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인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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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백인천(白仁天)
생년월일1943년 11월 27일[1]
국적대한민국
출신지중국 장쑤 성
학력경동고
포지션포수, 외야수
투타우투우타
프로입단1962년 도에이 플라이어스 입단 (NPB)
1982년 MBC 청룡 창단멤버 겸 감독 (KBO)
소속팀도에이 플라이어즈/닛타쿠홈 플라이어즈/닛폰햄 파이터즈[2] (1962~1974)
다이헤이요클럽 라이온즈 (1975~1976)
롯데 오리온스 (1977~1980)
긴테쓰 버팔로즈 (1981)
MBC 청룡 (1982)
삼미 슈퍼스타즈 (1983~1984)
지도자MBC 청룡 감독 (1982~1983)
삼미 슈퍼스타즈 플레잉코치 (1983~1984)
LG 트윈스 감독 (1990~1991)
삼성 라이온즈 감독 (1996~1997)
연세대학교 타격 인스트럭터 (1998)
한화 이글스 타격 인스트럭터 (1999)
삼성 라이온즈 타격 인스트럭터 (2000)
한화 이글스 타격 인스트럭터 (2001)
SK 와이번스 타격 인스트럭터 (2002)
롯데 자이언츠 감독 (2002~2003)
1959년 청룡기 전국고교야구 선수권대회 MVP
김영빈 (경기공업고등학교)백인천(경동고등학교)이재환(경동고등학교)
1990년 한국프로야구 우승 감독
김응용(해태 타이거즈)백인천(LG 트윈스)김응용(해태 타이거즈)
MBC 청룡 역대 감독
팀 창단백인천
(1982~1983)
김동엽[3]
(1983)
LG 트윈스 역대 감독
배성서
(1989)
백인천
(1990~1991)
이광환
(1992~1996)
삼성 라이온즈 역대 감독
우용득
(1993~1995)
백인천
(1996~1997)
서정환
(1998~1999)
롯데 자이언츠 역대 감독
우용득[4]
(1999~2001)
백인천[5]
(2002~2003)
양상문
(2004~2005)
MBC 청룡-LG 트윈스 등번호 2번
프로 출범백인천 (1982~1983)최정기 (1984~1988)
양현기 (1989)백인천 (1990~1991)김동수 (1992~1999)
1982년 한국프로야구 타격왕
프로 출범백인천(MBC 청룡)장효조(삼성 라이온즈)
1982년 한국프로야구 최다 안타상
프로 출범백인천(MBC 청룡)박종훈 (OB 베어스)
장효조 (삼성 라이온즈)
1982년 한국프로야구 최다 득점상[6]
프로 출범김봉연(해태 타이거즈)
백인천(MBC 청룡)
이해창(MBC 청룡)
1982년 한국프로야구 최고 장타율
프로 출범백인천(MBC 청룡)장효조(삼성 라이온즈)
1982년 한국프로야구 최고 출루율
프로 출범백인천(MBC 청룡)장효조(삼성 라이온즈)

1 소개

대한민국의 전직 야구 선수이자 야구 감독. 오랜 기간 SBS 스포츠의 일본프로야구 담당 해설자로 활동했다. 현역 시절 포지션은 포수외야수.

한국프로야구 시절을 설명하자면,

MBC 청룡 시절 팬들에게는 한국프로야구 역사상 유일한 선수 겸 감독 및 4할타자.
LG 트윈스 팬들에겐 역사상 둘밖에 없는 우승 감독[7]이자 LG 최초의 우승 감독.
삼성 라이온즈 팬들에겐 556의 비밀번호를 끊어주고[8] 이승엽을 발굴해 내고[9]리빌딩과 성적을 모두 만족시키며 삼성의 팀 컬러를 확실하게 가져간 감독.
롯데 자이언츠 팬들에겐 백골프 or 백골퍼이자 팀의 암흑기를 만든 금지어. 그리고 타팀팬들이 맨날 꼴데라고 비하해도 할 말이 없게 만들어버린 천하의 개쌍놈.[10]
야갤러들에겐 현대판 예송논쟁을 불러 일으킨 장본인.현대판 인조

삼청태팬들의 평가가 없는 건 활동 기간도 길지 않았고 간통죄로 중도 아웃되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현대 유니콘스로 인한 팬덤 와해로 인해 그냥 잊혔다. 게다가 감독을 맡지도 않았다.

위에서 언급된 것처럼 LG와 삼성에겐 애증의 대상이요, 롯데 팬들에게 있어서는 증오와 원망의 대상이다. 인천 팬들에게도 삼미 시절에 터진 간통사건 때문에 감정이 좋을 리 없을 듯.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가 대한민국 야구사에 한 획을 그은 인물임에는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참고로 그의 이름은 인천광역시와는 전혀 무관하다. 백인천의 이름은 한자로 쓰면 白仁天이고, 인천시는 仁川이다.

프로야구 출범전에 일본에서 오랫동안 선수 생활을 한 것 때문에 일부 신규 유입 야구팬들이 재일 교포로 잘못 알고있다.

2 학창 시절

황금사자기 전국고교야구대회 70주년 기념 OB All-Star
in 2016. 동아일보
장효조
OF / 상원고
이정훈
OF / 상원고
박재홍
OF / 광주제일고
류중일
SS / 경북고
김성래
2B / 경북고
김동주
3B / 배명고
남우식경북고
송진우세광고
유지홍
1B / 선린상고
백인천
C / 경동고
경동고 시절 야구선수로 뛰는 와중에 스피드 스케이트 선수로도 활동했고, 1961년 500m 고등부 대회를 싹쓸이한 경력이 있을 정도로 출중한 실력을 보유한 만능 스포츠맨 이었다. 이런 경험 때문인지 두 번째 부인 사이에서 난 아들은 쇼트트랙 스케이트 선수로 키우려 한 적도 있었다. 한편으로 야구선수 로서의 능력은 더욱 뛰어나서 학창시절 "원자탄 투수" 이재환과 함께 배터리를 이루며 경동고를 당대 고교야구 최강으로 이끈 주역이었으며, 특히 1960년 한해 경동고의 성적은 무려 32승 2무로 그야말로 초고교급 야구팀이었고 백인천이야 말로 그 경동고의 핵심 선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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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의 백인천.

1959년 이영민 타격상을 수상했고, 1960년 6월에는 서울운동장 야구장이 개장한 이래 고등학생으로는 처음으로 홈런을 기록한 적도 있고, 그해 10월 일본 원정경기 때 메이지 진구 구장에서도 홈런을 기록했는데, 이는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고교생이 진구 구장에서 기록한 2번째 홈런이었다. 또한 1962년 1월, 타이완에서 열린 아시아 야구선수권 대회 최종일 필리핀과의 경기에서도 비바람을 뚫고 타이베이 송산구장 개장 이래 외국인으로서는 최초로 홈런을 날리기도 했다(…).

경동고 졸업 후 농협 야구단에서 활약했으며, 국제대회에서 보여준 뛰어난 활약으로 몇 번이나 일본 프로야구에서 스카웃 제의가 있었지만 당시 강하게 남아있는 반일감정 등의 이유로 번번히 무산되었다. 그러던 와중에 타이완 아시아 야구선수권 준우승을 치하하기 위해 대한체육회에서 개최한 환영회에 선수단이 참석했는데, 당시 대한체육회장은 이주일 준장으로 박정희 군사정권의 핵심 인물 이었다.콩나물 팍팍 무쳤냐 하시던 그 양반이 아니다! 연회 도중 이 준장이 백인천에게 야구하면서 애로사항이 없느냐라고 묻자 기다렸다는 듯이 "일본으로 가고 싶은데 좀 도와주십쇼."라고 당돌하게 답했다. 사실 백인천은 선수권을 마치고 타이완을 떠나 일본에서 한국행 비행기를 기다리던 중에, 한 재일교포 야구인의 주선으로 도에이 플라이어즈의 미즈하라 시게루 감독과 구단 관계자를 만나 가계약을 맺은 상태였다. 이에 당시 야구협회장이 펄펄 뛰며 반대하자 이 준장은 오히려 "이런 젊고 훌륭한 선수가 해외로 나가 많은 것을 배워야 한다!"면서 신문에 여론조사까지 의뢰했고, 결과는 80%의 국민이 백인천의 일본 진출에 찬성하는 것으로 나왔다. 결국 백인천은 일본식 이름으로 개명하지 않고 나중에 돌아와 병역의무를 완수한다는 조건 하에 일본으로 건너가게 되었다. 결론적으로는 제대로 안했다. 당시 병역비리 사건이 크게 터져서 잠시 귀국한 적이 있었지만, 사태가 수습되자마자 다시 일본으로 출국, 중앙정보원 소속 첩보원으로 일본에서 병역을 완수했다(…).[11] 당시 김성근등 실력이 쟁쟁하던 선수들도 도로 한국으로 와서 야구를 하는 판국이여서 야구계에서 걱정을 많이 했다고 한다.

3 일본 선수 시절

그러나 개명하지 않겠다는 선언과는 달리 유니폼에는 BAEK이 아닌 HAKU로 적혔는데 그 덕에 영문으로 된 일본프로야구 관련 자료에 Jinten Haku라고 나와 있는 경우가 많다.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건 일본에서 뛴 대한민국 선수 다 마찬가지라 할 수 있다. 애시당초 Jinten Haku가 백인천(白仁天)의 한자를 일본식으로 읽은 것을 서양식으로 성과 이름을 뒤집은 것이다. 따라서 한자만 따지면 개명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애매하다.

사실 그 시절에는 우리나라도 이토 히로부미를 우리식 발음인 이등박문으로, 장제스를 장개석으로 읽는 일이 흔했다. 한자의 일본 발음을 따르지 않은 한국 선수는 선동열이 처음이다. 일본어는 198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동북아시아 한자문화권 지역 출신의 인명표기를 일본어 음독으로 표기했다. 당장 선동열보다 조금 더 앞서 1980년대 중반에 일본에 데뷔해서 맹활약 했던 대만출신인 궈위안즈(郭源治:곽원치), 궈타이위안(郭泰源:곽태원)도 일본에서는 각각 카쿠 겐지, 카쿠 타이겐 등 일본식 음독으로 불렸고 유니폼에도 곽(郭)의 중국어 발음인 KUO가 아니라 일본식 음독인 KAKU로 표기됐다. 대만 출신으로서 일본에서 대만 발음으로 선수 등록이 이루어진 것은 선동열보다 조금 뒤에 데뷔한 쉬밍제(許明傑:허명걸)에 이르러서 였고, 유니폼에도 성인 허(許)의 일본식 한자독음인 KYO대신에 중국발음인 HSU로 표기 했다. 이는 한어병음방안이 아닌 웨이드식 표기이다. 즉, 이는 백인천 만의 문제는 아니었다는 얘기다. 이상훈의 경우는 별명을 반영하여 SAMSON LEE로 적혔다. 다시 말하면 동아시아권 선수 이름의 원어발음 존중 표기법의 효시가 선동열이었던 셈.


장훈과 함께. 왼쪽 롯데 유니폼이 백인천. 오른쪽 도쿄 유니폼이 장훈이다. 사진은 1977~1979년 찍은 것으로 보인다.[12] 정확한 정보를 아시는 분은 추가바람.

일본프로야구에서는 1962년부터 1974년까지 토에이 플라이어즈(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의 전신), 1975년부터 1976년까지 다이헤이요 클럽 라이온즈(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의 전신), 1977년부터 1980년까지 롯데 오리온즈(치바 롯데 마린즈의 전신), 1981년 킨테츠 버팔로즈에서 선수로 뛰며 오랫동안 활약했고, 이후 한국프로야구 출범 원년인 1982년에 MBC 청룡에 감독 겸 선수로 입단했다.

입단 초기엔 말이 안 통하는 외국인에게는 가혹한 포지션인 포수로 플레이했는데, 항상 일본어 사전을 손에서 놓지 않으며 투수와의 의사소통을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1963년 시즌 중반 주전 포수들의 부상으로 인해 1군으로 올라와 미즈하라 시게루 감독 눈에 들며 주전 포수자리를 꿰차게 되었다. 그러던 중 1965년 시즌 후반부터는 빠른 발과 강한 어깨를 살리기 위해 외야수로 전향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2군에서 백인천이 가끔 외야수로 뛰면서 좋은 플레이를 보이자 2군 감독이 미즈하라에게 외야수 전환을 건의했는데 미즈하라는 "발 빠른 포수가 어디 흔한 줄 알어?" 라고 화를 내며 일축했으나, 그 해 난카이 호크스와의 경기 도중 장훈이 부상으로 빠지자 백인천이 백업 좌익수로 교체 투입되었고 시기 적절하게 까다로운 안타성 타구를 다이빙 캐치하는 파인플레이를 선보인다. 이는 포수로 뛰면서 분석해 두었던 당시 타석에 있던 상대방 선수의 타격 스타일과 타구 방향 등을 염두에 두고 미리 공이 떨어질 만한 위치에 이동해 있었는데 그 예측이 적중한 것이었다.

결국 미즈하라 감독도 "오늘부터 외야수를 하라."고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그 이후 백인천은 주로 중견수로 뛰면서 타자로서의 재능을 더욱 꽃피우게 되었다. 실제로 이와 같은 이유로 포수 출신 외야수가 많다. 대표적인 예로 이택근이라든가, 브라이스 하퍼라든가.

백인천이 중견수를 볼 때 좌익수는 주로 선배이자 절친인 장훈이 맡았는데, 백인천은 빠른 발과 넓은 수비범위로 리그 정상급의 외야수비를 자랑한 반면, 장훈은 백인천 못지않게 발은 빨랐지만 어릴 적 입은 화상으로 불편한 오른손과 고등학교 시절 부상으로 약해진 어깨 때문에 수비는 영 자신이 없었던지라 좌중간을 향해 날아오는 타구는 으레 백인천만 바라보기 일쑤였다. 그리고 그때마다 백인천은 먼 거리를 헐레벌떡 뛰어와 타구를 잡아낸 적이 한두 번이 아닐 정도였다(…).[13] 그래서 어느 날 백인천은 이를 참지 못했는지(?) 웃으면서 장훈에게 "장이형, 형 연봉 중에 수비 몫은 나한테 줘요."라고 농을 걸자 장훈은 백인천을 장난스레 쥐어박으며 "임마, 너 수비연습 시켜준 건 생각 안해?"라면서 서로 껄껄댔다는 에피소드도 있다고. 참고로 백인천은 장훈과 친해서인지 장이형이라고 불렀다.

한국인 선수인지라 투수에게 종종 빈볼성 공을 맞기도 하고 심판 판정에 있어 불리한 점도 많았다. 대표적인 예로 1970년 5월 23일 킨테츠 버팔로즈와의 시합 때 주심이었던 전직 권투선수 출신 심판 츠유자키 모토야가 존에서 한참 벗어난 투구를 스트라이크로 판정하며 백인천에게 삼진을 선고하자 이에 발끈한 백인천이 츠유자키에게 죽빵을 날리고 퇴장당한 사건은 지금도 퍼시픽리그의 명장면으로 꼽힐 정도다. 이 사건으로 백인천은 츠유자키에게 폭행죄로 고소당했지만 며칠 후 서로 화해하고 소를 취하하면서 무혐의 처리되었다.

또한 자신에게 빈볼을 던진 투수는 세이프티 번트를 시도하면서 1루에 커버 플레이를 들어오는 그 투수의 발을 스파이크 날로 밟아버릴 정도로 보복은 반드시 하는 파이터 기질도 있었다. 한편으로 팀 선배인 장훈의 후광도 있었고 소속된 파벌 자체가 일본프로야구계의 성골이라고 할 수 있는 미즈하라 시게루 계열이었기 때문에 한국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인간 관계에서 크게 손해본 건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다. 오히려 미즈하라가 토에이 감독으로 재임하던 시절에는(1962~1967) 트레이드를 거부할 만한 힘까지 있을 정도였다.

1975년 막장팀 다이헤이요 클럽 라이온즈에 이적하여 히가시오 오사무(東尾修), 도이 마사히로(土井正博), 가토 하지메(加藤初, 前 SK 와이번스 투수코치), 등과 함께 팀의 간판으로 활약하며 0.319로 타격왕을 차지했다. 재미있는 것은 그해 라이온즈 타격왕 백인천, 홈런왕 도이 마사히로, 다승왕 히가시오 오사무를 배출했음에도 리그 우승을 하지 못했다는 것.[14] 이 해의 타격왕 경쟁은 상당히 치열했는데 백인천과 타격왕 타이틀을 놓고 경쟁했던 상대는 공교롭게도 백인천을 트레이드시킨 전 소속팀 닛폰햄 파이터즈의 오다 요시토였다. 자신을 버린 전 소속팀에 대한 앙갚음이라고 생각했는지 세이프티 번트까지 동원하면서(...) 타격왕 경쟁에서 물러나지 않았고 시즌 마지막 경기에 딱 규정타석을 채워서 5모(0.0005) 차이로 극적으로 수위타자 타이틀을 따냈다. 이 타이틀 경쟁이 자신을 버린 전소속팀에 대한 극적인 복수로 인식되어 당시 상당히 임팩트가 있었는데 그 때문인지 백인천이 라이온즈에 재적한 것은 불과 2년밖에 안 됨에도 불구하고 당시 팀 응원가 우리들의 우상 라이온즈(僕らの憧れライオンズ) 의 가사에 나오는 선수들 중에 백인천이 나올 정도고 세이부 라이온즈에서 전신 구단인 다이헤이요 시절 스타들을 초청해 팬미팅을 가질 때 백인천도 참석했다.

일본프로야구 통산 1,969경기에 출장하여 1,831안타, 209홈런, 212도루를 기록했다. 현재 이 기록은 명구회 가입 조건인 2,000안타, 200홈런에 가장 가까운 기록으로 평가받고 있지만, 안타깝게도 대한민국에서 기록한 135안타를 더한다고 해도 2,000안타가 되지 않는다. 2006년 WBC 이후부터는 일본에서도 대한민국에서 세운 기록을 인정해 주는 게 일반적이다. 그래서 이승엽의 한일 통산 400호 홈런도 방송에서 직접 언급을 했었다.

만약 귀국하지 않았다면 2,000경기 출장은 확실히 이루었을 것이 분명한 바, 영광 대신 조국을 선택한 선수 백인천을 무조건 비난하기는 어렵다고 볼 수 있다. 한편, NPB에서 활동한 외국인 선수 중 알렉스 라미레즈에 이어 두 번째로 안타를 많이 친 선수이기도 하다. 참고로 여기서 '외국인' 선수란 일본 기준으로 성장기 및 학창 시절 및 학교 선수생활을 외국에서 보낸 선수를 말한다. 국적만 외국이고 실제 성장 및 학창시절을 일본에서 보낸 장훈이나 오 사다하루(왕정치) 같은 선수는 제외한다.

참고로 일본과 대한민국 양쪽에서 수위타자를 차지한 최초의 첫 선수이다. 또한 대한민국에서 외국 리그로 진출한 선수 중에 최초로 타이틀을 획득한 선수이기도 하다. 2012년 전까지는 유일했었지만, 2012년에 이대호가 퍼시픽리그 타점왕을 차지하면서 유일한 선수라는 타이틀은 사라졌다.

한편 화려한 선수생활에 걸맞지 않게 일본시리즈 우승은 커녕 진출도 못한 콩라인이기도 했다. 신인시절이던 1962년에 토에이 플라이어즈가 일본시리즈 우승을 차지하긴 했으나 그 때는 2군에 있었고, 1군에 정착한 시점부터 한큐 브레이브스의 황금기가 도래하면서 한큐의 통합 3연패를 그저 부러워해야만 했다. 수정 전엔 리그 우승도 경험 못했다고 했으나 사실 퍼시픽리그가 전후기리그제로 운영하던 시절 롯데 오리온즈 소속이던 1977년 후기리그, 1980년 전기리그 우승을 경험해 본적 있긴 하다.
근데 문제는 플레이오프에서 팀이 깨져서 일본시리즈를 가진 못했다(...)[15]

4 한국 선수 시절

파일:Attachment/백인천/백인천4할.png

1982년 원년 시즌에 타율 0.412(72경기[16] 250타수 103안타[17])를 기록하게 되는데, 이 타율은 당연히 한국프로야구 단일시즌 최고타율이다. 일단 일본프로야구에서도 4할을 친 선수는 없고 일본프로야구 최고 타율 기록은 1986년 한신 타이거즈의 랜디 바스가 기록한 0.389이다. 미국에서도 1941년에 테드 윌리엄스가 4할을 친 이후로는 4할타자가 한 번도 나오지 않았다.

장타율 또한 0.740로서 2015년 에릭 테임즈에게 깨지기 전까지 33년 동안 1위를 유지하였다. 다만 당시 김성한이 투수로 나와서 10승 방어율 2점대를 기록할 정도로 현시점 고교야구에이스가 투수겸 타자로 활약하는라고 할 정도로 상당히 수준이 낮았고 에이스 박철순이 224이닝80경기중 36경기등판을 던질 정도로 선수층이 매우 안 좋았다는 점,해태는 14명으로 시작해서 20명으로 야구했다 카더라에이스 투수만 피해도 상당히 기록관리가 쉬운 환경이였다는 점[18], 월등히 적은 경기수, 그리고 선수 겸 감독으로서 스스로 기록관리를 했다는 의혹은 이 기록을 상대적으로 저평가하게 만드는 요인이다.물론 40세에 4할에 홈런왕을 노려볼수있었다는건 대단한 기록 기록관리를 했다는 주장에 대한 김은식 기자의 반박도 보자. 그리고 마치 상대팀의 에이스가 나온 경기는 결장이라도 하면서 피해간 것같은 뉘앙스로 서술을 했는데 위에 내용을 보면 알겠지만 실제로 백인천은 그해에 벌어진 80경기의 90%에 해당하는 72경기에 출전했으며 그나마 결장한 8경기 중에서 5경기는 몰수경기에 따른 출장정지에 의한 것으로 실질적으로 백인천이 결장한 경기는 불과 3경기에 불과했다. 오히려 감독이라는 신분을 활용해서 어려운 투수가 나오면 결장이라는 수단을 쓸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거의 전경기 출장에 가깝게 출전했다는 점은 감안해야한다. 일단 본인은 4할보다는 홈런, 타점왕을 노렸는데 결과적으로 그 두개는 못하고 4할만 달성하게 됐다고 한다.기록관리설 정리

일본시절을 봐도 3할을 넘긴 적이 딱 3번이며 장타율 5할을 넘긴 것도 3번뿐이며 출루율 3할5푼을 넘긴 시즌도 2번인 선수가 40세에 4할을 치고 장타율이 7할이 된다는 것 자체가 상당히 일본과 창단당시 KBO의 야구수준을 보여줬다고도 볼 수 있겠다.

그렇지만 통산 타율이 0.278, OPS가 0.746로 절대 그저그런 선수라고 말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일본프로야구 무대에서 20년이나 현역생활을 이어갔다는 것 자체가 백인천이 일본프로야구에서도 주전급 이상의 상위권에 해당하는 실력을 가진 선수였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또한 일본 프로야구에서 통산 209홈런을 기록했는데 한국프로야구에서 통산 200홈런을 넘긴 선수가 몇명이나 되는지 세어봐라. 2015년 시즌까지 한국프로야구를 거쳐간 그 많은 선수 중에서 200홈런을 넘긴 선수는 22명밖에 없으며 백인천의 기록인 209개를 기준으로 하면 불과 17명 밖에 없다. 이러한 백인천의 성적의 수치적 상승은 대만리그를 생각하면 쉬울 것이다. 많은 외국인선수가 말년에 대만으로 가는데 기록이 전성기 못지 않은 혹은 뛰어넘는 경우가 많다. 타카츠 신고, 틸슨 브리또 등등 당연히 외국인선수가 이전에 뛰었던 일본, 한국보다 리그 수준이 낮기 때문이다.

원년에는 지금은 용병이라고 볼 수 있는 재일교포가 없었다. 재일 한국-조선인하면 김일융, 장명부처럼 리그를 씹어먹은 투수들이 들어오고 최동원, 장효조, 김시진처럼[19] 원년에 참가하지 않은 선수들도 꽤 있다는 점에서 82년도와 83년도는 리그수준 차이가 컸다.

어찌되었는 4할타율의 기록은 대단한 것이어서 백인천이 나중에 백골퍼라는 조롱을 듣게되자 MBC팬들이 불편한 감정을 표현하기도 한다.

파일:Attachment/백인천/게브랄티.jpg
여담으로 MBC 청룡에서 4할을 치던 1982년, 종합비타민제 'Gevral T' 광고 모델로 출연했다. 잘 나가는 스포츠맨과 종합비타민제의 결합은 누구나 쉽게 생각할 법하지만, 문제는 우리말로 '게브랄 티'로 소개한 상품명 덕분에 당시 초딩부터 어른까지 만인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광고영상[20] 미국에선 '지브럴 티'쥐의 고환로 읽는데 왜 한국에서 '견공 고환(?)'을 연상시키는 요상한 한국이름을 붙였는지 의문. '우공 고환'을 연상시키는 의약품 소부날도 있으니 아무래도 상관없어 하지만 일종의 노이즈 마케팅으로 브랜드는 확실히 대중에 각인시켰으니 효과로서는 만점이었을지도 모른다.

한편으로 선수로서는 말할 나위 없이 훌륭했지만, 감독 자질은 다소 부족했다는 것이 중론이었다. MBC의 감독(겸 선수)으로 취임 할 당시 백인천의 나이는 40세로 가장 젊었고, 백인천보다 선배 야구인들을 코치로 영입하기엔 조금 곤란했던지라 백인천의 의중을 받들어 영입한 코치가 동년배인 이재환과 유백만이었다. 특히 이재환은 경동고 시절 배터리로 호흡을 맞춘 사이였으나, 감독과 코치라는 수직 관계로 재회한 이 둘은 시즌 내내 사사건건 충돌을 빚으며 팀내 분위기를 험악하게 만들었다(…). 오죽 사이가 안좋았으면 이듬해 백인천이 삼미 슈퍼스타즈로 이적하자 먼저 코치로 와 있던 이재환[21]을 2군 감독으로 내려 보낼 정도였으니[22]... 게다가 일본야구 타격왕 출신 백인천의 능력을 과신했는지 몰라도, 두 명 밖에 없던 코치 T/O를 전부 투수코치로 채운 것은 야구를 좀 아는 사람들이 보기엔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처사였다. 결국 MBC는 1982년 시즌 후기리그 부터 타격과 수비 강화 차원에서 명 2루수 출신의 한동화를 코치로 영입하긴 했고, MBC는 그해 원년 6개구단 중 유일하게 세 명의 코치를 보유하였다.

아무튼 간에 여차저차 원년 시즌을 마친 백인천은 개인 사정을 이유로 1983년 시즌 초반에 MBC에 사의를 표명하고 삼미 슈퍼스타즈로 이적하여 타격코치 겸 선수로 활동하다가 시즌 도중 간통죄로 인해 쇠고랑을 차면서 그 해 시즌을 마감하고[23] 이듬해인 1984년 조용히 은퇴했다. 첫번째 부인은 일본에서 결혼한 재일교포. 그리고 두번째 부인과는 간통 이후 결혼하여 지금까지 살고 있다.

그렇게 영광의 선수시대가 끝났다.

5 역대 기록

역대기록
연도소속팀경기타수타율안타2루타3루타홈런타점득점도루볼넷출루율장타율OPS
1962도에이 플라이어즈1군 기록 없음
19634120.15830105000.154.263.417
196492250.252631216232598.284.380.664
1965116356.26795142144443911.294.435.729
1966126363.26295131423421812.293.336.629
1967128396.2801111741051431315.313.419.732
1968117382.29611313315515299.316.463.779
1969109454.2911321791246681313.314.447.761
1970127496.2761373021864672836.325.454.779
1971107421.2381001141138471726.283.361.664
1972126486.315
(3위)
1533331980672035.362.512.874
1973닛타쿠홈 플라이어즈96291.2477213062027816.290.354.644
1974닛폰햄 파이터즈114418.2611092011542632422.310.421.731
1975다이헤이요 클럽 라이온즈102379.319
(1위)
1211821653571317.349.504.853
1976121469.288
(5위)
1351721759541523.321.441.762
1977롯데 오리온즈126452.281127112165650630.327.420.747
197858171.25744703111957.289.351.640
1979124415.340
(3위)
141254187147321.378.549.927
198076167.21636125211107.253.335.588
1981긴테쓰 버팔로즈84194.2274411042319214.292.345.637
연도소속팀경기타수타율안타2루타3루타홈런타점득점도루볼넷출루율장타율OPS
1982MBC 청룡72250[24].412
(1위)
103
(1위)
23
(1위)
119
(2위)
64
(2위)
55
(1위)
1142
(5위)
.497.7401.237
연도소속팀경기타수타율안타2루타3루타홈런타점득점도루볼넷출루율장타율OPS
1983삼미 슈퍼스타즈35121.19023611176111.261.281.542
19841032.281920310611.343.625.968
통산NPB 20시즌19696579.278183128343209776801212322.316.430.746
KBO 3시즌117403.3351353122391671356.421.5931.014

6 LG 트윈스 - 삼성 라이온즈 감독 시절

그 이후에는 골프용품 관련 사업을 벌이며 야구계와는 잠시 거리를 두고 있다가 1990년 배성서의 후임으로 MBC 청룡 감독으로 컴백했다. 이 후 청룡이 럭키금성그룹에 매각되며 LG 트윈스로 개명해 LG의 창단감독이 된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MBC의 시작과 마지막을 함께한 감독이자 LG의 시작을 함께한 감독.

아무튼 다시 돌아온 백인천은 6년 연속 포스트시즌 탈락의 흑역사를 쓴 팀을 추스려 6월부터 돌풍을 일으켜 페넌트레이스와 한국시리즈 통합우승으로 이끄는 수완을 발휘한다. 당시 해태 타이거즈는 5연패를 노리고 있었으나 1.5게임차이로 LG에게 패넌트레이스 우승을 내주고 플레이오프에서마저 삼성 라이온스에게 일격을 당하며 3위로 주저앉았다. 요시요시 1990년의 우승은 백인천의 흑역사화와 더불어 잊힌 영광의 역사로 남을 줄 알았지만, 2013년에 김기태 감독이 돌풍을 일으키며 6668587667의 기나긴 암흑기를 끝장내자 다시금 주목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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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수 은퇴식에서 헹가레를 받는 백인천.# 그리고 그날 해태가 더블헤더 2차전에서 지면서 최초의 정규리그 우승을 확정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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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리즈 우승 직후 헹가래를 받는 백인천.

이때까지만 해도 좋았다. 허나 그로부터 12년 후...

하지만 다음해인 1991년에는 구단과의 재계약 문제[25]와 선수들간의 사이가 벌어짐으로 인해 팀은 6위로 내려앉았고, 시즌 종료 뒤 이광환에게 감독직을 넘기고 LG를 떠났다.[26] 그러다가 1995년 10월 우용득의 후임으로 삼성 라이온즈 감독으로 컴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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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삼성 부임 전부터 백인천 감독의 건강은 별로 좋지 않았다. 1996년부터 막장급의 전력이던 삼성을 각고의 노력끝에 추스려 1997년부터 슬슬 성적이 나기 시작했는데, 6월에 한번 뇌출혈로 병원 신세를 지게 되었다. 그렇게 쓰러진 뒤 감독직을 유지를 하느냐 마느냐 설왕설래도 있었지만, 그래도 원래 의지가 강한 백인천이었던 바 주변의 만류를 뿌리치고 결국 현장에 복귀하게 되었다. 하지만 백인천이 돌아와보니 코치들끼리 파벌이 나뉘어 서로 싸우고 있었고 백인천은 이에 크게 실망하고 만다. 더불어 초반에 좋았던 성적도 3위로 내려가게 되었다.

그리고 그해 시즌 막바지 무렵 LG와의 더블헤더 경기에서, 당시 삼성 선발 투수 정성훈이 초장부터 무너지기 시작했고 구원투수로 전병호가 등판했다. 그런데 당시 포수가 막장으로 유명(?)한 김영진이었고,[27] 포수 출신이라 볼배합에 많이 관여하던 백인천 감독이 변화구 사인을 냈는데... 배터리는 사인을 잘못 읽었는지 4번타자 심재학과 정면 승부를 선택했고 3점 홈런을 허용하고 말았다. 마운드에서 내려온 전병호를 불러 백인천이 왜 내 사인대로 던지라는데 안 던지냐고 화를 내자 전병호는 던지라는 대로 던진거라고 개겼고, 백인천은 격분하여 전병호의 뺨을 때리고는 다시 뇌출혈로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백인천은 곧바로 병원으로 후송되었고, 더블헤더 2차전은 감독 없이 경기를 치뤄야 했다. 결국 최측근인 수석코치 조창수가 감독대행을 맡으며 잔여시즌과 포스트시즌까지 치르게 되었다. 그리고 플레이오프 종료 후 백인천은 감독직에서 사퇴하였다. 일명 전병호가 백인천을 보내버린 사건. 사실 전병호보다는 김영진의 잘못이 크다고 무방하다, 그 전의 낫아웃사건만 봐도 공수주 모두 최악임을 인증했으니...

사실 퇴임 전까지 삼성에서도 MBC와 LG 시절 못지않게 여러모로 좋은 평가를 받았다. 무엇보다도 이승엽을 발굴한 것과 2년이라는 짦은 기간에 야수진의 전면적인 세대교체를 성공적으로 단행해서, 이후 삼성이 타력을 바탕으로 최강 팀으로 군림하게 된 기초를 만들었다. 이 시절에는 대부분 노쇠화한 30대 주전들을 제치고 젊은 신인급들만 데리고 스프링캠프를 일찍 시작하는 등 의도적으로 세대교체를 단행했다. 지금까지도 KBO 리그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리빌딩 사례로 손꼽힌다. 선수 은퇴 후 미국에 건너가 있던 박흥식을 타격코치로 데리고 온 것도 나름의 업적. 자신의 양아들로 보자면 이만수[28], 양준혁[29]을 위주로한 삼성 멤버들과 이승엽, 정경배, 최익성, 김태균, 김한수, 신동주, 김종훈(...)[30]

하지만 괜찮은 평가와는 별개로 사실 알고 보면 감독 생활은 상대적으로 순탄치만은 않았는데, 강기웅[31]전병호, 동봉철과의 트러블과[32] 짧은 커리어긴 했어도 외야수 전향 전에 포수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정작 포수 육성에 실패[33]했다는 것 자체는 오점으로 남는다. 삼성 감독 재임시기 있었던 사건으로는 압축 배트 의혹도 있었다. 1997년 5월 4일, 삼성과 LG의 대구 경기에서 삼성 타자들이 정경배의 연타석 만루홈런 등 27:5라는 역대급 점수를 내면서 LG 투수진을 떡실신시키자 다음 날 경기 도중 LG 트윈스 천보성 감독이 삼성 타자들이 사용한 미즈노사의 배트를 규정 위반인 압축배트라고 주장한 사건이다. 이날 경기 도중 백인천이 LG 주루코치이던 조 알바레즈와 멱살잡이까지 가는 난투를 벌이기도(...). KBO는 해당 방망이를 목공소에서 절단해보고 이상이 없다고 했으나 LG 측은 계속해서 의혹을 제기했고 뜬금없게도 제3자인 쌍방울 감독 김성근이 정식으로 KBO에 공문을 보내어 결국 제조사인 미즈노에 배트를 보내서 의뢰까지 한 결과 배트에는 이상이 없었다고 밝혀지게 된다. 또한 메이저리그 사무국에서도 X-ray와 도료 검사까지 했으나 결론은 이상 없음이었다. 참고로 그 때 다른 구단들도 논란이 되었던 배트를 암암리에 구입해서 사용하기 시작했다. 전병호 사건만 부각되지만, 부임 때부터 건강이 안 좋은 것도 있었고 압축배트 논란 때부터 건강문제가 본격적으로 심각해지기 시작한 상황이었다. 거기에다가 96년 시즌 삼성의 전력이 영 좋지 못한데다가 97시즌에서 뇌출혈로 인해 빠진 경우가 있어서 감독직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는 평가도 있다. 이 때문이었는지 역대 삼성 감독들 중에서 두 번째로 승률이 낮다.(승률 0.488) 또한 두 번째 뇌출혈과 전병호의 뺨 사건까지 겹친 관계로 삼성은 97년도에 3년 만에 포스트시즌에 진출했지만 정작 그 해에 열린 포스트시즌은 조창수 감독대행이 팀을 이끌었다. 이것 또한 삼성 시절의 백인천에게는 무척 아쉬운 일. 또한 백인천 감독에게 민폐를 끼친 선수들이 한 두명이 아니었으니(김영진[34], 최창양[35], 양용모[36]) 그래도 이 상황속에서도 구단측에서부터 연봉도 후하게 주고 백인천의 양아들인 선수들에게 용돈을 줄 정도로 헌신적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고 쓰는 걸 보면 삼성 감독 시절의 백인천의 노력을 엿보일 수 있는 대목이다.

LG 트윈스의 감독으로 복귀했었던 점을 감안한다면 그래도 미운 정, 고운 정이라도 박혀 있었는지 이후에는 2000년경 삼성의 타격 인스트럭터로 활동하게 되고[37] 2001년부터 타팀의 타격 인스트럭터로 활동했는데 한화 이글스의 타격 인스트럭터로 있었을 때에는 김태균의 스윙폭을 늘리려다가 망한 전력이 있었다.(...) 그리고 2002년 롯데 자이언츠의 감독으로 영입되었는데 이것이 롯데팬에게는 사상 최악의 악몽이 될 줄 누가 알았으랴... 그리고 삼성의 감독으로 부임했었을 때처럼 우연히도 전임 감독이 우용득이었다.

그리고 그 다음에 후술할 내용은 지금까지 서술한 이 인물하고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봐도 좋다.

7 롯데 자이언츠 감독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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롯데 팬들의 영원한 혐짤.

로나쌩 클럽 종신감독
자이언츠 초대 암흑군주
롯데, 아니 KBO 역사상 최악의 감독중 하나
드디어 마왕 백골퍼의 시대가 도래한다.
다른 팀에게는 홀인원이나 버디를 롯데에게는 벙커샷과 보기를
잘도 이런 미치광이 감독을
자매품으로 한화의 김성근이 예약되어 있다 카더라

감독 이름만으로 팬들의 혈압을 올릴 수 있는 능력자(?)로 추앙된 계기를 만든 시절이다. 이순철, 박종훈, 서정환, 선동열, 송일수, 이종운, 김성근 등 팀을 나락으로 만든 감독들의 이름이 거론되지만, 타팀 팬의 눈으로 보더라도 팀을 막장으로 운영한 사람으로는 백인천이 독보적이다. 특히 중립적인 언론까지 나서, 단순히 통솔력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 것이 아니라, 팀에 대한 관심이 하나도 없다고 직접적으로 비판한 사람은 백인천이 유일하다. 프로야구는 순위제이기 때문에, 지도력 부족이나 불운으로 매년 하위권으로 팀을 추락시킬 감독들은 프로야구 역사가 계속되는 한, 계속 등장하겠지만, 무능력과 무리수의 문제를 넘어서 일관되게 이길려는 의지가 전혀 없이 작정하고 팀을 풍비박산내버린 백인천은 어느 누구도 넘어설레야 넘어설 수가 없다. 즉 백인천 급의 감독은 앞으로도 등장해서도 안될 것이다. 이 문단에는 매년 프로야구 각 팀 팬들에 의해 하위권을 마크한 자기팀 감독이 백인천에 동급인 감독으로 언급되곤 하지만, 단순히 팀의 성적을 추락시킨 정도가 아니라 저렇게 명명백백하게 공개태업을 일삼은 감독은 한국프로야구 역사상 백인천밖에 없다.

다른 감독들은 잘해보려는 생각은 있었는데 자신의 능력 및 지도력 부족 + 선수단과의 불화, 여러가지 무리수로 팀을 말아먹었지만, 백인천은 아예 팀에 관심을 하나도 갖지 않았거나 심지어는 맘먹고 팀을 망치려고 작정한 사람처럼 막장행보를 펼쳤다고 평가된다. 이 때문에 팬들로부터 감독 취급도 안 해주는 금지어로 전락하였다.

2001년 김명성 감독의 급사때문에 우용득 후임 감독이 나섰으나, 우용득 감독이 부진하자 롯데구단은 우용득 감독을 해임하고 당시 각팀을 돌아다니며 타격 인스트럭터를 하고 있던 백인천을 영입한다. 공교롭게도 삼성 라이온즈 감독에 부임할 때도 전임 감독이 우용득이었다.

백인천은 2002년 부임하자마자 시즌포기 선언을 했다. 이는 백인천의 감독자질이 매우 떨어진다는 것을 반증하는 대목이다. 아무리 리빌딩을 위해 성적을 포기한다고 하더라도 사령탑이 부임하자마자 저런 말을 한다는 것 자체가 선수들 뿐만 아니라 경기를 보는 관중들까지 엿먹이는 행위라는 것을 모른다는 반증. 2013년 그 어떤 팀 보다도 리빌딩을 외치고 무리수를 두었던 한화 이글스김응용 감독 또한 저런 발언만큼은 하지 않았다.

그래도 그 당시까지는 아주 이해 못할 정도까진 아니었다. 2002년의 롯데는 백인천 이전에도 14연패를 하는 등 추락하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백인천의 행보는 그걸 감안해도 도저히 실드를 쳐줄 수가 없을 정도다.[38]

지탄받고 까이는 여러 감독들을 재평가를 해야하네 마네 하고 아웅다웅할때도 롯데 백인천은 그냥 무조건 논외다. 정말 어그로를 끌 여지조차 없을 정도로 완벽하게 박살내버렸다. 사실 이건 이순철도 마찬가지지만 백인천이 이전에 감독으로 있었던 LG/삼성 팬들도 롯데 백인천은 실드를 안쳐준다는 점을 보면... 사실 말이 좋아 부동의 워스트 1,2위로 같이 언급하는거지 둘 간의 막장도 차이도 이순철을 백인천이랑 엮는게 미안하게 보일 정도로 엄청나게 차이난다는게 중론이다.[39]

위에도 나왔지만 롯데 백인천은 그냥 승부욕 자체가 전혀 없이 제발 나좀 짤라달라는 식의 태업이 의심될 정도로 작정하고 망친 유일한 사례라서 다른 감독을 이 사례랑 엮는건 곧 그 감독에 대한 모욕이라고 말해도 될 정도다. 이 길이길이 남을 만행의 여파로 전임 우용득은 그냥 잊혀져 버리고 만다.

게다가 리빌딩을 한다면서 여러가지 무리수를 일삼았는데, 그게 오히려 독이 되어서 성적은 고사하고 성과도 전혀 안 나오게 되었다. 애초에 리빌딩도 성적, 아니면 뭔가 성과라도 나와야 리빌딩이지 이 경우는 그냥 시즌을 통째로 날려버린 셈. 그러자 2003년 시즌은 아예 팀을 망치려고 작정한 실성한 사람같은 행보를 하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KBO 역사상 최악의 감독으로 반드시 꼽히는 인물이 되어버렸다.

롯데 감독이던 시절의 만행을 정리하자면,


* 벤치에선 골프 치고와서 쳐자질 않나, 기자들과의 회견에서는 자기팀이 어떻게 돌아가는지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안하고 골퍼인 자기 아들 이야기와 골프 이야기만 계속했다. 이때 얻은 별명이 자랑스러운 백골퍼 혹은 백골프. 기자들이 이를 보도하기 시작하면서 팬심은 급속도로 악화되었다.
* 선수기용에 있어서 가장 큰 기준은 자기 말을 듣느냐, 듣지 않느냐였고 그해 롯데 타선은 1번부터 9번까지 모두 타격폼이 똑같이 변했다.복붙 그 결과 시즌 16연패와 팀 통산 최저승률을 기록했다. 거기에 스윙폼 개조에 실패한 선수들은 가차없이 팀에서 쫓아냈는데, 직전해에 3할, 20+홈런, 100+타점을 기록한 팀의 중심타자를 억지로 스윙폼개조하려다가 말을 안듣자 마음에 안든다고 SK로 강제 트레이드 시켰으며, 당시 신고선수였던 정보명은 쫓겨나듯이 상무로 입대했다. 조경환의 경우 당시에 하도 어이없고 억울해서 비오는 텅빈 사직구장에서 눈물을 한바탕 쏟고 인천으로 올라갔다고.
* 특이한 폼 때문에 스윙폼 개조가 불가능했던 박정태2군에 쳐박아 두었다. 다만 나중에 자기 말을 들으니까, 다시 1군에 올리기도 했다.
* 직전해 다승왕인 손민한을 포수 채상병과 트레이드 하려다가 제지 당하자 "그러면 손민한을 포수 시켜야하나?" 라고 농담 삼아 말했다가, 진지하게 에이스를 포수전환 하려고 했다고 오해한 팬들에게 욕을 먹었다.[40]
* 제리 로이스터 감독 이전에도 롯데 감독이 자기가 아는 용병을 영입한 경우가 있는데, 이게 또 백인천 감독이었다. 영입한 선수는 투수 모리 가즈마(森一馬)[41]와 외야수 보이 로드리게스. 이 두 선수는 어지간한 야구팬들에게도 낯선데 당연한 것이 모리 가즈마는 시즌도 시작하기 전에 퇴출, 보이 로드리게스차마 시즌 전에는 퇴출 못하겠는지 7경기 출장하고 퇴출 당했다. 당연히 모두 투타 최고 기록. 이에 대해서 모리 가즈마는 백인천 감독의 친구 아들, 보이 로드리게스는 일본에서 1년 뛰었기 때문에 백인천이 알고 있고 영입할 수 있는 선수라서 영입했다는 이야기가 돌았다. 사실인지는 불명이나 이정도면 막장중의 막장. 두 선수가 퇴출된 이후 영입된 페레즈와 마리오 엔카나시온(일명 이시온)이 모두 그럭저럭 활약해주어서 앞의 두 용병은 더더욱 묻혔다. 말 그대로 흑역사 감독의 흑역사 용병들.
* 그 해에 2할 8푼가량 치고 있던 최고수준의 타자 유망주의 체구가 마음에 안든다고 살 빼랍시고 오리걸음으로 무릎을 아작내버리고 트레이드 시도. 이 시기 부상으로 인한 운동량 부족으로 이대호의 체중이 급격히 불어나기 시작한다.
* 규정타석은 비록 미달이었지만 2년 연속 3할대의 컨택 나쁘지 않고 빠른 발을 가진 선수30-30도 가능한 선수라며 스윙폭을 크게 만들게 하여 한동안 부진에 빠뜨렸다.
* 2차 1순위로 갓 입단한 신인투수선수도 아니라고 방출. 그리고 그는 SK에서 활약을 하다 KIA에서도 활약하고 있다.
* 멀쩡히 타자로 잘 뛰던 선수를 투수로 전향시키려고 하다가 실패를 했으며, 결국 당사자는 타자로 복귀하나 은퇴했다. 좌완 사이드암 투수가 희귀함을 감안해도...
* 경기 전 훈련하는 한 선수를 두고 저 XX는 내 말대로 안하는 XX인데 왜 여기서 훈련하고 있어? 2군 내려보내!라고 노발대발한 일화 또한 유명하다. 즉 자기팀 1군 명단조차 제대로 모르고 있었다는 이야기.
* 투수 혹사로도 꽤나 욕을 먹었는데, 2003년에 당시 유망한 투수였던 양성제, 변인재 등을 무조건 올려버리며 어깨를 아작내게 하고 말았다. 이로 인해 이 선수들은 빠른 은퇴를 해야만 했으며 손민한, 이정훈, 김사율 등은 선발-중계를 가리지 않고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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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외에 눈뜨고 못봐줄 수준의 막장 엔트리 남발과 롯데팬들의 속을 아주 뒤집어놓는 현기증나는 인터뷰들의 향연은 덤, 이 때문에 제대로 뚜껑열린 롯데팬들은 무관중 운동 등 백인천 퇴진 운동을 벌였다. 이때 백인천에 대한 반감이 얼마나 심했냐면 위에처럼 백인천이 다른 팀 감독도 했으면 좋겠다. 너무 억울하다는 롯데팬의 절규어린 짤방이 나왔을 정도다. 덕분에 그 관중 흥행이 좋다는 사직 야구장유료관중 69명의 신화를 쓴다. 여기에 구장 내 관중석 일대에서 자전거를 타고 삼겹살 구워먹었다는 이야기는 덤, 2003시즌은 15연패로 내몰렸는데도 끝까지 버티다가 결국 2003년 8월 5일 더이상 참다못한 구단에 의해 전격 경질되었다. 정작 해고 당일은 이겨서 연패를 끊었다.

이로써 백인천 감독은 당당히 롯데 자이언츠 역사에 길이길이 남을 감독도 아닌 개쓰레기 흑역사+금지어로 공인. 백인천은 퇴진하면서 롯데는 향후 10년동안 가을야구 못 할거라는 말을 했는데, 엄밀히 따지면 저주라기보다는 스스로 박살낸 팀에게 한 말이니 확인사살에 가깝다. 10년 중 다섯 번이 가을야구 했는데? 한 지인의 말에 의하면 실패 원인이 세대 차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참고로 2003시즌 백인천은 2015시즌 김용희와 동갑이다.

최종적으로 롯데 자이언츠 감독으로서 2시즌 동안 총 163전 41승 119패 3무 승률 .256의 삼미 슈퍼스타즈의 0.188의 뒤를 잇는 찬란한 성적으로 역대 롯데 감독 14명 중 압도적인 최하위 승률을 기록했다. 전년보다 좋은 성적을 내야 할 2003년에 12/15연패를 하고, 2002/2003년에 롯데가 각각 97패/91패라는 참담한 성적을 받게 된 결정적 요소가 된건 덤이다. 이때 나온 2년 연속 90패 이상은 롯데 말고는 어느 팀에도 없는 치욕적인 기록이다. 단일 시즌 90패 이상도 해체 직전까지 내몰리던 1999년 쌍방울/경기수가 늘어난 2015년의 신생팀 KT 위즈 밖에 없다.

만약 저 연패가 조금이라도 더 갔거나 자신이 일본에서 선수생활을 마지막으로 지낸 팀 마냥 한시즌 100패를 하거나 하는 사태가 발생했으면 가뜩이나 많이 힘들던 롯데 팬들에게 정말로 씻을 수 없는 상처가 더해졌을 것이다. 여기에 위에서 말한 대로 선수단 붕괴+흥행 참패까지 더해져 넘보는 것 자체가 불가능할 수준의 완벽한 삼위일체가 만들어졌으니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참고로 역대 롯데 자이언츠 감독중 통산 승률이 5할 이상 되는 감독은 로이스터와 성기영 감독(이쪽은 한시즌), 양승호 감독 세 명뿐이다. 백인천 퇴진 이후 한동안 롯데팬들 사이에서는 백인천이 사직구장 들어오면 살아 나가지 못할 것이란 이야기가 돌기도 했다. 추가로, 디트로이트 타이거스는 2003년에 119패를 기록했는데, 상기된 백인천의 롯데 재임 시절의 패수와 일치한다. 여기에 더 깊게 파고들자면, 디트로이트의 2003년 승률인 .265는 2002년 롯데의 승률과 일치한다(...). 백인천 재임 당시 프로야구의 승률의 인플레는 심각했는데 6할 승률 팀 2개가 2년 연속으로 나왔다. 2002년에는 삼성KIA가, 2003년에는 현대KIA가 6할 승률을 달성했다. 이 당시에 6할로 2위 찍은 KIA는 이종범의 복귀와 더불어 신진 선수들, 그리고 김성한 감독의 감까지 잘 맞아 떨어져서 그런대로 강한 편이었지만 한국시리즈에 진출하지 못한 바람에 딱히 그 시대를 대표할 정도의 강팀이라 보긴 어려웠다. 여기에 롯데가 KIA전 18연패를 했으니 말 다했다.

단일리그제인 KBO에서 6할 승률 팀이 2개였던 적은 그외에 1995년, 2009년, 2014년 세 번밖에 없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흠좀무. 저 세 시즌의 2위 팀은 각각 LG, SK, 넥센이었는데 1995년의 LG는 그 해 한국시리즈가 좌절되었어도 97,98년에 다시 한국시리즈에 진출한, 일명 '신바람 야구'로 기억되는 당대의 강팀이었고 2009년 SK는 그 해에는 대이변을 일으킨 KIA에 밀렸던 데다가 김성근 체제 당시 왕조로 불렸던 팀이었다. 그리고 2014년 넥센은 역대 최고의 타고투저 시즌에서도 무시무시한 타선을 자랑했다. 즉 저 2위를 기록한 팀들은 역사적인 강팀으로 기억되고 있다. 2002년 시즌 당시 7위 한화가 0.461의 승률을 기록할 정도였다. 이쯤이면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다.

추가로, 2008년 롯데가 한창 주가를 올릴 때 '롯데가 플레이오프에 진출할 수 있겠는가?'란 질문을 모든 방송 해설가에게 한 적이 있는데, 다른 해설가들이 '한다'라고 대답한 반면 백인천만 오직 한국야구를 보지 않아 모르겠다란 대답을 했다. 10년동안 가을야구 못한다고 확인사살했는데 간다고 그러면 이상하잖아!? 이봐요 당신 한국프로야구에서 원년 멤버로 뛰었다는 것을 잊으셨나요?

MBC-LG 시절과 삼성 시절에는 이렇게까지 평가가 절하되진 않았지만, 롯데 시절에는 이와 같은 최악의 막장 행보로 인해 최악의 감독으로 낙인찍혔다.

어느 정도 부진이 예고된 다른 감독들과 달리 왜 이렇게까지 망가졌는지 이해가 안 가는 수준이라 여러 이설이 많은데 다음과 같다.

  • 첫 번째 설로는 삼성 말기에 온 뇌출혈 후유증+노령으로 인한 건강문제로 이렇게 되었다는 설이다. 실제로 뇌혈관 질환이 오면 심하게는 식물인간이나 반신 불수가 오지만, 가볍게 온 사람은 성격변화 혹은 지적능력 감퇴 등의 증상이 온다. 직업적 능력 야구 감독은 스트레스를 매우 받는 직업인데 재발 위험성이 있는 지라 이러한 후유증을 회복할 시간이 필요 했음에도 불구하고 백인천 자신이 이런 자리를 수락했다는 게 문제다. 물론 급한 불 끈답시고 이런 사람을 급하게 앉혀 놓은 구단 측도 문제지만...
  • 두 번째 설로는 구단이 백인천에게 제발 와주십쇼 하고 구두로 여러 약속을 했었는데, 이 약속들을 안 지키고 그 후 구단에서 게임 운영 면에서 월권행위를 저지르자 백인천이 이렇게 할 바에 차라리 경질 해달라고 했는데 경질하면 구단이 잔여 연봉을 지급해야 하니, 구단에서는 그 돈을 주기 싫어서 자진사퇴 하라고 하는 바람에 대판 싸우고, 화가 머리 끝까지 난 백인천이 누가 이기나 한번 해 보자 하고 상기된 막장 짓들을 고의로 했다는 것.

일반적으로는 건강도 안좋아져서 감독으로서의 역량도 퇴물이 된 마당에 구단과의 싸움으로 말 그대로 성적이고 뭐고 내던지고 고의로 그렇게 했다는 평가가 대다수다. 아무리 명감독이라도 시대 흐름에 적응하지 못하면 막장이 되는 점이야 다른 감독들도 해당되겠지만 백인천은 거기에 감독으로서의 의무 포기를 더한 셈이다. 거기에 뇌출혈 후유증이 덧붙여졌으니 이게 시너지 효과를 일으킨 것.

어쨌든 지금도 올드 롯데팬 사이에서는 백인천을 범죄자로 취급하고 있다. 간통죄가 아니라 롯데를 망친 죄로. 그래서 롯데가 하나의 국가였다면 백인천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사형이라는 말도 간간히 나온다. 솔직히 한 거 보면 무슨 죄 여러 개 묶어서 보내버릴 수 있을 지경 그리고 롯데팬들은 그 시절이 너무 억울해서 백인천이 한시즌씩 돌아가면서 다른 팀을 맡아주길 바라고 있다.

덤으로 그에게 백골퍼(白骨-)[42], 골퍼라는 별명까지 붙은건 덤이다.

8 역대 감독 성적

역대 감독 전적
연도경기정규리그포스트시즌
1982MBC 청룡80463403위-
1983168801위[43]-
통산9654420
연도경기정규리그포스트시즌
1990LG 트윈스120714901위우승
1991126537216위-
통산2461241211
연도소속팀경기수정규리그포스트시즌
1996삼성 라이온즈126477366위-
199785443654위4위
통산2119111911
연도경기정규리그포스트시즌
2002롯데 자이언츠7118[44]5308위-
200392236638위-
통산163411223
총계71631638614

9 NPB 해설자 시절

요시! 하나둘셋이야!그란도 시즌! 라지에타가 터졌어! 아주 그냥

임용수와의 NPB 경기 중계중 터진 감탄사.

이후 SBS 스포츠의 야구 해설위원이 되어 NPB(일본 프로야구) 전담 해설위원이 되어 2010년까지 활동했다. 자신의 수제자 이승엽에 대한 애정이 넘쳐흐르며, 캐스터와 함께 대놓고 승빠 기질을 보이고 있다.

다만 해설위원으로서의 역량은 이뭐병... NPB에서 20년 가까이 현역으로 뛰었으니만큼 한국에서 가장 NPB에 대한 지식이 많다는 장점은 있는데 그게 끝. 처참한 한국어 발음(+웅얼웅얼한 말투)과 흥분하면 튀어나오는 일본어. 대표적인 것이 "요시!" "그란도 시즌!" "라지에타" "스고이!" 특히 그란도시즌!!과 반말 때문에 해설을 알아들을 수가 없다는 단점이 있다. 당시 같이 중계를 맡았던 임용수 캐스터조차 '요시 그란도 시즌'에 대한 질문을 받자 "백인천 위원님이 오랫동안 일본 생활을 하셔서 일본식 어투가 많습니다. 그래서 저도 잘 못 알아들을 때가 많아요."라고 답변하였다. 옆에 캐스터도 못 알아듣는데 시청자는... 게다가 이승엽이 나오지 않았던 시절에는 해설임에도 불구하고 말이 거의 없어졌다.

그의 명대사(?)인 요시 그란도 시즌야갤을 시작으로 많은 곳에서 사랑받고 있다. 그런데 '요시! 그란도 시즌!'이 아니라 '역시! 하나둘셋이야!'라는 주장이 나왔고 그 근거까지 제시되자 모든 야구 사이트에서 논쟁이 일어났다. 결론은 요시 하나 둘 셋이야가 정답. 슬로우 그란도시즌!

10 그 이후

2010년 8월 20일 일간스포츠에 이대호는 날 미워할지도 모르겠다라는 기사가 떴다. 내용인 즉 이대호는 사직구장에서 쪼그려뛰기 같은 걸 함으로써 정신적으로 더 성숙해지는 발판이 되었을 것이다라는 것. 요시! 그란도도발! 덕분에 가뜩이나 폭염주의보가 내려 더워 죽겠는데 벽주 대낮부터 롯데팬들의 혈압을 올리고 있다. 그래도 당사자 이대호는 전혀 미워하지 않는다, 분명 자신을 잘되게 하기 위해서 시킨 훈련이었다는 내용의 마음 넓은 인터뷰를 했다.

2010년 6월부터 일구회 산하의 은퇴선수 협의회 회장직을 맡고 있다. 2012년에는 한일유소년야구육성기금 이사장으로 재직하며 뇌출혈 후유증 예방운동을 전개중. 동시에 동아일보에서 회고 인터뷰도 했고 김영덕, 박영길 감독과 삼자 인터뷰로 프로야구 30년을 회고했다.

2013년 7월 29일 정재승 KAIST 교수와 58명의 공동 저자가 함께 집필한 과학 논문인 <백인천 프로젝트>가 사이언스북스에서 출간되었는데, 백인천 본인이 직접 책 추천사를 썼다.# 논문의 내용은 트위터, 페이스북 등의 SNS로 모여 한국프로야구에서 4할 타자가 사라진 이유를 분석했으며, 스티븐 제이 굴드의 가설이 한국프로야구에도 적용될 수 있을지에 대해서도 검토했다고 한다. 본인이 한국프로야구 역사상 유일무이한 4할 타자다 보니 그리 뜬금없는 건 아니다. 참고로 공동저자로 참여했던 천관율 시사IN 기자는 본인이 롯데팬이라 프로젝트 이름을 처음 듣고 기겁했다고 한다(...).

2014년 12월 5일 '한국프로야구 은퇴선수의 날' 시상식에 참여한 뒤 롯데 자이언츠 선수단 CCTV 사찰 사건과 관련해 프런트는 성적을 이유로 감독을 경질하기보다는 믿고 기다려야 한다는 요지의 인터뷰를 했다. 관련기사 이 발언을 접한 팬들은 '말은 맞는 말이지만 백골퍼 입에서 나올 말은 아닌듯'하고 뒷목을 잡거나 '믿고 맡겼더니 8888 찍냐'하고 실소를 흘렸다.

여담으로 '한국프로야구 은퇴선수협회'에서 수여하는 최고의 고교/대학야구 타자상 이름이 백인천의 타율이었던 0.412를 딴 'BIC 0.412 상'이다.

이승엽최익성이 가장 존경하는 야구인이다. 실제로 이승엽은 자신의 스승으로 박흥식(야구), 박승호 코치와 함께 또 하나의 은사인 백인천 감독을 꼽았으며, 최익성은 백인천 감독이 본인의 야구인생에서 인생을 꽃을 피운 은인이라고 언급했다. 사실 최익성이 코치와의 트러블속에서도 지금까지 버텨왔던 인물이 다른 사람도 아닌 백인천 감독이 최익성 본인의 재능을 극찬받았기에 백인천 감독을 자신의 친아버지처럼 생각하고 있으며 지금도 최익성은 은사인 백인천이 있는 한은회에 가입할 정도로 백인천 감독을 잘 따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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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도 올스타전 시구를 했다. 자신이 초대 감독을 역임했던 원년 청룡의 모자를 쓴 채, 마운드를 밟고서 투구하여, 바운드 없이 포구를 맡은 이승엽의 글러브로 들어가는 노익장을 보여주었다. 물론 롯데팬들은 매우 못마땅해 하는 반응이었고, 나머지 구단 팬들의 현장 호응도 미미했던 모습을 보여주었다.
  1. 실제로는 1942년 9월 27일생이라고 한다.
  2. 같은 팀인데 팀 매각에 따라서 이름만 바뀌었다. 1972년까지는 도에이 플라이어즈, 도에이가 부동산 회사인 닛타쿠홈에게 매각해 1973년에는 닛타쿠홈 플라이어즈, 닛타쿠 홈이 1년만에 다시 팀을 닛폰햄에게 매각해서 닛폰햄 파이터즈가 됐다. 그리고 1974년 시즌 후 닛폰햄 사장으로 취임한 미하라 오사무가 전임 감독이자 라이벌이었던 미즈하라 시게루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서 취임 1년만에 대규모 트레이드를 감행하며 소위 '미즈하라 인맥'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작업에 나섰다. 장훈도 백인천도 이 과정에서 팀을 떠나게 되었다.
  3. 1983년 6월부터 10월까지만 재임.
  4. 2002년 6월 중도 사임.
  5. 2003년 중도 해임.
  6. 최다 득점상은 1999년에 신설
  7. 다른 한 명은 신바람 야구를 이끌었던 이광환이다.
  8. 사실 부임 첫 해에 삼성 구단 역사상 가장 낮은 성적인 6위를 찍었으나 애당초 당시 팀의 분위기상 어쩔 수 없는 측면도 크고 결정적으로 리빌딩에 성공해서 이거 가지고 까진 않는다.
  9. 사실 백인천이 롯데 감독 시절 이후로 대한민국에서 야구로 먹고 산 것의 팔할은 이승엽 덕분이다. 게다가 이것도
  10. 그리고 백인천이 떠난지 10여 년이 지난 지금 이종운 감독이 롯데를 8위로 꼴아박는 바람에 제 2의 백인천으로 승격하나 했지만 그냥 이종운과 백인천은 따로 평가받게 됐다. 이종운은 신장개업이지만 백인천은 이전에 감독으로서 좋은 성적을 냈는데 롯데에서만 작정하고 완벽하게 팀을 추락시켰기 때문에 비교 자체가 불가능하다는게 중론,
  11. 당시에는 해외여행 자유화가 이루어지기 전이었기 때문에 이런식의 편법이 가능했었다. 명목상 주어진 임무는 일본에서 정보를 수집하는 임무였다.
  12. 둘이 각각 롯데와 교진에 있던 시절은 1977~1979년 이 3년간이다.
  13. 참고로 지명타자퍼시픽리그에서 1975년부터 도입되었다.
  14. 수정 전 리그 꼴찌를 기록했다고 되어있었으나 이 해 종합순위는 3위였다.(전기리그 2위, 후기리그 4위) 꼴찌는 이듬해인 1976년, 전후기리그 전부 꼴찌를 기록했다(...)
  15. 1977년엔 한큐 브레이브스, 1980년엔 긴테츠 버팔로즈한테 플레이오프에서 패배했다.
  16. 1982년 시즌은 팀간 16경기, 총 80경기를 40경기 씩 전기/후기 리그로 나누어 치뤘으며 출장하지 않은 8경기 중 5경기는 판정 항의 및 경기 속개 거부로 인한 출장정지로 프로야구사에 몇 안되는 몰수게임사태 중 하나이다.
  17. 이 이후 KBO 타격왕 중 가장 적은 타수를 기록한 경우는 1987년 장효조의 88경기 284타수 110안타 0.387이다. 1987년에는 전체 시즌 경기가 108경기였다.
  18. 다만 당시 에이스투수가 완투는 기본에 선발이 아닌 경기에도 마구잡이로 등판했기 때문에 에이스를 피하는게 더 어려웠을 것이다. 단적으로 원년 박철순만 해도 팀 이닝의 30%를 던졌다.
  19. 80년대까지는 프로야구가 성공할지 회의감으로 실업에 남거나 실업을 거쳐오는 경우도 간혹 있었으며 82세계 야구 선수권대회로 참여하지 못한 선수들도 있다.
  20. 슈퍼스타 감사용에서도 이 드립이 등장한다. '여자가 ○○○이 뭐냐'는 감사용 어머니(김수미 분)의 한마디…. 시대고증이 그래도 잘 되었다는 의미.
  21. 다만, 나중에는 백골퍼밑에서 롯데 2군감독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백골퍼 잘리고, 얼마못가 재계약 실패.
  22. 당시엔 2군 자체가 없었다는게 함정, 최초로 2군을 만든 삼성과 OB는 1984년부터 2군을 신설했다.
  23. 1983년 삼미가 장명부의 맹활약에도 불구하고 말아먹게 되는 주요한 2가지 이유중 하나이다. 다른 하나는 물론 김진영 감독의 이단 날아차기 방송사건.
  24. 단일시즌 타율 1위.
  25. 백인천의 증언에 따르면 MBC 시절 맺은 감독 계약은 표면상으로는 2년이었지만, 실제로는 1+1 계약이었다고 한다. 백인천 본인은 첫 해 통합우승을 차지했으니 당연히 좋은 조건에 재계약할 줄 알았는데, 프런트 직원에게 변호사의 공증을 받은 1+1 계약서까지 들이밀었는데도 프런트는 사태를 무마시키려고하기는 커녕 오히려 "백인천이 미국인 코치 영입에 반발해서 깽판친다"고 언론플레이를 했다고.
  26. 이광환 감독은 MBC 청룡의 잔재를 지우기 위해 대대적인 선수단 개혁을 감행했는데, 이로 인해 팀을 나간 선수가 김재박, 윤덕규, 김상훈이다.
  27. 김영진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같은 해 8월 23일 쌍방울 레이더스와의 홈 경기에서 팀이 1:4로 앞서던 9회초 2아웃에서 장재중의 헛스윙 삼진으로 낫아웃이 됐을 때 자동 아웃으로 착각했다가 6:4로 역전패하는 원인을 제공한 바 았다. 그 당시 장재중이 바운드 볼에 스윙 삼진이 됐을 때 김영진은 팬서비스를 한답시고 관중석 쪽으로 공을 던져버렸고 뒤늦게 백인천 감독이 김영진에게 1루로 송구하라고 외쳤지만 공은 이미 관중석으로...
  28. 당시 은퇴를 앞둔 그를 대타, 지명타자로 이용했다. 아쉽게도 백인천 쉴드가 없어지자, 그대로 방출
  29. 다만 양준혁에게는 그의 타격 폼을 형편없다고 비난하기도 했다. 양준혁 본인도 좋은 소리를 못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밑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긴 했었다. 물론 자신의 수제자인 이승엽을 돌보느라 정신이 없겠지만.
  30. 1997년 시즌 중 롯데 투수 박동희와 함께 트레이드되었던 선수다. 박동희는 망했지만, 그는 프랜차이즈가 되었다.
  31. 강기웅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체력이 상당히 약한 선수로 알려져 있으며 그로 인해 고강도 훈련을 선호한 백인천과 마찰이 있었다. 결국 96년 시즌이 끝나고 강기웅은 현대로 트레이드되지만 앞서 말했다시피 심장에 푸른 피가 도는데 어떻게 유니콘스 옷을 입을 수 있었겠느냐.라는 명언을 남기고 은퇴를 한다. 삼성 타선의 리빌딩 등 다른 쪽에서 좋게 보는 백인천 감독이지만 강기웅팬 한정으로 백인천 감독을 좋게 볼 리가 없는 건 사실이다.
  32. 다만 동봉철의 경우 선수 본인의 기량 하락이 있었음을 감안해야 한다.
  33. 10년이 넘도록 주전 포수 자리를 차지한 진갑용도 OB(현 두산) 출신이다. 고로 이만수 이후 삼성은 포수난에 시달렸다는 것.
  34. 낫아웃 사건의 그 포수가 맞다.
  35. 실제로 백인천 감독이 최창양의 행동거지를 보고 1년에 6승 이상 못한다고 해서 했는데. 최창양은 정말로 1년에 6승 이상을 못했다고 한다.
  36. 새벽 4시까지 술을 먹고 오다가 백인천 감독한테 딱 걸렸다고 한다.
  37. 이 당시 김용희 감독을 견제하려고 불렀다는 말이 있다. 당시 2군감독도 김성근이였고...
  38. 당시 롯데가 얼마나 심각했었냐면 용병 두 명이 일찌감치 퇴출되고 다른 팀들은 3명을 보유하고 있는데도 (2001년부터 02년까지는 3용병 2출전이었다.)2명만 보유했었으며 팀 전력에서 좋은 선수들을 찾을수가 없었다.이런 상황에서 갑자기 14연패로 삼미의 18연패를 깰 최악의 상황이 오면서 이러한 상황이 벌어지게 됐다.
  39. 아이러니하게도 최악의 감독 중 1,2위를 다투고 있는 백인천과 이순철 둘 다 한국프로야구 은퇴선수 협회(이하 한은회)에서 같은 한솥밥을 먹고 있다.
  40. 그때의 트레이드 시도는 그 당시 재임 중이었던 단장에 의해 무산되었고관련 기사 포수 전향을 권유했다는 것에 대해 김용철 전 수석코치는 "처음 듣는 말"이라고 기자에게 답했다.
  41. 일본 사회인야구팀 선수. 현재는 미에 현 사회인야구단의 선수 겸 코치를 맡고 있다.
  42. 근육과 살이 온데간데 없고 뼈가 드러날 정도로 훈련시키는 혹사로 퍼지게 만든다는 의미. 태업이 의심되는 감독 하에서 이게 뭔소린가 싶지만 백인천 시절 롯데 선수들이 받는 훈련은 엄청나게 빡셌다. 의도는 좋았지만 위에서 언급한 수많은 무리수 때문에 투타가 함께 퍼져버렸다. 당시 박기혁 선수도 피해자였으니 지못미
  43. 시즌 초 사퇴. 이 해 청룡은 후기 리그 우승, 통합 승률 1위를 기록. 하지만 한국시리즈에서 해태에 패배하면서 준우승에 머물렀다.
  44. 백인천의 통산승률이 5할에서 내려앉은게 이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