野良犬 | 1949 |
추문 | 醜聞 | 1950 |
라쇼몽 | 羅生門 | 1950 |
백치 | 白痴 | 1951 |
살다 | 生きる | 1952 |
7인의 사무라이 | 七人の侍 | 1954 |
산 자의 기록 | 生きものの記録 | 1955 |
거미집의 성 | 蜘蛛巣城 | 1957 |
밑바닥 | どん底 | 1957 |
숨은 요새의 세 악인[15] | 隠し砦の三悪人 | 1958 |
나쁜 놈일 수록 잘 잔다 | 悪い奴ほどよく眠る | 1960 |
요짐보 | 用心棒 | 1961 |
츠바키 산주로 | 椿三十郎 | 1962 |
천국과 지옥 | 天国と地獄 | 1963 |
붉은 수염 | 赤ひげ | 1965 |
도데스카덴 | どですかでん | 1970 |
데루수 우자라 | デルス・ウザーラ | 1975 |
카게무샤 | 影武者 | 1980 |
란 | 乱 | 1985 |
꿈 | 夢 | 1990 |
8월의 광시곡 | 八月の狂詩曲 | 1991 |
마다다요 | まあだだよ[16] | 1993 |
- ↑ 참고로 구로자와라고 표기한 매체가 간혹 보이는 데, 구로사와가 맞다. 여담으로 같은 성을 쓰고 있는 구로사와 기요시랑은 아무런 관계가 없는 남남.
- ↑ 단지 일본에서 처음 이 별명이 붙었을 때는 촬영 현장에서 보여주는 독재자스러운 성격을 비꼰 것이었다.
- ↑ 완전히 손을 뗀 건 아니고, 취미+스토리보드용으로 계속 그렸다. 감독으로써 명성이 생긴 이후로는 그의 그림이 영화 포스터에 쓰이기도 할 정도. 화풍은 본인이 좋아했던 빈센트 반 고흐를 위시한 인상파나 야수파의 영향을 받은 모습을 보인다.
- ↑ 후에 이 영화는 안드레이 콘찰롭스키 감독에 의해 완성되었다. 줄거리는 두 죄수가 탈옥을 감행하여 기차에 올랐다가 그 기차가 폭주하는 바람에 생기는 일을 다루는데, 구로사와는 영화가 시작하면 이미 기차가 폭주하고 있고 그 상황에서 점차 인물들의 사정이 밝혀지는 구조를 원했었으나 안드레이 감독의 손으로 완성된 영화는 그냥 두 죄수가 탈옥하는 부분부터 차근차근 따라간다.
- ↑ 이후 구로사와 대신에 투입된 일본 쪽 감독은 우리나라에서는 《배틀로얄》로 유명한 후카사쿠 긴지 감독이다.
- ↑ 이 일화는 로버트 슈네이큰버그의 '위대한 영화감독들의 기상천외한 인생이야기'에서 고릴라로 오역되었지만 그 일러스트는 누가봐도 고지라이므로 고지라를 잘못 번역한 것이 확실하다.
- ↑ 란은 인간성을 처참히 부정하는 배드엔딩으로 끝마치는 영화라 대작임에도 불구하고 인기가 그리 높지는 않다.
- ↑ 몰타의 매로 유명한 대실 해밋의 소설이다.
- ↑ 사실 이는 소설에서 영향을 받은 사례라 다른 영화감독의 스타일을 참고했다는 예시로는 부적절하다.
- ↑ 단, 일각에선 구로사와가 리메이크라는 것을 동의한 적은 없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 ↑ 작품 내에서도 그런 성향이 드러난다. 대표적으로 《쓰바키 산주로》는 《요짐보》의 후속작격인 작품이지만 등장 인물들을 취급하는 방식이 하늘과 땅 차이다.
- ↑ 당시 사건은 도호에서 유명한 전설로 남아있다고 한다.
- ↑ 당시 조선인들은 주로 면도를 하지 않았다.
- ↑ 참고로 이 작품은 타카하타 이사오가 감독이었다. 물론 지브리 작품이긴 하다
- ↑ 이 영화를 본 조지 루카스가 스타워즈를 떠올린 이야기는 유명한 실화다.
- ↑ 직역하자면 "아직이야"란 뜻인데 숨바꼭질에서 "아직 다 안 숨었다."라는 뜻으로 외치는 구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