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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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최태민.jpg
崔太敏(1912년 5월 5일?[1] ~ 1994년 5월 1일(?)[2]

1 개요

한국의 그리고리 라스푸틴

현재 대한민국의 만악의 근원이며, 지금 대한민국에 드리운 그림자의 모든 근원일 수도 있는 자.

취소선이 있었지만 사실 상 생몰년도조차 미상인 그 만큼 사기꾼의 전형을 보이는 미스테리한 인물이다. 이 전대미문의 대사기꾼이 오늘날 대한민국 2030 청년들의 인생을 망쳐 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게 박근혜 정부의 집권 후 청년실업 등의 문제가 심해지고 분노한 청년층에 의해 헬조선이니 수저계급론 등의 블랙 코미디가 생김은 물론[3] 대대적 촛불 시위 등 실질적인 저항까지 불러 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자 하나 때문에 이 자를 비호한 기성세대는 틀딱충이란 멸칭까지 선물받았다. 이런 점까지 보면 단순히 국정농단만 한게 아니라 대한민국의 세대간 분열과 갈등이 깊어지도록 부채질한 원흉이기도 한 것이다.

정확히는 대한민국사이비 종교 교주이자 기관단체인이었다. 즉, 조희팔과 더불어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성공한 사기꾼이며, 역사상 유일무이한 스님목사사이비 종교 교주인 속을 알 수 없는 음흉한 인물. 실제로 오래 전 외신에서도 그를 한국의 라스푸틴으로 언급하기도 했었다.

1949년 이전에는 주로 치안당국인 일본 경찰이나 치안대에서 근무하였다. 일제강점기에는 국내 독립운동가들을 잡으러 다니는 일제의 순사로 활동하며 당시 일제에 많은 공로를 세웠다. 근본부터 글렀었네! 해방과 전쟁 이후엔 1970년대 들어 서울대전 일대에서 난치병을 치료한다는 등 사이비 종교 행각을 벌이다가 1975년부터 박근혜와의 인연으로 막후에서 권력을 휘둘렀다. 박근혜의 이름을 팔아서 많은 대기업들로부터 막대한 돈을 갈취한 후 흥청망청 돈을 쓰고 다녔다. 그의 사기행각은 그의 딸 최순실에게도 그대로 이어져 부녀가 40년에 걸쳐 박근혜를 꼭두각시처럼 조종하며 수천억에 달하는 재산을 축적할 수 있었다.

2 생애

여러 가지로 미스테리한 인물이다. 생애란에 기록된 내용은 기존에 알려진 내용으로, 현재 계속해서 행적에 대한 의혹이 불거지고 있다. 그만큼 인생 자체가 불투명하고 구린 구석이 많았다는 소리다.

1912년 혹은 1918년황해도 봉산군 사리원읍 서동에서 태어났다고 하는데 확실하지 않으며 어린 시절도 일절 알려지지 않았다. 묘비에는 본관이 수성[4] 최씨이며 1918년생이라 새겨져 있다고 한다.# # 하지만 수성 최씨 종친회에서 최태민은 우리 혈족이 아니라며 정면 반박에 나섰다.#

최태민의 아버지 최윤성(崔崙成, 1892-1945)은 독립유공자다. 최윤성은 1919년 3·1 운동 때 독립선언서 1천여장을 인쇄해 배부한 뒤 피신했고, 1920년 상해임시정부 군자금 모금 활동을 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돼 징역 8월을 선고받고 1년여 정도 감옥에서 지냈다. 그는 1990년 공훈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최태민의 증언에 따르면 아버지가 독립운동으로 가산을 탕진해서 어렸을 때 고생을 많이 했다고 한다.

그런데 정작 최태민은 일제강점기 순사 출신이다. 아버지가 독립운동가 중 한 명이었음을 생각하면 당연히 호부견자. 최윤성을 독립유공자로 지정해달라고 신청한 사람이 바로 최태민이다. 상식적으로 독립운동하던 사람의 아들을 일본 경찰이 순사로 채용했다는 것도 이상하기 때문에 최윤성이 이후 변절했을 가능성도 있다면서 재심사를 요청하는 주장도 있다.월간조선 기자수첩 그런데 최태민이 최 씨 호적에 올라있지 않으며 나이도 거짓이었다는 사실이 발견되었다. 아버지가 독립운동가인가 아닌가를 따지기 전에 최윤성의 아들인가부터 불분명하다. 나이야 그당시 사람들은 안맞는 경우가 제법 많으니 그렇다 쳐도 호적이 파인건지 족보를 위조한 건지도 알수 없다.

이후 최태민은 불교 승려가 된 적도 있었고, 1969년에는 천주교 세례를 받기도 했다.[5] ‘태민’이란 이름도 각종 가명을 포함해 7번째 이름이다.

참고로 처음 이름은 최도원(崔道源)이었다고 하며, 1927년황해도의 재령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고 한다.

1977년 중앙정보부의 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처음 이름을 바꾼 건 광복 직후였다고 한다. 광복 전에 순사였기 때문에 과거를 숨기려고 한 것인지 모르겠으나 광복 직후 이름을 최상훈(崔尙勳)으로 바꾸고 강원도에서 경찰 생활을 했다. 이후, 대전과 인천 등으로 옮기기도 하다가 1949년부터 군대에 육군 헌병대 비공식 문관으로 들어갔다고 조사되었다. 이후 해병대 비공식 문관도 했다고 한다.

그런데 한국전쟁 중이었던 1951년 3월[6] 갑자기 군인을 그만두고 이름을 최봉수(崔峰壽)로 바꾸며 사업을 시작했다고 한다. 1951년 3월이면 1.4후퇴 이후 국군이 다시 반격하여 서울 재탈환을 하던 무렵으로 전쟁이 한참이던 시기인데, 어떻게 군대를 그만둘 수 있었는지 여러모로 알 수가 없는 인물이다.

이후에도 부인과 다툼이 심해 도망치듯 경상도 절로 들어가 승려 생활을 하기도 하고, 이름도 최퇴운(崔退雲), 공해남(孔亥南), 최방민(崔房敏), 최태민 등 알려진 것만 7개로 다양하게 바꾸며 살았다.[7]

단 합법적으로 바꾸기는 박근혜를 만난 뒤의 최태민으로 바꾼 개명 한 번뿐이라고 한다. 나머지는 다 가명이었다고.[8][9]

참고로 1977년 중앙정보부 조사 보고서[10][11]에 따르면, 1958년 2월 당시 여당이던 자유당에 비당원 공천을 신청한 것을 계기로 정치권에 뛰어들었고 당시 기사 5년 후인 1963년 5월 당시 여당이던 민주공화당[12] 서대문구 중앙위원장[13]이었던 적도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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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초반부터 서울경기도 일대나 대전충청남도 일대에서 난치병을 치료한다는 등 사이비 종교 행각을 벌였다. 불교, 기독교(개신교/가톨릭 둘 다 포함), 천도교를 종합했다는[14] 교리를 내세웠다. 그는 이를 '영혼합일법'[15]이라 칭하며, 영세계[16]의 교리라고 주장했다. 방민이란 가명을 쓰면서 ‘원자경’, ‘칙사’ 또는 ‘태자마마’라는 호칭을 자처했고 스스로를 '단군', '미륵'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영세교[17] 제1대 교주라는 카더라도 있다.

얼핏 보면 대단한 사이비 교주쯤으로 보이기도 하는데, 막상 후세에 그에 대해 조사했던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1975년 이전까지 큰 사이비 종교 조직이었던 적은 전혀 없던 것으로 보인다. 보통 구성원 10명에서 30명 사이로 유지되는 소형 집단이었다고 알려진다. 박근혜를 만나기 몇 개월 전까지도 제기동이나 북아현동[18] 등 당시 별로 서울 중심지가 아닌 곳을 이리저리 떠돌아 전세를 살며 계속 저런 걸 했다고 한다. 그러니까 제대로 신자들 뜯어먹고 한탕한 부자 교주이기는커녕 잘 사는 편이 아니었다.[19] 당시에도 저거보다 훨씬 큰 집단의 사이비 교주들이 꽤 있었고[20] 현대에는 그것보다 더 큰 집단들이 있을 정도라[21] 그들과 비교할 수준은 아니었을 것이다. 애초 걔네들이 같은 류로도 안 쳐줬을 법 하다.

그런데 중앙일보 기사에 따르면 당시 큰무당 원자경으로 무당들 사이에 유명했었다고 한다.기사 그 당시 최태민은 1973년 7월에서 대전시 선화 1동 동사무소 앞으로 숙소를 옮기고 ‘영세교 칙사관’이라는 간판을 내걸었다. 병을 고치기 위해 찾아드는 사람들에게 색색의 둥근 원을 벽에 붙여 놓고 "나무자비조화불"이란 주문을 외우며 그 원을 집중적으로 응시하도록 했다. 일종의 최면술에 가까웠다고 한다.

특이한 것은 방금 전까지 ‘아파 죽겠다’고 소리치던 환자들이 이 의례를 거치고 나면 다 나은 듯이 웃음을 짓는다는 사실이다. 무당들도 ‘원자경’ 교주 앞에서는 꼼짝도 하지 못하고 벌벌 기었다. 뿐만 아니라 원자경 교주를 만나고 난 후 무당들이 신기(神氣)가 떨어져 그 업을 작파하는 경우도 생겨났다. 소문을 듣고 찾아온 다른 무당들도 그 앞에 엎드려 절부터 했다. 이로써 그는 신통력 있는 도사로 확고한 위상을 굳히게 된다.

1974년 육영수문세광의 총에 맞아 세상을 떠난 뒤[22][23] 완전히 멘붕 상태였던 박근혜에게 1975년 2월경 위로하는 편지를 3차례 보내 박근혜와의 인연이 시작됐다.

중정부장이었던 김형욱에 의하면 편지는 죽은 육영수가 최태민의 꿈에 나타나 '딸은 한국의 지도자, 더 나아가 아시아의 지도자가 될 것이며 자신은 그러기 위해 자리를 비켜준 것', '내 딸 근혜가 우매해 아무것도 모르니 가서 그녀를 도우라'[24] '내(육영수)가 보고싶거든 언제든지 최태민을 통해 만날 수 있다'는 내용이라고 한다.[25] 이후 편지를 본 박근혜가 최태민을 직접 만나기로 결정하게 되고, 실제로 1975년 3월에 직접 만나게 된다.[26] 항간의 소문에 따르면 이 당시 박근혜는 어머니 육영수의 죽음으로 엄청난 심리적 고통에 시달리는 상태였는데, 육영수의 영혼에 빙의되었다며 육영수의 표정과 음성을 그대로 재연하는 최태민에게 심리적으로 상당히 의존하게 되었다고도 한다.[27]

다만 박근혜의 동생 박근령 측은 세간에 널리 알려진 위의 이야기와는 다르게 말하고 있다. 2016년 11월 1일 박근령의 남편 신동욱이 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 출연하여 한 말에 의하면, 최태민은 육영수 여사 사망 이전부터 이미 박근혜에게 여러 번 접근했고 육영수는 그에 관하여 우려를 표시했다고 한다. 박근령 "육 여사, 생전에 '최태민 조심하라' 경고" 이 말에 따르면 문제의 핵심인 최태민과 박근혜, 두 사람의 만남의 과정과 두 사람의 관계부터가 불확실하다는 이야기다. [28]

sbs 그것이 알고싶다 팀의 취재결과, 최태민이 육영수 피격 이전에 청와대에 들락거렸으며 그 이유는 육영수가 최태민의 최면술에 흥미를 갖고 불러들였기 때문이라는 증거를 11월 26일 방송에서 밝혔다. 또한 새로운 가설을 내세우기도 했는데 최태민은 육영수박근혜만이 알고 있는 비밀을 알고 있었으며 박근혜가 최태민의 현몽설을 믿을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아무도 몰라야 할 비밀을 최태민이 알고 있었기 때문 아닌가 하는 것이다.

현재 개신교에서는 최태민이 목사였다는 사실을 부정하고 있지만, 노컷뉴스 단독보도로 최태민이 이전에 떠돌던 말처럼 돈 주고 목사 안수를 받았음이 확인되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종합총회(이하 예장종합총회)로부터 안수를 받은 것. 나중엔 주술사스러운 행동 탓에 교단에서 쫓겨났다고 한다. #, #2

그 후 1975년 4월 ‘대한구국선교단’을 발족하고 스스로 총재에 취임하였다. 1975년 5월 임진강에서 연 ‘구국기도회’에는 2천여 명이 운집한 가운데 박근혜도 참석했다. 최태민의 즉석 제안으로 박근혜는 명예총재로 추대됐다.[29][30][31] 이후 박근혜는 구국선교단 행사에 자주 모습을 드러냈고, 1976년 구국선교단은 ‘구국봉사단’으로, 2년 뒤인 1978년엔 다시 ‘새마음봉사단’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바로 박근혜의 퍼스트레이디 경력의 핵심인 새마음운동의 본산이다. 여기서 최태민은 목사들에게 군사훈련 시켰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 후 최태민은 새마음운동본부의 비공식 고문으로서 박근혜로부터 전권을 위임받아 새마음운동본부의 모든 업무를 관장했다. 새마음운동본부를 기반으로 행정부, 정계, 경제계, 언론계 등 각 분야에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한다. 다음 문단에서 서술하는 최태민에 대한 1977년 중앙정보부의 조사자료에 따르면 한 봉사단 관계자는 새마음운동본부를 “한마디로 미니 청와대였다”고 표현했다. 실제로 최태민 주위에선 각종 이권개입과 횡령, 사기 및 융자알선 등 권력형 비리, 그리고 온갖 여성과의 스캔들 의혹이 들끓었다. 심지어 박근혜의 이름을 앞세워 구국십자군 이름으로 국민 1인당 천 원 씩을 걷어들이기도 했다고 한다.

각계에서 불만과 제보가 속출하자 대통령비서실에서 나섰다. 1977년 봄 박승규 민정수석비서관[32]이 산하기관을 동원해서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최태민의 비리 보고서가 김정렴 대통령 비서실장을 거쳐서 박정희 대통령에게 올라갔는데, 정말 이상한 것은 박정희의 반응이 미적지근하기 그지 없었다는 것이다.[33]

아무런 후속조치가 없자, 이번에는 실세 중의 실세인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직접 나서 최태민을 조사하기에 이른다. 김재규의 항소이유보충서에 따르면 박승규 민정수석이 자신(김재규)한테 와서 제발 최태민을 정리해달라고 하소연해서 조사에 착수했으며, 최태민의 비리행적을 조사해서 박정희에게 보고하자 박정희가 김재규에게 "중정이 그런 것도 하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민정수석 비서실과 중앙정보부 보고를 잇따라 받은 박정희 대통령은 1977년 9월 12일 직접 최태민을 불러서 심문을 했다. 이른바 ‘친국’(親鞠:임금이 직접 중죄를 지은 자에게 일일이 따져 묻는 일)이다.[34] 청와대에서 극비리에 진행한 친국엔 중정의 김재규 부장과 조사 실무를 담당했던 백광현[35] 국장이 동석했다. 박근혜도 참석해 “그런 일 없다. 김재규가 최태민을 모함하는 것이다”며 최태민을 옹호했다.[36]

박정희 대통령은 모든 보고를 받고도 최태민을 벌하고 박근혜를 구국봉사단에서 손 떼게 하기는 커녕 오히려 스스로 박근혜를 총재, 최태민을 명예총재에 임명했다. 그리고 이 것을 가지고 이후 박근혜는 최태민에 대한 의혹이 불거질 때마다 “최태민은 무고하며, 나 역시 결백하다는 것이 증명된 것”이라는 주장을 하고 다녔다.[37] [38] sbs 그것이 알고싶다 팀은 '김재규가 바보가 아니기 때문에 영애(박근혜)가 엮인 문제를 아버지(박정희) 앞에 사실대로 다 말할 수 없었을 것'이라며 친국 자체가 부실했다는 증언을 방송했다.

지금껏 대통령 박정희를 포함해 청와대 안에서 발언권이 강한 영부인 육영수, 감찰권한을 가지고 있는 민정수석실을 포함한 비서동, 실세로 알려진 김재규를 위시한 중정인사들을 비롯해 청와대에서 근무하던 모든 이들이 최태민을 싫어했다고 알려진 상황에서[39] 최태민이 어떻게 잘 넘어갔는지 모르겠지만[40] 결과적으로 박정희의 소위 친국을 통해 최태민은 아무 처벌도 받지 않았다.[41]

한편 정권의 실세였던 김재규가 바로 1977년 최태민 친국 때부터 박정희한테 불만(혹은 의구심)을 품기 시작했다는 이야기가 많다. 당시 박정희의 친국이 실제로는 최태민과 김재규의 대질심문처럼 진행되었는데, 김재규 입장에선 자신은 평생 박정희에게 충성했고 정권을 떠받드는 천하의 중앙정보부장인데 자신이 올린 자료를 믿지 않고 근본도 알 수 없는 웬 잡놈하고 동등하게 취급한다고 받아들여서 엄청난 굴욕감을 느꼈다는 것이다. 여기에 박정희가 '최태민은 무고하다'는 박근혜의 호소에 넘어가서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자, 이미 박정희가 공과 사를 구별하지 못하고 정상적으로 국가를 통치할 만한 판단력을 상실한 것으로 봤다는 추측도 있다. 실제 김재규 스스로도 박정희가 최태민을 제어하지 않고 놔둔 것을 10.26 사건의 먼 원인으로 꼽기도 했을 정도다.

박정희 정부 말기 실세 중의 실세였던 이는 경호실장 차지철이었는데, 차지철은 최태민과 가까이 지냈던 인물이며 이 때문에 김재규와 사이가 매우 나빴다는 비서실장 김계원의 증언도 있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와 이 당시 청와대의 권력암투 구도가 비슷하다는 점을 떠올려보면 차지철이 실세가 된 것도 어떤 비선과 가까웠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추론을 하는 이도 있다. 물론 이에 대해서는 차지철이라는 인물이 국정보다는 박정희라는 개인에 대한 충성심이 깊다고 알려진 인물이라 그 충성 때문에 실세가 된 것이고, 실세에 오른 것과는 별개로 박근혜가 지나치게 최태민을 싸고돌며 울기 까지 하니 영애에 대한 삐뚤어진 충성심으로 최태민과 가까이했다는 설과, 차지철 본인이 최태민에게서 따로 이권을 받거나 최태민을 이용하기도 한 것 아니냐는 설도 있다. 현재까지는 어떤 해석도 가능하다. 다만 확실한 것은 박정희는 이 모든 것을 보고받아 알고 있었다는 점이다.
최태민의 전횡을 참지 못한 김재규는 박정희 살해의 동기에 자신이 최태민의 부정행위를 상세히 조사해 보고했음에도 불구하고 박근혜가 그를 비호하는 바람에 박정희에게 오히려 대질심문을 당한 것도 있다고 하였다. 구국여성봉사단의 집회는 청와대에서 열렸다. 약 200명의 재벌들과 함께 집회를 열었는데 김재규와 중앙정보부는 이를 매우 못마땅하게 여겼다고 한다. 그런데 이들의 출입을 눈감아 줬던 부서가 바로 경호실이었고, 경호실의 실장은 바로 그 차지철이다.[42][43] 참고로 당시 구국봉사단 등 박근혜-최태민이 운영한 단체가 어떤 식으로 운영되었는지 잘 드러내는 증언이 있다. 당시 정치자금을 관리하던 김정렴 대통령 비서실장의 회고록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온다. 박근혜가 어느날 갑자기 찾아와서 모 건설회사의 현안을 해결해 달라고 요구해서 당황했는데, 알고보니 이 기업이 최태민이 운영하는 구국봉사단에 거액의 기부를 했다는 것이다.[44] 그래서 김정렴 비서실장이 직접 박정희 대통령한테 "근혜 영애의 활동 자금은 제가 마련해서 드릴 테니, 돈이나 이권에는 절대 개입하지 못하게 해주십시오"라는 건의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당시 박근혜-최태민-구국봉사단이 어떤 식으로 운영됐는지 알게 해주는 증언이다.[45]

최태민은 새마음봉사단의 명예총재(총재는 박근혜)를 맡는 등 1979년 10.26 사건 때도 박근혜의 옆을 계속 지켰다. 박정희의 죽음 이후에는 전두환이 지휘하는 합동수사본부의 수사를 받았다. 그 결과 최태민은 산골 지역에 있는 강원도 양구에 있는 21사단 군부대에서 6개월 간 가택연금을 당했다. 연금이 해제되자 다시 박근혜 곁으로 돌아온 최태민은 이 일을 박근혜에게 그대로 일러바쳤고 박근혜는 이 일로 전두환을 매우 싫어하게 되었다고 한다. 우연찮게도 박근혜 정부 초창기 큰 이슈 중 하나가 전두환 전 대통령 추징금 환수였다. 전두환 정권에서 ‘실세’로 꼽힌 허화평 전 의원은 “최순실이 (박근혜 대통령) 뒤에서 여러 가지를 했다면 최순실의 원수는 전두환”이라고 말했다. 최순실이 아버지 최태민에 대한 복수심으로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 보복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 [46]

전두환 정권은 박근혜에게 최태민이 문제가 많으니 새마음봉사단을 해체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박근혜는 "국가를 위한 일인데 꼭 해체해야 하나요?"라고 반문했다고 한다. 그래도 새마음봉사단은 1980년 11월에 강제로 해산되었다.

“(최태민을) 강원도로 보내 활동하지 못하도록 했다. 조용하게 자숙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전두환은 강원도에 그리 오래 두지는 않았다. 구체적 비리 혐의는 기억나는 것이 없고, 그가 기업체로부터 돈을 뜯어낸 것으로 확인된 게 얼마나 되는지… 별로 없었던 것 같다. 박근혜의 연루 의혹은 없었다.”[47]

당시 국군보안사령부 대공처장 이학봉, <신동아> 2007년 6월호

그 후 박근혜가 육영재단영남대학교 등을 통해 사회활동을 이어가자 최태민은 슬그머니 거기에 동참했다. 그러다가 1986년부터 육영재단의 어린이회관에선 최태민의 전횡이 입길에 올랐다. 여성중앙 1987년 10월호를 보면, 최태민에게 우선 보고를 해야 이사장(박근혜) 결재를 받을 수 있었으며, 최태민의 5녀 최순실도 회관 운영에 개입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 무렵 재단 잡지사 기자들 파업과 직원들 농성도, 모두 ‘외부세력’이라고 표현된 최태민·최순실 부녀의 간섭이 원인이었다.

이러한 분란은 1990년 11월 15일 박근혜가 여동생 박근령에게 이사장직을 넘길 때까지 계속됐다. 박근혜는 물러나면서 “내가 누구에게 조종받는다는 것은 내 인격에 대한 모독”이라며 최태민의 전횡 의혹을 일축했다.

이후 서울특별시 역삼동 자택에 칩거하다가, 1994년 5월에 노환으로 숨졌다. 이때가 향년 81세다.[48] 그런데 사망시점에 대한 의혹이 존재한다. 예장 종합총회 총회장 전기영 목사에 의하면 최태민은 1994년 1월에 사망했다고 한다. 그런데 왜 5월에 사망했다고 발표되었는지 의문이라고. [단독 박근혜 대통령, 최태민·최순실 주술에 홀렸다] 2016.11.11일자 MBN '아주궁금한이야기'를 통해 최태민의 가족들이 부활의식을 하느라 사망을 제 때 발표를 하지 못한 것이라는 경악스러운 취재내용까지 나왔다. 그런데 최태민의 아들 최재석이 타살설의 주장을 제기했다.[단독 최태민 아들 “내 아버지는 타살됐다”]

3 경력

  • 1942년~1945년 8월 황해도경 순사
  • 1945년 9월 강원도경 소속 경찰
  • 1947년 3월 대전경찰서 경사
  • 1947년 4월 인천경찰서 경위 (사찰주임)
  • 1949년 6월 육군 제1사단 헌병대 비공식 문관, 해병대 비공식 문관
  • 1950년 7월 육군 제1사단 헌병대 비공식 문관
  • 1951년 3월 사단법인 대한비누공업협회 이사장, 대한행정신문사 부사장
  • 1954년 부산 금화사에서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됨. 이름을 퇴운으로 개명
  • 1955년 경남 양산군 개운중학교(비인가 학교) 교장, 대한농민회 조사부 차장, 전국 불교청년회 부회장, 한국복지사회 건설회(임의단체) 회장
  • 1963년 5월 민주공화당 중앙위원
  • 1965년 천일창고라는 회사의 회장으로 있다가 유가증권 위조혐의로 서울지검이 그를 입건하자 도피하였고, 8월에 사기 혐의로 구속되었다. 당시 기사
  • 1975년 박근혜와의 인연 시작[49]
  • 1975년 4월 29일 대한구국선교회(1976년 12월 10일 구국봉사단, 1979년 5월 1일 새마음봉사단으로 개칭) 총재

4 박근혜와의 부적절한 관계

박근혜와의 사이가 얼마나 가까웠냐 하면, (위에 쓰여져 있듯) 박정희가 살아 있었던 시절, 중앙정보부, 검찰청, 경찰청박정희 정권의 사정 기관들이 '이런 사기꾼이 영애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며 최태민을 잡아들여서 족치고 박정희에게 이 인물을 '처리'해야 한다고 건의할 때마다 박근혜 본인이 직접 나서서 이 사람을 비호하고 지켜줬다.

최태민이 직접 박근혜와 영적 부부라는 말을 하고 다녔다는 증언이 나왔다.# 박근혜가 대통령이 되면 근화봉사단에 맡아달라는 것이다. #

1990년 8월엔 친동생들이 직접 노태우 전 대통령에게 편지를 써서 최태민을 족쳐줄 것을 요구했었다![50] 노태우 전 대통령이 경찰청장 등을 시켜 최태민을 조사하라 요구한 것으로 보인다.

박근혜는 먼 훗날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에 뛰어들었을 때에도, 그리고 그 이전에도 이 사람을 마치 인생의 가장 큰 은인인 것처럼 각별하게 생각한다는 것을 드러낸 바 있었다. 박근혜는 늘 "가장 어려울 때 곁에서 여러가지로 도와주신 분"이라는 말을 반복해왔으나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도왔는가에 대해서는 단 한 차례도 제대로 된 해명을 한 적이 없다. 다만 박정희가 피격된 후 아버지의 부하였던 사람들이 자신을 보고 인사도 하지 않고 피해다니는 광경을 보며 배신에 대한 큰 정신적 트라우마를 앓아왔다는 사실만 재확인될 뿐이다.

박근혜와 최태민 사이에 사생아가 있다는 의혹도 여러 차례 제기된 바가 있다. 박정희의 최측근이었던 김종필 전 총리가 박근혜가 정계에 입문한다고 하자 "최태민의 자식까지 있는 애가 무슨 정치를 한다는 거야!?"라면서 부정적인 입장을 드러냈다는 루머까지 흘러나왔었다.[51] 박근혜는 '원한다면 DNA 검사라도 받겠다'며 이러한 의혹을 일절 부정하였다.

주갤러가 주갤럼을 위해 박근혜, 최태민 스토리를 정리하였다.정리1 정리2 정리3 정리4[52]

자세한 내용은 최태민과의 부적절한 관계 참조.

2016년 10월 29일, 박정희가 측근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왜 최태민을 박근혜에게서 적극적으로 떼어놓지 않았나에 대해 추측해 볼만 한 증언이 나왔다. 박근혜가 연루 된 최태민의 구국선교단은 박정희의 지시로 창설되었으며, 그 목적은 민주화 세력에 대항하기 위함이라는 내용이다. 최태민이 박정희와도 무슨 연관이 있지 않은가 의심할 여지가 있다.

전 목사에 따르면, 박정희 전 대통령이 최태민을 불러 민주화 운동을 하는 진보 기독교 세력이 강하다며, 이를 견제할 세력을 만들라고 했다.

이규연의 스포트라이트를 통해 최태민이 생전부터 박근혜 대통령 만들기 프로젝트를 추진해왔다는 탐사보도가 나오기도 했다. 이는 현몽설부터 시작해 박근혜의 인생, 발언과 앞뒤가 딱딱 맞아떨어지는지라 종교나 세뇌 관련 이야기가 무성하다. 고발뉴스, “박근혜-최태민 아지트에 금은보화 가득”

1990년에도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랑 똑같은 방법으로 박근혜 대통령을 등에 업고 대기업을 압박해 돈을 뜯어낸 것으로 확인됐다.#

팬티까지 사주는 관계였다는 증언도 나왔다. #

5 가족 관계

<주간경향> 1205호, ‘마침내 실마리 드러난 최태민 가계도의 미스터리’ 기사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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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엔 김 아무개와 결혼했다가, 김씨가 그를 여자 문제로 고소하자 부산 금화사로 도피하는 등 여자관계가 매우 복잡하였다.

그 결과 부인 5명으로부터 자식을 3남 6녀나 두었다.

  • 5번째 부인 임선이(1920~2003) 최순실의 모친. 박근혜의 정계입문에 큰 도움을 주었고 사위인 정윤회에게 비서실장직을 추천했다고 알려졌다. 최태민의 사망 직후 배다른 자식 3명을 상대로 친자확인소송을 냈다고 한다. 판결문을 보면, 최태민은 임선이와의 혼인신고 전에 두 여인에게서 이들을 낳았다. 결혼과 동시에 “편의상” 이 3명을 모두 임선이와의 사이에서 낳은 듯 출생신고를 했지만, 최태민 사망 뒤 임선이가 이를 인정하지 않겠다고 한 것이다. 유산배분 문제를 염두에 둔 조처였을 거란 관측이 제기되지만, 최태민 본인도 생전에 이들을 언급하지 않았음 또한 주목할 만하다.# 임선이 역시 박근혜 대통령에게 만만치 않은 영향력이 있었던 듯 한데 당시 박근혜의 임선이에 대한 호칭은 '이모'였고 1998년 재보궐 때 선거 자금을 조달 했으며 박근혜와 아파트에서 같이 살면서 선거를 총지휘 했다고 한다. 임선이의 사망 이후 최순실이 본격적으로 영향력을 가지게 된 것으로 보인다고. ##
  • 3녀 최순영 : 최태민 친딸이 아니며, 5번째 부인 임선이와 전 남편 사이에 난 딸이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이후 최순영 일가도 보유한 토지를 정리하는 등 재산정리작업에 착수한 정황이 포착하였다.#
  • 4녀 최순득 : 강남구 도곡동 소재 고급 빌라 힐데스하임 및 강남구 삼성동 45-12 소재 7층 빌딩 소유중.
  • 5녀 최순실 : 사위 정윤회와 함께 박근혜 정부 국정 농단의 주인공. 4녀 최순득과 제일 친하다고 한다.
  • 6녀 최순천 : 용산구 한남동 소재 고급 아파트 한남 하이페리온 및 천억대로 추산되는 강남구 청담동 119-3번지 9층 빌딩 (씨티은행 건물)과 서초구 반포동 50-7 4층 상가 소유 중
  • 의붓아들 조순제 : 5번째 부인 임선이와 전 남편 사이에 난 아들이다.

박근혜와의 인연이 5녀 최순실[53]에게까지 이어져 내려왔고, 박근혜 대통령과 최순실은 자매 이상으로 각별한 사이였다고 전해진다. 정윤회는 박근혜 대통령이 초선의원이었을 때 첫 비서실장을 지냈던 사람이며, 비선실세 국정개입 의혹의 한복판에 서 있던 사람이다.

최순실은 이때 잠깐 이름이 언급되었다가, 미르 재단 & K 스포츠 재단 사건의 흑막으로 지목되면서 우리나라 뉴스의 전면에 부상하게 된다.

CBS 시사자키 '최태민 패밀리와 박근혜 대통령, 그 40년의 역사

이박사와 이작가의 이이제이 최태민 특집 1편, 이 박사와 이 작가의 이이제이 최태민 특집 2편

6 비리

언론의 보도에 따르면 70년대 당시 국가정보기관인 중앙정보부와 당시 치안본부였던 경찰청에서 최태민에 대하여 조사를 하고 보고서를 작성하였다고 하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중정은 국내 사건은 대공용의점이 없으면 직접수사는 할 수 없는 관계로 치안본부 및 검찰에 이첩했으며 경찰도 자체적으로 정보력을 동원해 최태민의 구린 뒤구석을 알고있었다.

6.1 인사 청탁

1975년 9월 15일 2군 이모 대령의 부인 김OO에게 "국방부 장관에게 청탁하여 이OO을 준장으로 진급시켜 준다."고 하고 그 대가로 200만 원 수수. 1976년 6월 4일 H사 사장 김OO에게 서울시장에게 청탁하여 "서울시 비상유류 저장탱크 공사를 맡게 해준다."고 하고 그 대가로 5,000만 원 수수. 1976년 10월 초순 한국소방기구공업협동조합 이사장 이OO에게 내무부 차관에게 청탁하여 "소방기구 신규제조 허가를 억제해주고 동 기구검정권을 동 조합에 주도록 해준다."는 조건으로 200만원 수수.

1976년 8월 전 중앙정보부 강원지부장 김OO의 부인 박OO에게 "남편을 중정에 복직시켜 준다."고 하고 그 대가로 2차에 걸쳐 150만 원 수수. 1976년 9월 초순 S관광 대표 진OO에게 "대덕-연기 지역구 차기 공화당 국회의원 후보 공천을 받게 해준다."고 하고 1976년 9월 17일 ~ 12월 10일 5회에 걸쳐 500만 원 수수

1977년 3월 24일 H사 K회장에게 "구국봉사단 부산지단장에 임명해 준다."고 하고 그 대가로 200만 원 수수. 1975년 9월 27일 H사 사장 K회장에게 "대한화재보험협회에 청탁하여 동 협회 청사 신축공사를 맡게 해준다."고 하고 그 대가로 7,000만 원 수수

6.2 재산 관련

최태민은 각종 비리 의혹과 함께 박근혜와 막역한 관계 내세워 재산을 부정 축적하였고, 이를 자녀들에게 상속하였다는 의혹이 있다. 실제로 최태민의 5녀 최순실-정윤회 부부는 강남의 200억 원 빌딩의 소유주이고, 6녀 부부는 150억 원 규모의 부동산 소유주다. 최태민과 박근혜 사이에 숨겨둔 아이가 있다는 의혹이 있으나, 현재까지 밝혀진 바는 없다. 이 의혹을 제기한 백은종은 명예훼손으로 고발당하여 재판이 진행 중이다.

최태민 일가는 노태우 정부에서 1989년 사정(司正) 당국이 집중 조사했던 것으로 확인됐으며, 당시 이미 강남 등지에 백억대 부동산 보유했던 것으로 드러났다.최태민 일가 재산 보고서

이미 80년대부터 부를 축척했으며, 조순제의 육성녹음이 맞다는 것이다.#

육영재단도 역시 재단 직원들을 자신의 사무실로 불러 업무를 지시하고 채용 면접에도 참석하는 등 실질적인 권한을 휘두르며 전횡을 일삼았다는 것이다.#

6.3 여자관계에 대한 다른 이야기

미주한인신문 선데이저널의 보도에 따르면, 1979년 중앙정보부의 최태민 관련 보고서에 그의 난잡한 여성편력에 관한 구체적인 수사기록이 나온다. 관련 기사 @ 기사에 나온 내용을 보면 성기불발기로 실패했다는 내용이 많이 나온다.

자진해서 한 경우는 전 00병원 경리담당(24), 전 총재 비서(27), 전 부단장 (31), 사무총장 (35, 유부녀), 전 00병원 간호과장 (40), 전 여군국장 (41), 전 부총재 (45) 7명이었다.

항간에 최태민과 박근혜의 '통정설'이 회자되고 있다. 김종필이 박근혜가 최태민의 애를 낳은 여자라고 했다는 인터뷰 기록도 있었다. 그러나 2016년 11월 시사저널의 인터뷰에서 김종필 총재는 자신의 종전발언이 잘못 알려진것이라고 하면서 "당시 최태민은 나이가 많아 박 대통령을 임신시킬 수 있는 능력도 없다"라며 부인 하였다.

신동아 16년 12월호에서 최태민 구국봉사단 총재의 특별보좌관 박병률의 인터뷰를 실었는데, 그는 중정 최태민 보고서에서 나오는 12건의 여성 추문에서 나오는 여성들 대부분을 알고 있다고 한다. 이중에서 1건만 사실에 부합하다고 했다. 바로 구국봉사단 간부 김모씨로 오랫동안 내연관계를 유지했다고 한다. 김씨는 젊은 나이에 이혼한 상태로 외모가 빼어났으며, 최총재 가까이에서 일하면서 그가 다른 여자를 가까이 하는 것을 차단했다고 한다. 이런 맥락에서 박근혜와 최태민의 '통정설'도 근거가 없다고 한다.

7 죽음에 대한 타살 의혹

최태민은 대외적으로는 1994년 5월 1일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이 죽음이 석연치 않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최태민의 친아들이자 최순실 일가와 배다른 형제지간인 최재석씨가 최태민의 죽음이 타살에 의한 것일 것이라는 말하였다. 최태민은 죽기 수개월전부터 "그분(박근혜)에게 재산을 돌려드려야겠다. 그분 대통령 만들기 프로젝트를 접어야겠다"라는 말을 하였다고 한다. 최재석의 주장에 의하면 당시 최태민 본가 내실에는 1994년 당시 기준으로 약 1조원 정도의 동산 재산이 있었다고 한다.
최태민이 돈을 돌려주겠다고 한후, 몇개월 후에 최태민은 석연치 않게 죽는다.
그의 재산에 욕심이 많던 최순실 일가에 의해 최태민은 살해당한 것 아니냐는게 그의 주장.
최태민은 당시 건강을 위해 비타민 주사 정맥 주사를 맞는데 이 주사제에 몰래 약물을 넣어 살해한 것 아니냐 하고 최재석씨는 의심하고 있다.

실제로 최태민의 죽음후 그의 재산은 최순실 일가에게로만 분배되었고, 다른 배다른 형제에게 재산이 분배되지는 않았다고 한다. 최태민이 재산을 돌려주겠다고 말한 박근혜에게도 물론이다.
타살의 이유가 상당히 그럴듯하며, 최태민 사망당시 재산 분배와 관련된 주변인물에게는 사망 통보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최태민의 배다른 형제및 친아들 최재석과 심지어 최태민이 돈을 돌려줘야 겠다고 말한 대상인 박근혜도 죽음을 나중에서야 알았다고 한다. 최태민은 최재석에게 평소에 "이건 내 돈이 아냐. 이걸 내가 널 줄수는 없어. 그리고 주면 나중에 사단이 나"라고 말했었다고 한다.

최태민이 돈을 돌려줘야겠다는 말에 화들짝 놀란 최순실일가가 당시 1조원에 달하는 거액의 돈을 편취할 목적으로 최태민을 몰래 살해하고, 최태민의 죽음을 숨기고 최순실 일가가 재산 분배를 독단적으로 비밀리에 추진했었다고 의심되는 정황. 최재석에 의하면, 최태민의 진짜 사망일은 5.1이 아니라 4.18이며, 최재석이 한국에 왔을때 최태민은 이미 암매장이 끝난 상태였다고 한다. 박근혜도 최태민이 죽음을 나중에야 알았다고 한다.
최재석과 박근혜가 최태민의 사망을 알았을때, 최태민 금고의 돈은 이미 사라진 후며 이미 재산분할은 끝나 친아들인 최재석에게는 한푼의 상속도 돌아가지 않았다고 한다.
세브란스 병원의 의료 기록에도 최태민의 건강 상태가 죽음을 앞둘정도로 내일 모레 한다는 기록도 없었고, 병원에 입원하지 않고 집에서 죽었기 때문 제3의 목격자나 사망당시의 진료 기록도 없고, 의료진도 예측못할 정도의 만성 신부전에 의한 급사 사례도 희귀하다고 볼때, 최재석의 주장대로 그의 죽음이 상당히 의심이 되는 상황이다.
아 씨바 할 말을 잃었습니다.

8 무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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찍은 것도 하필 밤에 찍어서 더 음산하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취재경쟁을 시작한 언론들에 의해 최태민의 무덤이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유방동 산 81-3번지 에서 발견되었다. # @ 용인시는 묘지 조성과 관련한 신고가 없다며 고발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살아서도 온갖 불법을 저지르더니 죽어서도...

구글어스 좌표는 37°15’48.43” N 127°11’17.62” E이다.X키를 눌러 Joy를 표하십시요. 결국 용인시에서 행정 절차를 착수하자@, 이장하겠다고 한다. 처인구청 관계자의 추측으로는 훼손 여부를 우려하는 것 같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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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주민등록상의 생년월일이며, 밑에 추가됐듯이 모 언론에서 취재한 최태민의 묘비엔 1918년 음력 11월 5일 출생이라고 기록되었다. 양력으로 환산하면 12월 8일이다.
  2. 4월 18일에 죽었다는 타살 의혹도 있다.
  3. 무서운 건 이 둘은 보통 사람들의 공감을 받는다는 것! 죽창드립처럼 과격하기나 하고 듣는 사람에게 거부감을 주는 것과는 다르다.
  4. 수원시의 옛 지명이다.
  5. 서울 중림동 성당에서 받았다고 한다. 일부 신문보도에는 '공해남'이라는 세례명을 받았다고 하는데 이것은 오류. 이런 세례명은 존재하지 않는다. 최태민이 공해남이란 속명을 사용하며 성당에 등록해서 세례를 받았을 텐데 언론에서 착각한 것이다. 성당 서류에는 공해남+세례명의 형태로 기록되었을 것이다.
  6. 당시 이었다.
  7. 이 정도로 이름을 자주 바꿈은 굉장히 드문 케이스로 범죄전문가들은 '개명이 잦은 사람들은 신분을 계속 세탁해야 하는 간첩이거나, 사기꾼, 연쇄살인마, 테러리스트 등 죄질이 무거운 중범죄자일 가능성이 높다'고 했었다. 사실 지금도 의미있는 사항
  8. 단, 황해도에서 강원도로 온 뒤 공무원인 경찰과 군인 생활 등을 했는데 그때 이름 최상훈이 가명이었다면 그 이름을 공무원으로 어떻게 쓸 수 있었는지는 의문이다.
  9. 이에 대해 본명이 2개였던 것이 아니라 이름은 3개고 개명을 두 번 했다는 주장도 있다. 본명이 몇 개인가가 논란이 됨도 굉장히 이례적인 일이다. 그 정도로 행적이 불분명한 인물. 물론 이 시기가 6.25 이후로 대한민국의 행정체계가 잿더미가 되어버린 탓도 있을 것이다.
  10. 수사가 아니다!!! 위키니트 몇몇이 헷갈리는데 정보기관은 원칙적으로 경찰이 아니라서 수사 권한은 없고 정보 수집/배포 권한만 있다. 국내 치안정보 수집/배포/분석 차원에서 조사한 것이며 이 보고서는 당시 치안본부인 현 대한민국 경찰청의 수사국 특수수사과, 당시 형사국 특별수사대(일명 사직동팀. 이름의 유래는 위장용 유령회사가 있던 사직동 사무실)으로 이첩된다.
  11. 앞 각주의 설명과는 다르게 당시 중앙정보부는 수사권한이 있었다. 전세계적으로 정보기관이 직접 수사권과 기소권을 가진 매우 드문 사례. 그리고 이것은 현재의 국가정보원도 마찬가지이다.
  12. 박정희의 당이다.
  13. 요즘 기준이면, 서대문구 국회의원 후보가 확실한 자리다. '대체 어떻게?'라는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아마 1958년의 공천 신청도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보인다.
  14. 일부 언론에 불교/기독교/천주교로 잘못 알려졌는데 천주교 즉 가톨릭은 엄연히 기독교로서 같은 종교다. 교리도 같은 삼위일체이다. 당장 가톨릭 신자에게 가톨릭이 그리스도교가 아니란 식으로 잘못 말하면 화낸다. 역사적으로도 개신교가 생기기도 훨씬 전 이미 가톨릭이 존재했었고 개신교의 교리는 가톨릭 교부인 성 아우구스투스나 성 안토니우스 등이 만든 교리다. 불교의 조계종과 천태종, 일련종, 정토종이나 이슬람의 시아파, 수니파, 알라위파 정도 차이라고 보면 된다.
  15. 말은 교리인데, 최면술을 통해 영혼합일을 이룰 수 있다는 주장이 핵심이라고 한다. 최태민의 조카 최용석을 인터뷰한 내용에 따르면 최태민이 최면술에 뛰어난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사실 최태민을 종교 자체보다 최면술을 깊게 연구한 사람이라 추측해 볼 수도 있다. 원래는 종교에 심취하려다가 최면술에 빠졌다거나.. 최용석이 삼촌 최태민과 오랜 기간 같이 살거나 할 만큼 친한 가족이었던 것은 아니고 최용석의 어머니, 즉 최태민의 형수가 최태민에게 최면을 체험하고 나서 몸이 안 움직였다가 다시 움직였다가 하는 걸 겪었다는데 아들에게 그 경험을 얘기하며 '니네 삼촌 능력이 엄청나더라'라고 말한 것을 인터뷰한 것이라 실제 본인 체험담은 아니지만 현존하는 관계 인물의 증언 측면으로는 매우 중요한 자료다.
  16. 영혼할 때 그 영이다. 영혼세계를 의미
  17. 영생교는 잘못 알려진 이름이다. 이 종교 교주는 살인특공대로 유명한 조희성으로 2004년 살인교사 혐의로 수감 중 감옥에서 뒈졌다!!! 물론 박태선계 계보라는 공통점이 있단 설도 있는데 워낙 최태민의 과거 행적이 불투명해서 조희성과 연계가 있을 수도 있다.
  18. 당시 이 지역인 굴레방 다리에서 영세계를 포교하는 사이비 교주를 했다고 한다. 참고로 여기는 과거부터 지금까지 쭉 서울에서 가난한 축에 속하는 동네.
  19. 그렇다고 안 뜯어먹었을 거라고 장담할 수는 없다. 뜯어먹었는데 신자들 수가 적고 가난해서 뜯어낼 게 별로 없었을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다.
  20. 대표적으로 천부교 즉 전도관이 있다. 천부교가 지금은 몰락했지만, 70년대 당시에는 전성기라고 할 수 있을 만큼 꽤 활발했었다.
  21. 대표적으로 신천지. 이들의 능력은 뭐...
  22. 육영수가 정말 조총련의 사주를 받은 문세광이 쏜 총에 맞아 죽었는지에 대한 여부는 현대사의 미스터리 중 하나다. 그냥 떠도는 음모론이 아니라 sbs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주제로 다룬 적도 있다. 자세한 것은 항목참조
  23. 박근혜의 친동생 박근령의 남편 신동욱에 발언에 따르면, 박근령이 주장하기로 편지나 육영수 사망보다 전인 1974년 3월 이전에 최태민과 박근혜와 교류가 있었을 거라고 한다. 육영수조차 사이비 느낌나는 최태민을 경계한 적이 있다고 한다. 여기서 팩트 부분 이해에 대해서는 주의할 것이 있는데, 물론 박근혜와 직접 관계 있는 인물인 박근령과 그 남편의 주장이라 신뢰도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나, 증거자료가 밝혀진 것은 없다. 증언 자체도 박근령은 저 상황에 대해 간접적으로 들었다는 것이지 직접 봤다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절대적 신뢰도가 있는 발언은 아니다. 박근령은 최태민을 처음으로 직접 얼굴 보고 만난 시점이 박정희 사망 후 전두환 정부까지 다 들어선 1981년이라고 증언한다. 그러니 박근령의 입장에서는 최태민과 박근혜의 1970년대 친분관계 시작에 대해서는 당시 어머니 육영수나 언니 박근혜 정도에게 전해 들은 내용만 있을 수 있는 것이다.
  24. 일각에서는 '별볼일 없던 일개 사이비 종교 교주인 최태민이 어떻게 청와대에서, 그것도 그 서슬퍼런 박정희 시대의 철통 경호를 받고 있던 영애, 박근혜가 우매하단 것을 알았는가'라며 진짜로 뭔가 신통력 같은 것이 있었던 것 아니냐는 말도 있긴 했었다. 그러나 박근령 측의 주장에 따르면 최태민이 이전부터 박근혜 주변에서 그녀가 우매하단 것을 지켜보았을지도 모른다
  25. 이이제이 최태민 특집(1)
  26. 당시 퍼스트레이디였던 박근혜는 20대였으나, 최태민은 60대 노인이었다. 두 사람의 추정 나이차는 40살 근처다.
  27. 프레이저 보고서에 의하면 "최태민은 박근혜의 몸과 정신을 지배했다"고 언급한다.
  28. '어머니를 잃은 심적인 큰 고통'은 그동안 박근혜라는 사람을 이해하는 중요한 키워드 중 하나였다. 그렇기 때문에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터진 후 최태민과의 관계에 대해 사람들도 쉽게 납득을 했다. 어머니를 잃고 절망적인 상황에 빠진 소녀에게 죽은 어머니를 만나게 해주겠다며 접근한 사이비 종교 교주라는 논리는 그리 어색하지 않다. 그런데 이 논리를 만드는 근간이 뒤흔들린 것이다. 도대체 언제부터 두 사람이 이토록 밀접한 관계가 되었는가에 대한 명확한 시점이 없기 때문에 이 부분이 불확실하다는 것은 중요하다. 훗날 대한민국을 뒤집어놓은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라는 거대한 사건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부분에 대한 설명이 반드시 제대로 있어야 한다.
  29. 박근령, 신동욱 측은 이 시점에 의문을 제기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고 한다. 어떻게 최태민이 고작 2월에 편지 보내고 3월에 처음 직접 만난 상황에서 5월이라는 짧은 기간에 대통령 딸 박근혜를 자기 단체의 명예총재로 만드는, 이 수준의 대형 이벤트를 연출할 수 있는지 납득할 수 없다는 것이다.(신동욱은 오늘날의 번개팅도 이보다는 빠르지 않을 거라는 농담 섞인 말을 했다.) 그러므로 신동욱은 1974년 이전에 반드시 박근혜-최태민의 기본적 교류가 있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30. 사이비종교연구가 탁명환의 기록을 봐도 무당, 사이비교주였던 그가 공식적으로 활동하면서 청와대와 긴밀한 관계를 맺자 매우 의아하게 여겼다 한다.
  31. sbs 그것이알고싶다 2016.11.26일자 방송분에서 육영수가 최태민을 직접 청와대로 불러들였음이 밝혀졌다
  32. 민정수석비서관은 검찰경찰을 관할하면서 공직자 기강 관리, 부정부패 단속 그리고 대통령 친인척을 관리하는 보직이다. 현재도 마찬가지로 이 때문에 민정수석비서관은 대통령이 가장 신임하는 최측근 인사가 발탁되는 자리.
  33. 현대사 연구자 한홍구 교수에 따르면 당시 박정희는 “자네가 직접 근혜한테 얘기 좀 해봐. 나한테 보고 안 한 걸로 하고…” 식으로 반응했다고 한다. 관련칼럼.
  34. 즉 경찰, 검찰을 통한 정식수사가 아니라 대통령이 최태민을 직접 불러서 심문했다는 것이다. 국가기관에서 정식으로 수사에 돌입하면 당연히 공문서에 기록을 남겨야 하며, 나중에라도 정권의 치부로 작용할 위험성이 있다. 또한 수사 중에 외부에 소문이 나서 야당의 공격대상이 되고, 여론이 악화될 가능성이 높다. 게다가 사실상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하는 박근혜가 연루된 일이기 때문에, 최대한 비공식적인 방법을 사용해서 박근혜가 세간의 구설수에 오르는 것을 피하고자 했을 것이다.
  35. 당시 검찰에서 공안수사를 위해서 중앙정보부에 파견 나온 검사였다.
  36. 그런데 이 친국이 사실상 김재규와 박근혜의 대질심문의 형태로 진행되면서 오히려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굴욕감을 느꼈다는 이야기가 있다.
  37. 대통령은 수사권한이 없다. 한마디로 "우리 아빠가 잘못 없댔어"라는 주장이다.
  38. 한편 이 때 박정희 대통령이 최태민의 생식능력을 없애라는 명령을 내렸다는 카더라도 있다. 다만 김종필은 2016년 11월 시사저널과의 인터뷰에서 이때 최태민이 이미 고령이었기 때문에 애를 만들 능력이 없었을 꺼라고 이야기했다.
  39. 실제 김정렴 비서실장이 청와대 비서관들에게 새마음운동본부, 구국봉사단 등 최태민이 하는 일에 끼어들지 말라고 주의를 줬다는 증언이 있다.
  40. 최태민은 민주공화당 당직자 출신이고, 박정희가 따로 최태민을 불러 식사를 하거나, 임무를 맡기기도 했다고 한다. 기독교 내부에서 부패한 정치에 대한 자성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박정희가 최태민을 통해 기독교 내 수구세력을 결집하려 했다는 증언도 있다. 또 다른 실세 차지철과 가까이 지냈다는 말도 있다.
  41. 그뿐만 아니라 경찰, 검찰 등 정식 조사기관을 통해 조사받지 않았는데도 이 친국 사건을 박근혜와 최태민은 이후 자신들이 무결하다고 주장하는 근거로 사용했다.
  42. 청와대를 자유롭게 들락거리며 재벌들과 만나 축재를 저지른 민간인,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지 않은가?
  43. 이렇듯 김정렴 대통령비서실장과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은 최태민이 대통령과 박근혜에게 악영향을 끼치고 있다고 상당히 불만스럽게 생각했으나, 차지철 경호실장은 오히려 최태민을 싸고 돌았고 이것이 김재규와 차지철이 대립하게 된 직접적인 계기라는게 당시 주변인사들의 증언이다.
  44. 박근혜의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핵심 혐의점인 미르/k스포츠 재단과 똑같다! 박근혜는 현재 대기업에게 돈을 받아 재단에 넣고, 대신 규제완화, 노동개혁 추진, 법인세 인상반대, 경영권 승계, 회장 사면 등의 현안을 챙겨준 것 아니냐는 혐의를 받고 있다.
  45. 또한 최근까지 국정이 어떤 식으로 운영되었는지도 잘 보여주는 일화라고 볼 수 있다
  46. 진짜 전두환에게 목숨을 잃을 뻔한 김영삼 정부, 김대중 정부와 이후 정권인 노무현 정부, 이명박 정부에서도 안 했던 것을 유독 박근혜 정부에 들어서자마자 전두환에게 부정축재 재산환수 등의 이유로 아들과 처남을 교도소로 보내는 등 정치보복을 했다. 하지만 아마 이것만큼은 박근혜 정부의 실책이 되진 않을 것이다.
  47. 앞서 설명 되어 있지만 최태민의 비리혐의가 밝혀지면 박근혜가 공범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암살 당한 전직 대통령의 딸을 범죄자로 잡아넣는 것은 쿠테타로 정권을 창출해 국민에게 정당성을 부여받지 못한 군부에게는 큰 부담일 수 밖에 없다. 박정희가 적잖은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었고, 옳은 일이더라도 정치보복으로 비춰질 모습을 보여준다면 국민들로부터 지탄받을 가능성이 컸던 상황이다. 정말 아무 문제도 없는 인물이었다면 공직에 올랐던 적도 없는 사이비교주 최태민을 군부대에 연금할 이유도 없다.
  48. 만약 묘비에 적힌 대로 1918년 (음)11월 5일에 태어났다면 향년 75세가 된다.
  49. 여러차례 언급된적이 있지만 의혹이 있는 부분이다
  50. 박근혜의 재산을 모두 최태민이 운용하면서 육영재단이나 영남대 등에서 여전히 전횡을 일삼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박근혜를 최태민에게서 빼내기 위해 박근령과 박지만은 엔테베 작전이라는 암호명으로 군사작전에 필적하는 물리적 구출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진입로와 탈출로, 인원과 차량 등까지 세세하게 짜인 작전이었으나 경찰에게 발각되어 실패로 돌아간다.
  51. 이 소문을 보도한 언론사 대표는 박근혜 측에게 고소당했다가 영장이 기각되었다. # 그런데 정작 김종필은 최근 인터뷰에서 그 얘기를 처음 들었다고 한다. 벌컥 화를 내면서 부인하고, 인터뷰 당시에 옆에 있던 보좌관에게 그 얘기를 처음 들었다. #
  52. 기존의 사실들로 현재는 의혹이 수 없이 많이 추가 된 상황
  53. 현재는 최서원으로 개명하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