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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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Exercitus Romanorum. 고대 로마, 다시 말해 로마 공화정 및 로마 제국군대다.
그리스에 비하여 주변 국가와 비교해 경제력과 무장, 인구 등이 월등한 시절이 많았는데, 노레이아 전투, 아라우시오 전투, 론 강 전투, 마살리아 전투, 토이토부르크 숲 전투, 에데사 전투, 아브리투스 전투, 카르헤 전투, 칸나에 전투 등등을 언급하면서 생각보다 못 싸운다며 까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패전한 것만 모아놓고 보면 몽골제국미국도 패배만을 거듭하는 엄청 못 싸우는 국가이며 그리스[1]도 사서를 보면 많은 패배를 겪는다. 당장 그리스군은 로마에게도 많이 진다. 애초에 허접한 수준이었다면 제국을 세우기 불가능 했을 것이다. 로마군은 수많은 문화권의 수많은 군대를 굴복시켜 지중해 최후의 승리자가 된 군대이다.[2][3]

로마가 3개 대륙을 제패하고 지중해를 내해로 만들수 있게 해준 원동력

2 역사

2.1 왕정 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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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의 로마군은 부족 단위로 구성된 집단을 이 이끄는 식으로 구성되었다.
그러다 세르비우스 툴리우스가 정식으로 병력을 징병하는 식으로 제도를 개혁하여 이것이 정착된다.

기원전 500년 이전까진 대략 9,000명 정도를 징병했는데 6,000명 정도는 중보병이고 2,400명은 경보병, 그리고 600명은 기병으로 구성되었다. 왕이 두명의 집정관으로 바뀌면서 이 9,000명은 두 집정관이 나눠서 지휘하게 되었는데 따라서 각각 4,500명씩 지휘하게 된다.

소규모 국가답게 당시 잘 나가던 에트루리아그리스를 적극적으로 모방했으며 에트루리아에게 패배한 이후에는 밀집대형 전법을 익히게 된다. 그러나 그리스의 팔랑크스와는 달리 로마는 백인대를 구성하는데 이는 소규모 부대로 주변 도시들을 약탈할 필요성이 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대다수의 군인들이 농경기엔 농사를 지었었는데 이는 곧 상비군은 많지 않았다는 뜻도 된다.
덕택에 원정 전쟁에선 약한 모습을 종종 보였는데, 큰 문제가 안 되었던 것이 당시 '로마'는 현재의 로마시보다 작았기에 방어적 전투 혹은 로마 주변에서 전쟁한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당시 사용하던 장비는 에트루리아군이나 그리스군과 큰 차이가 없었으리라 추정된다.

자세히 알기 힘든 것이 로마군의 아무리 예전 모습을 추정하더라도 공화정 시기 정도이기 때문에 왕정 시기의 로마군에 대해선 자세히 알기 힘들다. 일단 남아있는 자료가 거의 없고, 그나마 남아있는 사료 등도 믿기 힘든게 많아서 제대로 조사하기 힘들다.

2.2 공화정 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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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리비우스의 군제개혁 이후 로마군의 모습. 좌로부터 하스타티, 벨리테스, 트리아리, 프린키페스이다.

공화정 시기의 로마군은 징병된 시민을 중심으로 조직된 시민군이었다.
자영농으로 구성된 시민들은 무장을 개인적으로 조달했으며, 따라서 재산에 따라 무장이 달라질 수 밖에 없었고 군에 있어서 차지하는 역할도 달라졌다. 사회적 계급이 곧 군의 계급이 된 셈이다. 시민들은 재산 액수에 의해 분류되어 최상위 계층은 기병과 중장보병을, 중위 계층은 중장보병을, 하위 계층은 경장보병을 맡는 시스템이 구축되었다. 로마군의 군율이 이상하다싶을 정도로 빡세면서도 동시에 유연성이 있거나 지휘관의 자질이 매우 중요시된 것도 바로 이 시민병 위주의 시스템 때문이었다.

물론 아무나 입대시킨 건 아니고 만 17세 때 징병검사를 하는데 지적장애, 신체 결손, 중증 질환 등을 앓고 있는 사람은 제외되고 나머지에게 현역 판정을 때렸다. 그리고 집정관이 군을 소집할 때 이렇게 현역판정을 받은 17세부터 시작해 45세까지의 남성이 광장에 소집되어 지명된 사람이 차출되는데, 이들이 1년간 병역을 수행하게 된다.[4]

이렇게 재산별로 나뉜 병사들은 백인대장이 이끄는 백인대에 소속되며 이들은 각각 작은 정사각형들을 구성하며 하나의 커다란 직사각형을 이루었다. 또한 무장의 질과 나이에 따라 이들은 벨리테스, 하스타티, 프린키페스, 트리아리, 에퀴티로 나뉘었는데, 벨리테스는 투창병, 하스타티는 경보병, 프린키페스는 중보병, 트리아리는 중창병, 그리고 에퀴티는 기병이었다.

  • 벨리테스 : 매우 가볍게 무장하였으며 많은 수의 투창을 들고 다니며 전투 개시시 최전방에서 투창을 하는 임무를 맡았다.
  • 하스타티 : 젊은 병사들로 이루어진 경보병으로 전선의 맨 앞줄에 위치하여 적의 체력을 소모하는 역할을 맡았다.
  • 프린키페스 : 로마군의 핵심이자 주력을 이루는 병력으로 이들은 젊고 전투 경험이 풍부한 30대에서 40대 초반의 시민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 트리아리 : 나이가 많은 고참병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이들은 최후방에 위치하며 여러가지 전술적 움직임에 동원되거나 불리한 전선에 투입되는 등의 보조적인 역할을 맡았다.

이러한 시스템은 마니풀라르(manipular) 시스템이라 불리우며 이러한 조합은 삼니움 전쟁때 확립된 것으로 보인다.
이런 로마 고유의 독특한 구성은 로마군으로 하여금 다른 세력에는 볼 수 없는 상당한 유기적인 움직임을 가능케 하였으며 따라서 로마군은 다양한 전술적인 움직임이 가능하였다. 개별 시민들의 전투력 자체에는 그다지 큰 기대를 하지 않았고 유기적인 집단전 수행을 중시했다.

또한 로마군은 그들과 같은 라틴족 도시들로 이루어진 라틴 동맹의 동맹시 또는 속국들에게서 보조병을 징집하여 동원한다.
아욱실리아(Auxilia)라는 이 보조병의 개념 역시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로마만의 독창적인 것으로, 이는 로마 군단과 거의 비슷한 규모의 병력을 동맹시로부터 제공받아 로마군과 같이 싸우는 것이었다. 로마는 보조병을 제공받는 대가로 자신들의 동맹시들에게는 외교권을 제외한 것을 빼고는 완전한 정치적인 자치를 부여하였으며, 세금 역시 강요하지 않았다. 그리고 로마는 그들에게 군사적인 보호를 제공하였다.

이러한 보조병의 존재는 로마의 군비를 크게 절감시켰고, 군사력 또한 크게 상승하게 했다.
그 결과 그리스의 아테네나 테베와 같은 그리스의 대도시에 비해 로마가 해마다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의 양은 상당하였다.
따라서 로마는 대규모의 총력전이 가능하였으며 포에니 전쟁때는 해마다 10만이 넘는 병력을 편성할 수 있었다.
다키아 전쟁 때는 무려 20만이나 동원되었다. 이 때문에 에피루스의 피로스왕은 로마를 머리를 잘라도 잘라도 다시 자라나는 히드라에 비유하기도 하였다.

한니발이 이탈리아에 침입함으로써 발발한 2차 포에니 전쟁때 로마인들은 한니발로 부터 기병 운용의 중요성을 터득한다.
한니발은 우세한 기병 전력을 바탕으로 이들이 빠른 기동력으로 보병 배후로 기동한 뒤 돌진함으로 충격을 주는 전술을 즐겨 사용했고 이는 로마군이 초기에 연전연패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이러한 전술에 연패하고 또 칸나이 전투에서 사상 최악의 패배를 경험한 로마인들은 기병 전력의 확보에 열을 올리게 되었으나 기존의 귀족으로부터 기병전력을 조달하는 방식으로는 충분한 전력을 확보할 수 없었다. 또한 이탈리아의 지형은 대부분이 산지라서 말을 키울 목초지가 부족해서 말을 많이 키울 여건이 안되었다. 때문에 로마인들은 기병부대를 대거 운용하는 이민족 부대 전체를 고용하는 방식으로 기병 전력을 조달하고 더이상 귀족으로 부터 기병을 조달하지 않는다. 그 결과 에퀴티는 더이상 기사가 아닌 계급을 뜻하는 명칭으로 굳어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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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방식의 기병 조달은 훗날 제국 후기에 보이는 로마군의 이민족화의 불씨가 된다는 게 일반적인 통설이다.
단, 이 말은 더 깊이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 제국 후기에 접어들어 기병의 중요성은 점점 높아지지만 적어도 3세기까진 이들은 말만 기병이지 상당수는 하마 보병이었으며 4세기 때는 이런 서술이 확실히 들어맞는 시기긴 하나 여전히 제국은 보병을 기병보다 훨씬 더 많이 운용했고 야만족 부족 단위 계약 용병들인 포이데라티들은 여전히 제국 정규병들의 존재 탓에 행동을 제약당했다. 또한 아드리아노플 전투 이전까지 포에데라티들은 개인별 혹은 소규모 그룹 단위로 로마군에 입대했으며, 대규모 이민족 집단이 로마로 귀순해오면 제국 전역으로 분산시켜 이들이 힘을 결집하는 것을 막았다. 대표적인 사례가 고향인 다뉴브 강 연안에서 멀고도 먼 하드리아누스 성벽 인근에 배치된 사르마티아 기병들이다. 흔히들 생각하는 로마군 최악의 암흑기는 5세기의 이미지인데 대부분의 책들은 2~5세기에서 이어지는 경과들을 단 몇 줄로 축약하는 탓에 이런 오해가 생긴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여전히 주의는 필요하다.

또 로마인들은 칸나이 전투에서 로마군이 밀집상태에 빠져 전멸한 것을 교훈으로 기존의 매니풀라 방식의 전투를 개혁하였다.
로마인들은 백인대들을 따로 모아 정사각형 형태를 이루게 한 뒤 이를 한명의 지휘관이 지휘하도록 하였으며 이는 훗날 마리우스가 코호르스[5]라 명명함으로써 공식화 된다.

이 코호르스의 편성으로 인해 칸나이 전투와 같이 밀집되는 상황이 되면 대대장이 독자적인 판단으로 배후로 방향을 틀거나 전열에서 이탈하여 협공에 대비하는 식의 유연성을 발휘할 수 있게 하여 밀집 포위에 대한 저항력을 높이게 되었다.

이처럼 시대에 맞는 개혁과 기병의 운용으로 인해 로마군은 더 강해졌으나 로마의 전장이 확대되면서 자영농인 시민들에게 군복무는 커다란 부담이 되었다. 장기간의 해외원정으로 농장이 황폐화 되고, 전쟁의 결과 경제적으로 몰락하는 시민이 많아졌던 것이다. 그로 인해 군대에 투입되는 인적자원도 고갈되어 갔다. 때문에 점차 징병을 위한 최소 자산 수준을 낮추는 조치가 있었다. 그러나 로마 역사상 최대의 위기였다고 할 수 있을 한니발 바르카와의 전쟁 중에도 무산자는 소집되지 않았던 이유를 무시한 결과를 톡톡히 치르게 된다. 당장 자산이 낮은 로마시민들의 군대는 무장 수준이 떨어지고, 무산자들은 체력적인 면에서도 빈약한데다가 무장도 제대로 못갖추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로마군의 전체적인 질적 저하를 초래하였다.

보조병을 담당했던 로마의 동맹시들도 점점 상황이 안좋아졌다. 원래 초창기에는 로마가 동맹시들에게 위에 언급한 것처럼 외교권을 로마가 가지고 있는 것을 빼고는 완전한 정치적 자치를 보장하고, 군사적인 보호를 제공했지만 나중에 가면 갈수록 동맹시의 자치를 인정하지 않으며 세금을 강요하기 시작했다. 또한 동맹시의 자치권이 보장된다해도 동맹시의 시민들은 준로마 시민이지 정식 로마 시민이 아니라서 여전히 차별했다. 그래서 이에 분노한 동맹시들이 나중에 반란을 일으키는 중요한 원인이 된다.

따라서 공화정 말기때 로마군은 총체적인 위기를 맞게 되었다. 스페인에서 벌어진 누만시아 전투에서 로마군은 대패하였고, 킴브리족과 튜트네스족의 남하를 저지하려 보내진 두명의 집정관은 목숨을 잃고 아루시오에서는 80,000명의 로마군이 전멸당하였으며 또한 유구르타 전쟁에서는 계속 고전하게 되었다. 이런 상황때 등장한 가이우스 마리우스는 또다시 시대에 맞는 개혁을 함으로써 로마 공화국을 위기에서 구한다.

2.3 마리우스의 개혁, 그리고 내전기

마리우스의 집권 이전 시민군의 의무를 지는 자영농을 바탕으로 하던 로마군은 자영농의 몰락으로 인해 인적자원이 고갈되며 전투력이 저하되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었다. 심지어 마리우스가 군제 개편을 하기 전 로마군은 야만족의 대대적인 침공에 처참하게 무너지기까지 했다. 지중해의 패권국의 군대가 붕괴되는 것은 패권의 연쇄적인 붕괴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는 로마에게는 희대의 위기였다고 할 수 있다. 집정관에 선출된 가이우스 마리우스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군제개혁을 실시하였는데 그는 재산에 따라 징집하던 관례를 없애고, 무산계급까지 모병하는 대신에 그에 대한 임금을 지불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의 방식대로 재편된 로마군은 거짓말처럼 야만족을 완벽하게 격파했다. 물론 마리우스 본인의 군사적 역량이 우수했던 것도 영향이 있었겠지만.

이 개혁으로 인적자원 고갈 문제가 해결되었지만, 상설 군단이라보다는 일종의 계약직으로 운영된 것이 이 시기 로마군의 한계였다고 할 수 있다. 병역 기간이 정해진 것이 아니고, 때에 따라 봉급을 지불하는 군대를 모집하고 필요가 없으면 군대를 해산하는 식이었던 당시 로마군은 이전과는 달리 국가가 아닌, 전리품을 배분해 주거나 돈을 더 많이 주는 군사령관에게 충성하는 사병이나 용병처럼 되는 현상이 일어나게 되었다.

게다가 무산자들로 이루어진 로마 군단병들은 정치에 소외된 계급이었다.
고대 로마의 정치제도를 보면 잘 알 수 있는데, 로마의 관료를 뽑는 백인대 집회에서 무산자 계급은 사실상 투표권이 아예 없었다.
재산이 없는 계급에 해당되는 무산자 계급은 천명이건 만명이건 그 그룹 전체가 192표 중 1표만 행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한표가 영향을 준적은 로마 사상 한번도 없었는데 그 이유는 로마의 선거제도는 투표를 진행하면서 192표 중 과반수가 된 시점에서 투표를 중단하였기 때문이었다. 무산자는 투표권을 가장 마지막에 행사하였고 따라서 이들이 발언권을 보이기 전에 이미 선거가 끝나게 되었다. 그 결과 무산자는 백인대 선거 자체에 구경하는 목적 이외엔 참여의 의미가 없었고 따라서 이들은 공화정 정치가들의 선거 운동 대상이 아니었다. 덕분에 누구도 이들을 제대로 생각해주지도 않으므로 전리품이나 봉급으로 아무리 돈을 모은다고 해도 한도가 있었다. 전쟁은 자주 일어나는 편이었지만 충분하지 않았고, 병사로 일할 수 있는 것은 짧은 기간에 불과했다. 군대를 이용한 실업자 흡수는 결국 일시적인 미봉책에 불과했으며 자칫 현대 제3세계 군대 대다수처럼 사회의 쓰레기장으로 전락할 우려도 있었다.

이때 군사령관들은 휘하의 퇴역병들의 복지를 보장해 줌으로써 지원병의 자질을 확보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게 된다.
일단 상당한 경제적 격차에도 불구하고 전장에서 함께 싸우면서 지휘관과 병사들 사이에서는 '전우'라는 인간적인 유대감이 나타나게 되었는데, 이러한 사례는 내전기의 여러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차후 원로원 의원으로서 정계 영향력 확대를 노리는 군사령관들은 잠재적으로 자신의 열렬한 지지자가 될 수 있는 퇴역병들의 생계를 보장해서 지속적인 지지 세력으로 만들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루쿨루스처럼 그냥 원칙대로 일을 처리하여 적은 봉급만 주었을 뿐 병사들에게 전리품을 나눠주지 않은 경우도 있지만 루쿨루스는 그 때문에 미트리다테스 전쟁에서 완전한 승리를 거두기 직전까지 간 상태에서 병사들의 반항과 파업으로 폼페이우스에게 전공을 빼앗기고 차후의 정치적 입지도 불안해지는 등의 대가를 치렀으므로 야심있는 군사령관치고 자신의 부하들을 어느 정도 챙겨주지 않은 사람은 없다시피했다.

따라서 군사 지휘관들은 퇴역한 병사들의 생계 대책을 위해 정착지와 식민지를 달라고 요구하기 일수였다.
하지만 원로원은 이러한 요구에는 대체로 무감각 하거나, 뭉기적 거리며 제대로 처리해주지 않는 것이 보통이었다.
원로원의 지배적인 파트리아키 파벌에서는 하층민으로 구성된 군대 역시 이전과 마찬가지로 불평쟁이 무산자 집단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이미 그들은 이제 어느 사회에나 있는 무능력한 불평쟁이 무산자 집단이 아니었다.

과거의 개혁자 그라쿠스 형제는 단지 한 줌의 지지자와 무력하고 조직되지 못한 무산 대중 군중밖에 없었기 때문에 원로원에게 허무하게 참살되었다. 그런데 마리우스의 군제 개혁 때문에 이 모든 조건이 뒤집어져 버렸다. 과거 '재산순'으로 유산 계급이 노블리스 오블리제처럼 담당하던 로마의 군사력이 이제는 무산자들이 담당하는 것이 되어버렸다. 그들은 이제 노련한 전사였으며 칼을 가지고 있었다. 더 이상 무질서한 대중의 무리가 아니라, 당대 최고의 조직체인 로마 군대라는 체계를 통해 수천 수만이 조직화 되어 있었다. 또한 로마의 전쟁을 수행함으로서 자신들은 엄연한 로마 제국의 일원이고 제국의 정치에 참여할 권리가 있다는 자부심까지 있었다. 물론 군사적 능력만 존재했다면 이야기가 다르겠지만 대부분의 군단 사령관은 정치-군사 모든 면에서 유능한 인물들이었고 이해관계를 같이하고 인간적으로도 유대감이 깊은 정계 유력자가 자동으로 그들의 지휘관이자 대표자가 될 수 있었다.

빈털터리 무산자 계급으로 시작하여 타국을 약탈하거나 전쟁 배상금을 받아내 인생을 바꾸는 재미를 안 병사들의 눈앞에는 훨씬 먹음직스러운 먹이가 들어왔다. 바로 지중해의 모든 재물이 모여든 조국 로마였다. 야심많은 군사령관들은 이런 보상 심리를 이용하여 로마군이 조국을 향해 칼을 휘두를 수 있도록 만들 수 있게 되었다. 외세의 힘을 빌리는 매국행위도 아니고 어차피 내부 정치 다툼이었으니 더욱 그렇다. 군단 병사들은 야심 많고 능력도 좋은 군단 사령관들의 의중에 쉽게 동조하였다.

이리하여 군사력을 앞세워 정권을 장악하는 쿠데타가 연속으로 벌어졌으며, 이 최초의 쿠데타인 술라의 로마 진군은 고작 마리우스가 군제 개혁을 단행한 뒤 10여년 뒤에 일어나게 되었다. 술라 이후에도 많은 장군들이 쿠데타를 시도하였고 그들 중 권력을 장악하는데 성공한 장군들은 율리우스 카이사르폼페이우스, 옥타비아누스안토니우스 등이었고 이들은 서로 내전을 벌이는 형태로 권력 다툼을 하였다. 결국 이러한 내전이 지속되다 옥타비아누스가 정국 불안정을 없애기 위한 목적으로 공화정 체제를 무너뜨리는 대신 자신이 직접 통치에 나섬으로써 공화정은 종언을 고하게 된다.

2.4 아우구스투스의 재편

혼란을 종식시킨 제국의 황제 아우구스투스(=옥타비아누스)는 항복한 병력까지 합쳐 60개 군단, 50만에 가까운 병력을 보유한 명실상부한 최고사령관이었으나 그 병력을 그대로 유지하는 게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지 아우구스투스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이는 군대는 본질적으로 경제력을 소모하는 비생산적 집단이며, 당시의 로마의 경제력을 생각하면 적절한 수준을 크게 초과하는 병력규모였기 때문이다.[6] 그래서 늘어난 병력을 28개 군단 17만 명까지 감축했다가 너무 부족하다 싶자 보조병을 포함해 30만 명 정도로 늘렸다. 이후 토이토부르크 전투에서 3개 군단이 전멸하며 25개 군단으로 줄어들었는데 방어선이 그럭저럭 갖춰지면서 굳이 보충할 필요가 없다 싶었는지 그대로 내버려뒀고, 이후 클라우디우스 황제 시절부터 브리타니아 원정을 하면서 군단이 다시 증원되어 오현제 시대 직전 28개 군단, 오현제 시대에 30개 군단,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때 33개 군단으로 증원되었다. 또한 이때부터 복무기간을 비롯해 여러 가지가 규정되었는데 그 중 하나가 군단에 복무하는 병사는 20년. 보조병은 25년을 의무복무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편 사령관의 개인적인 군단 모집과 사령관이 병사들에게 사적으로 포상하는 것을 금지하여 군벌화를 막았다.
심지어 사령관이 휘하 병사들을 부르는 호칭마저 변화시켰다. 본래 사령관은 휘하 병사를 전우라는 의미를 가진 '콤밀리테스'라고 불렀는데, 이를 단순한 휘하의 병사라는 의미인 '밀리테스'로 부르도록 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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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병사들의 갑옷도 이 시기에 사슬 갑옷의 일종인 로리카 하마타(Lorica Hamata)에서 하프 플레이트 갑옷 종류인 로리카 세그멘타타(Lorica Segmentata)로 서서히 대체되기 시작한다. 흔히 로마의 병사 하면 떠올리는 이미지는 이 시기에 정립되었다. 다만 간지가 날뿐 실전에는 안 맞기 때문인지 방어가 아닌 공격 혹은 회전을 치르는 상황에서는 로리카 하마타를 주로 착용하고 대신 장구류 보강을 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아우구스투스가 철저하게 방어에만 전념한 것은 아니었으며, 재위 중기에는 양자인 티베리우스드루수스 형제를 등용하여 라인 강 너머 엘베 강까지의 제패를 통해 게르마니아를 제국의 영역 내에 확보하겠다는 야망을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아르미니우스에게 바루스가 이끄는 3개 군단이 전멸당하면서 이러한 움직임은 멈추게 되었고, 제위를 물려받은 티베리우스는 제국의 방어선을 라인 강으로 한정하며 게르마니아 제패를 포기했다.

결국 로마군은 아우구스투스가 게르마니아 제패를 포기한 이래 사실상 국경 방어군으로서의 성격을 가지게 되었으며, 전성기 로마의 국경선은 1만 킬로미터에 달하기 때문에 국경을 방어하는 것 자체가 절대로 만만한 임무가 아니었다. 실제로 아우구스투스 이후의 황제들이 새로 속주로 삼은 곳은 기껏해야 브리타니아와 다키아에 불과하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로마군이 철저하게 요새화된 국경선에 틀어박혀 수비만 한 것은 아니다. 로마군은 맞기 전에 먼저 때린다는 교리에 충실했으며, 불온한 움직임을 보이는 야만족을 먼저 타격해 쓸어버리는 작업을 통해 국경을 방어했다. 물론 파르티아가 버티고 있던 동방 국경에서는 이런 방식을 시행하지 않았다. 파르티아가 강력한 적인 동시에 중요한 무역 상대이기에 그대로 국경 방어에만 전념. 기본적으로 열린 국경 시스템에, 전쟁이 나면 국경을 닫는 스타일이다. 케이스 바이 케이스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사산 왕조 출현 이후 모든 것이 바뀌었다. 문제는 이 씨앗을 로마가 뿌렸다는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니시비스 전투 항목을 참고하라.

제정 시대 로마 제국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국경은 라인 강도나우 강, 그리고 유프라테스 강이었다(물론 유프라테스 '강 자체'가 국경이라고 보기는 좀 어렵지만). 로마 제국은 이 세 국경선에 군사력의 핵심인 다수의 군단을 배치했다. 그리고 거의 군단병의 수에 준하는 정도의 보조병이 1차 방어선을 맡은 전력이었다. 보조병들은 주로 현지인으로 구성되었으며 일반적인 전투 상황일 때는 보조병 선에서 대부분의 처리를 했고 대신 전면전은 군단이 수행했다. 그리고 제대할 경우 로마 시민권이 부여되었다.

다수의 병력을 빠르게 이동시킬 수 있는 로마식 가도망과 곳곳에 들어선 초소와 요새가 결합된 유기적인 시스템은 제정 건설 이후 200년 가까운 기간 동안 제국에 평화를 제공했다.

3 조직(공화정 말기에서 원수정 시기)

3.1 프라이토리아니

Praetoriaeni.
일명 근위대. 매체에서 흔히 '프레토리언 가드'라고 부르는 아우구스투스가 이탈리아에 주둔하게 한 황제 직속 친위대.

정규 군단의 편제와는 거리가 있기에 '군단'이라는 표현과는 거리가 좀 있다.
정규 로마군이 10개의 코호르스 총 6천여 명으로 구성된 반면, 근위대는 총 9개 코호르스 9천여 명으로 구성되었다.
비텔리우스는 한때 9천명 규모의 근위대를 2배 가까이 증설했지만 베스파시아누스가 바로 원상복귀시켰다.
이후 세베루스가 근위대의 규모를 크게 보강하고(《로마제국 쇠망사》에는 거의 3배~4배 규모라고 쓰여 있다) 권한을 강화하면서 권력투쟁의 온상이 된다.

처음에는 원로원 등 공화제 세력들의 반발을 우려해서였는지 이탈리아 전역에 분산시켜 특별한 주둔지가 없었으나, 티베리우스 시절에 수도 로마 외곽에 근위대 병영을 짓고 전체를 로마에 주둔시키게 된다. 그리고 제국 후기에는 근위대 병영이 아우렐리아누스가 건설한 아우렐리아누스 성벽의 일부에 포함되어 수도 로마의 방어 시스템의 일부를 이루게 된다. 이탈리아에 주둔하는 사실상 유일한 군사력이었으나, 이러한 역사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 재위 당시 도나우 강 방어선이 돌파당하면서 맞은 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편성한 이탈리아 주둔군에 의해 끝나게 되었다.

의외로, 프라이토리아니는 흔히 생각하는 것과 달리 거의 누더기에 가까운 조촐한 토가를 입고 대거 한자루만 차고 다녔고, 전투에 투입되거나 행진을 하는 경우에만 무장을 하였다. 이유는 당연하지만, 원로원을 안심 시키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나중에는 아예 원로원 복장으로 바뀐다. (...)

황제 직속의 부대이니만큼 정예부대로 알려져 있기는 하지만, 황제가 직접 전선에 나가는 일이 드물어진 제정 중후반기에는 그저 가장 대우가 좋고 폼나는 병력이라고 할 수 있을 듯 싶다. 당장 근위대 병사의 급료는 675데나리우스로 일반 로마군 병사의 3배 가량이었다. 다만 중요한 전투에서는 직접 최전선에 나가서 싸우기도 했던 모양이다. 실제로 도미티아누스 시절에는 근위대 절반이 다키아와 싸우다가 궤멸당했던 기록이 남아 있기도 하다.

이들의 임무는 직접적인 전투보다는 수도인 로마의 치안을 유지하기 위한 경찰에 가깝다는 의견도 있다.
하지만 수도 경찰이 존재하는 로마의 시스템을 생각할 때, 치안 유지보다는 원로원에 대한 일종의 위협이라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것 같다. 제정 중기까지도 황제와 원로원은 서로 으르렁거릴 수 있는 관계였다.

이런 원로원을 제압하는 황제의 두 가지 무기가 바로 근위대와 국가반역죄였다.
근위대에는 두명의 근위대장이 있었고, 이들은 보통 원로원 계급이 아닌 기사 계급 출신이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근위대의 역할에 원로원 견제도 포함되어 있었다. 실제로 칼리굴라가 암살된 직후에 근위대는 원로원이 '공화정 복귀'를 선언할까봐 재빨리 클라우디우스를 황제로 앉혀 대응한다.

여러모로 '로마 제국 시스템의 대표적인 폐해'라고 부를 수 있는 존재이다.
수도 로마에 주둔하는 유일한 군사력이었던 탓에, 황제의 견제가 없을 경우 근위대장이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게 되었기 때문이다. 제국 후반으로 가면 근위대가 차츰차츰 정부의 다른 부서들을 흡수해, 근위대장이 재상 비슷한 위치까지 격상되게 된다. 황제조차도 근위대를 무시할 수가 없어서, 근위대의 환심을 사기 위해 자주 근위대에 상여금을 내려주었다. 특히 정통성이 부족하다는 등의 이유로 인해 기반이 약한 황제는 더더욱 근위대에 매달렸다.

로마 역사에서 황실 내부의 권력투쟁은 흔했으며, 근위대는 보통 그 중심에 있었다. 근위대가 부각되면 로마가 혼란스러워졌고, 근위대가 조용하면 로마는 안정되었다. 실제로 오현제 시대에는 근위대에서 인기가 높았던 도미티아누스가 암살당하고 네르바가 제위에 앉자, 불만을 품은 근위대원들이 네르바를 유폐시키고 후계자를 빨리 선정하도록 윽박지르는 사건이 일어난 초기를 제외하면 근위대가 문제를 일으킨 흔적이 발견되지 않는다. 오현제 시대가 끝나자마자 근위대는 다시 문제를 일으키기 시작한다.

제국 초기 티베리우스의 오른팔이었던 근위대장 세야누스는 황제가 로마에 없을 때 대리인 역할을 맡아 티베리우스를 대신해 온갖 더러운 일을 도맡아 하다가 황제에게 숙청당했다. 숙청당할 당시에는 반역을 꾀했던 흔적도 있었다.

칼리굴라는 근위대 대대장이었던 카시우스 카이레아의 손에 암살당했고, 이후 근위대는 주도적으로 움직여 클라우디우스를 황제로 옹립한다. 클라우디우스는 근위대에 상여금을 내려준다. 다만 이 때까지는 근위대가 집단적으로 '권력'을 차지하려 움직였다는 증거는 없으며, 카이레아는 클라우디우스가 자리를 잡자마자 황제 살해죄로 처형당한다.

네로 시절부터, 근위대가 정치에 개입하는 나쁜 선례를 만들기 시작한다. 클라우디우스 시절 아그리피나는 자기 아들 네로를 황제로 앉히기 위해, 심복인 브루스를 근위대장에 앉힌다. 클라우디우스가 급서하자(아그리피나가 독살했으리라는 설이 유력하다) 브루스는 근위대를 움직여 재빨리 클라우디우스의 아들도 아니었던 네로를 황제에 앉힌다. 근위대에 상여금이 내려졌음은 물론이다.

네로가 죽고 갈바가 황제 자리에 오르게 되는데, 갈바는 오토에 의해 매수당한 근위대원들에게 살해당한다.
비텔리우스의 반란이 성공해 오토가 죽자, 비텔리우스는 자기 휘하의 '라인 군단' 병사들을 근위대로 이동시킨다.
물론 오토에 붙었던 전(前) 근위대원들은 모조리 축출당했다. 베스파시아누스가 비텔리우스에 반대해 들고 일어나자, 오토파 전(前) 근위대원들이 재빨리 베스파시아누스 편을 들고 비텔리우스파 현(現) 근위대원들과 맞서 싸우는 촌극이 일어나기도 했다.

베스파시아누스는 집권하고 나서 아들이자 차기 황제인 티투스를 근위대장에 앉혀 새 왕조를 안정시키려 했다.

베스파시아누스의 아들이자 티투스의 동생인 도미티아누스는 황궁 내 음모에 의해 암살당하고, 원로원에 의해 네르바가 황제 자리에 오른다. 근위대 내에서 인기가 높았던 도미티아누스가 암살당한 데 불만을 품고 근위대가 네르바에 반대해서 들고 일어나는데, 네르바는 원로원의 뜻과 다르게 주도적으로 고지 게르마니아 사령관인 트라야누스를 차기 황제로 선임해 재빨리 근위대의 반발을 무마시킨다. '신의 한 수'라는 것은 이럴 때 쓰는 말이 아닐까?

오현제 시대에는 앞서 말했듯이 초기의 사건을 제외하면 근위대가 말썽을 일으키지 않았다.

아우렐리우스의 뒤를 이은 콤모두스는 궁정 내 음모에 의해 암살당하는데, 근위대장인 레토가 당시 인망있던 페르티낙스를 황제 자리에 앉힌다.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올 것처럼 보였으나, 레토는 페르티낙스가 자신을 이집트 장관에 앉히지 않은 것에 불만을 품고 페르티낙스를 살해해버린다.
당시 레토는 사실상 페르티낙스를 제위에 앉힌 최고의 공로자였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페르티낙스가 자신에게 아무런 보상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불만을 가질 이유는 충분했다. 이집트는 고대에는 제국 내에서 가장 부유한 곳이었고, 다른 속주들과는 달리 황제의 사유지였기 때문에 황제만 눈감아 준다면 한 재산 모을 수 있는 곳이었다. 때문에 이집트 장관은 제국의 관료들이 선망하는 자리였다. 로마 제국에는 공식적인 관료 계급이 존재하지 않았지만, 관료 계통은 분명히 존재했다. 원로원 계층에 속하지 않는 '기사 계급'이 보통 임명되었으며, 황제 재무관, 황제 비서[7] 근위대장, 이집트 장관 등 황제와 보다 가까운 위치에서 활약했다.

하지만 근위대는 이후 말 그대로 어처구니없는 일을 벌이는데, 로마 황제 자리를 경매에 부친 것이다.
술피키아누스와 율리아누스가 황제 자리를 놓고 경매를 하게 되고, 더 높은 값을 써낸 율리아누스가 제위를 '낙찰'받아 황제 자리에 오른다. 물론 돈으로 산 황제 자리가 당연히 안전할 리가 없어서, 도나우 군단을 이끌고 세베루스가 진군해오자 율리아누스는 황제 자리를 빼앗기고 살해당한다. 세베루스는 이후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을 벌인 근위대를 해산시키고 근위대를 전부 자기 병사들로 채워넣는다. 그러면서 근위대의 규모를 3~4배 늘려 말 그대로 '군사 독재'를 펴게 되고, 이 때부터 로마 제국의 군사국가화가 가속된다.

이후로 로마 제국이 위로는 게르만족, 옆으로는 사산 왕조에 압박당하는 시기인 이른바 군인 황제 시대가 닥쳐오고, 이 와중에 황제를 살해하고 '근위대장'들이 그 뒤를 잇는 이들이 생긴다. 카라칼라의 근위대장이었던 마크리누스라든가, 고르디아누스 3세의 뒤를 이은 필리푸스 같은. 아우구스투스 이후 근위대가 해체되는 콘스탄티누스 1세 시절까지 52 명의 황제중 12 명이 근위대에게 살해당했다.

285년 이후 황제가 로마를 떠나게 되면서, 근위대는 버림받고 하는 일 없는 신세가 된다.
결국 근위대는 각종 음모와 내전에 개입하면서 한 몫을 챙겼던 기억을 잊지 못하고 막센티우스를 황제로 옹립하지만 막센티우스가 콘스탄티누스와 벌인 밀비우스 다리 전투에서 패배하여 전멸했고, 이후 콘스탄티누스에 의해 공식적으로 해체된다.

3.2 레기온

영상 출처 / 원본 영상 출처

Legion.
한국과 일본에서는 군단이라고 자주 불린다.
로마군 전력의 핵심 조직이다. 그러나 공화정 시기의 군단과 제정 시기의 군단은 편제가 꽤 다르다.

우선 공화정 시기 로마 군단은 고대 로마의 명장 카밀루스에 의해 체계가 갖추어졌고, 제정 시기보다 규모 면에서 비교적 작았다.
군단의 주력은 3개로 나뉘어진 중장보병 부대였다. 중장보병들은 군사 경력이 짧지만 젊은 축에 속하는 하스타티와 경험을 갖춘 실질적인 주력 부대 프린키페스, 나이가 비교적 많은 고참으로 구성된 예비대 트리아리로 나뉘어 편성되었다. 여기에 소수의 기병과 경장보병, 그리고 다수의 지원병과가 존재했다.

제정 시기의 군단은 기본적으로 마리우스에 의해 짜여진 편제를 기본으로 한다. 각 6개의 켄투리아(가장 비슷한 현대 군 편제는 중대 정도)로 구성된 총 10개의 코호르스(현대의 강화된 대대 정도?)가 1개 군단, 즉 레기오를 형성한다. 마리우스의 개혁 이래 로마는 2개 군단을 집정관 군단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전략 단위의 병력으로 취급했다. 주력은 여전히 시민으로 구성된 중장보병이었지만, 규모의 확대 및 보조병의 충원을 통해 유기적인 전투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기병이 부족하다는 점은 항상 로마군의 아킬레스 건이었다. 기병을 제공하던 최상위 계층의 수는 적었고, 당시에는 등자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기병을 육성하는 것은 로마에게 결코 쉬운 것이 아니었다. 또한 군마부족도 정말 심각했다. 로마군에서 군마를 탈수있는게 고위장교, 연락병뿐이었다. 이러다보니 로마군은 항상 보병 중심일수밖에 없었다. 그로 인해 로마군은 동맹국 및 속주에서 기병을 충원받았는데, 사실상 충원이 아니라 비싼 돈주고 용병처럼 고용하는 것에 가까웠다. 대표적인 예로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유명한 갈리아/게르만 기병,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동맹자였던 누미디아 기병을 들 수 있다.[8] 물론 기병은 돈이 워낙 많이 드는 관계로 이들조차 기병이 강한 페르시아나 파르티아에 비하면 높은 비율은 아니었고, 해서 3세기 동안에는 진정한 기병이 아닌, 야만족들을 빠르게 따라잡기 위한 하마 보병들이 주를 이뤘다. 즉 보병 -> 하마 보병으로 전환이 이뤄졌고, 이 하마 보병에 대해 다시 기병화가 3~4세기 동안 꾸준히 이뤄졌다. [9]

공화정일때 로마군에서 집정관 군단의 경우 대대장은 모두 시민들에 선거로 선출된 군사호민관(military tribune)들이었는데 이들은 모두 기껏해야 20대 초반의 젊은이들로 명예로운 경력에 처음 나선 유망주들이었다. 군단장은 집정관이 부관으로 데려온 노련한 정치가들 중 하나로 임명하는데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군단장 부재시 군단을 맡은 제1대대장도 이러한 군사호민관으로 선출된 이라 비록 미래의 엘리트라지만 애송이 정도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주홍색 띠를 두른 대대장이라는 칭호를 받는 명예로운 자리인 1대대장의 중요성을 감안했을 때 얼핏 이러한 시스템은 이해하기 어렵지만, 군사 경력과 민간 경력을 조화롭게 쌓아나가는 것을 중시했던 전성기 로마 엘리트들의 사고방식을 감안하면 중요한 군사 의무의 수행 경험을 이런 애송이가 맡는 것도 이해 못할 것은 아니다. 게다가 이들이 애송이에 불과하다지만 군사호민관에 나서 당선되는 것도 매우 경쟁이 치열한데다 시민들이 아무나 뽑아주지 않기 때문에 이들은 기본적인 군사 지식을 빡세게 교육받으며 이 선거에 대비해 왔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능력은 갖고 있었다.[10]

3.2.1 군단 일람

3.2.1.1 공화정 후기

단대호상징물군단 주둔지비고
제1게르마니카 군단
제2사비나 군단제2아우구스타 군단으로 명칭 변경
제3키레나이카 군단
제3갈리카 군단황소
제4마케도니카 군단
제4스키티카 군단
제5알라우다에 군단
제6페라타 군단늑대[11]
제7클라우디아 피아 피델리스 군단
제8아우구스타 군단황소서로마 제국 멸망까지 존속
제9히스파나 군단황소108년 브리타니아에서 실종
제10프레텐시스 군단일명 카이사르 군단
제11군단넵튠
제12빅트릭스 군단
제13게미나 군단사자카이사르가 로마 진군때 지휘
제18리비카 군단
제30클라시카 군단

3.2.1.2 제정시기

단대호상징물군단 주둔지비고
제1아디우트릭스 군단염소판노니아
제1게르마니카 군단황소저지 게르마니아
제1이탈리카 군단멧돼지저지 모이시아
제1마크리아나 리베라트릭스 군단아프리카
제1미네르바 군단미네르바저지 게르마니아
제1파르티카 군단켄타우로스시리아
제2아디우트릭스 군단염소판노니아
제2아우구스타 군단염소브리타니아前제2사비나 군단
제2이탈리카 군단암늑대노리쿰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창설. 코미타텐세스 보병 연대로서 아프리카 야전군 및 일리리쿰 야전군에 들어감.
제2파르티카 군단켄타우로스시리아4세기의 편제 개편 때 리미타네이 보병 연대가 되어 메소포타미아 둑스 관할구에 들어감.
제2트라이아나 포르티스 군단헤라클레스아이귑토스
제3아우구스타 군단페가수스모리타니아
제3키레나이카 군단아라비아 페트라이아
제3갈리카 군단두마리 황소시리아
제3이탈리카 군단황새라이티아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창설. 4세기의 편제 개편 때 11개 연대로 분할되어 다섯 연대는 라이티아 변경군에, 여섯 연대는 코미타텐세스로서 일리리쿰 야전군에 배속됨.
제3파르티카 군단황소시리아
제4플라비아 펠릭스 군단사자고지 모이시아영화 글래디에이터에서 막시무스가 지휘하는 펠릭 군단의 모티브가 된 군단
제4마케도니카 군단황소고지 게르마니아
제4스키티카 군단염소시리아
제5알라우다에 군단코끼리저지 게르마니아
제5마케도니카 군단독수리다키아4세기의 편제 개편 때 코미타텐세스 보병연대로서 오리엔툼 야전군에 들어감.
제6페라타 군단암늑대유다이아
제6히스파나 군단
제6빅트릭스 군단황소브리타니아
제7클라우디아 군단황소고지 모이시아
제7게미나 군단히스파니아4세기의 편제 개편 때 코미타텐세스 보병연대로서 오리엔툼 야전군에 들어감.
제8아우구스타 군단황소고지 게르마니아서로마 제국 멸망까지 존속
제9히스파나 군단황소브리타니아108년 이후 기록 실종
제10프레텐시스 군단멧돼지유다이아4세기의 편제 개편 때 리미타네이 보병 연대로서 팔레스타인 둑스 관할구에 들어감.
제10게미나 군단황소판노니아레피두스가 창설. 4세기의 편제 개편 때 일부는 코미타텐세스 보병 연대로서 오리엔툼 야전군에 들어갔고,
다른 일부는 리미타네이 연대가 되어 판노니아 둑스 관할구에 들어감.
제11클라우디아 군단넵튠저지 모이시아
제12풀미나타 군단번개카파도키아유대전쟁 중 군단기 상실
제13게미나 군단사자저지 모이시아카이사르가 로마 진군때 지휘.
4세기의 편제 개편 때 일부는 리미타네이로서 시리아 변경군에 들어갔고,
다른 일부는 코미타텐세스 보병 연대가 되어 트라키아 야전군에 들어감.
제14게미나 마르티아 빅트릭스 군단염소판노니아아우구스투스가 창설. 4세기의 편제 개편 때 코미타텐세스 보병연대로서 트라키아 야전군에 들어감.
제15아폴리나리스 군단아폴로카파도키아카이사르가 창설. 4세기의 편제 개편 때 리미타네이 보병 연대로서 오스로에네 둑스 관할구에 들어감.
제15프리미게니아 군단포르투나저지 게르마니아
제16플라비아 피르마 군단사자시리아
제16갈리카 군단사자저지 게르마니아
제17군단저지 게르마니아토이토부르크 전투에서 전멸
제18군단저지 게르마니아토이토부르크 전투에서 전멸
제19군단저지 게르마니아토이토부르크 전투에서 전멸
제20발레리아 빅트릭스 군단멧돼지브리타니아하드리아누스 방벽 건설
제21라팍스 군단염소판노니아
제22데이오타리아나 군단아이귑토스
제22프리미게니아 군단헤라클레스고지 게르마니아
제30울피아 빅트릭스 군단유피테르저지 게르마니아

3.3 켄투리오

Centurio. 백부장(百夫長)이라고도 한다. 시오노 나나미로마인 이야기에서 백인대장에 대해 미합중국 해병대중사 정도로 보는 것이 어떤가 하는 말을 심심하면 한다. 물론 백인대장은 현대의 개념으로 비추어 보자면 중대장에 가까운 자리겠지만, 시오노 나나미의 말처럼 부대의 중핵을 이루는 부사관으로서의 성격 또한 가지고 있었다.

백인대장은 병사들과 말 그대로 동고동락하며 지내는 가장 가까운 장교였다.
백인대 이하의 편제가 없는 로마군에서는 최하위 장교이자, 최전선에서 싸우게 되는 일종의 부사관의 역할 및 현대 군의 행정보급관 역할까지 수행했다고 보면 정확할 것으로 보인다. 백인대장은 병사들과 가장 가까이에 있으면서 병사들을 최전선에서 지휘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병사들은 백인대장의 역량에 대해 의심이 갈 경우 백인대장의 교체를 요구하기도 했다고 한다.

1대대의 1백인대장은 군단 전체의 최선임 백인대장으로 예우받았으며, 작전 회의에 참여할 권한도 있었고 군 내에서는 매우 명예로운 지위로 취급받았다. 주임원사나 마찬가지 지위인 셈이다. 백인대장 전사 시 지휘권 공백으로 인한 혼란을 방지하기 위해 백인대에는 백인대장을 보좌하는 부백인대장(Optio)도 항상 편제되어 있었다.

3.4 병과

여기 언급된 모든 병과들이 다 동일한 시기에 있던 것은 아니다.

  • 레베스(Leves)
경보병. 가난한 사람들의 병과로, 투창 몇자루, 방패나 투구 정도의 간단한 방어구로 무장한 투창병이다.
선두에 배치되었으며, 역할은 벨리테스와 똑같다.
  • 로라리(Rorarii), 아켄시(Accensi)
가장 가난한 4~5 계급 사람들로, 레베스보다도 무장이 딸렸다. 트라아리 뒤쪽, 즉 대열의 맨 뒤에 배치되어 최후의 예비대 역할을 했다. 로마 토탈워에서 아켄시는 투석병으로 나온다. 기원전 2세기에 레베스와 통합되어 벨리테스로 재편되었고, 위치도 대열 선두로 옮겨졌다.
  • 벨리테스(Velites)
경보병. 기원전 2세기 경보병들인 레베스, 로라리, 아켄시를 합쳐 만들었다.
돈없는 가난한 시민들이 주로 지원하는 병과. 투창병으로 투창 서너자루, 투구, 방패 정도의 빈약한 무장만 갖췄다.
기동성을 살려 일단 전열에 나서 투창을 다 던진 후 중보병들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퇴각하는게 주로 하는 일이고, 정찰 임무에 투입되기도 했다. 마리우스의 군제 개혁으로 바뀐 뒤에는 보직 자체가 된다.
  • 중보병
로마군 주축을 이루는 보병대로 어느 정도 돈이 있는 사람들이 지원했던 병과다.
모병제로 바뀐 뒤에는 그냥 보직 자체가 되었다. 붉은 장식술 달린 투구, 중장갑옷(로리카 하마타 또는 로리카 세그멘타타에), 붉은색 대형 스쿠툼 방패, 필룸(대형 투창), 글라디우스, 칼리가에(쓰러진 적 공격용 못박힌 샌달)를 갖춘 흔히 생각하는 그 '로마 보병'의 이미지. 투창병이 후퇴한 후 전선에 투입되며 일단 투창을 한자루씩 던진 후 방패벽을 쌓아 전진하는 팔랑크스 전술의 응용버전을 구사했다. 복무기간에 따라서 하스타티(신병), 프린키페스(12~13년 복무), 트리아리(장기복무 베테랑)로 분류되었다. 이 중 주전력은 하스타티와 프린키페스고, 트리아리들은 최후의 예비대로서 후방에 남아있었다. 트리아리가 전투에 투입되는건 하스타티와 프린키페스가 돌파당하거나, 이들만으로는 적을 무너트릴수 없다고 판단될 때. 여기서 '트리아리까지 왔다' 라는 속담이 유래되었다고 하는데, 당대 로마에서 패배나 망하기 직전등의 위험한 상황을 비유할때 썼다고 한다. 역시 지원제로 바뀐 뒤에는 그냥 섞어버렸다.
로마군은 가급적 용병을 고용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했지만, 특수한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전문가'들을 고용하지 않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특히 로마군이 상대적으로 취약했던 분야였던 기병 수요가 많아서, 기마에 능한 누미디아인, 기마술 + 굉장한 완력을 지닌 갈리아인, 게르만인들을 필요에 따라 보조병으로 유연하게 고용하였다.

그리고 세계에서 최초로 의무란 병과를 만들어냈으며, 숙련된 군의관과 의무병을 배출하여 실질적인 부상자와 병자 처리에 활용했다. 자세한 내용은 군의관 항목의 타국의 의무군 참조.

이외에도 기수나 군악병 같은 보직은 있었지만 특별히 병과로 취급된 것이 아니고 어느 병과에 해당하는 병사이면서 그 보직을 겸임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런 보직은 곁보기에는 의장대 같아 보이지만 실제론 회계 업무나 보급 업무 등 백인대장을 보좌하는 일종의 행정병이었기 때문에 해당 능력이 있는 고참병들이 담당했다.

또한 스페인 남쪽 발레아레스 제도에서 고용한 투석병도 보조전력으로서 역할을 톡톡히 해내기도 하였다.

카이사르도 갈리아 원정기에서 발레아레스 투석병들의 솜씨를 칭찬한 기록도 있다. 본래 카르타고에서도 활약했었다.
기둥에 빵조각을 매달아놓고 이를 맞추지 못하면 식사를 주지 않는 방식으로 어렸을 때부터 훈련받았다고 한다. 이외에도 공성전등 모든 전투에 반드시 필요한 궁병도 용병으로 자주 모집했다.[12]

정당한 급료는 물론, 보조군으로 일정한 기한을 복무하면 로마 시민권을 주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기 때문에, 로마군의 용병들은 일반적인 용병들과 달리 높은 충성도를 보이며 정규군과 함께 끝까지 싸운 경우가 많았다는 점도 특이하다. 제정 말기의 개판은 예외. 아버지가 보조군으로 장기복무해서 시민권을 따고, 아들이 그 시민권으로 군단병으로 입대해 복무한 사례도 많았다고 한다.

하지만 빛이 있으면 어둠이 있듯이 보조병 제도가 다 좋은 것은 아니었다.

일단 로마군에게 고용된 보조병 대부분은 속주민이지만 아직 속주민이 아닌, 즉 게르만족처럼 로마군의 적인 경우도 있는데, 이런 경우에는 부작용이 발생한다. 왜냐면 게르만인들이 로마의 용병으로 고용되어 보조병으로 복무하면서 로마의 전술을 알아차린다. 그래서 로마군이 게르만인들을 상대하기가 더 힘들어지게 된것이다. 여기에 더해서 로마군의 차별과 멸시가 심했기에 보조군들의 반란도 자주 일어났다. 특히 급료가 군단병들보다 적은데다 그 급료마저 제때 못 받는 일이 생겨서 이에 가장 큰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킨 것도 많았다.[13] 특히 후기에 들어선 보조군 반란에 무려 9개 군단, 6만 명이 투입될 정도로 보조군의 반란이 갈수록 심해진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아우구스투스는 정규 보조병을 속주민만으로 한정하고 복무기간도 25년으로 규정하는 등의 대대적인 개편 과정을 거치게 된다. 물론 봉급도 지급되었는데 만기전역 시 받는 로마 시민권[14]이라는 메리트를 감안해 군단병보다는 못하지만 그래도 적정 수준의 대우를 해줬을 것으로 보인다.

4 로마군인의 생활

제정 시기 로마군은 1년에 3회 봉급을 받았으며, 이 돈으로 무기와 장비를 장만하고 의식주와 취미생활을 했다.
일반 병사의 봉급은 그리 많지도, 적지도 않은 수준으로 일반 노동 임금자보다 조금 많은 정도였다. 초기 지급되는 갑옷이나 칼 등은 국가가 제공했을 가능성이 높지만 이후 소모되는 장비는 개인 돈으로 해결해야 했다. 보통 70%를 식비와 의복비등의 생활비로 소모했으며, 특히 갑주랑 무기의 유지비가 가장 많이 들었다. 따라서 실제로 가용한 자금이 크게 부족하므로 성실한 병사는 이 돈을 낭비하지 않고 저축할 수도 있었지만 대체로 돈이 모자라는 병사가 많았다.

물론 마리우스의 개혁 이후 명목상 무기, 장비, 의복 등은 지급되는 것으로 되어 있었지만 그럴 리가 없지.
그나마 징병제 말기에는 워낙 사람이 부족해서 재산이 거의 없는 병사도 전쟁터에 보내져야 했으니까 국가가 지급하기도 했지만 모병제 이후에는 병사들이 자기 장비값을 내는 공동구매 가 정착되었다. 또 이 병사들이 구매해야 하는 '장비'에는 무기와 갑옷뿐만 아니라 의복,신발,텐트,이불,식기,건초 같은 군생활에 필요한 것들 대부분이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봉급 부족은 티베리우스 즉위 직후의 병사 반란의 중요한 원인 중 하나이기도 했고, 군 당국도 이걸 잘 알고 있어서 의외로 처벌이 가벼운 경우가 많았다.[15] 이 때문에 로마군이 사용한 투창인 필룸은 상당히 비싼 주제에 소모품이었기 때문에 병사들에게 인기가 없었다. 싸울 때마다 던지고 나서 전투 끝나면 다시 사야 한다고 생각해 보자. 설상가상으로 필룸이 쓸모가 없으면 모르지만 적의 기병이나 전차가 몰려오는 상황에서 필룸도 없이 칼만 들고 있다가는 그냥 갈려나가기 때문에 안 쓸 수도 없었다. 이런 이유로 인해 로마 후기에는 결국 다트형 투척 무기로 교체되었다.

다만 로마군도 이게 문제라는 인식이 없지는 않아서 일부 금액을 따로 떼어 저축하게 했고 (도미티아누스 황제 때부터.) 그 외에도 퇴직금이 존재했다. 과거 공화정 시기에는 해산된 군단의 병사들에게 땅을 나누어 주었지만, 제정 시기가 되면서 만기 전역하는 병사들에게는 퇴직금이 주어졌다. 물론 놀고 먹을 비용이라기보다는 재사회화 과정에서의 정착 비용으로 보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로마군은 17세부터 입대가 가능했으며, 만기 20년을 채운다 해도 고작 37세에 불과했다. 그리고 고대라고 해도 군단에 입대할 정도로 건강했다면[16] 적어도 15~20년은 더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만기 전역할 정도면 대개 자식도 여럿 두었기에 재사회화는 불가피했다.

제정 시기와 비교하면 내전기는 병사들이 금전적으로 풍족한 시기였다.
특히 상여금이 많았는데, 군 사령관들이 병사들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더 많은 상여금을 지급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돈이 없던 카이사르는 부하 장교들에게 돈을 꾸어 상여금을 지급했다고 한다.(.....) [17][18]

내전기에는 장군들이 병사의 지지를 얻으려고 상여금을 마구 뿌려댔지만, 제정 시대에는 이런 관행은 없어졌다.
이렇게 된 이유는 장군들이 군벌로 변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왜냐하면 장군들은 상여금을 마구 뿌려대서 병사들의 지지를 얻은 다음 그들을 자신의 사병으로 활용했기 때문이다. 대신 아우구스투스는 봉급 수준을 모병제 도입 초기에 비해 3배 가까운 225데나리우스까지 올렸지만 그리 큰 돈은 아니었다고 한다.[19] 또 로마가 확장을 거듭할 때는 적의 도시를 점령하고 약탈 한 번 크게 저지르면 한 몫 단단히 챙길 수 있었지만 역시 제정 시대에는 확장이 멈추다시피했기 때문에 이런 일은 드물어졌다. 그나마 새로운 황제가 등극할 때나 국가에 경사가 있을 때 관행적으로 소정의 상여금을 하사하는 정도에 그치게 되었다. 게다가 상여금의 부여 횟수나 금액도 내전기보다 줄어들었는데, 사실 국토가 넓어지자 지켜야 할 국경이 길어지다보니 영토 관리가 우선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내부 사정도 좋지 못하고 로마의 적들도 갈수록 강력해져 로마가 확장 정책이 갈수록 힘들어졌기 때문이다. 대신 로마 정부는 군인들의 처우를 적당히 개선하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위에 언급한 도미티아누스의 봉급 인상도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

여가 시간에 농사를 짓거나, 닭을 기르거나, 그 밖의 잡일로 부업을 하는 병사도 적지 않았다.
하긴 봉급으로 먹고 살수가 있어야지. 서로 돈을 꿔주고 갚으라고 독촉하는 편지도 남아 있었다. 고향의 가족들에게 돈이 필요해서 돈을 부쳐달라는 편지도 발견되었다.

전리품은 병사들에게 분배되는 경우가 많았다. 약탈도 때때로 허용되었다.
게르만족 등 가난한 야만족과 싸우는 경우에는 전리품을 기대할 수 없었지만[20], 트라야누스 황제가 펼친 다키아 원정처럼 풍요로운 지역[21]으로 출동하는 경우에는 풍성한 전리품을 획득할 수 있었다. 하지만 사산조 페르시아나 파르티아는 부유하지만 막강한 적이다 보니 약탈하거나 전리품을 얻는다는것 자체가 매우 힘들었다.[22]

이때문에 로마군은 약탈보다는 상여금에 관심이 많아져 후기에 가면 상여금을 올려달라는 병사들의 요구가 빗발친다.
하지만 이게 부작용을 가져왔는데, 왜냐면 황제랑 군 사령관들이 병사들의 지지를 얻으려고 화폐를 마구 찍어내서 상여금을 지급했기 때문이다. 그나마 내전기같은 경우에는 화폐의 귀금속 함유량이 높아서 실제가치와 명목가치가 그대로 유지되었지만, 황제의 정통성과 권위가 추락하는 3세기의 위기부터는 사실상 은화가 은도금한 동전으로 바뀌는 등 악화가 주조되는 바람에 심각한 물가상승을 초래했다. 그래서 상여금이 많이 지급되어봤자 물가상승으로 인해 병사들의 살림살이는 나아진게 별로 없었다.

식사는 육체노동의 극한이라고 할 수 있는 전투 수행원이었다는 점에 비해서 매우 단촐했다.[23]
기본적으로 이랑 보리로 만든 죽에다 병사 개인이 상비하고 다니는 건포도 같은 견과류, 양의 젖[24], 몇 가지 샐러드, 물에 탄 시금털털한 포도주가 전부였다.[25][26]
그나마도 샐러드에 뿌리는 소스는 주로 몸에다 바르는 올리브 기름이었다. 고기는 특별한 날에만 먹는 게 보통이지만 군단 주둔지에 따라서는 그래도 여유가 있는 곳도 많았던 모양이다. 주둔지 근처에 야생동물이나 물고기들이 풍족한 곳이 있다면 고기반찬을 위해 사냥과 낚시를 하기도 했다고. 이건 서민들도 마찬가지라서 고기를 특별한 날 외에는 먹지 못했다. 고기를 많이 먹을수 있는건 부자들밖에 없었다.[27] 그래도 종합하자면 로마군은 동시대 다른나라 군인들보다 훨씬 잘먹었다고 생각하면 된다.

다만 말기가 되면 이런 상황이 상당히 심해진다는 얘기가 있는데, 이런 현상은 이미 2세기 때부터 현저해진 현상이었고 때문에 부대 이동 및 배속에서 상당한 어려움을 겪지만, 그렇다고 군단 전출이나 배속이 아주 불가능해진 건 절대 아니다. 3~4세기 때만 해도 도나우 강에 있던 부대 일부가 짜개져서 대페르시아 전선에 보내지거나, 페르시아 전선에 주둔해 있던 부대가 이탈리아 쪽으로 전근오기도 한다.

그리고, 국경 지역의 병사들이 게르만 출신이거나, 게르만 여인과 몰래 결혼한 로마병사도 많아서 게르만족이 올 때 국경이 열려버렸다는 얘기는 후기 로마 제국의 실상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나온 미신이다. 게르만족들의 침투는 훈족들이 오기 삼백 년 전부터 꾸준히 시도되었고, 3세기 아우렐리아누스가 상대해야 했던 게르만족이 오히려 실력에 있어서도 수에 있어서도, 훈족 침략 시기의 훈족이나 게르만족보다 무시무시했다. 그런데도 로마군이 적어도 4세기 때까지 족족 야만족을 격퇴한 것은, 로마군에 입대한 게르만족이 종족 정체성보다 국가 정체성을 중시했기 때문이었다. 처가쪽 식구들이 피난을 오는데 안 열어줄 도리가 없다고? 그게 일이백 년 전 갈라진 친척 집안이라면 어떠할까? 옆에 있는 게르만 전우가 칼을 들고 노려보고 있었던 건 사실이지만 언제까지나 로마군의 일원으로서였다.

군의관들도 존재했는데, 본래는 군단장이 자기 돈으로 자율적으로 행할 문제였다.
즉 군단장이 이런 문제에 무심하거나 재정이 부족하면 병사들은 싸우다 다쳐도 전문적인 의료 지원을 받을 수 없었다.
이렇다 보니 전투 중에 중상을 입은 병사가 사망하거나 원래라면 현역복무를 지속할 수 있는 부상을 입었는데 치료를 못 받아서 결국 팔다리를 잘라야 하는 경우도 생겨났다. 아우구스투스는 기원전 30 년경 전문적인 의료부대를 창설했고, 여러 혜택을 걸어 전문의들을 군의관으로 입대시켰다. 내장이 튀어나온 부상병도 수술해서 살려낸 사례가 있을 정도로 실력이 뛰어났고, 병사들의 위생과 영양도 체계적으로 관리했다. 그 덕에 군의관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는 시절에는 군인들의 평균 수명이 민간인들보다 10 년 가량 길었다고 한다 (...) 참고

또한 아우구스투스 시기의 군제 개혁때 병사들의 결혼을 금지 시켰는데, 군인들을 민간사회와 격리해 군대에만 집중하게 하며, 사적인 가족이 없이 군대를 가족으로 여기게 만들기 위한 정책 + 가족이 있다면 다른 지역으로 부대를 이동시킬때 가족들을 데려가는 문제로 골치가 아파질게 뻔하니 이 문제를 방지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이미 결혼한 기혼자도 입대는 가능했지만 가족들을 데리고 다닐수는 없었다.

하지만 병사들은 결혼 금지를 결혼식 금지로 실행(...), 공공연하게 주둔지 근처에 사는 현지 주민이나 여노예와 살림을 차리고 애낳고 가족을 꾸려, 정식 결혼은 못하지만 사실혼 관계로 살았다. 여기에다 제국이 안정된 이후에는 대규모 부대 이동이 거의 사라졌기에 두번째 문제의 발생 가능성도 낮아졌다. 현실적으로 지켜지지 않고 있음에 더해 필요한 이유중 하나의 감소로 인해, 클라우디우스 황제 시절에는 이 사실혼 관계로 살고 있는 병사들에게도 기혼 남성들과 같은 법적 권리를 보장하게 되었으며, 또 하드리아누스 황제 시절에는 군인들이 사실혼 관계중 낳은, 법적으로는 사생아인 아이들도 합법적인 적자들과 마찬가지로 상속권등의 법적 권리를 보장받게 되었다. 그리고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 때에는 아예 결혼 금지령이 폐지되었다.

4.1 군법과 형벌

로마군의 강점으로 꼽히던 가장 큰 요소는 조직력과 군율이다. 이는 전시 사상자 최소화 및 목표 달성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고, 이를 위해 로마군은 상당히 엄격한 훈련 및 처벌을 시행했다. 다만 처벌 수위는 부대가 처한 상황. 행위의 중대성이나 지휘관의 판단에 따라 달랐다. 심지어 적전 도주라 해도 지휘관과 병사들의 관계가 양호하거나 지휘관이 인간적인 경우는 명예형으로 끝나기도 했고, 크라수스처럼 이런 데 신경 안 쓰는 지휘관이 걸리면 10분의 1형이 내려지기도 했다.

이외 로마군은 명예형이 굉장히 많았는데, 사형이나 중노동형을 평시에 무작정 남발하기가 어려운 상황에서 병사들을 처벌하기 위해서였을 것으로 보인다.

  • 노예형
로마 시민인데도 불구하고, 징집을 거부하고 도망가거나 징병검사[28]에서 꼼수를 부리다가 발각되면 시민으로서의 자격이 없다고 하여 노예로 팔려가는 신세가 된다. 물론 꼼수를 부려도 소용 없이 그냥 현역 판정을 받았다면 해당사항이 없고, 또 징병제가 폐지된 뒤에는 없어졌다.
  • 사료배식
밀이 아니라 가축 사료로 쓰는 귀리 같은 날곡식을 배식했다. 이걸로 요리해먹으면 정말 맛이 없고 조리하기도 힘들다.
하지만 그보다는 인간 이하의 짐승 취급이라는 심리적 모욕을 주는 게 목적이었다. 현대 군인들한테 처벌 목적으로 개밥[29]을 배식한다고 생각해보라. 일종의 명예형.
상대적으로 약한 처벌이지만 안 그래도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돈 들어갈 곳이 많은 로마군에게는 치명타였다.
역시 징병제가 폐지된 뒤 본격화된 형벌.
  • 노역
현대의 소일거리식 노역과는 달리 영화에서 흔히 나왔던 채찍 맞아가면서 중노동 하는 노예의 노역보다 약간 나은 수준으로 심각한 형벌이다. 애당초 로마군은 비전투시에는 묻지마로 각종 토목공사에 동원되었으니 벌로써의 노역을 주려면 그것보다는 강해야 하지만, 명색이 정규군이므로 노예처럼 채찍을 때릴 수는 없으므로 미묘한 기준이 성립된다. 아마 노역 기간 동안 개인정비를 박탈한다던지 하는 식으로 모욕과 고통을 같이 줬을 공산이 크다. 특히 노역하면 정말 힘드니 이것도 상당한 형벌이다.
현대의 영창과는 달리 노역이 추가된 형태가 많고, 영창 자체가 불결하다.
물론 특정 지역에 가둬놓는 감옥은 그 자체로 불결한 경우가 대부분이긴 했다. 현대 선진국 감옥이 위생적인 건 사회 전반적인 위생상태가 개선되면서 감옥도 그 혜택을 받았기 때문일 뿐이고 개도국 감옥은 지금도 별 차이가 없다.
  • 열외 (행렬에서의 제외)
징계 처분에 따라 행렬에서 제외된 사람은 무능력자 취급을 받기에 사료배식만큼 심한 심리적인 모욕이다.
문자 그대로의 의미로 열외다. 이것도 명예형의 일종.
때리는 도구는 주로 채찍이다. 태형을 받는 죄목은 폭행이나, 싸움, 술주정인데 중대하지 않은 명령 불복종의 경우도 역시 태형을 받는다. 드라마 ROME에서 주인공이 받는 형벌이 이것이다. 지휘관의 명령을 어기고 멋대로 대열을 이탈해 돌진. 대열을 무너뜨렸을 뿐만 아니라 그를 구출하기 위해 다수의 동료들이 위험에 처하게 하기까지 한 죄로 태형에 처해졌는데, 전 병력이 보는 앞에서 집행함으로써 망신을 준 것은 기본이다. 물론 남들 휴가 받을 때 휴가도 못 받고 감옥에서 불평이나 해야 했다.
말 그대로 계급이 강등된다. 봉급과 퇴직금에 큰 영향이 올 뿐더러, 원래 계급에 있던 사람에게 명령을 받게 되니 지옥이 따로 없다.
주로 장교급에 적용되지만, 일반 병사에게 적용되는 경우도 드물게 있었다. 역시 어지간히 큰 죄를 지어야 가능한 처벌.
보통은 시쳇말로 진급하기 힘들거나 쓸데없이 빡센 부서로 배치하지만, 사안이 중하면 다른 지역에 있는 군단으로 배속해버린다. 장교는 로마 전역의 군단에서 순환근무에 가까운 형태로 근무하기도 하므로 그렇게까지 큰 타격은 아니지만, 일반 병사 같은 경우에는 현지의 군단에 지원해서 해당 군단에서 퇴역할 때까지 자리를 고수하는 경우가 많으므로 타 지역으로 좌천되면 만만치 않은 타격이 온다.
퇴직금 없이 중간에 추방하는 것이다. 명예에 금이 가는 것은 물론, 일반 병사의 경우에는 금전적으로 엄청난 손해가 난다.
다만 퇴직금은 중간 전역의 경우 모두 지급이 안 된다. (다만 이 경우는 안전장치가 있어서 별도의 위로금과 적립금을 주도록 되어 있었다. 아무리 로마군이라지만 과사실 추방자와 그냥 복무 부적격자는 구분했다.)
  • 코 베기
민간인 강간은 코를 잘랐다. 물론 이 민간인은 로마 시민이나 속주민. 동맹국 혹은 일반적인 비적성국 주민 및 기타 부족민을 말하는 것이다. 다만 적지의 여인이라고 해도 적용대상이 되는 경우가 있었는데 주로 유력부족이나 파르티아 같은 강대국의 백성들이 해당되었다.
  • 손 베기
확실하게 사람 1명을 일을 할 수 없게 만들어주는 형벌.
상습 절도범은 손을 자른 다음 추방해 버렸다. 역시 흔한 처벌은 아니다.
탈영, 명령불복종, 반항, 살인 등 중대한 군율 위반에 한하여 내려지는 처벌이다.
집행 방식은 교수형 등 당시 쓰는 일반적인 것들과 함께 푸스투아리움, 10분의 1형 등 군대에서만 쓰는 것이 있었다.
물론 사형 자체가 중한 형벌이므로 반항의 경우에는 직접적으로 항명 행위를 한다던지 하는 확실하고 중대한 사유가 있어야 했으며, 탈영의 경우에도 복무기간, 계급, 탈영 이전의 행동이나 탈영 때의 상황 등을 참작해서 사형보다 가벼운 처벌을 하기도 했다. 복무기간이 짧은 병사들은 참작을 많이 받았으나 많은 훈련을 받고 복무기간도 긴 고참병들은 참작받기 어려웠다고 한다. 이는 후기의 병사 반란에서 고참병들이 반란을 많이 일으키는 원인 중 하나를 만든다. 가뜩이나 원하지도 않은 힘든 군생활을 하는데다 짬밥을 많이 먹어도 여전히 혹독한 처벌을 받으니 누가 좋으랴. 당연히 병사들의 불만이 폭발할 수밖에.
  • 푸스투아리움
사형보다 중한 범죄에 적용되는 형벌. 원래는 채찍, 가지 같은 의미.
단어 자체를 의역하면 태형 정도가 되겠지만, 실질적으론 때려 죽이는 타살형이다. 크게 두 종류가 있다.

첫번째는 병사들이 2열로 늘어서고 처벌 대상자가 그 사이를 지나가면 병사들이 자기 앞에 올 때 몽둥이로 때리는 것.

이건 로마 이후에도 상당히 오래 남아서 러시아에서는 19세기까지, 스웨덴에서는 18세기까지 군대 뿐만 아니라 민간인의 형벌로도 쓰였다. 영어로는 곤틀릿이라고 한다.

두번째는 군인 신분을 박탈한다는 의미로 군복을 벗긴 후, 다른 병사들이 둘러싸고 몽둥이나 채찍, 돌로 때려 죽이는 것.

1번과의 차이는 1번은 대열을 통과할 때까지 하지만 이건 죽을 때까지 한다는 것이다.

1번은 거의 사형이고, 2번은 그냥 사형이다. 1번에서 몽둥이질을 버티고 대열을 통과해 살아남았을 경우 처벌을 끝내고 살려주는지는 특별한 기록을 찾지 못했으나, 당장은 살아남더라도 이후 생존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보는 게 맞으므로 사실상 사형으로 봐도 된다.

이게 적용되는 대표적 경우는 1번의 경우에는 경계근무 중 태만, 2번의 경우에는 탈영이나 적전도주였다.

이외 십자가형을 받는 경우도 있었으며 동성간 성교도 이 형벌의 대상인데, 로마 법에서 남자들간의 동성애는 삽입하는 건 금지되어 있지 않아도 삽입당하는 건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저지른 놈은 로마 남자에게 해서는 안 될 짓을 한 죄. 당한 놈은 로마 남자로써 할지언정 당해서는 안 된다는 규율을 어긴 죄. 연약해서 강제로 당한 것도 죄여 참고로 로마는 그리스와 달리 동성애 자체를 좋아하지 않았다. 동성애 자체를 윤리적으로 죄악시하지는 않았지만 '당해서는' 안 되는 남자답지 못한 행동으로 보았다.
  • 10분의 1형
극형 of 극형으로 꼽을만한 형벌. 부대 전체가 처벌 대상일때 쓴다.
라틴어로는 데키마티오(decimatio), 영어로는 데시메이션(decimation) 이라고 한다.

물론 어지간한 걸로 적용하는 일은 절대로 없었고, 사령관에게 부대 전체가 누가 봐도 명백하게 정당한 이유 없이 집단항명을 하거나 하는 경우에만 시행되었으며 사실 이런 경우도 어지간해서는 그대로 집행하지 않고 과격분자와 주동자급만 불러내 처형하고는 눈감아주거나 입으로만 10분의 1형을 외치고 슬그머니 거둬들이는 경우가 절대다수였다. 예를 들자면, 지친 병사들이 행군을 거부한다던가 하는 경우에 카이사르는 이 때 선고만 하고 집행은 하지 않았다. 애시당초 경고가 목적이었다는 게 중론. 티베리우스 황제 즉위 초기 군단병들이 일으킨 반란 당시 티베리우스는 10분의 1형을 집행하지 않았고 대신 주동자와 적극 가담자만 따로 불러내 처형하고 나머지 병사들은 그냥 넘어갔다.

일단 처벌 대상자중 10분의 1 정도를 제비뽑기로 뽑는다. 그리고 운 좋게 뽑히지 않은 9명의 병사가 불운한 전우에게 푸스투아리움 2번을 가해 처형하고, 일정 기간 동안 진영 밖으로 쫒겨나 위험한 곳, 혹은 노예나 창녀들을 주둔시키는 곳에서 주둔하며 정규 짬밥 대신 동물용 사료를 배식받는다.

운 하나만으로 생과 사가 갈린다는 것으로 병사들에게 상당한 공포를 줬고, 운이 좋아도 같은 백인대 내에서 한솥밥을 먹고 얼굴 맞대며 함께 생사의 문턱을 넘나들던 동료 병사를 직접 때려 죽여야 하니 당대 사람들도 매우 흉악하고 야만적인 처벌이라 여겼다. 맞아 죽는 사람보다 때려 죽이는 사람들이 더 참담했을 거다라고 보는 사람들도 적지 않은 형편이다.[30] 그런만큼 시행한 기록은 정말 극히 드물고 주동자와 적극 가담자만 사형시키는 선에서 마무리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마리우스가 모병제로 군제 개혁을 할 때 아예 폐지시켜 버리기도 했었다. 도의적인 판단도 있었지만, 이런 흉악하고 야만적인 게 있으면 지원자가 줄어들 것 같은 데다 어차피 당사자만 처형해도 처벌은 충분하다는 현실적인 이유도 있었다.

그러나 스파르타쿠스 반란 때 크라수스가 부활시켜 시행했는데 그 이유는 전열 붕괴로 인해 군 전체가 전멸할 뻔했다는 것이었다.[31] 카이사르도 자기 군단에게 선고했었지만 집행은 하지 않았다. 제정 시대에도 선고 및 집행한 사례는 거의 없다시피 하며, 마지막 시행 기록은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때이다. 알렉산데르 황제도 이 형벌로 집단 탈영에 대한 책임을 묻고 군기를 잡으려 했다가 병사들의 반발이 심각하자 주동자 몇명만 추려내 처형하고 넘어갔다. 6세기 마우리키우스 황제가 쓴 병법서인 스트레기콘에서는 병사들의 사기에 악영향을 끼칠 뿐만 아니라 인적 자원의 낭비라는 이유로 10분의 1형을 포함한 극형들을 금지하였다.

5 후기 로마군

이 항목에서 주의할 점은, "로마군"이라 하면 일반적인 의미에서는 공화정 중기서 원수정 중기까지의 로마군을 뜻하며 위 서술도 주로 그 시기의 로마군에 대한 것이란 게 되겠다.

로마군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국내외 상황에 적응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며 이는 일반 독자들이 관심이 멀어지기 시작하는 2~4세기에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는 편제, 무기, 동원 체제, 주둔지에 걸쳐 광범위하게 이뤄졌고, 어느 한순간 모조리 바뀐 게 아니라서 특정할 수는 없다.

물론 서로마 제국의 5세기 로마군 그리고 그후에 등장하는 유스티니아누스의 6세기 로마군을 보면 도저히 원수정기의 그 로마군이라곤 생각이 안 들겠지만, 이는 그 두 시기 사이에 거진 이삼백 년의 갭이 있는 것을 모르고 하는 소리들이다.

로마군이 원수정 말기와 전제정을 거쳐 변화했던 상황에 대해서는 디오클레티아누스, 콘스탄티누스 그리고 로마인 이야기항목의 비판에서 나오는 선방어 부분 오류 참조.

로마군의 주적은 기병이 주력을 이루는 게르만족과 사산 왕조였고 이들이 기병의 기동력과 충격력을 무기로 삼아 속공을 가할 수 있었던 것도 물론 중요한 이유지만, 이런 특징은 원수정 때에도 그리고 사산 왕조 이전의 파르티아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렇다면 어째서 로마군은 2세기부터 점점 이들을 막아내기 힘들어졌던 것일까?

이유는 적들이 강해진 데에도 큰 원인이 있다. 게르만족들은 로마군의 진법과 훈련을 모방해서 강해졌고 부족에서 왕국으로 발전하는 단계를 거치는 중이었으며,[32] 사산조 페르시아는 파르티아를 타도하면서 어설픈 봉건 제도를 타파하고 옛 아케메네스조 페르시아의 영광을 되찾을 것을 국시로 분명히 하였다. 즉 게르만족들은 카이사르가 각잡고 두들겨 대던 그 게르만족들이 아니었으며 사산조 페르시아의 경우는 간혹 로마가 방심하면 어처구니 없이 지기도 하던 그때의 파르티아보다 더욱 강해진 상태였다.

한마디로 정리하면 내우외환. 즉 로마군의 적들은 인력이 늘어나고 군제도 일신해서 동원력과 단위 전투력이 상승한 반면, 이걸 막아내야 하는 로마군은 재정 악화와 병력 자원의 감소로 경제적 부양 상태가 갈수록 나빠져 단위 전투력과 동원력이 떨어져버리는 시기가 겹쳐버린 것이다!!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하자면 일단 재정악화야 로마의 경제제도 자체의 문제점에서 시작된 것이고, 병력 자원의 감소는 로마 시민들의 입대 기피로 인해 모집이 힘들어진데다, 귀족들도 소작제를 하면서 자신들의 소작농들이 입대하면 농사를 지을수가 없어 손해라는 걸 잘알기에 소작농들의 입대를 적극적으로 막았다. 또한 군인들도 미래가 보장되지 않는 군대에 더는 있기 싫어하여 탈영이 증가했다. 탈영자를 엄하게 처벌하고 입대시 낙인을 찍었지만 그래도 탈영이 계속될 수준으로 심각했다. 그래서 모병제에서 다시 징집제로 회귀한 이후로는 병역을 회피하기 위한 자해도 만연하였다. 주로 손가락을 절단하는 자해(이러면 활줄을 당길 수 없으니 병역에서 제외된다)가 주를 이루었고, 여러 황제들이 이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병역회피를 위해 자해를 한 자들을 일종의 공익으로 배치하였고,발렌티니아누스 1세는 자해를 하면 화형시키겠다고 위협하였다. 그리고 테오도시우스 대제는 자해를 한 사람도 그냥 징병하였다. 또한 계속된 전쟁과 내전, 그리고 전염병(165년의 안토니우스 역병과 250년의 키프리아누스 역병)으로 인한 인구 감소도 병력 자원의 악화에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바깥의 적이 강해지니 내우외환의 상태가 된 것이다.

로마 당국과 시민들이 사치와 나태에 빠져 향락에 쩔은 나머지 문제를 몰랐고 수정도 하지 않았다는 이상한 오해도 있는데, 아직도 한국 혹은 미국의 일부 일반인 대상의 매체에선 이런 내용으로 서술하지만 이는 완전히 틀린 소리다. 종전의 방어 전략이 더 이상 통하지 않고, 기존의 전술 또한 정작 국토를 방어하는 분야에서는 효율이 떨어졌다는 것을 깨닫게 되자 로마 정부 또한 계속해서 군제 개혁을 단행하였다.

즉 로마 제국 후기라고 해서 카이사르나 술라 같이 체제를 개편하고자 하는 야망과 강력한 영향력을 겸비한 인물이 없었던 게 아니란 것이다. 본격적인 군제 개편과 전술 혁신을 추구했던 황제들은 후기 제국에서도 수없이 많았고, 또한 뛰어난 명장인 장군 황제도 많이 배출되었다.

다만 로마 제국 전기 때에는 군사 행정을 담당하는 인물들은 대부분 야전에서도 뛰어난 재능을 발휘했던 명장들이었던 반면, 군정과 민정이 분리되어가는 추세에 있었던 로마 제국 후기에는 그런 인물들이 아주 적어 조명이 덜했기에, 잘 알려지지 않는 것이다.

예를 들어 로마 제국 전기에 군제 개편을 단행했던 이들을 살펴보면, 공화정 말기가 아니면 논란이 좀 있긴 하지만 세르비우스 툴리우스,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 카밀루스, 스피키오, 마리우스, 아우구스투스, 하드리아누스 등인데 이중 영 장군 자질이 없었던 사람은 유일하게 아우구스투스 하나 뿐이다. 반면 로마 제국 후기의 경우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세베루스, 갈리에누스, 디오클레티아누스, 콘스탄티누스, 콘스탄티우스 2세 대강 이정도인데, 이들 중 야전 지휘관으로써도 확실히 뛰어났다고 말할 수 있는 이들은 기껏 세베루스와 콘스탄티누스 뿐. 이쯤되면 왜 로마 제국 후기의 군제 개편이 화제거리가 되기 어려운지는 감이 올 것이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후기 로마 제국 정부는 어느 경우에서든 정책 문제에선 국방을 최우선으로 고려했다

다시 언급하자면, 과거의 로마군이었다면 라인/도나우 방어선에서 야만족의 선제공격 이전에 병력을 집결시켜 야만족의 본거지를 공격, 로마군이 강점을 보이는 평원에서의 회전을 벌이는 식으로 전투를 전개시켰겠지만 어느 시기부터는 더 이상 그럴 수가 없게 되었다. 이는 인력이 부족한 이유도 있었고, 야만족들도 평원에서의 회전에서 이전과는 달리 일방적으로 로마군에게 휘둘리지 않은 것이 원인이다.

기존 로마군 방어 체계의 패러다임이던 선방어가 더 이상 유용하지 못한 상황이 온 것이다.
보병 중심의 선방어는 유효한 방어수단이라고 할 수 없었고, 로마군은 결국 군사 교리의 전환을 선택한다.
황제 휘하의 최정예 부대는 더 이상 보병이 아닌 기병이었다. 로마군은 보병이 아닌 정예 기병을 이끌고 야만족의 기동력에 대항했으며, 방어선에 배치된 보병들은 최소한의 시간 벌기용 병력이나 다름없게 되었다. 보병이 국경선에서 적의 발목을 최대한 붙잡는 동안, 기동력을 갖춘 기병이 기동전을 통해 이미 넘어온 야만족을 빠르게 격퇴하는 것이 로마군의 전략이 되었다. 제국 말기 로마군의 꽃은 어디까지나 기병이었으며, 이러한 변화는 비잔티움 제국으로까지 이어지게 된다.

다만 이런 변화 역시 단기간이 아니라 2~4세기 동안에 점진적으로 일어났다는 데 주의할 필요가 있다.
병력을 늘렸다지만 기병을 그렇게 단시일 내에 늘릴 수는 없었으며 결국 보병의 기병으로의 전환은 우선 먼저 보병을 하마 기병으로 만드는 것부터 우선되어야만 했다.

전장에서는 말에서 내려서 싸우더라도 우선은 야만족들이 노략질을 한 다음 치고 빠지는 것만큼은 반드시 잡아야만 했던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당장 야만족들도 머리가 있었기에 당연히 로마 정규군과 로마 국경 안에서 벌이는 전투는 어지간하면 정말 피하고 싶은 선택이었다. 이들 입장에선 노예와 전리품만 챙겨서 걸리지 않고 고향으로 돌아가서면 그만이었다. 그리고 노략질로 인해 강력해진 야만족들이 또 쳐들어오기 때문에 초동대처가 매우 중요했다.

이동도 전장에서의 전투도 말을 타고 하는 진정한 의미의 기병 확충은 콘스탄티누스의 시절까지도 제대로 완비되지가 못했고, 이는 콘스탄티우스 2세와 율리아누스 그리고 발렌티니아누스의 시기에 와서야 겨우 이뤄진다. 스틸리코와 아이티우스의 그 로마 이미지만 기억한다면 이런 조치를 어떻게 할 수 있었겠나 이해가 어렵겠지만, 이런 이미지의 로마 제국은 4세기 후반 부터의 서로마에 한정되는 데다 흔히들 기억하는 막장 로마 제국은 동서 로마 제국 중 서로마 지역에 한정된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이때 이뤄지는 기병 확충 및 제대로 된 기병 수급 체제는 이후 제국 역사가 지속되는 한 계속 지속된다.

다만 일반 독자들 입장에서 주로 궁금한 건 이런 복잡다단한 정치경제적 상황보다는 유명한 원수정 로마군을 상징하는 무구들, 즉 필룸, 글라디우스, 스쿠툼이 어째서 후기에서 사라졌나 싶은 것일 텐데, 이것들도 한꺼번에 제식 장비에서 한순간에 사라진 건 아니다.

가장 먼저, 그리고 제일 눈에 띄게 변화가 시작된 것은 스큐툼글라디우스로, 이것들은 많은 인력이 좁은 공간에 치고 들어가 2인 1조로 적을 상대한다는 개념에 최적화된 무기들인데, 동원 인력은 줄어들고 종심 방어를 위해 후방 요새로 분산되어 적을 상대하는 상황에선 병사 1인이 커버해야만 하는 영역이 커지는 게 필연이었고 이 상황에서는 그런 무구들론 제대로 된 대응이 힘들었다.

때문에 종전의 글라디우스보다 긴 검인 스파타를 쓰게 되고 방패도 다시 공화정 중기 이전의 원형 방패로 회귀한다. 다만 이런 변화도 일부 특정 황제들이 이제부터 로마군은 스파타와 원형 방패만 쓰라고 해서 한순간에 바뀐 건 아니며, 역시 점진적으로 이뤄졌다. 글라디우스는 한꺼번에 스파타로 대체된 게 아니라 천천히 검신이 길어지는 점진적인 과정을 거쳤으며, 스파타로 불리는 검도 꽤 오랫동안 계속 글라디우스로 불렸다. 또한 직사각형 방패 스쿠툼은 적어도 3세기 후반까진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갑옷은 판금갑옷 계열인 로리타 세그먼타티에에서 동방에서 전파된 찰갑으로 돈이 되는 한에서 교체되어 나갔고, 투구도 고대 로마군의 투구에서 점점 원뿔형 투구로 바뀌어 나간다. 그래도 초기에는 고대로마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으나, 로마군 특유의 양식에 맞춘 장식들이 제작단가를 꽤 올려먹는 탓에 점점 단순한 모양으로 바뀌어나가게 된다. 이것은 돈의 문제.

어쩌면 방패와 칼, 갑옷 보다 훨씬 중요한 변화일지도 모르는 변화는 바로 투창에 있었다.
투창은 로마 극초기부터 로마 말기에 이르기까지 "완소" 무기 취급을 받았지만, 오라지게 비싸다는 치명적인 문제점이 있었다. 고대 로마군의 막강한 견제력의 주축을 자치했던 그 유명한 필룸은 분명 손에 꼽을 만큼 막강한 투창이었지만, 정말 비쌌다. 진짜 환장하게 비쌌다. 뿐만 아니라, 더럽게 무겁기 까지 했기 때문에 예산 문제와 기동성 문제가 동시에 결합한 끝에, 결국 버틸 수가 없게 되어 도태어버리게 된다. 그래도 투창은 완소 무기였고, 더 싼것으로 바꾸는 한이 있어도 유지되었으나, 결국 이 조차도 정신나간 유지비와 무겁다는 병사들의 징징(...)이 겹처저 아예 다트로 교체된다. 근데 이것을 다트라고 불러줘야 하나(...) 이 베르툼의 경우 표준 규격이 없고 각자 취향대로 만들었는지 무게와 크기가 천차만별이라 무거운 축의 경우 180~200g 정도이고 말이 다트지 정확하게 말하면 대형화살을 손으로 날리는 것과 크게 차이가 안난다. 다트라고 분류할 때는 중다트라고 말해야 할 정도. 어지간한 현대의 DMR소총이나 경기관총급의 무게인 필룸 2~3개를 들고 다니는 것보다는 가벼우므로 5~6개 씩 가지고 돌아다니면서 투척이 가능하다. 단, 필룸이 가지는 장점인 비상 시 1회용 대기병용 창의 역할을 더이상 바랄 수 없게 된 것은 큰 단점이 되었다. 뭐 이 부분은 제정시절 파르티아 등과 붙으면서 보강한 원거리 전력과 제정 말기의 기병전력이 커버해 주지만.

이렇게 로마군이 점점 철벽 같이 틀어막은 후 상대를 나가 떨어지게 만드는 레기온 방식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은 당장 중대한 적성국인 페르시아의 기병대의 발전과도 연관되어있다. 로마 후기에 이르면 이미 중세 기사에 가까운 형태로 발전한 랜스가 등장해 있는 시점이며, 페르시아는 아예 랜스 차지까지 동원하기 시작하게 되는 시기다. 사산조에 이르러서는 한 술 더떠 한참 뒤에 나오는 카우치드 랜스에 가까운 랜스 파지법이 등장하며, 이를 바탕으로 거의 카우치드 랜스 차지에 가까운 돌격을 행하는 수준에 이른다. 물론, 로마군은 투창을 애용하였으므로 중세 서유럽 처럼 랜스 차징에 일방적으로 손실을 입지 않고 투창을 집어던저 돌격을 방해할 수 있었으나, 위에 이미 서술했듯, 그 로마 조차도 감당 못할 끔찍한 가격 때문에 투창을 어쩔 수 없이 점점 포기해가면서 랜스 차지와 같은 기병 개돌에 더욱 취약해저가고, 기존 로마군의 레기온이 기병을 견제하던 투창이 부실해진 결과로 레기온의 기병 견제력이 없으면서 창병 방진의 돌격 의욕 저하도 없는 막장 군대가 탄생해버리게 되는 것이다. 본래 같으면 투창 없어도 궁수와 노포같은 원거리 병과가 알아서 커버해 주지만(실제 로마제국이 파르티아와 쌈박질을 할 때 동방속주는 타 지역보다 원거리 투사병력을 더 강화해서 싸웠다.)

이런 로마군의 변화는 당장 로마의 최정예인 프라이토리아니의 무장의 변화에서 극적으로 드러난다.
당장 방패가 로마 초기의 타원형 방패로 회귀하였고, 갑옷은 찰갑으로, 투구는 원뿔형으로 바뀌었으며, 글라디우스는 1.5배쯤 길어어지고, 투창은 필룸대신 랜스에 가까운 모양을 가진 작고 가볍고 저렴한 투창으로 바뀌었다.[33]

이건 로마군의 편제가 카라칼라 이후로 보조군 아욱실리움과 정규군 레기오의 구분이 없어져 버린 이후, 인력 부족에 따른 전술 및 교리 개편에 이전 보조군인 아욱실리움의 무장이 더 적합했던 이유도 있었다. 다만 여기서 오해가 있는데, 이 3세기에 일어난 변화는 거의 준징병제로 바꾸다시피한 디오클레티누스 이전에 이뤄졌기에 탈영과 인력 부족으로 허덕이던 4세기와 5세기 양상과는 별로 관련이 없고, 보조군과 정규군의 통합 및 속주민에 대한 로마 시민권 부여로 보조군 전체가 그냥 정규군이 되었다. 이것을 디오클레티아누스와 콘스탄티누스가 또 다시 짜개서 리미타네이가 이전 보조군이 하던 역할을 수행하게 되지만 이는 4세기 동안 진행되는 개편이지 3세기에까지 소급해서 볼 순 없다.

때문에 후기 로마군은 갈수록 창을 많이 쓰게 되며, 콘스탄티누스 개선문의 로마군 병사들도 이미 창을 많이들 들고 있는게 확인된다. 다만 게르만족이 대거 군대로 들어와서 게르만족들의 장비로 전환하였고 때문에 '야만화'했다는 이상한 서술이 있는데, 많은 오해와는 달리 2~4세기에 로마군에 입대한 게르만족은 용병이 아니라, 로마 시민권이 있고 로마인 장교 밑에서 훈련 받고 싸우는 정규 상비군이었다.

이에 대해 다른 잘못된 생각은 게르만족이 자기네 장비를 그대로 갖고 로마군에 들어와서 로마군의 전술이 '게르만화'되었다는 오해도 있는데, 그렇지 않다. 이 시기에 입대하는 게르만족은 부족 단위가 아니라 기존 로마군 부대에 개별적으로 입대해서 해당 부대에서 장비를 지급받고 로마식으로 훈련했으며, 애초에 게르만족 또한 로마군의 전술과 장비를 꾸준히 자기네 식으로 모방하려 하였다.

아드리아노플 전투로 정규 로마군 편제 중 여럿이 거덜나면서 용병인 포이데라티 비중이 확실히 높아지긴 하지만 이런 현상이 '사치와 나태에 빠져 용병 쓰는 재미에 맛들인 로마인'들 탓에 갑자기 생긴 것은 아니며, 설령 그랬어도 공화정 시기에 삼니움과 갈리아의 전법을 참조한 건 야만화가 아닌데 제정 후기 시대에 게르만과 사산조 페르시아의 전법을 참조하는 게 야만적이라는 건 어불성설의 편견에 찬 서술이다.

여러 증거를 볼 때, 로마군이 '야만화'된 것이 아니라 게르만족 등이 로마군의 장비와 전술을 모방하여 '로마화' 되었다는 것이 더 합리적이다.물론 로마군도 역으로 게르만족의 전술 중 좋은 부분이 있으면 채택했지만, 로마군과 게르만족 중 군사학이나 군사 기술이나, 애초엔 명백히 로마군측이 압도적인 우위에 있었음을 생각해봐야 하므로 이 서술을 채택할 수밖엔 없다. 명심하자. 이건 내가 좋아했던 로마가 아니야!는 역사 애호가 아니라 분별력 없는 빠질에 불과하다.

필룸은 상당 부분 이후 시기에서도 쓰였으며 율리아누스 시대에도 썼던 것 같으나, 중량도 더 적고 휴대는 간편하며 개수는 많은 플룸바타리(다트)와 베루툼(벨리테스 등이 사용하던 투창), 그리고 필룸과 유사한 중투창인 스피쿨룸이 필룸을 점차 대체하게 된다. 이렇게 된 원인은 필룸이 무겁고 비싸서 자비로 무장을 해야 하는 로마병사들에게 부담을 많이 줬기 때문에 서서히 도태되어 간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이 역시도 스파타와 마찬가지로 플룸바타리도 정작 그 시대엔 그냥 필룸이라고들 많이 불렸다.

로리카 세그멘타타와 임페리얼 갈리아 혹은 이탈리아식 투구 역시 3세기 후반까지 사용했되었다.

궁병들의 상당수를 시리아 등지에서 온 보조병으로 충당했던 원수정 시기와는 달리, 궁병 훈련에도 상당히 신경을 쓴 것으로 보인다.

한편 후기 로마군의 기병은 록솔라니, 알란, 고트족 등 유목민들과 게르만족 기병들에게서 아이디어를 많이 차용하고 그들 자체를 용병으로 고용했다. 따라서 마찬가지의 논리로 사산조 페르시아의 중장 기병들에게서도 많은 영감을 받았다. 훈족 쇼크를 겪은 5세기 이래로는 훈족 기병들과 궁병들의 전술도 상당 부분 차용하게 된다. 물론 서로마 제국은 그럴 수 있기 전에 망해버렸긴 했지만 동로마 제국은 충분히 이런 교훈을 제대로 살릴 수 있었다.

이렇게 해서 후기 로마군은 달라진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주변국의 군대에서 장점을 따와서 기존의 로마군 체제를 서서히 변화시켰으며, 이는 비잔티움 제국의 군대의 뼈대를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이후의 로마군의 변화는 동로마 제국테마 제도등을 참고하라.

  1. 사실 일부 사람들이 로마군에 대한 반감이 강한 것은 로마의 기록자들이 국뽕에 미쳐버린 나머지 너무 심한 과장을 했고 현대에도 일부 사람들이 그걸 우기고 다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예를 들어, 피드나 전투 같은 것들에서 사실상 너무 괴이한 교환비인 1 : 250영어로 검색하면 [1] 진짜 100명만 죽었다고 여기는 사람들도 꽤 있지만 영문 위키 같은 곳들은 1 : 25로 되어 있고 학계에서도 별로 진실로 믿지 않는다.을 찍거나 적들은 몇만 명이 거의 다 죽었는데 불사(?)의 로마인들은 몇백 명만 죽고 거의 죽지 않는 기적을 보여주는 기록들이 많고,상성이 있다 쳐도 로마군이 약한 군인들을 죽여서 강한 군인들만 남긴 스파르타조차 가볍게 능가하는 인간병기 수준으로 강했는지는 의문이다. 더구나 스파르타도 그렇게까지 장비나 전략전술에서 밀리지는 않았다. 또 몇몇 로마뽕들이 로마가 패배한 전투들을 기록에서 대량으로 삭제하는 희대의 테러까지 한 역사가 있었는데 패전한 전투들이 시간이 지날수록 꽤나 밝혀지면서 역풍이 부는 중이기도 하다.심지어 당시 로마인들이 아닌 에드워드 기번 같은 권위자들도 두들겨 맞는 중이다.
  2. 위에서 언급한 로마군이 크게 진 전투들보다 압도적이게 더 많은 수의 전투들에서 로마군은 자신들의 적을 박살냈다. 아라우시오 전투 이후 게르만군은 마리우스군에게 부족이 멸망할 정도로 크게 박살났고 토이토부르크 숲 전투 이후 게르만군은 게르마니쿠스에게 크게 박살났고 카르헤 전투 이후 파르티아군은 트라야누스에게 크게 박살나고 수도를 털리고 칸나에 전투 이후 카르타고군은 일리파 전투나 메타우로스 전투, 자마 전투에서 크게 박살났다. 이처럼 로마군은 큰 패배 이후 반드시 되갚아주었음을 알 수 있다.
  3. 사실 큰 패배가 많아 보이는 것은 그만큼 로마가 자주 전쟁을 치뤘기 때문이기도 하다.
  4. 어떻게 차출되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복무 기간 그리고 이 때 재산도 신고하는데 어디서 임무 수행을 해야 하는가를 확인하기 위해서다.
  5. 한국과 일본의 대중서에서는 흔히 '대대(大隊)'라 번역됨. 라틴어로는 코호르스(cohors), 복수형으로는 코호르테스(cohortes), 영어로는 코호트(Cohort)라고 쓰고 읽는다. 이 문서에서는 코호르스로 통일하자.
  6. 이 비생산적 집단을 지나치게 많이 유지할 경우 벌어지는 일을 알고 싶으면 한반도 북방에 위치한 동토의 지옥에서 선군정치라는 미명 하에 사회 전체의 기반을 군대에 집중했다가 그 군대까지도 망가진 걸 생각해 보면 된다.
  7. 클라우디우스는 한때 해방노예 출신들로 비서실을 채웠으나, 도미티아누스는 황궁을 신축하면서 비서실을 부활시키고 기사 계급들을 그 자리에 임명했다.
  8. 시오노 나나미는 누미디아 기병을 무슨 카타프락토이처럼 묘사하고 있지만, 사실 누미디아 기병은 빼어난 승마술을 바탕으로 한 경기병에 가까웠다. 로마뿐만 아니라 중국 또한 몽골 기병대를 로마처럼 용병으로 고용해서 보조군으로 활용했다.
  9. "경제가 파탄난 막장 상황"은 어디까지나 서로마 제국 말기 중의 말기인 5세기의 한정된 상황이며, 3~4세기엔 그 정도는 아니었기에 로마군의 기병화가 실패했다는 건 잘못된 분석이다.
  10. 다른 대대장들은 진급한계선인 백인대장을 뚫고 올라온 정말 능력 있는 서민이거나, 백인대장부터 시작해 군경력을 쌓아서 대대장으로 진급한 기사 계급들이다. 이런 대대장들 또한 1대대장의 능력을 보기 때문에 1대대장으로 선출된 뒤에도 군생활이 쉽지는 않았다.
  11. 로물루스와 레무스를 젖먹이는 건국설화의 늑대이다.
  12. 영화 글래디에이터의 로마군 궁수들은 사실 로마인이 아니라 시리아인 궁수들이다.
  13. 미드 스파르타쿠스 시즌 1에 보면 용병으로 고용되어 보조군에 들어간 스파르타쿠스랑 트라키아인들이 로마군에게 심한 차별을 받는다는 것을 알수 있다.
  14. 본인만 지급받는 게 아니라 직계가족 전체가 지급받는다. 예를 들어 보조병 아버지가 전역을 했다면 아들은 아버지 덕택에 자동으로 로마 시민이 되는 것.
  15. 물론 처우개선 요구로 인한 평시 집단행동 한정. 전장에서의 명령 불복종 같은 경우는 얄짤없다.
  16. 로마군은 교육 수준은 그냥 문맹만 아니면 된다는 식으로 크게 문제삼지 않았지만(당시 공용어인 라틴어를 읽고 쓸 줄 알아야 했고 기본적인 사칙연산도 요구하였다), 체력 테스트는 철저했다. 체력이 모자라면 전투 중에 쉽게 지쳤다가 적군의 공격에 죽을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인데 입대 이후에도 수시로 체크를 했고, 모자라면 그냥 조기 퇴출.
  17. 카이사르가 빚을 하도 많이 져서 채권자들이 절절 매며 바쳤다는 말도 안 되는 얘기가 어떤 작가 때문에 퍼져 있는데 이에 대해 정정. 예나 지금이나 빚쟁이들이 멀쩡히 돈을 떼이고 가만히 있는 족속은 아니며, 카이사르는 총독으로 부임하기 바로 전에도 크라수스가 아니었다면 분노한 빚쟁이들에게 붙들려 맞아죽기 일보 직전의 상황에 있었다. 크라수스가 카이사르의 빚에 대해 한 보증은 어디까지나 미래를 위한 일종의 투자였고, 카이사르는 그 값을 충분히 했다.
  18. 소금과 향신료로 봉금을 주기도 했다. 봉급을 뜻하는 영단어 Salary가 소금을 뜻하는 라틴어 'sal, salis' (명사 제3변화) 에서 나왔을 정도.
  19. 어차피 제대하고 나서 일거리를 찾기 어려운 마당인지라 복무하면서 알고 지낸 소속부대 장군의 사병으로 활동하는게 PMC 생계에 큰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다.
  20. 게르만족이 로마를 약탈하는 중요한 원인이 로마인들이 자기들보다 잘 살기 때문이었던 이상, 자기들도 잘 못 사는 땅에서 더 잘 사는 나라 군대가 약탈을 할 수 있을 가능성은...
  21. 다키아는 풍성한 금광과 은광을 자랑했다. 그러다보니 로마가 다키아를 뺏고나서 파르키아와 사산조 페르시아한테 뺏기지 않으려고 많은 애를 썼다.
  22. 국력도 막강하고 기병 전력이 로마보다 압도적이다보니 당연히 상대하는게 힘들어 약탈이 쉬울리가 없다.
  23. 물론 전근대의 군대라면 이보다 나은 식사를 하긴 어려웠다. 동아시아권 군대의 식사만 봐도 주먹밥 이외의 반찬은 어지간히 부유한 세력의 군대가 아니면 먹기 힘들었을 정도. 사실 현대에도 북한군 같이 가난한 국가들의 경우 당시 로마군보다도 못한(...) 식사를 하는 경우는 흔하다. 때문에 과거 히스토리 채널에서 소개할 때는 일반 서민들 보다 훨씬 더 잘먹었다고 설명했다.
  24. 소의 젖인 우유는 그당시 귀족이나 부자들만이 먹을수 있는 고급 음식이었다.
  25. 고대에는 포도주가 술보다는 음료수로 간주되었다. 물론 많이 마시면 취하는터라 연회를 제외하곤 취하지 않을 만큼 마시는 것을 원칙으로 여겼다.
  26. 또한 스팀팩처럼 병사들이 더 잘 싸우게 하기 위해서도 지급하였다.
  27. 역덕후들의 공적이신 모 여사께서는 로마인들이 육식을 즐기지 않았던 것이라고 서술해놨는데 당연히 틀린 소리. 즐기지 않은게 아니라 먹고 싶어도 먹기 힘들었던 것뿐이다.
  28. 당연히 이 시기에도 있었다. 한번 징집하고 끝이 아니라 많게는 17~45세 기간 1년 징집을 4~5회씩 경험하기도 하기에 굳이 상태 안 좋은 병사를 억지 선발할 필요는 없어 제정 시기의 지원병 선발 기준과 큰 차이는 없었을 것으로 보이며, 로마인 이야기 등에서 언급하는 징병 선발은 성인이 된 뒤 징병검사를 통과한 뒤 현역 판정을 받은 청년들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다.
  29. 물론 성분은 사람 먹을 영양소인...
  30. 비교하기는 좀 그렇지만, 박완서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란 소설에서 초등학생 시절 주인공의 담임 선생님이 수업 분위기를 단체로 저해한 학급 전체를 대상으로 "담임이 그만하라고 할 때까지 서로 자기 짝꿍의 싸대기를 때리는 체벌을 가하는 장면이 나온다. 선생님이 그만하라고 할 때까지 처음에는 형식적으로난 때리다가더 나중에는 그 아이들이 악에 받쳐서 싸대기를 때리게 되고, 아예 반 자체의 분위기가 좆망하게 되는 묘사가 소설 내에서 아주 생생하게 나온다.
  31. 다만 1개 중대에 한정하여 시행했다. 물론 이것 때문에 병사 및 장교들에게 미움을 심하게 받아서 인망을 잃었고, 나중에 그 병사들에게 버림받는다.
  32. 이 과정은 의 기미지배체제가 붕괴된 것과 매우 유사하다.
  33. 그래도 프라이토리아니가 무렵까지, 꽤 오랫동안 필룸이라 불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