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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년에서 1912년 사이에 벌어진 노르웨이의 로알 아문센과 영국의 로버트 스콧 해군대령의 남극 극점 정복 경쟁을 살펴보는 문서.
목차
1 개요
최초 남극점 등반을 두고 벌인 두 남자의 싸움.
세계 역사상 여러 가지 인상적인 탐험이 있지만, 하나의 목표를 놓고 두 탐험대가 동시에 경주를 하듯이 경쟁한 일은 보기 드물다. 그리고 두 탐험가는 성격이 극단적으로 달랐다. 무서울 정도로 계획적이고 철저한 아문센과, 열정과 용기는 있었지만 무모한 스콧.
이 레이스의 결말에는 승자에게는 영광, 패자에게는 죽음이 기다리고 있었다. 어린이용 책에서는 그냥 "아문센이 이겼어요 끝."이라고 나오고 스콧 일행의 죽음은 생략하기 때문에 나중에 커서 스콧의 최후를 알고 쇼크를 받는 경우도 있었다(…). 그나마 어린이용 책 중에는 Why 시리즈의 《남극과 북극》 편 [1]이나 《탐험대장 떡철이》 에서 스콧의 죽음을 간략하게 다뤘다.[2] Why에서는 스콧 탐험대가 겪은 일을 모두 적었다간 더는 아동용 만화가 아닌지라(...) 그냥 "썰매개 안 들고 기계로 들고 갔다가 싹 다 얼어붙어서" 죽었다고 써 놨다. 떡철이에서는 얼어죽기 직전 스콧이 자신의 묘비를 상상하면서 울부짖는 컷으로 묘사했다. 그 외에도 《노빈손의 남극 어드벤처》에서는 스콧 일행의 참담한 현실과 그나마의 학술적 성과가 나름 묘사되긴 했지만 스콧의 각종 오판들은 역시나 생략.[3] 80년대에 나온 책이나 만화에서는 제법 상세하게 묘사된 적도 있었다.
2 탐험 준비
2.1 탐험 동인
로알 아문센은 본래 북극을 목표로 삼았다. 아문센은 일단 북서항로를 개척한 영광을 얻었지만, 더욱 위대한 이름을 얻고 싶었다. 북극은 일단 노르웨이에서 지리적으로 가까웠으며, 고국의 선배 탐험가 난센이 실패한 곳이었기 때문에 난센의 '프람' 호를 물려받은 아문센은 프람 호로 북극을 정복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미국인 탐험가 로버트 피어리가 세계 최초로 북극점에 도달했다...고 주장하여[4] 이에 아문센은 미개척지인 남극 정복으로 목표를 수정했다.
영국 해군의 로버트 스콧은 이미 1901년에서 1904년에 걸쳐서 남극 탐험대를 지휘해 남극에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1차 탐험대의 대원이던 어니스트 섀클턴이 1908년 12월에 남극 100마일 전방까지 갔다가 돌아오자, 스콧은 남극을 정복한 영광을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조바심이 났다.[5] 게다가 1910년 3월 3일, 미국의 전국 지리학회(내셔널 지오그래픽을 발행하는 곳)는 1911년 12월부터 남극 탐험을 시작하여 1년 뒤에 남극을 정복하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내놓았다. 탐험대장은 1909년 4월 북극을 정복한 피어리가 될 예정이었다. 미국 탐험대는 흐지부지되고 말았지만, 이 도전장을 받은 영국 탐험대는 조바심을 내며 탐험 준비를 서둘렀다.
2.2 후원 단계
아문센은 과학 조사를 위해서 북극 탐사를 떠난다고 공식 발표하여 진짜 목표를 숨기는 연막 작전을 펼쳤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는데, 경쟁자가 생겼다는 것을 알면 자극받은 영국인들이 스콧의 진영에 후원을 쏟아부을 것이 분명했으며, 막 독립한 신생국 노르웨이 정부가 영국과 경쟁하는 것을 두려워해서 아문센을 후원하는 것에서 물러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이 작전은 성공하여 아문센은 무사히 노르웨이 왕실을 속여의 후원을 받아 수월하게 탐험을 준비할 수 있었다.
스콧은 당시 영국이 유럽 전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기 때문에, 정부 예산을 쉽게 따내지 못했다. 그래서 여러 회사의 이사회장과 강연장을 돌아다니며 기금을 모으고 다녔으며, 『타임즈』에 영국 탐험대의 찬란한 성과가 답보하고 있어 안타깝다는 기사와 스콧의 호소문을 실었다. 결국 영국 정부는 기금을 내놓았고, 회사들도 동참하였다. 특히 본사 상표가 지명도 높은 탐험사업으로 유명해지길 바라는 식품 회사들이 많이 참여했다. 덕분에 아문센보다 자금 여유가 있었다.
2.3 남극 대륙 도착
1910년 6월 15일 세돛대 포경선을 개조한 '테라 노바(Terra Nova)' 호가 사우스웨일즈의 카디프에서 출항했다. 스콧은 모금활동을 하다가 남아프리카 케이프타운에서 테라 노바 호에 합류했고, 인도양을 가로질러 오스트레일리아로 향했다.[6]
아문센은 8월 9일 프람 호를 타고 노르웨이를 떠났다. 원래 혼 곶(Cape Horn)으로 향하다가 아메리카 쪽으로 올라가 북극 지방으로 갈 예정이었던 프람 호는 9월 6일 마데이라 제도에 도착하여 식수와 보급품을 챙긴 다음 선원들에게 북극으로 간다는 건 전부 다 페이크다 이 병신들아였고 진짜 목적은 영국의 스콧 탐험대를 앞질러서 남극 정복을 이루는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근데 가는 방향이 그런데 아무도 의심 안했나? 아문센은 형 레오에게 10월에 이 사실을 전보로 알리도록 부탁해두었으며, 이제 노르웨이 탐험대의 목표 변경이 세계에 알려졌다. 희대의 레이스가 막을 연 것이다.
10월 12일 저녁, 스콧은 오스트레일리아 멜버른 항에 도착해 아문센이 남극으로 가고 있다는 전보를 받았고, 스콧을 지원한 클레멘츠 마컴(Clements Markham) 경은 아문센을 가리켜 '지저분한 기만술을 쓴 불량배'라고 비난했다.
스콧은 1911년 1월 4일 년 로즈 섬에 상륙했고, 아문센은 1월 14일 그레이트 아이스 보빙 지역에 상륙한뒤 배의 이름을 따서 그 이름을 '프람하임'이라 지었다.
2.4 준비작업
3개월이 남은 남극의 여름 동안 두 팀은 준비작업에 들어갔다. 식량을 쌓아놓은 보급기지들을 미리 만드는 것이다. 영국 탐험대는 남위 79도 30분까지 나아가 엄청난 양의 식량을 쌓아놓고 '1톤 보급소'라는 이름을 붙였다. 노르웨이 탐험대는 남위 80도, 81도, 82도의 여러 군데에 보급소를 설치하였다. 남극 480마일 반경 이내에 총 1.5톤의 보급소를 설치한 것이다. 또한 펭귄과 바다표범을 사냥하여 기지의 식량을 쌓아두었다.
두 베이스 캠프는 고작 400마일밖에 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가끔 두 탐험대는 서로 마주치기도 했는데, 의외로 큰 갈등은 없었고 나름대로 우호적인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노르웨이인들은 영국인들을 다정하게 대해주었고, 영국인들은 노르웨이인의 강인함과 훌륭한 장비에 놀라워했다. 또한 서로에게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신경전도 없지는 않았는데 영국팀은 하역 실수로 바다에 빠져 버린 설상차가 무사히 내렸다고 말하는 등 블러핑를 쳤다. 스콧은 어느 날 갑자기 침낭에서 벌떡 일어나서, 아문센은 영국 영토에 침범한 것이므로 붙잡아서 배를 태워 귀국시킬 수 있었는데 기회를 놓쳤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스콧은 그레이트 아이스 보빙 지역은 자신과 섀클턴이 직접 탐사한 곳이므로 대영제국의 일부라고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영국인 입장에서의 일방적인 주장이었다.[7]
1911년 4월 21일, 남극 대륙에서 해가 사라지는[8] 긴 겨울밤이 찾아왔고, 두 팀은 베이스 캠프에서 겨울을 났고 4달이 지난 8월 24일이 돼서야 해가 다시 떠올랐다. 9월 8일, 초조함을 견디지 못한 아문센은 한 차례 프람하임을 떠나 남극으로 향했지만 너무 이른 출발 때문에 추운 날씨를 견디지 못하고 참담한 실패를 맛보고 돌아와야 했다. 아문센은 이 사건 때문에 요한센과 갈등을 겪었고, 요한센을 추방하는 극단적인 조치를 취하기도 했다. 그러나 아문센은 이 실패를 잊지 않고 왜 실패했는지 그 이유를 끈질기게 생각하고 있었다. 단순히 조급증 때문 이었다는 결론은 쉽게 내릴수 없었겠지 자존심 때문에
3 탐험 일지
내셔널 지오그래픽 홈페이지에서 두 팀의 경로를 볼 수 있다.#
3.1 10월 : 출발
아문센은 10월 20일 다섯 명의 탐험대와 함께 남극점으로 출발했다. 협곡을 지날 때 어려움이 있기는 했으나 순조롭게 진행하였고, 10월 24일에는 남위 80도 보급소에 도착했다.
스콧은 11월 1일에 출발했다. 출발 때부터 설상차가 말썽을 일으키다가 5일 뒤에는 완전히 멈춰버려서 포기해야 했다. 아문센은 문제없이 하루 20마일씩 전진하였으나, 스콧은 일진이 좋은 날에도 10마일을 채 가지 못했다.
3.2 11월 : 마지막 보급
11월 7일, 아문센은 남위 82도에 준비해둔 최후의 보급소에 도착했다. 최후 보급소에서 가져온 식량은 100일치로, 1912년 2월 6일까지도 버틸 수 있는 양이었다. 아문센 일행은 액슬하이버그(Axel Heiberg) 빙하의 얼음봉우리를 넘어 남극 고원에 이르기까지 1톤의 보급품을 끌고 갔다.
비어드모어 빙하의 기슭에서 스콧 일행의 로런스 오츠(Lawrence E. G. Oates) 육군 기병대위가 마지막 조랑말을 잡았다. 이제부터 스콧 일행은 약 700파운드(약 318㎏)의 짐이 실린 썰매를 사람의 힘으로 끌고 가야 했고, 남극까지 갔다가 기지로 돌아가는 왕복 거리는 1000마일이었다. 참고로 어니스트 섀클턴은 거의 이 정도 시점에서 탐험을 포기했다.
3.3 12월 : 아문센 남극점 도착
12월 8일, 아문센은 어니스트 섀클턴이 기록한, 인류가 도달한 최남단 지역인 88도 23분을 지나갔다. 남극까지는 100마일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개들은 굶주림과 피로에 시달렸고, 팀원들의 얼굴에는 부스럼과 동상 자국이 있었다. 남극에 가까이 갈수록 노르웨이 탐험대는 혹시나 스콧이 먼저 남극에 도착하지 않았을지 걱정하였다.
비욜란은 12월 14일에 자신의 일기에 "우리가 거기서 영국 국기를 보는 것이 아닐까? 신이시여, 우리를 보호하소서. 난 그걸 믿고 싶지 않다."라고 적었다.
1911년 12월 14일 오후 3시, 아문센 일행은 남위 90도 남극점에 도착했다. 아문센 탐험대의 대원들은 남극점 도달 직전에 아문센에게 "개들은 누가 앞에 가는 걸 좋아합니다."라고 우기면서 선두에 세웠다. 그래서 아문센은 문자 그대로 인류 최초로 남극점에 도달한 사람이 되었다.
그곳에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사람이 있었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들은 인류 최초로 남극점에 도착한 것이다.
아문센 일행은 노르웨이의 국기와 프람 호의 깃발을 남극점에 꽂았다. 좌측부터 로알 아문센, 헬메르 한센(Helmer Hanssen), 스베르 하셀(Sverre Hassel), 오스카 위스팅(Oscar Wisting).
그리고 4일 동안 남극점에 머물면서 지자기 측정, 인증샷 찍기(…)[9] 등의 작업을 하고, 행여 스콧 일행이 도착했을 때 그들이 물자 부족에 시달리지 않을까 해서 약간의 식료품과 순록 가죽으로 만든 털옷을 남겨두었다.[10] 12월 18일 온 길을 다시 돌아 프람하임으로 돌아가는 여행길에 올랐다.[11]
남극점 정복 인증샷. 노르웨이 국립 문서보관소 소장. #
여기서 아문센은 한 가지 빗나간 예측을 했다. 아문센은 한센에게 "난 영국인을 잘 알아. 그들은 일단 시작하면 포기하지 않아. 스콧은 앞으로 하루 이틀 내에 여기에 도착할 거야."라고 하였다.
그때 스콧은 360마일 뒤쳐진 지점인 비어드모어 빙하를 힘겹게 오르고 있었다. 즉 남극점에 도착한 건 아문센의 예측이 맞았으나 날짜는 틀린 것. 비어드모어 빙하를 오르던 스콧과 내려가는 아문센은 100마일도 안 되는 거리에서 서로 길이 엇갈려서 만나지 못했다.
3.4 1월 : 스콧 남극점 도착, 아문센의 귀환
1월 3일, 스콧은 남극까지 150마일이 남은 곳에서 8명의 팀을 반으로 나눠서 남극으로 도착할 일행을 선발했다. 마지막까지 스콧과 함께하게 된 사람은 오츠 대위, 헨리 바워스(Henry R. Bowers) 해병소위, 에드거 에번스(Edgar Evans) 해군중사, 스콧의 친구이자 민간인 탐험가 에드워드 윌슨이었다.
1월 16일, 스콧 일행은 충격적인 것을 발견하였다. 썰매 지지목과 수많은 개 발자국, 그것은 노르웨이인들이 자신들을 앞서 남극점에 갔다는 명백한 증거였다.
1월 17일, 스콧 일행은 남극에 도착했다. 그리고 그 곳에는 노르웨이 깃발이 펄럭이며 기다려주고 있었다. 또한 아문센이 쳐놓은 텐트와 남겨둔 장비, 식량, 그리고 아문센이 스콧 앞으로 보내는 편지를 발견하였다.
친애하는 스콧 대령님당신이 우리 다음으로 이 지역에 도착한 첫 번째 사람이 될 것 같으므로 이 편지를 하콘 7세께 발송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텐트 속에 남아 있는 물건들 중에서 쓸모 있는 것이 있으면 부담 가지지 말고 사용하도록 하십시오. 무사하 귀환하시기를 빌며.
-로알 아문센[12]
1월 26일, 아문센 일행은 프람하임에 도착했고, 나흘 뒤 남은 개 39마리와 함께 오스트레일리아로 출발했다. 3월 7일, 아문센 일행을 태운 프람 호는 태즈메이니아(Tasmania) 섬의 호바트(Hobart)에 도착했다. 그리고 아문센의 남극 정복 업적은 전 세계 신문에 대서특필되었다.
이후 아문센 일행은 2주 가량 호바트에 머물렀고, 그 동안 남극의 미탐사 지역 탐험을 준비하던 오스트레일리아 탐험대의 대장 더글러스 모슨과 만나 탐험과 관련된 조언을 해주었다. 그리고 호바트를 떠나기 전에는 모슨에게 탐험에서 살아남은 개들 중 21마리를 선물로 주었다.[13]
아문센은 탐험계의 슈퍼스타가 되었고, 각지에서 강연 요청이 빗발쳤으며 남극 탐험 과정을 책으로 집필하였다. 그리고 세계는 도대체 스콧 탐험대는 어디로 갔길래 아직도 돌아오지 않는 것인지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3.5 2-3월 : 스콧의 죽음
자신들이 패배했다는 것을 깨달은 스콧 일행은 힘겹게 귀환을 서둘렀다. 하지만 남극점에 도달하기 전부터 부족하던 식량과 연료 사정은 이제 스콧 탐험대의 생존 자체를 위협하기 시작했다.
2월 16일, 비어드모어 빙하에서 에번스가 쓰러져 죽었다.
남은 일행은 한 달 동안 그레이트 아이스 보빙지역을 내려갔다.
3월 17일, 보어 전쟁 때 다친 다리의 상처가 동상으로 도져 절뚝거리던 오츠가 자신의 느린 걸음 때문에 동료들의 발목을 잡게 된다는 걸 생각하여, 살신성인의 희생을 하였다. 오츠는 텐트 밖에 좀 나갔다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침낭 하나만 챙겨들고 눈보라 속으로 걸어가서 돌아오지 않았다. 스콧은 용감한 오츠의 행동을 일기에 적었다.
머지 않아 힘겹게 한 걸음씩 전진하던 스콧 탐험대는 힘이 다했다. 윌슨, 보워스가 먼저 죽음을 맞고 스콧은 최후까지 견뎌내고 있었으나 식량이 완벽하게 바닥나 더이상 버틸 수 없었다.[14]
우리는 끝까지 버텨볼 생각이다. 하지만 몸이 점점 쇠약해져서 이제 끝이 멀지 않았다. 정말 안 된 일이다. 나는 더 이상 쓸 수 없다. R. 스콧추신 - 신이시여 우리 국민을 보호해주소서
1912년 3월 29일, 스콧은 마지막 일기를 쓰고 배고픔과 추위 속에 동사하였다. 이들이 사망한 장소는 보급소에서 고작 800m 떨어진 곳이었다.
아문센이 고국으로 돌아오고 대영광을 만끽하고나서도 스콧 탐험대가 돌아오지 않자 구조대가 파견되었으나 4월에 남극의 여름이 끝났기 때문에 수색은 진행될 수 없었고, 10월 말이 되어서야 수색대가 출발하여 11월 12일에 들어 수색대가 스콧 일행의 텐트를 발견하여 그 곳에서 윌슨, 보워스, 스콧의 시신을 발견하였다.
4 전략 비교 분석
아문센은 목표를 달성하고 돌아와 영광을 만끽했고, 스콧은 배고픔과 추위 속에서 절망에 빠져 죽었다.
아문센과 스콧의 대결은 시작부터 이미 승자가 정해져 있었다고도 할 수 있다. 이는 아문센이 극지방에 사는 원주민들의 충고를 받아들인 데서 기인한다.
아문센은 북국 노르웨이 출신으로서 어린 시절부터 스키[15]를 즐기며 동계 활동에 친숙하였다. 애초에 노르웨이 사람들은 스키를 잘 타는 것으로 유명하다. 북서 항로 탐험 등을 하면서 오랫동안 북극 근처의 혹한지에 거주하던 이누이트들을 찾아가 친하게 지냈으며[16] 그들에게 생활방식을 배웠다. 아문센 자신에게 모계로 이누이트 혈통이 흐르고 있다는 설도 있다. 극지방 현지인들이 주로 먹는 페미컨 같은 전통 보존식품이나 순록의 털가죽으로 만든 코트와 장화, 개썰매를 주로 쓰는 현지 적응 방식을 완벽히 터득했으며, 심지어 이글루를 만드는 방법까지 배웠다. 추운 곳에 적응하는 법은 추운 곳에 사는 사람들이 가장 잘 안다고 봤던 것이다.
또한 아문센은 이전의 탐험가들(주로 영국)의 탐험 기록을 상세히 조사했으며, 동시에 그들의 문제점과 한계을 고찰하고,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탐험 계획과 기술을 신중하게 보완하였다.
반면 스콧은 경로도, 장비도 모두 어니스트 섀클턴과 동일한 방식을 채택하였다. 그러면서도 섀클턴이 고생하고 결국 실패한 이유에 대해서는 제대로 연구하지 않았다. 그리고 어니스트 섀클턴보다 훨씬 크게 실패했다.
아문센이 노르웨이의 전통과 이누이트의 전통, 자신의 경험과 아이디어로 다양한 기술을 획득하여 탐험 기술을 완전히 새로운 단계로 발전시켰다면, 스콧은 영국의 과학기술로 만들어진 설상차, 통조림 정도를 제외하면 새로운 시도는 별로 없었고 이전 수준의 탐험 기술을 답습하는 상태였던 것이다.
극한의 남극 대륙에서 스콧이 택한 대영제국의 과학기술보다는 아문센이 택한 이누이트 족의 전통기술이 보다 큰 도움이 되었다. 현지화의 중요성
4.1 옷
아문센은 이누이트가 입는 털가죽 방한복을 준비했고, 스콧은 영국 신사가 야만인의 추한 옷을 입을 수는 없다고 생각하여 영국제 모직 방한복을 고집했다.
이누이트의 털가죽 옷은 외부의 물을 먹지 않고 땀을 밖으로 발산할 수 있는데, 고어텍스가 개발되기 전까지는 그런 기능을 할 수 있는 옷은 털가죽 옷 뿐이었다. 심지어 보온 성능 면에서는 현재 기술로도 털가죽 옷을 따라갈 수 없고, 다만 무게 때문에 다운이나 중공사로 충전된 패딩을 사용할 뿐이다.
스콧 탐험대의 방한복은 버버리 사가 개발한 트렌치 코트에 쓰이는 천인 개버딘을 기반으로 하였는데 영국에서 상상할 수 있는 추위라면 방한 성능이 충분하였고, 털가죽 옷 보다 훨씬 가볍다는 장점이 있었다. 모직 의류는 흡습성이 조금 있지만 면 등의 다른 직물에 비해서는 낮은 편이어서 원래 겨울 옷으로 많이 쓰인다. 게다가 남극이 워낙 건조하기 때문에 흡습성은 문제가 되지 않으리라 생각하였다. 남극은 사막으로 분류되며 강수량이 대단히 적고 공기중의 수증기가 죄다 얼어버리기 때문에 습도가 심하게 낮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혹독한 추위는 땀에서 나오는 수증기를 외투에 흡입 동결하게 하여 점점 체온을 빼앗았고, 나중엔 보온의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 결국 스콧은 남극 내륙의 혹한에 시달린 뒤에야 비로소 이누이트식 가죽옷이 있었으면 좋았을 것이란 생각을 일기에 적었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거기에 아문센의 방한복은 흔히 보는 외투와 같이 앞이 터져있어서 쉽게 입고 필요할 때 벗을 수 있었지만, 스콧의 방한복은 푸대 자루 같은 것을 뒤집어쓰는 형태였기 때문에 한번 입으면 웬만해선 다시 벗지 못하고 계속 입고 있어야 했다. 당시에는 아직 지퍼가 개발되진 않던 시절이라 모직옷은 입고 벗기 굉장히 번거로운 옷이었다. 아문센의 방한복은 가죽끈을 달아서 입을 때 묶어서 채우는 원시적인 방식이지만 혹독한 환경에 아무 문제가 없었고, 스콧의 방한복은 목 부분 등을 채우는데 주석 단추를 사용했으나 주석이 극한의 추위에서 주석 페스트 현상을 일으키며 모두 바스러져서 가루가 되어 버렸다. 뿐만 아니라 스콧의 방한복에는 주머니까지 없어서 필요할 때 손을 보온할 수도 없고 작은 연장을 챙길 수도 없었다.
즉 스콧의 영국제 명품 방한복은 남극의 추위 앞에서 완전한 실패작이었다.
4.2 교통 수단
4.2.1 아문센의 개썰매
아문센은 썰매를 끄는 동물로 개를 선택했다. 극지방 교통 수단으로 안정성이 증명된 개썰매가 최고라고 생각한 것이다. 아문센은 개를 잘 다루는 헬메어 한센과 개썰매 대회에서 우승할 정도로 개썰매 조종에 능숙한 스바레 하셀을 최종 팀원으로 넣을 만큼 개썰매에 신경 썼다. 잘 훈련된 많은 수의 개들은 아문센의 탐험을 순조롭게 만들어주었다.
이 개들 중 쇠약해지거나 죽은 개는 가차없이 식량으로 재활용하는 철저한 계획성을 보였다. 반대로, 스콧에게 자신들이 개를 먹는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문센은 애초에 탐험 계획 단계부터 언제쯤 죽은 것을 얼마만큼 먹을 것인지를 계획해 놓았다. 그리고 그 개고기를 남은 개에게 먹이로 주기도 했다.[17]
잘 모르는 사람이 보면 경악스러울 수도 있겠지만, 북극의 썰매개들은 원래 본능적으로 같이 썰매 끄는 동료가 쇠약해지면 집단 공격하여 잡아먹는 습성이 있다. 말라뮤트나 허스키 같은 견종들은 혹독한 환경 하에 인간과 공존하기 위하여 오랜 세월에 결쳐 사나운 개체들을 모두 도태시켰기 때문에 순하다고 알려졌으나 그건 애완견이나 스포츠를 위한 개썰매 개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다. 극지방에서 삶을 영위하는 개들이 동료를 잡아먹는 일은 흔하며 극한의 환경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생존방법의 하나다. 참고: 한국 탐험대의 그린란드 개썰매 종단기. 따라서 아문센의 개를 이용한 식량보충은 그 환경에선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개썰매에 신경을 많이 쓴 만큼 아문센의 개들을 철저히 훈련되어 있었다. 개썰매를 모는 요령도 뛰어났고 전속력으로 달려가던 수십 마리의 개들이 명령을 듣자마자 곧바로 멈춰설 정도였다. 이와 대조적으로 스콧 탐험대의 개들은 개썰매 전문으로 훈련받은 개들이 아니라 비교하기도 힘들었다.
스콧이 개를 등한시한 이유는 개썰매를 신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첫 번째 탐험에서 스콧은 훈련되지 않은 썰매개들 때문에 어려움을 많이 겪었다. 대신 스콧은 만주산 조랑말에 기대를 걸었다. 아문센은 이걸 알고 깜짝 놀라 개를 쓸 것을 권유했으나 스콧은 듣지 않았다. 그래도 아문센은 스콧이 마지막에 마음을 바꿔 개를 선택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개 구입 대리인에게 다른 곳에서 주문이 온다면 자신에게 먼저 알려달라고 미리 지시를 내렸을 정도였다.
스콧이 개를 사용하지 않은 것은 해군출신인 스콧은 동물을 사랑하고 자립심을 중시하는 영국 해군의 전통을 답습했다는 설이 있는데, 아문센과 경쟁하기 전에 저명한 지리학회 강연에서 스콧은 이런 말을 했다.
스콧 : 피어리 씨의 북국탐험 이후 개를 이용한 탐험이 늘고 있지만 사실 개의 유무는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개 없이도 탐험은 충분히 가능합니다. 게다가 개썰매를 이용한 탐험이 개에게 얼마나 잔혹한지 아십니까? 얼마전 탐험에서 개썰매를 끌도록 썰매개 열여덟 마리가 동원되었지만 단 한 마리만이 살아남았습니다. 굶어 죽고 과로로 죽어갔고 그 시체는 다른 썰매개들의 먹이로 사용되었죠. 결론적으로 썰매개를 사용한 탐험은 너무나 잔혹한 탓에 지양되어야 마땅합니다.
완벽한 개빠의 논리
박수갈채가 일었지만 그 학회에 동석하고 있었던 탐험계의 대선배 프리드쇼프 난센은 벌떡 일어나서 반박했다.
난센: 나는 개를 사용한 탐험도 해 봤고 개를 사용하지 않고도 탐험을 해 봤소. 스콧 씨는 개를 사용한 탐험이 잔혹하다고 했고 실제로 잔혹한 건 사실이오. 그러나 스콧 씨에게 묻겠는데, 그럼 사람이 무거운 썰매를 끌도록 강요하는 건 어떻다 생각하시오? 이게 몇 배나 더 잔혹한 일 아니오?
난센의 이 반박은 후일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스콧의 탐험대는 고장난 설상차와 죽어버린 말들 때문에 대원들이 직접 썰매를 끌어야 했다. 거기다 스콧이 데려간 개들은 모두 죽어버렸다.
4.2.2 아문센의 스키
아문센 탐험대는 전원 스키에 능숙했으며[18] 심지어 스키 대회 세계 챔피언 올라프 비욜란이 탐험대원에 들어 있었다. 스콧 탐험대는 그렇지 못했다. 눈 위를 이동하는 수단으로 걸어가기가 나을지 스키를 타고 가기가 나을지는 설명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스콧은 스키를 타려고 시도해 본 적이 있었다. 1901년부터 1904년까지 어니스트 섀클턴 등과 함께 했던 디스커버리호 탐험 중 스키를 타보려고 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스키를 제대로 탈 줄 몰랐기 때문에 오히려 걸어가기가 더 편할 정도로 실수를 거듭했고, 결국 스키를 때려치웠다.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게 된 스포츠가 된 현대와는 달리, 이 무렵 유럽에서 스키는 그리 널리 알려진 기술이 아니었다. 이제 막 스포츠화 돼서 알려지기 시작했던 무렵이었기 때문이다. 스키는 스웨덴, 노르웨이 같은 북유럽 일대가 아니면 능숙한 사람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하지만 그렇다고 스키가 무슨 숨겨진 '비장의 기술'도 아니었고, 정말로 하려고 한다면 북유럽 국가 출신으로 스키에 능숙한 사람을 찾아서 대원으로 영입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스콧은 한 번의 실패에 크게 실망했는지, 스키를 제대로 배우지도 스키에 능숙한 사람을 대원으로 삼지도 않았다.
4.2.3 아문센의 곰썰매 구상
그 밖에도 아문센은 여러 가지 새로운 계획을 선보였는데, 심지어는 북극곰을 길들여 썰매를 끌게 하는 방법까지 생각했다. 물론 곰을 길들이기 어렵고 워낙 많이 먹는데다가 같이 가기로 되어있던 조련자가 탐험에 참여하지 않는 등 여러모로 문제점이 많아 빨리 포기했지만. 실제로 곰을 길들인 사람들은 대부분 곰이 새끼였을 때부터 길러온 것이다.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었겠지만, 남극에서 북극곰을 관리하기란 불가능했을 것이다. 탐험대원 전원이 힘을 합쳐도 북극곰을 제압하는 것은 어려울 터이고, 극한 상황에 몰아넣으면 곰이 생존본능으로 야성을 일깨우지 않을 리가 없을 것이다. 덤으로 먹을 게 부족하면 야채라도 뜯어먹는 잡식성인 다른 곰들과 달리 북극곰은 먹을 게 부족해도 굶어죽으면 굶어죽었지 야채를 뜯어먹지 않는 온리 육식성 곰이다. 나중에 아문센도 북극 탐험을 하다가 곰에게 맞아 죽을 뻔했다.(…)
위에서 말한대로 금방 포기해서 망정이지 이 계획을 실행했다면 스콧 일행이 남극에서 만난 것은 노르웨이 깃발과 개 발자국이 아니라 아문센 일행의 일부만 남은 사체와 배고픈 북극곰이었을지도 모른다. 물론 이들은 총과 작살을 가져가서 당하기만 하지 않았을 테지만 피해는 적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아문센과 스콧이 실패한 이유'가 짤막하게 언급되는 '남극정복에 성공한 다른 사람'의 문서를 보고 있겠지.
4.2.4 아문센의 배(프람 호)
스콧의 테라노바 호와 섀클턴의 인듀어런스 호는 원래 포경선이어서 극지를 항해하는데는 적합했으나 유빙에는 프람 호 만큼 잘 대처할 수 없었다. 배가 스콧 탐험대의 실패 원인은 아니었지만 그 뒤에 섀클턴의 남극횡단 탐험의 실패 원인은 바로 배에 있었다. 인듀어런스 호가 유빙에 갇혀서 오도가도 못하다가 결국 박살나버린 것.
아문센은 난센으로 부터 프람 호를 물려받아 디젤 엔진을 설치하여 업그레이드 하였는데, 프람 호는 원래가 탐험을 위하여 건조한 배였다. 난센은 프람 호를 얼음의 압력에 견딜 수 있도록 기골을 튼튼히 하고, 뿐만아니라 바다가 얼면 배가 얼음 위에 올라타도록 선저를 둥글게 건조하였고, 선내에도 오랜 기간 동안 지치지 않고 견딜 수 있도록 충분한 편의 시설을 갖추었다.참고: 프람호 박물관 관람기 난센은 흠좀무하게도 아예 유빙에 갇혀서 몇년간 표류하다보면 북극점에 도달하겠지(...)하는 발상으로 8년 치 연료와 6년 치 식량을 싣고 탐험을 떠나, 3년간 유빙에 갇힌 채 탐험하여, 비록 북극점 도달에는 실패하였지만 나름대로 큰 성과를 거두고 무사히 귀환하였다. 난센의 프람 호 운항 경험과 성과들은 고스란히 아문센에게 전수되었고, 아문센은 돛단배였던 프람호를 디젤 동력선으로 업그레이드하여 남극 탐험을 준비한다.
이렇듯 결과적으로 아문센은 배에서부터 영국 탐험대들 보다 훨씬 발전되고 완전히 검증된 준비를 해놓았던 것이다.
4.2.5 스콧의 설상차
스콧이 탐험에 이용했던 설상차는 빙판도하를 고려해서 메인프레임을 목재로 제작해 경량화를 꾀했으며 2~30도 이상의 등판능력도 있었다. 1회 주유시 최대 주행거리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최대 적재중량 및 견인중량은 300 kg에 달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런 최첨단 장비로 여겼던 설상차(스노모빌)도 문제였다.
당시 영국 언론이나 세계 언론은 유럽 몇몇 강대국들만 보유하고 있던 이 최첨단 장비에 대해 집중보도했다. 그들은 이런 화려한 장비를 보유한 스콧 탐사대가 당연히 이기리라고 예상했지만, 정작 당대 최첨단 기술력의 설상차는 남극의 극한 상황을 버텨낼 수 없었다! 너무 낮은 온도에서 연료가 얼어 버린 것이다. 스콧이 아무 검증도 없이 설상차를 가지고 간 것은 아니다. 설상차는 상당한 추위를 자랑하는 혹한기의 스코틀랜드 평원에서 많은 테스트를 거치고 실용성을 검증 받은 물건이었다. 다만, 남극의 추위가 스코틀랜드의 추위와 비교할 수도 없는 수준이었을 뿐이다. 21세기에 개발되는 설상차였더라면 시속 100km넘게 고속주행을 하기 때문에 스콧의 압승으로 끝날 수도 있었건만 이 설상차는 현대의 설상차가 아니라 원시적인 설상차다. 달리는 속도도 사람의 뜀박질 이상은 못내는 물건이다.
그뿐만 아니라 스콧은 설상차를 고칠 기술을 가진 대원과 마찰을 빚은 끝에 그가 떠났기에 설상차가 고장 나면 고칠 사람도 없어서 그냥 버리고 가던가 아니면 같이 끌고 가야 했다.[19] 그런데 그냥 버리고 가면 될 것을 워낙 비싼 것이라고 하여 끌고 갔다.
안 그래도 엄청 무거운 이 장비를 끌고 가야 할 말이 죄다 죽으니 사람이 끌고 가기도 힘들었는데 결국 오래가지 못해 설상차 세 대는 모두 극심한 추위 속에 얼어서 움직이지 않거나 물에 빠져 쓸 수 없게 되었다.
우습게도 스콧은 탐험 전에 일기장으로 개썰매를 폄하하면서 설상차의 장점을 찬양했는데, 반대로 아문센은 설상차를 보고 '저게 추위 속에서 정말 제 몫을 하는지 실험이라도 해봤는지 모르겠다'면서 실패를 예상했다고 한다.
4.2.6 스콧의 조랑말
스콧은 추위에 강하다는 만주산(産) 조랑말을 데려갔다. 그러나 10마리나 되는 말을 데려간 것은 큰 실수였다.[20]
어니스트 섀클턴의 항목에 나온 계산식을 보면 알 수 있듯이, 견인력과 식량 소모량을 비교하면 말이 개보다 효율적이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그런 단순한 계산과는 다른 것이 많았다.
말 사료인 건초는 사람이 먹을 수 없다. 아무리 극한 상황에 몰려도 사람이 건초를 먹으면서 버틸 수는 없는 것. 맛 없는건 둘째치고 억지로 목구멍 속으로 밀어넣어도 인간의 위장으로는 소화 자체를 시킬 수 없다. 즉, 건초는 말이 먹는 양이 상당해서 많이 준비해야 하는데 말 먹이 외에는 사용할 곳도 없다. 하지만 개는 사람과 같은 음식을 먹을 수 있어 모든 식량이 단일하게 관리되므로 보급이 훨씬 편리한 것이다. 게다가 고기[21]는 무게에 비해 열량이 많기 때문에 더 적은 양을 비축해두어도 나중에 더 많은 칼로리를 얻을 수 있었다.
남극의 혹한 환경에서 크레바스에 빠지는 등의 곤란한 상황을 많이 겪게 되는데 상대적으로 가벼운 개와 달리 말은 상당히 크고 무겁기 때문에 구조하기 힘들었다. 극도로 기력이 소모되는 남극 탐험에서 이런 체력 소모는 최대한 기피해야 한다.
그리고 맹렬한 추위에 말들은 금새 얼어죽어갔다. 이유는 간단하다. 스콧이 데려온 말들은 극지방에 사는 품종이 아니었다.[22] 이 말들은 털이 짧아 보온을 하지 못하는 데다가, 땀을 흘려서 찬바람에 땀이 금세 얼어붙어 고드름이 주렁주렁 달려서 동상을 입기 때문이다. 반면 개는 털가죽이 두터워 보온을 잘 하고, 땀을 흘리지 않고 숨을 몰아쉬어 체온을 낮추기 때문에 말 처럼 몸에 고드름이 달리는 일이 없다.
이러다보니 캠프에서 말은 개보다 손이 많이 갔다. 돌보는데도 체력을 많이 소모했다는 뜻이다.
또한 개들은 눈속에서도 잘 수 있다, 북극의 썰매개들은 잠을 잘 때 제 스스로 눈 구덩이를 파고 들어가 보온을 유지[23]하는 재주가 있다. 그래서 아문센 탐험대는 캠프에 도착하여 그냥 개들을 썰매에서 풀어놓고 밥만 주면 개 관리는 다 마친 것이었다. 개들은 자기들이 알아서 눈밭에 구멍을 파고 들어가 안에서 휴식을 취하고 체력을 회복했다.
하지만 말은 달랐다. 온대 지방에서는 말을 적당한 곳에 묶어놓고 밥만 주면 관리는 대충 끝나지만 극지방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스콧 일행은 캠프를 치고 난 다음 일일이 말의 몸에서 얼음을 털어주고, 추위를 막기 위해 담요를 씌워주고, 눈으로 벽을 쌓아 바람을 막아주어야 했다. 극지방에서 말을 관리하는 일은 매우 손이 많이 가서 스콧 일행을 지치게 만들었다. 말을 관리하는 것이 워낙 힘들어서 기병장교 출신으로 말을 돌보는게 전문인 오츠조차 아예 관리를 포기하고 죽을 때까지 끌고 가다가 쓰러지는 대로 잡아먹어 버리자는 제안을 했지만 스콧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바로 이 조랑말 문제 때문에 스콧 일행은 비어드모어 빙하에 도달할 때까지 아문센 쪽보다 인원이 더 많이 필요했다.
물론 스콧도 완전히 바보는 아니라서, 말을 돌볼 전문 인력도 겸할 수 있는 오츠를 대원에 포함하고, 추위에 강한 마종을 선택했다. 하지만 극지방의 추위는 만주와 차원이 달라서 말들도 버틸 수가 없었다. 그나마 죽은 말의 고기를 일부 챙기기는 했지만 큰 도움은 되지 못했다.
심지어 조랑말과 설상차는 바로 섀클턴 탐험대가 3년 전인 1909년 남극점 탐험에 나설 때 썼다가 똑같이 낭패를 봤던 이동수단이다. 자세한 건 어니스트 섀클턴 참조. 그런데도 스콧은 새클턴의 경험에서 전혀 배우지 않았고, 결국에는 섀클턴과 똑같은 과정으로 실패한데다가 그 대가는 더 컸다.
아문센은 조랑말에 대해 별로 긍정적이지 못한 평가를 내렸다. 아문센과 스콧이라는 책에 실린 일화에는 아문센이 스콧 탐험대가 조랑말을 데리고 간다는 소리를 듣자 "조랑말은 안 된다. 개를 데려가라"고 충고하는 장면이 나온다. 아문센은, 비록 스콧이 자신의 라이벌이지만 스콧을 존중했고 무엇보다 승패를 떠나서 생명과 직결되는 문제에 대한 조언을 한 것이다. 그러나 그 조언은 무시당했다.
4.2.7 스콧의 인력
'개들과 함께 하는 여행에서는 사람들이 자력으로 하는 어려움, 위험, 간난을 무릅쓸 때의 그런 높은 모험정신에 도달할 수 없다.' - 로버트 스콧
'그들은 개가 끄는 썰매를 타고 편안한 여행을 한 것으로 보인다. 우리처럼 사람이 비참하게 썰매를 끌어야 하는 여행은 하지 않은 것 같다.' - 오츠의 일기
스콧은 원래부터 비어드모어 빙하까지 조랑말이 썰매를 끌게 하고, 그 뒤에는 조랑말을 잡아 식량으로 한 다음 인간이 썰매를 끌고 가는 것으로 계획하고 있었다. 이것은 위의 발언에서 보듯이 스콧이 탐험에서의 극기정신과 인력을 중시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무모한 계획이었다. 스콧이 처음 캠프를 세운 로스(Ross) 섬에서 남극점까지 직선거리로만 대략 1400 킬로미터이며, 실제로 이동한 거리는 거의 1500 킬로미터에 달했다. 알기 쉽게 비유하자면 서울에서 부산간 경부고속도로를 따라 가는 거리(약 417 킬로미터)의 3.5배쯤 된다. 탄탄하게 손질된 고속도로를 타고 걸어가도 끔찍할 정도로 먼 거리인데, 여기는 남극이다. 남극 고원은 춥기도 엄청나게 춥거니와 해발고도도 수천 미터에 달하므로 공기 역시 매우 부족하여 체력이 훨씬 빨리 쇠한다. 스콧 일행은 이 기나긴 거리를 생존에 필수적인 많은 물자를 운반해서 이동해야 했다. 남극 고원의 무자비한 환경에서는 인간의 육체를 극한까지 몰아넣는 선택이었다.
4.3 식량과 물자
4.3.1 페미컨을 비축한 아문센
물품의 준비와 비축 계획은 겉으로 보면 서로 별 차이는 없었다. 오히려 자금 지원은 스콧이 더 빵빵하게 받은 만큼 준비 과정에서는 더 여유가 있었을 것이다.
1910년 10월 19일에 출발한 노르웨이 탐험대는 개 52마리가 끄는 개썰매에 800 kg이 넘는 온갖 물품을 가득 싣고 있었다. 아문센은 식량 저장고들을 만들면서 높은 깃발을 꽂아서 멀리서도 보이기 쉽도록 해두었다. 각 저장고들에는 기본적으로 페미컨 12상자, 바다표범 고기 30 ㎏, 비계 50 ㎏, 마가린 한 상자, 초콜릿 20상자, 비스킷 12 상자, 등유 25 갤런(약 114 L),[24] 붕대 및 구급품과 담요 같은 만일의 사태를 위한 물품들을 꼼꼼하게 비축해 두었다. 아문센 탐험대는 이외에도 과일의 설탕절임이나 잼, 치즈 등도 비축하고 있었지만, 이들 물품이 탐험에는 그다지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해 기지였던 프람하임에 그대로 남겨두었다.
이때 아문센이 선택한 페미컨과 바다표범 고기는 대단히 효과적이었다. 조리할 필요 없이 그냥 육회 형태로 먹어도 되기 때문이다. 극지방에서 비타민 등을 섭취하려면 고기를 익히지 않고 그냥 먹는 게 낫다. 그리고 고기 대부분을 육회로 먹으니 조리에 연료를 소모할 필요가 없었고 그만큼 연료를 아낄 수도 있었다. 이 또한 극지방의 이누이트들에게 배운 방식이었다. 페미컨은 극지방에서 수십 년 동안 보존이 가능했고 가벼운데다 당시의 발달되지 않은 기술로 만든 깡통 통조림처럼 납중독 같은 질병에 걸릴 염려도 없었으며, 영양분도 풍부했다. 그리고 아문센 탐험대의 페미컨은 말린 야채나 과일, 오트밀을 섞어서 만든 개량형이라 기존 페미컨보다 더 맛도 좋고 다양한 영양소를 섭취할 수 있었다.
아문센 탐험대가 먹은 바다표범 고기는 현지에서 사냥을 하면서 조달한 것이었다. 당연히 남극의 내륙에는 바다표범같은 동물이 없지만, 해안가에는 바다표범이 아주 많이 살고 있었던 것이다. 아문센은 이들을 훌륭한 단백질 공급원으로 보았고, 대원들은 바다표범을 볼 때마다 열심히 사냥을 해서 식량으로 삼았던 것이다. 이러니 아문센 탐험대의 식량이 많을 수밖에... 이렇게 식량 비축을 위해서 사냥을 하기는 했지만, 아문센은 개인적으로 사냥을 즐기지는 않았으며 동물은 자연 상태 그대로 살아 있는 것이 더 아름답다고 여겼다. 재미없는 남극에서 따분해진 탐험대원들이 사냥에 재미를 붙여서 필요 이상으로 동물들을 잡아대자(…) 쓸데없이 동물을 잡는 것을 엄격하게 금지했다. 따지고 보면, 인간의 육체/정신을 극한까지 몰아넣는 극지탐험 중에 따분해졌다는 자체가 그들의 탐험이 여유가 많았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리고 비스킷의 경우에도 아문센의 꼼꼼함이 두드러지는데, 아문센은 비스킷을 고를 때 고운 밀가루를 주재료로 하는 것을 피하고 통밀과 오트밀, 이스트가 많이 들어간 것을 선택했다. 이런 비스킷은 식감이 거칠지만, 섬유질이 풍부하고 도정하지 않은 곡물에 많이 포함된 비타민 B 복합체도 섭취할 수 있다는 이점이 있다. 아문센은 그 동안 여러 탐험을 하면서 밀가루빵이나 비스킷 보다는 자신들이 상식한 호밀이나 귀리 등의 잡곡류가 극지방 탐험에서도 유용하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 체득하고 있었기 때문에 각기병의 위험 또한 피할 수 있었다.
이렇게 꼼꼼하게 식량을 고르고 또 준비한 덕분에, 아문센 탐험대는 식량의 가짓수를 최소한도로 줄여갔으면서도 스콧 탐험대가 시달린 영양실조를 피할 수 있었다. 이렇듯 가장 기본적인 식량의 영양분 파악 및 조사까지 스콧은 아문센을 이길 수 없었다.
4.3.2 통조림을 들고 간 스콧
스콧도 아문센 못지않게 보급품 비축에 신경을 썼고, 저장고마다 통조림 24 상자, 훈제 고기 25 ㎏, 마가린 6 상자, 초콜릿 40 상자, 비스킷 30 상자, 그놈의홍차,[25] 등유 8 갤런(약 36 L), 구급품을 비축했다.
여기에 더해서 사람이 필요한 것 말고도 위에 앞서 말한 대로 스콧은 말이 먹을 사료까지 따로 챙겨야 했는데 나중에 말을 다 잃고 저장고에서 남겨진 말사료를 보고 말이 아니라 개를 준비해야 했다고 후회하게 된다. 위에서 언급했다시피 개가 사람이 먹을 고기를 먹어도, 사람이 개가 먹을 고기를 먹어도 큰 문제가 없었기 때문이다. 비록 채소를 먹지 못한 여러 가지 불리함은 남았지만[26][27] 그 추위 속에 우선은 고열량 고기 및 초콜릿이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스콧의 식품 중 상당수는 못 먹게 되었다. 단백질과 지방 보급을 위해 잔뜩 비축해둔 통조림이 추위를 견디지 못하고 터져서 먹지 못하게 되는 일이 다반사였던 것이다. 이것도 스콧이 잘못 계획한 것이다. 극지방 정도 추위라면 뭘 준비해도 바짝 마른 물건으로 통일시켜야 마땅했다. 왜냐하면 수분이 조금이라도 포함되어 있다면 몸무게가 무거워지는 데다가 극지방의 추위로 얼어붙어 터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당시의 통조림은 무거웠고, 기술적인 한계로 깡통에 납을 땜질해 밀봉했기 때문에 몇 달 동안 계속 통조림만 먹다가는 납중독에 시달리게 되는 등의 단점을 골고루 가지고 있었다. 다만 이에 대한 다른 해석으로 스콧 탐험대가 주석 땜납을 실험적으로 적용한 통조림을 가져갔다는 기록에 근거해 납중독이 아니고 위에서 이미 언급한 주석 페스트 현상으로 인해 땜납이 부스러져 터졌다는 해석을 내놓기도 한다. 실제로 다른 탐험가들의 통조림들이 온전한 형태로 발견된 사례도 있다.
하지만 스콧이 통조림을 선택한 것은 해당 통조림을 제조한 회사에서 스폰서 형식으로 무상지급을 해준 것이었기 때문이라는 이유도 있긴 했다. 결국 스콧은 통조림 등의 지원을 받는 대신 그 통조림 등의 지원받은 물자로 남극탐험을 했다는 광고효과를 노리고 스콧 탐험대를 지원해준 사업가들의 요구를 거절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 판단된다. 그리고 스콧은 바다표범 사냥을 하지 않았다. 식량을 늘릴 기회를 스스로 걷어찬 셈이다.
누가 영국인 아니랄까봐 홍차를 챙겨가기도 했었는데, 스콧 탐험대의 오판과 비참한 최후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바와는 달리 남극에서 차 종류는 상당히 도움이 되는 물건이다. 위대한 모험가로 칭송받는 영국의 섀클턴도 영국인이니까 그랬겠지만 위험 천만한 길을 가는데 홍차를 싸 가지고 갔다. 남극같은 극한의 자연환경 속에서 마시는 따뜻한 차 한잔은 피로에 지친 심신은 빠르게 회복시켜주고 마음을 위로 할 수 있는 유일한 즐거움이 되어줄 수 있다. 이는 극한의 오지에서 대원들의 사기를 높게 유지하기 위해 충분히 고려할 만한 요소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야채가 부족한 식단에서 비타민을 조금이나마 충족시켜 줄 수도 있다. 같은 이유로 현대전투식량에도 차가 종종 들어간다. 일반적으로 약 300 cc의 차를 끓이는데 필요한 차잎의 양은 2에서 3그램 정도밖에 소모되지 않는다. 단지 찻잎 몇백 그램 정도만 챙겨가면 긴 탐험기간 동안 차를 마실 수 있으니 필요한 양도 매우 적다. 그리고 탐험 중 잠시 쉬는 동안 당연히 온기를 돋구기 위해 불을 피우게 된다. 사방에 널린 게 얼음이고 눈이니 대강 퍼서 온기를 느끼는 동안 차를 끓이면 그만이다.
하지만 스콧 탐험대는 연료가 부족하여 쉬는 동안에도 불을 피우지 못했다. 결국 불도 못피우고 물도 못 끓이고 식량도 떨어졌을 때, 스콧 탐험대는 차잎을 생으로 씹어먹어야만 했다. 아무리 홍차 한 잔이 마음을 위로해줄 수 있다고는 하지만 생 홍차잎을 씹어먹는게 무슨 도움이 될까?
게다가 이 연료 부족은 바로 식수 부족 문제로도 연결되었다. 물론 열로 녹이면 마실 수 있는 민물이 되는 자원인 빙산이 바로 옆에 널려 있으니 굳이 식수를 따로 챙길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바로 옆에 물로 전환 가능한 자원을 두고도 연료 부족으로 그걸 물로 만들 수가 없으니, 그야말로 사막 한가운데 있는 것이나 다름없는 고통이 추위 등의 각종 문제와 함께 영국 탐험대를 덮친 셈이다. 억지로 얼음을 먹어서 어떻게든 수분을 보충할 순 있었지만, 연료가 부족해서 당장 추위와 동상으로 고통받는 마당에 억지로 얼음까지 먹어야 하는 영국 탐험대가 받았을 고통은 대단히 컸다.
아문센이 통밀과 귀리가 들어간 비스킷을 선택한 반면, 스콧은 자신들이 영국에서 먹던 밀가루 비스킷을 잔뜩 싣고 갔다. 스콧이 챙겨간 식료품 목록을 봐도 알 수 있듯이, 스콧 탐험대의 식량에는 비타민과 무기질이 상당히 결핍되었다. 결국 이런 영양 불균형은 탐험 중반 이후 이들이 고전하게 되는 큰 원인이 되었고, 애초에 다리에 총상까지 있었던 오츠가 계속 쇠약해진 것도 동상 외에 각기병을 비롯한 영양실조까지 같이 겪었기 때문이었다.
이건 스콧의 잘못만은 아니긴 하다. 이 시기 영국인들의 식사 자체가 영양적으로 매우 불균형했기 때문에, 영국 탐험가들은 똑같은 상황에서도 다른 유럽인 탐험가들에 비해서 영양실조나 각기병 등을 앓는 비율이 더 높았다. 제대로 챙겨갔어도 영양적으로 불균형한데 이 문제점투성이 식품마저도 부족했으니 상황은 더욱 악회되었다. 영양밸런스를 등한시하는 영국식 식생활의 문제점은 스콧의 탐험에서도 치명적인 폐해를 가져왔다.
4.3.3 물량의 아문센, 잘못 계산한 스콧
연료의 저장량 면에서도 스콧은 열세를 보이고 있었는데, 위에 쓴 대로 영국 탐험대는 각 저장고에 8 갤런(약 36 L)의 등유를 들여놓았다. 반면에 아문센은 스콧보다 세 배 이상인 25갤런의 등유를 각 저장고마다 비축해두었다. 당시에 납 리벳으로 만든 연료통은 혹한에 작은 틈이 생겨 등유가 스며나오는 일이 있었다. 앞선 탐험대에서 이런 현상을 보고한바 있었으나 스콧은 이를 간과하였다. 결국 스콧은 탐험일지에 "비축해둔 등유가 줄어들어 있어서 기존에 쓰려던 양보다 부족하다"고 한탄하는 처지가 된다.
극지에서 인간이 겪는 피로와 열량 소모는 상상을 초월했다. 스콧 일행은 하루에 4000 kcal를 소모할 것으로 예상하고 식료품을 준비했지만, 현실은 그보다 배는 더 많은 평균 6000-7000 kcal에서 11,000 kcal였다. 한술 더 떠 스콧 탐험대는 설상차가 고장나고 말들이 죽어나가 썰매를 사람 손으로 끌고다녀야 해서 열량소모가 더욱 극심했다. 미군의 하루 권장 급식 열량이 3800 kcal, 한국군이 3100 kcal임을 생각하면, 스콧이 계산한 4천 kcal는 지나치게 낮은 수치이다. 물론 이 무렵의 영양학은 걸음마 단계였긴 했지만, 남극 탐험을 처음 한 것도 아닌 스콧이 너무 계산을 날로 했다. 반면 아문센은 저장고에 무려 3톤이나 되는 식량을 미리 준비했으니 스콧이 계산했던 1톤에 비하면 세 배에 달하는 양이었다. 아문센 일행은 그러고도 생각보다 식량소모가 많아서 개를 죽여야했다. 덕분에 아문센 일행은 건강하고 좀 더 살찐 채로 돌아왔다. 스콧보다 열량소비는 적으면서 식량을 더 많이 가져갔기 때문에 당연한 결과다. 허나 스콧은...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4.3.4 문명과 원시의 저장고
두 탐험대는 저장고 시설부터 꽤 차이가 컸다. 아문센 쪽은 목재와 이글루 등으로 급조한 반면, 스콧 쪽은 돈을 들여 더 꼼꼼하게 지었으며 더 튼튼해 보였다. 하지만 탐험 시작 후 얼마 안 되어 이 부분에서도 아문센이 현명했음이 입증되었다. 이글루를 비롯한 현지인들의 저장 방식을 따른 아문센이 더 돈을 들이고 꼼꼼하게 저장고를 만든 스콧보다 훨씬 유리했다.
스콧이 만든 저장고는 저장고마다 달랐는데 튼튼하게 남은 곳도 있었다. 스콧 탐험대가 사망하고 시신들이 발견되고 15개월 후인 1913년 8월, 미국 탐험대가 스콧 탐험대가 남긴 저장고들을 발견했는데, 저장고 안에는 시간이 지나면서 새나간 등유 정도를 제외하고 보급품 대부분이 보존되어 있었다. 문제는 이런 곳을 발견하지 못하고 지나쳤고 애써 찾은 저장고는 상태가 엉망이라 기름이 터져나와 먹을 것까지 오염시켜버렸다는 것.
4.4 루트와 스케줄
아문센은 남극점으로부터 1335 ㎞ 떨어진 웨일스 만에 프람하임 기지를 세워 1911년 10월 19일에 출발한 반면, 스콧은 1448 ㎞ 떨어진 맥머도 만에 있는 에번스 곶에 윈톤 기지를 만들어 1911년 11월 1일에 출발했다. 출발거리부터 110 ㎞씩이나 차이가 났으며 열흘 이상 빨리 출발했으니스콧이 압도적으로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 그 대신 아문센은 아무도 가본 적이 없는 길로 간 탓에 자신이 직접 길을 개척해야 했고, 스콧은 어니스트 섀클턴이 개척한 길을 그대로 따라갈 수 있었지만, 스콧은 섀클턴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나마조차 아문센이 아무도 가본 적이 없는 길을 새로 개척해야 했다지만 훨씬 편했다. 스콧 탐험대의 루트처럼 비어드 모어 빙하같은 위험지대도 없었으며 위험지대가 있어도 비어드 모어 빙하만큼 심각하게 위험하지도 않았다. 스콧은 비어드 모어 빙하에서 조랑말 1마리를 크레바스에 추락해 잃었다. 사람이 떨어졌으면 어쩔 뻔했는지 생각해보면 답은 뻔하다.
4.5 탐험대 구성
4.5.1 생존왕 아문센
아문센은 스키 선수 및 어릴 적부터 추운 곳에서 태어나고 자라면서 추위에 적응되면서 살아온 이들을 골라서 데려갔다. 참고로 노르웨이 탐험대 다른 일원들의 직업 및 특기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헬메어 한센(Helmer Hanssen, 1870-1956) - 노르웨이 극지방 출신이라 어릴 적부터 추위에 강했다. 물론 스키 실력도 있었고, 빙해도선사로 일할 만큼 극지방 항해술에도 뛰어나 아문센이 북서 항로를 개척할 때부터 탐험에 참가했다. 이 기간 중 아문센과 함께 이누이트들에게 개썰매 모는 법을 배웠고, 이후 아문센에게 추가 스카웃된 스바레 하셀과 함께 개들의 관리와 개썰매 조종을 담당했다.
- 남극점에서 귀환할 때 아문센이 식량 확보를 위해 정든 개들을 쏴죽이는 것을 슬퍼했지만, 아문센이 개고기를 좋아해 잡아먹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냥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고 회고했다.[28] 당연히 귀환 이후에 노르웨이 탐험대가 개고기를 먹었다고 야만인이라며 비꼬던 영국 기자들에게 가장 강하게 항의했다. 이후 아문센과 한 번 더 북동 항로 개척 탐험에 선장으로 참가했다.
- 오스카르 비스팅(Oscar Wisting, 1871-1936) - 16세 때부터 선원 생활을 시작했고, 노르웨이 해군에 입대해 오랫동안 극지방에서 근무했던 인물이라 역시 추위에 강했다. 스키 실력은 대원들 중에서는 좀 서툰 편이었지만, 아예 못 탄 건 아니었다. 해군 시절 포수였기 때문에 탐험 준비 기간에는 사냥을 담당했고, 바다표범 고기를 저장고에 비축해 비상식량 보충에 큰 기여를 했다. 또 대원들 중 요리를 가장 잘해서, 남극점 정복 후 돌아오는 길에 개를 도살할 때 '이걸 어떻게 먹을 수 있을까'하고 고민하던 대원들에게 맛있는 개고기 스튜를 만들어 주기도 했다. 남극 탐험 후 아문센이 북극 횡단 비행을 할 때도 동행했다.
- 올라프 비욜란(Olav Bjaaland, 1873-1961) - 세계대회 스키 챔피언. 말이 필요한가? 물론 아문센이 오오 챔피언 오오라며 데려간 것은 아니었다. 비욜란은 자신의 스키 장비를 직접 만드는 능란한 목수이기도 해서, 탐험 준비 기간 중에 무게 88 ㎏의 썰매를 마개조해 22 ㎏으로 대폭 감량시켰다. 그러면서도 내구성은 전혀 떨어뜨리지 않았고, 덕분에 아문센 탐험대의 개들은 한층 가벼워진 썰매를 빠른 속도로 끌고 갈 수 있었다.
무게는 4분의 1로 줄이고 내구성은 그대로면 좀 심하게 대단한데.
- 스바레 하셀(Sverre Hassel, 1876-1928) - 비스팅과 마찬가지로 일찍부터 선원 생활을 했고, 오토 스바르드륍이 이끄는 그린란드 일주 탐험에 참가하는 등 극지방 탐험 경력도 갖고 있었다. 이후 세관원으로 근무하다가 개썰매 대회에서 우승한 경력을 가져, 개썰매를 준비하던 아문센의 매의 눈에 걸려들었고, 무급 휴가를 받아 아문센 탐험대에 참가했다. 한센과 함께 탐험 중 개의 관리와 개썰매 조종을 맡아 탐험 성공에 큰 기여를 했다.
모두 각자 맡은 일이 극지방 생존에 필수적인 기술을 갖춘 인재들이었다.
4.5.2 아마추어 스콧
스콧은 탐사대를 해군 장교인 자신을 비롯한 군인들(스콧 대령과 오츠 대위, 보워스 소위, 에번스 중사), 과학자(윌슨), 의사, 광물학자(앳킨슨) 같은 과학 및 여러 전문가 위주로 편성했다. 물론 목적은 남극점 도달 외에 과학 탐사를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들은 각자 군 장교와 부사관 및 지질학자, 기후학 및 여러 가지로 학문과 과학분야 전문가들이기는 한데 여기까지였고, 극지방 생존에선 압도적으로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 말 그대로 프로 VS 아마추어. 오츠는 육군 기병 장교였던 만큼 극한 상황에서의 생존성 확보라는 점에서는 아문센 정도는 아니어도 그나마 스콧 팀에서 제일 유능했지만, 보어 전쟁에서 발목에 총상을 입어 총탄 제거 수술조차 받지 못한 채 발목뼈에 총탄이 박혀 있었기 때문에 거동이 원활하지 못하다는 문제점이 있었다.
4.5.3 프로와 아마추어의 차이
아문센 탐사대와 스콧의 탐사대는 길찾기 능력에도 차이가 있었다. 특별히 이정표가 될 만한 지형지물이 드물고 미리 만들어진 지도도 없는 남극인 만큼 태양과 달 및 별의 위치를 보아 계산함으로써 현재의 위치와 앞으로 갈 길을 알아낼 수밖에 없었다. 즉, 천문항해술을 발휘해야 했다.
아문센 탐험대는 천체측정에 작고 가볍고, 계산도 간편한 육분의를 이용했으며 전원이 숙련된 천문항해술을 갖춘 덕분에 모두가 길을 계산할 수 있었다. 여럿이 힘을 합쳤으니 계산 속도도 빠르고 오차 범위도 굉장히 줄여낼 수 있었다.
그러나 스콧 탐험대에서 천문항해술을 갖춘 길잡이는 스콧밖에 없었으며, 다른 일행은 스콧만 바라보며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스콧이 사용한 경위기는 계측오차나 실수가 없다고 가정했을때, 육분의의 경우 오차범위가 +-15~5km정도로 잡히는 반면, 경위기는 +-1~2km정도의 오차범위를 가질 정도로 정확도가 높았으나 크고 무거웠으며, 육분의보다 계산을 더 많이 해야 했다. 스콧은 숙련된 탐험가이기는 했지만 아무리 재주가 좋아도 5명이 힘을 합치는 것쿼드코어, 아니 펜타코어보다는 계산이 느릴 수밖에 없었고 실수도 가끔 저질러서 탐험은 지연되었다.
아문센 탐험대는 남극으로 향하면서 8 ㎞마다 깃발을 꽂아두었다. 이것은 돌아올 때 눈보라로 인해 길을 잃지 않기 위한 이정표가 되어주었다. 이동 경로마다 깃발을 튼튼하게 박아넣었기 때문에 스콧처럼 극심한 눈보라에 겪더라도 보급기지를 놓칠 가능성은 상대적으로 낮았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 전문가들의 견해다. 설령 깃발을 못 보더라도 아문센에게는 개가 많이 있었고, 개는 냄새를 잘 맡는다. 페미컨이나 바다표범 고기 냄새를 찾아서 달려가면 된다. 그에 비해 스콧 탐험대는 이러한 준비를 하지 않았고 이정표는커녕 어니스트 섀클턴이 갔던 길만 그대로 따라가기를 고집했으며 시야마저 가리는 강한 눈보라가 수시로 휘날리는 통에 근처에 있던 저장고도 찾지 못하고 지나쳐버리는 등의 실수를 거듭했다. 결국 길을 잃고 우왕좌왕하다가 스콧 탐험대 자신들이 설치한 식량 저장소에서 겨우 800 m 남겨둔 매우 가까운 곳에서 전원 얼어 죽었다.
어처구니없을지 모르지만 남극에 불어닥치는 극심한 눈보라를 생각하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실제로 일본 남극기지에서 볼일이 있어 기지 밖으로 잠깐 나온 일본인 대원이 눈보라 때문에 겨우 몇 m 떨어진 곳을 도저히 찾지 못해 헤매다가 멀리 수백 m 외딴 곳으로 가서 추위와 절망 속에 결국 얼어 죽은 일까지 있다. 이미 추위와 굶주림 속에 지치고 눈보라 때문에 도저히 앞을 볼 수 없는 그들에겐 저장고가 800 m가 아니라 80 m라고 해도 이렇게 죽었을 가능성이 컸다. 또한 남극에서는 눈보라가 불지 않더라도 화이트아웃 현상 때문에 방향감각을 상실하기 쉽다. 심지어 하늘과 땅을 구분하지 못할 정도인데 오죽할까. 그렇기 때문에 항해술 숙련자와 이정표가 필요했음에도 불구하고 스콧은 다른 항해술 숙련자를 대원으로 데리고 가지도 않고 이정표를 설치하지도 않았다. 참고로 그들이 죽고 나서 몇 달이 지난 다음에 온 수색대는 기지에서 12마일 떨어진 저장고는 빨리 찾아냈지만 저장고로부터 얼마 떨어지지 않은 이들의 시체를 찾는 데 한 달이 넘게 걸렸다.
아문센 일행에 전문 의사는 없었지만, 아문센의 의과대학 경험으로 간단한 의료조치는 취할 수 있었으므로 큰 문제는 없었다. 아문센은 탐험에 필요한 모든 기술을 자기 자신이 스스로 갖추려고 노력했으며, 항해사, 대원을 돌보는 의사(의학을 배운 것 자체는 어머니의 강요 때문이었지만), 과학자(독학으로 지자기 측정, 기상학 등을 배웠다.)의 역할을 한 몸에 떠맡을 수 있었다. 그 자신이 한 몸에 탐험에 필요한 모든 능력을 겸비한 프로페셔널 완전체 탐험가였던 것이다. 탐험에 필요한 모든 기술을 스스로 배우려 했던 아문센은 나중에는 비행술까지 익혔다. 노르웨이의 서바이벌은 세계 제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일!!
4.6 실패로부터 배운 사람과 배우지 못한 사람
아문센은 일단 처음에 스콧에게 남극점 점령을 빼앗길까봐 조바심을 내서 무턱대고 달려들었다가 대원들 전원이 동상에 걸리는 등 고생을 했다. 이때 아문센은 한 달 동안 푹 쉬면서 뭐가 잘못되었는지 연구를 하고 대원들끼리 연구한 내용을 검토하기를 반복해서 문제점을 최대한으로 수정하거나 보완했다.
반면 스콧은 어니스트 섀클턴이 이미 실패했던 그 루트를 따라 탐험을 한 것은 물론이요 어니스트 섀클턴이 이미 실패한 장비들을 그대로 똑같이 가지고 갔다.
스콧은 섀클턴이 귀환했다는 소식을 듣고 "다음에는 (새클턴이) 성공할 것이다."라고 발언했다. 그러면서 섀클턴에 비해서 탐험 기술 측면에서는 별다른 향상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즉, 섀클턴이 탐험 기술의 한계로 대원들을 죽음으로 몰고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 포기했다는 분석을 받아들이지 않고, 그저 근성이 부족해서 혹은 의지가 부족해서 좀 덜 과감해서 한계에 부딪쳤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적어도 스콧은 섀클턴이 왜 실패했는지 그것 하나만이라도 분석했더라면 아문센에게 패했을망정 대원 전원이 모두 무사히 살아서 귀환했을 것이다.
4.7 탐험과정
아문센은 처음부터 끝까지 계획대로 진행했으며, 모든 것은 그야말로 순조롭게 진행되었고 별다른 문제는 발생하지 않았다. 그러나 스콧은 실수를 연발했다.
우선 스콧이 저지른 치명적인 실수는 남극으로부터 260 ㎞ 떨어진 비어드모어 빙하로 돌입하기 직전에 일곱 명의 지원대를 기지로 돌려보내면서 24마리나 되는 많은 개들도 같이 돌려보낸 것이었다. 이 개들을 최대한 이용했다면 사람이 썰매를 끌고 빙하를 넘지 않아도 되었을지 모르며, 그렇게 해서 돌아갈 때 필요한 체력을 보존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스콧 일행이 데려간 나머지 여덟 마리의 개들이 굶주림과 피로로 기진맥진한 상태가 되자 잡아먹을 생각도 하지 않고 불쌍히 여겨 풀어줬던 걸 보면, 이 개들을 다 데리고 갔다고 해도 결국 제대로 써먹진 못했을 것이다. 물론 이 개들도 탐험대와 마찬가지로 결국은 추위와 굶주림으로 죄다 죽어 버렸다. 남극 한가운데에서 개들이라고 뾰족한 수가 있었던 것도 아닐테고 결국 스콧은 자신이 데리고 있던 개들이 어떻게 하든 죽음을 피할 수 없었다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설령 쇠약해졌지만 살아있는 개를 도축하진 못하더라도 죽은 후에라도 그 고기를 먹는 결단을 해야만 했다.
또한 도저히 개를 못 먹겠다면 차라리 아문센이 남기고 간 물자로라도 목숨을 연명했어야 했다. 이미 남극점에 도달했을 때 노르웨이 깃발을 목격한 상황이라면 자존심을 지킨다고 해서 달라질 게 없기 때문이였다.
아문센의 탐험대는 개를 잡아먹은 것은 물론이고 탐험 도중 발견하는 모든 동물들을 사냥해서 그 동물들의 고기도 식량에 포함시킬 만큼 철저하게 살아남으려는 노력을 했지만 스콧의 탐험대는 이런 노력도 없었다. 아문센이 남극 탐험에서 괜히 총과 작살을 구비한 게 아니었다. 영국인 아니랄까봐
스콧은 알 수 없는 이유로 보워스 소위를 마지막 탐험조에 합류시켰다. 본래 스콧의 계획은 150마일 지점에서 4명이 최종팀으로 남극점 정복을 나서는 것이었지만, 보워스가 합류한 것 때문에 인원은 5명이 되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비어드모어 빙하에 도달했을때 일행의 체력 소모가 너무 심해서, 남극을 정복하려면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은 인력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 결정은 탐험 계획을 뒤틀리게 만들어서 안 그래도 여유없이 빠듯한 식량과 연료를 무려 1인분만큼 더 소모되게 만들었고 스콧 탐험대의 물자 사정을 악화시켰다. 이 명령에 따른 보워스도 목숨을 잃었다.
스콧은 남극점의 온갖 광물도 관심을 가지고 수집하여 가져왔다. 말과 개를 모두 잃고 사람만 힘겹게 오는 와중에 16 ㎏이나 되는 이런 물건들은 탐험대원들에게 무거운 짐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 때문에 스콧이 살아돌아오는 데 실패했음에도 탐사 분야에서 나름대로 기여했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을 수 있었다. 아문센이 오로지 '남극점으로 고고씽'만 외친 것과 달리 스콧은 탐험일지에 기후와 여러 가지 자연 현상들을 죽기 직전까지 꼼꼼하게 기록했고, 이 기록과 수집품들은 남극의 과학적인 조사에 큰 기여를 했다.
비록 스콧은 처음에 선택을 잘못해서 이 레이스에서 승리를 아문센에게 빼앗겼지만 처음에 그렇게 출발했다 해도 사실 스콧은 살아서 생환할 수 있는 여러 가지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이 많디 많은 기회들을 스콧이 스스로 포기하거나 스콧이 실수해서 죄다 놓쳤고 그 결과는 죽음이었다.
4.8 행운
사람이 어찌할 수 없었던 악천후도 두 탐사대의 운명에 큰 영향을 주었다. 노르웨이 탐사대는 그다지 혹독한 눈보라를 만나지 않았고, 행여나 눈보라를 만났다고 해도 꼼꼼하게 준비해둔 연료로 큰 문제는 겪지 않았다. 하지만 스콧의 탐험일지에 따르면 영국 탐험대는 며칠이고 계속 불어대는 지독한 눈보라인 블리자드에 수시로 노출되었고, 안 그래도 몸을 녹여줄 연료도 조금밖에 없었던 그들에게는 재앙이었다.[29] 2002년에 미국 기상학자 수잔 솔로먼이 당시 아문센과 섀클턴, 스콧 탐험대가 기록한 기상 조건과 기후를 조사해 발표한 연구 자료에 따르면, 아문센 탐험대가 가장 운 좋게 강추위를 피한 반면, 스콧 탐험대는 가장 운 나쁘게 내내 추위와 눈보라에 시달렸음을 확인했다고 한다.
끝내주는 불운도 있었는데, 스콧 일행이 애써 튼튼히 구축한 저장고를 천신만고 끝에 찾아냈지만 캔버스 천으로 두른 코크 연료통에서 등유가 새어나와 옆에 쌓여있던 식료품들을 오염시켜 상당수를 먹을 수 없게 만든 것이다. 스콧 일행이 죽은 뒤 파견된 다른 탐험대들도 이 저장고들을 정밀 조사했는데, 연료 저장에 사용되었던 코크통은 매우 튼튼하고 추위에도 강한 것이어서 이렇게 터진 것이 그야말로 불운 중의 불운이었다고 기록했다.
한술 더 떠 스콧의 일기를 보면 저장고에 비축한 비스킷이나 고기가 한두 명 분량이나 줄어 있었다고 경악하는 대목이 나오는데, 스콧과 일행도 어째서 이렇게 되었는지 모르겠다고 적어놓고 있다. 앞서 말한 대로 막판에 보워스가 합류했으니 당연히 식량이 부족한 것이거늘 이것조차 파악하지 못하는 걸 보면 스콧이 당시 추위에 생각조차 못하는 거 아닐까 싶을 정도이다. 저장고의 식량이 줄어들만한 이유가 하나 더 있다. 스콧 탐험대는 극지 공격대 5명 외에도 3명이 더 있었는데, 이들은 남극에서 150마일 떨어진 지점에서 극지탐험대 5명과 헤어진 후 먼저 돌아왔다. 그들 역시 스콧과 마찬가지로 예상보다 훨씬 많은 칼로리를 소모하고 있었을 것이 분명하므로, 그들이 저장고에 들러서 식량 일부를 꺼내 먹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스콧은 이것도 계산 못한 것이다.
또한, 아문센도 거친 성격에 고집이 무척 센 편이어서, 이 당시 대원들 중 하나인 요한센과 자주 다투었다. 사실 요한센이라는 인물은 단순 대원이라고 볼 수 없는 것이, 아문센보다 선배였고 난센과 함께 유명한 북극 탐험에 나선 베테랑 탐험가였다.[30] 한 조직에 머리가 둘이니 당연히 지휘권에서 문제가 발생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 아문센이 '내가 리더임'이라고 공개적으로 선언하여, 남극점 탐험에서 요한센을 배제시키고 주변 섬 탐험으로 돌려 버리자(…) 요한센은 화를 참지 못하고 노르웨이로 돌아가고 말았다. 아문센은 남극점 도달에 성공하고 귀국한 뒤에도 앙금이 남아 있었는지 언론과의 인터뷰 등에서 요한센을 매우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결국 요한센은 이후 노르웨이에서 푸대접을 받다가 우울증에 빠져 자살하고 말았다.[31] 물론 이것만 가지고 아문센이 악랄하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이 불화 사건[32]은 나중에 1등 자리를 빼앗기고 열폭하던 영국이 아문센을 깎아내리는 수단으로 쓰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남극일기란 제목으로 국내에 번역된 스콧의 일기 번역자인 박미경도 서문으로 아문센을 이걸 들먹이며 악당같이 쓰고 있는 오류를 저지르고 있다. 하지만 박미경이 재평가해야한다느니 좋게 본 스콧도 이런 갈등이나 여러가지는 다를 거 없었다. 아니, 질투나 열폭으로 다른 이들을 폄하하던 걸 보면 훨씬 더하다.
게다가, 스콧 본인이 일지에 적은 불운담은 어느 정도 걸러들을 필요가 있다. 일단 스콧 일행은 근본적으로 정신적, 육체적으로 극도로 쇠약해진 상태였으며, 이런 상황에서는 건강한 상태에서는 충분히 버틸 수 있는 악천후 역시 몇배는 더 강하게 느껴질 수 있다. 게다가 스콧 자신이 상당히 감정적이라서, 성향 자체가 탐험 중의 여러 문제를 '불운'으로 돌리는 경향이 강하게 나타나기도 한다.
그러므로 당시 스콧은 탐험 도중에 겪어야 했던 심각한 문제들 때문에 모든 것이 절망적으로 느껴졌을 것이고, 그 때문에 날씨 문제 역시 정확한 측정 결과라기보다는 스콧이 '주관적으로 느낀 어려움'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반대로 아문센은 상대적으로 건강하고 활력 있는 상태로 탐험을 했기 때문에 이러한 것을 적게 느꼈을 것이다.
또한 근본적으로 이런 탐험에서 악천후를 피해갈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아문센처럼 기후가 좋을 때 가능한한 빠르게 이동하여 탐험 시간 자체를 줄이는 것이다. 따지고보면 나쁜 날씨는 언제든지 있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나쁜 날씨를 원망하기보다는 날씨가 좋을 때 빨리 빨리 행동하는 것이 합리적인 셈이다.
4.9 설맹 대비책
눈(雪)에 반사되는 자외선은 여름의 해수욕장보다 무려 4배나 강력하다. 사막의 알베도(빛 반사율)가 30%가 안 되는데 반해, 갓 내린 눈은 최대 85 %까지 육박하며, 눈이 쌓인 지 오래되어 알베도가 떨어진 경우에도 40%를 넘는다. 현대에도 스키장 자외선이라고 하여 피부 미용의 적으로 여겨서 경계하고 있는데, 이 자외선은 너무 강렬하기 때문에 계속 받다 보면 시력에 손상을 준다. 이것이 현대에도 극지 탐험대나 스키어들을 괴롭히는 설맹 증세이며 스키장에서 선글라스를 쓰는 이유이다. 강한 자외선이 계속 안구에 조사될 경우 자외선의 높은 에너지가 안구의 단백질을 변형시키고 칼슘염을 침착시켜서 백내장으로 진행된다. 이 때문에 이누이트족은 가는 구멍을 낸 나무판으로 편광 선글라스의 원조격 되는 도구를 만들어서 사용했다.
아문센은 태양이 그들이 가는 앞쪽에 떠 있을 때는 쉬고, 태양이 등 뒤에 있거나 밤이 되었을 때만 움직였다.[33] 이것은 눈밭이 햇빛을 반사하여 지나치게 많은 빛이 눈을 괴롭히고 시력을 떨어뜨리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스콧은 이 문제를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스콧 탐험대는 자외선에 계속 눈을 혹사시켰고, 남극점에 도착했을 무렵에는 심각한 시력손상을 입어 모든 대원들이 거의 장님이 되다시피 했다.
4.10 자금력
이것만큼은 스콧 탐험대가 더 유리했다. 앞서 설명했듯 노르웨이는 이제 막 독립국가가 되었고 해서 아문센은 그다지 많은 자금을 지원받진 못한 반면, 그 당시 최고 선진국 중 하나였던 영국 자체는 물론 많은 기업들이 스콧에게 자금을 지원해줬다. 그러나 위의 항목들을 보면 스콧이 돈을 효과적으로 쓰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4.11 결론
자세히 보면 스콧 탐사대가 유리한 것은 돈 말고는 하나도 없었다. 그마저도 제대로 쓰지 못했고. 극지 생존에 최적화된 이누이트의 방식을 철저하게 받아들이고 기본적인 식량에 대한 영양분 조사까지 꼼꼼히 한 아문센 탐험대, 반면에 앞선 섀클턴 탐험대의 실패에서 전혀 교훈을 얻지 못하고 대충 '이렇게 하면 되겠지'하며 무작정 뛰어든 스콧 탐험대. 결론은 현지화의 차이다.
쉽게 정리하자면 기술적, 경험적으로 모든게 부족하면서 단지 근성이 모든걸 결정한다는 정신승리적 사고방식에 취하고, 자존심만 높으면 어떤 위험한 일에 처할 수 있는지를 알 수 있게된다.
5 결과
아문센은 세계 최초로 남극점을 정복했고, 아문센의 휘하 대원들은 전부 무사히 돌아왔다. 그러나 스콧 탐험대는 귀환하던 도중 모조리 죽었다. 5명 중 한 명도 살아서 돌아가지 못한 것이다. 위에 있는 여러 가지 요인들을 보면 스콧의 죽음은 피할 수 없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5.1 어니스트 섀클턴
스콧 탐험대가 겪은 어려움을 먼저 겪은 게 바로 섀클턴의 탐험대이다. 조랑말과 설상차를 썼다가 낭패를 본 것도 그렇고, 사람의 힘으로 썰매를 끌며 비어드모어 빙하를 넘어야 했던 것도 그렇다. 심지어 스콧 탐험대의 코스까지도 섀클턴이 먼저 간 길을 따라간 것이었다. 이 정도면 섀클턴 탐험대에서도 다수의 희생자가 나와야 마땅하다.
하지만 섀클턴은 단 한 명의 대원도 잃지 않았다. 남극점까지 156 ㎞를 남겨둔 시점, 돌아갈 길을 포기한다면 인류 최초의 남극점 정복자가 될 수 있는 상황에서 '식량 부족 때문에 더 이상의 전진은 불가능하다'고 순순히 인정하고는 발걸음을 돌렸던 것이다. 이때 섀클턴은 이렇게 말했다.
죽은 사자보다는 산 당나귀가 낫다.
섀클턴 역시 아문센과 마찬가지로 물러설 때를 알았던 것이고, 그 결정이 섀클턴과 그의 대원들을 살렸다. 돌아가던 중에도 추위와 굶주림으로 고생하기는 했지만, 전원이 살아서 귀환했던 것이다. 극도로 위험한 극지 탐험에서 전원이 무사히 돌아온다는 것은 그 자체로 굉장한 업적이었기에 섀클턴은 그가 남극점 정복에 실패했음에도 칭송받았다. 남극점까지 도달하지 못했다 뿐이지 당시로는 가장 남극점에 접근한 탐험대였고, 여러가지 과학적 성과를 올렸다는 이유도 있었다. 그리고 그의 영광은 스콧의 열폭(...)에 한몫 해서 결국 스콧이 남극점으로 떠나게 되는 계기 중 하나가 되었다.
아문센이 남극점을 정복한 후 섀클턴은 남극 횡단 계획을 추진하였는데, 이때 그는 과거의 실패를 교훈삼아 개썰매, 패미컨, 육분의 등 아문센이 유용하게 쓴 장비들을 도입했다. 불운하게도 웨들해 한가운데에서 얼어붙은 배가 침몰하는 바람에 대원 27명과 함께 조난당하지만, 스콧과 달리 탐험대원 전원을 생환시킴으로서 불멸의 명성을 얻게 된다.
1956년 영국 지질학자인 레이먼드 프리슬리(1886~1974)는 늘그막에 세 사람을 이렇게 회고했다.
- 나는 아문센, 섀클턴, 로버트 스콧 세 사람을 모두 만나보고 같이 일도 하기도 했습니다. 이 세 사람은 각자 특징이 있더군요. 우선 스콧은 과학탐사대를 이끌 대장으로서 누구도 따라가지 못할 겁니다. 다음 아문센은 빠른 움직임과 꼼꼼한 준비로 전문적인 속전속결 탐험대장으로 누구도 따라가지 못하죠. 하지만 절망적인 상황에 빠진다면 무릎을 꿇고 섀클턴을 보내달라고 기도하겠습니다.
이분이 이렇게 섀클턴을 칭송한 이유는 그만한 업적이 있기 때문이다. 더 자세한 그의 위업은 어니스트 섀클턴 참고.
5.2 최후의 기회?
스콧 탐험대가 남극점에 도착한 후, 아문센 탐험대가 일부러 남기고 간 식량과 순록가죽으로 만든 의복을 발견했다. 식량부족과 추위에 시달리는 스콧 탐험대에게는 큰 선물이었지만, 스콧은 여기에 일체 손을 대지 않았다.
반론도 있다. 남극점에 남은 것 중에 식량은 없었고, 돌아가는 데 필요없다고 판단하여 버린 여분의 장비뿐이었으며, 스콧 탐험대를 위해 일부러 남긴 것도 아니었다는 것. 실제로 아문센은 남극점에 도달하는 순간까지 영국의 설상차를 비롯한 충분한 보급과 '영국인' 스콧의 집념에 경계심을 늦추지 않고 있었다. 아문센 역시 귀로에 식량사정으로 고생을 한 만큼 만일 남겼더라도 스콧을 위한 동정심 같은 목적은 아니었다는 주장도 있다. 아문센 일행이 남긴 물자 중에서 가죽장갑 한 쌍은 남극점에 오는 도중 장갑을 잃어버린 보워스가 가져갔다.
6 대결 이후
북극 정복에서 로버트 피어리와 쿡 의사 간에 논쟁이 있었던 것처럼, 아문센은 탐험의 중요성뿐이 아니라 탐험 결과를 홍보하는 언론의 중요성도 잘 알고 있었다. 그 때문에 남극에 도착했을 때는 철저하게 지자기 관측 결과 등의 인증자료를 뽑았고, 북극 정복 때처럼 논쟁의 여지를 남겨두지 않았다.
6.1 영국의 반응
런던에서는 스콧이 이겼다는 헛소문이 요란하게 나돌았지만, 아문센의 승리가 확실해지자 영국인들은 아문센에게 비난을 퍼부었다. 타임스에서는 아문센이 갑작스러운 남극행과 비밀스러운 준비계획을 성토하고 나섰다. 영국 언론은 아문센의 꼼꼼한 준비를 수치스러운 것이라고 꼬집었고, 스콧이 취한 "신사적인 아마추어 정신"과 비교할 때 아문센의 "전문가 정신"은 비겁한 것이고 은밀한 계획 추진은 "속임수"라고 매도했다.
예를 들어 아문센이 영국을 방문했을 때, 영국인들은 개의 활약을 특히 강조하며 아문센의 노력을 깎아내렸다. 환영의 말을 한 사람은 어니스트 섀클턴 정도이고, 나머지는 형식적인 환영만을 해주었으며 고의적으로 환영장소를 작은 곳으로 정할 정도였다. 큰 곳은 스콧 환영에 써야 하니까 말이지. 그러나 아쉽게도 그 큰 장소가 쓰이는 일은 없었다.[34]
사실 영국이 아문센을 푸대접한 것은 아문센이 북서 항로를 개척했을 때부터였다. 존 프랭클린을 비롯한 수많은 영국 탐험가들이 목숨을 바쳐도 이룰 수 없었던 북서 항로 통과를 식은 죽 먹듯 쉽게 해치운 아문센을 영국이 좋아할 리가 없었던 것이다. 개척한 게 죄냐? 기분 나쁘게 한 게 죄다. 실제로 영국은 북서 항로를 처음으로 개척한 사람에게 준다고 상금을 걸었지만, 그 상금을 받아야 할 아문센에게는 한 푼도 안 주고 엉뚱하게도 행방불명된 존 프랭클린 탐험대[35]를 수색한 탐험가들에게 줘 버렸다. 이건 뭐 아무리 참으려고 해도 참을 수준이 아니다. 이런 악연 때문에 아문센은 영국에 가지 않으려고 했지만, 강대국 영국과 노르웨이의 관계악화를 우려한 노르웨이 국왕의 어명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영국에 갔다.
당시 영국인 중에서는 유일하게 어니스트 섀클턴만이 아문센의 업적을 칭송했다. 스콧의 아내 캐슬린(1878~1947)은 아문센을 칭송한 섀클턴의 발언을 듣고 "난 그 자를 파멸시키는 일에 앞장설 거예요!"라고 노골적으로 섀클턴에게 격분을 퍼붓기도 했다. 하지만 섀클턴은 파멸은 커녕 마지막까지 현역으로 활동하며 위대한 탐험가로 기록되었고(섀클턴의 평가는 스콧보다 훨씬 높다!) 정작 캐슬린은 보험금과 여러 일로 스콧의 친가와 갈등을 빚는 안 좋은 일을 벌인 끝에 재혼하여 스콧 가와 절연했다. 나중에 스콧 가와 화해는 했지만 이 당시 스콧 가에선 캐슬린을 비난했다. 그리고 캐슬린은 역사적으로 듣보잡이 되었다
다른 이야기지만 인류 최초 우주인이라는 기록을 유리 가가린에게 넘긴 미국이 열폭하며 2번째 우주인인 앨런 셰퍼드가 더 위대하다능~ 이라며 미국 홀로 정신승리를 하던 것과 비슷하다. 그러나 7,80년대 반공이 엄청났던 한국에서조차 인명백과사전만 봐도 가가린은 꼭 나오곤 했지만 셰퍼드는 생략했던 경우가 많았듯이 세계적으로 스콧은 그저 패하며 얼어죽은 탐험대 정도로 알아줄 뿐이었다.
6.2 영국을 제외한 세계 각국 반응
세계인들은 아문센의 승리에 찬사를 보냈다. 그 중에서도 영국과 역사적인 라이벌인 프랑스가 더욱 즐겁게(...) 환호성을 울렸다. 스페인도 프랑스만큼 극단적이지는 않았지만 풍악을 울리며 아문센을 크게 축하해줬다.
6.3 노르웨이의 반응
물어보면 잔소리, 안 봐도 비디오다. 국왕인 하콘 7세는 15년 뒤에 북극을 비행선으로 탐험하려던 아문센이 돈이 부족하다고 하소연하자 "노르웨이를 세계에 알린 당신의 부탁을 왜 마다하겠소?" 라며 기꺼이 돈을 모조리 제공하여 비행선을 구입해줬다. 이후 아문센이 죽자 국왕도 명복을 빌며 대리인을 보내어 국장으로서 장례를 치렀을 정도였다.
6.4 평가의 변화
스콧의 언플력 vs 아문센의 고지식함
스콧의 죽음이 알려지고 난 다음부터 그에 대한 옹호자가 급격히 늘어나게 된다. 당시는 아직 낭만주의적인 분위기가 많았고, 죽음이 닥쳐오는 가운데서도 끝까지 걸어간 스콧 탐험대의 여정은 아무튼 감동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었다. 또한 스콧의 언플력문필력이 뛰어나서 그가 남긴 일지도 대단히 명문이었기 때문에 영미권 사람들에게는 특히 큰 감명을 주었다.
물론 아문센도 탐험일지를 정리하여 '남극'이라는 책으로 출판했다. 그러나 아문센의 기록은 그다지 높은 평가를 받지 못했는데, 아문센의 문필력이 독자들을 지치게 할 정도로 엉망인 것은 아니었지만 그가 실용적인 성품이어서 매우 담담하고 객관적인 내용으로 글을 썼던 탓에, 일반 대중 독자들에게 아문센의 글은 심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근본적으로 탐험이 너무 순조로워서[36] 대중들이 좋아하는 '고난', '희생', '극복', '비극' 같은 극적인 요소는 조금도 없었기 때문.
그 때문에 스콧은 '위대한 패배자', '안타까운 제2인자' 정도로 불리며, 영미권에서 유명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오히려 세계에 널리 알려지고 호평도 받게 되었다. 상대적으로 아문센은 그 자신도 '냉혈한', '스콧을 죽게 내버려두었다.'는 비난 때문에 고통받게 된 것이다.
그러나 20세기 후반에 이르면 합리주의가 기본적인 이념으로 대두되는 현대로 접어들게 되면서 평가는 다시 재반전 되는데, 애초에 스콧처럼 사람이 죽을 상황에서 용기를 보이는 걸 칭송하기 이전에 사람이 자신이 죽을 비극적인 상황으로 스스로를 몰고가지 않는게 더 낫지 않느냐는 이성적인 주장이 대두되었기 때문. 과거에는 '낭만'으로 평가되었던 스콧의 탐험은 점차 '무계획', '무책임', '징징(…)'이라는 비판을 받게 되고, 아문센의 계획적인 탐험 활동이 높은 평가를 받게 되었다. 심지어 스콧의 죽음 자체에 대해서도, 어떻게든 살려고 하면 살 수도 있었지만 패배자로 살아남는 것보다 사람들이 자신을 '숭고한 순교자'처럼 기억하기를 원해서 동료들까지 같이 죽음에 몰아 넣었다는 극단적인 평가까지 있다.
여기까지 글을 다읽은 사람이면 스콧이 그 악상황과 오판에도 불구하고 어찌어찌 남극점까지 도착했다는 사실이 굉장히 흥미로울것이다. 그런데, 어떤 탐험이라도 탐험의 성공과 실패보다 '목숨'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것은 모든 탐험사에 있어서 상식이다. 어니스트 섀클턴의 경우가 그렇고, 프리드쇼프 난센도 그랬다. 식량 부족이나 체력 한계, 위기를 고려하지 않고 목숨을 버리기로 결심했다면 '목표에 도달할 수 있었던' 탐험가는 사실 무수히 많았지만 결코 목숨보다 중요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포기하였다.
일반인들이 가볍게 운동을 하거나 등산을 할 때도 '무리하지 않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으로 여겨진다. 생명이야 말로 무엇보다 소중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스콧은 탐험 과정에서 이 원칙을 망각했거나 무시했기 때문에 남극점에 도달했던 것이다. 현대에도 극한지 탐험에서 자신의 능력을 과신하여 '어찌어찌 해보려다가' 결국 조금 더 목표지점에 가까이 가긴 했지만 귀환에 실패하여 목숨을 잃는 탐험가는 적지 않게 나타난다. 스콧이 여러 오판에도 불구하고 남극까지 갈 수 있었던 것이 아니라, 스콧이 남극까지 간 것 자체가 바로 탐험대의 생명을 앗아가버린 가장 중대한 '오판'이었다고 봐야 한다. 스콧은 자기 목숨과 남극점 도착을 맞바꿨다고 볼 수 있다. 근성론
- ↑ 사족으로, 이 책에는 로버트 피어리가 먼저 북극점을 정복했다고 나와있다.
- ↑ 또 어린이용 책 중 여러 인물들을 함께 다루는 위인전류에서는 스콧에 대해서도 다루기도 한다. 물론 이런 책들은 여러 사람을 한꺼번에 다루다보니 간략화되는데다 어린이용이라 스콧의 미친 짓(...)들은 대다수 생략된다. 적당히 '스콧은 열정은 있었지만 계획을 제대로 세우지 않았다.' 정도만 표현한다.
- ↑ 간단하게 묘사되긴 한다. 자신이 멍청했다고 자책하는 스콧에게 그러게 왜 그렇게 했냐고 깐족대는(...) 노빈손의 모습으로
- ↑ 당시에는 그렇게 알려졌다. 1996년 밝혀진 바 로버트 피어리는 북극점에 매우 가까이 갔을 뿐이다. 자세한 내용은 로버트 피어리 항목 참조.
- ↑ 스콧이 섀클턴의 탐험 보도를 보고 "다음 번에는 성공하겠군."이라 했다고 한다.
- ↑ 당시 전부 영국 영토였다.
- ↑ 참고로 이 당시 남극은 주인이 없는 땅이긴 했고, 한 50년 쯤 뒤인 1959년에 남극조약이 맺어져 영유권 주장을 할 수 없게 되었다.
- ↑ 극지방은 기울어진 공전축 때문에 여름과 겨울에 백야(낮이 계속되는 현상)와 극야(밤이 계속되는 현상) 현상이 나타난다.
- ↑ 다만 이때 찍은 사진의 상당수가 귀환길에 카메라 고장으로 인해 유실되어 버렸고, 비욜란이 자신의 카메라로 찍은 사진 몇 장만이 남아 있다.
- ↑ 아닌 게 아니라 아문센의 예측은 정확했다. 남극점에 도착한 스콧은 이미 물자부족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콧 탐험대는 장갑을 잃어버린 보워스가 장갑 한 쌍을 챙긴 것 말고는 자존심 때문에 아문센이 남기고 간 물자를 쓰지 않았다. 여담으로 아래 '최후의 기회?' 문단에서 설명하듯, 이걸 걱정해서 남긴 게 아니라 그냥 버리고 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 ↑ 왔던 길을 정확히 찾아갈 수 있었던 것도 그동안 일정 간격으로 깃발을 꽂아 두었기 때문이었다. 반면 스콧 탐험대는…
- ↑ 아문센은 혹 자신이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할 경우에 대비하여 스콧에게 증거품을 남겨두려는 의도로 편지를 남긴 것이었지만 실제로는…
- ↑ 불행히도 모슨이 이끌었던 탐험조인 파 이스턴 파티는 악천후와 잇따른 사고로 탐사에 실패했고, 대원 두 명과 개를 모조리 잃어 모슨 혼자만 가까스로 생환했다.
- ↑ 진짜 '식량'은 진작에 바닥났고 연료가 없어 생으로 씹어먹던 '홍차잎'도 다 떨어졌다.
- ↑ 해당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경사를 내려가는 알파인 스키 말고도 크로스컨트리 스키처럼 평지같은 곳에서 타는 스키도 있다.
- ↑ 다문화(?) 아이도 만들었는데 유전자 검사 결과 아문센은 혐의를 벗었고 대원 중 한 사람이라고 한다. 출처.
- ↑ 어떤 위인전에서는 이를 조금 순화해서, 더 이상 달릴 수 없을 정도로 쇠약해진 개들을 짐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죽인 걸로 표현했다. 또 옛날 위인전에서는 죽고 나서 자신의 고기까지 바친다면서 개의 충성심을 극찬하기도 했다.
- ↑ 물론 일반적으로 스키 하면 떠올릴 알파인 스키가 아니고 노르딕 스키(크로스컨트리 스키)이다. 발과 스키가 꽉 물려있어 경사를 빠르고 안정적으로 내려올 수 있는 알파인 스키와는 달리 노르딕 스키는 발 뒤꿈치가 떨어져 있어서 걷듯이 이동할 수 있다.
- ↑ 그런데 아무리 기술자라도 남극에서 고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 ↑ 과거 몽골 제국의 역참 제도도 추운 북부에서는 말이 아니라 개를 이용했다. 그런데 몽골 북부보다 더 추운 남극에 말을 끌고 간다면...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 ↑ 정확히 말하면 페미컨이라고 고기와 기름을 섞어서 굳힌것이다. 그리고 지방은 같은 무게의 탄수화물이나 단백질에 비해 두배 이상의 열량을 낸다
- ↑ 사하 공화국에는 극지방의 기후에 적응한 품종도 있긴 하다.
- ↑ 이글루의 원리와 비슷하다.
- ↑ 영국 갤런을 리터로 환산하여, 소수점 첫째 자리에서 반올림함. 아문센이든 스콧이든 미국 갤런을 기준으로 물품을 기록했을 리 없으므로 영국 갤런일 것이다.
- ↑ 당시 스콧 탐험대가 남극에 가져간 것에 가깝게 블렌딩한 홍차는 영국의 대형 유통업체로 유명한 테스코에서 제조하고 있다. 한국에서도 테스코의 자회사인 홈플러스에서 '캡틴 스콧 블렌드'라는 이름으로 된 홍차를 구할 수 있었지만 테스코가 홈플러스를 매각하기로 하면서 더 이상 신규 물량이 들어오지 않게 되었다. 이 홍차는 다른 홍차에 비해 맛이 매우 진한 편이라 밀크티를 만들기에 적합하며, 판매 수익금 중 일부는 스콧 탐험대의 전초기지였던 남극 캠프를 관리하는 영국 남극유산기금(Antarctic Heritage Trust)에 기부된다.
- ↑ 사실 극지방 탐험에서 채소는 그렇게 크게 필요한 물건이 아니었다. 스콧 탐험대가 남극에서 기지를 세운 후, 겨울을 보내면서 가장 많이 남았던 음식이 바로 오이절임인 피클이었다. 채소가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해서 가져왔는데, "극지에서는 몸 자체가 피클 같은 음식을 거부하는 것 같다"고 탐험대원이 증언했듯이 아무도 손을 대지 않았다고 한다.
어쩌면 그냥 맛이 없어서 그런 것 아니었을까. - ↑ 그러나 이후 한국의 남극탐사대가 신선한 채소를 먹고싶어 고생했고 지금도 온실에서 키운 새싹채소를 큰 위안거리로 여기는 걸 보면 문화별 식습관 차이도 무시할 수 없을 듯하다.
- ↑ 1980년대 한국 위인전에서는 아문센이 개를 쏴 죽일 때 곁에서 개들의 명복을 빌며 울면서 기도했다고 나오기까지 했다.
- ↑ 스콧의 일기를 보면 영하 40~50도의 추위 및 눈보라에 시달렸다고 적혀 있다.
- ↑ 물론 위인전은 난센만 있고 극화에서는 대부분 콩라인으로만 묘사된다. 아무래도 아문센 사건 이후의 행보 때문에 그런 듯하다.
- ↑ 다만 아문센을 탓할 수도 없는게 요한센은 난센과의 북극 탐험 이후 이런저런 개인적인 일의 실패로 알콜중독에 시달렸다. 남극탐험도 기술고문의 자격이자, 높으신 분의 강요 때문에 데리고 온 것이었다. 이런 상태의 사람을 리더로 삼아서 탐험에 나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 ↑ 사실 스콧 자신도 이런 류의 불화로 많은 인원들을 잘랐다.
- ↑ 한겨울이나 한여름이 아닐 때는 극지방에서도 해가 대강(...) 뜨고 진다. 백야 참조.
- ↑ 아문센이 영국을 방문한 이후, 스콧의 시체가 남극에서 발견되었다.
- ↑ 1786~1847/ 남극탐험에 나섰다가 전원 몰살당했다.다나카 요시키의 월식도의 마물에서도 언급되는데 1857년 이 소설 배경에서도 프랭클린 부인은 남편이 안 죽었다고 자비를 들여 남편과 탐험대 흔적을 찾아나섰지만 나중에 시체 및 기록이 발견된다.
- ↑ 물론 순조롭다는 것도 남극이란 극한 지역의 탐험 치고는 순탄했다는 것이지 위에 나온 것처럼 아문센 및 대원들도 자잘한 동상과 부스럼, 피로에 시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