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F. 케네디

(존 피츠제럴드 케네디에서 넘어옴)
미국 대통령
34대35대36대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존 F. 케네디린든 B. 존슨
공식 초상화
풀네임John Fitzgerald[1] Kennedy[2]
출신 정당민주당
생몰년1917년 5월 29일 ~ 1963년 11월 22일
재임기간1961년 1월 20일 ~ 1963년 11월 22일
서명
신체183cm . O형[3]
1961년 타임지 선정 올해의 남자
Time Man of the Year 1961
300px
미국과학자
1960
존 F.케네디
1961
요한 23세
1962
"Two thousand years ago, the proudest boast was 'civis romanus sum'. ... All free men, wherever they may live, are citizens of Berlin, and therefore, as a free man, I take pride in the words "Ich bin ein Berliner!"

2000년 전, 가장 자랑스러운 말은 '나는 로마 시민입니다(라틴어: 'Civis romanus sum')'였습니다. (중략) 모든 자유민은, 그 사람이 어디에 살든 그 사람은 베를린의 시민입니다. 고로, 자유민으로서, 전 ‘나는 베를린 시민입니다(Ich bin ein Berliner)’라는 이 말을 자랑스럽게 말하겠습니다. 나는 베를린 시민입니다(Ich bin ein Berliner)!"

"We choose to go to the moon. We choose to go to the moon in this decade and do the other things, not because they are easy, but because they are hard, .... Well, space is there, and we're going to climb it, and the moon and the planets are there, and new hopes for knowledge and peace are there. And, therefore, as we set sail we ask God's blessing on the most hazardous and dangerous and greatest adventure on which man has ever embarked. Thank you."

우리는 달에 가기로 했습니다. 우리는 10년 안에 달에 가고 다른 일들도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쉬워서가 아니라 어려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중략) 우주가 그곳에 있기 때문에 우리는 우주에 오릅니다. 달과 행성들이 거기 있기 때문에, 지식과 평화에 대한 새로운 희망이 그곳에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신의 축복을 빌며 항해하기로 결정하였고 이는 지금껏 인류가 승선한 가장 불확실하고, 가장 위험한, 그리고 가장 위대한 모험이 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And so, my fellow Americans: ask not what your country can do for you - ask what you can do for your country!"

그리고 친애하는 미국시민 여러분, 국가가 당신을 위해 무얼 할 수 있는지 묻지말고 당신이 국가를 위해 무얼 할 수 있는지 생각하세요!

1 개요

미국 민주당 자유주의[4] 의 상징처럼 되어버린 가장 인기높은 대통령 중 하나[5]
냉전 후 미국의 황금기를 상징하는 대통령이자 미국 정치권에서 가장 유명한 스캔들과 음모론을 가지고 있는 대통령[6] 그리고 잘생긴 얼굴


미국의 제35대 대통령. 본격 TV정치시대의 개막을 알린 대통령이자 미국에서 선거를 거쳐서 취임한 최연소 대통령[7], 그리고 유일한 가톨릭 신자 대통령이기도 하다. 또한 아일랜드 이민자의 후손이므로, 몇 안되는 비WASP 대통령이다. 그리고 2차 세계대전 이후 암살 당한 유일한 대통령이자, 20세기 암살 당한 두번째 대통령.[8]


20세기에 태어난 최초의 대통령이자 트루먼, 아이젠하워보다 한 세대 가까이[9] 젊은 대통령. 단적으로, 60년대 초를 풍미한 케네디보다 80년대를 풍미한 로널드 레이건이 그보다 여섯 해 먼저 태어났다.[10]



대선 당시 광고(1960년)풀버전(컬러)

광고 초반에 자세히 보면 린든 존슨도 보인다.

케네디 케네디 케네디 케네디 케네디 케네디 당신을 위한 케, 네, 디!

세상을 알기엔 충분히 먹을만큼 먹었으면서도, 무엇이든 해내기에 충분히 젊은 사람!

2 초기 일대기

2.1 젊은 시절

매사추세츠 주 브룩라인(Brookline)에서 당시 보스턴의 명문가이자 상하원의원을 밥먹듯이한 아일랜드계 이민자인 조지프 패트릭 케네디(J.P 케네디)의 9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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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네디 가문은 19세기 후반 아일랜드 대기근을 피해서 미국으로 이주한 가톨릭교 신자들이다. 그의 아버지인 조지프 케네디는 은행장으로 부호가 되었고, 동시에 영국 주재 대사로 오른 입지전적 인물이었다.라고 쓰지만 실은 불법축재 재벌이다[11] 이런 명문가이자 정치적, 경제적으로도 남부러울 것 없었던 조지 케네디의 야망이었던 '우리 집안에 대통령 하나 쯤은 나와야 한다'는 교육 방침에 따라 케네디의 자녀들은 어릴 적부터 집안의 빵빵한 지원 속에 엘리트 교육을 받았다.[12]

조지프 케네디의 이런 태도는

인간 성공의 척도는 돈이 아니고, 그가 만드는 가문(가정)의 종류이다”

란 말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로버트 F. 케네디, 에드워드 케네디 등도 대기후보(?)로 정계에 투신하였다.

운동, 공부 모든 것에 만능이던 장남 조 케네디(Joe 케네디)에 비해 좀 왜소하고 어려서부터 잔병 치레를 한 잭 케네디는 성적이 다소 떨어졌음[13]고등학교에서 정말 많은 여자들과 사귀었는데 자신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나는 잘 생긴것은 아닌데 여자들이 나를 좋아하는 것 보면 내 성격이 잘 먹히는 것 같다. 껄껄' 이랬다고 한다.에도 정계 유력인사이자 하버드 출신인 아버지의 후광에 역시 명문가였던 친척들의 신원보증을 얻어 하버드에 입학했다. 본인은 프린스턴 대학교에 간다고 했지만 아버지가 차갑게 "형이 두려워서 그러는 거냐"라고 반응했다고 한다 대학에서 정치학을 공부하였고 학창 시절 유럽 여러 나라들을 탐방하였던 그는 외교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그 결실로 졸업 학위 논문 <영국은 왜 잠자고 있었나(Why England Slept)>(1940)는 출간 후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직전 영국의 네임 체임벌린이 뮌헨 협정아돌프 히틀러독일 제3제국에 대해 펼쳤던 유화정책을 비판한 것이 주요 내용이다. 교수들은 이 논문이 굉장히 장황하고 내용이 반복된다고 하면서도 그 깊이는 인정한다고 하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정작 아버지인 조셉 케네디는 당시 주영 미국대사로 히틀러에 대한 유화정책을 적극 지지했고, 미국이 유럽에 개입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아빠 디스 케네디는 주영 대사인 아버지의 도움으로 대학생의 신분으로 구할수 없는 미, 영 외교문서들을 탐독하고기밀 누설 전속 속기사와 타이피스트를 고용하여 3개월만에 학위 논문을 써냈다. 여담으로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 어느 석기시대 예찬론자는 대놓고 존 케네디 면전에서 뮌헨 협정을 언급하며 케네디의 쿠바에 대한 유화 정책을 비판한 적이 있다. 위 내용을 감안할 때 이 말을 듣고 당시 케네디가 어떤 심정이었을지는 더 이상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2.2 2차대전 참전

원래 부신피질 호르몬 분비 이상인 에디슨병을 앓고 있었고, 대학시절 미식축구를 하다 등에 큰 상처를 입어 늘 진통제를 달고 살았는데 후의 전쟁 부상으로 더 악화되었다. 이 때 입은 등의 부상은 평생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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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해군에 복무, 대위전역했다. 아버지의 연줄이 아니라면 에디슨병, 성병 등의 부상 등으로 군대에 갈 수 없는 신체 조건이었지만[14][15] 세계대전에 참가해야 향후 정치 인생에 영향을 끼칠수 있다는 판단에 따라 아버지의 연줄을 이용해 입대했고, 아버지를 설득해 후방이 아닌 전선에 배치받았다. 서방국가는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에 입각해 리더가 되려면 참전경험이 선거에 유용하게 작용한다. 실제 케네디가 경력도 일천한 젊은 나이에 하원의원에 출마했을 때 참전용사 출신이라는 점을 크게 부각했다. 항간에 나오는 노르웨이 출신의 나치주의자와의 만남 때문에 군으로 쫓겨났다는 건 사실이 아니다.

참고로 케네디의 영원한 맞수인 닉슨 역시 태평양 전쟁 참전자이자 같은 해군 출신이다. 단 PX병 창고 관리 직책을 맡았던 보급병과 장교(최종 계급은 소령)이었기에, 닉슨은 케네디의 전쟁 경험 때문에 선거때 자신도 병역을 이행했다는 부분을 유난히 강조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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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위 시절, 어뢰정 PT-109정장(艇長)으로 근무했는데, 작전중에 전원 자느라고뭐? 어둠 속에서 미처 일본 구축함 아마기리[16] 함을 발견하지 못해 구축함에 들이받히고 PT-109는 격침되었다. 아마기리측에서도 PT-109의 발견이 늦었고, 어설프게 피하는 것보다는 똑바로 들이받는게 안전하다는 판단으로 충각전술을 사용.포격이 아니어서 다행

이후 케네디는 난파된 배에서 살아남은 승조원들을 이끌고 6km를 헤엄쳐 인근에 위치한 무인도에 상륙하여 조난이 되었고, 일주일정도 버틴 후에 구출이 되었다고 한다. 물론 고향으로 돌아왔을때 케네디는 구사일생 끝에 살아온 전쟁영웅이 되었다.

다만 애초에 안 들이받히고 구축함을 격파하는게 어뢰정의 진짜 임무 아니냐는 비판도 있으며 사실 이 사건은 군인으로서 케네디가 무능했다는 걸 드러낸다는 주장도 있다.[17] 어뢰정의 빠른 가속력을 생각할 때, 구축함을 못 피한 건 확률적으로 어려운 일이긴 하다. 이미 아버지 대에 거물이 된 케네디 가문빨로 인해 징계감인 사건이 훈장수여로 뒤바뀐 건 아니냐는 조롱이 나올 정도. 물론, 격침까지 몰고 간 책임을 묻는 사람들도 그의 사후 대처(생존 승조원들을 무사히 수습해 이후 사망자를 내지 않고 무사히 돌아온 것.)는 훌륭했다는 걸 인정한다. 훈장 수여 또한 이 점이 감안된 듯 하다. 이 이야기를 바탕으로 1960년대에 'PT-109' 라는 제목으로 영화도 만들어졌다.아, 물론 자다가 자기 휘하의 군함이 공격받아 격침된건 무능한 짓 맞다.

사실 '왜 영국은 잠자고 있었는가' 등의 여러 지명도 있는 케네디의 서적들도 대필의혹에 상당한 가능성이 있으며, 대박이 나는데 영국 대사와 초대 증권감독위원장을 지낸 아버지 조셉 케네디의 '빽'이 작용했다.

원래 아버지의 계획은 큰 아들 조지프 케네디 주니어가 대통령이 되는 거였다. 이름도 같고 말이지 그러나 그가 1944년 사고로 사망(아프로디테 계획 참조)하면서 대권의 꿈은 둘째인 존에게로 자동 승계되었다. 차라리 그의 동생 로버트를 미는게 나았을지도... 나이 출마제한 있잖아요 근데 정작 아버지는 로버트의 1968년 미국 대선 출마 선언에 반대했다. 그리고 아버지의 반대에도 출마를 강행한 로버트는 암살....[18]

여담으로 조지프 케네디는 존 F 케네디가 대통령에 취임한지 11개월만에 뇌경색으로 반신불수 상태가 되었고, 2년 후 존에 이어서, 역시 대선에 출마한 로버트마저 피살당한 이듬해인 1969년 향년 81세를 일기로 숨을 거두었다. 자신의 거동이 불편해진 것과 더불어, 자신의 꿈을 이루어준 아들들을 셋이나 먼저 떠나보냈던 점에서 매우 불우한 말년을 보냈던 셈. 거기에 넷째 아들 에드워드 케네디마저 조지프 케네디의 사망 직전에 여비서의 사망 사건[19]에 연루[20]되었다.

2.3 정계 활동과 대선 승리

1946년 하원의원으로 정계를 시작했으며, 1952년에는 매사추세츠 상원의원이 되었다. 1953년 《타임 헤럴드》의 사진기자 재클린 부피에와 결혼하였으며, 1957년 《용기 있는 사람들(Profiles in Courage)》로 퓰리처상을 받았다. 1956년 대선에서 민주당 전당대회에 부통령 후보로 출마하였으나 낙선, 인지도만을 높였다. 그러나 현직 아이젠하워의 인기가 너무 좋았던 만큼 이 실패는 도리어 약이 되었다.

1958년 상원의원으로 재선되었으며, 1960년 대통령선거에서 민주당 경선에서 거물인 린든 B. 존슨을 꺾고 후보로 출마, 뉴 프런티어(New Frontier)를 슬로건으로 내걸고 공화당리처드 닉슨을 누르고 승리했다. 미국 대통령 선거 역사상 처음 개최된 생방송 텔레비전 토론은 미국 선거운동에 새로운 장을 열면서 미디어 정치, 이미지 정치의 시대를 열었다.

이날 토론은 TV와 라디오로 동시 중계되었는데, 라디오 중계를 들은 고참 신문기자들은 무승부 혹은 닉슨의 약간우위라고 평가했다. 반면 TV중계를 본 신참기자들은 예외없이 '케네디 압승'으로 다음날 지면를 도배했다. 즉, 스마트한 케네디의 이미지가 약간 노쇠해보이는 닉슨과 대비되면서 시청자들에게 각인됐다는 것. 기자들조차 내용보단 이미지에 현혹됐다는건 말 그대로 미디어 정치의 일면을 보여주는 적나라한 사례. 후에 닉슨은 자신이 라디오로만 토론을 했다면 승리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쉬운 말로 케네디는 이미지 정치에 능했단 이야기.

선거 자체는 0.2~0.6%, 10~40만표의 신승이었지만, 선거인단에서 303:219로 발라버렸다. 이때 대선의 승패를 결정한다는 오하이오는 물론 최대 선거인단캘리포니아(닉슨의 고향)가 닉슨에게 넘어갔으며, 15명의 남부 선거인단이 가톨릭 교도나 다른 이유를 핑계 삼아 투표 사기(즉 반란표)를 쳐버렸음에도 이 정도였다.[21][22][23] 대통령이 된 이후에도 쇼맨십이 능했고, 또한 기자회견 등에서도 텔레비전을 유효하게 활용하였다.

3 행적

취임 두 달만에 피그만 침공을 수락했다가 개털리며(...) 외교적으로 큰 부담을 지게 된다. 그러나 베를린 위기를 통해 미숙한 자신을 깔보는 소련 서기장 니키타 흐루쇼프의 위협을 적절하게 선방하여 서유럽 국가들의 여론을 다시 자기 편으로 되돌리는데 성공한다. 쿠바 미사일 위기에 즈음하여 핵전쟁의 위험을 무릅쓰고 흐루쇼프 정권과 대결한 결과, 미국은 쿠바를 침략하지 않을 것을 약속하는 대신에 소련은 미사일·폭격기 등을 쿠바에서 철수하고, 미국 측의 사찰을 인정함으로써 소련과의 극적인 타협을 이루며 열광적인 지지를 얻었다. 또한 중남미 여러 나라와 '진보를 위한 동맹'을 결성하였고, 평화봉사단을 창설하기도 하였다.

냉전시대 최악의 위기였던 베를린 장벽 사건도 당시에는 배짱과 용기가 없다며 큰 비난을 받았지만, 결과적으로 냉전을 냉전으로 남게 만든 것[24] 당시 인공위성 스푸트니크를 날리면서 미국을 추월한 소련을 따라잡기 위해 아폴로 계획을 계획한 것도 이 무렵.[25]

내정 면에서는 뉴프런티어 정신을 내세우며 개혁법안을 의욕적으로 추진했으나 정작 의회와의 관계가 원활하지 못해 제대로 추진되지 못했고 재정 압박만 가중시키는 꼴이 되었다. 군사비는 급속도로 증가했음에도 되려 군부와의 마찰이 심화, 쿠데타 위협이 가시화 되는 등 껄끄러운 부분이 많았다. 그러나 마틴 루터 킹 목사 등으로 촉발된 민권운동에 대해서는 유연하게 대처하여 정권 기간 중 연방재판소에 최초의 흑인 판사가 취임하고 흑인 검사를 10명에서 70명으로 늘리고 오랜 악습이던 투표세를 없애 흑인은 물론 푸어 화이트 계층의 선거 참여율을 높인 것은 업적으로 인정받는다. 반면 우파의 공격은 거세졌고 너무 급격한 변화로 중산층의 여론이 갈라지며 사회분열을 가중시켰다는 비판도 함께 받고 있다.

젊은 대통령, 타고난 말빨과 극적인 죽음, 아름다운 아내 등의 이미지로 좋은 평을 받았으나 지나치게 미화되었다는 분석도 있다. 실제로 베트남전의 계기를 어느 정도는 제공했으며, 주변의 매파 때문이라고 해도 냉전을 축소시키려는 행동만 보인 것은 아니었다. 단적으로 미사일 격차 논쟁은 케네디가 촉발시킨 것이다. 그리고 복지 등 각종 개혁은 케네디 재임 중 입안됐지만, 그가 죽은 후 의회를 설득설득해 통과시킨 그의 그림자 신세였던 린든 존슨 대통령의 작품에 가깝다.

이에 대한 반론으로 케네디 자신은 베트남전에서 발을 빼려고 했던 것은 분명하다. 다만 그의 전임 '아이젠하워'가 프랑스의 직접 개입 요청을 끝내 거부하고 장비와 자금 등 물자지원에 한정했는데 반해, 케네디 정부 시절엔 군사고문만 1만명 가까이 파견되는(이들은 말로만 고문이지 실제로 전투에 참가했다.) 정책을 결정했는데, 이건 상황이 달라진 탓도 있었다.(프랑스의 식민지 베트남 -> 자유국가 베트남 공화국) 실제로 베트남에 대해서 케네디는 깊숙이 개입하는 것을 경계하고 있었고, 일단 재선을 한 다음에 베트남 철수를 다룰 예정이었다는 것이 중평이다.결국 한참 뒤로 밀린 끝에 경쟁자가 전격 철수를 결정

수려한 외모와 젊은 이미지, 여러 캐치프레이즈, 그리고 암살되었다는 점 때문에 재임 기간 뿐만 아니라 사후에도 대중적 인기는 좋은 편이었으나, 이젠 케네디를 실제로 본 세대(핵심 지지층)가 완전한 노년기에 접어들면서 예전만큼 회자되진 않는다고 한다. 하지만 인지도는 현재까지도 미디어에서 빠지지 않고 나오며 민권운동에 크게 노력한 점과 (재임기간이 짧았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그의 재임 중에 큰 실책은 없었다는 점은 장점이다.

4 평가

정치학자들이 대통령 업적 평가를 하면 주로 10위권(11위에서 20위 사이)로 랭크된다. 제2차 세계대전 이전 미국 대통령의 권한과 위상이 현재보다 크게 약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다지 높은 순위라고 할 수는 없다. 재임 기간 중 업적이 없는 대통령이라는 평가도 있다. 그러나 미디어를 통한 젊고 진취적인 이미지와 갑작스런 암살 때문에 과대평가되고 있는 측면이 있다는 비판.

극적인 인생 때문인지 그와 그의 정권은 '카멜롯(그 유명한 아서 왕의 근거지)'에 많이 비교되었다. 실제로 35살의 법무장관 로버트 케네디를 비롯해서 백악관 참모진의 상당수가 대단히 젊은 3~40대의 아이비리그 출신 동부 엘리트들이었다. 끼리끼리 게다가 32살의 막내동생 에드워드 케네디는 상원의원.[26]

케네디는 미국 대통령 역사상 처음으로 1962년 여름 대통령 집무실과 각료회의실에 녹음장치를 설치했으며 이 사실은 그의 동생인 로버트 케네디 법무장관과 단 둘만이 존재 사실을 알고 있었다. 케네디 사후에는 동생인 로버트 케네디 법무장관의 지시로 248시간 분량의 회의기록, 12시간의 전화통화 내역은 케네디 도서관으로 옮겨졌으며 특히 쿠바 미사일 사태 부분인 43시간의 녹음 부분은 1983년, 2001년에 나누어져 공개되었다. 이 녹취 대화록에서 케네디는 소련과 쿠바에 강경한 모습을 보이면서도 쿠바 공습과 관련한 직접적인 문제에서는 매우 이성적인 모습이 나타났기에 케네디의 국무능력이 단순한 쇼맨십이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미국 민주당원들 사이에선 가장 이상적인 대통령의 롤모델로 꼽히기도 한다. 뉴프런티어 정신으로 대표되는 젊고 도전적인 이미지. 베를린 연설에서 보여준 대중을 휘어잡는 카리스마, 그리고 완벽한 미국 중산층 가족의 모습[27]. 흐루쇼프와의 정상회담으로 최초로 군축을 시도하고, 달착륙으로 결실을 맺은 우주개발을 시작하는 등 월남전으로 엉망진창이 되기 직전 미국의 황금기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금까지도 많은 민주당 정치인들이 케네디와의 접점을 부각하려고 노력한다. 1992년 전국적으론 듣보잡이던 클린턴은 케네디와 악수하는 포스터를 도배했고(케네디를 만나면서부터 대통령의 꿈을 키워오면서 블라블라), 2004년 존 케리는 뜬금없이 이니셜을 JFK로 바꾸었다.결국 낙선 2008년 오바마는 '블랙케네디'라는 표어를 은근히 사실은 대놓고 밀었다.

개인사에서 보듯 여성 편력건으로 까이는 경우도 많지만, 여하간 미국에서는 그나마 존경받는 전직 대통령이라, NASA의 우주선 발사장은 케네디 우주센터, 워싱턴에는 케네디 센터가 있고[28] 뉴욕에는 존 F. 케네디 국제공항이 있을 정도.[29] 세계적인 명문대학인 하버드에도 케네디 스쿨이란 이름으로 대학원이 설립되어 있다.

영국의 저널리스트인 폴 존슨은 자신의 저서인 모던타임스에서 케네디를 비록 잘 싸운 것은 아니지만 대처나 레이건과 같은 냉전의 전사라고 평가했다.

5 갑작스런 암살

1963년 11월 22일 현지 시각으로 오후 12시 30분 쯤, 유세지인 텍사스댈러스 시 다운타운에서 오픈카 퍼레이드 중 암살자의 흉탄에 치명상을 입고 사망하였다. 현직 대통령이 퍼레이드 중에 암살당하는 충격적인 장면이 TV를 통해 전국에 방송되었고, 그야말로 전미가 울었다.

자세한 내용은 존 F. 케네디 암살 사건 참조.

6 가족과 개인사

어릴 적에 식탐이 장난 아니어서 식사 전 기도하는 시간조차도 뭔가를 집어먹곤 했다고 한다. 형의 음식까지 집어먹어서 형이 때리려 했는데, 입에 파이를 가득 물고 잘못했다고 비는 모습이 하도 웃겨서 봐줬다는 일화도 있을 정도.

모자를 쓰지 않은 첫 대통령. 그 전까지는 신사의 정장에는 당연히 중절모가 따라오는 것이 상식이었으나 케네디는 맨머리로 대중 앞에 나섰다.[30] 그 후로 미국 대통령들은 대중에 나설 때 모자를 대부분 쓰지 않게 되었고, 그 풍조는 전 세계로 퍼져서 모자는 지금도 드레스 코드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 또한 유난히 뛰어난 패션 감각으로 당시 케네디의 패션 코드는 전세계에 유행처럼 번지기도 했다. 아마도 정치가가 디자이너를 제치고 패션 아이콘이 된 사례는 에드워드 8세를 빼면 케네디 밖에 없을 것이다.(물론 인민복처럼 강요한 경우는 제외.)

사생활적 면에서는 부정적인 평가가 많다. 원앙부부 같은 이미지와 달리 재클린 케네디(1929~1994)[31] 와의 부부 사이는 사실 그리 좋지 않았다고 한다. 케네디가 바람둥이였다는 말이 있으며[32], 그 자신의 건강에 자신감이 없어 그 심리적 반동으로 성을 지나치게 탐닉했으며 아내 몰래 비밀 검열삭제 파티(...)를 열었고, 또 그 유명한 메릴린 먼로와도 썸싱이 있었다.(...) 이 때문에 먼로와 사이가 좋았던 전 남편 조 디마지오는 케네디 일가가 먼로를 죽게 한 배후인물이라고 의심해서 평생을 증오했다.[33] 그 밖에도 백악관에서 아내가 외출만 하면 수영장에서 여비서 2명[34]과 검열삭제를 하면서 놀았다고 한다.그리고 케네디가 우상이었던 클린턴은 따라한다

앞서 언급했듯 대외적인 이미지와는 달리 건강이 상당히 안 좋았다. 에디슨 증후군 등의 이야기는 선거 당시에도 논란이 된 이야기였다. 등의 상태도 매우 심각했던 듯 하다. 그러나 이러한 건강상의 문제는 당시에는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사실 건강상태를 사실대로 이야기했다면 정계은퇴까지도 갈 정도였고, 평생 두 번의 병자성사를 받은 적도 있었다.[35] [36] 특히 등의 통증은 매우 심각한 수준이었던 듯 하다. 대학시절 사고로 척추수술을 받았다. 엄청난 재활훈련을 겪었다지만, 그 후유증이 평생 남아 있었는 듯. 게다가 2차 세계대전 당시 어뢰정의 침몰 후 구사일생으로 귀환하는 과정에서 등의 부상이 크게 악화되었다고 한다. 선거 당시에는 하루 종일 유세를 뛰고 나면 등의 통증을 가라앉히기 위해 저녁에 한 시간씩 목욕탕에서 뜨거운 탕 안에 앉아 있어야 했다고 그의 전기에 소개되어 있다. 5.16쿠데타 이후 미국을 방문한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수행원들의 증언에 의하면 회담 때도 케네디는 허리가 좋지 않아 흔들의자에 앉아있어야 했으며, 이마저도 매우 힘들어하는 것으로 보였다고 한다. 사후에 공개된 사진 중에 대통령 재직 중 크레인에 실려서 비행기를 타는 사진도 있다. 케네디의 사진이나 영상물을 보면 구부정한 자세로 허리를 이용하지 않고 상체 전체를 통째로 움직이는 장면을 자주 볼 수 있다. 또 연설을 할 때 연단은 두 손으로 짚는 경우가 많다. 이런 건강상 문제로 스테로이드제를 복용해서 체중을 불리려 했고 남성 호르몬도 투여했다고. 이런 류의 소문이 신빙성 있게 돌기만 해도 치명적이었기 때문에 에드거 후버 FBI국장에게 슬슬 기었다는 이야기도 있을 정도였다.

아내 재클린과의 사이에서 2남 1녀가 있다. 장남인 존 F. 케네디 주니어는 1963년 당시 3살 나이로 아버지 장례식에서 경례하던 모습으로 세계를 울렸으나 그 역시 커가면서 데릴 해나와의 관계 등으로 여러 루머에 시달려야 했고, 1999년 7월 타고 다니던 비행기가 추락하여 갑자기 아내와 함께 세상을 떠나면서 온갖 음모론이 나왔음은 물론이다. 차남인 패트릭 부비어 케네디는 미숙아로 태어났으며 신생아 호흡곤란증후군으로 아버지가 죽기 수 개월 전 1963년 생후 2일만에 사망했다. 당시에는 미숙아에 관한 의학지식이 부족하여 의료진이 할 수 있는 것이 없었으나 대통령의 아들인 그의 죽음은 이후 신생아 호흡곤란증후군과 각종 미숙아 관련 질환들에 대해 본격적으로 연구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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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기준 케네디와 재클린의 아이 중 살아있는 건 첫째인 딸 캐롤라인(1957년생) 뿐이다.[37] 캐롤라인은 변호사로 활동하다가 2008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숙부인 에드워드 케네디 상원의원(2009년 타계)과 함께 버락 후세인 오바마 후보를 공개 지지하여 그의 당선에 기여하기도 했다. 캐롤라인은 2013년 후반기부터 주일 미국대사로 재직 중이다. 이 캐롤라인을 보고 쓰여진 유명한 노래가 하나 있는데 그것이 바로 보스턴 레드삭스 팬들의 애창곡 스윗 캐롤라인(Sweet Caroline). 보스턴 레드삭스의 펜웨이 파크 100주년 경기에서 시구를 하기도 했다. 다만 차마 낯간지러워서라도 쏘굿! 쏘굿! 쏘굿!은 외치지 못하는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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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일 프로야구 올스타 시리즈가 열린 도쿄 돔에서 보스턴 레드삭스 유니폼을 입고 왕정치와 동반 시구를 하기도 했다.

7 어록

취임 영상. 잘 보면 이 동영상에는 미국 대통령이 5명이나 있다. 해리 S 트루먼, 아이젠하워, 린든 존슨, 리처드 닉슨, 그리고 본인 케네디.[38]오로성

"And so, my fellow Americans, ask not what your country can do for you, ask what you can do for your country. My fellow citizens of the world, ask not what America will do for you, but what together we can do for the Freedom of Man."

자, 미국 국민 여러분. 국가가 여러분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지 묻지 말고, 여러분이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자문해 보십시오. 그리고 세계의 시민 여러분, 미국이 여러분을 위해 무엇을 베풀어 줄 것인지를 묻지 말고 우리가 손잡고 인간의 자유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자문해 보십시오.[39][40]



연설문 풀버전

"Two thousand years ago, the proudest boast was 'civis romanus sum'. Today, in the world of freedom, the proudest boast is "Ich bin ein Berliner!"... All free men, wherever they may live, are citizens of Berlin, and therefore, as a free man, I take pride in the words "Ich bin ein Berlin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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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전, 가장 자랑스러운 말은 '나는 로마 시민입니다(라틴어: 'Civis romanus sum')'였습니다. 오늘날, 자유세계에서 가장 자랑스러운 말은 단연 ‘나는 베를린 시민입니다('Ich bin ein Berliner')’일 것입니다. (중략) 모든 자유민은, 그 사람이 어디에 살든 그 사람은 베를린의 시민입니다. 고로, 자유민으로서, 전 '나는 베를린 시민입니다' 라는 이 말을 자랑스레 여길 겁니다![41]

동독 한복판에 있는 관계로 '냉전의 최전선'이나 다름없던 서베를린을 방문했을 때의 연설. 동독의 갑작스런 베를린 장벽 구축 후 위기감이 고조되던 당시 빌리 브란트 서베를린 시장이 동독과 소련의 위협을 막기 위해서 미국의 도움을 요청했는데, 린든 존슨 부통령을 보낸 이후 케네디가 직접 왔다! 보시다시피 케네디는 폭풍간지의 명언으로 동독소련에 맞서 서베를린을 지키겠다는 의지를 우회적으로 표현했는데, 이 날 무려 50만명이 넘는 시민들이 거리로 쏟아져나와 케네디를 열광적으로 환영했다. 오죽했으면 연설의 달인인 케네디가 환호성에 다소 놀라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을 정도였는데 미국 대통령이 유럽에서 이런 환대를 받은건 전무후무한 일.

"전쟁은 오늘날 군인들이 누리는 것과 같은 명성, 특권을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이 누릴 수 있을 때 끝나게 될 것이다."
"세계에 많은 나라가 있는데 정부끼리는 잘 지내기 어렵더라도 사람들끼리는 친구가 될 수 있다. 여러분이 미래에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한다. 미래의 희망이다. 우리가 서로 도움의 손길을 건넬 의지만 있다면 국경은 아무런 방해도 되지 않는다."[42]

8 트리비아

미 역사상 최초의 해군 출신 대통령으로, 그 뒤를 이어 취임한 4명의 대통령이 모두 해군 출신이라는 재미있는 기록이 있다. 한 분 건너 뛰면 한 분 더 있다.

젊고 매력적인 대통령이었기 때문인지, 그는 당시 어린이와 청소년들에게도 많은 동경을 받았다. 백악관에도 대통령에게 보내는 어린이나 청소년들의 편지가 유난히 많이 쌓였을 정도였다. 케네디 역시 가능한 직접 이들의 편지에 답장을 써 주었다고 한다. 어린 시절 그를 만난 세계적 유명인사가 두 명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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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네디와 악수하는 이 소년은 훗날 미국의 마흔 두 번째 대통령이 되었고, 여성편력까지 닮을 필요는 없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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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원 안에 있는 소년이 바로 손흥민 반기문 UN 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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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전 대통령이 5.16 군사정변을 일으킨 직후 국가재건최고회의의 수장으로서 방미를 하면서 만난 적이 있다. 케네디는 당시 반공라인을 구축하기 위해 장면 내각을 뒤에서 뒷바라지할 일종의 막후 경제자문을 구상하고 있었던 터라, 강력한 반공에 기반하고 정국을 안정시킨다면 어느 정권이건 크게 개의치 않았기에흑묘백묘의 근원? 사실상 군사쿠데타는 이 방미로 미국의 승인(?)을 얻게 되었다. 그리고 후임인 린든 존슨과도 베트남전 파병 등 우호관계가 지속되어 1960년대 한미관계는 잘 굴러갔다. 닉슨이 취임할 때까지는

로널드 레이건과 함께 미국 대통령들 중 최고의 위트가이로 뽑히는 인물. TV를 적극 활용하여 이미지를 잘 만들었지만 본인의 입담도 훌륭해서 많은 사람들을 매료시켰다. 프랑스에 갔을 때 프랑스 언론들은 케네디보다 그의 부인인 재클린에게 더 집중하여 취재를 벌였는데, 이를 본 케네디는 "저를 제대로 소개할 수 없을 것 같군요. 저는 재클린 케네디 여사를 프랑스로 모시고 온 남자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트루먼과의 논쟁 후에 트루먼에게 한 말도 유명. 자세한 건 해리 S 트루먼 항목 참고.

에이브러햄 링컨과 여러 면에서 많이 연관되어진 적이 있다. 링컨과 케네디의 공통점 항목 참조. 다만 이 항목에서 보듯이 케네디는 태어날 때부터 인생에서 성공가도를 누려왔지만 링컨은 전혀 그랬지 못했기에 그냥 이런 정도의 공통점이 있었다는 정도로만 알면 된다.

오늘날 케네디는 자유주의자의 상징이지만, 생전에 그는 자유주의는 유약하다라고 생각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놀랍게도 그는 리처드 닉슨과 한때 베프였다. 닉슨만큼 케네디도 보수적이었다는 것. 허나 한때 죽이 잘맞던 두 사람은 대권 때문에 틀어졌다고 한다.

닉슨은 갖가지 방식으로 정적을 공격했다. 국세청을 동원해 정적들의 약점을 잡고 도감청을 했는데 닉슨은 케네디도 했는데...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이건 일정 부분 사실이라고 한다.(...) 케네디는 극우단체를 후원하는 부유층들을 압박하려고 국세청에 세무조사를 시행하도록 지시, 극우단체의 돈줄을 끊어버렸다. 또한 철강업체들의 담합을 막기 위해 철강업체들 주요 임원들의 자산에 대한 세무조사로 철강업체들의 담합을 좌절시켰다고 한다. 또한 여러 경로로 정적들에 대한 도감청과 대화의 비밀 녹음도 했다고 한다. 닉슨: 내가 나쁜건 다 케네디 탓이야

마틴 루터 킹 목사에게 후버의 감시를 몰래 알려준 것도 케네디였다고 한다. 킹목사가 백악관을 방문했을때 단 둘이서 백악관 정원을 산책하면서 알려줬다고 한다.

9 대중매체에서의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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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TV 미니시리즈 <케네디 가(家)>(The Kennedys)에서 그레그 키니어가 케네디 역으로 출연했다. 대체적으로 역사상의 모습을 잘 묘사했지만, 스캔들과 잔병 치레에 시달리는 어두운 모습들도 등장한다. 본 드라마는 그동안 케네디 가를 두고 떠돌던 스캔들, 루머의 상당수를 기정 사실로 묘사하였고,[43] 때문에 방영을 전후로 케네디 가와 케네디 행정부 시절의 전직 관료들이 반발하기도 했다.

영화 포레스트 검프에서 잠깐 등장. 검프는 대학 미식축구 선수로 출전하여 혁혁한(?) 역할을 한 후에 올 아메리칸 팀에 엔트리가 올라가 백악관에 초청되어 케네디를 만난다. 그런데 만찬장에서 닥터페퍼[44] 15병이나 마셔버리는 바람에 케네디와 악수를 할 때 케네디가 "축하하네. 올 아메리칸 팀에 들어간 소감이 어떤가?"라고 묻자, 검프는 오줌이 마려워서 "쌀 것 같아요(I got to pee)"라고 말해버린다. 케네디는 웃으면서 "이 친구가 오줌이 마려운가 보군."이라고 주위에 말한다. 그리고 다음 장면에서 검프는 "그 젊고 멋진 대통령은 차 안에 있을 때 누군가에게 저격당해 죽었다"고 암살 사실을 언급하며 그 동생 역시 호텔 부엌에서 총 맞아 죽었다(1968년 로버트 F. 케네디의 암살을 말한다.)며 "역시 형제는 힘든가봐요"라고 회상한다.

콜 오브 듀티: 블랙 옵스 시나리오에서는 주인공에게 암살 임무를 주며 특유의 연설하는 어투로 명대사를 뽑아내신다. 그런데 블랙 옵스의 세계관에서는 바로 그 주인공이 케네디를 암살했다. **

좀비 모드에서는 플레이어블 캐릭터로 등장한다. 오프닝에서부터 포스를 뿜어내더니 좀비 한 마리를 죽일 때마다 명언 한 마디씩 외치는 게 장관이다. 음침해야 하는 좀비모드가 이 사람 덕분에 유쾌해졌다. 근데 대사들을 다 들어보면 반 이상이 피델 카스트로를 까는 내용이다.

마이클 셰이본의 대체역사소설 유대인 경찰연합에서는 케네디가 암살당하지 않고 재클린과 이혼한 뒤 메릴린 먼로와 재혼했다고 언급된다. 진정한 인생의 승리자?

환상특급(The Twilight Zone) 시즌1의 49번째 에피소드 Profile in Silver에서는 케네디가의 후손 한 사람이 과거로 시간여행을 해서 암살을 막았으나. 그 결과로 3차 세계대전의 위기에 휩싸이게 된다. 결국 다시 과거로가서 자신이 케네디 자리에 있음으로서 암살을 성공시키고 진짜 케네디는 미래로 보내버리는 결말.[45]
보려면 여기로

해리 터틀도브의 대체역사소설 '두 명의 조지'에서는 영국령 북미연방[46]을 독립시키려는 아일랜드계 백인우월주의자 단체의 수장으로 나온다. 초반에 기념물인 두 명의 조지 그림을 훔치고 북미연방의 사업가 정직한 리처드 닉슨을 암살한 범인.

같은 작가의 월드 워 시리즈에서는 얼 워런에게 대선에서 처발린다. 해리 터틀도브가 케네디를 싫어한다

영국 대체역사소설 부활의 날에서는 쿠바 위기 당시 강경책으로 핵전쟁을 일으켜서 미국을 말아먹은 대통령으로 묘사되고 있다. 하지만 사실은 실제 역사대로 온건파였고 커티스 르메이 장군의 독단적인 핵전쟁 결정 후 막료들이 전멸하자 역사가 왜곡되었다는 비밀이 있다.

심슨 가족에서는 에이브 심슨이 제2차 세계대전 때 PT-109라는 함정에서 케네디와 같이 근무했는데,[47] 케네디가 "Ich bin ein Berliner"를 말하자 심슨이 케네디를 나치라고 하면서 동료 수병들과 함께 케네디를 구타한다.하극상

스티븐 킹의 11/22/63에서는 주인공 커플의 활약으로 암살을 모면하지만 이후 인권 운동에서의 미온적 대처와 극우세력과의 준내전및 자연재해[48]로 인해 미국을 말아먹는 초석을 세운 대통령으로 기억된다. 퇴임후 80년대에 사망했다고. 스티븐 킹은 이 소설 후기에서 자료를 조사해 보니 오스왈드의 단독범행설이 믿기 어렵지만 사실이라는 결론이 났다고 언급하고 있다.

어새신 크리드 시리즈 세계관에서는 에덴의 조각을 통해 국민들에게 민주적인 투표를 할 수 있게 하려다가 성전기사단의 눈 밖에 나는 바람에 암살당했다는 설정이다. 리 하비 오즈월드(미끼역), 린든 B. 존슨, 심지어는 평범한 시민이었다가 우연히 케네디 암살장면을 찍은 위의 에이브러햄 자프루더(진짜 암살범.(!!!) 브라더후드의 퍼즐에선 "Z"라고 명명됨.) 전부 성전기사단의 일원. 오즈월드나 존슨은 그렇다고 쳐도 마지막의 평범한 시민 자프루더에 대한 설정은 고인드립 쩝니다


브라이언 싱어의 시리즈 영화 엑스맨 2에서 오프닝 부분 백악관에 잠입한 나이트 크롤러가 백악관의 보디가드에게 처음 모습을 드러낼때 그 위에 있는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공식 초상화가 비춰진다. 케네디가 암살당한 사실을 아는 관객들은 나이트 크롤러가 (본인의 의도가 아닌 세뇌당했지만) 대통령의 암살을 기도할 인물이라는 복선을 보여주는 약간의 영화적인 장치. 또한 엑스맨: 데이즈 오브 퓨처 패스트에선 뮤턴트(!!!)였음이 밝혀졌다. 그를 암살하려는 세력이 있음을 눈치챈 에릭이 동족인 그를 구하려다 실패하고 오히려 암살범 누명을 뒤집어쓰고 펜타곤 비밀감옥에 10년간 갇히게 되었다. 케네디의 능력을 묻는 질문에 각본가는 아마도 자신의 말을 남들이 따르게 하거나 긍정적인 에너지를 발산하는 능력이였을 거라고 말했다.

이터널시티 세계관에서 흑막이나 다름없는 외계인(게스트)의 존재를 발표하려하다가 암살당한 걸로 짤막하게 언급된다.

먼나라 이웃나라 미국편에서 이원복이 무척 케네디를 싫어하는지 아에 케네디가 한 업적이나 정책들을 환상 정도로 표현한다. 사실 먼나라 이웃나라 미국편 전체가 작가 성향에 반하는민주당 계열 대통령들을 대부분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편이지만, 케네디 한정으로 좀 심하게 비하해놓았기 때문에 어느 정도 가려서 들을 필요가 있다.

영화 '버틀러:대통령의 집사'에서는 제임스 마스던이 해당 역할로 출연했다. 몸이 약해서 아무도 몰래 거실 바닥에 누워 있다가 버틀러와 대화를 하기도.
  1. 중간이름인 피츠제럴드(Fitzgerald)는 당시 보스턴의 시장이었던 존 F. 피츠제럴드의 딸이자 존 F. 케네디의 어머니인 로즈 케네디(역시 아일랜드계다.)의 처녀적 성이다. 실제로 역대 미국 대통령 중에서 어머니의 처녀적 성을 중간이름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생각보다 많다. 가장 대표적인 예로 조지 허버트 워커 부시, 로널드 레이건, 리처드 닉슨, 린든 B. 존슨, 프랭클린 D. 루스벨트, 우드로 윌슨 등이다.
  2. 아일랜드성씨 중에서 20위권 이내에 들어갈 정도로 많은데 특히 먼스터 지방의 티퍼레리 주에 가장 많다.
  3. 케네디박물관에서 공식적으로 입증하였다. #1Blood type:O RH Positive #2 미군인식태그에도 unsr-O로 표기되어 있는것을 확인할 수 있다.
  4. 미국이나 다른 나라들에서 자유주의라고 하면 진보나 개혁주의자들을 뜻한다. 보통 개인과 인권으로서의 자유로 자유주의를 뜻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기업활동에서의 자유로 의미가 좁아지는 왜곡이 있어서 전혀 엉뚱하게 보수적인 입장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많지만...
  5. 여러 재평가에 따라 에이브리함 링컨, 프랭클린 D. 루즈벨트, 로널드 레이건 등보다 평은 밀렸지만, 아직도 미디어와 대중은 그에 대해 인기가 사그러들지 않고 있다.
  6. 헐리웃 스타 마릴린 먼로 등과의 스캔들, 50년이 지난 지금도 의문인 암살 등 미국의 역대급 음모론을 남기고 간 사람이다.
  7. 당시 만 43세 6개월. 최연소 대통령은 부통령에서 대통령을 승계한 당시 만 42세 11개월의 시어도어 루스벨트이다. 3위는 빌 클린턴. 하지만 4등 이분이 더 예외적인 인물.
  8. 여담으로 미국에서 암살 당한 대통령은 모두 넷인데, 링컨, 가필드, 매킨리, 그리고 케네디이다. 가장 젊었던 게 케네디였던 것도 물론.
  9. 아버지 조지프 케네디가 1888년생이고 트루먼은 1884년, 아이젠하워는 1890년생이다.
  10. 1910년대에 태어난 대통령은 케네디(1917), 닉슨(1913), 포드(1913), 레이건(1911)인데 그가 제일 어리다! 약 30년 후에 대통령을 했던 조지 허버트 워커 부시(1924)와도 7살밖에 차이 안 난다.
  11. 그는 세계 대공황때 적절한 주식투자라 쓰고 주가조작으로 이해한다와 밀조주 사업으로 부를 축적했다. 적나라하게 말하면 뉴욕 금융가에서 작전(주가조작)의 원조격인 인물이며, 이외에 한때 영화체인 M&A로 할리우드를 좌지우지하기도 했다.
  12. 케네디의 자녀들은 보스턴 시내 어디 상점이든 외상으로 물건 구입이 가능했다고 한다. 그 집안을 모르는 시민들이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케네디가의 비서가 잔금을 늘 치렀다고 한다.
  13. 초트고등학교에서의 존의 성적은 중하위권이었다.
  14. 이 때문에 한 번 육군 장교를 지원했다 떨어졌다.
  15. 일례로 동생 로버트 케네디가 '모기가 잭의 피를 빤다면 잭이 감염되는 것이 아니라 모기가 감염될 것이다'라는 농담을 할 정도로 걸어다니는 종합 병원..
  16. 후부키급 구축함 15번함
  17. 그럼 구축함 아마기리도 못 피하고 박았으니 똑같이 한심한 거 아니냐는 이야기도 나오는데, 구축함 등 호위함들이 잠수함이나 어뢰정 등 (당시 기준으로)쪽배들을 고속으로 들이받아 격침시키는 전술은 교범에도 나와 있는 정규 전술이다. 아마기리의 견시는 PT-109를 제때 발견했고, 아마기리의 함장은 PT-109를 함포로 해치우기엔 거리가 가까워 충돌로 해치우기로 하고 돌진했다. 다만 아마기리는 PT-109를 격침시킨 후 좀 당황했다고 하는데, 어뢰정이 그 거리에서 구축함을 피하지 못할 가능성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아마기리도 일단 시도는 하되, PT-109가 자신들을 회피하면서 도주해 버릴 것으로 예상했다고 한다.
  18. 만 35세 이상이니 1925년 11월 20일 생인 로버트 케네디는 1960년엔 아슬아슬하게 걸린다.
  19. 여비서를 집에 데려다주다가 차가 강에 빠졌는데, 자기는 탈출에 성공했지만 여비서가 그대로 익사하고 만다.
  20. 사실 사망 사건 그 자체보다는 이후 에드워드가 패닉에 빠져 경찰에 신고도 하지 않았던 점이 크게 문제시됐다. 세계 초강대국의 대통령 자리를 노리는 양반의 사고 후 상황 판단이 엉망이었으니...
  21. 50개 주를 다 방문하겠다는, 당시로서는 무리한 계획을 시행하다가 기진맥진한 닉슨의 컨디션 + 망한 메이크업 탓도 컸다.
  22. 승패를 가린 최소 격차 지역구는 하와이(3), 일리노이(23), 미주리(11), 뉴저지(16), 미네소타(11) 등의 중부권 주 위주였다. 이들 지역구에서 0.6~1.6%의 격차만 뒤집어졌어도 승자는 닉슨이었다. 단 2%의 격차에도 텍사스(존슨의 고향)를 수성한 것도 이득이었다.
  23. 하지만 이렇게 FDR 이후로 민주당 내 남부세력은 독자출마나 팀킬도 서슴지 않던 남부는 기어이 70, 80년대의 공화당 천하를 지나면서 공화당의 텃밭으로 변하게 된다. 사실 노예제문제로 남북전쟁을 일으켰던 극보수 성향의 남부 민주당 후예들이 뉴딜정책 이후 노동자-흑인(소수인종) 연합을 기반으로 한 민주당에 잔류한다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긴 했다.그리고선 당시의 적이었던(링컨의 기반) 공화당으로 갈아타기 모두 알다시피 케네디는 첫 임기에 암살되었고, 그렇게 미국 선거의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이 되었다.
  24. 즉, 양측의 전면전은 없었다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특히 이에 대한 독일인들의 평가가 후하다. 핵 위기의 반성으로 부분적 핵 실험 금지조약(Partial Test Ban Treaty)을 제창하여 이를 성사시켜 후일의 수많은 핵제한/감축 협정의 시금석을 심은 것도 높은 평가를 받는다.
  25. 비판론자에게서는 이 또한 군산복합체들에게 숨통을 틔워주는 사업이었다는 비판을 받고있다. 뭐든지 생각하기 나름.하지만 2차 대전의 유럽 사령관 출신 대통령도 해결을 못해서 퇴임사에서 위험성을 경고하는 것으로 그친 상대를 대위가 무슨 힘으로 막으라고?
  26. 결국 이 때문에 대통령은 자신의 친족을 공직에 앉혀서는 안된다는 법안이 후에 통과되었다.20세기 민주당 대통령의 전통인가
  27. 단 이것은 철저하게 대외적인 이미지였다. 실제 케네디는 부인과 사이가 그다지 좋지 않았다. 후술된 가족과 개인사 참조.
  28. 사실 뉴욕에는 더 크고 아름다운 링컨 센터가 있다.
  29. 전직 대통령의 이름이 붙은 국제공항으로는 휴스턴조지 부시 인터컨티넨탈 공항, 워싱턴 D.C.로널드 레이건 국제공항 등도 있지만 가장 유명한 건 역시 존 F. 케네디 공항이다. 2014년 12월 대한항공 KE 086편 이륙지연 사건이 일어난 곳이기도 하다.
  30. 전임 대통령들 가운데도 대중들 앞에서 중절모를 쓰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이는 언론 매체를 위한 부분적인 것이라 볼 수 있다. 1950년대까지 미국 정치인들에게 중절모는 보편적인 것이었다. 케네디의 대선 라이벌인 리처드 닉슨도 당시에는 중절모를 썼다.
  31. 덧붙이자면 재클린은 나중에 그리스의 선박왕 오나시스와 재혼했다.
  32. 케네디의 아버지 조지프의 이중생활 영향을 받아 이런 성생활이 생겼다는 것이 중론이다. 한 때 영화제작자인 조지프는 할리우드의 여배우들과 염문을 일으키곤 하였다.
  33. 이 여성편력 문제는 케네디가 형제들한테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둘 다 역시 성공하여 민주당 대선 경선까지 도전하지만 로버트의 경우는 거의 확실시된 상황에서 암살되고, 막내 에드워드 케네디는 의문의 여비서 익사사고(차파퀴딕 스캔들)로 대통령의 꿈을 접어야 했다.
  34. 속칭 fiddle과 faddle
  35. 가톨릭 교도로서 병자성사 받는다는 건 죽을 날이 머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자기 수명이 45세를 넘지 못하리라 생각했다. 그런 그가 만 46세에 암살로 죽을 거라고 생각이나 했을까.
  36. 지금은 그저 좀 심하게 아프면 받을 수 있는 게 병자성사지만, 저 시기 병자성사는 종부성사라는 이름으로 불려 그야말로 죽기 전에 받는 의식이었다.
  37. 미국 정부는 2039년 케네디 암살과 관련된 모든 정보를 공개하기로 결정한 상태다. 물론 케네디 가족들의 정신적 충격을 고려한 결정이기 때문에 캐롤라인이 그 전에 죽는다면 조기 공개할 가능성도 있다고 한다.
  38. 단 이 때 닉슨은 전직 부통령, 존슨은 새 부통령으로 참석한 것이다. 존슨은 케네디 다음, 닉슨은 존슨 다음에 대통령이 된다. 아이젠하워와 트루먼은 각각 케네디의 전임자, 전전임자 자격으로 참석한 것. 앞뒤 두명씩 딱 좋네요 이들의 재임년수는 1945년부터 1973년까지 28년에 달한다. 뭐 8 곱하기 5보다는 작지만... 한 명 빼고는 다들 임기의 시작(전임 대통령의 급서) 또는 끝(불명예퇴진, 암살)이 불행 예외라는 그 한 명도 자기의 예전 직장 문제로 골치를 앓았다
  39. 이 폭풍간지의 취임연설로 후대의 대통령 연설문 작가들이 고통받고 있다.
  40. 앞문장의 경우 국가주의의 표본으로서 많이 인용된다. 헌데 정작 국가주의 항목에서 보듯 이 문장은 국가주의를 의도한 게 아니다. And so(그래서)는 앞에 이야기하는 부분을 종합할 때 쓰는 것이므로, 문맥을 제대로 파악해야 한다. 이 문장의 앞 내용은 '우리 세대는 최악의 위기 속에서 자유를 지킬 역할을 부여받았고, 우리는 그것을 책임지고 수행해야 한다.'는 내용이고, 이 문장의 뒷 내용은 '여러분들이 국가를 위해 하는 희생하는 만큼 우리 정부에게도 요구하라. 우리 정부는 준비가 되어있다'는 내용이다. 즉, "미국 국민, 정부, 전세계인들 모두 실천하여 자유를 지키자"는 내용. 실천하는 국민들을 국가가 얼마든지 뒷바라지 해주겠다는 내용을 국가주의라고 이해하면 일종의 악마의 편집이라 볼 수 있다. 연설문 전문(한국어 번역)
  41. '나는 베를린 시민입니다'라는 뜻으로 말하려면 부정관사 ein을 빼고 말해야 하고, Berliner는 젤리가 든 도넛의 한 종류를 의미하기도 하는데, 여기서 ein을 넣고 말하면서 실제 뜻은 '나는 베를리너 도넛입니다'가 되므로 독일어 어법상 틀렸다는 지적이 있다. 그러나 이는 잘못 알려진 것이다. 부정관사 ein은 직업이나 거주지를 말할 때에는 생략하지만, 이 연설에서 케네디는 실제로 베를린 출신이 아님에도 베를린과의 강한 유대를 드러내기 위하여 이 말을 하였다. 이러한 의미로 문장을 구성하면 Ich bin ein Berliner은 문법적으로 옳을 뿐더러, 케네디의 취지를 표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와 같이 말해야 한다. 문맥상 "나 역시 한 명의 자유인인 서베를린 시민입니다"라는 의미이므로.연설문을 보좌진도 볼 텐데 대통령이 '나 도넛이요'라고 선언하는 꼴을 볼 리도 없고 영어로 치면, I am (also) one of Berlin citizens라고 말한 셈.
  42. 세계 각국의 학생들이 백악관에 방문했을 때 한 얘기. 그리고 이 학생들 중엔 반기문도 있었는데, 그는 UN사무총장이 된 후 이 얘기를 전하는 기고문을 쓰기도 했다.
  43. 예컨대 케네디의 복잡한 여성관계(마릴린 몬로도 등장한다!), 부모인 조셉 1세와 로즈 여사의 불화, 심지어는 케네디와 재클린 부부 사이의 불편한 모습까지 나올 정도. 다만 케네디의 암살은 별다른 음모론 없이 오스왈드의 범행으로 묘사.
  44. 국내 자막에는 콜라라고 번역되어있다, 영화 개봉 당시만 해도 국내에 닥터페퍼가 알려저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맛 차이도 뭐
  45. 마지막 부분 대사 등을 보면 우리가 흔히 아는 케네디 암살 미스터리는 사실 이런 바꿔치기 때문에 벌어진 음모라는 설정이다.
  46. 소설의 배경이 미국 독립전쟁이 조지 워싱턴과 조지왕의 화해로 끝나서 미국이 영연방에 통합된 후 200년이 지난 1980년대이다.
  47. 실제로 케네디는 2차 대전 때 PT-109에서 지휘관으로 근무했다.
  48. 사실 이 자연재해는 주인공이 시간 여행을 했고 과거를 바꾸는 바람에 벌어진 인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