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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2월 3일 (금) 01:49 기준 최신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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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프란스코 파울노 에르메네도 테둘로 프랑코 이 바아데 살르도 데 안드[1]
(Francisco Paulino Hermenegildo Teódulo Franco y Bahamonde Salgado Pardo de Andrade)
생몰년1892년 12월 4일 ~ 1975년 11월 20일
출생지스페인 페롤시
사망지스페인 마드리드
정당팔랑헤당
종교가톨릭
신장163cm
배우자카르멘 폴로
1975년 10월 1일.생애 마지막 대중연설이었던 동방광장(Plaza de Oriente)에서의 연설에 참석한 프랑코.
갈 날을 암시하듯 살이 쪽 빠져버렸다.
"나는 역사 앞에서만 책임이 있다."'

1 개요

스페인판 히틀러

스페인 육군장군이자 독재자이자 학살자유럽 최후의 파시스트라는 평을 받는 인물. 통칭 카우디요(Caudillo). 한국어로는 평상시 '대장님'이라는 호칭으로 불렸다는 정도의 의미. 북한에도 대장님 있다 이 별명은 에르난 코르테스도 같다. 왜 파쇼놈들은 퓌러두체니 하길 좋아하는 거지? 뭐 우리말로는 모두 총통 이런 드립은 1937년 타임지에서도 나온 바 있다. 프랑코 이베리아의 지도자.

1936년 공산당과 기타 좌파의 연합세력인 인민전선의 집권에 위기감을 품은 스페인 우파의 반란으로 시작된 스페인 내전의 주역으로 권좌에 올라 1939년 스페인의 독재자가 되고 1947년에는 스페인을 왕정체제로 되돌린 뒤 스스로 섭정이 되어 종신권력을 획득하여 1975년 사망할 때까지 스페인에 철권통치를 펼쳤다.

프랑코 시절의 스페인은 20세기 초 해군중장 호르티 미클로시 제독이 섭정 신분으로 독재하던 헝가리처럼 국왕 없는 왕국이었다. 다만 헝가리의 경우 왕정시절의 상징물들을 민주화 이후 부활시킨것을 제외하면 완전히 의원내각제 공화국(명목상의 대통령제)으로 전환했지만 스페인은 다시 왕에게 국가원수 지위를 돌려주었다는 차이점이 존재한다. 그도 그럴것이 호르티 제독 정권은 나치를 배신하려다가 해체되었으며 이후 공산화되었기 때문이다.

2 유년기

1892년 12월 4일, 스페인 북부의 주요 해군기지였던 갈리시아 주의 페롤에서 출생했다. 가문 대대로 해군에서 복무했던 군인 가정에서 태어났다.(월간 항공에선 그를 유태인이라고 쓴 바 있다.[2]) 1살 위의 형 니콜라스와 동생 라몬, 그리고 2명의 누이가 더 있었는데 이중 해군 장교였던 형 니콜라스는 프랑코의 집권에 큰 공헌을 하게 된다. 동생인 라몬은 비행기 조종사가 되었는데 실력이 꽤 좋았다 한다.

3 군인 경력

3.1 모로코의 전쟁영웅

소년 프랑코는 원래 집안의 내력에 따라 해군에 지원하려 했지만 그 무렵 스페인이 미국과의 전쟁에서 패하면서(미서전쟁) 식민지를 거의 다 잃고 해군이 대폭 축소되어 해군사관학교도 1906년부터 1913년까지 문을 닫는 지경이어서 아버지의 권고에 따라 1907년 톨레도에 있는 육군 보병사관학교에 입교했다.

1910년 사관학교를 졸업하여 중위로 승진한 프랑코는 1912년에 당시 스페인 육군이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던 모로코 전선으로 파견되어 이른바 리프 전쟁이라고 불리는 모로코 베르베르 인들과의 전쟁에 참여한다. 당시 스페인군은 전술적으로나 기술적으로나 2류 이하의 군대였기 때문에 엄청난 희생을 감수해야 했지만, 역설적으로 이는 일정 정도의 용기와 담력을 지닌 장교들의 화려한 무용담과 그를 통한 급속한 출세가 가능한 환경을 제공했고, 때문에 전군 16만 남짓이던 스페인군에 장군과 장교가 무려 1만 2천명이 넘는 기형적 구도가 형성되었다.

프랑코도 이러한 시류에서 예외적인 존재는 아니었다. 사실 지금 남아있는 그의 사진만 보더라도 키는 작고 체격도 군대에서 일반적으로 먹어주는 몸짱과는 거리가 먼지라 동료 장교들이 다들 꼬마 프랑코, 계집애 파카(프란시스코의 여성형인 프란시스카의 애칭)라고 부르며 조롱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프랑코는 모로코 현지민들로 구성된 용병부대 레굴라레스의 지휘관으로 임관하여 맹활약을 펼침으로써 그들을 압도한다.

1916년, 23세에 이미 스페인군 최연소 대위가 되어 전도유망한 장교로 명성을 얻고 있던 프랑코는 엘 비우츠 전투에서 심각한 부상을 입게 되는데, 그 부분이 하필이면 영 좋지 않은 곳이었고, 이 때문에 한 쪽 고환을 잃었다고 추측된다. 추측된다고 쓴 것은, 훗날 독재정권하에서의 스페인이 위대한 카우디요가 짝x알이라는 사실을 공식적으로 확인했을 리가 없으므로.

하지만 그는 중상을 입은 중에도 의사를 권총으로 협박하여 자신을 수술하게 했고 기적적으로 회복, 모로코 원주민 병사들로부터 기적의 남자라고 불리게 된다. 이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 그는 스페인 최고무공훈장을 받지 못했지만, 그 대신 스페인군 최연소 소령, 즉 최연소 영관이 된다. 이전 글에서는 고자라고 했지만, 일단 한 쪽만 그런 것으로 추정되는 것도 있고, 나중에 결혼해서 딸도 낳은 바 있기에 고자는 아니다. 알은 한 개만 있어도 애낳고 남자로 사는 데 하등 지장이 없다.

1923년 다시 중령으로 승진한 프랑코는 에스파냐 육군이 프랑스 외인부대를 본따 창설한 에스파냐 외인부대의 사령관이 되었다. 같은 해 결혼도 했는데, 스페인군의 전쟁영웅이었기 때문인지 결혼식에서의 대부 역할을 맡은 사람은 다름아닌 당시의 국왕 알폰소 13세였다고 한다. 이 결혼으로 딸 하나가 태어났다. 이 딸의 외손자가 카페 가문과 부르봉 가문의 전체 남계 후손의 수장이며(부르봉 왕가의 항렬로 볼때 후안 카를로스 1세보다 빠르다. 다만 여러 가지 이유로 국왕이 되지 못했다.) 현재 명목상의 프랑스 국왕인 루이 20세이다. 물론 현직 국왕이 아닌 왕위 요구자이다.

이후에도 계속 출세가도를 달린 프랑코는 다시 1926년에 에스파냐군 최연소 장성[3]이 되고, 1928년에는 사라고사에 새로 세워진 육군사관학교의 교장이 된다. 이 육군사관학교는 종전의 보병, 기병, 포병장교를 따로 양성하던 관례를 깨고 통합적인 장교양성과정을 통해 육군의 결속력을 강화하는 것을 목표로 했는데, 여기서 교육받은 육군 장교들은 훗날 프랑코의 충실한 친위세력이 된다.

외인부대 사령관 시절 프랑코에 대한 일화가 있다. 어느 날 너무나 부실한 급식을 참다 못한 병사들 사이에서 불온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급기야 주동자격인 병사가 프랑코의 얼굴에 음식을 집어던졌는데, 프랑코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식당 담당장교를 불러오게 해 그 병사가 보는 앞에서 "즉시 급식의 질을 개선하도록"이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그 직후 그가 내린 두 번째 명령은 "그리고 저 자(자신에게 음식을 던진 병사)를 즉시 끌어내 총살하도록!"이었다. 훗날 프랑코가 걷게 될 길을 암시하는 듯한 상당히 섬뜩한 일화다.

3.2 제2공화국

1930년대 초,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경제불황과 정치적 실책을 극복하지 못한 부르봉 왕가알폰소 13세가 해외로 망명하면서 왕정이 붕괴되고 제2공화정이 수립된다. 이 부르봉 왕가는 루이 14세가 억지로 옹립한 방계인데 이후 벌어진 일련의 전쟁으로 정통성은 상실했다.

프랑코는 그때까지만 해도 정치에는 별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툭하면 쿠데타를 남발하던 다른 장군들에 비해 공화정부로서는 다루기 쉬운 인물로 비춰졌다. 1931년 무렵 산후르호 장군의 쿠데타에도 참여하는 것을 거절했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다. 오히려 그는 1931년 공화국 수립 이후로 우리에겐 공화국을 도와 자유와 정의를 실현할 의무가 있다며 생도들을 모아놓고 연설하는 등 공화국에 가장 협조적인 장군으로 보였고 공화국에서도 '이 사람이 반란을 일으킬 가능성은 없다.'라고 판단했다. 다만 어디까지나 평화기에만 그렇고 혼란기라면 봉기할 가능성이 높다는 조건이 붙긴 했지만... 하지만 당시 전쟁장관을 맡고 있던 마누엘 아사냐가 사라고사 육군사관학교를 방문했을 당시 생도들에게 프랑코가 갖고 있던 카리스마적인 영향력을 알게 된 것이 원인이 되어 사라고사 육군사관학교는 그대로 폐쇄되었고(…), 프랑코는 폐교 후 6개월 동안 보직을 받지 못했다고 한다.

이후 1933년 2월, 발레아레스 제도로 파견된다. 1933년 10월, 이른바 아스투리아스 혁명이라고 불리는 무정부주의 반란이 발발하자 당시 전쟁장관 디에고 이달고의 지원을 얻은 프랑코는 사단장 자격으로 반란 진압을 담당한다. 그리고 후에 스페인 내전의 용장으로 이름을 떨치게 되는 훌리오 야구에 중령이 지휘하는 외인부대를 파견하여 오초아 장군의 응원군과 함께 반란군을 참혹하게 진압한다. 이 과정에서 오초아 장군은 모로코 출신의 용병들이 포로 및 양민 학살 등의 만행을 저지르는 것을 막고, 포로들에게 인간적인 대우를 했다. 그런데 그 이유로(...) 전간기 파시즘으로 가득 찬 스페인 군부 내에서 왕따가 돼버리는 통에 프랑코는 반란진압의 1등공신이 되고, 이로 인해 1935년, 아프리카 파견군 총사령관을 맡고 다시 스페인군 참모총장이 된다.

4 스페인 내전

4.1 장군들의 반란

1936년, 공화정 수립 4년만에 다시 정부가 붕괴되고 이른바 인민 전선이라고 불리는 자유주의-좌파 연합세력이 선거에서 압승을 거두자 우파 세력의 불안감은 극에 달한다. 이미 스페인 좌우파의 대립은 유혈사태로 이어진 전례가 있었다.

게다가 공화국은 왕정시대 거의 절대적인 특권을 보장받던 가톨릭 교회를 상당 부분 제재했다. 원래 가톨릭 교회 전체를 공격하려고 했으나 그것은 너무 부담스럽다 하여 예수회가 주 타겟이 되었다. 앤터니 비버의 스페인 내전에 따르면 가령 토지나 재산 등의 몰수, 특권 박탈 등의 주 타겟이 예수회였다. 이 때 몰수당한 재산이나 특권 등은 프랑코 시대에 정부에서 돌려준다.

여기서 또 황당한 건 정작 반동적 극우 사상이 팽배했던 당대 스페인 가톨릭 교회 내부에서 그나마 가장 자유주의적이고, 인민친화적인 색채를 보였던 파벌이 예수회였다는 것이다. 당시 스페인 좌파 지식인들 상당수 본인들 또한 역사적으로 종특수준으로 교육을 강조했던 예수회 교육 과정이나 기관 출신이었고, 당시 스페인 진보 교육계를 지배했던 조류였던 아나키스트 프란세스크 페레르 이 가르디아의 에스꾸엘라 모데르나(근대 학교) 운동 또한 예수회의 영심수련에 큰 영향을 받은 운동이었다.

역설적으로 스페인 가톨릭 교회 내에서 예수회의 존재감이 너무 강하다 보니 반대편에서도 단순히 가톨릭 교회의 상징적인 샌드백으로 골라버린 경우이다. 이런 사정 때문에 종교세력의 반발도 위험수위에 달해 있었다.

인민 전선은 이와 같은 상황에서 위험 세력들을 제재하기 위해 군의 유력한 장군들을 외부로 떨어뜨려놓는 조치를 취한다. 이에 따라 프랑코도 참모총장직에서 해임되어 카나리아 제도로 추방되었으나, 오히려 이 때문에 프랑코는 자신의 세력기반이던 아프리카 파견군과 더욱 긴밀히 접촉할 수 있었고 이 시점에서 정부에 대한 그의 의견도 확고해진다.

하지만 프랑코는 이 시점에서도 태도를 명확히 하지 않은 채 상황을 주시하는 길을 택했고, 이 때문에 동료 장군들로부터 불신을 받기도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훗날 권력을 간단히 장악할 수 있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같은 해 7월, 우익의 거물 정치인이던 칼보 소텔로가 좌파 경찰에 의해 살해되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 결국 7월 말, 국민 진영(Bando Nacional)이라는 이름으로 장군들과 우익 세력들이 반란을 일으키면서 스페인 내전의 막이 오른다.

4.2 권력장악

당시 국민 진영의 유력한 장군들은 대부분 스페인 영내에 기반을 두고 있었지만 프랑코는 아프리카 파견군을 장악하고 있었다. 이때 스페인군은 사실상 아프리카 파견군을 제외하면 향토방위군 수준에 불과했기 때문에 프랑코의 영향력은 반란 초기부터 가장 클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그때까지 반공주의 외에는 다른 정치적 성향을 거의 드러내지 않았던 그의 태도 때문에, 국민 진영을 구성하던 여러 파벌들에게 프랑코는 가장 적절한 지도자로 비춰졌고, 여기에 그의 형 니콜라스 프랑코의 로비 활동이 결실을 맺어 1936년 10월 1일, 프랑코는 국민 진영의 본거지인 부르고스에서 총통=3군 총사령관(Generalísimo) 겸 국가수반이 된다.

여기에 그의 강력한 경쟁자가 될 수 있었던 몰라 장군이 1937년 원인불명이유는 몰라의 비행기 사고로 급사한다. 프랑코의 경쟁자 내지는 경쟁자 예비 후보들이 유독 비행기 사고로 많이 죽었으나 섣불리 프랑코 짓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스페인 내전 동안 국민군이 사고로 잃은 군용기는 공화군에게 격추당한 군용기보다 많을 정도였다고 한다. 당시는 비행 기술 자체가 새로운 기술이라 여러가지 기술적, 운용적인 측면에서 불안정했던 시대다. 그리고 이렇게 군용 비행이 아직 기술적으로 불안정했던 시절 해군이 공화파 수병들에게 장악당했으니 싫어도 어쩔 수 없이 불안한 신기술의 개척자가 되어야 했던게 스페인 파시스트 진영이다(...). 스페인 내전 당시 산후르호나 몰라 같은 스페인의 선구자들이 목숨으로 개척한 경험으로(...) 독일이나 이탈리아 같은 원조 세력은 2차대전 본편이 터지자 축적된 항공 수송 기술을 잘 써먹었다.

몰라 장군의 급사로 프랑코의 권력기반은 더욱 탄탄해진다. 세비야와 안달루시아 지역에서 왕초 노릇하던 케이포 데 야노 장군이 내전 내내 프랑코에게 찌질찌질걸리적거리긴 했지만, 내전이 끝난 뒤 실권을 빼앗기고 아무 힘도 쓸 수 없게 되었다...

4.3 내전의 승리

당초 16만 정도이던 스페인군은 내전 발발 당시 국민진영측에 약 10만, 공화정부측에 6만 정도가 배치되어 있었다.그런데 국민 진영에서 프랑코가 이끌던 4만에 이르는 아프리카 파견군, 그 중에서도 주로 모로코 현지인들로 구성된 용병부대 레굴라레스와 스페인 외인부대에 필적할 정예부대가 공화정부 측에는 없었다.

게다가 대부분의 실전경험 있는 지휘관들이 이른바 아프리카 당, 즉 아프리카 파견 경력을 매개로 결합되어 있었기 때문에 공화정부는 정예병사도, 신뢰할 지휘관도 없었던 판이었다. 그나마 공업지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고 1차 세계대전 당시의 경제호황으로 인해 축적해두었던 상당량의 금괴를 보유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해군의 상당수가 공화정부를 지지했다는 점 정도가 공화정부가 믿을만한 것이었다. 하지만 태생부터 허약할 수밖에 없었던 연립정권이었던 인민 전선 정부는 이런 이점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처음부터 갈팡질팡해야 했다.

프랑코를 비롯, 국민 진영의 주요 지휘관들은 용감한 군인이긴 해도 전략가로서의 재능은 부족했다.(어디까지나 당시 유럽 기준에서 볼 때) 1936년 7월의 반란도 실상 굉장히 조악한 것이어서, 정부가 단호하게 대처하기만 했어도 조기진압의 가능성은 높았다. 하지만 공화정부와 좌파 진영간 관계 때문에 일이 틀어지고 말았다.

반면 프랑코가 이끌던 국민 진영에는, 왕당파인 카를로스 파와 파시스트 정당인 팔랑헤 당 등의 내부 계파가 있었긴 했지만, 아프리카군을 중심으로 한 군대의 힘을 가진 프랑코의 힘이 이들을 억제하기 충분했기에 통합된 세력을 이끌 수 있었다. 이런 내부 파벌들도 내전 승리를 눈앞에 둔 프랑코가 팔랑헤 당을 중심으로 파시스트, 보수주의자, 왕당파에다가 노동조합주의자들까지(물론 좌파는 아니고, 파시즘의 원류가 되는 국가노동조합주의자들) 모조리 통합하는 친위쿠데타를 감행, 이른바 "통합 팔랑헤당"을 만든다.

이런 프랑코 정권의 복합적인 성격 때문에 현재 학자들은 프랑코의 정치성향을 파시즘인지, 단순한 권위주의+내셔널리즘으로 보는지 의견을 달리 한다. 후자의 경우 저러한 프랑코 정권의 복합적인 태생적인 성격과 그 내에서 주도하기 보단 조절자 역할을 했던 프랑코의 역할을 강조하는 반면, 전자로 보는 경우 가톨릭 보수주의를 근반으로 한 강제적인 국민적 사상 교육, 이에 따른 전쟁 이후로도 지속 되었던 전시 체제, 그리고 역시 가톨릭 교회를 매개로 한 국가 이데올로기의 일상의 침투 등을 주목 하며 프랑코 정권을 히틀러, 무솔리니, 스탈린 등과 함께 걷는 전체주의 정권으로 간주한다.

이런 상황에서 인민 전선 정부에 치명타를 날린 것은 아돌프 히틀러가 이끌던 나치 독일 정부와 베니토 무솔리니가 이끌던 파시스트 이탈리아였다. 히틀러는 스페인의 풍부한 광산과 대서양 연안에 있는 잠재적인 해군기지들을 노렸고, 무솔리니는 장차 영국지중해의 제해권을 두고 다툴 때 영국의 지중해 주요 거점인 지브롤터를 견제할 수 있는 새로운 파시스트 국가를 확보하고 싶어했다.

게다가 당시 급속도로 재무장하고 있던 독일로서는 새로운 장비와 전술을 실전으로 시험한다는 점도 무시 못할 매력이었다. 이 때문에 독일은 포켓전함 '도이칠란트'와 '아드미랄 셰어'를 파견하여 공화정부 측 해군을 견제하고, 콘도르 군단으로 유명한 지원 병력을 파견했다. 이탈리아도 자국의 최신 피아트 전투기와 안살도 경전차를 비롯해서 수만 명의 파시스트 의용군을 파견한다.

여기에 공화 정부 집권과 함께 좌파의 보복을 우려하여 해외로 도피했던 스페인 자본가들이 영국과 미국에서 로비 활동을 펼쳐 공화 정부에 대한 지원을 차단함과 동시에 프랑코에 대하여 미국이 석유를 계속 수출하게 만든다. 때문에 국민 진영에서 "우리가 이길 수 있었던 것은 독일의 폭격기와 이탈리아의 대포, 미국의 석유와 신용대부와 차량 덕분"이라는 말까지 나왔을 정도다.

여기에 공화정부가 그나마 국제여단을 비롯한 지원세력들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소진시켰다.

결국 1939년, 프랑코 군대에 의해 스페인 수도 마드리드가 함락된다. 정확히는 마드리드가 함락된 것은 아니었다. 공화파의 주요 거점 도시들이었던 바르셀로나 등이 함락되었지만, 프랑코의 군대는 평화협정이 맺어지기 전까지 마드리드를 완전히 함락시키지 못하고 시내에서 전진과 후퇴가 반복되는 시가전만 벌어지고 있었다. 이렇게 프랑코는 사실상 스페인의 카우디요(지도자)가 된다.

5 2차 세계대전과 프랑코

프랑코는 내전 기간 중 독일과 이탈리아, 두 파시즘 국가들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다. 프랑코 자신도 친파시스트적 성향을 띠었기 때문에 2차 세계대전 동안 두나라와 비교적 우호적인 태도를 유지했다. 이데올로기적으로 프랑코는 2차대전 당시 나치스의 행동을 유대-볼셰비즘에 대항하는 문명의 수호자라며 칭송하고, 당시 스페인에 살고 있던 6,000명 가량의 유대인들의 명단을 만들어 히믈러에게 넘겨 주는 등 나치스에 동조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러한 언행과는 대조적으로 실제 유대인들에 대한 정책은 당시 스페인은 알함브라 칙령종교 재판이 설친지도 이미 400년이 지났으니 막상 박해하고 싶어도 박해할 유대인들이 없는(...) 상황이기도 했고[4] 주 헝가리 스페인 대사로 있었던 앙헬 산즈 브리즈 대사 같은 사람들은 개인적으로 외교관 신분을 사용하여 수 많은 유대인들의 탈출을 도운 바도 있으며, 정권이 딱히 이런 개인적 차원의 인도주의를 제재하진 않았다. 총체적으로 2차대전 도중 2만~3만5천 가량의 유대인들이 스페인을 통해 탈출한 걸로 추산 된다. 전쟁 중 나치스의 패색이 짙어질수록 당장 외무 장관만 해도 골수 친독 인사였던 처남 세라노 수녜르에서 좀 더 온건파로 알려졌던 프란시스코 고메즈 장군으로 바꾸는 등 눈치 보는 능력 하나는 아주 끝내주게 맹우였던 독일과 이탈리아의 뒷통수를 치고 연합군에게 러브콜을 보냈다.

일부 프랑코 옹호자들은 이런 전시 행적을 프랑코 정권의 인도주의적 면모로 포장하고 내세우려고 하나, 당장 위의 유대인 명단을 만들어 나치스에게 건내준 것만 해도 기본적으로 정권 차원에서 홀로코스트를 막으려고 했다는 건 헛소리이다. 일단 기본적으로 2차대전 당시 스페인은 내전에서의 복구가 똑바로 안되어 특히 프랑스쪽과의 기본적인 국경 통제도 제대로 안 되는 상황이었다. 많은 유대인들이 피신 루트로 사용했던 저 피레네 산맥 불-서 국경은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이 쯤에는 프랑스 레지스탕스와 통합되어 나치스 상대로는 물론이고, 종종 월경하여 프랑코군도 습격하곤 했던 공화파/좌익 잔당 게릴라도 쉽게 통과했고, 종전 직후에는 전범 재판을 피해 도망치려는 나치스 인사들도 잘만 술술 통과했다(...). 정권의 의도와 상관 없이 기본적으로 국경을 비롯한 인구의 호구와 이동에 대한 통제가 똑바로 안되었다는 반증이다.

반면 그 대상이 이미 스페인에 있지도 않았던 유대인들이 아니었을 뿐이지, 범위를 정치범까지 확장 시킨다면 스페인은 엄연히 홀로코스트 가담 국가다.[5] 당장 2차대전 개전 당시 프랑스로 망명해 있다가 프랑스 침공과 함께 나치스에게 사로 잡힌 공화파 스페인인 10,000명 정도가 "스페인인들의 수용소"란 별명까지 붙었던 마트하우젠 수용소를 비롯한 나치의 강제 수용소에 끌려갔고, 스페인 정부는 어차피 자국으로 송환 되었어도 총살 시켰을 작자들이니 나치스가 이들을 절멸수용소에서 확실하게 끝장내도록 종용했다. 나치 강제 수용소에 수감 되었던 9,300명 가량의 스페인인 중 50%를 훌쩍 넘는 5,000명 가량이 마트하우젠, 다카우, 부헨발트 등에서 그 어떤 나라도 돌보아 주거나 이들을 구하려는 노력 없는 무국적자로 죽었다. 반면 이 생지옥 와중에서도 수용소의 스페인인들은 일단 정치범들이니 신념에 따라 정신력이 강한 사람들이 많았고, 와중에는 부르봉 왕정 말기->제2공화국-> 나치스 치하 유럽에서 좌파 혁명가, 레지스탕스 투사로 잔뼈가 굶었던 사람들이 많았다 보니 그 뒤에 들어온 폴란드인, 소련인 수감자들에게 노하우를 가르쳐 주는 등 수용소 내 저항 조직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다.[6] 실재로 부헨발트 수용소의 경우 미군이 진주하기 겨우 며칠 전 나치스가 수용소를 텅텅비우려는 (즉, 자신들을 죽음의 행진으로 학살하려는) 당국의 의도를 알아 챈 스페인인, 폴란드인 카포들 주도로 수용소 봉기가 터져서 미군이 들어오기 전 자체적으로 캠프가 해방되었다.[7] 종전 후 홀로코스트의 실상을 세계에 널리 알리고 전범 재판에 핵심적인 증거 자료가 된 수용소의 사진들을 남긴 친위대 산하 수용소 사진사였던 프란시스코 보이스[8] 또한 스페인 공화파 수감자였다.

지브롤터 해협의 중요성으로 인해 스페인의 주요 항구였던 카디스는 대전 기간 동안 크릭스마리네(독일 해군)의 기지가 되었고, '청색사단(División Azul)'과 '청색 비행중대(Escuadrilla Azul)'이라는 이름으로 1개 보병사단과 비행중대가 독소전선에 파병되기도 한다. 이 청색 사단은 구성원 중 적지 않은 수가 친지, 친구 등이 내전 당시 공화파로 싸우다가 감옥에 갇혀 있어 연좌제를 피하는 겸 그들의 형기를 조금이라도 줄여 보려고 참전했다는 비극적인 여담이 있다. 이 때 한가지 해프닝이 터졌는데 독일에서 청색사단과 파일럿들을 환영한답시고 군악대로 국가를 부르게 했는데 바로 공화파의 국가를 연주했다.

그러나 무솔리니는 그 특유의 허세(...) 때문인지 프랑코에게 그리 많은 대가를 요구하지 않으면서 스페인에 필요 이상의 지원을 퍼부었다. 결국 이 때문에 이탈리아는 무솔리니가 그나마 잘하고 있던 경제분야를 고대로 말아먹어 2차 세계대전 그 숱한 병크를 터뜨리는 또 하나의 원인을 초래하고 만다.

반면 히틀러는 지원의 대가로 스페인 북부의 광산들을 차지했고 헤르만 괴링 장군이 공화 정부에도 무기를 파는 등의 행각을 벌였으니 강한 민족주의자이기도한 프랑코로서는 감정이 나빴다.

프랑코는 당시 비시 프랑스의 국가수반이었던 페탱 원수에게 "선생님[9], 가지 마세요. 저놈들이 선생님한테 책임을 다 덮어씌우려 한다고요."[10]라고 말하고, 히틀러와의 동맹 교섭현장에도 일부러 몇 시간이나 늦게 도착하여 히틀러를 빡돌게 만드는 등, 거리를 어느 정도 두려고 했던 것 같다. 이건 프랑코의 책략이라고도 볼 수 있지만 프랑코가 그때 히틀러를 만나기 위해 사용했던 교통수단이었던 스페인 철도가 워낙 개판이어서 그랬다고도 한다. 나폴레옹이 괜히 스페인을 설명할때 "피레네 산맥 이남은 아프리카다."라고 깐게 아니다.

때문에 공식적으로는 우리가 내전 때문에 산업이 개쪽돼서 무기도 못 바꾸는데, 님들 무기 좀 무상으로 줄래염?ㅋ 그러면 동맹함 그리고 식량이랑 산업시설이랑 산업원료랑 영토도 좀 정도로 끝낸 듯하다. 물론 위에서도 썼듯, 자국내 항구를 군사거점으로 제공하고, 독소전쟁이 시작되었을 때는 대놓고 추축국에 가담하지는 않지만 소련과의 전투에 참전하고 싶어하는 자원병을 제공하겠다고 제의하였다. 이에 히틀러는 형태야 어찌됐든 스페인이 참전하는 것이니 흔쾌히 수락하였다. 이 부대가 청색 사단이다. 이를 들어 스페인은 2차대전에서 표면적으로 중립이었지만 사실상 참여한 것으로 보고 있다. 물론 프랑코의 강력한 요청으로 인해 파병된 부대는 소련하고만 싸웠다.

그리고 독일이 잘 나가던 1940년대만 하더라도 "우리 내전 전후 복구만 도와주면 당장이라도 참전해서 도와드림"이란 식으로 살랑이를 떨었으나, 이 내전 복구와 스페인군을 다시 전력이 될 만한 단계로 재건하는 것 만으로도 천문학적인 투자를 필요를 해서 히틀러가 거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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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릭스 작전에 대한 스페인의 신문 기사.

1940년 11월, 히틀러는 '총통 지령 제 18호'로 지브롤터 공격 계획인 펠릭스(Felix) 작전을 수립한다. 루트비히 퀴블러(Ludwig Kübler)를 사령관으로 1개 군단이 스페인을 통과해 스페인 공군의 지원과 함께 지브롤터를 침공하는 계획이었다. 하지만 프랑코는 지브롤터를 스페인에게 주겠다는 히틀러의 말에도 작전에 협조하는 것을 거부했고, 독일으로서도 소련 침공을 위한 준비가 필요해 지중해 봉쇄는 이탈리아 해군과 롬멜의 아프리카 군단의 수에즈 공격에 맡기기로 한다.둘 다 망했지만 말이다 프랑코가 무기뿐만 아니라 식량, 석유에 비시 프랑스령 북아프리카 식민지(모로코 전체, 알제리의 일부, 사하라 사막 등)까지 요구해대니, 아무리 지브롤터 공략이 매력적이라도 히틀러가 선뜻 들어줄 수 있을 리 없었다.

1941년, 히틀러는 또다시 지브롤터를, 이번에는 스페인 전부를 공격할 이사벨라(Isabella) 작전을 구상한다. 프랑코가 계속 중립을 지키자, 프랑코가 연합군에 가담하거나 연합군이 나폴레옹 전쟁 때처럼 스페인을 통과해 서유럽을 공격할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한 것이지만, 계획에 그친다.

이러다가 전황이 슬슬 안 좋아 보이기 시작하는 1942년부터 역으로 히틀러가 참전 좀 하라고 살랑이를 떨다가, 그 이후 독일의 패색이 확실히 짙어지자 완전히 쌩깠다. 그리고 무솔리니 또한 내심 지중해에서 다른 경쟁자가 생기는 것을 바라지 않아 등 뒤에서 히틀러에게 스페인을 끌어들이지 말라는 압력을 넣었다.

전쟁 말기 독일의 패색이 짙어지자 프랑코는 재빨리 청색사단을 국내로 소환하고 독일과의 관계를 단절했다. 1944년 말, 프랑코가 연합국과의 협상에 나섰다는 이야기를 들은 히틀러는 프랑코 개객기라고 내뱉었다고 한다.

다른 얘기로는 연합국에서 프랑코에게 중립국인척 하면서 계속 독일을 지원하면 스페인을 추축국으로 인정하고 공격하겠다고 했고 프랑코는 히틀러에게 그대로 하소연하면서 청색사단을 빼돌릴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히틀러도 만약에 스페인이 공격당하면 스페인을 지켜줄 상황도 아니고 스페인 방향에서 연합군이 밀고 올라오면 곤란해지니 차라리 친독일성향의 중립국으로 놔두는게 낫다고 판단해서 프랑코가 발을 빼는걸 허용했다는 얘기도 있다. 소련에게 밀리던 상황에서 스페인 사단만 빼갈게요 한다고 곱게 들어줄리도 없고...

한편 이런 독일과의 관계 때문에 같은 추축국인 일본 제국과도 우호 관계를 유지했다. 하지만 이 관계는 태평양 전쟁 말기에 일본이 자폭을 일으켜 버렸다. 미군이 필리핀 마닐라를 공격하자, 마닐라 주재 스페인 영사관을 일본군이 공격해서 영사관에 방화하고 민간인을 학살하는 사건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이 사건을 접하자 프랑코는 당연히 격노했고, 1945년 4월 11일에 스페인은 일본과 단교해 버렸다. 그런데 이 와중에도 스페인 정부에선 '사건을 그냥 넘어가서는 안되지만, 그래도 일본과의 관계는 유지해야 하지 않은가'라는 논란이 있었다. 그만큼 당시 스페인은 일본에 대해 우호적인 감정이 강했다. 이런 우방국조차 자기 스스로 걷어차버린 일본군은 자신들의 어리석음을 또 입증한 셈. 이렇게 독일, 일본 등 추축국(Axis)세력을 배신한 덕에 전범재판에 회부되어 권력이 무너지는 건 면할 수 있었다. 게다가 이런 엄청난 외교적, 국제적 무례를 당하고도 항의성으로 국교 단절도 "이런 행위는 지금까지 있었던 스페인과 일본 제국의 우호적 관계에 타격을 줄 수 밖에 없다"라고 상당히 소극적으로 밖에 말 못하고, 학살 자체의 보도도 가톨릭 신앙과 스페인 제국의 유산을 지키겠다며 그 난리를 쳐놓고 이런 일도 못 막나? 라는 식의 반 정권 여론이 형성 되는 걸 막기 위해 사건의 스페인 국내 보도 자체도 사건 발발 이후 몇주 뒤에야 허용하는 등 심각하게 비굴한 모습을 보였으며, 이 뒤에는 추축국들이 끝나면 우리 차례일지도 모른다라며 두려워 하던 정권의 공포와 취약함이 있었다.[11]

실재로 당장 청색사단 문제를 따지면 스페인을 교전 상대인 적국으로 분류할만할 명분도 있고, 일단 국제 공산권의 거두이며 실재로도 엔리케 리스테르를 비롯한 적지 않은 공화파 망명객들이 붉은 군대에 지원했던 스탈린의 경우 아예 스페인도 추축국으로 분류하여 조지려고 하였으나, 포츠담 회담에서 더 이상 전쟁을 키우기도 싫고, 좌파 공화파를 도와주기도 싫었던 처칠과 트루먼이 "스페인 저 시끼들은 무조건 국제연합에 끼워주지도 않고, 추축국 애들 급으로 경제 제재를 먹여 참교육 시켜줄거니 님이 참으삼"이라 설득하여 겨우 스탈린을 달렐 수 있었다. 이 만큼 스페인이 비록 직접적으로 2차대전 자체는 비껴나갔지만 연합국, 특히 소련을 비롯한 공산 세계 또한 내전 당시의 프랑코가 한 짓거리를 잊은 건 아니었다. 무엇보다 2차대전 직후와 냉전 체제가 본격화된 50년대 사이에는 동서방을 가리지 않고 파시즘에 대한 혐오 분위기가 세계적으로 대세였다. 때문에 2차대전에 휘말려 드는건 피했을 망정 외교적으로 스페인은 남아공, 포르투갈, 로디지아와 함께 여전히 국제적 천민 취급을 받으며 고립되었고, 위의 처칠과 트루먼이 약속한 경제제제로 인한 극도의 고통을 받았다. 이 내전 이후 2차대전이 끝나고도 10년 가까이 국제적 고립으로 인해 스페인이 극도의 가난과 굶주림에 시달렸고, 이에 수반한 정권의 폭력성도 극에 달했던 1939~1955년 사이의 시절을 스페인인들은 "기아의 세월(años del hambre)"이라 부르며 스페인 현대사에서 가장 고통스러웠던 세월로 기억한다.

그리고 1947년 프랑코는 이미 대가 끊긴 것이나 다름없던 스페인 부르봉 왕조의 복권을 선언하면서 왕위를 이을 적합한 인물이 나타날 때까지는 내가 섭정이라고 선언, 종신 집권을 합법화한다.(…)

6 프랑코의 정치

6.1 무자비한 철권 통치 및 일인독재

스페인의 철권통치자가 된 프랑코는 군총사령관, 유일한 합법정당인 국민운동당(팔랑헤) 당수, 국가원수, 내각수반을 모두 겸임하며 헌법도 국민 기본권도 인정하지 않는 폭압적 체제의 수장으로 40년간 군림했다. 그의 권력엔 어떠한 제도적 한계도 없었고 마음대로 법을 만들어 권력을 행사했다.

군인으로서의 화려한 무용담과 집권 과정에서의 교묘한 책략으로 꽤나 간지나는 인물로 보이지만 그의 정치 행태를 보면 전혀 간지나 카리스마 따위가 아니라 오히려 삽질, 비굴함, 운빨이 삼박자로 가득차 있다. 특히 경제정책의 경우 뒤에 나오듯이 말 그대로 주먹구구식이라 위기에 취약하여 이후 유로존 위기 상황에서 스페인이 국가 막장 테크를 밟는 주 원인으로 작용했다.

또 프랑코는 말이 좋아 공산주의자와 무신론자들로부터 스페인의 가톨릭적 정체성을 보존하는 데 성공했을 뿐이다. 실제로는 철저한 반공주의, 중앙집권주의, 스페인 단일국가주의를 국시로 옛 공화주의 세력을 갈아마셨다. 게다가 카탈루냐, 바스크 등 지역 분리주의 세력도 마찬가지로 거의 갈아마시다시피 탄압했다. 게다가 살라자르와 함께 중남미의 콘도르 작전을 지원하기까지 했으며 망명 온 중남미 사람들을 잡아서 중남미 본국으로 송환까지 했다. 연좌제는 기본이었고 심지어 스페인 국민들의 탈출을 법적으로 허용하지 않았으며 탈출하다 발각되면 엄한 처벌을 가했다.

때문에 지금까지 집계된 프랑코 정권하에서의 사망자만도 20만을 넘어서며, 그나마 이것도 극히 일부라는 말이 나올 정도다. 그것도 내전 중에 사망한 숫자는 뺀 것이다. 프랑코 정권이 정권 말기 조직적으로 대대적인 기록 말살을 저질러 정확한 숫자가 파악될 날은 멀지만, 근 몇년간 암매장된 집단 무덤이 대거 발굴되면서 희생자의 추정 숫자는 갈수록 늘고 있다. 같은 전간기~2차대전~대전 후 유럽에서 스탈린히틀러를 제외하면 이 정도 숫자의 자국민 학살을 저지른 독재자는 없다.[12]

심지어 프랑코는 아침식사를 한 뒤 커피를 마시면서 사형수 명부를 갖다놓고 이름 옆에 사형, 연기, 사형 후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할 것 등을 직접 기입했다고 한다. 이 시기 한때 스페인 민중의 다수를 차지했던 공화주의파,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 아나키스트 등의 세력은 죄다 외부로 망명 or 사형 크리를 밞아서 스페인 내부의 진보, 좌파 진영이 아예 절멸당했다. 이를 두고 영국의 근현대 스페인사 전공 역사학자인 폴 프레스턴은 '스페인의 홀로코스트'라고 표현했다. 그러다 프랑코 정권이 2차대전이란 고비를 넘기고 어느 정도 '프랑코 체제'라 부를 만한 것이 자리 잡은 50년대 중후반 쯤에 약간의 변화가 생긴다. 다시 대학생, 근대 자유주의 성향의 정권 내 반독재 인사들, 망명 2세대, 바스크와 카탈로니아 민족주의 세력이 다시 성장하기 시작하면서 프랑코 독재 정권에 대한 저항 2기가 나타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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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코 및 그 군대가 반대파를 처형 혹은 학살하고 암매장 혹은 공개매장한 장소다. 색깔 별로 발굴-이장(적색), 유실(흰색)로 구분했다. 이 지도는 스페인 법무부가 작성한 곳이다. 녹색은 아직까지도 발굴이 안된 곳이다. 전 국토를 피비린내나는 학살장으로 만든 자로서, 인구비례로 따져보면 소련의 대숙청이나 나치 독일에서 있었던 집단학살에 전혀 뒤지지 않는다.

위에서처럼 스탈린이나 히틀러를 연상케할 정도로 이 양반은 사람 죽이기를 밥먹듯이 했다. 스페인 인구가 내전 전후로 약 2500만~2600만이었는데, 내전 사망자만 50만이고(물론 여기엔 프랑코측 사망자도 포함되어 있다.), 집권 이후 프랑코가 직접적으로 죽인 백색테러 희생자는 최소 10만, 최대 30만 정도로 잡는다.

타국과 비교를 해보자면 한국의 박정희나 전두환과 같은 군사독재자들 역시 5.18과 같은 굵직한 사건들을 포함하여 인혁당 사건, 민청학련등과 더불어 법학, 경제학 교수들에 자행한 사법살인, 김형욱 납치살인, 김대중 납치살인미수 등의 납치, 긴급조치로 잡혀 고문당한 무수한 피해자 등 국가적으로나 권력자 개인적으로나 수많은 고문과 납치와 살인이 군부독재 시절 행해졌지만 희생자 수의 단위는 프랑코쪽이 더 많은 편이다. 근대 한국사에서 일단 남한만 국한시켜 보자면 국가 권력에 의한 폭력이 프랑코와 비교할 만큼 10만 단위의 희생자를 찍으며 가장 극악했던 시절은 해방공간~한국전, 즉 이승만 정권 초기 시절인데 이 당시의 학살은 그게 정당화 사유는 못 될 망정 일단 전시 상황에서 벌어진 국가의 테러 행위(state terrorism)이다. 반면 프랑코 체제는 적어도 집권 초기 10년 동안은 테러가 일상화 되었고, 그나마 많이 느슨해졌다는 정권 말기 70년대에 가서도 체제의 폭력성이 다시 강해졌으며, 프랑코 본인이 죽어버린 이후에도 극우 테러리즘으로 이런 공권력의 테러에 집착했다. 사실 '비전시 자국민 희생자'라는 카테고리로만 한정하면 프랑코 정권의 폭력성과 비교할만한 동시대 체제는 진짜 스탈린 정도 밖에 없다(사실 스탈린 체제도 스탈린 집권 초기에는 이 정도로 가혹하고 폭압적이지는 않았다. 일반적으로 스탈린 하면 으레 따라붙는 '대숙청'의 이미지는 1930년대 후반부터 일어났다). 히틀러만 해도 당장 홀로코스트를 비롯한 나치의 학살 행위는 일단 전쟁 발발 이후 점차적으로 심화된 것이다.

6.2 학계와 문화계 탄압

한 마디로 말해 스페인판 문화대혁명

프랑코 정권은 단순한 피비린내나는 학살 뿐만 아니라 장기적으로 스페인의 사회적, 제도적 인프라를 망쳤다. 대표적으로 지목되는 것이 바로 문화, 예술, 학문 방면에서 처절한 지식인 계층의 탄압이었다.

내전 발발 이전 스페인의 문화적, 예술적 사조를 주도하던 '27 세대'라고 불렸던 문학인, 예술인들이있었다. 이 가운데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 미겔 에르난데즈는 숙청, 옥사당했고, 페드로 살리나스, 후안 라몬 히메네즈는 망명지에서 객사했다.

학계에서도 당시 대부분 공화국, 사회주의, 공산주의, 아나키즘 등을 지지했던 스페인의 인텔리 계층은 끌라우디오 산체스 알보르노, 라몬 피달,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 아메리코 카스트로, 등 당시의 거물 역사학자, 철학자, 비평가 등이 대거 중남미, 북미, 프랑스, 등지로 망명하면서 되려 남의 나라 대학 배만 불려주었다.

내전 이전만 해도 상당히 발전해있었던 스페인의 역사학계와 문화비평학은 대거 작살나서 오히려 70년대, 80년대를 들어 미국, 멕시코, 아르헨티나, 프랑스 등을 통해 역수입되었다.

서구권 지식인 사회 전반에서 히스패닉 역사, 문화, 예술 등에 대한 관심과 연구가 대폭 늘었던 시기가 바로 이 망명인사들이 전 세계로 흩어진 40년대, 50년대의 일이다.

6.3 경제정책

프랑코 지지자들이 프랑코의 주요한 업적으로 꼽는 것은 경제정책이다. 1940년대와 50년대 스페인의 경제는 독일과 이탈리아에 진 막대한 부채를 갚는 것과 동시에, 프랑코의 이른바 '자급주의', '군수공업우선주의'로 인해 거의 파탄 직전까지 갔다는 비판도 있지만, 당시 스페인은 국제적으로 고립되어 있었기 때문에 외국과의 교역을 활발하게 하려고 해도 그럴 상황이 못 되었다. 스페인이 고립된 것도 따지고 보면 프랑코 때문이지만.[13]

게다가 독재자들이 나라 굴리는 게 보통 그렇듯이, 프랑코는 정부 각 부처의 장관들과 고위 관료들을 모두 전문성과는 하등 상관 없는 정치적인 이유로만 골랐다. 때문에 나머지 유럽이 모두 2차대전의 참화에서 재기하고 경제적인 호황기를 누린 1950년대 후반까지, 스페인의 경제는 한국전쟁 직후 한국과 마찬가지로 전후 복구는 그럭저럭 잘 됐지만[14] 전쟁복구 이상은 하지 못한 사실상 경제적 파탄 상태에 있었다. 이런 저런 이유로 프랑코 정부는 비전문가들이 고위직을 차지했고, 이들의 경험이나 능력이 별볼일 없었기 때문에 프랑코 정부의 경제는 혼란 일색이었다.

1960년대 프랑코 정부에서는 까를로스파, 왕당파, 파시스트 등 복잡한 정파 싸움의 교통 정리가 이루어졌다. 이제 눈치 안보고 제대로 된 전문 관료들을 선임하기 시작하였다.

뒤늦지만 이러한 개혁 조치로 스페인은 저임금 노동력과 괜찮은 수준의 제조업을 갖추게 되어 프랑코의 경제정책도 결과적으로 나쁘지 않았다. 문제는 이러한 조치가 그가 집권하고도 20년이나 지난 뒤에 취해졌다는 것이지만.

프랑코 정권 치하에 이루어진 국가 기반사업이나 공업 육성이란 정책들은 과달키비르 강 운하에서 철도선, 자기 영묘인 전몰자 계곡까지 하나같이 2차 대전 기간 중 연평균 수십만명의 전직 공화파 출신 강제 노역자들을 통해 이루어졌다. 스페인 내전 도중과 이후 프랑코 정권은 비록 나치 독일 수준의 아예 절멸을 목적으로 한 절멸 수용소는 아니지만 여전히 비참하게 굶다가 강제 노역과 질병, 간수들의 폭행으로 죽기 딱 좋은 수준의 강제 노동 수용소를 170개 이상 운영하며, 그 중에서 가장 규모가 컸던 미란다 델 에브로의 수용소만 하더라도 6만 5천명의 공화파 정치범들이 왔다가며 이 중에서 수백, 수천이 비참한 환경 속에서 노예 노동자로 죽어갔다. 스페인 역사상 레콘키스타 이후 유례가 없는 규모의 자국민 노예화와 강제 노동, 후술 할 자국민에 대한 인종차별적인 우생학적 정책만 보고 있다면 이는 차라리 우익판 북한 정권이 연상 될 지경이다. 프랑코 정권이 이룩한 경제 발전이란 건 결국 이러한 그 그늘 아래 이루어진 인권 탄압에 비하면 새발의 피 만도 못한 업적이다.

프랑코 치하의 스페인은 내전 끝나고 20년 뒤인 1950년대 후반에야 내전 및 혼란 이전 경제 수준을 완전히 회복했다. 능가했다는게 아니라 20년이나 지나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다른 유럽 국가들은 전부 다 2차 대전이 끝난 지 10년도 넘었고, 마셜 플랜의 지원과 눈부신 전후 경제 발전으로 인하여 진작에 유례없던 호황기를 한창 누리며 전후복구를 수년 만에 끝내고 빠른 속도로 고성장에 돌입했다. 그 사이 스페인은 겨우 경제가 막장이 되고 내전이 벌어지기 전인 1930년대 이전 수준으로 돌아간 것이다.

이 와중에서도 스페인의 지배 계층은 사치를 부렸다. 최고 대귀족 가문 중 하나인 알바 공작가의 여공[15]이 1947년 2천만 페세타나 쏟아부은 화려한 결혼식을 치르기도 했다. 당시는 다른 유럽마저도 박살이 나서 스페인 전체가 내전 후 파괴와 고립에 떨던 시절이었다. 그런 시기에 스페인의 귀족은 마치 계급 투쟁의 승리를 과시하는 듯 막장 행보를 거듭했다. 프랑코 사후 처음으로 경제가 개판이 되자 갑자기 과거의 공화국 시절 적-황-자색의 깃발을 들고 쏟아져 나오는 현대의 스페인인들의 행동에는 이러한 역사적 경험이 바탕에 있다.

이후에는 성장이 궤도에 오르면서 서유럽을 어느 정도 따라잡았고 이에 따라 국민소득이 상당한 수준에 이르긴 했다. 물론 이에 대해서 프랑코 실드 치기 바쁜 현지 우익들은 스페인은 마셜 플랜의 지원을 못 받아서 그렇다고 그렇게 변명한다. 하지만 애초에 미국이 스페인만 마셜 플랜에서 쏙 빼놓은 건 그만큼 프랑코 정권에 대한 시각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처칠 같은 우익 인사들마저도 이미 버스는 지나갔지만 훗날에나마 '그때 눈 앞의 레드 컴플렉스를 치우고 공화국을 도왔어야 했다' 하며 후회했을 정도다. 게다가 프랑코 시기의 경제 발전은 작위적이고 중구난방으로 이루어져 그 결과를 현대의 스페인인들이 유로존 경제 위기로 톡톡히 치르고 있다.[16]

게다가 프랑코 이전에도 스페인에 중공업과 산업이 아예 없었던 건 아니다. 바르셀로나의 제조업, 바스크 지방의 조선업, 북부 아스뚜리아스 지방의 철광업 등은 유럽 전체에서도 상당한 경쟁력을 자랑하는 산업이었다. 그런데 당시 대부분 지역 자치주의 성향이었던 현지 산업가 계층 또한 프랑코가 싸그리 갈아버렸다[17]. 결국 프랑코는 있던 기반을 없애고 나라를 바닥으로 떨어뜨린 후에 막판에야 다시 건설한 셈이다.

그래도 스페인은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소득이었던 그리스나 포르투갈, 아일랜드에 비하면 중공업이 튼튼했던 것으로 평가받는다. 스페인은 한국과 일본의 조선업이 흥하기 전까지 유럽 조선업의 선두주자였고, 자동차의 경우 한국 다음의 생산량을 자랑한다. 고속철도도 프랑스로부터 기술이전을 받아서 자체 개발할 정도다.

죽은 독재자에 대한 옹호란 게 거의 다 그렇지만, 스페인의 우익들이 프랑코를 옹호하면서 내세우는 경제 발전도 비슷한 경우를 전세계적, 장기적 관점에서 비교하면 초라하면 초라했지 그리 딱히 특출날 것도 없다. 한국, 중남미 등이야 진짜 막말로 아무런 기반 산업, 제도적 인프라, 인적 자원이 아예 없는 상황에서 시작했지만[18], 스페인은 아무리 삼류 국가여도 프랑스와 국경을 댄 유럽 국가여서 애초에 프랑코가 집권하기 이전에는 나름 쌓아둔 게 있었다.

단순히 경제 발전 하나만으로 프랑코를 좋게 평가하기에는 뿌린 피가 일단 너무 많다. 또 그 경제 개발이란 것도 지금 스페인이 겪고 있는 고난의 씨앗이 통제 불가능한 공권력, 뿌리 깊은 부정부패, 능력이 아닌 이념과 충성도에 따른 코드 인사, 그리고 이런 상류층의 비행의 성역화와 함께 이루어진 것이다. 때문에 프랑코가 뿌린 씨앗과 깊게 연관된 것을 보면 제대로 된 공로라고 할 수 없다.

6.4 대외관계

프랑코 정권은 정치적인 기반도 불안하고, 국제적으로는 왕따고, 경제 사정은 또 개판이니 결국 50년대 중후반을 기점으로 대대적인 수술을 가했다.

프랑코는 냉전 시기 서방의 편집증적 좌익공포증에 편승하여 갑작스럽게 자신을 반공 투사 1세대로 국제 무대에서 포장하기 시작하였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프랑코는 한국에 스페인 지원병을 파병할 용의가 있다고 주장했다. 한국전에 참전을 해서라도 UN과 서방 국가들의 인정을 받겠다는 뜻을 내보인 것.

유사한 사례로 이탈리아가 있다. 추축국의 일원이었던 이탈리아는 스페인처럼 UN에 가입하지 못하는 등 국제적으로 고립상태에 빠져 있었다. 그래서 이를 극복하기 위한 방법 중 하나로 한국전쟁 때 의료 지원단을 파견하였다.

결국 스페인의 한국 파병은 실현되지 않았지만 이러한 노력들을 통해 1950년대 후반부터 미국을 비롯한 서방진영과의 관계를 회복하여 국제 교역에 본격적으로 뛰어들 수 있었다.

프랑코는 전반적으로 경력 자체만 두면 내전에서도 이기고, 2차대전도 비껴나가고, 경제 발전도 하는 등 나름 뭔가 잘한 것 같이 보인다. 하지만 그 내부적인 과정을 뜯어보면 거의 대부분 운빨이다. 또 나름대로 머리 굴려서 집행한 것도 나라 전체를 위한다기보다 자신의 지지계층 소수만을 위해 지극히 이기적인 방향으로 머리쓴 것이다.

2차 대전 이후 국제적 고립에서 입을 싹 씻은 후 다시 국제 사회에 편입된 모습 등을 보면 과거의 영광으로의 희귀니, 스페인의 명예니 하며 떠들었지만 필요에 따라 말을 바꾸는 것도 서슴치 않았다.

무엇보다 프랑코는 국민 앞에서는 당당한 것과 달리 히틀러, 무솔리니, 아이젠하워, 처칠 등 본격적인 강대국의 지도자들 앞에서는 저자세로 굽신거리는 등 좋게 평가하기가 힘들다.

6.5 심화된 지역 갈등과 분리주의

프랑코는 현재의 지역분리에도 책임이 있다. 폭탄테러 등으로 스페인을 괴롭힌 바스크 지방의 ETA를 필두로 한 테러리즘, 그리고 독립 선언을 한다 만다 하는 카탈루냐의 분리주의 운동은 역사적으로 프랑코 이전에는 전례가 없었다. 분리주의라 해도 스페인 내에서 자치권의 확대와 보장을 요구하는 훨씬 더 온건한, 중앙에서는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의 소수의 지식인들과 산업가들 중심의 지역주의 운동 수준에 가까웠다.

원래 역사적으로 스페인이란 나라는 이베리아 반도의 이슬람 세력에 맞선 여러 가톨릭 왕국들의 동군연합에 뿌리를 둔 나라다. 때문에 이웃 프랑스와는 대조적으로 지방 자치 전통이 뿌리 깊게 박혀 있었으며, 중앙 또한 이를 대체적으로 존중하고 합리적으로 교섭을 하는 게 전통이었다.

스페인 각 지방들의 사법적, 정치적 통합은 까딸루냐의 경우 18세기 중반, 바스크 지방은 19세기 후반에야 이루어졌다. 당연히 통합 이후에도 자국어 사용같은 시시콜콜하면서도 민감한 문제로 지방을 건드리는 일은 별로 없었다.

그런데 프랑코는 정권을 잡은 이후 현지에서 일상 언어로 수백년간 사용된 카탈루냐어, 바스크어를 제한도 아니고 강제로 금지시켰다. 그리고 공권력을 동원해 스페인 역사상 유례 없는 탄압을 가하며 중앙에 의한 복속을 강요했다. 까딸루냐나 바스크 지방은 제국의 먼 식민지도 아니었다. 현대 스페인의 중심인 까스띠야보다 더 현지에 독립적인 정치적, 사회적 집단으로 존속해온 땅으로 자국 땅에서 뿌리 없는 강제동화정책의 대상이 될만한 곳이 아니었다.

이 시절의 기억은 현재도 빌바오바르셀로나의 중장년층 사이에도 남아있다. 젊은 시절 거리에서 자연스럽게 모어인 바스크어나 까딸루냐어를 사용했다고 해서 헌병대에 끌려가 뺨때귀 맞은 이야기를 자주 들을 수 있다.

자기네 땅에서 이런 유례없는 탄압과 강제동화정책을 40년 가까이 겪으며 산 이 지방들은 프랑코 정권 말기 독재자가 죽을 기미가 보이자 아예 스페인이란 나라 자체에 질색을 하게된다. 그리고 폭탄이나 로비를 통해서 노골적인 분리독립을 요구하는 급진적 방향으로 선회한다.

서형욱의 저서에 의하면 레알 마드리드를 프랑코가 지원해주었다고 하나, 사실 프랑코는 축구 자체에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프랑코 정권이 대대적으로 축구나 문화적으로 탄압한 건 사실이고 이는 카탈루냐나 바스크 지방에서의 축구로 표출되는 반발감과 하나로 뭉치는 계기가 되었다. 실제로 스페인 정부에서 라이벌 팀에게 간접적, 직접적으로 방해한 일들 중 디 스테파뇨 사건은 너무나도 유명한 사례. 바르셀로나의 대표적 수장인 감페르도 말년에 스페인에서 쫒겨났었다.

6.6 우생학

뿐만 아니라 프랑코는 당시의 정신나간 나치식 인종주의를 어설프게나마 받아 들여서 빨갱이들이가 되는 것은 열등한 유전적 요인이 있으니 그 형질을 물려 받은 빨갱이 자식들은 사회에서 정화해야 한다는 명목으로 공화파 포로와 자식들을 납치하여 부모로부터 격리시킨 적도 있다. 이 짓거리는 아르헨티나의 군부 독재에서 벤치마킹해서 써 먹은 적이 있는데 대표적인 독재자가 바로 호르헤 라파엘 비델라다.

1934년 아스뚜리아스 혁명 진압과 내전 당시 프랑코가 모로코 식민지병을 끌고 와 공포 정책을 편 적이 있다. 이때 좌익에서 "왜 니들 우익은 천날만날 레콩키스타드립 치면서 스페인 정화 운운하는 주제에 그 스페인 노동자들 죽일 때는 왜 바로 그 무어인들을 끌고오냐?"라고 따지자 우익쪽에서 변명이라고 꺼냈던 소리였다. 좌익은 생물학적으로 스페인인이 아니라는 소리.

격리 당시 스페인은 고아원에라도 보낼 능력조차 없었던 나라였기 때문에 부모에게서 강제로 떨어져 사회의 암지에서 버림받아 자라게 된 아이들이 30만명이다.

196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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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1월 스노크??

6.7 섭정 통치

프랑코는 집권 이후 자신을 스페인 왕국의 섭정임을 자처하며 왕정을 복고하고 귀족 제도를 부활하는 등 왕국을 다시 열긴 했지만 정작 자기 살아 생전엔 왕을 세우지 않았다.

프랑코는 1961년 과거 스페인을 지배한 적이 있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수장인 오토 폰 합스부르크에게 스페인의 국왕 자리를 제안하였다.하지만 오토 폰 합스부르크는 거부한다. 그리고 스페인 부르봉 왕조의 후예로 이탈리아에 망명중이던 후안 카를로스 왕자를 추천했다. 프랑코는 그를 만난 뒤 1969년 그를 행정법을 통해 '스페인의 왕', 동시에 자신의 후계자로 선언한다.

원래 계승 순위는 후안 카를로스 왕자의 아버지이자 알폰소 13세의 아들인 바르셀로나 백작 후안이었다. 하지만 후안 백작은 자유주의 성향이 강했기에 프랑코는 탐탁치않게 여겼다. 때문에 프랑코는 백작 대신 그 아들을 지명했지만 백작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프랑코가 죽은 이후 총선이 실시되기 전까지 왕위계승권을 포기하지 않고 저항했다.. 프랑코는 외동딸 하나만 있었고 아들이 없어서 권력을 세습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사실 프랑코 정권 말기에 이르면 서방과의 관계가 계속 긴밀해지면서 이전처럼 나라 문을 닫고 살기는 어려워졌기 때문에 아마 아들이 있었어도 세습은 안 했을 공산이 크다.

원래 후안 카를로스는 단순한 얼굴마담으로 실제로 프랑코가 후계자로 삼았던 것은 해군대장 카레로 블랑코(Luis Carrero Blanco) 제독이었는데 프랑코는 그를 1973년 수상에 임명하며 후계자 과정을 거치고 있었고 스페인 군부는 후안 카를로스를 애송이(ese nino)라고 공공연하게 비웃었다. 그런데 바스크 분리주의자들의 테러에 블랑코 제독이 암살당하면서 프랑코 체제는 후계자를 잃었고 상당히 난감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프랑코 총통과 한 때 후계자였던 블랑코 제독

결국 프랑코는 단순한 얼굴마담으로 내세우려 했던 후안 카를로스를 프랑코 체제의 후계자로 삼을 수밖에 없었고 군부도 후안 카를로스에게 2대 카우디요가 되길 바랬다.

프랑코는 후안 카를로스 왕자가 어릴 때부터 그를 신경써서 교육했다고 하는데, 교육 내용이 실질적으로 죄다 군사교육. 후안 카를로스는 육해공군 사관학교 세 곳을 모두 졸업했다. 한 마디로 말해서 프랑코는 장래의 임금님에게 스페인 전군의 장교단에 골고루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인맥을 만들어 준 것. 덕분에 후안 카를로스 왕자가 왕위에 오른 뒤 군의 움직임에 민활하게 대처할 수 있었다고도 하니 이건 꼭 깔 거리는 아니긴 하다.

후안 카를로스 왕자가 후계자 수업 시절 프랑코에게 정치를 가르쳐 달라고 하자 후안 카를로스가 통치할 때는 자신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통치할 것이기 때문에 자기 방식은 아무 도움이 안 될 것입니다라고 말하며 거절했다고 한다. 이 에피소드의 신빙성을 의심하는 사람들에게 후안 카를로스 국왕은 자신이 직접 들은 얘기라고 증언했다.

그런데 아버지와 떨어져 자란 국왕 본인은 프랑코에게서 부성애를, 아들 없이 산 프랑코 본인은 국왕을 아들처럼 아끼며 자란다. 후안 카를로스가 어느 정도의 개념은 있어서 공적인 자리에서 대놓고 프랑코 옹호 발언은 하지 않으나 사석에서 다른 사람이 프랑코를 비판하는 건 용납을 못할 정도로 프랑코에 대한 친밀감이 크다.

반면 정치적인 이유로 사형과 수감을 비롯한 탄압은 그의 권력 말년이라고 특별히 더 누그러지고 온건해지고 그딴 거 없었기에 후안 카를로스가 프랑코의 실드를 치기 위해 한 발언이라 추정되고 있다. 이미 프랑코 살아 생전인 70년대부터 프랑코 정권에 대한 저항이 멈추지 않았고 프랑코의 사망이 목전에 다가오자 저항 운동은 더욱 거세지고 있었다. 프랑코 체제는 생존을 위해 '통제된 민주주의'란 명목으로 민주주의와 일부 협상을 시도했으나 걷잡을 수 없는 개혁 요구에 놀란 아리아스 나바로 수상은 바스크 분리주의자, 카탈루냐 분리주의자, 무정부주의자들을 닥치는대로 처형하며 공포분위기를 조성했고 프랑코 말엽의 스페인은 다시 유럽 정가의 개천민으로 추락했다. 프랑코는 군부에게 후안 카를로스 1세에 대한 절대적인 지지를 주문하고[19] 그를 자신의 대행으로 내세우는 듯 후안 카를로스 1세의 권위를 세워주는 행보는 밟았지만 민주화 세력과의 일부 협상 시도를 제외하곤 큰 틀에선 자신의 카우디요 독재 체제를 유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프랑코를 절대적으로 떠받들었던 벙커파들도 프랑코 사후 후안 카를로스 1세의 독재를 원했고... 체제 내부에서도 개방파나 기술 관료 세력들도 있었지만 이들도 후일 후안 카를로스 1세의 급격한 개혁 수준은 요구하지 않고 있었다.

6.8 사망

이 와중에 골골대던 프랑코는 1975년 10월 1일 대중연설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대중 앞에 서지 못했고 대수술 끝에 그해 11월 20일에 지옥으로 갔다. 향년 82세. 프랑코가 죽은 뒤 더 이상 프랑코 체제를 유지할 수 있는 고리는 없었고 스페인은 입헌군주국으로 복귀했으며, 왕이 된 후안 카를로스 1세의 노력으로 군의 준동을 억제한다. 1981년 2월 23일 의회가 점령당하는 쿠데타가 일어났으나 비교적 문제없이 진압할 수 있었다.

그리고 다시 좌파정부가 집권하여 민주화의 길을 걷게 되었으나 그 후유증이 너무 커서 스페인 국민들은 암묵적으로 침묵 협약을 맺어 그 당시의 일을 입밖에 내는 것을 금기시하고 있다고 한다.

프랑코 사후 정권의 야만성이 드러났지만 과거사 청산 노력은 거의 이뤄지지 않았다. 현 사회당 정권이 들어서기 전까지 스페인 정부는 독재 시절의 어두운 과거를 애써 외면했다. 과거를 보기보다 미래를 보고 살아야 한다는 이유였다.

7 프랑코 통치 이후

지금은 과거사 청산이 진행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장 전쟁 이후에도 20만명 이상의 정치범들을 처형 또는 살해하고, 전쟁이 끝난지 40년이 다 되가는 집권 말년까지 숙청을 계속한 건 어떤 변명도 통하지 않는 범죄이다.

7.1 프랑코와 가톨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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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가톨릭의 흑역사 - 파시스트 경례를 하는 스페인의 한 주교

프랑코 체제의 정신나간 인종주의 덕에 공산주의자 부모로부터 아이들을 납치해 고아원으로 보내는 일이 잦았는데, 스페인 가톨릭은 이런 애들 납치를 반대하기는 커녕 가톨릭 사제와 수녀들이 조직적으로 도왔다. 게다가 단순히 정치적인 문제만이 아니라 미혼 여성이나 믿음이 약하다고(!) 생각되는 어머니에게 아이가 죽었다고 말한 후 그 아이를 '신앙이 투철하고 경제적으로 유복한' 가정에 입양시켜버렸다는것. 더욱 황당한것은 이런 애들 납치에서 나오는 돈에 맛들린 의사 성직자 수녀들이 조직을 짜서 90년대까지 했다는 것이다..! 사회의 존경을 받는 소위 "사"자 돌림들이 이런짓을 한 것이다.

이 때문에 스페인 인구의 절대 다수가 가톨릭 신자임에도 불구하고, 스페인은 반교회주의 또한 대중적으로 강한 나라다. 프랑스의 가톨릭이 상층부만 썩었지 하층부는 백성들의 입장에 서 있었던 반면 스페인의 가톨릭은 중세에는 종교재판을 통해 절대 권력을 휘두르며 백성들을 탄압하였다는 인식이다. 그리고 근대에는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같은 이웃나라들이 산업을 발전시키고 부국강병을 이룰 동안 스페안은 신(神) 타령이나 하면서 근대화를 등한시하는 바람에 스페인은 3류 국가로 주저앉았다는 인식이 팽배하다.

이 와중에서도 세계적으로 스페인의 명성을 높힌 문필가, 역사학자, 철학자들 상당수가 예수회 교육 과정을 받았거나, 예수회 학교 출신이거나, 아예 예수회 소속이거나 어떤 식으로든 가톨릭 교회와 연관이 되 있다.

한편으로는 멀쩡한 동네 후비며 이웃들을 서로에게 밀고하게 만드는 종교재판관들을 배출하는 반면, 반대로 또 의기 높고 헌신적인 봉사자들, 지식인들을 배출한 집단이 스페인 가톨릭 교회다. 스페인 역사에서 가톨릭 교회의 영향력은 단순하게 일방적으로 판단하기에는 너무나 깊은 존재이다.

특히 예수회 출신들의 경우 가톨릭 내부 개혁을 통한 철저한 가톨릭화를 추구했는데 이 과정에서 개신교는 물론 기존의 부패한 권력층과 교회도 적대시했기에 중앙 권력의 탄압을 좀 심하게 받았고(라틴아메리카의 경우 예수회 출신의 성직자들이 군사독재에 맞서다가 숱하게 학살당했다.) 가톨릭 내부는 물론 외부의 서민들 사이에서도 평가가 좋은 편이다.

그런데 가톨릭 전체로서는 특히 20세기 프랑코와 결탁하여 권력의 시녀 노릇을 하며 온갖 부정부패를 저질렀으니 인식이 좋을래야 좋을 수가 없다. 성직자들의 '고아 장사'는 21세기에 이르러서도 현재진행형이며, 부정부패 스캔들이 터질 때마다 고위 성직자들이 연루되는 일이 다반사다.

덕분에(?) 현대 스페인 민중들은 이름은 죄다 동네 교구에 등록 되 있고, 깜짝 놀랄 때 마다 미사 때 성체를 의미하는(영어로는 holy host) "오스띠아!(¡Hostia!)"라고 외치는 반면, 성직자들은 생산적인 일은 안하는 주제에 생산성 낮은 본인들이 할 소리는 아닌 것 같지만 권력자들과 결탁하여 감언이설을 뿌리며 더러운 돈이나 버는 암적인 잉여들로 보는 시선이 팽배하다.

다만, 가톨릭 교회 당사자들 입장에서도 할 말이 없는 건 아니다. 일단 위의 교회 상류층의 비리와 사회적 무책임함은 주교단 등 고위 사제들 중심으로 존재했지, 대다수 마을 사람들과 생사고락을 같이 했던 일반 신부들은 민중들과 마찬가지로 저런 착취적인 구체제의 희생자에 가까웠다. 그리고 내전이 터지고 좌파들이 자기네 교회와 성직자, 수녀들을 테러하고 한 쪽에서는 스페인 전통이라며 치켜세워주는데 좌파 편을 드는게 오히려 이상하다. 공화국 정부, 좌익 혁명 단체들과의 합의로 정치적, 군사적으로는 공화파에서 싸웠지만, 사회적으로는 구체제를 유지하며 군종사제 등을 유지했던 바스크 지방의 경우가 많은 점을 시사한다.

게다가 가톨릭 교회 내에서도 시대가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만들었지만 자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일단 내전이 휩쓸고 간 이후 프랑코 정권 내부에서의 가톨릭 인본주의에 기반한 반정권 인사도 많이 배출 되었다. 또 피상적으로나마 현대 스페인 가톨릭 사제들 또한 이 시절의 얘기는 피하거나 아니면 소극적으로나마 잘못을 인정하는 경우가 많다.

프랑코 독재 말년에 이르면 결국 스페인 가톨릭 주요 성직자들까지도 프랑코의 독재에 불만을 드러냈다.# 프랑코가 반공정책을 펴고 가톨릭을 수호했다고 하지만 자유와 인권을 억압한 프랑코의 강압적이고 비상식적인 독재 통치에 스페인 가톨릭 교회조차도 결국 엄청난 염증과 답답함을 느꼈다는 얘기다.

스페인 내전과 연관 되어 스페인 사회 내에서 가톨릭 교회의 입지가 단단히 꼬인 상황이다. 나머지 가톨릭 교회 전반은 2차대전 당시 파시즘에게 대체적으로 무기력하게 협조한 과거를 적극적으로 반성하고, 2차 바티칸 공의회를 통해 근대 세계와의 대립보다 화해, 공존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변했다. 그런데 프랑코 정권이 필요했던 가톨릭 교회는 바로 옛날의 반동적이고, 억압적이었던 그 모습 그대로의 교회였기 때문이다.

영화 등의 매체의 경우, 같은 우파쪽이라도 팔랑헤나 그냥 군인들은 가차없는 인간 말종으로 묘사하는 반면 그나마 성직자들이나 비교적 종교기사 코스프레를 하는 카를로스파는 개념으로 쳐준다.

어찌 되었던 전통적인 신앙의 요새였던 스페인에서 벌어진 근현대사의 비극으로 현대 스페인의 가톨릭 교회의 위치 자체가 단단하게 꼬여버렸고, 이를 벗어나 발전하기 위해서는 가톨릭 교회가 프랑코 정권의 멍에를 어떤 방식으로든 해결해야 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스탈린이 그러했듯이 이 사람도 성인으로 추대하려는 움직임이 스페인 내에서 존재한다. 사유는 빨갱이들로부터 스페인과 가톨릭을 수호했다는 이유. 물론 어디까지나 일부 이단이나 그러하고 로마 교황청 및 가톨릭 주류는 상큼하게 씹는다. 애초에 가톨릭 교회 자체가 2차 바티칸 공의회를 겪으며 자유주의와 어느 정도 관계 회복을 하면서 프랑코 정권과 사이가 급속도로 냉각해졌으며, 정권 말기에는 가톨릭 교회 내의 반체제 인사들도 많이 배출 되었다. 아니, 원론적으로 현대 스페인 가톨릭 교회가 현재 처한 딜레마 자체가 프랑코와의 야합에서 비롯 된 바가 많으며, 스페인 가톨릭 교회도 이 문제를 절실하게 자각하고 있는 만큼 저런 프랑코 정권 옹호 여론은 오히려 교회 측에서 먼저 나서서 헛소리 트롤링 하지 말라고 선을 긋는 경우가 많다. 실재로 프랑코 사후에도 활동을 계속한 마누엘 프라가 같은 프랑코파 정치인들과 피오 모아 같은 학계 내의 수정주의자들은 그래서 스페인 가톨릭 교회와도 상당히 냉담한 관계이다[20].

프랑코 정권을 직접적으로 대놓고 긍정할 정도의 스페인 현지 골수 우익은 전통적 우파적 민족주의적 정체성의 일환으로 가톨릭 정체성을 강조할 뿐이지 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의 바티칸과 교회 자체는 '자유주의와 결탁한 변절자' 비슷한 존재로 보았다.

겨우 40년 전인 70년대 까지만 하더라도 가톨릭 교회 입장에서는 대놓고 나치스 경례를 하며 프랑코와 시시덕거리는 톨레도 총대주교의 사진 같은 역사가 지금도 당장 검색하면 좌르륵 쏟아져 나오는 가능하면 지우고 싶은 깨끗치 못한 역사이기 때문에(...) 서로 냉담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편이다.

7.2 프랑코 통치의 유산

간단히 말하자면 프랑코의 비호 아래 성장한 기득권 세력의 고착화, 그리고 그들의 전횡과 실정과 뿌리깊은 부정부패를 꼽을 수 있다. 이러한 부정적 요소들은 현재 스페인 국민들이 겪고 있는 극심한 경제적 고통의 직접적 요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흔히 우리는 "유럽 나라들은 거의 다 선진국들이니 다들 청렴할 것이다."라는 환상을 갖긴 하지만, 유럽이라고 무조건 다 청렴한 건 절대 아니다.[21] 스페인은 유럽이 아니라 아프리카라서 그런 듯. 우리나라보다 월등하게 청렴한 나라는 스칸디나비아 국가들, 독일, 영국 정도다. 스페인은 국제투명성기구(Transparency International)에서 측정한 청렴지수에서 2015년 기준 58점을 받아 조사대상 168개국 중 36등을 기록하였다. 참고로 대한민국과 체코가 56점으로 바로 다음인 공동 37등이다. 스페인의 부정부패의 특징은 그리스나 이탈리아처럼 다 썩은 건 아니고, 전형적인 중국식 부패구조이다. 쉽게 말해 최상층의 지도자와 하부 실무집단은 상당히 깨끗한 편인데, 문제는 중상층 집단, 특히 지도자의 측근들이 상당히 심하게 썩은 것.

최근 스페인에서 벌어진 큼직큼직한 부정부패 사건들의 대표적인 사례로, 바로 전 국왕의 사위(!)씩이나 되는 사람이 나랏돈을 580만 유로(!!)나 횡령했다가 걸려서 해외로 반(半) 귀양을 간 일이 있다. 또 다른 예로, 스페인 고속철도 노선을 보면 도저히 수익을 낼 수가 없는 외딴 시골 마을이나, 아예 대놓고 허허벌판에 덩그러니 역을 세워놓은 경우가 비일비재한데, 이것 또한 지역 토호들의 욕심과 표심(票心)에 눈이 먼 정치인들, 그리고 이들과 결탁한 기업가들 사이의 정경유착의 고리가 핵심 원인이다. 더 큰 문제는 이런 일들을 한번 두번 겪으면서 잘못이 개선되는 게 아니라, 새 노선을 깔 때마다 유령역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난다는 것이다. 스페인 자국 주요 언론들도 대차게 깔 정도다. 아예 제목이 유령역(...)인 기사 기사2 하루 이용객이 8명(...)에 불과한 시골역까지...(동영상) 스페인어가 가능한 위키러는 참고 바람.

당연하지만 이것들은 글자 그대로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며, 그 밖에도 수많은 비리 사건들이 중앙정부나 지방정부를 막론하고 산재해 있다. 무엇보다도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한' 사법부의 태도 또한 스페인의 부정부패 근절을 가로막는 심각한 문제로 꼽히며, 이것 역시 프랑코식 철권통치의 어두운 유산 중 하나로 지적받는다(관련기사(스페인어)).[22]

그리고 과거사 때문에 스페인에서는 이 비리와 부정부패를 지도하는 계층이 주로 왕족, 지방 옛 귀족 가문들과 결탁 된 금융권, 프랑코 정권의 비호 아래 큰 재벌 등 어디 어디 공작가 하면 대부분 국민들이 딱 알 정도로 밀착되어 있다. 중앙 왕실에서 부터 동네 토호들까지 위아래로 고르게 썩은 물이 흐른다.(...) 때문에 2010년대 재정 긴축의 그림자 아래 사는 현대 스페인인들은 아예 이런 체제를 고착시켜 버린 프랑코 정권과 이를 승계한 현대 부르봉 복고 왕정 자체를 부정적으로 보고 구 공화국 체제로의 복귀를 주장하는, 아예 당장의 헌정 질서 자체를 부정하는 여론이 강하게 나오는 것이다.

같은 발상으로 반대편에서 소련의 지지를 받고 네그린과 결탁해 공화진영에서 트롤링을 일삼은 공산당은 우익에게는 당연히 집중적으로, 좌파 내에서도 극딜 당하며 현대 스페인 공산당은 의례적으로 '그 시절의 잘못 된 선택을 반성한다'라는 식으로 자아비판을 해야 하는 무언의 압력을 받는다.

반면 스페인 고유의 민중적 전통에서 시작하여 민중의 영웅관에 딱 부합한다는 문화적 버프를 잔뜩 받은 CNT나, 양쪽에서 버림 받은 시대의 피해자인 POUM같은 동네는 비교적 전반적인 칭송을 받는 편이고, 적어도 그 순수성은 이념과 무관하게 인정을 받는 편이다. 정작 공화국 정부의 숫적 대다수를 차지하는 사회주의 노동자당(PSOE)은 현대에 들어 너무 기성정당이 되 버려서 과거에는 공산당이나 CNT에게 휘둘렸고, 현대에는 그냥 무능하다고 까인다.

하여튼 저렇게 자국민 수십만을 쳐죽이고, 자국민을 무슨 나치스 치하 독일의 소위 '열등민족' 처럼 취급하고, 국제사회의 천민이 되도록 70년대 까지도 사형질에 정치범 탄압하면서 온갖 발작을 다 했어도 결론적으로 프랑코는 스페인의 좌파 박멸이라는 지상 과제 달성에 철저하게 실패했다. 중국/러시아 국경만 틀어 막으면 섬이나 다름없고, 근대 이전에는 최소한의 중국, 일본과의 관계 이상으로는 외국과의 교류를 거부하며 문화, 사회적 토양 자체가 자국 중심적으로 폐쇄적이었던 한국과 달리, 스페인은 당장 피레네 산맥이라는 넘기는 힘들지만 통제하기는 더 힘든 거대한 자연 국경을 통해 프랑스라는 비교적 개방적이고 자유주의적 전통이 강했던 선진 강대국으로 쉽게 넘어 갈 수 있었고, 배편 하나만 타면 언어도 똑같으며 문화도 동질성이 강하고, 게다가 20세기 초중반 시점에서는 뻬닌술라레스 (Peninsulares)라 부르며 스페인 본토 출신인들을 우대하는 분위기가 강했던 중남미 국가로 얼마든지 튈 수 있었다. 공간적인 문제를 떠나 역사적 관점에서 봐도 스페인의 좌파 혁명가들은 나머지 유럽 대륙과 미주의 동지들과 행보와 투쟁을 많은 부분에서 공유하면서 장시간에 걸쳐 유기적으로 형성한 국제 좌파 네트워크의 당당한 일부이기도 했다. 프랑코 체제 아래서 스페인 좌파는 자국 내에서는 뿌리가 뽑히거나 지하로 들어가야했지만, 전 세계에서 수 만명의 반파시스트 투사들이 국제여단으로 참전했던 것 부터 시작하여 공식적인 정부 차원의 정책이 아니라 민간 사회 차원에서는 2차대전 이후 유럽에서 스페인의 반체제 인사들은 의탁할 친구와 동지들이 유럽 각지에 많았으며, 심지어 샤를 드골 같은 개인적으로는 차라리 프랑코에 더 가까운 우파 민족주의 지도자들도 전후 여론과 스페인 공화파 망명객들이 프랑스와 이탈리아 레지스탕스에 공헌했던 빚을 고려하여 스페인 좌파 반체제 인사들이 자국에 정착하는 걸 허용할 뿐만 아니라 피레네 산맥 넘어 지하 활동을 하는 것도 묵인해줬다.

이런 대외적인 여건 뿐만 아니라 아나키스트 전국노동연맹, 사회주의 노동자당 산하 UGT[23], 공산당 산하 CCOO[24] 같은 거대 노조들은 스페인 내전 이전 부터 비단 정치판 뿐만 아니라 사회적, 문화적 차원에서도 깊은 영향력을 발휘하며, 잔인무도하기 그지 없었던 프랑코 치하에서도 가해진 탄압도 이들의 활동을 지하로 몰아 넣을 수는 있어도, 이미 스페인인, 비스페인인 각계의 문화, 예술계 인사들의 활동을 필두로 20세기 민중 운동사에서 신화의 영역으로 올라서 수 많은 활동가들과 추종자들을 재생산할 역량을 얻은 좌익 세력을 근본적으로 박멸한다는 건 불가능했다. 당장 폴 프레스턴, 휴 토머스 등을 비롯한 현대에 스페인 근현대사의 거장으로 추앙 받는 역사학자들 중 상당수는 프랑코 정권이 아직 현재진행형이었을 때 부터 외국인 신분을 이용하여 반체제인사들을 보호했고, 1964년 스튜어트 크리스티라고 하는 스코틀랜드의 아나키스트 청년이 프랑코를 암살하려고 마드리드 백주 대낮에 폭발물을 대거 소지한 체로 체포 당했을 때도 프랑코 정권은 전형적인 자국민 앞에서는 밑도 끝도 없이 당당하지만 진짜배기 강대국 앞에서는 한없이 비굴해 지는 모습을 그대로 보이며 3년 동안 카라방첼 감옥 특실에 구금하다가[25] 버트런드 러셀, 장 폴 사르트르 같은 전 세계 지식인들의 압력 아래 석방하는 나약한 모습을 보일 수 밖에 없었다.

원래 자체적으로 막강한 조직력과 선동능력을 가지고 있었고, 지지 기반이 뿌리 깊을 뿐만 아니라 국제적이기도 했던 스페인 좌익들이 자국 내 활동 터전은 잃었어도 2차대전 이후 유럽과 미주 전역에서 성장한 시민 사회, 대중 매체와 적극 연계하기 시작하면서 프랑코 정권은 이미 더 조질 것도 없는 자국 내의 지하 세력 빼고는 아예 반체제 세력을 터치도 못하는 팔다리 묶인 입장에 빠져버린 것이다. 정권의 지상과제이자 존재 이유를 기독교 신앙에 충실하며, 분열을 용납하지 않는 통일 스페인 민족 국가의 반좌빨 레콩키스타라고 규정했던 것 무색하게 60년대, 70년대 들어서 공산당, 사회주의자, 아나키스트 조직들은 숨겨 왔던 지하 조직과 함께 정권에게 이빨을 들이대기 시작했고, 프랑코 사후에는 몇년 지나지도 않아 다시 당당한 사회의 주류 여론이자 거대 이해 집단으로 재부상하는데 완벽하게 성공한다[26]. 그리고 이들 좌파 단체, 정당들이 재부상을 넘어 30년 넘은 세월이 흘러 기성 수구 세력으로 정착한 2010년대 현재 스페인은 헌정 질서 자체를 공화정으로 복고 시킨다 만다로 우익 세력과 치열한 줄당기기를 하고 있으며, 프랑코가 그렇게 지우려고 했던 제2공화국의 삼색기는 스페인 어디를 가든 흔히 보이는 시위판에서 어디든지 쉽게 발견할 수 있다. 프랑코가 엄청난 인권 탄압과 국제적 멸시를 감수하면서도 추구했던 강압적인 국론 통합이란 지상과제마저도 이렇게 형편 없이 실패한 판국에 프랑코 정권의 한계란 너무나 명확하다.

50년 뒤 루마니아의 차우셰스쿠가 한 짓을 반대편인 우파에서 선례를 남긴 것이다. 그리고 2차대전의 참화를 피한 거나 경제적 발전은 프랑코의 개인적 유능함보다 당시 국제적 여건의 도움이 더 컸다. 막말로 2차대전 이후 70년대 까지 약 30년의 기간은 서방이든, 공산주의 동구권이든, 이제 막 생긴 제 3세계든 세계 경제 자체가 급성장하던 시절이었다. 여기서 다른 유럽 국가들은 마샬 플랜의 원조를 받아 가며 1950년대 중반까지 전쟁 전 경제수준을 대부분 회복한다. 웃긴 건 한국도 전쟁 전 경제수준을 1950년대 중반 경에는 회복했다는 것이다. 물론 한국은 전쟁 전에도 가진 게 워낙 없어서 사실 한국전쟁 자체가 경제적으로 입힌 피해는 크지 않았다.

1950년대 후반 쯤 되면 전쟁 전에도 상상치 못한 번영을 누리고 있었던 반면 스페인의 경우 프랑코와 스페인 내전의 낙인으로 인하여 왕따 신세를 면하지 못한다. 그러다가 60년대까지 미국의 저널리스트 존 군터를 비롯한 동시대 관찰자들에게 '스페인은 지정학적으로만 유럽이지 차라리 아프리카에 속한다고 보는 게 맞다' 따위 소리나 듣고 있었다.

그나마 본격적으로 서방 국가들의 경제성장이 시작되던 1950년대 후반에 타이밍을 잘 잡아 나라문을 연데다 그 이전에도 최소한의 경제 기반은 제대로 갖춰놓은 덕택에 최악은 피한다.

살라자르와 이 점에서 차이가 크다. 살라자르는 프랑코보다 온건했지만 산업화를 싫어해서[27] 식민지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제조업 등 전반적인 국가 공업 육성과 인재 양성에는 무관심했다.

어찌 되었든 현 국왕 후안 카를로스 1세에게는 정치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아버지 같았던 인물이었는지라 프랑코의 외동딸 카르멘은 1975년에 공작(1a Duquesa de Franco) 작위를 받았다.

스페인의 프랑코 추종자들은 이들은 진정한 의미에서 2차대전 이후로 명맥이 끊기질 않고 지금까지 내려오는 최후의 순수한(?) 파시스트들이라 할 수 있다. 프랑코 정권이 70년대 까지 워낙 오래 버티다 보니 다른 서방 국가에서는 엄두도 못낼 저런 공개적인 파시즘 옹호 세력이 많은 편이다. 프랑코 정권이 학술적 의미로 순수한 파시즘이 맞냐 아니냐는 정권 내부의 행정적 차원에서의 학술적인 문제지, 공교육 과정, 대민 선동 등을 통해 대중과 직접 만나는 차원에서의 프랑코 정권은 유대인들과 볼셰비키들의 사주로 스페인에 침투한 비국민 빨갱이들과 자유주의자들, 지역 분열주의자들에게 대항하여 단일 가톨릭 스페인 민족을 수호하는 성전이란 바람직하게 일관적인 전투적, 혁명적, 정화적 파시스트 운동으로 자신을 포장했다.

7.3 프랑코 묘역

전몰자의 계곡 성 십자가 대성당(Valle de los Caídos).
전몰자의 계곡 성 십자가 대성당 내부에 있는 프랑코의 무덤.

프랑코 묘역을 포함해 스페인 내전 기간 동안 사망한 전몰자 4만 여 명의 무덤이 위치한 전몰자의 계곡은 공화군 포로 1,200명의 강제노역으로 만들어졌다. 프랑코 비판자들은 그의 묘역을 역사교육센터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나치의 만행을 반성하는 생생한 교육현장으로 변한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모델로 삼고 있다. 이에 대해 프랑코 추종자들은 오히려 그의 묘역을 성역화해야 한다고 맞서고 있다.

완공 후 계산한 총 길이가 교황청에서 '이보다 더 크게 지을 수 없음'이라고 못 박은 성 베드로 대성당보다 조금 더 길다. 그래서 성 베드로 대성당보다 1미터 짧아지는 지점에 격벽을 짓고 '여기서부터가 성당입니다'라는 안내문을 붙였다고 한다. 바티칸은 무서운가 보지?

프랑코는 말년에 결장암, 동맥경화 등 합병증에 시달렸고 1975년 11월 3일 위수술을 받고 혼수상태로 17일을 버티다가 19일에 사망하고 20일날 그의 죽음이 공표되었다. 그 또한 포르투갈안토니우 드 올리베이라 살라자르와 마찬가지로 측근들이 마치 그가 살아있는 것처럼 행동했다. 그 결과 이미 죽은 사람이 스페인령 사하라를 모로코에 양도하는 협정에 서명하게 되었다.

그의 기일에 관해서 다음과 같은 기묘한 비화가 있다.

36.07.18 - 스페인 내전의 발발일
39.04.01 - 스페인 내전의 종전일

이 두 날짜를 각각 더하면

75.11.19 - 즉, 그가 사망한 날짜가 된다.

8 현재 스페인 사회의 평가

전 세계의 대부분의 독재자들이 그렇듯이[28], 프랑코도 극렬한 지지자들이 아직 남아 있다. 프랑코 치하에서 떡고물을 먹던 인간들이 대부분 스페인 사회의 기득권으로 남아 있기 때문에, 프랑코 통치의 여러 악행이 속속들이 드러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스페인 사회에서 프랑코 시대를 전면적으로 청산하는 일은 근시일 내에서는 불가능하다. 프랑코 이후에 스페인에서 좌파가 여러 번 집권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랑코 시대를 직접적으로 청산하지 못하는 이유는 사회의 뼈대가 모두 프랑코 시대에 만들어진 기득권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애초에 좌파 정당들이 합법적으로 집권 할 수 있는 민주체제를 열며 우리나라의 '87년 체제' 이상의 비중을 지니는 몬클로아 협약 또한 분명히 프랑코 체제에 기대며 성장한 기득권 세력의 유지를 체제 전환의 대가로 보장했었다. 또한 그시대가 너무 참혹했기 때문에 그 시대를 살아온 많은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다시 파해치는걸 꺼려한다[29]. 물론 민간, 학술 단체와 구 공화파 계열 정치 세력, 외부 국제 기관의 적극적인 활동을 통해 프랑코 사후 체제를 지배했던 소위 '망각의 협약'의 그늘은 서서히 물러나고 있지만, 전면적으로 평가를 내리고 과거사 청산을 하기에 프랑코 시절은 아직도 너무 가깝고, 그 영향력이 현재진행형이다. 포데모스의 부상 뒤에 있는 인디그나도 (Indignado) 운동으로 대표 되는, 몬클로아 협약과 전혀 상관 없는 현대 스페인의 신세대 정치 세력의 미래 행보에 따라서 프랑코 정권에 대한 역사적 인식과 평가도 점차적으로는 크게 바뀔 수도 있지만, 어쨋든 당장의 헌정 질서의 직계 선대 정부라는 점만으로도 현재로서는 프랑코 정권에 대한 논의는 그 자체로서 정치성 만땅 일 수 밖에 없는 주제이다.

예를 들어 1980~90년대 IOC위원장으로 장기간 군림했고, 한국에서도 1988년 서울올림픽 당시 위원장으로서 잘 알려진 후안 안토니오 사마란치 (1920~2010) 는 프랑코 치하에서 온갖 특혜를 받고 출세한 인사였고, 파시스트 군복을 입고 파시스트 경례하는 사진이 수없이 남아 있음에도 한국에서는 민주주의와 국제평화를 위한 사도쯤으로 알려지곤 했다.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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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대중문화

스페인 내전과 프랑코 집권기는 멕시코 영화감독 기예르모 델 토로의 두 장편영화, '악마의 등뼈'와 '판의 미로'의 배경이 되기도 했다. 빅토르 에리세벌집의 정령남쪽, 카를로스 사우라까마귀 기르기도 이 시대를 배경으로 다루고 있는 영화들.

스페인어권에서는 이시기를 다룬 영화들이 상당히 많지만 한국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1. 너무 긴 이름이라 발음 편의를 위해 강세 음절을 굵게 표시. 이 이름을 짧게 줄이면 프란시스코 프랑코 이 바아몬데(Francisco Franco y Bahamonde)가 된다. 스페인 사람들의 정식 이름에는 대부분 이런 식으로 부계/모계 성이 몇 대씩 어마어마하게 따라붙는다. 정확하게 말하면 Teódulo까지가 이름/세례명이고, 그 뒤가 전부 성이며 그 중에서도 Franco와 Salgado는 부계쪽, Bahamonde와 Pardo de Andrade는 모계쪽 성이다. 참고로 프랑코의 모계쪽 성은 대체로 갈리시아/포르투갈 계통의 가문명이다.
  2. 프랑코 유대인 드립은 스페인 내전 시기까지 궤를 올라가는데 안달루시아 지방엔 프랑코라는 성을 쓰는 유대인이 많았기 때문에 프랑코도 유대인이 아니겠냐는 인민전선의 황색선전이 시초다. 이 떡밥을 주워들은 히틀러도 자기 말 잘 안듣는 프랑코를 유대인이 아닌가?하고 의심한 바가 있다. 하지만 프랑코는 족보상으로 유대인일 가능성이 전혀 없다. 스페인은 종교개혁 이후 실시된 반종교개혁으로 종교재판(Inquisition)이 19세기까지 수백년간 계속되어 신교도뿐만 아니라 겉으로만 개종하거나 지하로 숨은 이슬람교도나 유대교도도 철저히 박멸되었는데, 스페인 귀족인 그가 유대인이라는 것은 절대 가능하지가 않은 이야기.
  3. 당시 유럽에서 가장 젊은 장성이기도 했다.
  4. 위의 명단은 당시 스페인 국적자도 아니고, 그냥 스페인에 살고 있으며 유대인으로 확인 된 사람들만 6,000명이라 한 것이다. 주로 대부분 다른 유럽에서 도망치는 도중 스페인에 체류 중이었던 유대인들이었다
  5. 그리고 현대 홀로코스트 학계는 비단 유대인, 폴란드인, 소련인, 집시 같은 인종적 분류 뿐만 아니라 프리메이슨, 여호와의 증인을 포함한 정치범들도 당연히 홀로코스트의 희생자에 포함 시킨다.
  6. 대전 후에는 일찍부터 나치에게 점령 당해 국가가 유린 당한 폴란드인들이 비슷하게 살아 남은 자들은 수용소 고참이 되어 그 중 지조와 양심을 지킨 사람들은 수용소에서 적극적으로 다른 수감자를 도우며 수용소 내 저항에 핵심적인 역할을 종종 맡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폴란드는 전쟁 이전에는 군사정권 아래 반공 우익 정권이었기 때문에 이 폴란드인 수감자 중에는 폴란드 국내군을 비롯한 이데올로기적으로 따지면 스페인 공화파와 반대인 우익 가톨릭 민족주의 성향의 인사들이 많았다. 폴 프레스턴이나 스타니스와프 도보시에비츠 같은 스페인과 폴란드의 홀로코스트 전문 역사학자들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이 와중 실재로 마트하우젠, 부헨발트, 다카우 같은 곳에서는 스페인 공산당원/아나키스트와 폴란드 가톨릭 사제의 협력 같은 좌우합작 같은 경우도 종종 있었던 모양이다(...).
  7. 당연히 이런 신념적 정치범들이 수용소 내 저항 조직을 만드는 걸 막기 위해 일반적으로 카포는 민간 사회에서도 삐뚤어진 도덕성을 가지고 있었던 그냥 범죄자 중심으로 이루어졌지만, 특히 아직 전시 체제가 본격화 되지 않고 홀로코스트가 정치적 박해 수준으로 머물렀던 30년대 말을 비롯하여 이따금 대규모 소탕 작전 이후 한번에 대규모로 독일이나 각 점령지의 정치범들이 대거 입소하여 이들이 카포 층을 이루었던 경우가 있었다. 부헨발트의 경우도 그렇고 수용소 문학에서 가끔 가다 나오는 양심을 지키고, 엄청난 위험을 간수하며 중간관리자로서 다른 수감자들을 더 박해한게 아니라 오히려 감싸주고 지키려고 했던 예외적인 카포들은 다수가 이런 경우이다
  8. Francisco Boix, 1920~1951 이름에서 보이듯이 카탈루냐인이었다
  9. 프랑코는 사관학교 시절 페탱 원수의 제자였고, 페탱은 프랑코를 "유럽에서 가장 날카로운 검"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리고 2차 세계대전 무렵 페탱은 그런 프랑코와의 관계를 고려한 프랑스 정부에 의해 스페인 대사로 파견되어 있었다.
  10. 그리고 프랑코의 예견은 사실이 되었다. 페탱은 제3공화국 정부를 대신해 항복 협정에 조인했을뿐더러, 파시스트 괴뢰정부인 비시 정부의 수반으로서 대독협력을 총지휘한 뒤 전후에 반역자 재판으로 제거당한다.
  11. Wayne Bowen, Spain During World War 2, 2006년 작 출처
  12. 인구비례로 따지면 정말로 독보적이다. 예를 들어 총인구 3억의 소련에서 대숙청 희생자가 60만명(독소전 발발후 후송이 어려워 처형되거나 수용소에서 사망한 사람까지 넉넉잡아서 100만 정도) 정도인데, 2500만에서 10-30만을 처형했으니, 이사람을 스탈린-히틀러의 반열에 둬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 이승만의 경우는 당시 3천만(남한 2천만, 북한 1천만)의 한국인구에서 보도연맹 사건으로 최소 10만, 국민방위군 사건으로(이건 사실 학살이라기보다는 관리부실이지만...) 9-10만을 굶겨 죽였으니 뉴라이트 쪽에서야 펄쩍 뛰겠지만, 이분도 전혀 이 반열에 오르는데 손색이 없다.
  13. 엄밀하게 사실 관계 전후로만 따지면 사실 2차대전 끝날 무렵에는 스탈린의 소련과 공산당, 사회당이 주축인 자유 프랑스 측, 스페인 내전 때 부터 스페인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으며, 합법적인 신정부로 재탄생하고 있었던 이탈리아 레지스탕스 측을 비롯하여 프랑코 정권을 실질적인 추축국으로 분류하여 조지려는 세력은 연합군 내에 충만했다. 그나마 영국과 미국 측에서 적극적으로 이들을 뜯어 말렸으며, 뜯어 말리면서 직접 조지진 않아도 국제 왕따로 만들어서 벌은 주겠다고 설득을 해서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경제제재 정도가 아니라 2차대전의 참화 자체가 스페인에 직접 쏟아져도 신기하지 않을 만큼 전후 세계 여론은 프랑코 체제를 차갑게 봤다.
  14. 사실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른 국가라면 기본적인 역량은 있기 마련이기에 전쟁으로 인한 피해는 비교적 쉽게 복구가 가능하다. 전쟁 전부터 이미 굴지의 공업국이었던 독일은 2차대전에 탈탈 털렸지만 전후 얼마 지나지 않아 라인강의 기적으로 불리는 고도의 경제 성장을 보여주었고, 일본 같은 경우도 한국 전쟁으로 인한 특수를 감안하더라도 꽤 단시간에 전쟁 전 수준을 회복했다.
  15. 스튜어트 왕가의 제임스 2세의 서자인 베릭 공작 제임스 피츠제임스 장군(1670-1734)의 후손으로 원래 피츠제임스는 영국인이었지민명예혁명 후 프랑스군에 가담하여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에 30세로 참가하고 37세에 알만사 전투에서 펠리페 5세의 왕위를 합스부르크의 카를 6세로부터 지켜내 원수가 된다. 이로 인해 프랑스 귀족작위(피츠제임스 공작)와 스페인 귀족 작위(영국에서 쓰던 것 그대로 베릭 공작)를 가지게 되는데 프랑스계는 1967년 후사 없이 단절되고 이 사람이 후손인데, 찾아보면 알겠지만 진짜 스캔들이 많은 인간이다.
  16. 예를 들어 프랑코 정권 당시에는 경기나 회사 상황이 나빠져도 노동자를 함부로 못 자르게 하는 법률을 제정했는데(실업자가 늘어나면 정권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이 늘어나니까), 이게 1973년 오일 쇼크로 전후 서구의 호황이 끝난 상황에서 민주화된 이후에는, 경제 불황 속에서도 기존의 노동자들은 철밥통으로 남아 있는 탓에 신규 고용은 상당수 비정규직으로 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결과 스페인은 실업률이 20%를 넘나드는 막장 상태가 되었다.(유로존 위기로 2013년 27%라는 신기록(...)을 달성해서 그렇지, 스페인은 1970년대 이후 실업률이 선진국 중에서는 최고 수준으로, 2007년 버블의 정점에서도 8%에 달했다.)
  17. 당시만 하더라도 카탈루냐 민족주의는 소수 엘리트 지식인들과 이들을 후원하는 자유주의 자본가들의 사상이었지, 카탈로니아 현지 노동 인민 다수의 정치적 성향은 확고한 전국 노동연맹이 주도하는 아나키즘이었다.
  18. 한국과 비교해보면 북한의 경우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 기업체들이 지은 공장들이 남아있던 탓에 어느 정도 경제적 재건이 가능했지만, 한국에는 공장은 고사하고 한국전쟁 이후 미국등에서 원조를 해줘 겨우 살아가는 수준이었다. 그 원조 역시 5.16 군사정변이 일어나고 나자 미국이 중단해버리고 그 여파로 내다팔 수 있는 것은 다 판다고 할 정도로 극단적인 수출주도형 경제로 변화했다. 독일의 광부, 간호사 파견이나 중동건설붐 같은 외향적 경제활동이 아니고서는 절박한 상황이었던게 한국의 초창기 경제수준이었다.
  19. 나에게 바친 충성을 국왕에 바치라는 것이 군부에 대한 프랑코의 유언이었다.
  20. 우리나라로 치면 양식 있는 좌파들은 종북주의자들이 설치면 오히려 먼저 눈살 찌푸리고 선을 그으려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라 할 수 있다
  21. 이탈리아의 예만 보더라도 G7회원국이자 선진국임에도 부패지수가 꽤 높은편에 속한다.
  22. 링크 기사에도 언급되는 내용이고, 너무나도 당연한 얘기지만 이런 모습을 반복해서 보여주는 정치권과 권력기구들에 대한 국민들의 불신은 심각한 수준이다.
  23. Union General de Trabajadores, 노동자 총연맹
  24. Comisiones Obreras, 노동자 위원회
  25. 이 사람은 카라방첼 감옥 수감 중에서 우리나라로 치면 검정고시 비슷한 A-Levels를 취득하기도 하며, 본인 인터뷰에서 자신은 영국인이라 감옥에서도 다른 스페인인 수감자들이 겪은 고통에 비하면 부끄럽다고 할 만큼 당국자들이 자신을 터치하지 못했다고 했다. 석방 이후 이 사람은 영국으로 귀환, CNT 계열 스페인 반체제 인사들 비호 활동에 주력하다가 현대에도 명망 있는 아나키스트 운동가로 살고 있다
  26. 유튜브에도 동영상이 올라와 있는 프랑코가 죽은지 고작 2년 뒤 바르셀로나 몬주익 언덕에서 열린 CNT 총 대회만 해도 30만명의 군중이 집결하며 이들이 40년동안 활동가 수 만명을 잃으며 철저하게 탄압 받았던 지하 조직이 맞나 싶을 정도로 동원력과 조직력을 보여주었다. 정권 말기로 가면 갈 수록 체제 유지와 반대파 탄압 능력 자체가 서슬퍼렀던 40년대와 달리 녹이 슬어버렸던 프랑코 정권의 말로를 그대로 보여주는 셈이다
  27. 산업화로 나라가 발전해서 국민들이 의식을 트게 되면 정권이 망할 수 있다. 이는 우리나라의 사례에서도 나타나며싱가포르:?? 아프리카 등지의 독재자들도 같은 이유로 나라를 적절히 가난하게 유지하려는 모습을 보였다.
  28. 예외적이라면 히틀러 정도? 히틀러는 도저히 실드를 칠 수 없는 극악무도한 자였기 때문에 마지막 남은 한줌의 골수 지지자들도 자살, 처형, 전사로 죽고 정말 무의미한 수준의 몇몇 송사리만 남고 극소수의 네오나치를 제외하면 악당으로 규정되어 있다. 사담 후세인이나 카다피는 그래도 자기 고향에선 지지받는데 히틀러는.....
  29. 물론 역사적 기억의 회복 위원회 (Asociación para la Recuperación de la Memoria Histórica)의 적극적인 활동과 발전에서 보이듯 오히려 적극적으로 과거사 규명에 발벗고 나서는 사람들도 많다. 하지만 우리나라를 보면 대충 생각이 나듯이 현 세대에서 저런 과거사 관련 정책은 누가 어떻게 하던 이데올로기적, 정치적 문제로 비화 될 수 밖에 없어서...
  30. 전두환의 회고에 의하면 사마란치는 올림픽의 성공적인 개최를 위해서 일해거사가 단임 약속을 깨고 계속 맡아주기를 바랬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