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공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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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이징에 입성하는 인민해방군

국공내전
날짜
1차 : 1927년 ~ 1936년
2차 : 1946년 ~ 1950년[1]
장소
중국대륙 전체 및 부속도서
 교전국1교전국2
교전국[2]중국 국민당
(국민혁명군)
중국 공산당
(중국 인민해방군)
지휘관장제스
천청
리쭝런[3]
바이충시
옌시산
허잉친
마오쩌둥
주더
저우언라이
펑더화이
리리싼
린뱌오
허룽
예젠잉
쉬하이둥
병력430만명(1946년)
365만명(1948년)
149만명(1949년)
120만명(1946년)
280만명(1948년)
400만명(1949년)
피해 규모불명불명
결과
중국 공산당의 승리, 중국 국민당의 참패
기타
중화인민공화국이 세워지고 중국 국민당타이완 섬으로 천도함[4]

1 개요

정체자 : 國共內戰.
간체자 : 国共内战.

1927년 4월부터 1950년 5월까지 중국 국민당중국 공산당중국의 패권을 두고 벌인 내전. 2000년만에 재현된 현대판 초한전쟁.

2 전개

2.1 제1차 국공내전: 제1차 국공합작의 결렬과 공산당 수세 그리고 대장정

1911년 쑨원 등이 주동이 된 신해혁명으로 청나라는 무너지고 중화민국이 세워졌으나, 초대 대총통인 위안스카이는 중앙정부를 장악하여 독재정치를 폈고, 다른 군벌세력들은 중원을 할거하면서 오히려 청나라보다 더 심각한 악정을 펼치게 되었다. 쑨원은 혁명이 타락했음을 한탄하고, 이런 군벌세력들을 정리하여 진정한 공화국을 세우려고 하였다.

원래 쑨원은 공산주의자는 아니었으나, 영국과 미국과 같은 서방국가들이 제국주의적인 입장에서 중국의 이권을 강탈하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당시 갓 건국한 소련에 점점 기울어졌다.

소련은 갓 건국했지만, 당시 서방 국가들에 의해 고립되어 있었으므로, 중국과 우호관계를 맺어 고립을 벗어나고 반제국주의 공동전선을 구축하려고 했다. 중국 공산당은 1921년 창당되었으나, 소련에 있는 코민테른(국제공산당)의 명령에 따라 국민당에 협력하는 방침을 채택했고, 공산당원들은 당적을 가진채로 국민당에 입당하는 형식으로 국민당과 공산당은 합작하게 되었다. 이것을 제1차 국공합작이라고 한다. 국민당은 광동성을 세력기반으로 하고 있었지만, 당시 중국에는 군웅할거 상태였다.

국민당은 소련의 원조로 군대를 양성하여 북벌에 나섰고(장제스의 북벌), 공산당은 이에 협력하여 중국은 국민당의 주도하에 통일되는듯 했다. 하지만 쑨원 살아 생전부터 공산당과 국민당의 사이는 상당히 삐걱거렸다. 쑨원 본인부터 보로딘의 볼셰비키적 개혁에 대해서 중국엔 맞지 않는다고 거부했고 소련도 쑨원이 공산주의를 받아들이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평가하는 등, 국공합작은 중국의 공산화라는 목표를 볼 때는 잠시 거치는 중간단계에 불과했다. 그리고, 국민당 내부에서 우파들은 숫자도 얼마 안 되는 공산당원들이 국민당을 잡아먹고 있다고 크게 불만스러워했으며 향신, 자본가들뿐만 아니라 일반 군관이나 중산층 당원들도 공산당이 자신들의 사유재산을 건드릴 것이라고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쑨원 사후에 국민당이 노동지파, 태자파, 당권파로 갈라졌을 때도 가장 세력이 센 당권파 내부에서도 후한민의 우파와 왕징웨이의 좌파가 분리되고 있었다. 그 중에 터졌던 것이 중산함 사건으로 왕징웨이파로 인식되던 장제스가 공산당원들이 자신을 납치하려고 했다고 주장하면서 공산당원들을 대대적으로 체포하고 자신에게 적대적인 소련 고문들을 강제 귀국시킨 사건이 벌어졌는데, 이 때까지 친소 용공파로 인식되던 장제스는 차차 우익으로 변해갔다. 이후 국공간의 갈등은 날이 갈수록 깊어졌고, 공산당은 왕징웨이 등의 국민당 좌파와 연합, 장제스를 군사독재자로 비판하면서 북벌을 계기로 강성해진 장제스를 실각시키려고 했다. 이에 장제스는 4.12 상하이 쿠데타를 일으켜서 독자적인 난징정부를 수립하고 공산당과의 관계를 완전히 끊게 되었다.

왕징웨이의 우한 정부와 공산당의 관계는 여전히 유지되었으나, 이후 소련의 방침이 바뀌어서 갑자기 공산당에게 자체적인 무장세력을 조직할 것이며 국민당 중앙집행위원회를 장악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소련 고문 보로딘은 이건 미친 지령이라고 혀를 찼지만, 소련에서 파견된 마헨드라나트 로이는 왕징웨이에게 새로운 공산당 방침을 통보하며 이를 따르지 않으면 국민당을 적으로 간주하겠다고 통보했다. 가뜩이나 장제스와 맞서기 위해서 손을 잡았던 펑위샹이 국민당 내부의 공산당원들을 해고하라고 요구하는 판에 소련의 이러한 요구는 울고 싶은데 뺨을 거세게 때려준 격이었다.

결국, 왕징웨이도 국공합작의 파기를 선언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소련도 9월에 국공합작을 중단하라는 지령을 내렸고 1차 국공합작은 이렇게 완전히 종말을 맞았다. 이때 공산당은 리리싼과 같은 교조주의자들이 소련의 사례를 따라 도시를 장악하려는 반격작전을 펼쳤으나 모두 실패했고, 마오쩌둥 부대가 장시성의 징강산으로 도피하여 해방구를 열었고 여기에 주더 부대가 합류하여 게릴라전을 펼치기 시작했다. 이외에도 양자강 이남의 여러 지역에 홍군 지도자들이 해방구를 만들었고, 중국공산당은 마오쩌둥이 이끌던 장시성 해방구를 중심으로 중화소비에트공화국의 성립을 선언하고 토지 개혁으로 중국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농민층의 민심을 모으면서 내전을 지속해나갔다.

마오쩌둥과 주더, 장궈타오가 이끄는 홍군은 4번에 걸친 국민당군의 토벌전을 모두 분쇄하고 총병력 60만에 이르는 대부대로 성장하였다. 그러나 당지도부의 내분과 노선 투쟁 와중에 장제스의 국민당군이 100만 대군을 동원하여 5차 초공전을 개시하자 대부분의 해방구를 상실하고 궤멸 위기에 몰렸다. 이에 중국공산당은 잔존병력과 당원들을 재편하여 부대별로 해방구를 탈출하여 서부로 이동하기 시작한다. 국민당군과 각 지역 군벌과의 끊임 없는 전투 속에서도 핵심 당원을 보존한채 중국 북서부의 산시성 옌안에 도착하였는데 이것을 대장정이라고 부르며, 현대의 중국공산당은 자신들의 정통성을 이 대장정에서 찾고 있다. 또한 이 대장정 와중에 마오쩌둥이 여러 경쟁자들을 누르고 중국공산당의 절대적인 1인자로 등극했으며, 그가 주창한 농민혁명 노선이 확고하게 자리잡았다. 중국 동남부에서 서북쪽으로 시계방향 돌듯 이동하는 미칠듯한 대이동을 하면서 수많은 대중들이 실제로 공산당군을 접하면서 이들의 엄정한 규율에 호감을 가지고 했다. 중국 북서부의 산시성 옌안에 새로운 근거지를 건설한 공산당은 다시금 병력을 보충해서 게릴라전을 펼치면서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했다.

홍군이 이렇게 급속도로 세력을 확장할 수 있었던 것은 삼대기율 팔항주의로 대변되는 엄격한 군율 때문이었다. 군벌 소속 군대는 물론, 국민당군은 군기가 엉망진창이라 도적떼로 간주되어 농민의 지지를 얻기가 힘들었지만 홍군은 민폐를 끼치는 것을 엄격히 금지했으며 이에 대한 처벌이 엄격했기 때문에 농민의 지지를 얻을 수 있었다. 또한, 향신들을 숙청하고 토지를 나눠주겠다는 공산당의 선전은 아주 달콤하기 그지 없었고 국민당의 재정과 행정력 부재로 인한 개혁과 국토개발의 혜택이 농촌에 제대로 전달되지 않으면서 농민들은 멀리 있는 국민당을 신뢰해야 할 이유를 전혀 느끼지 못하게 되었다.

2.2 중일전쟁과 제2차 국공합작

홍군(공산당군)이 괴멸되지 않고 서북부에서 세력을 확정하기 시작하자, 장제스는 만주사변 이후 본거지를 잃고 산시성에 주둔중인 장쉐량의 동북군벌에 토벌을 명하게 된다.[5] 장쉐량의 동북군은 홍군을 공격했지만 참패했고, 중국인끼리 싸우기보다는 일본과 싸우자는 공산당 측의 선전에 설득되면서 비밀리에 홍군은 동맹관계를 맺고 전투를 중단한다. 이것에 열받은 장제스가 장쉐량을 닥달하기 위해서 산시성으로 오자, 오히려 장쉐량은 장제스를 구금하고 공산당과의 내전 중단 및 전면적인 항일전쟁을 강요하는 이른바 '서안 사건'을 일으켰다. 결국 서안사건의 여파로 침략자 일본에 맞서 싸운다는 명분을 내걸고 중국국민당과 중국공산당간의 2차 국공합작이 성립되었다.

1937년 일본군이 중일전쟁을 일으키자 장제스는 루산 회의를 소집, 국민당의 모든 인물들은 물론 주더, 저우언라이, 펑더화이를 비롯한 공산당의 여러 주요 인물들까지 초청하여 항일 전쟁을 선포하였다. 그리고, 홍군을 팔로군으로 편성하여 옌시산 휘하에서 일본에 맞서 싸우도록 지시했다. 이후 공산당은 전쟁 초반에 옌시산과 협력하여 핑싱관 전투 등에서 일본군을 수차례 격퇴하였으나 일본군이 옌시산의 영지인 산시 성을 공격하여 타이위안을 점령하고 옌시산도 산시 남방으로 밀려나자 공산당은 옌시산과의 협력을 중단하고 독자적인 활동에 나섰는데 이 독자적인 활동이란 다름아닌 세력확장이었다. 마오쩌둥은 일본과의 교전을 극도로 회피하는 것을 명령하는 한편, 해방구를 건설하여 홍군 지배영역을 늘리는데 치중했고 한 때 화북의 일본군 점령지 중에 일본군이 통제할 수 있는 지역이 10%까지 떨어지기도 했다.

문제는 이러한 행동들이 국민당과의 협정위반이었으며 엄연히 자신들이 상관으로 모시겠다고 자처한 국민당 상부의 모든 명령들을 무시한 처사였다. 이렇게 확장된 홍군 영역들은 대부분 국민당이 홍군에게 할당해줬던 영역 바깥이었다. 거기다가, 홍군은 국민당 유격대나 국민당 부대들을 필요에 따라 닥치는대로 습격해서 죽이기를 서슴지 않았다.

이 때문에 명목상 홍군의 상관인 옌시산은 물론이고 국민당 전체가 굉장히 열받았었고, 국민당 상부에서 수차례 "하라는 항일은 안하고 도대체 뭐하냐!" 라고 항의 전문을 보내기도 했지만 공산당은 그냥 씹어버렸다. 결국, 어그로가 오를 대로 오른 국민당과 공산당이 한번 대충돌했던 것이 환난 사변이었는데 이때 실질적으로 국공합작이 사실상 깨졌다고 보여지고 있다. 물론 명목상으론 계속 이어져왔지만....

물론, 공산당 내부에서도 왕밍 등은 국민당과 계속 협력하여 항일운동에 나서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으며 공산당도 중국인이니만큼 조국을 침략한 일본군을 보고 분개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 때문에, 펑더화이가 백단대전을 계획했을 때는 홍군 지휘관들이 앞을 다퉈서 자청했고 작전에 원래 포함되지 않은 부대들도 자발적으로 참가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백단대전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마오쩌둥은 백단대전이 전투를 회피하고 세력을 확장하는 자신의 방침에 어긋난다고 심히 못마땅해했으며 자칫 패배하기라도 했으면 기껏 모아놓은 세력이 모두 다 날아갈 판이었다고 화를 내는 바람에 그 이후론 공산당은 변변한 전투 기록을 찾을 수가 없게 된다.

2.3 제2차 국공내전 발발: 내전 재개

제2차 세계대전이 연합국의 승리로 끝난 후, 공산당과 국민당 정부간의 회담이 열리는데, 1945년 8월 화평교섭회담(和平交涉會談)이 개최되고 같은 해 10월 쌍십협정(雙十協定)을 발표, 정치의 민주화와 함께 독립적이고 자유로우며 부강한 중국을 위한다는 명분 아래 뜻을 같이하고 의견을 도출해내었다. 참고로 쌍십협정이란 十월(10월) 十일(10일)에 협정이 발표되었다고 해서 쌍십협정이다.

하지만, 이러한 협정이 이뤄지고 있는데도 국민당과 공산당 모두 일본군이 물러나고 무주공산이 된 영토를 차지하기 위한 논공행상과 치열한 싸움을 벌였고 이 과정에서 공산당은 옌시산을 공격하면서 무려 2만명 이상의 피해를 주기도 했다. 게다가, 이 쌍십협정에서도 양자 모두 상대방을 거꾸러뜨릴 궁리만 하고 있느라 국공합작이 이뤄진다면 필요한 실무적 협상이 거의 이뤄지지 않은 채 뜬구름이나 잡는 소리에만 합의가 이뤄졌고, 공산당은 화북 5개의 성과 독자적 군대 보유를 끝까지 고집함으로서 공산당 자신들의 세력이 국민당의 밑으로 들어갈 생각이 전혀 없음을 분명히 했다.

선빵을 날린 것은 500만에 이르는 대군과 미제 병기 및 압도적 해공군을 보유하고 구 일본군의 협력까지 받는 장제스의 국민당이었다. 장제스는 1946년 3월 미국 국무장관 마셜이 방문하여 정전협정을 주선하고 귀국하기가 무섭게 공격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이는 정치적으로도 전략적으로도 대실수로 협상을 주선했던 미국에게 빅엿을 먹임으로 국민당의 후원자인 미국을 분노하게 만들고 국공내전의 분수령이 되었던 미국의 정전명령이 내려지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국민당 지배 영역 내부의 철로와 각종 요충지를 장악한 공산당을 완전히 몰아내지도 않고 무리한 공격이 가해짐으로 안정되지 않은 후방을 짊어지고 싸우게 되었는데 그 결과는 만주에서 대패하고 난 뒤 항복과 투항 릴레이를 통해서 보여진다. 당시 해방군은 숫자는 100여만으로 크게 불어나긴 했지만 무기가 태부족이라 장제스가 작정하고 덤빌 시엔 불리한 상황이었는데 이 때 소련의 협조로 만주의 일본군 무기들을 대량으로 공여받아 무장을 몇 배로 강화했다. 물론 결정적으로 무장을 강화해줬던 것은 장제스의 파멸적인(...) 만주공세였지만...

어쨌거나, 초반에 국민당은 상당히 선전하면서 사평전투에서 공산군을 섬멸하였고 후쭝난은 산시의 옌안을, 바이충시는 만주를 맹공하여 창춘, 지린을 잇달아 점령하고 하얼빈까지 치고 올라갔다. 이에 6월 6일, 린뱌오가 하얼빈을 포기할 수밖에 없다고 상부에 건의하고 있었을 정도로 공산당에게 초기 상황은 좋지 않았다. 하지만, 공산당은 미국의 로비와 국민당이 정전협정을 어겼다고 하소연을 했고 이에 분노한 미국은 국민당에게 진격중지 명령을 내렸고 물주인 미국의 말을 어길 수가 없었던 장제스는 깨갱하면서 하는 수 없이 바이충시에게 정전 명령을 내렸다.

바이충시는 난징까지 날아와서 지금이 절호의 기회라고 했지만 장제스는 바이충시를 군정부장에 임명하여 내전에서 발을 빼도록 했다. 그리고, 미국이 벌어다준 이 소중한 시간동안 공산당은 전열을 가다듬고 다시 정비하면서 대책없이 자신의 영역 내부 깊숙히 들어온 국민당을 타도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만약, 장제스가 측근들의 말을 들어 국공내전을 재개하지 않고 산해관을 국경으로 삼아 전후 피해를 복구하고 전열을 정비하여 후방을 탄탄히 해놓은 다음에 중국 공산당을 쳤다면 가뜩이나 소련과 사이도 안 좋았던 공산당은 그냥 국민당에게 쓸리는 것 말곤 도리가 없었다.

2.4 공산당의 반격과 최후의 승리

2.4.1 인민해방군의 편제

국공내전과 더불어 8로군은 인민해방군으로 개칭하여 다음과 같은 편제를 갖추었다.

  • 서북 야전군 (제1야전군)- 펑더화이 사령관, 시중쉰[6] 정치장교
섬서성, 감숙성 방면
  • 중원 야전군 (제2야전군)- 류보청 사령관, 덩샤오핑 정치장교
산둥성, 허난성 방면
  • 화동 야전군(제3야전군) - 천이 사령관 (정치장교 겸직)
장강 이남 방면
  • 동북 야전군(제4야전군) - 린뱌오 사령관, 뤄룽환 정치장교
만주 방면
  • 화북 야전군 - 녜룽전 사령관, 보이보[7] 정치장교
산서성, 하북성 방면

참고로, 각 야전군 사령관들은 1955년 계급이 도입되었을 때 모두 원수 계급으로 진급한다.

2.4.2 요심전역

결국 공산당을 섬멸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친 국민당이 진격을 멈추고 딱 먹기 좋은 표적으로 전환되자 처음엔 정신없이 밀리던 해방군은 전열을 재정비하여 보급에 애로사항이 꽃피던 국민당군에 대한 총반격을 감행하기 시작하는데 여기서 장제스의 몰락이 시작되었다. 린뱌오는 1948년 봄부터 공세로 전환, 2월에 요양과 영구를 함락시켰고 3월 14일에 사평가, 3월 19일에 영길을 점령했다. 장제스는 국민당이 장악한 여러 요충지들을 절대로 포기할 수 없다는 방침을 거의 광신적으로 유지하면서 전략적 후퇴를 용납하지 않았고 장춘, 심양, 금주 3개 지구를 중심으로 방어한단 전략을 수립했다.

하지만 이는 결과적으로 50만이 넘는 국민당 군대가 공산당에게 포위되어 고립당하는 결과를 낳았다. 그리고 이 군대는 미군이 훈련시키고 미제 무기로 무장한 장제스의 최신식 정예부대와 중앙군 부대들이 섞인, 장제스의 핵심 전력들이었다. 장제스는 10월 8일 직접 심양으로 날아와서 전투를 독려하고 관내의 병력을 빼내어 증원을 시도했지만 공산군은 보급 부족에 시달리는 국민당 증원군을 어김없이 격파했고 장제스의 모든 행동은 자신의 목줄을 조이는 짓이었다.

1948년 10월 9일 인민해방군 동북야전군이 린뱌오의 지휘 하에 25만 명의 병력으로 1948년 9월 7일 금주를 공격해 점령했고 장춘도 완전히 포위되었다. 린뱌오는 장춘을 죽음의 도시로 만들 것을 지시, 장춘을 포위하여 굶겨 죽인다는 작전을 강구했고 10만명의 국민당군과 50만 장춘 시민들은 쫄쫄 굶다 16만명이 아사하는 참혹한 결과가 초래되었다. 결국 장제스는 장춘을 포기하고 포위망을 뚫어 심양으로 철수하란 지시를 내렸으나 장춘을 사수하던 국민당 60군 사령관 증택생이 반란을 일으킴으로 무산되었다. 반란을 일으키지 않았더라도 그럴 역량이 있었는지는 별개로 치더라도 말이다. 1948년 10월 17일 증택생의 반란에 이어 동북 지역의 소공 작전의 총책임자인 정동국 중장마저도 10월 21일에 공산당에 투항하면서 장춘은 완전히 공산당에 넘어갔고 해방군은 의기양양하게 장춘에 입성했다. 곧 이어 심양까지 함락됨에 따라 11월 즈음에 국민당은 만주에서 완전히 축출되었다. 린뱌오는 관내로 진출, 섭영진, 하룡과 합세하여 화북 공격에 가담했는데 요심전역이라 불리는 5개월 간의 전투 끝에 장제스는 만주는 물론 수십만의 정예병력과 막대한 물자를 잃었다. 이 와중에 장징궈가 야심차게 시도한 경제개혁마저 실패하면서 국민당은 더욱 나락으로 몰렸다.

하지만 해방군이 민심을 바탕으로 이겼다는 공산당 선전과 달리 홍군은 장춘에서 공산당은 국민당을 이기기 위해 수십만의 무고한 민간인의 죽음을 야기했고 장춘을 탈출하는 민간인들을 대대적으로 사살했다. 린뱌오조차도 그러한 상황을 견디지 못하고 마오쩌둥에게 전략의 수정을 요청하였으며 마오쩌둥이 침묵으로 일관하자 9월 11일 마오쩌둥의 허가 없이 장춘의 민간인들을 석방하라는 지시를 내렸으나 마오쩌둥은 이 명령을 취소시켰다. 또한 160만 명 이상의 노동자들이 강제로 징용되었고 80만명의 전투원 또한 징병되었다. 이러한 과정이 강압적이었음은 당연했고 공산당은 협조하지 않는 민간인들에 대해 잔혹하게 보복했다.

2.4.3 회해전역

다음은 제남전역에서 승리한 공산군의 서주 공략이었다. 공산군은 화동야전군과 중원야전군 소속 32개군 등 도합 60만 대군으로 공세에 돌입했다. 이에 맞선 국민당 군대도 60만이었지만 이들은 제남전역의 패배와 사기 낮은 군벌군들의 혼재로 인하여 불안정했다. 사령관 유치는 수세적인 전략을 추구했으나 59군과 77군의 반란으로 전선이 붕괴되기 시작했다. 덕분에 공산군은 서주의 핵심 교통로인 농해철도를 장악하고 황백도가 지휘하는 제7병단을 포위했다. 구정천의 2병단과 이미의 11병단이 구원하려 했으나 공산군에게 제지되었고 구정천은 황백도랑 사이도 나빴던지라 11월 22일에 있었던 7병단의 전멸과 황백도의 전사를 수수방관했다.(...) 상황이 이런 모양이니 일사분란한 공산군의 공세에 국민당이 제대로 대응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결국 7병단의 패배로 국민당군 18개 사단이 전멸했고 서주의 국민당군은 남북으로 갈려 고립되었다. 이 상황에서 장제스는 서주의 요충지 숙현을 탈환하여 진포철로를 다시 개통한 다음에 서주의 병력을 철수시켜 난징의 방어를 강화하려 했으나 공산군의 손바닥 위에 있었던 국민당군 12병단이 또 공산군의 공세에 포위되었다.[8] 결국 장제스는 두위밍에게 서주 포기를 명령했으나 마오쩌둥은 즉각 퇴각하는 두위밍을 습격, 두위밍 휘하 30만 병력을 포위해버렸다. 12월 15일 12병단이 전멸했고 17병단도 역시 전멸했다. 49년 1월 6일 총공세로 두위밍 역시 패배, 30만 병력이 증발했으며 두위밍은 1월 10일에 포로로 사로잡혀 전향하게 된다. 국민당은 이 전투에서 또 55만에 달하는 병력을 잃었다. 충격에 빠진 장제스는 하야하기에 이른다.

2.4.4 평진전역

당연하지만 승기를 잡은 마오쩌둥은 만주에서 만족하지 않고 즉각 남진을 개시했다. 이미 요심전역이 끝나기 전부터 산동 반도에 대한 공격이 시작되어 9월 23일 성도 제남이 공산군의 수중에 떨어졌고 1948년 11월부터 중원야전군이 회해전역에 돌입, 두위밍에 맞섰다. 두위밍은 홍군을 이기지 못하고 참패했고 이러한 패배의 배경엔 장제스의 무리한 간섭과 병크들이 있었다. 이어 평진 전역에서 국민당은 참패했고 압도적인 병력으로 베이징을 포위한 린뱌오군은 국민당군 수비사령관 푸줘이(부작의)를 설득시켜 무혈입성했다. (평진 전역) 장제스는 푸쭤이에게 독전편지를 보내는 등, 푸쭤이에게 사수할 것을 권했으나, 푸줘이는 공산당 당원이었던 딸의 설득으로 시를 공산당에 무혈로 넘겼다. 장제스는 중앙군이라도 빼려 했으나 푸쭤이의 비협조로 인해 그것도 실패하고 개빡쳤다.(...) 다만, 무혈로 넘기는 항복조건으로 공산당은 북경을 수비하던 국민당군이 철수할 수 있도록 포위망을 열어주었다. 이 덕분에 베이징 시내는 피해를 입지 않았다고 한다. 여담으로 항복 회담장에서 푸줘이가 한 말은 한마디, "나에겐 죄가 있습니다(我有罪)."였다고 한다(...) 항복을 결정한 뒤, 참으로 복잡한 심경에서 나온 말인듯 하다. 중국 공산당 정부도 이를 감안해서인지 이후 푸줘이는 중국의 수리부(水利部) 장관을 20년간 역임하는 등 편히 지낼 수 있도록 배려했다.

여하튼 베이징의 함락으로 홍군은 화북 일대를 확실하게 장악하게 된다. 어차피, 푸줘이가 북경에서 농성을 했던들, 보급이 단절되고 완전히 포위된 국민당 수비군이 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었으며, 북경의 여러가지 문화재들만 작살내고 홍군의 진격을 몇 주 늦췄을 뿐이며, 어차피 결과는 국민당이 완전히 참패하는 것은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국민당은 150만이 넘는 병력을 상실했다.

2.4.5 옌시산의 몰락

한편 산시의 옌시산은 40년 간 산시를 지배하며 사실상의 왕으로 군림하고 있었고 따라서 군벌들 중에 예외적으로 강력한 전투 의지와 국민당 중앙정부에 대한 충성을 바치고 있었다. 하지만 전투 의지와 전투 능력이 직결되는 것은 아니라서 이미 47년에 벌어진 일련의 전투 과정에서 옌시산은 공산군에 참패했고 베이핑이 함락되자 공산군의 정면공격에 노출되어 큰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48년 9월 28일 네룽전이 산시 침공을 개시했고 옌시산은 8만명의 병력으로 맞섰지만 잇달아 참패하고 포위되기에 이르렀다. 옌시산은 투항한 일본군과 후쭝난이 공수해준 지원군을 동원하여 치열하게 맞서 싸웠으나 패배했고 부하들이 반란을 일으키는 지경에 이르렀다.

하지만 옌시산은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라서 반란을 일으킨 부하들을 모조리 처형하고 공산당 간첩들도 모조리 색출해 목을 매달아버린 다음에 타이위안 전체를 폭파시킬 준비까지하는 악독한 각오로 치열하게 맞서싸웠다. 옌시산의 처절한 저항에 네룽전은 타이위안을 함락시키지 못했고 공산군의 초점이 베이핑 함락에 집중되면서 옌시산은 잠시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베이핑이 함락되자 옌시산은 엄청난 대공세에 직면하게 되었다. 물자도 병력도 부족했던 옌시산은 1949년 2월 난징으로 가서 리쭝런에게 지원을 요청했으나 리쭝런도 딱히 해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이 상황에서 공산군의 공세로 옌시산은 산시로 돌아가지 못했다. 옌시산의 부하 왕징궈는 공산군의 전향 제안을 거부하고 끝까지 맞섰으나 공산군의 대공세에 결국 무너지고 말았고 4월 24일 타이위안이 함락됨에 따라서 산시도 무너졌다. 이제 후쭝난, 바이충시 정도를 제외하면 국민당이 믿을 수 있는 병력은 없다시피 했다. 한편 난징에서 오도가도 못하게 된 옌시산은 행정원장 겸 국방장관에 임명되지만 결국 장제스를 따라 타이완으로 달아나는 처지가 된다.

2.4.6 장강 도하

이후 홍군은 계속 남진하면서 장강(양쯔강)에 이르게 되었다. 장강은 천연의 요새였기 때문에, 국민당군은 이를 경계로 중국을 남북으로 갈라 지배하려고 했다. 이종인(리쭝런)을 협상자로 내세워서 공산당과 협상을 벌였지만, 공산당이 이기고 있는 중(...)인데 이를 절대로 받아들일 리가 없겠지.

공산당은 먼저 전범(장제스)를 처벌(...)한 후에야 협상이 가능하다고 했는데 그건 국민당을 비롯한 장개석 측이 받아들일 수가 없는 조건이었다. 즉, 공산당도 처음부터 협상할 마음이 전혀 없었다는 것이다. 애초에 1920년대부터 일어난 연성자치운동(각 성에 광범위한 자치권을 주자는 운동)을 국민당이 탄압한 것도, 모택동이 이 운동을 내세워서 체력이 약하던 공산당을 일으켜 세운후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과 함께 중앙집권의 통일국가를 내세우며 용도폐기하고 주장자들을 반동으로 몰아간 것도 중국에는 하나의 통일국가만이 필요하다는 이념이 워낙 강했기 때문이었다. 두 세력이 각기 분할을 제의한 것은 코너에 몰렸을 때 위급해서 그런 것이고, 실제로는 시간을 벌기 위함이었다. 어쨌든 두 세력은 하늘아래 태양이 두 개가 아닌 것처럼 중국대륙에서도 절대로 양립할 수가 없다는 것은 명백했다.

공산당군의 도하작전이 시작되자 국민당군 일부가 배신하여 공산당으로 넘어가 역으로 아군에게 총을 돌리는 상황이 일어났고, 결국, 장강 방어선이 뚫리자 4월 23일 국민당군 정부가 있던 수도 난징이 완전히 함락되었고, 장제스가 집무하던 난징의 총통부에는 홍기가 내걸렸다. (장강 도하 작전)


천이페이(陈逸飞), 웨이징산(魏景山)의 《총통부 점령(占领总统府)》 유화. 1977년작. 찢겨나간(…) 청천백일만지홍기에 주목.

이후 공산군은 상하이로 진격했고, 장제스는 중국 경제의 중심지이자 최대 연안도시인 상하이를 사수하기 위해서 온갖 안간힘을 썼으나, 역시 간단히 함락되었다. 난징에서 참패하고 패주한 국민정부는 광저우로 퇴각했다가, 10월 14일 광저우마저 함락되자 중일전쟁 당시 임시수도였던 충칭으로 다시 퇴각하기에 이르렀고, 11월 말 경 공산당군이 충칭까지 진격해오자 재차 청두로 후퇴했다.

결국, 1949년 12월, 장제스는 군벌군 병력을 모조리 포기하고 살아남은 중앙군 50만명만 데리고 대만으로 도망갔다. 이를 국부천대라고 부른다. 그리고, 공산당은 대만 공격을 몇 차례 시도했지만 실패했고 이후 6.25 전쟁이 터지고 북한을 지원하게 되면서 어쩔 수 없이 자의반 타의반 포기하게 되었다.

한국사에도 국공내전의 의의는 크다. 공산당의 승리가 없었다면 이로 인해 자신감을 얻은 김일성6.25 전쟁을 일으킬 확률도 상당히 낮아졌을 것이다. 설령 국민당이 패망하지 않았더라도, 한국전쟁 쯤 국민당 정부와 중국 본토에서 대치했을 공산당이 팔로군을 비롯한 정예군을 한반도로 파견보내지는 않았을 것이다.[9] 다만, 이렇게 하자면 국민당군의 전력이 장제스의 중앙군 급은 되어야 하고 여기에 민심도 장제스 편이어야 하는데 이것 자체가 불가능한 시점에서 국공내전은 사실상 장제스의 패배와 다를 것이 별로 없었다고 봐야 된다.

3 장제스 정권의 한계와 공산당의 승리 원인

"이런 군대가 이긴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 미국 OSS(CIA의 전신) 보고서-[10]
"어디에도 오늘날 우리 당처럼 노후하고 퇴폐한 정당이 없다. 얼이 빠졌고, 기율도 없으며, 옳고 그른 기준조차 없다. 이 따위 당은 이미 오래 전에 부수어 쓸어버려야 했다." - 장제스

1948년 1월, 로이드 이스트먼의 "장제스는 왜 패하였는가"에서 재인용.출저

국공내전의 흥미로운 점은 승리자인 공산당은 물론이고, 패배자인 국민당에서조차도 참패의 원인과 문제점을 국민당 내부에서 찾는다는 것에 있다. 즉, 국민당은 처음부터 문제점을 해결하지 못하고 패배할 수 밖에 없는 전쟁을 했을 운명이었기 때문에 참패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장제스와 국민당이 중일전쟁에서 (지금까지 알려진 것보다) 적극적인 자세였던 것은 사실이고, 결과적으로 일본의 패망을 앞당긴 원동력임은 부인할 수가 없지만, 국공내전에서 패배한 것은 비열한 공산당이 뒤치기를 해서가 아니라[11] 온갖 병크로 인해 스스로 자멸했기 때문이다.

장제스의 난징정부는 내전이 일어난 상황에서 절대로 하지 말았어야 될 정책만 골라서 실행했기 때문에, 공산당의 근거지인 농촌뿐만 아니라 자기 본거지인 도시민의 신임과 지지조차도 완전히 잃어버렸고, 이런 잘못된 정책으로 인해서 경제가 붕괴해버리자 자신들의 군대인 국민당군의 사기마저 완전히 꺾어버려 폭락하게 되고 사단이나 군같이 대규모 부대단위로 투항이 발생하게 되면서 사실상 멸망하게 되었다.

국민당은 공산당군을 선제공격하면서 제2차 국공내전의 포문을 연 이후, 파죽지세로 진격하면서 공산당의 본거지인 옌안까지 단숨에 함락시켰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한대로 국민당은 이런 좋은 전략적 위치를 가지고도 승리를 거두지 못하고 있었으며 인민들의 지지를 완전히 잃어버린 채 자멸해 버렸다. 게다가, 대륙을 20여년간 통치하던 장제스는 진정한 민주주의자가 아니라 잔혹한 독재자였다.

대만 자료로 중국을 연구한 일리노이대 교수 로이드 이스트먼(Lloyd Eastman)의 "장제스는 왜 패하였는가"[12]은 이 문서에서 대표적인 떡밥거리가 되고 있다. 책 자체도 마오쩌둥이 잘해서가 아니라 국민당이 워낙 막장이고 장제스가 워낙 병신짓거리를 저질러서 참패했다고 결론을 내린 바가 있다. 한 마디로 패배할 쪽이 패배한 것이다. 국내에서는 이 자료를 서울대 故 민두기 동양 사학과 교수가 번역하였다. 민두기 교수는 일관되게 반공적인 입장에서 국민당의 몰락을 "안타까워" 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증주의적인 로이드의 저서를 높이 평가하고 이를 번역했다.

그나마, 장제스를 옹호할 수 있는 점은 내전 당시의 장제스는 군벌연합체의 지도자였기 때문에 중국에서 무슨 정책을 실시할 수 있을만한 위치도 아니었다. 각 성은 자체적으로 통화를 발행하고 경제가 통일되어있지 않았으며, 각 군벌들은 마치 춘추전국시대처럼 계속 내전(반장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장제스의 국민당이 시종일관 갖고 있었던 대표적 문제점으로는 위의 서술과 같은 것들이 있었다. 물론, 앞서서 설명된 것과 같이 중일전쟁 이전부터 누적되어온 고질적인 문제점들이며, 이를 해결하기 위해 필요한 개혁을 전혀 하지 않았거나 미루었기 때문에 당연히 패배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지금은 그럴 시기가 아니오

3.1 심각한 경제 파탄

장제스의 국민당 정권은 1930년대 초까지 각양각색의 은행들이 남발하는 화폐를 법정화폐로 통일하고, 은본위제를 폐지했으며, 상해 중심의 빠른 경제 성장이란 업적을 남겼다. 그러나, 중일전쟁 기간 도중에 무려 1936년 발행량의 100배에 달하는 화폐를 남발하는 바람에 화폐 가치가 종이보다 못할 수준의 경제파탄을 불러왔다.

덕분에 은본위제 폐지 이후 귀금속(주로 은이었다)을 화폐로 바꾼 사람들이 큰 피해를 보게 되었다. 이것을 교정하려고 했던 1940년대 후반의 금본위제 개혁조차도 실패함으로써 국민당은 사실상 경제적인 지지기반마저 완전히 무너진 셈이었다. 여기에 군납비리같은 부정부패가 더 심해졌으니 화폐개혁은 이들의 호주머니만을 체워주었다.

1940년대 후반의 화폐개혁은 이보다는 국공내전 전비로 인한 재정적자와 인플레이션를 화폐개혁으로 만회해보려고 노력한 것인데, 이 화폐개혁이 실패하는 바람에 인플레이션이 심화되면서 국민당의 지지기반인 양쯔강 삼각주의 중산층들이 재산을 모조리 날려버렸고, 결국 지지기반을 완전히 잃어버린 국민당은 이 곳에서도 그대로 패퇴하게 되었다.

3.2 답이 없는 부정부패

국민당 정권의 부정부패는 위아래부터 아주 심각했는데 그 중 윗물을 예를 들면 미국에서 국가예산으로 일본군과 공산당을 막으라고 국민당에 자금을 지원했다. 그러나, 지원금을 장제스의 가문(장씨)과 장제스의 선배 가문(진씨), 장제스의 부인 가문(송씨), 장제스의 동서의 가문(공씨)라는 4대가족이라 불렸는데 보이는 것처럼 장제스의 최측근들로 구성된 이들은 국민당의 실세들이 자금을 착복하면서 전쟁시에 쓸 지원자금을 제대로 써보지도 못하게 되었다. 나중에 미국으로 도피한 일부 4대가족에게 국가예산을 지원하고도 착복한 사실을 알게 된 미국 정부는 어이가 없어서 분노하며 돈을 다시 돌려줄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고 한다.

애초부처 국민당군은 가혹행위부정부패같이 군납비리가 손을 쓸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해서 징집된 신병 1/10이 비전투적 요인으로 사망할 정도로 막장스런 군대나 다름없었다. 뿐만 아니라, 국민당은 청방이나 삼합회같은 폭력조직과 손을 잡고 이들의 범죄를 비호하면서 이들의 정치깡패짓으로 반대파를 탄압하거나 막대한 뒷돈을 공급받고 있었다고 한다.

그가 지휘하던 국민당과 관련해 이런 일화가 있다. 로이드 이스트만의 '장제스는 왜 패했는가?'에서 나오는 유명한 대목이다.

때는 2차 국공내전. 국민당 장군으로 두율명(杜聿明)[13]이라는 자가 있었다.

어느 날, 두율명이 장개석을 찾았다.

"총통 각하, 아무개 장군은 공산당의 첩자인듯 합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가?"

"다른 장군들과 달리 청렴하기 때문입니다."

이에 장개석은 찔리는 구석이 있었는지 화를 벌컥 냈다.

하지만, 두율명의 말은 사실이었다.해당글 링크

그 외에도 미군이 국공내전에서 밀리고 있는 국민당군에게 약간이나마 무기를 지원해 주었는데, 국민당군의 장성들이 이것을 적군인 공산군에게 팔아먹을 정도였다면 이미 승부는 결정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당장, 저 위의 유화만 봐도 중앙에 있는 홍군이 소지한 무기가(...)

더구나 국민당의 극심한 부패로 인해 월급은 커녕, 식량도 제대로 배급받지 못한 국민당군 병사들은 굶주림을 이기지 못해 곳곳에서 약탈을 저지를 정도였고 부상병에게 줄 치료제도 색소를 탄 가짜(...) 약을 사용하는 바람에 많은 병사들이 가벼운 부상에도 치료를 받지 못해 죽어가면서 국민당군의 전력유지에 큰 차질을 주었다.

3.3 미국이 공산당에게 준 귀중한 시간: 조지 마셜의 중재

중일전쟁이 끝난 이후 다시 벌어진 내전에서 국민당군이 우세를 점하고 있었으나 미국의 조지마셜의 중재간섭으로 봄, 여름에 2차례에 걸쳐서 휴전이 선포됐다. 이 휴전은 공산군의 승리를 굳히는 데 상당한 도움을 줬다. 소련은 공산군에게 일본군이 만주에 두고 간 엄청난 물자들을 그대로 넘겨주면서 소총 70만정, 기관포 1만4000정 , 탱크 700대를 보유한 공산군은 국민당군과 맞서는 데 큰 도움을 받았다.

물론, 국민당군은 미국으로부터 훨씬 더 많은 지원을 받았으며 태평양 전쟁이 끝난 이후 남겨진 미군의 잉여무기들의 대부분은 국민당군에 지원되었다. 국민당군의 장성들 조차도 무기의 부족이 국공내전의 승패에 결정적 영향을 준 것은 아니라고 인정하고 있다고 로이드 이스트만 "장개석은 왜 패하였는가"에 언급되어있다. 다만, 장제스가 미국의 휴전요청을 따를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국민당의 장비나 운용비, 특히 유류가 모두 미국으로부터 나왔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었다. 만약에, 국민당이 미국의 중재안을 거부하고 닥공했다고 해도 미국의 지원이 끊겨버려서 오히려 더 빨리 참패했을 확률이 높았을 것이다.

4 의의

4.1 아시아 공산블록의 대확대

국공내전의 승리로 인해 중국 공산당이 중국대륙을 완전히 차지하고 주변국의 공산세력을 지원하게 되면서 아시아의 공산블록은 대대적으로 강화되었다.

이것이, 대표적으로 영향을 끼친 사례가 6.25 전쟁베트남 전쟁이었다. 결국, 6.25 전쟁이 벌어져서 휴전 이후 한반도가 어떻게 분단되었는지 잘 생각해보면 알 수 있다.

2차 국공내전 재개 이전 부터 한반도는 분할되어 38선이 그어진 상태였고, 김일성은 그 때부터 이미 무력통일을 꿈꾸고 있었는데 그 배후에는 중공보다 소련이 더욱 큰 영향력 행사를 했기 때문이다. 스탈린에게 김일성은 매번 남침을 주장하기 위해서 징징거렸으나 스탈린은 국공내전이 끝날 때까지 그 주장을 묵살했다. 한편, 북한은 소련이 기획했던 대로 중공을 통제하기 위해서 간도와 동만주~남만주 일대를 흡수하려고 했다. 이 사건 역시 북한에게는 체제대립에서 정통성을 과시하려고 무력통일을 기도할 명분이 되었다.

하지만, 국공내전에서 공산당이 승리하면서 이런 균형은 무너지게 되었다. 북한의 건국 주역들은 보천보 전투 등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중국 공산당과 깊은 연관을 맺고 있었으며 북한정부 수립 이후에도 국공내전 기간 중 대놓고 중국 공산당을 지원한 바가 있다. 그래서 국공내전을 통해서 조선인민군의 전투 경험은 더욱 풍부해졌고, 국공내전이 종식된 이후 중공군 출신의 164~166 3개 사단이 입북하게 되면서 1949년 5만에 불과했던 북한군의 숫자는 급격하게 늘어났다.

결국, 국공내전의 승리는 애치슨 라인 뒷편에 있는 남한을 침공하는데 전혀 두려울 것도 없는 무소불위의 상황처럼 인식했고 김일성이 자신감을 갖게 되면서 "나도 중국의 공산군처럼 남한을 무찌르고 충분히 적화통일 가능할 것 같은데?"라고 오판하도록 만들었다. 또한, 스탈린의 소련이 배후에서 김일성의 남침을 승인한 것도 역시 문제가 심각해질 경우 꿩먹고 알먹고 격으로 한반도에 병력을 투입할 수 있는 중화인민공화국의 존재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었다.

4.2 구 체제의 청산과 근대적 국민국가의 완성

한국과 중국 양국에서 모두 전쟁 이후로 구 체제가 완전히 청산되고, 근대적인 국민국가를 건국하게 되었다. 전쟁 초반 내전의 성격을 어느 정도 가미하고 있었던 6.25 전쟁이 최후에는 두 국가의 국민으로 확실하게 구분지었다는 것을 생각하자. 분단과 국민 국가를 완성시켰다. 이는 아시아에서 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1950년대부터 세대구분을 현대로 취급하는 이유이다.[14] 장개석 치하의 중국은 제대로 된 근대국가가 아니었다는 견해다.[15]

또한, 전쟁 이후 중소 국경과 중국과 조선(북한)의 국경이 "조중변계조약" 등으로 확립되면서 당시의 국경선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북한은 한때 소련의 지지로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던 간도를 포함한 만주 일부의 영유권을 더 이상 주장할 수 없었다. 한편, 백두산을 둘러싼 국경 문제는 중국이 주장한 석을수가 아닌 과거 대한제국의 토문감계사 이중하가 주장했던 홍토수를 따르게 되면서 기존의 국경선을 유지하게 되었다.

4.3 공산권 세력 판도의 변화

중국의 공산화는 결과적으로 공산권의 세력 판도 변화를 몰고 오게 된다.

공산화 초기의 중국은 일단 소련을 사회주의 혁명의 선배로서 존중을 해주긴 했지만, 1950년대 말에 들면 점차 중, 소 양국간의 갈등이 표면화되기에 이른다. 사실, 국력만 놓고 봐도 중국은 소련의 위성국으로 남아 있기에 너무나도 큰 나라였는데, 일단 국토 면적으로 따지면 소련이 다른 공산국가들의 국토를 합친 것보다 훨씬 컸지만 인구로 따지면 중국은 다른 공산국가의 인구를 합친 것보다 훨씬 더 많았다.

더욱이 2차 대전 이후 탄생된 공산정권 대부분이 소련에 의해 세워진 데 반해 중국은 비록 소련의 지원이 없진 않았지만 시종일관 중국 공산당의 주도로 혁명을 이루었기 때문에 크렘린의 노선을 일방적으로 추진하지 않았고 독자적인 노선을 추구할 수 있었다. 결국, 중국은 스스로 공산국가로 건국, 재탄생하고 이후 중-소 갈등이 본격화가 되면서 공산권의 세력 판도는 기존의 소련 1강 체제에서 중-소 양강구도의 체제로 바뀌게 되었다.

5 후일담 : 70년대까지 지속된 체제경쟁

국제연합 창설 당시부터 아시아에서 일본의 지위를 날려버리고[16] 5개 상임이사국 가운데 하나였던 중화민국의 국제적 위상은 당분간 유지되었다. 한국전쟁으로 미국이 적극적인 지원에 나섰기 때문이다. 진먼 포격전(금문도 포격전)이 이 때의 일이다. 중공 정부는 1971년 국제연합에서 대만 정부가 여러 회원국들의 압박에 자기 운명은 자기가 결정하겠다고 제발로 박차고 나가기 전까지는 미승인국으로 정통정부로 인정받지 못했다. 흔히 대만이 쫓겨났다고 표현하지만 사실이 아니다. 실제로 중화인민공화국을 정통으로 인정하자는 결의안이 통과되어 쫓겨나는 모양새이긴 했지만, 중화민국 정부는 상임이사국이므로 그런 결의안 따윈 씹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 결의안은 국제사회에서 중화민국이 설 자리가 좁아졌음을 입증하는 상징이었으며 미국에서도 중화민국의 UN 잔류를 지지하지 않음으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 이후 미중수교, 일중수교와 대만단교가 이뤄지면서 데탕트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일본의 국제사회 복귀가 달성된 1955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서 전쟁의 최대 피해국이자 승전국인 중국과 식민지배의 가장 큰 피해자였던 한국은 전혀 초청받지도 못했다. 두 나라 모두 내전의 재발발 가능성이 높은 가운데에서 UN이 인정한 정통정부와 공산정부가 따로 존립하고 있어서 대표성에 큰 문제가 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중국의 경우는 미국은 당연히 상임이사국인 중화민국을 초청하자고 주장했으나, 중공에게 홍콩이 위협을 받던 영국이 이를 반대하면서 결국 초청은 무산되었다. 이로서 일본은 중국, 한국과 따로 국교회복과 협상을 진행해야만 했다.

중화민국은 헌법 제1조로 내세우는 국시가 삼민주의이며 삼민주의에는 민주주의가 명시되어 있어서, 중화민국 체계에서 민주주의는 지극히 합당한 명분을 가지고 있고, 그 구체적인 시행방법 까지도 삼민주의에서 제안되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날 대만에 민주주의가 정착된 것도 대단히 점진적인 방식으로 "주어진" 것이다. 민주화 운동을 거친 한국이나 기타 국가들와 다른 점이다. 여기에는 장제스 일가가 무력으로 독재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2대 만에 사실상 단절(혼혈) 된데도 영향이 적지 않으며, 중공과의 대립 구도에서 일종의 체제 우월성을 근거로 주어진 측면도 있다는 견해도 있다.

그리고, 대만 장제스 정부의 계엄령은 1980년대까지 계속되었고 1980년대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대만에서 민주화를 주장하면 감옥에 갈 수 있을 정도였다. 또한, 선거도 보궐선거 내지 증원선거로 진행되었고 총선으로 진행되지 않을 지경이었던데다가 국민당 후보와 위성정당 2중대 후보, 무소속 후보만 출마했고 당외세력은 출마를 할 수 없었지만 장징궈 말기부터 점차 민주화 논의가 진척되더니, 리덩후이에 의해 국민대회와 입법원의 총선이 진행되었고, 대만의 국민당 1당 독재체제에서 다당제를 인정하고 민주체제를 인정하는 방향으로 전환이 완전히 완료된 시점은 1996년으로 상당히 오래걸렸다.

그리고, 민주진보당의 정권 교체와 뒤이은 국민당의 정권 탈환으로 제도상으로는 완전한 민주국가이다. 물론, 운용상으로 보면 한국과 같이 소모적인 정쟁이 그치지 않으며, 고위층의 고질적인 부패나 정치보복, 권력남용도 상당히 일어나고 있는데 제도는 정착되었지만, 민주적 마인드는 아직도 충분치 않은 듯 하다. 여기에 비하면, 중국은 건국초기부터 전체주의 국가였기 때문에 서구식 민주주의의 개념은 전혀 찾아보기 힘들지만, 여기서도 조금씩 민주화 운동이 고개를 들고 있으며, 언론자유도 점차 조금씩 늘어나는 추세다.

참고로, 1980년대 말까지만 해도 체제경쟁에서 중화민국이 확실히 우세한 것으로 보였으나 현재는 1980년대부터 규모를 이용한 엄청난 경제적으로 대성장을 이룬 중화인민공화국이 체제경쟁에서 딱히 열등하다고 보기는 힘들다. 참고로, 양쪽의 상호방문인원은 현재 각각 수백만명에 달하며 대만인이 대륙으로 가는 것은 1980년대 말부터 이미 별 문제가 없었다. 또한, 대륙인들의 대만 방문이나 관광도 2000년대부터 별 문제가 없다. 한국으로 비유하자면 한국인이 평양에 가는 것이 베이징이나 도쿄에 가는 것과 별 차이도 없고, 북한인도 자유롭게 서울을 왔다갔다 할 수 있는 수준이다. 아니, 방문이나 관광을 넘어서 체류하는 사람들도 상당히 많다. 2013년 기준으로 대만에 체류하는 중국 대륙(홍콩, 마카오 제외) 출신의 일시거주자는 241,455명, 영구거주자는 128,744명이다. 출처

대륙정부 중국은 자유가 제한된 1당 독재체제 국가이고, 대만이 자유민주주의 국가인 것은 사실이지만, 대륙인이 딱히 자유를 찾아서 대만으로 망명할만한 메리트도 없어졌으며 대만에서도 대륙인의 망명은 잘 받지 않으려고 하는 추세다. 대만은 한국에서 탈북자에 주는 포상금 같은 것을 1980년대 말에 모두 없애버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21세기에 들어선 지금에 와선 파워 밸런스가 완전히 역전되어, 다른것은 몰라도 군사력에선 이제 대만은 중국의 상대도 되지 않는 상황이다. 20세기때처럼 대륙회복은 전혀 꿈도 못 꾸고 방어에만 전념해도 부족한 상황이다. 뭐... 현대 중국이 국방비를 쇼미더머니(...) 수준으로 써대니까 상대가 될 리 있나?

6 여담

6.1 장제스의 국보 유물 사랑

여담이지만, 장개석의 국민당이 대만으로 도망갈 때 미국에게 수송선을 지원받아 그 중 5척에 북경 고궁박물원의 유물들을 '왕창' 털어서 대만의 국립고궁박물원으로 가져갔다. 당시 미군은 장개석이 국민들을 도피시킬줄알고 감격해서 기꺼이 수송선들을 빌려줬는데 나중에 국민이 아니라 문화재들이 실렸다는걸 알고 굉장히 빡쳤다 카더라 그래서 당시의 북경 고궁박물원에는 몇 가지 유물을 제외하고는 텅텅 비고 말았다. 이때 빼돌린 보물들은 대만에서 다른 나라 박물관에 '대여'해주고 있었다.

이 때 가져간 유물이 얼마나 방대하고 다양했는지, 60년동안 계속 유물을 바꿔가며 전시했음에도 단 한번도 중복된 것이 없었다고 한다.

그 뒤 중국에서 문화대혁명이라는 어마어마한 병크를 터뜨리면서 홍위병이 중국 전역의 문화재를 열심히 부수고 다닐동안, 다행히 중화민국이 가지고 있었던 문화재만큼은 그 화를 면할 수 있었다. 그렇게 해서 국립고궁박물원은 졸지에 중국 본토보다도 더 많은 중국 전통 유물을 보존하고 있는 명소가 되어버렸다(...)

6.2 조선인민군 참전 논란

근래에 비전공 모 블로거가 당시 북한 인민군이 국공내전에 대거 참전하였다는 주장을 불확실한 근거들을 들어 강변하다가 '진짜' 전쟁사 전공자에게 개쳐발린 일이 있었다. 사실, 이러한 주장은 연구자들마저 현혹시키는 감이 있는데 북한 전문가인 이종석이 다음과 같이 조목조목 반박한 바 있다. 관련 블로거가 강변한 이유는 좌파인 이종석의 주장이 맞지 않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이종석은 국내에서는 최초로 북한을 진지하게 연구한 학자이며 노무현 정부에서 통일부 장관을 역임했다. 특히, 논쟁 중에 이종석의 의견을 들고 온 유저들에 대해서 인신공격을 좀 심하게 했다. 비슷한 사례로 이런 것도 존재한다. [1]

  • 조선인민군 병력이 만주에 대거 파견되었다고 하는 1946~7년은 소군정기였는데, 당시 소련은 중국공산당 지원에 매우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 대규모의 병력 지원이 있었다고 한다면 어떤 식으로든 이 문제를 놓고 국민당/미국 측과 북한/소련 간의 갈등 양상이 빚어졌을 텐데 실제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 국공내전에 관한 중국 내의 어떠한 저작물이나 증언에도 북한군의 대거 참전을 암시하는 내용을 찾아볼 수 없다.
  • 북한 측에서도 공식적으로 이러한 사실을 인정한 바 없다. (이종석, 《북한-중국 관계: 1945~2000》(중심, 2000), 69~74쪽.)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그런 일이 실제로 있었는데 그토록 흔적이 남지 않는다거나 북한이나 중국 측에서 꼭꼭 숨겨야할 이유가 없으니, 그저 이러한 설은 떡밥 정도로 생각하고 넘기는 것이 현명하다.

북한측이 국공내전에서 중국공산당을 지원한 것으로 밝혀진 것은 병력제공이 아니라 중국공산당 간부의 가족들을 피난시켜준 것과 만주지역에서 국민당군에 쫓기던 홍군이 북한지역을 통과하여 안전히 이동할 수 있도록 도와준 것이다. 국공내전의 전세역전이 만주전역에서 시작되었으므로, 중국 공산당 측으로서는 북한에 고마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고 이런 고마움은 후에 한국전쟁에 개입한 것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물론, 브루스 커밍스 교수에 의하면 실제로 8.15 광복 직후 북한에 들어오려던 8로군소속 조선의용군[17]이 소련군에 의해 설득되어 국공내전에 참전한 사례는 있다. 하지만, 이들은 이 시점에서는 절대 조선인민군이 아니었으며 당시의 남한 지역에서는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에서 나온 것과 같이 마치 중국계 군사력을 소련계가 막은 공산당의 주도권 다툼으로 선전되었으나 실제로는 국공내전에서 공산당이 밀리고 있었기 때문에 소련 측이 이들을 설득시켜 참전하도록 한 것이다. 이들은 인민해방군 내에서도 정예부대였으며 어려운 임무에 우선적으로 투입되었다.

이렇게 소련의 설득으로 국공내전에 참전한 조선인으로 구성된 인민해방군의 사단이 한국전쟁 전에 북한군으로 전환된 일이 있다. 당시 그 사단에 몸담고 있었던 사람들에 증언에 의하면 상부에서 별말 설명없이 부대가 이동한다고 해서 기차에 탔고, 자다가 깨어 도착한 곳을 보니 북한땅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내리자마자 바로 인민군 군복으로 갈아입으라는 명령을 들어서 그제서야 인민군에 편입된 사실을 깨달았다고 한다.

한국전쟁에서 북한군 정예사단으로 남침의 선봉이었던 4사단과 6사단이 바로 그런 식으로 전환된 사단이다. 이 사건은 1949년 말에서 1950년 한국전쟁 전까지 발생한 일이다. 그 외의 사단에도 일정수의 전직 홍군이 있었다. 이들은 풍부한 실전경험을 가지고 있었기때문에 6.25 전쟁 초기에 맹활약을 했다. 대전에서 미군 24사단을 패퇴시키고 딘 소장을 포로로 잡은 부대가 바로 이들 부대였다. 제4사단장 이권무와 제6사단장 방호산은 모두 인민해방군 출신이다.

간단히 말하면 중국인민해방군 -> 인민군 테크를 탄 것이지, 인민군 -> 중국군 테크가 아니라는 말이다. 한 마디로 위의 모 블로거가 한 주장은 앞뒤를 착각한 주장이라고 보면 된다.

참고로, 코민테른의 1국 1당 원칙. 즉, "한나라에는 국적과 민족 불문하고 한개의 공산당만을 인정한다"라는 원칙에 따라 1930년대 중국 본토에서 활동하던 많은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이 대거 중국 공산당에 입당해서 일본군과 맞서싸웠다. 비록, 소속은 중국 공산당이었지만 항일독립운동의 일환으로 생각한 것이다. 중일전쟁과 국공내전에서 활약한 이후 중국과 북한 수뇌부의 합의에 따라 1945년 8.15 해방 이후 북한으로 귀국해서 인민군의 주축이 된다. 그리고, 2군단장 김무정을 위시한 이들 홍군 출신들은 풍부한 실전경험을 바탕으로 6.25 전쟁에서 맹활약한다.

그러나, 전후 김무정을 위시한 이권무, 방호산 등의 중국 홍군 출신 장교들은 김일성에 의해 대부분 숙청당하고, 이상조 같은 일부는 소련으로 망명을 한다. 익숙한 중국이 아니라 소련으로 망명한 이유는 당시 중국-북한은 혈맹관계였기 때문에 중국으로 망명하면 다시 북으로 송환될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윤봉길 의사의 의거에 감동한 장제스가 적극적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했던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장제스는 한반도 독립 이후 거기에 친중위성정부를 두면서 한반도를 자신의 영향력과 세력하에 두려던 것이 본 목적이었고, 실제로는 임시정부가 광복군을 창설하자 미국이 지원해주기 전까지 임시정부가 군장비 구입, 한국청년모집, 첩보활동 같은 항일 무력투쟁에 지속적인 패널티를 걸었다.

6.3 활약을 한 일본군 97식 전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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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식 전차 치하가 전차로서 제대로 대활약(!)했던 전쟁이기도 하다. 중일전쟁이 종결된 후 상당수의 일본군 전차가 중국군에게 노획된 상태에서 셔먼은 고사하고 스튜어트 경전차조차 지나가지 못하는 도로를 치하는 잘만 이용하여 기동전을 수행했다. 그 당시 중국의 열악했던 도로망 때문에 벌어진 일. 이 때문에 권총탄에 장갑이 뚫리는 94식 경장갑차 같이 장갑차에 넣기도 힘들 정도의 경장갑차량이 활약할 정도다. 덕분에 희한하게도 일부 중국밀덕들은 치하에 대해서 국공내전 한정이라는 전제하에서 "치하 전차는 의외로 쓸만했다."라고 평가한다.

원래 일본군 전차라는 것이 제1차대전의 전차와 같이 보병지원용의 컨셉으로 제작된 것이라서 국공내전과 같이 화력이라는 것이 기껏해야 드럼통으로 만들어낸 조잡한 박격포비뢰포정도였던 보병전쟁에서는 물고기가 물을 만난 셈이었다. 물론 국민당에겐 미국에게서 받은 셔먼과 스튜어트가 있었지만, 그것을 상대로 이겼다는 것은 대단한 것이다. 무기는 성능보다는 누가 쓰느냐가 중요하다는걸 여실 없이 보여주는 예라고 하겠다.국민당도 치하를 꽤나 사용했다 한다. 근데 공산당은 1950년대까지 이 장비를 굴렸다는 것이 함정이다 훈련을 제대로 안해서 씨뻘건 승무원 숙련도 VS 그나마 익숙한 전차

7 대중문화에서 다뤄지는 국공내전

한국에 알려진 영화로는 '집결호'가 있다. 중국 공산당의 창업과정이기 때문에 중국대륙 현지에서는 굉장히 많은 영화가 제작되었다. 중국판 용비어천가?

1990년에 만들어진 대결전(大決戰)이라는 3부작 영화가 있는데, 이것은 위에 제4기를 다루고 있다. 또한 2009년 개봉한 '건국대업(建國大業)'이 있다. 이 작품은 1945-1949년의 국공내전을 묘사하고 있는데 보다보면 중국영화와 드라마에서 익숙한 얼굴들이 수도 없이 많이 나온다. 건국 60주년을 기념해서 중국 정부가 그야말로 연예계스타들을 총동원해서 만든 자뻑스런 배달의 기수 선전 영화다.

그 밖에 국공내전을 다룬 유명한 소설로는 왕람(王藍) 이라는 작가가 1958년에 발표한 <람여흑(藍與黑)> 이라는 장편소설이 있다. 해당 소설은 1966년 홍콩 쇼브라더스에서 영화화를 하였고, 홍콩과 대만에서 여러 차례 드라마화가 진행되기도 해서 더욱 유명한 소설이다.

소설은 중일전쟁에서 부터 국공내전을 시대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애국청년인 주인공 장성아가 중일전쟁과 국공내전이라는 난세의 풍운 속에 겪었던 여러가지 일들과 모험, 그리고 주인공 장성아가 열렬히 사랑했었던 두 여인 당기와 정미장과의 이뤄질 수 없는 슬픈 사랑은 무슨 페이크 에 대해 다루고 있다.

소설의 제목 람여흑, 그러니까 남(藍)과 흑(黑)에서 남은 광명, 자유, 희망, 사랑, 평화를 심볼로 하였고, 흑은 암흑, 타락, 죄악, 폭력, 절망을 심볼로 하였는데, 작가는 서로 대립 되는 환경과 성격을 가진 두 여인 당기와 정미장을 각각 남과 흑으로 형상화하였다.

작가이자 화가인 왕람은 중일전쟁에 직접 참전했었으며, 그와 같이 참전하였던 그의 친구는 전쟁 도중에 전사 했다고 한다. 전쟁 이후 왕람은 자신이 겪은 전쟁을 소재로 여러 편의 소설을 썼는데, 이 소설 <람여흑>은 그의 소설들 중에서도 가장 훌륭한 걸작이며, 대만과 홍콩에서 드라마화, 영화화 되기도 하였다. 국내에서도 1967년 삼일각에서 상과 하, 두 권으로 번역 출판 되었었다.

번역의 퀄러티는 대체적으로 우수한 편이지만, 세로본이라 가독성이 떨어진다는게 옥의 티....그리고 출판 년도가 오래된 만큼 절판이 되었고, 헌책방에서 구하기도 쉽지 않다.

중일전쟁과 국공내전에 대해서도 생생하게 자세히 표현 되었는데, 이 시기의 정세가 매우 상세히 몰입감 있게 자세히 잘 설명 되었기 때문에, 이 시기 중국에 대한 아무런 사전 배경지식이 없이도 충분히 몰입하면서 읽을 수 있다. 또한, 이 시대 여러 계층의 중국인들의 생활상에 대해서도 고증이 잘 된 편이다.

다만, 소설이 발표된 시기가 시기인 만큼 이 소설은 지나칠 정도로 반공에 집착하면서 공산당 을 완전히 천하의 개쌍놈들, 악의 축으로 표현한게 약간의 옥의 티라 할 수 있는데, 물론 소설에 표현된 공산당의 악행들, 예를 들어 중일전쟁 당시의 팔로군의 만행이라던지, 이런 내용들은 대부분이 거의가 다 실제 사실에 기반한 내용들이긴 하지만(...) 국공내전의 경우 국민당의 시점에서 너무 편향되게 서술이 되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가 없다.

7.1 대체역사 속의 국공내전

7.1.1 중화민국의 승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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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민국의 장제스(장개석)가 국공내전에서 승리해 중국을 통일을 한 상태를 가정한 천안문 광장 합성사진. 구호 간판 부분이 중화민국만세(中華民國萬歲)와 세계화평만세(世界和平萬歲)로 되어있으며 초상화 속 인물이 마오쩌둥이 아닌 쑨원으로 되어있다.[18]

천안문에 게양된 국기도 오성홍기가 아닌 청천백일만지홍기로 되어 있다[19]. 구글에서 "中華民國 天安門"이라고 검색 후 사진을 보면 그런 사진을 볼 수 있다.

대체역사 가정 에세이집 만약에(what if?) 1권의 마지막 챕터는 미국의 요청대로 장제스가 만주를 남겨놓은 상태에서 1947년 국공내전 휴전에 동의했을 때를 가정한다. 즉, 실제 역사의 남북한처럼 마오쩌둥대약진운동 - 문화대혁명이란 잃어버린 10년(어쩌면 20년)의 대 삽질 없이, 즉 덩샤오핑의 개방이 필요없이 중국(중화민국)은 빠른 속도의 경제성장을 이뤘을 것이라는 가정이다. 당장 문화대혁명과 같은 개삽질이 벌어지지 않는 것만 해도 중국사, 아니 인류사에 있어서 얼마나 큰 쾌거(!)인가? 참고로 한일양국은 반공의 전진기지로서 미국의 막대한 원조를 받을 가능성이 없어지면서 경제발전을 아마도 이루지 못했을 것이라는 가설이 있는데 역사가 달리 진행된 이상 확인할 수 없는 가설이다.

제1차 국공내전에서 일본한테 망하든 말든 장제스가 공산군의 씨를 말려버렸다면 공산군은 아예 사라졌거나, 재건하더라도 상당한 시간이 걸렸을 가능성이 높다. 이 가정을 적용한 경우가 복거일비명을 찾아서이다. 여기서는 1935년 옌안에서 마오쩌둥, 저우언라이, 주더를 포함한 마지막 공산군 부대가 모두 국민당군에게 사살(...)됨에 따라 제1차 국공내전이 종결되었다. 그러나 공산군은 국민당의 실정과 굴욕 외교 덕택에 유리한 재기 조건을 갖춘 뒤, 류사오치펑더화이1950년 11월 신장에서 '신장 소비에트'를 결성하여 감숙성 등으로 세력을 확장하면서 1953년 4월에 제2차 국공내전이 벌어졌다. 실제 역사에서처럼 국민당은 개털려서 베이징과 톈진을 잃었고, 1956년 2월 중화인민공화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그러나 산동성의 교주만과 관동주, 만주국을 영유하고 있던 일본 제국이 "황하 남쪽에서도 전쟁하면 우리도 참전함!"이라고 위협(소위 '도조 선언')하자 결국 공산군이 협상에 응하면서 마침내 그해 7월 6일 하남성(허난성) 정주(정저우)에서 황하를 경계로 한 휴전협정이 맺어졌다. 그리하여 소설의 배경인 1987년 현재 중국 대륙은 황하 남쪽의 중화민국, 황하 북쪽의 중화인민공화국, 요하 동쪽의 만주국, 이렇게 신나는 삼국지 3국으로 분단되어 있으며, 중공의 통일 정책 및 만주국과 중화민국에서 전개되는 학생 운동권의 통일운동이 지속되면서 대륙 통일을 향한 열망이 뜨거워지고 있다.

그 외의 대체역사물은 스탈린의 편지 정도이다. 그렇게 메이저한 소재는 아닌 것이다. 하지만, 중화민국/역사장제스 항목 등에서 보듯이 관련 역덕들에게는 영원한 떡밥거리가 되고 있다.

이는 국민당 옹호 측에서는 홍군의 "건국신화"가 서방의 우호적인 진보적 역사가들에 의해 멋대로 대중에 유포되어버렸다는 시각을, 공산당 옹호 측에서는 무능한 장제스를 이념적으로 복구하려는 소수의 무리수라는 시각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 논쟁거리는 과거 베트남 전쟁68운동 이후 문화대혁명대약진운동까지 옹호했던 진보 역사가들의 전력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덤으로 역시 이념전쟁을 치렀고 분단상태인 남북한의 체제경쟁 문제까지 고려하면 그야말로 헬게이트를 볼 수 있다. 일단 주류 학계에선 70년대 이후로 중국에 대한 시각이 대격변을 겪게 되면서 중일전쟁 당시 국민당의 활약이나 장제스의 능력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한게 없다는 과거의 시각에서보다 진일보하여 장제스의 난징 정부 기간(1927~1937)을 황금의 10년이란 표현까지 나오는 수준이다. 이 기간의 눈부신 경제성장은 장제스 비판론자의 대표격인 로이드 이스트만까지 인정하는 편이다.

결국, 중국의 공산화를 저지하는 것 자체가 세계사에 미쳤을 영향, 특히 바로 옆의 한국사에 미쳤을 영향도 어마어마했겠지만 그 파급력을 예측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중국의 승리와 공산권의 축소 자체로도 세계사 전반이 새로 쓰여지기 때문에 섣불리 어떻게 되었을 것이라고 가정하는 자체가 떡밥거리에 불과한 것이다.

1947년 당시 장제스는 휴전을 절대 거부했었다. 베이핑의 코앞에, 또 다른 공산정권이 버티고 서 있는 꼬라지를 용인한다는 것이 전혀 다른 문제였던 것이다. 당시의 중국 국내의 정치 지도자들이 공유하는 이념은 중국대륙에는 오직 하나의 국가만이 필요하다는 통일국가론이었다. 이런 이념은 춘추전국시대에 형성되면서 천하통일이 희대의 과업이라고 여겼고 반드시 이뤄내야 할 지상과제 레벨로 굳어진 상태라 한족들은 좌우의 이념차이를 막론하고 평균적으로 유럽인들처럼 대륙의 분열을 긍정적으로 보는 것조차 백안시하고 있다.

그리고 장제스의 무리한 만주침공을 시작으로, 국공내전은 분수령을 맞았다.

7.1.2 한국 전쟁처럼 국공내전이 무승부로 끝났다면? 남북분단이 될 경우

국공내전이 무승부로 끝난다면 다음과 같은 시나리오가 펼쳐질 것이다.

  • 황하 강,회하,장강을 경계로 남북한처럼 분단된다.
  • 과거 오호십육국시대삼국시대, 남북조 시대, 남송-금나라 때 이미 비슷한 사례가 있다.
  •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도는 베이징, 중화민국의 수도는 난징이 된다.
  • 어쩌면 분단되지 않고 국민당(여당)과 공산당(야당)이 공존하는 양당제 국가가 될 가능성도 있다.[20]
  • 남중과 외교를 맺은 나라에서 중국어를 배울때 정체자로 배우게 된다[21]
  • 국제적으로 중화인민공화국은 중공, "북중"(North China), 중화민국은 민국, 자유중국, "남중"(South China)으로 불릴 것이다.
  • 국공내전보다는 중국전쟁이라 불릴 것이다.
  • 남중이 일제시대때 일본 제국타이완에 남겨둔 기술을 활용하여 경제 발전을 할 가능성이 있다.
  • 다만 소수 민족 탄압은 남북이 똑같이 벌일 것이다.
  • 하나의 중국 개념이 시기가 지날수록 더욱 강화되어 상호충돌 가능성이 높아질 수 있다.
  • 남중, 남한, 일본, 미국 VS 북중, 북한, 몽골, 소련으로 치열한 대립관계가 될 수도 있다.[22]
  • 한국 전쟁 보다는 "제 2의 중국 전쟁"이 일어나고 거대한 중국의 특성상 제3차 세계대전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23]

7.1.3 기타 대체역사

그 외의 떡밥 소재로 중화민국이 대만이 아니라 중국 본토의 사천성으로 본진을 옮겼다면? 전한한고제 또는 촉한소열황제 따라하기? 김일성한국전쟁 개시를 1~2년 연기하거나 개전 1~2개월 내에 손쉽게 적화통일을 달성하여 앙대!!!

중국 인민해방군이 한반도에 투입되지 않고 예정대로 대만 상륙을 개시했다면? 혹은 한국전쟁 당시 맥아더의 구상대로 중국 본토에 전면 공격을 개시하고 대만의 국부군을 중국 동남 해안에 상륙시켜 제2전선을 구축했다면? 등등이 있다.

8 국공내전과 초한대전

일부 역덕계를 비롯해 중국사에 관심이 많은 이들은 이 국공내전을 현대판 초한지로 부르기도 한다. 실제로 국공내전과 초한대전 여러 인물이 너무나 비슷하게 대칭되는데, 마오쩌둥한고제처럼 초반 약세에도 불구하고 결국 천하를 손에 넣었고,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하고도 패한 항우처럼 장제스는 500만대군을 보유하고서도 결국 패해서 대만으로 쫓겨나고 만다. 한나라 초반에 한신이나 팽월, 영포 같은 일등 공신에 대한 숙청이 벌어진 것처럼 중화인민공화국에서도 최고의 공신이었던 펑더화이린뱌오는 숙청되었으며, 고조가 늙은 후 왕비인 여후가 실권을 장악한 것처럼 마오가 병석에 눕자 마오의 부인인 장칭이 실권을 장악하였다.

국공내전초한지
마오쩌둥유방초반 약세, 후반 역전, 말기 공신숙청
장제스항우강력한 군사력과 자원, 그러나 민심상실로 패퇴
펑더화이한신군사적 천재, 후에 숙청
바이충시범증천재군사, 그러나 항우(장제스)의 의심을 사서 한직
린뱌오영포[24]군사적 천재, 후에 반역을 도모했으나 실패하여 사망
주더조참군사적 천재, 숙청에서 생존[25]
저우언라이소하 또는 장량후방에서 활약, 2인자, 숙청에서 생존
덩샤오핑진평공신,수차 실각, 재기, 4인방(여씨일가) 축출, 권력장악
리쭝런계포항우(장제스)쪽의 인물이었으나, 전쟁이후 유방(마오쩌둥)쪽으로 귀화 후 요직을 차지.

해설하면 진나라가 존재하는 동안은 유방과 항우는 형식적으로나마 협력 관계에 있었는데, 이는 국민당과 공산당 역시 일본의 패망 이전까지는 공식적으로는 동맹 관계에 있었다는 점과 유사하다. 그리고, 진나라 멸망으로부터 유방이 항우를 제압하기까지 걸린 시간이 4년인데(B.C. 206-202), 이는 일제 패망 후 공산당이 중국 대륙에서 국민당을 몰아내는데 걸린 시간과 같다(1946-1950). 초한지에서 항우가 진나라의 수도였던 함양을 포함한 노른자위 땅을 확보한 상태에서 유방이 깡촌인 촉한의 산악지대를 근거로 세력을 키워나갔었는데, 국공내전 당시의 공산당 역시 대도시 대신 농촌을 기반으로 세력을 확대해나갔다는 점에서 큰 유사성이 있다.

거기에다가, 유방과 마찬가지로 마오쩌둥도 중일전쟁에서 한 때 형식상으로는 장제스군에 복속되어 있었고, 제2차 국공내전에서도 계속 마오쩌둥이 쫓기다가 한신이 지휘한 해하성 싸움에서처럼 만주결전(요심전역)에서 린뱌오군이 장제스 주력을 섬멸함으로서 그 다음에 전세를 완전히 역전해 뒤집고 얼마 안가서 천하를 완전히 장악했다는 것도 놀랄만큼 유사하다.

일부에서는 삼국지를 가져와서 모택동을 조조에, 저우언라이를 순욱(때때로는 현대판 제갈량)에, 장제스를 원소에, 바이충시를 저수전풍에 비견하기도 한다. 이는 조조를 극찬한 마오쩌둥 자신에 따른 것 .그리고 모택동은 시간이 흘러 조조보다 더 크나큰 병크를 저지르게 되는데...?

9 참고문헌

  • 중화민국과 공산혁명, 신승하, 대명출판사
  • 장개석 vs 모택동, 이건일, 도서출판 삼화
  • 중국지 하 대란대치편, 현이섭, 인카운터
  • 중국혁명사, 서진영, 한울아카데미
  • 마오,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들 상, 장융, 존 핼리데이, 까치
  • 장제스 평전, 조너선 펜비, 민음사
  • 장개석은 왜 패했는가, 로이드 이스트만, 지식산업사
  • 마오쩌둥 평전, 로스 테릴, 이룸
  • 해방의 비극, 프랑크 디쾨터, 열린 책들
  • 욱이님의 국공내전 연재 시리즈
  1. 중국 내륙에서 국부군 잔당처리는 1950년 즈음에 끝났다.
  2. 본 내전은 중국 공산당vs중국 국민당이지만 '중국'의 지위를 놓고 다툰 두 나라(중화민국 vs 중화인민공화국)의 내전과 같기에 교전국으로 표기함.
  3. 단 공산당으로 전향한 것은 국공내전이 끝나고 나서였다.
  4.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중화민국이 멸망하고 중국 국민당이 대만으로 망명했다고 하고 있다.
  5. 장쉐량의 동북군벌은 동북역치이후 형식적으로는 장제스의 중화민국 정부의 통치에 들어갔지만, 하지만 실제적으론 독자적인 행정체계와 군사력을 보유하고 만주와 베이징 일대를 지배하던 독립 군벌로 장쉐량은 만주의 이었다. 하지만 만주사변으로 본거지를 모두 잃고 잔존병력 일부만 데리고 산시성으로 도망와서 눈치밥만 먹는 신세로 전락했다. 전같으면 장제스의 명령따위는 씹어버렸겠지만, 이때는 시키는 대로 할 수 밖에 없는 상황.
  6. 시진핑 현 중국 주석의 아버지이다
  7. 유명한 보시라이의 아버지이다
  8. 공산군을 추격하다가 함정에 빠졌다고 생각했다고 퇴각하려는 순간 습격을 당했다.
  9. 국민당이 본토에서 완전히 철수한 건 1949년 12월 10일이다. 그리고 잘 알다시피 한국전쟁은 1950년 6월 25일이다.
  10. 미국 공화당과 자유주의자들이 자비로 셔먼탱크를 4대를 구입 국민당을 지원해 주었는데 인수받은 다음 날 그 셔먼탱크는 공산군이 몰고 있었다. 그 이유는 국민당의 장군들이 지원받은 탱크를 받자마자 공산군에게 팔아먹는 군납비리를 저질렀기 때문이다. 이 보고서를 받은 트루먼은 국민당에 대한 모든 지원을 취소하였다.
  11. 따지고 보면 중일전쟁 종결 이후 국민당군이 먼저 공산당군을 선제공격하는 짓을 했다.
  12. 원제-Seeds of Destruction: Nationalist China in War and Revolution.
  13. 중국군 최초의 기갑사단을 이끌면서 중부 전선에서 혁혁한 성과를 거두었으며, 그의 병력교환비율은 중국과 일본이 2 : 1수준이었다. 얼마 안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겠지만, 당시 타 지역의 교환비가 5(최대 10) : 1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그가 정예군대를 이끈다고 쳐도 꽤나 괜찮은 인물이다. 이후에 버마 전선에서도 참여했으나, 영국의 비협조로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그가 무능한 인물이라고 평가절하 받는 것은 미국 고문이 악의적으로 중국 국민당을 폄하했기 때문이다.
  14. 일부 철학, 미학 사조에서 그런 견해가 강하다. 유럽으로 따지면 68운동, 미국을 따지면 베트남 전쟁과 반전운동이 "포스트 모던"의 기점인 셈인데, 중국은 적어도 "모던"까지는 왔다는 것. 반면 한국의 경우는 "포스트 모던"을 논하기에 부적절하다라는 견해가 컸는데, 90년대 말 포스트 모던 논쟁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소련, 중국, 한국 등의 비 서구 주변국이 "근대"의 단계를 거치고 온 것은 사실이나, 진정한 의미의 근대였는지, 또 "근대적 인간상"을 이뤄냈는지에 대해서는 하도 논란이 많다. 문화대혁명이나 천안문 6.4 항쟁을 생각해보자. 당장에 한국만 해도 1980년대까지는 북한은 식민잔재를 몰아내고 근대국가를 완성했으나 남한은 근대국가가 아닌 "식민지 반봉건" 아니면 "식민지 국가독점자본주의"라는 식의 이념적 논쟁이 횡횡했으며, 1988년 서울올림픽을 지나고 나서야 "식민지 남한"의 논리가 패배하면서 어느 정도 종결이 되었다. 흥미롭게도 남한이 아직 준식민지 상황이란 이론을 비약하여 소설소재로 활용한 경우 역시 <비명을 찾아서>이다(...)
  15. 국민당군 장교를 하다가 (패망이전) 미국으로 유학해 하버드대의 중국사 교수를 한 황런위(레이 황, 1918~2000)의 "허드슨강에서 중국역사를 말하다"에서도 그런 견해가 나온다는 말도 있다. 그의 "장제스 일기를 읽다"의 경우는 장제스에 대한 우호적인 시각을 반영하고 있다.
  16. 국제연맹(LN) 당시에는 일본제국이 상임이사국이었다는 것을 상기하자.
  17. 원래는 수백명 단위였으나, 만주지역으로 이동하면서 많은 조선인 청년들이 가담하여 수가 사단급으로 늘어났다.
  18. 실제로 중일전쟁 직후에 천안문에는 장개석의 사진이 오늘날의 마오쩌둥보다 더 크게 걸려있었다.
    755px-Chiang_KaiShek_Portrait_Tiananmen_Beijing.jpg
  19. 따지고 보면 고증오류. 현재 천안문에 게양되어 있는 깃발은 중화인민공화국 국기가 아니라 그냥 빨간 깃발이다.
  20. 미국이 줄곧 원한게 이거였다. 하지만 마오쩌둥도 장제스도 바라지 않는 결과였으니 양당의 수뇌부가 다 갈리지 않는 한은 불가능한 선택이다.
  21. 유럽은 아무래도 중국어 교육이 간체자 중심이지만 미국은 중공과 수교한 지 30년이 넘었어도 간체자 일변도의 교육을 하진 않는다. 간체자와 정체자와 공존하는 편. 그러니 외교관계라는 것이 어찌보면 절대적이진 않다. 그리고 당장 중화민국에서 영어를 배울 때 외교관계가 있는 벨리즈, 마셜제도, 세인트빈센트그레나딘 이런 나라 방식으로 배우는 게 아니라 외교관계가 없는 미국식으로 배운다.
  22. 여기에 아무 상관없을 것 같은 몽골이 들어간 이유는 현재 중화민국의 미수복 영토에 몽골의 모든 영토가 들어가있기 때문이다.
  23. 물론 이렇게 되어도 북한이 단독적으로 행동하여 남침을 할 수도 있다.
  24. 어떤 혹자는 한신하고 비교하기도 하는데 사실 한신은 린뱌오보다는 펑더화이 쪽이 더 가깝다.
  25. 주더도 문화대혁명때 잠깐 숙청당하긴 했다. 하지만 마오쩌둥에게 미움을 사 처참한 최후를 맞은 펑더화이와 달리 잠깐 권좌에서 추방당하는 것으로 끝났고 나중에 다시 복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