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위 항목 : 독소전쟁
1 1941년 몰려드는 먹구름
독일육군 최고사령부(OKH)의 바르바로사 작전 계획도. |
침공 당시 소련군은 많은 면에서 열악했으며 특히 군대의 사기, 전술 체계, 명령 체계, 지휘 통신 체계, 보급, 장비 등 모든 면에서 독일군에 비해 후진적이었다. 게다가 개전 직전의 상황은 그 이전의 소련에 비해서도 막장이었는데 이는 대숙청 이전까지만 해도 스탈린은 종심 작전 이론을 창안한 미하일 투하체프스키와 신진 장성들을 지원했으며 발전된 기계화 부대를 만드는 데 힘을 기울였다. 이는 영국의 리델 하트, 퓰러, 프랑스의 샤를 드 골이 기갑 부대의 집중 운용을 주장해도 번번이 무시당하고 아돌프 히틀러도 전차를 대외 과시용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던 때라 붉은 군대가 큰 발전을 이룩했음을 알려준다.
그러나 스탈린의 대숙청 때 투하체프스키가 처형되면서 소련군의 발달하던 작전 교리라든가 기계화되던 부대 구조 등이 말 그대로 전부 도로 아미타불이 되어 버렸다. 특히 전쟁 직전까지 스탈린이 독일군의 침입 내지 도발에 반응하지 말라고 강력히 지시했기 때문에, 굴라그에 끌려가고 싶지 않았던 많은 소련군 병사와 장교들이 초기 독일의 침공에 매우 수동적으로 반응했고 그 결과 손 써볼 틈도 없이 궤멸당해야 했다. 물론 이 명령은 개전 수 시간 만에 철회되었다. 애시 당초 소련군의 패배 원인이 현지 사수 및 축차소모 등의 비현실적인 전략이었던 만큼 달라질 것은 없었을 것이다.
사정은 공군도 마찬가지였다. 대숙청 기간에 유능한 장교들이 피해를 입어 마치 척수가 뽑혀 나간 상황이나 진배 없었던 것이다. 공군 사령관 야코프 블라디미로비치 스무쉬께비치 중장을 위시한 스페인 내전의 베테랑들 상당수가 투옥되거나 사형당한 것이 시작이었다. 스무쉬께비치의 후임자인 파벨 바실례비치 뤼차고프 중장은 신기술 도입과 선진 교리 숙달에 적극적이었고 개전 시 선제권 획득을 위한 상시 준비 태세 수립을 주장했으나, 결국 대숙청의 희생양이 되어 독립 항공전대장으로 소령 계급이던 아내와 함께 재판 없이 처형당했다. 그는 스페인 내전에 자원한 에이스이며 창의적인 관리자로서 29세의 젊은 나이에 공군 사령관에 발탁되었으나, 결함이 많은 기종에 대해 "우리 조종사들은 관을 타고 비행하고 있다!"고 일갈할 만큼 깐깐하며 지도층과 타협할 줄 모르는 성격으로 목숨을 잃은 것이다.
그 외에도 젊고 실력 있는 장성들과 실전 경험이 풍부한 조종 장교들 상당수가 개전을 전후하여 처형되었다. 설계국도 예외는 아니라서 뛰어난 기술자들도 사소한 결함이나 사고로 문책을 당해 처형되거나 감방 신세를 면치 못했다. 유명한 안드레이 니콜라예비치 투폴레프가 투옥된 것은 1937년이다. 그는 10년형을 받고 복역하던 중 1944년 석방되었다. 게다가 공군은 조종사나 기술자 등 인적 자원의 의존도가 육군보다 오히려 높으면 높았지 낮지 않았고, 이러한 대숙청은 공군 전력에는 엄청난 타격을 입혔다. 그 결과 소련 공군은 육군과 다름없는 상황에서 독일군의 공격을 기다리는 신세가 되었다.
그나마 소련 해군의 경우엔 육-공군에 비해 타격이 크지 않은 것처럼 보여서 이를 두고 "러시아 혁명 당시 해군 수병들이 혁명에 적극 가담해서 숙청의 칼날을 피할 수 있었다"는 의견도 있지만 해군도 인적 자원 측면에서 큰 피해를 입었다. 한 예로, 잠수함 설계를 담당하던 설계 기사인 알렉세이 아사포프의 경우 말류트카급 잠수함을 설계할 당시 공산당에서 설계에 대해 이것저것 자기들이 원하는 요소들을 넣을 것을 지시했다. 처음에 아사포프는 잠수함의 성능을 떨어트린다며 반대했으나 결국 기존의 설계에 공산당에서 원하는 요소 중 일부를 강제로 집어넣었으며 결국 기존 예상 성능을 한참 밑도는 한심한 성능의 잠수함이 탄생했다. 이후 잦은 설계 변경에도 불구하고 성능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아 알렉세이 아사포프는 책임을 물어 숙청당하고 만다. 물론 예조프시나 이전부터 독일과 소련의 해군 전력은 듣보잡 수준이었고, 독소전쟁 때 소련 해군의 존재감이 매우 미약하다 보니 육군이나 공군에 비해 그 참상이 돋보이지 않은 것뿐이다.[1]
당시 태평양함대 사령관 니콜라이 쿠즈네초프 제독과 같이 부하들의 공훈을 확인하고 신원 보증을 서 주며 대숙청에 용감히 저항한 지휘관들도 있지만, 이들의 힘만으로 해군 장교단의 약체화를 막을 수는 없었다.
결국, 6월 22일 전쟁이 시작되자마자 루프트바페는 미리 다 파악해 둔 소련 공군 기지를 공습해 항공기들을 대파했고 불과 며칠 만에 1,200여 기의 항공기를 파괴해 제공권을 장악해 버렸다.[2] 이는 해군도 마찬가지였는데, 한술 더 떠 "크릭스마리네를 자극하지 말라"는 스탈린의 명령까지 있어서 소련 해군은 사실상 손을 놓고 있던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 때문에 소련 해군의 대다수 함정들은 항구 내에서 루프트바페의 공습 등으로 격침당하거나 손상을 입고, 심할경우 항구 내에서 아예 버려지거나 건조 중이었던 함선들 역시 독일군의 폭격이나 공격 등으로 완전 박살이 나거나 독일군에게 노획당했다. 물론 소련 해군도 완전히 손을 놓고 있지는 않아 키로프급 순양함과 그녜브늬급 구축함 등을 동원해 독일 해군을 압박하려는 시도를 했지만 하필이면 독일군이 부설한 기뢰원으로 돌입하는 바람에 기함인 막심 고리키가 손상을 입었고 구축함 1척이 가라앉고 말았다. 그나마 전비 태세는 잘 갖추어 두어 피해는 삼군 중 가장 적었고, 그간 육성해 둔 해군 항공대는 개전 초에 전멸한 공군이 우랄 산맥 너머에서 재건될 때까지 버텨 주었다. 히틀러 : 아니, 개전 당일 소련 공군 전멸시켰댔는데 왜 전방에선 자꾸 공습당했단 보고가 올라와? 괴링 : 소련 공군을 전멸시켰댔지 해군을 전멸시켰다고 한 적 없다능.
더구나 전격전의 논리에 따라 시작된 300만 명이 넘는 독일 육군 3개 집단군의 대대적인 공격은 수동적 대응에 익숙했던 소련 육군에게 사형 선고나 다름없었다. 소련군은 선진 이론과 추진력을 겸비한 뛰어난 지휘관들에 의해 양성될 기회를 놓친 채, 그렇게 독일군의 파상 공세에 직면했다.
처음 몇 주간 소련군은 괴멸적인 피해만 입었으며 수십 개의 사단을 잃었다. 독일군은 제공권을 순조롭게 수중에 넣고 폭발적인 속도로 진군하여 불과 몇 주 뒤에는 벨로루시와 서부 우크라이나, 발트 3국의 대부분을 장악했다. 9월까지 2백만 명 이상의 소련군이 전사하였다. 이 시기 소련과 독일의 병력 손실비는 20:1에 달했다. 소련은 중요한 곡창 지대와 산업 중심지들을 상실했다. 이때에는 천하의 이오시프 스탈린과 소련 지도부조차도 너무도 당황한 나머지 정신을 차리지 못할 정도였다.[3]
이 시점에서 소비에트 연방의 붕괴는 자명해 보였으며 작전 당시에 OKW가 목표하였던 A-A선[4]의 확보는 현실로 다가온 듯하였다. 영국과 미국의 지도자들도 소련이 몇 달 버티지 못하고 붕괴할 거라고 예측했으며 독일의 히틀러도 그렇게 예상했다. 히틀러는 겨울이 오기 전까지 우랄 산맥까지 정복할 수 있을 거라고 낙관했다.
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았다.
"우리가 적 12개 사단을 섬멸하면 적은 그냥 12개 사단을 새로 편성한다." - 프란츠 할더과연 12개 사단만 편성할까?
"우리 정보국은 나에게 소련에는 160개 사단과 300대의 전차가 있다고 말했다. 우리는 지금까지 400개 사단과 2만 대의 전차를 파괴했으며, 이제 우리 앞에는 500개의 사단과 3만 대의 전차가 있다." - 아돌프 히틀러
소련은 수백 만의 예비 병력을 끌어 모아 궤멸당한 사단과 군단들을 대체했다.[5] 원래 개전 초 독일은 소련이 약 180여 사단을 동원할 수 있다고 보고 있었고 개전 초 이 사단들 대부분이 전멸 상태가 되자 진격을 막을 병력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소련의 병력 동원 능력과 물자 생산 능력은 그들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어 있어서 180여 개의 사단을 뚫어내니 이번에는 360여 개의 사단이 독일군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만큼 독소전에서 서로가 끝장이 날 때까지 모든 인구와 자원을 쏟아 부었다는 이야기다. 정말로 소련은 2만 대의 전차가 파괴되자 그냥 2만 5천 대를 새로 출고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여기에 더해서 모든 산업을 후방으로 옮기는 엄청난 사업을 단행했다. 이는 특히 무기와 탄약과 장비를 생산하는 중공업 시설이 대부분 이동이 불가능한 것을 전제로 만들어진 것을 생각하면 대단한 것이다. 당장 용광로 같은 것은 평시에도 이동이 불가능해서 용광로 건물을 지을 때 함께 현지에 건설된다. 게다가 소련의 교통시설은 빈약하기 이를 데 없었고, 그나마 루프트바페의 공습을 받는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소련 공장과 제철소들, 노동자들은 독일군이 지척까지 닥쳐와서도 무기를 생산하거나 공장 기재를 분해해 이송하는 작업에 열중했으며 몇몇은 너무 늦어서 독일군이 들이닥쳐서도 그 일을 계속했다. 말이 쉽지 몇 마디로는 절대 설명할 수 없는 정말 황당하고 엄청난 일이다.[6][7]
소련은 서부의 공업 도시 수십 군데의 모든 설비와 수백 만 노동자를 모두 열차에 싣고 수천km 떨어진 우랄 산맥 근처의 황무지로 이전했다. 심지어 그 가족들까지, 아무런 인프라가 없는 황무지 한복판에 내팽개쳐진 이들은 오로지 열차를 통해 공급되는 얼마 안 되는 식량에만 의지한 채 공장을 다시 조립하고, 아무런 장비도 없이 스스로 도시를 건설했다. 심지어는 아예 식량조차 주어지지 않아서 노동자들이 스스로 텃밭을 가꾸어 식량을 얻어야 하는 경우도 존재했다. 전선의 장병들에 대한 식량 공급에도 허덕이는 판에 후방의 노동자들에게 제대로 식량 공급이 되기는 글러먹었으니...
다른 문제점도 있었다. 전쟁 초기 히틀러는 모스크바는 별 가치가 없다고 보고 레닌그라드와 우크라이나의 곡창 지대를 차지하길 원했는데 이 조치로 모스크바는 최소한의 방어력을 강화할 시간을 벌었다. 각지의 소련군은 궤멸당하면서도 대부분 격렬히 저항했고 라스푸티차로 대표되는 열악한 소련의 도로 상황도 독일군의 발목을 잡았다. 게다가 프랑스와는 비교도 안 되게 광대한 소련의 국토와 빈약한 교통망은 1940년 5월의 전격전을 고려하고 있던 독일 군부를 난감하게 만들었다.
또 다른 문제로 제시되는 것은 광활한 동유럽의 대지, 그리고 소련을 상대로 집단군을 3개로 편성하여 북부, 중부, 남부로 나눈 것이었다. 게다가 히틀러의 오판으로 중부집단군의 경우 스몰렌스크에서 전진하지 않고 키예프에서 고전하던 남부집단군을 하인츠 구데리안의 기갑 부대로 지원을 명령했다. 구데리안은 크게 반대했으나 히틀러는 그냥 씹어 버렸고, 이것은 모스크바에 다시 2달의 시간을 주었다.[8]
1941년 남부집단군과 구데리안의 기갑 부대는 키예프의 소련군에 타격을 입히고 구데리안의 부대는 스몰렌스크의 중부집단군에 합류하여 모스크바로 진격하였다. 그러나 10월부터 엄청난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고, 남부집단군에 대한 지원으로 인하여 소련에게 방어를 강구할 시간을 벌어주었다. 특히 폭우로 인하여 전선부터 보급선이 모두 뻘로 변하여 기갑 부대의 기동력이 저하되는 등 독일군은 온갖 난관에도 불구하고 소련군을 계속 격파하며 모스크바 교외까지 다다랐지만 소련 정부는 결사항전의 결의를 다졌다.
이즈음 독일의 북부집단군에 의해 레닌그라드에서는 레닌그라드 포위전이 시작되었다. 모스크바의 상황도 암담했지만 스탈린은 도시를 포기하지 않았고 수백 만의 시민을 동원해 방어 설비를 축조하고 병력을 아낌없이 쏟아 부었다. 게다가 그 당시 독일이나 서방에서는 거의 무명이었던 할힌골 전투의 영웅, 게오르기 주코프 대장[9]이 급히 레닌그라드 방면에서 전임해 와서 방위전을 지휘했다.
게다가 그해 겨울이 조금 일찍 찾아오자 동계 준비를 소홀히 해 왔던 독일군은 작전에 애로사항이 꽃피고 말았다. 필사적으로 저항하는 소련군에 의해 모스크바 공격이 좌절되고, 물자가 얼어붙기 시작하자 독일군은 모스크바 공략을 포기했다. 그러는 동안 소련은 일본이 참전하지 않는다는 첩보를 받았고, 엄청나게 많은 예비 병력을 극동에서 소집해 훈련하고 배치했으며 공장과 산업 설비들의 후방 배치가 끝나면서 곧바로 소련이 전쟁 중 내내 드러내었던 막대한 물량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물론 시설 이동과 재배치는 막대한 혼란을 일으켰고 정부의 강제에 엄청난 반발과 저항이 있었지만 소련 정부는 '조국 어머니 러시아'를 지키기 위한 논리로 절대 물러서지 않았다. 물론 NKVD의 아름다운 내부 숙청과 학살은 덤
모스크바 공방전 때 소련군의 반격으로 밀리면서 독일군의 전선이 붕괴 위기에 쳐하자 독일군 수뇌부는 화학무기 사용을 진지하게 검토했다고 한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화학 무기가 사용되면 적도 당연히 보복으로 쓸 것이고, 기동전을 장기로 하는 독일군의 주요 수송 수단인 말[10]을 보호할 수 없어서 화학 무기를 사용하지 않기로 했다.
1941년 6월 소련이 처음 침공당했을 때 크레믈린의 억압에 짓눌려 있던 많은 국가와 사람들이 독일군을 환영했다. 당장 1년 전까지 엄연하게 독립국이었던 발트 3국과 우크라이나 대기근으로 최소 300만 명이 굶어죽은 우크라이나 주민들, 스탈린이 자치권을 주겠다는 약속을 저버린 체첸[11]은 크레믈린에 대항해 침략자들을 도울 것이라는 견해가 팽배했다. 실제로 소련 당국도 부분적으로는 그렇게 예상했다. 그리고 실제로 독일군이 침공하자마자 이 지역들은 반소 게릴라 운동이 일어나면서 독일군을 대대적으로 환영했다.
그러나 히틀러는 전쟁 전에 열등 인종인 슬라브족에게 관용과 용서를 베풀 필요가 없으며 승자가 정의이며 진실이라는 논리에 충실하라고 지시했다. 문제는 히틀러가 외치는 슬라브족은 러시아인뿐 아니라 소련 치하의 민족들을 모두 싸잡은 개념이라는 것. 이런 상황은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에서 적대자에게 증오를 품고 이를 폭력적으로 해소하려고 들기 쉬운 병사들을 통제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당장 총통이 공언했는데 어느 장교가 쉽게 말릴 수 있었겠는가? 게다가 부분적으로는 역시 나치의 이념에 빠진 간부들이 이런 상황을 조장하고 방치하기도 했다. 히틀러 암살 미수사건의 주인공인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가 반 나치주의자로 전향한 계기 또한 독소전쟁에서 저지른 독일군의 학살을 목격한 것이었다. 게다가 독일군을 뒤따라 들어온 나치 친위대와 인종 청소 부대인 아인자츠그루펜이 자행한 인종 학살과 약탈, 강간, 학살, 촌락 파괴와 같은 각종 만행은 침략자들을 환영하던 피억압 민족들의 마음에 도리어 적개심만 품어주며 '좋은 계모보다 나쁜 생모가 낫다' 는 생각을 갖게 하였다.나치 독일이 좋은 계모인지는 따지지 말자
1941년 우크라이나에서는 전쟁과 설비 이동, 독일군의 방치와 학살로 또다시 무수한 우크라이나인들이 떼죽음을 당했으며 발트 3국이나 벨로루시라고 상황이 좋지는 않았다. 이 지역에서는 독일군의 대량 파괴와 학살, 인종 청소로 제3제국의 이데올로기가 만든 그늘이 짙게 드리웠다. 어쨌거나 그 결과 1941년 하반기가 되면 대부분의 점령지 주민들이 독일군에 비협조적으로 변했고 독일군의 학살은 점령지 주민이 독일군을 증오하도록 만들었고 많은 주민들을 파르티잔으로 만들어 버렸다. 여전히 독일에 협조하려는, 혹은 둘 다 싫다며 양쪽과 적대한 세력도 있었으나 그들이 대세가 될 순 없었다. 우크라이나 독립주의자들의 게릴라는 1950년대까지 살아남아서 소련군이 이들의 소탕전을 했다고 한다.[12]
결국 독일군은 이데올로기에 충실한 나머지 이념적으로는 '청소'를 통해 성공했을지 몰라도 전략적으로는 대실패의 기반을 닦았던 셈이었다.[13]
이런 상황에서 모스크바 공략에 실패한 1941년 12월이 지나면서 대사건이 잇따라 일어나 소련의 기세를 올려주었다.
하나는 일본 제국이 공격하라는 소련은 공격하지 않고 미국의 진주만에 기습 공습을 감행하여 태평양 전쟁이 터진 것이었고, 또 하나는 독일이 미국에 먼저 선전포고하여 아시아-태평양 지역과 유럽-아프리카의 전쟁이 하나로 연결되었다는 점이다. 그 결과 소련도 이제 공공연히 미국의 물주한테 물자 지원을 요청하고 받을 수 있게 되었다.
2 1942년 전세의 전환점
1942년이 되자 소련은 곧바로 미국에 대량의 원조와 지원을 요구했다. 미국은 소련의 청구량에 난색을 보였으나 43년부터 산업생산력이 최고조에 달하기 시작하자 이내 상당한 물자를 소련에 보내주기 시작했다. 미국은 소련에 스팸 통조림부터 전차, 항공기, 트럭, 철도 차량같은 군수 물자와 유무선 통신 시설 일체, 심지어 핵무기의 원료인 우라늄까지 원조해 주었다. 소련은 체제 붕괴 때까지도 인정하지 않으려 했으나 무기대여법은 소련 산업과 전시 경제가 붕괴하는 것을 막아내는 데 기여를 하여 결과적으로 소련이 승리하는 데 큰 기여를 했다. 우크라이나 곡창 지대를 상실한 소련이 식량 배급문제에 빠지는 것을 막았고 전차, 항공기 등의 전투물자 생산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하였던 것이다. 이는 이오시프 스탈린 및 게오르기 주코프 같은 소련 고위층들도 인정하였는데, 스탈린은 비공식적인 자리에서 측근에게 무기대여법이 없었다면 소련 공업의 대부분을 잃어버린 상황이니 1대 1로 독일과 싸웠다면 감당할 수 없었을 거라고 말했고, 주코프는 63년도의 한 대화에서 무기 대여 법 없이는 전쟁을 계속할 수 없었을 거라고 말했다.[14]
무기대여법이 1943년 초반 소련군이 독일의 진격을 막는 데 성공한 시점에서 본격적으로 들어온 것을 거론하며 없어도 방어에 성공했을 거라는 의견도 있으나 이 시점에선 소련군도 한계를 보이기 시작했으므로 운이 좋아야 전선을 현상 유지하는 데에 그쳤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1941년부터 들어온 무기대여법 물량이 적긴 했지만[15] 초반에 급속도로 밀린 탓에 전력 부족에 시달린 소련군에게는 정말 가뭄에 단비 같은 존재였다. 특히 마틸다, 발렌타인같은 전차들이 대환영을 받는데 그 유명한 T-34도 전쟁 초반부에 무식한 운용으로 물량이 거의 소모되고 생산 공장은 우랄 산맥 너머로 급히 이동을 한 덕분에 제대로 생산할 여건이 안 되었으니 수량이 부족했고 결국 42년도까지 BT 전차,T-60같은 경전차들이 주력이었는데 문제는 이 전차들은 97식 전차와 별반 차이 없는 깡통 전차였으니(...) 거기다 매월 수백 대의 전차가 건너오면서 소련은 무기대여법 전차만으로도 독일에 대한 수적 균형, 혹은 우위를 이룰 수 있었다.
그리고 42년 중반~43년부터 랜드리스가 재대로 가동되기 시작하자 이런 원조 무기들은 양과 질에서 소련군에게 상당한 도움이 되었다. 영국과 미국에서는 찬밥 신세였던 P-39 에어라코브라는 180도 평판 역전에 성공했고 발렌타인 전차는 가벼우면서도 경전차답지 않은 장갑 및 화력으로 인기를 끌었다. 전면 장갑이 65mm이었는데 이는 M4셔먼 전차의 전면 장갑보다도 더 두껍다. 이는 영국이 단종시키려 한 것을 소련의 요청으로 추가 생산한 것이다. T-34를 대신하여 배치된 75mm 셔먼은 비록 전선에서 순식간에 털려나갔으나 후반기 등장한 76mm포 버전의 셔먼은 T-34 보다 우수한 거주성, 그리고 무엇보다도 가혹한 환경에서도 잘 굴러가는 기계적 신뢰성, 구경이 더 큰 T-34 보다 비교적 손쉬운 임무를 받음으로 인해 '무고장 전차'로 불리며 전차병들이 애용하는 전차가 되었다. T-34-85의 85mm 주포는 구경치수가 더 크고 그만큼 화력은 강했으나 소련의 금속 가공 기술 미비로 대전차전에 중요한 관통력은 셔먼의 76mm와 비슷했고 무엇보다도 원거리 명중률이 안 좋았다. 하지만 원거리 명중률을 엄청난 숫자로 및 제파전술로 메꿨기에 실제 명중률 문제는 발생하지 않았다.물량의 힘
게다가 소련이 그렇게 혹평했던 영/미제 무기들의 구성 품들(주포 안정 장치나 엔진 등)은 이후 냉전기 소련 무기 개발에 중요한 참고자료가 되었다.[16] 이러한 무기들이 상당히 지원되어 생산력을 따라잡지 못하는 일시적 수적 공백을 메꿔주는데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위의 긍정적인 평에 있어서 소련에 대한 평가 절하 및 미국에 대한 의존덕에 이긴것 처럼 묘사되나 그런것 만은 아니다. 물론 무기대여법은 소련에게 상당한 도움이 되었으나 주류 군사학자들은 실제 무기대여법에 있어서 소련에게 도움을 준 것은 전투물자보다는 비전투물자가 도움이 되었다고 본다. 차량과 철도용 광궤, 식량부분이 실제 상당한 도움이 되었고 전투물자부분에 있어서는 전쟁 전체에 있어서 절대적 영향을 미칠 정도는 아니라는 것이다. 또한, 무기대여법으로 무기 공여 당시 최단항로인 북극해 항로는 독일의 주기적인 공격으로 1942년 7월 최초의 미국 랜드리스 호송선단 PQ-17 독일 U보트 공격으로 35척 중 22척 격침당하고, 1942년 9월 제2차 랜드리스 호송선단 XG-122 U보트에 의해 39척 중 12척 격침당하자, 1943년 2월까지 대서양 및 북극항로를 통한 미국, 영국의 소련 무기 및 물자수송은 중단되었다. 이란 루트는 아프리카전선을 평정한 43년 여름부터 이루어졌고 실제 공급량도 1942년 월 80-90t의 평균 보급량에서, 1943년 하반기에 한 달에 200,000t으로 증가했다. 실제 무기대여법이 제대로 소련에게 도움을 주기 시작한 것은 43년 6월 30일 부터 시행된 서드 프로토콜 부터였다. 1942년 소련이 연합국에게 도움 받은 가치는 1,376,000,000 달러 에 달했다. 1943년 2,436,000,000 달러, 1944년 4,074,000,000 달러였다.[17]. 태평양 항로를 통한 보급도 가능했으나 비전투물자만 가능했고, 보급선이 엄청나게 길었던 것도 감안을 해야 한다. 따라서 1941년에서 1942년까지는 소련이 어느정도 독자적인 힘으로 버텨냈다고 보고, 1943년 6월 이후부터는 무기대여법의 큰 도움을 받았다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어쨌거나 42년 당시에는 수량적으로 부족했지만 사막의 오아시스 같이 도움이 됐던 미국의 물자 원조와 시베리아로의 산업 설비 재배치 성공, 엄청난 인력의 동원을 통한 전시체제로의 이행, 수백만의 예비군 소집으로 인한 양적 우위의 확보를 통해 1942년 소련은 반격의 채비를 갖췄다.
그러나 이 상황에서 병크를 터트린 것은 소련 최고사령부인 스타프카, 그것의 정점인 스탈린이었다. 스탈린은 동계 공세를 통해 확보된 영역을 더 넓히고자 1942년 전반기 내내 독일군이 강력한 방어선을 형성한 중부 전선에 물량을 쏟아 부었다. 그 결과 소련은 엄청난 피해만 내고 별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 공세의 실패는 소련군과 소련 당국자들에게 소련군의 한계와, 독일군이 아직은 건재하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었다. 소련이 1942년 전반기를 막대한 피해를 입는 것으로 끝내는 동안, 독일군은 새로운 전략 목표를 찾아냈다. 그것은 캅카스의 석유 자원이었다. 이에 독일은 캅카스 일대를 차지하기 위한 하계 공세를 입안하고 이름을 청색 작전이라 명명했다.
1942년 하반기, 독일군은 우크라이나와 남러시아를 지나 카프카스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방비가 상대적으로 허술했기에 독일군은 손쉽게 소련군을 격파하고 돈 강을 건너 카프카스 지대로 들어갔으며 이에 호응해 체첸의 무슬림들이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 상황에서 독일군은 조공의 목적으로 볼가 강의 공업도시 스탈린그라드를 목표로 삼았는데, 이 도시가 지닌 엄청난 상징성 때문에 이 도시는 곧 2차 대전의 전환점이 되었다.
스탈린그라드는 글자 그대로 소련의 통치자인 스탈린의 이름을 따서 지어진 공업 도시로서 독일군의 청색 작전에 있어서 흑해와 카스피 해 사이의 병목 지역을 닫을 수 있는 마개에 해당하는 지역이었다. 즉, 이 지역을 제압하거나 견제하지 않는다면 소련군이 바쿠를 향해 진격한 독일군의 뒤를 완전히 차단해 버릴 수 있다는 이야기. 따라서 스탈린그라드는 청색 작전의 성패를 좌우하는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다. 여기에 소련의 최고 통치자의 이름을 딴 도시라는 상징적인 이유가 겹치면서 양측은 이 도시를 둘러싸고 1942년 말 스탈린그라드 전투에 돌입했다.
초기 단계에서는 이번에도 독일군이 유리했다. 독일군은 재빨리 도시의 소련군을 몰아내었으며 곧 소련군을 볼가 강으로 밀어붙여서 소련군을 곧바로 궁지에 몰아넣었다. 그러나 스탈린은 그 즉시 대규모 지원군을 보내기 시작했다. 엄청난 물자와 병력이 스탈린그라드를 지키기 위해 투입되었으며 이내 도시 전체가 포격과 폭격으로 대파된 상황에서 거리 단위, 심지어 빌딩 단위로 백병전이 시작되었다. 1942년 10월에는 한때 스탈린그라드의 90% 지역을 점령하기도 했다. 화력과 전술에서는 독일군이 크게 우세했지만 겨울이 다가오고 소련군이 몇 배나 되는 병력으로 밀어 붙이자 점차 궁지에 몰리기 시작했다.
이 상황을 더 악화시킨 것은 히틀러의 전략적 사고였다. 히틀러는 독일군 지휘관들에게 후퇴할 권리를 박탈하고 일단 차지한 점령지는 끝까지 지킬 것을 원했다. 스탈린그라드의 독일 제6군 사령관 프리드리히 파울루스 장군은 히틀러의 이런 강력한 압박에 어쩔 수 없이 스탈린그라드에 남았으며 소련군은 엄청난 병력으로 도시를 역으로 포위하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서 소련군은 지루한 공방전을 끝내기 위해 반격을 개시했다. 1942년 11월 여전히 고립 상태인 상황에서 소련군은 독일 제6군의 양 측면이 약체인 루마니아군으로 방어되고 있다는 것을 간파하고 대병력을 집결시켜 포위 작전에 투입하는 "천왕성 작전"으로 독일군의 구원을 가로막았고 스탈린그라드의 독일군을 완전히 가두었다. 겨울폭풍 작전을 통해 독일군은 소련군의 포위망을 돌파하여 6군 구출을 시도했지만 소련군의 격렬한 반격으로 독일군은 결국 스탈린그라드의 아군을 구하는 것을 포기하고 우크라이나로 철수했다. 고립된 독일군은 강추위와 식량부족으로 커다란 고통을 겪다가 지휘관 파울루스 장군과 함께 1943년 1월 말 항복했으며 살아남은 포로는 최초의 30만에서 10분의 1 정도에 불과했다.[18]
스탈린그라드의 승리는 곧 반파쇼 연합군의 승리로 인식되어 소련은 물론 서방 세계에도 엄청난 선전 효과를 가져왔다. 반면 이미 아프리카에서도 주도권을 잃은 독일은 점차 밀려나게 1945년 4월 30일(히틀러의 자살일)로 이어지는 기나긴 패전의 나날을 밟게 되었다.
3 1943년 거짓 새벽
1943년 초, 소련은 스탈린그라드의 승리에 힘입어 대규모 반격을 꾀하며 중부에서 '별 작전'을, 남부 일대에서 '갈로프 작전'을 시행하는 대공세를 펼치며 독일군을 몰아붙였다. 그러나 상황을 지나치게 낙관적으로 본 무리한 공세의 한계점과 에리히 폰 만슈타인이 이끄는 독일군의 뛰어난 대처로 인해 제3차 하르코프 공방전에서 대패하여 더 이상의 공세 지속 능력을 상실했다. 이 때 소련군의 실패한 공세로 인해 돌출 지역으로 쿠르스크 전역(戰域)이 남았는데 그 돌출부는 1943년 독일-소련 지휘부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독일은 쿠르스크의 돌출부를 제거하고 전선을 교착시켜 태세를 정비한다는 전략을 세웠다. 반면 소련은 쿠르스크를 지켜내어 독일군을 소모시키고 대규모 반격으로 실지(失地)를 만회한다는 전략을 세웠다. 이 상태에서 소련은 쿠르스크에 참호와 벙커를 비롯한 엄청난 방어 설비를 구축했고 스탈린그라드 못잖은 대규모의 병력을 집결했다. 엄청난 포병 부대의 배치는 1943~45년 독일-소련 전역의 특징이 되었다.
독일군은 병력을 보충하기 위해 예정된 작전 개시 일을 자꾸 늦춘 끝에 1943년 7월 쿠르스크에 대한 공격을 개시했다. 남북에서 돌출부에 대한 공격이 이어졌으나 소련군의 강력한 방어설비로 인해 실패로 돌아갔다. 독일군의 쿠르스크 점령 실패는 그 자체로 1943년 전략의 무효화를 의미했다. 소련군은 이내 태세를 정비했다.
소련군은 계획된 대로 쿠르스크 돌출부 북쪽에서 '쿠투조프 작전'을, 남쪽에서 '류먄체프 작전'을 실시하여 독일군에게 심대한 타격을 가하고 돌출부를 없앴다. 이후 중부에서 펼쳐진 '수보로프 작전'은 실패했지만 남부인 우크라이나에서의 공세는 효과가 있었다. 소련군은 독일 남부집단군과 혈투를 벌이며 미우스 강을 넘어서 제4차 하르코프 공방전 끝에 하르코프를 탈환하고 우크라이나로 쏟아졌다. 치열한 전투 끝에 소련군은 드네프르 강 좌안으로 독일군을 몰아내고 키예프를 탈환했다.
쿠르스크 전투 이후 독일군이 이렇게 형편없이 밀리게 된 데에는 물론 쿠르스크 전투로 야기된 기갑 전력의 공백도 있었지만, 히틀러가 이탈리아 전선에 너무 집착해서 동부전선의 알토란 같은 기갑 전력 상당수를 이탈리아로 돌리는 바람에 동부전선에 더 커진 전력 공백으로, 천연 해자인 드네프르 강을 제대로 활용 못하고 뚫려 버렸기 때문이다. 드네프르 강은 호수처럼 되어 강의 너비가 10km에서 20km로 엄청나게 큰 곳이 많아서
(축척에 보이듯이 강 폭이 매우 큰 곳이 많다.)
독일군이 제대로 방어를 할 경우 소련군이 강을 뚫으려면 엄청난 희생을 무릅쓰고 강폭이 좁은 지점으로 축차 투입을 하는 수밖에 없는곳이었다. 이탈리아로 빼고 남은 동부전선 병력이라도 제때 드네프르 강 서안으로 후퇴해서 요새화시켰으면 어떻게든 강을 끼고 버틸 수 있었지만 히틀러는 '강 건너에 요새를 구축해 두면 병사들이 열심히 싸울 마음이 떨어진다'(....) 본격 한신 디스라는 미친 소리로 제대로 된 방어선 구축을 허가하지 않았다.
1943년 8월이 되어서야 마지못해 방어선 구축을 허락하는데 촉박한 시간으로 콘크리트를 치기는커녕 대충 참호나 판 엉성한 방어선이 되었다. 그리고 강 건너로 후퇴를 원하는 에리히 폰 만슈타인등 독일군 장성들의 청원을 계속 씹고, 히스테리적인 고집을 부리면서 전선 사수를 명령하다가 9월 15일이 되어서야 강 건너로 후퇴를 시작한다. 후퇴의 시기를 놓치고 현지 사수를 하다가 소모된 만신창이 병력으로 방어가 제대로 될 리가 없었던것. 게다가 소련군은 이 틈을 놓치지 않고 현지 파르티잔 등의 협조로 재빨리 9월21일 드네프르 강 첫 교두보를 확보하게 된다.
소련군도 쿠르스크 이후 반격부터 해서 드네프르 강을 완전히 뚫어 버리기까지 200만 명 가량의 사상자를 내는 인명 손실을 입었지만 1941년 독소전 직전 인구 2500만 명은 족히 넘던 드네프르 강 서안 서부 우크라이나를 탈환할 수 있었고 여기서 병력을 보충할 수 있었다.
이처럼 군사적인 측면만을 고려한다면 동부전선 >>>> 이탈리아처럼 보이기는 한다. 그러나 연합군이 상륙한 직후 이탈리아 정부가 내분을 일으켜서 붕괴되고 무솔리니가 체포되었으며 이를 가까스로 수습한것이 이탈리아에 주둔해 있던, 알베르트 케셀링이 지휘하는 독일군이었다. 만약 이탈리아를 내버려 두었다면 이미 붕괴한 이탈리아는 손쉽게 연합군이 점령하게 되어서 군사적으로도 손해다. 비록 연합군이 이탈리아에서 전진을 거의 못하고 종전 직전에야 대대적인 진격이 가능했다고 하지만 이는 철저히 결과론적인 이야기이고 그게 가능했던 게 히틀러가 파견한 독일군이 있었기에 가능한 점이라는 걸 생각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노르망디 상륙 이후 주력을 서유럽에 쏟아부으면서 이탈리아 전선의 병력까지 차출되어 나가서 양측의 병력비가 1:1까지 떨어지게 된다. 게다가 이탈리아는 삽질을 많이 하기는 했어도 추축국에서 그래도 강력한 나라 중 하나였다.[19] 이런 나라가 추축국의 대열에서 탈락한다면 다른 나라에 미치는 정치적 여파 또한 엄청날 것이다. 이런 점을 살피지 않고 이탈리아로 전력을 파견한 것이 실수라는 것은 정치적, 군사적인 면을 충분히 살피지 않은 근시안적인 견해다.
1943년 이후 소련군과 독일군의 상황은 완전히 뒤바뀌었다. 전쟁이 계속되며 게오르기 주코프와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를 비롯한 붉은 군대의 수뇌들은 비록 대놓고 내세우지는 않았지만 실질적으로는 붉은 군대가 초기의 '종심 작전'으로 회귀하도록 힘을 써서 소련군이 현대전에 걸맞는 기동과 화력을 갖추도록 했다. 그 결과 소련군의 돌파력은 증대되고 대규모 포격은 훨씬 정밀해졌으며 특히 기만술 측면에서는 독일군의 허를 찌를 정도로 크게 발전했다. 여기에 더불어 서방의 렌드리스로 비전투 분야의 생산은 신경 쓸 필요가 없게 되자 남은 역량이 죄다 무기로 집중되어 소련은 경이적일 정도의 무기 생산을 기록했다.
반면 독일군은 소련군에 비해 대량 생산 체제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데다가 독일 본토 항공전, 드레스덴 폭격 등 서방 연합군의 끊임없는 폭격에 시달려 소련군을 압도할 만할 무장을 갖추지 못하게 되고 말았다. 또한 소련에 비해 인구가 적은 편인 독일은 병력이 소실될 때마다 신병들을 불러오고 그 경험 없는 신병들이 제일 먼저 전사해 또 신병을 불러올 수밖에 없는 악순환의 상황이 소련군보다 컸으며 더욱이 이민족에 대한 잔혹한 탄압으로 인해 이들을 전장에서 쓸 수 없는 건 물론 오히려 독일인 병력을 이민족 억압에 배정하여 가뜩이나 부족한 병력을 더 낭비하게 되었다.
또 흥미로운 부분은 히틀러와 스탈린의 태도 변화다.
스탈린은 청색 작전 이후 자신의 군사적 무지를 깨닫고 주코프를 총군부사령으로 임명해 실질적 군사 지휘권을 이양했으며, 쿠르스크 전투 이후에는 완벽히 휘하 장군들을 신뢰하게 되어 스탈린 자신은 그저 최고 결정권자 이상으로 붉은 군대의 작전에 관여하지 않으려 하고 정치장교의 권한을 대폭 축소시키는 등 2년 전에 비해 엄청나게 개념화된 모습을 보여줬다. 그 결과 재량권을 확보한 소련군은 스탈린과 정치권의 눈치를 보지 않고 얼마든지 효율적으로 작전을 진행시킬 수 있게 되었다.
다만 이 시기에 스탈린이 직속 기관으로 만든 방첩기관 스메르쉬의 존재를 고려하면, 그가 군에 대한 당의 권한을 축소시켰을 뿐, 실제로 군에 대한 감시와 간섭을 푼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독소전의 본좌 데이비드 글랜츠 예비역 대령의 인터뷰에 따르면 이러한 견해조차 오류였다고 한다. 스탈린은 전쟁 끝까지 통제권을 놓은 적이 없었으며, 1942년 초 모스크바 전투 후에는 스탈린과 주코프 모두 견해가 다르지 않았다고. 현재로서 내릴 수 있는 결론은 스탈린이 현대전에 대한 개념을 새로 공부하여 이해할 능력을 늦게나마 갖추는 데 성공했고 그 결과 통제력을 유지하면서도 현대전에 걸맞는 군대를 운용할 능력을 갖게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전쟁 좀 하다 보니 만렙 적백내전에 뒤이은 폴란드와의 전쟁에서 매우 늦게 학습은 했나 보다
반면 히틀러는 해가 갈수록 장군들을 믿지 못하고 작전 입안과 수행에 사사건건 간섭하여 지휘관들의 재량권을 크게 떨어트렸다. 히틀러는 상황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기동 방어를 위한 후퇴조차 허용하지 않는 현지 사수 명령을 남발하여 지휘관들의 손발을 묶어 버리는 꼴을 만들고 말았다. 게다가 현대전에 걸맞는 능력을 갖출 생각 따위는 하지도 않아 전쟁 기간 내내 바보 같은 지시가 계속 내려지고 그 결과 독일의 패망은 더 빨라지게 되었다.
한편 스탈린은 집요하게 제2전선의 구축을 요구했다. 이는 어떤 의미에서 본다면 지극히 당연한 일인데 그 때까지 유럽지역의 주요 전선은 동부전선밖에 없었고, 본질적으로 북아프리카 전역은 규모가 작은 데다가 부차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미-영 연합군은 1943년 7~9월 이탈리아에 제2전선을 구축했다. 이것이 이탈리아 전선. 이는 일시적으로 이탈리아를 이탈시켰으나 알베르트 케셀링이 지휘하는 독일군은 지형을 잘 이용해서 시간을 효과적으로 벌었고 독일 특수부대가 무솔리니를 구출하여 다시 괴뢰국을 세우면서 전선은 교착 상태에 빠져들었기에 더 이상 독일에게 큰 위협이 아니었다. 결국 영-미는 1944년 프랑스에 제2전선을 다시 구축하기로 했고 이것이 1944년 6월의 노르망디 상륙작전과 프랑스 진공으로 이어지게 된다.
4 1944년 붉은 해일
1944년 겨울에 소련군은 다시 대공세를 펼쳤다. 독소 양군의 관심에서 멀어졌던 북부 전선에서의 공세로 소련군은 레닌그라드 공방전에서 승리하여 포위 900여 일만에 해방시켰다. 레닌그라드는 이 엄청난 포위를 감당한 대가로 '영웅 도시'의 칭호를 받았지만 300만 시민 중 100만 명 이상이 기아와 폭격, 전투로 사망했다.
남부에서도 공세가 이어졌다. 소련군은 재빠른 기동을 통해 1월에 체르카시와 코르순에 대한 포위망을 구축하는 데 성공하면서 독일 남부집단군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독일군의 기민한 대처로 코르순-체르카시 포위망은 기대했던 것보다 성과를 보지 못하도록 만들었지만 독일군이 기동 전력을 포위망 분쇄에 투입하느라 다른 전선에 투입하는 것을 막음으로서 소련군의 이어진 공세를 막아내지 못하게 만들었다.
2월 중순에 소련군은 카메네츠-포돌츠크 지역에 대한 포위를 통해 독일 제1기갑군을 포위하는 데 성공했다. 역시 독일군의 기민한 대처로 완전한 포위 섬멸에는 이르지 못했지만 독일군 전력에 큰 타격을 입히는 데 성공했다.[20]
결국 소련군은 우크라이나 전체에서 독일군을 몰아내는 데 성공하고 크림 반도를 탈환했다. 이 결과로 루마니아는 추축국 탈퇴를 고려하며 서방 연합군과 비밀리에 협상을 벌이는 등 전략적인 효과를 낳았다.
한편 독일군의 관심사가 우크라이나에 집중된 사이 소련군은 벨라루스의 중부집단군을 한 방에 날려 버릴 또 다른 대공세를 준비하고 있었다. 소련군은 치밀하고 철저한 준비 끝에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 제2전선이 실현된 지 얼마 안 되어 벨라루스를 비롯한 전쟁 이전 소련의 영토를 죄다 되찾는 바그라티온 작전을 실행시켜 독일 중부집단군을 문자 그대로 믹서기로 갈아 버리고 뒤따른 3번의 공세를 성공시켜 독일군을 폴란드까지 밀어내고 핀란드를 추축군 대열에서 이탈시켰다.
거기다 히틀러의 간섭이 상황을 더 악화시켰는데 독일군이 상부의 간섭이 없이 자유롭게 기동 방어해서 소련군을 상대할 경우 교환비는 10:1까지도 나온 경우가 있다. 그런데 히틀러는 넓은 방어선에 부족한 병력들에게 기동 방어를 위한 후퇴를 불허하고 무조건 전선 사수를 명령했다. 당시 중부집단군은 약 85만 명이었고, 공격하는 소련군은 233만 명 정도로 약 2.75배에 달하는 병력차가 있었는데 소련군은 거대한 규모의 부대로 여러 곳을 집중 공격하고 중부집단군은 히틀러 때문에 안그래도 적은 병력으로 흩어져 있는 데다가 후퇴까지 불허되니 쌈싸 먹히고 각개격파당했다.[21] 물론 저 당시 독일군의 상황을 고려하면 기동방어를 펼칠 역량이나 있었나 의심스럽기는 하다. 그렇지 않아도 장비가 부족한 상황에서 소련군의 기만책에 걸리는 바람에 일부 기갑장비를 다른 부대에게 넘겨주었으니.[22] 게다가 전차의 전략적 기동성은 소련군 장비가 독일 장비보다 한 수 위였다. 바그라티온 작전이 끝나고 교환비를 보면 독일군 대략 25만 명이 전사하거나 실종된 잡힌 반면에 소련군 18만 명정도가 전사하거나 실종되었다.[23] 손실비 역전 성공 그리고 우크라이나에서 그랬던 것처럼 벨라루스를 탈환하고 나니 소련은 인구 1000만 명을 다시 되찾게 되었고 여기서 또다시 병력을 보충할 수 있었다.
여하튼 독일군으로서는 중부집단군 괴멸 + 탈환한 지역에서 보충된 소련군 병력 이라는 결과가 나온 것이다.
그런데 히틀러는 이 와중에도 정신을 못차리고 치명적인 미스를 하게 되는데. 노르망디 상륙을 애초에 막았으면 모를까, 일단 상륙이 된 이상 병력을 보존해서 프랑스 동북부 삼림지대로 후퇴하고 제트기 생산을 폭격기가 아닌 전투기로 몰빵시키고, 서부전선의 기갑 병력 상당수를 동부전선으로 돌려서 나치 독일의 생명줄인 루마니아 플로에스티 유전을 어떻게든 보전하는것이 그나마 버티기라도 하는 수였다. 그런데 히틀러는 실현 불가능한 망상인 '대서양으로 연합군을 쓸어 버린다'에 집착해서 무려 1400대나 되는 전차를 동원해서 8월 중순에 서부전선에서 공세에 나섰다가 팔레즈 포위전에서 연합군의 폭격에 1300대가 넘는 되는 전차가 무의미하게 녹아내렸다.[24] 전차뿐만 아니라 이 무모한 공세로 후퇴 시기를 놓쳐서 인적 고갈로 1명의 군인이 아쉬운 상황에서 20만 명이 추가로 포로가 되었고 5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사실 1944년 4월에 도입된 제트기 메서슈미트 Me262를 원래 계획대로 전부 전투기로 생산했으면 1944년 서부전선처럼 제공권에서 완전히 밀려서 독일군 기갑 부대가 영미 연합군 폭격기의 밥이 되는 일은 어느정도 줄일수 있었다. 하지만 1943년 11월 26일 히틀러 눈앞에서 한 시제 비행 때, 완전히 삘이 꽂힌 히틀러가 메서슈미트 Me262를 전부 폭격기로 생산하도록 명령했다. 물론 이를 무시하고 상당수를 전투기로 생산하였으며 야전 부대에서는 어렵지 않게 이를 전투기로 개조해서 날렸다.
그 와중에 소련은 9월 초부터 루마니아 영내에 대대적으로 침입하여 곧 루마니아 플로에스티 유전을 확보하게 된다.
플로에스티 유전을 잃고 나니 독일은 극심한 석유난에 시달리게 되어, 플로에스티보다 생산량이 적은 헝가리 유전과 독일 내의 액화 석탄으로 근근히 버텨내야 할 상황으로 몰리게 되는데, 얼마나 석유가 없었으면 800대 가량의 전차를 동원한 벌지 전투(아르덴 대공세)에서, 800대의 탱크를 120~130km 진격할 기름도 없어서, 연합군의 석유를 노획해서 전진할 계획을 짤 정도로 안습하게 된다. 이것도 보면 가관인 게 공세 목표인 안트워프를 확보하려면 120~130km를 진격해야 하는데 최대 진격 가능 거리가 60km(....)인 기갑 부대도 있었다. 애초에 불가능한 작전을 했던 셈.
바그라티온 작전으로 중부집단군 괴멸 + 팔레즈 포위전으로 탱크 1300대 상실 + 포로 및 사상자 25만 명 추가 + 플로에스티 유전 상실 = 이로서 사실상 나치 독일은 끝났다.
이런 처참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동북부~독일 국경에 퍼져있는 넓은 삼림 지형을 이용한 방어의 사자 발터 모델의 눈부신 방어로 휘르트겐 숲 전투가 벌어지던 1944년 9월~12월 초까지 서부전선은 상대적으로 잘 버티고 있었다.
그러나 발터 모델을 위시한 독일군 장군들이 반대한 아르덴 대공세가 히틀러의 고집으로 개시되었고,[25] 작전 초반엔 그나마 악천후를 바탕으로 전진하다가 날씨가 개자 제공권을 장악한 연합군의 폭격으로 독일군은 800대 이상의 전차를 상실한다. 이 기 갑전력들은 상당수가 동부전선에서 빼온 것이었고, 8만 명 정도의 병력 손실까지 보게되니 안 그래도 부족했던 인력은 더 부족해졌다.[26]
이런 상황에서 1945년 1월 중순부터 소련군의 공세가 시작되자 동부전선은 말 그대로 쭉쭉 밀리기 시작한다. 그러잖아도 바그라티온 작전으로 인해 동부전선의 독일군 전력이 절단났는데 여기서 또 서부전선으로 병력을 빼고 상대하는 소련군은 더 늘어났으니... 엎친 데 덮친 격이었다.
1944년 초까지 엄청난 공세로 독일군을 밀어내고 본토를 탈환한 뒤 소련군은 서방 국가들이 제2전선을 구축한 결과 조금이나마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그리고 소련이 한숨을 돌린다는 것은 다시 대규모 공세가 시작됨을 의미했다.
독일이 서부전선의 연합군을 상대하기 위해 동부전선에서 군대를 빼내자, 소련군의 대규모 공세를 독일군이 막기는 더 어려워진 게 자명한 사실. 이후 소련군은 차례차례 루마니아, 불가리아, 헝가리, 유고슬라비아 등 중유럽과 발칸 반도 국가들에 진격하면서 그 지역 파르티잔과 합류하거나 몇몇 나라에는 새 정권을 세웠다. 소련군이 점령한 국가는 소련군에 의해 신정권이 세워지고 이들은 즉각 독일군에 대해 총을 겨누었다. 소련군은 이후에도 폴란드의 바르샤바를 점령하고 계속 서진하여 1945년에 이르렀으며, 1945년 2월 미-영 지도자들과 스탈린이 얄타 회담을 개최했을 때 소련군은 순조롭게 진격하여 동프로이센까지 진격했다.
5 1945년 하켄크로이츠의 추락
이 시기 독일군은 바그라티온 작전의 여파로 잘게 쪼개져 각지에서 부분적 저항을 계속했으나 소련군의 빠른 공세 앞에선 역부족이었다.
우선 1944년 12월에 벌인 아르덴 대공세(벌지 전투)로 독일군은 800대 이상의 전차를 날려먹었고 이중 상당수는 동부전선에서 빼왔던 것이라서 당연히 동부전선은 더욱 더 급속도로 붕괴되었다.
1945년 2월이 되자 히틀러는 또다시 미친 짓을 기획하게 되는데 소련군이 베를린 앞 60km 오데르 강까지 도달한 상황에서 동부전선의 기갑 전력을 상당수 남쪽으로 돌려서, 상대적으로 소련군을 잘 막아내고 있는 것 같아 보이는 남부전선 근처에 있는 헝가리 유전을 재탈환해서 석유를 확보하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세운다. 당연히 독일군 장성들은 베를린 방어를 위해 동부전선에 집중하자고 건의를 올렸지만 히틀러가 들을 리가 없었다. 아르덴 대공세 후 남은 전차, 돌격포, 구축전차에 1945년 초부터 생산한 전차로 쥐어짜낸 병력으로 3월 6일 '발라톤 호수의 공세'를 감행한다. 이 공세는 전선을 따라 고작 15~40km를 전진한 후 돈좌되었으며, 결국 처참하게 실패했다. 항목 읽다 보면 이런 미친 짓을 언제 끝낼지 심히 궁금해진다..
이 마지막 도박 실패로 받은 손실은 전차 331대에[27] 돌격포와 구축전차는 244대 손실로[28] 전차+돌격포+구축전차까지 총 575대가 한방에 날아갔다(...) 하프트랙과 장갑차의 손실도 거의 1000대에 육박했고(...)
보텐플라테 작전이 루프트바페의 사형 선고였다면, 독일 기갑 부대의 사형선고는 바로 이 공세 실패였다. 이후 독일군은 이제 얼마 남지도 않은 소수의 전차,돌격포,구축전차와 판처파우스트로 소련군의 베를린을 향한 기갑 웨이브를 상대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1945년 4월이 되자 소련군은 베를린 지척에 다다랐으며 서방 연합군도 아르덴 대공세를 막아낸 후 지크프리트 선을 돌파하고 라인 강을 건너 순조롭게 중부 독일까지 밀고 들어왔다. 물론 아르덴 공세는 연합군에게 수만 명에 달하는 인명 손실을 강요했지만 붉은 군대의 어마어마한 피해에 비하면 보잘 것 없었다.
이 때문에 스탈린은 베를린을 점령하기를 원했다. 그 상징적인 의미 때문에라도, 그리고 소련이 입은 막대한 피해에 대한 정치적 보상의 하나로서 베를린 공략을 소련에게 넘겨주길 원했고 영-미도 이에 수긍했다. 1945년 4월 중순 소련군은 베를린을 포위하고 이내 대규모 소탕전을 시작했다. 그리고 이내 소련군은 베를린으로 진격하여 마지막 베를린 전투가 시작되었다.[29]
이 마지막 전투에서 소련군은 약 250만 명의 병력(폴란드군 20만 명 포함)과 4,100문의 포, 6,200대의 전차를 투입했으며 이 중에 사망자만 81,116명, 부상자는 28만 251명이었다. 단순히 성격이 소탕전이라도 독일군이 무력하게 무릎을 꿇은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30].
하지만 그럼에도 독일군은 무너졌고 결국 마지막 2주일 동안 소련군은 베를린 시내를 헤집고 다니며 도시의 저항군을 섬멸했다.
570px
히틀러가 세상에 자랑한 소위 '천년제국'의 수도는 폐허와 포연을 넘어 진격해온 붉은 군대에 정복되었다.
1945년 4월 30일, 히틀러는 자살했고 일주일 뒤 모든 저항 여력이 거의 고갈된 독일 정부는 소련을 포함한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했다. 이 날이 5월 7일이며, 소련 정부는 독일의 항복을 5월 9일에 공식 추인했기 때문에 소련(그리고 그 후계자인 러시아)은 5월 9일을 기해서 나치 독일과의 전쟁을 마침내 끝냈다.
베를린 전투 종료 직후 대규모의 피난민들과 잔존한 제9군의 병력들이 베를린으로부터 쏟아져 나와 복수심에 불타는 소련군을 피해 서방 연합군의 점령지로 필사적인 탈출을 감행했다. 엘베 강 도하 작전으로 대표되는 이 탈출은 베를린에서 살아남은 티거 2 5대가 뒤에 남겨져 엘베 강으로 향하는 길목을 막고 며칠간 버티며 엄호했다. 이 전차들은 수십 만 명의 목숨과 자신들의 운명을 맞바꿨다.- ↑ 소련 해군, 특히 수상 함대의 전력 및 존재감이 미 해군을 상대할 수 있을 정도로 팽창한 것은 독소전쟁이 끝나고도 한참 뒤인 냉전 시기, 1960년대 이후이다.
- ↑ 바르바로사 작전동안 소련은 2만여 기의 항공기를 손실하는데 이는 소련이 독소전 전기간에 상실한 항공기의 40%에 달하는 수준이다.
- ↑ 소련 지도부의 침공 당시의 상황은 이오시프 스탈린 항목의 제2차 세계대전과 독소전쟁 부분 참조.
- ↑ 아르한겔스크-아스트라한을 잇는 선으로 바르바로사 작전의 최종 도달 목표였다.
- ↑ D. 글랜츠의 <독소전쟁사>에 따르면 소련군에는 한때 96번 야전군 단대호가 있었다고 한다. 서방 기준으로는 누적 960만, 소련 기준으로는 누적 320만인데 서방기준으로 보인다.
- ↑ 대한민국으로 비유하면 울산과 포항을 불과 몇 주 만에 통째로 수백,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지역으로 몽땅 뜯어서 옮긴다는 것.
- ↑ 이런 대사업의 성공은 보즈네센스키를 필두로 한 국가계획위원회와 소련 산업 관료들이 5개년 계획으로 대규모 산업단지를 이리 저리 뜯어서 붙여본 경혐이 풍부했던 것이 주요했다.
- ↑ 다만 키예프의 있던 대규모 소련 병력이 빨치산화 해버리면 후방에 대재앙이 벌어질 수 있었으므로 필요한 조치였다는 평가도 있다
- ↑ 주코프의 당시 계급은 'генерал армии'인데, 이것은 상급대장의 위, 소련 원수 아래의 계급. 스탈린그라드 전투 끝난 후 원수로 승진하였다.
- ↑ 독일군 하면 대부분 기계화 부대가 연상되지만, 실제로 기갑 부대나 장갑 척탄병을 제외한 보병이나 포병의 수송력은 말에 의존했다.
- ↑ 체첸은 독일군이 진입하지는 않았지만, 나름대로 게릴라 활동을 벌여 소련을 애먹였다.
- ↑ 1944년 소련군에서 가장 창조성 있는 지휘관의 하나인 니콜라이 바투틴도 독일군이 아니라 이들의 습격에 의해 전사했다.
- ↑ 당장 인류의 전쟁 역사를 보아도, 원정군이 현지 토착민과 사이가 나빠지는 것은 패망의 지름길이 아니던가? 태평양 전쟁 때도 멍청한 일본군은 태평양 섬에 거주하던 원주민에게 적대적으로 행동해 많은 반감을 샀고, 그나마 덜 나쁘게 행동하던 미군이 그들의 도움을 받아 전쟁을 조금 더 쉽게 풀어나갈 수 있었다. 하긴 애초에 정신 나간 인종주의로 찌든 나치 독일이 아니었다면 소련이라는 대국을 쉽게 공격하여 슬라브족을 몰살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을 것이다. 독일판 신멸작전인 벨라루스 초토화작전 따위는 더더욱 있을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고.
- ↑ 출처 리처드 오버리 저, 지식의 풍경사 출판 "스탈린과 히틀러의 전쟁" p.268.
- ↑ 소련이 지원 받은 랜드리스 가액은 103억 달러였고, 41년에 지원 받은 가액은 9100만 달러에 불과 했다.
- ↑ 단적으로 T-64전차의 엔진이 바로 미국이 지원해 준 기관차의 엔진을 베끼다시피 만든 것이다.
- ↑ В.Н. Краснов, И.В.Краснов "Ленд-лиз для СССР. 1941-1945" Москва, Наука, 2008г., 246 стр., тираж не указан.
- ↑ 비록 결과론적인 서술이지만, 사실 스탈린그라드 점령 자체는 청색 작전 원래 계획대로 했으면 가능한 목표였다.(80만 대군 + 동맹국 군대로 우선 스탈린그라드부터 점령해서 볼가 강 방어선을 확보한 후에 남하해서 카프카스 유전들을 확보) 하지만 X맨 히틀러가 독일의 정예 병력 80만 대군을 반으로 쪼개서 40만 명은 스탈린그라드로 40만 명(A집단군)은 남쪽 카프카스 산맥으로 보내는 바람에 망한 거다. 반으로 나눈 병력으로도 10월에 스탈린그라드 90%를 점령했다가 결국 뒷심 부족으로 지지부진해지다가 11월에 포위되면서 망한 거니까. 반으로 나눈 병력으로도 10월에 스탈린그라드 90%를 점령했으니 원래대로 했으면 9월즈음엔 스탈린그라드를 접수하는 건 충분히 가능했다.
- ↑ 당장 추축국 하면 생각나는 나라가 나치 독일, 일본 제국, 이탈리아 왕국이라는 걸 생각해보라.
- ↑ 항목을 참조하면 알겠지만 20만에 달하는 기갑군은 몸만 빠져나왔지 기갑장비와 차량은 죄다 버리고 도망쳐야 했다. 즉 이름만 기갑군이었던 상황.
- ↑ 15만 명 정도가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포로로 잡히고 사상자는 35만 명 발생. 거의 50만 명이 날라갔다.
- ↑ 가령 제3기갑군은 이름과는 달리 기갑 부대를 전혀 편제하지 못한 상황이었으며 거기다 제56기갑군단을 북우크라이나 집단군에게 넘겨주었다.
- ↑ 단 부상자는 소련이 더 많아서 부상자 및 포로까지 집계하면 독일이 60만 명 소련이 77만명이다.
- ↑ 쿠르스크 전투에서 독일이 동원한 전차가 2938대였고 손실이 720대 정도였던 것을 감안한다면 이 무의미한 1300대 이상의 소모가 얼마나 큰 타격이었는지는.....그때보다도 더 큰 기갑 전력 손실이었다.
- ↑ 이 당시 독일군은 플로에스티 유전 상실로 비롯된 기름 부족으로, 공세에 동원한 전차들이 목표지점인 안트워프까지(약 130km) 도달할 기름도 없는 상태로, 연합군의 기름을 노획해서 전진한다(...)는 작전 계획을 짰다.
- ↑ 그런데도 [1]를 보면 1945년 3월 20일경까진 서부전선을 그럭저럭 막아내고 있던게 신기하다.
아르덴 대공세라는 뻘짓을 안했다면 서부전선은 삼림지대를 이용해서 몇 달 정도는 더 버틸 수 있었을 텐데 - ↑ 완전 파괴 86대 + 가동 불능 245대
- ↑ 완전 파괴 42대 + 가동 불능 202대
- ↑ 전의 이 문서에서도 언급되어 있었고 또한 대부분 이 전투가 그저 모든 힘이 빠진 독일군을 소탕한 소탕전으로만 알고 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베를린 전투 항목 참조.
- ↑ 만약에 독일이 1945년 3월 발라톤 호수의 공세로 기갑 부대를 죄다 말아 먹지 않고 그걸 베를린 방어전에 돌렸으면 소련군의 손실은 훨씬 커졌을 것이고 베를린 함락도 몇 주는 더 뒤로 미뤄졌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