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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개요
대한민국에서는 서양 화교와 비슷한 시기인 19세기 말 즈음에 조선의 인천이 개항하며 노동자 신분으로 대량으로 유입되었다. 역사적인 유래를 따진다면 고조선 때부터 중국 한족들이 한국으로 유입되는 경우는 수두록했으니, 이들도 화교로 칠 수 있겠지만 오랜 시간을 거치면서 동화되었기에 논외로 친다.
다른 화교들과는 다르게 대한민국의 화교는 한반도와 가까운 산동성 지방 출신들이 많다. 산동성은 지리적 특성상 고대부터 중국에서 한반도 국가들과 가장 교류가 많은 지역이었다. 지도를 봐도 산동성이 한국에서 가깝고 광동성은 한국에서 멀다.
이로 인해 대한민국의 화교들은 다른 화교들과 소속감이 다르다고 한다. 일단 언어부터 다르다. 다른 화교들은 대부분 광둥성, 푸젠성 출신이라서 광둥어를 주로 사용하는데 반해 산둥성은 북방 방언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냉전시대의 특수했던 관계로 인해서 대부분 국적은 중화민국이다. 1992년 중국과의 수교가 이루어진 이후엔 다시 중국으로 국적을 변경한 사람들도 있다.
대한민국의 경우 정부 규모로(특히 박정희 정권 시절) 화교가 경제적인 실권을 쥐는 것을 지속적으로 견제했다. 특히 1961년 외국인 토지 소유 금지법으로 화교들의 부동산을 압수하고 소유 규모를 제한하였다. 직접적인 재산적 타격도 컸지만, 당시 화교들 중엔 부동산 중개업에 종사하던 이들도 많았기 때문에 이에 대한 타격도 컸다. 1962년의 화폐 개혁도 실제로는 화교들이 모아온 재산을 노린 것이라는 설도 있다. 당시에는 인플레이션 때문에 돈을 은행에 예치시키는 것보다 현금으로 집에 보관하는 것을 선호했기 때문에 이런 장롱예금들을 은행으로 끌어들여 산업화에 대한 자금으로 충당하고자하는 목적이었다. 지금도 이것이 화교들의 재산을 강탈하기 위해서였다는 이야기가 돌고 있다. 화교 노인들 얘기 들어보면 이때 환전량이 정해져 있어서 예금 안 하고 모아둔 현금 상당수를 울며 겨자먹기로 싸게 넘겨야 했다고 한다. 이후 1990년대 들어서 중국과 수교하며 완화되어가는 추세지만 여전히 제한이 있다. 이러한 차별 때문에 화교들은 상당수 귀화를 선택해 현재 한국 사회에 동화되었다. 자기가 말 안 하면 모를 정도.[1] 당연한 말이지만 귀화한 "화교"는 이제는 엄연한 대한민국 국민으로 멋 모르고 함부로 비하하면 안 된다. [2]
현재는 2011년 귀화자가 10만 명을 넘었을 때 중화인민공화국 출신이 7만 9천 명이었고 중화민국 국적자는 2천 명이었다. news.joins.com/article/4969953 을 참고할 것. 위의 언급이 사실과 다르다기 보단 한국 화교 사회가 1990년 이전에 작살났고[3], 그 빈자리를 중화인민공화국 출신 조선족이 메꾸어 조선족 귀화자가 더 많다고 보면 된다. 실제로 2000년대 이후 배달부나 노가다 같은 블루 칼라는 조선족들이 점령한 업종이 되었다. 이 조선족은 같은 한민족계라는 이유로 별 다른 불이익도 안 보고 되려 정부가 귀화를 권장하기까지 한다. 명분은 국적 회복이 명분이다. 이런 제약에도 틈새시장 돌파로 요식업 같은 분야에서 1위를 달리는 화교 기업들이 더러 존재한다.
2010년대 현재 대한민국의 순수 화교 인구[4]는 5만 명 정도로 나머지는 중화민국으로 귀국하거나 미국, 호주로 이민 갔다. 여기서 화교는 영주권을 가진 사람들을 말한다. 한중 수교 이후에 들어온 조선족이 주류인 중국인들은 한국 화교에 포함하지 않는 편이다.
결국 한국에 체류하는 중화민국인은 결국 크게 두 부류인데
- 산둥에서 온 화교들
- 근래에 대만 지구에서 온 사람들
로 나눌 수 있다. 대만에서는 이 두 부류를 노교(老僑,오래된 화교), 대교(臺僑, 대만에서 온 화교)로 구분하는 듯하다. 현재 국내 체류자의 인구 비율로 따지면
순서다. 중화인민공화국에서 홍콩과 마카오를 따로 놓는다면 그들이 가장 수가 적다. 그 이유는 노교들이 대규모로 한국에 귀화하거나 대만으로 돌아가서이다.[5]
2 역사
한국 화교를 줄여서 한화(韓華)라고 하기도 한다. 일단 화교, 화인, 화예의 용어 설명은 화교 참조. 한국내의 소수민족 문제이므로 최대한 객관적으로 서술, 수정바람
2.1 구한 말
한국 화교의 역사는 전란이 있거나 여러 이유로 한반도에 오던 중국인들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으나 특별한 공동체를 이루지도 못했고 한국 사회에 동화되었다.
본격적인 시작은 1882년 임오군란 이후 청군이 주둔하면서부터이다. 이 시기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에 의해 청나라 상인들이 내지에서의 상업 활동을 보장받으면서 일본 상인들보다 유리한 위치에 올라서게 되고, 조선 조정에 대한 청나라의 영향력이 강해졌다. 화교들은 주둔 청군의 도움을 받아 한반도 내에서 유통망을 확충하는데 힘썼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인 입장에서 보자면 초기의 화교들은 서양인이나 일본인 상인과 다를 바가 없는 썩 달갑지 않은 집단이었다.
한국 화교의 발생은 외국의 화교 집단과는 다르다. 다른 화교들은 농지 문제라든가 경제 문제 등으로 17세기부터 인구 유출이 발생한 복건이나 광동 출신들이 많았다. 19세기 이후 신대륙으로 간 화교들도 서양과의 교류가 많았던 이 지역 출신들이 많았다. 이들은 대체로 자신들이 간 나라에서 3D 업종부터 시작해 오늘날에 이르렀다.
그에 비해 한국 화교들은 인천과 직항이 있던 산동 지방 출신들로 위안스카이 등 실력자들이 한국에서 청나라의 영향력을 높이기 위해 의도적으로 유입시킨 것이다.
그러다가 1894년 발생한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청나라에게 승리하면서 조선과 청나라의 수교는 끊어진다. 5년 후 대한제국이 된 조선은 청에게 유리했던 과거의 수호조약을 수정하여 새롭게 조약을 건다. 이 시기에 화상들은 일상들(일본인 상인)에게 점유율 면에서 밀리나 그 전에 잘 확보해둔 유통망을 바탕으로 꾸준히 상업에 종사한다. 그러다가 1905년 을사조약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상실되고 청나라 역시 망해 중화민국이 들어선다.
2.2 일제 강점기
중화민국은 일본과 새로운 수교를 맺게 되고 일본은 자국 상인들이 조선에서 힘을 갖도록 하기 위해 화상을 견제한다. 화상들의 주요 교역 상품은 영국이 만든 포목이나 자국의 비단 등인데 일본은 1920년대 말에 높은 관세를 붙이는 식으로 이를 견제한다. 그러자 화상들은 한약상이나 청 요릿집 등을 차리고 주물공장 등을 운영한다. 이들의 숫자는 1930년에 6만명에 이른다. 당시 조선의 인구가 갓 2000만 정도를 넘겼고 일본인이 약 70만을 차지했는데 화상들은 조선 전체의 상인에서 2%를 차지했다.
특이할 만한 사항은 이런 화교들에 포함되지 않는 계절 노동자도 꽤 많았다는 것이다. 1920년대 조선에서 발생한 토목공사에는 산동에서 겨울이나 봄에 일자리를 찾으러 온 중국인 노동자들이 많았다. 비공식적인 추계론 1927년에 17만의 중국인 계절 노동자들이 왔다는 분석도 있다. 이들은 일본인 임금의 절반 수준인 조선인보다 임금이 좀 더 쌌다. 화교 중에는 농업에 종사한 이도 많았다. 화농(華農)이라고 하는데 이들은 주로 채소를 재배했고 채소를 구매할 구매력을 갖춘 일본인들을 상대로 장사를 많이 했다. 그리고 돈을 많이 벌어도 저축만 하고 소비를 잘하지 않는 특성상 경제적인 이유로 인해 조선 내에서 반중 감정은 점차 강해진다.
중국 본토에서는 동북지방, 즉 만주에 일본인의 침략이 심해지면서 반한 감정도 나타난다. 지금엔 그게 무슨 개소린가 하는 생각이 들겠지만 당시 먹고 살기 막막해 만주로 이주한 조선인들의 공식적인 국적은 일본이었다. 독립운동가들이 해외에 가기 위해 중국인 여권을 위조하던 시절이었다. 1931년에 만보산 사건이 일어난다. 일본 정부의 지원을 받은 조선인 농민들이 경작하기로 한 땅에 가는 관개수로를 중국인 농민들이 덮어버린 일이었다. 중국 지방정부의 허가를 받는 과정에서 승인이 제대로 나지 않았는데 일본은 무리하게 공사를 강행했고 이로 인해 중국인들과 그 땅에서 농사를 짓기로 한 조선인들이 대립하게 된다. 일본군경은 자국민인 조선인을 보호한다는 이유로 무장 경찰을 보냈고 중국 정부도 무장 경찰을 보낸다. 조선인과 중국인의 충돌이 일어나자 일본 경찰은 발포를 하였는데 싸우다 찰과상을 입은 정도 수준에서 사태는 끝났다.
문제는 이를 보도하던 과정에서 총독부가 루머를 퍼뜨렸다는 것이다. 총독부는 마치 중국인과 조선인의 싸움에서 조선인이 당해 사상자가 많이 발생한 것처럼 소문을 퍼뜨렸고 분노한 조선인들은 서울, 평양(한반도 북부 최대 도시)과 천안(보부상 등 당시의 유통 경로상 중요한 곳), 인천(대표 항구) 등 화교가 많은 지역에서 폭동을 일으켰다. 조선인들은 1주일 동안 화교들의 가게를 공격하거나 했고 일본 정부는 만주 침략을 위해 조선인과 중국인의 갈등을 일부러 더 조장하려고 일본인을 조선인으로 둔갑시켜 폭동에 참여시키거나 조선인 깡패에게 돈을 줘 화교들을 공격하게 했다.
상황 발생 후 1주가 지나서야 총독부는 진화에 나서지만 약 100여명의 화교가 폭동으로 사망했다. 수치는 조선총독부 경무국은 사망 97/부상 118, 중국측에선 사망 142/부상 546, 국제연맹의 만주사변 조사 보고서에는 사망 127/부상 392. 이 폭동으로 약 4천명의 화교들이 중화민국 영사관으로 대피했다고 할 정도였고 6만이었던 화교의 숫자는 그 해 겨울에 3만으로 반토막이 난다.
다행히 일본의 이간질이 개입됐다는 것을 안 조선과 중국의 지식인들은 반일전선을 강화하기 위해 진실을 알리려고 노력했고 그 해 겨울에 윤봉길 의사가 훙커우 의거를 행하면서 조선과 중국의 감정은 완화된다. 그러나 1931년 만보산 사건 후 일어난 일은 화교들에게 꽤 큰 트라우마로 남아 있다.
1930년대에 만주사변, 중일전쟁이 일어나면서 화교들은 적성국의 국민으로 조선에서 생활하게 된다. 화교들도 친일파와 반일파로 나뉘어 갈등을 빚게 된다. 특히나 전쟁으로 본토와의 무역이 불가해지면서 화교들은 위축된다.
2.3 해방공간
1945년 일본이 패망했다. 한국에 진주한 미 군정은 2차 세계대전의 연합국인 중화민국인인 화교들에게 우호적이었다. 기존의 식민지 시절의 네트워크였던 만주, 북한 지방, 일본과의 연결이 끊기면서 한반도 남부의 화교들은 중계무역 등을 독점하게 된다. 1946년엔 전체 무역량의 82%, 1948년에는 52.5%를 차지할 정도였다. 당시 화교의 숫자는 북부 지방에 5만, 한국에 2만 정도가 살았다. 이런 화교들의 짧은 전성기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정부와 각종 사회 기능이 회복되면서 점점 줄어든다. 거기에다 본토에서 국공내전이 발생하고 1948년 한국 정부가 외국인의 출입을 제한하고 1949년 세워진 중화인민공화국이 자국민의 해외 이주를 금지하면서 중화민국인들은 이산가족이 된다. 특히나 전쟁 직전에 한국 정부는 밀무역을 막는단 이유로 전국에 창고봉쇄령을 내려 중계무역을 하던 화교들은 타격을 입는다. 특히나 한국인들은 공업화를 하는데 중화민국이나 홍콩 같은 중화계보다는 재일 한국인이 많은 일본을 주요 수입 기지로 삼는다.
2.4 전쟁과 대한민국 내
1950년 한국에서 전쟁이 터지면서 북부에 살던 화교들 중 약 1만명이 중국으로 가거나 한국으로 월남한다. 장제스는 국공내전 직후인지라 다시 중화민국군을 투입하는 방안을 미국에 제안하지만 확전을 원치 않던 미국은 거절한다. 대신 국군에 화교들이 통역이나 인민해방군을 상대로 한 심리전에 투입된다. 사실 이는 통역병에 해당하는 얘기고 일부는 자원하여 실제 전선에 투입되기도 했다. 주로 반공화교들로 추정된다. 당시 화교들은 전국에서 부산으로 피난을 많이 갔는데 군복을 입고 휴가 나온 화교들이 자주 임시 화교학교에 나타났다고 한다.
이들 중 일부는 나중에 대만으로 가 대만군에 참여하기도 했다고 한다. 한국 화교 중에 대만의 사관학교에 가 대만군이 된 사람도 꽤 있다고 한다. 예전에 화교들은 대만에 들어가 몇 개월 이상 있으면 대만군에 입대해야 했다. 현재는 모병제가 도입되어 그럴 필요는 없지만. 국제 사회에서 중화민국의 대표성을 세우고 싶었던 장제스는 해외의 화교들에게 이를 얻기 위해 한국 화교를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한국 화교들은 대만 입시에서 꽤 혜택을 받은 편이었고 중국어를 배우기 위해 대만의 중고등학교로 올 수 있게 여러 지원책을 마련한 게 오늘날까지도 남아있는 편이었다. 심지어는 군함을 동원해 화교들이 대만에 와서 교육을 받을 수 있게 지원하기도 했다. 한국 정부도 대만과의 협조를 위해 중공군 중 4천명의 반공포로를 석방해 대만으로 보내기도 했다.
한국 전쟁이 끝나고 화교들은 사실상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했던 상업 행위를 포기하게 되고 요식업으로 가게 된다. 국내 산업 보호를 위해 1950년 창고봉쇄령과 화폐개혁, 그리고 1962년의 외국인 토지 소유 금지 등으로 인해 화농이 몰락하고 화상들도 헐값에 땅을 팔게 된 것이 그 이유다.[6] 화교 요식업자들은 피로연 같은 큰 행사를 많이 했는데 토지 소유 제한으로 대규모 영업장의 운영이 불가능해진다. 운이 좋은 경우엔 한국인 바지사장을 내걸기도 한다.
박정희 정권에 들어와서도 상황은 마찬가지였으며, 국내공산업 발전을 위한 국산품 애용, 국민의식 고취 노력이 더 강해지며 화교 억제 정책은 계속되었다. 1970년엔 주거용 200평, 영업용 50평으로 약간 제한이 풀리긴 하지만 영세한 수준을 벗어나기 힘들었고 이러한 외국인 토지 소유 제한은 외환위기 이후에 풀리게 된다. 1970년엔 단 몇 개월 뿐이긴 하지만 중식당의 쌀밥 판매 금지 조처가 내려진 적도 있는데 화교들에게 상당히 심리적으로 위축될 만한 일이었다. 4천 곳에 달하던 화교 식당은 1천 곳으로 줄어들었다. 대신 미국에 한국화교들의 식당이 2천 곳이 생겼다.
다만 당시 한국과 중화민국(대만)은 서로 상당히 우호적인 편이었다. 아무래도 당시 한국과 대만이 정치적으로 밀월 관계였기 때문에 그런듯. 1964년 프랑스, 1972년에 일본, 1979년에 미국이 차례로 중화민국과 단교한데 비해 한국은 1992년까지 수교를 유지했다. 하지만 한국 또한 1980년대부터 중화인민공화국과의 관계 개선을 추진했다. 중국 본토과의 수교가 가시화되면서 소공동 쪽에 주로 거주하던 화교들이 본토와의 연결이 상대적으로 편한 연남동 등지로 이주하기도 했다.
2.5 1990년대에 이르러
1992년 한국이 중국과 수교하면서 중화민국, 즉 대만과는 단교했다. 한중수교 양해각서 및 국제법과 국제관례에 따라, 명동 자리에 있던 중화민국 대사관은 그대로 중화인민공화국 대사관이 됐는데 대만 정부가 혹시나 해당 부지를 대만계 단체 등에 팔 것을 우려해 한국 정부는 단교 1주일 전에 비밀리에 통보하고 3일 전에 공식 통보함으로써 물리적인 시간을 주지 않았다.
결국 대만 정부는 부지를 그대로 중국에게 넘겨주게 되고 청천백일기가 내려가고 오성홍기가 올라가는 동안 화교들이 몰려들어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그나마 한국 정부는 신사적인 편이었는데 프랑스나 일본은 단교 때 수도와 전기를 끊어버리고 경찰을 투입해 저항하는 대사관 직원들을 퇴거시켰다. 미국 같은 경우에는 시간을 주어 대만이 대사관으로 쓰던 부지를 대만계 단체에 매각할 수 있도록 했는데 그 자리를 그대로 자신들의 대사관으로 쓰려던 중화인민공화국에게 자국 내 재산 동결과 같은 보복 조치를 당하기도 했다.
어쨌든 1992년은 화교들에게 있어서 중대한 분기점이었는데 근래에는 신화교의 등장에 한국에서 중국 대륙인을 보기가 쉬워졌고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중화인민공화국에 우호적인 화교들도 꽤 있다고 한다. 다만 중장년층 이상 화교에선 여전히 중국 대륙인들을 빨갱이로 보는 사람들도 많다. 화교들은 중국 국민당 당원들도 꽤 있는데 최근엔 대만 독립파를 지지하는 화교들도 소수이긴 하나 있다. 그런데 이렇게 되어버리면 본인 연고가 산둥이 맞다면 중화인민공화국을 택하지 않는 한은 진짜 대만 독립하면 자신의 국가정체성은 완전히 없어진다는 것을 생각할 필요는 있다.
한국 화교는 1970년대 최대 8만에 이르렀다. 전쟁 이후에는 베이비 붐과 월남자 등으로 인한 자연증가. 근데 수치에 따라 12만까지 보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국내산업보호를 위한 외국인에 대한 제한조치로 1990년에 2만명까지 줄어들게 된다. 이들은 대만으로 돌아가거나 북미로 이주했다. 한국에서 나고 자란 탓에 다시 돌아오는 경우도 꽤 있다. 토지 소유 제한 등으로 화교들은 전문직 등으로 진출하게 되고 중화민국이 그래도 꽤 살았던 탓에 한국에서 대학 입학 등에서 괜찮은 편이었다. 화교들은 의대, 한의대등 알짜배기 학과에 입학할때 특별 전형을 통해 들어온다. 이 때문에 해당 직종 종사자들도 화교에 대해 호의적이지 않은 사람들이 있고 심지어 세계 어느 나라에서 외국인한테 알아서 만렙 채워주냐고 까는 사람도 있다.
화교들을 보면 의사나 한의사가 꽤 많은 편이다. [7] 그래도 가장 많은 건 식당이지만. 캘리포니아에는 약 1만명에 가까운 한국 화교들이 이주했는데 민남어를 쓰는 복건이나 광동어를 쓰는 광동 출신들과 달리 대부분이 산동 출신이라 소속감이 달라 한국 화교들은 차이나타운 대신에 코리아 타운에 거주하는 경우가 많다. 중국어의 방언간 차이는 웬만한 유럽 언어들의 차이보다 크다고 보니깐.
1989년 천안문 6.4 항쟁에 참가했다가 중국 정부의 탄압과 체포를 피해 한국으로 온 사람들도 많다. 이 사람들은 자신들이 중국이 아닌 홍콩이나 대만에서 이주해온 것으로 위장하면서 국내 화교 단체와도 연관을 맺지 않는다. 자국에 대한 증오가 아니라 혹시 있을 지 모를 테러를 피하기 위한 것이다.그 중에는 아예 한국인처럼 융화된 사람도 적지 않다.
1990년대 이후에 태어난 화교들은 중국어가 스펙이 되자 중국어를 배우러 교육기간의 일부를 대만이나 중국에서 보내는 일이 생기고 있다. 집에서 중국어 사용이 줄어들고 화교학교 교육으로도 부족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화교 3세대의 경우 모어는 거의 한국어라 봐도 무방하다.
2.6 한국 화교들의 정체성
대한민국 귀화 화인이 아니라 아직도 귀화 안 한 화교들은 대부분 중화민국(대만) 국적을 유지하며 한국과 마찬가지로 가부장적이며 민족주의적인 기질이 강한 편이다. 속인주의 국가인 한국과 중국 때문에 대부분 3세대에 이르러서도 중화민국 국적을 유지하고 있으며 한국으로 귀화하는 사람은 연 100명을 밑도는 수준이었다가 최근에 들어서는 한국 원주민과의 결혼이 급증하여 늘고 있다. 특히 화교 여성의 경우 대놓고 한국 원주민 남자를 선호하기도 한다. 그리고 자식을 한국인으로 키운다. 어차피 같은 황인에 이름도 한국식 독음으로 하면 거의 똑같아 못 알아본다.
통혼에 관해서는 화교들은 한국인 남자와 화교 여자가 결혼하는 것에는 부정적이지만 화교 남자가 한국인 여성과 결혼하는 것에는 상당히 관용적이다. 그나마도 무너지는 편이라 화교 3세대 여자의 경우에는 한국인 남자와 결혼하는 일도 꽤 많다. 특히 통혼은 최근에 잦은 편으로 한성화교학교의 경우에 학생들의 절반 가량이 어머니가 한국인이다. 아버지가 한국인이고 어머니가 화교인 화교가 잘 없는 이유는 한국이나 중화민국이나 부계를 따르는 편이라 화교 여자들이 한국인으로 귀화해버리기 때문. 예시로 하희라가 대표적인 예시일 것이다.
1992년 한국이 중화인민공화국과 수교하면서 중국은 화교학교 등에 중국 본토식의 교육을 하라고 압력을 넣고 있는 편이고 화교들도 새롭게 넘어오는 신화교 등의 문제에 있어서 다양한 의견을 내고 있는 편이다.
화교들에 대한 차별 조치도 많이 개선된 편이다. 예전에는 3년 또는 5년 마다 장기거주외국인(F2) 사증을 갱신해야 했고 등본을 떼려면 동사무소가 아니라 출입국사무소에 가야 했지만 2002년부터 영주권이 나왔다. 그리고 지역사회의 시민으로서 지방 참정권은 허용됐다. 물론 한국 국민은 아니므로 국회의원이나 대통령은 안 된다. 다른 선진국들도 영주권자에겐 지방 참정권만 허용한다[8]. 애초에 자국민과 똑같이 대접할 수는 없으니까.
화교 1, 2세대는 거의 완전한 중국인 정체성을 가지고 화교학교 등의 민족 교육을 통해 강화된 것이 있지만 아래로 내려갈수록 한국에 동화되는 사람도 많다. 특히나 3세대에 이르면 제1언어가 한국어가 되어버리고 중국어는 나중에 따로 배우는 경우가 많다. 이는 재일교포 사회에서도 흔히 보이는 현상이다.
화교 학교에서도 되도록 중국어를 쓰게 시키지만 학생들끼리 있을 땐 한국어로 대화할 때가 많다. 화교학교에 안 다니는 화교들도 한 10% 정도 되는데 이런 사람들은 자기가 화교인 줄도 모르다가 귀화하거나 성인이 돼서 알 때도 있다. 대표적으로 하희라. 뭐 화교들도 사람이다 보니 중화사상에 심취해서 혐한이 된 인간들도 있고 차별 때문에 반한 감정이 있는 이도 있고 동화돼서 자기가 화교인지도 모르는 사람도 있고 다양하다. 이건 어느 민족이나 마찬가지다. 한국 사람 역시 국까와 국뽕이 존재하듯이.
상당 수가 한국인 혈통이 섞여 버려서 자기 정체성에 대한 고민도 많은 편. 그래도 한국인들 입장에서는 다른 사람들이라는 인식이 있어 혐한이나 반한인 화교들이 눈에 잘 띄기는 한다. 그리고 아무래도 한국인에 동화되다보니 화교들 중엔 기독교 신자들도 많은 편이다.[9] 특히 인천광역시의 화교들은 거의 다 가톨릭이나 개신교를 믿는다.[10]
한국인 남성들 입장에선 군대에 안 간다는 게 화교 남성들을 싫어하는 이유가 되는 경우가 있다. 다만 한국군에서 귀화 안 한 외국인을 입대시키지 않는다는 점과 한국과 중화민국 다 속인주의 전통과 민족주의 전통이 강한 탓에 국적을 바꾸는 것이 개인에게 상당히 결단이 필요하였었다는 점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사실 공무원이 되려고 하거나 여러 차별이 싫어서, 귀화하는 화교 중엔 군대 가는 사람도 있다. 특이 케이스인데 행정착오로 한국과 대만 국적이 모두 말소되어 무국적자가 된 예비역 육군병장 화교도 있다만 현재는 정상적으로 대한민국 국적을 부여해 주고 예비군도 간다. 예전엔 재산 5,000만원이라는 귀화의 조건이 있는데 요새는 많이 약화된 편이다. 또 군의관 3년 갔다오니 유급 2번 당했던 화교 동기가 이미 개원해서 자리 잡은거 볼때 참으로 상콤함을 느낄 수 있다. 물론 군필 귀화 화인의 경우 해당없는 얘기. 어차피 이쪽이면, 특히 모계가 화교인 하프인 경우는 그냥 똑같은 한국사람일 뿐이다.
한국에서 여진족이나 항왜가 동화되어 소멸된 뒤에 거의 유일하게 남은 소수민족이다. 항왜 같은 경우에는 초기에 자신들의 거류 지역을 만들어 일본의 생활습관을 유지하였으나 이를 달갑지 않게 여긴 조선 정부에 의해 조선에 동화되었고 여진족은 함경도 북부에 상당수가 살았으나 점차 동화됐고 구한말에 재가승이란 이름으로 4천명 정도가 남았고 일제강점기까지 살아남았으나 순수 혈통에 집착 쩌는 볼드모트김일성이 박살냈다. 확실히 타민족 간에 통혼을 하게 되면 동화가 금세 이뤄진다.
화교들이 한국을 떠난 이유 중에는 정책적인 차별도 있지만 교육 문제도 있다. 한국이 고도의 학벌사회로 성장하는 가운데 화교학교는 학력을 인정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검정고시를 쳐서 한국 수험 과정을 밟거나 대만의 대학교를 준비해야 하는데 해외에서 자국 입시를 준비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일단 화교학교 자체는 대만 입시를 준비한다. 한국 대학에 화교들 특별전형으로 들어가는 거 있지 않냐고 싶겠지만 그걸로 들어갈 수 있는 인원은 그리 많지 않다. 화교 학교 다니면서 한국 수능을 별도로 준비하는 건 힘들고 한국에서 좋은 대학을 나오기 어려우니 대만이나 미국으로 간 것이다. 정작 미국 가서는 코리아타운에서 살지만... 이런저런 이유가 겹쳐서 1970년대 초반에 10만에 가깝던 인구가 지금은 1/4로 줄은 것이다.
재일 한국인의 경우엔 조선대학이란 학력은 인정 못 받는 대학이 있긴 하지만 화교들에겐 화교 대학이 없다. 조선대학교와는 다르다!
한편 화교들과 그 본국 중화민국과의 관계도 복잡하다. 위에 언급했듯이 대체로 한국 화교들은 '중국인'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중화민국이 '대만'을 강조하면서부터 연계가 더욱 소원해지는 감도 있다. 이들은 '중화민국인'은 맞지만 '대만인'은 아니다. 물론 자기 소개를 할 때 (중국이라고 하면 중화인민공화국을 연상하므로) 편의상 남에게 '대만인'이라고 말하는 경우야 많다.
또한 한국 화교들은 중화민국 본국에는 호적이 없어서 국민 신분증[11]번호도 없다. 현재 중화민국 정부는 여권 발급에서 '무호적 국민'에 대한 차별을 하고 있다. 외관상 타이완 섬 거주민들과 차이가 없는 여권이지만 효력의 차이는 굉장히 크다[12]. 중화민국 국민에게 비자를 면제하는 나라에 갈 때도 무호적 국민은 그 혜택을 받지 못한다. 심지어는 무호적 국민이 본국에 들어가는 경우도 비자를 받아야 한다[13]. 그래서 중화민국 국적을 유지하는 화교가 대만에 가는 것보다 대한민국으로 귀화한 화교가 가는 것이 오히려 쉽다(중화민국은 대한민국 국민에게 90일간 무비자 입국을 허가하므로).
이 무호적 국민이란 개념은 리덩후이 정권 때인 1991년에 생긴 것으로 보인다. 관련 글. 중국어(정체자)이다. 본국인 대만에서는 '억울하면 와서 호적 만들어라' 하는 식인데 이게 쉽지도 않을 뿐더러 남자의 경우는 대만이 징병제 국가라 군대 문제가 걸리게 된다. 결국 한국 화교들이 본국 정부에 시위를 한 사례도 있었다. 한국 화교들의 주장에 의하면 천수이볜 정권 이후로 호적 만들기가 어려워졌다고 한다. 기사 1기사 2
하지만 국부천대 이후의 중화민국은 축소된 영토에 많은 사람들이 있고 수많은 화교들마저 많이 와버리면 국가 경영에 상당한 어려움을 겪을 것이기에[14] 이런 차별 정책을 해 오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물론 중화민국의 무호적 국민이 대한민국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다른 나라 거주 무호적 국민도 당연히 있고 유튜브 검색해 보면 필리핀 화교가 대만에서 비슷한 이유로 시위를 한 사례도 있다.
좌우지간 이러한 제약 땜에 현재는 귀화 화인이나 하프들이 더 눈에 띈다. 귀화자의 대표적인 예는 앞서 언급한 이연복 쉐프나 가수 주현미 씨 등이다. 그리고 모계가 화교인 하프 2세는 아예 이런 저런 복잡한 거 따질 거 없이 한국인이다. 간혹 자기가 화교 2세인 걸 모르는 경우도 있다.
2.7 맺으며
화교들의 등장은 제국주의 시대에서 한국인들에게 달갑지 않은 일이었고 화교들의 경제권을 견제하기 위해 한국이 반중감정과 차별을 이용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이 이미 100년 이상을 한국사회의 일원으로 살아온 점을 감안하고 비판적으로 볼 점은 비판적으로 보고 받아들여야 할 점은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민족분단이나 전쟁 등 한국 화교들은 한국인과 비슷한 배경을 지녔고 한국 사회에서 오랫동안 정착해 살아왔기에 이들을 연구하는 것은 앞으로 계속 늘고 있는 한국 사회의 다양성과 그에 따른 문제를 어떻게 풀어가느냐에 중요한 실마리가 될 것이다.
3 화교 현황
2010년 기준으로 화교 숫자는 21,490명 수준이다. 이중에 13,316명이 영주권비자(F-5)이며 거주비자(F-2)는 6,569명이다.
다만 이들은 자발적인 집계이고 실제 숫자는 화교 3세이상을 합산하면 5만명 가량이다.
서울특별시 | 8,769명 |
경기도 | 2,484명 |
인천광역시 | 2,839명 |
부산광역시 | 1,732명 |
대구광역시 | 871명 |
충청남도 | 647명 |
전라북도 | 585명 |
충청북도 | 569명 |
강원도 | 558명 |
대전광역시 | 514명 |
경상북도 | 432명 |
경상남도 | 358명 |
광주광역시 | 334명 |
제주시 | 295명 |
울산광역시 | 282명 |
전라남도 | 221명 |
서울시 서대문구의 연희동과 연남동(연희동 남쪽이란 뜻)엔 전통적으로 화교가 많이 살고, 근처에 화교 중.고등학교도 있다. 이 화교 학교가 전국적으로 대표적으로 큰 화교 학교에 속한다. 하지만 교육 현실은... 주차 안내표시에 중국어 번체로 안내도 적혀 있고 근처의 중국집 중에 화교가 운영하는 곳이 많다.
4 신화교
1992년 한중 수교 이후에 들어온 대륙의 중국인들을 말한다. 2012년 한국의 체류 외국인은 144만명으로 장기체류자 112만명, 단기체류자 32만명 선이다. 여기에 잡히지 않는 불법체류자는 17만명 정도이다. 한국 정부는 중국인과 한국계 중국인, 즉 조선족을 구분하는데 합법 체류자 가운데 중국인은 25만, 불법체류자 중에 중국인은 5만명 정도 수준으로 한국 내에 화교를 제외하고 약 85만의 중국계 인구가 있는 것이다.
5 유명 인물
화교와 화인(귀화자)의 구분 없이 일단 다 화교로 기재한다. 중화인민공화국 귀화자는 제외한다.
5.1 연예인/스포츠/기타
- 공상정: 1996년생 쇼트트랙 선수. 춘천 화교 출신 의사의 딸로 화교 3세다. 중3이던 2011년 특별귀화 신청을 인정 받아 가족이 함께 귀화. 2014 소치 동계올림픽 3000m 계주에서 금메달을 따서, 화교 귀화자 출신 첫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화교학교 출신이 아닌 일반 한국 학교를 나왔다.
요새는 한국인들이 중국어 배운다고 편법 써서 화교학교 들어가고 화교들은 한국학교 간다. - 나광훈: 1962년생 배우.
- 단영: 1978년생 배우.
- 강래연: 1981년생 배우
- 소소경: 1979년생 前 프로야구 선수. 중화민국 국적이지만 중학교 고등학교를 대구광역시에서 다녀, 규정에 따라 국내 선수로 활동하였다. 1998년 해태 타이거즈에 입단하여 2005년에 이원식과 함께 LG 트윈스로 트레이드 되었다. 이때 트레이드 상대가 홍현우,이용규 였다. 은퇴후 2014년 현재 대전 유천초등학교 야구부 감독으로 지내고 있다.
- 손성희
버즈의 손성희가 아니다: 1990년생 가수. 필서진과 마찬가지로 대만에서 활동 중이다.(대만 활동시 이름은 孫盛希/Shi Shi) 부모님이 모두 중화민국 국적의 한국 화교며 고향은 강릉시. 연세대 재학시절 밴드 동아리 "소나기" 에서 보컬로 활동한 이력이 있다. - 이기용: 1985년생 모델 겸 배우. 아버지가 한국인으로 귀화했다고 한다.
- 이연복: 1959년생 요리사. 중식당 목란 운영. 한국으로 귀화
- 장채희: 김창렬의 아내.
- 주현미: 1961년생. 광주광역시 화교 출신으로 트로트 가수이다. 한의사인 아버지의 영향으로 약사일을 하다가 음반을 취입하였다. 현재는 한국인으로 귀화.
- 필서진: 1989년생 가수. 대만에서는 Bii, 혹은 Bii畢書盡으로 불린다.(2013년부터 후자를 더 많이 씀) 아버지가 중화민국 국적의 한국 화교, 어머니는 한국인인 혼혈이며 고향은 성남. 중화민국 국적이지만 성남에서 화교학교가 아닌 일반 한국 초중고를 다녔다. 2006년 성남정보산업고(현 성남금융고)2학년을 중퇴, 홀로 대만으로 건너가 트레이닝을 받고(당시엔 중국어를 전혀 할 줄 몰랐다고 한다) 2010년 대만에서 데뷔하였다. 이후 2012년에 해군에 입대하였고 대만 시민권을 취득, 완전한 대만인이 되었다. 2013년 제대후 발표한 2집 Come back to Me의 동명 타이틀곡이 대박을 터뜨리면서서 대만 현지 소녀팬들의 우상으로 급부상하였다. 앨범 수록곡의 대부분을 작사작곡하며 거의가 대만 드라마 주제곡 및 삽입곡으로 쓰였다. 타이틀곡은 한글 가사가 짧게 들어가 있거나 중국어/한국어 두 가지의 버전이 존재한다. 심지어 한국어로만 된 노래도 있으며 공연이나 시상식 등에서 노래하기도 했다. 여담으로 한국에 있었을 때 자신을 SM관계자라고 소개한 의문의 남자에게서 명함을 받고 어머니에게 보여드렸더니 어머니가 그거 다 사기꾼이라면서 갈기갈기 찢어버리셨다고...
만일 진짜 그 남자가 SM측 사람이었고 어머니가 승낙하셨다면 대만이 아닌 한국에서 볼 수 있을텐데... 하지만 뒷날 라디오 방송을 통해 슈주와 친분을 쌓았으니 아주 인연이 없진 않은 듯. - 하희라: 1969년생 배우로 최수종과 결혼하며 귀화하였다.
- 후인정: 배구 선수로 귀화했다. 역시 배구 선수, 감독 출신인 아버지 후국기나 다른 가족들은 중화민국 국적을 유지하고 있다. 국적 때문에 한국 대표선수가 되지 못했던 아버지의 영향이 컸다.
- 김승희: 1974년생 가수. 2014년에
한국나이로 무려 41세에데뷔하였고 대만 현지에서는 RK金承熙라는 이름으로 활동중이다. 필서진과 마찬가지로 대만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자랐으며 국적은 한국.필서진이 혼혈치고 타고난 미모와 관리로 예쁘장한데 이쪽도 나이만 조금 있을 뿐 미중년이다한국에서 10여년간 연습생 겸 보컬 트레이너로 있어서인지 대만 데뷔 앨범 홍보 영상에 티아라와 다비치 등"당시" 코어 소속가수들의 축하 메시지가 있다. 대만 데뷔곡 10:10은 별에서 온 그대의 대만판 삽입곡으로 쓰임. - 강육항: 1958년생 가수. 서울에서 태어나서 대만으로 건너가 가수활동을 했다. 이문세 등 한국노래를 번안해서 부른 노래가 몇곡있다. 대만 TV를 보면 나름 인기가수 인듯하다. 대만 TV 에서 번안곡을 부를 때면 한국어 가사를 중간에 넣는 경우도 있다.
5.2 기업인
해방공간 당시 화교들은 대중(對中)무역 등으로 인해 1946년에 수입액의 90%를 화교가 차지할 정도였으나 중국의 국공내전에 의한 무역중단[15]과 한국 상인들의 역량 회복[16], 한국전으로 인한 창고봉쇄령[17], 화폐개혁[18], 부동산 제한 등으로 화교들의 경제력은 미미한 수준이 되었다. 그러던 것이 1990년대 들어 중국과의 교역이 늘어나면서 한국어와 중국어를 둘 다 구사하는 화교들의 경제 활동에 많이 참여했다.
화교들은 유독 요식업자가 많은데 중국 수교 이전에는 한국 기업에서 임원으로 승진하기가 힘들어서 중간에 나간 케이스가 많다. 그리고 한국 화교는 산동 출신들이라 광동이나 복건성 출신의 화교들과는 교류가 적은 편이다.
- 담도굉(譚道宏): 베이징현대차 총경리(부사장). 설영흥의 추천으로 영입되었다. 1959년생으로 한성화교학교, 고려대 경영학과를 졸업했다. 현대정공(현대모비스)에서도 근무했다. 2015년 8월에 현대자동차 중국법인의 전략담당부사장으로 발령났다. 설영흥이 물러난 뒤 한국인인 최성기가 이어 받자 중국 정부와 조율이 잘 안 되서 다시 화교를 발탁한 케이스로 재계에서 보고 있다. 설영흥은 정몽구와의 친분으로 유입된데 비해 담도굉은 현대에 입사해 실력으로 승진한 케이스이다.
- 담철곤(譚哲坤): 1955년생으로 오리온의 회장이다.
현재는 횡령, 배임으로 집행유예결혼후 한국인으로 귀화. 조부가 화교였으며 본인은 자신이 화교라는 자각도 거의 없다고 한다. 하희라와 비슷한 케이스. 하지만 중국어 구사가 가능하고 중국제과시장에서 오리온이 약진하는 등 혜택을 보고 있다.어찌보면 신격호의 한중버전본 항목에 나오는 설영흥이나 담도굉과 달리 한국켄트외국인학교를 나오고 조지워싱턴대학교를 거치는 등 일반적인 화교 2-3세보다는 한국의 재벌 2-3세와 비슷한 교육과정을 거쳤다. - 설영흥(薛榮興): 1945년생. 오른쪽은 현대자동차 회장인 정몽구이며 왼쪽이 부회장인 설영흥이다. 현대자동차의 중국 판매를 총괄하고 있다. 본래는 아버지가 중국집을 하면서 무역업도 했는데 본인도 가업을 물려받아 무역업을 했다. 정몽구 회장과는 경복고를 다닐 때 정몽구가 근처에 있던 설영흥 아버지의 식당에 자주 들르면서 알게 되었다. 둘은 7살 차이로 정 회장이 연상이다. 당시에 설 부회장은 초등학생이었다. 무역업을 하다가 1999년부터 현대에 합류하였다. 사실 정몽구의 당구 친구였다는 이유로 친해졌다고...
- 설호지(薛浩智): 현대차의 이사. 위의 설영흥 부회장의 아들이다.
- 손계서(孫啓瑞): 대한항공의 고문 출신. 화교들은 요식업이나 여행업에서 많이 종사했는데 그도 대한항공에서 중국 현지의 인허가를 받아내는데 주력했다. 한족 출신인 화교들이 조선족들[19]에 비해 관시 구축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2013년에 작고.
- 손서신(孫書臣): 대한항공의 상무.
- 여경래(呂敬來): 그랜드앰버새더호텔 중식당 홍보각 대표.
- 여경옥(呂敬玉): 롯데호텔 중식당 도림 조리이사.
- 후덕죽(侯德竹): 신라호텔 중식당 팔선 상무이사.
5.3 화교설이 도는 사람
- 전지현: 본명이 왕지현이고 아버지 성함이 왕정처, 어머니가 묵창애 씨라서 화교설이 제시되나 본인은 한국인이라 못박고 있다. 부모는 모르겠으나 본인은 확실히 한국 국적이다. 부모가 화교라면 화인이라 볼 수 있다. 허나 전지현은 인터뷰에서 할아버지대까지 화교랑 아무 연관이 없다고 말했다. 사실 왕씨나 묵씨나 극히 드물긴 해도 우리나라에 확실히 존재하는 성씨라서.
한때 씨몰살급 피해를 입어서 그렇지 왕씨는 고려 왕성이었다.자세한 사항은 전지현 항목 참고.
- 진미령: 화교가 아니다. 아버지가 한국광복군 출신. 아버지가 중국인들과 친한 탓에 그냥 화교학교에 넣었다고 한다... 현재 화교학교를 보면 편법으로 다니는 한국인들이 꽤 있다. 부모 어느쪽도 화교가 아닌 그냥 한국인들. 이유는 중국어 배우게 하려고.
6 대우
차량 등록 하나만 해도 중형차 이상은 구비해야 할 서류 종류가 한국인의 4배에 가까우며 죄다 인지를 떼야하는데다가 서류 미비를 구실로 인지 재발행을 요구하는 등, 한국인으로 귀화하는 게 더 빠를 정도. 주민등록번호도 남녀 각각 5, 6으로 시작하는데 사실 주민 등록번호가 아닌 외국인 등록번호라 그렇다.
하희라도 화교였으나 1995년 최수종과 결혼하면서 귀화하였다. 본인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자신이 화교인 것 자체를 모르고 살았으며 중국어도 할 줄 모른다고. 아무래도 가족과 같이 살다 보면 규제가 문제될 수도 있으니. 한국인과 결혼하면 조건에 따라 한국 국적이 자동으로 나온다. 이때 국적 취득을 포기할 수도 있다. 이후 귀화 시 '국적 회복 신청'을 통해 간단히 귀화할 수 있다.
과거엔 정부 주도로 화교의 경제 진출을 막았다고 하지만 어디까지나 과거 이야기. 지금은 경제적으로 잘나가는 화교도 많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의사나 한의사 수의사로 진출하는 화교도 많고, 중국이 급성장하면서 중국 진출을 모색하는 기업들 사이에 화교의 입지가 넓어지는 바람을 타고 한중 수교 20주년 기념 KBS-CCTV 공동 제작 프로그램에 화교 출신 설영흥 현대 자동차 부회장이 출연하기도 했으며, 대기업 오리온의 수장 담철곤 회장 역시 화교출신이다.
한국전쟁 당시엔 화교 청년 중 일부가 한국군에 입대해서 활동한 적이 있다. 한국어와 중국어에 모두 능숙하다는 점을 이용해 공산군 진영에 침투, 정보를 수집하거나 중공군 포로를 심문하는 등의 임무를 맡았다고. 하지만 대부분의 참전 용사들이 이에 대한 대우를 받지 못하는 실정이다.[20]
그런데 국내에서 화교들의 중국 음식점이 굉장히 인기를 끌어서 문화적 영향은 제법 크다. 친숙한 사업인 동네 중국집이나 중국에 역수출되어 인기를 끄는 한국식 짜장면의 탄생이라든지... 참고로 중국에서 한국식 짜장면은 한식이라고 한다. 대표적인 한식으로 한국에서 대표적인 중국 음식이 짜장면인 것과는 정 반대. 유명한 화교 음식점이 여러 군데 있었으나 남아있는 것은 거의 없다시피 하며 사정이 안 좋아진 틈을 타 한국인들이 상표를 스틸했다. 대표적으로 공화춘. 공화춘 외에도 중국집 이름의 클리셰가 된 것들은 대부분 실존했던 유명한 음식점이라고 한다. 이건 꼭 상표를 뺏었다는 게 아니라 그냥 문화 전파에서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현상. 한국의 경우 화교가 득세한(특히 경제적으로) 다른 나라들의 경우에 주목해 그들이 혼란기의 한국에 끼칠 악영향을 고려하여 건국 초기부터 1970년대까지 각종 제한을 걸었는데, 이것에 대해서는 두가지의 견해가 있다.
6.1 화교 탄압에 대한 비판
화교의 경제장악은 몇몇 동남아시아 나라에만 국한된 케이스였다. 이 지역에는 수백년전부터 중국인들이 대거 무역, 교류, 피난 등으로 정착해온 역사가 있어, 나라 인구의 5%에서 20%가 화교였고 원주민들과의 교육수준에서 차이가 많았던 것이다.
당연히 일본, 유럽, 미국, 캐나다 등 다른 나라에서는 이러한 현상이 없었다. 한국도 19세기말인 임오군란(1882년)때 조선에 40여명의 중국상인이 들어오면서 비로소 화교역사가 시작된다. 그래서 화교들이 무조건 나라경제를 장악한다는 주장은 화교들에겐 억울할 수도 있다. 70년대까지 대한민국이 못 살았던 것은 사실이나, 동남아시아에서 화교가 득세하게 된 계기는 경제적인 요건 뿐 아니라 명-청 대부터 이어진 지속적인 인구 유입정책에 기반한다. 동남아의 화교는 대한민국 화교와 출발선부터가 다르다. 차라리 제노포비아를 놓고 이야기 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또한 엄연히 내국인과 동일하게 세금을 내는데도 그에 맞는 최소한의 권리는 보장되지 않은 점이나 한국전쟁에서 국군에 가담해 활약한 공도 인정받지 못하는 점은 문제라는 주장이다. 사실 웬만한 국가에선 외국인이나 이민자 정책에 차별은 존재하더라도 국가에 공이 있다면 이미지 메이킹에서라도 제대로 보상한다. 무엇보다 국가에게 선택권이 있어서 그에 따른다고 해도 그 기준이 명확하지 않아서 세금도 내지 않고 미국에서 경제활동을 하는 이중국적자에게 꾸준히 지원하는 것과 비교되기 때문에 모순된다.관련기사
왜 한국인으로 귀화하지 않았냐고 반문할 수도 있는데 귀화하려면 재산이 어느 정도 있어야 했고 절차도 까다로웠고 동아시아의 속인주의 전통에 민족주의가 강하게 겹친 터라 국적을 포기하거나 새로 얻는 게 굉장히 어려웠다. 일본에서 그렇게 차별을 받던 재일교포들도 60만이 넘는 숫자가 아직도 한국 국적이나 조선적을 유지하고 있다.
6.2 반론
정부 수립 당시부터 약 70년대까지, 당시의 한국 정부는 화교가 득세한 다른 나라들의 케이스에 주목해 그들이 혼란기의 한국에 끼칠 악영향을 고려하여 각종 제한을 걸게 된 것이다. 지금의 스탠다드로 보면 그 당시의 차별은 좀 심하긴 했다. 근데 그 때는 자국인 인권조차 안 따지던 시절(...)이었고, 사실상 인권을 따지는 지금도 어느 정도 화교에 차별을 두는 건 비슷하다.
또한, 영주권과 시민권의 차이를 생각하면 화교뿐만이 아니라 다른 외국 국적자들도 사정은 비슷했다. 영주권자의 경우는 극단적인 경우는 그냥 싫어도 추방할 권리가 있다. 이것은 주권 국가의 고유 권리이며,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경우 경우에 따라서는 영주권자들에게 (특히 선거 부분에서) 국가의 주권 자체가 농락당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일제강점기의 트라우마 때문에 일본계 외국인에 대해서는 훨씬 더 가혹하게 차별했다. 심지어 영주권을 가진 외국인에게 참정권이 생긴 이후인 2006년 지방선거 당시에 재한일본인 가운데 영주권자는 1,622명인데 이중에 선거권을 인정받은 사람은 51명이다. 그 정도로 일본계에게는 제한이 많다. 근데 화교에 비하면 다들 숫자가 거의 얼마 안 됐다. 그나마도 주재원이나 외교관이었고. 사실상 당대의 재한 외국인 정책은 화교들이 주요 대상이 된다. 주한미군이 있긴 하지만 걔넨 군 부대에서 지내고.본격 소수민족 주한미군
미국을 포함한 상당수 국가의 경우 원칙적으로는 영주권자는 투표권 자체가 없다. 그래서 미국의 유권자 등록카드 기입사항을 보면 시민권자 여부를 묻는 사항과 '영주권자는 이 카드를 기입하지 마십시오'라고 쓰여있다. 그런데 한국은 지방선거에서 영주권이 있는 화교들에게 투표권을 준다. 지방자치에 한정된 이야기지만 귀화도 아닌 영주권자가 정치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상황에서는 오히려 한국인의 참정권이 침해받는 상황이라고 해석될 여지도 있다.
이런 해프닝은 참정권과 귀화 문제에 대해 유독 동아시아 3국이 서로 민감하게 반응하기 때문이다. 다른 나라의 경우 (이웃나라 출신의) 영주권자에게 서로 쿨하게 참정권을 주거나, 아니면 주변 국가와의 문제를 고려해서 아예 참정권을 주지 않는데, 예를 들어 재일교포들이 일본에서 지방참정권 받는 문제랑 일본인들이 한국 사회에서 지방참정권 받는 문제를 연계해서 다뤘어야 하는데 이점에서 한국 정부가 미숙했다고 볼수도 있지만 애시당초 중국과 일본은 외국인참정권에 대해 매우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국가이니 협상 테이블을 만들지도 못했을 것이다. 게다가 아래 단락에서는 한국이 외국인참정권을 부여하는 것은 호구가 아니라고 하는데 외국인참정권에 가장 관대한 유럽의 경우 주변 국가끼리 유럽연합이라는 정치적, 경제적 공동체가 형성되어 있는 곳이다. 공동체는 커녕 툭하면 갈등이 벌어지는 동아시아에 위치하는 한국과는 상황이 다르다.
또한 한국의 경우 징병제 국가인데다가 휴전중인 관계로 국방의 의무가 없는 영주권자에게 권리부여를 하는 것에 대해 상당히 부정적인 여론을 가지고 있다. 위 단락에서 언급된 납세의 의무도 한국사회에서는 국방의 의무에 비하면 민감도가 떨어지는 편이다. 위의 한국전쟁을 언급하는 이야기도 있는데, 그건 SC지대 한정이고 한국전쟁 이후로는 화교가 대한민국 국방에 참여한 사례가 없다.
또한 이 정책을 가지고 과거의 독재 정권의 문제라고 비판하는 것도 상당히 논점에서 어긋난 주장이라고 볼 수 있다. 뒤집어서 이야기하면 민주화 이후에도 화교 탄압 정책이 즉시 완화되지는 않았으므로 화교 입장에서는 더더욱 고통을 받았던건 사실이다. 차라리 역사적으로 외세에게 침략을 받았던 배경과 식민통치의 트라우마로 인해서 외국인에 대한 배려가 부족했다는 비판이 더 논점과 일치한다. 물론 민주적인 정권이 있었어도 그랬을 테니 독재 정권이 탄압을 한 게 정당화되는 건 아니지만 한국의 제노포비아가 상당히 한국인들의 트라우마에 바탕하여 심리 기저에 자리하고 있고 방어기제로 작용한다는 점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7 경제 위기 당시 루머
1997년 외환 위기 당시 해외 화교들이 한국 정부의 부채를 탕감해주는 대신 화교들의 권익 신장과 조계 지역 형태의 거주구를 요구했다는 주장이 있다. 하지만, 당시 한국 정부가 필요했던 건 부채 탕감이 아니라 국가 신용도와 국가 단위 유동성 확보로, 일개 이익 단체인 화교 레벨에서 어찌할 수가 없다. 이런 헛소문의 자매품으론 통일교가 한국 부채를 탕감해 줄 테니 통일교를 국교로 지정해 달라는 요구를 해왔다는 루머가 있다.
이는 1997년 인도네시아의 외환 위기를 혼동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화교 자본이 강하게 영향을 주던 인도네시아는 화교 자본을 추방하려고 애썼는데 그 반작용으로 외환 위기를 겪었고 이 때문에 화교 자본들의 복귀를 수상이 요청한 바 있다. 이런 경제적인 반감으로 인해 이듬해인 1998년에 인도네시아 화교 학살이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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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정부가 인정한 차이나타운은 인천광역시, 부산광역시에 있다. 각각 인천역, 부산역 앞에 위치한다. 이름과 달리 화교는 많이 귀화하고 그 자리를 조선족이 점령해 사실상 조선족 거주지처럼 되었다.
- 인천
- 종로와 명동, 특히 중앙우체국과 주한 중국대사관 근처에 몰려 있다.
- 규모로는 인천 차이나타운에 비할 바가 못 된다. 또한 명색이 차이나타운인데 오히려 조선족과 러시아 사람과 러시아어, 아랍어 간판이 더 많아 보여서 차이나타운이라기보다는 작은 이태원동 같은 분위기이다. 중국집이 많은데, 짜장면이 인천 차이나타운에서 유래한 음식이기 때문인지 이 곳에는 짜장면보다는 만두를 주력으로 삼는 곳이 많다. KTX를 탈 수 있는 부산역 바로 앞에 있어서 접근성은 좋은 편. 이전까지는 아무나 가볍게 발을 들일 만한 분위기가 아니었는데 2013년 대대적으로 타일을 갈아엎고 정비되어 관광지처럼 깔끔해졌고 관광객이 길을 거니는 모습도 쉽게 볼 수 있다. 다만 화교들은 정부 주도의 차이나타운에 부정적인 편이다.[21]
- 종로(대구에도 종로가 있다.)쪽에 화교들이 상당히 모여살고 있는데 중국인 학교가 있지만 차이나타운이라고 부르기엔 미비한 수준이며 사실상 일반 유흥가, 혹은 외국인 거주구역이나 다를바가 없다. 조선족이 대부분이다.
- 계림동에 화교 소학교가 있고 충장로 5가 지역에 화교들이 운영하는 중국음식점이 들어서 있다. 다만 광주 지역은 화교들을 결집시킬만한 커뮤니티가 강한 편이 아니고 화교 교육기관이 소학교(=초등학교)까지밖에 없다는 점이 다른 지역의 화교 공동체에 비하면 약한 편.
현재 화교들은 꽤 귀화했기 때문에 거주지는 조선족이 점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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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생김새도 비슷한데다가 이름은 아예 우리와 똑같은 걸 쓰니 알아볼 도리가 없다. 별 생각없이 만나던 지인이 원래 화교 출신이라 놀라는 경우도 많다. 군대에서도 화교 출신이 간헐적으로 보인다.
- ↑ 경제 활동 제약 등으로 많은 화교들이 귀화를 택해 한국인이 되었다. 외관상으로는 똑같이 한국어가 제1언어, 즉 모국어라 구별도 어차피 안 된다. 대화할 때 중국어를 섞어 쓰는 사람들은 요즘은 대개 조선족들이지 화교들이 아니다. 한국 사회에 화교가 얼마나 동화되었냐면 중국어도 잊어버려 화교소학에서 따로 가르쳐야 할 정도이다.
- ↑ 귀화하지 않는 화교는 거진 이민을 택하거나 대만행을 택했다. 현재 2만 명 정도만이 중화민국 국적으로서 영주권자로 잔류해 있고 그나마 이들도 조금씩 귀화하는 중이다.
- ↑ 아직 귀화 안 한 중화민국 국적자로 점진적으로 귀화 중이다.
- ↑ 그래서인지 화교들이 거의 귀화한 현재 화교들은 조선족을 이방인 취급하며 싫어한다. 사실 조선족은 민족만 한국계이지, 한국계 미국인처럼 정체성이 이질적인 외국인이 맞다. 싱가포르의 중국계 시민들과 중화인민공화국 사람들이 같은 중국계 혈통이지만 본질적으로는 결국엔 서로 이방인인 것과 같다.
- ↑ 미국 로스엔젤로스에서 유학생활을 했던 이승만이 화교의 놀라운 상권 장악력을 목격하고 막으려 했다는 설이 있으며, 실제로 이승만 집권 내 이런 정책을 펼쳤다.
- ↑ 그 예로 공상정의 아버지는 화교출신 의사다.
- ↑ 참고로 미국은 영주권자는 유권자 등록을 할 수 없다.
- ↑ 중화권 중에서는 홍콩, 마카오, 싱가포르가 기독교인이 많은 곳이다. 중화인민공화국도 각종 박해 속에 지하 교회가 늘고 있다.
- ↑ 인천은 국내에서도 기독교 초강세 지역으로 유명하다.
- ↑ 한국의 주민등록증 및 중국본토의 후커우에 해당하는 것이다.
- ↑ 중공의 일국양제에서 따와서 자기들에게 一本兩制가 적용된다고 말한다. 똑같은 여권이지만 타이완, 펑후, 진마 거주민과 자기들은 다른 제도를 적용한다고.
- ↑ 일부 거주지가 확실한 경우 면제해 주기도 한다.
- ↑ 귀국 화교가 대만 거주민들의 일자리를 뺏어간다든지. 안 그래도 대륙에서 대만으로 온 외성인들도 꽤 됐는데 귀국 화교도 사실은 외성인이다.
- ↑ 중화민국과 달리 중국 공산당은 극도로 대외무역에 폐쇄적이었다.
- ↑ 일제강점기와 해방공간 초기의 경제 혼란 등으로 한국인들의 경제력이 위축되었다가 순식간에 회복되었다. 사실 인구규모에서 차이(한국인 2천만 가량, 한국화교 3-4만)가 엄청 나기 때문에 한국인들이 주도권을 회복하는 건 결국 시간문제였다.
- ↑ 무역에 종사하던 화교들에게 타격
- ↑ 은행을 잘 이용하지 않고 현금보유를 선호하던 화교들에게 타격이 되었다.
- ↑ 조선족은 소수민족이라 중국 정관계의 주류로 파고들기가 쉽지 않다. 그나마 잘 사는 조선족들은 중국에 정착했지만 중하층 조선족들이 한국으로 많이 이주한 게 그 이유이다.
- ↑ 백선엽의 자서전에서 발췌. 관련기사
한국계 한국인 참전 용사들의 처우도 열악하다는 언론 보도가 나오는 것은 안 자랑 - ↑ 애초에 돈 많은 대만이나 홍콩인들은 안 오고 조선족만 대규모로 몰려오는 게 현실이다. 화교 본인들도 현재는 대부분 한국 귀화 후 동화를 택한 이상 굳이 자기들끼리 모여살 이유도 필요도 없다. 실제로 2~30대 이하 화교들은 혈통만 화교지 여권도 대한민국이고 엄연한 한국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