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타닉

(타이타닉호에서 넘어옴)

제임스 카메론이 이 선박을 소재로 만든 동명의 영화에 대해서는 타이타닉(영화)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1 개요

주의. 사건·사고 관련 내용이 있습니다.

이 문서에는 실제로 발생한 사건·사고에 대한 자세한 내용과 설명을 포함합니다. 불법적이거나 따라하면 위험한 내용도 포함할 수 있으며, 일부 이용자들이 불쾌할 수 있으니 열람에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실제 사건·사고를 설명하므로 충분히 검토 후 사실에 맞게 수정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이 틀을 적용하시려면 적용한 문서의 최하단에 해당 사건·사고에 맞는 분류도 함께 달아주시기 바랍니다. 분류 목록은 분류:사건사고 문서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RMS_Titanic_3.jpg

타이태닉호[1]
RMS[2] Titanic[3].
1912년의 최초이자 최후의 항해 때 빙산과 충돌해 침몰한 비운의 여객선. 아마도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침몰선일 것이다. 2012년 4월 15일로 침몰한 지 딱 100년이 되었다.(2012년도 기준) 하도 거대해서 별명이 불침선(The Unsinkable)이라는 말도 있었지만 결국...

1.1 스펙

Titanic_side_plan_1911.png

선적: 영국
모항: 리버풀(Liverpool)

선박 특성 #

  • 총 톤수: 46,328 GRT[4]
  • 배수량: 52,310t
  • 전체 길이: 269.1m
  • 전체 폭: 28m
  • 최대 속도: 23노트 (43㎞/h)[5]
  • 굴뚝 수: 4 (단, 끝의 하나는 환기용[6])
  • 마스트 수: 2
  • 통신 시스템: 밤에는 3,200km까지 연락 범위 확대.
  • 무선호출 부호 : MGY
  • 재질: 강철
  • 기관: 스카치식 보일러 24기, 보조 5기, 레시프로 4기통 엔진 2기, 증기터빈 1기, 혼성 3축, 프로펠러 3기[7]
  • 출력:46,000HP(설계) – 59,000HP(최대출력)
  • 최대 탑승 가능 인원: 3547명 (승선객, 승무원 모두 포함)
  • 선실수
    • 1st-class(1등실) 416
    • 2nd-class(2등실) 162
    • 3rd-class(3등실) 262
    • cabin area(전용실, 갑판실 등) 40

2 건조

20세기 초 조선업계에 큰 영향력을 갖고 있던 하란드 월프 사의 회장인 피리 경이, 런던메이 페어의 저녁 식사 모임에서 화이트 스타 라인사의 이즈메이 사장에게 3척의 대형 여객선의 건조 계획을 말한 것이 타이타닉 호 건조의 발단이었다. 설계는 토머스 앤드루스가 맡았다.

화이트 스타 라인사는 블루리본[8]으로 불렸던 북대서양 여객선들의 속도 경쟁에는 별로 관심을 나타내지 않고 느긋하고 쾌적한 여행에 중점을 두는 회사였다. 하지만 타이타닉은 속도부터 설비의 호화로움까지 모든 것에 중점을 두어 설계되고 있었다. 안전에도 신경을 써 설계에 방수구획을 도입하였다. 선체는 방수 격벽에 의해 16개의 구획으로 구분되었고 그 중의 2구획(뱃머리의 경우 4구획)이 침수해도 침몰에 이르지 않는 구조였다. 게다가 격벽은 제어실의 원격 조작으로 즉시 폐쇄할 수 있었다.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방수대책의 도입으로 타이타닉 호는 '불침선' 의 명성을 얻고 있었다. 실제로 설계상의 구조는 지금 기준으로도 안전한 편. 그러나 갑판 아래 선체가 전부 방수구획으로 설계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고 주 갑판을 통해 구획 모두가 연결되어 있어서 선체에 큰 손실이 발생하여 다량의 해수가 유입될 경우 도미노처럼 다른 구획까지 차례차례로 침수될 수도 있는 구조였으며 실제로 최초 항해 때 이런 일이 벌어졌다.

타이타닉 호는 올림픽 호와 거의 동시에 건조가 개시되어 대계단이나 식당의 장식, 식사의 메뉴나 객실의 서비스 등 외관에서나 내장 면에서 거의 동일했다고 한다. 영화 타이타닉에서는 마치 타이타닉 호가 전무후무한 초대형 선박인 냥 연출했지만 실제로는 올림픽 호(1910년 10월 20일 진수)가 클래스의 대표 선박으로 타이타닉 호(1911년 5월 31일 진수)와 브리타닉 호(1914년 2월 26일 진수)라고 하는 2척의 자매선과 함께 올림픽 클래스라고 불리고 있었다. 타이타닉 호의 사진으로도 종종 올림픽 호 사진이 사용된다!

여담으로 타이타닉호와 자매선들은 최초로 배 안에 수영장을 설치해 놓은 여객선들이었다고 한다.

2.1 설계의 변경

오른쪽이 타이타닉 호, 왼쪽은 자매함이자 타이타닉이 속한 올림픽 급[9]의 1번선 올림픽 호.

그러나 앞서 항로에 투입된 올림픽 호에서 발생한 문제점을 타이타닉 호의 설계에 반영한 결과 몇 군데 달라진 부분은 있었다. 예를 들면 A 갑판의 1등실 전용 산책용 갑판(Promenade) 앞부분에 유리창이 설치되었는데 이는 북대서양의 추운 바람으로부터 승객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이 점은 외관상으로 두 자매선을 구분하는 요소 중 하나이다. 위 사진은 전술한 유리창이 설치되기 전의 모습. 그 밖에도 올림픽 호는 B갑판의 창가 전체에도 산책용 갑판이 설치되어 있었지만 타이타닉 호의 설계도에서는 산책용 갑판 대신에 창가 전체에 1등 선실을 새롭게 마련하도록 변경되었다. 그 결과 1등실의 수가 올림픽 호보다 더 많아졌고 전용 산책용 갑판에 면한 스위트룸이 도입되었다.

자매선이니만큼 애초의 중량은 거의 비슷하게 설계되었지만 이상의 이유로 타이타닉의 객실 수가 증가, 최종적으로 타이타닉 호의 등록톤수는 올림픽 호의 45,324톤보다 1,004톤 커진 46,328톤으로 늘어났다. 타이타닉 호가 올림픽 호를 넘어 당시 세계 최대의 여객선이었다는 것은 확실한 사실. 그러나 타이타닉 호가 지금까지도 유명세를 타고 있는 것은 그 크기 때문이 아니라 어두운 바다 속으로 가라앉은 탓이다.

수에즈 운하에 이 배가 너무 커서 안 들어가 확장 공사를 해야 했다는 말도 있지만 이 말은 확실한 과장. 수에즈 운하의 확장은 당시 선박의 대형화 추세 때문이지 타이타닉 호 한 척의 통행 때문은 아니었다.수에즈 운하에 이놈이 안들어가서 확장공사를 했다면 미국은 2차대전때 아이오와급 전함의 함폭을 제한하느니 차라리 파나마 운하를 확장했을것이다.

2.2 층별 구조

총 11층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 보트 갑판 - 최상층으로 구명보트들은 모두 여기에 나열되어 있었다. 맨 앞쪽에는 선교와 조타실이 있었으며 선장&간부(상선사관) 숙소와 바로 연결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뒤에는 중앙계단의 최상층과 체육관이 연결되어 있었다. 넓은 산책로를 가지고 있었으며 1등실, 2등실, 상선사관 등 저마다 산책로의 영역이 정해져 있었다. 1등실 산책로의 경우 외관을 잘 볼 수 있게 하기 위해 구명보트가 설치되어 있지 않았는데 이때문에 참사의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 A갑판 - 산책 갑판이라고도 불렸다. 거의 모든 영역이 1등실 전용이었고 1등실 객실들과 라운지, 흡연실, 독서실, 그리고 야자수 코트가 놓여져 있었다. 산책 갑판이라는 이름답게 승객들은 기나긴 산책로가 놓여져 있었는데 앞에서도 말했듯이 앞쪽의 산책로에는 유리창이 설치되어 있었다.
  • B갑판 - 선교루 갑판이라고도 불렸다. 객실은 1등실이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었으며 어떤 객실들은 개인 산책로를 보유하고 있었다. 레스토랑카페도 있었다. 이 갑판에는 선두와 선미 위쪽도 포함되어 있는데 선미는 3등실 산책로로 쓰였지만 선두는 당연히 안전문제상 선원 외 출입금지였다. 그러니까 97년판 영화에서 "나는 세상의 왕이다!" 하는 장면과 "날고 있어!" 장면은 페이크(…) 다만 실제로 가봤다는 생존자의 이야기도 있긴 한데, 당연히 선원 눈을 피해 슬적 들어갔다 나온 정도다. 영화에서처럼 선장 이하 선원들이 흐뭇한 표정으로 가만 놔둘 가능성은 적었을 것이다.
  • C갑판 - 배에서 선두, 선미와 분리되는 지점이자 하얗게 칠한 곳이 시작하는 지점으로 3등실의 산책로로 쓰이고 선두와 선미로 각각 이어지는 요갑판과 이어져 있었다. 선두는 주로 선원들의 숙소로 쓰였고 선미는 3등실 전용 휴게실과 흡연실이 있었다. 그 사이에는 1등실 객실들과 2등실 도서관이 있었다.
  • D갑판 - 3개의 넓은 공공시설이 상당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는데 1등실 대합실, 1등실 식당과 2등실 식당이 있었다. 3등실을 위한 트인 공간도 있어 밤만 되면 신나는 연회가 열렸다. 1등실, 2등실, 3등실 객실들과 화부들의 숙소가 있던 곳이기도 했다. 방수격벽이 위치해있던 가장 높은 갑판이기도 했다.
  • E갑판 - 주로 1등실, 2등실, 3등실 모두의 객실들과 선원들의 숙소가 차지하고 있었다. '스코틀랜드 로드' 라고 불리던 아주 긴 복도가 있어 선원들과 승객들이 오고 갈 수 있었다.
  • F갑판 - 객실은 3등실이 대부분이었지만 2등실 객실과 선원들의 숙소도 있었다. 3등실 식당은 여기에 있었다. 또 1등실 승객들을 위한 수영장과 터키탕도 있었다.
  • G갑판 - 수면 위에서 가장 낮은 층으로 선원들과 승객들의 객실이 있는 가장 낮은 갑판이었다. 스쿼시 코트도 있었으며 우편 저장소도 여기에 있었다. 대다수의 영역이 보일러실이 있는 최하 갑판과 겹쳐있어 선미와 후미가 각각 따로 떨어져 막혀있었다.
  • 최하 갑판 - 주로 창고가 대부분이었다.
  • 탱크 톱 - 보일러실과 기관실이 위치해 있었다.

3 출항과 항해

타이타닉호의 침몰 시점 : 1912년 4월 15일 밤
타이타닉호의 침몰 지점 : 영국령 뉴펀들랜드 해안 동쪽 400마일(640km) 해상으로 추정.

Titanic.jpg
Titanic_new_york.jpg
1912년 4월 10일, 영국의 사우샘프턴(Southampton)으로부터 타이타닉호는 첫 항해를 시작했다. E·J·스미스 선장과 승무원과 승객을 합쳐서 2,200명 이상이 승선하였다. 배가 항구를 떠날 때 실수로 정박되어 있던 뉴욕 호(위 두번째 사진에서 왼쪽 선박)의 정박용 밧줄을 끊어버려 둘이 충돌할 뻔했던 사건(!)이 발생했다. 프랑스의 셸부르(Cherbourg)과 아일랜드의 퀸즈타운에 기항한 후 미국뉴욕 항구로 향했다.

출항 당시 쌍안경의 열쇠가 인계되지 않아서(!) 배 안에 있는 쌍안경을 꺼낼 수 없었다.(…) 때문에 견시[10]들이 쌍안경을 사용하지 못했고 육안으로 위험요소를 확인해야 했는데 사고 초기에는 이게 큰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되었으나 나중에 사상 최악의 참사에서 실제로 동일한 환경 속에서 당시 쌍안경을 사용하여 실험한 결과 이것조차도 무용지물이었다. 실험 결과 그냥 검은 원만 보였다고.(…) 애당초 당시의 차가운 공기 때문에 시야 확보가 어려웠고 칠흑같은 밤에 파도도 없어서 빙산을 발견하기 어려웠다. 여러 악조건이 겹쳤기에 쌍안경을 사용하지 못했던 것은 그 많은 악조건 중 하나였을 뿐이었다고 볼 수 있다.

출항 오전부터 빙하가 돌아다닌다는 위험한 소식이 선박 사이의 무선통신으로 경고되고 있었으며 적어도 타이타닉 호는 4월 14일 6통의 경고를 통신으로 받았다. 그러나 타이타닉 호의 통신사들[11]은 승객들의 통신 발신 업무에 쫓기고 있었고 이 계절의 북대서양의 항해에는 자주 있는 일이라고 여겨서 경고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러다가 화물선 캘리포니안 호가 무선을 보낼 때에는 더 이상 참지 못한 통신사 필립스가 "닥쳐요! 지금 그쪽이 통신을 방해하고 있다고요!" 라고 일침을 놓았고 캘리포니안 호의 통신사 에번스는 빡쳐서 무전 스위치를 끄고 잠이 들었다.(…) 문제는 타이타닉호가 침몰할 당시 가장 가까이 있었던 배가 캘리포니안 호였는데 하나뿐인 통신사가 잠을 자고 있었기 때문에 구하러 오지 못했다. 이 설에 따르자면 겨우 통신사의 불친절함 때문에 1,500여 명이 죽어간 참사가 일어난 것이 되는데 사실 이 주장에 대해서 사건 직후 청문회에 증인으로 불려간 에번스는 '그런 정도 문제 가지고 화를 낸 건 아니다' 고 증언한 바가 있다. 애초에 통신장비를 갖춘 선박의 통신사는 24시간 근무를 하도록 되어있었고 당연히 혼자서 24시간 근무가 가능할 리가 없었기 때문에 통신사를 1인만 탑승시킨 캘리포니안 호가 규정을 위반하고 있었던 것. 다만 당시의 해운 관행상 이런 경우는 흔했기 때문에 캘리포니안 호만 특별한 것도 아니었다. 이때 억울하게 캘리포니안 호의 선장만 비난받기도 한 적이 있다. 당시 에번스는 빡쳐서 무전을 끄고 잔 게 아니라 그냥 고된 근무로 피곤해서 잠이 들었던 것이었다.

3.1 승객과 선원들

  • 1등실에는 총 329명의 부유한 승객들이 타고 있었으며 급한 사정보다는 즐기려고 승선한 승객들이 많았다. 객실은 최상층인 보트 갑판부터 갑판 E(상갑판)까지 설치되어 있었으며 호화 호텔 수준이었고 개인 목욕탕이 있었다.
  • 2등실에는 총 285명의 중산층 승객들이 타고 있었다. 전체적으로 봤을 때 1등실만큼 좋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다른 배들의 1등실에 견줄 만한 많은 편리한 시설들이 설치되어 있었다. 객실은 갑판 D부터 갑판 G까지 설치되어 있었다. 흡연실(갑판 B), 레스토랑(갑판 B), 도서관(갑판 C), 상점 등이 설치되어 있었다.
  • 3등실에는 총 710명의 가난한 승객들이 타고 있었으며 주로 아메리칸 드림으로 미국에서 새로운 보금자리를 얻기 위해 승선한 승객들이었다. 객실은 2등실과 마찬가지로 갑판 D부터 갑판 G까지 설치되어 있었다. 시설은 1등실과 2등실만 못하고 엔진이 가동되는 소리가 울려퍼졌으나 다른 배들에 비해서 비교적 좋은 대우를 해주었다.[12] 배에 탑승하기 전에는 검역을 걸쳐서 전염병이나 /벼룩을 확인했고 여자와 남자는 배의 앞머리와 뒷머리에 각각 따로 떨어져 승선했으나 가족 단위일 경우 같이 승선할 수 있었다.
  • 선원들은 총 885명이 타고 있었다. 항해사, 갑판 선원, 기관사, 화부, 기관 선원, 요리사, 레스토랑/카페 점원[13], 우편 점원, 음악 연주가[14], 그리고 보증으로 탑승한 관계자들[15] 등등 여러 종류의 선원들이 타고 있었다. 물론 월급과 대우도 직종에 따라 달랐다. 여성 승무원은 23명이 타고 있었다.

3.2 불길한 징조?

우연인지 운명인지 많은 사람들이 출항하기 전 불길함을 느꼈다고 한다. 어떤 선원은 자기 아내가 화이트라인사 로고가 새겨진 뜨개질을 하다가 엉켜버렸는데 이에 아내가 불행한 징조라면서 말려 가지 않았다고 한다. 수석 항해사 헨리 와일드는 출항 전 가족에게 뭔가 불길하다는 편지를 남겼는데 이게 그의 생애 마지막 출항이 되었다.

그리고 침몰 전 배와 한참 떨어진 스코틀랜드에서 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던 제시라는 여자아이가 꿈에서 큰 배가 침몰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월리라는 사람이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것을 봤다고 한다. 소녀가 꿈에서 보았던 일은 실제로 일어났고, 월리 하틀리가 이끄는 악단은 가라앉는 배에서 생애 마지막 연주를 했다.

또 출항하던 날 갈매기가 단체로 배를 쫓아왔다고 하던데 이는 뱃사람들에게 안 좋은 징조로 여겨지기도 했다. 그리고 앞서 말했듯이 다른 배와 아슬아슬하게 충돌할 뻔한 일도 있었고 항해 와중에 석탄 저장고에 원인불명의 화재가 나기도 했다.

또 특기할 만한 것은 타이타닉호 침몰 사고(1912년)가 일어나기 14년 전인 1898년 모건 로버트슨(Morgan Robertson)이란 작가가 쓴 단편 소설 <무용지물(Futility)>이 이 배의 침몰을 예언했다는 사실이다. 로버트슨의 그 소설 내용이 "'타이탄' 이란 초호화 여객선이 대서양으로 첫 항해에 나섰다가 빙하와 충돌하여 대형 인명사고를 낸다" 는 것이었는데 이 소설에 나오는 탑승객 숫자와 구명 보트 수, 출발 항구, 사고 원인과 사고 지점, 배의 규모와 사고 시기가 14년 뒤에 실제로 일어난 타이타닉호 사건의 그것과 매우 유사했다.(다만 일부 내용이 소설 출간 이후 개정되기는 했다.) 그런데 작가인 로버트슨은 자신이 예측한 것이 아니라 자신은 그저 선박에 대한 풍부한 지식을 바탕으로 소설을 꼼꼼하게 썼을 뿐이라고 했다고 한다.

위의 징조처럼 사고가 일어나기전 발생된것은 아니지만 타이타닉호는 배를 진수하는 도중에 선수에 샴페인을 깨는 행사를 하지 않았다. 진수식중 병이 안깨져도 저주받았다고 난리인데 행사자체를 안했다는것은 진수때부터 불길했다는것.

4 침몰

첫 빙산충돌로부터 침몰까지 타이타닉 침몰 사건을 자세하게 재현한 영상. 업로더의 설명에 따르면 편집이나 슬로우모션과 같은 시간 왜곡없이 완전한 실시간(real time)으로 제작되었으며 언리얼엔진4가 활용되었다고 한다.

4.1 빙산과 충돌하다

그리고 운명의 1912년 4월 14일 밤 11시 40분, 레지널드 리와 함께 견시를 보던 갑판 선원 프레더릭 플리트가 전방 450m에 높이 20m 미만의 빙산을 육안으로 발견했다.[16] 출항할 때 쌍안경을 사용할 수 없었고 빙산의 10분의 9는 숨어있었기 때문에 빙산을 발견했을 때에는 이미 늦은 뒤였다.

500px-Titanic_porting_around_English.svg.png
플리트가 빙산을 발견하고 종을 몇번 울린 후 급히 선교에 전화로 보고했고 6등 항해사[17] 제임스 무디가 조타실에서 그것을 받고 1등 항해사 윌리엄 맥매스터 머독에게 보고했다. 보고와 비슷하게 빙산을 확인한 그는 바로 좌현전타[18]를 명령하고 텔레모터(원격 조정 장치)를 "전속 후진"로 돌려놓아 기관실에 지시한 뒤,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보일러실의 방수격벽이 닫힐 것을 알리는 알람을 울렸다. 조타수 로버트 히친스는 지시에 따라 왼쪽으로 키를 최대한 돌렸으며 기관실에서도 배의 속도를 늦추기 위해 노력했으나 배의 회전반경이 너무 크고 빙산과의 거리가 가까운 탓에 충분한 회전과 감속을 하지 못했다, 결국 우현은 빙산이 있는 곳으로 서서히 접근하여 정통으로 부딪히지는 않았지만 우현측면이 빙산과 충돌하였다. 충돌 이후 1항사 머독은 우현전타[19]를 지시하여 빙산으로부터 벗어나는 한편, 방수격벽 폐쇄 스위치를 작동시켰다. 빙산으로부터 얼마 떨어지지 않아 타이타닉은 멈춰섰고 텔레모터는 '정지'에 놓였고 이후로 타이타닉은 영원히 움직이지 못했다.[20]

"속력을 떨어뜨리지 않고 있으면 빙산과의 충돌은 회피할 수 있었다" 라는 설도 있지만 어디까지나 결과론일 뿐이었다.

아랫쪽 승객들은 큰 충격을 느끼고 잠에서 깨어났다. 윗쪽 승객들은 약간의 흔들림을 느꼈으나 잠에서 깨어날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몇몇은 흔들림을 느끼고 깨어났다.

하지만 6번과 5번 보일러실에서는 사정이 달랐다. 물이 폭포처럼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화부들은 물을 피해 도망갔다. 조타실과 망루에서는 빙산의 피해가 그렇게 크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충격을 느끼고 올라온 사람들이나 갑판 위에 있었던 승객들은 오히려 즐거운 분위기였다. 3등실 승객들은 올라나와 얼음 조각으로 축구(...)를 했으며 1등실도 다른 건 아닌지라 어떤 사람들은 기념으로 위스키에 쓸 얼음으로 가져갔다(...)이봐?

하지만 우현에는 수면 아래 약 9m에 손상이 생겼다.[21] 이 과정에서 5구획에 걸쳐서 엄청난 해수가 배 안으로 들어왔다. 방수격벽탓에 배 전체에 물이 들어차지는 않았다. 하지만, 타이타닉은 2구획(뱃머리로 부터는 4구획)까지 물이 들어오면 침몰하지 않고 버틸 수 있으나 뱃머리로 부터 5구획 이상에 물이 차면 그 한계를 넘는 것이었다. 거기에다 타이타닉의 격벽은 위의 E갑판과 연결되어 있는 구조라 선체가 부력을 잃고 앞으로 기울어지며 잠기는 와중에 해수는 격벽을 넘어 차례차례로 다른 구획까지 흘러 들어갔고 이는 배의 침몰을 가속했다. 이후 뱃머리에 실린 물로 인해 배는 서서히 앞으로 기울었고 뱃머리가 해수면 아래로 점점 들어갔다.

횡단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던 화이트 스타 라인 사의 회장이자 배의 이사 브루스 이스메이가 그대로 전진할 것을 지시하고배가 쇄빙선이냐... 선원들은 이를 그대로 따르는 병크를 저질렀기 때문에 침몰이 가속되었다는 주장이 있다. [22] 하지만 이건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은게, 빙산 충돌 직후 모든 엔진을 정지시켰다는 것을 많은 승객들이 증언하였다. 실제로 이상한 진동 이후 배의 엔진이 출항 이후 처음으로 꺼지고, 오랜 시간 다시 들어오지 않자 무슨 일이 일어났음을 직감한 승객들이 상당히 있었다. 카메론판 영화에서는 침몰 자체에는 영향을 끼치지 않았지만 사고 전 이스메이가 횡단시간을 줄이기 위해 속도를 더 내라고 선장에게 부탁하는 장면은 나온다.[23] 하지만 이 역시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은데 위에서 이미 언급한 것처럼 원래 화이트 스타 라인 사는 선박의 빠른 속도에 굳이 집착하지 않았다.

침몰에 이를 정도의 손상을 받은 원인으로 "정면이 아닌 측면에 빙산이 충돌해 피해가 가중되었다" 라고 하는 설도 있다. 만약 타이타닉 호가 빙산에 정면에서 충돌했으면 침수한 방수 구획은 일부의 좁은 범위(타이타닉 호의 방수 구역 내)에 머무르는 것으로 끝나고 침몰을 면할 가능성도 있다. 결과적으로는 충돌을 회피하려고 키를 돌려 어중간하게 방향을 바꾸었던 것이 피해를 가중했다. 당시의 낮은 제강 기술로 인해 당시 최고급 강철판을 사용했던 선체의 강철에 불순물인 황과 인이 많이 섞여있었는데 많은 인 성분은 균열을 만들고 황은 이러한 균열을 더 확산시키고 낮은 망간 비율은 강철의 탄력성을 낮추어 메진 성질을 더 크게 한다. 참고로 현대의 질 좋은 강철은 망간과 황의 비율이 200:1이지만 타이타닉 호의 선체에 사용된 고급 강철은 겨우 6.8:1 수준이었다. 황과 인은 각각 4배, 2배 더 많았다는 게 밝혀졌다.

2000px-Iceberg_and_titanic_(en).svg.png
또한 금속 자체의 특성과도 연관이 있는데 금속은 온도가 낮을수록 용접 부분이나 금속 그 자체가 충격이 가해졌을 때 파괴되기 쉬운 특징이 있다. 이를 '취성' 이라고 하는데 연성[24]과는 반대되는 개념이다. 타이타닉 호는 침몰 당시 북대서양[25]의 차가운 해수를 가로지르며 항해하고 있던지라 취성 파괴가 일어나기 쉬운 조건이었다. 당시의 야금 기술의 한계로 영하의 기온 속의 빙산은 건조시 사용된 강철보다 단단했으며 외부적 조건(낮은 온도)에 의해 금속의 특성이라는 악조건이 겹쳐 배가 파손당하기 쉬운 상태가 된 것이다.

게다가 선체를 접합하는 데 사용했던 이음못(리벳)이 생각보다 훨씬 더 약했다는 것도 문제였다. 타이타닉 호의 잔해에서 채취한 이음못 48개를 분석한 결과 이음못에 유리 성분의 슬러그[26]가 높은 비율로 섞여있었고 이로 인해 이음못이 메진 성질을 가져 쉽게 금이 간 것이다. 사상 최악의 참사에서는 이쪽을 밀고 있는데 여기서의 내용에 따르면 선수 부분은 곡선이다 보니 리벳 머신으로 박을 수 없어서 강철 리벳 대신에 인력으로 때려박을 수 있는 연철 리벳을 사용하였다고 한다. 헌데 테스트용으로 만든 연철 리벳은 10,000psi의 압력을 견딜 수 없었고(타이타닉이 충돌할 당시의 충격에 의한 압력은 14,000psi로 추정하였음) 실제 타이타닉의 선수 부분의 리벳은 테스트용보다도 훨씬 약한 수준이었고 그 때문에 충격으로 리벳이 박살나면서 생겨난 틈으로 침수가 되었다고 한다.

쉽게 말해서 이 배는 지중해의 기후에는 적합해도 대서양을 건너는 여객선 용도에서는 낙제점이다. 그냥 처음부터 크루즈선으로서 이용을 하는 것이 가장 나았다.
타이타닉 선장 스미스는 해수의 배수를 시도하려고 했지만 그저 침몰을 늦출 뿐 막을 수는 없었다.

4월 15일 0시 15분 조난 신호 CQD (Come Quick Danger) 를 발신, 인근 선박에 구조를 요청했다. 불과 20km 정도의 거리에 정박중인 화물선 캘리포니안호가 있었지만 1명밖에 없는 통신사가 위에서 나온 것처럼 취침중...이라 연락을 받지 못했다.[27] 대략 90km 떨어져 있던 여객선 카르파티아 호가 응답해 전속으로 구조로 향했지만 배의 최대 속도가 17노트(약 34km)에 그쳐 카르파티아 호가 현장에 도착한 시간은 오전 4시.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4.2 탈출작업

titanic-distress-rockets-april-15.png
스미스 선장은 탈출 명령을 내렸다. 물론 누구처럼 갑판에 나오지 말고 배안에 가만히 있으라고는 안했다.우선 모든 승객들과 선원들에게 구명조끼를 나누어주기 시작했으며 좌현에서는 2등 항해사 찰스 라이톨러가, 우현에서는 1등 항해사 머독이 구명보트를 내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승객 대부분은 배가 침몰한다는 것을 믿지 못하고 구명보트에 탈 생각조차 안했는데, 나무로 만든 조그만한 보트보다는 270m의 강철로 만들어진 여객선이 훨씬 안전해 보이는 건 어쩌면 당연할 듯. 게다가 날씨 때문에 귀찮아했던 사람들도 매우 많았다. 배에서 가장 부자였던 존 제이컵 아스터도 아내에게 "여기가 저 조그만한 보트보다 안전해" 라고 말했다고 한다. 심지어 안내도 제대로 하지 않았다! 영화판에서도 그저 괜찮다는 식으로만 안내하는 장면이 여러 번 나왔다.

2등 항해사 라이톨러는 선장에게 여자와 어린이를 먼저 태울 것을 건의하고 선장은 승인했다. 이건 당시 사회 통념상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1등 항해사 머독은 더 이상 여성과 아이들이 보이지 않으면 남자를 태우는 것을 허용하는 등 비교적 남성에게도 관대한 대응을 했지만 라이톨러는 "여자와 어린이 먼저" 를 "여자와 어린이" 으로 받아들여 혼란을 막기 위해 여성과 어린이 우선의 관습을 철저히 실시했다.[28]

타이타닉 호가 참사가 된 원인 중 하나는 구명보트의 부족 때문이었는데 당시의 영국 상무성의 규정을 보면 여객선은 여객 정원만큼 구명보트를 갖출 필요가 없었다. 당시 규정에서는 978명, 그나마도 배의 배수톤수 기준이었다! 또한 미관, 비용 등의 이유로 인해 화이트 스타 라인사는 최종적으로 타이타닉 호에 1,178명 정도가 탈 수 있는 보트만 준비하는 병크를 저질렀지만[29] 그나마도 제대로 채워지지 않았다. 맨 처음 구명보트를 하선할 때에는 많은 승객들이 탈 수 있어도 타지 않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유언비어가 선원들 사이에 떠돌았다. 정원 65인승의 보트에 70명을 태우는 실험을 했는데 배는 뜰 수 있었지만 추진과 균형 잡기가 불안정하다는 것이었다. 배에 타고 있던 타이타닉의 설계자인 조선기사 토머스 앤드루스를 포함해 관련자들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30] 어찌 할 도리가 없었다. 또한 급작스런 사고에 당황한 선원들은 정원을 다 채우지 못하고 황급히 구명보트를 하선했다. 사전에 계획되어 있던 안전 교육도 (아마도) 예배 때문에 취소되어 전혀 하지 않았다.

정원을 초과해도 모자를 판에 많은 보트들이 정원을 채우지 않은 채로 바다에 내려졌다. 만약 정원이 완전히 채워졌다면 반이라도 살 수 있었을 것이다.

한편 배 밑 보일러실에서는 화부들과 기관선원들이 물이 보일러에 접촉해 폭발하는 것을 막기 위해 증기와 해수를 배출하며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기관실에는 기관사들과 기관선원들이 계속해서 동력을 공급했다.[31]

배수를 시작하고 얼마 후 5번 보일러실에서 첫 번째 사망자들이 발생했다. 화부와 기관선원 몇 명이 펌프질을 하다가 6번 보일러실의 석탄 저장고가 수압을 견디지 못하고 터져 익사한 것. 이건 밑에도 있는 항해 중에 있었던 의문의 화재 때문에 격벽이 약해져서라는 이야기도 있다. 화부장이었던 프레더릭 배럿은 가까스로 살아남았다. 또 한편 우편 직원들은 침수하는 우편물 저장고에서 우편물을 물에서 구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것이 마지막으로 목격되었다.

그리고 하갑판에 남아있던 몇몇 승객들과 승무원들은 물이 복도 구석구석에 밀려오기 시작하는 것을 목격했다.

12시 45분쯤 구명보트 7호가 28명을 태우고(정원은 65명...) 처음으로 내려졌다. 곧이어 55분에 좌현에서 구명보트 6호가 7호와 마찬가지로 28명을 태우고 내려졌다. 여기에 타고 있던 사람들 중에는 빙산에 부딪히고 있었을 때 조타 당직자였던 조타수 로버트 히친스, 빙산을 처음 목격했던 견시 프레더릭 플리트[32], 그리고 훗날 "가라앉지 않는 이(Unsinkable)" 이라는 별명을 갖게 된 마거릿 몰리 브라운도 있었다.

구명보트는 좌현과 우현 양쪽에서 하나둘씩 내려지기 시작했다. 허나 앞서 말했듯이 대부분 정원을 제대로 채우지 않고 내려졌다. 구명보트 5호는 41명이 탔고 3호는 32명이, 8호는 39명이 탔고 1호는 겨우 12명(정원 40명)밖에 타고 있지 않았다.

혼란이 점점 가속화되기 시작했고 그에 따라 사고도 약간씩 일어나기 시작했다. 어떤 여성은 구명보트 10호와 배 사이에 떨어져 끼었다가 구조되었다.

어떤 승객들, 특히 탑승이 거부된 성인 남성들 중 몇몇은 구명보트에 타기 위해 보트를 내리고 방치된 줄을 타거나 아예 선원들의 제지를 뚫고 뛰어들기도 하였다. 어떻게든 보트에 오르기만 하면 내려가는 중이거나 다 내려진 경우 쫓아낼 방도가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 와중에 부상자들도 생겨났다. 이제 승객들도 상황의 심각함을 어느 정도 눈치채기 시작했다.

한편 무선사 잭 필립스와 해럴드 브리드는 계속해서 모스 신호를 보내고 하늘에는 계속해서 로켓이 발사되었다. 캘리포니안 호에서도 이것이 조그만하게 보였지만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다. 정체불명의 선박이 목격되었지만 알아보지 못하고 수평선 너머로 사라졌다. 선박은 후에 포경선으로 밝혀졌으며 자신들에게 뭔가 트집을 잡으려던 미 해안경비대로 착각하고 도망갔다고 한다.

상황이 지속되고 배가 서서히 기울어짐에 따라 혼란이 훨씬 더 가중되었다. 이제 대다수의 승객들이 상황이 생각보다 훨씬 심각함을 깨닫고 공황에 빠졌다. 아직도 최악의 상황까지는 가지 않을 거라고 희망을 거는 사람들도 약간씩 있었다.

이때 수많은 3등실 승객들이 여전히 배를 헤메고 있었다. 여러 구역이 철창으로 막혀 제한되어 있었고 배가 미로처럼 복잡했기 때문에 탈출에 지장을 빚었으며 일부 승무원들은 혼란을 막는다는 이유로 승객들의 통행을 제한하기까지 했다. 거기에다가 3등실 승객들 중에는 영어를 잘 하지 못하는 승객들도 많았다. 영화에서는 영어 안내판을 본 어느 아랍계 승객이 영어사전을 뒤져가며 Deck의 의미를 찾는 장면도 있다.

이 상황해서 여러 3등실 승객들은 그냥 탈출 시도를 포기한 채 자신들의 숙실이나 식당, 복도 등에 남아 지시가 내려오기만을 기달리는 수밖에 없었다. 생존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이때 수백명의 승객들이 식당에 남아 묵묵하게 탈출지시를 기다리거나 같이 모여 기도를 했다고 한다. 이 가운데 존 에드워트 허트를 비롯한 승무원들은 배 밑으로 내려가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3등실 승객들을 적극적으로 인도해 도와주기도 했다.

Leaving_the_sinking_liner.jpg
1시 30분쯤에는 배의 앞머리가 잠기기 시작하고 혼란은 계속해서 가중되었다. 구명보트도 이제 정원에 어느 정도 맞추기 시작했다. 구명보트 11호는 정원을 다섯명 초과해서 내려졌고 배에서 펌프질로 빠져나오는 물이 들어갈 뻔했지만 가까스로 피했다. 13호도 마찬가지로 비슷한 문제를 가까스로 피했으나 밧줄에 문제가 생겨 옆에서 함께 내려지던 15호 바로 위에 내려져 깔리기 일보직전까지 되고 말았다. 다행히도 구명보트에 타고 있던 화부장 바렛을 포함한 선원들이 아슬아슬하게 밧줄을 잘라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구명보트 14호가 내려지려 하자 공황에 빠진 승객들이 필사적으로 타기 위해 우르르 몰려왔다. 이에 14호를 맡은 5등 항해사 로우는 혼란을 저지하기 위에 허공에 대고 총을 쐈다. 5분 후에는 구명보트 16호가 내려졌는데 여기 타고 있었던 사람들 중 간호사였던 바이올렛 제솝은 후에 자매선 RMS 브리타닉이 침몰했을때도 간신히 살아남았다.

구명보트가 하나둘씩 내려짐에 따라 이제 후미로 몰려가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1시 45분에는 구명보트 2호가 내려졌다. 이때 몇몇 외국인들이 타려 했지만 2등 항해사 라이톨러가 권총으로 위협해 쫓아냈다. 존 제이컵 애스터는 어린 아내를 태우고 아직도 빈 공간(40명 중에 25명이 타고 있었음)이 많은 것을 보고 타도 되냐고 물었으나 라이톨러에 의해 거절당했다.

접이식 보트 C가 2시 정각에 내려지기 직전 두 사람이 몰래 탔는데 한 명은 가족을 구명보트에 미리 태운 승객이었고 나머지 한 명은 화이트 스타 라인사의 회장이자 배의 선주 브루스 이스메이였다. 그는 이 때문에 돌아와서 욕을 꽤 먹었으며 책임을 지고 회사에서도 사퇴했다.

마지막 구명보트(선교 위에 비상용으로 있었던 접이식 보트 2개는 제외)는 접이식 보트 D로 2시 5분에 내려졌다.

이 와중에 배에 남기로 한 사람들도 있었다. 뉴욕에서 유명한 메이시 백화점을 소유하고 있는 스트라우스 내외는 금슬 좋은 노부부였는데 남편인 이사도라 스트라우스가 다른 사람들이 구조되기 전까지는 타지 않겠다며 구명보트 승선을 거절하자 그의 부인도 선원의 구명보트 승선 제안을 거절한 다음 하녀 엘렌에게 자신의 모피 코트를 건네주고 자기 대신 구명보트에 태운 뒤 배에 남아 남편과 함께 운명을 같이했다. 영화에서는 물이 들어오는 선실 침대에 둘이 함께 껴안고 누워있는 장면으로 등장한다. 이 두사람의 내용은 2016년 3월 13일자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도 소개된다.

철강업자 벤저민 구겐하임은 현지처와 하인을 보트에 태운 뒤 선원의 구명조끼를 거절했다. 턱시도로 갈아입은 그는 자신을 따르는 하인과 함께 "우리는 가장 어울리는 복장을 입고 신사답게 갈 것이다" 고 하며 마지막까지 시가와 브랜디를 즐기며 배와 함께 최후를 맞이했다. 카메론판 영화에서 보이는 그의 최후는 제법 비장하다. 계단으로 물이 서서히 차오르는 홀의 의자에 정장 차림으로 앉아 무심히 최후를 기다리는 모습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든다.

4.3 최후의 순간

Titanic-Sink.jpg
titanic.jpg

2시 5분, 접이식 구명보트 2개를 제외한 마지막 구명 보트인 접이식 보트 D가 떠났다. 선장은 남은 선원들에게 모두 제 살 길을 찾으라고 했으며 배를 포기하겠다고 선포했다. 남은 사람들은 신분을 가리지 않고 살기 위해 발악하는 수밖에 없었다. 배에 남은 사람들은 접이식 보트 2개를 기다리거나 바다로 뛰어들거나 선미로 달려나갔다. 배가 기울며 프로펠러가 그 모습을 완전히 드러내기 시작했다.

2시 10분에는 바닷물이 최상층인 보트 갑판까지 다다랐다. 그때쯤 체육관 바깥쪽 휴식터에서 월리스 하틀리가 지휘를 맡은 악단이 구슬픈 찬송가를 마지막으로 연주하기 시작했다(어떤 곡이 연주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유력한 곡은 'Nearer, My God, to Thee' 와 'Autoume' 이다).

선장은 확성기를 쥔 채로 선교에 들어가 그대로 그곳에 남았다고 하며 배의 설계자 토머스 앤드루스는 흡연실에서 구명조끼를 벗은 채 그림을 응시하는 모습이 마지막으로 목격되었다고 한다.

2시 15분에서 17분 사이에는 배가 보트 갑판을 본격적으로 삼키기 시작했다. 배가 전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로 빠르게 가라앉기 시작했다. 통신사 잭 필립스와 조수 해럴드 브리드는 더 이상은 무리라는 것을 깨닫고 마지막 구조 신호를 보낸 후 침수되는 통신실에서 빠져나왔다.

남은 접이식 구명보트 두 척은 파도갑판 위를 떠다녔는데 접이식 보트 B는 뒤집힌 상태에서 여러 명이 매달려 있었고 접이식 보트 A는 뜨긴 했으나 물이 반쯤 찼다. 이때 몇몇 사람들(아치볼드 그레이시, 2등 항해사 라이톨러, 잭 테일러 등)이 환기구 때문에 빨려들어갔지만 다시 보일러실에서 발생한 뜨거운 공기가 올라오면서 물 속으로 빠져나와 뒤집어진 구명보트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러던 중 굴뚝 1이 선교루 쪽으로 쓰러지면서 (아마도 애스터를 포함한) 몇몇 사람들을 덮쳐버렸고 그 여파로 생긴 파도가 접이식 보트에 타고 있던 사람들을 쓸어내렸다. 잠시 후 중앙계단의 유리 돔과 창문이 파도에 의해 깨져 물이 쏟아져 내렸다.

그리고 배가 급속도로 기울면서 가라앉기 시작하자 온갖 종류의 배 내부 물체들(가구, 그릇, 보일러 엔진 등)이 떨어지면서 생기는 굉음이 발생했고 이는 배의 침몰을 가속시켰다. 배가 더 기울어지자 잡을 것을 찾지 못한 많은 사람들 또한 균형을 잡지 못하고 넘어지거나 갑판을 타고 미끄러졌다. [33]

2시 18분, 물체들이 떨어지면서 생기는 굉음이 더 커졌다. 그러던 중 보일러실이 침수하면서 잠깐 깜박거리다가 완전히 정전되었다. 잠시 후 바닷물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 선체는 2번째와 3번째 굴뚝 사이의 신축 이음을 중심으로 금이 가면서 굉음과 함께 두 동강으로 쪼개졌다. 동시에 굴뚝 3과 환기구인 4가 부러졌다.[34]

영화에서는 엄청 스펙터클하게 묘사됐지만 사실 이걸 본 사람은 소수인 데다가(폭발은 약간 보였다고 한다) 그나마 생존자 중 라이톨러가 회사가 망하는 것을 염려해서인지, 제대로 보지 못해서인지 "절대 동강나지 않았다" 고 말했기 때문에 영국 상무성은 "동강나지 않고 침몰" 이라고 결정내렸다. 1985년 로버트 밸러드에 의해서 비로소 진실이 밝혀지지만... 이윽고 선수 부분은 잠기고 선미 부분은 분리되어 떠있는 듯 했지만 곧바로 다시 기울면서 침몰했다. 이는 배가 동강난 뒤에도 선저에 있는 이중저(double bottom)부분이 두 동강을 연결하고 있었던 탓인데, 이것이 결국 선수부가 선미부를 잡아당기게 하는 역할을 해버린 것이다. 결국 선미 부분도 선수를 따라 가라앉기 시작하여 1분만에 완전히 침몰했다. [35]

이때 구명보트들은 빨려들어갈 것을 염려하여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선미는 꽤 느리게 침몰했고 빨아들이는 것 같은 건 없었다고 한다(후술하듯이 배 조리장 찰스 조그힌은 머리도 젖지 않았다).

4.4 침몰 직후

배에 남아있던 1500여 명의 사람들은 차가운 북대서양 한복판에 버려졌다. 배가 침몰한 곳에서 울려퍼지는 온갖 비명과 아우성이 구명보트 안에 타고 있던 사람들에게 트라우마를 주었다.

가장 적은 탑승수인 12명을 태운 1번 보트에 탑승한 화부 헨더릭슨은 현장에 돌아가자고 요구했으나 더프-고든 부부와 배를 맡은 선원 시먼스가 반대했고 나머지는 말이 없었으며 결국 무산되었다. 5번 보트의 3등 항해사 허버트 피트만 또한 현장에 돌아가려 했으나 몇몇 사람들이 이에 반대해서 무산되었다. 6번 보트에서는 마거릿 몰리 브라운 또한 현장에 돌아가서 사람들을 구하자고 요구했고 사람들도 이에 동의했으나 배를 맡은 조타수 로버트 히친스는 사람들이 배를 끌어당길 것이라며 거절했다.

한편 현장에서 비교적 가까이 있었던 (약 50m) 4번 구명보트에서는 완전히 침몰 전 헤엄쳐온 3명이, 침몰 후에는 5명이 헤엄쳐와 구조되었고 (1명 사망) 접이식 보트 D에서는 마지막 순간에 헤엄쳐온 한명을 구조한 상태였다.

현장에 바로 있었던 뒤집어진 접이식 보트 B에서는 30명이 넘는 사람들(2등 항해사 찰스 라이톨러, 아치발드 그레이시, 잭 테일러 등)이 메달리고 있었는데 주위에 너무 많은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현장에서 노를 저으며 느리게 벗어나야 했다. 이 중 구출되지 않은 한 남성은 "알겠소. 행운을 빌고 하느님의 축복이 있길 빌지요" 라고 했다고 한다[36][37].

사람들의 비명소리는 사람들이 동사해가는 동안 점점 줄어들면서 흐려지기 시작했다. 결국 14번 보트의 5등 항해사 해롤드 로우가 구명 보트들을 재편성한 뒤 지원자는 남기고(선원 7명, 승객 1명) 다른 사람들을 다른 구명보트로 옮겨 구조에 나섰으나 영하 2도의 차가운 바다에 있던 사람들은 저체온증으로 대부분이 30분 안에 사망했으며 4명만이 그곳에서 살아남았다.[38] 저체온증 이전에 심장마비로 몇 분 이내에 사망했다고 하는 의견도 있다. 사망자 중에는 갓난아기를 안은 여성도 있었다고 한다.

한편 배가 침몰될 때 제대로 내려지지 못하고 파도 위를 떠다니던 접이식 보트 A와 B에 타고 있던 사람들은 거의 지옥 같은 경험을 겪고 있었다. 뒤집어진 접이식 보트 B는 보트 안에 있는 공기가 불안정해지고 파도까지 일어서 모두가 서서 구명보트의 균형을 맞춰야 했고 몇명은 이 전에 동사하거나 이 과정에서 힘이 빠지면서 익사했으며, 물이 찬 접이식 보트 A에서는 반이 동사했다. 이 두 접이식 보트에 남은 생존자들도 다른 구명보트에게 구조된다. 그나마 2등 항해사 라이톨러가 올라탄 생존자들을 적절히 지휘해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잡으며 버티는 데 성공했다.

이때 바닷물에 있었던 사람 중 가장 오래 버틴 사람은 조리장인 찰스 조그힌이었는데 뒤집어진 접이식 보트 B에 매달렸다가 자리가 다 찼다며 거절당했지만 위에서 누군가가 먼저 사망해서 자리가 남자 끌어올려져 살아남았다. 그렇게 오래 버티며 살아남은 이유는 침몰 중 술을 잔뜩 마셨기 때문. 무려 세 시간을 버티고 있었다고 한다. 선미 끝에 매달려 있다가 배가 완전히 침몰함과 동시에 그냥 물 위로 떠올랐는데 머리가 물에 들어가지 않았다고 한다(...)[39]

한편 타이타닉의 잔해는 대서양 3,800미터 아래 해저에 가라앉았다. 동강난 선체중 선수부분은 전면으로 낙하하여 비교적 온전한 모습을 유지하였지만, 선미부분은 부서진 면을 아래로 수직으로 침몰하였기 때문에 수면 아래에서부터는 나선형으로 빙글빙글 돌며 극심하게 훼손되었고 해저에 다다랐을 땐 거의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되었다.[40] 이때문에 정확하게 선체가 파괴된 위치를 알기 어려워졌고 영화 타이타닉에서는 그 파괴위치를 묘사하는 데 있어서 오류를 범해버리게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영화의 성공은 타이타닉 침몰 사고에 대한 연구들을 기하급수적으로 증가시켜주었고, 최근의 연구에서는 주변의 잔해를 하나하나 빠짐없이 분석하여 아예 타이타닉 침몰 사건의 전모를 밝혀낸 수준에 다다랐다. 지금은 파괴 부위와 시점을 모두 알아내었다. 이 과정에서 동강난 부분의 이중저 잔해를 발견하였고 동강난 선미 부분이 왜 빠르게 침몰했는지 역시 밝혀내었다. [41]

5 카파시아 호의 구조

RMS_Carpathia.jpg

RMS 카파시아 (카르파티아) 호는 타이타닉의 선박사 경쟁사 큐나드 사의 여객선으로 뉴욕에서 출발해 상당수 미국에서 여행을 가거나 유럽으로 돌아가려는 승객들을 싣고 타이타닉의 정반대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4월 14일 12시 11분경 로스트런 선장은 자고 있던 중 무전사 헨리 커텀으로부터 타이타닉이 침몰하고 있고 구조신호를 보내고 있다는 것을 보고받았고. 선장은 27년 항해경력에서 구조는 이번이 처음이었지만 철저한 준비를 하고 사고 현장을 향해 전속력으로 달려갈 것을 지시하고 다음을 준비했다.

  • 모든 화부와 기관사들에게 각자 맡은곳으로 보고하라고 지시. 또한 증기엔진으로 돌아가는 동력을 최대한 속도에 집중하기 위해 모든 난방과 온수 시스템을 끄라고 지시함. - 승객과 선원들의 사소한 불편함을 감수한 결과 배의 최대속도를 14.5 노트에서 17.5 노트로 올릴 수 있었음.
  • 전속력으로 향하면서 빙산 감지를 위해 견시 선원들을 추가로 배치
  • 1등실, 2등실, 3등실 식당에 각각 생존자들을 진찰할 의사들을 배치
  • 복도 곳곳에 생존자들을 돕고 안내할 승무원 배치.
  • 생존자들의 잠자리를 위해 승객들의 양해를 구하고 빈 방들과 시설들이 준비됨.
  • 추위에 떨고있을 생존자들에게 나눠줄 담요를 배 곳곳에서 수거해 옴.
  • 커피 등 따뜻한 마실것과 스프를 준비
  • 선체에서 복도로 들어가는 문/해치들이 열려지고 거기에 생존자들이 올라올 줄과 사다리가 내려짐
  • 생존자들을 구조할때 물결을 잠재우기 위해 기름을 쏟을 준비를 함
  • 승객들을 구출한 뒤 타이타닉호의 구명보트를 올리기 위해 구명보트가 안쪽으로 내려짐.

그리고 4시쯤 구명보트 4호를 최초로 발견하여 구조했고 약 4시간 30분 동안 20개의 구명보트에 타고 있는 생존자들을 구조하고 12호를 마지막으로 구조했다. 선원들은 분주하게 생존자들을 위해 따뜻한 커피, 담요, 의료 서비스를 곳곳에 제공했으며 승객들 또한 생존자들에게 옷, 음식, 세면도구 등을 빌려주며 적극적으로 협조했다고 한다.

8시 30분에 마지막 생존자를 구조한 후 타이타닉 호의 자매선이던 화이트 스타의 RMS 올림픽 호가 회사 책임 차원에서 생존자들을 인계받을 것을 제안했지만 로스트런 선장은 또 옮기려면 생존자들에게 불편함만 줄 테고 무엇보다도 올림픽 호는 타이타닉 호의 자매선이라 거의 똑같이 생겼기 때문에 심리적인 불안감을 줄 것이라고 판단, 거기까지 생각할 수 있다니 정말 대단한 분이다 타이타닉 호의 생존자들을 위해 모두의 불편을 감수하고 출발지였던 뉴욕으로 되돌아가기로 결정한다. 카파시아 호는 속도를 줄이고 침몰 현장으로 돌아가 혹시나 있을 다른 생존자들을 찾았지만 당연히 이미 무리였고 대신 희생자들을 기리는 추도식을 열었다. 그리고 뒤늦게 달려온 화물선 캘리포니아 호에게 잔해를 더 뒤져보라고 지시하고 8시 50분에 뉴욕으로 향한다.

4일 뒤 배가 뉴욕에 도착하자 항구는 사고 소식을 들으려는 수만명의 사람들로 북적였고 취재하려는 기자들도 상당히 많았지만 로스트런 선장은 생존자들의 휴식과 심리적인 안정을 위해 기자들에게 자제할 것을 요구했다.

로스트런 선장은 영웅으로 칭송받았고, 영국과 미국에서 수많은 상과 훈장을 수여받고 (태프트 대통령이 직접 수여한 ) 기사작위까지 받았다.[42] 또 타이타닉 승객들은 고마운 마음에 기부금으로 상금을 주려고 했지만 거절하고 대신 자기 선원들에게 나눠줬다. 이후 1차세계대전에 참전해 활약했다고 한다.

6 피해자들

타이타닉 호의 생존자와 사망자 비율[43]

분류탑승자생존률사망률생존자사망자
1등실, 어린이683%17%51
2등실, 어린이24100%0%240
3등실, 어린이7934%66%2752
1등실, 여성14497%3%1404
2등실, 여성9386%14%8013
3등실, 여성16546%54%7689
1등실, 남성17533%67%57118
2등실, 남성1688%92%14154
3등실, 남성46216%84%75387
승무원, 여성2387%13%203
승무원, 남성[44]88522%78%192693
어린이 총합10951%49%5653
여성 총합42574%26%316109
남성 총합169020%80%3381352
전체 총합222432%68%7101514

여자와 아이들 먼저 규칙에 의해 남자들은 생존률이 여성과 아이들보다 훨씬 낮다. 3등실의 사망률이 월등하게 높다. 일부 승무원들이 3등실 승객들의 출입을 제한한 것도 있었고 3등실 선실이 구명보트에서 가장 떨어져 있고 복잡하게 얽혀있는 구조인 데다가 출입이 제한된 곳이 많았기 때문에 이런 일이 생긴 것 거기다가 영어가 통하지 않아 언어적으로도 문제가 있었다.

남성 승무원 중 사망자가 거진 700명 가까이 되었는데 이렇게나 많은 승무원이 필요한 이유는 이들의 상당수가 화부였기 때문이었다. 배는 24시간 쉬지 않고 운항을 해야 하는데 타이타닉이 증기선인 관계로 끝없이 석탄을 채워줘야 했다.

그러나 1등실이라고 마냥 다 살아난 것은 아니다. 1등실에서는 헬렌 알리슨이라는 당시 2살짜리 여자아기가 구조되지 못했는데(구조되지 못한 이유가 엄마를 찾아서라고...) 이는 1등실과 2등실에서 구조되지 못한 유일한 어린이였다. 그녀의 남동생인 당시 생후11개월의 트레버 허드슨 알리슨은 알리슨 가에 고용된 간호사 앨리스 클레버에 의해 구조되었다. 2등실에서 어린이 구조율은 100%였다. 반면 3등실에서 구조되지 못한 어린이는 구조된 수의 거의 두배에 가까웠다(1,2등실 어린이까지 합친 총 어린이수와 비교시 절반에 가깝다.).

사망 원인의 대다수는 영하 2도의 수온으로 인한 저체온증이었다. 물 속에서는 공기 중보다 체온 저하 속도가 훨씬 더 빠르며 영상 20도의 해수에서도 저체온증으로 사망할 수 있다. 사고가 발생한 북대서양 바다는 여객선이 통행하는 바다 가운데 가장 수온이 낮은 바다로 영하의 바닷물에서는 10분 내외로 목숨을 잃는다. 남성과 2등실, 3등실 승객의 사망비율이 상대적으로 높았는데 2등실 남성 승객 중 92%가 사망했다.

타이타닉 사건의 생존자들 중 현재까지 살아있는 사람은 없다. 마지막 생존자는 밀비나 딘(Millvina Dean) 여사로 타이타닉의 최연소 승객이기도 했다. 침몰 당시 9주밖에 안 된 아기였다. 그녀는 2009년 5월 31일 세상을 떠났으며 사우샘프턴에 거주했다고 한다. 그녀와 그녀의 어머니, 오빠는 아버지의 침착한 대처로 살아남을 수 있었지만 아버지는 끝내 배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노년에는 경제적 어려움에 시달리며 타이타닉 침몰 당시 갖고 있었던 가족의 유품을 경매에 내놓기도 했다. 97년판 영화의 제작진들과 타이타닉 탐사협회가 생활비를 지원해준 적도 있다.

타이타닉의 생존자 중에는 자매함인 RMS 올림픽 호에 승무원으로 탑승했었고 이후에 RMS 브리타닉 호에도 탑승하게 되는 간호사 바이올렛 제솝(Violet Jessop)도 있었는데 올림픽에서는 영국 해군 순양함 HMS 호크와 충돌하는 사고를 겪었고, 브리타닉이 침몰할 때도 물에 빠졌다가 간신히 구조되었다. 이런 불운에도 불구하고 건강히 살다가 83세로 1971년에 사망.

타이타닉 탑승자 중에는 동양인도 있었다. 중국인 8명(10명이라는 기록도 있다. 앞서 언급되었듯 타이타닉 탑승자에 관한 기록은 자료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다.)과 호소노 마사부미라는 이름의 일본인 공무원 1명이 있었는데[45] 중국인 6명과 일본인 1명이 구조되어 생존률은 꽤 높았던 편이었다. 이 일본인은 '여자와 아이를 우선으로 구한다' 라는 원칙을 무시하고 구차하게 보트에 탑승하려 했다고 해서 귀국하고도 갖은 욕을 먹었고 다니던 직장에서도 해고되어 불운하게 생애를 마감했다.

하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그가 탑승한 보트 근처에 더 이상 여자와 어린이가 없어서 탑승한 것이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설령 주변에 여자와 어린이가 있었다고 해도 상식적으로 가만 있으면 죽을게 거의 확실시되는 상황에서 살려고 발버둥치는 걸 뭐라고 하는 것도 우습다. 만약 '당신이 죽으면 다른 사람이 살 수 있을지도 모르는 약간의 확률이 있어'라는 말에 그 다른 사람이 자신의 가족, 친지도 아닌데 순순히 그러겠다고 포기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정당방위긴급피난이 괜히 받아들여지는게 아니다. 사회적 규범이라는 것도 산 사람에게나 의미가 있는 것이고 생존욕구는 모든 상황에서 우선한다. 그런 상황 속에서도 다른 사람을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을 칭찬하는 것은 맞지만 그런 행동을 하지 못했다고 해서 비난하는것은 정당한 비판이 아니다. 호소노 본인도 보트에 탄 후 너무나 참혹하고 끔찍한 기분이었다고 일기에 썼다.

하지만 늘 그렇듯이 이후 출간된 여러 관련 서적에서도 도시전설급으로 나중에 밝혀진 이야기는 빠지고 비난을 받았는데 80년대 조선일보에서 기고를 자주 하던 이규태(1933~2006)는 타이타닉 이야기를 하거나 타이타닉 영화[46]가 TV에서 방송될 때마다 일본인의 민족성 운운하면서 호소노를 까곤 했다.

참사의 원인을 요약하자면 이와 같다.

  • 빙산 경고 메시지가 선장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않아 항로를 바꾸지 못했다. 게다가 배는 당시 전속력으로 가는 중이었다.
  • 쌍안경 열쇠도 항구에 두고 왔고 달빛도 없었는 데다가 파도까지 잔잔해서 견시들이 맨눈으로 식별하기 매우 어려웠다.
  • 게다가 빙산의 대부분은 바다 밑에 있기 때문에 알아냈을 때는 늦었다.
  • 조타수가 갑작스러운 상황에 잠깐동안 우현 전타와 좌현 전타를 헷갈려 했다.
  • 리벳 또한 불량이었다.
  • 게다가 충돌 사실을 인지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전진하는 병크를 저질렀다. [47]
  • 그나마 가장 가까웠던 배인 캘리포니안 호의 유일한 통신사는 타이타닉 호의 통신사에게 일침을 들은 후 침몰 당시 자고 있었다.
  • 3등객 승객들이 탈출에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었다. 일단 나중에는 대부분 어떻게든 나오긴 했지만 이미 상당수의 구명보트가 떠난 상태였다.
  • 구명보트의 정원이 탑승객들의 절반밖에 안 됐다.[48]
  • 정원을 초과해도 모자를 판에 많은 수의 구명보트가 꽉 채우지 않은 상태로 보내졌다.

그야말로 악조건의 연속이자 총체적 난국(...) 아 망했어요

6.1 시신 수습

며칠 후 시신 수습을 위해 매케니 베넷 호를 포함한 몇몇 배들이 출항했다. 총 328구의 시신이 바다에서 수습되었는데, 그 중 119구의 신원 확인이 불가능하거나 연고자가 없는 시신, 그리고 선원들의 시신(바다에서 사망한 선원은 자신의 고향인 바다에 장사지낸다는 전통이 있다.)은 영국 근해에서 수장했다.

그런데 시체를 놓을 공간이 모자랐기 때문에, 선원들 뿐 아니라 3등실 승객들까지 바다에 장사 지내지기도 했다(...) 돈 없어서 죽었더니 죽어서까지 이 고생 수습된 시신들은 캐나다의 핼리팩스에 묻었다.

7 사고 이후

7.1 사고의 영향

최신 과학기술로 만든 타이타닉호의 침몰은 문명의 진보에 낙관적인 희망을 갖고 있던 당시의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물론 이 낙관은 2년 후 발생한 제1차 세계대전에 의해 확실하게 확인사살된다. 타이타닉호의 희생자 수에 대해서는 다양한 설이 있지만 영국 상무성의 조사에 따르면 1,513명에 달해 현재까지도 '세계 최대의 해난사고'[49] 이다. 생존자는 711명에 불과.

이 사고를 계기로 선박의 안전성 확보를 국제 조약의 형태로 규정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나 1914년 13개 주요 해운국 회의에서 '해상에서 인명의 안전을 위한 국제 조약(International Convention for the Safety of Life at Sea, 통칭 SOLAS)' 을 채택하기에 이르렀다.[50] 당시 선박에 적용되는 안전규정이 얼마나 엉터리였냐면 지금까지도 해상법에 있어 가장 공신력을 인정받고 있는 영국법에서도 구명보트의 설치 기준은 선박의 정원이 아닌 배수톤수에 맞춰져 있었을 정도. 화물선은 몰라도 여객선에서는 구명보트가 부족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후로는 여객선들이 충분한 구명정을 싣고 다니도록 개정이 되었는데 1915년에는 SS Eastland라는 여객선이 추가된 구명보트의 무게를 버티지 못하고 전복하는(...) 사고가 나기도 했다. 또 미국에서는 일정 규모 이상의 선박에 무선 통신 장비가 의무화, 무선 통신이 널리 보급되는 계기가 되었다.

긴급 상황을 의미하는 통신용어 메이데이(mayday)가 이때 등장한 표현. "구해 달라" 는 의미의 프랑스어인 'venez m'aider' 에서 뒷부분만을 몬더그린 현상이 일어나면서 생긴 단어이다.

또 하나의 같은 의미인 통신부호 SOS도 타이타닉에서 유래됐다 하는데 실은 떡밥이다. 하지만 타이타닉호가 최초로 SOS를 쓴 선박 중 하나인 건 맞다. 항목 참조.

타이타닉은 영국의 로이드 보험사에 손해보험을 들었는데 배가 침몰하면서 로이드는 보험금으로 140만 파운드를 지급했다. 원화로 환산하면 25억원 정도인데 1912년 당시 화폐가치를 적용하면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금액이 지급된 것. 어마어마한 보험금 때문에 타이타닉 침몰 사고가 보험사기라는 음모론이 나오게 된다. 문제는 영드 닥터 후 에서는 진짜 보험사기 였지만....

7.2 침몰선 발견

1985년 미국 심해탐험가 로버트 밸러드(Robert Ballard)는 뉴펀들랜드 680킬로미터 지점에서 최초로 타이타닉호 잔해를 심해카메라로 촬영했으며, 미국과 영국 학자들의 노력으로 심해 잠수정을 이용한 선체 파편 인양 작업이 성사되었다. 수심 약 4000미터에서 발견된 두 동강난 선체는 각각 600미터 떨어져 있었으며, 약 20% 정도가 침몰 과정과 그 후의 과정에서 유실되었다. 배의 앞쪽 부분은 비교적 그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뒷쪽 부분은 선체가 여기저기 찢어져 있어서 훼손이 심했으며, 잔해들이 이리저리 흩어져 있었다. 배의 모든 굴뚝은 침몰 과정에서 유실되었고, 망루가 선교루를 향해 쓰러지며 선교를 박살내 조타실이 노출돼 있었다. 신기하게도 옷은 발견되었으나 유해는 한 구도 발견되지 않았는데, 아마 조류로 인해 흩어졌거나 바닷물의 유기물에 녹아 없어진 듯하였다.

처음에는 모두 다 기뻐했지만 누군가 시계를 보고서 "그러고 보니까 침몰했던 시각 20분 전인데"라고 하자 분위기가 싹 바뀌어 하나같이 침묵했다고 한다. 발라드는 배를 발견하고 한동안은 그 사실을 언론에 알리지 않았으며, 참사에서 죽은 사람들을 기리기 위해 추모비를 세웠다. 또 배에서 단 한 개의 유물도 건지지 않았다.

사족. 사실 타이타닉을 찾기 위해서는 미 해군의 원조가 필요했었는데, 당시 관련자들은 미 해군의 원조를 얻기 위해 미 해군이 조건으로 내건 1960년대 바다에서 감쪽같이 증발한 두 척의 미 해군 원자력 잠수함인 USS 스콜피온과 USS 쓰레셔를 찾아내야만 했다. 결국 찾아냈고 짧은 시일이나마 미 해군의 원조를 받아 타이타닉의 잔해를 찾아낸 것이다. NGC에서 관련 다큐를 방영해준 적도 있다.

1993년 9월에는 미국 조선 전문가 윌리엄 가츠키(William Gartzke)가 당시 기록을 근거로 타이타닉 호 침몰 참사를 미리 막을 수 있었던 인재(人災)로 해석하는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당시 생존자들은 배가 빙하와 충돌하는 순간 엄청나게 크게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고 순식간에 가라앉았다고 증언했는데 그 소리는 저급 강철판이 만들어낸 대재앙의 신호였다는 것이다. 윌리엄은 건져올린 선체 파편을 연구한 결과 충돌시 휘지 않고 부서지는 질이 낮은 강철판을 사용한 것으로 판명되었으며 고급 강철판을 사용했다면 침몰을 막았거나 침몰시간이 지연되어 인명피해를 줄일 수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사실 타이타닉은 당시 사용되던 최고급 강철판을 사용했다. 단지, 당시 제조기술이 너무 낮아 최고급 강철판 역시 황의 함유량이 너무 많았고 덕분에 낮은 온도에선 휘어지기보단 부숴져버리게 된 것이다. 당시 한국어판 뉴턴에 이와 관련된 기사가 실렸다.

현재 배의 대부분이 부드러운 뻘 바닥에 파묻히고 있는 중이고 얼마 안가 완전히 묻힐 것이라고 한다.

출처: 위키백과(위키백과의 항목과 상당히 유사한 부분이 많은데 이는 몇몇 사용자들이 두 개 다 편집했기 때문이다. 돌고 도는 역사와 위키)

7.3 영웅들

승객들을 구하거나, 사회적 지위가 높아 충분히 구명정에 타려고 하면 탈 수 있었지만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하며, 품위 있게 생을 마감한 영웅들도 있었다. 이들 중 일부는 영화 타이타닉에도 등장한다. 타이타닉(영화) 문서들의 실존인물 내용을 약간 참고할 것.

  • 에드워드 존 스미스 선장은 구명보트에 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배에 남았으며 그가 마지막으로 목격된 이후에 무엇을 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영화에 묘사된 것처럼 조타실 문을 잠그고 침수될 때까지 나오지 않았다는 설과 다른 선원들과 함께 승객들의 탈출을 돕다 물에 휩쓸려 가라앉았다는 설 등 여러 가지의 설이 있다. 그는 마지막으로 목격되기 직전까지 구조에 힘썼다고 하며, 끝까지 배에 남았기에 모범적인 선장의 사례 중 하나가 되었다. 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고선장 , 그리고 코스타 콩코르디아 호 좌초사고의 선장 스케티노와 여러모로 대비되는 분이다. 100년 전보다 퇴보하였다

참고로 스미스 선장은 낮은 계층 출신이었으나 그 기품과 카리스마 덕분에 화이트 스타 라인의 고객 중에도 오로지 스미스 선장의 배만을 타는 사람도 많았다고 한다. 그는 원래 1911년에 은퇴할 예정이었지만 회사측의 설득으로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출항하기로 한 것이 바로 타이타닉호의 첫 항해였다. 절반 가량의 항해사 또한 순직했다.

Captain_Edward_Smith_statue%2C_Beacon_Park%2C_Lichfield_-_geograph.org.uk_-_403721.jpg
< 스미스 선장을 기리는 동상. 동상 건립 비용은 전액 기부에 의해 충당되었으며, 그가 마지막에 남긴 말인 '영국인답게 행동하라(Be British)' 란 문구를 새겼다고 한다.> [51]
20세기 초까지 생존한 인물이었던 탓에, 짧으나마 생전 모습이 기록된 동영상이 존재한다. 사망 1년 전, 타이타닉의 자매선 RMS 올림픽의 선장으로 재직 중 찍힌 영상으로, 저위도 지역 혹은 더운 기후에서 근무할 때라 흰색 하정복을 입고 있다.
  • 배의 설계자인 토머스 앤드루스는 승객들의 구명보트 탑선과 뜰 만한 물건들을 던지는 것을 돕다가 1등실 흡연실에 조용히 들어가서 배와 함께 최후를 맞이했다. 이때 흡연실에 고귀하게 남기로 한 사람은 앤드루스 뿐만이 아니라 다른 (1등실) 승객들도 있었다. 어떤 승객들은 카드 게임을 계속했으며 당대 저명한 언론인이었던 윌리엄 T. 스티드는 조용히 독서를 하고 있었다. 참고로 윌리엄 스티드는 과거에 헤이그 특사를 도와준 유일한 외국인이었다. 이들 또한 모두 가라앉는 배에서 품위있는 최후를 맞았다.
  • 기관장인 조지프 G. 벨을 포함한 많은 기관사/기관부들과 화부들이 배가 완전히 침몰하기 2분 전, 그러니까 배의 불이 완전히 꺼질 때까지 자리를 계속 지키면서 배의 전기를 작동시키는 작업을 하며 배와 함께 최후를 맞이했다. 상선사관들 중 항해사들과 달리 기관사들은 전원 순직했다.[52]
  • 월리스 하틀리가 지휘를 맡은 8명의 악단은 배가 침몰하기 불과 10분 전까지 곡을 연주하고 서로에게 행운을 빈 후 헤어진 뒤의 연주는 이들의 생애 마지막 연주가 되고 말았다. 이후 월리스 하틀리의 시신과 함께 바이올린이 발견되었으나, 시신을 인양한 이후와 타이타닉 잔해 및 기록의 최초 발견 이후에도 언급이 없었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타이타닉과 함께 심해에 가라앉아 있을 것이라는 추측을 했으나, 2006년 영국에서 하틀리의 마지막 바이올린이 나타나면서 추측이 깨지게 되었다. 이후 7년간 검증하면서 진품이라고 확인되었으며, 2013년 10월 19일 영국에서 진행된 경매에서 90만 파운드(약 15억 5,000만원)에 판매되었다.[53] 이 부분은 2015년 6월 7일자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다루어졌다.
  • 토머스 바일스 신부는 구명보트 승선을 거절하고 사람들의 구명보트 승선을 도왔고 구명보트를 타지 못하고 죽을 운명만을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고해성사를 주고 갑판 위에서 많은 사람들과 함께 미사를 드리다가 숨을 거두었다.
  • 추리소설가 잭 푸트렐도 이 배에 탔다가 36세의 나이로 요절했으며, 탐정 벤 두젠 시리즈를 내며 인기를 끌던 터,미발표된 원고 6편을 가지고 배에 탔다가 원고도 영원히 사라지고 만다.
  • 백만장자인 철강업자 벤저민 구겐하임은 자신은 살 수 없음을 직감하고 현지처와 하녀를 보트에 태우고 선원의 구명조끼를 거절하고 턱시도로 갈아입은 뒤 자신을 따르는 하인과 함께 "우리는 가장 어울리는 복장을 입고 신사답게 갈 것이다" 현지처를 만드는게 신사적인지는 둘째치고라고.[54] 하며 마지막까지 시가와 브랜디를 즐기며 배와 함께 최후를 맞이했고, 그의 딸 페기 구겐하임이 여기서 물려받은 유산으로 콜렉션한 예술 작품들이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 설립의 초석이 되었다.
  • 뉴욕에서 유명한 메이시 백화점을 소유하고 있는 노부부 스트라우스 부부는 금슬이 좋은 노부부였다. 이지도르 스트라우스가 구명보트 승선을 거절하자 그의 부인인 아이다 스트라우스도 선원의 구명보트 승선 제안을 거절한 다음 하녀 엘렌 버드에게 모피 코트를 건네주고 자기 대신 구명보트에 태운 뒤 남편과 함께 같이 운명을 맞았다. 영화에서는 물이 들어오는 선실 침대에 둘이 함께 껴안고 누워있는 장면으로 등장한다.

이지도르 스트라우스가 승선을 거부한 건 노블레스 오블리주 때문이었다. 주변에 있던 지인이 노부부가 함께 승선하는 것에 대해서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을 것이기에 함께 승선하라고 권유했지만 이시도르는 "나는 다른 이가 누리지 못하는 특권을 누리고 싶지 않네" 라고 말하며 승선을 거부했다.

참고로 이때는 아직 배의 운명을 깨닫지 못하고 구명보트에 타기보다 배에 남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을 때였지만 아이다 스트라우스는 엘렌에게 모피 코트를 건네며 "나에게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을 테니까" 라고 말했으므로 상황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 확실하다.

이 두분의 내용은 2016년 3월 13일자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도 소개되었다.

  • 두 명의 통신사들도 선장이 이만 물러나가도 좋다고 한 후에도 끝까지 남아 전파를 보냈다. 이 중 해럴드 브리드는 살아남았지만 잭 필립스는 순직했다.
  • 남편이 금광을 발견해 하루아침에 떼부자가 된 1등실 승객 마가렛 몰리 브라운은 구명보트에서 가장 앞장서서 노를 저었으며 생존자를 구조하자고 요청했으나 거절당했지만 보트를 맡고 있던 조타수 히친스(충돌 당시 배를 맡고 있기도 했다)의 기를 죽여놓았다. 몰리 브라운의 삶은 이후 1964년 사랑은 비를 타고의 데비 레이놀즈가 주연을 맡아 영화화되기도 했다.
  • 3등실 승무원 존 에드워드 허트는 배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길을 잃어 헤메는 3등실 승객들을 배 밖으로 안내했다.
  • 타이타닉은 당시 다른 여객선들과 마찬가지로 우편 운반선이기도 했으며, 등기우편물 200개를 포함해 3364개의 우편행낭이 적재돼어 있었다. 이 우편행낭의 처리를 위해 미국 우편원 3명, 영국 우편원 2명이 탑승했었으며, 타이타닉의 우편원들은 모두 우편원 생활 15년 이상 된 베테랑이었다. 이들은 빙산 충돌 당시 미국 우편원 오스카 스콧 우디의 생일 파티를 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들은 배가 침수되기 시작하자 곧장 우편행낭을 쌓아둔 방으로 내달려 그곳에서 우편행낭들을 꺼내 갑판 위로 옮기기 시작했고, 물이 발목 위로 점점 차올라 위험이 고조됐지만 이들은 아랑곳하지 않았고 다른 선원들이 부질없는 짓이라 만류해도 묵묵히 일을 계속한 뒤 가라앉는 배에서 최후를 맞았다. 생일이 사망일이 된 우디의 시신에서 현장에서 목숨을 바쳤음을 보여주는 유품인 우편물의 행선지를 표시해 주는 전표가 발견됐었으며 780만통의 편지들 또한 수장되었다.
  • 로테스 백작부인은 젊은 귀부인으로 미모로 명성이 높았다고 한다. 침몰 당시 여성이고 고귀한 신분에도 불구하고 노를 열심히 저었고 이 동안 선원들과 3등실 승객들에게도 친절하게 대했으며 구조된 후에도 음식과 담요를 나눠주는 등 가난한 승객들을 보살펴 모든 이들의 모범이 되었다고 한다.
  • 생존하지 못한 네명의 1등실 여성 승객들 중 한 명인 에디스 에반스는 1등실의 승객으로 마지막 구명보트가 내려질때 자신도 탈 수 있었지만 가족이 있는 여성에게 양보하고 자신은 배에 남아 생을 마감했다.

이 밖에 수많은 사람들이 배에 끝까지 남아 운명을 함께하거나 구명보트에 탑승해 열심히 생존자들을 도왔다.

8 부록: 타이타닉 자매선들의 운명

타이타닉의 자매함 올림픽호와 브리타닉호 역시 뒤끝이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브리타닉호는 원래 타이타닉호보다도 화려하게 만들어질 예정이었지만 건조되자마자(위에도 있듯 1914년 2월 26일 진수) 1차대전에서 병원선으로 징발되어 활동하던 중 1916년 독일 해군이 설치한 기뢰(추측)를 건드려 침몰하였다. 구명보트를 제대로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대부분은 살 수 있었지만 하필이면 스크루가 계속 돌아가고 있었기 때문에 구명보트 두 대가 빨려들어가 30명 가까이가 사망했다. 이때 바다에 뛰어들어 운좋게 살아남은 생존자 중 하나는 간호사 바이올렛 제솝인데 이전에 타이타닉 호에도 승무원으로 탑승해 살아남았다. 운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알 수가 없다

이 바이올렛 제솝은 올림픽호에도 승무원으로 일한 바가 있는데, 그때는 올림픽호가 방호순양함인 HMS Hawke를 들이받았다. 조사결과 올림픽호의 크고 아름다운 배수량이 수압차를 만들어서 군함인 Hawke가 끌려갔다고...

이 올림픽호는 후에 병력/물자 수송선으로 징발되어 1차대전에 참전하는데 독일의 유보트(SM U-103)를 선체로 들이받는(!) 충각 전술로 격침시키는 희한한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순양함을 들이받은 건 이걸 위한 연습이었나(1차세계대전에서의 상선이 군함을 침몰시켜버린 유일한 기록이다). 전후 올림픽호는 다시 호화 여객선으로 돌아왔으나 항공기의 발달로 호화 여객선의 시대는 서서히 저물어가고 있었다. 특히 올림픽호는 1차 세계대전을 전후해서 호화 여객선의 주요 기관이 터빈기관으로 바뀌고 있는 가운데 구식 왕복엔진을 주 동력원으로 한 탓에 속력이 느렸고 배 또한 1910년 건조 당시부터 끊임없는 사고로 인한 선체 노후화가 있어 결국 1934년에 퇴역, 35년에 고철로 처리되었다.

원래 항목에는 귀부인의저택이 되었다가 2000년에 크루즈 선사로 유명한 로열 캐리비안 사가 구매하여 자사의 크루즈선인 밀레니엄호의 부속 레스토랑으로 활용하고 있다는 내용이 있는데 이는 배 자체로서의 올림픽이 아니라 1934년에 배가 폐함 처분될 때 철거된 올림픽 호의 인테리어 파트, 특히 부설 레스토랑의 목제 내벽을 가리키는 것[55]이 아니면 1969년에 퇴역해서 장기간 수상 레스토랑으로 사용되다가 현재는 아일랜드에서 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는 올림픽 호의 1, 2등실 승객용 셔틀 선박인 SS 노매딕의 이야기가 복합된 착오라고 보인다. 수정바람.

8.1 타이타닉과 관한 도시전설

거의 모든 대형 사건들이 그렇듯 타이타닉도 몇 가지 괴담말도 안 되는 음모론이 존재한다. 예를 들자면...

가장 유명한 괴담 중 하나는 불행하게 생을 마감한 이집트 공주미라가 발견되었는데 이상하게도 그걸 소유하거나 관련된 사람들이 차례로 사망해나가다가 어느 고고학자에 의해서 어느 여객선에 실려갔는데 그 여객선이 바로 타이타닉이라는 것.


그밖에 선박 번호 390904를 거울로 뒤집어 보면 'NOPOPE' 가 되며 이는 아일랜드 선박 노동자들이 가톨릭에 대한 반감으로 꾸민 짓이라는 음모론도 있고[56] 애초부터 선박사가 보험사기로 꾸민 짓이라는 음모론도 있다. 그리고 여기서도 프리메이슨 음모론이 빠질 리가 없다(...)

물론 괴담과 음모론이 다 그렇듯이 근거는 없다. 하지만 보험사기 음모론, 즉 타이타닉호가 올림픽호랑 바꿔치기했다는 음모론은 그나마 이들 중에서는 설득력이 있다.

자세한 건 신비한 TV 서프라이즈를 참조.

8.2 타이타닉 2의 건조

2013년 2월 27일자 이후로 언론에 보도된 내용에 따르면 타이타닉 2가 만들어져서 항해할 예정이라고 한다. 기사 내용. 호주의 억만장자인 클라이브 파머가 소유한 블루스타 해운에서 중국 국영조선회사인 창장조선항운그룹에게 타이타닉2의 건조를 맡겨 중국의 진링조선소에서 건조할 예정이며 배는 2016년까지 완성되어 예전에 타이타닉이 항해했던 사우스햄프턴-뉴욕 노선을 운항할 예정이라고 한다. 혹시나 이게 블루스타 해운에서 타이타닉하고 외관만 같은 배를 만들 뿐인데 괜히 언론에서 타이타닉2라고 설레발치는 거 아니냐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지만 위에 링크된 기사에 포함된 동영상의 54초 부분의 뒤를 잘 보면 정중앙에 블루스타 라인이라는 회사 이름과 함께 좌우 양쪽 사이드에 TITANIC II라고 선명히 적힌 글씨를 볼 수 있다.이거 이거 사람이 무서워서 타겠나

9 각종 문화/매체에서

사실 이러한 선박 사고는 예나 지금이나 알음알음 터지고 있지만 타이타닉 침몰 사건이 유독 많은 주목을 받는 이유는 그 함선과 사고 경위 자체의 특수성에서 기인한다. 함선 자체도 당시 기준 최첨단+최고급+최대급 함선으로 대중의 관심을 받고 있던 함선이였는데 그 관심이 식기도 전인 처녀항해에 사고가 거하게 터진 데다가 규모가 큰 만큼 사건 규모도 큰지라 세간에 널리 알려지면서 많은 인지도를 확보한 까닭이 크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이 사건이 문화/기술적으로 비약적으로 발전하던 당시 20세기 초의 서구 사회(특히 대영제국)에 빅엿을 먹인 것도 있고 항해와 침몰 과정에서 생긴 일들이 상당히 드라마틱하기 때문에 역사상 가장 유명한 침몰선이 되었고 각종 문화와 매체에 등장하거나 오마쥬되어왔다.

타이타닉이라는 것 자체에 관심을 두고 연구하거나 취미로 두는 사람들도 있다.

9.1 영상화

아무래도 이 사고가 너무나 유명해서 그런지 영상화도 많이 되었다.

카메론의 타이타닉이 제작되기 전 가장 유명했던 영화는 '타이타닉호의 비극(The Night to Remember(1958))' 이라는 영화로 타이타닉에 관심 있다면 찾아볼 것. 제목은 월터 로드가 타이타닉에 관해서 쓴 동명의 책(논픽션)에서 따왔다. 케네스 모어가 2등 항해사 라이톨러(주인공) 역으로 등장한다. 오래된 영화지만 연출이 뛰어나며 1997년판 타이타닉도 이 영화에서 오마주한 것이 많다. 예를 들자면 토머스 앤드루스가 흡연실에서 시계를 만지작거리며 최후를 맞이한다던가 악단이 월리스 하틀리를 중심으로 하나둘씩 돌아와서 끝까지 연주한다던가. 사실 두 영화 다 실제 사건을 기반으로 한 영화인지라 구성 자체가 동일한 것은 어쩔 수 없지만 그것을 풀어나가는 연출 부분에서 비슷한 부분이 많다.

가장 먼저 나온 영화는 1912년에 배가 침몰한 후 한 달도 되지 않아 생존자이자 1등실 승객이었던 여배우 도로시 깁슨이 만든 '타이타닉에서 구출되다(Saved from Titanic)' 이다. 이때 사건 당시 입었던 옷을 그대로 입고 출연했다고. 안타깝게도 필름들이 훼손되었고 어느날 마지막 필름마저 화재로 유실되어 지금은 찾아볼 수 없다.

또 1953년에 나온 영화도 있는데 멜로드라마에 가깝다.

게다가 1943년에 나치 프로파간다(...)로 나온 영화도 있다! 주인공이 1등 항해사인 독일인(물론 영화상 설정)으로 나오며 연출은 좋지만 프로파간다 영화이기 때문에 왜곡되거나 편파적으로 나오는 부분이 많다.

이 영화를 찍은 감독은 당대 독일에서 성공한 감독이었는데 이 영화를 찍은 후의 삶은 순탄치 않았다. 파울 요제프 괴벨스에게는 이 영화와 감독이 탐탁치 않았고 이후 미운털이 찍힌 감독은 감옥에 갇힌 후 자살을 가장한 처형을 당하고 만다. 재미있는 사실은 이 영화는 훗날 소련에서도 방영됐다(!) 서구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어서라고. 또 한 가지 사실은 이 배의 배경이 아르코나 호(SS Cap Arcona)에서 찍어졌는데 아이러니하게도 후에 죄수선으로 쓰였다가 소련 잠수함에 격침당하여 무려 5000명이나 죽는 해양 참사로 기록된다. 타이타닉보다 무려 4배나 더 많이 죽었다. 흠좀무. 이 영화에서도 다른 타이타닉 관련 영화들과 마찬가지로 카메론이 따온 연출이 많다. 1958년도판 영화도 이 영화에서 나온 장면을 일부 첨부하였다.

그 밖에 1979년판 영화도 있고 기타 등등...

TV드라마로도 나왔다. 1996년도 2부작 드라마에서는 뜨기 전의 캐서린 제타존스가 나오기도 했고 2012년에는 침몰 100주년으로 4부작 드라마가 방영되기도 했다. 독일에서 나온 1984년도 TV영화도 있는 편. 최근 2013년 여름에 타이타닉의 건조과정을 소재로 한 '타이타닉 블러드 앤 스틸' 이 방영되었다.

타이타닉 2라는 괴작도 나왔지만 이건 카메론 감독이 만든 영화의 정식 후속작이 아니고 어사일럼 영화사가 만든 것. 할리우드에서 히트친 영화들을 속전 속결로 후다다닥 대충 베껴(?) 동인지 목버스터 영화로 만드는 곳이다. 예)퍼시픽 림→애틀랜틱 림, 트랜스포머→트랜스모퍼, 나는 전설이다→나는 오메가다, 드래곤볼 에볼루션드래곤 퀘스트(게임 원작 절대 아님!!), 스피드 레이서→스트리트 레이서, 데스 레이스→데스 레이, 파라노멀 액티비티→파라노멀 엔티티, 터미네이터 미래전쟁의 시작→터미네이터스, 타이타닉→타이타닉2. 이름을 살짝 바꾸는 게 아니라 2편이라고 쓰는 건 처음인데 아마 타이타닉은 영화 타이틀로서의 고유명사가 아니라 배의 이름이니까 상관없다고 둘러대는 데 성공한 것 같다. 참고로 이 타이타닉 2는 엄청난 저예산답게 CG나 연기들이 역시나 괴작이다.

그리고 타이타닉 3D 재개봉에 편승했는지 2012년 4월 25일 다시 국내 개봉했다. # 충격과 공포.

9.2 타이타닉(영화)

제임스 카메론 감독이 1997년이 제작한 영화 타이타닉은 역대 같은 소재를 다룬 영화들 중 가장 충실한 고증과 스케일 그리고 웅장함을 자랑한다. 멕시코에서 실물과 거의 흡사한 세트(!)를 만들었는데 이를 위해 건조를 담당한 회사였던 할랜드 앤 울프(Harland & Wolff)에 의뢰하여 실제 타이타닉 호의 설계도를 입수해서 만들었다(!!) 참고로 이 설계도는 2차대전으로 행방불명되었다가 극적으로 발견된 것(!!!) 거기에 타이타닉 호의 연회장과 식당을 장식했던 융단의 제작을 맡았던 업체 BMK Stoddard와(!!!!) 실제 타이타닉 호의 대빗(보트/닻을 달아 올리는 기둥)의 제작을 맡은 웰랜 대빗 컴패니(Wellan Davit Company)로 부터 기술 지원을 받아(!!!!!) 사실적으로 만들 수 있었다. 이 감독, 괴물이다 자세한 것은 해당 항목을 참조.

9.3 기타 이것 저것

뮤지컬도 있다. 꽤 호평을 받은 편.

또한 애니메이션 영화도 있다! 이탈리아에서 1999년에 만든 <타이타닉의 전설>이라는 애니메이션인데 타이타닉이 사실은 침몰하지 않았으며 뭐? 거대 문어가 타이타닉을 도와 사람들도 살고 배도 살고 선장도 살았다는 역사적 왜곡까지 집어넣고 있다. 거기에 난데없이 고래 보호 캠페인을 강조하자는 건지? Nostalgia Critic도 사정 없이 깠다.인용 오류: <ref></code> 태그를 닫는 <code></ref> 태그가 없습니다</ref> NC가 절규한다. 안돼애애애애애애

그 외에도 2000년에 이탈리아에서 <타이타닉 : 전설은 계속된다>라는 애니메이션을 만들었다. NC는 2000년에 이 영화를 먼저 리뷰했다. 영화를 먼저 리뷰했기 때문에 앞의 물건보다는 조금 나으나[57] 랩을 하는 개(...)가 나오고 뱅크샷이 빈번하게 사용되는 등[58] 여기도 만만찮게 미쳐있다. 이 영화는 2012년 6월 기준으로 드디어 IMDB에서 평점 1.4로 최악의 영화 1위를 찍었다.

  • 고스트 버스터즈 2에선 타이타닉이 무사히 미국으로 온다. 물론 유령선으로... 밤중에 갑자기 나타나서 미국 항구에 도달하여 유령들이 가득 내려오자 사람들이 건물 안에서 어이없듯이 쳐다보는 것으로 잠깐 나온다[59]. 그리고 뉴욕시경에게 타이타닉이 77년만에 미국에 도착했다고 연락한다.

하지만 더 이상 안나오는것을 보면 이미 잡은것으로 추정된다

  • 미국의 해양 모험 소설가 클라이브 커슬러는 1970년대에 "타이타닉을 인양하라" 라는 소설을 썼다. 미국의 전략미사일 방위계획에 꼭 필요한 '비자니움' 이라는 광석이 소련 영토에서만 채굴되는 것이라 구할 길이 없었는데 알고 보니 타이타닉 호의 화물 중에 다량의 비자니움이 있더라... 는 설정으로 미국은 타이타닉을 인양하려고 하고 소련은 방해하는 해양 첩보전을 다뤘다. 영화화도 되었는데 결말에서는 인양에 성공하여 위에 고스트 버스터즈 2의 엔딩처럼 타이타닉을 무사히 뉴욕 항에 입항시키는 장면으로 끝난다. 이 소설이 나올 때만 해도 타이타닉이 쪼개지지 않았다고 알고 있었으니 가능했던 장면. 그리고 망했다(...) 전체 영상
  • TITENIC이라는 게임도 존재한다. 물론 공식 게임화라고 믿으면 골룸. 패미컴의 해적판 게임이다. 이 게임의 제작진 중 몇몇은 마스터 파이터 2, 소마리를 제작한 해적판 게임 제작진으로 추정된다. 타이틀까지도 원작 포스터를 그대로 베껴 그렸는데 정작 잭과 로즈가 갑판에서 격투활극을 찍는 해괴한 내용의 액션 게임이 되어버렸다.[60] 또한 이 게임을 제작한 제작진들은 이 게임의 포맷을 복붙해서 해리 포터 게임이랍시고 역시 패미컴 해적판 게임을 내놓았다.
  • Titanic : Adventure Out of Time이라는 어드벤쳐 게임도 있다. Cyberflix사에서 제작했으며 1996년에 출시되었다. 주인공은 영국의 비밀요원으로서 타이타닉에 있었던 물건들[61]을 회수하는 임무를 맡았지만 실패하고 몸만 살아서 나왔다. 이후 제2차 세계대전 중 집이 폭격을 받자 타임 슬립하여 1912년 4월 14일 오후 9시 30분으로 되돌아가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들 세 가지를 입수하면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러시아 혁명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작 제대로 막으려면 1870년으로 타임슬립을 해야하는 건 함정 국내에서 PC게임으로 정발되었지만 영어판으로만 나왔다.
타이타닉의 재현도는 상당히 좋았으며 어떠한 물건을 손에 넣고 탈출하냐에 따라 엔딩이 갈리는 멀티 엔딩을 채택했다(총 9개).
  • 술자리 게임으로 타이타닉이란 벌칙게임이 있다. 냄비에 맥주를 채워 바다를 만든 후 접시를 띄워 그 안에 소주를 돌아가며 붓는데 마지막으로 접시에 소주를 부어 가라앉힌 사람이 냄비의 소맥을 전부 마시는 것. 당연히 큰일날 짓이므로 함부로 먹이진 말자.
  • 뮤지컬 헤드윅의 본격적인 공연 장소는 리버뷰 호텔로 이 호텔은 실제 타이타닉 호의 생존자들이 묵었던 것으로 유명하다. 때문에 뮤지컬 내용 중 타이타닉의 유령들(??)에게 윽박지르는 헤드윅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영화는 뮤지컬과 배경이 다르기 때문에 나오지 않는다.

가끔 양덕계 커뮤니티에서 자기가 지지하던 히로인이 끝내 선택받지 못하면 타이타닉처럼 침몰했다고 표현하는 사람이 있으나 자주 쓰는 표현은 아닌 편. 유일한 예외로 S.S.Kuroneko너무나도 처참했던 그녀의 최후를 기리기 위해서 반공식적으로 채택된 그녀와 그녀의 지지자들을 나타내는 말이다.

스쿨홀릭<뫼비우스의 띠>에서 쭈니군이 타이타닉 드립을 치다가 신쌞한테 걸려 뒤로 나간다 근데 뒤로 나가자마자 포세이돈호드립을 친다!!!!!!!!!!!!!

  • 콜 오브 후아레즈: 건슬링어에서도 짤막하게 언급이 되는데,[62] 달튼 형제(밥, 그랫, 에멧[63])를 잡기위해 둘이 숨어든 늪지대에 좌초된 증기선 [64][65]에 들어가지만 형제의 함정에 걸려 불타는 증기선속에 갇혀 탈출하던중 언급된다. 모두들 거대한 배라고 감탄하고 혹시 침몰하지 않을까 걱정하지만, 잭만이 냉소적으로 "그 배는 침몰할리 없어 ㅋ" 같은식으로 말하는데 1년후... 여기서 이야기가 막혀서 뻘쭘해진 사이러스도 포인트

타이타닉의 침몰일은 공교롭게도 김일성의 출생일과 일치하는데, 북한에서는 이를 자본주의가 침몰하고 위대한 령도자가 탄생한 날로 결부짓기도 했다.고인드립

이 사건은 세계의 보험역사에도 의미가 있는데, 선박사건 최초(?)로 보험에 가입한 생존자와 사망자에게 금액을 보상한 사례이기 때문#1#2이 사건의 수해자 당시 보상금액만 해도 엄청났을 것이란 추측도 가능하다.흠좀무

Voyage_of_the_Damned.jpg

닥터후 시리즈의 크리스마스 이브 스페셜로 방송된 '저주받은 자들의 항해'편에서 우주함선으로 등장한다. 지구에서 가장 유명한 라서 저런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크리스마스 날 운치 있는 여행을 하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하지만 배 이름이 사망 플래그 선주가 침몰시키고자 계획한 배였기 때문에[66] 일부러 역장을 내려 운석에 직격당해버렸고 거기에 천사 로봇의 영향으로 승객들 대부분이 몰살당한 상태로 결국 지구로 낙하하기 시작한다. 만약 지구에 낙하하면 초대규모 핵융합 폭발로 인해 광대한 영역이 생명체가 살 수 없는 환경이 된다. 결국 닥터의 활약으로 버킹엄 궁전 상공을 크게 가로지르며 불시착. 지구에 대피령을 내리자 애완견을 데리고 도망치시는 엘리자베스 2세님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사족으로 마지막으로 살아있던 생존자인 밀비나 딘 여사는 이 에피소드를 고인드립이라며 깠다.
여러모로 유명한 배다보니 국내의 대형할인매장 완구코너에서 타이타닉 프라모델은 쉽게 볼 수 있다. 국내 기업인 아카데미과학서 내놓은 킷인데, 전세계에서 타이타닉 프라모델을 꾸준히 내놓으면서 퀼리티도 준수한게 여기뿐이라[67] 현재도 해외에 많이 수출중인 효자상품. 심지어 영화 타이타닉의 대히트 바람을 타고 수출을 많이한 영향으로 IMF를 흑자로 이겨낸 전설이 있다.
  1. 정식 외래어표기법에 따르면 해당 선박은 타이닉호가 맞다. 선박의 선적 및 소유 기업의 국적이 영국이므로, 영국식 발음 타이타닉이 원지음을 고려한다는 원칙에 따라 맞다.덧붙이자면 배가 아닌 단어 titanic은 타이닉으로 표기하여야 한다. 단, 실정상 이하의 모든 내용은 타이닉으로 서술되어 있다.
  2. Royal Mail Steamer(왕립 우편 기선). 당시에는 여객선의 우편 배송이 상당히 흔했다. 사실 배와 열차 말고는 국제운송수단이 딱히 없는 시절이었고.
  3. 배의 이름은 그리스 신화의 거신족 티탄에서 따온 명칭이다. 영어 단어로써 '거대하다'를 뜻하기도 한다.
  4. 선박의 등록톤수. 1GRT = 100ft³ = 2.83168466m³
  5. 길이와 폭, 속도의 미터 단위 표기는 피트 단위 및 마일 단위의 환산이기 때문에 인용 매체에 따라 소수점 단위의 차이가 존재함.
  6. 증기선 시절에는 굴뚝이 많으면 더 힘세고 있어보이기에 이런 디자인을 주로 사용했었다. 차가 더 있어보이게 배기구를 일부러 2개 다는 경우와 비슷하다.
  7. 현대의 비슷한 배수량의 선박들이 보통 메인엔진 1기, 보조엔진 1기로도 타이타닉과 비슷한 속도를 낸다는 점을 떠올리며 20세기 내연기관의 발달에 감탄하도록 하자. 사실 타이타닉호가 처녀항해를 떠난 지 26년 후(1936년)에 경쟁회사인 큐라드 라인에서 발주해서 처녀항해를 한 RMS 퀸 메리(RMS Queen Mary)호만 해도 160,000shp 마력이다.
  8. Blue Riband, 대서양 정기 여객선들의 속도경쟁 정점으로 최단시간내에 대서양을 횡단하는 여객선에게 부여하는 상.
  9. 타이타닉은 단일 선박이 아니라 1번선 올림픽을 네임십으로 하는 올림픽 급의 2번함이다. 3번선이 바로 브리타닉.
  10. 배에서 선교나 마스트 등에서 직접 눈으로 배 주변을 감시하고 특이사항 등을 살피고 보고하는 당직 근무의 일종 혹은 그 당직을 서고 있는 인원.
  11. 총 2명으로, 화이트 스타 직원이 아니라 마르코니 사 파견 직원들이었다.
  12. 생존자 중 이 배의 거주 환경이 자신들이 살던 집보다 훨씬 나았다는 증언을 한 3등실 승객도 있다.
  13. 주인장을 포함해서 이탈리아인프랑스인이 대부분이었다. 호화 여객선답게 영국 요리 따위는 취급 안 하겠다는 화이트 스타의 의지 단 두 명밖에 살아남지 못했다.
  14. 8명. 전부 끝까지 연주하다가 사망.
  15. 배의 설계자인 토머스 앤드루스도 포함되어 있었으며 승객이면서도 선원으로 취급받았다. 생존자는 없었다.
  16. 타이타닉 호의 높이는 배 밑바닥으로부터 굴뚝 위까지 52.2m이고 빙산은 수면 위로 1/10만 모습을 나타내기 때문에 수면 아래에 충돌할 위험이 높다. 바로 앞의 문단을 통해 링크된 '빙산의 일각'이란 말도 이러한 사실에서 유래된 것.
  17. '6th Officer로 6등 항해사라고 번역한 경우가 대부분이나 최선임자인 Chief Officer의 국내 계급 명칭이 1등 항해사이므로 영문보다 한 등급씩 밀리게 된다'라며 7등 항해사로 번역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명백히 오역이다, 보통은 Chief Officer나 first Officer 모두 1등 항해사를 지칭하는 말이며 이후로 second, third officer로 이어진다, 그러므로 한 등급씩 밀려서 해석하는 것은 틀린 말이다. 다만, 타이타닉과 같은 대형선박에 많은 업무가 있는 특수선종의 경우 업무부담을 줄이기 위해 Chief Officer와 first Officer가 같이 있는 경우가 있는데 이럴 경우는 수석 항해사와 일등 항해사로 구분하지 마찬가지로 한 등급씩 밀리는 경우는 없다.
  18. 엄밀히 말하면 명령은 우현전타인 'hard starboard'였는데 당시에 주류를 이루던 범선은 왼쪽으로 가려면 오른쪽으로 타륜을 돌려야 했다, 이런 틸러 명령법에 따라 머독은 우현전타를 명한 것이다, 즉 당시의 'hard starboard'는 좌현으로 배를 최대한 꺾으라는 말이 된다, 문제는 이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타이타닉은 당시로서는 신식인 증기선으로 조타뱡항과 배의 진행방향이 일치했다, 다시말해 타륜을 회전하려는 방향으로 돌리면 되는 것, 그래서 타이타닉과 같은 증기선은 좌현으로 방향을 돌리려면 머독의 우현전타 명령대로 타를 오른쪽으로 돌릴게 아니라 왼쪽으로 돌려야 배가 좌현으로 갔다, 이런 변화는 키(rudder;방향타)를 기준으로 했던 타륜과 명령법이 오늘 날 자동차처럼 선체의 진행방향(course)을 기준으로 변했기 때문이다, 영화 '타이타닉'에서도 이런 점들을 감안해 당시 상황을 표현했다, 최근들어 당시에 조타수가 이런 조타법의 과도기에 따른 혼란으로 조타방향을 잘못 조작해서 빙산과 충돌했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지만 진위는 확인되지 않았다, 참고 링크 '배에는 좌·우회전 표현이 없다?' [1]
  19. 마찬가지로 명령은 좌현전타인 'hard port'
  20. 2등항해사 찰스 라이툴러의 손녀의 증언에 따르면 선주의 지시로 항해를 무리하게 재개하여 침몰속도가 빨라졌다고 한다.[2] 대략 충돌로부터 10분 후의 시점으로부터 5분간인데 이 때 약 370만리터의 해수가 유입되었다. 비교적 최근의 잔해 탐사에서 타이타닉 우현의 파공 크기가 생각보다 훨씬 작았다고 밝혀진 적도 있는데, 이를 감안하면 만일 항해를 재개하지 않았다면 침몰속도를 현저히 늦출 수 있었다는 그녀의 증언도 어느정도 설득력이 있다. 단적인 예로 자동차의 창문을 열고 가만히 있을때, 그리고 주행중일때 유입되는 바람 세기의 차이를 생각해보자.
  21. 배와 빙산은 최대한 10초간 정도밖에 접촉하고 있지 않았던 것이고 선체의 흠집은 겨우 수 인치 정도로 손상폭을 합계해도 1m란 것이 후에 해저 탐사에서 밝혀졌다.
  22. 이 주장은 찰스 라이톨러의 손녀의 증언에서 나왔다.
  23. 이 때 이스메이가 '첫 항해에 기록을 세운다면 언론에 1면으로 실리겠지요.'라며 자신만만한다. 하지만 충돌 직후 대책 회의 때 침몰을 막을 수 없음을 알자 스미스 선장은 "당신이 원하는대로 (침몰 사고로) 1면에 실리겠군요."라고 차갑게 대꾸한다.
  24. 금속이 외부 힘에 대하여 어느 정도 유연하게 변형되는 성질.
  25. 북극해 주변이라는 소리가 있으나, 사고 지점은 북위 41° 44′, 서경 49° 57′으로 북극해와는 거리가 멀다.
  26. 연철항목의 첫째 사진의 검정색 줄무늬가 바로 슬러그이다.
  27. 이 일로 인해 타이타닉 사고 이후 무전을 상시 켜놓고 교대근무를 통해 통신사가 항상 대기하도록 하는 국제규약이 생겨났다.
  28. 영화에서도 이 장면이 나오는데 선장은 "Yes...Women and children first"라고 하지만 다음 장면에서 라이톨러는 승객들에게 "Women and children ONLY"라고 말한다. 이게 현장에선 도리어 역효과를 내기도 했다. 정원이 덜 찼음에도 성인 남자라는 이유로 탑승이 거부되거나 우현에 비해 보트를 내리는 시간이 오래 걸리는 등 부작용을 일으켰다. 좌현에서 보트를 탄 성인 남성은 보트에 선원이 한 명 뿐이라는 여성 승객의 이의로 인해 선원 대신 타게 된 요트 선수 정도였다.
  29. 영화판에서는 보트를 좀 더 올릴 수 있었지만 1등칸의 미관상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언급이 있다. 보트 2대를 더 올리려다 말았다는데 그랬다면 100여명 정도는 더 살릴 수도 있었다.
  30. 영화에서는 앤드류스가 보트에 승객을 태우던 선원을 붙잡고 성인 남성 70명 태워도 잘 뜬다며 다그치는 장면이 나온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으니 보트 절반 가량이 승객을 다 채우지도 못한 채 이미 내려간 상황이었고 선원들은 보트 정원조차 제대로 모르고 있었다.
  31. 물이 보일러에 접촉해 폭발하는 원리가 궁금하다면 보일러항목을 참고하자
  32. 이들 선원들은 배의 침몰 상황시 맡게 되는 임무가 지정된 보트를 맡아 승객들을 대피시키는 것이었기에 타게 된 것이다. 뭣도 모르는 이들은 이렇게 살아남은 선원들이 비겁자라 보트를 선점해 동료들을 버리고 자신들이 탔다는 헛소리를 하기도 한다.
  33. 영화에서 묘사된 선체의 기울기는 거의 45도에 육박할 정도로 가파르지만 실제로는 18~23도 수준으로 생각보다 완만했다. 그래도 사람이 20도 이상 기울어진 경사에 서면 굉장히 가파르다는 느낌은 받게 된다.
  34. 영화 타이타닉에선 3번째와 4번째 굴뚝 사이가 갈라지는데 이는 고증오류이다.
  35. 영화에서는 선미부가 수직으로 기울어진 채 한동안 버틴 것으로 묘사되었는데 이 역시 명백한 고증오류이다.
  36. 1958년판 영화에서는 이 장면이 수록되었다. 한 남성이 접이식 보트에 접근하자 이미 올라탄 사람들이 저지하였고, 이 말을 하고 나서 다른 곳으로 헤엄쳐 갔다. 아직 보트 주위에 있던 라이톨러가 돌아오라고 소리쳐보지만...
  37. 1997년판 영화에서는 이 사실을 따온 장면이 촬영되었다(단, 본편에선 삭제되어 미방영 장면 모음으로만 볼 수 있다). 알려진 이야기와는 좀 다르게 전복된 보트가 아닌 로즈와 잭이 매달린 판자로 헤엄쳐 오다 잭에게 제지당하자 위 대사를 남기고 순순히 다른 곳으로 헤엄쳐 간다. 아마 의도는 좋은데 잭이 쓰레기(...)처럼 보여 삭제된 듯.
  38. 첫 번째로 구조된 사람은 중국인이었으며 5등 항해사 로는 구해주자는 의견에 이 사람이 대충 사망한 줄 알고 "저런 쪽바리 구해서 뭐하게?" 식으로 말하다가 말이 심한 걸 알았는지 금방 마음을 바꾸고 구명보트를 돌려 구해줬고 이 사람은 열심히 노를 저었다. 본인도 구명보트 위에서 괜한 소리를 했다고 인정했다고.
  39. 사실 조난시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행위이다. 술을 마시면 일시적으로 체온이 상승하지만 혈관이 확장되기 때문에 그만큼 체온 손실도 빨라진다. 술 마시고 길에서 자다가 동사하는 사람들이 왜 많은지 생각해보자(...) 단기간이라면 모를까 3시간 동안 영하의 바닷물에 노출되어 있으면서도 살아남은 것은 그냥 기적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물론 술의 영향으로 신체적으로는 추위가 덜 느껴졌을 것이다.
  40. 타이타닉 100주기 ngc 다큐멘터리에서 제임스 카메론 감독은 마치 항공기 추락현장을 보는 듯 하다고 언급했다.
  41. 이중저란 선저 파손사고시 해수의 유입을 막도록 이중으로 만든 바닥인데 이 부분이 두 동강이 난 뒤에도 완전히 분리되지 않아 선수부분이 선미부분을 잡아당기게 만든 것이다.
  42. 즉 로스트런 '경'이다.
  43. # 이는 승선객 명부에 따른 수치이며 돌발상황 등으로 인한 변화내용은 반영되어 있지 않을 수도 있다.
  44. 운항직 하급 승무원들 중 조타수들이 가장 많이 살아남았는데, 조타 항목에 나와 있듯 조타수는 타를 잡는 입장에서 돌발상황 발생 시 항해사의 지시 없이도 배를 올바른 방향으로 물 수 있는 감각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능력있고 어느 정도 근무 이력이 쌓인 이들에게 주어지는 직책이었다. 따라서, 항해사 없이 작은 보트를 난바다에서 사고없이 지휘하기엔 조타수들이 적합하므로 보트들에 가급적 조타수들을 태웠기에 이들이 제일 많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
  45. 이 사람의 손자가 바로 핫피 엔도옐로우 매직 오케스트라의 호소노 하루오미다.
  46. 물론 아래 나오는 영화는 아니다. 'A Nighy To Remember' 라고 이 주제를 다룬 고전 작품. 한국에서는 'SOS 타이타닉' 이나 '타이타닉호의 비극' 이라는 제목으로 여러 번 방영되었다.
  47. 위의 설명처럼 아닐 수도 있다.
  48. 적어도 500명은 더 태울수 있었다. 즉 전체 탑승인원의 반 이상은 구할수 있었다는 애기.
  49. 자연적 재해 아무래도 빙산을 사람이 만들거나 한 게 아니니까 분야 최대 선박 사고 사망자이다. 다른 사고로는 1945년 한국인 수천명이 죽은 우키시마 호 침몰 사건 같은 일이라든지 4천명 이상이 죽은 1987년 12월 필리핀 도나 파즈 호 침몰 사건 같은 비극은 사망자 수를 타이타닉 4배 가까이 된다. 사상 최악의 단일함선 침몰 사망숫자는 빌헬름 구스틀로프 호(1945년에 발트해 연안에서 피난 가던 독일 피난민을 태우고 가다가 소련 잠수함에 침몰. 최대 1만 명이 넘게 타고 있었다고 하는데 2000명 정도가 구조), 고야호(같은 지역에서 침몰. 이쪽은 6000~8000명은 넘게 타고 있었는데 그 중 180명 정도만 생존).
  50. 이 조약은 수없는 개정과 보강을 거쳐 현재까지도 효력이 지속되고 있는 가장 중요한 해상 규약 중 하나이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는 말이 해상 규약 역사에는 정확이 들어맞는 것이 SOLAS와 함께 가장 중요한 해상 규약인 MARPOL(선박에 의해 발생하는 해양 오염을 규제하는 규약) 역시 사상 최악의 유조선 침몰&원유 유출 사고가 일어나고 나서야 제정되었다. 이뭐병.
  51. 사진 출처
  52. 이들은 최후의 순간까지 고군분투 했는데 전속항해 중이던 타이타닉의 기관을 달을대로 달아있었고 여기에 차가운 해수가 닿으면 폭발할 뿐만 아니라 배에 지속적으로 전기를 공급해야 구조를 위해 달려오는 타 선박들이 정확한 위치를 파악할 수 있으며, 사고가 난 시각이 밤이였기에 빛이 없다면 승객들의 안전한 탈출을 할 수 없었다.
  53. 여담으로 왈리스 하틀리는 타이타닉에서 2등석 승객 대접을 받았다고 한다.
  54. 당시는 아직 여성참정권도 이루어지지 않았던 가부장제 시대였는지라, 노골적으로 부인을 버리거나 하지 않는한 정부를 두는것 정도는 봐주는게 일반적이었다.
  55. 현재 영문판 위키페디아에 해당 내용이 기재돼 있으나 선사가 다르며 또한 귀부인의 저택 관련은 출처 필요라는 조건이 부기돼 있다.
  56. 웃긴 건 정작 아일랜드인들은 가톨릭이 대다수이다.
  57. 여기선 최소한 침몰은 한다. 그리고 바로 위에서 NC가 씹은 타이타닉의 전설에서도 잠깐 나오는데 이게 저 애니보단 조금은 낫다고 언급한다.
  58. 71분으로 재편집된 영미권 버전 한정. 84분 오리지널에서는 뱅크샷은 나오지는 않으나 그에 만만찮은 작붕과 광기가 들어가 있다.
  59. 항만 선착장 직원들이었는데 이때의 대꾸가 걸작; "뭐..못 온 것보다 낫네(Well, it's better late than never.)".
  60. 또한 잭과 로즈의 동작 중 몇몇은 KOF 시리즈쿠사나기 쿄아사미야 아테나의 모션을 몇몇 유용했다. 아마 패미컴으로 낸 KOF 해적판의 데이터를 손질한 게 아닐까 싶다.
  61. 오마 카얌이 지은 시집 루바이야트와 다이아몬드 목걸이(세르비아 비밀결사단인 검은 손의 자금으로 쓰일 것이었다), 아돌프 히틀러가 그린 그림(뒤에는 네덜란드벨기에를 통해 프랑스의 마지노선을 우회하는 진로가 그려져 있다.), 볼셰비키의 명단이 적힌 공책.
  62. 주인공 사이러스 그리브즈가 술집에서 자신의 과거 이야기를 털어놓는 때가 1910년도인데, 1년후 타이타닉이 완성된다.
  63. 에멧만 줄처진 이유는 이전 스토리에서 형들이 도망칠 시간을 벌기 위해 사이러스와 총격전을 벌이고 리타이어하여 체포된다.
  64. 늪지대에 증기선이 있었다느 말에 모두 뻥이라고 까대지만 술집 주인 벤 브라이언트가 몇년전 홍수로 자초된것일거라고 말하며 덧붙인다.
  65. 꽤 오랜 시간 방치된 것으로 보인다. 게임 진행 중 엔진실을 지나가다 보면 엔진이 다 뻘겋게 녹슬어 있다.
  66. 위에 설명된 음모론에서 따왔을지도 모른다.
  67. 타이타닉 침몰 100주년 기념판은 일부갑판 재질을 플라스틱이 아닌 목재로 내놓은 적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