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시절
이름 | 무아마르 무하마드 알 카다피 (معمر محمد القذافي) |
생몰년 | 1942년 6월 7일- 2011년 10월 20일 |
출생지 | 리비아 시르테 |
사망지 | 리비아 시르테 인근 |
정당 | 무소속 |
종교 | 수니파 이슬람 |
배우자 | 사피아 파르카시 |
1 이름 표기
아랍어를 라틴 문자로 옮겨쓰는 방법이 여러 가지가 있고, 또 아랍어권 국가·지역마다 발음이 똑같은 게 아니라서 그의 이름을 'Gaddafi', 'Kaddafi', 'Qadhafi' 등으로 통일되지 않게 표기하고 있다. 그리고 카다피 본인이 자기 이름이 라틴 문자로 어떻게 적히길 바라는지 따로 공표하지도 않은 듯. 아래 그림에서와 같이 무려 112개의 서로 다른 표기가 가능할 지경.
한국의 경우 03년 12월 55차 외래어 심의회에서 국립국어원은 '무아마르 알 카다피(Muammar al Qaddafi)'로 규정했다. 관련 글. 밥 알아즈지야에서 발견된 그의 여권에서는 'Al Gathafi'로 적혀 있었다.
2 개요
독재자는 결국 몰락하고야 만다는 사실을 몸소 보여준 자이며, 독재자 중에서도 가장 비참한 최후를 맞은 인물 중 한 명
리비아의 전 독재자이자 그럭저럭 개념있는 지도자라는 평을 받을 수 있었지만, 결국 사회적 모순의 폭발을 수습하지 못하고 말년의 자국민 학살 및 탄압으로 최후를 맞이한 자. 비록 쿠데타로 권력을 잡긴 했지만 엄연한 전근대 사회였던 리비아를 근대화시킨 인물이라는 평가와 2011년 민주화 운동 당시 자국민을 무차별 학살, 탄압하고 결국 그 국민들의 손에 죽은 학살자라는 평가가 공존하는 인물이다.
최후의 막장 짓거리만 보면 김정일과 동급이지만, 사실 그 전에는 석유국유화를 시행해서 그 부를 재분배한 전적이나 석유붐이 끝난 이후로도 리비아가 아프리카에서 가장 생활수준이 높은 국가라는 타이틀을 유지했기에 제3세계권에서는 괜찮은 지도자라는 평이 많았다. 물론 한국에서는 반서구 성향의 인물이나 국가들에 악의적인 경우가 종종 있는 영미권 언론에 의해 기행만 중점적으로 보도되고 이것이 친미성이 강한 밀덕계 서브컬쳐에 알려지면서 그쪽에서는 이디 아민이나 김정일류로 알려져 있었지만, 사실 2000년대까지만 해도 한국이 수주한 대수로 공사때문에 한국의 보수언론에 의해서도 석유가 아닌 미래를 보는 지도자로 칭송받았다.[1]
1970년부터 28살의 나이로 리비아의 총리 겸 국방장관이 되었으며 동시에 리비아의 국가원수 겸 국가평의회 의장(=국회의장)까지 다 해먹었다. 과거 중동 일대에서 초강경 반미성향 지도자로 악명을 떨쳤으며 그 극단적인 언사와 기행으로 인해 서구권으로부터 '사막의 미친개', '아랍의 망나니'라는 불명예스런 별명으로 불렸으나 미국과 관계 회복을 어느 정도 이루어내서 많이 사그라들었다. 2009년 UN 연설 때 말한 것처럼 자신을 아프리카의 왕중왕으로 자칭했다. 리비아 내의 타민족 간의 통합 및 한국 건설회사를 통한 대수로 건설[2] 등 경제 발전을 이루어냈다는 평가도 있었지만 부족주의 전통이 강한 북아프리카-중동의 다른 독재자들[3]이 으레 그랬듯 해당 과정에서도 자기네 부족을 더 우대하고 친지들을 요직에 배치하며 세습제 국가를 만들려는 시도 등의 문제가 발생했다. 반서구권 언행을 줄이고 가족들에게 정권을 이양하려는 시도를 포기하고 적절선에서 은퇴했다면 세간의 평가가 그나마 나아졌을지 모르겠지만 결국 외골수처럼 고집을 부리다가 아래처럼 반대 세력의 분노를 폭발시켜 버렸다.
2011년, 2011 리비아 민주화 운동으로 반대세력의 저항에 직면했다. 전차와 전투기를 동원한 살육으로 맞대응했으나 이때문에 서방세계의 공격을 받고 내전이 벌어졌다.(리비아 내전)
2011년 10월 20일 그의 고향이자 마지막 거점인 시르테(Sirte)에서 시민군의 총격을 받아 부상을 입고 끝내 사망하였다.
3 생애
3.1 성장과정
1942년 유목민인 베르베르족의 일파인 카다파(Qadhadhfa) 부족 출신으로 카다피라는 이름도 부족 이름에서 딴 것이다. 사막 한가운데 천막에서 태어나 그 후 리비아 남부지역인 페잔에서 베두인식 이슬람교육을 받으면서 자라났다. 1952년에 나세르가 이집트 왕정을 무너뜨리고 공화정을 선포하자 여기에 영향을 받아 아랍세계를 통일해 기독교 세계에 대항하려는 의지를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1963년 벵가지의 리비아 대학교를 졸업한 후 벵가지의 육군사관학교에 입교해 재학 당시부터 동료 생도들과 왕정타도를 목표로 하는 자유장교단을 조직했다. 1965년 사관학교를 졸업, 육군 통신소위 임관과 동시에 1년 간 영국으로 유학 겸 파견근무를 하게 되었고 귀국 후 첫 보직으로 통신부대 장교로 부임하였다.
3.2 집권과정
꾸준히 진급하며 경력을 쌓던 육군 중위[4] 그 당시의 리비아는 1961년부터 석유개발이 본격화되면서 사막에서 유목을 하거나 해안가 근교지역의 약간의 농경지에서 겨우겨우 농사지으며 먹고살던 가난한 국가에서 아프리카에서 가장 잘사는 국가로 역전에 성공했지만 부의 재분배가 제대로 이루워지지 않아 빈부격차가 심했던데에다가 부정부패는 심각해졌고 왕정이 친미성향을 보인것도 있어서 국민들이 불만이 많았는데, 카다피는 1969년 9월 1일 동료 장교들과 함께 수도 트리폴리를 공격하면서 기습적으로 쿠데타를 감행했다. 해외 순방차 터키에 체류 중이던 국왕 이드리스 1세는 객지에서 그대로 퇴위당해 터키로 망명했고 국가의 중추기관도 유혈사태 없이 간단히 제압하는 데 성공하였다. 카다피는 쿠데타 직후 군 총사령관에 올랐고 11월에 잠정헌법을 공포한 이후 신생 리비아 공화국의 최고정치기구인 혁명지도평의회의 의장에 취임했다.
1974년에는 정치이론을 연구에 전념하여 혁명평의회의 의장 권한을 2인자에게 잠시 위임하였고 다음 해 그의 정치이론을 집대성한 책이 나왔으니 이것이 녹색서(The Green Book)[5]이다. 1977년 소위 '인민주권확립선언'을 공포한 후 초대 전국인민위원회서기장에 취임했으나 1979년에 모든 공직에서 사퇴하였다. 그 대신 오로지 혁명지도자라는 명예직함만을 가지고 있지만 사실상의 국가원수이자 리비아의 모든 국가 업무는 카다피의 지도하에 돌아가고 있었다.
3.3 미국과의 악연과 범아랍주의
1969년 이집트에서 나세르 대통령과 함께. 왼쪽이 카다피. |
집권 이후 철저한 반미를 외치며 미군 기지를 철수시키고 옛 종주국인 이탈리아 사람들을 강제추방시켰다. 외국의 석유 메이저 또한 모두 내쫓고 석유를 국유화해 그 이익을 국가가 차지하고 그 부를 사회복지시설에 돌리거나 교육 예산 등은 전용시키는 방식으로 재분배시켰으며 1973년에 석유값 인상을 주도하면서 리비아에 막대한 부를 안겨주었다.[6] 자신의 정치 사상을 관철시키기 위해 완전무결한 이슬람 국가 건설을 위한 일대 혁명을 주도했는데 이슬람 율법에 따라 음주 금지, 아랍사회주의에 따른 직접민주주의 제도를 구상하였지만, 경쟁력 있는 야당을 확보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실질적인 민주주의제도가 정착하지는 못하였다.
자신의 우상인 나세르처럼 범아랍주의의 열렬한 신봉자였기 때문에 중동과 북아프리카에 걸친 광대한 지역의 중동 전체를 아우르는 이슬람 국가들을 하나로 통일하려는 시도도 했다. 그 결과로 1972년 이집트, 시리아와 함께 아랍 공화국 연방(Federation of Arab Republics)을 구성에 합의, 그 해 7월 공식 출범했지만 중동전쟁 이후 이집트의 사다트 대통령이 이스라엘과 평화정책을 추진하면서 1977년 7월에 해체되었다. 그리고 열불이 나서인지 이집트 국경에 상당한 규모로 공습을 가했지만 이집트군의 역습으로 되려 리비아군이 압도적으로 패했다. 1980년에는 시리아와의 합방을 선언했으나 곧이어 이란-이라크 전쟁이 일어났고 시리아에서도 그다지 반기지 않아서 합방은 무산.
제3세계 비동맹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가하고 기니비사우, 앙골라, 모잠비크, 나미비아, 짐바브웨, 우간다, 말리등 아프리카 여러 나라에도 지원을 아끼지 않았지만 국내에 대한 철권 독재, 각종 인권 탄압, 테러, 핵실험 등의 의혹으로 인해 국제적으로 엄청난 비난을 받았다. 특히 유럽, 미국, 이스라엘에 대한 각종 초강경 테러를 지원한다는 의혹이 끊임없이 제기되었으며, IRA를 지원한다는 의혹도 제기되었다. 그 중 가장 유명한 것으로는 1988년 크리스마스에 스코틀랜드 로커비 상공에서 여객기가 폭발해 270여 명의 사망자를 낸 팬암 103편 폭파 사건을 들 수 있다. 카다피가 테러의 용의자를 인도하는 것을 거부하자 로널드 레이건 당시 미국 대통령은 카다피를 '테러리스트', '미친 개'라고 원색적으로 비난하며[7] 경제제재를 시행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유화한 석유로 이미 막대한 재원을 확보한 그를 막지는 못했다.
카다피의 이러한 행각에 빡친 미국은 카다피에게 겁을 줘서[8] 테러 지원을 끊기 위해 소규모 공습을 벌였고, 그 결과 그의 양녀가 희생되었다고 한다. 단, 양녀 사망에 관해서는 단순히 선전용 조작이라는 말도 있다. #기사 참고.
그 영향으로 미국의 공격을 받거나 암살당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여 아랍계 테러 조직에 대한 지원을 중지하고 잠시 데꿀멍하기도 했다. 이때 데꿀멍한 것은 카다피 뿐만이 아니라 잡다한 테러 조직들도 마찬가지였다. 이후로 친소련주의를 강화하면서 러시아제 무기를 많이 도입했다. 소련 해체후에도 철저한 친러성향을 보여 러시아와 굉장히 친했다. 물론 이때문에 미국에게 더욱 찍혀서 더 높은 경제제재를 받았다. 하지만 이 당시 우라늄이 가득한 지역을 두고 이웃 차드와 영토분쟁을 일으켰으나 또다시 되려 차드군에게 밀린 바 있다. 이른바 토요타 전쟁. 그래서 차드에 대해선 직접적인 무력 간섭을 삼가하는 대신 흑인계 앙헬 족과 백인 및 아랍계 혼혈에 가까운 투아레그(Tuareg)족의 무장을 서로 지원하여 차드를 내전 상태로 만든 것에 다른 미국 및 유럽 나라들과 같이 기여했다.
그러나 이후로는 소련붕괴와 저유가와 계속된 미국의 경제제재로 인해서 리비아의 재정이 안 좋아졌기 때문에[9] 조용히 지내고 있었다. 심지어는 9.11 테러 이후 조지 워커 부시 대통령이 북한과 이란에 마구 적의를 뿜고 있을 때 데꿀멍하는 모습을 한 번 더 보여주어 부시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어주기도 했다.(...) 2003년 공개적으로 반미정책 중단과 함께 모든 대량살상무기를 자진폐기하고 미국의 경제원조를 받겠다고 공언하게 된다. 사실상 GG 선언. 그리고 2004년 팬암기 테러 용의자를 미국으로 인도하면서 미국과 외교관계를 복원시켰으며 그에 대한 보답으로 미국도 2006년 리비아를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빼줬다. 또한 과거 이탈리아인의 재산을 몰수하고 추방한 것에 대해 사과[10]하고 이탈리아의 식민 지배 사과도 받아들였다. 이러면서 그래도 나름대로 균형은 잡겠거니 싶었는데...
3.4 몰락
나는 무력으로 이 혁명의 지도자가 되었으며 무력에 의해서가 아니고서는 내가 물러나지 않을 것임을 여러분은 알아야만 한다.- 1975년 5월 벵가지 Gharyounis(Garyounis) 대학에서 한 카다피의 연설
2011년 1월 튀니지에서 재스민 혁명이 일어나면서 2010-2011 아랍권 민주화 운동의 열풍이 리비아에도 불어닥치면서 상황은 예기치 않게 돌아가게 된다. 초기에는 작은 시위였고 벵가지 일대에 한정되는 것 같았지만 어느 순간 갑자기 확 불타오르기 시작해 2011 이집트 혁명 즈음엔 카다피의 고향인 시르테 등 일부지역을 제외한 대부분의 도시에서 카다피를 타도하자는 시위가 벌어지게 된다. 게다가 수도 트리폴리에서도 반정부 시위가 벌어졌다.
2월 22일에 가진 국영TV를 통해 "공식적인 자리를 가지고 있지 않아서 물러나 줄 수도 없다. 나는 영원한 혁명의 지도자이며 내 조상의 땅에서 '순교자'로 죽을 것"이라고 말했다. 결국 리비아 민주화 운동은 너 죽고 나 죽자라는 최악의 국면으로 흘러갔다.
2월 23일에 나온 미국의 시사주간지 타임지에 의하면 측근에게 '리비아를 되찾지 못할 바에는 차라리 리비아를 소말리아로 만들어버리겠다'고 말했다 한다. 그리고 이건...누구도 날 막을 수 없어. 네 놈이건, 미국이건, 유럽이건, 그 누구도! 리비아를 가질 수 없다면 차라리 잿더미로 만들어버릴 테다!!! 이어 국민을 상대로 내전을 선포했다.
그리고 진짜로 내전 발생. 리비아 전역에서 유혈충돌
TV 연설에서는 "엘리자베스 영국 여왕은 57년이나 왕위에 있지만 아무도 반대하지 않았다." 응? 나 "알 카에다가 시위대에 마약을 주고 있습니다. 시위대는 마약 때문에 살인을 저지르는 것도 모르고 있습니다"라는 등의 망언을 시전하면서 정신 상태마저 의심받고 있는 처지에 몰렸다.#
3월 20일 시작된 다국적 연합군의 오디세이 새벽 작전에 총력으로 맞서겠다고 큰소리 쳐놓곤 부랴부랴 UN과 오바마에게 공격을 멈춰달라고 애원했다.#
2011년 7월 2일 뉴스에서 "나토 공습 중단 안하면 유럽 공격"할 것이라며 리비아 수도 트리폴리 광장에 모인 수천 명의 지지자들에게 이같은 내용의 육성 녹음을 방송했다고 한다.#
한국 시각으로 2011년 8월 22일 수도 트리폴리가 반군의 손에 들어갔고 아들들도 반군에게 붙잡혔다.
한편 현지 시각으로 8월 29일 카다피의 아내 사피아 파르카시와 딸 아이샤, 두 아들인 무하마드와 한니발이 알제리로 도망쳤는데 여기가 최종목적지가 아닌 중간경유지일 가능성도 제기되기도.[11]
그리고 9월 7일 리비아 반군이 카다피 원수를 포위했다.#
3.5 최후
트리폴리가 함락된 8월 21일, 카다피는 측근과 경호원 10여명과 함께 트리폴리에서 남동쪽으로 80㎞ 떨어진 산악지대 타루나와 카다피 지지세력이 포진한 바니 왈리드를 거쳐 시르테로 갔다. 무타심이 시르테가 누구도 생각하기 어려운 마지막 도피처라는이유로 도피할 것을 주장했다. 카다피의 사촌으로 리비아 인민수비대 사령관 만수르 다오 이브라힘이 소수의 병력을 이끌고 카다피와 함께 하고 있었다.
이브라힘을 비롯한 측근들은 카다피에게 해외 망명을 건의했지만, 카다피는 "여기가 내 나라다. 나는 1977년에 국민들에게 권력을 넘겨줬다."고 말하며 반대했다.
최후의 순간이 다가오자 카다피는 시르테에 고립되었다. 카다피 일행은 빈집을 피난처로 삼았고 나토의 공습을 두려워하여 2,3일 마다 위치를 옮겼다. 컴퓨터가 없어 인터넷을 쓸 수도 없고, 전기마저도 자주 끊어졌으며 물도 없었다.
카다피 지지자들은 카다피가 최전선에서 전투를 독려하고 있다고 선전했으나, 카다피는 전투에 나서지 않았으며 총 한 발 쏘지 않았다. 주로 코란을 읽으면서 시간을 보냈으며, 외부와는 위성전화로만 연락을 했다. 카다피는 시리아 방송에 결사 항전을 독려하는 메시지를 보냈다. 하지만 이 위성전화는 나토의 정보망에 파악되어 카다피의 위치는 추적되었다.
나토의 공습으로 카다피가 은신해있던 집에 포탄이 떨어졌으며, 경호원 3명이 부상당했다. 요리사가 다친 이후로 카다피 일행은 직접 음식을 만들어먹었는데, 민가에서 구한 파스타와 쌀 정도 뿐이었다. 이브라힘은 "사느냐 죽느냐를 결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고 말했다. 이런 상황속에서도 카다피는 도피처로 사용하던 집에 왜 전기가 안나오느냐, 물은 왜 안나오느냐며 측근들에게 불평하는 등, 현실감각을 완전히 상실한 모습을 보였다. 기사
시민군의 포위망이 좁혀오자, 카다피는 20일 은신처를 옮기려 했다. 자신이 태어난 생가 근처의 주택으로 갈 생각을 하고 있었다. 당초에는 40대 이상의 차량을 이용해서 오전 3시에 빠져나가려 했으나, 친위대의 집합이 늦어져 오전 8시가 돼서야 출발할 수 있었다. 카다피는 SUV 차량인 도요타 랜드 크루저를 타고, 이브라힘과 경호대장, 친척 한 명, 운전사와 함께 탔다. 카다피는 이동하는 내내 별다른 말이 없었다.
그러고 출발 30분 후 나토의 공습이 시작되었다.
카다피의 최후. 시체 사진이니 혐짤 주의. |
조선일보에서 CG로 재구성 한 그림. 그런데 시민군의 복장이 FPS 게임 카운터 스트라이크의 테러리스트 진영 복장이다.# |
10월 20일(현지 시간), 농성을 하고 있던 고향 시르테에서 도주하다가 붙잡혀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이날 아침에 나토에서는 대규모 차량이 운집하는 상황을 정찰중이던 영국군의 토네이도 전투기[12]가 포착하고 미군에 알렸다. 카다피는 이때 시민군의 공격을 피해 도시 중심부를 탈출하고 있었다. 카다피를 태운 차는 호송차 100여대와 함께 서쪽으로 달리고 있었다.
나토는 일단 카다피가 타고 있는지 확신못했지만 여러 대의 차량이 한꺼번에 움직이는 상황이 카다피와 관련되어 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미군은 시칠리아 기지에서 무인기를 출격시켜 헬파이어 미사일을 발사해 차량 행렬을 공격했고 프랑스의 라팔 전투기도 출동하여 차량 행렬을 폭격했다. 이 공습으로 100여대의 호송 차량 중 기관총을 실은 트럭 15대가 파괴됐고 카다피 친위대 50여명이 전사했다고 알려졌다. 카다피의 측근 이브라힘은 이 때 공습으로 정신을 잃었다가 시민군에 생포되고 병원에서 깨어났다.
카다피와 친위대원들은 차량에 내려 도로 밑의 배수관으로 달아났다. 하지만 하수구에 숨어있던 카다피에게 시민군이 다가왔고 결국 생포되고 만다.
두 다리에 심한 부상을 입은 채 생포되었으나 부상이 악화되어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근데 다음 보도에서는 머리에 총상을 입어 죽었다고 나왔다. 미국 정부는 사실확인이 되지 않았다며 사망을 부정했으나 이후 사망한 것으로 최종확인했다. CNN 속보를 통해 시르테에 있던 리비아 시민군 병사가 휴대폰으로 찍은 카다피 시신 동영상까지 보도되었다.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쏘지 마시오."# 자신이 전범재판을 받을 거라고 생각했나본데 결국 꿈을 이루지 못했다.
알 아라비아 방송에 나온 카다피 체포 영상을 보면 발견 당시 두 다리가 절단에 가까운 심각한 외상을 입은 상태였다. 체포 당시에 어느 정도 말을 할 수 있는 상태였고 의식이 있었기에 시민군들이 부축해서 차에 그를 실었지만 부상이 심한 탓에 후송 도중에 사망했다.
하지만 또 다른 보도에 의하면 부상이 아니라 흥분한 과도정부군들이 그를 집단 구타한 뒤 누군가가 머리를 향해 9mm 권총을 쐈고 그 부상이 악화되어 사망했다고 한다.#
또 집단 구타하는 도중에 누군가가 카다피의 엉덩이에 무언가를 집어넣는 프레임 컷이 발견되었다.#
위 프레임 컷에 등장하는 병사는 이후에도 앰블런스를 기다리면서 다 죽어가는 카다피의 엉덩이에 저 이물질을 계속 집요하게 삽입하려 시도하다가 시민군 장교한테 호통을 들은 뒤에야 그만뒀다고 한다.#
참고로 다음의 링크는 패러디. 카디피가 청년막 뚫리기 전에 만들어진 패러디물이지만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찰지구나
10월 22일, 카다피의 사망 원인은 복부에 입은 총상 때문이었다고 공식발표되었다. 그리고 그 당시에 시민군들의 분위기는 축제 분위기였다. 이 정도면...[13]
카다피의 시체는 매장된다고 발표되었으나 그 전에 미스라타에 있는 정육점의 냉동창고에서 일반인들에게 전시되었다(시체사진, 험짤주의).
그리고 25일 카다피의 시체가 묻혔다. 매장 지역은 기밀로 처리된 데다 사막 한가운데 있기 때문에 영원히 찾지 못할 것이라 한다. 일각에서는 '그렇게 본인이 생전에 주장하던 대로 리비아 땅에 뼈를 묻었으니 아주 잘 됐네'라며 비꼬았다.
하지만 나중에 리비아가 세속주의 세력과 이슬람주의 세력간의 내분에 빠지면서 부분적으로는 재평가를 받는 추세에 있다.
4 업적
리비아는 다른 중동국가처럼 지배자가 독점하는 오일머니를 이용해 전반적인 복지제도를 실시했다. 물론 카다피 일가가 이를 삥땅치고 상당히 사치로운 생활을 산 것은 사실이지만, 다른 중동의 왕가들과 독재자들에 비하면 새발의 피 수준. 그의 치하 하에서 무상 교육과 무상 의료가 실시되었다. 또한 이슬람주의식 정책을 펼쳤기는 했지만 나세르주의의 영향 또한 받았기 때문에 이슬람권이면서도 남녀공학이 실시되었으며, 무상교육뿐만 아니라 학용품, 식비까지 모두 무료인데다가 해외유학비도 국가에서 지원할 정도.
또한 장래 석유가 고갈될 때를 대비하여 오일머니로 사막을 가로지르는 대수로 공사를 실시, 리비아에 농업을 확충하여 농업국으로 발돋움하려고 했다. 이 공사의 1단계는 한국이 수주했으며, 이 공사를 위해 리비아와 한국과 직항편이 설치될 정도였다. 북아프리카는 로마시절만 해도 곡창지역이었다. 기후가 변하면서 사막이 되었지만, 관개만 제대로 된다면 토질은 상당히 좋은 편이니 이게 공상적인 계획은 아니었다. [14]
반미를 내세우면서 아프리카의 대동단결을 모색했다. 잘 알려져있지 않지만, 1980년대 초반, 서방국가들이 ANC를 이끌던 넬슨 만델라를 테러리스트라며 외면할 때 유일하게 지원한 지도자가 카다피이다. 만델라는 항상 이에 대해 카다피에 고마움을 표해왔고, 남아공 대통령이 된 후 서방국가들과 리비아를 중재하기 위해 노력했을 정도.
5 가족관계
파일:/image/001/2011/08/22/GYH2011082200030004400 P2.jpg
- 사피야 : 카다피의 둘째 부인. 사피야는 남편의 권력을 이용해서 돈을 쓸어담았는데 리비아의 수도 트리폴리에 있는 미티가 국제공항에 본사를 둔 항공사를 소유했으며 이 항공사는 리비아 국영 항공사와 경쟁 관계로 리비아인 순례자들의 환승 업무를 독점했다고 한다.
- 무하마드 : 장남. 리비아에서는 올림픽을 총괄하고 있는데 장남임에도 불구하고 후계구도에서 멀어진 이유는 얘만 어머니가 다르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죽자 5남 한니발을 데리고 알제리로 도주했다.
- 세이프 알-이슬람 : 차남. 영국에서 유학한 엘리트. 카다피 재단 이사장이며 후계자 1순위. 8월 21일 생포되었다...고 알려졌는데 며칠 뒤 지지자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면서 건재함을 과시했다. 아버지의 사망 소식이 알려진 후 복수를 다짐하는 메세지를 보내고 니제르 쪽으로 빠져나가려다 2011년 11월 19일 체포되었다. 참고로 이름의 뜻은 이슬람의 칼(...)이라는 뜻이다. 이후 사형이 선고되었다.
- 알 사디 : 삼남. 축구광. 무슨 이유에서인지[15] 허접한 실력임에도 불구하고 세리에 A까지 진출했는데 우스꽝스런 일화만 남기고 되돌아왔다. '아무도 막지 못한 선수'라는 수식어가 붙어있지만 못 막을 만큼 강해서가 아니라 아예 막아볼 기회조차 없어서 그랬다고. 야, 웃기지 마. 축구선수를 그만둔 후에는 군에 입대해서 고급지휘관으로 잠시 복무하기도 했다. 8월 21일 생포되었다. 하지만 도망쳤으며 니제르에 도피한 것이 확인되었다.# 그리고 니제르 정부의 보호를 받고 있으며 인터폴이 그를 수배하고 송환 요구를 함에도 불구하고 니제르 총리가 송환하지 않겠다고 했다. 하지만 결국 니제르가 알 사디를 추방함으로 리비아로 강제 송환되어 수감되었다. 2015년 8월엔 그가 고문당하면서 자백을 강요받는 영상이 유출되어 파문이 일었다.
- 무타심 : 4남. 2011년 10월 20일 아버지와 같은 날 전사했다고 알려졌다. 아버지의 보좌관이다. 그 아비에 그 아들이라고 시민군이 트리폴리를 공격한 전날인 19일까지 승리를 장담하며 옛 연인과 파티를 즐겼던 것으로 드러났고, 2004년 3개월간 무타심과 사귄 자의 증언에 의하면 그는 무타심이 평소 아돌프 히틀러, 우고 차베스, 피델 카스트로를 동경해왔고 한 달에 200만달러를 쓸 정도로 씀씀이도 컸다고 회고했다.
- 한니발 : 5남. 장남인 무하마드와 함께 알제리로 도망쳤다고 한다. 그러나 인간말종인 것은 아비, 형제랑 똑같아서 한니발과 부인 에이라인은 유모에게 화상을 입히는 등 고문에 가까운 폭행을 했다는 사실이 드러나기도 했다. 2010년 에티오피아에서 건너와 한니발의 어린 아들과 딸을 돌봐온 샤이가 물라는[16] 얼굴과 두피, 가슴과 다리에 화상과 구타 흉터가 가득했는데 6개월 전인 2011년 2월 한니발의 아내인 에이라인이 아이들을 울지 못하게 때리라고 했는데 물라가 차마 때리지 못하고 있자 샤이가 물아를 욕실로 데려가 손과 발을 묶고 끓는 물을 부은 것이다. 물라는 "구타할 때마다 3일간 잠도 못 자고 먹지도 못하게 한 데다 치료를 받지도 못해 머리에서 구더기가 나왔다"고 말했다. 방글라데시에서 온 다른 동료 역시 한니발에게 칼에 베이고 구타를 당했다고 주장했다. 기사
- 사이프 알 아랍 : 6남. 나토의 공습으로 전사했다. 이름의 의미는 아랍의 칼(...)
- 카미스 : 7남. 카다피의 친위대 격인 카미스 특수 여단의 사령관. 트리폴리가 함락될 때 시민군과 전투를 벌이다 전사했다.
- 아이샤 : 장녀. 변호사이며 사설 병원을 운영하고 있다. 대외적으로는 소박한 이미지를 내세우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모두 쇼. 사실은 엄청나게 사치스러운 생활을 했다는 것이 정권붕괴 후에 밝혀졌다.
- 밀라드 : 카다피의 양자. 사실은 카다피의 조카이다.
- 한나 : 카다피의 양녀. 미군의 폭격으로 사망했다고 알려져 있었으나 사실은 생존해있었던 것이 밝혀졌다.
6 그 외
- 리비아 국기를 보면 알겠지만 세계에서 가장 그리기 쉬운 국기를 만들었던 지라 일명 기적의 디자이너 또는 녹색을 좋아하는 사나이라는 우스갯소리가 인터넷에 나돌기도 한다. 하지만 지금은 시민군이 카다피 정권 이전에 쓰이던 국기로 바꿔놓으면서 저 초록색 국기는 유물이 돼버렸다.
- '국가평의회 의장' 직함 다음으로 카다피가 자주 불리는 호칭은 '대령'이었다. 카다피가 권좌에 오른 이래 국가원수란 개념을 계속 인정하지 않았지만 리비아 사람들은 이미 '대령'을 국가원수의 고유명사로 인식하고 있었다. 다만 이 나라 사람이 아닌 정상적인 타국 사람들은 한 나라의 국가원수라는 양반이 고작 대령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에 기묘한 위화감을 느꼈지만... 왜 굳이 혁명 이후 40년이 넘도록 대령이란 명칭을 고집했는지 여러가지 추측이 있었으나 일단은 나세르 빠돌이 설이 우세하다. 대위였던 카다피가 숭배하는 아랍권 지도자인 가말 압델 나세르 전 이집트 대통령이 왕정붕괴 쿠데타를 일으킬 당시 계급인 대령을 따라 진급한 뒤 그 이상의 계급으로 진급하는 것을 스스로 거부했다는 설. 여기에 대령에 진급한 이후 혁명 당시의 초심을 잃지 말자는 다짐[17]으로 그렇게 했다고하는데 민주화 시위를 자초한 요인으로 봐선...
- 현명하게도 독재자 킬러인 지미 카터를 만나지 않았다. 덕분에 사신의 마수를 피해갈 수 있었지만 오디세이 새벽 작전 때의 미군 사령관 이름이 '카터 햄'이다.
- 리비아 카다피는 종종 베두인(사막 유목민) 텐트에서 잠을 자며 검소하게 살았다고 주장해댔다고(...)
- 카다피는 다른 독재자나 자녀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검소했다는 보도도 종종 나오지만 실제론 전혀 아니다. 특히 선글라스는 반드시 명품을 고집했다고 한다. 평소 "내 미래가 너무 밝아서 가리개가 필요하기 때문"이라며
하이라이트 레코즈?[18] 루이비통 선글라스를 즐겨 썼던 카다피의 바브 알 아지지야 관저에선 카르티에를 포함한 명품 선글라스 100개가 무더기로 발견됐다고
- 몰락하기 이전에 서방 세계에 대놓고 "이슬람이 가진 최대의 무기는 여성의 자궁이다. 이슬람은 출산율로 유럽을 정복할 것이다" 따위의 어그로성 발언을 한 적이 있어서 새뮤얼 헌팅턴의 <문명의 충돌>에도 언급되는 등 서방세계의 눈총과 주목을 받았었다. 물론 현실은 자기가 말한 소위 '이슬람교도'들이 유럽이 아닌 자기 자신과 가족을 정복하고 끝장내 버렸지만(...)
- 1990년 아프리카 정상회담에서 알제리 대통령 라바흐가 카다피에 대해서 '본인이 뭘 하는지도 모르고 그 결과가 어떤 건지도 알려고 하지 않은 채 언행을 일삼는 어린애 같은 양반'이라고 비꼬는 발언을 하였다.[19] 여기에 한술 더 떠 짐바브웨 대통령 무가베는 '생각없이 말하는게 꼭 뇌가 없는 것 같다'면서 맞장구를 쳤었다. 같은 독재자들 사이에서도 이미 노란 싹수로 분류된 셈.(...) 하지만 2011 리비아 민주화 운동이 일어나고 내전이 벌어지자 무가베는 카다피를 적극 지지했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인간적으로 좋게 본 것은 결코 아니지만 같은 독재자 입장에서 카다피가 반대 세력이나 서방세력에 의해 무너질 경우 선례가 남을 것을 우려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 카디피의 경호원들은 대개 여성들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일부 찌라시 언론들의 이야기처럼 3천궁녀나 기쁨조를 구성한 것은 아니고, 여성들의 충성심이 남성들보다 좋을 것이라는 믿음 때문에 여성으로 경호원을 조직했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그의 건강을 돌보던 우크라이나 출신 간호사가 있었으나 리비아에서 소요사태가 벌어지자 카다피의 허락을 받았는지 고향으로 무사히 귀국했다. 이들 여성 경호원들은 카다피 생전에는 몇몇 암살시도도 막는등의 공도 세웠으나 정작 카다피가 몰락해버렸을땐 아무 저항도 없이 모두 도망가버렸으며, 일부는 반군 손에 잡혀 맞아죽거나 윤간당한뒤 살해되어 시체가 수일간 거리에 방치되는 수모를 겪기도 하였다. 이 여성경호원들의 채용기준은 신체적인 능력이나 전투실력보다는 외모였으며, 주 업무는 경호보다는 카다피의 잠자리 상대가 되어주거나 카다피의 취향에 맞는 소녀들을 성노리개용으로 납치해 오는 것이었다. 그래서 결국엔 카다피의 기쁨조에 불과했다.[20]
- 2009년에 집권 후 처음으로 UN 총회에 나타나서 음모론을 1시간 반 넘도록 떠들다 내려갔다. 처음에는 UN 창설 뒤 터진 65차례 전쟁을 해결하지 못한 무능함을 질타한 데 이어 5개 강대국이 거부권을 행사하는 안전보장이사회 체제를 신랄하게 까버렸다. 여기까진 좋았는데 뜬금없이 "UN 본부를 뉴욕에서 리비아로 옮기자"라고 말하더니 본회의장에서 헌장을 찢어서 던져버렸다.(...) 이날 남긴 말만 해도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이스라엘의 핵무기를 조사하려다 암살됐다.", "신종플루는 백신을 팔아먹으려는 제약회사들의 수작이다.
안예모 회원?", "아프리카 식민지배 피해 배상금으로 7조 7700억 달러를 내놓아라.", "오바마는 아프리카 혈통이니 우리 아들, 영원히 대통령 해먹어야."라는 등의 각종 개드립의 향연이 벌어졌다. 이때 1인당 20여분으로 제한되어 있는 연설 시간을 무시하고 거진 2시간 동안 혼자 마이크를 잡고 떠드는 바람에 그곳에 있던 국가 대표들이 할 일 없는 사람들이 아닌지라 사람들이 꽤 나갔다. 문제는 그 후가 이명박 대통령의 연설 순서였다.(...) 이 전후사정을 모르던 네티즌들은 꽤 사람들이 빠진 회의석을 보고 'UN이 이명박을 싫어한다!'라고 오해하게 되었다.
- 해외 순방할 때마다 유목민식 천막을 공수해와 넓은 공터에 쳐놓고 지내는 기행도 자주 벌였다. 2009년 당시에는 그렇게 하려다 주변 주민들이 반대 퍼레이드를 벌였고 결국 도널드 트럼프의 사유지에다 천막을 치고 지내다 돌아갔다.
- 권투가 야만적이라는 이유로, 국가적으로 금지를 시켰던 적이 있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리비아는 과거 아프리카 내에서도 알아주는 권투 강국 중 하나였다. 결국 독재정권이 무너지고, 민주화가 되고 난 뒤부터 권투는 다시 활성화가 되기 시작했다. 위 내용의 신문기사
- 서구권 시각에서는 패션 센스가 괴악한 것으로도 꽤나 빈축을 샀다. 위의 여성 경호원 관련 블로그에 가보면 그 일부를 확인할 수 있다.
- '아프리카의 왕중왕(King of Kings of Africa)'이라고 자칭했다.
그것을 비꼬는게 이 벽화. 아랍어로 '아프리카 원숭이 중 최고봉'.
- 2002년 한국의 모 대학에서 명예 정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에 와서 받은 것은 아니고 총장이 직접 리비아로 건너가서 줬다. 이유는 카다피가 콩고 분쟁 등 아프리카 지역의 분쟁을 종식시키기 위해 애써왔고 1999년 아프리카연합 창설을 주도하는 등 북아프리카의 발전에 기여했으며 아랍민족주의를 제창해 아랍권 통합에 앞장선 공로를 평가했다나. ...
- 자신의 이름을 딴 카다피(가 주는) 인권상이 있었다. 역대 수상자로는 넬슨 만델라, 피델 카스트로, 우고 차베스 등이 있다. 2010년 수상자는 터키 총리 타이이프 에르도안. 아마 터키 구호선이 가자에서 이스라엘군에게 공격받은 일 때문인 듯 하다.
- 제9회 한국 불교인권상 수상자다. #. 최후의 오명때문에 이것을 흑역사라고 보는 사람도 있지만,마자막 얼마전까지는 그럭저럭 나라를 운영했다. 뭐 이런 경우는 꽤 있다. 남베트남의 독재자인 응오딘지엠에게 건국훈장을 수여한 이승만 정권의 일은 이승만 지지자들이 숨기고 싶은 과거이며 악랄한 독재자 니콜라에 차우셰스쿠는 반소적 정책을 취했다는 이유로 샤를 드 골이나 리처드 닉슨이 혁신적인 지도자라고 찬양했던 일도 있다. 더 심한 경우는 아돌프 히틀러나 스탈린이 노벨평화상 후보에 오른적까지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추축국이 이겼으면 히틀러가 노벨평화상을 탈 뻔했을지 모르지만, 승전국 지도자인 윈스턴 처칠은 노벨평화상 후보조차 오르지 못하고 대신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처칠은 자신이 평화상받을 자격이 있다고 여겼기에 평화상 수상에 껄끄러운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 이 세상에서 가장 지저분한 독재자가 더욱 더 지저분하게 보이는 순간(...)
소리가 참 찰지다
- 카다피 본인은 '자신이 이슬람 세계를 통합하려고 노력하였으며 지금도 그러고 있다' 고 주장[23]했지만 실제로는 아랍권의 분열의 상징이었다. 특히 아랍 연맹 국가들이 모인 공식 석상에서 친미 국가인 사우디를 '사우디가 악마와 거래한다'는 막말을 하여 사우디 대표를 빡치게 만들었다. 곁에 있던 아랍 국가 대표들도 당장 막말을 취소하며 사과하라고 했지만 자신은 마른 말을 하는거라고 고집을 해 회담을 파토내버렸다. 그래서 그가 아랍권을 통합하려고 한 행위는 오히려 독이 되어 아랍권에서도 리비아가 배척되게 만들었다. 사실 위에서 본 카다피의 정신 상태라면 저렇게 되는 게 당연하지만.
- 미국 재무부가 처음 카다피의 자산을 동결했을 때에는 미국 내에 약 1억 달러 정도가 예치되어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실제 조사 결과 297억 달러에 이르는 엄청난 금액이 동결된 것으로 드러났다. 이 제재는 미 재무부가 실시한 경제 제재 중 역대 최대 규모이자 리비아 전체 GDP의 절반에 맞먹는 엄청난 액수이다. 이렇게 많은 액수가 3일이라는 짧은 시간 내에 동결될 수 있었던 건 카다피가 특정 은행에만 돈을 몰아서 예금시키는 어처구니 없는 잘못을 했기 때문이라고. 통장 쪼개기와 분산 투자라는 개념을 설명할 때 예시로 쓰일 듯하다.
- 서양에서 default 패션 테러리스트로 불리기도 했다.
- 카다피는 오사마 빈 라덴을 상당히 싫어했다고 한다. 이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일부 친미 밀덕들이 카다피와 빈라덴이나 IS를 동일시 하는데 이것은 반미라는 입장에서만 그럴 뿐, 빈 라덴을 포함한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이 원하는 것은 근본주의 이슬람을 원리로 하는 신정국가인데 이들에게 카다피 같은 중동-북아프리카의 세속 독재자들은 미국 못지않은 사악한 이교도일 뿐이다. 독재자들 입장에서도 정권의 안전에 매우 위협이 되는 세력이기는 마찬가지. 그런 이유로 카다피, 무바라크, 후세인, 카셈, 아사드, 부메디엔, 수하르토 같은 이슬람권 국가들의 독재자들은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을 아주 강경하게 탄압했다. 그중에서 특히 유명한 역사적 사례로 시리아에서 도시 하나를 통째로 갈아버린 하마 학살을 꼽을 수 있다.
- 시위대의 여성들을 성폭행하라고 군대에 비아그라를 지급했다. 이쯤 되면 막장 중의 개막장. 공포심과 폭력으로 사람을 지배하려는 그야말로 현대 사회에서는 북한 등 극히 일부 지역에서나 통용되는 수준의 원시적인 철권 정치를 생각한 듯하다. # 그러나 카다피가 군대에 비아그라를 지급했다는 루머는 현재까지 아무 증거도 없고 입증된 바가 없다. 사실 이 루머는 미국의 UN대사인 수잔 라이스가 알자지라의 보도를 인용하여 주장한 것인데, 이 알자지라의 보도는 리비아에서 활동하는 어떤 의사가 친카다피 군 소속인 어떤 병사의 호주머니에서 비아그라약을 발견했다는 소식에서 출발하였다. 그런데 이 소식이 전파되는 와중에 과장되고 왜곡되어 카다피군소속 일개 병사의 호주머니에서 비아그라약이 발견되었다는 작은 일화가 카다피가 시위대를 강간하라고 비아그라를 군대에 대량으로 지급했다는 막장이야기로 둔갑해버린 것이다. 당연히 리비아 사정에 정통한 전문가들은 이 뉴스에 신빙성이 없다고 주장하였으나 그들의 주장은 미국의 리비아 개입을 강력히 원하는 여론에 밀려 묻혀버렸다.
- 리비아 반군에 의해 점령된 카다피의 요새 안에서 미국 前 국무부장관 콘돌리자 라이스의 사진첩이 발견되었다. 어!?# 이후 카다피가 콘돌리자를 짝사랑했다는 사실이 기정사실화 되고 있다. 기사도 있다. # '흑인 여왕' 이라고 호칭하면서 일종의 이상상처럼 여겼다고 알려졌다. 카다피 본인도 이러한 사실을 거의 숨기지 않았고 콘돌리자 라이스가 리비아를 방문했을 때 그녀의 해외 외교영상들을 짜깁기해서 만든 '기괴한' 동영상을 감상시켜줬다고. 콘돌리자의 말에 따르면 기괴하긴 했으나 성적인 느낌은 없었다고 한다. 덕분에 미 정부는 콘돌리자의 방문 일정을 리비아 쪽과 외교 협상을 하는 줄다리기 카드 중 하나로 써먹었다. 대량살상무기 사찰 때라든가... 콘돌리자가 처음 카다피와 대면하기 전 미 대사는 '갑자기 이상한 짓을 할 수가 있는데 당황하지 말고 냅두면 좀 있다가 회복된다' 라고 귀띔해줬다고 한다. 아니나 다를까 기자들이 철수하고 곧 고개를 전후로 흔들며(...) 앞뒤가 맞지 않는 발언에 이상한 떼를 쓰기 시작했는데 콘돌리자가 자기 요구를 거부하자 투정을 부리며 그 자리에서 통역관 두 명을 잘라버리는 등 기행을 보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카다피의 일편단심 짝사랑에도 불구하고 콘돌리자 라이스는 오바마를 설득하여 리비아 사태에 미국이 적극 개입하는데 일조하였다. 원래 정신 나간 장광설을 늘어놓다가 갑자기 정상으로 돌아오는 대화 스타일을 갖고 있었다.
- 카다피는 몰락 이전에 정권 안정을 조건으로 서방 세계에 개방 정책을 펼쳤기 때문에 안전할 거라 믿었지만 혁명이 시작되자 돌아온 건 공습. 결과적으로 다른 제3세계 독재자들에게 서방을 믿을수 없다는 교훈을 주었다. 국민대의 북한전문가 드미트리 란코프(러시아인) 교수는 북한 또한 카다피를 보고 절대로 핵무기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 카다피는 특유의 곱슬머리로 유명했는데, 사실 이는 카다피는 탈모가 심해서 이를 감추기 위해 가발을 착용한 것이다. 탈모가 워낙 심하다보니 모발이식 수술까지 한 적도 있다고. 심지어 죽기 직전까지 가발을 착용하였다.
파일:Attachment/55241 36587 2124.jpg
- 2011년 8월 25일 수도 트리폴리를 함락한 리비아 반군들은 카다피의 요새 안에 들어간 순간 본인들 중언에 의하면 "자신들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믿을 수 없었다"고 증언했다. 군사요새로 알려졌던 ‘바브 알아지지야’ 요새 안에는 놀이동산에나 있는 각종 탈것들이 설치돼 있었고, 놀이동산 옆 동물원은 아프리카 독재자들이 선물한 수많은 진귀한 동물들로 채워져 있었는데 특히 18마리의 애완용 사자가 가장 신기했다고 한다.
- 카다피가 거주했던 ‘궁전’은 고급 대리석으로 치장했으며, 벽에는 예술작품이 걸려 있었다. 방마다 앤티크 가구들이 채워져 있고, 큰 방들에는 욕조가 있는 고급 욕실이 딸려 있다. 카다피는 요새 내에 영화관을 만들고 가족들과 최신 서구영화를 즐겨 본 것으로 전해지며 요새 중앙에는 일명 ‘저항의 집’이 있다. 이 저항의 집은 1986년 미국의 공습으로 이 건물이 파괴될 당시, 생후 수개월밖에 되지 않은 수양딸 한나가 사망했는데, 카다피는 어린 딸의 죽음을 기념하기 위해 이 건물 안에 있던 그녀의 방 침대와 램프 등을 모두 유리로 둘러싸 25년 전 모습을 그대로 유지해놨다.
- 카다피 자식들의 저택도 사치스럽기는 마찬가지였는데, 해변에 위치한 카다피의 셋째 아들이 살던 빌라에는 람보르기니와 BMW, 아우디 등 고급 승용차 여러 대가 주차돼 있었으며, 빌라 내 사무실에는 100억원을 웃도는 요트와 고급 자동차 카탈로그가 쌓여 있었다고 한다.
- 카다피는 스타들을 불러 사치스런 파티를 즐기는 것을 좋아해서 많은 유명 가수들이 그의 파티 때 노래를 불렀다. 미국 래퍼 50센트는 2005년 베니스 영화제 기간에 열린 한 사설 콘서트에서 카다피 일가를 위한 노래를 불렀고, 캐나다 가수 넬리 푸르타도 역시 2007년 이탈리아의 한 호텔에서 사적인 공연을 했는데 이 때 머라이어 캐리와 비욘세도 불렀다. 그래서 훗날 리비아 민주화 운동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자 공연을 한 사람들이 하나하나 발굴되어지기 시작했고 이에 바욘세와 겉은 스타들은 자신의 공연 비용을 기부하겠다고 황급히 입장을 표명해야 했다.
- 카다피는 축구광이기도 했다. 축구 사랑이 어느정도 였나면, 이탈리아의 명문 클럽인 유벤투스를 살려고 시도한 적도 있었다. 오너인 아녤리가문이 팔지 않아서 실패했지만 지분을 상당량 인수했다. 아들 중 한명도 세리에A에 진출해 아무도 막지 못하는 선수라는 칭호를 받았다. 실력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경기를 뛰지도 못했기 때문(...). 받아준 클럽도
괴짜 구단주[27]로 악명높은 페루자 칼치오였다.
- 김정일과 김정은은 카다피가 민중들에게 잡혀서 살해된 장면이 방송에 나오자 그 즉시 평양을 지키는 평양 수비대를 급히 방문하여 이들을 격려하고 이들에 대한 지원을 대폭 강화하였다. 물론 그 이전에도 루마니아 독재자 차우셰스쿠가 총살당한 것을 본적도 있다.
- ↑ 2000년대 초반에 나온 이희수 교수의 <어린이 이슬람 바로 알기>와 같은 청소년용 교육 도서에도 사담 후세인은 걸프전 때문에 이때부터 찜찜하게 서술되어 있는 반면, 카다피에 대한 평가는 지금과는 영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이희수 교수가 이슬람 전문가 중에서도 이슬람의 정치인과 문화를 매우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경향이 없지 않지만...
- ↑ 그 건설회사중 하나가 동아건설인데, 이 놈들은 나중에 부실공사로 한강 다리가 붕괴되게 만든다 동아건설의 모기업인 동아그룹은 IMF 외환위기때 부도가 나서 해체되었다. 그 동아그룹의 계열사중에는 한 택배회사가 있었다. 참고로 전성기인 1984년에는 2만명의 인부가 건설에 참여해 무려 37억 달러, 당시 GDP의 3%를 따내기도 했다. 77년부터 한국이 따낸 건설 수주만 총 366억 달러로 지금 GDP로도 넉넉히 1/7이 되고 1984년 GDP로는 30%나 된다. 동아건설, 대우건설, 동아건설의 최원석 회장, 대우그룹의 김우중 회장과도 친했다. 최 회장은 카다피를 카 선생이라고 불렀고 카다피는 그와 만난 자리에서 서투르지만 한국어로 헤잔님(회장님)이라고 부르기까지 했다. 이런 점에서 보면 한국 정부는 좀 배은망덕이란 드립이 나올 수도 있다.
하지만 러시아, 중국도 반카다피 과도정부를 인정했는데 그들도 배은망덕?# 관련기사 - ↑ 아사드, 후세인, 벤알리, 무바라크, 살레 등등
- ↑ 미국이나 한국의 경우 일개 중대장 보직 정도에 불과한 계급이지만 군대 규모가 크지 않은 영세국가나 군대 규모가 크더라도 사단 및 군단 같은 대단위 부대 편제를 유지하지 않아 장군 보직의 필요성이 낮은 국가에서는 위관급 장교들이 영관급에 심하면 장성급에 준하는 권한을 지니고 있기도 하다. 비슷한 사례로 남미 같은 경우에는 중사 출신 독재자들도 있다.
- ↑ 1982년에 한국어 번역판이 나왔는데 사회학자 김동춘이 당시 김성근이란 가명으로 번역했다
- ↑ 이 부분이 미국과 틀어지고 현재 중동이 석유로 한 가닥 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1차 오일쇼크의 가장 큰 이유인 동시에 OPEC의 탄생 배경이다. 카다피가 중동권에서 먹어줬던 이유기도 하고. 사실 후세인도 1980년대 초까지는 이라크를 근대화시킨 인물로 인정받았을 정도로 능력은 있었긴 했다. 그 이후가 문제지...
- ↑ 당시 헐리우드에서도 백 투 더 퓨쳐에서 리비아가 핵무장을 노리는 테러국가로 나온 바 있다.
- ↑ 죽일 생각이었다면 더 많은 공군을 투입하여 관저까지 확실히 날려버렸을 것이다. 그런데 이원복이 조선일보에 1990년대에 연재한 시사 만화에선 당시 미국은 150만 달러 이상을 주며 어느 용하다는 점쟁이에게 점을 쳐서 그 위치를 폭격했다는 게 군감사에서 드러났다고 엄청 비꼬았다!?
- ↑ 그래도 알제리처럼 내전이 터지거나 러시아처럼 사회시스템 자체가 없어지다시피하거나 베네수엘라처럼 빈곤층이 거의 70%에 달할 정도의 막장상태까지는 안갔다. 리비아의 인구가 500만 정도로 적고 쌓아놓은것도 많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 ↑ 물론 말로만 사과했을 뿐이다. 이탈리아에서 이에 대하여 반발도 있었지만 식민지 시절의 땅과 여러가지를 거저 먹고 남은 것들이라 예전처럼 돌려줄 일은 없어보인다.
- ↑ 기사 참고
- ↑ 조선일보 기사에는 "영국 공군 차세대 전투기 토네이도"라고 되어있다. 조선일보에서는 토네이도가 차세대 전투기 입니다!
- ↑ 실제로 "아프리카의 차우셰스쿠"로 비유받기도 했다.
- ↑ 캘리포니아나 스페인 남부같은 지역들도 원래는 황량한 사막이었지만 지금은 곡창지역이 되어서 수출까지 한다
- ↑ 사실 카다피도 축구광으로 알아준다. 그래서 유벤투스를 완전 인수하려다가 실패했지만 2011년 현재까지도 유벤투스 구단 지분 30%를 바로 카다피가 가지고 있었다. 이탈리아 프로축구계에 뭔 떡밥을 던져주었는지 몰라도 2002년 세리에 A 슈퍼컵에 유벤투스가 참가하면서 바로 리비아 트리폴리에서 열리기도 했다.
- ↑ 당시 나이는 30살
- ↑ 하지만 라이베리아나 여러 나라에선 독재자가 소령으로 멈춰선 채로 권력을 차지하던 것도 있다...
- ↑ 하이라이트의 슬로건이 'My life is so bright' 즉, 내 미래는 너무 밝다는 뜻이다...
- ↑ 정작 이후에 알제리가 10년간 내전 상태에 빠지고 반대로 리비아는 경제력이 하락하기는 했지만 그런대로 안정세를 유지하면서 참으로 미묘한 발언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사실 알제리 내전의 근본적인 원인은 집권여당에 연줄이 있었던 군부의 선거불복에 있기는 했지만
- ↑ 출처 영어위키백과
- ↑ 그런데 이스라엘과 원수진 나라들에서도 인기가 있었다고 한다. 하긴 사우디 아라비아나 여러 아랍 나라들도 카다피를 질색했으니.
- ↑ 연설 내용은 "골목길을 구석구석 뒤져서 시위대를 찾아 죽이겠다" 뭐 이런 거였다고...
- ↑ 리비아에 가보면 지금이 아프리카의 중심이라며 자기 사진 속에 아프리카 나라들 국기가 크게 배경으로 자리잡은 홍보판이 여기저기 있었다고 한다
- ↑ 벨기에에서 제작한 브라우닝 하이파워에 금도금을 한 것이다. 그리고 F2000과 같은 최신예 벨기에산 무기들이 중동에 속출하는것도 기분탓일지도?
- ↑ 사실 황금 무기는 아랍 군주들이나 독재자들이 많이 가지고 있다. 사담 후세인도 황금으로 도금된 AK-47가 있었고 사우디아라비아 국왕에게도 미국에서 도금 총기를 선물해준 적이 있다.
- ↑ 김정일 경호원 출신의 탈북자에 따르면 은빛으로 도금된 AK를 지급받아 근무한다고 한다. 총 자체도 원 오브 사우전드라고... 는 하는데 원 오브 사우전드라는 말 자체가 허황된 거라 단순(...) 은 도금 AK일 것이다.
- ↑ 안정환이 월드컵 이탈리아전에서 골넣었단 이유로 짜른 인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