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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월 31일 (화) 21:12 기준 최신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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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서울 SK 나이츠 서울 삼성 썬더스 전주 KCC 이지스
No. 11 서장훈No. 11 서장훈No. 7 서장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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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전자랜드 블랙슬래머 창원 LG 세이커스 부산 kt 소닉붐
No. 11 서장훈No. 11 서장훈No. 11 서장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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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 예능인 데뷔의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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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종신조규찬하림조정치뮤지
정진운퓨어킴에디킴장재인투개월
박재정이지연서장훈김영철
브라운 아이드 걸스천둥민서조형우
박혁권김석훈이규한오타니 료헤이
김기방조한선하재숙박시연강래연
오지은한채아김성은김사권태항호
이정혁노수산나유주혜장준유
자이언트 핑크
이름서장훈(徐章勳)
출생1974년 6월 3일, 서울특별시
본관이천 서씨
출신학교학동초 - 휘문중 - 휘문고 - 연세대
신체207cm[1], 115kg
포지션센터
가족아버지 서기춘, 어머니, 여동생
소속팀청주/서울 SK 나이츠(1998~2002)[2]
서울 삼성 썬더스(2002~2007)
전주 KCC 이지스(2007~2008)
인천 전자랜드 블랙슬래머/엘리펀츠(2008~2011)
창원 LG 세이커스(2011~2012)
부산 KT 소닉붐(2012~2013)
국가대표팀1993 자카르타 ABC[3]
1994 캐나다 세계선수권 / 히로시마 아시안게임
1997 리야드 ABC[4]
1998 그리스 세계선수권 / 방콕 아시안게임
1999 후쿠오카 ABC
2001 상하이 ABC
2002 부산 아시안게임
2005 도하 ABC
2006 도하 아시안게임
등번호55[5], 7[6], 11[7]
소속사미스틱 엔터테인먼트
수상내역농구대잔치 MVP 3회(94, 97, 98)
KBL 파이널 우승 2회(2000, 2006)
KBL 정규리그 MVP 2회(2000, 2006)
KBL 파이널 MVP 1회(2000)
KBL 베스트 5 8회(1999, 2000, 2002~2006, 2008)
KBL 올스타전 MVP 1회(2006)
KBL 리바운드상 1회(1999)
1994 히로시마 아시안 게임 은메달
1998 방콕 아시안 게임 은메달
2002 부산 아시안 게임 금메달
FIBA ABC 우승 1회 (1997)[8]
/ 준우승 1회 (1999) / 3위 2회 (1993,2001)
1993~1994 농구대잔치 MVP
강주작
(기아자동차)

허재
(기아자동차)
서장훈
(연세대학교)
허재
(기아자동차)
1996~1997, 1997~1998[9] 농구대잔치 MVP
김유택
(기아자동차)
서장훈
(연세대학교)
조우현
(중앙대학교)
1999~2000 한국프로농구 정규리그 MVP
이상민
(대전 현대)
서장훈
(청주 SK)
조성원
(창원 LG)
2005~2006 한국프로농구 정규리그 MVP
신기성
(원주 TG삼보)
서장훈
(서울 삼성)

양동근
(울산 모비스)
양동근
(울산 모비스)
1999~2000 한국프로농구 챔피언결정전 MVP
조성원
(대전 현대)
서장훈
(청주 SK)
주희정
(수원 삼성)
2005~2006 한국프로농구 올스타전 MVP
찰스 민렌드
(전주 KCC)
서장훈
(서울 삼성)
조상현
(창원 LG)

1 개요

KBL 사상 최고의 센터

통산 최다 득점, 최다 리바운드 등을 기록한 KBL 살아있는 레전드
건물주 TV에 나오는 유명인 셀럽

대한민국의 前 농구선수 및 방송인. 키 207cm.[10][11] 대한민국 농구를 대표하는 센터로 사실 포지션을 따지지 않아도 대한민국 농구 역사상 최강을 논할 때 빠질 수 없는 선수다. 센터 부문에서는 경쟁자가 없다는 평이 중론.[12]

KBL 기록의 사나이기도 한데, 통산 최다 득점 13,231점, 통산 최다 리바운드 5,235개의 소유자이기도 하다.[13] 또한 한국프로농구 역사상 조니 맥도웰과 더불어 유이한 7시즌 연속 PER 20+의 주인공이다.[14]

상대 선수들의 집중 견제 탓에 부상을 달고 살며 말년에는 골밑보다 외곽을 많이 도는 모습을 보여줬지만, 전성기 시절에는 우월한 신체 조건을 이용한 포스트업에도 상당히 능했으며, 이를 역이용한 미들슛 또한 상당히 정확했다. 미들슛만이 아니라 3점슛도 마찬가지.[15] 포스트업도 막기 힘든데 수비를 달고 쏘는 미들슛, 3점슛도 쏙쏙 들어가니 상대 입장에서는 미칠 노릇. 반칙으로 끊어도 자유투도 정확하니 더 미칠 노릇.[16] 게다가 말년에 외곽을 많이 돌았다는 것도 젊었을 때와의 상대적인 의미이지 실제로는 골밑을 주로 지키며 궂은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17]

한국의 운동선수라는 조건에서도 의외로 공부도 상당히 잘 했고 IQ 140이 넘을 정도로 머리도 좋다고 한다. 최화정의 파워타임에서 IQ 정확하게 측정한 게 아니라 잘 모르겠지만 공부는 잘 했다고 전해진다.

서장훈의 역대 스탯 국내선수로서는 드물게도 시즌 평균기록 더블더블을 네 차례나 기록한 바 있다. 또한 평균 20점 10리바운드 이상을 기록한 유일한 선수이다. 서장훈 외에 시즌 더블더블을 기록한 유일한 선수는 하승진으로 한 차례 기록한 바 있다.[18]

은퇴 뒤 무한도전 등 각종 방송에 나오기 시작하다 결국 미스틱엔터테인먼트와 전속계약을 체결하고 생색 많은 방송인으로 제 2의 인생을 살기 시작했다.

2 기록

항목참조

KBL 파이널 우승 2회 (청주 SK 나이츠 1999-00시즌, 서울 삼성 썬더스 2005-06시즌) [19]
정규시즌 MVP 2회 (청주 SK 나이츠 1999-00시즌, 서울 삼성 썬더스 2005-06시즌[20])
파이널 MVP 1회 (청주 SK 나이츠 1999-00시즌) [21]

현재는 농구 선수 기록을 모두 잃고 그냥 건물주가 되었다.

3 선수 생활

3.1 농구에 입문한 야구소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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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OB 베어스박철순 선수를 좋아해서[22] 서울 학동초등학교 4학년 때 야구에 먼저 입문했다.[23][24] 초등학교 졸업 이후 선린중학교로 진학해 야구부 활동을 했지만, 중학교 1학년 도중 초등학교 친구들 대부분이 있던 휘문중학교 근처로 다시 이사 갈 일이 생겼고 당시 학교군 제도상 야구부 소속으로는 전학이 불가능해 농구부로 바꿨다고 한다.[25] [26]게다가 마침 180cm를 넘는 키는 농구부에서도 주목할만 했고, 휘문중학교에 농구특기생으로 전학한 뒤 1년 동안은 기본기만 다지다가[27] 중3 때 15cm 폭풍성장하면서[28] 197cm의 거인 센터가 되어 마침내 포텐이 터지게 되었다. 중학교 때부터 같이 활동하던 단짝이자 1년 후배인 현주엽과 함께 휘문고를 고교 정상급의 팀으로 이끌며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나란히 93학번과 94학번 최대어.

3.2 충격과 공포의 연세대 시절

그러다 1993년 연세대학교에 입학하고 93-94 시즌 농구대잔치에 등장, 1학년 주제에 기존 대학 팀들의 인사이더뿐만이 아니라 기존 실업팀의 국가대표급 센터들까지 떡실신시키며 농구팬들에게 충격과 공포를 선사한다. 당시 서장훈만큼의 높이를 가진 농구 선수는 노쇠한 기아의 한기범과 기량이 두드러지지 못한 현대의 정경호 둘뿐이었고, 키는 비슷하다 해도 서장훈만한 힘에 서장훈만한 민첩함에 서장훈만한 공격 기술을 가진 선수는 그때까지의 한국 농구에는 없었다. 이 당시 국내 농구인들의 희망사항이 "한기범의 키에 김유택의 기량을 가진 선수가 있으면 좋겠다."였고, 서장훈은 이 조건을 충족시킨 한국 농구 역사상 두명 뿐인 선수중 하나다.[29] 다른 하나는 김주성. 서장훈 본인은 후보선수라 전술 훈련에도 잘 끼지 못했었던 중학교 시절에 슈팅 연습을 혼자 열심히 했던 것이 센터치고도 슈팅 능력이 탁월해지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고 평했지만, 사실 서장훈은 대학이나 프로농구 활동 당시 또래 선수들 중에서도 매우 성실한 선수에 속하는 편이었기 때문에 체격이 커지고 주전선수가 되고나서도 슈팅 연습을 항상 따로 열심히 했었다고 알려져 있는데 그것에 의한 영향이 더 컸을 것으로 여겨진다.

당시 연세대 농구단이 실력도 뛰어났지만 인기 자체가 연예인급으로 많아서, 농구팬들에게 어마어마한 인기와 지지를 받던 시절이었는데 최희암 감독은 선수들이 훈련 중 해이한 모습을 보일때 선수들을 모아 놓고 "너희들이 대단한 줄 아느냐. 너희들이 막말로 연필 하나라도 만들어서 팔아봤느냐. 그냥 농구만 하는 니들이 무슨 생산성이 있는 일을 한다고 거만해지느냐. 모든 게 니들 덕이 아니라 너희를 좋아해주는 사람들 덕이니 항상 사랑을 주는 팬들에게 감사해야 하고 그를 위해 성실히 노력하라"고 하며 무섭게 다그쳤고, 그것이 서장훈의 농구에 대한 생각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참고로 그렇게 불벼락을 떨어뜨린 최희암 본인은 연세대학교 농구팀의 인기에 힘입어 남성팬티 TRY CF를 찍기도 했다.

서장훈은 당시 농구대잔치 리그에서 연세대가 한기범김유택이 있던 기아자동차를 이기는데 일등 공신 역할을 했고, 플레이오프에서 재차 기아자동차와 대결하는 일은 없었지만[30], 결승에서 상무의 센터 정재근을 제압, 결승에서 1패를 당하긴 했지만 이상민, 우지원, 문경은, 김훈 등과 함께 연세대를 농구대잔치 최초의 대학팀 우승으로 이끈다. 이게 얼마나 대단하냐면, 허재, 강동희, 김유택, 한기범이 모두 뛰고 있던 중앙대조차도 준우승만 하면서 이루지 못한 업적이다.[31]

93-94 농구대잔치 결승전 영상. 젊은 시절 몸놀림이 훨씬 가벼운 서장훈을 볼 수 있다.

1994년에도 서장훈의 공포는 이어졌다. 서장훈은 21점 20리바운드 10블록슛으로 트리플 더블을 달성하기기까지 하며 공포의 존재로 군림했다. 고려대가 전희철, 김병철을 비롯한 기존의 강력한 선수진에 현주엽까지 입학시키는 데 성공하며 연세대를 노리는 상황에서 두 대학이 마주한 농구대잔치, 경기 도중 이상민이 부상으로 실려나가면서 고려대는 동점을 만들었고 연장전만 가면 유리하다고 할 수 있는 상태가 되었다. 연세대에겐 한번의 슛 찬스밖에 없는 상태에서 서장훈은 눈앞에 수비수를 달고서도 중거리슛 한방을 버저비터로 꽂아넣으며 팀을 승리로 이끌고 고려대를 충격에 빠트렸다.[32] 서장훈의 운동 능력이 절정이던 시기였는데, 본인 스스로도 이 당시의 자신은 막을 방법이 없었다고 할 정도.


위의 영상이 바로 당시 경기의 영상이다. 참고로 이 영상은 KBL 07-08 시즌에 추억의 영상으로 KBS에서 편집하여 방송한 것인데, 편집영상이 끝나고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진행자는 다름 아닌 오정연 아나운서... 이미 두 사람의 인연은 여기서부터 예고되었던 것인가...흠좀무

이상민이 부상으로 잃은 상태에서 1번 시드 연세대는 8번 시드 삼성전자와 플레이오프 1라운드를 맞게 된다. 당시 삼성전자는 2번 시드 고려대와 만나기보단 이상민이 없는 연세대와 붙는게 유리하다고 판단해 정규시즌 막판 석연치않은 고의성 패배까지 불사하며 8번 시드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이상민이 졸업한 연세대가 불리할 것이라는 예상이 많았으나 정작 1차전은 건재한 서장훈의 활약에 대학시절 내내 동기 이상민에게 가려 출전 기회도 제대로 잡지 못했던 백업 포인트가드 김성헌[33] 이 선발출장해 그야말로 이상민이 빙의한 듯한 엄청난 활약으로 연세대가 손쉽게 승리를 가져갔다. 삼성은 2차전을 가까스로 잡고 다음 라운드 진출 여부를 최종 3차전으로 끌고갔다.

그런데 여기서 한국 농구에 길이 길이 흑역사로 회자될 일이 벌어진다. 서장훈만 철저히 틀어막으면 이긴다고 본 삼성은 서장훈의 학교 선배인 문경은까지 가세해서 서장훈에게 그냥 폭력에 가까운 파울을 남발했고, 그 와중에도 서장훈의 활약은 계속되었는데, 삼성의 센터 박상관은 거친 파울 속에도 서장훈이 득점을 하고 리바운드를 따내자 아예 서장훈의 뒷통수를 그대로 두들겨 패 버리고 만다. 연수 부분에 충격을 받은 서장훈은 그대로 코트에서 혼수상태로 쓰러지면서 병원으로 실려간 후 요단강 익스프레스를 탈 뻔하다 살아나고, 삼성은 서장훈을 해치운 덕에 결승에 올라간다.[34]

이 때 서장훈이 당한 부상은 상당히 심각했는데, 목 다친 부분이 약간만 더 빗나갔어도 전신마비가 올 수도 있었다고 한다. 결국 서장훈은 한국 농구에 환멸을 느껴 1995년 미국의 산호세주립대학으로 유학을 떠난다.[35] 그러나 애초에 편입생은 1년간 뛸 수 없다는 당시 NCAA의 트랜스퍼 제한도 걸린데다 산호세주립대학이 농구로 알아주는 대학도 아닌지라 미국에서 별로 보여준 건 없이 1년만에 귀국한다.[36] 더군다나 서장훈의 기량과 재능도 상당히 좋긴하지만 미국에는 서장훈 이상의 키와 스피드, 파워를 지닌 선수들이 많아서 미국 농구계에서 대성할 거라고 확신하긴 힘들었다. 조재중 [37]

서장훈은 국내 복귀 후 황성인, 김택훈, 조상현, 조동현과 함께 다시금 연세대를 최강팀으로 이끈다. 그리고 다시 농구대잔치. 서장훈이 이끄는 연세대는 당시 센터치고는 단신이지만 주목받는 활약을 보여준 윤영필과 장신 슈터 김성철, 그리고 강혁을 앞세운 팀플레이를 보여준 경희대와 플레이오프에서 맞섰다. 서장훈은 이미 경희대의 골밑을 유린한 적이 있지만 경희대는 당시 상승세를 타고 있었기에 새롭게 떠오르는 센터 윤영필과 서장훈의 맞대결이 기대되었는데, 김택훈은 에이스 킬러짓으로 윤영필을 코트에서 응급실로 직행시켜버렸고 서장훈은 맞설 상대 없는 경희대 골밑을 손쉽게 접수한다. 경희대는 1차전을 그렇게 잃은 후 2차전에서 인사이드의 절대적인 열세 속에서도 강혁이 팀을 이끌며 연세대와 대등하게 맞섰으나, 김택훈이 강혁마저 병원으로 보내버리자 경희대는 더 이상 버틸 힘을 잃고 만다.

그리고 결승. 이상민, 조성원, 문경은이 있는 상무는 현주엽이 있던 고려대를 격파하고 올라오면서 이번에야 말로 우승하겠다고 벼르고 있었고, 준결승에서 연세대의 테러를 본 농구팬들은 상무에게 일방적인 응원을 보냈다. 하지만 상무에는 서장훈을 막을 선수가 없었다. 서장훈에 의해 제공권을 장악당하며 상무는 패하고, 서장훈은 다시 한번 연세대를 농구대잔치 우승으로 이끌었다.

그후 프로화된 농구팀에 입단하는 과정에서 갈등을 겪었다. 당시 진로그룹은 신생 농구팀을 창단하는 과정에서 연대 농구선수들에 대한 우선 지명권을 가지고 있었고, 당연히 서장훈을 자기들의 신인으로 지명해 놓았는데 이에 대해 서장훈은 선수의 권리를 침해하는 거라며 반발했기 때문.

이와 관련해 서장훈의 농구 유학 자체가 이후 프로화되는 실업팀에 입단하면서 대우가 나빠질 것에 대한 불만 때문이었다는 설이 있는가 하면 이 당시 진로 농구팀 단장이었던 사람이 농구대잔치에서 삼성 감독으로서 서장훈을 골로 보낼 뻔한 짓을 지시한 김인건이었기에 서장훈이 진로 입단을 꺼렸다는 말도 있다.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서장훈이 졸업 후 현대전자로 가기로 밀약이 되어 있었다는 설. 그 때문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현대는 KBL 출범 과정에서 상당히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고 프로 전환 후에도 팀내 베테랑 선수인 이영주를 내치는 등 갈지자 행보를 보이기도 했다.

그런데 진로가 창단해 보기도 전에 부도가 나고 농구 팀은 SK그룹에 인수, 그리고 SK 측이 김인건을 단장에서 부단장으로 찍어내려버리고 최고대우를 약속하자, 서장훈은 SK에 입단한다.

3.3 프로 (1998~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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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인으로 SK 나이츠에 입단한 서장훈은 함께 입단한 현주엽과 함께 소속팀을 우승시킬 것이라고 사람들은 예상했으나, 서장훈과 현주엽은 각자 스탯만 잘 쌓고 시너지 제로의 모습을 보이면서 '시즌 전엔 우승 못하면 바보, 시즌 끝나면 플레이오프 진출 실패'라는 SK나이츠의 전통 첫 장을 열기만 했다.

하지만 다음 시즌, SK가 시즌 도중 활동범위가 겹치는 현주엽을 슈터 조상현과 트레이드하면서 황성인, 로데릭 하니발, 재키 존스와 함께 팀을 99-00 시즌 우승으로 이끈다. 시즌 MVP는 서장훈의 몫. 사실 데뷔 시즌에도 국내 선수로서는 최초이자 지금까지도 유일한 리바운드 1위를 차지했지만, 팀 성적을 이유로 신인상을 못 받았는데, 그 한을 제대로 풀었다.[38] 외국 선수와 대적해도 결코 밀리지 않는 존재감을 과시할 뿐더러 되려 외국선수를 압도한 경우도 많았다. 그가 MVP를 차지한 00시즌을 보면 외국인선수상을 탄 멕도웰과 그의 성적이 거의 비슷하다. 그리고 2001-02 시즌에는 외국인 1명이 식물 상태였던 만신창이 SK 나이츠를 이끌고 당시 최고 전력을 자랑한 대구 오리온스와 맞서서 7차전 접전을 이끌면서 역시 서장훈이라는 찬사를 얻는다.

그리고, 01-02시즌 종료후 놀랍게도 FA자격으로 서울 삼성으로 이적한다. 팬들이 대단히 놀랄수 밖에 없는게 농구대잔치시절 서장훈에 대한 린치에 가까운 거친플레이를 가한 삼성(그때문에 당시 서장훈의 부친이 김인건 삼성감독에게 드잡이질을 했을정도.)이었고 이적 당시 서장훈을 목장훈으로 만든 당사자들인 이창수 & 박상관 두 선배(강을준은 은퇴)가 멀쩡히 팀에 있었기 때문에 삼성행의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본 사람들이 많았고 모비스의 최희암감독이 강력히 영입을 희망하기도 해서 모비스로 갈 것으로 예상한 사람들이 많았지만...삼성행이라는 최대의 반전이 일어난 것이다.

물론 등가교환이라고 당시 삼성이 샐러리캡을 맞추기 위해서 우지원을 내쳐버렸다.[39] 서장훈으로 인해 쫒겨난 선배가 이상민 뿐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리고 서장훈을 목장훈으로 만든 주범들이었던 이창수&박상관은 동시에 방출됐다.[40][41] 스포츠계에서 감독이나 스타선수 영입이 있으면 껄끄러운 관계인 선수나 코치들을 방출시키는게 관행이라 비판할일만은 아니지만 서장훈으로 인해 주전급인 우지원과 나름 전력급 백업센터이창수 & 박상관이 동시에 팀을 떠났다. 자신의 이적으로 대학선배 우지원이 팀을 떠나게돼서 마음이 안좋았다고 하는데 몇 년 지나지 않아 자신의 이적으로 또다른 대학선배인 이상민을 떠나게 만들어서 너무나도 안타까웠다고 한다.

어쨌든 서장훈이 합세한 서울 삼성은 05-06 시즌 정규리그 우승을 거머쥐었다. 그러나 이 05-06 시즌 우승 과정에서 정규 시즌에서는 서장훈이 활약하며 생애 두 번째 MVP를 수상했지만, 챔피언결정전에서는 안준호 감독이 의도적으로 강혁과 네이트 존슨의 픽 & 롤을 구사하면서 서장훈의 비중은 상대적으로 적었다. 연장까지 간 2차전에서는 강혁과 함께 팀을 캐리했고, 접전이었던 3차전은 결승점이 된 자유투 2개를 성공시켰으니 비중이 아예 없다고 할 수 없지만 마지막 4차전에서는 경기 초반만 뛰고 내내 벤치에 앉아 있었다. 이 때문인지는 몰라도 삼성과 갈등이 생긴[42] 서장훈은 다시 한 번 FA로 KCC 이지스로 이적했는데, 이 때 보상선수로 이상민이 삼성으로 가게 된다.[43]

사실 우승에 기여하지 못했다는 일각의 비아냥과는 다르게 챔피언결정전 한정으로 서장훈이 출전시간이 줄었지만, 정규시즌과 플레이오프에선 서장훈이 좋은 활약을했다. 특히 플레이오프에서 오리온스의 약한골밑을 제대로 유린하면서 팀이 체력소모없이 쉽게 챔피언결정전에 진출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서장훈은 KCC에서도 나름 활약했으나[44] 하승진의 등장 이후 출전시간이 줄어들자 트레이드를 요구, 강병현이 포함된 3:1 트레이드가 성사, 인천 전자랜드로 이적했다. 전자랜드에서는 당시 7~10위권을 헤매며 답이 없어 보이던 전자랜드가 2월 전승을 포함해 13경기 12승 1패라는 대반전으로 팀을 재건, 은사 최희암 감독과 만나며 6강 진출을 이루었고, 전자랜드가 답이 없던 09-10에도 서장훈은 건재했다. 유도훈이 감독이 된 10~11시즌 문태종-허버트 힐과 같이 서태힐 트리오를 결성, 전자랜드를 팀 성적 역대 커리어하이인 정규리그 준우승으로 이끌었다.[45]

데뷔 시즌부터 10~11시즌까지 통산기록 12,500점을 돌파[46]했고 리바운드 4,986개로 독보적 1위이다. 센터중 유일하게 어시스트 1000개를 넘어섰다. 전술한 폭행성 파울로 인한 부상을 제외하면 철저한 몸관리를 통해 잔부상도 별로 없이 꾸준히 시즌을 소화해온 프로의식도 칭찬할만한 부분. 그러나 실상은 만신창이 수준의 몸상태를 참고 경기뛴것이다 족저근막염에서 만성요통으로 이어진 부상이 그의 운동능력을 많이 갂아먹었다 커리어 중반이후부터 뛰지못하고 잘 넘어지는 이유가 허리때문이다. 이게 무한도전까지 이어져서더구나 현역 주전 선수이기에 프로농구계의 살아있는 전설이라 불러도 무리가 없다. 특히 득점 통산기록이 대단한 것은 2위를 다투는 문경은추승균보다 2~3,000점 이상 차이가 나는 데다가 서장훈이 문경은보다 3살이나 나이가 어리다는 점이다.

2010-11 시즌후 FA자격을 얻었으나 연봉 2억5천에 인센티브 1억 총 3억5천만원에 1년계약으로 팀 잔류를 선언했다. 그러나 이후 LG 세이커스의 이현민+강대협과 1:2 사인 엔 트레이드 형식으로 LG 세이커스로 이적. 유도훈 감독은 2010-11 시즌을 치르면서 종종 팀에 남아달라 요청했었고 서장훈도 별다른 잡음없이 무난하게 팀에 남을줄 알았는데, 이런 트레이드가 터짐으로서(게다가 기사에서 서장훈은 사전에 트레이드 진행을 몰랐다는 이야기도 있어서) 전자랜드 팬들은 프런트를 폭풍 성토. 더군다나 서장훈을 내주고 얻어온 대가가 많이 부족해 보인다는것도(트레이드의 명분을 리빌딩으로 삼았는데 강대협은 30대 중반, 이현민은 30대에 들어선 나이도 있고, 상무소속이라 로스터를 비워둔다고 해도 2011-2012시즌 5라운드 이후에나 합류 가능. 게다가 강대협, 이현민 모두 요근래 하향세를 보였으니...) 트레이드에 대한 비판의 한 원인으로 보인다. 어쨌든 원치않은 저니맨(...)이 돼버린 서장훈과 이번 트레이드를 주도한 전자랜드의 2011-2012 시즌 성적은 어떨런지...[47]

결과적으로 2011-12 시즌은 서장훈 농구 인생 최대의 흑역사가 되었다. 노쇠하고 발이 느려진 상태에서 문태영과 롤도 겹치고, 애런 헤인즈 위주로 공격을 풀어간 LG에서는 그의 자리가 마땅치 않았다. 수비 면에서는 송창무가 어느 정도 각성하면서 장신 선수 수비에 굳이 서장훈이 필요 없어진 상황. 여기에 부상까지 겹치면서 완전히 시즌을 망쳤다. 그를 트레이드시킨 전자랜드는 6강 PO에는 진출했지만,[48] LG는 6강 PO 진출에 실패하면서 묘한 대비가 되었다. 이 때문인지 은퇴냐, 선수 생활 지속이냐를 두고 진지한 고민중이라고 한다.그 당시 서장훈을 LG팬들은 당연히 좋게 볼리 없었다.게다가 팀은 6강에도 못갔으니....~

결국 전창진 감독의 부름을 받고 연봉 1억원에 KT와 계약을 맺고 선수 생활봉사활동을 이어가게 되었다. [49] 기자회견을 열어 KT에서 뛰는 12-13시즌 이후 은퇴와 연봉 전액과 사비 1억을 더해 사회기부를 발표했다. 서장훈 본인은 은퇴식을 고사했지만 KT는 전설에 대한 예우차원에서 은퇴식을 준비, 2013년 3월 19일 KCC와의 홈 경기에서 은퇴식 및 은퇴경기를 가졌으며, 33득점이라는 놀라운 기록, 그리고 이날 경기의 마지막 득점을 남기며 25년에 걸친 농구 인생을 마감했다.

3.4 국가대표

94년 히로시마 아시안게임에 대학 신입생 신분으로 발탁된 것을 시작으로 2006년 도하 아시안게임까지 12년간 성인 대표팀에 발탁되었다. 이 시기는 중국이 아시아 농구의 1인자였고, 서장훈과 동시대에 왕즈즈(214cm)[50], 야오밍(226cm)이 중국 대표팀에 뛰었기에 아무리 서장훈이여도 높이의 열세는 어쩔 수 없었다. 그래서 아시안게임 두차례 은메달에 그쳤으나 국내에서 열린 2002년에 기적적으로 중국을 꺾었다. 야오밍을 막다 일찌감치 파울 3개를 범했으나, 끝까지 야오밍을 육탄방어해냈고 연장에서 중요한 첫득점을 3점슛으로 올리는등 활약하며 15득점 6리바운드로 승리에 공헌했다. 경기 직후 인터뷰에서 서장훈은 '왜 중국을 넘지 못하는가' 라는 비판을 떠올리며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이후 방송에서 정말 이기고싶었고 농구하면서 처음으로 야비한 짓까지해가며 뛰었고, 농구 인생에있어 가장 열심히 뛰었던 경기라고 술회했다. 여담으로, 야오밍이 출전한 중국팀이 아시아 국가에게 패한 유일한 경기가 2002년 아시안 게임 결승이다. 2006년 도하 아시안게임 무대는 안일한 대회 준비와 선수선발으로 형편 없는 경기력을 보였으며, 결국 5위에 그치는 수모를 겪는다. 서장훈도 부상이 있는 상태로 참가하여 최부영감독에게 '센터 본능'을 잃어버렸다며 혹평을 듣기도하며 갈등을 겪었고 결국 이 대회 이후 서장훈은 대표팀을 은퇴하고 이후의 복귀 요청도 고사한다. 한국 농구 사상 최고 센터의 국가대표 은퇴로는 씁쓸한 모양의 은퇴. 아시안 게임 금메달1, 은메달 2개를 따냈다. 금메달 2개부터 연금이라 연금을 못받는다고한다. 대신 월세 받는다

4 평가

4.1 팬들의 평가

기록만 봐서는 프로농구의 톱이었고 화려한 커리어로 농구팬들의 추앙만 받아왔을 것 같지만 현실은 비난과 비판을 독식하였던 불운한 선수였다.LG팬들은 비난한 기억만 많을 것이다

코트에서 잦은 항의를 하는 모습이 팬들이 서장훈을 싫어하게 된 가장 큰 이유이다.
2011년 11월 20일 서울 SK 나이츠와의 원정경기에서 심판에게 거칠게 항의해서 테크니컬 파울을 연속 2개 받고 바로 퇴장당해 팀 벤치 분위기를 다운시킨 것이 단적인 사례이다. 심판 항의가 잦고 인상을 많이 쓴 것 자체는 사실인데 그것은 김주성, 하승진 외에는 서장훈을 정상적으로 수비할 수 있는 국내선수가 거의 없던 상황에서 그의 마크맨들이 늘 파울성의 거친 수비를 했고 심판들이 다른 선수들의 마크맨에 비해 너그러운 판정을 내렸던 것에 대한 불만을 표현하는 과정이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 이건 사실인게 한 심판도 서장훈에게 일일이 파울을 다 불어주면 시합이 안되기 때문에 일부러 안부는 경우가 있었다고 한다.[51] 서장훈만 그랬다면 비판을 독식해도 할 말이 없겠지만[52] 서장훈의 현역 시절 서장훈을 그렇게도 괴롭혔던 김주성 역시 짜증과 항의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아니 오히려 해가 거듭될수록 점점 늘어나고 있다. 물론 코트에서 욕설을 하고 잦은 항의를 하는 것이 좋은 모습은 아니지만, 수비를 빙자한 거친 폭력에 수도 없이 노출되었고 커리어 내내 그를 괴롭힌 목부상을 두 번이나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견제는 줄어들 줄 모르니 서장훈의 행동을 마냥 비판만 하기는 어렵다.


참고로 이른바 '목장훈'의 상징인 목 보호대를 은퇴할 때까지 차게 된 원인은 2004-05시즌 김주성에게 당한 일명 주성타 사건 때문이다. 후술하겠지만 서장훈이 골밑 싸움을 잘 안한다는 이유로 [53] 서장훈의 센터로서의 기량을 깎아내리고 김주성을 추켜세우는 사람들은 이 동영상만 봐도 입을 다물어야 한다.[54][55]

자신을 욕한 관중에 대해 욕설을 했다는 루머도 있다. 그러나 중계화면에 잡힌 바로는 그 관중은 '이응사'[56]로 밝혀졌다. '이응사'가 서장훈을 욕하게 된 계기는 FA로 KCC로 이적하였을 때 삼성이 보상선수로 현대-KCC의 프랜차이즈 스타인 이상민을 지목하여 그가 팀을 떠나게 되었기 때문. 그러나 서장훈이 KCC로 이적한 이유부터가 대학 선배 이상민과 다시 같이 뛰고 싶어서였는데 소속팀에서 이상민을 보호하지 않고 보상선수로 떠나보냈음에도 욕은 그가 다 먹었다. 사실 병크가 아니라 당연한 선택이었다. KCC는 서장훈-이상민의 콤비플레이를 맞춰주기보다는 노장인 이상민 대신 다른 선수 위주로 팀을 개편하고 싶어했고, 서장훈 역시 삼성보다는 우승권에 근접한[57] KCC를 염두에 두고 있었을 것이다. 이상민과 같이 뛰고 싶다는 것은 단순한 립서비스였을 수도 있다. 요컨대 서장훈-이상민의 특별한 관계를 떼어놓고 보면 상식선에서는 전혀 문제될 것이 없는 선수 이동이었고, FA 계약이었다. 이응사를 비롯한 일부 지나친 팬들이 말도 안되는 비난을 쏟아낸 판에 서장훈이 피해를 본 상황이었다. 상식적으로 서장훈이 자신이 떠날 팀에 어떤 보상선수가 올지 생각하면서 팀을 선택해야 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저런 특수한 상황을 제외하고도, 평소 팬서비스가 그리 좋지는 못 했다는 증언이 있다.

전혀 그럴 것 같지 않지만 경기력 면에서도 비판을 받았는데, 골밑경합, 리바운드 등 센터의 본분을 다하지 않고, 프로데뷔 당시만 해도 골밑에서 경쟁력이 있었지만 외국인 센터들의 수준이 높아지자 몸싸움을 기피하고 외곽으로 나와 중장거리 슛에만 몰두하며 팀 성적보다는 스탯관리에만 몰두한다, 센터로서 자격미달이다라는 내용의 비판이었다. 하지만 이는 시대의 흐름을 모르는 농구 초보적인 비판에 불과하다. 현대 농구는 빅맨들에게도 정확한 중거리슛을 요구하고 있는데, [58] 이는 단순히 공격 옵션의 추가 외에도 상대 수비를 벌려놓는 전술적 효과가 크기 때문이다. 서장훈은 대학교 때부터 꾸준히 40%대의 3점슛 성공률을 기록할 정도로 중장거리 슛의 정확도가 높은 편이었기 때문에, 자신이 가지고 있는 공격 옵션을 최대한 활용했을 뿐이다.[59] 게다가 프로 이전부터 몇몇 상대팀의 수비를 빙자한 폭력 때문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고 골밀에서 몸싸움을 할 체력이 받쳐주지 못하는 노장 선수가 되면서 생긴 자연스러운 변화라고 볼 수도 있다.[60]

그리고 리바운드 역시 수치상으로 매우 뛰어나며 [61] 본인은 자신의 득점의 6,70%는 항상 골밑공격으로 이루어진다고 항변해 왔다.[62] [63]

느린 백코트와 불성실한 수비 또한 비판받았다. 다만 백코트의 경우는 오히려 기존의 센터들에 비해서 백코트가 느린 선수가 아니었다. 단지 나이먹은 이후 키에 비해 비정상적으로 빠른 김주성이 등장해서 김주성과 비교되는 것이기 때문에 서장훈이 억울한 면이 없지 않다.[64] 하지만 센터 포지션임에도 몸싸움 기피에 따른 불성실한 수비라며 지적받는 경우도있는데, 이 부분은 오해의 소지가 높은것이 서장훈이 센터포지션에서 상대 수비할때 몸싸움 기피한적이 없다. 서장훈이 당대의 다른 센터에 비해서 중거리슛이나 외곽슛이 많다보니 몸싸움 피한다는 이미지가 붙었을뿐이다. [65] 물론 그 이후 노쇠화가 된 이후에 느려지면서 지역방어등 여러 수비테크닉면에서 팀의 수비밸런스에 손해를 끼친건 사실인데, 이건 노쇠화 이후 어쩔수없는 현상이다. 이것 역시 상대적으로 수비에 강점이 있었던 김주성과 비교되는 면인데, 사실 김주성이 센터지만 유난히 스피드 있어 지역방어등 수비조직력에 도움되는 강력한 수비수였던거지 전성기 서장훈이 수비가 약했던게 아니다.
커리어 후반에서야 실제로 이런 점이 문제가 됐지만, 농구선수가 그 정도 나이면 누구든지 수비에서 문제점이 생기기 마련이다.[66]

덩크슛이 적었다는 점도 꽤나 욕을 먹었었다. 최근에서야 김선형이나 김종규등 비교적 토종 선수들의 덩크가 많이 나오는 편이지만 서장훈의 선수시절엔 국내선수의 덩크가 희귀한 볼거리였고 그나마 김주성이 몇차례 보여주는걸 제외하면 시즌 내내 총 횟수가 한손에 꼽는 수준이였다. 볼거리에 목마른 팬들은 국내선수중 최장신이던 서장훈이 덩크를 좀 시도해주길 바랬지만 원맨 속공 같은 노마크 상황에서도 레이업을 올려놓아 아쉬움을 샀던 것. 본인은 자신의 덩크가 외국인 선수들의 덩크에 비해 멋이 없어서 잘 시도하지않는다고 인터뷰했다.

물론 이는 프로시즌 이후의 농구팬들이 주로 가하던 비판이었으며, 농구대잔치 시절부터 그를 봐 온 올드팬들은 대부분 서장훈에 대해 불쌍하다는 반응을 보인다. 가령 위에서 언급한 삼성전 때의 폭력 수비 사건. 그리고 프로에서 '주성타'를 비롯한 수많은 폭력 수비 등등. 그만큼 국가대표나 소속팀에서나 궂은 일을 많이하고 험한 꼴 많이 받았으나 돌아오는 건 욕밖에 없으니... 사실 서장훈이 받는 비판의 대부분은 상대 선수들의 상식 이상의 견제와 목 부상에 기인한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불쌍한 거 맞다.
하지만 위와 같은 비판들이 시간이 흐를수록 논파되거나 정상 참작되며 긍정적으로 재조명받고 있다. 어쨌든 한국 농구계의 전설적인 선수이니... 특히 베테랑이 되면서 인터뷰도 자주 있었고 신문 기사에서도 자주 본인의 목소리를 냈는데, 그 동안 농구팬들에게 험상궂고 짜증만 많은 이미지로 알려져 있던 서장훈은 인터뷰를 통하여 똑똑하고 말도 잘하는 이미지로 돌아서게 되며 이미지 회복에 큰 도움이 되었다. 그 후에도 늘 개념찬 인터뷰를 보여준다.

다만, 여러 팀을 돌아다닌 통에 어느 팀의 프랜차이즈 스타로 기억되기는 어려울 듯 하다. 어떤 의미로 보자면 농구계의 저니맨. 한국을 대표하는 센터로 농구사에 길이 남겠지만, 특정 팀의 영웅은 되지 못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다. 단 굳이 따지자면 SK[67] 혹은 서울 삼성의 레전드로 볼 수 있겠다.

이는 서장훈의 2번의 MVP와 우승을 차지한 팀이 각각 SK와 삼성이고 그가 뛴 기간동안 최전성기를 누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등번호인 11번이 영구결번 된다면 이 두 팀에서 받을 가능성이 높다. [68] [69] [70] 하지만 본인 스스로가 영구결번에 부정적이라 영구결번이 될 확률은 낮은 편이다.

그 외에 01년과 03년에 음주운전 전과가 있어서 까이는 것도 있다. 01년 9월에 음주운전으로 인해서 면허가 취소되었는데 02년 7월 2002 월드컵 기념 대사면으로 면허가 회복되었다. 그런데 이후 불과 8개월만에 6강 플레이오프 중[71] 음주 운전이 적발되어 다시 면허가 정지되었다. 그리고 이 여파로 인해서 플레이오프에서 삼성이 탈락했고 까임의 단초를 제공하였다.

4.2 농구인들의 평가

(한국농구 역대 Best 5를 뽑아달라는 질문에)“제일 어려운 질문이다(웃음). 애매하긴 한데, 일단 서장훈은 무조건 들어가야 하고, 이충희, 허재도 이름을 올려야 한다. 김주성도 2002년 때의 전성기라면 뽑힐 수 있다"- 울산 모비스 피버스 감독 유재학 신동아 2015년 1월호
"내가 높이 평가를 하는데. 그 당시에 선수 생활이라는 그. 그게 있다고.. 한기범이랑 서장훈이랑 10년 차이가 나요. 농구 역사로 보면 10년 주기로 한번씩 나온다는 거지. 그게 이제 서장훈이라고. 한기범 밑으로 나온 게 서장훈인데… 한기범은 그때 몸이 안 좋아서 체력적으로 많이 딸릴 때고. 그러니까 이제 서장훈이가 그때 완전.. 서장훈이 하나 때문에 우승했다고 보면 되지." - 허재[72][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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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들의 평가 보다도 농구인들 사이에서 오히려 더 높은 평가를 받는다. 궂은 일을 잘하는 블루워커 스타일을 이상하리만큼 고평가 하는 한국농구의특성에 맞지 않게 블루워커 보다 득점을 하고 팀의 중심이 되고 싶기에 반감을 사기도 했지만 농구대잔치 시절부터 공포의 대상으로 군림하던 만큼 현역 농구인들로서는 서장훈의 실력을 그 누구보다도 잘 실감했다.

2016년 스포츠동아에서 현역 감독, 코치, 선수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허재와 함께 '남자프로농구 20주년 기념 역대 최고선수' 공동 1위에 선정됐다.‘국보 센터’ 서장훈 ‘대통령’ 허재…최고 선수 공동 1위

4.3 은퇴 이후의 재평가

선수 생활을 하던 시기 궂은 일을 안하고, 득점과 리바운드등 드러나는 성적에만 신경쓴다는 비판도 있으나 당시 시대적 상황을 보면 좀 억울한 면이있다. 사실 한국프로농구가 출범한 이후 외국인 선수 도입 이후 한국 농구의 방향이 바뀌어버렸다. 황인에 비해서 흑인의 기본 신체적 능력이 아주 뛰어나기에 신체적 능력이 중요한 농구에서 흑인과 황인과의 격차가 크며, 프로가 출범 이후 외국인 용병이 모든 팀의 주인공이 되었다. 득점, 리바운드등 농구의 핵심적 스탯을 용병이 장악해버렸다.

첫 우승팀인 부산 기아 엔터프라이즈의 경우 국가대표 센터 김유택이 순식간에 식스 맨이 되고, 허재가 팀에서 존재감이 없어져서 결국 밀려나는 상황이었다. 실제로 당시의 기아의 상황만 봐도 두 명의 용병인 클리프 리드와 저스틴 피닉스 이 두 명이 득점 리바운드를 장악해버리니, 그 동안 득점원 역할을 해줄 국내 선수 해결사는 필요가 없어지고, 그저 용병에게 패스나 잘 해주는 포인트 가드용병이 빼준 공을 받아서 외곽슛이나 던져주는 슈터... 수비가 되면 더 좋고... 정도, 그리고 용병이 쉴 때 백업을 해주는 식스 맨(조동기라든지... 앞서 말한 김유택이라든지...)이 필요할 뿐이었다. 하물며 다른 팀은 말할 것도 없었다.

결국 팀 플레이와 궂은 일을 잘하고 수비를 열심하는 선수 모아놓고 그 위에 뛰어난 용병 둘을 얹으면 우승하기 좋기에 당장의 우승을 위해선 감독은 그냥 용병 뒷받침을 잘 해주는 선수를 모을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연세대 선배인 우지원은 선수 후반기로 갈수록 수비 참여를 하고 캐치 앤 슈터로 변신에 성공해서 적응했고, 원래 고려대학교 센터 출신이자 서울 삼성 썬더스 시절 동료였던 이규섭도 우지원과 비슷하게 수비력을 갖춘 캐치 앤 슈터가 되었다. 라이벌이었던 현주엽포인트 포워드라는 이름 아래 용병에게 패스해주는 걸로 선수생활을 이어갔다. 그런 상황에서도 여전히 한국 선수가 보조가 아닌 중심이 되어서 경기를 끌어갈 수 있는 선수는 서장훈과 방성윤, 그리고 문경은의 프로 초기와 2000~01 시즌 MVP조성원밖에 없었다. 시간이 흐르며 국내 선수 중 살아남아서 각광받은 선수는 대부분 용병을 보조하는 궂은 일을 하는 선수들이었다.

서장훈은 인터뷰에서 이런 식으로 궂은 일을 하는 선수가 더 가치를 인정받는 KBL의 풍토가 아쉽다고 토로하고 있다. 그의 주장의 요지는 용병과 정면으로 대결해서 평균 20점씩 넣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선수들도 팀의 중심이 되지 못하여 궂은 일을 하는 스타일, 용병을 보조하는 쪽으로 방향을 바꾸었다는 것이고, 그런 이유로 한국농구에 에이스 역할을 할만한 선수가 사라지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서장훈은 궂은 일을 하는 선수는 아니었지만, 능력이 떨어져서 그렇게 될 바에야 은퇴를 하겠다고 이야기했던 선수이다.[74] 실제로 서장훈의 이야기가 틀린 말이 아닌게 시즌이 진행될수록 점차 국내 선수의 득점과 리바운드 등의 기여도가 낮아져서, 2015년 현 시점에서 팀 공격의 중심으로 활약하는 국내 선수는 귀화선수인 문태영 밖에 남지 않았다. 이런 식의 화려하고 개인 능력으로 득점하는 선수가 아닌 궂은 일을 하고 성실한 선수가 더 인정받는 KBL이 오히려 비정상이며 우물 안 개구리가 되었다는 이야기들도 나오는 상황이다.[75][76]

이 항목에서 많이 언급된 궂은 일은 쉽게 말해 외국인 선수가 에이스인 상황에서 보조를 한다는 이야기다. 쉽게 말해서 외국인보조라는 이야기다. 경기의 주인공이 용병이 된 상태에서 용병 보조, 수비 가담을 열심히 하고 용병이 빼준 공을 노 마크 3점 슛을 던질 수 있는 선수가 각광받는 시대란 이야기. 그 때문에 역대급 슈터로 불리던 문경은은 프로 초기에 팀의 중심이었지만, 차차 단순한 캐치 앤 슈터로 플레이 스타일을 바꾸어 이충희같은 압도적 커리어와 스타일을 갖지 못햇다. 이후 등장한 방성윤은 해결사 능력을 보여주었지만 잦은 부상으로 29세에 은퇴, 그 이후 조성민의 13~14시즌 각성 전까지 토종 슈터는 한동안 찾기 어려웠다. 또한 프로 초기에는 김승현같이 용병에게 볼 배급해주는 포인트 가드가 득세하다가 나중에는 궂은 일 잘하는 양동근과 같은 포인트가드가 득세하게 되었다. 그 결과, 국제 대회에 한국선수중에 해결사가 없는 상황이 되었다.받아 먹는 슈터가 아닌 자기가 찬스를 만들어 해결할 능력을 가진 슈터와 큰 선수를 상대해야 할 빅맨이 부족한 황당한 상황으로 한국 농구가 흘러가기도 했다. 서장훈 이후의 스타인 김주성김승현은 원래 실력도 출중하지만, 외국인 선수에게 잘 맞춰주는 스타일로 더 주가를 올린 것이다.

그 결과 국제대회에서 접전상황에 점수 내고 어려운 상황을 해결해줄 스타 선수가 없어졌다. 만일 혼혈 선수인 문태종이 한국에 귀화해주지 않았다면 2014년 아시안게임 금메달은 힘들었을 것이다.

물론 서장훈도 나이를 먹으면서 외곽으로 밀려나는 경향은 있었으나, 자신이 중심이 되어서 득점하고 리바운드를 잡으며 경기를 이끌어가는 스타일은 변하지 않았다. 그럴만한 실력이 있었으니 가능했지만, 반대로 욕은 많이 먹었는데, 그 이유는 왜 블루워커가 되지 못하냐?였다. 그럼 마이클 조던이나 샤킬 오닐이 블루워커라 대단했던 건가 ??
어쨌든 서장훈은 마지막 두 시즌을 제외하고는 소속팀을 포스트시즌에 꾸준히 올린 선수였으며, 수비 능력도 나이가 많아 밀리는 것이지 기본적인 몫은 해주었다.

5 방송 활동

연예인은 아니고 단지 방송에 나오는 사람
무한도전이 발굴한 예능계의 보물 예능 공룡
2014년 후반기, 강남과 함께 떠오르는 예능계 블루칩
강호동의 뒤를 잇는 성공적인 운동선수 출신 연예인 후보.

아니, 아니 그게 아니고~[77]

보통 스포츠 선수들이 은퇴 후 원래 몸 담갔던 분야와 연관된 업종에 종사하는것과는 달리, 서장훈은 은퇴 후 농구판으로 돌아가지 않고 방송 활동을 하였다. 그 이유가 입담도 좋아서 그 전에도 예능에 자주 나왔는데[78] 은퇴 후 주변 인맥들을 통해 여기저기 얼굴을 비추다보니 아예 방송계에 의도했든 아니든 많이 알려졌기 때문. 스포츠 선수였다가 예능인으로 전직했다는 점에선 강호동과 비슷하지만, 강호동이경규라는 강력한 버프를 받고 있었고 주로 메인으로 활약한 것과는 달리 서장훈은 서포트 없이 개별적으로 활동하며 메인 보다는 (존재감 강한) 보조로 나오는 느낌이 강하다.

원래도 스포츠를 통해 인지도가 높았지만 방송을 통해서 다시 한번 인지도가 쌓였기 때문에 우리동네 예체능, 런닝맨 같은 방송사들의 간판급 예능 프로에도 다수 출연했다. 2013년 7월 6일 방송된 무한도전 웃겨야 산다 특집때 뮤지컬 중 목부상으로 입원한 정준하의 대타로 출연해 국내 최장신 예능인 반열(...)에 올랐다. 본인은 이거로 뜨고 싶은 마음 없어요. 이게 마지막 방송이에요 라며 격하게 부정했지만 유재석은 녹화장에 나타나자마자 못친소 2회를 위해 아껴둔 게스트라며 기대감을 표출했을 정도.

결국은 2014년 1월 3일부터 시작된 금요 예능 사남일녀에서 김구라, 김민종에 이은 셋째 역할로 고정 예능인으로 데뷔해 좋은 모습을 보여주며 합격점을 받았다. 물론 힘쓰는 장면도 많이 나오긴 하지만 이제 운동만 잘한다는 이미지는 거의 벗어던진 셈. 이상민이 삼성 감독에 취임한 후 서장훈이 코치로 하마평에 오르내리자 시청자들이 드립일 뿐이라도 '사남일녀 해야된다 가지마라' 라는 반응을 보인 것을 보면 시청자들의 지지도 받고 있다. 본인 역시 흥미를 느끼고 있는 듯 하다.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지도자 생활보다는 예능이 재미있다며 이상민 감독의 제안을 정중히 거절했다고 한다.

사남일녀 출연덕분에 라스에도 출연하였고 여기서 재밌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결국 연말에 한해동안 가장 재밌었던 게스트중 한명으로 한번더 라스에 출연하면서 상당한 예능감을 보여줬다. 거기다 예전부터 김구라가 종종 자기가 부러우니까서장훈의 재테크(전술한 부동산 수익)를 언급한 일이 있었는데 이덕에 라스에서 윤종신이 붙인 서셀럽이 캐릭터화되면서 예능 안착에 긍정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전부터 방송 적응이 잘되기도 해서 전업 예능인이 되기에 좋은 운을 탄 상태.

2014년 8월 10일 아빠! 어디가?윤후(윤민수아들)의 농구선생님으로 출연했다. 윤후의 팬이라고... 과연 마성의 사내 윤후.

그 후 새로 개편된 세바퀴의 고정이 되었다.

2014년 12월 13일 무한도전 유혹의 거인 편에 의리보단 시청자의 마음을 대변한다는 옴부즈맨의 정신으로 주연으로 출연, 맹활약을 펼쳤다. 무려 3주에 걸친 낚시로 무한도전 멤버들을 훌륭하게 낚았다. 정준하, 하하, 박명수와는 원래부터 친분이 있었고, 정형돈도 후배인 이규혁을 통해 연락을 한 적이 있을 정도로 무도 멤버들과 친한 사이라서 시너지가 컸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정준하와 함께 멤버들을 꼬여내기 위해 갖은 사탕발림과 협박을 적절히 배합하는 진상 콤비는 이날 방송의 백미였다. 적절한 리액션과 자연스러운 멘트로 유재석을 비롯한 무도 멤버들로부터 MC 꿈나무라는 소리까지 들었다. 그리고 이후 무한도전 나 홀로 집에에서도 최종보스 역으로 출연 준비된 예능인이자 사실상 이전의 데프콘처럼 비정기 객원 멤버 취급이다(…).[79] 무도큰잔치에서는 농구계 동료 현주엽을 데리고 나왔는데 유재석에게 " 한 달에 한번씩 꼭 나온다"며 디스당했다.

일밤 아빠! 어디가?의 후속 프로그램이었던 애니멀즈에 캐스팅되었다. MBC 계약직. 그러나 애니멀즈는 몇 달 지나지 않아 폐지.

1월 15일 썰전에도 나왔는데 본인이 방송을 하게 된 계기중 하나는 본인에 대한 선입견이 있는데 그걸 깨고 좀 더 소통하기 위해서 라고 밝혔고 언젠가 자신에 맞는 팀을 지도해보고 싶다는 말도 하였다.
1월 28일 미스틱 엔터테인먼트와 전속계약을 체결했다.

2015년 2월 20일 [[MBC SPORTS+|]]의 프로농구 SK-KT 경기 중계에서 일일 해설을 맡았는데 무도큰잔치 녹화 중에 현주엽이 자기 해설할 때 한번 같이 하자고 해서 나왔다고 한다.###

무한도전 식스맨 당시 후보로 거론되며 1차 토론회까지 출연했지만 투표에서 탈락한 데다가 방송에서 과거 음주운전 이력을 어물쩍 넘긴 것 때문에 논란이 되기도 했다. 다만 무한도전 식스맨 : 시크릿 멤버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소재 자체가 논란과 병크 투성이인지라. 이후로 무한도전에 더 이상은 나오지 않고 있다가 무한도전 예능총회에 오랜만에 나왔다.

동상이몽, 괜찮아 괜찮아 고정 패널로도 출연 중이다. 3회에 출연했던 무용소녀 김현아 편의 경우 유독 서장훈의 존재감이 돋보였는데, 다른 출연진들이 단순히 엄마와 딸의 1차적인 입장에 대한 생각을 이야기하는 수준이었던 반면 서장훈은 예체능계 출신 경험을 토대로 딸의 건강에 대해 조언하기도 하고, 딸의 어머니에게 "코치의 역할은 코치에게 맡겨야 한다"며 진지하게 설득했다. 게다가 단지 딸을 대변하는 선에서 그치지 않고 자신의 부모님에 대한 이야기를 털어놓으며 어머니가 스스로의 인생을 더 즐기길 바란다고 하면서 분위기를 이끌어 나갔다.‘동상이몽’ 서장훈의 기가 막힌 어시스트..당신이 MVP 방송 이후 시청자들의 평가도 좋았으며, 프로그램 성격에 가장 걸맞은 패널이라는 말까지 나왔다.

여러 방송에서 이야기를 했지만 다른건 몰라도 농구에 대해서 터치하고 시비거는 것을 상당히 싫어한다. 실제 세바퀴에서 우지원과 비교해서 누가 더 잘하냐 라는 질문을 받았을때 상당히 언짢은 표정을 짓기도 하였다. 김구라 및 다른 사람들이 포지션이 다르니까 비교하기 힘들다 라고 이야기 했지만 포지션이 달라도 실력 비교는 가능한 일이며[80] 우지원도 나름 이름을 남긴 슈터이지만 서장훈은 그걸 넘어 한국 농구 역대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선수이다. 정말로 실력 비교를 하는걸 떠나서 우지원은 전성기를 함께한 연세대학교 선배라 "내가 지원이 형보다 훨씬 잘하지"라고 할 수도 없는 마당에, 옆에서 비교하기 어렵느니 운운하니 불쾌할 만도 하다.

방송활동 초기에 계속 밀던 그냥 유명인 컨셉은 이제 버린지 오래. 이제는 아예 방송을 전업으로 삼고 있고 건물주 캐릭터로도 웃음을 뽑아내는 중. 운동선수 출신 치곤 꽤 똑똑한 데다 시사상식이 풍부하고 소위 촉까지 좋기 때문에 앞으로도 방송계에서 승승장구할 것으로 보인다.

JTBC 아는 형님여자친구가 초대되었을 때 예린이 "평생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말하자 이에 대해 서장훈이 "그러면 조증 환자"라고 답변해 주변을 폭소의 도가니로 몰고 갔다. 예린 시무룩.[81] 그런데 정작 서장훈 앞에서 이 사람을 언급하면 서장훈을 즉각적으로 분노하게 만들 수 있다. 누구냐 하면 박상... 읍읍...

5.1 출연 경력

5.1.1 과거 출연작

5.1.2 현 출연작

6 트리비아

  • 별명으로는 골리앗 센터, 언론에 쓰이는 공식 별명인 국보급 센터[82], 서장팔, 목장훈[83], 서역귀(패배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며), 목도리도마뱀 등 부정적인 별명도 많이 갖고 있었다. 이미지가 좋아지고 KBL의 레전드 취급을 받게 된 말년 of 말년 시절부터는 농구팬들이 장팔이형이라는 친근한 별명으로도 부른다.
  • 방송 인연으로 2009년 오정연 아나운서와 결혼해 화제가 되었지만 2012년 이혼했다. 다만 안 좋게 헤어진 것은 아닌지 둘은 지금도 가끔 연락을 하는 사이라고 한다. 또한 서장훈과 오정연이 본격적으로 예능활동을 하면서 이 둘의 사생활이나 성격 등이 노출되자 둘이 진짜로 안 맞았겠구나는 여론이 늘었다.[84] 자기도 이혼한 2015년 말 이후부터는 김구라가 대놓고 둘에게 다시 잘 해보라는 식으로 반 농담, 반 진담성 드립을 날리는 중. 2015년 SBS 연예대상에서의 공식 재회가 그 재결합 드립의 절정을 찍었었다.
  • 프로 데뷔 때부터 지금까지 리그에서 거의 손가락 꼽히는 고연봉자에다 재테크에 능해 백억대의 자산을 보유하고 있다고 한다. 1980년대 여자농구의 간판으로 활약했던 코끼리 센터 김영희는 8평짜리 단칸방에서 한달 체육연금 50만원으로 생활을 하는데 거기다 희귀병인 거인병까지 앓는 힘든 생활을 보내고 있었다. 어느 날 통장을 확인해보니 몇 달치 치료비가 입금되어 있었고 입금자 성명은 바로 서장훈. 후에 이 일이 알려지자, 서장훈은 머쓱해하며 '농구 선배의 딱한 사정을 듣고 약간의 성의를 보탰을 뿐' 이라며 쑥스러워했다고 한다. 이밖에도 은퇴 당시 마지막 연봉을 유소년 농구발전을 위한 기금으로 쓰라고 기부하였다. 국보급 센터에 걸맞는 인품이라 할 수 있다.
  • 은퇴할 때 동시에 강동희 감독이 승부조작에 연루되어 수사를 받고 있다는 소식을 접했고, 자신의 은퇴식에서 "강동희 감독님은 개인적으로 매우 존경하던 선배였는데 너무 가슴이 아픕니다. 수사 결과를 지켜보고 너무 섣부른 판단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라는 멘트를 남겼다.#
  • 약 200억 상당의 빌딩의 건물주이다. 그런데 주변보다 상대적으로 낮은 가격으로 임대하고 있어 착한 건물주가 되기도 하였다.기사[85]
그런데 이제는 괜찮은지 2016년 7월 9일자 아는 형님에서 일명 '건물주 전용 개그'를 하기도 했다.

그런데 빌딩에 설치한 광고판 한달수입이 3억이고
해당 광고판매회사 다보기획은 부친이 운영하는 회사다

  • 정치적으로는 매우 중립적인 인물임을 자처한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정치에 관심이 없는 사람으로 오인할 정도이다. 같은 1974년 동갑내기 친구이자 웹툰 작가강풀에게는 "너의 정치적인 발언 때문에 네 만화를 보지 못 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며 정치적인 의견을 표명하는 것에 대해 부정적인 의견을 밝힌 바 있다. 반대로 이러한 극도의 중립성 표방 때문에 정치에 어느 정도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나이 들고 정치하려고 그짓 하냐고 여기고는 한다.[86] 당장 김구라부터가 이런 말을 한 바 있으며, 이러한 중립적 입장견지에서 비롯된 "나는 공인이 아니라 셀럽이다" 발언도 그러하다.
  • 방송에 나오는 걸 보면 냉장고에 있는 음식이나 물건을 열을 똑바로 맞춰 놓고 유통기한을 앞으로 놓아둔 뒤 내림차순으로(...) 정렬을 해 놓아야 하는 등, 결벽증 및 강박증이 조금 있어 보인다. 집에 돌아와 '세상의 모든 더러운 걸 씻어내야 한다' 며 샤워를 1시간 가까이 한다고 한다. 200억 짜리 빌딩 갖고 있는데 그까짓 수도요금 쯤이야
  • 그런데 이런 건 뛰어난 운동 선수들 중에서 드물지 않게 보이는 현상이다. 프로 레벨, 국가대표 레벨 운동 선수의 훈련이라는 건 결국 반복 작업의 반복의 반복이다. 야구든 농구든 축구든 골프든 공을 사용하지 않는 복싱이든 레슬링이든 하루 훈련 일과의 대부분은 반복 훈련이고 그 과정에서 그 반복 작업에서 변수를 만들고 싶지 않아하는 심리가 루틴을 만들고, 그 루틴이 징크스를 만들고, 그 루틴이 강박증 내지는 결벽증이 된다. 물론 그렇지 않은 선수들도 많지만, 웨이드 보그스 항목의 징크스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이런 결벽증이나 강박증이 프로 레벨 운동 선수들에게서는 그다지 보기 드문 일은 아니다.[87]
  • 이런 징크스는 실력이 부각되고 나서 더욱 심해졌는데 아무리 술에 취하고 시합을 뛰고 힘들어도 모든걸 깔끔하게 정리하고 샤워를 마치고 잠을 잘 정도라고 하였다. 잘해야 한다는 욕심과 부담감이 많았던 결과라고 한다. 더불어 박지성, 박찬호를 부러워 하면서 농구선수로서의 꿈을 완전히 이루는데는 실패했다고 하였고 1만 3천점이 아니라 2만점 넘는 압도적인 선수가 되고 싶었다고 밝혔다. 이 때문에 예능프로에서 농구를 시켜도 절대로 대충하지 않는다.
  • 선수 시절 다른 부위들에 더 부상을 많이 당했지만, 오히려 은퇴 이후에 그의 건강에 가장 무리를 주는 건 무릎관절이라고 한다. 이는 무릎이 단순히 농구같은 격한 운동에서만 무리가 갈 수 있는 부위가 아니기에 그런 것으로 판단되는데, 일상생활 중에도 2m 이상의 거인이라면 서 있기만 해도 누구나 겪는 무릎 관절에 가해지는 강한 하중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데, 젊을 때 농구까지 계속 하면서 더 큰 충격이 가해져왔던 후유증으로 보여진다. 나이 40이 넘은 이후로 갈수록 무릎에 물이 자주 차서 주기적으로 병원에서 뺀다고 한다. 무릎 컨디션이 정말 좋지 않을 때는 한 층을 이동할 때조차 계단으로 오르내리는 것도 피한다고. 거인의 슬픈 숙명[88]
  • 힐링캠프에서 밝혔는데 가장 기뻤던 순간이 중학교 2학년때 처음 나갔던 시합에서[89] 첫 골을 넣었을때가 가장 기뻤다고 한다.
  • 다만 자신이 메인인 그 다음 회차 냉장고를 부탁해를 보면, 도무지 맛의 기준을 잡을 수가 없다.(...) 신맛 매운맛 뿐만이 아니라 단맛도 싫다면서 비빔면은 왜 가지고 있냐는 지적에 '그 정도는 괜찮다' 는 말을 하질 않나, 시고 단 맛이 싫어서 과일도 거의 안 먹는다고 했으면서 마카다미아 아이스크림은 왜 가지고 있냐고 묻자 '내 기준에는 괜찮다' 고 대답을 하고, 같은 회사의 아이스크림 중 조금 더 단맛이 없는 제품을 추천하는 김풍에게 '그건 너무 심심하다' 고 말을 하는 등 셰프들과 MC, 시청자들을 혼돈으로 밀어 넣었다.(...) 이 현상을 굳이 분석하자면 위에서도 말했듯이 서장훈은 루틴에서 벗어나는 걸 극도로 싫어하는데, 이 성격이 자신이 매일 먹던 음식에 자신의 입맛을 최적화 시키며 그 입맛을 기준으로 아주 조금이라도 더/덜 시거나 달거나 매운 음식을 싫어하게 된 듯. 한 마디로 까다롭다고 같은 회차의 냉장고를 부탁해에서 '어머니 음식이 맛있어서 다른 집에 가서 음식 맛있다고 느낀 적이 한 번도 없다' 고 했는데, 아마 이런 강박증 내지는 징크스의 발현일 확률이 높다.
  • 키가 워낙 커서 제2국민역 판정으로 일반적인 병역의무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훗날 병무청에서는 그보다 더 큰 최홍만에게 병역 의무를 부과했지만 최홍만은 키와 무관하게 뇌종양으로 면제(제2국민역)되었다. 이는 1998년에 병역법이 바뀌면서 키로 인한 제2국민역(면제)[90] 조항을 1998년에 없앴기 때문에 그 전인 1993년에 신검을 받은 서장훈은 키로 제2국민역(면제) 판정을, 그 이후인 1999년에 신검을 받은 최홍만은 키로 보충역(4급) 판정을 받았던 것이다. 애초에 2미터 넘는 사람이 한국에 서장훈, 최홍만 밖에 없는게 아니다.[91] 그 둘보다도 더 큰 하승진은 별 일 없이 공익요원으로 잘 복무하다 왔다.
  • 그리고 사실 그 이후 아시안게임 금메달 획득했기에 군면제자격을 한번 더 받았다. 그런데 이 때 같이 뛴 현주엽이 군복무 중에 금메달을 획득한 거라 현주엽은 그냥 상무에서 남은 기간을 마저 복무하고 현주엽으로 인해 상무 소속인 상태에서 예술체육요원 자격이 생기면 전역 조치하는 규정이 생겼다.
  • 한때 서장훈의 쌍꺼풀 수술설이 있었는데 본인이 은퇴 후 공식적으로 방송에서 밝힌 바로는 자연산 쌍꺼풀이라고 한다. 단지 나이를 먹으면서 생겨서 오해를 받은 것이라고.. 그의 가족들도 대부분 쌍꺼풀이 있었는데, 본인은 어릴 때는 피곤할 때만 생겼을 뿐 평소에 없었다가, 성인이 되고 나이를 더 먹으면서 쌍꺼풀이 평소에도 생겼다가 없어졌다를 반복하면서 자연적으로 쌍꺼풀이 자리 잡혔다고 한다. 자신의 수술여부를 의심하는 시선에 대해 말하면서 '저보고 느끼하게 보이게 그걸(수술) 왜 했냐, 이상하다, 이런 식으로 말씀들 하시는데, 제가 이거(쌍꺼풀) 생긴다고 잘 생겨지는 것도 아니고, 쌍꺼풀 수술을 해도 별로인(?) 얼굴이라고 스스로도 생각하는데 제가 왜 그런 수술을 했겠습니까? 정말 안 했습니다' 라고 호소하며 억울해 했다.
  • 또한 방송에서 과거 연세대 재학시절 우지원, 이상민 등 잘생긴 선배들과 함께 스타 선수생활을 하면서도 팬들에게 외모로 지적받았던 설움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제가 언제 제 스스로 잘 생겼다고 했냐고요. 전 항상 가만히 있었는데 대체 왜~ 가만히 있는 사람을.."이라며 억울해 한 적이 있다. 그러면서 농구 경기장에서 자신에게 외모로 대놓고 지적질했던 여성팬과 인터넷에서 본인에게 못 생겼다고 한 농구팬들을 회상하며 "솔직히 세상에 그렇게 얼굴 잘 생기고 예쁜 사람들 많지 않습니다. 본인들은 뭐 얼마나.. 아니 차라리 장동건, 원빈 같은 사람이 나한테 와서 '야, 너 진~짜 못생겼다'고 하면 깨끗하게 인정하겠습니다. 근데 대놓고 저한테 얼굴 가지고 못 생겼다고 뭐라고 하신 분들, 대부분 그렇지(?) 않았거든요. 지~들도 그러면서(?) 뭘 나한테만 자꾸.."라고 하며 서러움에 말을 잇지 못하였다.
  • 아무래도 야구선수를 했던 경력 때문인지 농구 외에는 야구를 가장 좋아하는 것 같다. 앞에서 서술했다시피 초등학생 시절 박철순 선수를 응원했던 인연으로 현재까지도 두산 베어스의 팬이며 2016년 8월 잠실 홈경기에서는 시구도 했다. 야구선수 드립 쳐놓고 시구할 때 공을 패대기친 건 안자랑 여담으로 자신이 응원하는 팀의 최대 라이벌 팀 홈경기에서 시구할 뻔 했던 적이 있다. 2011년 6월 29일 잠실야구장에서 열릴 예정이었던 LG 트윈스삼성 라이온즈와의 경기에서 시구를 할 예정이었으나 이날 경기가 비로 취소돼 시구가 무산됐다. 두산 팬인 그에게 LG 홈경기 시구 기회가 주어진 것은 당시 그의 소속팀이 LG 트윈스와 한 식구인 창원 LG 세이커스였기 때문이다.[92]
  • <아는 형님>을 통해 장성규 아나운서와 레드벨벳 특히 아이린의 팬임을 자처하고 있다.[93] 특히 장성규에게 주로 하는 말은 "그만 프리선언 했으면 좋겠어.(...) 너무 불쌍해..."
  • 우리들의 공교시 19회에서 여자농구계 사상 최고의 유망주인 박지수와의 만남이 성사됐다. 그 목장훈 사건의 가해자였던 박상관의 딸로도 유명해서 팬들의 관심이 상당했는데, 서장훈은 박지수와 반갑게 악수를 하며 "저기 누구야...상관이 형 아들"이라는 실언을 해 폭소를 자아냈다. 설마 고의로 ㄷㄷㄷ

7 어록

저는 정말 농구를 더 잘하고 싶었어요. 우리나라 최다 득점 기록자였지만 정말 정말 남과 비교할 수 없는 훌륭한 선수가 되고 싶었어요. 은퇴할 때 말했지만 전 평생 후회하며 살 거예요.

더 어렸을 때 조금만 더 열심히 했다면, 더 몸 관리를 하고 더 노력하고 더 체력을 길렀다면 1만3,000점이 아닌 2만점, 2만5,000점도 넣을 수 있었을 거예요. 나 혼자 능력의 한계 안에서 죽기 살기로 했지만 '이것밖에 왜 못했을까'하는 후회를 평생할 겁니다.[94]

  1. 실제 맨발 키는 205cm정도
  2. 서울 SK 나이츠가 잠실실내체육관을 홈으로 쓸 때 삼성으로 이적해, 잠실학생체육관(2004~)에서 뛴 적이 없다.
  3. 연세대 1학년때 첫 선발.
  4. 사우디 현지에서 중이염에 심하게 걸려 역시 부상중이던 현주엽과 함께 대회 내내 거의 뛰지 못했다.덕분에 대표팀은 정재근(193cm)-전희철(198cm)의 꼬꼬마 라인업으로 왕지지(211cm)-공샤오빈(205cm)의 중국과 다카하기(198cm)-야마자키(214cm)의 일본을 상대해야만 했다.(근데 이들을 다깨고 우승!! 전희철 대회 MVP!!)
  5. 연세대학교 시절 등번호. 입학 당시인 1993년 덴버 너기츠에서 활약하던 218cm의 흑인 센터 디켐베 무톰보를 닮고 싶어서 이 번호를 택했다고 알려져 있다. 프로에 입단할 때도 이 번호를 달아볼까 고민했지만 외국인 선수들이 많이 달았던 번호라 가져가기가 뭐했다고 한다.
  6. KCC 시절 등번호. 입단 당시 같은 학교 선배인 이 사람과 등번호가 겹쳐서 7번을 달았는데 얄궂게도 그가 KCC에 온 뒤 그 선배가 삼성으로 팔려갔다. 그야말로 운명의 아이러니. 결국 서장훈은 KCC를 떠날 때까지 7번을 달고 뛰었고 KCC에서 11번은 이상민의 영구결번으로 헌액됐다.
  7. SK, 삼성, 전자랜드, LG, kt 시절 등번호. SK 입단 당시 11번이라는 번호를 받았는데 장신의 센터가 긴 다리로 우뚝 서 있는 모습을 연상케 한다는 느낌이 표면적 이유였고 실상은 SK 구단의 모기업 SK텔레콤의 대표 브랜드였던 '스피드 011'을 홍보하기 위한 것이 진짜 목적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물론 목적과는 상관없이 11번은 서장훈의 상징이 됐고 그가 팀을 옮길 때마다 11번은 그의 차지가 됐다. 만약 그가 한 팀에만 진득하게 남아서 커리어를 유지했다면 영구결번은 안 봐도 비디오였을 것이다.
  8. 상술했다시피 대회직전 중이염이 심하게 걸려 게임을 거의 뛰지 못했다.
  9. 1997~1998 시즌을 기점으로 농구대잔치는 아마추어 농구 대회가 되었다.
  10. 전, 현역 통틀어 한국농구에 등록한 선수중 하승진에 이어 두번째로 큰 키이고, 하승진 등장 이전까지는 최장신이었는데, 실제 신장은 최소 신발 벗고 205cm, 신발 신고 잴 경우가 207cm은 된다는게 정설이다. 지금 시점에서 보면 조금 황당한 이야기이지만, 선배 한기범에 대한 예의 차원에서 의도적으로 키를 한기범과 똑같이 적어냈다는 말도 있다.
  11. 프로선수 두번째 최장신 기록은 중앙대 김병오(219cm)가 2013년 KBL팀과 계약해 데뷔했다면 깨졌겠지만, 김병오는 거인증이 있는데다 경기 출장을 거의 못할 정도로 몸 상태가 엉망이라 프로 진출은 하지 못했다.
  12. 다만 하승진이 대한민국 역대 최고 센터라고 보는 사람들도 제법 있다. NBA를 경험했다는 단 한 가지 이유로(...). 사실 이것만으로도 하승진이 역대 최고의 센터라고 주장이 가능하긴 하다. 다만 이 논리라면 하승진이 역대 최고의 센터가 아니라 역대 최고의 선수라는 말도 할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업적 면에서 보면 아직도 큰 격차가 있는데, 서장훈이 여러 차례 기록한 한 시즌 평균 20점&10리바운드 이상도 하승진은 기록한 적이 없으며(평균 20점도 넘긴 적이 없다) MVP도 아직 없다. 게다가 하승진이 30이 넘으면서 누적된 부상으로 인해 위력이 줄어들어 그 격차를 끝내 좁히지 못했다. 또한 박찬호처럼 메이저에서 확실한 족적을 남겼다면 모를까, 상위리그를 말 그대로 단지 경험했다는 것만으로 더 뛰어나다는 것은 좀 빈약한 논리이다. 애초에 하승진이 뽑힌 것은 오직 거대한 체격으로 인한 가능성 때문이며, NBA급 선수로 클 가능성이 없다는 게 밝혀지자마자 팀으로부터 방출통보받았다. 또한 하승진은 대부분의 커리어를 한국에서 쌓은 KBL선수이다. 그런데 KBL에서 남긴 족적이 서장훈보다 현저히 떨어지는데, 고등학교 졸업 직후 2년을 NBA에서 벤치에서 앉아 있었다는 것만으로 서장훈보다(그리고 NBA경험=최고라는 논리대로라면 허재보다도) 높이 평가받아야 하는가? 게다가 하승진이 NBA에서 있었던 2년은 당연하지만 커리어 초창기라 그의 커리어에서 가장 실력이 떨어졌던 시기다. "하승진이 NBA를 경험했기 때문에 대한민국 역대 최고의 선수다"라는 논리대로라면, "NBA에서 뛰고 있던 만 19세/20세동안 2년이 하승진의 전성기다"란 주장도 할 수 있다.
  13. 평균을 내면 19.2점 7.6리바운드
  14. 1998-99시즌 25.68, 1999-00시즌 21.82, 2000-01시즌 22.48, 2001-02시즌 22.05, 2002-03시즌 21.25, 2003-04시즌 22.26, 2004-05시즌 22.89
  15. 손을 많이 쓰는 야구선수 경험이 있다는 것이 도움이 됐다는 분석도 있다.
  16. 그 당시 서장훈 급 피지컬을 가진 센터들은(정경호, 표필상, 이창수, 박상관, 박재헌 등등) 자유투가 서장훈보다 정확도가 떨어졌다. 그래도 요즘 선수들보다는 정확하지만(...).
  17. 서장훈 전성기 시절 주득점루트는 일대일 상황에서 엔트리 패스를 받은 후 포스트업 → 페이드어웨이였다. 외곽슛 비중이 늘게 된건 나이가 들어서부터이다. 그래서 주로 2000년대 중후반부터 농구를 본 젊은 팬들은 서장훈에 대한 평가가 박한 반면, 프로농구 초창기부터 그의 플레이를 본 팬들은 당연히 호의적이다. 2015년 시점에서는 서장훈과 비교하는 그 김주성마저도 서장훈만큼 외곽을 많이 돌고 있다. 또한 2000년대 중후반 모습만 놓고 보더라도 단순히 "외곽슛을 많이 쏜다"란 이유로 낮은 평가를 받을 이유는 없다. 당시 그는 파워포워드 역할을 주로 했으며, NBA에서도 덕 노비츠키처럼 외곽슛을 많이 쏘는 스트레치형 슈퍼스타 빅맨들이 주로 있다. 중요한 건 "얼마나 위력적이었느냐"인데, 서장훈은 아주 말년이 되기 전까지 플레이오프 보중수표였으며 전자랜드 시절에는 MVP후보로 꼽히기도 했다. 서장훈이 완전히 힘이 떨어진건 LG로 옮긴 2011년 이후 두 시즌 이었다.
  18. 하승진의 경우는 반올림을 해서 딱 10리바운드로 더블더블을 기록하였다. 정확하게는 9.95 리바운드.
  19. 공교롭게도 현재까지 우승이 없는 3구단, 전자랜드-LG-kt에서 모두 뛴 선수이기도 하다.
  20. 양동근과 공동수상
  21. 현재까지 SK 나이츠 프랜차이즈의 유일한 파이널 MVP 선수이기도 하다.
  22. 이 때의 인연으로 현재까지도 두산 베어스의 열렬한 팬이라고 한다.
  23. 창단 당시 KBO와의 약속대로 1985년에 서울로 올라온 OB 베어스가 서울 연고 정착과 야구 저변 확대, 꿈나무 육성 등을 위해 1986년부터 서울시 초등학교 및 리틀야구 대회를 개최했는데 이 대회 초대 우승팀 멤버였다. 2016년 7월 31일 아는 형님에서 직접 언급했고 8월 26일 두산과 롯데의 잠실 홈경기 전 시구 때도 이점을 직접 언급했다.
  24. 참고로 1986년 OB기 리틀야구대회 초대 우승팀 멤버 중 한 명이 '피자신' 이도형이다. 서장훈이 야구선수 생활을 할 때 투수 서장훈의 볼을 받는 경우가 있었다고 한다. 이도형과는 학동초-휘문중-휘문고를 같이 나온 절친.
  25. 2011년 1월 3일 네이버 라디오 바스켓카운트.
  26. 선배로 인해 학교를 옮겼다는 이 기사를 참조바람.
  27. 농구를 늦게 시작한 관계로 실력이 부족해서 벤치 신세를 졌다고 한다. 당시 옆에서 함께 기본기 연습에 매진했던게 1년 후배 현주엽이었다.
  28. 본인 말로는 훈련하다가 다쳐서 한 달 정도 쉬던 기간부터 폭발적인 성장을 시작해서 그렇게 된 것이라고 한다.
  29. 이때 국가대표 에이스 센터이자 한국농구 최초로 국제무대에서 그나마 이름값을 해본 한국 역사상 최고의 센터중 하나인 김유택은 서장훈에 대해, "우리는 매번 중국,서양팀들에게 20점차 대패하는게 일이었는데, 서장훈 덕에 10점차 정도까지 줄일수 있었다."라는 말을 남겼을 정도다.
  30. 당시 기아자동차는 플레이오프에서 중앙대에게 떡실신당하며 탈락하는 굴욕을 겪었다.
  31. 근데 이 당시는 워낙 나이가 깡패였던 시절이라... 심판도 대놓고 상대에게 편파판정을 해대서 중앙대 선수들이 항의의 표시로 경기중에 그냥 서 있기만 했던 적도 있다고 한다.
  32. 이때 터치아웃을 유도한 선수는 석주일.
  33. 김성헌은 이상민의 동기인 91학번으로 경복고 시절 포인트가드 랭킹 2위의 유망주였지만, 하필이면 랭킹 1위 이상민이 고대에서 연대로 갑자기 진로를 틀어버리는 바람에 4년 내내 벤치만 달구다시피 했지만 중도이탈 없이 4년을 잘 다니다가 이상민의 아웃 때 기회를 잡았다. 이 시리즈에서 김성헌의 활약만큼은 과장 좀 보태 제레미 린이 갑툭튀한 수준과도 같았다. 4년동안 경기에 거의 출장도 못하던 선수가 졸업 고별무대와도 같은 농구대잔치, 그것도 플레이오프에서 갑자기 주전으로 나와 엄청난 활약을 보인데다 연세대의 높은 인기 탓에 당시 많은 주목을 받았다. 그후 인천 대우 제우스에서 프로생활을 한뒤, 2014년에는 인천 전자랜드의 사무국장으로 재직중.
  34. 코트를 폭력 영화의 장으로 만들며 결승에 올라간 삼성은 허재, 강동희, 김유택에게 돌아가며 두들겨맞으면서 기아자동차에 떡실신 크리.
  35. 당시에 "대표팀 빠지려고 저런다", "몸값 부풀리려는 술책"이라는 등 온갖 말도 안되는 이유로 곳곳에서 비난이 쇄도했었다.1995.04.25 경향신문 기사
  36. 최희암 연세대 감독도 한국으로 돌아오라고 설득했다고 한다.
  37. 서장훈의 전성기였던 96년 NBA 선수인 그랜트 힐이 한국에 방한해서 이벤트로 서장훈과의 1:1 대결을 한 적이 있었는데, 서장훈의 슛을 전부 막아내며 본인은 서장훈을 앞에 두고 덩크를 하는 등 퍼포먼스성 플레이를 하며 그야말로 가지고 노는 모습을 보여줬다. 서장훈은 끝까지 진지하게 임했고 결국 그랜트 힐 상대로 한 골을 넣었으나 당시 한국 최고의 선수였던 서장훈의 입장을 생각해서 그랜트 힐이 봐준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물론 그 당시 그랜트 힐은 전년도 신인왕을 탄 NBA 최고 수준의 플레이어이긴 했으나, 스몰 포워드인 그랜트 힐이 자신보다 키가 큰 서장훈을 상대로 골밑 공격까지 압도한 것을 보면 NBA와의 격차를 느낄 수 있었다.
  38. 사실 지금도 좀 그렇지만 당시 KBL수상은 좀 근본없는 경우가 많았다. NBA같은 경우 아무리 팀성적이 떨어져도 서장훈 정도로 개인성적이 압도적이면 당연히 신인왕을 준다. 4대 센터 중 하나인 패트릭 유잉도 결장이 잦고 팀성적도 전년과 비슷했는데 무난히 상을 탔다. 이때 KBL수상체계가 얼마나 엉망이었냐면 이상민의 경우 신인시즌에 MVP를 타놓고도 이미 상을 받았다는 이유로 신인왕을 못 받았다(...)당연히 이 경우엔 둘다 석권하는게 상식. 다행히 몇년 뒤에 데뷔한 김승현의 경우는 이런 촌극이 반복되지 않았다.
  39. 우지원은 SK에서 보상선수로 지목받자마자 김영만과 맞트레이드되어 모비스로 가게 된다.
  40. 이창수는 울산 모비스를 거쳐 창원 LG에서 현역 최고령인 42세로 은퇴했다. 박상관은 대구 오리온스에서 2004년 은퇴했다. 모두 이 사건때문에 인간말종 취급받아 저평가를 많이 받았지만 두 선수 모두 블루워커로써는 상당한 실력을 보여주었다. 서장훈은 이창수의 은퇴경기에 앞서서 이창수의 롱런을 칭찬하는 인터뷰를 했고 경기중에도 이창수와 대화를 나누는듯한 모습을 보여서 앙금을 푼듯하나 그때의 부상으로 목쪽에 고질적인 부상을 안게된건 여전히 본인 입장에선 마음이 아플듯.
  41. 여담이지만 박상관의 딸 박지수는 아버지의 대를 이어 농구선수를 하고 있다. 더군다나 여자임에도 불구하고 키가 김연경과 동일하며 아직도 성장 중이다. 2016년 4월 현재 195cm다. 1998년생으로 동연령대 선수 중에서는 최고로 국내대회뿐만 아니라 국제대회도 그야말로 씹어먹는 중. 아들 박준혁 군은 2m의 키로 명지고 농구부에서 선수생활을 했다.
  42. 일설에는 우승 축하연을 안 갔다고 한다.
  43. 서장훈의 이적과 이상민의 영입으로 삼성은 3가드 시스템을 가동하는 전력을 썼고, 이는 팀의 2차례 준우승과 인기몰이 등 호성적을 가져다주었다. 다만 등가교환으로 높이와 수비력이 급격하게 약해져 11~12시즌 삼성 추락의 원인을 제공하기도 했다.
  44. 10,000득점 마일스톤은 KCC에서 달성했다.
  45. 전자랜드는 저 때가 우승을 노릴 수 있었던 절호의 기회였지만, 정규시즌엔 부산 KT 소닉붐에 밀려 준우승, 4강 플레이오프에선 KCC에게 패해 챔결 진출이 무산되었다. 그리고 정규리그 우승을 했던 KT 역시 제스퍼 존슨과 김도수가 빠지며 동부에게 밀려 4강 플레이오프에서 탈락하였다.
  46. 서장훈이 10,000점을 넣던 그 경기에서 현주엽이 상대팀으로 만났는데 서장훈의 기록을 세워주기 위해서 일부러 골을 허용했다고 한다. 그리고 10,000득점을 달성한 직후의 서장훈은 같은팀 동료들로 뿐만 아니라 상대팀 선수들에게도 축하를 받았고 전광판에는 그 동안의 서장훈의 농구인생을 담은 다큐멘터리를 담았다.
  47. 여담으로 서장훈은 은퇴할 때 까지도 전자랜드에게 각별한 애정이 있는 듯 보였다. 서장훈이 은퇴를 선언한 시즌 막바지 즈음, 이미 4라운드에 전주에서의 KT의 경기가 종료된 KCC전을 제외하고 나머지 8개구단 원정경기때 각 팀에서 서장훈 은퇴 기념행사를 했는데, 전자랜드 홈인 인천에서 행사를 진행할때 눈물을 글썽이며 말을 잇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48. 다만 KT에게 1차전을 따내고도 5차전까지 간 끝에 분패하고 만다. 여담으로 5차전은 연장 접전이 펼쳐진 명승부였다.
  49. 사실 이 기간에도 전자랜드 복귀 희망 루머가 돌면서 잠시 떠들썩 했던 적이 있었다. 다만 이는 규정상 '원 소속팀으로의 복귀는 1년이 지나야 가능하다'는 규정 때문에 불가능하게 되었다. 트레이드 발표 자체는 5월 중순에 났지만, 규정상 공식 승인은 6월 1일에 떨어지기 때문에 아직 1년이 지난 기간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자랜드에 복귀하려면 서장훈을 다른 팀에서 영입한 뒤 트레이드 하면 되는데, 무상 트레이드는 영입하는 팀에서 할 이유가 없고, 맞트레이드는 전자랜드에서 할 이유가 없다. 결국 전자랜드 복귀 얘기는 흐지부지 되고 KT가 영입과 기용 의사를 밝히며 자연스럽게 KT행이 되었다.
  50. 아시아 최초로 NBA에 진출한 선수이다.
  51. 라고 하는데 칼같이 불어야 한다. 해외축구와 k리그에서도 좀 차이가 나는 부분인데, 물론 유럽축구라고 해서 부담스런 상황에서 항상 칼같이 부는 것은 아니지만 k리그보다는 훨씬 칼같이 분다.
  52. 사실 코트에서 욕을 자주 하는 편이기도 하다. 카메라맨도 서장훈이 욕하는 장면을 담기 위해 서장훈의 얼굴을 자주 찍는다. 파울을 당한 뒤 서장훈의 얼굴을 클로즈업하여 욕하는 입모양을 슬로우모션으로 보여주는 리플레이 장면은 농구팬이라면 수십 번은 봤을 장면. 하지만 서장훈 정도로 견제를 당한다면 욕이 안 나오는 게 외려 이상하다.
  53. 게다가 이건 오해에 가까운데 서장훈은 리바운드왕을 차지한 유일한 국내센터이며 커리어 말미에 크게 노쇠하기 전까지 리바운드 수치가 리그 최고수준이었다. 게다가 서장훈은 국제대회에서 야오밍을 상대로도, 하승진을 상대로도 맞상대하며 치열하게 몸싸움을 했지 피한 적은 없다.
  54. 실제로 서장훈은 심판에게 항의하는 이미지 때문에 과다하게 욕을 먹는반면, 김주성은 이미지로 인해 비판을 적게 받는 측면이 있다. 김주성이 깨끗한 사생활, 효자이며 한국 역대 최고 빅맨중 하나이지만, 리그에서 가장 헐리웃 액션을 많이 하는 선수이며 경기 매너도 그리 깔끔한 선수는 아니다.
  55. 이 사건 이후로 서장훈은 목 보호대를 하고 농구를 했으며 사실 이 당시 대부분의 의사들이 은퇴를 권유했다고 한다. 그러나 은퇴는 죽어도 하기 싫었던 서장훈은 보호대를 하면서 선수생활을 이어나갔다.
  56. 이상민을 응원하는 사람들의 약칭이자 팬카페의 이름. 이들은 극성팬으로 악명이 높았다.
  57. 다만 삼성은 서장훈이 떠난 이후에도 2번의 준우승을 기록하였다.
  58. 덕 노비츠키팀 던컨같은 2010년대 nba를 대표하는 빅맨들의 상징과도 같은 무브는 오히려 골밑 공격보다도 중장거리 슛이다.
  59. 이 문단에 많은 논란의 여지가 있는 것이 서장훈이 처음부터 몸싸움을 하지 않는다고 비판 받은게 아니다. 05/06 시즌 이후 서장훈은 골밑 플레이를 지양해왔고 그로 인해 평균 리바운드와 블록이 크게 줄어들었을 뿐만 아니라 경기를 직접 본 팬들이 서장훈이 이전보다 수비에서 적극적이지 않다고 비판한 것이다. 상황을 정확히 이해 못하고 비판적인 사람들을 전부 초보적인 비판으로 몰고 가는 것은 올바른 반론이 아니다. 위에 나온 초보적인 비판이라는 건 모든 비판에 대한게 아니라 상술되어 있듯이 서장훈을 "골밑싸움을 적극적으로 안한다는 이유로 스탯쟁이로 몰고가는" 비판이 초보적이라는 거다. 서장훈의 경기를 본 사람이면 누구나 말년으로 갈수록 그가 골밑에서 적극성이 줄었다는건 알겠지만, 그는 자신의 장점인 중장거리슛을 더욱 활용해 위력적인 선수로 남았다. 실제로 09시즌 중반에 트래이드된 이후 바닥을 기던 전자랜드를 기어코 6위로 이끌면서 "플옵보증수표"란 별명값을 했고, 그 다음 시즌엔 팀을 2위로 이끌면서 MVP 후보이자 베스트5에도 들었다.(물론 에이스는 문태영) 게다가 06시즌을 기점으로 리바운드가 줄었다거는 하나 이후 여섯시즌 중 부상에 시달렸던 07시즌을 제외하고는 전부 5~7개 사이의 리바운드를 기록했는데, 이는 김주성과 비슷한 수준이다. 원래 10개를 기록하던 선수가 6개 정도 잡으니 적어보이는거지 절대적으로 보면 적은 수치가 아니다. 게다가 서장훈은 막판 두 시즌전까진 왠만한 국내선수들은 털어버리는 포스트업 공격력을 보였다. 정리하다면 서장훈이 06시즌를 기점으로 골밑플레이가 예전보다 줄어든건 맞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력적인 선수였기 때문에 스탯쟁이 운운은 초보적인 비판이 맞다. 또한 골밑 플레이가 줄었다고 해도 국내선수들 중 상위권의 보드 장악력을 보였던 것도 사실이다. 독보적인 넘버원에서 "잘하는 수준"이 된 것일 뿐.
  60. 다시 강조하지만 그 김주성도 2015년부턴 3점슈터 역할도 하고 있다.
  61. 앞서 언급된 대로 국내 선수 중 평균 리바운드가 두자리 수를 넘긴 선수는 서장훈(네 차례)와 하승진 뿐인데, 그나마 하승진은 정확히는 9.95로 반올림해서 10리바운드다. 커리어 후반에도 6~7개는 올려줬으며 이는 국내 선수 중 상위권이며 김주성과 비슷한 수준. 김주성보다 리바운드 순위가 쳐진 적이 거의 없다. 몸싸움을 안하는 빅맨이 리바운드왕을 하는게 상식적으로 말이나 되는지 생각해보자.
  62. 실제로 아마추어때는 아예 골밑에 주력했고, 프로초창기 전성기 서장훈의 주 공격루트는 포스트업에 이은 골대 근처에서 페이드어웨이슛이었다.
  63. 30대 초반까지 경기당 삼점슛 성공갯수가 한 개 정도였다. 이때 서장훈이 20점 가까이 넣은걸 생각하면 실제로 3점슛이 차지하는 비중은 극히 적었다.
  64. 사실 나이가 먹고 체중이 늘어나면서 느려졌지만 본래 서장훈은 100m 13초대가 나올정도로 스피드가 좋았다. 실제로 서장훈이 대학농구에서 다른 선수들을 압살한 이유도 키도 키이고 힘도 힘이고 기량도 기량이지만 스피드까지 뛰어났다는 것이었다. http://sports.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kbl&ctg=news&mod=read&office_id=076&article_id=0001974936
  65. 서장훈 이전의 센터들은 주로 피딩이라해서 볼배급받으면 노마크에선 슛쏘고 아니면 외곽에 적당한 빈 선수에게 공배급해주는 역할이나 혹은 아주 가끔 일대일로 훅슛등을 쏘는등의 역할이었지, 서장훈처럼 주 득점원인 경우가 드물었다. 그래서 서장훈처럼 슛터처럼 페이스업 공격을 하는게 신기했을것이다. 그러나 전성기 서장훈의 주 득점루트는 포스트업으로 힘으로 골밑까지 밀고간후 페이드어웨이슛이 주득점원이었다. 즉, 단조로운 공격패턴이 문제였으면 몰라도 몸싸움 안한다는 비판은 제대로 플레이를 안본 비판이다.
  66. 뛰어난 수비수였던 추승균, 이상민, 김영만, 주희정 등등의 더 가벼운 선수들도 말년에는 수비 구멍이 될 때가 있었는데 뭘...
  67. 청주와 서울 두 연고지를 모두 경험했다.
  68. SK는 문경은전희철팀의 프랜차이즈가 아님에도 농구계의 전설에 대한 존경의 의미로 영구결번을 지정했기 때문에 서장훈에게도 이를 적용할 가능성이 있다. 2015년 시점에선 11번은 이현석이 달고 있다.
  69. 2016년 현재 SK 나이츠 역사상 유일한 파이널 MVP가 서장훈이다. 구단의 상징성은 충분히 있는 셈
  70. 삼성은 이상민이 11번을 이어받은 후 지금까지 11번을 단 선수가 없으며, 서장훈과 이상민이 동시에 영구결번을 받을 가능성이 있다. 단 이상민은 이미 KCC에서 지정되어 있으며 서장훈은 삼성 이적 전까지만 하더라도 삼성과의 사이가 껄끄러웠던 편이었던데다(대표적인 것이 연세대와 삼성전자간의 사건) 05-06 챔피언결정전에서는 비중이 낮은 탓에 팀간의 갈등이 있는 것도 사실.
  71. 당시 음주운전에 적발된 이후의 기사.
  72. 스포츠웹진 후추닷컴 인터뷰 <허재 - 드디어 후추를 만나다> (1999년 10월 24일 취재)
  73. 그 유명한 "문경은이 걔는 뭐...선수가 아니고..." 발언이 나온 인터뷰다.
  74. 실제 안티들이 서장훈을 폄하할 때 '기록만 신경쓴다.', '센터인데 왜 궂은 일을 하지 않느냐?' 라는 식의 비판을 많이 받았다.
  75. 궂은 일을 하는 선수가 팀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건 당연하지만 그 선수가 화려하게 득점하고 에이스 역할하는 선수보다 잘 한다고 볼 수 있는건 결코 아니다.
  76. 보통 어떤 스포츠건 궂은 일을 하는 선수는 팀의 입장에서 좋아하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그 궂은 일이 저평가받기 때문에 그에 대한 보상차원의 접근이다. 궂은 일이 주목받는 일이 많다면 그건 이미 궂은 일이라 부를 수도 없다.
  77. 본인과 관련된 설을 부정하는 멘트였는데, 어느새 서장훈 고유의 유행어가 되어버렸다.
  78. 대학생 때도 워낙 유명한만큼 예능에 나왔었는데, 심지어 미국 유학 직전에 연대 동문 박진영과 토요일 SBS 예능에 나와서 박진영은 유학을 말리고 서장훈은 가겠다고 고집하는 설정으로 유학여부를 가리는 자유투 내기를 했다(...). 물론 말도 안되는 내기이나, 당연히 서장훈이 이겨서 유학을 다녀 오긴 했다. 이 때 운동장에 서장훈을 보러 온 여성 팬들이 일부 있었는데, 내기 후에 내 팬은 여동생 밖에 없는 줄 알았다며 눈물을 흘리기도(...). 프로 선수 활동 중인 때도 SBS 야심만만에 게스트로 출연한 적이 있다.
  79. 그 전 녀석 이 무한도전에 편입할때랑 비슷한 루트를 타고있다. 길도 처음엔 서장훈과 비슷한 역할을 하다가 자연스레 무한도전에 정식편입되었었다. 문제는 이 사람이 전술했듯 이미 음주운전 두 번이나 걸린 사람이다. 그래서인지 다른 예능은 몰라도 무한도전에 출연할 때 만큼은 무한도전 고정멤버 설에 대해 매번 언급하고 매번 부정하려고 하지만 언제나 유반장에게 커팅당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80. 좀 말도 안되는 예시일수도 있지만 리오넬 메시와 기성용의 실력 비교가 불가능한가? 결코 아니다. 사실 굳이 다른 스포츠를 논할 것도 없이 "4대센터"로 불렸던 하킴 올라주원과 90년대에 이름을 날린 슈터 미치 리치몬드랑 비교해보자. 두 선수의 스타일도 포지션도 다르고,자유투 시합(...)을 한다면 십중팔구 리치몬드가 이기겠지만(두 선수의 통산 자유투성공률은 1할4푼이나 차이가 난다) 누구한테 물어봐도 MVP도 탄데다가 팀을 우승시키고 리그 최고의 선수 중 하나였던 올라주원이 더 뛰어나다고 할 것이다. 서장훈과 우지원의 경우도 업적과 실적 자체가 차원이 다르니 우열이 명확하다고 봐야 한다.
  81. 여담으로, 친구 같은 엄마가 되고 싶어하는 은하에게는 애가 잘못간다고 했고, 유단자가 되고 싶어하는 신비에게는 가스총을 갖고 다니라고 해서 역시 웃음을 자아냈다. 그래서 붙여진 별명이 '드림 브레이커'. 신비:내 꿈을 짓밟지 마!
  82. 언론에서 골리앗 센터를 공식 별명으로 썼는데 본인이 이미지가 나쁘다고 국보급 센터로 바꿔 줄 것을 요청했다는 루머가 있었는데, 종교적인 이유로 골리앗이라는 별명을 쓰지 말아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참고로 국보급 센터라는 별명도 기자들이 지은 것이지 서장훈 본인이 지은 것은 아니다. #
  83. 위에 서술한 04-05 시즌에 당한 목부상 이후 목보호를 위해 거의 항상 목보호대를 하고 나온다.
  84. 서장훈은 집에 들어오면 샤워를 1시간 동안 하고, 냉장고에 식료품을 유통기한대로 정렬해 놓을 정도로 깔끔한 성격인데, 오정연은 2~3일에 한번씩 머리를 감고 화장실에서 볼일을 본 뒤 물을 바로 내리지 않고 2~3번씩 본 뒤에야 내릴 정도라서 남편이었던 서장훈이 이를 이해하지 못 했다고 한다. 심지어 저게 누가 부풀린 것도 아니고 방송에서 오정연 본인이 한 이야기다.
  85. 시세를 해치지 않는 상식적인 선에서 임대료를 약간 낮게 잡고 받고 있으며, 아버지에게 맡겨놓고 굴리는 부동산이라지만 잡음이 들리지 않는 것으로 보아 임차인과 원만하게 지내는 것으로 보인다. 많게는 절반까지 깎아가며 임대료를 싸게 받는다는 소문이 돌고 기사까지 나오는 바람에 방송이나 인터뷰 등으로 여러 번 해명한 것으로 보아 그런 얘기 하지마아~ 사람들이 자꾸 와서 진짜냐고 물어봐아 ~ 이에 대한 스트레스가 심했던 것으로 보인다. 예능에서 본인 소유의 빌딩에 관한 토크가 나오면 불편해한다.
  86. 정치적 견해를 밝힘으로써 불이익 받지 않음은 국민의 기본적 권리 가운데 하나다.
  87. 그런데 본인도 혀를 내두를 정도의 깔끔쟁이가 있는데 바로 허지웅.
  88. 서장훈의 은퇴 직후, 방송활동을 왕성히 할 것으로 예상되지 않던 시절, 앞으로의 삶에 대해 인터뷰에서 "농구계에서 내 도움이 필요할 때는 언제든 돕고 싶고, (그럴 때가 아닐 때)평소에는 선수생활동안 감사히 벌었던 재산으로 조용히 감사하는 마음으로 충실하게 살고 싶다"는 표현을 한 것에는 원래 그의 이혼에 대한 세간의 평가가 신경쓰였던 게 컸을 거라고 평가되었지만, 실제로는 이런 건강쪽 원인이 컸을 가능성이 있다. 어떤 일이든 활발히 외부활동을 할수록 무릎에 지속적 타격이 갈 위험성이 커진다는 걸 스스로도 느꼈을 가능성이 있다. 그래서 방송활동이 활발해 진 이후에도 종종 방송에서 운동을 하거나 몸을 쓰는 코너에 출연할 때 "요즘 무릎이 안 좋아서 조심해야 된다"는 말을 자주 하기도 한다.
  89. 앞에서 서술했다시피 서장훈은 초등학교 때까지 야구를 했다가 중학교 1학년 때 농구를 처음 시작했고 1년간 기본기만 닦았다. 때문에 실전 첫 득점이 중학교 2학년 때였던 것.
  90. 사실 정확히 말하면 면제라는 등급은 따로 있다. 병무청의 정식명칭으로 5급이 제2국민역, 6급이 면제인데 제2국민역과 면제의 차이가 제2국민역은 특정기간 동안 1년에 하루 4시간, 이후 1년에 1시간 민방위교육을 받고 그나마도 대충 때우지만, 면제는 그것도 안 한다는 것밖에 없어서(흔히 알려졌다시피 민방위 교육은 예비군 훈련 수준도 안 되는 것으로, 훈련이라 부를 정도가 아니라 그야말로 민간인 대상 교육이다. 그냥 몇 시간 강의 듣는 수준에 불과하고 참여하지 않아도 벌금(형사처벌)이 아니라 행정처분인 과태료가 부과되어 전과가 생기는 것도 아니다.) 둘다 사실상의 면제로 느껴지고, 5급 판정자 수도 매우 적은데 6급은 그보다 더 적기 때문에 일반인들 대부분이 5급 6급을 구별하지 않고 둘다 면제라고 부를 뿐이다. 서장훈은 5급 제2국민역이었다.
  91. 신검 대상자중에서 매년 10명가량(200cm 포함) 나온다.
  92. 현재도 창원 LG 세이커스 연습체육관과 LG 트윈스 2군 연습구장은 이천 LG 챔피언스 파크에 나란히 있다.
  93. 레드벨벳이 나왔을 때 계속 아이린을 찾아댔고, 미공개 영상을 보면 하라케케 CF에서 췄던 춤을 춰달라는등...
  94. 2015년 6월 8일 힐링캠프에 출연했을 때 했던 말로 그의 농구에 대한 진지함과 프로로서의 집념을 그대로 말해주는 대목이다. 이 얘기를 꺼내기 전 그는 "농구로는 웃기고 싶지 않다."고 딱 잘라 말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