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위 문서: 고려대학교/학부
목차
1 개요
1905년에 보성전문학교 법과로 설립되었고 2009년 이후 신입생을 더 이상 받지 않게 되기까지 고려대학교의 간판으로 군림하였던 단과대학.[1] 줄여서 '고대법대', 아주 줄여서 '고법'이라고도 부르고 있다. 법조계, 정계, 재계 등에 수많은 인재들을 배출하였다.[2]
2 역사
2.1 연혁
1905년 북청물장수 이용익에 의해 보성전문학교 법과라는 이름의 2년제 학부로 설립
1907년 01월 3년제 법학과로 개칭
1915년 일제에 의해 사립보성법률상업학교 법률과로 격하됨
1922년 보성전문학교 법과로 복원됨
1932년 중앙학원 보성전문학교 인수
1934년 안암동 교사로 이전
1944년 일제에 의해 경성척식경제전문학교 법률과로 강제 개명됨
1945년 해방, 보성전문학교 법과로 다시 환원됨
1946년 종합대학교인 고려대학교 내의 4년제 정법대학 법률학과로 승격됨
1951년 대구 임시교사 개교
1953년 안암동 교사 재개교
1955년 정법대학 폐지, 입학정원 각 80명 법과대학 법학과·행정학과 신설
1981년 행정학과의 정경대학 이전으로 법학과 단일학과 단과대로 전환
1984년 법학관 준공
2005년 법과대학 설립 100주년
2007년 03월 국내 최대 법학도서관인 해송법학도서관 개원
2009년 법학전문대학원으로 전환됨
2.2 국내 최고(最古)의 법과대학
1905년에 설립된,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법과대학이다.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의 전신인 법관양성소가 1895년에 세워져 연도가 더 빠르다고는 하나, 1년제의 국가관리 양성기관으로서 학문적 독립성을 갖춘 교육기관이라 보기 어렵기 때문에, 우리나라 법과대학의 효시는 고대법대가 맞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는 '근대적 법학 교육의 시작'이라는 측면에서 법관양성소보다 늦을 수밖에 없고, '대학'이라는 구체적 실체를 놓고 보더라도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와 비교하면 보성전문학교는 '대학'이 아닌 전문학교에 불과하기 때문에, 고대법대는 그냥 어중간한 위치를 점할 뿐이라는 비판도 존재한다. 오래되기만 하면 뭐해? 대다수 범생이들은 일제가 세운 경성제대 법대의 후신인 설법을 더 좋아하는데... 그렇다면 우리 국민 전부가 다 친일파라는 건가?
2.3 학문적 전통
일제 시절에 당대 최고의 조선인 변호사였던 허헌과 가인 김병로, 해공 신익희, 법철학자 안호상, 헌법학자 유진오, 법철학자 최용달, 상법학자 최태영, 민법학자 진승록, 형법학자 이건호 등 저명한 학자들이 보성전문 법과의 교수진에 포진하고 있었다. 경성제국대학 법학과의 교수진이 전원 일본인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보전 법과의 교수진은 국내 법학자들 가운데 최고의 인물들로 구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해방 이후에는 대한민국 헌법을 기초한 유진오 총장의 리더십 아래 민법학자 현승종, 국제법학자 박재섭, 법철학자 이항녕, 형법학자 남흥우, 상법학자 차낙훈 등[3]이 고려대학교 법과대학의 학맥을 이어나갔다. 1980년대 이후에는 민법에서 김형배, 조규창, 형법에서 김일수, 배종대, 상법에서 이기수, 헌법에서 계희열 등 독일유학파 출신들이 고려대학교의 학풍을 주도하면서, 주로 일본 번역법학에 의존하던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의 학풍에 맞서는,[4] 대항마 구실을 담당하였다.
1990년대에는 김일수, 배종대, 이상돈 등 고려대학교 형법 교수들의 학문적 역량이 아주 높은 평가를 받아서 서울법대를 압도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1990년대 중후반에는 당시 고대법대에 임용된 행정법 류지태, 상법 김정호, 민법 김제완 교수 등의 강의력이 워낙 좋아, 고대법대생들의 실력이 급상승하기도 했다.
그러나 2000년대 이후에는 고대법대의 학문적 위상이 다소 떨어진다는 평가가 주를 이루고 있다. 고대법대 학-석사졸업, 독일법대 박사졸업이라는 이른바 고법 성골라인을 밟은 교수들의 실력이 옛 스승의 실력만 못하지 않냐는 의문이 제기되고 있는 것.[5] 그리고 非고대 출신, 실무출신 교수들도 민법의 지원림, 김제완 등을 제외하면 학문적으로 그닥 두각을 나타내지 않는다는 불만이 나오고 있다.[6] 같은 기간 동안 서울법대가 양창수, 윤진수와 같은 탁월한 실력자들을 교수로 초빙하여 학문적으로 급성장한 것에 비해 상대적으로 고대법대가 계속 부진하다는 말들이 나오고 있다.[7]
2.4 학생운동의 전통
일제 강점기 초부터 남형우, 김립, 윤해, 이춘숙 등 보전 법과의 졸업생들 가운데 다수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하였다. 그 외에도 서상일 등 숱한 졸업생들이 만주와 대구 등지에서 독립운동가로 활약하는 등 보전 법과생들은 국내 그 어느 학교 어느 학과 학생들보다도 더 민족독립에 헌신한 사람들의 비율이 높은 편이었다.
3.1 운동 당시에는 실질적으로 만세시위를 주도한 학생대표가 바로 보전 법과 재학생인 강기덕이었다. 그 후에도 보전 법과는 전통적으로 데모기질 충만한 민족독립운동, 사회주의운동의 투사들을 무수히 길러낸 학교로 명성이 높았다. 일제시대 최고의 민족지도자 중 한 사람이었으며 가장 유명한 조선인 출신 변호사였던 허헌도 보전 법과 출신이었는데, 해방 이후 월북한 허헌은 김일성대학교 초대 총장으로 임명되었을 정도로 조선 지식인 사회에서 무게 있는 인물로 인정 받고 있었다.
해방 이후 고려대학교 법과대학으로 개칭된 이후에도 엘리트 좌파 학생들의 소굴로 유명했다. 조정래의 대하소설 태백산맥에서도 "서울의 ㄱ대학 법과는 사상적으로 중무장되고 행동적으로 과격한 그야말로 골수 사회주의자들의 집합소였다."라고 묘사되고 있을 정도이다.[8] 한국의 체게바라로 불리던 이현상 남부군 총사령관과 이호제 강동학원 원장도 보전 법과, 즉 고려대학교 법과대학 출신이었다. 물론 고대법대에는 좌파 학생들만 득시글했던 것은 아니며, 이철승 같은 우파 학생운동 지도자도 고대법대 소속이었다.
자유당 정권 말기 4.18. 의거의 주역도 고려대학교 법과대학 학생들이었다. 한일국교정상화 반대 시절은 물론이고 서슬 퍼런 유신 시절에도 전국에서 가장 극렬하게 박정희 정권에 저항하던 학생들은 바로 고려대학교 법과대학 학생들이었다. 예를 들어 1971년 광주 대단지 사건이 일어났을 때, 고려대 지하신문 '한맥'을 통해서 이를 폭로하고 그 실상을 전세계에 알린 사람은 법학과 70학번 조상호였다.[9] 박정희가 죽고 짧은 서울의 봄이 찾아왔을 때, 당시 고려대 총학생회장은 법과대학 74학번 신계륜이었는데, 그때 신계륜의 주장대로 서울역 앞에서 학생들이 계속 버티며 투쟁했다면 광주의 비극은 없었을지도 모를 일이다.[10]
그 후 전두환-노태우 정권기에도 전국적인 대규모 학생운동을 이끌었던 것은 고대법대생들이었다. 특히 85학번 오영식은 제2기 전대협 의장이었고,[11] 91학번 정태흥은 제3기 한총련 의장이었다. 물론 민주화 이후 고대법대의 학생운동은 급격히 쇠퇴하였지만, 1990년대 중반까지 고대법대가 대한민국 학생운동계에서 차지했던 위상은 실로 대단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2.5 법과대학 행정학과
1955년 만들어져 1981년까지 존속한 법과대학 행정학과는 이름과 달리 행정학을 가르치는 학과였다고 보기 어렵다. 당시 단과대의 소속 학과수에 따라 지원에 차등이 있었기 때문에 보다 많은 지원을 받기 위해 법과대학 내에 행정학과를 증설하였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1981년 행정학과가 정경대학으로 이전하면서, 고려대학교 법과대학은 법학과 단일학과 단과대로 전환되었다. 1980년까지 고려대학교 법과대학 행정학과를 다녔던 학생들은 스스로를 '고대법대생'으로 생각했지, '행정학과생'으로 생각하지는 않았으며, 지금도 고려대학교 법과대학 교우회에 참여할 뿐, 행정학과 교우회에 참석하지는 않고 있다.
하지만 2015년에 정경대학 행정학과에서 주최한 '행정학과 설립 60주년 기념 행사'에는 과거 법과대학 행정학과 졸업생을 초청하여 교류하는 모습을 보였다.
2.6 입시성적에 있어서 시련기와 부흥기
1970년대 유신 시절에 박정희 정권에 고려대학교가 가장 앞장서서 저항하였기 때문에, 그 여파로 고대법대의 수업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고대법대의 위상이 떨어지고 심지어는 연상(연대경영)에도 밀린다고 할 정도가 되었다.[12] 그러다가 1980년대 들어 입학정원제가 실시되고 1981년부터 입학 정원이 크게 늘어나면서 1982년 법과대학 건물의 신축 계획이 발표되고 1984년 5월 29일, 비로소 연면적 1200평 규모의 법과대학 건물이 완공됨으로써 고대법대는 새로운 도약의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특히 사법시험 합격인원이 300명으로 늘어나면서 고대법대 출신의 사시합격자가 폭발적으로 증가하자, 1980년대 후반부터는 고대법대가 문과 분야에서 비서울대 학과들 가운데 최고봉의 위치를 차지하였다.
1990년대에는 특차전형이 생기면서 고대법대에 우수한 학생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내신에서 핸디캡이 있었던 외고 출신 인재들이 서울대 대신 특차로 고대법대에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1995년의 경우 고법 특차 합격생이면 설법까지 올킬할 실력이라는 게 대입 수험가에서 정설로 통할 정도였다. 그러자 고대법대 교수들이 1997년 입시에서 고려대학교 여러 학과들 가운데 법학과만 나군으로 옮겨서 서울대학교 법과대학과 경쟁하였는데, 그 결과 정시컷이 크게 내려앉는 굴욕을 경험했다. 당시 가군이었던 고려대 정외과와 행정학과의 컷이 법학과보다 더 높았을 정도로 참담한 패배였다.
그러자 고대법대는 재빨리 가군으로 옮겨서 신입생을 받았고, 그 후 컷이 다시 수직상승하여 비서울대학교 학과들 가운데 연의와 함께 다시 투톱을 형성할 정도의 막강한 위상을 회복하였다. 심지어는 대입 수험생들 사이에서 선호도가 설인문을 능가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2000년대에는 고대법대 최초합의 경우 수능점수 0.1%에 해당하는 실력이었고, 이러한 성적이면 어지간한 의대도 다 합격한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였다.
2.7 사법시험 성적
1981~1985년의 통계에 따르면, 서울대가 821명의 사시 합격자를 배출할 동안, 고대는 205명의 사시 합격자를 배출했다. 서울대에 비하면 상당히 합격자 숫자가 적긴 하지만, 법대만 놓고 보면 큰 차이가 나지 않고, 특히 고대는 인풋에 비해 아웃풋이 대단했음을 알 수 있다. 같은 기간 성균관대가 68명, 연세대가 62명, 한양대가 59명을 합격시킨 것과 비교할 때, 성대+연대+한대를 다 합쳐도 고대 합격자에 전혀 못 미쳤음이 확인된다.
1986~1990년의 통계에 따르면, 서울대가 661명의 사시 합격차를 배출할 동안, 고대는 251명의 사시 합격자를 배출했다. 서울대와의 격차를 좁히는 데는 성공했지만, 같은 기간 연대가 110명, 한대가 103명, 성대가 80명을 합격시켰던 것과 비교하면, 연대, 한대, 성대와 고대 간의 격차도 줄었음이 확인된다.
1991~1995년의 통계에 따르면, 서울대가 780명의 사시 합격자를 배출할 동안, 고대는 225명의 사시 합격자를 배출했다. 서울대와의 격차가 다시 벌어졌는데, 이는 1990년대부터 서울대 비법이 사시에 대거 뛰어든 때문으로 보인다. 같은 기간 한대는 89명, 연대는 86명, 성대는 63명 합격했으니, 한대, 연대, 성대 합격자를 다 합친 숫자와 고대 합격자 숫자가 비슷했다고 할 수 있다.
1996~2000년의 통계에 따르면, 서울대가 1217명의 사시 합격자를 배출할 동안, 고대는 548명의 사시 합격자를 배출했다. 300명 정원의 사시합격자 수가 500~700명으로 늘어나면서, 고대법대 90년대 초반 학번들이 거의 미친 듯한 아웃풋을 선보이던 시절이다. 같은 시기 연대는 311명의 합격자를 배출하여 대단히 약진했고, 한대는 193명, 성대는 158명이 합격하여 연대가 한대, 성대를 따돌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2001~2005년에는 서울대가 1711명의 사시 합격자를 배출할 동안, 고대는 808명의 사시 합격자를 배출했다. 설법과 고법의 사시 합격자 숫자가 거의 비슷해진 시절이라고 할 수 있다. 같은 시기 연대는 465명이 합격했고, 한대는 261명, 성대는 214명이 합격했다. 실제로 2002년에는 사시 1차 합격자 숫자에서 고대법대 출신의 인원수(379명)가 서울법대 출신의 인원수(365명)를 앞지르는 일이 일어났다.[13]
2007년에는 사법시험 합격자가 156명을 기록하였고, 2008년에는 고대법대 출신 사시 합격자 숫자(151명)가 서울법대 출신 사시 합격자 숫자(143명)를 크게 앞지르기에 이르렀다.[14]
2000년대부터는 몇 년에 한번씩 사법시험 수석합격자와 최연소합격자를 배출하였다. 사법연수원에서도 상위권 졸업생들을 많이 배출하였다. 예를 들어 2011년에는 사법연수원 수석을 고대법대 출신이 차지하였고,[15] 2008년 1월에는 사법연수원 졸업식에서 2등과 4등을 고대법대 출신이 차지하기도 하였다.[16]
2009년에도 사법시험 2차 합격자 1009명 중 고려대 법대 출신 합격자가 155명으로 가장 많은 인원을 차지했다. 서울대 법대 출신은 153명으로 고려대 법대에 이어 근소한 차이로 2위에 올랐다.[17]
2.8 법학전문대학원 도입 이후
2007년 7월 3일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 법안이 국회를 갑자기 통과하면서, 로스쿨제도의 도입에 거의 대처를 못하고 있던 고대법대의 추락이 시작되었다. 로스쿨 인가 당시 성균관대 법대, 연세대 법대보다도 순위가 더 낮은 4위에 랭크되었으며, 로스쿨 정원 배정도 성대법대, 연대법대와 같은 숫자인 120명을 배정 받는 개굴욕을 당하였다.[18]
충격을 받은 고려대는 2008년 2월 경 로스쿨예비인가 반납을 심도 있게 검토하였다. 배정된 120명으로는 로스쿨 본래 취지에 맞게 운영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차라리 현행 법과대학 체제를 유지하는 게 낫다는 판단에서였다.[19] 이때 고대법대가 강단 있게 로스쿨예비인가 반납결정을 하기를 많은 사람들이 애타게 기다렸으나, 결국 고대법대는 슬그머니 반납의사를 철회해버리고 말았다.
로스쿨이 문을 연 이후에는 입학생의 수준에서 고대 로스쿨과 연대 로스쿨이 사실상 거의 차이가 나지 않는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20]
2.9 자유전공학부
고대법대의 신입생 모집 중단으로 2009년 설립된 것이 자유전공학부이다. 실제 커리큘럼은 법학부에 준한다고 보기에 부족한 점이 있지만, 어쨌든 고대법대의 전통을 잇는 학부이다. 법대 부활에 대비해서 정원을 빼놓았기 때문에, 유사시에 고대법대가 부활하면, 자유전공학부의 역사는 고대법대의 역사에 편입될 가능성이 높다.
- '공공거버넌스와 리더십' 융합전공: '10학번부터 자유전공학부 학생들이 필수로 들어야 하는 융합전공[21]. 그래서 자전 학생들은 다른 제2전공(이중전공, 융합전공, 학생설계전공)을 할 수 없다. 그러니까 실제로는 제1전공만 인문·사회계열 학과 중에서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것이다(그것도 기본전공만 가능. 심화전공은 불가). 게다가 사실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게 각 학과별로 TO가 있어서 학점이 좋지 않으면 본인이 원하는 학과를 선택하기 매우 어렵다.[22] 커리큘럼도 아무리 봐도 로스쿨 예비과정
및 고시 대비과정으로 취급되는 중(...). 헌법, 민법, 형법 과목과 라틴어 I 혹은 희랍어 I 혹은 동양의 지혜[23]를 필수로 수강해야 하고 법학, 행정학, 경제학 영역 선택과목에서 각각 6학점 이상 들어야 하며, 이 선택과목들은 24학점 이상 들어야 한다. 왜인지는 도저히 알 수 없지만 라틴어 I과 희랍어 I이 전공필수인 당혹스런 전공이다.
- 전공배정: 이수학점과 평점 그리고 신입생세미나 출석 등의 지표로 평가해서 1지망부터 23지망까지 신청받는다.[24] 사실상 평점이 가장 중요한 요소이고, 경영학과가 3점 후반대 경제학과가 3점 초반대로 커트라인이 형성되고 나머지과는 사실상 프리패스(...) 이는 한 과에 배정될 수 있는 최대인원이 자유전공학부 총원[25]의 30%까지 되어있기 때문에 60명 넘게 경영, 경제로 빠져버리면 사실상 나머지 학과들은 전공배정에 있어서 학점이 의미가 없다.[26] 전공배정을 받은 이후에도 단과대는 자유전공학부 소속인 것에 변함이 없다.[27]
- 외국인 신입생?: 2014년에 외국인 신입생 100여명을 자유전공학부에서 모집한다는 루머가 돌기 시작하더니 그것이 현실화 되어버렸다. 외국인 신입생들은 2학기에 입학하였으며 '공공거버넌스와 리더십' 융합전공이 아닌 한국학, 융합전공 등 뭔지 잘 모를것들을 배우고 있다고 한다. 다만 한국어를 몹시 잘하는 국적만 외국인인 경우가 꽤 있기 때문에(...).
- 반: A반, B반, C반, D반 이렇게 4반이다.[28]
- 시설: A반부터 D반까지 각 반의 반실이 독립적으로 존재한다. 자유전공학부 학생회실은 별개로 존재한다. 그 외에 밴드실, 동아리실 다수 보유. 모두 구법관에 위치하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수업은 신법관에서 듣는다.
3 출신 인물
- 허헌 - 김일성대 초대 총장 (법과 1907년 졸업)
- 변영만 - 독립운동가/변호사 (법과 1908년 졸업)
- 남형우 - 임정 법무총장 (법과 1908년 졸업)
- 서상일 - 독립운동가 (법과 1909년 졸업)
- 윤해 - 임정 국민대표회의 의장 (법과 1910년 졸업)
- 김립 - 임정 국무원 비서장 (법과 1910년 졸업)
- 장도빈 - 대한매일신보 논설주필 (법과 1911년 졸업)
- 차상찬 - 한국 잡지언론의 개척자 (법과 1913년 졸업)
- 이병도 - 대한민국 역사학계 태두 (법과 1915년 졸업)
- 이춘숙 - 임정 학무차장 (법과 1916년 졸업)
- 김기전 - 독립운동가/사회운동가 (법과 1917년 졸업)
- 한기악 - 동아일보/조선일보 편집국장 (법과 1917년 졸업)
- 강기덕 - 3.1.운동 학생대표 (법과 1919년 졸업)
- 방정환 - 어린이운동가 (법과 1918년 입학)
- 김정렬 - 2선 의원/ 변호사 (법과 1926년 입학)
- 이현상 - 빨치산 사령관 (법과 1927년 입학)
- 김용식 - 조선의 축구영웅 (법과 1930년 입학)
- 이원홍 - 제헌의원 (법과 1931년 졸업)
- 김재열 - 변호사 (법과 1932년 입학)
- 유성권 - 3선 의원 (법과 1936년 중퇴)
- 허정 - 과도정부 수반 (법과 1936년 졸업)
- 백남억 - 5선 의원 (법과 1936년 졸업)
- 윤택중 - 3선 의원 (법과 1936년 졸업)
- 허정구 - 삼양통상 회장 (법과 1937년 졸업)
- 이호제 - 사회주의 운동가 (법과 1938년 졸업)
- 김학묵 - 한국뇌성마비복지회장 (법과 1938년 졸업)
- 강의석 - 검사/변호사 (법과 1939년 졸업)
- 정성태 - 국회부의장 (법과 1941년 졸업)
- 김중서 - 대법관/중앙선관위장 (법과 1943년 졸업)
- 장영순 - 검찰총장/법무부장관 (법과 1944년 졸업)
- 김종경 - 검찰총장 (법과 1944년 졸업)
- 이철승 - 신민당 대표최고위원 (법과[29] 1946년 졸업)
- 김일두 - 인권변호사 (법률학과 1948년 졸업)
- 유수호 - 민정당 국회의원 (법률학과 51학번)
- 황윤기 - 재선 의원 (법학과 53학번)
- 이상희 - 내무부/건설부 장관 (법학과 53학번)
- 염보현 - 서울시장 (법학과 54학번)
- 박승규 - 초대 환경청장 (법학과 54학번)
- 김진배 - 재선 의원 (법학과 54학번)
- 김기배 - 4선 의원 (행정학과 55학번)
- 장덕진 - 대한민국 최초 고시3관왕 (법학과 56학번)
- 이종남 - 법무부장관/감사원장 (법학과 57학번)
- 이택석 - 3선 의원 (법학과 57학번)
- 이성호 - 4선 의원 (행정학과 58학번)
- 김중권 - 민주당 대표최고위원 (행정학과 59학번)
- 임채정 - 국회의장 (법학과 60학번)
- 양경자 - 재선 의원 (법학과 60학번)
- 박상범 - 청와대 경호실장/국가보훈처장 (법학과 60학번)
- 유지담 - 대법관/중앙선관위장 (법학과 61학번)
- 남궁진 - 문화관광부 장관 (법학과 61학번)
- 김충조 - 5선 의원 (법학과 61학번)
- 박재홍 - 4선 의원 (행정학과 61학번)
- 김상희 - 가수 (법학과 61학번)
- 이진강 - 대한변협 회장 (법학과 62학번)
- 이팔성 - 전 우리금융지주 회장 (법학과 63학번)
- 김일수 - 모교 교수 (법학과 65학번)
- 이기수 - 모교 총장 (법학과 65학번)
- 채이식 - 세계적인 해법학자 (행정학과 67학번)
- 이상수 - 인권변호사/정치인 (법학과 67학번)
- 김종빈 - 검찰총장 (법학과 67학번)
- 조성준 - 재선 의원 (법학과 67학번)
- 김성호 - 법무부장관/국정원장 (법학과 68학번)
- 송훈석 - 3선 의원 (행정학과 68학번)
- 이귀남 - 법무부 장관 (법과대학 69학번)
- 조상호 - 나남출판사 대표 (법학과 70학번)
- 김봉수 - 키움증권 창립자 (법학과 70학번)
- 배종대 - 모교 교수 (법학과 70학번)
- 정세균 - 국회의장/민주당대표 (법학과 71학번)
- 홍성방 - 법학자 (행정학과 71학번)
- 홍준표 - 경남지사 (행정학과 72학번)
- 송하진 - 전라북도 도지사 (법학과 72학번)
- 강희락 - 경찰청장 (법학과 72학번)
- 허구연 - 야구해설가 (법학과 72학번)
- 강병규 - 안전행정부 장관 (법학과 73학번)
- 신창현 - 재선 의원 (행정학과 73학번)
- 정유섭 - 제20대 의원 (행정학과 73학번)
- 염재호 - 모교 총장 (행정학과 74학번)
- 신계륜 - 4선 의원 (행정학과 74학번)
- 이춘희 - 세종시장 (행정학과 74학번)
- 임종인 - 변호사/국회의원 (법학과 74학번)
- 김태규 - 명리학자 (법학과 74학번)
- 김용철 - 검사/삼성그룹 법무팀장 (법학과 76학번)
- 최용규 - 재선 의원 (법학과 76학번)
- 구자균 - LS산전 회장 (법학과 76학번)
- 류지태 - 모교 교수 (법학과 77학번)
- 박남춘 - 재선 의원 (행정학과 77학번)
- 문석호 - 재선 의원 (법학과 77학번)
- 오세훈 - 서울시장 (법학과 79학번)
- 양운덕 - 철학자 (법학과 79학번)
- 이재현 - CJ 대표이사 (법학과 80학번)
- 이상돈 - 모교 교수 (법학과 80학번)
- 금민 - 사회당 대통령후보 (법학과 81학번)
- 김귀옥 - 판사 (법학과 81학번)
- 이정미 - 헌재 재판관 (법학과 81학번)
- 조희진 - 여성 최초 검사장 (법학과 81학번)
- 전해철 - 변호사/국회의원 (법학과 81학번)
- 주광덕 - 재선 의원 (법학과 81학번)
- 정태옥 - 제20대 의원 (법과대학 81학번)
- 최교일 - 전 서울중앙지검장, 제20대 의원 (행정학과 81학번)
- 이원욱 - 재선 의원 (법학과 82학번)
- 김의겸 - 한겨레 논설위원 (법학과 82학번)
- 김경진 - 변호사/국회의원 (법학과 83학번)
- 오영식 - 제2기 전대협 의장 (법학과 85학번)
- 박훈 - 노동문제 전문 변호사 (법학과 86학번)
- 김두식 - 경북대 교수 (법학과 86학번)
- 함진규 - 19대 국회의원 (법학과 86학번)
- 노종면 - YTN 앵커 (법학과 87학번)
- 박재영 - 판사/변호사 (법학과 87학번)
- 김정일 - 행정법 강사 (법학과 92학번)
- 임은정 - 검사 (법학과 93학번)
- 홍성수 - 숙명여대 교수 (법학과 94학번)
- 정선균 - 행정법 강사 (법학과 94학번)
- 김정철 - 형법 강사 (법학과 95학번)
- 나승철 - 서울변협 회장 (법학과 96학번)
- 강다솜 - MBC 아나운서 (법학과 05학번)
- ↑ 고려대학교의 대부분 학과가 연세대학교와 엎치락 뒷치락하는 관계이며, 심지어는 연세대학교에 밀린다는 평가도 받았던 것에 비하면, 고려대학교 내에서 거의 유일하게 연세대학교에 압도적 우위를 점하는 학과로 평가되었다.
- ↑ 고대법대의 위상을 알게 하는 것으로 입법부, 행정부, 사법부의 수장을 모두 한 명 이상씩 배출했다는 것이 있다. 임채정 국회의장, 정세균 국회의장, 허정 과도정부 수반, 김병로 대법원장이 그들이다.
김병로 대법원장은 고법 출신이 아니라 보전 법과 교수 출신이잖아!그 외에 로펌 대표변호사도 항상 일정 비율은 고법 출신이다. 2014년 기준으로 로펌 대표변호사의 숫자는 설법 42명, 고법 8명, 설경 2명, 성법 1명, 한법 1명이다. - ↑
모두 경성제대 법대 출신들이잖아? 그럼 경성제대 법대의 진정한 학맥은 고대법대가 잇는다는 건가? 그러고도 민족법학? - ↑ "설법 니네는 일본을 통해서 간접수입하지만, 우리 고법은 본고장 독일에서 직수입한단다~!"
- ↑ 물론 우리나라 법학도 이제는 많이 발전했고, 각 전공별로 세분화가 상당히 이루어짐으로써, 옛날 1980년대와 같이 한 전공에 도미넌트한 법학자가 나오기는 어차피 어려워졌다는 분석도 있다. 예를 들어 형법이라면 예전처럼 형총-형각-형소로만 나뉘는 게 아니라, 경제형법, 환경형법, 사이버형법, 보건형법, 마약형법, 조세형법, 교통형법, 정보형법, 양형법, 군형법 등으로 나뉘고 있고, 민법이라면 예전처럼 계약-물권-불법행위-친족-상속으로만 나뉘는 게 아니라, 매매-도급-금전채권-토지법-동산담보물권법-신탁법-성년후견법-시효법-집합건물법-소비자법-제조물책임법-주택임대차법-상가임대차법-여행계약법-의료법-손해배상법-부부재산법-이혼법-친자법-입양법-유증법-법정상속법-유류분법 등으로 수십갈래씩 나뉘는데, 예전처럼 대학자가 나올 수 있겠느냐는 것. 그리고 옛 스승들의 그늘이 너무 커서 후진들이 햇빛 보기 어렵다는 말도 있다. 막상 독일박사 출신 아닌 법학자들 중에 마땅한 인물이 있는 것도 아니다.
- ↑ 非고대 출신, 실무출신 교수들이 대부분 학문적으로 주목을 받기 어려운 후4법이나 인접법분야로 임용이 되었으니 당연한 측면도... 사실 실무출신이라고 해서 무조건 실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고대법대의 기존 학풍과는 뭔가 조화가 되지 않는, 너무 가볍고 실용적인 느낌을 갖고 있다는 점도 고려해봐야 한다.
- ↑ 그런데 양창수, 윤진수의 시대도 이젠 끝났다는 말들이 많고, 어차피 요즘은 인서울 로스쿨들 전체적으로 교수진이 거의 평준화되었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 ↑ 태백산맥의 주인공들 가운데서도 이해룡과 정하섭이 고려대학교 법과대학 출신이다.
- ↑ 그로 인해 조상호는 경찰에 체포되고 강제징집되어 최전방에서 근무해야 했다. 후에 조상호는 나남출판사라는 사회과학 전문 출판사를 설립하여 출판운동을 통해 대한민국의 민주화에 기여하였다.
- ↑ 그 당시 서울대 총학생회장이었던 심재철의 주장대로 서울역에서 회군한 결과, 각 대학의 운동권 학생들은 각개격파되어 모진 고문을 받고 감옥 또는 군대로 끌려가 죽음을 당하였다.
- ↑ 제1기 전대협 의장은 고대 국문과 84학번 이인영이었다.
- ↑ 특히 1975년과 1976년에는 고려대학교 전체의 입시성적이 폭락하였고, 당연히 법학과의 입시성적도 죽을 쑤었다.
- ↑ 연대는 법대와 비법대를 모두 합쳐도 201명에 불과했음.
- ↑ 고려대 전체 합격자 숫자는 183명으로 서울대 전체 합격자 숫자인 274명에 여전히 크게 뒤쳐졌음.
- ↑ 2012년 1월 18일 열린 41기 사법연수원 수료식에서 고려대 법대 출신의 허문희(당시 27세/ 명덕외고/ 고려대 법대 졸업)가 수석의 영광을 차지하였다. 연수원 성적이 4.3 만점에 4.28을 기록하였고, 1학기 전공 선택과목인 ‘헌법연구(1학점)’, 4학기 ‘형사변호사실무(2학점)’ 두 과목에서만 각각 A-, AO를 받고 모든 과목에서 A+를 받았다.
- ↑ 당시 1위는 이경민(26·명일여고·서울법대), 2위는 박미선(27·이화여자외고·고려대법대), 3위는 이창민(26·대구오성고·서울대법대), 4위는 이인수(27·대원외고·고려대법대)가 차지하였다.
- ↑ 그 뒤로 연세대 법대(101명), 한양대 법대(68명), 성균관대 법대(66명), 이화여대 법대(43명) 등의 순이었다. 이에 대해 정상조 서울대 법대 교수는 "서울대 법대 정원이 고려대 법대의 정원보다 적을 뿐더러 서울대가 내신 성적을 우선해서 입학생을 뽑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나온 것 같다"며 "로스쿨이 이미 생긴 상황에서 출신 학교별로 합격률을 따지는 건 구시대적인 발상"이라고 강조했지만, 당시 고려대와 서울대 법대 정원은 2008년 기준 각각 223명, 205명으로 고려대가 서울대보다 겨우 18명 가량 많은 수준이었다.
- ↑ 고대가 성대보다 역대 사법시험에서 두 배 이상의 합격자를 냈는데도 성대와 같은 정원을 배정받은 까닭은 불성실한 자료 때문인 것으로 알려졌다. 서울 시내 한 대학 관계자는 “고대는 이행계획서를 제출할 때 각 부문 평가요소 커트라인에 딱맞게 맞춰서 준비를 해 서류를 충실히 준비해온 성대 등 다른 대학에 비해 점수를 박하게 받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고려대는 66개 항목의 정량평가에서 8, 9위로 밀린 것으로 알려졌다. 여성교수 비율에서 4점, 실무 교수 충원에서 무려 7점, 연구 업적에서 4점, 재정에서 무려 9점이 깎였다는 것이다. 정량평가 1위는 서울대, 2위는 성균관대, 3위는 서울시립대였던 것으로 전해졌다.
- ↑ 당시 예비인가를 받은 서강대 한국외국어대 중앙대 건국대 한양대 등 5곳도 전국법대학장협의회 성명을 통해 "현행 로스쿨특별법은 총정원을 제한하는 데다 청와대가 법적 절차를 무시하고 예비인가 과정에 개입해 위법 요소가 있다"는 의견을 밝혔다.
- ↑ 이건 서울대생, 연대생들이 고대 로스쿨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데 기인한다는 분석도 있다. 시설-교수진에 있어서는 고대 로스쿨이 연대 로스쿨보다 아무래도 훨씬 더 나은 게 사실이지만, 연대는 특유의 자유분방하고 센슈얼한 분위기, 예쁜 여학생이 많다는 점 등에 있어서 메리트가 있고, 고대 로스쿨은 뭔가 칙칙한 분위기라는 선입견이 있는 데다가 서울대생들이나 연대생들을 약간 배척할 것 같은 느낌적 느낌이 있어서 서울대 출신, 연대 출신들이 고대 로스쿨을 좀 기피한다나? 어쨌든 로스쿨 도입 초기 고대 로스쿨과 거의 맞먹을 것 같은 기세였던 성균관대 로스쿨이 요즘 천천히 주저앉고 있는 걸 보건대 연대 로스쿨도 점차 제 자리를 찾을 거라는 전망 역시 존재한다.
- ↑ 2014년부터 연계전공이 융합전공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 ↑ 자유전공학부 첫 학번인 09학번은 각 학과별로 TO가 없어서 학과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다들 경영학과에 몰려가는 바람에 경영예과냐는 비아냥을 듣고부터 학과별 TO가 생겼다.
- ↑ 유가와 도가 사상을 경전 원문을 통해 고찰해보는 강의이다.
- ↑ 경영대학(1), 문과대학(15), 정경대학(4), 국제학부(1), 미디어학부(1)에 생명과학대학의 식품자원경제학과(1)까지 선택 가능하다. 즉, 사범대를 제외한 인문사회계 학과 중에서 하나를 제1전공으로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 ↑ 2014학번 기준 108명이다.
- ↑ 이는 11학번때 확정된 것으로 09학번 때는 정말 자유로웠기 때문에 대다수가 경영학과로 진학해버렸고 그 반동으로 10학번때는 가장 괴랄한 전공배정이 실시되었다. 지원하고자 하는 과의 정원의 10%정도만 합격이 되며, 지금과는 다르게 2학기 기말고사가 실시되기 전에 전공배정신청을 받았다. 그래서 1지망에서 밀려서 8, 9 지망의 독어독문 영어영문 등으로 배정되는 대참사가 일어났었고, 따라서 모든 학번 중에서 학과 스펙트럼이 가장 넓다.
- ↑ 경영학과를 예로 들면, 학적에 경영대학 경영학과가 아닌 자유전공학부 경영학과로 표시된다.
- ↑ 법대의 영향을 받은 듯하다. 초기에는 법대처럼 A1~D4까지 16개의 조로 나누려고 시도했었다는 카더라(...). 하지만 자유전공학부 인원이 한 학년에 100명은 간신히 넘는 정도임을 고려해볼때 현실적으로 불가능했었다.
- ↑ 단, 졸업은 보성전문학교 법과가 아닌 정법대학 정치학과로 하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