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빈 장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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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명의 드라마에 대해서는 장희빈(KBS)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조선의 역대 왕비
숙종
인현왕후 
숙종
옥산부대빈
숙종
인현왕후
(복위)
빈호희빈 장씨(禧嬪 張氏)
옥산부대빈 장씨(玉山府大嬪 張氏)
이름장옥정(張玉貞)
출생1659년(효종 10년) 음력 9월 19일
사망1701년(숙종 27년) 음력 10월 8일
본관인동(仁同)
배우자숙종
자녀경종
재위기간1686년~1688년(후궁:숙원)
1688년~1689년(후궁:소의)
1689년(후궁:빈)
1689년~1694년(왕비)
1694년~1701년(후궁:빈)

1 소개

장씨를 책봉하여 숙원(淑媛)으로 삼았다. 전에 역관 장현은 국중(國中)의 거부로서 복창군 이정과 복선군 이남의 심복이 되었다가 경신년의 옥사에 형을 받고 멀리 유배되었는데, 장씨는 곧 장현의 종질녀이다. 나인(內人)으로 뽑혀 궁중에 들어왔는데 자못 얼굴이 아름다왔다. ㅡ《조선왕조실록》 숙종실록 17권, 숙종 12년(1686년) 12월 10일 경신 4번째 기사

역대 조선 왕비들 중 유일한 평민 출신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높은 곳까지 오른 여인[1]

희빈 장씨, 본명은 장옥정(張玉貞).[2] 장녹수 아니다 몇몇 사람들이 장희빈을 이름으로 잘못 알고 있다. 희빈은 후궁의 지위 중 하나. 내명부 정1품 후궁 '빈'(嬪)으로서 받은 작호가 '희빈'이다. 그녀의 오빠의 이름이 장희재라서 '희'자 돌림인줄 알고 착각하기 쉽다.

숙종후궁이었으며, 한 때는 왕비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그리고 경종의 생모. 조선의 역사상 궁녀 출신으로 왕비까지 올라간 유일한 여성이다.[3]

공식적인 역사기록인 조선왕조실록에서는 그녀의 미모가 아름다웠다고 기록하고 있다.[4] 이 때문인지 후대에 그녀를 주인공으로 한 사극에서는 장희빈 역할을 맡는 배우는 무조건 미인을 캐스팅한다. 역사적 인물을 재해석한다고 해도, 미인이 아니었다는 설정이나 미인이 아닌 배우를 캐스팅하는 경우가 없다.

아들인 경종이 그녀를 추존했기에 그녀의 정식 칭호는 옥산부대빈(玉山府大嬪)이다. 그녀를 기리는 사당의 이름도 대빈궁(大嬪宮)이다. 그렇지만 그녀의 묘소(대빈묘)는 왕을 낳은 다른 후궁들과 다르게 '원'(園)이 아니라 '묘'(墓)다.

그녀에 관해 널리 알려진 일화로는 임금의 승은을 받은 궁녀였던 숙빈 최씨를 잔혹하게 매질했다거나[5] 사약을 거부하며 저항하다 비참하게 죽었다는 이야기, 심지어 사약을 거부하는 과정에서 아들 경종의 성기를 잡아당겨 성불구로 만들었다는 이야기인용 오류: <ref></code> 태그를 닫는 <code></ref> 태그가 없습니다에 어머니의 비참한 죽음을 목도한 데서 온 정신적 충격에서 비롯된 것일 가능성이 크며, 실제로 경종이 성불구였다는 근거는 없다. 경종이 성불구라는 말 또한 서인 쪽에서 은근슬쩍 나오기 시작한 말이다.</ref>까지 있으나 모두 정확한 근거가 없다. 야사나 후대의 소설, 드라마로 각색되면서 나온 이야기들이다. 기황후천추태후, 명성황후와 반대로, 나라의 쇠퇴나 멸망에 기여한 인물도 아닌데 사실과 다른 루머들로 두고두고 악녀의 전형이 되어 까인 셈.

아이러니하게도 한국 대표 미남배우 중 하나인 장동건이 바로 이 장희빈과 같은 본관이다.

2 생애

2.1 집안 배경

역관 장형[6]의 막내딸. 그녀의 아버지 장형은 역관 출신으로 사역원 정9품 봉사로 재직하였지만 일찍 은퇴하였다가 그녀가 막 11세가 된 1669년 1월 12일에 사망했다. 이후 당숙 장현의 슬하에서 자랐다. 형제는 이복오빠인 장희식과 동복오빠인 장희재가 있었고 9살 이상 위인 동복언니가 1명 있었다.

할아버지 장응인은 통문관지에 행적이 기록된 뛰어난 역관으로서 생전 최고 관직이 정3품 첨지중추부사(무관직)에 이르렀고, 전쟁 중에 무관으로 참전한 바 있으며 시재(詩才)도 뛰어난 인물이었다. 외할머니 변씨는 조선 최고의 갑부 역관으로 유명했던 변승업의 당고모로 소설 허생전에도 모델로 등장한 변부자 가문의 딸이었다. 외삼촌 윤정석도 시전의 거부였고, 당숙인 장현은 효종 8년에 이미 정2품 자헌대부를 제수받은 거물 역관으로 무역에도 종사해 국중거부라 불릴 정도로 많은 재산을 모았으며, 종1품 숭록대부까지 올랐던 인물이다. 거기에 장현 형제의 자식들은 대부분 무관 및 역관, 혹은 의관으로 고위직에 있었다.

그녀의 일족이 조선에서 손꼽히는 대부호였으며 사회적 위치 또한 결코 떨어지지 않았음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그러니까 양반 사대부가 명문의 여식은 아니었더래도 잘나가는 외교관-재벌가 가문 따님은 되었단 소리.[7]

흔히 '장씨의 어머니 윤씨[8]가 조사석 처갓집 집안의 노비였고 그 당시 조사석과 사통했다더라'는 설이 알려져 있지만 이는 숙종실록 13년 6월 16일 3번째 기사에 적혀있는 기록으로 노론 측의 사관이 '그랬다 카더라'라고 적어놓은 것에서 기인하고 후일 소론에 의해 수정된 숙종실록보궐정오 같은 날짜 기사에 '그거 허황된 소리임'이라고 정정했던 기사다.숙종실록보궐정오 기사[9] 외삼촌이 시전의 상인이고 장옥정이 사가로 내쳐졌을 때 옥정의 집 바로 옆에 외삼촌의 집이 있었다는 걸 생각하면 신빙성이 떨어지는 얘기기도 하다. 그렇다면 이런 얘기가 왜 나왔는지 의문이 생길수도 있을 텐데, 다시 말하지만 숙종실록 편찬 당시 실록청 총재관인 민진원이 인현왕후의 둘째 오빠다(...).

물론 그렇다고 실록의 내용이 거짓이라고 볼 수는 없다. 애시당초 실록에서 주의 깊게 봐야 하는 게 '주관적인' 사관의 평이며 이런 평가가 들어가긴 해도 역사적 사실을 없애버릴수는 없는 일이다. 또 사관의 평 정도는 이 보궐정오 건에서도 볼 수 있듯이 잘못되었다고 정정될 수 있다. 거기에 이 보궐정오에 나오는 사신의 평가도 경종과 장희빈의 우호세력인 소론에 의해 수정되었다는 점도 감안해야 할 듯. 무엇보다 민진원이 무조건 자신의 누이에게 유리한 기록만 남길수 있었다면 숙종이 인현왕후 폐위 당시 그녀를 비하했던 기록을 지워버렸어야 정상일 것이다물론 사관평으로 구구절절하게 뒷말이 나오긴 하지만, 실록에서 주의해야 봐야 하는 점이 바로 이것이다. 무조건 역사는 승자의 기록 운운하면 다가 아니다.[10] 일단 실록에는 당시 국가적으로 욕을 먹던 인간이라도 소설을 지어내서 욕하진 않는다 최소한 당대에도 말이 안된다고 까여도 실제로 존재하던 풍문을 집어넣는다. 예컨대 연산군월산대군 부인 박씨와 간통을 했다는 소문이나 황희가 박포의 아내와 간통을 하고 불법적으로 노비들을 불렸다는 소문 등이 그것이다. 황희는 연산군이나 장희빈과는 다른 위인이지만 그건 넘어가자[11]

2.2 입궁

장씨의 입궁시기는 사실 설이 분분하다. 흔히 사극에서는 서인에 맞선 남인의 책략으로 그녀가 입궁했다고 나오는 경우도 있으나[12] 경신환국 당시 장씨의 나이가 이미 22세였기에 억지스러운 면이 있다. 장씨가 10세의 어린 나이에 아비 장형을 잃고 생계가 어려웠던 탓에 궁녀가 되었다는 주장과 당숙 장현의 권고를 받아 막내딸인 장씨를 입궁시켰다는 주장이 존재한다.

그러나 효종 때 이미 막대한 부를 쌓은 장현도 딸을 궁녀로 입궁시켰으며, 현종 5년에 대왕대비전의 궁녀로 뽑혔다가 이미 사주가 오간 상대가 있으니 정혼을 한 것과 마찬가지라는 이유로 출궁된 역관 최우의 딸의 전례가 있는 만큼, 희빈 장씨의 가세가 빈궁하여 궁녀가 되었다는 가설은 억측으로 보인다. 생부 장형의 옥산부원군신도비 기록에 따르면 희빈 장씨가 어린 나이에 간택되어 입궁해 성장한 것으로 되어 있으며, 실록에도 머리를 스스로 땋아 올리기 전에 입궁했다고 기록이 되어 있다.

어쨌든 입궁한 뒤에 인조의 계비 자의대비의 수발을 드는 궁녀로서 생활한 것으로 보인다.[13].

2.3 출궁에서 재입궁까지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경신년에 숙종의 첫번째 왕비인 인경왕후 김씨가 승하한 후 비로소 은총을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으므로 숙종의 승은을 입은 시기는 1680년으로 보인다. 그러나 1681년(숙종 7년) 5월 14일, 숙종은 인현왕후와 국혼을 올렸고, 남인의 영수 허적의 서자 허견이 꾸민 역모가 적발되면서 경신환국이 발생했다.[14]

그리고 이 시기에 숙종의 어머니인 명성왕후 김씨가 장옥정을 궁 밖으로 쫓아냈다. 궁 밖으로 쫓겨나서는 숭선군의 부인 신씨가 돌봐줬다고 하는데, 숭선군 부인 신씨는 자의대비의 조카가 되기 때문에 자의대비의 언질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장옥정의 정확한 재입궁 시기는 알기 어렵지만, 실록을 통해 유추해볼 수 있다. 1686년 7월 6일, 당시 이징명이 상소를 올렸다.

“궁인(宮人)으로서 은총을 받고 있는 자가 많은데, 그 중의 한 사람이 역관(譯官) 장현(張炫)의 근족(近族)이라고 합니다. (중략) 예로부터 국가의 화란이 다 여총(女寵)으로 말미암고, 여총의 화근은 대개 이러한 사람에게서 나왔습니다. 전하의 명성(明聖)으로 어찌 알지 못할 바가 있겠습니까마는, 신은 바라건대, 성상께서 장녀(張女)를 내쫓아서 맑고 밝은 정치에 누를 끼치지 말게 하소서.” ㅡ 《조선왕조실록》숙종 17권, 1번째 기사

이 시기에 이미 장씨가 재입궁을 한 상태라는 걸 알 수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재입궁은 라이벌인 인현왕후에 의해서 이뤄졌는데, 숙종의 어머니 명성왕후가 죽고 난 뒤에 인현왕후가 궁궐로 다시 불러들였다고 기록에 남아있다.

보통 재입궁하기까지 기간에 옥정이 궁핍한 삶을 살았다고 묘사하는 매체가 많다. 하지만 옥정이 궁에서 나온 지 얼마되지 않아 그녀의 당백부인 장현이 유배에서 풀려나와 예전처럼 재물을 모으기 시작했고, 일반적으로 이 당시에 한량으로 놀기만 했다고 알려진 오빠 장희재는 이미 무과에 급제하여 종 6품 포도부장을 맡고 있었다. 또 외삼촌 윤정석은 면포를 팔던 시전상인이었다. 장씨는 이 시기 출궁 궁녀의 법도에 따라 사가에 머무르기만 했겠지만, 이런 정황상 오히려 부족함이 없이 유복하게 지냈을 가능성이 높다. 어쨌거나 이 기간에 장씨가 숭선군 부인 신씨, 그 아들인 동평군, 조사석 등 남인과 접촉하면서 정치색을 띄게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도 가능하다.

2.4 후궁에서 왕후로

“지금은 천재(天災)가 거듭 이르러서 백성의 생명이 거의 죽게 된 때이므로, 바로 성상께서 지성으로 백성을 구제하여 다른 생각은 하지 말아야 할 시기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듣건대, 궁중 안에 요즈음 집을 짓는 일이 있어 목재를 실어 오고 목수를 불러들이는데, 반드시 이른 아침과 늦은 저녁에 하도록 하여 외부 사람들에게 알지 못하도록 했다고 하는데 (중략) 청컨대, 지금부터는 궁중 안에서 집을 짓는 크고 작은 일들을 일체 중지시키도록 하소서.” ㅡ《조선왕조실록》 숙종 17권, 4번째기사

1686년 9월 5일의 기록이다. 요약하자면, 천재지변으로 나라가 난리인데 궁궐에서 몰래 공사를 하다니 당장 중지하라는 소리다. 이 시기에 숙종은 장씨를 위해 집을 짓고 있었는데, 공사를 중지하라는 말을 서인들의 견제로 해석하기는 어렵다.

실제로 이 때, 나라 곳곳에서 천재지변을 벌어지고 있었다. 7월부터 9월 초의 기록만 보면, 호남 일대에 바람과 폭우가 내리고, 폭풍우가 불어서 피해를 입고, 찬 비가 내리는데 길에서 찬 비를 맞고 죽은 사람이 나오고, 경상도 각 고을에 큰 비와 우박이 내려서 피해 상황에 대한 보고가 올라온다. 나무가 부러지고 기와가 날아가고 심지어 눈까지 내려서 가을 추수를 기대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여름에 장마가 있는 건 당연하지만, 눈까지 내리는 건 기상이변이 맞다.

현종 때에 경신대기근 이후로 조선의 기후 상황은 좋지 못했다. 나라 상황이 이러니까 숙종은 8월 달에 비망기를 내려 자신의 모자란 탓이라면서 반성까지 한다. 그러나 이어 1686년 9월 9일, 제주도에 말이 2,890마리가 얼어 죽는 일까지 생겼다. 그런 와중에 궁궐에서 공사 중이었다. 그러나 숙종은 공사를 멈추지 않았다.

“가만히 듣건대, 효종께서 궁인 한 사람을 가까이하여 옹주를 낳기에 이르렀으나, 임어(臨御)하는 날에 끝내 봉작을 내리는 한 명(命)을 아끼셨으므로, 성덕(成德)의 일이 지금까지 칭송되고 있습니다. 전하께서는 어찌 성조(聖祖)에게서 본받지 않으시고 이러한 오늘의 거조가 있으십니까? 또한 신이 삼가 깊이 우려하는 것은, 장씨의 일은 전하께서 그 미색(美色) 때문이며, 전하가 장씨를 봉한 것은 그를 총애하기 때문이니, 오늘날 신민들의 근심이 이보다 더 큰 것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ㅡ《조선왕조실록》숙종 17권, 2번째기사

그리고 1686년 12월 10일, 장씨는 내명부 종4품 숙원(淑媛)에 책봉된다. 이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장씨가 아들이나 딸을 낳지도 않았고, 단지 숙종의 총애만으로 이루어진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상소에서 지적하고 있듯이, 효종의 서녀인 숙녕옹주[15]의 어머니는 효종이 살아 있던 시절에는 후궁으로 책봉을 받지 못했다. 숙녕옹주의 어머니는 안빈 이씨인데, 안빈 이씨는 효종의 아들인 현종 때 숙의로 책봉되고, 숙종 때 정1품 빈으로 책봉되었다. 옹주를 낳은 후궁에게도 그렇게 했는데, 임신도 아직 안 한 장옥정을 숙원으로 책봉하는 일은 아무 명분이 없었다. 그러나 숙종은 여기에 자신이 미색을 좋아하고 총애함 때문이라는 건 억측이라고 대답했다. 아무도 안 믿었을 듯 결국 장옥정의 숙원 책봉은 숙종이 원하는대로 되었다.

1688년 10월 28일, 장씨는 당시로서는 꽤 늦은 나이에 속하는 30살에 고대하던 왕자를 낳았다. 드디어 숙종의 첫 아들이자 뒤를 이어 임금이 되는 경종을 낳은 것이다. 여기서 드라마에서 빠지지 않는 사건이 벌어진다. 이른바 옥교 사건이다.

“신이 듣건대 ‘장 소의 모친이 8인이 메는 옥교를 타고 궐중에 왕래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장 소의의 어미는 한 천인일 뿐인데, 어찌 감히 옥교를 타고 대궐에 드나들기를 이와 같이 무엄하게 할 수가 있습니까? 옛날 선조 초년에 유모가 옥교를 타고 입궐하니, 선조께서 매우 준엄하게 꾸짖으시며 즉시 명하여 내쳐 물리치고는 걸어서 돌아가게 하였으니, 화란의 조짐을 막는 뜻이 이 또한 지극했던 것입니다.” ㅡ《조선왕조실록》 숙종 19권, 2번째 기사

요약하자면, 장옥정의 친정어머니가 딸의 산후조리를 해주기 위해서 궁궐로 들어올 때, 8명이 끄는 옥교(가마)를 타고 왔다. 이에 사헌부 관리가 가마를 압수하고 가마를 끌고 들어온 종을 처벌하여 문제가 된 사건이다. 굳이 비유하자면 장옥정의 어머니가 경차를 타는 것도 분수에 넘치는데 중형 세단을 탄 셈. 사실 원칙적으로 따지면 이런 가마를 타면 안된다. 왜냐하면 옥교는 덮개가 있는 가마를 말하는데 3품 이상 관리의 어머니나 부인이 타라고 법전에 나와 있었다.

하지만 당시에 현실적으로 이런 법이 잘 지켜지지 않았다. 숙종은 "후궁이 해산할 때 가족이 들어와서 살펴보도록 하는 건 옛날부터 있어온 전례이고, 천인인 궁녀들도 가마를 타고 다니는 데다가, 왕이 허락의 의미로 출입패를 주었는데 이런 일을 벌였다"면서 노발대발하면서 관리를 파직하고 죽이기까지 했다. 이어 홍문관, 사간원까지 나서서 줄줄이 상소하고 난리가 나지만, 결국 숙종이 뜻을 꺾고 신하들의 말을 순순히 들어줬다. 이미 죽은 사헌부 관리들의 장례까지 후하게 치뤄주라고 하면서 말이다.

이 사건은 드라마에서는 압축되어 장옥정의 어머니가 가마를 타고 입궁하다가 가마를 빼앗기고 부서지면서 불에 타고 모욕을 당하는 것 정도로만 나온다. 실록을 보면 시작과 끝 사이에 길고 긴 과정이 있었지만 드라마화를 시키다보니 어쩔 수 없는 듯. 사실 상세과정까지 드라마화시키면 겨우 가마 하나 가지고 왜 저래 소리가 나올지도?

이 옥교 사건에서 숙종이 엄청난 설전을 벌여놓고 끝에 가서는 순순히 물러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숙종에게는 이 사건이 종료된 다음부터가 진짜였다. 말 그대로 폭풍전야. 끝난 줄 알았지? 숙종 15년 1689년 1월 10일, 숙종은 신하들 앞에서 왕자의 명호를 정하려고 한다고 밝힌다. 원자정호 사건이다. 이 말은 곧 숙종의 후계자로 삼겠다는 뜻이나 다름이 없으므로 엄청난 반발을 불러온다.

당시에 인현왕후가 20대 초반의 젊은 나이여서 임신 가능성도 높았다. 비슷한 일을 찾아보자면, 서자 광해군이 세자로 책봉된 다음에 선조의 계비 인목왕후가 적자인 영창대군을 낳은 것을 떠올려보자. 실제로 신하들도 이 일을 언급한다.

“왕자가 지금 강보에 계시는데, 갑자기 명호를 정한다면, 어찌 너무나 크게 서두른 것이 아니겠습니까? (중략) 선묘조(宣廟朝)에 의인왕후께서 저사(儲嗣)가 없으시어 광해가 어질다고 하여서 아들을 삼았으나, 명호에 이르러서는 임진년에 비로소 정하였습니다.” ㅡ《조선왕조실록》 숙종 20권, 1번째 기사

오죽하면 남인조차 숙종이 지나치게 서두른다면서 신중히 하라고 충고한다. 당시에 숙종도 30대에 인현왕후도 20대 초반이니 서두른다는 말이 틀린 말도 아니다. 또한 왕자가 아직 말도 할 줄 모르고 무릎을 꿇고 절하는 방법도 알지 못하는 나이니까 기다렸다가 하라고까지 했지만, 앞서 숱한 사례들을 보면 숙종조선의 답정너은 대계는 이미 정해졌다고 못을 박아버렸다.

1689년 1월 14일에 이런 숙종의 뜻답정너 취향에 알맞는 상소가 올라왔다. 유생 유위한이 올린 상소로 명나라의 정통제는 낳은 지 4일 만에 책봉하여 태자로 삼았고, 정덕제는 낳은 지 7개월 만에 책봉하여 태자로 삼았는데 서두르는 일도 아니라는 내용이다. 그리고 1689년 1월 15일에 숙종은 원자의 정호를 종묘와 사직에 고하고, 생모인 장옥정을 희빈으로 삼았다.

다 끝났는데 서인의 정신적 지주이자 키워 송시열은 송나라 철종의 고사를 들어 상소를 올렸다. 송나라 철종은 10살에도, 번왕의 지위에 있다가 신종(철종의 아버지)이 병이 들자 비로소 책봉하여 태자로 삼았다는 것. 숙종은 또 화를 낸다. 역시 앵그리 숙종 이미 원자정호 다했는데 송시열이 뒷북친다, 명나라 황제는 4달 만에 정호한 일도 있는데 송시열이 왜 이러는지 이해가 안 간다는 말을 한다. 즉 원자정호 하기 전에는 시기상조라고 말해도 이해를 하겠는데, 이미 다 끝났는데 태클거는 이유는 왕권에 도전 아니냐면서 송시열은 귀양 크리. 귀양지에 도착하기 전에 사약을 내려서 죽인다.

이후 서인들은 남인에게 밀리고 인현왕후는 폐서인되어 궁 밖으로 내쳐진 후, 장희빈은 왕비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이것이 바로 기사환국이다.인용 오류: <ref></code> 태그를 닫는 <code></ref> 태그가 없습니다 궁녀 출신의 후궁이 중전이 된 사례는 전무후무한 일이었기 때문이다.</ref>

기사 환국 과정에서 숙종은 비망기를 내리면서 인현왕후를 폐서인해야 하는 까닭을 말하는데, 폐비 윤씨와는 비교할 바가 아니고, 인성이 여후와 같다고 비난을 한다.

“투기하는 것 외에도 별도로 간특한 계획을 꾸며, 스스로 선왕·선후의 하교를 지어내어서 공공연히 나에게 큰소리로 떠들기를, ‘숙원(淑媛)은 전생에 짐승의 몸이었는데, 주상께서 쏘아 죽이셨으므로, 묵은 원한을 갚고자 하여 이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경신년 역옥 후에 불령한 무리와 서로 결탁하였던 것이며, 화는 장차 헤아리지 못할 것입니다. 또 팔자에 본디 아들이 없으니, 주상이 하셔도 노고하셔도 공이 없을 것이며, 내전에는 자손이 많을 것이니, 장차 선묘 때와 다름이 없을 것입니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비록 삼척 동자라도 반드시 듣고 믿지 아니할 것이다.” ㅡ《조선왕조실록》 숙종 21권, 2번째 기사

당시에 인현왕후의 폐출되는 일을 당연하게 여긴 사람은 없었던 모양인지 서인과 남인을 가리지 않고 폐출에 반대를 했다. 신하들은 어떻게든 숙종과 인현왕후의 사이를 화해시키려고 노력했고, 남인에 속하는 권대운은 "부인들은 원래 편협한 성품들이라 투기하지 않는 여자가 드물다"면서 "살면서 잘 해보면 좋아질 것"이라고 숙종을 달랬다. 그러나 숙종은 "이미 다 해봤다!! 그래봤자 소용없다!!"고 반박했다. 정 쫓아내고 싶으면 별궁에 두고 스스로 반성을 시간을 주자고까지 했지만, 숙종은 자신의 의지대로 밀고 나갔다. 결국 1689년 5월 6일, 장옥정은 장희빈에서 왕비가 된다.

그러나 이 기사환국 과정에서 많은 사람이 죽으면서 원하든 원하지 않든 장씨에게 적이 생긴다. 남인들도 인현왕후가 덕을 잃었다는 소리를 들어보지를 못했다면서 반대했고, 박태보, 오두인 같은 사람들은 죽었고, 숙안공주는 아들을 잃고, 명안공주는 시아버지가 휘말린다. 이렇게 만들어진 원한이 향하는 곳은 당연히 장희빈이다. 숙종을 원망할 수 없으니까... 누구든지 숙종을 원망하면 X되는 거에요 아주 X되는 거야.

2.5 왕후에서 후궁으로

이후, 김만중의 손자 김춘택 등을 중심으로 인현왕후 복위운동이 일어나고 인현왕후의 폐서인을 후회하고 있던 숙종은 장희빈의 거친 성격에 실망해서 인현왕후를 복위시켰다는 것이 대중 사이의 기존 인식이었으나 실제로는 권력다툼에서 기인한다. 즉, 숙종은 권세를 잡은 남인의 권력이 왕권을 위협하는 수준에 도달했다고 판단하고 1694년, 인현왕후를 복위시키고 남인의 지지를 받던 장희빈을 희빈으로 강등시켰다. 그리고 권력은 남인에서 온건 서인인 소론에게로 넘어가게 된다.(갑술환국)

하지만 대중 사이의 기존 인식이 그러했던 것은 다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일단 희빈 장씨의 아들이 인현왕후를 더 어머니로 생각했으며, 동평군 이항조차도 여러번 손을 떼려는 마음을 먹었으며 후궁으로 격하시킨 직후부터 희빈 장씨의 세력은 급속도로 떨어져 나갔던 점이다.

2.6 최후

지위가 강등된 뒤, 장희빈은 울분의 나날을 보내며 숙종과 인현왕후에게 문안조차 가지 않았다. 그러면서 다시 중전이 되기 위해 안간힘을 다했다. 게다가 인현왕후를 중궁이라고 부르지도 않고 '민씨'라고 부르면서 요사스러운 여자라고 욕했다.

인현왕후가 시름시름 앓자, 장희빈은 인현왕후가 죽으면 자신이 다시 왕비가 될 것이라 믿고 그렇게 되게 하기 위해 자신의 처소인 취선당 뒷쪽 별채에 신당을 차리고 인현왕후를 저주하기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건 전부 1701년 9월 23일에 숙종이 제주에 유배 가 있는 장희재를 처형하라고 비망기를 내리면서 한 말이다.

그러나 남인의 재집권을 두려워한 노론의 사주로 숙의 최씨가 취선당의 신당과 인현왕후 저주를 고변하여 결국 같은 해 10월, 사약을 받았다. 실록을 보면 숙종은 한무제가 구익부인을 죽인 이야기를 예시로 들면서 신하들에게 말하고 있었기 때문에 혹자는 처음부터 죽일 계획이었다면서 숙종을 무서운 왕으로 본다.

말로는 비참했지만, 숙종은 희빈을 왕후의 예에 준하는 장례를 치르게 했고, 장례에 세자 부부 내외도 참가케 했으며, 나중에 희빈의 묘가 터가 안 좋다는 말에 길지를 고심한 끝에 가장 평가가 우수한 광주 진해촌으로 와병 중인 숙종이 직접 택하기도 하였다.

숙종실록과 승정원일기에는 숙종이 희빈에게 자진(자살)하라고 명을 내려 희빈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되어 있는데, 그녀를 자진하게 할 때 숙종이 사약을 내릴지 신하들과 의논하는 장면이 있는 것으로 보아 자진했다고 해도 일단 사약을 마신 건 맞는 듯하다. 숙종실록 27년 10월 8일 11번째 기사

재미있는 것은 신하들이 당시 세자였던 경종을 낳아서 기른 사람이니 유사(攸司:관청)의 형벌을 쓸 수 없음을 말하고 주례를 예시로 들면서 은근히 숙종을 만류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임금의 후궁이지만 궁궐에서 죽을 수 없으니 사약을 받더라도 사가로 나가서 받아야 하는데, 그럴려면 관원이 사약을 들고 사가로 가야 한다. 이렇게 된다면 이 또한 유사의 형벌이 되는 거라면서 판중추부사 서문중이 나름대로 숙종을 말려보지만 정해진 뜻이 완고해서 실패. 숙종은 유사의 형벌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승정원이 전교를 받지 않는다고 해서 형벌을 내리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냐는 발언을 한다.

참고로 이때 장희빈이 사약을 마시지 않겠다면서 패악을 부려서 힘으로 찍어누르고 강제로 먹였다는 야사가 널리 퍼져있으나[16] 이와 관련된 기록은 서인과 관련되어서 발견되는 데다 정사에서는 그녀가 세자를 위해서 순순히 마셨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송시열, 김수항, 김익훈 등의 죽음으로 장희빈에 대한 포한이 깊었던 서인 계열의 악의적인 왜곡일 가능성이 높다. 한편으로는 그러한 왜곡이 가해질 정도로 그녀에게 정적이 많았다는 소리도 될 수 있다.

이와 관련해 그녀가 몰락했을지언정 양반 가문 출신이기만 했어도 그토록 비참하게 죽진 않았을 것이란 시각도 존재한다. 정적인 남인 쪽 사람인데다 중인 집안 출신이었으니 서인들의 증오가 굉장히 깊었을 것이라는 게 그 요지.
그도 그럴 것이 원자정호 사건부터 송시열이라는 거목이 쓰러졌고, 웬만한 서인 가문이 줄줄이 귀양에 숙청당하고, 공주들도 피하지 못해서 숙안공주는 아들을 잃고 숙종의 여동생인 명안공주는 시아버지가 휘말려서 죽는다. 이런 과정에서 생긴 원한이 왕에게 갈 수는 없으니 자연히 장희빈에게 향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실제로도 숙종은 자신의 후궁들에게 궁궐 밖에 집을 마련해주고 재산을 만들어주는 과정에서 백성들에게 원망을 샀고 여기에는 그녀도 별반 다르지 않다. 결국 이런 원한 하나 하나가 모여서 부메랑처럼 돌아온 셈일지도(...) 근데 그건 숙종 잘못이잖아

한편 인현왕후를 저주했다는 취선당 신당은 사실 인현왕후가 승하하기 2년 전에, 장씨가 세자(후일의 경종)의 병을 낫게 하기 위해서 지은 것이었는데, 숙빈 최씨가 이는 인현왕후를 저주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 그 뒤, 장씨 휘하 나인들에게 가혹한 고문이 가해졌지만, 나인들은 세자의 병을 낫게 하기 위해서라고만 말했다고 하며, 나중에서야 고문을 못 이긴 나인들이 추가 증언으로 인현왕후의 죽음을 빌었다고 자백하여 희빈의 처벌이 결정되었다고.

물론 당시 법도로 보아서는 어디까지나 병환 중에 있는 인현왕후가 우선이기 때문에, 희빈 장씨가 아픈 세자를 위해 사사로이 궁 밖으로 나가 절에서 불공을 드렸다던가 치성을 드렸다고 해도 허물이 되는 상황이기는 했다.[17] 궁궐 내에 허락도 없이(애초에 허락을 받을 수 있을 일도 아니었지만) 신당을 차려 세자만을 위하여 치성을 드렸다면 예법을 중요시하고 무속신앙을 천대하였던 당시 사회에서 큰 허물이 될 수밖에 없는 일이다. 인현왕후의 죽음 여부와 무관하게 상전인 인현왕후를 능멸하는 일이라며 트집 잡히기에는 딱 좋은 정도의 일인 것이다. 이미 조선에서는 상복을 얼마나 입느냐 하는 일로 조정대신들이 싹 갈려나가고 몇 십 년이나 당파 싸움으로 이어진 예송논쟁도 있었던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법도를 어긴 것과 일국의 왕비를 주살한 것은 아주 큰 차이가 있으며, 무리해서 인현왕후를 저주하여 죽였다는 죄목으로 사사(賜死)당한 것은, 서인의 정치적 의도가 개입되었다고 볼 수 있게 한다.[18][19]

야사에는 그녀가 경종고환을 상하게 하며 이씨를 망하게 하겠다고 저주를 퍼부었다거나, 사약을 마실 때 발악을 했다는 이야기개소리가 있으나, 실록에는 그같은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사실이 아닌듯 하다. 사실 경종은 즉위 1년 후 희빈을 옥산부대빈으로 추숭했고 높히려 했으나 영조 즉위 이후 집권 노론이 희빈을 대역죄인 취급하였고(다행히 깎아내리지는 않았다), 후세에 인현왕후전 같은 소설이 널리 알려지며[20] 악녀의 오명을 뒤집어 쓰게 된 탓에 저런 야사가 널리 알려지게 된 듯하다.

그녀 사후 숙종은 내명부의 궁녀(정확히는 후궁)가 왕비로 책봉되는 일을 금지시켰고, 스스로도 후궁 중 한 명을 왕비로 삼지 않고 새로 장가를 들었다. 그 때문에 장희빈이 후궁 출신의 왕비로서는 마지막이 되었다.

장희빈의 묘는 본래 경기도 광주시에 있었지만 1969년에 고양시 서오릉 구역으로 이장되었다. 이를 대빈묘(大嬪墓)라고 부른다.

3 평가

대단히 드라마틱한 일생을 산 여인으로 영국의 헨리 8세의 총애를 받다 몰락하여 죽은 앤 불린과 묘하게 닮은 구석이 많다. 그녀는 사극에서 단골소재로 등장하는 인물로 아마 연산군, 정조, 이순신과 더불어 막상막하일 듯하다. 사극 내에서도 남자배우 최고의 배역이 이순신, 여자 배우 최고의 배역이 장희빈이다.

앤 불린이나 장희빈이나 부정적인 이미지가 강하지만, 현대에 들어선 당대의 평가만큼이나 악한 인물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21] 둘 다 권력을 쥐고 있는 남편, 왕에 의해 희생되었다고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장희빈도 앤 불린도 알고보면 평가가 상당히 갈린다.

그녀의 일생을 다룬 사극만 해도 여러 편이며 대부분 당대 최고의 여배우들이 출연해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심지어 MBCKBS는 같은 시간대에 장희빈을 주인공으로 한 사극을 방송해 경쟁을 하기도 했을 정도였다.

4 기타

장희빈의 묘인 대빈묘에 참배하면 남자친구가 생긴다는 이야기가 2~30대 젊은 여성들에게 알려져 인기를 끌었다. 대빈묘에 절을 하거나 특정 행동을 해서 장희빈의 기를 받으면 된다는 것인데, 2008년도경에 잠시 유행했다.당시 기사에서도 확인이 가능하다.

5 장희빈을 연기한 배우들

사극에서 장희빈의 배역은 그만큼 미모를 인정받는 배역이기 때문에 아무에게나 주어지지 않았다. 때문에 사극에서 장희빈 역할을 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대단한 미모를 가진 여배우로 인정받는 것이고, 그렇다 보니 여배우들 사이에서는 서로 장희빈 역할을 하려 하는 추세이다. 실제로 김혜수의 경우 장희빈의 배역을 얻기 위해 영화 <바람난 가족>의 캐스팅을 포기한 것은 매우 유명한 일화이다.

5.1 김지미: 1961년 영화 "장희빈"

-최초로 장희빈이 영상에 등장한 작품. 당대 최고의 여배우 김지미가 장희빈 역을 맡아 표독스러운 장희빈의 이미지를 처음으로 만들어냈다. # 김지미 # 포스터 장희빈의 사약신이 나오지 않은 유일한 작품으로, 자진하라는 명을 받고 쓸쓸하게 궁궐의 뒤안길을 걷는 장면이 끝이다.

5.2 남정임: 1968년 영화 "요화 장희빈"

-임권택 감독, 신성일, 태현실 등의 초호화 캐스팅으로 김지미의 "장희빈"의 위세를 완벽하게 눌러버렸다. 남정임의 장희빈은 김지미의 장희빈보다 세련되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 남정임# 포스터

5.3 윤여정: 1971년 MBC 드라마 "장희빈"

-"요화 장희빈"의 개봉 3년 후 MBC에서 방송된 최초의 드라마 장희빈. MBC 드라마의 역사를 다시 썼다는 찬사를 받는 걸작으로 꼽힌다. 윤여정의 장희빈은 '역대 최강의 표독스러운 장희빈'이란 평가를 받았는데, 길거리를 지나다니면 사람들이 욕을 하고 돌을 던지거나, 그녀가 나온 광고 포스터가 수시로 훼손되는 등의 일을 겪었다고 한다. # 윤여정 더불어 그녀는 드라마가 제작되기 전 '장희빈 역할에 가장 잘 어울리는 배우는?'이라는 앙케이트 조사에서 1위로 뽑혀 캐스팅되었다.

5.4 이미숙: 1982년 MBC 드라마《여인열전》중 제1화 "장희빈"

-윤여정의 장희빈이 잊혀질 무렵 다시 MBC에서 제작된 드라마. 이미숙의 장희빈은 그간 표독스럽기만 했던 장희빈에 섹시와 당당한 카리스마를 결합하여 역대 전무후무할 장희빈이란 찬사를 받았다. 숙종은 유인촌#[22]# 이미숙

5.5 전인화: 1988년 MBC 드라마 "조선왕조 500년-장희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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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저조한 시청률 때문에 위기를 맞고 있던 조선왕조 500년 시리즈의 흥행을 위해 선택된 카드로 전인화를 캐스팅해 큰 성공을 거두게 되었다. # 전인화

5.6 정선경: 1995년 SBS 드라마 "장희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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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의 장희빈과는 달리 파격적으로 당대 최고의 배우들이 아닌 거의 신인급이었던 정선경, 김원희, 임호 등이 캐스팅되었던 드라마.(심지어 명성왕후견미리였다.) 대중적으론 정선경의 장희빈이 가장 훌륭하게 기억에 남게 되었으며 그 때까지 영화 데뷔작에서의 노출 이미지가 따라다니던 정선경을 배우로 인정받도록 만들었다.# 장희빈 사진 # 사약신 # 영상

5.7 김혜수:2003년 KBS 드라마 "장희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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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반에는 이미지가 맞지 않는 배우들을 캐스팅했다는 평가인용 오류: <ref></code> 태그를 닫는 <code></ref> 태그가 없습니다 김혜수는 장희빈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의견이 강했다.</ref>가 지배적이었고 에로 사극이라는 비아냥을 들을 정도로 초반에는 좀 노출문제도 있긴 했었다.[23] 그리고 장희빈을 나름대로의 아픔과 정당성을 지닌 인물로 그리려는 초반부의 의도와 달리 점점 기존의 표독스러운 장희빈의 이미지로 회귀하는 문제점을 보였다. 역대 장희빈과 비교했을 때 시청률도 그런저런 시청률에 경실련에서 시청자가 뽑은 프로그램에서 최악의 프로그램 하나로 선정되었다. 김혜수는 방송 초반 ‘최악의 장희빈’이라는 혹평에 시달려야 했다. 김혜수 자신도 “드라마하면서 이렇게 욕을 많이 먹은 적은 없다”라고 밝힐 정도. 공동연출을 맡은 이영국 PD는 22일 가진 종영 기자간담회에서 “장희빈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고 10년 가까이 왕의 사랑을 독차지한 카리스마와 매력이 무엇이냐를 담아내 새 인물을 만들고 싶은 의욕은 컸지만 작가 교체 등으로 인해 제대로 구현하지 못했다”고 밝혔다.

이 작품을 기점으로 장희빈의 라이벌인 인현왕후도 단순히 천사표 캐릭터가 아닌, 더 인간적이고 현실적인 모습을 띄게 된다. 또 당시만 해도 신인 수준이었던 박예진숙빈 최씨 역으로, 송일국이 숙종의 첫 왕비 인경왕후의 조카 김춘택 역[24]으로, 송시열 역으로 그 유명한 이순재가 등장하는 등 연기파 배우 다수가 출연한 작품이다.

여기서도 사약신에서 발악하는 장면이 등장했는데, 사약을 먹이는 배우들이 김혜수의 힘을 당해내지 못해 촬영이 버거웠다는 뒷얘기가 있다. 김혜수가 여성치고는 체구가 큰데다 운동을 많이 해서 체력이 상대적으로 뛰어났기 때문이었다고.

5.8 (번외) 이재은:2005년 KBS 드라마 "HDTV 문학관-서러워라 잊혀진다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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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는 김만중의 소설 사씨남정기가 자신과 인현왕후의 관계를 빗댄 소설임을 알고 그것을 차지하려고 한다.[25]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는 타인의 생명을 가볍게 여길 정도로 대담하지만, 한편으로는 소설로 외로움을 다스리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5.9 이소연:2010년 MBC 드라마 "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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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이 아닌 주조연으로서, 드라마의 주인공인 영조의 생모 숙빈 최씨와 대립하는 라이벌이다. 이제까지 장희빈은 대개 주인공이었던 걸 생각해보면 이례적. 배우는 이소연으로, 선역도 자주 맡지만 악역 연기가 인상적인 배우라 캐스팅된 듯하다. 하지만 이제까지의 장희빈들 중에서 가장 인간적인 장희빈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숙종의 사랑을 받던 시절에는 숙종에게 정치적 조언을 해줄 만큼 총명하고, 천비인 동이를 인간적으로 대하고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등 사려깊은 인물이었다. 또 신분상승을 위한 욕망은 강했지만 늘 정당성과 명분을 가지고 행동하려 했다. 그러나 인현왕후를 몰아내고 중전이 되기 위해 점점 양심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게 된다. 그렇게 해서 중전이 되지만 숙종의 마음이 동이에게 옮겨가자, 동이에게 열폭해 무리수를 쓰다 점점 몰락하게 된다. 처음에는 그녀의 오빠인 장희재(김유석 분)나 어머니가 술수를 쓰고 그녀가 뒷수습을 하다가 같이 끌려 들어가는 패턴이었지만, 나중에는 인현왕후을 밀어내려는 장희재의 모략을 알고도 중전이 되고 싶은 야망에 그것을 묵인한다. 그리고 그 후로는 점차 그녀 자신이 뒷술수를 주도한다. 그러다 결국 동이와 동이 소생 왕자인 연잉군을 해치려다 들켜 사사당하게 된다.

악역이지만 정적인 인현왕후와 숙빈에게 패악을 부리기보다는 교묘한 심리전을 펼치며 고고함과 우아함을 잃지 않았다. 또 마지막까지 숙종에 대한 사랑과 아들 경종에 대한 모성애에 흔들리는 인간적인 모습을 보였다. 인현왕후와 숙빈, 숙종에게 온갖 패악을 부렸던 이전의 표독한 장희빈들과는 다른 모습이다. 사사되는 장면에서도 온갖 발악을 하다 억지로 사약을 마셨던 다른 장희빈들과 달리 "다른 건 후회하진 않으나 숙종을 사랑한 것이 잘못이었으니 그 때문에 사약을 받겠다" 면서 스스로 사약을 청하며 품위를 잃지 않고 순순히 최후를 맞았다. 죽기 전에 속으로 "숙종을 사랑한 것이 잘못이라던 말은 거짓말" 이라고 하면서, 사랑했기에 숙종의 사랑이나 다른 모든 것을 가지고 싶었으며 그것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전반적으로 입체적이고 인간적인 캐릭터라는 평을 받았다. 이소연의 호연이 인간적인 장희빈의 모습을 잘 살렸고, 특히 죽기 직전 울며불며 숙빈에게 매달려 나는 죽어도 세자만은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모습과 전하를 연모했던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는 유언은 시청자들이 장희빈에게 연민을 느낄 수 있게 했다. 일반적으로 묘사되는 장희빈과는 상당히 큰 차이가 있게 묘사된 캐릭터. 이병훈 PD가 한 인터뷰에서 말하기를, 악역이라기보다는 '여성CEO'의 느낌을 살려서 연기하도록 지시했다고 한다.

의외로 이후의 역대 장희빈 연기에 대한 설문조사에서는 아래의 김태희에 이어 2번째로 나쁜 평가를 받았다. 다만 이는 이소연의 연기력이나 캐릭터 자체의 문제보다는, 기존의 '표독스러운 장희빈'의 이미지와 달라서 생긴 괴리감이 반영된 것.

5.10 (번외) 최우리: 2012년 TVN 드라마 "인현왕후의 남자"

5.11 김태희(아역 강민아):2013년 SBS 드라마 "장옥정, 사랑에 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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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대 장희빈이라는 계산은 시청자나 네티즌들의 추측을 보건대 이재은의 장희빈과 인현왕후의 남자에 나온 최우리의 장희빈이 빠진 듯하다. 아무래도 단막극의 존재감이 희미하고 인현왕후의 남자에서는 장희빈의 비중이 작았기에 발생한 문제인 듯.

장희빈을 침방 나인으로 설정, 조선시대의 디자이너로 만든다는 모토로 시작했는데, 방영 전부터 무리수 설정이라는 지적이 있었고 방영 후에도 복식이나 기타 자잘한 요소들이 고증을 무시한 데다 대본도 개연성이 없어 비판을 받았다. 김태희의 연기력 역시 숙빈 최씨 역의 한승연과 함께 부정적인 평 일색이었다. 장희빈은 대대로 연기력이 뛰어난 배우들이 맡아온 배역이라 연기력 논란이 끊이지 않는 김태희가 캐스팅된 것 때문에(근데 사실 그렇게 논란될 만한 연기력은 아니다, 송승헌과 주연을 맡았던 마이프린세스(2011)에서도 좋은 연기력을 보여주었다. 아마 아이리스 초기와 중천 때의 논란으로 박힌 인식이 아직도 이어지는듯) 방영 전부터 우려가 있었다. 특히 숙종의 정비 라인은 인경왕후 김하은에 인현왕후 홍수현으로 연기력이 뛰어난 배우들이라서 김태희의 장희빈은 더욱 우려되었다. 당장 1화부터 영화 '중천' 에서 보여준 똑같은 얼굴 표정이 그대로 나온다거나, 해품달 한가인의 발연기가 안 부럽다는 등의 연기력 논란이 일었지만, 회차가 지날 수록 장옥정에 녹아든 연기력을 보여 지금까지도 그 때 드라마를 정주행했던 시청자들에게 호평을 받고 있다. 문제는 그때 드라마를 보지 못했던 사람들은 1~2회 때의 논란만 보고 연기력을 평가하고 있으며, 장옥정 드라마 자체가 시청률이 그닥 높지않았던 탓에 그대로 여론이 형성되고있어 현재까지 장희빈을 맡은 배우들 가운데 가장 부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실제로는 유투브에 치면 쉽게 볼 수 있는 장옥정 명장면들을 통해 김태희의 연기가 좋았음을 알 수 있다(상대 역이였던 유아인도 김태희는 '말랑한 연기'를 한다며 칭찬했었다). 용팔이 방영 전에도 어김없이 김태희 연기력을 우려하는 사람들이 많아지자, 쉴드 댓글의 대부분이 '장옥정을 봐라'였을 정도다(그리고 실제로 용팔이에서 연기력 우려를 1화부터 떨쳐내었다). 드라마 자체는 역사 고증의 오류도 많지만, 배우들 간 호흡과 개개인의 연기는 좋았으며(한승연은 제외) 대사나 감정선에 대해서는 사극 로맨스 특유의 설렘을 잘 살려내었다는 평이 대다수다. 아직까지도 유아인과 김태희의 애정씬, 김태희 및 타 궁중 여인들 사이의 기싸움 장면들은 유투브에 최근 댓글이 많이 달리고 있으며, 그만큼 이미 2013년 방영 당시의 시청자들은 정주행을 몇번씩 한다는게 팩트. 유아인과 김태희의 호흡이 상당히 좋았던 드라마다. 단, 실록과 어긋난 부분이 상당히 많으니 정주행 시 역사적 사실을 바라기보단 인물간 감정선을 중점으로 시청하는 것이 좋을 것.

이외에 2007년 작 영화 "궁녀"에서도 장희빈으로 추정되는 역할이 등장하지만 실은 가상의 인물이라고 설정했고 시대도 정조시대로 잡았다고 한다(...).

5.12 (번외) 조미령: 2015년 KBS 드라마 스페셜 "붉은 달"

5.13 오연아:2016년 SBS 드라마 "대박(드라마)"

거의 엑스트라급이다. 초반에 백만금을 고문하고 숙빈 최씨를 괴롭히는 등 온갖 어그로를 끌다가 결국 숙종에게 머리채를 잡혀 쫓겨난다. 그후 사약을 받아 죽게되고 그녀의 죽음을 계기로 아들인 세자 윤이 자신을 찾아온 이인좌에게 손을 뻗치게된다.

5.14 (번외) 툰드라쇼-조선왕조실톡 : (신보라)

장녹수와 서로 생전의 행적으로 디스를 걸며 매치를 벌인다.
  1. 드라마 동이에서는 이 타이틀을 숙빈 최씨에게 씌워줬는데 사실 숙빈은 왕비가 아닌 '빈'까지만 올랐고, 또 그 위에는 인원왕후가 있었으니 가장 높은 곳까지 오른 인물은 아니었다. 숙빈과 희빈이 비슷한 삶을 살긴 했다.
  2. 인현왕후의 오빠인 민진원(閔鎭遠)이 쓴 <단암만록(丹巖漫錄)>에 기록되어 있다.
  3. 처음에 후궁으로 궁에 들어왔다가 이후에 왕비가 된 경우는 가끔 있다. 연산군의 생모 폐비 윤씨도 후궁으로 간택되어 입궁한 후 정비인 공혜왕후 한씨가 사망한 후 왕비가 되었다. 얄궂게도 두 여성의 운명은 비슷하였다. 중종의 생모인 정현왕후 윤씨도 간택후궁 출신이다. 성종이 유독 후궁들을 왕비로 올리는데 적극적이긴 했다.
  4.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사람의 외모에 대한 구체적인 기술 자체가 거의 없다. 임진왜란포르투갈 상인이 중국에 판 흑인 노예 출신의 용병같이 아주 특별난 경우에만 구체적인 묘사를 했다. 혹여 외모에 대한 언급을 한다해도 사관들은 어지간하면 아주 짠 평을 내렸다. 연산군의 애첩인 장녹수는 외모가 중간에도 못 미친다는 평을 들었다. 이런 사관들이 미모를 인정했다면, 장희빈은 진짜 미인이라는 뜻이다.
  5. 오히려 인현왕후가 자신보다 몇 살 연상인데다, 부종으로 종아리가 퉁퉁 부었던 희빈을 불러다 매질을 한 일은 실제로 있었다.
  6. 장희빈이 왕비가 되자 옥산부원군에 추봉되었다가, 희빈으로 강등되자 봉작이 추탈되었다.
  7. 재미있게도, 자주 비교되는 앤 불린과 출신 배경이 비슷하다. 또한 아키히토 현 일본 덴노의 황후인 미치코 황후의 출신과도 비슷한 면이 있다.
  8. 장희빈이 왕비가 되자 파평부부인에 봉작되었다가, 희빈으로 강등되자 봉작이 추탈되었다.
  9. 희빈의 어머니 윤씨는 엄연히 장형의 정실로서 옥산부원군 신도비에 따르면 사역원 첨정 윤성립(일본어 역관)의 딸이며 그는 1653년까지 승정원일기에 기록이 있었다.(참고로 희빈의 오빠 장희재가 1651년생.)
  10. 당장 보궐정오에선 인현왕후의 아버지 민유중이 자신이 외척이라 겸직을 사임할 때도 '당연히 사임해야지 인재라고 봐주기냐? 그리고 민유중은 자신을 단속하고 제재하는 데 있어서 본래 결단성 있게 엄격하게 하지 못해 조정한테 국구의 집 수리하라고 금 주는거 사양 안하고 겸직했음'이라고 깐다. 참고로 민유중은 자신의 여식이 중전에 간택되자 그날 바로 사퇴하려다가 못하고 저기서 트집잡은 선혜청 겸직도 숙종이 '너님 너무 지나치게 사양하는거 아님?(...)'라고 했을정도 였다.
  11. 여담으로 황희는 후세의 이미지만큼 마냥 청렴했던 인물은 아니다. 인재를 알아보는 악덕상사 세종대왕의 안목이란... 그런데 일은 굉장히 잘했다. 그래서 세종대왕이 두고두고 부려먹었다. 애당초 황희와 맹사성이 살인사건에 연류된 것을 알아낸 것도 세종대왕이었으니, 그럼에도 계속 일을 맡긴 것은 그만큼 황희가 일을 잘했다.(…).
  12. 대표적인 예가 2003년판 KBS 장희빈.
  13. 자의대비는 외질녀인 숭선군의 아내 신씨에게 장옥정을 돌보게 했고, 장옥정이 재입궁했을 때도 인현왕후와 차별을 두어 장옥정만 총애하다시피 했다고 실록에 기록이 있다.
  14. 유악을 멋대로 빌려썼다는 야사가 유명하지만 전혀 근거가 없는 소리다.
  15. 효종이 후궁에게서 낳은 유일한 자식이다.
  16. 마찬가지로 희빈 장씨 사후 그녀의 시신이 참혹한 모습으로 변했다는 부류의 이야기들 또한 근거없는 야사나 후대에 쓰인 소설(…)이 그 출처다. 죽은 후에 두고두고 모욕과 비하의 대상이 된, 여자로선 역사에 흔치 않은 경우.
  17. 앞에서도 말했듯 인현왕후가 더 어른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세자라 하여도 그 어머니인 왕비보다 우선시 될 수는 없었으며, 내명부 후궁인 희빈 장씨에게 있어서는 더더욱 그러했다. 오늘날에도 자식이 아파도 그 부모가 병환 중에 있다면 알리거나 티내지 않으며, 수발을 드는 것도 조심스럽게 하는 점을 생각하면 알기 쉽다.
  18. 인현왕후는 죽기 전 '내가 이렇게 몸이 아픈 건 뭔가 이유가 있기 때문이야'라는 내용의 발언을 한다. 무고의 옥과 관련하여 서인 측엔 충분히 떡밥이 되었을 발언.
  19. 어떻게 보면 숙종의 정치적 희생양이라고 할 수 있다. 숙종이 아무리 막강한 왕권이 가졌다고 해도 사대부의 분노가 폭발하면 제어하기 힘들 것을 누구 보다 잘 알 것이다. 그러면 적당히 완급조절을 해야 하는데 그게 환국이다. 결국 숙종은 정치적 안정을 목적으로 장희빈을 희생시켰을 수도 있다. 다만 이런 정치적 속내를 미디어에서는 잘 묘사하지 않을 뿐이다.
  20. 후세에 악녀 장희빈의 이미지가 만들어진 것도 실제 역사와는 다른 사씨남정기, 인현왕후전과 같은 소설들에서 비롯된 부분이 크다.
  21. 전통 사회에서는 왕을 직접적으로 비판하는 것이 금기였던 만큼 왕의 정치가 불만이라도 왕을 직접 비판하진 못하고 측근인 간신이나 요녀에게 비판의 화살을 돌릴 수 밖에 없었다. 물론 정말로 왕을 쥐락펴락 할 수 있는 진정한 권신도 존재했지만, 실질적으로 왕이 올바른 판단을 내렸다면 충분히 억제할 수 있는 경우도 숱하게 많다.
  22. 유인촌은 후에 2003년 <장희빈>에서 장희빈을 돕는 왕족 동평군으로 나온다.
  23. 노출문제와는 별개이지만 사극 최초로 키스도 있었다.
  24. 장희빈 반대파 인물이다. 흥미로운 건 같은 드라마에 등장한 송일국의 모친인 김을동 씨는 장희빈의 측근 상궁으로 출연하였다는 점이다.
  25. 이건 전작인 김혜수 장희빈에서도 나타났으나 이때는 없애려고 차지하려는 거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