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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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思悼) (2015)
The Throne
[1]
감독 이준익
각본 조철현, 이송원, 오승현
출연 송강호, 유아인, 문근영, 전혜진, 김해숙, 진지희, 서예지, 박원상, 이대연, 박명신, 박소담, 정석용 등
장르 드라마
제작사 타이거 픽쳐스
배급사 쇼박스
촬영 기간 2014년 7월 8일 ~ 2014년 10월 8일
개봉일 2015년 9월 16일
상영 시간 125분
총 관객수 6,241,005명 (최종)
국내등급 12세 이상 관람가

1 개요

2015년 9월 16일에 개봉한 한국 영화. 2014년 7월에 촬영을 개시했고, 2015년 8월 11일 제작보고회를 개최했다.

감독은 이준익이고, 송강호, 유아인, 문근영, 전혜진, 김해숙, 진지희, 서예지, 박원상 등이 출연했다.

영어 제목은 'The throne'인데, '옥좌', '왕위', '국왕'을 뜻한다.

배경은 1762년 사도세자뒤주에 갇혀서 죽는 임오화변이다. 8일 동안의 시간 순으로 진행하면서, 뒤주 속에서 사도세자가 점차 의식을 잃어가는 와중에 사도세자의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 영조와 관계가 틀어지고 뒤주에 갇혀 죽기까지의 상황을 그려내고 있다.

영화 자체가 장기간의 역사를 매우 압축해서 보여주므로, 보기 전에 숙종, 경종, 영조에 대해 개략적으로라도 알고 가는 것이 좋다.

에스토니아에서 열린 탈린영화제에서 최우수상을 받았다. 상금은 기부했다고.

2 예고편

▲ 티저 예고편
▲ 메인 예고편
▲ 설민석의 설명

3 공식 시놉시스

“잘하자. 자식이 잘 해야 애비가 산다!”[2]
재위기간 내내 왕위계승 정통성 논란에 시달린 영조는 학문과 예법에 있어 완벽한 왕이 되기 위해 끊임없는 노력을 기울인다.
뒤늦게 얻은 귀한 아들 세자만은 모두에게 인정받는 왕이 되길 바랐지만 기대와 달리 어긋나는 세자에게 실망하게 된다.

“언제부터 나를 세자로 생각하고, 또 자식으로 생각했소!”
어린 시절 남다른 총명함으로 아버지 영조의 기쁨이 된 아들
아버지와 달리 예술과 무예에 뛰어나고 자유분방한 기질을 지닌 사도는 영조의 바람대로 완벽한 세자가 되고 싶었지만 자신의 진심을 몰라주고 다그치기만 하는 아버지를 점점 원망하게 된다.

왕과 세자로 만나 아버지와 아들의 연을 잇지 못한 운명,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가족사가 시작된다.

4 개봉 전 반응

왕 또는 귀족 등의 상류층 배역을 거의 맡지 않던 송강호영조를 연기한다는 것에 아무리 연기파 배우라도 어색함이 있지 않을까 하는 일부 우려를 표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송강호가 맡았던 배역 중 그나마 상류층에 속하는게 변호사(영화 '변호인')정도였고, 이 쪽 역시도 이제 막 상류층에 들어갈 기회를 얻어낸 것 뿐이지, 영화상 묘사에서 상류층의 생활과는 거리가 멀다. 효자동 이발사가 상류층에 가깝긴 했다. 물리적으로(...). 그 외에는 대부분 일반 형사(살인의 추억), 공원 매점 주인(괴물) 등 서민적인 역할을 맡은 경우가 많다.

그러나 예고편과 스틸컷이 나오면서 그런 불안감이 싹 사라졌다.

영화 베테랑으로 좋은 연기를 보여주었던 유아인 역시 베테랑의 천만 돌파로 영화배우 커리어의 전성기를 맞게 된 상태에서 사도세자 역을 맡아 기대가 큰 상황. 적어도 주역 연기자의 연기력에는 걱정이 없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역시나 걱정 없었다. 베테랑에서 마약중독자 싸이코 역으로 나오던 유아인이 이 영화에서도 정신병자 역으로 나오는 것이 묘하게 배역이 매치가 된다는 시각도 있었다.

서부전선과 추석 극장가를 노린다.가정불화를 담은 온가족의 추석영화 결과론적인 얘기지만, 전체적인 이야기 구조가 부자지간의 갈등이라는 점에서 추석께 개봉이 시의 적절했던 셈.

영조와 사도세자와의 관계는 정치적인 문제 때문에 두 부자가 갈라졌다는 속설 대신 지나친 기대감 때문에 사도세자를 거칠게 몰아붙이는 영조의 모습, 두 부자의 성격차이와 그로 인한 부자간의 갈등을 주로 묘사할 것으로 보인다. 영조가 편집증 수준으로 정신적 폭행을 가하고 이로 인해 사도 세자가 정신 질환에 시달리며, 사도세자와 영조가 서로에게 반감을 가지고 이것이 극도로 악순환을 거듭하다가 결국 임오화변이 일어났다는 것은 현대에 남아있는 사료에 근거한 정설이다. 주류사학계에선 여기에 해석을 더하여 정치적 문제와 부자 갈등을 섞는 게 보통이다. 물론 이 정치 갈등도 이덕일 같은 노론 음모론은 절대 아니다. (자세한 내용은 임오화변 항목 참고.) 아버지의 따뜻한 말 한 마디가 듣고 싶었다는 예고편의 사도세자의 대사가 그걸 잘 나타내는 듯 하다.

2000년대 방영한 영화, 드라마 중에선 노론 음모론을 전면 배제한 2번째 작품이다. 첫번째는 2015년 8월 7일에 방영한 KBS 드라마 스페셜 붉은 달이다. 사도세자 근처에서 사람들이 죽자 동복 여동생 화완옹주와 세자의 근신들은 세자를 시기한 내부세력의 음모라 의심하는데 알고보니 광증에 빠진 사도세자의 소행인 것임이 밝혀지며 이야기가 전개된다. 정치 사극이 아니라 사료에 기록된 사도세자의 광증에 장희빈 귀신이란 상상의 소재를 연결시킨 호러사극이지만 1시간 분량에서 나름 실제 사건을 구현시켜 호러요소와 자연스럽게 이으려 노력하였고 사도세자의 광증은 영화 <사도>보다 이쪽이 실제에 가깝다. 사도세자의 연쇄살인과 옥추경, 빙애(경빈 박씨), 세손의 휘항 등 영화에 미구현된 에피소드들이 다수 등장한다. 노론 음모론은 당쟁도 대통의 씨가 있어야 할 수 있다는 화완옹주의 대사를 빌어 초반부터 배제해 버린다. 세자가 삭아보인다는 게 고증오류 비만이었다는 사도세자의 기록으로 볼때 날씬한 유아인보단 살집있는 김대명(미생의 김대리 역)이 더 고증에 충실

그런데 인터넷의 영화 관련 댓글에는 노론 음모론을 앞세운 자칭 전문가들의 글이 잠시 폭주한 적 있고 이후에도 간간히 활동세력이 눈에 띈다.

5 흥행

한국 박스오피스 1위 영화
앤트맨
(2015년 37주차)
사도
(2016년 38주차)
사도
(2016년 39주차)
사도
(2015년 38주차)
사도
(2016년 39주차)
인턴
(2016년 40주차)

개봉 첫 날, 2주 연속으로 박스오피스 왕좌에 군림하던 앤트맨을 제치고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했다. 개봉 첫 주에 1,210개관에서 3만 2,987회 상영하여 179만 9,063명을 동원하고, 142억 7,496만 9,979원을 벌었다. 개봉 이전 관객수까지 포함해 총 관객수는 181만 554명이고 총 누적 매출액은 143억 6,635만 5,979원이다. 《관상》보다는 낮은 출발이지만 평단과 관객 양쪽의 평이 워낙 좋아 추석 시즌에도 강력한 흥행 몰이를 할 것으로 보인다. 당연히 같은 날 개봉한 《메이즈 러너: 스코치 트라이얼》을 제치고 주간, 주말 모두 박스오피스 1위로 화려하게 데뷔했다. 9월 22일에는 전국 200만 관객을 넘어섰으며 26일에는 전국 300만 관객을 넘어섰다.

권상우, 성동일 주연의 《탐정: 더 비기닝》, 여진구, 설경구 의 《서부전선》 등 추석 연휴를 겨냥한 대형 한국 영화 경쟁작들도 모두 물리치고 2주 연속 1위를 지켰다. 2주차에는 전국 1,153개관에서 3만 6,050번이나 상영됐으며 전주보다 고작 1.1% 감소한 178만 51명을 불러모았고, 전주보다 0.6% 줄어든 141억 8,302만 287원을 벌었다. 그래서 2주차까지 누적된 관객 수는 359만 595명, 총 매출액은 285억 4,928만 5,266원이다. 30일까지 496만 관객을 넘으며 10월 1일에 전국 507만을 넘었다. 이로서 이준익 감독에게는 278만 관객을 기록한 황산벌 흥행을 넘으며 왕의 남자에 이어 감독으로서 2번째 흥행 대박 영화가 되었다.

더불어 사극 영화 역대 흥행 7위를 차지했다. 사극 영화 1위는 1,761만 관객이 본 명량. 2위는 광해, 왕이 된 남자로 전국 1,232만 관객이 봤으며 3위는 전국 1,230만 관객이 본 왕의 남자, 4위는 전국 913만 관객이 본 관상, 5위는 866만 관객이 본 해적: 바다로 간 산적, 6위는 전국 747만 관객이 본 최종병기 활.

덤으로 노론 음모설을 소재로 만든 영화 역린이 거둔 전국 384만 관객도 압도하며 깨버렸다.

흥행 추세를 따지자면 감독의 최고 대박작인 왕의 남자가 열흘동안 거둔 전국 228만 관객을 깨며 열흘동안에 전국 260만 관객을 기록했다. 때문에 이 작품도 1,000만 관객이 가능하리라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비록 베테랑이 열흘동안 510만, 암살이 열흘동안 540만 관객을 기록한 것보다 반타작급이지만. 역시 추석 시즌 개봉작이었던 <광해 왕이 된 남자> 보다는 3일 먼저 400만 관객을 돌파하였고, 꾸준히 흥행이 이어지고 있기에 충분하다는 의견도 있다.

그런데, 개봉 3주차, 평일에 계속 1위를 지키다가 예상치도 못했던 앤 헤서웨이로버트 드니로의 《인턴》의 갑작스런 대반격으로 주춤했다. 평일 기록까지 합산한 주간 박스오피스에선 3주 연속으로 1위를 지켰지만, 주말 박스오피스에선 《인턴》에 밀려 전주보다 1단계 떨어진 2위를 차지했다. 3주차엔 전국 934개관에서 2만 8,060회 상영되었으며 전주보다 11.3% 상승한 198만 818명을 불러모았고, 전주보다 7.7% 상승한 152억 7,098만 2,935원을 벌었다. 그래서 3주차까지 누적된 총 관객 수는 557만 1,388명이며 총 438억 2,005만 4,201원을 벌었다. 지금까지 상당한 흥행세를 보여줬지만, 《인턴》에 이제 왕좌를 뺏긴데다 《마션》과 《성난 변호사》가 개봉하면 꽤 타격을 입을 것으로 보인다. 천만 관객을 바라보기에는 그렇게 여유로운 상황이 아니다. 거기에 10월 4일에는 인턴과 탐정-더 비기닝에까지 밀려 박스오피스 3위로 내려가버렸다. 그나마 하룻만에 2위로 다시 올라섰고 10월 5일까지 전국 562만 관객을 기록했다.

그러나 10월 8일 《마션》과 《성난 변호사》가 개봉하면서 4위로 밀려났다. 10월 10일까지 전국 594만 관객을 기록, 이 상황이라면 전국 1,000만은 어렵게 되었다. 일단 전국 600만은 넘어서겠지만 700만대까지도 힘들 듯 하다.

개봉 4주차에는 역시 에상대로 《마션》과 《성난 변호사》의 개봉으로 직격탄을 맞았다. 4주차에는 전국 732개관에서 1만 5,320회 상영되었는데 전주보다 77.7%나 폭락한 44만 2,076명을 불러모았고, 전주보다 78.2%나 하락한 33억 3,584만 6,800원을 벌었다. 그래서 4주차까지 누적 관객수는 601만 3,321명으로 6백만 관객을 돌파했고, 누적 매출액은 471억 5,459만 3,501원이다. 그리고 박스오피스 4위를 차지했다. 4도

그러나 이후 6위로 밀려나면서 이젠 주말에도 3,4만 정도 관객을 기록하면서 700만 관객 넘기도 어려워 보인다. 10월 17일까지 전국 617만 관객을 기록했다. 그리고 개봉 5주차에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주말에는 《트랜스포터: 리퓰드》의 개봉으로 인해 6위로 하락했지만, 평일 기록까지 합산한 주간 박스오피스에선 전주와 마찬가지로 4위를 유지했다. 2주 연속 4도가 됐다 4C˚ 5주차에는 전국 424개관에서 7,540회 상영되었으며, 전주보다 61.2% 감소한 16만 2,444명을 불러모았고, 전주보다 65.6% 감소한 11억 8,077만 2,100원을 벌었다. 그래서 5주차까지 총 관객 수는 617만 5,579명이며, 총 누적 매출액은 483억 3,377만 7,301원이다.

개봉 6주차에는 《더 폰》, 《특종: 량첸살인기》. 《돌연변이》 등 신작 한국 영화들의 총공세로 타격을 많이 받았고 흥행세도 제법 가라앉았다. 6주차에는 전국 360개관에서 3,342번 상영되었으며, 전주보다 67% 하락한 5만 3,573명을 불러모았고 또 전주보다 67.2% 감소한 3억 8,780만 5,100원을 벌었다. 박스오피스에선 전주보다 3단계 하락한 7위를 차지했다. 그리고 6주차까지 누적 관객 수는 622만 9,110명이며, 누적 매출액은 487억 2,121만 101원이다.

물론 팬들의 기대치에 못 미쳤을 뿐이지 손익분기점(300만 관객)을 돌파해서 상업적으로 분명 성공했고, 영화 자체의 평가도 양호해 지금까지의 실적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할 자격이 있다. 《소원》에 이어 또 다시 히트작을 탄생시킨 이준익 감독은 평양성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의 연이은 참패로 은퇴 직전까지 몰렸던 슬럼프에서 완전히 벗어나 재기에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 반면 《소원》의 주연 배우였던 설경구는 연이은 하락세를 겪고 있다

6 등장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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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세자 선(愃) (유아인 분)
"내가 바란 것은 아버지의 따뜻한 눈길 한 번, 다정한 말 한 마디였소."

- 극중 사도세자의 대사

아버지의 따뜻한 눈길 한 번, 다정한 말 한 마디가 듣고 싶었던 아들. 극 초반에 사도세자는 마치 분노에 미친 사람처럼 칼자루를 쥔 채 영조가 있는 곳을 쫓아간다. 물이 흐르는 진창을 따라 걸어가는데, 당시의 일을 기록한 한중록에도 "수구(水口)를 통해 윗 대궐로 가리라.", "내 기어이 '마무리하고' 말 것이다."라는 사도세자의 말이 있다. 하수도를 따라 영조가 거처하는 궁궐로 가서 (아마도 영조를) 죽이고야 말리라는 분노 어린 말.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 영조의 눈에 들기 위해서 노력을 했지만, '아버지'가 아닌 '군주'로서, 자신을 대하는 아버지의 기대에는 못 미쳤다. 결국 자신이 대리청정을 맡게 된 순간부터 아버지와 관계는 급격히 냉각이 된다. 대왕대비인원왕후의 죽음을 계기로 온갖 기행을 일삼는다. '내관목을 따가지고 가족들에게 내보이기', '을 짜서 스스로 그 안에 들어가기', ' 중에 술 마시기' 등. 이에 폭발한 영조는 "네가 며칠째 대리청정도 안 들어오니, 내가 너한테 문안 드리러 왔다."라면서 물까지 끼얹는다. 이후로는 국정에 전념하기 보다는 사냥이나 유희를 즐기는 쪽으로 바뀌었고, 그 틈을 노린 김상로 등 일부 신하들이 자신을 역모로 몬다. 결국 영조어명에 따라 뒤주에 7일 동안 갇히게 되고, 그동안 영조와 나누지 못한 속 얘기를 하게 된다.
그런데 이 영화는 또 다른 창작에 기초에 이야기를 진행하고 있다. 정조의 부탁으로 영조가 없애버린 사초의 빈틈을 매우는 셈이다. 사초를 세초해 없애버린 것은 사실이나 그 내용을 우리가 알 수는 없다. 세자가 부왕을 상대로 역모를 감행했으나 세손을 위해 포기했다는 것이다.
세자는 부왕의 가혹한 압박으로 인해 정신적으로 피폐해지고 주변 사람들 과도 점점 멀어진다. 부왕의 마음에 들기 위해 노력하나 좌절되고 머리 숙여 비바람과 눈보라 속에서 사과하기를 여러번. 한번 더 사과하며 부왕에게 고개를 숙이고 솔직히 울화가 있어 힘들다고 외쳐 보지만 부왕은 한 마디 내뱉고 다시 세자를 무시한다.
"넌 존재 자체가 역모야!!"
결국 세자는 폭발해 상복을 입고 측근들과 함께 부왕을 죽이러 경희궁으로 향한다. 하지만 부왕과 대화하는 세손을 보고 포기한다.
사실상 영화를 보다 보면 안습이라는 생각밖에 안든다. 관객 입장에서 사도세자의 행동을 볼 때 대리청정 장면만 봐도 느낄수 있다. 자신의 생각대로 정책을 말할 때 영조가 왜 자기랑 말 안 하고 막하냐라며 태클을 걸고, 다른 질문에서 조언을 구하자 그거 하나 혼자서 못한다고 혀를 차니, 얼마나 안타까운지 직접 봐야 한다. 또한 세손을 100일 때 영조 앞에 보여드렸을 때 10초도 안돼서 아기에게 시선을 돌릴 때 그 표정만 봐도 안습이다. (더 무서운건 이 모든게 사료에 기록된 사실.
영화는 심의문제 때문인지 사도세자의 살인행각이 상당히 순화되어 있다. 예로 조선왕조실록에선 "병의 증세가 더욱 심해져서 병이 발작할 때에는 궁비(宮婢)와 환시(宦侍)를 죽이고, 죽인 후에는 문득 후회하곤 하였다"고 나오는데 영화에선 딱 하나만 죽이며 "왕손의 어미"를 때려죽이지도 않는다. 아마 저런 것들을 다뤘다면 저 심의로 나오긴 힘들수도 있다. 사도세자가 딱 하나 죽이는 장면도 좀 아슬아슬하다. 머리를 잘라서 들고 다니긴 하는데 카메라가 미묘하게 비껴가며 촬영하고 있다. 그러나 노론 음모론자들은 이런 순화조차도 "사도세자를 사람 마구 죽이는 살인마로 왜곡했다"고 주장했다. 아래 '노론 음모론자들의 비난' 항목 참고.
영조의 콤플렉스로 인해서 정신적으로 지속적인 고통을 받은 자식의 모습으로 나온 사도세자는 영화속에서 제일 비참한 인물로 묘사되었다. 그렇게 많은 신하와 친적들에게 사랑받은 어린 세자가 아버지인 영조의 생각과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다는 이유로 부자의 관계가 갈라지고, 뒤주에서 굶으면서 아들의 울음소리에 고통스러워하며 죽어가는 장면들을 하나하나 볼 때마다 안타까움만 자아낸다.
영조 (송강호 분)
"왕은 결정하는 자리가 아니야. 신하들의 결정을 윤허하고 책임을 묻는 자리다."
너, ~니? 등 은근히 간략하고 짧은 대사들이 많은데, 작중 내내 무겁기만 한 중후반부를 조금이나마 환기시켜주는 대사로 생각하는 관객들이 많지만 현실은 실제 궁중어투라서 쓰인것이다. 궁중어투를 잘 살린 것으로 유명한 사극 대왕의 길의 영조도 거의 똑같은 말투를 사용한다. 실제로 영조는 신하가 아침에 문후를 여쭐때에도 "나는 일없다" 하는 식으로 짤막하게 답했다. 한중록을 봐도 영조는 세자에게 "그 술은 누가 주더니?" "네가 불한당이냐. 불은 어이 지르니" "어찌 그러하니?" 하는 식으로 말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배우의 출신지(경남 김해)가 출신지여서 그런지 억양상 동남 방언이 묻어날 때가 종종 있다. 그런데 듣다 보면 꽤 자연스럽다.
"별일 없지?"
.
영조가 불길한 일이 있는 날에, 부정을 떠넘긴다는 의미로 싫어하는 사람을 불러서 말하는 대사. 처음엔 내관, 그 다음엔 세자를 불러서 이런다. 이 점은 영화와 사료가 조금 다른데, 한중록에 따르면 영조가 부정을 씻기 위해 세자를 불러서 실제로 한 말은 "밥 먹었냐"였다. 누구나 예상할 수 있듯이 해당 상황에서 (송강호가 연기하는) 영조가 '밥 먹었냐'고 물어보면 훌륭한 배우 개그가 되어 버려 관객들이 빵 터질 것을 우려해 유사한 의미의 다른 대사로 바꾸었다는 후일담이 있다.
아들사도세자성군이 되기를 바랬던 군주(아버지). 극중 영조는 세자가 어린 시절 때부터 엄하게 교육을 시켰다. 영조는 권력 투쟁 와중 숱한 죽음의 고비를 넘긴 사람으로 즉위한지 한참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반역 모의가 나오고, 친국장에서 대놓고 영조에게 경종을 독살한 범인이라고 우기는가 하면 천한 무수리 최씨의 자식이 어떻게 왕이 되냐며 비난한다. 이런 아버지 입장에서는, 항상 자식은 모자란 듯 보인다. 세자가 어린 시절 영조가 직접 쓴 책을 읊으면서 무려 한 구절이나 빼먹자, "저, 저... 눈 껌뻑껌뻑 쳐다보는..." 라고 말하고 노는 것만 좋아한다며 강하게 훈계를 할 정도다. 세자가 어느덧 청년이 되자, 틈만 나면 "양위하겠다."라는 등의 얘기를 꺼낸다. 이는 세자의 반응과 신하들의 충성심을 떠보기 위함이었다. 결국 대리청정이 시작되었는데, 세자의 개혁적인 성향이 자신과 안 맞았고, 거기에 자신이 이뤄놓은 탕평책을 건드리는 게 싫었는지 '신하들이 다 보는 앞에서 세자의 발언 하나하나에 지적'을 해서 를 죽인다. 대왕대비가 죽은 뒤 이 둘의 관계는 더욱 더 어긋나고 이 둘의 관계를 멀게 하려는 일부 신하들의 책동으로 말미암아 영조는 칼자루를 내던지면서 말한다. "자결하라." 세자가 이런 법도가 어디 있느냐가 거부하자, 그를 뒤주에 들어가라고 한다. 그리고 직접 못질을 한다.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둔 후 7일 째 밤에 사경을 헤매는 사도세자와 진심 어린 속 얘기를 하면서 아버지로서의 부정을 드러낸다. 자신이 세자를 엄하게 키울 수 밖에 없는 이유인 군주와 후계자로서의 법도와 자신의 기대에 어긋나는 세자를 보면서 얻은 실망이 사랑을 미움으로 변하게 하였다며 자신의 진심을 토로한다. 자신이 원했던것은 아버지의 따뜻한 눈빛과 말 한 마디였다는 세자의 진심을 듣고 왜 우리는 마지막에서야 서로의 진심을 알았냐면서 한탄한다. 그 후 세자가 뒤주에서 숨울 거두자 죽음을 확인하기 위해 숨과 맥박을 확인하고 죽음을 확인한 뒤 얼굴을 어루만지며 소리 죽여 오열하면서도 명분상 폐서인된 역적을 처단한 것이기에 환궁하면서 개선가를 울린다. 김상로를 비롯한 다른 대신들도 '독하구먼. 자식 죽이고 개선가라니......'라고 말하며 씁쓸해 한다. 이렇게 아버지의 심정과 군주의 의무를 복합적으로 드러내었다. 영화에서 자신의 침전에 칼을 빼들고 호위무사를 제압하면서 온 세자를 모반을 한 역적으로 취급하여 사약을 내리거나 참수하지 않은 연유가 역적은 그 3대가 역적으로 취급받기 때문에 세손에게 피해가 갈까봐 왕을 죽이려한 역적이 아닌 '미쳐서' 아비에게 해를 끼치려한 아들로서 죽임으로써 여론을 희석시키기 위해서라고 나온다.

영화속의 묘사만으로 따질때는 정말 막장부모로 묘사가 된다. 아니, 사실 실제 역사상의 모습으로도 막장부모가 맞다. 어릴때 쏟은 사랑이 성인이 되기까지 유지되었다면 좋았을 운명을 자신과 나라만을 생각하면서 아들을 죽이는 게 운명이라면서 단호하게 나오는 모습이 화를 일으키게 만든다. 마지막에 사도세자를 걱정하면서 그래왔다는 이야기나 의리를 내세우며 사도세자에 관한 기록을 지우는 모습을 보면 참으로 아이러니하고 비참한 인물로 볼 수 있다.
혜경궁 홍씨 (문근영 분)
사도세자의 아내. 풍산 홍씨. 정조의 어머니다. 정조 역에 소지섭이 출연했는데, 이에 대해 문근영은 반농담으로 "소지섭과 로맨스 연기를 찍고 싶었는데 어머니 역할을 맡아서 아쉬웠다"고 말했다. 문근영이 <사도>에 출연한 이유는 평소 존경한 연기자인 송강호와 연기해보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아역부터 시작해서 60대 노인 분장을 한 문근영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런데 분장이 안 어울린다는 평가가 상당히 많다, 차라리 이 부분만 적령기 나이대의 배우를 캐스팅하는 게 낫지 않았겠냐는 평가도 있다. 마치 90대마냥 폭삭 늙은 분장인데 조선시대 60대가 현대의 90대와 맞먹는다 생각하면 과한 분장은 아니라는 반론도 있다.[3]

문근영 연기 인생에서 처음으로 어머니 역할을 연기했다. 영화 전체적으로 세자의 아내로서의 모습보다는 세손의 어머니라는 모습이 더 부각된다. 영화 시작 부분을 보면 "세자는 포기하고 세손을 살릴 것"을 종용하기도 한다. 사도세자가 며느리(세손빈)에게 "부부란, 잘못이 있으면 덮어주고 사소한 예법에 얽매이지 않으며, 사랑하고 또 사랑하는 것이니라."라고 얘기한 것을 보면, 이 때 이미 세자는 아내에게도 의지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좋은 어머니이긴 했으되, 좋은 아내는 아니었던 것으로 표현된 셈이다. 실제 역사 기록을 보면 사도세자가 아버지 영조 앞에 불려갈 때, 영조가 유달리 예뻐한 제 아들(정조)의 머리쓰개를 쓰고 가려 하자 홍씨가 머리에 맞지도 않는다며 말리면서 세자 본인의 것으로 바꿔쓰라며 실갱이한 일이 있었다. 이때 아내 혜경궁 홍씨에게 한 세자의 말이, "자네는 어찌 이리도 자네 생각만 한단 말인가"였다고 한다. 여러가지로 해석이 가능한 기묘한 말이다. 물론 이 기록이 혜경궁 홍씨 본인이 쓴 책인 한중록에 나오는 부분이라 혜경궁 홍씨의 행동이 자식을 살리기 위해 남편을 죽도록 내버려두겠다는 의미인지에 대해서는 논쟁거리이다. 정말 그런 의미면 혜경궁 홍씨 자신이 기록으로 남기려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학계의 평도 꽤 많기 때문이다. 즉 당시 혜경궁 홍씨는 단순히 세자의 의도를 몰랐을 뿐이고, 이런 아내의 행동에 사도세자는 섭섭한 나머지 아내가 이기적으로 행동한다고 오해했다는 해석.

영빈 이씨 (전혜진 분)
선희궁. 전의 이씨. 사도세자의 생모이며, 영조후궁이다. 영조와 사도세자를 잇는 인물 중 하나로 사도세자의 최후에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혜경궁 홍씨가 세자가 칼을 들고 영조에게 간다고 알리러 찾아왔을 때 절망한 듯 주저앉아 세자를 포기한 모습을 보여준다. 결국 사건의 전말을 영조에게 알리고 '세자는 처분하시되 세손은 보존해 달라'고 하는 것으로 정조를 살리고 세자가 죽는데 일조하게 된다. 사도세자가 죽은 뒤 혜경궁 홍씨에게 '내가 죽인 게 아니지?'라며 통곡하는데 아들을 자신의 손으로 먼저 보낸 어머니의 절규를 보여준다. 사도세자의 3년상을 끝낸 후 자식을 뒤따르듯 사망한다.
인원왕후 (김해숙 분)
- 윤~허~하오~ .
대왕대비로, 숙종의 계비이다. 경주 김씨. 사도세자에게는 든든한 후원자이다. 영화에는 나오지 않지만 실제 역사에서는 인원왕후가 세자를 끼고 밥을 많이 먹인 통에 세자가 살이 쪘다고 영조가 타박했을 정도다. 영조가 인원왕후에게 문 소원을 매질한 것으로 대들며 양위를 들먹이자 같이 열받아서 덜컥 양위를 허락했다가 세자가 양위 파동에 얼어죽을 판이 되자 허락한 것을 철회하며 스스로 금식하면서 죽는 것으로 나온다. 인원왕후 사후 사도세자의 광증은 급격히 악화된다. 박수무당과 비구니를 끼고 굿판을 벌이기 시작한 것이 인원왕후 상을 치를 때 부터였다. 따스한 후원자를 잃었다는 면도 있지만, 영조의 행동을 막아 줄 사람이 없었다는 것도 컸다. 참고로 영화에선 직접 묘사되지 않지만 영조 본인의 후원자이기도 했다. 연잉군 시절 생모인 숙빈 최씨가 사망한 이후 의지할 곳이 없던 영조를 지원해주고 그를 왕세제로 공식 지명해준 사람이 인원왕후이기 때문이다. 인원왕후가 사도세자를 보호하자 영조가 불만을 토로하면서도 크게 대항하지 못하는 것에는 인원왕후가 대왕대비란 것도 있지만, 영조 본인의 은인이라는 이유도 있었다.
화완옹주 (진지희 분, 아역 신비 분)
영조영빈 이씨의 딸. 사도세자여동생. 뮤지컬에서는 노론과 연합해 동복오빠를 몰아낸 악녀로 매도당했다. 그런 뮤지컬과는 달리 사도세자와 사이가 좋고 영조의 지극한 사랑을 받고 있음이 직간접적으로 드러난다. 세자빈을 맞이하는 자리에서 아버지가 무릎에 앉히기도한다. 이 때 눈을 사시처럼 뜨는 장난을 쳐서 사도세자가 결국 폭소를 터뜨리고, 영조가 한참 설교를 하다가 "너 왜 웃니?"라고 말하는 개그씬이 등장한다. 또 오라버니가 힘들어하니까 아버지의 총애를 받는 자신이 나서서 아버지를 경희궁으로 이어하게 한다. 실제 역사에서 사도세자와 이상한 말까지 나올 정도로 사이가 좋았던 걸 강조하기 위해서인지 사도세자 사후 혜경궁보다 더 세손에게 매달리는 장면을 통해 조카를 아끼는 고모의 모습도 드러난다.[4] 실제로도 조카와 친했지만 영조 말기 세손이 척신들을 바짝 경계하면서 사이가 벌어지기 시작했고 정조 즉위 후 정후겸이 사사당하면서 화완옹주도 귀양간다. 화완옹주는 1737년생으로 임오화변 당시 만 25세로 정치달과 혼인했다가 젊은 나이에 상부하고 궁에 들어왔는데 영화에선 만 16세의 진지희가 섭외되었다. 당시 17세였던 정순왕후 김씨 역에 만 25세인 서예지가 섭외된 것과 대비된다. 역사 내용 그대로를 보자면 실제로는 진지희 역할이 서예지 역할보다 더 나이가 �많았어야 한다는 의미다.
정순왕후 (서예지 분)
영조의 계비. 경주 김씨. 15세의 나이로 66세였던 영조와 혼인을 치룬다. 국사 공부 좀 했다는 사람이라면 한번쯤 들어봤을 세도정치와 연관이 깊은 인물이다. 물론 정순왕후가 직접 세도정치를 일으켰다는 것은 잘못된 해석이다. 정순왕후와 세도정치의 관계는 좀 더 복잡한데 해당 항목을 참고 바람. 영화에선 딱히 선역도 악역도 아닌 중립자적 인물로 나온다. 실제로도 이 시기 정순왕후의 발언권은 매우 미약했다. 정순왕후의 발언권이 커진 건 정조가 효장세자의 양자로 입적된 이후이다. 양부모가 모두 죽고 난 뒤라 법적 보호자가 없었기에 그 틈에 정순왕후가 발언권을 키웠다. 작중에서도 정순왕후의 방이 노론 회합소로만 사용되지 뭔가 음모를 꾸미는데 적극적인 모습은 아니다. 오히려 영조가 두렵다고 말한다. 이 뒤로 영조의 앞에서 자신의 총명함을 보이는 장면만 나와서 뭐가 무서운가 어리둥절해하는 사람들이 많다. 보는 사람에 따라서 이런 정석적인 답밖에 하지 못하게 하는 영조의 압박감 때문에 두려운 것이라고 해석하는 의견도 있다. 다만 외척들과의 2번째 모일 때는 사도세자에 대한 적대적인 의견을 표출하기도 하였다.
홍봉한 (박원상 분)
사도세자의 장인이며 혜경궁 홍씨아버지. 부채를 매개로 아버지아들을 연결해주는 사람. 세손을 살리기 위해 비정하게 사위에게 죽음을 강요하는 모습도 나온다. 실제 역사에서는 사도세자가 장인에게 꽤 의지한 것으로 보인다. 두 사람이 주고받은 편지가 여럿 남아 전해지고 있고, 또 개중 어떤 내용들(무기를 수집한다거나)은 화변 때 언급된 폐세자의 이유들과 관련해 볼 수 있다.
정조 (유년 이효제 / 성년 소지섭 분)
"그날 소손은 제 아비의 마음을 보았나이다."
사도세자혜경궁 홍씨의 아들. 태어났을 당시에는 세자의 아들이라서 영조에게 별로 사랑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총명하고 공부를 좋아해서 할아버지 영조의 사랑을 듬뿍 받는다. 세자는 능행 도중에 궁으로 돌아가라고 쫒아내는 반면 세손과는 함께 가서 정답게 이야기를 나누기도 한다. 영조의 질문에 또박또박 잘 대답하자 영조가 칭찬하며 "삼백년 종사의 명맥이 오직 세손에게 달려 있다."고 말하는데 이 때의 문답과 영조의 발언 모두 실록에 있는 내용 그대로다. 다만 공부에 열중하는 건 모두 할아버지가 기뻐하기 때문에 하는 일이라 내키지 않아 하는 속사정을 아버지에게 털어 놓기도 한다. 영조와 사도세자의 부자관계와 또 다른 부자관계를 보여주는 인물로 사실상 제3의 주인공이다. 두 관계 다 아버지의 정치적 입지, 정신적 문제가 부자관계의 악영향을 주는 공통점이 있는데, 파국을 맞이 한 전자와 달리 후자의 관계는 어느정도 공감대를 이루는데 성공한다. 사도세자가 분노하여 칼을 들고 영조에게 갔을 때 사도세자를 포기시킨 게 바로 정조. 영조와의 대담에서 영조가 사도세자가 영빈 이씨의 환갑 잔치에서 사배[5]를 할 것을 정조가 받아 들인 점을 지적하자, 자신은 할아버지 영조가 왕이 아니더라도 그 이상의 대접을 할 수 있다며 '예법도 사람이 있어야 되는 것이다' 곧이어 '아버지(사도세자)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는 발언을 하는데, 아버지에 대한 끓어 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칼을 들고 영조를 찾아간 사도세자가 마당에서 마침 이 말을 엿듣게 되고 분노를 풀어버린다. 이는 사도세자가 젊은 시절 끊임없이 아버지를 이해하려고 노력했으나 끝내 하지 못했음을 연상케 한다. 사도세자는 아들이 자신의 심정을 이해했다는 발언을 한 순간 아버지를 이해하고자 했던 과거의 자신을 떠 올렸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지금 아들에게 상처를 주는 행위를 하는 지금 자신의 처지가 자기 아버지와 다를바 없다는 점을 인지했을 것이다. 세자가 뒤주에 갇힌 뒤 세손빈과 함께 물그릇을 들고 와서[6] 아비에게 물 한잔 제대로 줄 수도 없냐며 울부짖자, 영조는 세손을 안타깝게 바라보면서도 세손을 외가(혜경궁 홍씨의 친정)로 보내라며 끝내 외면하고 만다.
소지섭이 이 영화에 특별출연했는데, 후반 10여분에 무려 4개의 씬이나 나와 까메오로 출연했다기엔 결코 비중이 작지 않다. 그렇지만 이 영화가 정조 영화가 아닌데도 불구하고,[7] 정조 등장 장면이 상대적으로 긴 편이기 때문에 결말이 지루하다는 평을 듣게 되었다. 반대로 소지섭이라는 이유도 있을수 있지만 음악과 나오는 춤 장면에서 감동하는 관객도 있다. 말그대로 호불호. 특히 부채 춤 장면. 정조가 태어난 날 꿈에 나온 용을 그린 그림으로 만든 부채는 훗날 정조가 왕이 되었을때 선물하려 했던 물건이고 극 중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혔을 때 사도세자의 최후까지 함께한 사도세자의 유품이다. 그래도 관객 중에선 이 장면에서 눈물을 흘린 경우도 있었다. 특히 아버지 사도세자와의 추억을 회상하면서 활시위를 당기는 자세이거 아니다를 취한 뒤[8] 복받치는 감정을 갈무리하기 위해 자연스럽게 부채로 얼굴을 가리는 엔딩 장면은 그야말로 백미다.
여담이지만 소지섭은 이 배역을 출연료 없이 무상으로 연기했다.
  • 김상로 (이대연 분)
사도세자에 적대적이며 나경언을 사주해 비행을 고하게 만든 대신. 노론 음모론 같은 관점이 아니라 영조의 마음이 사도세자를 떠난 걸 알고 명분을 주고자 한 행동이었다. 실제 역사 속 김상로는 내심이야 어찌되었든 표면적으론 세자를 비호했고 그러다 파직당하기도 했다. 김상로가 왕과 세자 사이에서 이간질을 했다고 적은 기록이 한중록에 있긴 한데 막상 실록과 교차검증 해보면 그런 정황을 찾기가 쉽지 않다. 영조가 뒷날 세손에게 김상로에게 사도세자의 죽음의 책임이 있다고 말하기는 하는데, 누가보다 가장 큰 책임자는 영조라서 면피성 발언으로 보는 경우가 많다. 아무튼 정조 즉위 후 관직이 삭탈되는데, 이 때 김상로는 이미 죽은 뒤였다. 실제 역사에서 사도세자의 그간의 비행과 관서행을 정조에게 고한 것은 당시 영의정이었던 김상로가 맞다.

초반부에 사도세자를 벌하러 가는 영조 앞을 가로막으며 등장한다. 이후 영조와 사도세자를 바라보던 찌질한(...) 신하들이 자기 신세 걱정을 하자 "지금 당신들 가문 걱정할 때요? 나라가 망하게 생겼는데" 라고 일갈. 이후 난입하여 자해를 거듭하는 사도세자를 막고 어떻게든 영조의 처분을 막으려 하지만 결국 끌려나가게 된다. 적극적으로 처분을 반대하는 역할. 물론 이야기의 자체가 영조와 사도세자에게 맞춰져 있기 때문에 여타 신하들처럼 큰 비중은 아니다. 채제공이 실제로는 사도세자의 몇 안 되는 든든한 우군이었다는 점을 상기해보면, 비중을 좀 더 늘려 더 다양한 이야기를 할 수 있었을 지도 모를 일이다. 반대로 주된 서사구조와 주연들에게 집중시키기 위해 딱히 언급 없이 지나가는 점이 나쁘다고 할 수도 없다. 여러 의견으로 수정 바람. 다만, 임오화변 당시 채제공은 모친상을 당해 고향에 있어서 사도세자를 위해 별 일을 해주지 못했다.

  • 이천보 (조승연 분)

사도세자의 스승이다. 영조로부터 '보위를 세손에게 전하고자 하니, 세자를 잘못 가르친 책임을 지고 폐세자 상소를 올리라'는 명을 받는다. 그 직후 '세자에게 자애를 베푸시라'는 애절한 상소를 남기고 자결한다.

  • 이후
  • 민백상
영조의 첫 번째 중전. 달성 서씨. 영조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했고, 환갑 잔치도 제대로 받아보지 못하고 혼자 외롭게 죽었다. 극중에서 영빈 이씨가 영조의 성격이나 버릇을 갓 시집온 혜경궁에게 알려주는 부분이 있는데, 자기는 총애받지 못해 잘 알지 못하는 부분이라 씁쓸해한다. 하지만 영빈 이씨가 도리어 환갑 잔치까지 건의해줄 만큼 대접을 해주는지라, 둘 사이엔 큰 다툼 없이 그럭저럭 잘 지낸다. 노년에 거동이 힘들 때 그녀를 부축하며 함께한 것도 다름아닌 영빈 이씨다.
극 중 영조가 불길한 기운이 들면 를 씻어내는데, 그 물을 담은 대야를 들었던 내인이다. 어느날 영조의 눈에 띄어 임신하게 되고, 한 순간에 신분이 격상된다. 이후 영조의 총애를 믿고 선희궁에게 말대꾸를 했다가 대왕대비에게 버릇없다며 혼쭐이 난다. 참고로 이 일화들은 모두 실제로 있었던 일이다. 여담으로 영화는 이 장면을 통해 영조의 이중적인 행태를 보여주는데, 아들을 사소한 예법가지고 깐깐하게 굴며 갈구었으면서 정작 대비가 예법을 들며 자기가 아끼는 후궁을 혼내자 대비에게 대든다. 게다가 대비가 문 소원을 천한 것으로 매도하자 이를 지멋대로 확대 해석해서 자신의 출신 문제까지 들고 나온다. 영조의 일그러진 인간상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장면이라 할 수 있겠다. 계비인 정순왕후가 들어오자, 더 이상 등장하지 않는다. 참고로 이 내인을 정순왕후라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동일인물이 아니다. 정순왕후 본인은 정식 간택을 통해 중전 자리에 올랐다. 숙종이 희빈 장씨 이후 후궁이 왕후가 될 수 없도록 법을 만들었기에, 실제로 영조가 마음이 있었어도 문소원을 왕후로 삼을 수 없었다. 실제 인물은 1776년(정조 즉위년), 오라버니인 문성국과 함께 영조를 이간질하여 사도세자의 죽음에 이바지했다는 이유로 작위를 삭탈당하고 동년 음력 8월 10일 사약이 내려졌다. 문성국도 이 때 역률이 적용되었으나 이미 죽은 뒤였다. 실록과 한중록에 문씨 남매가 이간질했다는 기록이 있으나 혜경궁 홍씨가 사도세자의 아내이자 영조의 며느리로서 남편과 시아버지에게 모든 책임을 돌릴 수 없었으며, 실록도 정조 즉위 후 정조가 일방적으로 발표한 것을 그저 기록한 것일 뿐이기 때문에 김상로처럼 책임전가 당했다고 보는 사람이 많다. 대신들은 정조가 사도세자 일을 추궁할 것을 겁내고 정조는 할아버지에게 책임을 돌릴 수 없는 데다가 대신들 입장도 고려해야 했으니, 그들에게 선왕의 후궁에 불과한 그녀는 굉장히 만만한 먹잇감이었기 때문이다. 여담으로 배우 박소담은 임오화변을 소재로 한 KBS 드라마스페셜 붉은 달에서 화완옹주 역할을 맡은 연기자이기도 하다.
  • 홍 내관 (정석용 분)
영조내관. 초반에 영조가 안부를 묻고 귀를 씻는 장면이 나온 것으로 보아 싫어하는 듯 하다.(...) 영화 후반부에 왕실 법도에 따라 궁궐 지붕에 올라 영조의 붕어를 고했다.[9] 영조가 싫어하기까지 한 사람이었는데 끝까지 살아남았다. 최후의 승리자. 애초에 세자처럼 중요한 지위에 있는것도 아닌 내관 한 명을 마음에 안든다는 이유만으로 죽일 까닭도 없지만
  • 나경언
나경언의 고변으로 유명한 인물. 작중에서 사도세자의 비행을 고한 이유는 나경언의 동생이 사도세자에게 살해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7 고증

7.1 전체적인 사건

정병설 교수가 영화 사료 검수에 참여했다.

일단 영조, 사도세자, 임오화변 소재를 다룬 작품 중에선 고증이 가장 좋은 편에 속한다. 1998년 <대왕의 길> 방영한 직후 이덕일의 사도세자의 고백이 출간되고 이후 대중의 인식은 이덕일의 견해에 많은 영향을 받게된다. 대왕의 길 이후 17년만에 사도세자의 정신병을 조명한 작품이고 세밀하게 다룬 건 이 영화가 최초다.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한중록을 폭넓게 참고한 게 분명한 장면들이 정말 상세하게 나온다. 인원왕후가 혜경궁 앞에서 예법을 어긴 화완옹주를 꾸짖으며 곡좌를 하게 하는 장면, 선희궁에게 대든 숙의 문씨의 종아리를 치는 장면, 영조가 방어진 논의를 자기 의사대로 결정한 사도세자에게 왜 자신에게 묻지 않냐며 핍박하는 장면, 호조의 은 문제로 논의하는 장면, 사도세자가 정조의 태몽으로 용꿈을 꾸고는 이를 그림으로 그리는 장면[10], 세자의 스승이었던 이천보 등의 자결, 아들의 죽음을 확인한 영조가 개선가를 울리는 장면 등은 모두 사료로 전해지는 내용이다. 이 정도로 세밀한 고증을 보여주는 한국 사극은 매우 드물다. 관련 지식은 정병설 교수가 쓴 '권력과 인간'과 '혜경궁 홍씨, 회한의 궁중생활 칠십 년'을 참고.

이 영화는 비밀의 문이나 역린 같은 노론 음모론에선 분명하게 벗어난 작품이다. 그런데 아무래도 영화 전체가 영조시대 전반(심지어는 경종독살설까지)을 다루다보니 시간이 부족해 요약한 내용이 많다. 이에 역사를 좀 아는 사람과 일반 관객이 받아들이는게 서로 조금 다를법하다. 역사 매니아들은 주변 내용을 이해한 상태에서 컷 하나하나에 집중할 수 있어 장면을 보며 감탄했지만, 역사를 잘 모르는 관객들에서는 상황 자체가 잘 이해가 안간다는 사람들도 있긴 하다.

전체적인 고증은 좋지만 지나가는 내용에선 오류가 여럿 있다. 굉장히 짧은 장면으로 사도세자가 균역법에 영향을 끼친 것으로 나오는 장면이 있다. 그리고 영화에선 나경언의 고변에 홍봉한이 배후를 밝혀달라고 청하고 김상로가 태워버리는 걸로 나오지만 실제로는 홍봉한이 태워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7.1.1 엔딩 크레딧에서 나온 참고문헌

실록과 승정원일기, 한중록과 같은 1차사료와 함께, 2차사료로 정병설 교수의 저작과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이 나온다.

7.1.2 노론 음모론 탈피와 담론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임오화변에 대한 당대부터 현대까지의 연구와 학설들을 굉장히 폭넓게 받아들였다.

이덕일노론 음모론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는 오해가 있다. 김귀주를 비롯한 경주 김씨 일파가 정순왕후에게 가서 '우리 다 죽는거 아니냐'고 세손까지 몰아낼 궁리를 하고 나경언의 고변이 그들의 배후공작인 것으로 나오기 때문이다. 노론이니 소론이니 하는 언급 자체가 등장하는건 아니지만 정순왕후가 '오라버니, 아버지'하니 관련 지식이 조금만 있어도 노론임을 알 수 있다. 정순왕후는 오히려 자신은 영조가 두렵다고 언급한다. 근데 정작 정순왕후가 어떤 경험을 통해 영조를 두려워하게 되었는지는 구체적으로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영조에게 '친정식구들 벼슬을 높이지 말아달라'고 부탁하는 정순왕후의 현명함을 나타내는 장면만 나온다. 사실 저 부탁 자체가 '(젊은 나이에 나한테 시집 오게 해서) 자네에게 내가 미안한데 혹시 할 말 있으면 해 보라'는 영조의 질문에 대한 답이었던 걸 생각하면, 자신으로 하여금 원칙론적인 대답을 할 수밖에 없게끔 먼저 선수 친 고단수 영조가 두렵다는 표현일수도 있다. 이 역시도 사료에 나오는 기록을 바탕으로 한 묘사다. 실제 역사에서는 영조 말년 세손 승계 문제에서 김귀주를 비롯한 경주 김씨들이 오히려 세손의 편을 들었다.

이 부분을 파고보면 이덕일식 노론 음모론과는 다르다. 이덕일식 노론 음모론은 성군의 자질이 있던 사도세자를 노론이 모함해 죽이고 광인으로 몰았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 작품 속 사도세자는 정신병자가 맞고 그를 정신병자로 만들고 죽인 주체는 영조다. 노론이 나경언의 배후에 있긴 했지만 최종 결정권은 분명 영조에게 있었고, 홍봉한의 만류에도 나경언의 고변서를 태우고 세자와 대질시키지 않고 바로 죽여버리기로 결정한 이도 영조였다.

사료 고증을 해준 정병설 교수는 부자갈등으로 인해 정신병을 얻은 사도세자가 부친을 죽이려는 모습까지 보이자 영조가 제거한 다음 원인을 흐릿하게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노론은 이 사건에서 몸을 사렸고 끼어든 정황이 없다고 본다. 총명한 세손을 후계자로 점찍고 눈밖에 난 세자를 팽했다고 본 박시백 화백 역시 노론이 이 사건에 끼어든 바는 없었다고 본다.

그러므로 오히려 여기서 중요한건 정병설 교수는 노론이 끼어든 정황이 없다고 봤지만 감독과 각본가들은 그와 다르게 임오화변의 배경에 정치갈등도 일부 포함됐다고 보고 포함시켰다는 것이다. 이건 혜경궁 홍씨로부터 비롯된 설이다. 혜경궁 홍씨는 사도세자의 정신이상 증상에 대해서는 가감없이 적었지만 이에 대해 본심은 아니었고 아버지에게 미움받아 어쩔수 없이 생긴 것이며 둘 사이에 김상로 등 노론인사들이 끼어서 중상모략을 했다고 적었다.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에 사도세자는 "본래는 인자하고 효성스러우신 분께 어쩌다 저런 광증이 생겼는지 망극할 따름"이라는 표현이 적지 않게 나온다.

영화는 정병설 교수의 주장을 골자로 하면서, 세손(정조)이 머리좋고 공부가 취미라 (사도)세자와 달리 영조의 사랑을 받았다는 점을 부각시키고 혜경궁의 담론까지 받아들였다. 즉, 임오화변에 대한 당대부터 현대까지의 연구와 학설들을 굉장히 폭넓게 받아들인 것이다. 고로 닥치고 노론이 만악의 근원이라는 노론 음모론하고는 분명히 다르다.

7.1.3 사도세자의 정신병 묘사

영화는 부자갈등 관계에 초점을 맞춰서 사도세자의 정신병 묘사는 덜 한 편이다. 한중록은 "현대 정신의학지식이 없으면 지어내기 힘들" 내용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이 한중록에선 사람을 마구 죽이다가 나중에 후회했다는 묘사가 있는데, 영화에선 그런 갑자기 성격이 변하거나 후회하는 일 따위가 거의 없다. 그보다는 성격이 예민해서 사나운 부분이 강조된 편이다. 사도세자가 죽인 사람도 의대증을 표현하며 죽인 내시 1명 뿐이다.

작품의 전체적인 완성도보다는 사도세자의 정신병에 더 관심있는 사람들은 KBS 드라마 스페셜의 붉은 달을 참고. 여기서 김대명이 사도세자를 연기했는데 정신병 연기는 여기가 좀 더 사실적이다.

그러나 이덕일은 영화의 정신병 묘사조차 왜곡이라고 주장한다. 물론 사료에 근거하면 영화의 정신병 묘사는 순화된 것이다. 자세한 건 아래의 <이덕일 : "살인마로 둔갑한 사도세자"?> 참고.

7.2 문화부분

조정(궁궐의 정전 앞마당)에 품계석이 없다. 품계석을 설치한 것은 정조 때의 일로 영화를 준비하면서 세세한 부분까지 치밀하게 고증했음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영조 때부터 정조 즉위식까지의 조정에 품계석이 있는 것으로 나왔다면 고증오류가 될 것이다. 그리고 창덕궁의 금천교가 꽤 좁고 긴 모습으로 나왔는데, 금천교는 창덕궁이 창건된 뒤 지금까지도 창건 당시의 모습을 보존하고 있다.# 즉 영화에서 나온 가마꾼이 간신히 지나가는 금천교는 고증 오류인 셈.

작중 청나라에서 보내온 개와 개 그림이 소재로 나온다. 영조 시대에 이들이 있는 게 가능했던건지 의문이다. 국립고궁박물관에 사도세자가 그렸다고 전해지는 개 그림이 있긴 한데, 이게 정말 사도세자가 그렸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청나라 황실에서 라사압소시추 혹은 페키니즈를 키웠다는 건 사실로 보이지만 사도세자가 그렸다는 개 그림과는 너무 차이가 크다. 적어도 궁궐에서 약용 목적으로 따로 개를 길렀던 것은 확인되는 사실.

정병설 교수는 위의 개 그림을 사도세자가 그린 게 맞다는 가정 하에 개 그림의 구도 등에서 영조와 사도세자 사이의 소원한 사이, 그리고 부왕에게 사랑 받고 싶었던 사도세자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 근데 그 개 아프간 하운드잖아 이 견종은 이름 그대로 아프가니스탄 원산으로 지금도 국내에선 보기 드문 견종이다. 영화에서는 해당 그림[1]을 사도세자가 그렸다는 전언을 받아들여 그림에 묘사된 개와 유사한 개를 출연시키려다 보니 한국 토종 개와는 다른 느낌의 개가 등장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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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조룡보)
실제 왕의 곤룡포의 보는 오조룡, 세자는 사조룡, 세손은 삼조룡이다. 그런데 영화에선 그런 거 없이 죄다 오조룡의 보가 달린 곤룡포를 입었다. 다만 세자의 아청색 용포는 잘 고증되었다.

당시의 익선관 치고는 익선관의 높이가 상당히 낮다. 조선에서는 신하들의 사모가 왕의 익선관보다 더 높습니다!

영화의 촬영지는 전북 부안군의 부안영상테마파크와 수원 화성행궁 등이다. 작중에서 나오는 종묘 정전 장면은 실제 종묘에서의 촬영 허가를 받지 못해서 경희궁에서 촬영한 뒤 CG로 배경을 입혔다고 한다.

극 중에 나오는 무관들의 복식은 완전히 틀렸다. 조선시대 금군들의 복장과는 거리가 먼, 완전히 정체불명의 퓨전스러운 복식이다. 그리고 한국 사극의 고질적인 문제인 띠돈매기는 여전히 나오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자면 발도를 하거나, 세자를 뒤주에 넣는 등 양 손이 자유로워야 하는 순간에만 띠돈매기를 통해 칼을 고정시키고, 이외의 경우에는 손에 들고 있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7.3 개별 사건들

  • 영조가 세자빈을 맞이하는 자리에서 "네 폐백까지 받았으니 훈계 한마디 하자~~"라면서 하는 설교는 토씨 하나까지 그대로 사료에 나와 있는 내용이다.물론 "너 왜 웃니?"는 빼고
  • 세자가 대리청정을 하는 장면은 대부분 사실이나 몇가지 내용은 차이가 있다. 대리청정 첫날 함경도 군영을 옮기는 문제로 일어난 일은 신료들부터 왕부자(王父子)의 대화까지 거의 실록의 기록과 일치한다.
  • 세자가 세손을 위해 용그림을 그린 것은 사실이다.
  • 세자가 중간에 뒤주를 나온 것은 사실이다. 초기에는 감시가 그리 엄하지 않아 밖에 나와 바람을 쐬다 혼날까봐 다시 들어가기도 하고 음식을 주기도 했는데, 아마 당시 대신들도 화변 초기에는 "이러시다 말겠지..."하는 느낌으로 받아들인 모양이었나 보다. 영화에선 세자가 뒤주를 박살내고 탈출해 우물가에 뛰어들고 이에 영조가 격노해 뒤주를 봉하는 식으로 더 격렬하게 묘사되었다.
  • 세자가 부채로 소변을 받아 마시는 부분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 부채가 세손을 위한 용그림으로 만들었고 결국 세손에게 전해진 것은 비극을 더하기 위한 창작이다. 바로 위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화변 초기에는 주변인들이 지키고 선 병졸들과 쉬쉬하며 물과 먹을 것을 가져다 주기도 했었다.
  • 임오화변이 있기 전 해(1761년, 영조 37년)에 있었던 세자의 관서행에 대한 묘사는 등장하지 않는다. 실제로는 영조가 이 관서행을 통해 세자가 역모를 준비했다며 뒤주에 가두는 가장 근본적인 사건이었다.
  • 외적인 이야기로 그간 한국 영화, 드라마에서는 대체로 4배에 대한 묘사가 드물었던 편인데, 본작에서는 영빈 이씨의 생일잔치 일로 2배(흔히 일컫는 큰절)와 4배의 차이를 잘 설명하고 있다. 더불어 이 4배는 후반부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에서도 등장하는데 영빈 이씨처럼 헤경궁 또한 중전 또는 대비가 된 적이 없기에 본래는 받을 수 없다. 허나 정조는 자궁(慈宮)이란 호칭까지 만들어 내는 등 어떻게든 편법을 써서 어머니를 궁에서 대비에 준하는 대접을 받을 수 있도록 했다. 역사적 사실과 별개로 영화상의 내용만으로 보면 사도세자와 정조의 어머니에 대한 애정의 공감대를 보여주는 연출이라 할 수 있겠다.[11]

8 평가

8.1 관객

네이버, 다음 둘 다 약 8점대의 평점으로 전반적으로 호평이 많다. 출연 배우에 대해서도 송강호, 유아인 등 주역 배우들의 연기는 물론이고 아역까지 호연이라는 평이 많다. 영화 내용에 대해서도 눈물을 흘리며 봤다는 등의 여운을 느낀 감상평이 많다.

그러나 현재와 과거를 넘나드는 방식[12]때문에 그 시대 역사를 잘 아는 사람이 아니면 정신이 없다는 평이 있다. 또 영화의 군더더기 장면이나 특히 소지섭이 특별출연한 성년 정조의 부채춤 같은 장면이 생각보다 길고 지루했다는 의견이 있다. 이에 대해 이준익 감독은 그 부분 역시 심혈을 기울여 상징성을 살린 장면인데 관객 반응이 좀 섭섭한 모양.(...)# 도중에 잠깐 춤을 멈추고 혜경궁 홍씨와 눈빛을 주고 받았을 때 끝났어야 했다 하지만 극의 골자와 방향을 제시한 정병설 교수부터가 이 부분을 '이상한 군더더기'라 표현한 것으로 보면 딱히 이준익 감독의 뚜렷하지 못한 의도만을 옹호해주기도 어렵다. 과욕이었던 듯하다.

역덕후들은 정말 오랜만에 이덕일노론 음모론이 배제된 수작이 나왔다는 점에서 만족스러워하고 있다.

8.2 전문가

씨네21에선 대체로 무난하거나 수작이라는 평이다. 시네21

일간스포츠 기사 역시 무난하거나 수작이라는 평. 다만 결말이 상대적으로 약해 아쉽다는 평도 있다.

+김봉석 영화 평론가

"가장 익숙한 소재다. 연령층으로 봤을 때 40~50대도 유입할 수 있는 영화다. 누구에게나 극적이고 흥미로운 소재가 될 수 있다. 하지만 많이 다뤘던 이야기다. 관객이 피로감을 느낄 수 있다. 강점이 될 수도 있지만, 약점이 될 수도 있다."

+송효정 영화 평론가

"웰메이드 사극이다. 무거운 주제를 감독의 연출력과 배우의 연기력으로 잘 풀어냈다. 다양한 세대가 어울려 볼 수 있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전반적으로 높은 만족감에 비해 결말이 약하다."

박혜은 <맥스무비> 편집장은 10점을 주며 극찬하기도 했다.

"다 아는 이야기다. 그러니 무엇을 새롭게 보여주겠는가? 이준익 감독은 이 질문 자체를 부질없게 만든다. 사도는 모든 것이 새롭다. 하나뿐인 아들을 뒤주에 가둬 굶겨 죽인 왕의 잔혹사, 즉 박제된 이미지와 이야기에 함몰됐던 시선을 인간에게 돌리자 전혀 다른 세계가 열린다. 시간을 초월해, 온 세상의 부모와 자식이 보인다. 영조와 사도의 마지막 대화, 정조의 춤사위가 내 것인 듯하여 오장육부로 울었다. 송강호, 유아인은 물론이려니와 이름을 하나씩 거론할 것 없이 모든 배우가 무시무시하다. 이토록 인간을 알알이 헤아린 영화를 본 적이 없다. 그야말로 떳떳한 이준익의 걸작이다."

8.3 음모론자들의 비난

8.3.1 황진미

황진미임오화변을 사사화(私事化)[13]되게 했다고 주장한다. 사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 박시백 화백이 주장했듯이(영조실록 편), 임오화변과 같은 거대한 사건이 일개 개개인의 감정과 행동 때문에 일어날 수도 있다는 것을 신뢰하지 못하는 것이 바로 음모론이 만들어지는 이유 중 하나이다. 사람들은 큰 영향을 미친 큰 사건에는 그 이유와 배경 역시 크다고 생각하기 쉽기 때문이다.

그런데 황진미혜경궁 홍씨 집안이 그 집안이 사도세자의 죽음에 기여했으며 이로 인해 정조의 즉위 후 멸문 당한 것으로 잘못 알고 있다. 거기다 이덕일의 사도세자 관련 역사책을 사료분석에 근거해 나온 책이라고 주장했다. 관련 역사사실에 대한 공부를 하지 않은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이덕일/비판, 황진미, 정병설 문서를 참고.

일간스포츠에서 대놓고 실제 "역사적 사실"(이라고 본인만 생각하는)에 근거해서 비판을 하였다. 일간스포츠 기사

역사적인 사건을 부자간의 갈등으로 축소했다. 영조와 사도 세자를 이용해 386세대의 부모와 2030 자식 세대의 갈등을 보여줬다. 그 점이 흥미로웠다. 송강호·유아인의 연기는 말이 필요 없다. 반면 전체적으로 정통사극을 표방했다고 했는데 정통사극과는 거리감이 있었다. 정통사극은 정치적인 해석과 역사적인 사실이 훨씬 더 가미돼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특히 후반부로 갈수록 이준익 감독이 균형감을 잃었다. 이에 이야기가 끝까지 팽팽하게 가지 못했다.

사도세자임오화변에 대해 제대로 공부도 하지 않고 이덕일의 책을 근거로 심각한 오류까지 범하는 사람이 역사적인 사실이 가미돼 있지 않은 것을 근거로 균형감을 잃었다는 평을 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영화평을 했다는 황진미는 정작 역린의 평점을 사도보다 높은 7점을 줬는데 역사적 사실은 사도가 더 충실하다.

황진미는 9월 24일에 영화비평을 내기도 했다. 시작부터 이덕일의 책을 길게 언급하더니 이런 평을 썼다.

그 결과 영화의 교훈은 “이들 부자를 반면교사 삼아, 자식들 너무 몰아세우지 마라. 물론 돈 들여 키워놨더니 취직도 못하는 자식들이 한심하겠지만, 그걸 노골적으로 드러내면 자식들은 ‘오타쿠’가 되고, 그러다 이런 참변이 벌어질 수도 있으니, 자식 죽일 생각 아니면 막말과 꼰대질을 삼가라” 정도의 명절 덕담이 되는 것이다. 작품성과 무관하게, 딱 그 정도의 의미에서 추석 가족영화로 추천할 만하다.

어지간히 마음에 안들었는지 9월 25일에도 다른 매체에 비평을 실었는데, 이덕일의 노론 음모론을 길게 언급하는 등 전체적인 내용은 대동소이하지만, 끝에 다른 의견을 덧붙이며 이번엔 자신의 정치적 견해와 결부지었다.

그러나 사도의 입장에서 영화를 곱씹어 보면 전혀 다른 교훈이 도출된다. 사도세자는 왜 죽었는가? 그가 미쳐서이든 정치적인 이유에서이든 정말로 죽게 된 원인은 '아버지를 죽이려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를 달리 말하면, 그가 죽은 이유는 '아버지를 죽이려다 못 죽였기 때문'이다. 그가 칼을 빼들고 영조의 침전까지 갔지만 죽이지 못했을 때, 그는 이미 죽음과 마주친 것이다. 그 순간 그에게는 딱 두 가지 길이 있었다. 아버지를 죽이든지, 아버지에게 죽든지. 가령 이방원은 왕자의 난으로 실권을 장악한 뒤 이성계를 상왕으로 추대하였다. 사도세자는 이방원처럼 아버지를 상징적으로 죽이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이 죽임을 당한 것이다. 칼까지 빼들고 아버지를 죽이지 못하면, 곧바로 내가 죽는다. 기억하자. 1980년 5월 15일 서울역 회군이 있은 뒤 며칠 만에 광주학살이 시작되었다. <암살>의 아버지를 죽이기 위해 나선 딸은 영웅이 되고, <사도>의 아버지를 죽이지 못한 아들은 뒤주 속에서 죽는다. 청산하지 못하면 역청산 당한다.

황진미는 어이 없게도 봉건왕조제인 전근대 역사와 민주주의가 성립된 현대역사를 마치 같은냥 생각하고 대입한다. 이건 군사독재정권도 하던 짓인데 황진미는 똑같은 행위를 했다. 광기에 젖은 상태에서 툭하면 사람을 살인했던 사도세자의 행위는 옹호받을 상황이 아니다. 그런데 이런 역사적 사실을 무시하거나, 아니면 모르고 있는 것이다. 또 극중 나오는 사도세자의 살부에 대한 당위성을 주장하며 이를 1980년 서울역 회군과 광주민주화운동에 비교한다(...)

그리고 황진미는 정치갈등과 이덕일의 노론 음모론을 구분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정치갈등이 실재했다는게 곧 이덕일의 노론 음모론을 가리키는 건 아니다. 정치갈등 자체는 이미 1980년대부터 나오던 것이지 이덕일에서 시작한 것이 아니다. 이덕일의 문제점은 거기에 근거없는 음모론에 대한 확신과 극단적인 과장을 붙혀 노론 음모론을 만든 것이다. 정치 갈등 자체는 한중록의 서술을 완전히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8.3.2 이덕일

이 영화는 이덕일의 주장을 대놓고 까는 수준의 작품이면서도 상당한 흥행을 기록하고 있다. 결국 이덕일은 이 영화를 "당파싸움에 휘말려 억울하게 죽은 사도세자를 정신병자 살인마로 둔갑시켰다"면서 비난하기 시작했다. 나의 사도세자는 그렇지 않아! 이덕일의 대중적 유명세는 특정 당파를 만악의 근원으로 지목하는 음모론에 바탕을 둔 것이었고 그 중에서도 가장 자극적인 사건이 임오화변인지라 위기감을 느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실제 사료와 비교해보면 영화에서 묘사된 사도세자의 광증은 오히려 순화되어 있다.

"네가 왕손의 어미를 때려죽이고 여승을 궁에 들이며, 서로(西路)에 행역하고 북성(北城)으로 나가 유람했는데, 이것이 어찌 세자로서 행할 일이냐? 사모를 쓴 자들은 모두 나를 속였으니 나경언이 없었더라면 내가 어찌 알았겠느냐? 왕손의 어미를 네가 처음에 매우 사랑하여 우물에 빠진 듯한 지경에 이르렀는데, 어찌하여 마침내는 죽였느냐? 그 사람이 아주 강직하였으니, 반드시 네 행실에 대해 간언하다가 이로 말미암아서 죽임을 당했을 것이다. 또 장래에 여승의 아들을 반드시 왕손이라고 일컬어 데리고 들어와 문안할 것이다. 이렇게 하고도 나라가 망하지 않겠느냐?”

『영조실록』 99권, 영조 38년 5월 22일 을묘
타고난 자질이 탁월하여 임금께서 매우 사랑하셨는데, 10여 세 이후로 점차 학문을 게을리하게 되고, 대리청정 이후로는 질병이 생겨 천성을 잃었다. 처음에는 대단치 않았기에 신민들이 낫기를 바랐지만, 정축년(1757)과 무인년(1758) 이후로는 병증이 더욱 심해져서 그 발작할 때에는 궁녀와 내관을 죽이고 죽인 뒤 문득 후회하였다. 임금이 매번 엄한 하교로 질책하니, 세자가 의심하고 두려워하여 질병이 더해갔다.

『영조실록』 99권, 영조 38년 윤5월 13일 을해
세자가 내관, 나인, 하인들을 죽인 것이 거의 백여 명이오며, 그들에게 낙형을 가하는 등 차마 보지 못할 일은 이루 말로 다할 수 없습니다. 그 형구는 모두 내수사 등에 있는 것인데 한도 없이 갖다 썼습니다. …… 지난번 제가 창덕궁에 갔을 때 몇 번이나 저를 죽이려고 했는데, 겨우 제 몸의 화는 면했습니다만 지금 제 몸을 돌아보지 않더라도 우러러 임금의 몸을 생각하면 어찌 감히 이 사실을 아뢰지 않겠습니까?

『모년기사』 · 『대천록』 폐세자반교문 중 선희궁의 말
사도세자는 휘는 선이요, 자는 윤관이라. 재위 11년 을묘년(1735년) 정월 21일에 탄생했는데 영빈이 낳았다. 나면서 남달리 영특했고 자라면서 문리 역시 통해 거의 조선의 희망이었다. 오호라, 성인을 배우지 않고 도리어 태갑을 배워 망할 일로 가려고 하니 슬프다. 스스로 깨닫고 마음을 잡기를 가르치고 수시로 말했으나 소인배 무리를 가까이 해 장차 나라를 망칠 지경이었다. 오호라, 자고로 무도한 임금이 어찌 없다 하리오만 세자 시절에 이런 자를 나는 들은 바 없었다. 그 근본은 넉넉하고 좋게 태어났으나 마음을 잡지 못해 미치는 데로 흘렀다. 새벽부터 밤까지 태갑의 뉘우침 같은 것을 바랐으나 마침내 만고에 없는 일에까지 가서 머리 센 아버지가 만고에 없는 일을 저지르도록 했구나. 오호라, 애석한 것이 그 자태요. 한탄스러운 것이 이 적는 글이다. 슬프다. 이 누구의 잘못이란 말인가?

영조가 쓴 사도세자 묘지명

그런데 영화에서 사도세자가 죽인 사람은 딱 한 명이고 사도세자가 죽인 경빈 박씨도 나오지 않는다. 그런데 이덕일은 이 정도도 역사 왜곡이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영화의 역사 왜곡 여부를 떠나 아예 이덕일이 비난을 했는지조차 모르는 사람들이 대다수다.

이덕일의 비난

또 이덕일은 "대한제국을 팔아 넘긴 마지막 노론 당수 이완용이 고종에게 사도세자 살해에 가담한 정후겸의 신원을 여러 차례 요청한 데서도 이 사건의 본질은 명확하다"고 말한다. 이 역시 오류다. 임오화변 당시 정후겸은 불과 13살에 화완옹주의 양자도 되기 전이었다. 이완용이 마지막 노론 당수라는 증거도 없다. 또 이완용이 신원을 요청한 것은 정후겸 뿐만 아니라 무려 77인이나 되며 그 중에는 남인 이현일과 윤휴, 북인 정인홍 등등 서인과 노론에게 숱한 비난을 받은 인물까지 있다. 특히 윤휴는 이덕일이 송시열과 대비하여 '백성의 벗이 되고자 했던 시대의 개혁가'라고 극찬한 인물이다! 그 목록에는 심지어 윤원형, 김익순 같은 인물까지 포함되었으며 시기 또한 고종이 아닌 순종 때다. 즉 '대한제국을 팔아 넘긴' '이완용'을 제외하면 문장 전체가 오류 아니면 왜곡이다.

9 OST

오프닝에 나오는, 관객들이 가장 주목한 OST. 이곡은 영화에서 맹인 무당역을 맡았으며 시그널에도 출연한 배우 정해균이 직접 부른것이다.[14]

메인 테마. 생황피리를 사용했다고 한다.

10 트리비아

  • 추석을 맞아 영화 장면을 편집한 추석 예절 영상을 공개하였다. 모두 실제 극에서는 비극성을 가진 장면인데도 현실에선 묘하게 매치되는 것이 은근히 웃기다.
  • 영화 시작부와 회상을 거듭해 사도가 경희궁으로 올라가는 장면 등에서 나오는 '나무아미타불~' 하는 음악이 귀에 맴돈다는 평가가 많다. 이 때문에 OST를 공개해달라는 요청이 많았는데 9월 25일 OST가 공개되었다. 관객들에게 특히 주목받은 그 부분이 나오는 트랙은 아모리 - 만조상해원경, 진혼 - 만조상해원경, 무덤방 - 망자해원경 - 옥추경 이 3곡이다. 이 곡들은 무속 경전이 대체로 네글자 네글자 대구로 이루어져 리듬감이 강하다. 또한 맹인 무당이 사도세자 앞에서 굿을 하며 옥추경을 부르는데, 해당 역을 맡은 배우 정해균이 실제로 박수무당에게서 2달간 배워 불렀다고 한다.
전체적으로 음악이 좋다고 말 할 수 있는데 음악감독이 방준석 음악감독인데 이준익 감독과 한 작품만 봐도 라디오 스타소원이 있고 베테랑, 공동경비구역 JSA같은 전설적인 작품에 음악도 담당하셨다. 영빈 이씨의 환갑후 행차 장면같은 인상적인 음악으로 영화를 돋보여주었고 특히 타이틀 곡인 '사도' 라는 곡은 방준석 음악 감독과 함꼐 진윤경이라는 뮤지션과 함께 피리, 생황으로 작업한 곡인데 영화의 슬픈 분위기를 살려주고 마지막 장면에서 관객들의 눈물을 빼주는 역할을 톡톡히 해주었다. 청룡영화상에서 음악상을 수상하였다.
  • 유아인은 장옥정 사랑에 살다숙종 역으로 출연한 바 있는데. 그 사실을 알고나서 극중에서 영조(송강호)가 숙종 대왕 얘기를 하는 걸 들으면 묘하다. 아버지가 아들로 환생했다 배우 개그 근데 그 숙종은 영조를 안 낳았잖아? 연잉옹주
  • 한편, 영화가 흥행을 거두자 사도세자의 무덤인 융릉에 참배객 및 관광객이 많이 늘어났다고 한다.
  • 강남의 학부모들로부터 반응이 좋다고 한다. 기사 내용을 요약하자면, 부모 말 안 듣고 공부 안 하면 사도세자처럼 비참해질 것이라는 것을 자녀에게 주입시키고자 이 영화를 보게 한다는 것. 그럼 이 양반들은 애가 공부 안 하면 방에 가두고 밥도 안 줘서 굶겨죽일 작정인가 부모가 지나치게 자식 갈궈 비참하게 만든다는 점 하나는 비슷하다. 당연하지만 이 영화의 주제와는 정 반대이다. 그렇지만 모두가 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고, 부모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나뉘는 듯하다.
한편 이 영화를 본 강남의 청소년들은 사도세자가 갇힌 뒤주가 마치 자기 공부방 같다고. 참고로 실제 영화상에선 예법보다 인간이 먼저지 않냐 등의 말이 나오고 사도세자의 뜻을 이어받은 정조가 왕이 되면서 새로운 시대에 대한 희망으로 끝나는데, 공부 안 하면 잘못돼서 사도세자처럼 된다는 건 현실에 갇혀있는 영조의 구시대적 발상과 같다. 즉 아주머니들이 영화를 악의적으로 왜곡해서 아이들을 공부시키려는 것이다. 사실 여지간히 인지능력이 떨어지지 않고서야 그런 해석을 할수는 없을것이고 그냥 강남 학부모를 악의적으로 풍자하려는 기사일듯
  • 극 중 영조의 자결하라는 명에 사도세자가 돌에 머리를 박는 장면이 있는데, 이 장면에서 유아인은 실제로 돌바닥에 머리를 박았다. 원래는 돌에 스펀지를 덧대고 그 위에 머리를 박기로 되어 있었다고. 그래서 극 중 머리를 박은 후에 유아인의 이마서 흐르는 피는 진짜 유아인의 피다. 이 씬의 촬영이 끝나자마자 응급처치를 하고 분장을 해서 촬영을 계속 진행했다고 한다.
  • 2015년 청룡영화상 시상식 때 축하 공연을 한 이은결이 이 영화를 패러디하였다. 함께 출연한 서유리가 '오늘 출연하신 분들을 보다가 옆(이은결)을 보면 한숨이 나오내요'라고 말하자 귀를 씻고 양치한 다음 '별일 없지?'(...). 이 때의 배경음악도 아모리 - 만조상해원경. 다른 참석자들이 빵 터진 것은 물론이고 송강호 본인도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1. 포스터를 자세히 보면 영조와 사도세자의 얼굴에 비치는 빛이 서로 반대 방향이다. 서로 지향하고자 하는 점이 정반대인 것을 잘 표현했다.
  2. 영조가 아들보다 자신을 더 우선시하고 있음을 담고 있는 대사다.
  3. 그러나 실제로 조선시대 60대가 현재 90대라고 보기에 무리가 있는 것이 비율적으로 볼 때 조선시대에도 60세 넘게 사는 사람이 지금 90세 넘게 사는 사람보다 많았고, 80살 넘게 산 사람도 생각보다는 꽤 있었으며 이는 인구비율로 보면 지금 110세 넘게 사는 사람들보다 많았기 때문이다. 차라리 나이도 그리 많지 않은데다가 동안이기까지한 문근영이 자기보다 10살이나 많은 배우 소지섭의 어머니로 나오는 장면이라 그렇게 억지로라도 늙어보이게 표현하는 게 나을 거 같아서 그랬다고 보는 게 더 자연스러울 수 있다.
  4. 이후 혜경궁 홍씨화완옹주의 사이가 매우 나빠진 것도, 화완옹주가 친모인 홍씨보다도 더 지나치게 정조와 가까이 지내는 모습을 섭섭해 하고 이것이 증오로 악화되었다는게 정설이다.
  5. 4번 절하는 것. 왕이나 중전만 받을 수 있는 대접이다.
  6. 이 때 내금위장이 앞을 막자 내금위장의 지위와 이름을 묻고 "내 너를 기억해두겠다." 란 한 마디로 데굴멍시키고 뒤주로 간다. 참고로 이때 정조의 나이 10살.ㅎㄷㄷ
  7. 다만 이는 생각을 해 봐야 할게 이 영화는 영조와 사도세자만의 이야기가 아닌 영조, 사도세자, 정조 3대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또한 정조도 엄연한 임오화변 관련인이다. 특히 이 영화는 영조가 세손을 자신의 후계자로 만들기 위해 사도세자를 희생시켰다는 설을 따르고 있기 때문에 더욱 관련될 수 밖에 없다.
  8. 앞서 언급한 할아버지가 기뻐하기에 자신의 의지와 별개로 공부에 열중해야 하는 현실에 대한 거부감을 아버지에게 털어 놓은 시기로, 사도세자, 정조 부자가 처음으로 공감대를 이루었던 때다.
  9. 실제로 조선조에 왕이 죽으면 이렇게 했다. 요즘은 뜸하지만(그래도 더킹 투하츠에서도 이 풍습이 묘사되었다) 2000년대 초 TV사극들만 해도 이 장례 풍습을 묘사한 경우가 많았다.
  10. 홍봉한이 이 그림을 부채로 만들어 사도세자에게 전했다는 건 영화에서의 창작인 듯.
  11. 사도세자가 영빈의 회갑연에서 어린 정조에게 4배를 요구하자 정조는 이를 받아 들였고, 이후 영조가 어린 정조에게 이가 예법가 어긋나는 행위임을 지적하자 인간이 예보다 더 중요하다며 가족애와 아버지에 대한 이해심을 드러냈다.
  12. 이준익 감독의 다른 영화 동주도 사도와 비슷하게 현재와 과거를 교차시키는 전개 방식을 채택하였다.
  13. 사회 및 조직의 문제가 아닌 개개인의 문제로 여기는 것.
  14. 이후 2016년 라디오 스타에서 비화를 털어놓기도 했는데, 극단에서 창을 배웠던 적은 있지만 이정도로 비중있는 배역인줄 모르고 덜컥 맡아서 촬영 전까지 직접 절에서 경 읊는 법을 배웠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