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 게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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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출생1928년 6월 14일
사망1967년 10월 9일
국적아르헨티나[2]


Ernesto "Che" Guevara
1928년 6월 14일(아르헨티나) - 1967년 10월 9일(볼리비아)

인류가 자신의 불행에서 도피하고 싶다면 방법은 오직 하나뿐이다. 모든 것을 불과 피로 파괴하는 것... 다른 길도 없고, 다른 희망도 없다.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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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가 만든 20세기 공산권 최고의 스타

흔히 체 게바라라는 별명으로 잘 알려져 있는데 이것은 본명이 아닌 애칭으로, 훗날 그를 상징하는 본명이 되었다. 체(Che')의 원래 뜻은 바로 이탈리아어 "케 코사 체(Che cosa c'è, 무슨 일이야?)"를 뜻하는 말이였는데, 아르헨티나로 대거 유입해 온 알프스 산맥 지방 출신의 이탈리아 사람들이 언제부터 이 'c'è'를 '체(Che)'로 바꿔 쓰고 발음하였다. 아르헨티나 북동부와 파라과이에서 통용되는 과라니어에서 '체'는 '나' 또는 '나로서는'이라는 뜻으로 쓰이게 되었다.

그가 쿠바 혁명의 주도자라는 이유로 쿠바 출신이라고 아는 사람들도 많은데, 그는 사실 아르헨티나 사람이다.[3] 아르헨티나의 또 다른 유명인인 에바 페론의 일대기를 다룬 앤드루 로이드 웨버의 뮤지컬 『에비타』에 등장하기도 한다.[4] 극 중간중간 등장하는 해설역으로, 극 중 내내 페론을 따라다니며 그녀의 행동에 딴죽을 걸거나 비아냥거리는 역할을 맡았다.

2 일생

2.1 유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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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은 에르네스토 라파엘 게바라 데 라 세르나(Ernesto Rafael Guevara de la Serna). 산타 페로사리오의 귀족가 혈통을 이어받은 부르주아 집안 출신으로 아버지는 제법 큰 병원 원장이었으며 따라서 경제적으로 부족함 없이 잘 자랐다. 하지만 부모가 둘 다 중립적 자유주의자라 어릴적부터 스페인 내전 패배로 망명한 국민정부 인물들과 만나 진보적인 사고에 대한 지각을 넓혔다.

체 게바라 평전에 의하면 어린 시절 에밀리오 살가리(1862~1911)[5]의 소설들에 빠져 살았는데 이 소설들에서 반제국주의적 사고관을 배우게 되었다고 적혀있다.

그는 만능 스포츠맨이었으나[6] 미숙아로 태어났다. 또한 그는 그가 두살이었을 때 그의 아버지의 팔에 안긴채 차가운 여울을 건너다가 천식에 걸려 평생 흡입기를 지참하고 다녔다. 그러나 그는 학창시절 미식축구를 즐겨하는 호색한 이었으며, 시가를 즐겨 피웠고 독서를 좋아하였다.

2.2 의사에서 혁명가로

본디 의사를 꿈꿔 부에노스아이레스 의대를 졸업했으나(알레르기 연구로 의사면허을 취득), 우연히 친구인 알베르토 그라나도모터사이클로 남미 대륙을 여행하면서 피폐한 남미의 현실(빈부격차로 인해 좌절하여 하루하루 살아가는 무수한 사탕수수, 커피, 바나나 농장의 노예들)을 보며 충격에 빠졌다. 또한 CIA 사주를 받은 군부가 좌파정권을 무너뜨리는 것을 보고 미국에 대한 적개심을 갖게 되었다. 체는 이 당시 현실에 좌절하여, 의사 가운을 던지고 혁명에 종사하게 된다.[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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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테말라 혁명에 참여했으나 실패로 끝나고 쿠데타 정권의 블랙리스트에 오르게 되자 멕시코로 탈출, 1955년 7월 10일 평생 동지인 변호사 출신의 한 살 많은 피델 카스트로와 만나 독재자 풀헨시오 바티스타가 집권하는 쿠바에 혁명의 불길을 일으키기로 결심, 혁명군에 투신하게 된다. 그리고 스페인 내전을 겪은 베테랑 군인 알베르트 바요 아래에서 혹독한 훈련을 거쳐(조금이라도 명령을 어기거나 불손한 움직임을 보이면 바로 총을 들어 사살했다고 한다.) 강건한 병사로 단련되었다.

1956년 11월 25일, 멕시코의 툭스판에서 요트 그란마 호를 타고 쿠바로 향한 82명의 전사들은 12월 2일 쿠바에 도착했다. 그러나 그들은 상륙 직후 바티스타 정부군의 기습 공격을 받아 대부분이 사살되거나 체포되어 17명(12명이 남았다는 설도 있다.)으로 찌부러들었다. 명단은 다음과 같다.

  • 대장 피델 카스트로
  • 부장 라울 카스트로[8]
  • 부장 에르네스토 게바라
  • 대원 우니베르소 산체스
  • 대원 후안 알메이다
  • 대원 시로 레돈도
  • 대원 라미로 발데스
  • 대원 알만도 로드리게스
  • 대원 레네 로드리게스
  • 대원 프란스스코 곤잘레스
  • 대원 라휄 챠오 산타나
  • 대원 에피게뇨 아메이헤이라스
  • 대원 카리스트 모잘레스
  • 대원 까밀로 시엔후에고스
  • 대원 레이날도 베니테스
  • 대원 성명불명
  • 대원 성명불명

이후 추가로 생존해서 합류한 6명의 대원은 다음과 같다.

  • 대원 호세 모얀
  • 대원 루이스 크레스포
  • 대원 훌리오 디아즈
  • 대원 카리스트 가르시아
  • 대원 카를로스 베르무데스
  • 대원 성명불명


겨우 시에라 마에스트라로 탈출한 혁명군은 그 곳을 기점으로 바티스타 정권의 폭정에 오래전부터 지쳐있던 민중들의 지지를 받아 기세가 성장하였다, 그들은 결국 2년 뒤인 59년 1월에 수도 아바나에 입성하여 독재자 바티스타를 쿠바에서 몰아내었다. 이것이 바로 포코 이론의 성공이었다.

2.3 혁명은 성공, 경제정책은 실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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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 직후 쿠바의 일반 대사로 해외에 파견되어 이집트나세르, 인도네루, 유고슬라비아티토, 인도네시아수카르노 등 '비동맹 국가'들의 지도자들과 만나 반제국주의, 반식민주의 외교활동으로 우호를 다지게 된다. 심지어 UN 총회에서도 쿠바 대표로 참여했으며 북한에서 김일성을 만나기도 했다. 이때부터 검은 베레모와 구겨진 군복은 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됐다.

사실 혁명 초기까지만 해도 피델 카스트로에 맞먹는 영향력이나 지위, 명성을 가진 이는 없었다. 그는 그린마 호에 처음 탈 때까지만 해도 간부 같은 게 아니라 그냥 게릴라들 중 유일한 의사이자 군의관이였고, 후일 대민 의료지원에서 뛰어난 성과를 거두며 영향력과 지위가 올라간 것이다.[9]

이후 쿠바 국립은행 총재[10], 산업부 장관에 발탁되어 농업국 쿠바를 공업국화 하려는 계획의 책임자가 된다.[11]

하지만 산업화와 금융정책 등 경제 성적은 전반적으로 나빴다. 체는 애초에 금융이나 경제 전문가도 아니었고, 이상가였지 실무자가 아니었다. 은행총재이었지만 돈을 혐오해 지폐에다가 대충 '체'라고 휘갈겨 쓰거나, 실무를 보기 위해서 책상에 앉거나, 직접 실무를 보기보다는 대외활동을 통해 항상 구멍난 양말을 신고 직접 사탕수수 농장, 벽돌 공장에서 근로활동을 더 많이 했다.[12]

게다가 너무 서투른 산업 국유화는 자본 이탈과 함께 미국의 경제 봉쇄라는 더블 펀치를 쿠바에 안겼다. 게다가 마침 불거진 중소 간의 충돌은 공산주의 진영에서 편 가르기를 촉발시켰고 그 와중에 귀중한 시간까지 낭비되었다. 결국 체 게바라는 자아비판까지 해야만 했으며, 이 커다란 실책으로 인해 라울 카스트로의 친소파가 쿠바 정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물론, 부분적으로는 노조가 기업 경영에 동참하게 하고[13], 물질적 인센티브가 아닌 도덕적 인센티브를 통해 노동실적을 장려하는 등 긍정적인 성과도 있었다.[14]

그러나 의사 출신인 게바라는 무엇보다 의료 개혁만큼은 자신있게 주도했다. 옛 친구 알베르토 그라나도를 쿠바로 초청하여 임상학 연구소를 설립하게 하고, 산티아고하바나 대학 등의 의대에 전폭적인 지원을 했다.

2.4 쿠바를 떠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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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트로는 결국 친소련정책을 취하여 자국 내에 소련 핵미사일 기지 설치를 허용하고 군사, 경제원조를 얻어냈으나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를 계기로 게바라는 소련의 진의에 대해 회의감을 품게 되었고 이는 소련의 점수 따기에 몰두하던 카스트로와의 사이에 균열을 만드는 계기가 된다. 특히 1965년 1월, 알제리에서 행한 연설을 통해 소련을 향해 "제국주의적 착취의 공범자"라는 원색적 비난을 퍼부었고, 이에 격노한 새 집권자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소련 서기장이 그가 공직에서 사퇴하지 않으면 모든 경제 원조를 중단하겠다는 엄포를 놓게 되자 카스트로의 지시로 모든 공직에서도 사임하게 된다. 경제정책 실패에 이어 터진 이 사건으로 인해 그는 혁명 정권 내에서 고립무원의 처지가 되었다. 결국 그 해 5월, 가족과 카스트로에게 보내는 편지를 남기고 소수의 지지자들과 함께 쿠바를 등지게 된다.

체 게바라와 소련의 관계가 극도로 악화된 원인은 다음과 같이 분석할 수 있다.

1. 체 게바라는 마오쩌둥의 혁명전략에 큰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러시아 혁명 당시 제정 러시아가 농업 국가라 해도 그 안에는 공장과 노동자들이 다수 존재했다. 그러나 라틴아메리카 대부분 나라에서 공장의 노동자들을 통한 사회주의 혁명 전술은 적용하기 매우 어려웠다. 체 게바라가 활동할 당시 라틴아메리카의 공장 노동자들은 그 수가 정말 한 줌에 불과했다. 더욱이 극단적인 빈곤층과 빈농의 수가 너무 많아 공장 노동자들의 위치가 절대적으로는 빈곤층이나 상대적으로는 중류층~중하류층에 속한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소련식 사회주의 혁명 모델은 쿠바 상황에 적합하지 않았고, 더 나아가 대부분의 제3세계 국가들에게 있어 소련식 사회주의 혁명 모델은 맞지 않았다. 오히려 쿠바를 비롯한 제3세계 지역에서는 중국식 혁명 모델이 적합했다.

2. 소련의 사회주의 국제분업 계획에서 쿠바는 당연히 농산물 생산 - 특히 사탕수수 보급 기지에 불과했다. 그러나 사탕수수 생산에만 의존하는 경제는 결국 경제적 예속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것은 너무나 자명한 사실이었고, 단일작물 경작에 의존하는 경제가 가지는 문제점에 대해서는 쿠바 혁명정부의 지도부 모두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 더욱이 사회주의 혁명 완수를 위해서는 반드시 산업화(공업화)를 달성해야만 했다.[15] 그러나 쿠바 혁명정부의 태도에 확신이 없었던 소련[16]은 쿠바 혁명정부가 만족할만한 지원을 해주지도 않았고, 지원 약속을 성실하게 이행하지도 않았다. 더욱이 빠른 산업화를 통한 공산주의 사회 건설을 꿈꾸던 쿠바에게 사탕수수 생산에 의존하는 경제의 유지를 강요하다시피 제안하는 소련은 새로운 경제적 종속 관계를 요구하는 것으로 비추어졌다.

그가 향한 곳은 독립국 탄생이 한창이던 아프리카였고 그 곳에서 내전이 한창인 콩고에서 자기 자리를 찾으려 했다. 그러나 스페인어가톨릭으로 공통점이 많은 남미와는 달리 생소한 환경의 아프리카는 그가 생각한 세상이 아니었다. 자칭 공산주의자들은 약탈밖에는 관심이 없는데다 총소리만 들어도 앞다투어 달아나는 오합지졸들뿐이었다. 게다가 중국과 소련 간의 갈등은 이곳에서도 그의 발목을 잡아 친소 국가인 쿠바 출신의 그를 중국의 지원을 받는 콩고 공산세력은 다짜고짜 적대시했다. 연이은 좌절에 피폐해진 그는 일단 남미혁명이라도 완수하겠다고 생각, 1966년 11월 변장한 채로 볼리비아로 입국하게 된다.

2.5 볼리비아에서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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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바라는 볼리비아 공산당과 연계해 혁명을 일으키려 했으나 소련에게서 낙인찍힌 그를 볼리비아 공산당은 대놓고 군 식구 취급했고 여기 지휘권 문제까지 불거지자 거의 빈손이나 다름없이 정글로 향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보수적인 볼리비아 농민들[17] 또한 이 외지인들을 반기기는커녕 적대시하여 신고를 하는 지경이었고, 현지 원주민들은 백인인 그의 말을 들으려조차 하지 않았다.[18] 사실 볼리비아에서 공산당 지지 세력은 농민들이 아니라 광부나 도시 노동자였으나 그 누구도 이 사실을 알려주지 않았다. 심지어 오랜 동지인 카스트로조차 침묵했다.

거기에다 미국의 추적이 더해졌다. 너무 유명해진 그는 미국에게도 카스트로 다음 가는 눈엣가시로 여겨졌고, 그의 입국이 확인되자 CIA가 나서서 네이비 씰에 의해 양성된 정예 레인저 부대를 인간 사냥에 투입했다. 그의 목에는 자동차오토바이를 비롯한 거액의 현상금이 걸렸다.

영양실조이질에 시달리며 11개월 동안 추격을 피해 도망쳤으나 결국 1967년 10월 8일, 추로 협곡 전투에서 본대와 떨어진 상태로 몇 안되는 부하들과 함께 정부군 특무대대의 매복에 걸려 그 자신도 총상을 입고 생포된다. 생포 당시 게바라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쏘지 마라! 나는 체 게바라다. 죽이는 것보다 살려두는 것이 더 가치있다."[19][20]

그 당시까지만 해도 게바라는 고국 쿠바와 세계의 좌파 지식인들이 자신을 살리기 위한 구명운동을 펼칠 거라고 믿었던 듯하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이었을 것이다. 미국이 불법적으로 처형한 것에는 이유가 있던 것. 일단 게바라는 게릴라전이긴 했지만 군복을 입은 전쟁 포로이므로 교전단체로 인정받을 수 있고, 설령 그렇지 않고 전범으로 기소하더라도 범죄자를 정식재판없이 즉결처분을 하는 것은 법치국가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여하튼 게바라가 생포될 당시의 기록에 의하면 그는 소총권총 한 자루, 단도, 롤렉스 시계[21]담배 파이프 두 개를 지니고 있었으며, 또한 그의 가방에서는 1만 5천 달러가 발견됐다.[22] 당시 그는 이발과 면도를 오래동안 하지 않아 매우 지저분한 모습이었으며, 북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전통 신발인 모카신을 신고 있었다.

그는 한 학교에 감금되었다. 다음 날인 9일에 CIA의 지령을 받은 볼리비아 정부는 그를 살려두면 훗날 큰 화가 생길거라고 판단하여 그를 비밀리에 죽이기로 결단하였다.. 하지만 당시 볼리비아에는 사형제도가 없었으므로 대외적으로는 게바라가 전투 중 부상으로 숨졌다고 발표하였다. 그를 사형시킬 때 몇몇 병사들이 거부해 병사들을 억지로 술을 먹여 취하게 한 뒤 총으로 쏘았다는 설이 있다. 그는 처형 직전 빈사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주저하는 집행자에게

"당신이 날 죽이려고 온 것을 알고 있다. 떨지 말고 방아쇠를 당겨라! 당신은 단지 한 사람을 죽이는 것 뿐이다!"[23][24][25] 라고 일갈했다고 전한다.

체 게바라 자체도 그렇지만 최후에 대한 부분은 루머와 정치적 왜곡이 개입될 수 있는 부분이므로 학술적으로나 토론에서 근거로 사용하고 싶은 분은 확실한 출처가 있는 서적과 자료를 통해서 확인한 뒤 판단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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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디 알보르타가 체 사후에 찍은 마지막 사진.

2.6 죽음 이후

사후, 그의 죽음을 입증하기 위해 볼리비아 정부는 그의 손을 잘라 고향 아르헨티나 또는 카스트로에게 보냈다.[26] 그의 데드마스크는 정확하지 않았는데, 얼굴이 이미 훼손되었기 때문이며, 때문에 그들은 그의 손을 보냈는데, 이는 그를 식별한 증거는 그의 지문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의 사체는 비밀리에 매장되었다가 30년이 지난 1997년, 유족을 포함한 볼리비아/쿠바 합동 조사단에 의해 바예그란데의 어느 폐쇄된 활주로에서 발굴되었다. 이에 쿠바 정부는 추모 주간을 선포했고 대규모 국장 행사를 진행한다. 심지어 산타클라라에 게바라를 추모하는 사원까지 생겨났다.

3 평가

간단히 말해서 혁명가로서는 성공했지만 정치가로서는 실패한 남자라는 평으로 압축할 수 있다.

3.1 상품화 된 혁명가 우상

결과론적으로만 보자면 그는 실패하고 단명한 비운의 혁명가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인기는 사후에도 식을 줄 모르고 계속되었고 결국은 그를 불멸의 영웅으로 만들었으며 공산권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할리우드에서 세 번 씩이나 영화화가 되었으며[27] 다방면에서 상품화가 된 유일한 인물이었다. 논란은 있겠지만 프랑스의 철학자인 장폴 사르트르는 그를 '금세기의 가장 완벽한 인간'이라고 평하기도 했다. 그는 아직도 제국주의와 싸우는 제3세계 민족해방 투쟁의 상징이 되어 아직도 21세기를 살아가는 불멸의 투쟁가로 기억되고 있다.

최소한 엘리트 지식인(의사)이었던 사람이 모든 것을 버리고 총을 잡고 혁명에 나선 일이나, 혁명이 성공한 뒤에는 권력다툼이나 하고 부정부패로 재산 모아서 잘먹고 잘 살 궁리나 했던 동료들에 비해, 쿠바 혁명 성공 뒤에도 그 자리를 박차고 나가서 마지막까지 혁명의 최일선에서 싸우다 죽어간 고결함 만으로도 인기의 비결은 충분히 설명될 듯(쿠바에서 떠난 것을 권력다툼에서 밀려서라고 해석할 수도 있지만, 그래도 다른 사람이었다면 쿠바에서 재산 잔뜩 챙긴 뒤에 중립국으로 튀어서 평생 편하게 호의호식하며 살았을 게 분명하다. 아니면 미국 같은 데로 망명해서 미국 정부의 보호를 받으며 카스트로 뒷담화나 까면서 회고록 팔아먹으면서 편히 살거나(...).

반자본주의를 주창하던 그였으나 훗날 자본주의자들에게 의해 상품이 되어버렸다는 것이 참 아이러니하다. 실은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가 있는데, 그 첫 번째는 그가 젊어서 죽은 데다 대단한 미남이었다는 것이다. 항상 군복에 수염도 깎지 않은 모습이었지만 그래도 눈에 뜨일 정도였으니. 청년 시절 사진을 보면 어지간한 배우는 저리 가라 할 정도의 꽃미남이다. 또 다른 이유는 위의 별 붙은 베레모를 쓴 유명한 사진을 찍은 코르다가 그 사진에 한해 저작권료를 받지 않겠다고 발표한 것이다. 아무나 그 사진을 써도 상관 없게 되었으니, 저항의 상징이자 젊은 순교자 이미지를 팔아먹으려는 전 세계 회사들이 앞다투어 그의 얼굴을 광고에 사용한 것이다. 체와 전혀 상관 없는 오스트리아스키 회사 Fischer에서는 "스키의 혁명"이란 문구로 체의 얼굴을 써먹었고, 은 입에 대지 않았던 체의 이름이 붙은 술도 나와 있다.[28] 스노보드 바닥에도 있고...국내에서도 게바라를 검색 엔진에서 치면 티셔츠 등 꽤 많은 상품이 올라온다. 심지어 축구공이나 속옷에까지 쓰이는 등 상업적으로 마구 쓰이고 있다…

그러다 보니 얼마 전에 저작권자가 저작권 등록을 했다고 한다. "그가 죽은 뒤에, 그를 상업적인 아이콘으로서 써먹은 서구 기업가들에 의해 그의 이미지가 과대포장되었다."라며 인물에 대해 근본적인 부분에서 문제를 제기하는 주장마저도 나오는 실정. 후일 체와 함께한 최후의 게릴라였던 부스토스가 체 티셔츠를 입고 다니는 젊은이에게 "그걸 왜 입나"라고 물어보자 대답을 못했다는 에피소드도 있다. "체는 이미지가 되어 버렸다"는 게 전 게릴라의 씁쓸한 회상.

3.2 긍정적 평가

천식과 같은 신체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격렬한 운동과 고강도 노동, 게릴라전까지 감내하는 극기력은 체 게바라의 삶에 바탕이 되었다. 현실에 안주하지 않는 그의 성품은 안락한 의사의 길 대신 혁명가의 길을, 승리한 혁명사회의 각료로써 누리는 삶 대신 혁명가의 삶을 살게 하였다. 혁명가로서 종속된 라틴아메리카 대륙에서 빈곤과 억압으로 고통받는 이들을 해방시키고자 한 체의 이상은 라틴아메리카인들 뿐만 아니라 많은 이들에게 감명을 주었다.

소련이 국제 공산당의 중심으로서 서구 좌파 학생들에게 이상향으로 여겨지던 시절에는 스탈린이 존경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스탈린 사후 흐루쇼프의 폭로와 더불어 소련군이 무력으로 헝가리 봉기프라하의 봄을 진압하면서 스탈린에 대한 환상은 깨져버렸고 소련에 대한 동경도 많이 퇴색되어버렸다. 이때 68혁명으로 대표되는 신좌파의 발흥과 함께 그 공백을 채우고 부상한 것이 호치민, 마오쩌둥, 체 게바라, 그리고 피델 카스트로였다. 호치민은 베트남 전쟁을 반대하는 반전 운동까지 결부되어 일종의 철인과 같은 존재로 여겨졌고, 마오쩌둥은 문화대혁명의 실상이 알려지면서 스탈린과 같은 신세로 추락하였다. 체 게바라는 상술되었듯이 잘 팔렸고 여전히 혁명의 아이콘으로 기능하고 있다. 피델은 여전히 집권 중인 생존 중인 지도자로서 이제는 그 대우가 조금 미묘한 듯. 체 게바라가 혁명의 아이콘이라면 피델은 혁명의 화석이라나.

옛날 한국에서도 군사/독재정권시대에 운동가를 비롯한 대학생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은 인물이기도 했다. 그의 일대기를 가지고 다니다 걸리면 큰일나므로, 노트에 옮겨써서 신입생들에게 읽게 했었다. 지금도 체게바라 평론은 유독 잘 팔린다.

근래에 남미에서는 체 게바라가 신성시되는 조짐을 보이고 있다. 특히 볼리비아에서 이런 현상이 강하며 남미 신문들은 아예 대놓고 게바라의 사진에 "성 체 게바라"라는 설명을 달아놓기까지 한다고 한다. 일각에서는 이런 추세면 수백 년 뒤에 게바라가 가톨릭의 성인의 반열에 오를 것이라는 예측을 하기도 하는데 과연? 하지만 정작 체 게바라의 측근들은 게바라가 성인 대접을 받는 것에 대해서는 별로 좋지 않게 보고 있다고 한다. 거기다가 게바라는 자신의 어머니가 자신에게 기독교를 믿으라 하자 거절할 정도였다. 공산주의자가 종교를 믿을 리가 있나.[29].[30] 사실 엘살바도르오스카 로메로 대주교도 성인 시성을 추진하고 있지만 정치 참여 때문에 논란이 많다. 하물며 가톨릭 교회와 별 관련도 없었던 게바라가 성인으로 시성될 지는… 아무래도 성인에 오르는 일은 여러 모로 없을 듯 싶다. 다만 알포다에 따르면 체의 시체를 본 사람들은 모두 그가 예수를 닮았다고 하니 종교적 추앙은 지속 가능성이 있다.

3.3 비판

체 게바라는 이상론자였으며 현실성이 떨어졌다는 지적이 있다.

카스트로 평전을 썼던 로버트 E 쿼크는 게바라가 의사면허를 턱걸이로 취득하였고, 의사로서 고정적인 수입을 받고 안정적으로 생활할만한 실력이 아니었으므로, 외래진료활동을 많이 다닌 것이며, 애초에 안정적인 직장을 잡을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모험이나 유흥을 즐기고, 그러한 행동의 연장으로 혁명에 가담한 것이라고 추정했다.

쿠바혁명 과정을 살펴봐도, 카스트로나 체의 계획 능력은 매우 떨어졌고, 우연찮게 프랑스 언론을 통하여 해외로 알려지게 된 것으로 크게 덕을 봐, 결국 본인들의 능력보다 서구언론이라는 외부적인 요인으로 인해 성공하였으므로 유능하기 보다는 운이 좋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진작부터 피델 카스트로가 언론 플레이를 하며 자신들의 활동을 알리는 것에 적극 노력하였으므로 순전히 운이라고 보기에는 애매한 부분이 있다.

게다가 혁명에 성공하여 쿠바 중앙은행장으로 재직할 당시 무리한 국유화와 국고의 낭비로 쿠바 페소는 휴지조각이 되었으며 산업부 장관 시절 인프라 부족을 지적하는 학자들의 충고를 듣지않고 공업화 정책을 강행하다 참담한 실패를 맛보았다.

3.3.1 반대파 학살과 정치범 수용소

그는 혁명 직후 반대파 숙청과 처형을 지휘했으며, 또한 쿠바와 볼리비아, 콩고에서 혁명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처형하기도 하였다. 구체적으로 카스트로의 지시로 쿠바의 라 카바나에서 정치범 수용소를 건립했는데,[31] 체는 그곳 소장으로 재직하였다. 형무소에서는 인민재판소가 설치되어 많은 '반혁명분자들'이 처형되었고, 게바라 자신도 사형집행조에 참여되어 직접 사살을 집행했다. 개중에서는 체가 소녀임산부권총으로 사살하기까지 했다는 주장도 있다. [32]# 사살했는지는 불명. 이쯤되면 반공 쿠바 망명자의 카더라에 불과해보인다 체게바라가 카스트로에게 친선대사의 자리를 받아[33] 국외로 가기전까지, 3개월 간 형무소에서는 매일같이 사람들이 죽어나갔다. 그래서 라카바냐 형무소는 지금도 쿠바에서 제일 유명한 형무소로 공포의 상징이다.[34]

문제가 되는 것은 형무소에서의 처형이 정식 재판을 통해 진행된 게 아니라 인민재판을 통하여서 진행되었다는 점이다. 인민재판이라는 것은 법적인 절차나 법리에 따르지 않고 재판에 참여한 좌중들이 죽이라고 하면 그대로 사형을 집행하는 방식이었다. 수감인 중에서는 중죄인만 있던 것이 아니라, 단순히 정치적인 견해가 달라서 수감된 자나, 아주 경미한 범죄를 저질렀거나, 아무 죄를 저지르지 않았는데 혐의가 있다는 이유로 투옥된 사람도 적잖게 있었다. 인민재판을 거치면서, 좌중들의 군중심리에 이끌려 죄가 없음에도 사형수로 몰려 처형되는 일이 빈번하게 있었다.[35]

특히 정치범 처형의 경우 체의 경력에서 크게 문제가 되는데, 이들 정치범들이 주로 카스트로와 정치적인 견해가 다르다는 이유로 투옥된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바티스타의 독재에 항거한 혁명가가, 카스트로 독재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 정치범들을 투옥하고 처형했으니, 그의 혁명실적과 정면으로 모순되는 행적이었다.

하지만 단순히 견해가 다른 정치범을 처형한 것이 아닌 바티스타 집권 기간 중 횡포를 일삼거나 백색테러를 저지른 혐의가 확인된 이들을 처형시킨 것을 과연 문제시할 수 있을지는 이견이 남는다. 실제로 쿠바 정부는 오늘날까지 사형제를 유지하고 정치범 투옥을 지속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테러나 유혈사태를 획책하지 않은 이상 정치범을 사형시킨 사례는 없었다. 즉, 쿠바 혁명 이후 처형된 '정치범'이라는 것은 한국으로 치면 서북청년회 같은(...) 같은 무리와 비슷한 상황. 프랑스베네룩스 3국에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친독파들을 다소 군중심리적인 상황에서 처형한 것은 시대상을 고려하여 크게 규탄 받지 않는다.

3.3.2 볼리비아에서의 혁명 활동에 대한 비판

체 게바라를 생포한 가리 쁘라도 장군은 그의 실패원인을 크게 3가지로 꼽았다.관련칼럼

첫째로, 볼리비아에 반정부 활동을 하러 온 것이다. 애초에 그가 게릴라전으로 큰 성과를 거뒀던 쿠바의 경우 바티스타가 독재를 일삼고 그에 대한 민중의 발발이 컸기 때문에 반정부활동을 하기에 좋은 환경이었지만, 볼리비아의 경우에는 새로히 들어선 군사독재정부가 도시 노동자층의 파업을 탄압하고 민주화 세력을 가두어놓았지만 1952년부터 1964년까지 이어진 민주정부의 혼란스럽고 성과없는 개혁에 지친 상당수 농민들에게 있어서 나라를 안정시킬 세력으로 보였기에[36]농촌에서의 민심이반은 적었다.

둘째로, 보급이나 연락이 원활하지 않은 상태에서 병력만 분산하여 정부군에게 각개격파 당할 빌미를 제공하였다. 그결과 정부군이 병력을 집중하여 흩어진 다른 게릴라 부대를 공격할 때에는 서로 연락이 닿질 않아 도와주질 못하다 궤멸하였다.

마지막으로 자기자신의 목숨을 보존하지 않았다. 교전에서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더이상 승산이 없다면 수염과 머리를 깎고 민가에 숨어들거나, 국외로 탈출하거나 다음기회를 노릴 수도 있었는데 그렇게 하질 않았고, 성과도 나오지 않는 상황에서 교전만 고집하다가 끝내 붙잡혀 죽음에 이르렀다.

많은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은 바로 게바라가 대체 왜 볼리비아에서 게릴라전을 시작했는가이다. 게바라가 볼리비아 사정에 정통한 것은 절대 아니었다. 그에게 볼리비아란 여행하다가 거쳐간 곳에 불과했다. 게릴라전에서 가장 기본적인 것은 현지화 전략이다. 정부군보다 현지를 더 잘 알아야만 정부군보다 열등한 장비와 보급 속에서 주민들의 지지를 획득하여 효과적인 게릴라전을 수행할 수 있다.

그런데 당시 볼리비아는 1950년대에 토지개혁을 실시하여 농민의 토지문제를 해결하였고, 1964년에 군사쿠데타가 일어나서 반발이 거세기는 했지만 새로이 들어서 군사정권도 토지개혁만은 뒤엎지 않아서 농촌지역에서의 민심이반이 적었다. 그렇기 때문에 게바라의 게릴라전은 실패할 수 밖에 없었고 게바라의 볼리비아 혁명 활동을 두고 '자살 여행'이라고 비하하는 사람들 까지 생겨났다. 볼리비아행을 옹호하는 지지자들의 논리 역시 여기에 대해서는 뚜렷한 답변을 하지 못한 채 '남아메리카 한가운데에 위치한 볼리비아를 혁명기지로 만들어 남아메리카 각국에 혁명을 수출하려는 계획이었다'는 말만 거듭하는 상황이다. 성공을 해야 각국을 혁명을 수출하든지 말든지 할 것이 아닌가.

좌익의 입장에서는 게바라의 노선은 극좌모험주의라고 비판받고 있다.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서두른 무장봉기 때문에 자신의 목숨도 잃었을 뿐만 아니라 그 지역의 혁명조직도 깡그리 씨가 말랐다는 것이다.[37]

4 명언

"네 자유와 권리는, 딱 네가 저항한 만큼 찾는다."
"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자, 불가능을 요구하자."[38]
"난 해방자가 아니다. 해방자는 없다. 민중이 스스로 해방하는 것이다."
"시간은 어느 누구의 사정도 봐주지 않는다. 나이를 한 살 더 먹는다는 사실을 생각하며 전사로서 내 미래에 대해 깊이 성찰한다. 그러나 당장은 타협하지 않겠다라고 결심한다."
"수단이 비열하다면, 결코 목적은 정당화 될 수 없다."
"나는 결코 후회하지 않는다. 그것은 자유 의지에 따른 신념의 소산이었다. 나는 68년 혁명을 함께 한 내 또래를 '메시아를 기대한 마지막 세태'로 본다."
"우리는 이론을 만들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해야할 것은 오직 행동이다."
"무릎을 꿇느니, 서서 죽겠다."
"피델 카스트로에게 아메리카에서 영광스러운 혁명 성공의 그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전해주게. 내 아내에게는 재혼해서 행복하게 살라고 전해주게나."[39]
"폭군은, 폭군으로 변할 새 지도자로 대체될 뿐이다."
"죽음을 각오한 이 투쟁에는 전방이 따로 없다. 제국주의에 맞서 싸운 그 어떤 나라의 승리도 우리의 승리인 것처럼, 패배도 우리 모두의 패배다."
"침묵은 다른 방식으로 펼친 주장이다."
"혁명은 다 익어 저절로 떨어지는 사과가 아니다. 떨어뜨려야 하는 것이다."
"많은 이들이 나를 모험가라고 부르겠지만, 나는 다른 류의 모험가다. 자기 의견을 증명하기 위해 목숨을 거는 모험가다."
"무언가를 위해서 목숨을 버릴 각오가 되어 있지 않는 한, 그것이 삶의 목표라는 어떤 확신도 가질 수 없다."
"우습게 들릴지 모르지만, 진정한 혁명가를 이끄는 것은 위대한 사랑의 감정이다. 이런 자질이 없는 혁명가는 생각할 수 없다."
"유엔미국의 개다."
"도전이 당신을 유혹한다면 그것은 만족할만한 초대이다."
"역사를 기록하는 혁명가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임무는, 손가락에 꼭 맞는 장갑을 끼는 것처럼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고수해야 한다는 것이다."
"가장 훌륭한 자서전은 미래를 쓰는 것이다"[40]

5 대중 작품 등의 모습

뮤지컬 에비타에서 나오는 건 유명하다. 다만 본인이 아니고 어디까지나 '체'라는 인물로, 한국 연출을 제외하고는 직접 게바라로 그려지지 않으니 유의할 것.

그의 일생을 바탕으로 만든 영화의 예고편. 주연은 베니치오 델 토로.
체 게바라의 일생을 담은 영화이기에(정확히는 혁명 전/후 몇 년 동안만) 시간은 4시간 이상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상하게 국내 개봉이 안되고 있다. 옆나라 일본에선 1, 2부가 DVD까지 나온 판인데...(이념 논란을 얘기하는 사람도 있으나, 체 게바라 평전도 나온 마당에 그럴 가능성은 없다. 실제 원인은 살 사람만 사는 한국 시장의 시궁창스런 환경이 제일 큰 문제.)하지만 DVD가 국내에서 출시되었다.

팬텀 하록의 수토수노툰에서도 등장. 마지막 장면에서 체로로(체 게바라+케로로)로 패러디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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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식으로 변형(?)되기도 한다. 자꾸 어딘가로 눈이 가면 지는거다
다름아닌 체 게바라의 손녀 리디아 게바라(Lydia Guevara)이다. 위 사진은 채식주의 캠페인 홍보 일환으로 찍은 것이다.

러시아의 베스트셀러 작가 드미트리 글루코프스키의 포스트 아포칼립스 SF 소설인 <메트로 2033>과 <메트로 2034>에서는 체 게바라의 이름을 딴 붉은 여단이라는 이름의 세력이 등장하는데, 이들의 정식 명칭은 '제1차 인터내셔널 모스크바 메트로의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 붉은 전투 여단'이다(길다, 길어.). 이들은 핵전쟁 이후 피란민들이 모여들어 생활하고 있는 모스크바 지하철에 공산 혁명을 일으키려고 한다. 이들은 레프 트로츠키와 게바라의 사상을 계승하고 있는 세력들이라고 볼 수 있다.

메탈기어 솔리드 피스 워커에서 네이키드 스네이크의 모티프가 되었다. 작중에 체 게바라에 대한 언급이 다수등장하는데다 찬양 일색이며 이야기가 진행되어 갈수록 스네이크가 게바라와 동일시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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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략 이런식으로.

마음의 소리에도 나와서 기생수가 되었다#

바키 시리즈에서 체 게바라를 모델로 한 쥰 게벨이 등장한다.

6 기타

  • 잘 알려져 있다시피, 마테차를 즐겨 마신 것으로 유명하다.
  • 체 게바라는 공식적으로 두 번을 결혼했으며 총 6명의 자녀를 낳았다. 현재 그의 유가족들은 부친이 상품화되는 것에 큰 불만을 토로하고 있다.[41]
  • 쿠바의 특산품이라 할 수 있는 시가를 지킨 사람이라고도 한다. 카스트로가 시가는 미국 부자들의 상징이라고 없애려 하자 지독한 골초이기도 한 체 게바라가 '시가는 쿠바의 상징'이라고 하며 말렸다고. 결국 마르크스 레닌의 시가가 등장했다
  • 여담이지만 체가 체포되기 전 몇 명의 동지가 생포 당했는데, 프랑스의 철학자 출신 레지 드브레와 화가 출신의 시로 부스토스의 체포 후 행적은 논란이 되었다. 그간 알려진 바로는 드브레는 끝까지 불지 않았고 대신 화가 출신인 부스토스가 겁에 질려 상세한 게릴라들의 초상화를 그려줬고, 그 때문에 체가 죽었다는 평가가 있었으나, 그러나 부스토스의 자서전과 체의 전기 작가들에 의하면 반대로 드브레가 CIA에 핵심적인 정보를 제공한 배신자였고 부스토스는 일부러 3주 동안 거짓된 신분을 내세워 조사에 혼선을 가져다줬을 뿐 아니라 그려준 초상은 일부러 사실대로(...) 수염투성이 얼굴로 그려 알아볼 수가 없게 만들었다고 한다.[42] 후일 부스토스는 복잡한 남미의 정치 환경 때문에 30년형 수감 -> 좌파 정권 집권으로 석방 -> 우파 테러단체의 살해위협에 스웨덴에 망명하는 과정을 거쳤다고 한다.(경향신문, 2013.07.10)
  1. 체 게바라 하면 딱 떠오르는 이 사진은 쿠바의 사진작가 알베르토 코르다가 1960년 3월 5일 아바나 혁명광장에서 우연히 찍은 사진이다. 도촬이잖아! 당시 라 쿠브르호 폭발 사건 희생자를 추모하기 위해 모인 집회에서 찍었던 이 사진은 훗날 게바라를 상징하는 절대적인 아이콘으로 부상한다.
  2. 미국인 아니 전세계인 대부분은 그가 쿠바인인줄 알고 있다..지금까지도.
  3. 쿠바인이라는 말이 틀린 것은 아니다. 카스트로에 의해 특별히 법적으로 쿠바 국민이 되었다. 또한 그는 그 스스로를 그렇게 여겼다고 한다.
  4. 다만 이것은 오리지널 프로덕션의 경우로, 이후의 프로덕션에서는 게바라 대신 익명의 해설역이 등장하기도 한다.
  5. 우리나라를 비롯해 세계 대다수 지역에서는 그다지 유명하지 않으나 이탈리아 및 스페인어권, 포르투갈어권 지역에서는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이탈리아의 쥘 베른이라는 호칭까지 듣고 있는 이탈리아 출신의 모험 소설가. 여러 작품을 남겼지만 말레이시아를 배경으로 한 산도칸 시리즈와 앤틸러스제도 해적 시리즈가 가장 유명하다. 19세기 제국주의의 광풍이 휩쓸던 시대답지 않게 앤틸러스제도 해적 시리즈를 제외한 대다수 소설들의 주인공은 비백인종이고 백인은 악당이거나 취급이 좋아도 주인공의 조력자 정도였다. 비단 체 게바라뿐만 아니라 아옌데, 푸치니, 움베르토 에코 등등이 그의 애독자였고 특히 움베르토 에코는 그의 소설에서 여러 번 살가리를 언급했다. 참고로 살가리의 소설들은 그의 생전에 이미 엄청난 인기를 끌었으나 비평가들에게는 혹평받았고, 거기에 가난까지 겹치면서 살가리는 1911년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6. 학창시절 미식축구를 즐겨했다고 한다.
  7. 이것을 소재로 만든 영화가 <모터사이클 다이어리>다. 2011년 88살에 세상을 떠난 그라나도는 이 영화를 매우 호평했다.
  8. 대장 피델의 친동생이다.
  9. 포코 이론에 따라 쿠바 혁명 전쟁 당시 혁명군의 주요 임무는 전투가 아니라 주민에 대한 봉사와 이를 통한 지지였다. 쿠바 혁명 전쟁 중 게바라가 매우 뛰어나고 중요한 존재였던 이유 중 하나는 그가 쿠바 빈농들에게 절실히 필요하지만 아무나 할 수 없는 '의료 봉사'를 제공할 수 있는 '의사'였다는 점이었다.
  10. 이 시절 새로운 은행 건물을 건설하고자 직원들이 새 건물의 청사진을 들고 왔을 때, 체 게바라는 건물에 엘리베이터가 있다며 매우 화를 냈다는 일화가 있다. 자신은 천식 환자임에도 불구하고 안데스 산맥을 돌아다녔다고... 독종 눈에는 독종들만 보이나 보다.
  11. 카스트로가 회의 중 "여기서 경제전문가(economista)가 있나?"라고 묻자 게바라가 바로 자신이라고 대답했다. 그래서 카스트로는 "그럼 자네가 국립은행 총재일세."라고 말했는데, 사실 게바라는 공산주의자(comunista)를 찾는 줄 알았다고 한 일화가 있다. 이 일화는 사실이 아니고 당시 파격적이었던 경제 인사를 두고 나온 얘기다.
  12. 연출이라는 의견이 있다. 실제로 사진촬영을 좀 많이했고, 언론등을 통해 노동하는 사진들이 많이 퍼졌다.
  13. 유고슬라비아의 자주관리기업에서 영감을 얻었다.
  14. 헬렌 야페의 <체 게바라, 혁명의 경제학> 참고
  15. 카를 마르크스는 '산업화와 자본주의의 발달 후 공산사회가 등장할 것이다'라고만 말했고, 블라디미르 레닌은 '자본주의 발달 후 노동자들이 폭력적인 방법을 통해 사회주의 혁명을 달성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을 뿐이고, 이오시프 스탈린은 '있는 것 다 쥐어짜서 공업에 투입해 공산주의 사회를 만들면 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심지어는 마오쩌둥조차 공산주의 사회 건설을 위해 '대약진운동'이라는 인류 역사상 초유의 병크를 터트린다. 이렇게 공산주의 국가들이 공업화에 목숨을 건 이유는 이론상 공산사회는 산업자본주의 사회 이후에 등장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16. 라울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는 혁명 전쟁이 시작될 때부터 사회주의자였으나, 카스트로의 정치 성향은 애매했다. 그래서 쿠바 혁명군은 공산주의 혁명군보다 반 바티스타 연합군에 가까웠다. 실제로 피델 카스트로의 혁명 지지자 중에는 극우부터 극좌까지 모두 포함되어 있었고, 이로 인해 초기 혁명 정부 주요 인사가 타국으로 망명하는 사태가 심심찮게 발생했다. 미국은 바티스타 정권에 반대하고 사탕수수 농장 및 각종 산업시설의 국유화를 주장하는 카스트로에 대해 섣불리 공산주의자라고 규정내렸지만, 쿠바의 상황에서 누가 혁명을 일으키든 - 심지어 우파가 혁명을 일으켰더라도 국유화는 피할 수 없었던 것이었던 것이다.
  17. 볼리비아는 당시 남미국가로는 이례적으로 자작농 비율이 높았다. 그 이유는 체가 오기 16년전인 1952년에 혁명이 일어나서 토지개혁이 이미 진작에 실시된데다가 1964년 쿠데타로 민주정권을 뒤엎고 들어선 독재정권에서도 토지정책 만큼은 뒤집지 않았기 때문에 농민들의 반발이 적었다.
  18. 애초에 스페인의 압제에서 해방하겠다고 싸운 남미 독립 혁명가, 지도자들부터가 자신들이 백인 문명인이라는 우월감을 가지고 원주민들을 탄압해왔던 역사가 있었으니 이에 시달렸던 원주민들은 역시 백인인 체 게바라도 믿지 못하는 게 당연하다.
  19. 확실하지는 않다. 신뢰도 있는 출처 추가바람.
  20. 생포 직전에 옆에 있던 동료가 "그는 게바라 사령관이다. 예의를 갖춰라."라고 말했다는 설도 있다. 확인 바람.
  21. 체 게바라 같은 이들이 롤렉스를 선택한 이유는 당시 시계 중 독보적인 견고함과 실용성 때문이었다. 쿼츠 시계가 실용화되고 널리 이용되기 시작한 것이 1970년대의 일이다. 이전에는 악조건에서 쓸만한 시계라고는 기계식 시계밖에 없었다. 그 중에서도 롤렉스는 튼튼함과 방수기능으로 인하여 명성이 높은 시계였기 때문에 게바라가 롤렉스를 선택한 것은 당연하다. 실제로 그는 인터뷰에서 롤렉스를 극찬했다. 달라이 라마의 시계도 롤렉스 문서를 참조할 것. 체게바라 알고보니 자본주의의 돼지였네라고 오해하지 말 것
  22. 활동자금을 현금으로 소지하고 있었던 듯하다. 그 시대 그 상황에서 계좌의 자금을 유용할 수는 없었을 테니...지폐의 위대함
  23. 그러나 아래 나오는 비판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체는 목숨을 구걸했다고 한다. "체 게바라의 진실을 알린다"라는 책을 따르면, 그는 "자신이 살아 있는 것에는 그만한 가치가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고, 또한" 자신이 "재판을 받을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이 말대로라도 전혀 목숨을 구걸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고 오히려 당당히 권리를 주장하고 협상을 하는 모습으로 보일 뿐이므로 다소 편향된 주장이라고 생각된다. 안중근이 재판에서 스스로에게 포로지위를 인정해서 범죄자로 처벌하지 않도록 해달라고 변론하였지만 누구도 이것을 목숨을 구걸했다고 하지는 않는다.
  24. 체의 부대원이였던 '다니엘 알라콘'의 진술에 따르면 살아 돌아온 자신을 두고 카스트로는 미심쩍어 했으며, 체게바라가 죽어서 소련과의 관계가 개선된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25. 체 게바라를 쏜 병사는 주변의 따가운 시선을 못 이겨서 끝내 자살했다고 전해지기도 했으나, 사실인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26. 체의 시체 사진을 찍은 사진사 알보르타의 증언에 따르면 손은 미국 CIA로 보내졌다고 한다.
  27. 처음엔 오마 샤리프가 게바라 역을 맡았으며, 스티븐 소더버그가 감독한 두 번째 영화(2부로 나눠져 있다.)에서는 베니치오 델 토로가 맡았다. 델 토로는 이 역으로 2008년 칸 영화제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28. 코르다는 다른 상품에 그의 사진이 붙는 것은 반대하지 않았지만 이 술에 붙은 것만큼은 술을 절대 마시지 않은 게바라를 모욕하는 것이라면서 소송을 걸었다고 한다.
  29. 기본적으로 게바라는 무신론자였다. 적들에게 십자가에 처박히는 것보다는 십자가에 박으려고 하는 적을 처단하겠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30. 평전을 보면 체 게바라는 반제국주의자로서 "그들의 것은 그들에게"라고 말하는 쪽에 가깝지 공산주의자가 아니다. 쿠바시절에도 공산주의자들을 소련의 원격조종을 받는 허수아비라고 말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그가 공산주의자로 분류된 건 냉전 체제하에서 미국에게 찍혔기 때문에 소련진영에 합류할 수 밖에 없었던 탓으로 보인다
  31. 견해에 따라서는 공직자들의 태업을 체벌하기 위해 건립한 노동 수용소가 정치범 수용소로 왜곡되어 전해진 것으로 본다. 노동 수용소의 경우 본인이 공직자 자격을 사퇴하면 수용소에 들어가지 않아도 되는 방식. - 그러나 공직에서 사퇴하면 형을 면제받을 수 있는데도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갔으므로 이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고는 하지만 라 카바나 수용소를 공직자 교화용으로 운영한 상세한 자료가 남아있으니 마냥 주작이라 하기도 난감하다. 자세한 내용은 헬렌 야페가 쓴 <체 게바라 혁명의 경제학>을 참고할 것.
  32. 라 카바나의 노동 수용소 성격이 위의 주석처럼 공직자 교화 용도였다면 애초에 소녀와 임산부를 살해했다는 주장 자체가 유효성을 잃게 된다.
  33. 외교적 수완이 있고 얼굴이 가장 잘 알려져서 적격이었다.
  34. 라 카바냐 형무소는 애초부터 식민지 시대부터 사용되던 해안 요새를 그대로 이어받아 사용한 것이다. 독립 혁명 이후에도 군사기지로 쓰였으며, 사회주의 혁명 이후에도 이러한 방식으로 쓰였다. 위치상으로도 어디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것이 아니라, 올드 하바나의 내해 바로 건너편에 있다. 현재는 형무소나 군부대로 쓰이고 있지 않으며, 박물관이자 사적지로서 관광객을 맞이하고 있다.
  35. 피델도 혁명 초기 재판과정에서 나타난 군중심리 요소에 대해서는 반성하는 인터뷰를 하였다. 하지만 인터뷰에 따르면 당시 재판은 미국 우익들의 선전과 같이 마구잡이식 학살이 아니라 체계적인 기소에 따라 바티스타 정권에 기생하던 흉악 정치범들을 상대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프랑스의 친독파 숙청 규모가 크다고 해서 그것을 학살이라고 하지 않는 것과 같은 맥락.
  36. 물론 그 안정화시킨것도 어디까지나 일시적이고 1970년대 후반을 정점으로 외채난으로 경제가 추락하면서 1982년에 민주화되었다.
  37. 1930년대 중국 공산당의 리리싼이 벌인 모험주의적 봉기와 비슷한 사례로 비판받는다
  38. 이 말은 가장 유명하지만, 체 게바라가 말한 것인지, 최초의 문구가 누구의 것인지도 확실하지 않다. 이 문구가 알려진 계기는 프랑스 68 혁명 당시 하나의 구호로서 활용되면서 부터이며, 이를 장 코르미에가 평전 앞머리에 실으면서 더 유명해졌다. 프랑스어로 번역된 문장은 보통 Soyez réalistes, demandez l'impossible."이며, 영어로 직역하면 "Be realistic, demand the impossible."이다. 한국에선 "우리 모두 현실주의자가 되자, 그러나 가슴 속엔 불가능한 꿈을 품자."라는 버전이 돌아다니지만 원문을 상당히 의역한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현재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장 코르미에의 텍스트와 68혁명 기간의 기록들 뿐이며, 체가 한 말이라는 증거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혹자는 'Médecin et homme politique argentin'라는 책에서 체가 썼다고도 하지만, 책 소개란에 체를 소개하면서 해당 문구가 실려있을 뿐 본문에 실려있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해당 서적을 구할 수 있는 이는 확인바람.
  39. 체 게바라가 죽기전에 남긴 유언이다.
  40. 이 말은 체게바라 자서전에서 나온 내용이다.
  41. 2012년에 서울대학교로 강연을 온 체 게바라의 딸 알레이다 게바라에 따르면, 체의 가족들이 이탈리아를 방문하였을 때 체의 얼굴이 그려진 티셔츠를 입은 일단의 청년들이 싸인을 부탁했는데 알고보니 그들은 이탈리아산 오리지날 파시스트였다고 한다. 체의 이미지가 얼마나 상품화되어버렸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 그래도 알레이다는 체의 이미지가 사람들에게 혁명적인 영감을 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좋다고 평가했다.
  42. 이후 에우세비오와 칭골로라는 게릴라 대원이 체를 배신하고 체의 은신처로 CIA를 인도했으며, 이것이 직접적인 사망원인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