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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어린 시절
1894년 15살의 어린시절의 스탈린. |
1879년 12월 21일, 당시 러시아 제국이던 남캅카스 그루지야 동부의 고리(Gori) 시에서 제화공 '베사리온 주가슈빌리과 케테반 겔라제 사이에서 셋째로 태어났다. 그에겐 미하일과 기오르기란 형이 있었는데 모두 태어난지 몇달이 되지 않아 죽었다. 이 때문에 베사리온 주가슈빌리, 줄여서 베소 주가슈빌리라 불리던 스탈린의 아버지는 큰 상심에 빠졌고 알코올에 중독되었다. 천신만고 끝에 태어난 아이가 이오시프, 어릴 적에 소소라 불리던 스탈린이었다.
스탈린의 아버지 베사리온 주가슈빌리 1850.??.??~1909.08.25 | 스탈린의 어머니 케테반 겔라제 1858.02.05~1937.06.04. |
아버지 베사리온 주가슈빌리는 술주정뱅이에다가 매우 거칠고 폭력적인 사람이었다.[1] 그러나 머리는 있는 편이었는지, 그루지야어를 비롯하여 러시아어, 아르메니아어, 터키어에 모두 유창했다고 한다. 베사리온은 젊을 적엔 여자들에게 대단히 인기가 있는 사람이었고 그의 결혼은 온 마을 여자들의 질시를 샀다. 그는 어렵게 얻은 아들 스탈린을 어릴 때는 몹시 귀여워했고 그의 제화공 사업은 상당히 잘 돌아가서 유복한 삶을 살 수 있었지만 베사리온 주가슈빌리의 과음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베사리온의 많은 손님들이 대금 대신에 조지아의 특산물인 포도주를 대신 내놓고 가는 일이 많았는데 자연스레 베사리온은 과음을 일삼았다. 한때 가정적이었던 베사리온은 신발을 만들 수 없을 정도로 상태가 나빠졌고 가정엔 불화가 스며들었다. 그는 매일같이 술친구들과 밤새도록 술을 마시고 뒹굴었는데 술친구 중 한명인 포카란 정치범은 아예 술을 마시다가 길거리에서 얼어죽었음에도 그는 깨닫는 바가 없었다. 게다가 설상가상으로 베사리온의 결혼을 시기한 마을 여자들이 퍼트린 악질적인 소문들, 주로 스탈린의 생부가 다른 사람이라는 소문들에 시기심 많던 베사리온은 더욱 술을 탐닉했다. 결국 1883년 즈음에 베사리온은 미친 사람이란 별명을 얻고 걸핏하면 싸움을 일삼는 망나니가 되었다. 행패를 부리는 아버지를 보고 겁에 질린 스탈린은 이웃집에 숨거나 어머니의 치마폭에 달려들며 아버지를 피했다. 자신을 피하는 아들을 보고 분노한 베사리온은 아들을 더욱 험하게 다루었다. 그는 스탈린을 마룻바닥에 내동댕이치고 사생아 새끼라고 욕을 퍼부으며 온갖 트집을 잡아 두들겨팼다. 아내도 함부로 대하긴 마찬가지라서 그는 아내도 두들겨패고 목을 졸라댔다. 한번은 그가 스탈린과 아내를 모두 심하게 구타하고 아내를 목졸라 죽이려 하여 피투성이가 된 스탈린이 길거리로 뛰쳐나가 경찰들을 데리고 와서 어머니의 목숨을 살린 적도 있었다. 이게 스탈린이 겨우 4살 때의 일이었다. 베사리온의 행패가 너무 심해서 하루는 스탈린이 어머니를 보호하기 위해 아버지에게 칼을 집어던지기도 했다. 결국 베사리온은 자신의 벨트를 팔아서 술을 사마셔야 하는 지경으로 전락했고[2] 이곳저곳 전전하며 어려운 삶을 살았다. 베사리온은 스탈린을 학교에 보내자는 케테반의 주장을 물리치고 1884년부터 스탈린에게 제화 기술을 가르쳤다. 이때 스탈린은 천연두에 걸렸고 곰보가 되었다. 스탈린이 낫자마자 베사리온은 집을 나가버렸다. 결국 케테반은 여러 지인들의 도움을 받아 스탈린을 키웠고 그를 주교로 만들기 위해 신학교에 보내기로 결심한다. 이 와중에 베사리온이 돌아와서 스탈린을 강제로 구두공장으로 끌고 간 사건이 있었지만 케테반이 신학교와 주변의 고위 관료들에게 로비를 하여 스탈린을 다시 되찾아왔다. 스탈린은 매우 우수한 성적을 거두며 두각을 나타냈고 고리 신학교의 사실상 리더가 되었다. 스탈린은 이미 12살 때 18살 짜리 상급생들을 부하로 거느리고 마음에 들지 않는 선생을 끌어내서 살해위협을 할 정도였다.
사실 스탈린의 아버지가 사실은 그 마을의 다른 사람이라는 설이 한동안 돌았었다. 스탈린의 부모가 그 마을에서 살때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었던 성직자라는 설, 스탈린 자신도 사석에서 이런 이야기를 자주 했지만 사실 신빙성은 없다. 위의 사진에서 보듯 베사리온 주가슈빌리와 스탈린이 똑 닮은 판박이인지라 농담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어머니 '케테반 겔라제(ქეთევან გელაძე)'는 남편과 반대로 매우 신앙심 깊고 아이에게 모든 정성을 쏟는 여자였다. 아버지는 술마시고 들어와서 어머니와 아이에게 걸핏하면 폭력을 휘둘렀다.[3] 이런 성장 배경이 스탈린의 성격 형성에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뿐만 아니라 이 시절 마차에 다친 탓에 왼팔을 자유자재로 쓸 수 없게 되었다고 한다. 그 때문에 제1차 세계대전에서 징집 면제되기도 했다. 성인이 되고 권력자가 되었어도 왼쪽이 짧은 컴플렉스 때문에 주머니에 넣거나 해서 숨겼다.
어린 스탈린은 초등교육을 받고 신부가 되기 위해 신학교에 진학하게 되었다. 이는 전적으로 어머니의 영향으로 보인다. 스탈린의 어머니는 신앙심이 깊었기 때문에 스탈린이 신부가 되길 원했다. 스탈린은 최고 권좌에 오른 후에 조지아에 있던 어머니를 찾아갔었는데 정치에 대해 잘 모르던 그녀는 스탈린에게 "너 요즘 뭐하고 있니?"라고 물었다. 그러자 스탈린은, "어머니! 차르 아시죠? 전 차르같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스탈린의 말에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한 채 "차르가 뭐니? 먹는거? 우걱우걱그래? 유감이네...그렇지만 지금이라도 신부가 되는게 어떠니?"라고 말했고, 이후로도 가끔씩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신부가 아니라 이미 신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스탈린의 최대 정적이던 트로츠키에게도 이와 비슷한 일화가 있다. 학생 시절 트로츠키가 혁명운동에 투신하자 아들이 불온분자로 낙인찍혀 장래를 망칠 것을 걱정한 트로츠키의 아버지는 "이 나라는 앞으로 천년은 더 갈거다."라고 경고하며 허황되고 위험한 행동을 중단하라고 권했던 것. 그리고 10월 혁명이 성공하고 볼셰비키가 권력을 잡은 후 트로츠키가 아버지를 놀리듯 "아버지는 차르의 러시아가 천년은 더 갈거라고 하셨잖아요?"라고 묻자 아버지는 웃으며 "그럼 네가 세운 나라가 그보다 더 오래가도록 하려무나."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이 두 일화를 비교함으로써 스탈린이 한때 동지였던 다른 볼세비키 당 지도자들을 상대로 보인 극단적인 적대행위, 더 나아가 스탈린이 보여준 극단적인 집요함과 잔인성[4]의 원인 중 일부를 성장 환경에서 찾을 수 있다는 관점을 설명할 수도 있다.
일단 스탈린의 일화는 가쉽에 가까운 것이라 사실여부를 완전히 신뢰하기는 다소 힘들지만 스탈린이 폭력적이고 억압적인 아버지와 신앙심이 깊고 자식에게 헌신적이지만 세상 물정에는 어두운 소위 '시골 아낙'인 어머니 사이에서 성장한 것은 분명하다. 이 면에서 볼 때 위 일화에서 스탈린의 어머니가 소련의 최고 권좌에 오른 스탈린에게 굳이 신부가 되라고 권한 것이 세속적 권력을 가지고 인간백정질 하는 것보다 종교적인 삶에 더 큰 가치를 두었다기보다는, 자식이 가진 막대한 권력 자체를 이해하고 실감하지 못한 것이라고 해석하기가 더 쉽다.[5] 이 점에서 트로츠키에 비해 스탈린이 더 주변으로부터 이해받지 못하는 성장기를 거쳤던 것으로 볼 여지가 크다. 또한, 스탈린의 신학교 진학 조지아 지역에서 농부나 제화공 같은 육체노동이 아닌 인텔리로써의 진로를 찾으려면 신학교로 가서 성직자가 되는 길 밖에는 없던 상황 때문이었다고 볼 수 있는데, 이는 트로츠키를 비롯한 다른 볼셰비키 지도자들이 대부분 고등학교나 대학 교육을 받고 언론이나 사업, 관료나 군대 등 상대적으로 다양한 진로를 선택할 수 있었던 상황에서 성장한 것과 대비된다. 한 마디로 설명하자면, 당시 유럽에 가까웠던 우크라이나나 러시아 서부 지역보다 캅카스 지역은 덜 근대화 된 지역이었고, 이런 성장 환경의 차이로 인한 갈등이나, 마르크스주의와 같은 근대적 사상을 받아들인 인물에 대한 주변의 반응 차이가 스탈린의 인생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는 것.
신학교의 출발은 좋았다. 아래는 로버트 서비스의 <스탈린>에 나오는 그의 학교 생활 초기의 성적표다. 해당 성적표는 5점 만점이다.
성경 | 5 |
러시아 문학 | 5 |
역사 | 5 |
수학 | 5 |
그루지야어 | 5 |
라틴어 | - |
그리스어 | 4 |
교회 슬라브어 | 5 |
조지아-이메레티 노래 | 5 |
하지만 스탈린은 다윈의 책 등을 접하면서 무신론적, 반정부적 성향을 갖게 되었고 파업으로 고리 신학교가 폐쇄되자 힘들게 트빌리시 신학교로 전학했는데 트빌리시 신학교는 억압적인 분위기 아래 학생들에게 러시아 문화와 차르에 대한 충성을 강요했고, 그루지야를 억압하는 러시아에게 반항적인 태도를 보이던 스탈린은 점점 신앙에서 멀어져 외부의 혁명활동, 특히 그루지야 독립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러다 보니 장학금을 받던 공부벌레는 당연히 학업에 소홀해질 수밖에 없었고, 신학교 마지막 학년 때에는 학교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낙제였다는 설도 있고, 스스로 나왔다는 설도 있다. 그런데 정작 학교 기록에는 수업료를 안 내서 제적된 것으로 나와 있다나. 신학교에선 스탈린에게 그간 지급한 480루블의 장학금을 돌려주지 않아도 되니 다시 학교에 돌아오라고 수차례 접촉했지만 스탈린은 거부했고 학교를 나가는 김에 신학교 도서관도 털어갔다.(...)
참고로 시인이었다. 그것도 공식으로 데뷔한! 뭐 어때 히틀러도 화가가 꿈이었는데 국내에 번역된 책 중에는 <스탈린>(구 <스탈린 : 강철 권력>, 로버트 서비스 저)이라는 책에서 <아침>이라는 시를 볼 수 있고, <달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시도 있다고 한다. <달에게 보내는 편지>는 그의 데뷔작이다. 1895년 <이베리아>라는 지면에 실렸고 교장에게 들키지 않도록 가명을 사용해 1895년~1896년 사이에 시 여섯 편을 발표했다. 그가 주로 다룬 주제는 자연과 대지, 애국심이었다.
<달에게 보내는 편지>지상의 비밀스런 먹구름 위를
예전처럼 거침없이 부유하라.
그대의 은빛 광채로
짙은 안개의 어두움을 흩날려라.잠에 취해 몽롱한 대지에
보드라운 미소로 고개를 기울여
캅카스 최고봉에게 자장가를 불러주라.
그대를 향해 높이 솟은 얼음 봉우리에게.그러나 언젠가 박해당해 유골이 된 이도
시인들이 잠든 그 신성한 언덕에 올라
희망의 날갯짓으로 날아오를 수 있음을
분명히 알아라.어두운 하늘에서 빛나라.
창백한 빛으로 뛰놀아라.
예전처럼 한결같은 빛으로
나의 조국을 비추어라.나는 그대에게 가슴을 열고
마주 향해 손을 내밀고
또 다시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밝은 그대를 보겠노라.
또 다른 시 <아침>은 당시 조지아 문인들 사이에 유행하던 낭만적인 문어체로 쓰인 감동적인 작품이었다고 한다.
<아침>연분홍빛 꽃봉오리가 피더니
온통 푸른 빛 도는 보랏빛이네
부드러운 산들바람에
계곡의 백합 풀 위에 누웠네종달새 짙푸른 하늘에서 노래하며
구름보다 더 높이 날고
아름다운 목소리로 나이팅게일
숲 속에서 아이들에게 노래 불러주었네꽃이여, 아 나의 조지아여!
평화가 내 조국에 넘치게 하라!
친구들이여 노력해
빛내라, 조국을!
한국어로 보면 별 거 없는 조잡한 시처럼 보이겠지만, 원어로 보면 또 다르다고 한다. 그루지야의 이아코브 고게바슈빌리(იაკობ გოგებაშვილი, 1840-1912)라는 교육자는 그가 집필한 교과서에 이 시를 넣을 정도였다고 한다[6]. 오오 시인 오오 이 때 시는 그루지야 민족주의의 성향이 강하다고 한다. 당장 스탈린의 악명을 높인 1907년 6월 26일 트빌리시 강도 사건만 해도 스탈린은 언제 돈이 도착하는지를 자신의 동창인 은행원들을 자신이 쓴 시로 낭만시로 끌어들여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알아냈다. 스탈린의 시가 얼마나 훌륭했는지 그루지야의 귀족들의 선집에 스탈린의 시들이 수록되기도 했다.
희한한 것은 이렇게 그루지야어는 유창하고 명문장가였으면서 러시아어는 무미건조하고 평면적인 문장만 썼다는 점이다. 러시아어 공부를 좀 더 열심히 하시지 그랬어요..
2 은행강도 혁명가
300px | [7] | 젊은 시절 스탈린. 보다시피 전혀 관리를 하지 않은 상태다. 수염을 깎으면 대단한 미남이었지만, 정작 스탈린 자신은 외모를 꾸미는데 관심이 없어서 관리를 별로 안 했다고 한다. |
스탈린은 학교를 나온 후 방황하다가 블라디미르 레닌의 글을 접했고, 거기에 감명받아 그가 이끌던 볼셰비키당에 가입하게 되었다. 당시 혁명세력 중 가장 과격한 부류의 분파 중 하나였던 볼셰비키에서 스탈린이 한 일은 혁명운동의 자금 조달이었다. 자금을 조달하는 방법은 결과적으로 범죄일 수밖에 없었는데, 이는 위험하기도 했고 정파의 도덕성을 의심받을 수 있는 문제였기 때문에 누구도 맡아서 하려고 하지 않았다. 볼셰비키와 대척되는 멘셰비키는 이런 활동들 때문에 볼셰비키를 범죄조직이라고 디스했다. 후에 레닌도 자금조달을 위한 은행강도는 중지시켰다. 모두가 꺼리는 일을 떠맡은 것이다.[8] 자금조달 방법으로 그는 은행강도를 하거나 현금 수송차를 털었다. 이 뿐 아니라 몸값을 위해 인질을 잡거나 납치를 하고 파업을 선동하는 등 그가 벌인 일은 대부분 비합법적인 범죄였다. 때문에 스탈린의 당시 활약은 스탈린 정권 시절에도 쉬쉬하여 잘 안 알려졌었다. 그걸 빌미로 트로츠키에게 혁명에 아무 공헌도 안한 잉여라고 자주 까이기도 했지만. 스탈린의 활약은 21세기에 학자들이 조지아의 문서보관소에서 당대 한패거리들의 회고록을 입수한 뒤에야 제대로 드러나게 되었다. 이전에는 스탈린이 잉여고 트로츠키가 혁명에 공헌했다는 식으로 알려졌는데 이것이 뒤집혔다. 다만 뒤집혔다고 해서 스탈린은 혁명에 공헌했는데 트로츠키는 알고보니 잉여였다는 식으로 뒤집혔다는 이야기는 아니고, 사실 10월 혁명의 전후과정을 보면 트로츠키의 활약이 스탈린보다 화려했던 것은 부정하기 힘들다. 다만 스탈린은 아무것도 한 것 없는 잉여라는 트로츠키의 주장과는 달리 스탈린 역시 볼셰비키 지도자로써 상당한 활약상이 있었음이 밝혀진 것.(그런데, 트로츠키의 오만하고 독선적인 성격을 생각한다면 설령 트로츠키가 스탈린의 활동 내역을 알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아무 공적도 없는 잉여라고 까는 것을 그만두었을 것 같지는 않다.)
이런 짓들을 저지르다 보니 경찰의 일급수배자가 되었고, 체포되어 7번이나 시베리아에 유배되었으나 그때마다 탈출하였다. 스탈린의 반대파들은 이것이 스탈린이 차르의 프락치였다는 증거라며 그를 비난했다. 하지만 알렉산드르 솔제니친도 지적했듯이 적어도 러시아 제국에서의 유형지 탈출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유형지 내에서는 범죄자들도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루 정도 사냥터를 지나 산을 넘어서 철도역으로 가면 되었고 10월 혁명의 지도자들도 그런 식으로 유형지를 나온 사람들이 많았다. 레닌뿐만 아니라 스탈린을 프락치라고 디스한 트로츠키조차 이런식으로 탈출했었다. 물론 스탈린 시절의 시베리아는 탈출 따윈 얄짤없다. 유형지를 대체한 굴라그는 말 그대로 자유 없이 중노동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범죄자일지는 몰라도 남이 꺼리던 일을 맡은 결과 레닌의 신임을 얻은 그는 조지아인임에도 볼셰비키당의 지도급에 진입하게 되었다. 이후 스톡홀름의 당대회에 참여하여 클리멘트 보로실로프와 친해졌고 런던에 간 적도 있었는데 항구 노동자들과 시비가 붙어 두들겨맞던 걸 막심 리트비노프가 구해준 적이 있었다. 이후 막심 리트비노프는 스탈린이 자길 굴라그에 보내지 않을 걸 설마 그때 구해준 것 때문이 아닐까?하는 농담을 하기도 했다.
또 당시 스탈린의 혁명동료인 알레크산드레 스바니제(ალექსანდრე სვანიძე)와 남매였던 에카테리네 '카토' 스바니제(ეკატერინე 'კატო' სვანიძე)와 결혼도 하여 아들(야코프)도 두었으나, 이런 도피 생활 때문에 제대로 가정을 돌보지 못했다. 카토는 혁명놀음에 가정 무너지는 줄 모르고 집을 비우는 남편을 대신해 홀로 아들을 키우다 그만 22세의 나이에 티푸스로 요절했다. 장례식에서의 스탈린은 매우 침통해 보였으며, "아내는 정말로 단단한 나의 마음을 부드럽게 해줬는데…아내는 내 마지막 인간적인 감정과 함께 세상을 떠났네…"라고 말하기도 했다.[9] 결국 그는 장례식 막바지에 이성을 잃고 아내의 무덤으로 뛰어들어 아내의 관을 쓸어안고 자신도 함께 묻어버리라고 오열했다. 그 순간 오흐라나의 첩자들이 장례식장을 습격하는 난장판이 벌어졌고 스탈린은 금방 감정을 추스르고 재빨리 달아났다. 그리고, 아내와 함께 떠나보낸 인간성의 빈 자리 뒤로 강철의 야수가 남았다.
1900년에 찍은 머그샷. |
이렇게 감옥에 있던 젊은 시절부터 무서운 정치적 재능이 있어서, 감옥 죄수들을 선동해서 자신은 움직이지 않고 폭력과 살인을 조장했다는 일화가 있다. 링크 참고. 그의 권력과 선동력은 실로 대단해서 간수들마저 그의 편의를 봐주었고 스탈린은 감옥 안에서 데이트를 즐기기도 했다.
3 프락치?
오래 전부터 그가 러시아 제국 비밀경찰 오흐라나의 프락치라는 소문이 퍼져 있었다. 사람까지 살해한 은행강도도 유배형을 받았고 나름대로 편하게 지냈으며 심지어 그는 유배지에서도 애인을 사귀어서 사생아를 여럿 두었다!!! 게다가 유배지에서 자주 탈출하였다는 것이 그 증거, 또한 그와 다른 동지들이 집단으로 체포되었던 때는 프락치가 아니면 알 수 없는 비밀 모임이었다는 점도 있다. 그런 측면에서 대숙청은 자신이 프락치라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들을 묻어버리려는 꼼수였다는 설.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멘셰비키 쪽에서는 스탈린의 이러한 강도짓에 환멸을 느껴서 볼셰비키를 비난하고 그를 혁명운동에서 제명시키려고까지 했었다.
하지만 이런 프락치 설은 오늘날에는 거의 폐기되었다고 보면 된다. 스탈린 시절과는 달리 러시아 제국의 시베리아 유배는 상당히 널널한 편이었고 맘만 먹고 돈만 어디서 구해서 어설프게 위조 서류를 만든 후 역까지 걸어가면 되었다. 스탈린도 자유 상태의 동지들에게 돈을 융통해서 밀반입한 다음에 탈출했었다. 한번은 동지 하나가 그런 돈을 삥땅쳤는데(...) 스탈린은 당연히 정권을 잡은 뒤에 그를 처형시켰다. 스탈린도 한번은 여장해서 기차를 타고 탈출했었다. 사실, 제정 러시아 말기의 유명한 러시아 혁명가들 치고 시베리아 유형 갔다가 탈출한 전력이 없는 사람이 거의 없다. 레닌이나 트로츠키 같은 볼셰비키든, 멘셰비키든, 이들과 사이가 극도로 나빴던 크로포트킨 같은 아나키스트나, 조금 앞선 시대의 바쿠닌같은 인물까지 현재까지 이름이 알려진 인물들은 죄다 시베리아 유형을 갔었던 건 뭐 유명한 인물이니 찍혀서 잡혀간 거라 해도...이 중에 탈출 실패한 사람이 어째 하나도 없다.(...) 즉, 본인에게 탈출할 의사가 있고, 그걸 도와줄 사람이 있기만 하면 누구나 탈출할 수 있었던 셈이니, 사실상 감시가 없었던 것이다 다름 없다. 네차예프처럼 탈출이 도저히 불가능 할 정도로 철저한 감시를 받았던 인물이 있긴 한데, 이건 사실 유형지에서 간수를 두들겨 패서 감시가 철저해진 것에 가까워서...
논란이 되는 체포의 건도 사실상 당시 볼셰비키 고위직에 실제로 오흐라나의 프락치가 있었다. 로만 말리놉스키라는 인물인데, 레닌과 행동을 함께 했으며, 의회 격인 두마의 의원직을 역임하기도 했다. 말리놉스키는 혁명세력의 분열이나 체포에 항상 연루되어 있었다. 후에 의심을 받자 독일로 망명했지만, 레닌은 "그자는 그래도 경찰에 갖다바친 우리당의 정보보다 우리에게 가져온 경찰의 정보가 더 많았다."고 옹호하기도 했다.
1차대전이 끝난 후 볼셰비키가 정권을 잡자 한자리 해먹을까 해서 러시아에 되돌아 왔는데, 그땐 이미 볼셰비키가 오흐라나의 모든 기록을 접수했고, 말리놉스키의 프락치질을 모두 파악하고 있었다. 결국 체포 후 처형. 다만 이 사람이 볼셰비키가 오흐라나 내부에 침투시킨 이중스파이라는 견해도 존재한다. 레닌이 그가 의심을 받고 있음에도 옹호했던 것을 봐서도 그렇다. 공식적으로 들통나기 이전에도 스파이 의혹이 있었는데 레닌과 스탈린을 포함한 다른 동지들의 변호로 살아난다. 레닌과 스탈린이 동지들을 믿지 않고 무분별한 숙청을 시작하게 된 것도 이때의 경험에서 보는 견해도 있다. 스탈린 자신도 비밀경찰 내에 스파이를 두고 있어서 비밀경찰의 움직임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고 하는데 때에 따라서는 프락치들이 무고한 사람들을 프락치로 몰아서 스탈린과 레닌에 의해서 제거되는 일도 심심찮게 벌어졌다.
이 문제와 관련해서 연구한 학자의 결론은 오흐라나는 프락치를 통해서 볼셰비키를 붕괴시키지는 못했지만 볼셰비키 지도자들이 후일 숙청을 통해서 서로 의심하고 죽이고 죽게 하는 결과를 낳았다고까지 했다. 스탈린 자신이 스파이의 여러 정보들을 역정보라고 의심하게 된 이유가 바로 이때의 경험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 이유로 스파이 조르게의 독소전 정보 등도 스탈린이 무시하고 넘어갔다[10][11]
4 권력을 획득하다
1925년의 캅카스 3인방이라 불리었던 3명의 사진, 아나스타스 미코얀[12], 이오시프 스탈린, 그리고리 오르조니키제[13]
본래 러시아 혁명기에는 그다지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도 내성적이라 나서기를 꺼려(이는 트로츠키와 매우 대조적이다.) 눈에 안띄는 인사였던데다가, 그루지야 출신으로 러시아어에도 서툴렀기 때문에, 말많고 논쟁을 즐겨하던 혁명가들 사이에서는 "조용한 사람", "말 없는 사람"이라고 간주되었지만 사실 스탈린은 그 과묵한 겉면 안에는 권력에 대한 욕심이 이글이글 불타고 있었다. 이랬기 때문에 10월 혁명 이전에 그를 주목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훗날 그의 가장 큰 정적이 되는 트로츠키조차도 그가 대단한 인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이런 어눌함은 다른 혁명가들이 그를 과소평가하는 계기가 되었고, 그것 때문에 그는 경계를 받지 않고 수월하게 권력을 장악할 수 있었다.
10월 혁명에 대한 유명한 미국인 사회주의자 존 리드의 르포 <세계를 뒤흔든 10일>에서도 겨우 두번 이름만 언급될 정도이다. 이에 반해 레닌은 물론 트로츠키나 지노비에프는 거의 매장마다 언급되는데, 스탈린은 자신의 이름이 많이 나오지 않고 트로츠키가 더 많이 나왔다고 이걸 금서로 만들어서 소련 인민의 접근을 차단한다. 참고로 이 책은 레닌이 만국의 노동자들로 하여금 읽으라고 서문을 써준 책이다! 어쨌든 스탈린은 혁명 중에 한 일이라곤 없는 그저 레닌의 그림자에 불과했다라는 것이 정설이었다. 원체부터 일덕후였기 때문에 막후에서는 나름 열심히 한 것 같지만...애초에 레닌에게 인정 받은게 말 많은 러시아 사람들에 비해 말 수 적고 과묵하며 근면성실함이었다.
하지만 평가는 나중에 권력에서 밀려난 트로츠키의 공개적인 디스의 영향이기도 했다. 트로츠키가 한 일에 비해서 스탈린은 정말로 부족했던 건 사실이었지만 그가 자주 주장했고 그가 쓴 스탈린 전기처럼 잉여인사는 아니었다. 오히려 은행강도 등으로 단련된 도시 뒷골목 어둠의 세력과의 커넥션으로 레닌의 망명이나 자금 동원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괜히 레닌이 말년에 서기장을 준게 아니다.
10월 혁명 이후 볼셰비키당이 권력을 잡고 적백내전이 벌어지자, 그는 붉은 군대의 정치장교로 입대하여 직업군인의 충성을 감독하고 동향을 감시하는 역할을 했다. 흔히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군사적 재능은 있었다고는 한다. 그는 내전 초기에 남부전선으로 파견되었고, 백군의 반격으로 볼가 강 인근의 차리친, 후에 스탈린그라드가 될 도시로 후퇴하여 그곳에서 업무를 보게 된다. 스탈린은 트로츠키가 심어둔 구 제정 출신 장교들과 불화를 빚었고, 자신의 명령을 잘 듣지 않는 몇몇을 경질시키고 체포한 후 클리멘트 보로실로프를 남부전선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군 전체를 통솔하는 모스크바의 트로츠키는 당연히 이런 스탈린의 행동에 격노하였고, 스탈린-보로실로프 라인의 위험성에 대해 경고하며 이 문제를 둘을 중재할 능력이 있는 레닌에게 직접 가져가기에 이른다. 레닌은 스탈린을 모스크바로 불러들이고 보로실로프를 우크라이나로 보내 트로츠키의 불만을 일단락 시켰다.
거기에 갓 건국된 폴란드가 국가 막장 테크를 타고있던 소련을 침공해온 소비에트-폴란드 전쟁 때, 그가 지휘-감독 하던 소련군은 폴란드군에게 역관광당해 대패했고,[14] 이 판단 때문에 소련측에 우세했던 전쟁 양상은 폴란드측으로 흐른다. 이러한 이유로 국방장관 트로츠키와, 전선사령관인 미하일 투하쳅스키와 엄청나게 사이가 나빠지고, 이 때문에 스탈린은 군직에서 물러날 수 밖에 없었는데,[15] 훗날 자신을 디스하던 이들을 스탈린은 처형과 암살로 복수하였다.
이후 정부로 돌아가서 소수민족 출신이라는 메리트를 강조하여 민족문제연구소 민족문제위원회 위원장에 취임하였다. 원래 정권을 잡기 전까지도 스탈린이 남들에 비해서 비교우위를 갖는 분야는 소수민족 문제 분야였고, 실제로 민족 문제 관련 일을 많이 했으니 당연한 일. 이 자리는 스탈린에게 상당한 이득을 가져다줬는데, 소수민족 출신의 공산주의자들을 자신의 권력기반으로 포섭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때 교묘한 정치적 책략과 소련 내 민족 업무에서 보여준 과단성[16] 등으로 세력을 키워나갔고, 다른 혁명가들은 그를 거의 경계하지 않아서, 제도적으로 당에서 가장 높은 서기장직까지 별 반대없이 올라갈 수 있었다. 실질적인 최고지휘자였던 레닌은 1919년 뇌출혈로 반신불수가 되었고, 와병 중이었기 때문에 지도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 그런데 스탈린은 이 때 소수민족을 너무 억압해서 레닌에게 상당한 반감을 산다.
아마도 당시 볼셰비키당 내에서는 레닌이 유일하게 스탈린의 성격을 정확히 보고 스탈린 지휘하의 당의 미래를 예측한 사람인 것 같다. 예지력 대장! 레닌은 죽기 전 써둔 유언장에서, "스탈린 동지는 너무나 잔인하고 성격이 급하다. 그의 성격은 서기장 자리에 맞지 않다. 그러므로 서기장에서 해임하라."고 써놨다. 그러나 레닌은 후계자에 대해 암시적이고 모호한 표현만 했지 아주 명백하게 후계자 지명을 언급하지는 않아서 문제가 되었다. 혁명의 1등공신이라고 할 수 있는 국방장관 트로츠키는 영웅주의적으로 보이는 성격 때문에 '제2의 나폴레옹'이 될지도 모른다는 우려로 당내 유력주자들의 견제를 끊임없이 받았고,[17] 스탈린이 사임하면 그에게 총서기 자리가 돌아갈 판이었다. 그래서 정치국 위원들은 다소 만만하게 보이는 스탈린의 사임을 반대했다. 그래서 이 유언장은 스탈린이 주재하는 정치국회의에서 공개하지 않기로 했고, 이는 30년이나 지나서 흐루쇼프 시대에 와서야 공개될 수 있었다. 이때 스탈린의 유임을 강력히 주장한 혁명가들 대부분이 후에 스탈린의 대숙청 때 트로츠키주의자로 몰려 처형되었는데, 이땐 많은 이들이 스탈린의 본질을 깨달았으나 그에게 대항할 힘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우선 레닌의 유언장은 스탈린에 대한 가혹한 평가와 트로츠키에 대한 전체적 호평, 그리고 약간의 단점과 그 부분을 다른 동지들이 보좌해서 채워달라는 언급을 하고 있다.
스탈린 동지가 서기장으로써 무제한의 집중된 권력을 쥐게 된다면, 그 권한을 주의깊게 사용할 거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반면, 트로츠키 동지는(중략) 개인적으로 가장 현재 중앙위원회에 적합한 인물이다. 그러나 그는 과도한 자만심을 보였고 문제의 순 관리적인 작업[18]에 몰두하는 경향이 있다.- 레닌의 인민위원회에 보내는 유언장 중 1922년 12월 24일 작성된 부분
그루지야 쪽의 일들은 진정으로 프롤레타리아적인 입장에서 접근한다면 극도로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하며, 사려깊음과 준비성을 가지고 필요사항에 대해 절충안을 이끌어내야 한다. 하지만 그루지야인(스탈린)은 이런 문제에 대해 무지한 모습을 보여줬고, 마구잡이로 남들을 '국수주의적 사회주의자'[19]라며 비난하고(사실은 그 자야말로 진정한 국수주의적 사회주의자이며, 대러시아주의에 물든 천박한 깡패 놈이다.), 사실상 노동자 계층의 단결을 저해하고 있다. 노동자 계층의 단결을 가장 크게 해치고 그를 무너뜨리는 요소는 국가의 '부당함'이며, "피해를 본" 민족들은 평등하다는 느낌과 그 평등에 대한 침해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할 것이다 - 특히 그게 과실이나 기만, 그것도 바로 그들의 노동자 동지들에 의한 것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이게 바로 내가 이 건에서 소수민족들에 대해서는 많이 양보하고 관대하게 대할수록 좋다 말하는 이유다. 이게 바로 이 건에서 노동자 계층의 근본 권리를 위한 투쟁에는, 단순히 형식적인 태도가 아니라 억압받는 소국의 노동자의 편에 서서 억압자 대국을 대하는 태도에 입각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는 이유다.[20]- 레닌의 국가와 '자치화'에 대한 서한. 1922년 12월 31일.[21]
스탈린에게 혁명의 영웅 트로츠키는 눈엣가시였고, 전 세계의 공산화를 이룩해야 공산주의를 유지할 수 있다는 영구혁명론을 주장하는 트로츠키에 맞서 러시아 단독으로도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할 수 있다는 일국 사회주의론을 펼쳤다. 다만 트로츠키는 거만한 태도 때문에 스탈린이 아니고서도 적이 많았다. 후일 외무장관에 취임하여 '몰로토프 칵테일'이라는 단어가 생겨나게 한 뱌체슬라프 몰로토프 같은 경우 윗사람에게 고분고분하고 근면한 것 외에 장점이 없는 관료에 불과했는데, 트로츠키가 대놓고 몰로토프를 조롱하자 몰로토프가 부들부들 떨면서 "동무, 모두가 (동무처럼) 천재가 될 순 없소."라고 대답하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그런 반면 그 당시 좀 만만한 감이 있었고[22] 겸손하고 상식적이라는 인상을 주변에 주고 있던 스탈린은 혁명동지들에게 마치 모두의 합의를 도출할 만한 좋은 지도자가 될 것이란 인상을 주었다.
당시 세계대전과 내전으로 피폐했던 소련인들은 다수가 타국의 혁명에 간섭하려던 트로츠키 노선보다는 다른 나라 일에는 일단 거리를 두면서 소련의 독자발전을 구상한 스탈린 노선을 지지할수밖에 없었는데, 트로츠키가 주장한 국제주의는 다소 공상적이었고 피폐한 상태에서 제국주의 각국과 충돌을 벌일 수도 있는 위험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다 트로츠키는 스탈린의 음험한 권력욕이나 잔인한 노선[23]을 비판하며 후계자 지명을 하지 않을 것을 요구하는 레닌의 서찰을 공개하지 않았다. 레닌은 애초에 스탈린에게 경계심을 품다가 볼셰비키가 초심을 잃고 소련의 군소 가맹국들에게 깡패 독재국가스러운 면모를 드러내는 것을 경계하고 반성하던 터라 약소국에 가혹한 면모를 내비치는 스탈린을 지도자 자리에 앉힐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됐다. 레닌은 절대 스탈린을 후계로 삼지 않을 것을 암시하는 여러 서찰을 남겼지만 트로츠키는 아직도 자신이 목숨을 건 권력투쟁의 장에 있다는 감을 잡지 못했는지 스탈린이나 스탈린 편을 드는 혁명동지들을 총칼로 말살할 기회를 잡지 않았고, 그 사이 여기저기 그리고리 지노비에프나 레프 카메네프 등의 여러 인물들에게 손을 뻗친 스탈린이 본격적으로 트로츠키를 조지려고 마각을 드러낸 상황에서 트로츠키가 하필 오리사냥 나갔다가 앓아누웠다. 몸져누운 트로츠키는 자기를 비난하는 사람들에 대해 본인의 주특기인 반박을 제대로 할 수 없었고, 결국 최종적으로 스탈린은 트로츠키와의 권력투쟁에서 승리하고 트로츠키를 극좌 모험주의자로 낙인찍을 수 있었다.[24]
권력투쟁 과정에서 패한 트로츠키는 처음에는 그냥 시베리아에 유배되었고 최종적으로 소련에서 추방되었다. 트로츠키가 곤란한 상황에 처하자 독일 공산당 등에서는 트로츠키를 모셔가려고도 했지만 교활하게 스탈린은 트로츠키가 외국에 가서 혁명을 성공시키고 자신의 세계 혁명론을 입증하고 영웅이 되어 돌아오는 것을 막으려고 이런저런 핑계로 트로츠키를 묶어 놓았다. 당시 스탈린의 동맹 지노비에프는 트로츠키를 처형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지노비에프도 같은 이유로 후에 처형 스탈린은 오히려 추방으로 처리했는데, 트로츠키가 아무리 실각했다고 해도 트로츠키의 영향력은 그만큼 강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트로츠키가 추방당한 후에도 반스탈린 활동을 계속 펼치자, 훗날 멕시코로 요원을 보내 암살하기도 했다. 대체로 스탈린에게 숙청된 인물들은 흐루쇼프에 의해 대부분 복권되었지만, 자신이 세운 소련 체제를 "퇴보한 노동자 국가"라고 주장한 트로츠키는 흐루쇼프도 외면했고, 암살자 메르카데르에게 소비에트연방영웅을 수여하기도 했다. 트로츠키는 결국 소련이 망할 때까지 복권되지 못했다.
이후 스탈린은 트로츠키를 몰아내는데 협력한 지노비에프-카메네프와 손을 잡고 트로이카 체제를 수립하나, 지노비에프나 카메네프는 스탈린보다 훨씬 혁명가적 커리어가 높았기 때문에 역시 자신의 유일지배체제에 방해가 되는 인물들이었다. 그래서 다시 이번에는 떠오르는 우익반대파의 니콜라이 부하린과 손을 잡고 지노비에프와 카메네프를 권력에서 몰아내었다.
이후에 트로츠키가 자신을 우익적이라고 디스질하면서 사용했던 논리를 비슷하게 부하린에게 적용해서 비판을 가했고, 부하린을 몰아내는데 성공했고, 마침내 당내의 유일지도자로 자리를 확고히 하였다. 이후 대숙청을 실시하여 이렇게 권력투쟁과정에서 자신에게 한번이라도 밉보인 인간들은 모조리 "트로츠키주의자"로 몰아서 처형했다. 지도적 혁명가들은 스탈린을 잘못 평가한 대가를 죽음으로써 치르게 되었다.
5 대숙청
그렇게 자신을 디스하던 이들을 숙청하고 자신의 절대권력 확립을 위하여 스탈린은 전대미문의 대숙청을 실시한다 자세한 것은 항목 참고.
6 제2차 세계대전까지
당시 소련의 실태는 동물농장에서 비판되기도 했다. 스탈린의 의심과 불안이 소련사회의 구석구석을 지배하였고 대숙청이라는 사상 최대의 마녀사냥을 발생시킨다.[25] 동물농장과 1984의 저자인 조지 오웰은 사회주의 사상을 가졌음에도 스탈린과 소련식 정책을 증오하며 그들을 신랄하게 까는 저 두 책을 썼다. 이에 관해선 스페인 내전 당시 공화파 내의 트로츠키주의자(POUM)들을 박멸시키기 위하여 NKVD로 하여금 스탈린주의자(PCE)를 부추겨 공화파를 후원하긴커녕 분열을 조장했다는 이유도 있는데, 당시 오웰은 스페인 내전에 참전 중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직전 스탈린은 독소 불가침조약을 맺고, 개전 이후 독일과 함께 폴란드를 사이좋게 갈라먹었다. 그러나 애초부터 서로가 서로를 믿지 않았던 조약은 언제 무너질지 모를 일이었다. 소련도 언젠가 독일이 뒤통수를 후려칠 것을 예상하고 있었고, 때문에 1939년의 폴란드 분할 이후 새로운 독일-소련 국경선에 "스탈린 라인"이라는 방어선을 건설하라고 명령한다. 다만 그 방어선이 이전의 소련-폴란드 국경선에 있었던 방어선을 뜯어다가(…) 만들려고 한 병크가 문제였다.
나중에 스탈린이 죽고 난 후에 니키타 흐루쇼프의 발언 중에는, "우리는 스탈린 덕분에 이긴 것이 아니라, 스탈린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이긴 것이다."라는 것이 있다. 실제로 러시아 역사학자들은 스탈린 집권기를 공식적으로 대공포(大恐怖)기로 정의하고 있을 정도. 다만, 흐루쇼프의 평가는 전쟁 지휘에 대한 부분에 한정해서 본다면 맞을지 몰라도 스탈린의 공업화 정책이 아니었다면 소련이 독소전에서 이기지 못했을 거라는 사실을 고려하지 않은 이야기라고 봐야 한다.
7 제2차 세계대전과 독소전쟁
1934년 아돌프 히틀러가 집권한 이후, 노골적으로 소련을 디스하며 주변의 소국을 병합, 소련의 안보를 위협하게 된다. 소련은 안보적 위기를 느끼게 되었으며, 대숙청 와중에도 꾸준히 국방력을 증진하기 위해 병력을 늘리고 무기를 뽑아내었다. 스탈린은 영국, 프랑스와 손을 잡고 히틀러를 막아보려 했으나, 영불은 소련을 노골적으로 무시했고,[26] 독일에 침략당해도 소련의 개입을 허용할 수 없다는 폴란드의 고집 때문에 협상은 결렬되고 만다.
결국 스탈린은 서방각국을 불신하게 되었고, 이 때 히틀러는 서방과 전쟁을 치르기 위해 소련과 폴란드 침공 직전인 1939년 8월 유럽을 독소가 반분하자는 비밀조항을 넣은 불가침 조약을 맺는다.(독소 불가침조약) 이후 히틀러가 서방각국과 전쟁을 치르는 동안 소련은 비슷하게 폴란드 동부, 발트 3국, 그리고 루마니아의 몰도바 지방, 핀란드 일부(카렐리야 지방)[27]를 차지해 대가는 톡톡히 챙긴다. 게다가 스탈린은 자신이 배신했을 경우의 상황을 히틀러가 바라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히틀러에게 협상하는 자세가 아니라 고압적인 자세로 여러가지 사항을 요구하여 여러가지 수많은 이익들을 챙겼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는 히틀러를 화나게 만들기도 해서 히틀러는 스탈린을 "피도 눈물도 없는 강도"라고 비유할 정도였다.자기는 피도 눈물도 없는 학살자면서 그러나 히틀러가 엄청나게 빠른 시간만에 프랑스 침공으로 프랑스를 함락시키고 다이나모 작전에서 영국군마저 거의 전멸 위기에 놓여, 영국의 함락도 거의 코 앞에 이르게 되자[28] 스탈린은 깜짝 놀랐다. 그러자 그때부터 스탈린의 태도는 점점 부드러워지기 시작했고, 히틀러가 요구하는 일들은 그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면서 최대한 협조해 주었다. 그러나 주코프와 소련의 여러 장군들은 이런 스탈린의 태도가 재앙을 불러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고 주코프는 스탈린에게 여러차례에 걸쳐서 전쟁에 대한 대비를 해야 하며 경계령을 내려주라고 화를 내기도 헀다. 그러나 스탈린 또한 화를 내면서 히틀러를 건드리면 안 되며 전쟁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이야기했다고 한다.
스탈린이 히틀러를 믿었는지 안 믿었는지 모르지만, 적어도 영국과 전쟁이 끝나기 전에는 소련을 침공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29] 다만 스탈린은 히틀러를 과소평가하지는 않았다. 그는 히틀러가 단시간에 독일 민족들을 통합하고, 특히 독일 내에 상당한 세력의 독일 공산당을 완전히 전멸시켰으며, 유럽의 거의 대부분을 순식간에 정복하는 그를 보면서 히틀러를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고 판단하고 있었으며 자신처럼 뒷통수를 쳐도 전혀 죄책감이 없는 인간이라는 것을 파악하고 있었다. 몰로토프가 회상한 바에 따르면 스탈린은 전쟁준비를 하고 있었으며 "1943년에는 전쟁을 할 준비가 마련된다"라는 스탈린의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고 한다. 게다가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에서 알 수 있듯이 러시아를 침공하려고 했을 때에는 동장군을 예상하여 봄에 침공을 해야 동장군의 위협에서 벗어나기 때문에 봄에 침공하는 것이 가장 중요했지만 독일군이 유고슬라비아 침공으로 발칸반도에서 이미 시간을 보내서 봄과 초여름이 지나서 한여름이 되었기 때문에 "지금 침공하면 겨울이 되는데 설마 침공해 오겠어?"라며 들어오지 못한다는 것으로 판단하여 봄이 지나고 나자 안심했던 것도 상당한 영향이 있었다. 그러나 히틀러는 소련과 끝까지 강화할 생각이 없었고 1941년 6월 22일 새벽 3시 30분부터 바르바로사 작전을 개시하여 소련을 침공한다. 붉은 군대는 초장에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전쟁 개시 몇 시간 만에 소련군 전투기 1200대가 그냥 지상에서 파괴되었고, 소련의 전방 보급기지들은 부대에 탄약을 공급하기도 전에 독일군에 점령되었다. 독일군의 진격이 워낙 전광 석화 같다보니 소련군은 적이 어디 있는지도 몰랐다. 많은 부대들이 새로운 숙영지로 이동중에 독일군의 공격을 받아 괴멸되었고, 전선에 도착한 부대들도 무턱대고 싸우다가 몇시간 만에 사라지기도 했다. 겨울전쟁에서도 오합지졸의 모습을 보여준 소련군이 우왕좌왕하는 사이 소련군의 상당수는 격파되었고 영문도 모른 채 포로로 잡혔다. 지휘에서 보급에 이르기까지 아직 대숙청의 여파를 완전히 극복하지 못한 소련군이기에 이러한 패배는 당연했다. 결국 이 바르바로사 작전으로 무려 수백만에 가까운 소련군 포로가 잡혔으니, 사실상 소련군은 거의 와해 상태였다.
주코프와 여러 장군들을 새벽 3시 30분부터 폭격이 일어나고 있다는 말을 듣고 드디어 올 것이 왔다고 판단하였고. 스탈린을 깨워서 모스크바에 데려오도록 했다. 잠자던 스탈린은 독일군이 소련 도시들을 공습하고 있다는 주코프의 전화를 받고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래서 크게 심호흡을 한 후에 주코프에게 그 어떠한 전투도 하지 말라고 명령했다. 그 뒤에 리무진을 타고 모스크바로 간 스탈린은 미리 회의를 하고 있던 몰로토프 주코프와 같은 사람들과 회의를 하기 시작했다, 스탈린은 독일이 침공했다는 소식을 듣자 망연자실하였고 매우 창백하고 당황한 얼굴로 빈 파이프를 뻐끔거리면서 이 상황을 믿지 않으려고 하였다. 스탈린은 이 회의에서조차 이 공격이 단지 제한된 도발이라고 믿고 있었다. 심지어 세묜 티모셴코가 '우리의 도시를 공습하는 걸 그냥 도발이라고 할 순 없다'라고 말하자 스탈린은 "그렇다면 독일의 장군들이 자신의 도시를 폭격해서 도발을 했을 것이다"이라면서 독일 지도자 히틀러가 그럴 위인이 아니라고 대꾸했다. 그는 자신이 틀렸다는 사실은 인정할 수 없었고인지부조화? "히틀러는 분명히 이 상황을 모를 거야."라고 푸념하듯이 말하면서 히틀러가 전쟁을 명령한 것이 아니라, 독일의 일개 장군들이 음모를 일으킨 것이거나 독단적으로 전쟁을 일으켰다고 끝까지 믿으려고 했다. 그러다가 지휘부의 누군가가 "히틀러는 이 도발에 대해 모르고 있을 수도 있으니 독일측의 정확한 의도를 알아야 하는 것이 먼저입니다"라고 말했다. 이에 스탈린은 그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해서 몰로토프를 독일 대사관에 파견했다. 몰로토프는 그곳에서 만난 독일 대사 슐렌부르크[30]에게 히틀러가 선전포고를 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에 몰로토프는 엄청난 충격을 박은 나머지 말을 더듬거리며 "우리가 귀국에 그럴만한 짓을 한 적이 있습니까?"라고 말했다. 스탈린 또한 엄청난 충격을 받았고, 몸에 힘이 빠졌는지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고 오랫동안 견딜 수 없는 침묵이 뒤따랐다. 계속되고 있던 침묵을 깬 사람은 주코프였다. 당시 개판이 따로 없던 소련 지도부 사이에서 거의 유일하게 주코프가 독일군을 저지해보겠다고 여러가지 전략들을 이야기했지만, 이반 코네프는 "저지가 아니라 전멸이겠지" 라고 이야기했다.
그러나 스탈린은 이 상황에서도 전쟁을 지휘할 생각은 없었다. 세묜 티모셴코가 스탈린에게 어떻게 전쟁을 이끌어야 되겠냐를 물어보기 위해 스탈린을 만났지만 스탈린은 그를 못본 척했다고 한다. 그는 오로지 정치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여 정치부회의에 참석했다.[31] 방송 연설은 몰로토프에게 맡겨놓았다[32]. 그래도 스탈린은 하루가 지난 후부터는 정신을 차렸으며 며칠 후에는 하루에 14시간 정도를 일하면서 전쟁을 지휘할 정도로 괜찮아 졌다고 한다. 소련 지도부는 일단 적이 코 앞에 와 있었기 때문에 일단 어찌저찌 전열을 정비하고 독일군과 싸우는데 정신이 없었지만,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하던 스탈린에 의해 소련군이 입은 피해가 심각하다는 것을 안 많은 사람들은 점점 "왜 스탈린이 서기장으로써 전쟁 역할을 수행하는가?"에 대해서 심각한 의문을 표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스탈린은 수수께끼 같은 행동을 했다. 1941년 6월 29일부터 스탈린에게 연락이 되지 않았다 즉, 스탈린이 실종된 것이다. 당황한 사람들이 스탈린의 행방을 알아보니 그가 며칠간 출근하지도 않고, 관저에 숨죽이며 틀어박혀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지휘부는 일단 스탈린이 없는 가운데에서 해야 할 일을 계속 했지만, 스탈린이 없는 상태에서 전쟁을 수행하는 그들은 왠지 모를 불안감이 생겼다, 그들은 항상 스탈린에게 명령을 받아 움직였으며, 지금하고 있는 일들이 그의 노여움을 사서 그가 무슨 트집을 잡아 자신들을 숙청 시킬지 몰랐기 때문이였다.
그러자 보다 못한 몰로토프 등의 심복들이 관저로 가서 스탈린에게 대책을 세워야 할 거 아니냐고 요구하기 위해서 찾아가기로 마음 먹었다. 그들은 먼저 스탈린을 설득하기로 하고, 만약에 그래도 스탈린이 제정신을 차리지 못한다면 스탈린이 아니라 몰로토프에게 전쟁 지휘권을 달라고 요구하기 위해서 스탈린의 관저로 찾아갔다. 그들이 본 관저에 있던 스탈린은 축 늘어져서 안락 의자에 앉아 있었는데 자신들이 오자 "무슨 일이요?"라고 답했는데, 스탈린은 자신들을 경계하는 눈치였으며 굉장히 나약하고 의기소침해 보이는 모습이여서 그런 스탈린의 모습을 보지 못한 사람들을 의아하게 만들었다. 미코얀이 생각하기에 스탈린은 자신들이 스탈린을 불신임하고 체포하러 온 줄 알았다는 눈치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러나 사실은 스탈린의 속내는 이반 4세가 자신이 왜 통치해야 하는지를 각인시키기 위해서 수도원에 들어가서 나오지 않았던 이유와 비슷하다.[33] 한마디로 "이놈들이 왜 이제서야 나의 중요성을 깨닫고 찾아오는 거야"였다고 한다. 그들은 스탈린에게 전쟁을 이끌 사람의 필요성을 이야기했다. 그러자 스탈린은 "그래서 누가 전쟁을 지휘할 것인가?"라고 이야기하자 심복들은 "당신이 전쟁을 지휘해 주시오"라고 이야기했다. 이에 스탈린은 꽤나 놀란 표정을 지으면서 그 제안을 승낙하여 전쟁을 지휘했다.소련판 선위파동 특히 스탈린은 자신의 부하들이 자신들끼리 권력 투쟁이나 자리 싸움을 하는 것을 보고 더욱 안심했다고 한다. 그러나 만약에 몰로토프가 전쟁을 지휘한다고 이야기했을 경우 그 자리에 있었던 모든 사람들은 모조리 숙청당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베리야는 스탈린의 나약한 모습을 본 미코얀과 몰로토프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대가를 치루게 될 것이다라는 섬뜩한 예언을 했다.[34] 어쨌든 현실을 깨달은 후에는 적극적으로 전쟁수행에 개입했다. 이것이 지나쳐서 몇몇 군사작전에 개입했다가 수백만의 병력을 날려먹긴 하지만,이게 그렇게 가벼운 일인가? 자신이 개입해 봐야 별로 좋을게 없다는 것을 깨달은 그는 이후에는 직업군인이 짠 작전에 손을 대지 않았다고 한다.
가장 큰 위기는 1941년 12월의 모스크바 전투였는데, 스탈린은 정부 부서를 모두 동쪽으로 피난시켰으면서도 시와 운명을 함께할 것이라고 선언했고, 실제로 공방전 내내 모스크바를 지키면서 방위전을 독려했다. 게오르기 주코프와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의 활약으로 모스크바는 성공적으로 사수되었다. 이후에는 총사령관 대리인 주코프에 작전지도를 맡기고, 자신은 자는 시간을 빼놓고 하루 12시간 이상씩 일하면서 전쟁 수행에 필요한 행정을 총괄했다. 그는 전쟁 전부터 총괄하던 일반 행정뿐만 아니라 군업무로부터 군수생산, 그리고 서방 원조까지 거의 모든 방면의 세부사항을 직접 챙기면서 실무진에 엄청난 압박감을 주었고, 이들은 저승사자였던 스탈린의 노여움을 사지 않기 위해 죽어라 일을 했다. 실제로 이 당시 대숙청 기간은 아니었으나 자신의 임무를 달성하지 못한 자는 굴라그로 가거나 혹은 처형되었다. 이런 면에서 스탈린은 2차대전 당시 소련의 승리에 일정 부분 기여했다. 그러나 이러한 무리한 작업은 스탈린의 육체를 크게 손상시켰다. 주코프가 회상하기를 스탈린은 도저히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노화가 진행되었다고 한다. 얼굴은 쭈글쭈글해졌으며, 눈은 심하게 쳐지기 시작했고 몸동작도 느려졌으며 머리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새하얘졌다고 한다. 실제로 1939년과 독소 불가침조약때와 1945년 얄타회담에 찍은 사진을 보면 6년밖에 안지났는데 머리나 수염이 모두 새하여졌다는걸 알 수 있다. (항목에 들어가서 사진 참조바람)
어쨌든 붉은 군대는 전세를 역전시키고, 베를린을 함락시켰고 5월 9일 마침내 주코프는 국방군 총참모장 빌헬름 카이텔로부터 항복문서를 받아냈다. 마침내 독소전쟁이 마무리된 것이였다. 당시 소련인들이 얼마나 기뻐했는지는 달리 설명할 필요도 없다, 당시 모스크바에서는 축포가 1000여발이나 발사되었고, 화려한 불꽃놀이가 벌어졌으며, 무엇보다도 모두들 엄청나게 마셔댔다. 비록 본진이 탈탈 털려서 식량은 없었지만 보드카는 넘쳐났서 술은 잔뜩 마실 수 있었으며 경찰들은 사람들이 고성방가를 하거나, 오줌을 벽에다가 싸는 것도 눈감아주었다고 한다. 6월 24일 역사적인 전승 기념 개선식이 모스크바에서 벌어졌는데 원래는 이 날 러시아군의 전통에 따라서 전쟁을 승리로 이끈 최고 사령관이 백마를 타고 개선식에서 그림처럼 달려나가기는 것으로 정해져 있었다. 물론 여기서 최고 사령관은 주코프가 아니라 스탈린이었다. 그러나 이 그림은 완성될 수 없었는데 그 이유는 스탈린이 탈 수 있을 만한 아랍산 백마는 구할 수 있었지만, 승마에 익숙하지 않은[35] 스탈린이 이 말을 타자 놀란 말이 앞다리를 치켜 드는 바람에 스탈린은 굴욕적으로 내동댕이 쳐져서 머리와 어깨에 부상을 입었다. 기분이 상한 스탈린은 화가 나서 큰소리로 말했다. "주코프더러 행렬의 선두에 서라고 하시오. 그는 노련한 기병이니까" 이에 다시 베를린에서 모스크바로 호출을 받은 주코프는 스탈린으로부터 말을 잘 다루냐는 질문을 받았다.[36] 그러나 이 독재자가 자신을 시기하고 질투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아는 주코프는 본능적인 방어로 당연히 스탈린 동무만이 최고사령관으로써 행렬에 선두에 서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스탈린은 자신이 너무 늙어서 힘들다며 주코프에게 선두에 설 것을 명령했다. 그리고 자신은 높은 곳 위에서 말을 타고 가는 주코프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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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마를 타고 개선식을 하는 주코프. 원래는 스탈린이 타고 있었어야 할 장면이였다.[37]
어쨋든 그렇게 전쟁에서 승리하자 전쟁 이전부터 우상화가 진행되고 있던 스탈린은 이제 군사적 커리어까지 더해 정말 소련에서는 신같은 존재가 되었다. 이런 것들이 종교화의 레벨까지 이르러 반종교를 표방하는 프라우다지에서조차 공개적으로 "자신의 일이 잘 안될때, 그분(즉 스탈린)에게 기원하면 모든게 이루어질 것이다"라는 사설을 쓸 정도였다. 사이비종교의 레벨
그런데 아주 놀랍게도 스탈린 자신은 독소전쟁 축하연 연설에서 "우리의 승리에 저는 아무것도 한 일이 없고, 모든 것은 소련 인민들의 피와 땀이 이룩한 것입니다."라고 겸손을 떨었다. 어떤 역사가는 이 연설이 스탈린이 한 연설중에서 가장 정직한 것이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8 냉전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무조건 항복함으로써 제2차 세계대전은 끝났지만, 추축국 동맹을 패퇴시키는데 가장 큰 공을 세웠던 미국과 소련은 전후 질서를 둘러싸고 첨예한 대립을 했다. 스탈린은 영미와 흥정으로 동유럽을 차지할 수 있었고, 소련의 건국 당시부터 숙원이던 완충지대를 마련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는 동서 간의 첨예한 대립으로 나타나는데 이를 냉전이라고 한다.
일단 전쟁이 끝난 후 스탈린의 권력은 더욱 공고해졌다. 1945년 6월 28일에는 자신이 영웅시한 알렉산드르 수보로프처럼 대원수의 지위에 오른 스탈린은 전쟁당시 주춤했던 세뇌 및 숙청 작업을 다시 시작했다. 일단 전쟁 중 독일 점령지에 있던 배신자들이 우선적인 숙청대상이 되었다. 카프카스와 발트 3국에 있던 여러 반소 분자들이 총살되거나 굴라그로 보내졌다. 전쟁 중 포로가 된 소련군도 결코 예외가 될 없었다. 277만 5700명의 소련군이 포로가 되었다는 이유로 여과 수용소라는 곳으로 보네졌다. 이 중 절반은 강제 노동 수용소로 끌려갔다. 전쟁이 끝났다는 이유로 국민들을 느슨하게 다루는 것은 강철의 대원수에게는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마르크스, 레닌주의가 다시 강조되었고, 국민들은 당과 정부에 충성을 바쳐야만 했다. 비밀경찰은 다시 바빠졌고, 소련의 어용 언론들의 세뇌와 선전은 다시 강조되었다. 그리하여 소련은 나치 독일에 엄청난 피해를 입었으나, 종전 3년 만에 전쟁 전 수준으로 생산량을 회복한다.
1949년 핵 실험을 하여 소련은 미국의 핵무기 독점을 끝내고 세계에서 두 번째로 핵무기를 보유하게 되었다.
냉전시대에 스탈린이 세계 적화의 야욕이 있었다는 식의 선전이 있었지만, 실제로 스탈린은 다른 나라의 혁명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다른 나라의 혁명이 실패하더라도 소련의 이익이 침해되거나 미국과 대결하는 것은 피했다. 예를 들어 스페인 내전에서 공화군에서 무정부주의자와 트로츠키주의자들이 득세하자, 소련은 NKVD를 보내 공화파에서 이들을 때려잡는데 힘을 쓰다가 적전분열을 일으켜 결국 파시스트군이 승리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베를린 위기때도 도로는 봉쇄했을지언정, 미국의 공중 수송은 막지 않았고, 국공내전 때도 인민해방군이 승리하기 직전까지 개입하지 않았고 공식적으로는 중화민국과의 외교를 끊지 않으면서 구 러시아 제국이 만주에서 가졌던 이권을 되찾는데 집중하였다. 한국전쟁에서도 소련군은 비밀리에 참전한 공군을 제외하면 끝까지 참전하지 않은 것도 이때문이다. 오히려 모택동에게 김일성을 원조하라는 말을 한 이후에 '쟤가 개입안하겠다고 하면 우리 이웃으로 미군을 놔도 상관없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정치학자들은 스탈린을 "20세기 최고의 정치현실주의자"로 평가한다.
스탈린이 이런 모습을 보인것은 그가 보기에 따라선 매우 소심하면서도 신중한 성격이었기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나, 그가 제2차 세계대전에서 소련을 지휘하면서 본 미국의 압도적인 군사력과 경제력을 뼈저리게 체감했기 때문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 스탈린은 소련의 서기장이자 소련군 통수권자 그리고 연합국의 지도자 중 한명으로서 미국이 행한 가진 것이라고는 명분밖에 없는 키다리 지도자에게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전차 수십, 수백량 이상을 제공하는 미칠 지경의 USA Loan, 미국이 수행한 일본 제국과 나치 독일을 대산으로 한 양면전쟁 그리고 미국의 가증스러운 JAP을 단번에 박살낸 악마의 폭탄 투하를 생생히 전달 받을 수 있었던 인물이다. 소련 서기장 스탈린이 아니라 삼척동자가 봐도 신생국가 소련이 핵무기 기술까지 독점했던 미국과 충돌할 경우 남는 것은 자멸 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실제 미소 전쟁이 소련이 미국이 가진 것 이상의 핵전력을 보유하지 못한 스탈린 생전에 벌어졌다면,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쑥대밭이 되었던 소련이 본토와 생산력, 경제력이 멀쩡히 살아있었던 미국을 이겼을 것이라 보기는 어렵다. 애초에 무기대여법 등을 통한 다양한 자원과 경공업, 군사적 지원, 배후에 있던 일본 제국을 미국이 박살내고 있었던 상황 등으로 인해 소련이 마음놓고 중화학 군사 산업을 육성하고 독소전쟁에 모든 것을 올인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만일 미국과 소련이 전쟁이라도 하게 된다면, 그런 지원은 당연히 없는 것이고, 소련은 독소전쟁 이상의 패널티를 가지고 전쟁을 했어야 함이 당연.
물론 미국 핵개발 비화에서도 알 수 있지만, 일본에 떨어뜨린 핵폭탄 두개 소진한 후 다음 핵무기의 준비까지 미국에게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던 것은 자명하다. 하지만 핵이 없었다고 해서 상황은 더 나아지지 않는다. 국제역학적으로 보아도 소련에게 득될 것은 하나도 없던 것이. 일단 영국만 해도 윈스턴 처칠이 철의 장막이라고 언급할 정도로[38] 공산주의 소련에 좋은 감정을 가지지 않았고, 독일 쪽에서 보아도 독소전쟁과 나치의 대 소련 프로파간다, 소련군의 약탈, 미소분할점령 등으로 인해 소련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다. 그나마 프랑스는 좀 나을지도 모르겠지만 자유 프랑스는 미국에게 진 빚이 엄청났기 때문에 미국의 입장을 묵살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즉 영프독으로 대표되는 기존 열강들이 소련에 친화적이지 않고, 미국의 편을 들 것이 분명한 상황이다. 일본의 경우 반미감정이야 당연히 가지고 있었다 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일본이 소련 편을 들어줄 것이라 보기도 어렵다. 일단 일본은 확실히 GHQ에 의해 지배당하고 있었고 이것은 서유럽을 확실히 지배하지 못한 소련과 미국의 극단적인 차이이다.[39] 또한 일본과 소련은 제정 러시아, 적백내전 시절부터 서로 치고받고 싸운 앙숙관계였기 때문이다.
어차피 미국은 태평양과 대서양을 넘어 양면전쟁을 했던 만큼, 소련을 동, 서로 나누어 공격할 능력도 충분히 있었다. 다만 양면 공격의 대상이 나치 독일과 일본 제국에서 소련 서부, 동부로 바뀌는 것일 뿐이다. 당시 미 해군은 태평양 전쟁을 통해 세계 3위 일본 해군을 상대로 하면서 급격히 팽창해 명불허전 세계 1위의 해양 군사력을 가지고 있었고, 수송능력 또한 별반 다르지 않았다. 당연히 공군전력 또한 마찬가지. 베를린 봉쇄에서 이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오로지 공군의 공중 수송을 통해 서베를린이라는 대도시를 지탱한 것이 미군의 수준. 이런 상황에서 대서양에서 주구장창 미군을 괴롭히던 나치 독일의 유보트와 일본 제국의 잠수함들마저 없어졌으니 상황은 더 낫다. 미국이 이런 해군력의 압도적 우세를 이용해 베링 해협과 대서양을 막아버리고 소련의 동쪽과 서쪽에서 양면 공세를 벌인다면 소련 입장에선 어떻게 할 방법이 없다. 소련의 의미있는 군항은 죄다 동유럽, 러시아 서쪽에 집중되어 있어 애초에 소련 해군이 약하지만 모항에서 벗어나기도 어렵다.[40] 때문에 일본 제국이 당했던 것처럼 소련 역시 미국의 본토를 공격할 엄두도 못 낸채 일방적으로 얻어 맞는 샌드백이 되었을 것이 자명하다. 소련군이 서진해 서유럽을 위협할 수도 있었겠지만, 일단 독일을 완전히 합병하려 한다면 그것대로 프랑스와 영국이 가만히 있을 것이라 보기도 어렵다. 적어도 스탈린 생전의 소련이 그런 능력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라 보기도 어렵고. 이런 점을 모두 종합하면 스탈린이 세계 적화를 추구하며 공격적 모습을 보일 수는 없다. 지상전에서 미국에게 상당한 출혈을 강요할 수는 있을지언정, 소련과 미국은 기본적으로 바다로 인해 이격되어 있어 근본적으로 상대가 안 되기 때문이다.
다만 소련군이 진주한 나라에서는 소련식으로 사회를 개조하려 했고, 꼭두각시 정권을 세워 위성국으로 삼으려고 했다. 이런 제국주의적인 태도는 나중에 동유럽에서 많은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거의 독자적인 혁명으로 집권한 요시프 브로즈 티토는 이에 반발해 소련의 영향력에서 벗어난다. 그리고 스탈린 사후, 헝가리나 체코슬로바키아에서는 소련의 간섭을 벗어나려는 소요사태가 일어났고, 동유럽과는 약간 다르지만 마오쩌둥이나 김일성, 엔베르 호자는 이전의 소련 꼬붕을 했던 노선을 폐기하고 독자노선을 천명하게 된다.
9 우상화의 절정
오로지 종교만이 그에게 바쳐졌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주변에 아첨하는 무리가 생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전대미문의 독재자답게 단순히 아첨에만 그치지 않았다. 스탈린에게 바쳐진 것은 그냥 아첨이 아니라 거의 숭배 수준이었다. 사실 스탈린 자신은 지나친 숭배 의식과 열풍에 당혹스럽다며 선전에 도가 지나치다고 불평했다. 그렇다고 선전과 숭배 의식을 제한하지는 않았다. 츤데레? 당시 이러한 숭배 의식을 만들어낸 건 결국 스탈린 본인의 절대자적인 통치 스타일 때문이었다. 따라서 그가 숭배 의식을 비판한 것은 당연히 뭔가 앞뒤가 맞지 않는 일이었다.
아무튼 전후 소련에서는 웃지 못할 스탈린 숭배 열풍이 불었다. 한 번은 1945년에 스탈린 전집이 출간될 때의 일이다. 스탈린은 종이가 부족하니 3만 부만 찍자고 했다. 그러나 주변인들은 대중의 요구가 엄청날 것이라면서 적어도 30만 부는 찍어야 한다고 말했다. 겸손한 스탈린 동지는 마지 못해(?) 이에 동의했다.[41] 그는 자신의 전기를 읽고도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스탈린은 자신에 대한 도가 지나친 아첨이 가득한 스탈린 전기를 읽고 "우리에게 우상 숭배자는 필요 없소...우리에겐 마르크스와 레닌의 가르침이 있으니 다른 것은 필요 없소"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스탈린 전기가 발간이 취소되지는 않았다. 스탈린을 신성한 마르크스, 엥겔스, 레닌의 후계자로 보는 '단기 과정'은 전후 천만부가 발간되었다. 동시에 전기는 100만부 이상, 전집은 50만부 이상 발간되었다. 스탈린의 숭배는 이제 소련 출판계의 사명이었고, 소비에트 언론이 가야할 길이었다. 전쟁전과 마찬가지로 스탈린에 대한 수많은 포스터가 제작되었다. 학교에서도 직장에서도 스탈린에 대한 철저한 세뇌는 미덕이 되었다.
스탈린 우상화는 1920년대부터 레닌과 엮어서 레닌의 계승자로 슬슬 나왔고 1930년대부턴 레닌을 제치고 자체 우상화로 더 심해지더니 대숙청이 시작되자 죽지 않기 위해서 열광적으로 변하고 독소전쟁에서 승리하자 신격화되기 이른다. 1940년대 소련 지도를 보면 독소전쟁때 유명한 격전지 스탈린그라드 뿐만 아니라 '스탈린스크', '스탈리노고르스키', '스탈린스키', '스탈리노그라트', '스탈리나오울' 같은 도시가 등장한다. 심지어는 모스크바를 '스탈리노다르 혹은 스탈린다르(스탈린의 선물)로 바꾸자는 아부성 청원이 나왔고 역법을 예수 태어난 연도 따위하면서 서기 연도를 대체하여 스탈린 생일을 기준으로 하자는 의견도 나온다. 두가지는 겸손한 스탈린 동지도 낯간지럽다고 생각했는지 사양한다.[42]
영화 <베를린 함락>에서는 감독이 스탈린 홀로 히틀러의 패배를 궁리하며 참모부 지도를 주시하는 장면을 보여준다. 전쟁 시 신화 속엔 스탈린이 홀로 전쟁영웅-정치인의 실체가 되었다고 믿을 판이었다. 1948년 소련 예술상 출품작 중에 단 두 편만이 위대한 스탈린을 묘사하지 않은 작품이었다. 새로운 노래나 출판물은 말할것도 없었다. 노래야 손발이 오그라드는 스탈린 찬양 내용이 주를 이었고 히틀러의 저서(?) 나의 투쟁은 겨우 1000만부 정도나 팔렸지만[43] 스탈린의 저작들은 총 7억 600만부가 팔렸다. 레닌의 저작은 2억 7900만부, 마르크스-엥겔스의 저작은 꼴랑 650만부가 판매 되었다. 하지만 인류 역사상 최고의 베스트 셀러작가가 되었던 스탈린 동지의 기록은 마오쩌둥에게 곧 깨진다. 마오주석 어록은 44억부가 출판되었다. 역시나 대륙의 기상이다.[44]
이런 지도자 신격화를 어디의 선전물에서 많이 본 것 같다면 절대 기분 탓이 아니다. 북한의 모든 선전, 선동 기법은 스탈린 식 선전선동 기법의 철저한 모방화 - 이후 민족주의 주입에 있었다. 당연히 스탈린을 찬양하는 포스터에서 북한 냄새가 나더라도 그게 당연한 것이다. 그런데 웃기는 것은 흐루쇼프, 브레즈네프 시대에 들어서면서 소련은 스탈린의 방식대로 체제만 유지하고 그를 숭배했던 것에 대해 흑역사 취급하는 분위기로 흐른 반면 북한의 김일성 숭배는 더욱 막장화되면서 소련에서 자기네들이 세워 준 정권인 북한의 김일성 숭배 선전물을 보며 낄낄거리는 웃지 못할 사태가 벌어졌다.
이 시절 소비에트 연방의 모든 사람이 위대한 스탈린 동지의 영도력 안에서 행복을 느꼈다. 아니라면 느껴야만 했다 소비에트 안에서 좋은 일은 모두 '친애하는 스탈린 동지'의 은혜로부터 시작되었다. 당시 어떠한 작품도 그의 천재성을 언급하지 않고는 나올 수 없었다. 역사와 정치학, 경제학, 지리학, 화학, 물리, 유전학 까지도 '스탈린 동지'의 지도적 사상을 통합하지 않으면 완전하지 못한 것으로 평가되었다. 심지어 요리책에까지 '스탈린 동지'의 말이 인용되었다. 그러나 스탈린은 자신의 사진을 게재하는 것은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어릴 적 마차 사고로 온전하지 못한 왼쪽 팔과 얼굴의 천연두 자국 때문이었다. 따라서 그는 사진보다 초상화를 많이 선호했다. 2차 대전 후에는 너무 나이든 초상화를 거부해서 보통 그 이전의 초상화가 사용되었으며 모든 초상화는 '스탈린 동지지'가 인정한 작품만이 공개될 수 있었다. 계속되는 선전과 세뇌는 억압적 독재 정권하에서도 효과를 발휘했다. 특히 독소전 이후의 상황과 연계되어 스탈린은 구국의 영웅으로 승격되었다. 이제 많은 소비에트 인민들이 실제로 '스탈린 동지'를 사랑했다.우웩 아마 초기에는 그냥 살아남기 위해서 또는 굴라그로 끌려가지 않기 위해 그를 숭배하는 사람이 많았고 스탈린이 독소전쟁에서 승리한 후부터 스탈린 격하 운동이 벌어지기 전까지는 실제로 숭배하는 사람들이 많았으나, 안습하게도 스탈린 숭배는 흐루시초프에 의한 스탈린 격하 이후에 스탈린은 대중의 관심에서 사라졌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소련 붕괴 이후에도 실제로 스탈린을 숭배하는 사람들이 대거 나타났다. 심지어는 이 항목 상단의 짤에 나온 것처럼 정교회에서 스탈린 이콘이 나오는 사태가 벌어졌다. 초기에는 정교회를 비롯하여 종교 자체를 말살하려 했던 스탈린이지만 독소전쟁이 시작되면서 소련 인민들을 단결시키기 위하여 정교회를 거꾸로 밀어 주었기 때문이다. 그걸 이유로 정교회에서 스탈린을 갖다가 떠받드는 거다(...)
10 말년
그렇게 시간을 흐르고 흘러 1949년에 스탈린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70살 노인이 되었다. 그의 70세 생일은 마오쩌둥, 호치민 등등의 전세계의 공산주의 지도자들이 모두 참여한 화려한 기념식이였다. 보통 사실보다 굉장히미화된 그의 초상화와 사진을 통해서 그를 알고 있던 많은 지도자와 사람들은 이날 참여한 스탈린의 노회한 모습에 굉장히 놀라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스탈린은 초상화에서의 모습과는 달리 나이를 먹는 인간이였다. 다만 인민들은 늙은 모습도 마치 오랜 세월을 지낸 현자 같다고 자기 합리화(...).
원래 의심이 더럽게많았던 독재자이지만, 나이가 많아짐에 따라 의심도 배로 더 늘었다. 그는 몰로토프, 카가노비치, 베리야, 흐루시초프, 미코얀 등과 같은 자신의 충실한 충복들이 자신을 배신하지 않을까 의심했고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스탈린의 모든 주변인들이 스탈린이 너무 늙었다는 사실을 잘 알았지만 의심많은 스탈린 앞에서 정신이 머리에서 가출하지 않는 이상 감히 후계자 이야기를 꺼내는 무모하고 정신나간 인간들은 없었다.
그 누구든지 자신을 위협할 권력을 가질 경우 이 늙은 콧수염 대마왕이 가만히 있지 않으리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였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심지어 그 정도의 권력을 갖지 못한 측근들도 항상 자신을 숙청할 지 몰라 살얼음판을 걷는 생활을 했다. 사실 스탈린은 쉬고 싶었지만 은퇴할 경우 보복을 당할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었다. 워낙에 대숙청으로 수많은 이들을 잔인하게 쓸어버린 그였기에 이러한 불안은 사실 정확한 것이었다. 그는 죽는 순간까지 권력을 잡고 있지 않는다면 무슨 보복을 당하게 될 지 몰랐다. 물론 이렇게 일을 하기에는 몸과 마음이 매우 지치고 늙은 상태였기 때문에 옛날처럼 정상적으로 업무를 보기는 힘들어서 말년에는 일도 대충대충하고 영화를 보거나 여행을 다니거나 만찬을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럼에도 스탈린은 말년에 주변 인물들을 떠보기 위해 자주 은퇴를 거론하긴 했다. 그가 은퇴의 뜻을 비치면 아첨이 예술에 경지에 이른 측근들은 펄쩍 뛰면서 스탈린이 없는 소련은 존재할 수가 없다면서 그가 없으면 절대로 안된다고 호들갑을 떨면서 말했다. 그러나 가끔 분위기 파악을 하지 못하는 인간도 있었다. 주치의였던 비노그라도프가 건강을 위해 은퇴를 제안하자이 샛키가? 스탈린은 그를 무자비하게 처벌했던 것이다. 심지어 그러면서도 스탈린은 자신의 은퇴를 계속 의제로 삼고 회의를 했다. 스탈린 강철 권력에 의하면 마치 고양이가 쥐를 손안에 가지고 장난을 치는 것과 같았다는 서술을 했다.
한편 스탈린은 미코얀, 몰로토프, 흐루시초프, 베리야 등의 여러 고위 정치인들에게는 자신들이 언제든지 숙청될 수 있음을 계속 경고했다. 특히 베리야는 자신이 전임자들처럼 숙청될 것이란 공포에 떨어야만 했다. 몰로토프의 아내는 유태인으로써 반소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체포되었으며 여러가지 경고를 통해 스탈린은 자신의 주변에서도 공포 정치를 유지했다. 말년에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미코얀과 몰로토프를 싫어해서 흐루시초프와 동료들이 미코얀과 몰로토프를 스탈린과 사이가 나빠질 것을 우려해서 그들을 스탈린이 자신의 측근들을 지정해서 영화를 관람하는 데에 동참시켰다. 그러나 스탈린은 이러한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결국 스탈린의 분노가 폭발하고 말았다. 특별히 누군가를 지목하지는 않았지만, 고함을 치면서 주로 말렌코프를 노려보았다. "우리가 영화를 관람할 때마다 몰로토프와 미코얀이 오는 이유를 내가 모를 줄 알았나?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당장 그만둬! 또다시 그런짓을 했다간, 누구든 용서하지 않겠어!"라면서 그들에게 화를 냈고, 그렇게 몰로토프와 미코얀은 모임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이 이유로는 독소전쟁 발발 때에 저택에서 자신의 허약한 모습을 본 그들이 자신을 해치려고 했다는 망상을 가지게 되었거나 자신의 나약한 모습을 본 것이 싫어서 그랬던 것 등의 이유가 가장 유력하다. 하여튼 미코얀과 몰로토프가 싫어졌던 이유는 위에서 베리야가 말했던 대로 스탈린의 나약한 모습을 본 것과 결코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흐루시초프가 생각했던 대로 그 이후에 스탈린이 급작스러운 죽음을 맞지 않았다면 그들은(...)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자세한 내용은 흐루시초프가 회상한 스탈린의 말년 참고.###
말년에 이르러 의심이 극에 달한 스탈린은 자신의 주치의들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자신을 죽일 수 있다는 생각에 이른 것이다. 왜 갑자기 스탈린이 의심하게 된 것인지에는 말이 많지만 아마도 허를러깅 처이발상의 죽음이 꽤나 큰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높다. 그는 1952년 모스크바에서 병사했는데 스탈린이 그를 무척이나 아꼈기 때문에 그가 죽자 처이발상을 치료한 주치의들을 대상으로 암살혐의을 씌우고 고문시킨 후 처형했다. 그런데 처이발상의 병사는 의심많은 스탈린이 자신을 주치의들에게 의심을 가지게 만들었다, 처이발상이 병사했다는 것은 주치의들이 제대로 치료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던 것이였다. 이에 스탈린이 의사들을 의심하기 시작하다가 위에서 말했듯이 주치의였던 비노그라도프가 자신의 하야를 요구하는 듯한 발언을 하자 스탈린의 의심은 더욱 깊어졌고 이에 스탈린은 그들을 숙청하기로 마음먹었다. 흐루시초프는 그때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어느날, 스탈린은 우리들에게 티마슈크라는 여의사로부터 받은 편지를 읽어주었다. 내용은 즈다노프가 고의적으로 부당한 진료를 받아 사망했다는 것이다. 스탈린이 정상적인 인간이라면, 그 편지를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편지 내용이 단 10%라도 진실이라면, 그 전체를 사실로 봐야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른바 '흰가운을 입은 암살자'들이 체포되기 시작했다. 크렘린 소속 의사들에 대한 조사가 시작되자, 이오시프 스탈린은 당시 국가보안상인 이그나티예프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면서 이렇게 말했다.
"두들겨 패! 두들겨 패! 두들겨 패라고! 그놈들을 가루가 되도록 짓이겨버려! 만약 자백을 받아내지 못한다면, 머리 하나만큼 네놈의 키를 줄여주겠어!"
저런 일화를 보니 이루어 낸 업적과는 별개로 성격은 인간쓰레기급인 것 같다 그걸 여기까지 와야 아냐 대숙청때 알아봤어야지
저딴 식으로 스탈린이 갈궈대니 의사들이 무슨 일을 당했을지는 빤히 알만하다 결국 소련의 의료 엘리트들이 차례로 체포되어 있지도 않은 음모를 자백했다. 이 사건은 굉장한 대숙청으로 발전한 소지가 있었지만 스탈린의 사망으로 인해 크게 번지지는 못했다. 참 아이러니 하게도 이 숙청은 스탈린의 생명을 보다 더 빨리 꺼지게 만들었다.
11 사망
스탈린은 말년에 흑해 연안 별장에서 주로 생활했다. 이곳에서 그는 편지를 통해 지시를 했다. 이 별장에는 당구장, 영화관이 설치되어 있었고, 인민들은 상상할 수 없는 풍부한 요리와 술, 그리고 담배가 준비되었다. 스탈린은 마음 내키는 사람들과 더불어 이곳에서 지냈다. 물론 그들은 대개 스탈린의 충실한 종이었다. 1953년 2월 28일 저녁에도 어느 때처럼 스탈린의 별장에서는 만찬과 연회가 베풀어졌다. 게오르기 말렌코프, 베리야, 불가닌, 니키타 흐루쇼프가 이 연회에 초대되어 스탈린과 함께 영화를 관람했다. 베리야를 포함한 고위 당원들은 콧수염 대마왕의 피바람을 감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연회가 가시방석 같았겠지만 그렇다고 참석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실제로 스탈린은 연회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몇몇사람들에게 '너 숙청'을 했기 때문이다. 만찬은 다음날인 3월 1일 새벽 4시에 이르러서야 파티가 끝났다. 스탈린을 비롯한 참석자들은 모두 심각하게 취한 상태였다. 스탈린은 경호원들에게 자신이 부를 때까지 방해하지 말라고 말한 뒤에 잠자리에 들었다. 그런데 3월 1일 아침에 경호원들은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었는데 매일 아침 10시마다 경호원들을 불러 보고를 받던 스탈린이 아무리 기다려도 방에서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경호원들은 당황했지만 그렇다고 스탈린의 명령을 거역할 경우 자칫 큰 재앙을 부를 수도 있었기 때문에 경호원들은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고 그들은 좌불안석이 되어 초초하게 기다렸다. 그러다가 오후 6시 반에 별장안에 불이 켜지자 경호원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이후에도 방에서 아무런 명령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결국 안되겠다는 생각을 한 경호원들은 마침내 용기를 냈다. 밤 10시쯤 모스크바에서 스탈린에게 소포가 도착하자, 이 소포를 들고 방안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그렇게 스탈린의 별장 방안으로 들어간 경호원들은[45] 스탈린이 바닥에 쓰러져 있는 것을 보고 기절할 뻔 했다. 스탈린은 의식은 있었지만 말은 못하는 상태였고 손을 심하게 떨고 소변을 잔뜩 흘린 상태였다. 놀란 경호대는 모스크바에 연락을 했고, 결국 베리야와 말렌코프에게 연락이 되었다. 그러나 경호대는 당연히 했어야 할 일을 하지 않았다. 누구도 의사를 부르지 않았고 그들이 한 유일한 행동은 스탈린을 침대에 눕히고 그 위에 이불을 덮어주는 것 뿐이였다.사실 죽으라고 하는 경호원들의 마음이 담겨있다 카더라 이것은 스탈린을 죽게한 가장 결정적인 이유였다. 그들은 누구도 스탈린의 명령을 거역할 수 없었고, 또 명령없이는 움직이지 않는 로봇 같은 존재들이였기 때문에 스탈린이 위급한 상황일 때 오히려 아무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거기에 의료진을 모조리 감옥에 가둔 상태라 의사도 곁에 없었다. 결국 스탈린은 자승자박의 상태가 되어 버렸다. 일단 흐루시초프를 비롯한 베리야, 불가닌, 말렌코프 등등의 당 지도부가 별장으로 황급히 도착했으나, 그들 또한 의사부터 부르지 않았다. 이것들이 그들에겐 중대한 딜레마가 있었다. 그것은 만약 스탈린이 살아난다면 자신들은 언제 숙청될 지 모르는 상태였기 때문에 따라서 스탈린이 살아나지 않는게 좀 더 유리할 수 있었다. 반면 스탈린이 어떻게든 재기 한다면 자신을 치료하지 않은 일을 그냥 넘어갈리 없었다. 그러나 어쨌든 고민 끝에 그들은 의사를 부르기로 결정한다. 의사들은 곧 스탈린의 상태가 돌이킬 수 없음을 알았다. 오른쪽 팔다리는 마비되었고, 피를 토했으며, 체인스톡스 호흡이라는 불규칙한 호흡을 했다. 스탈린의 사망 원인은 뇌출혈이나 뇌경색일 가능성이 높아보이지만 정확히는 알 수 없다. 왜냐하면 어떤 이유에서인지 스탈린의 부검 결과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에서 스탈린의 죽음과 관련된 의혹이 제기되었다. 그것은 스탈린이 살아나면 곤란한 베리야를 비롯한 고위 당간부들이 그를 독살했다는 것이다. 완전히 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니다. 그러나 어쨌든 당시 평균 수명을 감안하건대 스탈린이 일찍 죽은 것은 아니였으며 또한 직접 사인은 아니라 해도 근본적인 사인은 결국 뇌혈관 질환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2011년 소련의 비밀 문서가 공개되었는데 스탈린의 사인은 확실하게 뇌출혈이라고 판명이 났다.
아무튼 당 지도부는 스탈린의 상태를 정확히 알아야만 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들은 사악한 배신자로 감옥에서 고문을 당하던 전문의들을 찾아갔다. 의사들은 고문하고 심문하던 사람들의 태도가 갑자기 돌변한데에 굉장히 놀랐다.[46]고문당했는데 치료하라고 하네 병주고 약주고 그들은 체인스톡스 호흡을 한다는 환자가 어떻게 될 지 질문했다. 의사들은 사망이 가장 가능성 높은 결과라고 말해주었다. 그러자 당 지도부원들은 용기를 얻을 수 있었고 당 지도부원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포스트 스탈린 시대를 논의하기 시작되었다. 몰로토프는 한때 스탈린의 후계자로 생각되었으나 그는 스탈린의 공격을 받은 상태로 실권을 빼앗긴 상태였기 때문에 최고 권력을 얻겠다고 주장할 수 없었다. 스탈린은 2인자 따위는 키우지 않았다. 따라서 이제 새로운 권력 투쟁이 시작되었다 확실한 사실은 스탈린이 쓰러진 순간 이미 그를 치료하는 문제는 뒷전이었다는 것이다. 사실 이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모든 사람이 그 앞에서 헌신하는 연기를 한 것은 살기 위해서였다. 살아 있는 동안 신처럼 추앙받고 모두의 사랑을 받는 것 같던 그였지만, 스탈린이 쓰러져 재기 불능이 되자 누구도 그를 구하려 들지 않았다. 참으로 씁쓸한 최후였다.[47]
그렇게 스탈린은 1953년 3월 5일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48] 그의 공식 발표된 사인은 '고혈압의 발작에 의한 뇌의 대출혈'. 이중삼중으로 경비를 세웠고, 항상 자신이 자는 방을 수시로 바꿀 정도로 암살이나 테러에 민감했다.(그리고 바로 그 철통 경비 때문에 바로 발견되지 못한 게 사망의 원인이었다.) 수많은 인민을 학살하고 정적들을 무자비하게 숙청한 강철 사나이 스탈린도 자신의 죽음을 두려워한 평범한 인간에 불과했던 것이다.
12 장례식
"그를 보니 5개년계획과 공포정치, 대조국전쟁 등 그들의 지난 삶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스탈린은 그들이 집단적으로 걸어온 길을 상징하는 존재였다. 그들은 소비에트 국가를 강화하고, 군사력과 산업 생산력을 높이고, 영토를 확장하고, 정치적 안정을 꾀하며 함께 노력한 동지들이었다. 베리야는 예외일지 몰라도 그들은 스탈린이 두렵기도 했지만, 그의 지성과 경험을 존경하기도 했다. 그는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줄 때조차 그들을 매혹했다. 그가 소파에 축 늘어져 있는 동안, 어떤 초인의 능력으로도 그가 다시 일어나 소련의 공적 생활을 지배할 수 없다는 게 믿어지지가 않았다. 스탈린의 지도하에 수백만을 굴라그에 처넣었던 사람들이 의식을 반쯤 잃고 마비된 늙은이를 보면서 벌벌 떨었다. 그가 그들을 노예로 만들어놓았던 것이다. 설사 한순간일지라도, 그가 벌떡 일어나 모두를 파멸시키라고 명령할 가능성이 아직도 남아있었다. 그들은 죽어가는 스탈린에게조차 함부로 대할 수 없었다. 그렇게 지도자가 숨을 거두었다. 그가 세상을 떠난 것이다. 몇몇 사람이 서로의 품에 쓰러졌다. 스탈린의 딸 스베틀라나는 슬픔에 정신을 잃고 흐루시초프의 품에 안겨 위로를 받았다. 그들은 시종들도 들어와 주검을 보게 했다. 바로 몇 시간 전에 스탈린 사후의 정치를 논의했던 간부회 지도자들도 가슴이 쿵 하고 내려 앉았다. 그들의 인생 뿐만 아니라, 이 나라 역사에서 한 시대가 막을 내리고 있었다." - 스탈린 강철 권력
그의 죽음이 발표되자 소련은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오랜 숭배 의식으로 이미 신격화가 철저히 진행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가 죽자 수많은 인민이 대성통곡을 했고 소련 인민들은 공황상태에 빠질 정도였다. 몇년간 그가 건강에 이상이 있다는 이야기를 전혀 들은 적이 없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다. 소련 각지에서 그를 숭배하던 국민들이 몰려들었다. 모스크바로 가는 기차들은 모두 만원이었고, 경찰의 통제가 필요할 만큼 많은 사람들이 운집했다. 스탈린은 그의 스승이라고 알려진 레닌과 비슷한 방식으로 장례를 치를 계획이었다. 이집트의 파라오처럼 방부 처리가 된 시신은 유리관 속에 넣어져 레닌 영묘에 함께 안장될 예정이었다. 독재자가 현직에서 죽으면 대체로 비슷한 일이 벌어진다. 실제로 김일성, 마오쩌둥의 장례식을 보면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시신은 방부처리되어 레닌묘에 합장되었다가 후에 스탈린 격하 운동 이후 1961년에 다시 화장되어 크렘린 벽 묘지에 안장.
스탈린의 관 옆에는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라고 외치는 휘장이 쳐졌다. 스탈린 동무는 죽음에 이르러서도 자신의 특기를 끝까지 발휘했다. 3월 8일 그의 시신을 보려는 인파가 너무 많이 몰려서 수백명이 깔려 죽는 사고가 발생한 것이었다. 장례식장에서까지 서기장 동무는 인민들을 죽음으로 내몰 수 있었다.역시 죽을 때까지도 길동무를 만드시는 대원수 각하 마지막 순간에도 인민들을 숙청하는 스탈린 대원쑤 그러나 당 지도부와는 달리 많은 인민들이 그의 죽음을 정말로 슬퍼했다. 비록 그것이 세뇌의 결과이든 아니든 말이다.
여담으로 바로 같은 날에 대 작곡가 세르게이 프로코피에프가 사망. 그러나 그의 죽음은 스탈린의 죽음에 묻혔는데 더욱 더 안습한 사실은 스탈린의 죽음에 조화를 사가려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조화를 사가서 세르게이 프로코피에프의 장례식에는 쓸 수 있는 조화가 단 한개도 없어서 조화 없이 장례식을 치뤄야 했다는 심히 안습한 이야기가 있다.사실 스탈린한테 조화를 안 가져가면 스탈린이 저승에서도 숙청을 할까봐 그랬다 카더라
1953년 3월 9일, 스탈린의 장례식이 끝났다. 이제 레닌-스탈린 영묘로 이름을 바꾼 레닌 영묘에서 이오시프 비사리오노비치 주가시빌리 스탈린은 영원히 잠들었다.
자유 진영의 거두 미국, 영국을 포함해 전세계에서 고위급의 인사로 구성된 조문단이 장례식에 참석했다. 세계의 언론들은 스탈린의 죽음을 알리며 그를 위대한 지도자로도, 많은 무고한 사람들을 학살한 사악한 독재자로도 평가했지만, 그가 농업국가 러시아를 원자력 소련으로 현대화했으며 세계를 양분하는 초강대국의 지도자이자, 무엇보다도 히틀러에 맞써 싸운 최고사령관 중 하나였다는 것에 경의를 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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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래서 심지어 스탈린이 언제 그냥 죽여버릴까 벼르고 있던 적도 있었다.
- ↑ 카프카스에서 벨트를 판다는 것은 상징적인 것으로 경제적으로 갈 데까지 갔다는 것을 의미한다.
- ↑ 이로 인해 스탈린은 훗날 아버지의 무덤을 갈아엎어버린다.
- ↑ 물론 볼셰비키 정권이 보여준 모든 잔인성이 스탈린의 책임일 수는 없지만, 고참 볼셰비키 내에서도 스탈린의 잔인성이 두드러진 것은 사실이므로.
- ↑ 실제로 신분적 차별이 강하고, 대중이 정치적 권력을 갖지 못하는 중세적 환경에 익숙한 사람들은 자신과 가까운 사람이 권력자가 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경향이 강하다.
- ↑ 스탈린이 집권한 다음에 교과서에 스탈린의 글이 들어간 거라면 대단할 것도 없겠지만, 해당 교육자의 생몰년도를 보면 알 수 있듯 정치적으로 성공하기 이전부터 교과서급 시인이었다는 이야기이다.
- ↑ 이 사진은 나중에 <젊은 스탈린(Young Stalin)>의 표지로 쓰였다.
- ↑ 그러나 이 당시 스탈린의 가명으로 쓰인 소설 인물 코바 같은 의적 이야기나 민담이 많은데서 보듯 그 시절 그루지야 사람들에겐 사악한 부자의 재산을 털어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의적 행위는 그렇게 나쁜 일이 아니라는 정서가 주류였다는 설도 있다
- ↑ 아마도 스탈린이 진정으로 사랑했던 여자는 카토가 유일한 것으로 보인다.
- ↑ 정보전이라는 것은 속고 속이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에, 스탈린의 이러한 접근방식도 틀렸다고 보기는 힘들다. 정보전에선 상대국 스파이에게 가짜정보를 흘리는 경우도 허다하고, 이중스파이나 국가에 충성심이 부족한 스파이들이 자신의 입맛에 맞게 정보를 가공하는 경우도 매우 흔하다. 정보기관에서 권력자가 자신이 원하는 대로 움직이게 하기 위해 정보를 가공하는 경우도 매우 흔한 사례(이 경우는 '인(人)'의 장막에 둘러싸였다고 표현한다.)인 만큼 일단 매우 중요해보이는 정보나 매우 구미가 당기는 정보는 의심하고 보는 것이 이쪽 바닥이기 때문이다.
- ↑ 독소전 역시 '아무리 독일이 소련을 침공할 가능성이 있다 해도 독일이 영국을 이기지도 못했는데 설마 지금 소련을 공격해서 동부, 서부 양면전선을 만들겠어?'라는 생각에 소련이 제대로 대비하지 못했다는 의견이 군사학계에서도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리하르트 조르게의 첩보도 이런 맥락과 일본군에 대한 견제 필요성(만일 리하르트 조르게의 첩보가 가짜였고 소련이 조르게의 의견에 따라 서부전선에 군사역량을 몰빵했다면, 당연히 소련의 극동은 무주공산이 되고, 그러면 만주국과 중국에서 판치던 관동군이 북상할 여지가 생기게 된다. 소련과 일본제국은 1939년에 이미 할힌골 전투를 치른 전적이 있어 적어도 소련이 일본의 전력을 무시할 상황은 못 되었다. 스탈린이 소련의 극동전력을 포함한 모든 전력을 모두 독소전쟁에 투입할 상황이 되었던 것도 일본이 진주만 공습을 시작으로 태평양 전쟁을 일으켰기 때문이다.)을 두고 본다면 오히려 독일의 일본을 돕기 위한 역정보라고 판단할 여지도 있었다. 이미 1940년 나치 독일, 일본 제국, 이탈리아 왕국은 삼국 동맹 조약을 맺은 동맹국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돌프 히틀러는 스탈린이 생각하는 것 이상의 돌아이였다는 점에서 비극이 시작되었다.
- ↑ 동생이 그 미그사의 미코얀이다.
- ↑ 1886. 10. 24. ~ 1937. 2. 18, 조지아 출신의 혁명가로 소련 공산당 정치국에 몸담았으며 스탈린의 최측근이었다.
- ↑ 트로츠키 회고록에서는 이 패배를 권한을 넘어선 스탈린의 지휘때문이라고 책임을 전가하고 있으나 여러 원인이 복합적으로 얽혀 있다. 트로츠키도 패배의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이 현재의 유력한 설. 이 패배는 스탈린의 책임은 아니라는 것이 오늘날의 연구 결과이다. 폴란드 주변의 혁명운동을 퍼트리고 폴란드 내의 소수민족에 대한 혁명고취를 위해 잘 나가던 진격을 무리하게 옆으로 돌리게 한 것이 결정적 패인이라는 분석이 있는데, 이 명령은 스탈린이 아닌 당 차원의 권고였고 아이러니하게도 세계혁명론을 통해 주변국에 혁명을 퍼트리는 이론을 내세웠던 사람이 바로 트로츠키였다.
- ↑ 폴란드와의 전쟁을 스탈린의 책임으로 100% 물어버리고 당 차원의 추방을 논한 사람이 바로 트로츠키였다. 그는 이전에도 스탈린을 탐탁찮게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 스탈린은 볼셰비키 정권 내에서 민족문제 위원이 였으나 사실 서기장직(엄밀히 말하면 간사장)도 업무량만 많고 권한은 별로 없는 직위였다. 다만 스탈린에 대한 신임으로 레닌이 임명해준 것이다. 그러나 스탈린의 서기장 취임 한 달만에 레닌은 지병으로 쓰러진다.
- ↑ 실제로 러시아 혁명 당시 많은 사람들이 프랑스 혁명을 본보기로 행동했는데, 군인 출신 나폴레옹이 제정을 세워서 혁명 정신에 역행한 것을 보면서 '아 슈바 우리도 군인들 가만 내비두면 좆되겠구나.'라고 생각하여 태생부터 군인에게 별로 좋은 감정을 갖고 있지 않았다. 보나파르트주의자라고 소련에서 까인 군사관련 인물이 한 둘이 아닌데, 투하쳅스키도 그 중 한명이었고, 스탈린에게 처형당했다.
- ↑ 이 표현은 당시 러시아 혁명가들이 사용하던 일종의 관용구라서 관료적인 작업이라고 오독하기 쉬운데, 사실은 오히려 절차적 정당성을 중시하는 관료주의와는 반대 개념에 가깝고(관료주의는 오히려 서기장 스탈린의 중요한 특징이었다.) 문제나 갈등을 그 배경과 상황에 맞춰 순리에 따라 차근차근 해결하지 않고 문제 자체만 관리해서 해결하려 드는 특성을 말하는 것이다. 특히 트로츠키의 특징에 비춰서 설명한다면, 트로츠키가 볼셰비키 당 내에서 제일 똑똑한 사람이라는 건 레닌도 알고 트로츠키도 아는 사실이었으므로 당연히 트로츠키의 주장이 대체적으로 옳고 다른 주장은 틀린 것일 수 밖에 없으니까 굳이 토론이니 공감이니 합의니 하는 데 시간 낭비할 것 없이 그냥 아가리 파이트로 상대를 밟아버리고 자기 주장대로 하게끔 하는 태도를 말하는 것.
- ↑ 소수민족의 입장을 소련의 이익보다 앞에 놓는 것. 쉽게 말해 소비에트 밑으로 안 들어오면 쳐맞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깡패스럽고 폭압적 논리로, 당시 소수민족위원회 의장이었던 스탈린이 남을 비난할 때 남용하던 단어다. 심지어 조지아는 스탈린의 모국이었는데도.
- ↑ 레닌은 좀 더 그들을 달래 가며 타협을 해가야 한다고 느낀 것이고, 그런 문제에서도 폭압적이며 잔인한 모습을 보이는 스탈린은 지도자의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비난하고 있는 것.
- ↑ 조금 더 나중 시점에 쓴 서한에서는 스탈린은 소련의 소수민족 문제에 펠릭스 제르진스키와 함께 계속 종사하도록 해야 한다고 언급하긴 했지만, 이 평가를 보면 대강 레닌이 스탈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답이 나온다.
- ↑ 후일의 이미지에선 전혀 틀린 말이지만, 이 당시의 스탈린은 그냥 평판은 좋은데 말 없고 존재감도 그닥인 사람이었다.
- ↑ 특히 스탈린은 자기 조국인 조지아인들을 가혹하게 대하는 과정에서 레닌에게 상당한 어그로를 먹었다.
- ↑ 정확히 말하면, 스탈린은 트로츠키를 어떤 사상을 갖고있다고 보다 그냥 존나 나쁜 놈으로 낙인찍었다. 트로츠키주의자라는 딱지는 소련이나 동구권 내에서는 그냥 '무지무지 나빠서 때려죽여야 하는데 파시스트나 자본주의자라고 부르지 못 하는 놈'이라는 의미일 뿐이다. 트로츠키주의가 극좌 모험주의를 의미하는 것은 서구권의 트로츠키주의 정당이 극좌노선을 취했기 때문에 생긴 인식일 뿐이다. 이 점은 흐루쇼프와 마오쩌둥이 서로를 '극우 수정주의자'와 '극좌 모험주의자'라고 공격하면서 '트로츠키스트'라고 매도한 점이나, 노동조합이 국가의 개입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고 주장한 좌익 반대파를 탄압한 트로츠키의 노선을 스탈린이 '우익적이고 독재적이다'라고 비판한 점에서도 알 수 있다.
- ↑ 이에 대해 그의 딸은 "아버지는 어디에서든 적을 찾아내려 했으며 고독감과 절망감으로 가득한 탄압매니아였다."라고 술회하고 있다.
- ↑ 얼마나 무시했냐면, 영불 지도자급에서도 뮌헨 협상 이후 독일에 대한 불신과 1938-9년 들어 폴란드 위기가 번질 때 영불대사가 모스크바에 가서 스탈린과 대면해서 협상을 한 적이 있었다. 이 때 스탈린은 "만일 독일의 침공에 대비해 독일을 공격한다면 소련은 200개 사단을 동원할 용의가 있다. 영불은 무엇을 할 수 있느냐?"라고 물었다. 이에 영국 대사는 영국 본토에 육군사단 3-5개를 원정군으로 동원할 수 있다는 드립과 프랑스 대사는 전쟁의지에 대해 머뭇거림을 보였다. 이에 스탈린은 "이런 도둑놈들! 우리는 200개 사단이나 동원하는데 즈그놈들은 손도 안대고 코풀려고 하네?"라는 반응을 보이며, 서방이 독소이호경식지계를 노리는 것 아니냐라는 서방에 대한 의심을 한층 더 강화했다. 다만, 프랑스는 몰라도 영국에 대해 실드를 칠 여지는 있다. 영국은 전통적으로 대륙에서 전쟁이 터질거라 예상되면 육군 사단보다는 해공군 투자 혹은 전쟁에 쓸 재원 마련에 집중했기 때문이다.
- ↑ 사실 핀란드도 통째로 꿀꺽하려고 했지만 겨울전쟁에서 막대한 피해를 입는 바람에 카렐리야 지방만 점령하는 선에서 강화를 맺었다. 손바닥만한 나라에게 얻어터진 놀라운 업적으로 스탈린은 1939년 올해의 인물에 선정.
- ↑ 당시에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프랑스 뿐만이 아니라 영국조차도 한번에 독일에 점령 당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 ↑ 사실 스탈린의 판단은 히틀러가 희대의 돌아이가 아니라는 조건하에서는 옳은 판단이었다. 당장 독일은 1차 세계대전을 양면전쟁으로 끌고 갔다가 X망했다. 문제는 히틀러는 인류의 역사상 다시는 보기 힘든 돌아이였다는 거지.
- ↑ 베르너 폰 슐렌부르크 백작(1875년 11월 20일~1944년 11월 10일) 나치 독일의 마지막 소련 대사. 독일 제국 시절부터 활약한 외교관. 1944년 히틀러 암살 미수사건에 연루되어 처형당한다. 참고로 암살자 그룹의 내각 계획에 외무장관으로 포함되어 있었다.
- ↑ 스탈린의 이 멘탈붕괴는 인간 스탈린의 나약함을 드러낸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스탈린이 어떤 생각으로 현 정세에 임하고 있었는지를 생각해 보면 그럴 만도 하게 비춰질 수 있다. 어디까지나 추측의 영역임을 일단 언급하지만, 일단 스탈린은 그 전부터 히틀러에 대해서는 대단한 능력을 지닌 효웅으로 높게 평가하고 있었다. 히틀러가 자신처럼 정세에 대한 계산이 가능하며 상황에 대한 통찰력을 가진 정치가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따라서 스탈린은 1선 장군들이 뻔히 보이는 전쟁의 전조를 경고함에도 불구하고, 계산이 서는 날카로운 정치가인 히틀러에 대한 판단을 중시했기에 무시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독일이 엄청난 위력으로 프랑스를 점령하고 영국을 패배하며 히틀러는 완벽한 계산하에 전쟁을 일으킨 대단한 효웅이고, 독일의 전력은 대단하다는 인식을 강화했다. 이러한 까닭에 스탈린은 양면전쟁의 한계와 러시아 기후의 무서움을 히틀러가 계산하고 있을 것이라 여겨 전쟁은 없을 것이라고 판단했다고 추측할 수 있다. 하지만 역으로 히틀러가 전쟁을 일으켜 버리자, 히틀러에 대한 고평가는 역으로 러시아를 이길 만해서 전쟁을 일으킨 게 아닐까? 우리의 정보가 잘못됐었나? 독일이 신기술을 개발했나? 하여간 우린 끝이야!와 같은 사고로 이어졌던 것이다. 이런 경우 충격에 빠져 아무 것도 못하는 지도자도 역사 속에 종종 있으나, 강철의 대원수는 어쨌건 일단은 싸울 수밖에 없음을 인지하고 금세 충격에서 일어선 편이다.
- ↑ 그는 몰로토프가 자신을 위협하거나 깎아내리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맡겼다.
- ↑ 물론 정말로 충격을 먹은 것도 영향이 상당히 있겠지만.
- ↑ 그러나 미코얀과 몰로토프 모두 정치적 굴곡은 있었을지언정 그냥 제 수명에 죽었다. 미코얀은 1978년에 사망, 몰로토프는 1986년에 사망.
- ↑ 정확히 말하자면 안 타본지 오래 되어서 감이 떨어졌는데 건강까지 나빠지는데도 괜히 마상 사열을 하려다 고생한 것. 소싯적엔 스탈린도 한 승마 하는 기병대 정치위원이었다.
- ↑ 물론 주코프는 적백 내전 당시 기병 장교였으니 이런 질문은 물을 가치조차 없었다.
- ↑ 이전 문서에는 옆에 있는 동료가 콘스탄틴 로코솝스키라고 되어 있었지만 아니다. 로코솝스키는 저때 흑마를 타고 반대편에서 달려오고 있었다. 뒤에 두 사람이 나란히 달리기도 했지만 로코솝스키는 흑마를 타고 있었기 때문에 위 사진에서 뒤를 따르는 인물은 로코솝스키일 수 없다.
- ↑ 발언 당시에는 야당 대표로 말한 것이지만, 발언자가 다른 누구도 아닌 윈스턴 처칠인 만큼 흘려 듣기 어렵다.
- ↑ 즉 미국은 일본이 미국을 지지하도록 강제할 수 있지만, 소련은 서유럽 국가들이 자신을 지지하도록 강제할 수가 없었다는 말이다.
- ↑ 이는 이후 냉전에서도 드러난다. 소련 해군이 미 해군의 수준을 넘은 적은 소련의 성립부터 멸망까지 단 한번도 없었다.
- ↑ 이런 식의 이른바 충성 경쟁은 스탈린 정권에서 흔한 일이었다. 스탈린 스스로가 사치나 허영과는 거리가 먼 것도 한 몫했겠지만, 이렇게 자신을 의도적으로 낮추어서, 상대방에게 충성심을 드러내 보일 것을 강요하는 것은 정권 당시에는 일종의 의례였다. 의도 자체는 러시아나, 2015년 시진핑 주도의 열병식과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스탈린은 이를 일상화(...)했다. 스탈린이 가진 인간에 대한 편집증적 불신이 드러나는 부분이다.
- ↑ 북한에선 김일성 사후 김일성의 생일연도(1912년)를 따라 주체연도로 쓴다. 우상화는 여기가 한 수 위.
- ↑ 대부분은 국비로 결혼하는 부부에 증정한 것이다.
- ↑ 마오나 스탈린의 저작은 히틀러와 달리 불쏘시개감은 절대 아니다. 둘의 저작은 이론이나 사상적으로 당시는 물론 현재도 연구되고 있다. 문제는 해당 인물들이 국민들에게 그것만이 옳은 것이고 나머지는 다 틀린 것이라고 자신의 이념을 절대화하면서 강요했고, 그걸 거부하면 코렁탕을 먹였단 것.
- ↑ 파벨 로즈가쇼프라는 경호원이 혼자 들어갔다는 주장도 있다.
- ↑ 드디어 죽이려는 줄 알았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 ↑ 사실 3월 2일에서 이후 3월 5일 사이의 기록은 불완전하며 정확한 진상은 밝혀지지 않았다. 그것은 이 일을 증언할 사람들이 대부분 숙청되었고, 나중에 권력을 잡은 흐루시초프도 자신에게 유리한 사실만을 말했기 때문이다.
- ↑ 바로 같은 날에 대 작곡가 세르게이 프로코피에프가 사망. 그러나 그의 죽음은 스탈린의 죽음에 묻혔다. 안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