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전쟁의 전개


양측의 전선 변화를 동영상으로 요약한 것. 상세한 내용은 후술.

1 북한의 기습 남침

개전 당시 남북한 병력 현황 (단위 : 명)
국군인민군
부대명병력부대명병력
1사단9,7151사단11,000
2사단7,9102사단10,838
3사단7,0593사단11,000
--4사단11,000
5사단7, 2765사단11,000
6사단9,1126사단11,000
7사단9,6987사단12,000
8사단6,866--
수도경비사령부7,061--
--10사단6,000
--13사단6,000
--15사단11,000
--766 독립보병연대3,000
--12 모터사이클연대2,000
--105 기갑여단6,000
--경비 1 여단5,000
--경비 2 여단2,600
--경비 3 여단4,000
--경비 5 여단3,000
--경비 7 여단4,000
--1,2군 사령부5,000
합계64,697135,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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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6월 25일, 개전 당시 양측 병력배치현황. 기호에 대한 의미는 단대호 항목을 참고하면 된다.

사단을 표시한 위에 x자 2개가 있는 상자의 크기가 국군이 더 크기 때문에 국군이 병력상 우세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상자의 크기와 부대의 규모는 별개다. 상자가 크다는 것은 그만큼 해당 사단이 담당하는 구역이 넓다는 것. 북한의 사단을 표현한 상자의 크기가 작으면서 여러 개라는 점을 주목하자. 즉, 북한은 동일 전역에 더 많은 사단을 투입하여 국군보다 수적으로도 우세했다.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 4시, "폭풍" 이라는 작전명 하에 북한은 전면적인 남한 침공을 개시하였다. 물론 북한에서는 열심히 '남한이 먼저 쳤다'고 하나, 그런 식의 전투가 있었는지에 대해서도 회의적이며, 있었다 한들 이전에 빈발했던 국지전 수준의 전투를 전쟁의 명분으로 삼았다는 설이 절대 다수이다.

이러한 와중에 군 수뇌부는 미 군사고문단과 함께 이렇게 급박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육군본부 장교클럽에 모여서 놀고 먹는데 여념이 없었다. 게다가 전방 사단의 경우 전력의 대부분이 외박, 아니면 휴가였다. 북한에게 오라고 광고를 한 셈. 그러나 이 부분은 어느 정도 정상참작의 여지가 있는 것이, 38선상에서의 연이은 무력충돌과 전쟁 발발설로 긴장된 분위기 속에 당시 군은 직전까지 장기간동안 최고 경계태세를 유지하고 있던 참이었다. 상술한 대규모 출타도 이로 인한 병력들의 피로도를 고려한 전투력 회복 차원에서 조치되었던 것. 한편 이 건에 대해서는 역으로 한국전쟁 10대 미스테리 항목에서 나타나는 것과 같은 시각도 있다.

본격적 개전 이전부터 연속되던 국지전의 책임이 누구에게 있느냐, 6월 24일의 국지전이 있었느냐, 있었다면 어느 쪽 책임이냐 하는 문제를 떠나 3일 만에 서울을 점령한 것은 북한이 전쟁 준비를 했다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다. 현실적으로 미리 준비하지 않고 대부대가 전투를 수행하며 수십 킬로미터를 전진한다는 건 불가능하니까. 요컨대 설령 한국전쟁의 개전이 남한의 선공에 의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북한이 남한에 대한 공격의사가 명백했음이 결과론적으로 증명된다는 것이다.

1950년 6월 25일. 장마철과 겹쳐서 군대의 진군에는 적절치 않은 시기인 초여름에 개전한 이유가 가관인데, 김일성 자신이 8월 15일 광복절에 맞춰 통일 선언을 하기 위해서였단다. 38선에서 최종목표 부산까지 500km라 가정하고 소련군 고문관의 계산에 의해 하루 10km씩 진격할 것을 가정하면 50일이 소요되는데, 8월 15일에서 50일을 역산하면 6월 25일이므로 이 날을 개전일로 택일하여 북한군이 선제 공격에 나서면서 전쟁이 발발하게 된다.

1.1 국군의 초기 대처

그래도 국군 전방지휘관들이 모두 바보는 아니었기에 북쪽의 동향이 수상하다는 첩보에 따라 24일 저녁에 전방 사단에서 몇 개 팀의 정찰조들이 38선을 넘어 정찰을 나갔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리고 그 중의 한 조가 대규모의 전차들이 남진하는 것을 목격했으나, 재수가 없으려면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고 보고하려고 하니 당시로는 최첨단 통신장비였던 미제 SCR-300 무전기가 맛탱이가 가버렸단다. 정찰대원들은 결국 적 후방에 남겨졌고 일부는 실종, 일부는 인민군을 털어서 변복을 하여 겨우 퇴각할 수 있었다. 뭐, 무전기가 고장나지 않아서 전차가 떼로 몰려온다는 보고가 들어갔다고 해도 대전차전 역량이 부족해서 얼마나 효과적인 대처가 가능했을지는 모르겠지만.[1] 다만 이 이야기는 공식 전사에서는 찾아볼 수 없으니 알아서 걸러들을 것.

개전 시각이나 첫 교전이 일어난 시간이 언제였는지에 대해서는 참전 용사들의 증언이 매우 엇갈리고, 당시 육본의 상황은 그야말로 개판 5분전이었기 때문에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일반적으로 육군본부에서 동시다발적인 교전 상황을 인식하기 시작한 새벽 4시로 개전 시각을 서술하고 있다. 이 때 육군본부에서 당직근무를 서고 있던 당직장교는 당시 육본 정보국 연락장교였던 김종필 중위였다. 이 김종필은 훗날 거물급 정치인으로 이름을 떨친 그 김종필이 맞다.

김종필은 육본 국장들에게 연락을 취해서 깨웠고, 당직사령에게 전군에 비상을 걸 것을 건의했으나 육본 당직사령은 자신에게 그럴 권한이 없다며 거절했다. 채병덕 총참모장에게도 바로 연락이 갔으나, 클럽에서 놀다가 새벽 2시에 들어간 채병덕 총장은 급보를 들었음에도 잠깐 깨서 통상적인 국지전일 거라고 한마디 하고 도로 잤다.

결국 전군에 비상이 걸린 것은 급보가 들어오기 시작한 지 4시간이 지난 오전 7시였다. 이때 국방부 장관 신성모는 전쟁도 주말에는 쉬는 줄 알았는지 "신사는 주말에 근무하지 않습니다."라며 전화코드 뽑아놓은채 자고 있었고,과연 윗놈들도 신사인지는 넘어가...야 하나? 이승만 대통령은 9시가 넘어서야 보고를 받았다고 한다. 미군에 대해 기술한 부분에도 나오지만 미국 역시 트루먼 대통령이 휴가 떠나있는 것을 필두로 장관, 참모총장 등 모든 지휘라인이 부재중이었다. 뭐야 이거 무서워

한국에는 산이 많고 그나마 조금 있는 평지들은 죄다 질펀한 논바닥이라서 전차가 기동하기 힘들기 때문에, 2차 세계대전의 유럽 전선에서와 같은 대규모 전차전이 절대로 일어날 수 없다고 판단한 미군은 대전차무기를 달라는 국군에 2.36인치 M9 바주카와 57mm 대전차포만 있으면 모든 전차들을 다 까부술 수 있다며 이것들을 주고 갔으나, 그건 미군의 희망사항이었고 현실은 시궁창이었다. 미군이 준 바주카와 대전차포는 구일본군의 97식 전차같은 폐물은 충분히 상대가 가능했지만, 북한이 보유한 소련제 T-34/85 전차들을 막는 데는 택도 없었다.

국군 대전차반들은 미군들의 호언장담을 철저히 믿고 있었기에 굴러오는 전차들을 사정거리 내로 끌어들여 정확히 사격을 했으나 전차가 끄떡도 하지 않자 멘붕에 빠져버렸다. 포병대가 나서서 M3 105mm 견인곡사포로 적 전차에 직접조준사격까지 해 보았으나 효과가 없었다. 당시 국군의 유일한 기갑전력인 M8 그레이하운드 장갑차까지 동원되었지만 이 역시 T-34 앞에서는 역부족이었다.

전차가 없는 전선에서도 열세는 명백했다. 당시 백선엽 장군의 동생 백인엽 대령이 연대장으로 있던 육군본부 직할 제17연대는 황해도 옹진반도를 지키고 있었다. 이곳을 공격해온 북한군은 전차가 10대로 적은 편이긴 했으나 3배에 달하는 병력과 포병, 장갑차 등 압도적인 전력이었다. 17연대는 전력을 다해 항전했으나 끝내 인민군의 진격을 저지할 수 없게되자, 해군이 급히 파견한 상륙함 LST-801 천안함[2]과 소해정, 징발한 민간 선박을 타고 해상을 이용해 하루만에 인천으로 남은 병력이 무사히 철수하였다. 원래 옹진반도는 애초에 38선 이남 지역과 육지로 연결되어 있지 않았으므로 퇴로가 바다 밖에 없었던 것을 감안한다면 당시 전체 상황에 비추어 보았을 때 비교적 성공적인 탈출 케이스였다. 이후 17연대는 낙동강으로 물러서기까지 말 그대로 용전분투하면서 공을 세웠기 때문에 이에 대한 보상으로 해병대가 아닌 육군 부대임에도 인천상륙작전에 참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같은 사례는 전체 전선의 절망적인 상황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당장 숫적으로도, 장비로도 열세인 상황에서 농번기로 인한 대규모의 외박, 외출로 38선에 실제 배치된 병력은 편제보다도 더 적었고, 여기에 채병덕의 뻘짓까지 가해지자 제6보병사단춘천시에서 북한군 2군단을 3일간 저지한 것을 제외하고는 전체 전선에서 신나게 밀리고 있던 상황이었다.

게다가 사기진작 차원에서 국군이 반격에 성공하여 해주시로 진격하고 있다는 오보가 사태를 더욱 악화시켰다. 이 오보가 이후 북한의 북침설에 악용된 것은 안봐도 비디오. 심지어 제1사단 백선엽은 이 오보가 진짜인지 알고 전선을 맞추기 위해 북진해버려 38선 근처의 적 후방 지역에 고립 되어버렸다(...).

다만 문산과 봉일천 방면에서는 백선엽 대령의 제1보병사단이 그나마 건투하고 있었다. 사실 전방 4개 사단중 1사단, 6사단, 8사단은 각자 제자리를 지키고 열심히 싸우고 있었다. 1사단은 오히려 역공으로 나가 일부 시가지를 탈환하기까지 했고, 6사단은 포병으로 북한군 1개 군단을 초토화 시키고 있었으며, 8사단은 지형 자체가 험난해 적이 올만한 길이 정해져 있어 비교적 쉽게 막고 있었다. 문제는 북한군 주공인 포천시/동두천시-의정부시 축선. 이 축선은 계곡을 따라 개활지가 펼쳐진데다 도로망이 잘 발달되어 있어서 침공회랑으로 딱 알맞은 곳이었다. 이 취약한 방면을 지키고 있던 건 유재흥 사단장의 7사단의 2개연대였고, 사단 정면에는 북한군 3, 4, 15사단과 105전차여단 예하 전차연대 둘이 투입됐다. 7사단은 그야말로 박살이 나서 돌파당하고 말았다. 전 전선에서 비교적 성공적으로 방어작전을 전개하고 있었지만 7사단이 초장에 무너지자 북한군은 개전 첫날 그대로 서울로 난입! ...할 뻔 했는데 조선을 근대화시켜줬다는 일제는 대체 뭐했는지 도로가 너무 좁아서 북한군 전차가 통과가 불가능해 서울북쪽 가까이 왔다가 거꾸로 돌아갔고, 설상가상으로 후속하는 부대와 섞이는 대 혼란으로 2일을 낭비한다.

6월 27일 새벽 1시에 비상국회를 연 신익희 의장은 신성모 국무총리서리와 채병덕 총참모장에게 전황을 물어보았는데 신성모는 수도이전을, 채병덕은 수도사수를 주장하였다. 이에 국회 내에서 격론이 벌어지고 신성모와 채병덕은 자리를 떴다. 이후 엄청난 논쟁 끝에 결국 수도사수결의가 채택되었는데...

문제는 이것을 전달하려고 27일 04:00에 신익희 의장과 조봉암 부의장이 경무대로 향했는데 그곳이 텅 빈 것이다. 이에 신익희와 조봉암은 상황이 단단히 잘못된 것을 알고 바로 국회에 돌아와 사실을 알리고 산회했다. 당연히 국회의 수도사수결의는 전달되지 않았다. 그러니 정치권이 무리한 수도사수와 반격을 요구했다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이는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에서 출간한 <<6.25전쟁사>> 제2권 674쪽에 수록된 내용이다.

그러니 정확히는 정치권에서 무리한 반격 요구를 하려고 한거는 맞지만, 정확히는 하지 못했다. 하지만 결국 채병덕 총참모장의 지시에 의해 의정부와 동두천 일대에서 무리한 반격이 수행되었으며, 그 결과 방어선이 무너져내리고 남쪽에서 올라오는 병력은 오는대로 축차투입되어 허무하게 사라졌다.

참고로 이 때 서울시민을 동원해 결사 방어를 했으면 좋았지 않겠냐는건 한마디로 헛소리다. 당시 한국은 징병제조차 아니라[3] 군사 훈련을 받은 시민도 부족했고, 시민을 무장시킬 무기는 더더욱 없었다. 당시 서울에 진입한 북한군은 언급했다시피 국군 7사단을 그대로 무너뜨렸고, 후술하는 대전 전투에서 미군의 24사단을 패퇴시키고 딘 소장을 포로로 잡은 것이 서울에 진입한 북한군 4사단이다. 국군은 물론 미군의 정규 사단마저 막지 못하는 북한군 상대로 비무장, 비훈련 서울시민들을 전장에 내보내 사즉생 생즉사의 각오로 막으라는 소리는 그냥 전부 나가서 다 죽으라는 소리밖에 되지 않는다. 이는 일본이 미군상대로 민간인들에게 죽창들고 맞서 싸우려 한 것 보다 더 한심한 소리다. 만약 이랬다면 이승만 정부는 도망자의 오명에 학살자의 오명까지 뒤집어 썼을 것이다.

한편 채병덕 장군은 군 원로들에게 상황 브리핑을 하는 자리에서 또 '명령만 내리면 즉각 반격작전에 들어가 아침은 개성에서, 점심은 평양에서' 타령을 하다가 원로들에게 구박받았다.

어찌됐든 한강대교는 폭파되었다.. 결국 이소식을 듣고 1, 6, 8사단은 성공적인 방어를 하다가 후방 차단의 위협 때문에 후퇴해야 했다. 특히 경기도 방면의 1사단은 후퇴하라는 명령도 못듣고 그냥 장비 전부 버린 상태에서 개개인별로 한강을 건너 탈출하였다.

한편, 국군은 한강 이남으로 철수한 부대등으로 혼성 부대를 급조해 강북의 북한군과 대치하였다.(한강 방어선 전투) 혼성 부대라 지휘 체계가 제대로 안 잡히는 등 문제가 많았지만 최종적으로 퇴각한 7월 4일까지 그래도 며칠의 시간은 벌 수 있었고, 국군 재편성과 미군 병력이 투입될때까지 하루하루가 귀중했던 당시 상황에서 나름대로의 성과를 내었다.

덕분에 전쟁 3일만에 남한의 수도인 서울이 함락되면서 전쟁이 조기에 북한군의 승리로 종결될 가능성이 보였으나, 미국이 개전 이틀 만에 UN군 파병을 결정하면서 전쟁은 국제전 양상을 띄게 된다.

그렇다고 한강이북의 7만의 병력이 다 전멸하거나 포로로 잡힌 것은 아니고, 상당수는 전선 후방에서 게릴라전을 벌이거나 숨어 지내다가 국군이 반격에 나선 뒤에 하나 둘 합류했다. 이런 일은 이후에도 한국전쟁 내내 반복된다.[4]생존왕

어찌됐든 국군 10만 중 3만은 후방지원부대여서, 2만은 6,8사단, 5천은 한강이남 대전의 17연대와 영등포의 독립기갑연대, 그리고 15연대 3대대같은 후방경계부대, 그러면 4만 5천중 2만7천은 29일까지 한강도하 성공, 서울에서 숨거나 7월에 복귀한 숫자합하면 실제피해는 한 16000명이다. 사실 7만 전사설은 말그대로 6,8사단만 빼기한 무식한 샘법이고 역사를 잘 모르는 사람들이 국군의 실책을 강조하기 위해 강조한 탓도 있다.

당시 소련은 미국의 참전을 반대했으나, 소련이 우연히 불참해서 파병안 가결을 한 것이라는 게 근 40~50년간 정설이었다. 그러나 소련 붕괴 이후 기밀 해제된 스탈린 정권 시절 문건에 따르면, 스탈린은 한국전쟁에 북한을 도와 참가하는 것을 탐탁치 않게 여겨 당시 체코슬로바키아의 국가원수에게 보낸 편지에서 "미국이 한국전 개입을 지속하고 중국 또한 한반도에 끌려들게 된다면 어떤 결과가 올지 생각해보자"며 "유럽에서 공산주의를 강화할 시간을 벌고 우리에게 국제 세력균형에서 이득을 안겨줄 것"이라고 강조했다. 정치적인 의미이기도 하지만, 당시 소련은 유럽에서 불원간 미-서유럽 동맹과 공산권의 무력충돌이 일어날 경우 전력 면에서 소련이 열세하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단 이는 전쟁이 이미 시작된 뒤에 보낸 편지라는 점에 주의하자. 스탈린의 주장은 '변명'일 가능성도 크다.

그리고 그 우연이라는 것도 시각의 차이일 뿐 우연이 아니다. 당시에는 UN이 타이완 섬에 있는 중국 국민당중화민국 정부만을 공식적인 중국 정부로 인정했기 때문에 중공이 UN에 참가할 수 없었다. 이 때문에 소련은 중공을 인정해줄 때까지 UN 활동에 불참하겠다고 선언하고 유엔의 모든 회의에 대해서 계속 보이콧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소련이 만약에 안전보장이사회에 참석하여 거부권을 행사하며 UN군 결성을 반대하였더라도 미국은 어떻게든 UN의 이름을 따낼 작정이었다. 그래서 혹시라도 소련이 변덕을 부려 다시 출석할까봐 안보리가 아닌 총회의 이름으로 참전을 결정하게 한 것이다. 총회는 안보리 상임이사국의 독점권이 의미가 없는데다가 당시 유엔 회원국의 대다수가 미국 편에 가까운 서방 진영의 국가들이었으므로 소련의 반대 따위는 표로 눌러버릴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그리고 밑의 내용을 더 보면 알겠지만 소련이 안보리에서 거부권을 행사하면 소련이 북한을 지원했다는 사실이 공식적으로 인정되어 소련 영토까지 전쟁터가 되기 때문에 이를 기피해서 반대를 안 한 거다. 어찌되었건 결론은 소련에게 있어서 유럽 + 중국 >> 넘사벽 >> 북한이었던 것 뿐이다.

1.2 이승만의 몽진

이승만은 정체를 숨긴 채로 6월 27일 새벽2시 특별열차편으로 서울을 빠져나가 대전으로 피난하였다. 이 몽진의 혼란상을 살펴보면 실로 가관인 것이 입법부와 사법부와 부통령도 대통령의 몽진 사실을 몰랐다.

국무회의의 각료들마저도 6월 27일 아침에 알았다. 국회는 전선 정보가 부족한 상황에서 6월 27일에 새벽 4시 서울 사수 결의안을 제출하기 위해 경무대를 방문했는데 이미 이승만이...없네? 신익희조봉암은 부랴부랴 피난에 나섰고, 이승만을 강력하게 비판했다.

이 도주에는 두 가지 설이 있는데 하나는 이승만은 결사항전하려고 하였으나 무초 주한 미국 대사와 영부인 등이 극구 설득해서 몽진하게 되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반대로 무초 대사가 수도 방위를 외치고 이승만이 몽진을 주장했다는 것이다. 당시 경무대 내부 상황은 정확히 확인할 길이 없지만 신생 국가임을 감안해도 국민을 기만하게 된 점, 그리고 경무대만 몽진하는 등 몽진 과정에서의 혼란상은 비판받아야 한다.

무초 대사는 같은날 7시에 신성모 국방부장관의 방문을 받았다. 여기서 이승만의 새벽 2시 몽진을 알게 되었고 신성모의 일본망명정부 문의에 뚜렷한 답변을 남기지 않았다고 본국(미국)에 전보를 보낸 것이 밝혀졌다. 사실상 이승만의 몽진은 무초 대사의 의지와 떨어져 있다.

그리고 같은 날인 27일 저녁 7시 반 대전 KBS 방송국 유병은 방송과장은 대통령이 보낸 차를 타고 대통령이 머무르던 충남지사 관사에 갔다. 여기서 이승만은 방송과장에게 다음과 같은 지침을 내린다. #

1. 이 방에서 절대로 나가서는 안 된다.

1. 방송국에 전화를 걸어 중계방송기를 이 방으로 가져오라.
1. 오늘 밤 9시에 내가 이 방에서 하는 방송을 서울로 올려 보내서 전국에 중계하라.
1. 누가 묻더라도 대전에서 방송한다는 말을 해서는 안 된다.
1. 사전에 대통령 연설이 있을 것이라는 말도 해서는 안 된다.

유병은 방송과장은 우체국, 대전방송국, 중앙방송국에 연락하고는 90여분 만에 밤 9시 생방송을 성사시켰다. 이승만은 생방송에서 "동포 여러분, 계속 진격하고 있다. 모든 것이 잘 돼가고 있으니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하라"는 방송을 했다. 국민은 이승만 대통령이 중앙청 또는 경무대에서 방송한 것으로 알고 있었다. 서울시민들은 이승만이 서울에 남아 방송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승만과 정부는 이미 피난을 한 뒤였다. 아니, 정확하게는 이승만 피난가 버렸고 서울시민은 물론 전쟁수행에 필수적인 내각과 국회의원을 모조리 냅두고 피난을 했다.

하지만 북한군은 28일 0시 이미 서울 인근 미아리까지 와서 전투를 벌였고 전투하는 소리를 들은 서울시민들은 불안을 느끼고 이승만 방송 전부터 피난을 시작했고 한국군도 전황이 밀리는 상황이라 일단 후퇴해서 한강이남이나 혹은 더 남쪽에 방어선을 구축하기로 결정하고 후퇴를 시작한다. 하지만 6월 28일 새벽 2시 방송이 시작된지 5시간만에 한국군이 민간인과 자신들의 후퇴로인 한강대교한강철교를 스스로 폭파했다. 폭파지시는 채병덕 당시 총참모장의 지시였다는게 통설이나 이것에 대한 명령 주체자는 계속 논란중이고 이승만이 명령을 내린것은 아닌걸로 보인다. 그는 27일 대전에서 거의 혼자 있었고 정부와 군은 그와 연락할 방법이 없었다.. 자세한건 한강 인도교 폭파, 한강 방어선 전투 참고.

한편 이승만은 6월 27일에 수원의 미군 맥아더 사령부 전방지휘소[5]가 (잘못된 정보로) 오산으로의 철수를 결정하자, 이승만은 7월 1일에 대전에서 부산으로 다시 피난을 가기로 한다. 이때도 이승만은 피난을 극비에 붙이고 수행인원을 최소화해서 세단 자동차 한 대와 지프 자동차 두 대를 이용했다.[6] 경부선을 따라 피난하는 것이 상식적이지만, 추풍령의 험로와 당시 좌익의 세가 가장 강한 도시였던 대구에서[7] 지역 공산주의자나 빨치산의 기습을 받을 것이 우려되어 이리(오늘날의 익산)를 거쳐 목포로 향했고, 목포에서 해군함정을 타고 19시간 만인 7월 2일 오전 11시경 부산항에 도착했다.

1.3 북한군의 지체와 서울함락

이시영 부통령은 서울을 끝까지 사수하겠다고 결심했으나 결국 지인의 설득으로 수원으로 뒤늦게 피난가게 되는데 만약 그러지 않았다면 즉각 납북되었을 기세였다. 만약 그가 납북 되었으면 당시 부통령도 나름대로의 헌법 기관이었던 만큼 악영향을 미쳤을 수도 있다. 실제 월북하거나 납북당한 제헌의원 등도 많았는데, 대표적인 케이스가 김규식, 안재홍.

정확히는 북한군이 왜 지체한 것인지는 추정할 뿐이지 정확히 확답하기는 어렵지만, 동부 전선의 영향으로 추정 된다. 북한군이 처음에 계획한, 대한민국 국군을 포위섬멸한다는 전략은 수포로 돌아갔다. 대한민국 국군 제6보병사단춘천-홍천 전투에서 대승을 거둠으로서, 북한군의 제2군단의 진격을 3일이나 저지하고 막대한 피해를 입혔기 때문이다. 이는 북한군의 한강 도하가 늦어진 중요한 원인이 되었으며, 이 전투의 패배를 책임지고 북한군 제2군단장은 해임당했다. 6사단은 그 후 동락리 전투에서도 북한군 연대 하나를 전멸시키고 소련제 무기를 대량으로 노획하여 북한의 배후에 소련이 있었음을 짐작하게 해주었다. [8]

그리고 한강대교 폭파로 인해 적의 한강도하를 막은 국군은 28일부터 7월 3일까지 6일 동안 적을 저지했다. 한강 방어선 전투 참조.

서울함락 직후의 상황은 그야말로 절망적이어서 서울 점령 전투에서 국군 1, 2, 3, 5, 7, 수도 사단이 와해되었다. 제대로 편제를 유지한 것은 춘천의 6사단과 강릉의 8사단, 대전으로 후퇴한 17연대와 영등포로 후퇴한 독립기갑연대 정도였다. 그렇게 모두들 아 대한민국 망했쓰요하고 있는 순간 기적이 일어났으니 채병덕김홍일 소장을 시흥지구전투사령관으로 임명하여 서부지역 작전권을 일임한 것이다. 중국 국민혁명군 소장으로 중일전쟁에 참전한 경험이 있는 김홍일 소장은 실전 경험을 살려 기적을 보여준다.와해된 사단을 수습하여 다시 온전한 사단으로 재건하는 기적을 일으킨 것이다.[9] 이후 시흥지구전투사령부는 1군단으로 재편되어 국군 지연작전의 중축으로 활동하였다.

방송을 믿고 피난을 떠나지 않은 서울시민들은 다음날 한강대교와 한강철교 A, B선이 폭파되어 피난을 갈 수도 없게 되었고, 발이 묶인 상태에서 서울이 북한군에게 점령당하는 모습을 보아야했다. 한편 한강 인도교 폭파로 민간인 600~700명이 목숨을 잃었는데, 한강대교 폭파에 대한 비난과 원성이 높아지자 무책임한 군 당국은 거부할 수 없는 상관의 명령을 받아 폭파를 시행한 공병감 최창식 대령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그를 적전비행죄로 몰아 총살했다. 후일 명령을 집행했을 뿐 책임이 없는 것이 인정되어 1964년 무죄 판결을 받고 복권되긴 했으나 죽은 자는 말이 없다. 현재 기준으로 보자면 비난받아 마땅한 재판.

자세한 것은 한강 인도교 폭파 항목 참조.

지상전의 중요성과 급박한 전개 때문에 상대적으로 관심도가 떨어지는 편이지만, 이 당시 남한의 해군, 공군의 전황 역시 좋지 않았다. 전쟁 직전 대한민국 공군의 작전기는 제대로 된 전술기가 전혀 없었고 연락 및 정찰 임무에 사용하는 L-4/5 연락기 12기, 훈련기인 T-6 텍산 10기 뿐이었다. 그 중 L-4/5는 육군 항공대 소속이어서 공군이 직접 운용하지 못했다. 비행기 성능도 열악하여 T-6는 정비병들이 급조한 폭탄가에 소량의 폭탄을 장착해 지상 공격을 해야 했고, L-4/5는 이마저도 불가능해서 후방석의 관측사가 직접 수류탄이나 박격포탄 등을 손으로 던져 투하해야 했다.

그런데 북한 공군의 경우 객관적인 전력은 우수했지만 조종사의 수준이나 작전 수행 능력 등 실제 운용 능력은 빈약해서 양측 공군의 정면 대결은 일어나지 않았고 김포, 수원 등의 기지 공습 정도의 제한적인 공격이 있었을 뿐이었다. 이후 미군 등 UN 공군이 본격적으로 참전하면서 제공권은 UN군 측이 장악하게 되었다.

해군의 경우 남북한 해군 모두 질·양적 수준이 빈약해서 함대 간의 교전은 벌어지지 않았다. 1960년대에야 전사 연구를 진행한 결과 해군도 활약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대한해협 해전에서 PC-701 백두산함이 후방침투를 막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이 육해공 통틀어서 국군 최초의 승전이었다.

2 국군의 지연작전과 신의 은총 미군

낙동강 전선과 인천상륙작전에 비해서 주목도가 정말로 낮은 것이 바로 국군의 지연작전이다. 하지만 국군의 지연작전은 대한민국이 적화통일되지 않을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것이다. 당시 국군은 5개 사단이 모두 와해된 상황에서 부족한 무기를 가지고 무려 3개월을 버텼다. 수도 서울이 함락되는데 3일이 걸렸음을 감안하면 대단한 분전이었다. 아무튼 전황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판단한 맥아더는 일본에 주둔하고 있던 스미스 특무부대를 투입했다.

2.1 스미스 대대의 투입

7월 5일경 북한군과 UN군의 첫 교전이 일어났으며, 이때 스미스 특수임무부대가 배치되었다. 찰스 스미스 중령은 1916년 생으로 이 전쟁이 발발했을 당시 34살의 청년이었다. 이 전투에서 찰스 스미스는 자신의 대대가 궤멸되는 상황에서도 살아남아 6.25 전쟁이 끝날 때까지 계속 참전했으며 2004년에 88살을 일기로 천수를 모두 누리고 작고했다. 이 스미스 특수임무부대는 대대장 찰스 스미스 중령 이하 총원 406명에 2개 중대로 이루어진 1개 보병 대대와 52야포대대 A포대 134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어쨌거나 찰스 스미스 대대는 인원이 완편대대와 비슷해도 편제가 이렇다보니 이 대대의 장교 총원이 15명 안팎에 불과했다. 원래 정상적인 대대는 3개의 보병중대와 1개의 화력지원중대에 1개의 비전투요원중대로 구성되어있기 때문에 중대장이 5명이어야 하지만 찰스 스미스 대대는 보병중대가 단 둘 뿐이었고, 다른 중대들도 편제수에 미달이었으며 중대장부터 이미 2명밖에 되지 않았다. 게다가 그나마 영관장교도 대대장인 찰스 스미스 본인밖에 없었으며 나머지는 모두 대위 이하의 초급 군인들뿐이었고 장교 중에서 전투 경험자는 1/3이며, 병사들 중에서 전투 경험자는 단지 1/6일 정도로 숙련도가 낮았다. 그나마 주일미군 중 가장 사기가 높고 상태가 좋은 부대라고 보낸 게 이렇다. 보병은 7월 1일 오전 8시 45분에 이타즈케 공군 기지를 이륙했고 수원 비행장으로 출발했다. 한편 A포대는 배로 부산까지 간 후, 철도를 이용해 수원에서 보병대대와 합류, 한국군을 붙잡고 한강에서 지연전을 펼칠 계획이었다.

그러나...

6월 30일 수원에서 미군 정찰기가 한국군을 북한군으로 오인해 수원으로 북한군이 들어오고 있다고 보고했다. 오보를 들은 연합군은 재빨리 수원 비행장을 포기했다. 뒤늦게 오보라는 것을 알았지만 비행장은 사용할 수 없는 상태였다. 결국 스미스 부대를 태운 수송기는 악천후를 뚫고 7월 1일 부산에 착륙, 7월 3일 대전에 도착해 4일 오산에서 포병들과 합류한다.

5일이 되자 북한군이 이들의 진지로 전차를 내세우고 진격했다. A 포대의 105mm M101 야포 6문과 화기소대의 75mm 무반동총 둘로 전차를 공격했지만 무반동총은 전차를 관통하지 못했고, 고폭탄이 전차 주변의 보병들을 쓸어버리긴 했지만 전차 자체에는 큰 피해가 없었다. 전차는 더 다가왔고 이제 보병들이 바주카를 발사했다. 2.36인치 바주카는 T-34의 장갑을 어떤 방향에서든 뚫지 못했다. 그러나 105mm 포의 대전차고폭탄은 효과적이어서 삽시간에 T-34 둘을 세운다. 하지만 대전차고폭탄은 포대 전체에 6발 뿐이었고, 다 떨어지자 다시 고폭탄을 쏘아대서 한 대의 궤도를 파괴하는 데 성공한다.

더 많은 북한군이 접근하고 105mm 야포 사격이 전차를 하나 더 멈춰세우고 몇 대에 피해를 주었으며 보병과도 교전했다. 그러나 동쪽에서 포격과 함께 더 많은 북한군이 접근하자 퇴각한다. 통신의 혼선으로 부대간의 연락이 끊기자 후퇴는 곧 패주로 변했다. 이 전투에서 찰스 스미스 대대는 150명의 전사자를 냈는데 그 전사자 중에는 부대대장이 포함되어 있었다.

스미스 특수임무부대의 정확한 편제는 다음과 같았다.

  • 대대 본부- 대대장 찰스 스미스 중령(Lcl. Charles B. Smith), 부대대장 대위
    • 대대 직할 화기소대 - 소대장 소위
  • B 중대 - 중대장 찰스 토마스 중위(Lt. Charles Thomas)
  • C 중대 - 중대장 리차드 W. 다쉬머 대위(Cpt. Richard W. Thasimmer)
  • 52 포병대대 A 포대 - 밀러 페리 중령 (Lcl. Miller O. Perry)

이 전투에서 2.36인치 바주카의 위력 부족이 확실히 드러나게 된다.

2.2 미군의 연패

찰스 스미스 특수임무대대가 패퇴하고 나서야 모부대인 미 제24보병사단이 후속 투입되었으나 오산-죽미령 전투를 시작으로 24사단 직할 52포병대대장인 밀러 O. 페리 중령(Lcl. Miller O. Perry)이 전사하는 등 무참한 피해를 입어가면서 전투마다 패배를 거듭하다가 결국 대전 전투에서 사단장인 윌리엄 딘 장군이 실종됐다가 포로로 잡히는 참패를 당했다. 밀러 O. 페리 중령의 전사는 6.25전쟁에 참전한 유엔군 대대장급 이상 고급지휘관 중 최초로 전사한 사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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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상황을 보여준 작전도.

최초로 파견된 미군부대인 스미스 특수임무대대는 고작 75mm무반동총과 2.36인치 바주카[10]로 무장해 있었으며 방어진지를 구축하여 도로를 방어하려 하였으나 인민군과의 전력차가 너무 커서 결국 큰 피해를 입고 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 우리 입장에선 분한 일이지만 북한군의 고급 인력들 중엔 중일전쟁이나 국공내전에서 마오쩌둥의 군대 치하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피터지게 싸우다 온 베테랑들이 많았던데다 북한군이 사용하는 무기/탱크들은 일본군이 사용하던 경전차인 것들과는 차원이 다른 소련이 지원한 것들이었다. 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 베를린을 무너뜨리고 굴복시켰고, 만주에서 수백만 명의 일본군들을 싸그리 대패시켰던 바로 그 소련의 무기와 탱크들을 북한군이 잔뜩 지원받아 침공해온 것이었다.

그때까지 T-34/85 전차는 구경도 해본 적이 없기에 그 위력을 알지 못하고 일본군 전차처럼 쉽사리 뚜껑을 딸 수 있을 것이라 여겼던 듯하다. 어느 미군은 북한군의 T-34/85가 돌파하는 것을 보고 쟤들 우리가 한국군인줄 아나봐라고 말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그러나 막상 전투가 시작되자 보유한 대전차화기의 공격을 상당수를 방호해내는 북한군의 전차에 그대로 밀려버렸다. T-34/85 전차는 경사장갑을 채용하여 방어력이 중량에 비해 우수한 전차였고, 게다가 스탈린이 북한에 전차를 보낼 때 전차의 장갑을 조금 더 두껍게 해서 보냈다고 한다.[11] 이형근 장군의 증언 결국에는 야포와 같은 중장비를 거의 다 잃어버린채 남쪽으로 후퇴하다가 상당수가 전사하거나 인민군에게 붙잡혀 포로가 되었다.

깜짝 놀란 미국은 일본에서 M24 채피 경전차대를 부랴부랴 보냈지만 또 발렸다. 미군이 머리를 짜내보니 T-34/85 전차를 바를 수 있는 미군 전차포는 M4 셔먼 전차의 76mm 포와 M26 퍼싱 전차의 90mm 포였는데, M26 전차는 일본에 없었고 M4 전차도 일본의 미군 공창에 조립하다 만 상태로 있는 것까지 탈탈 털어서 7대가 전부였다. 헤집어 찾다보니 먼지가 쌓여있는 소수의 퍼싱을 발견했지만 도저히 가동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대전차화기로는 개발은 해놨지만 2차 세계대전이 끝나는 바람에 필요가 없어 양산을 하지 않은 M20 3.5인치 RKT 슈퍼 바주카나 되어야 T-34/85를 바를 수 있었다. 이 무기들을 부랴부랴 미국 본토에서 실어오는 동안 미군 24사단은 겨우 공수한 슈퍼 바주카 하나 들고 버티다가 대전에서 하루만에 인민군 3개사단에 포위당해 박살나버렸다.

여기서 얼마나 상황이 안 좋았냐면, 사단 예하 직할부대장이 미국 딘 사단장 바로 옆에서 전사하고 사단 휘하의 1개 대대가 전 대대원이 모조리 다 전사한 데다가 딘 사단장이 슈퍼 바주카로 직접 T-34를 격파하기도 했다. 그리고 사단장은 낙오되어 도피 중에 인민군에 잡혀버렸다. 그렇게 모두들 소련이 김일성에게 넘겨준 잉여 T-34/85 전차들 앞에서 "탱크!!"를 외치다 개발살나버렸다.

이 전투는 후퇴과정에서 6.25 전쟁 최초의 명예훈장 수상자가 나왔을 정도로 처절했다. 전투 공병대대 소속의 조지 D. 리비(Sgt. George D. Libby) 중사가 그 주인공. 부상병을 싣고 철수하던 공병대대는 북한군의 사격을 받았고, 리비 중사는 도로 옆 도랑에 엎드려 총탄을 피했다. 그리고 철수하는 포병 트랙터(M-5 Artillery Tractor)를 세워 부상병들을 실은 다음, 유일한 그 운전병을 자신의 몸으로 감싸 피탄면적을 줄이고 철수시켰다.그 와중에 리비 중사는 몸과 팔에 많은 총상을 입고 과다출혈로 숨을 거두었다.

2.3 포로

여기서 잠깐 딘 장군이 포로가 된 사연을 보자면 여기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두 가지 기록이 있다.

하나는 해당 사건 당시, 월리엄 딘 장군이 약간의 호위병력과 함께 피신하다가 전북 부안 산골 민가에서 휴식하던 중 포로로 잡혔다는 것이다. 이때 방에 들어가 쉬기 위해 군화를 벗었다가 북한군이 들이닥치자 군화 끈 묶을 시간이 없어서 맨발로 도망치다 잡힌 것인데, 뭐 군화 신었다고 탈출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던 것 같긴 하지만 전시와 같이 위급한 상황에서 군화 함부로 벗는 것 아니라는 점, 즉 불과 수분이라도 전쟁 중에는 목숨을 좌우할 만한 심각한 시간 소모가 될 수 있으니 유사시에 대한 대비를 언제나 하고 있어야 한다는 산 증거 되시겠다.

다만 이것은 북한의 자료가 딘의 포로됨을 비난하고자 하는 글에서 나오는 이야기로서 이상하게 국군 정신교육시간에도 퍼져있는 이야기이다. 일명 복장 단정하자는 것. 60년대 제작된 북한 영화에서는 그런거 없이 그냥 북한군이 몰려오자 철도변에서 찌질대다가 비겁하게 손을 들어주신다. 이 영화에서는 채병덕도 대전에서 사살되는 장면이 나오니 고증은 엿바꿔 먹은 작품.

하지만 딘의 회고록인 딘 장군의 이야기나 기타 일반적인 기록은 이와는 다르다. 딘 장군은 후퇴 중 운전병의 실수로 대구로 가는 길이 아닌 전북 부안쪽 길로 접어들어 부대와 분리되어 소수의 병력과 함께 산길로 이동하는 도중 식수를 찾다가 능선에서 굴러떨어졌다. 이때 머리에 자상, 어깨에 골절 등 부상을 입고 기절했고, 같이 있던 병력은 수색을 하다가 포기하고 떠나 대구에 있는 부대와 합류했다. 딘 장군은 중간중간 한국 민간인들에게 도움을 받으며 한 달 간 산길을 따라 남쪽으로 이동하던 중 전라북도 진안에서 민간인에게 밀고를 받은 북한군에게 결국 포로로 잡혔다. 공교롭게도 그날은 딘 장군의 결혼기념일이었다 한다.

밀고한 사람은 북한군의 치하를 받고 딘이 가지고 있던 달러와 인민위원회가 보관한 쌀을 받았으나, 이후에 부역자로 끌려가서 결국엔 총살당했다고 하는데, 사실 이 사람이 총살당했다고 하는 건 딘 장군 이야기를 대한민국에서 유일하게 2차 매체로 다룬 70년대말 어린이용 전쟁 실록 계림문고판 한국전쟁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실제로는 #와 같이 딘 소장을 밀고한 자는 전북 진안 운산리의 '한두규' 라는 사람이며, 밀고 과정중 딘소장의 부관을 사살 하였다 지역 수복 후 체포되어 복역하다가 딘 소장의 감형 탄원으로 출소하였다. 한두규가 밀고한 사유로는 인민군의 현상금을 탐냈다는 설과 전쟁전 반공청년단에 몸담은 전적이 있어 인민군에게 발각시 목숨을 부지하기 힘들것이라 판단, 자진해서 미국 장성을 넘겼다는 설이 있다.

하지만 본인 말로는 딘을 구하고 같이 가던 중에 인민군을 만나서 딘이 체포되었다고 하는데... 실제로 북한군이 후퇴할 때 미국의 장군을 넘긴 죄를 지은 이 사람은 같이 월북하거나 도망가지도 않고 집에서 잡혔고, 이후 죽을때까지 자신의 무죄를 항변했다. 이후 북한을 찬양하던 이들이 윌리엄 딘 장군이 미국 역사상 최초로 장성급 포로라는 괴설을 퍼뜨렸는데 사실 미국 독립전쟁 이래로 꽤 많은 장성급이 포로가 된 예가 많고 당장 2차 대전만 해도 필리핀에서 부대단위로 통째로 항복하는 바람에 조나단 메이휴 웨인라이트 장군이 포로로 잡힌 일도 있다. 이런 '미국 역사상 최초로 포로로 잡힌 미국장성' 얘기를 퍼뜨린 이들이 무슨 목적으로 그랬는지는 가히 알만하다.

참고로 딘 장군은 제2차 세계대전에도 참전했는데 그때 그의 사고방식은 전사하는 것보다도 더 굴욕적인 게 포로로 잡히는 것이었으며, 그가 지휘했던 사단은 적에게 잡힌 포로 수가 가장 적은 사단이었다. 그랬던 그가 전쟁 초반에 포로로 잡힌데다가 제24보병사단은 가장 포로로 잡힌 숫자가 많은 사단이 되어버렸다.

딘 장군은 1953년 9월에 조선인민군 2사단 참모장인 리학구 총좌와 포로교환되어 미국으로 송환될 때까지 포로로 북한에 억류되었다. 딘 장군과 포로교환되어 북한으로 송환된 리학구 총좌는 긴 기간동안 괴로워하다가 자살했다. 이때 북한군은 초고속으로 남진하기도 바쁜데 포로가 있으면 귀찮다고 다수의 포로들을 FM 소련식으로 두 손을 뒤로 모아 노끈이나 철사줄로 묶은 뒤[12] 무릎을 꿇린 후 총살해버렸다. 이 주검들은 그대로 길가나 산 속에 방치됐다가 나중에 유엔군이 북진할 때 발견되었다.

총살조차 할 겨를이 없으면, "동무! 이제 곧 조국 통일되는데 왜 도망가시오? 빨리 집으로 돌아가시오!"는 식으로 귀가를 권유 하기도 했다. 그래서 항복한 남한군이 집으로 돌아가는 척 하다가 남쪽으로 다시 도망간 경우도 있었다.[13]

하지만 서울대병원 학살사건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북한군이 개전초기에도 한국군을 포로로 안 잡은게 아니라 잡히면 처형한 경우가 더 많았다.

한편 전세가 낙동강에서 고착되자 개전초기 한강철교 폭파로 대량으로 생포한 한국군들을 해방동무라고 하면서 상당한 인원을 북한군에 편입시켰다. 거의 1개 분대당 2명 비율이었다고 한다. 북한군 기록에 보면 절대 감시하지 않고 알아서 싸우게 했다고 하는데 유사한 맥락으로 봐 줄 수 있다.

2.4 신의 은총 미 공군

진짜로 거짓말이 아니다. 미 공군의 개입은 그야말로 신의 은총이었으며 국군의 지연작전을 가능케 한 요인이었다. 물론 국군의 지연작전에서 국군의 처절한 살신성인, 초인적인 희생정신이 있었지만 미 공군의 화력이 없었다면 이러한 것도 무의미해졌을 것이다. 물론 오폭으로 인해 국군의 기동력이나 화력을 상실시킨 사건도 있었고, 민간인 학살사건 등의 문제점도 있었으나 미 공군의 업적은 너무나도 많아 여백이 부족할 지경으로 엄청나게 많다.

그 중에서 가장 큰 것은 북한군의 주간기동을 봉쇄했다는 점일 것이다. 북한군의 전차를 앞세운 공습에 열악한 화력을 가진 한국군의 입장에서는 방어하기가 어려웠는데, 미 공군의 주간 폭격으로 인해서 북한군의 전차와 북한군의 주간공습이 봉쇄되자 전차 자체가 무용지물이 되어버려[14] 국군이 북한군에게 기습을 가해 승전보를 울리기도 하였다. 즉, 북한군과 한국군의 가장 큰 전력차인 전차의 주 활동시간을 봉쇄해 버림으로써 한국군의 지연작전 수행을 가능하게 한 것이었다. 만약 미 공군의 화력지원이 없었다면 전차를 앞세운 북한군의 공격을 변변치 않은 무기로 막아내기란 어려웠을 것이다. 중공군은 가능했지만

3 낙동강 전선

당시 남한은 제대로 된 전쟁 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상황인 데다가 국가차원의 전쟁 계획도 없었고, 대한민국 육군 차원의 방어계획이 있긴 했는데 그나마도 1950년 3월에서야 나왔다. 각 사단들이 이를 수령해서 작전계획을 짠 건 그해 5월이 되어서였다. 설상가상으로 그나마 있던 병력과 물자를 너무 이른 한강교 폭파로 제대로 날려먹은 남한은 지연전을 펴면서 낙동강 전선까지 후퇴하였고, 남한 정부는 서울을 대신하는 임시수도대전-대구를 거쳐 부산으로 옮겨 자리잡았다. 더글러스 맥아더 UN군사령관은 임시수도 부산에 미8군사령부를, 일본UN군사령부를 설치하였다.

당시 인민군은 북한출신 5만명과, 남한에서 모은 의용군이 5만명을 더해 총 10만명이 조금 넘는 수준이었다. 그에 비해 UN군은 20만명으로 병력이나 화기면에서 압도적이였다.[15] 특히 공군과 해군의 전력은 일방적이어서 동해안지방에서는 미군 전함에서 막강한 함포 사격으로 북한군 방어진을 달표면 처럼 만들 정도였다. 그러나 방어할 때에는 항상 병력이 부족하였으며, 결정적으로 한미군의 정예 2개사단+2개연대들을 인천상륙작정을 위해 배에 실었다가, 낙동강전선이 무너지면서 급히 다시 내려 투입했다가를 2회 반복하며 약 2개월간 해상에서 대기한채로 허송세월 보내느라 전력과 시간을 낭비하였다. 이정도의 군단급 병력이면 충분히 북한진영을 뚫고 나갈정도의 전력이 되지만 맥아더는 더 큰 한방을 노리고 있었으니... 어쨌든 최정예 군단급 병력이 전선에서 빠진 영향은 컸다. 당시 국군과 미군의 보병의 훈련도나 사기가 바닥을 기어 전투력이 북한군에 비해 부족한 면도 있었고.

낙동강 전선을 두고 치열하게 전투를 벌였다고 해서 이곳을 사수한 것으로 오인되고는 하지만, 실제로는 한때나마 일부 무너졌다. 특히 9월 8일 영천을 잃었던 날, 워커 장군은 정일권 3군총사령관에게 예고없이 찾아와,

한국군 중에서 가장 믿고 있는 2개 사단을 골라둘 것

지명도가 높은 각계 각층 명사들 10만 명의 리스트를 준비해 둘 것
반공단체의 지도층 및 경찰간부들을 민간인 리스트에 포함시킬 것
이 대통령에게 당분간 비밀로 해두기 바람[16]

라는 놀라운 명령을 내렸다. 정일권은 순간적으로 미국이 도망갈 준비를 한다는 것을 느꼈다. 행선지는 하와이나 괌 또는 제주도쯤일거라 막연히 짐작했다. 정일권은 너무 중대한 문제라 이 대통령에게 보고 하였다. 개전 초 신속하게 몽진을 하였던 이 대통령이었지만, 이 때만큼은 "나, 대한민국 대통령은 누가 가자고 해서 나의 조국을 등질 비겁자가 아니라고 말하시오. 나 이승만은 공산군이 여기 부산에 오면 내가 먼저 앞장서 싸울 것이오!"라고 화를 내었다. 서울은 외국이었다 서울 공화국

다행히 2군단이 영천을 탈환하면서 워커의 계획은 없던 일이 되었다.

각설하고 국군과 UN군은 낙동강 전선에서 최후 방어선을 전개했다. 이에 북한은 9월까지 대공세를 펼쳤으나 대구, 칠곡, 영천 등지를 두고 벌어진 다부동 전투왜관 전투에서 국군과 UN군은 방어선을 사수하는 데 성공했다.

4 인천 상륙작전과 국군과 유엔군의 대반격

인천 상륙작전 이후 경상도 지역에서 북진이 시작되었고, 9월 28일 서울이 탈환되었다. 그리고 10월 1일 국군은 38도선을 넘어 진격하였다. 이것이 국군의 날의 기원이 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인천 상륙작전 항목을 참고.

이것이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 영감을 얻었을지 몰라도, 연관성은 낮은 편이다. 인천 상륙작전은 모루가 있는 상태에서 망치의 전형적인 우회기동이었던 반면, 노르망디의 경우는 모루가 없는 상태에서의 직접적인 적진 상륙이었기 때문이다. 망치와 모루 전술 참고.[17]

어쨌거나 인천 상륙작전에는 육군 17연대와 해병대 1연대가 참여하였다. 인천 지역에서 작전한 한국 군인은 유진 클라크(Eugene Clark)와 함께 팔미도의 버려진 등대를 점거한 해군 장교 연정, 육군 장교 계인주 등이다.

UN군의 본래 참전 목적이 방어였던 만큼 38도선을 넘는 데는 UN의 결의가 필요했으며, 이 즈음 북한과 중국이 접촉하였으나 미국을 비롯한 UN측에서는 대수롭지 않게 여겨서 국군보다 조금 늦은 시기에 UN군 또한 38도선을 넘었다. 이때 김일성은 10월 11일 밤 '피로써 조국을 사수하자'는 방송을 내고 바로 몇시간뒤 몰래 도주했다.이승만이랑 하는 짓이 똑같네 거기다 10월 12일 전황이 UN군에게 유리하게 흘러가자 스탈린은 김일성에게 북한에서 모든 무기와 병사들을 철수시키고 노약자와 환자는 소련 영토 안으로 이동시키며 만주에 망명 정부를 세우라 명령하고 소련 대사로부터 그의 명령을 전해들은 김일성은 참 하기 힘든 결정이나 스탈린의 명령을 따르겠다며 사실상 북한을 포기하려고 마음먹는다.[18] UN군은 10월 19일에 평양을 점령하였으며, 11월 후순에는 압록강두만강 유역에 이르렀다. 진짜 이 때 마오쩌둥이 마음만 달리먹었어도...

5 중국군의 참전

그러나 10월 중순 이후부터 이미 중국인민지원군이 한반도에 진입해 있었으며, 압록강과 두만강 유역에 이르렀을 때 이른바 인해전술로 알려진 중국군의 대반격이 시작되었다. 중국의 참전을 전혀 고려하지 않던 맥아더의 판단은 오판으로 드러났다. 인해전술이라는 말 때문에 사람들이 당시 참전한 중국군을 저평가하는 경향이 많은데 이때 한국전쟁에 참여한 중국군의 지휘부는 중일전쟁에 참여하여 일본 및 국민당과의 전쟁을 겪어본 지휘관들이었고 , 병사들도 당시 끝난지 얼마 안된 국공내전에 참여한 병사들이 다수인 베테랑 병사들이었다. 때문에 당시 중국군은 무식하게 총알받이를 앞세워 돌격만 하는게 아니라 많은 병사들을 효율적으로 운용하여, 신속하게 한 곳에 병력을 집중 시키는 포위전술을 구사하였다.

당초 중국군 총지휘관인 펑더화이가 미군과 한국군의 약점을 간파한 뒤 이를 적극 공략한 것도 주요했다. 내용인즉, 미군의 경우 강력한 공군과 기갑부대의 화력 그리고 차량에 의한 물자와 병력수송에 크게 의존(도보행군을 기피함)하였는데, 이 때문에 행동반경이 주로 도로와 평지로 제한되었다. 당시 중국군은 거의 대부분이 보병이었고, 이들은 도로와 평야보다는 산악을 통해 이동하였기 때문에 도로와 평야만 전전하던 미군은 산악을 통해 기동하는 중국군을 효과적으로 저지할 수 없었다.

그래서 중국군은 신속하게 우회하여 UN군의 후미와 측면에 있는 보급로와 퇴로등을 차단하며 공격해왔다. 주로 산지에 매복해 있다가 야간에 기습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당시에는 야시장비가 부족하여 시야확보가 잘 되지 않은데다 전장조차 수풀이 우거진 산지여서 공군과 포병의 화력을 통한 화력의 우위를 전혀 살릴 수 없었다. 때문에 기갑차량과 포병, 공군이 충분해도 중공군의 접근을 저지할 수 없어 속수무책이었다.

이때 전선은 주로 미군을 중심으로한 UN군 사단이 전방을 맡고, 측후방과 후미에는 한국군이 배치되는 경우가 잦았는데, 당시 펑더화이의 평에 의하면 한국군은 중국군에 비교해서 모든면에서 열세였으므로 UN군 주 패전 레파토리는 산길을 통해 이동한 중국군이 후방에 있는 한국군 사단부터 깨부순 뒤 UN군의 보급로와 퇴로를 차단시키고 포위섬멸하는 형태였다. 이런일이 거듭된 것은, 그저 아군과 적군의 대치선만 생각하여 적의 이동경로를 면밀히 살펴보지 못한 UN군 수뇌부의 실책이 컸다.

장비와 보급 면에서 열악하였지만 기동력을 살린 포위섬멸전을 구사한 결과 매번 공격할 때마다 우위를 점하였다. 중국군은 UN군의 후미부터 궤멸시킨 뒤 각각의 부대를 분리ㆍ고립시킨 뒤 병력을 집중시켜 각개격파 하는 방식을 구사하였는데, 이 때문에 당시 UN군 지휘관들의 보고를 보면, 중국 본토의 중국인들이 몽땅 참전한 것 같았다고 하고 있다. [19]

중국군의 본격적인 참전으로 전선이 다시 후퇴하기 시작하자 더글라스 맥아더 UN군사령관은 중국에 대한 핵폭격을 실행하고 장제스의 국민당군을 중국 남부에 상륙시키는 등 거의 3차 대전을 고려한 반격을 계획했으나, 이 핵폭격 문제로 트루먼 대통령과의 정치적 갈등을 빚어 나중에는 아예 해임당하게 된다. 처음엔 핵공격을 원하는 장병들이 많았고 트루먼도 핵폭격에 상당히 긍정적인 반응을 보여 세계를 기겁하게 했다. 영국 총리 애틀리는 트루먼에게 핵무기만은 안 된다고 거의 애걸복걸했다 한다. 결국 트루먼은 핵폭격 반대론자가 된다.

중국군의 대대적 참전 과정에서 10월 공세가 틀어졌고, 11월 공세에서는 미군 1개 사단이 거의 전멸하고 한국군 사단들 대부분이 편제를 유지하지 못하고 지리멸렬한 삽질을 계속하는 등 엄청난 타격을 입어 평양까지 내줘야 했고[20] 한국군과 UN군은 후퇴하기 시작하였다. 장진호 전투, 흥남 철수 등이 이 시기에 이루어졌고, 1월 4일에는 서울을 재점령당했다. 미군을 비롯한 모든 군인들은 이 시기에 최악의 혹한 속에서의 전투를 경험하였으며, 직접 총에 맞아죽는 이들보다 동장군에게 죽는 이들이 많았을 정도였다. 전선은 평택, 오산까지 내려왔으나 이후에는 UN군이 전력을 수습하고 반격을 시작하여 3월경 다시 서울을 재탈환하였다.

중국군은 피해가 크긴 했지만, 미군을 상대로 벌였던 이 전투들로 인해 중국군은 세계에 그 대륙의 위상을 드러내게 되었다. 미군은 태평양전쟁 초반의 일본군, 한국 전쟁 초반의 북한군에게 몇 차례 패전한 경험이 있긴 했지만 대규모로 후퇴하진 않았고 결국엔 재정비하여 전선을 밀고 나가서 결국 미드웨이 해전으로 일본에게 승기를 잡고, 인천 상륙 작전으로 북한에게 승기를 잡게 되어 역전에 성공했었지만, 중국과의 이 전투에선 큰 피해를 입고 바다를 통해 대규모로 후퇴해야 했다.

6 휴전

중국군의 춘계 대공세 이후, 양측 모두 더 이상의 공세를 하지 않게 되었다. 비록 선전했지만, 중국군은 근본적으로 보병위주였고, 보급의 수준도 낮아 기간을 정해두고 그 기한내에서만 효율적으로 싸울 수 있었기 때문에 잘 준비된 DMZ의 미군을 돌파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중공군의 연이은 공세 전략을 UN군측이 파악하고 대비를 하게 된 것도 한몫했다. 그래도 한국군을 돌파하는 건 가능했지만 이 역시 부담이 이전보다 커졌고, 게다가 순망치한이 명분인 이상 전쟁을 계속할 이유도 없었다.

물론 김일성이 길길이 날뛰었지만 애시당초 그의 군대는 예전에 소멸되고 없었으니 중국의 뜻을 따를 수밖에. 한편 미국은 사실상 필수적으로 유지해야 하는 지역의 방위 병력을 제외한 모든 군대를 한국에 투입한 상황이고 한국군의 역량이 만천하에 증명된 이상 중국을 확실하게 밀어내려면 다른 지역 어딘가를 포기할 정도로 미군을 증원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그리하여 한국군을 정비한 후 한반도가 그 정도로 소중한 지역은 아니라는 것이 미국의 판단이었고, 또한 남한을 지킨다는 초기의 목적은 달성했으니 이제 발을 뺄 때라고 판단했다. 트루먼 대통령 역시 대국민 담화를 통해 "제3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는 것을 우려하고 있다" 고 말했다. 맥아더도 길길이 뛰었지만 이미 트루먼은 자신의 통제를 벗어나려 하는 맥아더를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곧 미국의 각종 신문 1면에는 큼지막한 글씨로 맥아더의 해임 기사가 실렸다.

1951년 6월 경, 소련의 제의로 휴전협정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2년간 협상을 지지부지 끄는 동안 조금이라도 더 영토를 확보하기 위해 국지전은 오히려 더 활발해졌다. 북한군과 중국군은 연일 UN 공군으로부터 맹폭격을 당하느라 죽을 맛이어서 소련에 휴전을 간청하는 상황이었다. 특히 북한의 피해가 극심했는데, 북한의 경우 전쟁 초기부터 주요 도시의 비행장과 공장 등이 UN 공군의 직접 공격대상으로 선정되어 큰 타격을 입었고, 특히 원산은 공군의 공격에 더해서 해군의 포격까지 받았는데, 미국은 휴전 위반에 대비하여 경고로 이 지역에서의 포격을 휴전 발효 직전까지 수행했다.

이후에는 휴전까지 북한군이 보일 만한 곳이라면 무조건 공격 대상이 되어 무차별 폭격을 받는 등 북한 전역이 공군의 폭격 대상이었다. 당시 상황에 대해 미군 폭격기 조종사가 "북한은 석기시대로 돌아갔다"고 묘사한 바도 있고, 평양 시내를 폭격하기 위해 출격한 비행기가 적절한 목표를 못 찾아서 폭탄을 쓰지 않고 귀환한 사례도 있다. 당시 미군이 설정한 폭격 목표는 2층 이상의 모든 건물이었다. 요컨대 평양의 비행구역 내에 2층 이상의 건물이 하나도 안 남아났다는 것이다. 하지만 스탈린은 이를 받아주지 않고 협상을 끌도록 지시했다.

이렇게 협상이 지연된 이유는 21세기에 비밀 해제된 구소련의 문서에서 밝혀졌다. 이유는 스탈린의 고의적인 지시 때문이었다. 당시 소련은 자국의 군사력이 미국보다 약하다는 사실을 정확히 인식하고 있었으므로 미국이 서유럽에 힘을 집중하지 못하도록 교착 상태의 한반도에 최대한 많은 병력을 묶어놓고 싶어했다. 게다가 전쟁이 길어짐으로 해서 피를 흘리는 것은 중국과 북한이지 소련이 아니었다. 결국 스탈린이 1953년에 갑작스레 사망하고서야 협상이 급물살을 타 비로소 휴전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협상 자체만 놓고 보면 협상과정 중 가장 문젯거리였던 것이 포로 처우의 문제였다. 포로를 본국으로 송환할 때, "일괄송환" 할 것인가, 아니면 "자유송환" 할 것인가? 즉 전자는 포로 본인의 의사는 묻지 않고 포로의 출신국으로 일괄적으로 보내는 것이고, 후자는 포로 본인이 새롭게 살고 싶은 국가를 자유롭게 골라서 갈 수 있도록 배려해 주는 것이다. 소설 최인훈의 『광장』에서 주인공이 반복하는 "중립국!" 을 보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중공측은 일괄송환에, 유엔측은 자유송환에 지지를 표명했다는 것. 소련과 중공과 북한은 자유송환을 할 때 행여나 "자유진영을 선택하는 자국민" 이 나타날까 근심했던 것이다. 반면 일괄송환을 하게 되면 당사자의 의견이 드러나지 않고, 그들은 이 전쟁을 자신들이 승리한 전쟁으로 포장하여 선전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또한 붙잡힌 북한군 포로의 상당수는 북한군이 의용군이라는 미명하게 강제징집한 남한 출신들이기 때문에 자유송환으로 결론나면 이들 전원이 남한으로 갈 것은 분명했다.

포로 송환문제의 이면에는 이처럼 6.25 전쟁의 이념성이 드러난다. 양쪽이 정말 이를 악물고 두 주먹쥐고 덤벼들었던 마지막 춘계 대공세 이후, 더 이상 물리적 힘으로 부딪쳐서 상대방을 꺾는 것이 한 쪽은 불가능하고, 다른 한 쪽은 그럴 가치가 없다고 결정한 것. 그렇다면 이제 남은 것은 명분과 정당성, 이념으로 상대방을 꺾는 것일 뿐이었다. 당시 세계의 거대한 두 축은 이와 같이 6.25 전쟁을 자신들의 이념 전쟁으로 변모시켰고 그만큼 휴전을 간절히 원하고 있었다.

그래서 휴전의 결과로 제시될 최종적 휴전선이 정해지기 전 최대한 전략적으로 유리한 지형지물을 손에 넣기 위한 고지전이 치열하게 이루어졌다. 주로 북한과 중국이 공격하고 한국과 미국이 방어하는 형태였지만 그 반대도 적지 않았는데 물론 휴전 시점에 요충지를 최대한 점유하기 위해서였으며, 미국이 개성을 포기하는 쪽으로 방향을 정하자 한국으로서는 승리했다고 선전하려면 최소한 서부에서 내준 땅 이상으로 중동부 영토를 차지해야 했기 때문에 절박한 입장이었다. 결국 목적은 달성했지만 2년간에 걸친 고지 전쟁 과정에서만 5만 명 이상의 전사자가 발생했다. 대표적인 전투로 백마고지 전투, 단장의 능선 전투, 피의 능선 전투 등이 있다. 이때의 분위기가 얼마나 막장이었는지는 영화 고지전을 보면 알 수 있다. 특히 휴전이 초읽기에 들어간 1953년 6~7월에 발생한 인명 피해는 그 이전 전체 기간과 비교해도 엄청난 수준이었다.노병이 말하는 진짜 전쟁의 모습

1953년 6월 이승만 정권이 단독으로 거제도 등 각지의 포로 수용소에 수용하였던 공산군 포로들을 석방하여 문제가 되기도 했다. 당시 대한민국은 휴전 협상 당사자에서 완전히 배제되어 있었는데, 소외된 이승만은 휴전에 반대하는 입장이었고 이미 미국의 눈 밖에 난 상황이었다. 당장 1952년 8월 2일, 부산에서 이승만이 암살당할 뻔한 일이 있었다는 말이 있다. 범인은 CIA로, 이유는 협상에 비협조적이었다는 것이었다. 에버레디 작전으로 여러번 이승만을 제거하려고 했다고 한다.

에버레디 작전의 밝혀진 골자는 다음과 같다. 출처는 이곳.

1. 한국 육군 참모총장을 불러 유엔군 명령의 실천을 보장하라고 요구
2. 반항하는 지휘관은 미 8군 사령관에 충성하는 사령관으로 교체
3. 명령을 이행하지 않는 한국군에게 연료와 탄약 지원 중단
4. 한국 대통령에게 유엔군 사령관 명령을 준수할 것을 요구
5. 반항하는 군사 및 민간 지도자를 구금
6. 유엔군 이름으로 군사정부를 공포

하여튼 이승만의 이 행위에 대해 미국은 상당한 충격을 받았다. 처칠이 면도를 하다 턱을 베였다는 이야기도 있을 정도이고, 6월 18일이면 전쟁이 휴전할 것이라 철석같이 믿던 미국 정부는 바로 그 다음날 국무부 합참 합동회의를 개최, 이승만을 암살하는 것에 대해 정말로 진지하게 논의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매카시즘으로 유명한 매카시를 비롯하여 미국의 여러 의원들은 반공 논리에 입각하여 이승만 암살에 반대했고, 또 이승만이 실제로 한국 내 통제력도 확고한데다 이승만이 정말로 극단적으로 미국과 대립하려는 의지도 없었고 하여 결국 이 작전이 실제 실행에 옮겨지진 않았다.

대신 미국 국무부 차관보 로버트슨(Walter S. Robertson)이 긴급히 방한, 이승만 대통령과 160시간의 언쟁 끝에 결국 소위 "소휴전 회담" (Little Truce Talks)이라고 불리곤 하는 결과물을 내놓게 된다. 어떻게 보면 한국과 미국 간의 혈맹이 시작되게 된 중요한 계기이기도 하다. 소휴전 회담의 골자는 대략 다음과 같다.

1. 한국과 미국은 상호 안전보장 조약을 체결한다.
2. 미국은 한국에게 최초 2억 달러의 경제 원조를 해 줄 것과, 차후의 장기 원조에 대해서 보증한다.
3. 한미 양국 정부는 휴전 이후 정치회담에서 90일 이내 실질적 성과가 없을 경우 회담을 중단한다.
4. 미국은 한국의 육군 20여 개 사단 및 그에 상응하는 해군과 공군의 증편에 대하여 승한다.
5. 한미 양국 정부는 정치회담에 앞서 한미 정상회담을 개최한다.

당시 이승만의 행동은 북한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포로들에 대한 일괄송환의 가능성을 본다면 인도주의적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다만 이같은 행위는 국제법 위반이었다. 참고로 이 사건이 표현상으로는 '포로 석방 '이라서 단순히 수용소에서 포로들을 곱게 풀어준 정도로 받아들이는 경우도 있는데, 말이 석방이지 대탈주에 가까웠다. 당시 포로 수용소의 경비 및 관리는 한국군 뿐만 아니라 미군을 비롯한 UN군 측에서 맡고 있었다. 따라서 '포로 석방'을 위해 한국군 및 한국 경찰 당국과 반공 포로들이 사전에 계획하여 일시에 수용소에서 포로들이 탈출하고 이를 군과 경찰, 기타 민간인들이 적극적으로 탈출을 도와준 것. UN군이 탈출을 진압하기 위해 가한 사격으로 인해 사망한 포로도 존재했다.

이 일로 처칠은 남한이 망하든 말든 냅둬야 한다고 거의 길길이 날뛰었고 북한과 중공도 국제법 위반이라고 입에 게거품을 물었지만 일은 이루어졌으며 스탈린의 죽음으로 인해 또 한번 국면이 전환되면서 7월 27일 휴전 협정이 이루어졌고 10시를 기해 모든 전투가 중지되었다.

7 전투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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년도전투교전국형태
1950년옹진반도 전투대한민국북한
1950년대한해협 해전대한민국북한
1950년춘천-홍천 전투대한민국북한
1950년주문진항 해전미국북한
1950년한강 방어선 전투대한민국북한
1950년동락리 전투대한민국북한
1950년다부동 전투대한민국북한
1950년영천전투대한민국북한
1950년장사 상륙작전대한민국, UN북한
1950년인천 상륙작전대한민국, 미국북한
1950년평양 전투대한민국, 미국북한
1950년장진호 전투[21]미국중국
1951년1.4 후퇴대한민국, UN중국
1951년횡성 전투대한민국중국
1951년금양장리 전투터키중국
1951년현리 전투대한민국중국
1951년용문산 전투대한민국중국
1952년백마고지 전투대한민국중국
1953년금성 전투대한민국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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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미국이 원조해준 57mm 대전차포정도가 한국군이 보유한 가장 강력한 대전차포였는데 북한군 전차를 상대로 별 전과는 올리지 못했다고 한다. 근데 수치상으로는 해볼만한 수준은 되는게 함정.
  2. 함장 김옥경 대위
  3. 정확히는 1949년 8월에 징병제를 선언하고, 1950년 1월 신체검사를 실시했으나, 미군의 무기지원 부족 등의 이유로 1950년 3월 지원병제로 다시 바뀐다. 한국 전쟁 발발 후 학도병등의 지원병은 받았지만 정식으로 징병제가 실시되는건 1951년부터다.
  4. 어째 임진왜란때의 조선군 같다. 칠천량 해전에서 전멸한줄 알았던 수군이 명량해전 의 대승으로 아군이 유리해지자 죄다 살아서 나타난다. 심지어 이같은 작태에 선조가 진짜로 죽은건 사도첨사 김완 밖에 없다고 탄식하는데 김완 역시 대마도에 포로로 잡혀 있었을뿐(...).
  5. 당시 맥아더는 일본 도쿄에 있었고, 전방지휘소는 맥아더의 지휘를 받아 움직였다.
  6. 이철원 공보처장, 황규면 비서가 수행하고, 경무대 경찰서장 김장흥 총경이 경호경찰 4명과 경호임무를 맡았으며, 프란체스카 여사와 개인비서 김옥자씨가 동행했다.
  7. 지금은 상상도 못하겠지만, 일제시대부터 해방 후까지도 대구는 좌익의 근거지였다. 일제 시대 이 지역에 섬유공장을 많이 만들면서 도시노동자 계층이 크게 성장했고, 지식인들이 많았던 탓이었다.
  8. 그밖에 북한군이 지체한 이유에는 미처 피난하지 못한 국회의원들을 잡아들여 임시국회를 개최해서 공식적으로 항복선언을 하게 하려 했으나 대부분 피난해서 실패했다는 설, 박헌영이 주장한 서울만 점령하면 남한 전지역에서 북한에 동조하는 민중봉기가 일어나서 알아서 무너질 것을 기다렸다는 설 등이 있다.
  9. 굳이 설명하자면 당시 한강교 폭파로 인해 서울에 잔존한 부대들은 모두 땟목으로 자력도하해야 했다. 즉, 부대 편제 따위는 신경쓸 겨를도 없이 개별적으로 도하한 것. 그렇게 흩어진 병력을 수습하고 재편한 것이다. 당시 이정도의 능력을 지닌 사람은 없었다. 백선엽이 김홍일 장군을 평가하기를 "이분이 없었으면 조국은 적화통일되었을 것이다"라고 괜히 말한 것이 아니다.
  10. 물론 이렇게 형편없는 대전차무기지원 사실을 안 맥아더는 미 국방부에 "한국군이 대포쏘는법 몰라서 이렇게 밀린건줄 아냐"며 당장 90mm와 125mm 포 공수를 요청했지만 미 국방부는 쿨하게 씹었다. 그 당시 미 국방부는 극동지역에서 대규모 대전차 화력은 필요없을 것이라 판단하고 있었기 때문.
  11. 경사 45mm로 바주카포로 관통이 충분히 가능하나, 북한군 선봉에는 장갑을 경사 75mm로 강화한 것도 다수였다고 한다. T-34-85 루디??? 경사 75mm면 실방호력이 악명높은 티거 1 정면보다 방호력이 높다!!! 이러니 바주카와 75mm가 먹힐 리가 없다.
  12. 임진강 전투를 다른 파란 눈의 아리랑이란 자서전을 보면 군용 전화줄도 썼다.
  13. 실제로 2차대전 극초기 프랑스 전선에서 나치 독일군이 프랑스군을 마구 헤집고 파리까지 달려가자, 프랑스군은 한참 독일군 지나가는거 구경하다가 자신들을 포로로 잡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그냥 집으로 갔다. 롬멜도 항복하기 위해 두팔 들고 몰려오는 어마어마한 대군을 보고 "비켜!"하고 그냥 제치고 지나갔다는 기록이 나온다. 한국전쟁 초기도 대략 비슷한 상황이 있었다고 보면 될 듯 하다.
  14. 지금도 야간전차공습은 상당히 어려운 부분이다.
  15. 백선엽 회고록에서 인용
  16. 정일권 회고록 233~238페이지
  17. 물론 동부전선을 홀로 탱킹하던 소련군을 아주 크고 아름다운 모루라고 생각한다면 망치와 모루 전술의 일종처럼 생각해 볼 수도 있다.
  18. 허나 이 계획은 후술된 중공군의 참전으로 취소된다.
  19. 여담으로 이전 버전에서는 중국군의 숫자가 UN군보다 적었다고 되어있었는데 아무래도 최소 연인원 50만명이라는 수치를 착각한 것 같다. 중국군은 공식적으로 참전하지 않았고 공산국가다보니 통계가 비밀스러운 점이 많아 한국전쟁 당시 중국군의 병력숫자는 공표되지 않았다. 이에 관련된 통계는 죄다 추정치로, 30만부터 300만설까지 다양하다. 아무래도 병력상 우위였던 것이 사실인지라 일반적으로는 적어도 100만명 내외로 추측하는 의견이 많으며, Zhang, Shu Guang은 135만명이라고 주장했다.
  20. 다만 이 시기 중국군의 보급 및 전투력을 감안하면 지나치게 빠른 후퇴였다는 평도 많다. 정작 중국군은 한미 양국군이 평양-원산선 일대에서 방어를 유지할 거라 판단하고 신중하게 진군하다가 평양을 빠져나간 걸 알고서야 급속 진격에 돌입했다.
  21. 흥남 철수는 이 전투의 연장선상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