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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월 24일 (화) 12:11 기준 최신판
- 기자 김경문은 김경문(기자) 문서로.
OB 베어스 현역 시절.
다시는 볼 수 없는 두산 베어스 감독 시절.
NC 다이노스의 감독.
2015년 시즌 개막전에서 김태형 감독과 함께.
NC 다이노스 No.74 | |
김경문(金卿文 / Kyong-Moon Kim) | |
생년월일 | 1958년 11월 1일 |
국적 | 대한민국 |
출신지 | 인천광역시 |
학력 | 대구옥산초-부산동성중-공주고-고려대 |
포지션 | 포수 |
투타 | 우투우타 |
프로입단 | OB 베어스 창단 멤버 |
소속팀 | OB 베어스(1982 ~ 1989) 태평양 돌핀스(1990) OB 베어스(1991) |
지도자 | 삼성 라이온즈 1군 배터리코치 (1994~1996) 두산 베어스 1군 배터리코치 (1998~2003) 두산 베어스 감독 (2004~2011)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감독 (2008) NC 다이노스 감독 (2012~) |
종교 | 불교 |
두산 베어스 역대 감독 | ||||
김인식 (1995~2003) | → | 김경문[1] (2004~2011) | → | 김진욱 (2012~2013) |
NC 다이노스 역대 감독 | ||||
팀 창단 | → | 김경문 (2012~) | → |
1 개요
2 선수 및 코치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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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고등학교 시절 김경문 |
인천 출신으로 학창 시절 대구, 부산 등으로 이사를 자주 다니며 떠돌다, 당시 야구부를 재창단한 공주고등학교에 전학을 가면서 야구 인생이 바뀌게 된다. 야구부 주축이 되어 1977년 대통령배 야구대회를 우승을 했고 그로 인해 고려대학교에 진학 할 수 있게 된다. 고려대학교[2]를 졸업하고 1982년 OB 베어스의 창단 멤버로 프로에 입문했다. 선수 시절 포지션은 포수이며, 전 KIA 타이거즈, kt 위즈의 감독인 조범현과 같은 OB 원년 멤버 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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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역 시절 타격은 좋게 말하면 그저 그랬다. 사실 말이 좋아 그저 그랬다는 거지, 프로 10년간 통산 타격성적이 타율 0.220, 6홈런(...), 126타점에 불과하니 타격 실력은 떨어졌다고 할 수 밖에 없다.[4] 당시 조범현과 주전경쟁을 하며 상대적으로는 타격이 좋았다고 평가된다. 그래도 1982년 한국시리즈에서 우승 멤버로서 활약하면서 공을 받았던 선수다. 또 1988년 장호연의 공을 받으며 개막전 노히트노런을 겪어보기도 했다. 조범현과의 치열한 주전 경쟁은 김경문은 근소한 판정승으로 끝나는데, 이는 출장 경기수에서 조범현에 비해 우위를 점하고 있는 것으로 증명된다.[5]
OB에서 평범한 선수 생활을 이어가다가 1990년 태평양 돌핀스로 트레이드되었지만 1년만에 다시 OB로 복귀하여 현역 생활을 마감했다.
현역시절 김태형과 함께 |
1992년 미국 애틀랜타로 건너가 지도자 연수를 받았고, 1994년부터 1996년까지 삼성 라이온즈 배터리 코치를 지냈으며[6] 1998년부터 두산 베어스에서 배터리 코치를 맡았다.
3 감독 생활
3.1 두산 베어스 시절
2003년 시즌 종료 후, 선동열 감독의 영입을 둘러싼 두산과 LG의 경쟁 속에서 두산을 9년간 이끈 김인식 감독이 사퇴하게 되었다. 그러나 정작 선동열은 삼성의 수석코치로 이동했고, 공석이 된 감독 자리를 두고 고심하던 두산 수뇌부는 당시 무명에 가깝던 배터리코치 김경문의 감독 승격을 발표했다.[7]
부임 당시 2002년과 2003년 연속 PO 진출 실패에 특히 2003년은 롯데 자이언츠가 아니었으면 꼴찌를 기록해도 할 말 없는 성적이었기 때문에 장수할 것인지 의문스러웠지만, 2004년 부임 첫 해부터 팀을 3위에 올리며 PO에 진출시키면서 일약 젊은 명장으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일부 선수들이 병역비리로 빠졌음에도 2004년에는 플레이오프에 진출했고, 2005년에는 시즌 마지막 날 SK 와이번스를 제치고 정규시즌 2위에 올라 PO에서 한화 이글스를 누르고 한국시리즈에 올랐지만, 2005년 한국시리즈에서 맞붙은 삼성 라이온즈에게 0:4 스윕패를첫번째 호구 당하고 말았다. 그리고 2006년에는 주포인 김동주의 부상 속에 5할 승률을 넘기면서 선전했지만, 결국 PO 진출은 간발의 차로 실패했다. 하지만 이 때부터 발굴한 이종욱과 고영민 같은 선수들을 적극적으로 중용하면서 팀 타선의 체질을 개선하더니 2007년과 2008년에는 연속으로 한국시리즈에 진출한다. 김성근 감독의 SK의 벽을 넘지 못하면서 2년 연속 분패. 대신 2008 베이징 올림픽 대표팀 감독이 되어 9전 전승으로 금메달을 차지하면서 자신의 야구가 강력하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하지만 두산 구단의 외국인 선수 지원도 약간 아쉬웠고, 투수 운용이 야수 운영의 그것에 미치지 못하면서 한 끗 부족한 운영으로 인해 한국시리즈 우승에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 있는 정규시즌 우승에 실패했다. 2009년과 2010년에는 정규시즌 3위를 차지하여 준PO에서 롯데를 격파하고 PO에 진출, 두 번의 PO에서 모두 5차전까지 가는 처절한 접전 끝에 각각 SK와 삼성에게 PO에서 패퇴하면서 두산에서 우승의 꿈을 이루는데는 실패했다.
번트를 거의 대지 않는 강공 위주의 공격을 주로 펼쳤고, 김인식 시절의 뻥야구 대신 탄탄한 수비, 발을 이용한 주루플레이, 불펜야구를 중점에 두는 스타일로 팀을 변화시켰는데 이는 기록에서 자세히 찾아볼 수 있다(팀홈런, 득점, 실점, 방어율 하락, 도루 증가). 공격력이 전체적으로 하락한 이유는 팀의 전성기를 이끌던 KBO 리그의 전설적인 클린업 우동수 트리오와 정수근이 김동주를 제외하고 타팀으로 모두 이적해버리는 바람에 줄어든 공격력 때문. 이를 젊은 선수들을 중용하고, 도루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면서 극복했다.
분명 타선의 체질 개선과 발야구 정립, OB-두산 역사상 제일 높은 승률 기록등 큰 공이 있었던 반면에 쓸 만한 투수는 전부 불펜으로 돌려 감독으로 있는 동안 제대로 된 선발 투수 하나 만들어 내지 못하고, 임태훈, 이재우, 고창성 정재훈등 믿는 투수만 주구장창 기용하여 승리하는 방식으로 비난받고, 이런 운영이 누적이 되면서 두산의 투수력은 김경문 체제 후반기로 갈수록 약화되었다. 무리하게 우승을 노리는게 몇 년째였고, 결국 그 후유증이 2011년에 대폭발했다.
3.2 2011년 두산 베어스 감독 사퇴와 NC 다이노스 감독 선임
- 우승을 향해 야심차게 시작한 2011 시즌. 4월 3일 개막전에서 김현수와 김동주의 솔로포를 앞세운 승리로 시즌을 기분 좋게 시작했다. 4월 한달 동안 2~3위를 기록하며 시즌을 기분 좋게 시작하는 듯 했으나, 5월 들어 그의 선수관리에 치명타를 입은 사건이 발생하면서 돌아갈 수 없는 다리를 건너고 말았다.
하지만 5월의 마지막과 6월의 시작이었던 SK와의 3연전에서는 스윕당할 뻔 하다가 2승 1패로 위닝시리즈를 가져가게 되면서 기세를 살리는 듯 했으나 연이은 삼성과의 3연전에서 위닝시리즈를 내준 것을 시작으로 다시 연패를 기록하며 참담한 성적을 거두게 되었다.
결국 두산이 7위까지 내려간 상황에 결국 2011년 6월 13일 두산 베어스의 공식사이트에 사퇴에 관한 변을 올리면서 자진 사퇴하였다.
"7년 동안 고생해 준 선수들이 부상이다. 감독인 내가 마음이 아프고 미안해서 더는 냉혹하게 분발을 촉구하지 못하겠다. 정말 좋은 선수들과 함께 해 행복했다."
이 사퇴 소식에 어디의 누구를 막론하고 모든 두산 팬들은 단체로 패닉에 빠진 모습을 보여 주었다. 사실 사퇴 의사는 5월부터 밝혀 왔다고 한다. 어린이날 더비인 5월 5일 LG전의 처참한 패배 이후 사퇴의사를 밝혔으나 구단에서 말렸고, 재차 사퇴의사를 강하게 밝힌 것이 결국 받아들여진 것.
이후 감독은 김광수 수석코치가 대행하게 된다.
당분간 미국으로 건너가 가족들과 함께 휴식을 취한다고 한다. 그렇게 오래 쉬진 않을것이라고 밝힌 만큼 2011 시즌이 끝나고 어느 팀의 감독을 맞게 될지 귀추가 주목되는 상황이다. 자리가 위태로운 모 팀의 어떤 石이란 별명이 붙은 감독이 있는데...
그런데 2011년 연말쯤에 돌아올 것으로 알려진 김경문 감독이 8월 말에 갑자기 귀국했다. 물론 겉으로는 자신의 이름을 딴 서울시 송파구 방이동 한성백제박물관 건너편의 "문 카페" 알고보니 moo NC afe였다 카더라 의 개업 때문에 귀국했다지만 NC 다이노스가 2012년 드래프트가 열리는 2011년 8월 25일 이후에 창단 감독을 선임할 것이라고 밝혀서 NC의 초대 감독으로 낙점된 게 아니냐라는 소문이 돌고 있다. 게다가 김경문 감독의 오른팔로 잘 알려져 있었던 박보현 두산 베어스 1군 매니저가 그 무렵 두산 구단에 사직서를 제출하면서 더욱 더 가속화되었다.[8]
그리고 8월 31일 NC 다이노스의 창단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기사 선임되면서 인터뷰로 두산에서 받은 사랑 NC에서 보답하겠다라고 말같지도 않은 소리을 해서 두산 팬들의 어그로를 대량으로 끌었다. 그리고 2015년에 두산 우승에 큰 공헌을 하시면서 약속을 지키셨다 두산 선수단은 시즌 초반에 많이 까먹은 승수를 서서히 복구하면서 4강을 향한 희망을 키워 나가던 중이었는데, 팀을 끝까지 책임지지 않고 자진 사퇴한 감독이 고작 2달도 안 되어 신생팀의 창단 감독으로 가게 되면서 두산팬들은 집단 멘붕에 빠졌다. 두산 베어스 갤러리에서는 문 카페 에 축하 화환을 보냈다가 NC 다이노스 감독 부임 소식을 듣고 급하게 화환을 취소하려 했지만 간발의 차로 실패하고 말았고,[9] 두산 측에서는 감독 선임 소식을 듣자마자 곧 바로 잔여연봉을 끊어버렸다.[10] 그 후의 행보는 더 가관인데, 11시즌이 끝나기도 전인데 갑자기 9월부터 두산의 주요 코치진들[11]의 이름이 구단 홈페이지에서 사라져버리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 일어났다. 시즌 중간에 자진 사퇴한 감독이 2달만에 다른 팀의 감독으로 가버렸고, 그 시즌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주요 코치들을 빼간 것이다.
3.2.1 중도 사퇴에 대한 비판
2016 현재 KIA 감독인 김기태는 자진 사퇴 후의 행적이 그리 나쁘지 않았음에도 그 사퇴 하나만으로 런기태라고 LG 팬들에게 비난을 받았는데, 김기태가 KIA 타이거즈 감독으로 선임된건 적어도 정규시즌이 끝나고 난 후였고 코치를 유출시키는 것과 같은 행동도 없었다. 시즌 중간에 팀을 버린것도 모잘라서 잔여 연봉을 받는 사람이 두 달만에 다른팀 감독이 되고 시즌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코치들도 빼았어간 기본적인 상도덕도 없는 역대급 악질의 통수를 치고 간것이다.
그나마 두산 베어스는 김경문 감독 사퇴 당시 7위였던 순위를 최종 5위로 끌어올리면서 시즌을 마감한다. 재임 시절 명성을 날렸던 KILL 라인은 김경문 감독의 무분별한 혹사 이런 것도 김성근 감독에게 묻혀서 콩로 인해 다시는 그 모습을 되찾지 못했고[12], 두산은 그 이후로 항상 불펜이 약점인 팀이 되면서 가을야구에 도전할 때마다 이 부분이 아킬레스건으로 남게 되었다. 심지어 두산이 최종우승을 거머쥔 2015년에도 핵심 불펜진의 입대와 이적 등으로 인해 안 그래도 없는 불펜이 개발살난 와중에 정규시즌 중 뜬금없이 이천에서 튀어나온 투수 자원들이 있긴 했지만, 불펜도 불펜인데 선발진 또한 부상과 부상과 부상같은 이유로 인해 구멍이 나버려서 그 자원들을 선발 로테이션에 포함시킬 수밖에 없었고, 기대를 모았던 불펜 자원들도 부상이나 직전 시즌의 혹사 여파로 인해 무너져버리는 바람에 마무리로 대각성한 이현승과 그래도 사람구실은 해 준 함덕주, 진야곱 정도를 제외한 불펜진은 모두 불안불안했을 정도. 심지어 이 3명 중에도 정규시즌 내내 불펜에서 활약한 선수는 함덕주 뿐이다. 이현승은 개막 직전 당한 부상으로 인해 시즌 중반이 되어서야 출전할 수 있었고, 진야곱은 시즌 초반 구멍난 선발 로테이션을 땜빵하게 되면서 후반기에 들어서야 불펜으로 전업했기 때문이다.
2015년 포스트시즌에서 제대로 역할을 수행해줬던 두산의 불펜투수는 준플레이오프 MVP이자 포스트시즌의 미스터제로와 시즌 내내 말아먹다가 한국시리즈에서 대각성하신 분을 제외하면 없었다고 봐도 무방하다.[13]
그렇다고 재임 시절 선발진이 멀쩡한 것은 더욱 아니었는데, 리-랜-비-비-비 시절에서 보듯이 두산은 선발이 강한 팀도 아니었다. 후임이었던 김진욱 감독이 받은 선발진은 외국인 에이스 니퍼트와 토종 에이스 김선우가 끝이었다. 게다가 김진욱 감독은 너무나도 답이 없는 뒷문을 커버하기 위해서 용병 투수로 2012년에 마무리 스캇 프록터를 데리고 올 수밖에 없었다.[14] 다행히도 김승회, 유희관, 노경은등의 자원을 잘 활용하면서 김진욱 감독이 두산 선발진을 살려내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이는 김진욱 감독의 공이지 김경문이 투수진을 박살내놨다는 점에는 부정의 여지가 없다.
야수진은 그나마 상황이 좀 나았다고 볼 수도 있지만, 김경문이 팀을 떠난지 3년 후인 2014년 두산 베어스의 라인업을 기준으로 설명하자면, 김경문 감독 시절에 중용되었던 선수는 김현수, 대수비, 대주자 및 제4외야수 롤이었던 정수빈 그리고 내야 유틸로 써먹었던 오재원이 끝이다. 양의지는 사실상 경찰청에서 키워서 보내준 것이고, 본인이 타격 능력을 바탕으로 기회를 잡은 것이지 김경문이 딱히 큰 공을 세웠다고 할 만한 점은 없다. 민병헌 또한 입대전부터 적지 않은 기회를 받기는 했지만 경찰청에서 타격이 일취월장했고, 제대했을 땐 이미 감독이 바뀌어 있었다. 국가대표 2루수에까지 뽑혔었던 고영민은 내부경쟁자인 오재원에게 2011년부터 밀리기 시작했다. 오재원의 경우 내야 유틸이 가능하다는 점 덕분에 1군에서 계속 쓰이긴 했지만, 김경문의 양아들 고영민 부활 프로젝트의 희생양으로 인해 선발 출장을 보장받지 못했다. 오재원이 완벽히 두산 2루수 주전을 꿰찬 것은 고영민이 완전히 퇴물이 되어버린 11년 시즌 이후였다.
당시 주전 유격수였던 손시헌은 김경문 시절엔 잘 했으나 2013년 들어서 부진하더니 타격에서 각성하기 시작한 김재호에게 밀리기 시작했으며, 시즌 후 FA를 취득해 이종욱과 함께 NC로 갔다. 그 손시헌에게 밀려 10년 가까이를 백업으로 있었던 김재호는 '13시즌부터 각성의 기미가 보이더니 '15시즌에는 전반기 팀의 MVP로 뽑히고 9번 타순에서 타율 3할을 뽑아내는 등 아예 풀타임 주전을 꿰차버렸으며, 이 시즌에 데뷔 이래 처음으로 국가대표 A팀에 뽑혀서 여기서도 주전 유격수로 날아다니며 대표팀의 우승에 일조했고 마지막엔 골든글러브까지 타내며 화룡점정을 찍었다.
외야 백업 롤이었던 정수빈은 김경문 시절 코너, 중견 가릴 것 없이 자리에 구멍이 나면 땜빵으로 구르다가 11시즌에 되어서야 고정된 포지션으로(우익수) 뛸 수 있었고, 이종욱이 FA로 이적하고 난 14시즌에 들어서야 본 포지션인 중견수에 고정되어 출장하기 시작했는데 풀타임 중견수가 된 첫 해부터 리그 탑급 중견 수비력으로 인정받기 시작하더니[15] 타격에서도 커리어하이를 찍고 전 경기 출장까지 달성하면서 날아다녔다. 거기에 2015년 한국시리즈 MVP. 둘의 나이차를 고려한다고 해도 이종욱의 이적 후 활약을 생각해보면 안습이 따로 없다.[16] 즉, 김경문은 두산에 물려주고 나간 유산이 김현수 단 하나 뿐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팀을 초토화시키고 나간 것이다.
선수들을 육성, 발굴해서 단기적으로 본인이 사용하는데까지는 뛰어난 감독이었지만[17], 특유의 믿음의 야구로 인해 쓰는 선수만 쓰기 때문에 육성, 발굴해낸 선수들은 혹사당하며 서서히 망가져버렸고, 이 과정에서 가을야구에 무려 6번이나 도전했지만 결국 한 번도 우승하지 못한, 단기전에서 무능한 감독이었다. 그리고 두산 전통의 2군 육성 시스템이 아니었다면 그 6번의 가을야구도 힘들었을 것이다. 결국 팀에 거의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자 곧바로 자진사퇴라는 이름으로 도망가버렸다.[18] 더군다나 사퇴한 지 2달 만에 다른 팀의 감독으로 부임하더니 시즌이 끝나기도 전에 팀의 코치, 프런트를 싸그리 빼가는 기본적인 상도덕이 없는짓까지 해 버렸다.
이후 야구 팬들은 원조 런동님, 투수진은 박살내고 성적 안좋으니 도망갔다. KBO리그의 루이스 피구[19] KBO리그 역대급 파렴치한 행보, 한국프로야구의 이상범[20] 이라고 하며 그를 비난 했다.
3.3 NC 다이노스 시절
3.3.1 2013 시즌[21]
2012 시즌 퓨처스 리그를 정복하고, 외국인 3인방과 특별지명 8인, 이호준과 이현곤의 FA영입으로 팀을 만들어가기 시작했고, 시범경기때도 괜찮은 모습을 보여 주었지만, 개막하자 7연패에 빠지며 신생팀의 한계를 드러낸 것인가 하고 걱정했지만...
4월 11일 LG를 상대로 이재학이 첫 승을 따내며 분위기가 반전, 이후 SK를 상대로 2승 1패를 거두어 창단 첫 위닝시리즈를 만들었다. 특히 SK 와이번스를 상대로는 2013년에 우세였다. 같은 해 13연패를 찍으며 9호선을 개통한 한화 이글스보다 경기력이 낫다는 평.
5월 이후부터는 4월의 극심한 부진에서 벗어나 28경기 15승 12패 1무 (13.06.08 기준)의 성적으로 5할이상의 승률을 보이면서 기존 구단들마저 긴장하게 만드는 매우 인상적인 시즌을 보내고 있다. 5월 이후 호성적에는 팀 QS 1위를 달리는 선발진들의 힘이 크다는 평이 지배적이다. 하지만 여전히 7회 이후 불펜진의 방화로 실점하는 경우가 많아서 적은 점수차 리드를 하고 있을때의 불안감은 여전하다.
후반기에는 투수진이 안정된 반면 타선이 생각보다 잘 터지지 않을 때가 많아 걱정을 자아냈다. 하지만 선수층이 안정되며 야금야금 승수를 쌓아올리기 시작. 시즌 초에 연패를 너무 당해서 하위권에 머물렀을 뿐 팀의 경기력은 중상위권까지 올라왔다. 그 덕에 KIA 타이거즈를 제치고 시즌 최종 7위를 하였다.
3.3.2 2014 시즌
1월 22일 계약기간 3년간 계약금 5억원, 연봉 4억원에 계약을 마쳤다. 즉, 연장 계약이다.
정규 시즌 시작부터 투타 모두 기대 이상의 성적을 내면서 팀이 단독 1위까지 올라왔다. 시즌 초부터 다크호스라는 평가는 많이 받았지만, 그야말로 괄목상대가 무엇인지를 제대로 보여주었다. 체력이 떨어지기 시작할 시기인 여름 고비만 잘 넘긴다면, 4강권은 물론 우승에도 도전해볼 만하다는 평가까지 나왔다. 엔레발 자제요 그런데 가을야구가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6월 15일 한화 이글스전에서 역대 8번째로 프로야구 감독통산 600승 고지에 밟았다. 인터뷰
다만 6월 하순부터 7월 초순까지 팀이 부진에 빠지는 과정에서 김종호를 양아들이라고 기용한다고 NC 다이노스 갤러리 등에서 까였다.
거기에 7월 1일에 콜업한 조평호를 단 두 타석 쓰고 10일에 말소한 점도 비판받았다.
8월 3일 SK전에서 찰리의 욕설 퇴장 이후 14분간 시간을 끌어 비매너 이야기가 나왔다. 심지어 불펜에는 아무도 몸을 풀고 있지 않았다.
KBO로부터 엄중경고를 받았지만 솜방망이도 아닌 헛스윙 처벌이라는 평이 대다수.
이래저래 탈도 많았지만, 어쨌거나 10월 3일, 창단 3년, 1군 진입 2년만에 팀을 가을야구 진출을 이끌면서 지도력을 인정받았다.
3.3.3 2015 시즌
4월 22일 삼성 라이온즈와의 경기에서 파울 폴대 위로 날아가는 김상수의 솔로 홈런에게 합의 판정을 신청했으나 번복되지 않자 강하게 항의하다가 퇴장당했다. 김경문 감독의 NC 다이노스 감독 부임 이후 첫 퇴장이다.
맥없는 패배도 여러 차례 거두긴 했지만, 6월에는 1위로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16일 kt wiz와의 경기에서 패해 2위로 내려갔다.
17일에도 다시 kt wiz와의 경기에서 대패, 3위로 내려갔다.
19일 ~ 21일간의 한화 이글스와의 3연전에서 전승을 거두고 다시 1위 자리를 차지했다. 고마워요 G.G.범모
23일 기아 타이거즈와의 경기에서 패해 도로 3위로 내려갔다. 뭐 이리 오르락 내리락
7월 들어서 부진이 극에 달한 손시헌, 모창민, 조영훈을 너무 신뢰한다고 까이고 있다. 그럼에도 어찌어찌 3위권을 유지는 하고 있다.
그러나 7월 마지막날 결국 4위로 떨어졌다.
8월 초에 다시 2위 복귀. 그러나 언제 순위가 떨어져도 이상할 것 없을 정도로 힘겨운 상태이다.
8월 12일, 넥센 히어로즈와의 2연전 시리즈를 스윕, 시즌 처음으로 3위 이내에서 바로 아랫순위 팀과의 격차를 2경기로 벌렸다.
다만 김성근의 살려조에 가려서 그렇지 최금강 혹사 논란에서 자유롭지 않다.
결국 개천절에 또 콩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뜬금없이 조범현의 양아들 모 포수의 뒷담으로 비동님, 雨동님이라는 칭호도 얻었다.
플레이오프에선 또 밑에서 올라온 팀, 그것도 친정팀한테 업셋당했다. 두산 시절에는 한국 시리즈때 맨날 졌어도 올라온 팀한테는 항상 이겼는데 NC에서는 계속 업셋 당하는 중이다.
3.3.4 2016 시즌
2015년 11월 30일, 4년 총액 96억으로 NC가 삼성의 박석민을 영입해오는데 성공했다. 2015년 가을야구를 했던 나머지 팀들이 모두 전력이 하락하는 가운데 유일하게 전력을 보강한 팀이 되면서, 강한 전력의 팀이 만들어졌다.[22]
5월 22일 마산 삼성 라이온즈와의 경기에서 통산 6번째1400경기 출전이라는 대기록을 세웠다.
시즌 시작 이래 6월 14일 현재에 이르기까지 줄곧 콩라인 유지중. 두산 베어스가 워낙 잘 나가고 있어서 가을야구때까지 줄곧 이대로 갈 듯 하다. 그렇지만 연승기록에 도전하는 모습은 역시 후덜덜. 6월 19일 현재까지 NC가 6월 전승을 기록하고 있어서 혹사로 논란이 되고 있는 김태형과 달리 팀 운영에 대해서도 아무런 말이 나오지 않고 있다. 그러나 한화전에서 연승이 끝나고 난 이후 무승부와 기아전 3연전 스윕을 당하자 슬슬 다시 말이 나오고 있다.
그리고 운명의 두산 베어스와의 3연전. 1번째 경기는 완패하고 2번째 경기는 장원준의 컨디션 난조와 이어 올라온 불펜의 방화 때문에 이겼다. 그러나 마지막 경기에서 마이클 보우덴에게 노히트 노런을 내주며 콩의 본능 똥꼬입 시전 루징시리즈로 마감하게 되었다. 6월 15연승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는 두산 베어스와 같은 16승을 올리며 선두와의 게임 차는 도무지 좁혀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7월 들어 두산의 타격 사이클이 내려가고 불펜 불안으로 루징을 반복한 반면 NC는 올라오는 타격 사이클에 필살기인 불펜야구를 시전하며(...) 후반기에 어느새 게임차가 2.5경기까지 좁혀졌다. 다만 승부조작 사건이 터졌기에 선발 한 명의 공백과 팀 분위기의 악화 등을 감당해야 하는 막막한 상황에 처하게 되고 말았다. 무엇보다 이태양의 이탈에 이어 추가 승부조작 루머가 퍼지고 대체선발인 정수민의 답없는 부진 등이 겹치면서 불펜 과부하가 우려되고 있는 시점이다.다시 런할 때가 됬다
8월엔 본인의 콩 본능이 발동된 탓인지 NC는 2번 연속 1위 자리를 밟아보기만 한 뒤 두산의 상승세가 시작되자 경기차는 다시 5.5로 벌어졌다. 게다가 넥센이 2위 자리를 3경기 차로 맹추격해오고 있는 상황이라 까딱하면 2등 자리도 위태위태하다.
9월 11일 기준으로 1위 두산과는 경기차가 7.5라 추석 맞대결에서 2번 다 이기지 않는 이상 물건너갔다고 보면 되고 3위 넥센과는 4경기 차로 어느 정도 여유가 있는 상황이라 2위는 왠만하면 할 것 같지만 잔여경기가 전 구단 중 가장 많아서 부담으로 다가오는데다 타선도 부진하고 든든한 버팀목이었던 불펜들도 지쳐서 이전만큼의 믿음은 주지 못하는 상황이기에 김경문 입장에선 여러모로 골치아플 것이다.[23]
9월 16일 두산전 역전패로 게임차는 10.5게임까지 벌어졌다. 두산의 매직넘버는 이제 5.
17일과 18일 SK를 그야말로 압살해버렸으나 두산도 KT를 똑같이 묵사발내버린 덕에 매직넘버는 3이 되었다. 그리고 20일에 kt에게 고춧가루를 맞는 와중에 두산은 삼성에게 이기는 바람에 두산의 매직넘버는 1로 줄어들었다. 즉 한 경기라도 지면 두산의 1등은 완전히 확정된다는 것이다. 결국 9월 22일 두산이 kt에게 대승하면서 올 시즌 우승을 확정지었다. 그런데 같은 날부터 NC가 연승하기 시작하며 3위 넥센과의 승차를 6.5로 벌려놓았다. 승차도 그렇지만 9월 들어 넥센이 전반적으로 부진한 상태라 3위로 떨어질 걱정은 거의 사라졌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9월 29일 삼성 라이온즈와의 더블헤더에서 두 번 다 승리함으로서 2년 연속 정규시즌 2위를 확정지었다. 결국엔 올해도 콩라인 확정
에릭 테임즈의 음주운전 혐의가 사실로 드러난 뒤 '책임을 질 것은 지겠다'고 말하여 사실상 시즌 종료후 사퇴를 시사했다.
10월 5일 넥센에 연장 접전 끝에 패했으나 6일 넥센의 선발 양훈이 처참하게 무너진 덕에 승리를 거두고 감독 통산 800승 기록을 달성하였다.
10월 25일 NC 다이노스의 창단 첫 한국시리즈 진출을 이뤄냈다.
3.4 평가: 비판과 반론을 중심으로
다소 평범한 현역 시절과 무난한 코치 시절을 보냈지만,[24] 2004년 두산 베어스 감독으로 취임한 후, 마지막 해인 2011년을 제외하고 내내 5할 승률을 유지하면서 팀을 3번 한국 시리즈에 올려놓았다. 그러나 올려놓기만 하고 호구잡힌다 2008 베이징 올림픽 야구 국가대표팀을 이끌면서 9전 전승으로 금메달을 따와 일약 명장의 반열에 오른 인물.
두산 시절의 긍정적인 평가로는 베어스 프랜차이즈 출신으로서 코치와 감독으로서 두산을 가을야구 단골팀으로 만들었던 공, 김인식 감독 퇴임 이후 황폐화된 선수진을 재건했다는 점, 베이징 올림픽 우승으로 두산팬덤의 규모를 크게 확장시켰다는 점 등을 주요 공으로 꼽는다. 물론 불펜투수진 혹사, 2011 시즌중 사퇴하고 바로 다른 팀 감독으로 갈아탔다는 점은 분명한 과이다.
김경문이 선수빨로 좋은 성적을 거뒀다는 폄하를 받기도 하지만, 그 공포의 두산타선은 바로 김경문의 작품이었다. 특히 그가 김인식감독 퇴임 이후 물려받은 선수진은 그야말로 황폐화된 폐허에 가까웠다. 주축선수 대부분이 노쇠화된 상황이었기 때문에, 김동주 홍성흔 정도를 제외하고 과감히 물갈이, 타선의 대부분을 2군 선수들과 신인들, 신고선수들로 가득 채웠다. 그가 재임하던 시절 국대타선으로 불리웠던 선수들 대부분이 그가 발굴한 선수들이다. 이종욱, 고영민, 김현수, 손시헌, 오재원 등등 다른 감독이었다면 빛을 보지 못했을 선수들이 국가대표로까지 성장한 것이다. 선수가 부족할때마다 트레이드 또는 FA보상선수 등으로 쏠쏠한 재미를 봤는데, 최준석, 이원석등은 수년간 두산의 주전선수로 활약했다. 포수가 부족할 때 최승환이나 채상병 등을 데려와 좋은 활약을 보이기도 했다. 한마디로 리빌딩에 완벽히 성공한 셈. 혹자는 민병헌은 경찰청이 키워준 선수니 김경문 공이 없다고 하는데, 민병헌은 경찰청 이전에도 꾸준히 백업으로 기용되었던 선수라서 공이 아주 없다고 보기는 힘들다.
두산팬덤의 확장에도 기여했다. 한국프로야구 팬이 급격하게 늘어났던 계기 중 하나가 2008년 베이징올림픽에서의 극적인 금메달이다. 당시 김경문 감독의 한국야구 대표팀은 숙적 일본을 예선과 4강에서 2번이나 물리쳤으며 결승전에서도 한국역사상 가장 극적인 더블플레이로 전승우승을 달성하였다. 이 때 국대에서도 이종욱, 고영민, 김현수, 김동주, 등의 두산선수들이 활약하면서 두산이라는 팀을 일반인들에게 크게 어필하게 되었다. 네덜란드전 10-0 대승을 제외하면 모든 경기에서 짜릿한 승부를 연출하면서 재미있는 야구, 중독성 있는 야구를 보여주어 결과적으로 베이징올림픽으로 늘어난 팬덤을 두산팬으로 끌어들이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NC 팬들에겐 신생구단이던 NC를 창단 1년 만에 포스트시즌 진출, 2년 연속 포스트시즌 진출을 이루어낸 뛰어난 지도자. 하지만 두산 시절에는 업셋도 안했지만 피업셋도 안했던 것에 비하면 NC 시절에는 2년 연속 피업셋을 당하였다. 그에 비해 김경문 시절 우승은 꿈도 꾸지 못했던 두산이 김경문의 NC를 가볍게 이기고 올라간 데 이어 2015 시즌을 우승으로 장식하고 2016 시즌 1위를 달리고 있기 때문에 이중으로 비난받고 있다. 게다가 2016 시즌 전 압도적 전력의 평가를 받았던 NC였기에 더욱 좋은 소리를 듣지 못하고 있다.
3.4.1 계투진 혹사
두산 팬들에게는 중심선수들이 이탈하는 가운데서도 젊은 야수들을 키워내긴 했지만,[25] 선발 투수 하나 못 키운 채 그저 투수들을 죄다 불펜으로 갈아넣어 결국에는 두산 투수진을 완전히 박살내버린 인물로 남아있다. 특히 KILL 라인의 혹사는 경악할 수준. 두산 팬들에게 김성근에 이어 혹사에서도 2인자라고 까인다.선수를 갈아넣었으면 우승이라도 했어야지 갱문아[26]
NC 감독이 된 이후에는 선발 야구를 어느 정도는 하려는 모양새지만, 그래도 특정 불펜 투수에게 과부하가 걸리는 건 여전하다. 2015년엔 최금강이 페넌트레이스에서 너무 혹사당한 끝에 가을야구에서는 제 역할을 해주지 못했다. 그리고 그 과부하로 인해 결국 최종전에서 가을야구를 마무리.
이에 대한 반론은 다음과 같다. 첫번째로 선발보다 불펜을 중시하여 좋은 유망주투수들을 불펜에 우선기용했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젊은 투수들, 임태훈, 고창성, 이용찬, 이재우 등의 투수들이 빠른 시간에 선수생명을 마감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선발을 우선시하느냐 불펜을 우선시하느냐는 전적으로 감독의 결정이다. 또한 김경문 감독 초기 재임시절에는 리오스와 랜들이라는 강력한 선발 원투펀치가 있었고, 대부분의 팀들 역시도 용병투수 2명을 선발로 넣고 국내 토종에이스는 보통 1명, 많아야 2명이 추가될 뿐이었다. 즉, 어짜피 용병만 잘 뽑으면 선발은 한두명만 발굴해도 그럭저럭 잘 굴러가기 때문에, 그가 선발을 외국인 용병에 맡기고 나머지는 강력한 불펜진을 구성한다는 것도 꼭 틀렸다고 볼 수만은 없는 것이다.
또한 그가 불펜으로 기용한 투수들 중 고창성은 사이드암 투수로서 선발로는 적합하지 않았고, 이재우, 정재훈 역시 원래 불펜에서 이름을 날리던 투수였다. 이용찬은 역시 투피치 투수로서 불펜에 적합한 투수였다. 이후 이용찬은 정명원 코치하에서 포크볼을 전수받은 뒤에야 선발에서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3.4.2 큰경기에 약하다
김경문 감독은 리그 성적에 있어 전임 감독들 보다 좋은건 사실이다. 초대 김영덕감독을 제외하면 최고 승률이다[27] OB/두산은 김인식 감독 하에서는 부침이 있었지만 4년 연속 포스트시즌 진출, 총 5회 진출에 우승 2회로 명문팀의 반열에 들어서는 팀이였다.
좋은 페런트레이스 성적이지만 유독 가을야구에 졸전의 모습을 보였다. 2004년은 플옵에서 1승 먼저 했지만 그 후로 3패해서 탈락, 2005년은 KS에서 0승 4패 스윕패로 준우승, 2007년은 KS에서 2승 먼저 했지만 4연패로 준우승[28], 2008년은 KS에서 1승 후 4패로 준우승, 2009년은 플옵에서 2승 후 3패로 탈락, 2010년은 플옵에서 2승 3패로 탈락, 2014년은 준플옵에서 1승 3패로 탈락, 2015년은 플옵에서 2승 3패로 탈락.
특히, 한국시리즈 진출 4번 할 동안 잠실 경기 전적이 0승 10패 잠실에서 열린 한국시리즈 경기는 단 한 번도 이겨보지 못했다.[29]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내 무관의 한은 풀었지만, 쿠바와의 결승전에서 1사 만루 역전패 위기에 처했을때는 난 영원히 우승은 못하나 보다라는 생각이 저절로 들 정도라고했다.
하지만 객관적으로 보면 두산은 2008년 이후로는 우승후보로 평가받은 강팀이였지만 2007년 이전에는 매년 4강권도 평가받지 못한 팀이였다. 매년 팀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던 선수들이 이탈해 나가고 그자리를 신인선수들로 공백을 매우면서 포스트시즌에 진출한 것 자체가 호성적이었다는 말이다. 그리고 포스트시즌에선 김성근의 SK라는, 2000년대 최고의 팀 중 하나로 꼽히는 절대 강자가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SK와 그나마 싸움을 해볼만한 팀이 바로 김경문의 두산이었다. 그의 3번의 준우승은 사실 대부분의 전문가들이 한국시리즈 직전 예측했던 결과가 그대로 들어맞은 것 뿐이었다. 이 당시만 해도 큰경기에 약하다는 평가도 있었지만 그보다도 상대가 워낙 강해서 마지막에 승리하지 못했다는 주장이 더욱 힘을 실었지만...
그러나 2014년 준플레이오프에서 1승 3패로 패퇴하면서 가을야구 새가슴설 이미지가 다시 생겨나고 있다. 지금까지는 상대가 산전수전 다 겪은 김성근감독이었지만, 이번 상대였던 LG의 양상문 감독의 경우는 감독 커리어 첫 포스트 시즌이었다. 각축 끝에 진 것도 아니고 일방적으로 털리고 탈락한 것이어서 야구팬들은 물론이고 NC팬들 사이에서도 이쯤되면 진짜 문제있는 거 아니냐는 불만도 나올 정도였다.
2015년 삼성 라이온즈와 정규리그 1위를 두고 끝까지 경쟁하다가 겨우 2게임 반차로 아슬아슬한 2위를 거머쥔 2015시즌, 역시나 첫 포스트시즌을 치루던 김태형 감독의 두산 베어스에게 2승을 먼저 해놓고도, 4-5차전을 놓쳐 한국시리즈 진출에 실패했다.
3.4.3 2011년 중도 사퇴 논란
시즌중에 사퇴한 것이 팀을 엉망으로 만들어놓고 답이 없으니까 도망간 것 아니냐는 팬들의 반발이 있다. 하지만 감독의 입장에서 보면 그는 계속된 준우승으로 심한 2인자 컴플렉스에 시달리는 중이었다. 2011년은 김경문 감독 입장에서도 이례적인 두산구단의 지원이 있었고,[30] 시즌 전 강력한 우승후보로 꼽힌 상황에서 성적이 잘 나오지 않았으니 압박감을 크게 느꼈을 가능성이 크다. 한국시리즈에서 3번이나 물을 먹고 어느 때보다 우승이 간절하고, 여건이 맞춰진 상태에서 말이다. 강한 프라이드에 사로 잡혀 더는 버틸 수 없었던 상황일 가능성이 크다.
김경문 감독은 5월 5일 어린이날 잠실더비에서 대패한 날 사퇴의사를 처음 전했다. 당시 두산은 그 동안의 혹사 피로 인한 투수들이 부진 새로 뽑은 용병 페르난도 니에베의 부진, 그리고 임태훈의 불미스러운 일과 감독 중도사퇴 악성 루머들이 퍼져있고[31] 7위의 순위로 선수단 자체의 분위기가 매우 가라앉은 상황이었다. 계속된 우승 실패로 인한 본인의 자존심에 심한 자책감을 느꼈고 결국 시즌중 사퇴라는 불명예를 선택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시즌 중에 중도사퇴한 뒤 휴식을 취하며 공부하고 싶다던 사람이, 사퇴 한지 얼마 되지 않아 갑자기 자신의 카페 개업 관련이라면서 귀국한 뒤 신생 NC감독직에 취임하고 시즌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코치진을 빼간 것은 그어떤 쉴드도 불가능한 배신행위이다. 특히 그를 믿었던 팬들은 통수라고 볼수있고 어느 팀 팬들이라도 응원하는팀의 감독이 이런 모습을 보이면 당연히 반발한다. 2011년 당시 처음 김경문의 사퇴 소식이 나왔을때 대부분의 두산 팬들은 팀을 망치고 도망친다고 비난하기보다는 윤석환과 조계현을 비난하거나 임태훈때문에 마음 고생 많으셨겠다는 반응이 다수였다. [32] 하지만 2달 후 NC감독으로 가서 두사엔보 드립을 친 이후로 급속도로 두산 팬들의 팬심이 식어버렸고, 두산 헤비 팬들 사이에서는 비판의 대상이 되어버렸다.
3.4.4 선수관리 부실
2016년 프로야구 승부조작 사건이 터지면서 선수 관리에 대한 비판도 커지고 있다. 두산 감독 시절에도 범죄두라고 불릴 정도로 사건이 많았는데, 정작 두산은 김경문이 떠나자마자 사건사고가 확 줄어든데다가[33][34] 이태양의 승부조작이 드러나고 이재학까지 조사를 받고 있다. 게다가 승부조작 관련 사실을 은폐, 축소했다는 혐의를 받고 구단 사무실이 압수수색까지 당했다. 여기에 이민호는 부인을 폭행한 혐의로 고소를 당했으며, 팀의 4번 타자인 테임즈까지 음주운전으로 물의를 일으키는 등 2016년 한 해에만도 엄청난 범죄, 사건사고를 일으키면서 범죄C, New Crime 등으로 여론의 몰매는 맞는 중이다. 이에 따라 NC팬 내외로부터 선수단 관리가 미흡한 게 아니냐는 지적을 많이 듣고 있다.
4 스타일
김경문/감독 스타일 문서로.
5 별명
가장 많이 불리는 별명은 김경문의 '문'(moon) 자를 딴 달감독. 또한 좋은 페넌트레이스 성적을 내면서도 우승은 하지 못해서 콩경문이라고도 불리며, 삽질을 할 때는 돌경문 소리도 나온다. 2011년 시즌 중도에 사퇴한 이후의 행보 때문에 두산 팬들에게는 통갱문(통수 + 김경문), 런경문이라고 불린다.
호구라는 별명도 있는데, 이는 김성근에게 2007, 2008년 우승을 2년 연속으로 조공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SK 왕조의 1등 공신이라며 솩전드라 불리기도 한다.(...) 그 외에도 간통님[35]이라는 감동님의 바리에이션이 있지만, 위에서 말한 돌경문이나 (가을)호구 등이 더 쓰인다. 과거 선수 시절에는 영화배우 실베스타 스텔론 씨와 닮아서 별명이 람보였다.
장성우 사건으로 NC 다이노스 갤러리 등지에서 비가오면 돌아버린다 +감동님 해서 비동님 이라는 별명도 생겼다..
투수 혹사에 관해서도 그분의 뒤를 잇는 콩이기에, 혹사 관련 논쟁에서는 세이콩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6 기타
6.1 제2의 국민감독 후보
2008 베이징 올림픽/야구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으면서 예선 7전 전승 포함 도합 9전 전승으로 팀을 금메달로 이끌었으며, 예선 및 준결승에서 대타 성공률이 50%를 기록하면서 작두 탄 김경문(기사보기)이 되었다. 이 때부터는 김인식 감독에 이은 국민 감독의 재목으로 언급되고 있다. 그러나, 일단 KBO 리그 페넌트레이스나 KBO 한국시리즈 우승경력이 없는 것이 아쉽다. 2004 2005 2007 2008 2009 2010 2014 2015 벌써 8번째다
6.2 포스트시즌만 되면 호구 오능가? 새가슴?
콩경문, 돌경문이라 불리는 이유는 좋은 페넌트레이스 성적에도 불구하고 포스트시즌에서 2006년 이래 계속 물을 먹은 것을 빗대어 부르는 것이다. 사실 콩보다는 3을 훨씬 많이 찍은건 함정이다 락경문?
2004년은 플옵에서 1승 먼저 했지만 그 후로 3패해서 탈락, 2005년은 KS에서 4패 스윕패로 탈락, 2007년은 KS에서 2승 먼저 했지만 4연패로 탈락[36], 2008년은 KS에서 1승 후 4패로 탈락, 2009년은 PO에서 2승 후 3패로 탈락, 2010년은 PO에서 2승 3패로 탈락, 2014년은 준PO에서 1승 3패로 탈락, 2015년은 PO에서 2승 3패로 탈락.
특히, 한국시리즈 진출 4번 할 동안 잠실 홈 경기 전적이 0승 10패 잠실에서 열린 한국시리즈 경기는 단 한 번도 이겨보지 못했다.[37]
솩경문
2007년부터 3년여간 포스트 시즌에서 만난 SK팬들+대부분의 야갤러에게는 우리편이라는 의미로 솩경문이라고도 불린다. 애향심이 지극하다 오죽하면 SK에는 레전드가 없다고 까대는 야갤러들 마저도, 김경문이 SK 유니폼을 입은 합성사진을 올리면 모두 얄짤없이 솩전드라고 인정할 정도...[38] 2010년 포스트시즌에는 파생별명으로 호구로 불린다. 두산이 포스트시즌에서 이길 때마다 두산을 기다리는(?) SK 김성근 감독의 입장에서 호구 오능가?라는 유행어가 야갤에서 유행했다. 하지만 삼성과의 플레이오프 5차전을 오가는 혈전끝에 결국 호구는 오지 못했다. 그리고 야갤러들의 걱정대로 2010년 한국시리즈는 망했다. 아아 호구 왜 가능가...
2004년 플레이오프에서 3연패, 2005, 2007년, 2008년 3년간 한국시리즈에서 4연패로 탈락(2005년 4연패, 2007년 2승 후 4연패, 2008년 1승 후 4연패). 이후 2009년 플레이오프에서 SK 와이번스에게 2승 후 3연패하여 탈락. 이건 분명히 문제가 있다는 팬들의 지적도 있으나, 워낙 지지층이 두터워서 게시판 등에서 이 점을 지적하면 대체로 실드치는 글들이 따른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2010년에는 스윕 징크스는 깼다.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내 무관의 한은 풀었지만, 쿠바와의 결승전에서 1사 만루 역전패 위기에 처했을때는 난 영원히 우승은 못하나 보다라는 생각이 저절로 들 정도라고 하니 뭐라 위로해야할지(…).
아이러니하게도 본인은 KBO 리그 원년 OB의 우승 당시 주전 포수였다. 그리고 사실 감독으로 한국시리즈 우승만 못해서 그렇지 절대 콩라인은 아니다;
- 1982년 원년 OB베어스 우승 당시 주전 포수 - 선수시절 우승
- 2001년 두산 베어스 한국시리즈 우승당시 코치 - 코치시절 우승
- 2008년 베이징 올림픽 감독으로 금메달! - 감독으로 국제대회 우승
한국시리즈만 우승하면 오히려 우승으로 그랜드슬램이다. 근데 그게 엄청 힘들어 김경문과 가장 비슷하면서도 정반대의 위치에 있는 사람은 다름아닌 류중일. 코치로서 2002년 한국시리즈 우승과 베이징올림픽 금메달, 감독으로서 11-14년 통합 4연패와 2014 인천AG에서 금메달 등등 지도자로서는 모든 영광을 얻었지만 정작 선수 시절에는 팀이 지독한 준우승 징크스에 시달리는 바람에 한번도 한국시리즈 우승[39]을 경험하지 못했다. 다만 류중일이야 다시 현역으로 뛸 일이 없지만(...) 김경문은 큰 삽질만 없으면 무난하게 감독 커리어를 이어갈 테니.
또 OB시절 포수 라이벌이였던 조범현은 김경문보다 상위호환적인 모습을 보여주는데, 1982년 OB 선수 시절의 원년 우승, 2002년 삼성라이온즈 배터리 코치로 우승, 2009년 KIA 타이거즈 감독 우승으로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하였다. 거기에 더불어서 2010년도에 아시안게임 금메달로 국제대회까지 우승하며 한국프로야구에서 그랜드슬램을 달성했다.
2011 시즌 중 두 감독이 모두 소속팀을 떠나면서 이런 관계가 끝나는가 했으나 김경문 감독이 NC 다이노스 감독으로, 김성근 감독이 고양 원더스 감독으로 가게 되면서 또 다시 2군에서 맞대결을 펼치게 되었다. 정확히는 NC 다이노스는 2군 남부리그 소속이며 고양 원더스는 독립구단이기에 소속 리그가 다르지만 고양 원더스에 대한 지원책으로 2군 팀들과 번외 경기가 편성된다.
그래도 2군에서는 전반적으로 선수층이 NC쪽이 그나마 낫기에 호구라는 호칭을 벗을지도 모른다. 물론, 2군에서마저 밀리면 그 때는 정말 호구 인증일듯. NC에서 뽑은 선수들은 그래도 프로에 지명 받거나 타 구단에서 1군에서 조금이라도 뛰었던 선수들이고 원더스 소속 선수들은 대체로 미지명 혹은 방출 선수라는 걸 고려하면 아무래도 전력 자체는 NC쪽이 더 높은 편.
2012년 6월 15일~17일동안 NC 다이노스와 고양 원더스의 3연전을 했다. 경기 결과는 2승 1패로 다행히 김경문 감독은 호구 인증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2014년 준플레이오프로 인해 그 이미지가 다시 생기기 시작했다. 그 당시 삽질하던 박민우, 이종욱의 기용, 1차전 이재학 선발카드, 4차전 잘치던 권희동 대신 박민우 대타카드, 7회 아웃카운트 하나도 못잡고 쳐맞고 있는 원종현, 이민호를 내리지 않는 점 등 이해가 안가는 기용과 함께 경험 부족으로 1승 3패로 패퇴하면서 가을야구 호구설이 다시 확인되었다. 지금까지는 상대가 산전수전 다 겪은 김성근감독이었지만, 이번 상대였던 양상문 감독의 경우는 감독 커리어 첫 포스트 시즌이었다(...). 그나마도 각축 끝에 진 것도 아니고 일방적으로 털리고 탈락한 것이어서 타팀팬들은 물론이고 NC팬들 사이에서도 이쯤되면 진짜 문제있는 거 아니냐는 불만도 나올 정도였다.
그리고 삼성 라이온즈와 정규리그 1위를 두고 끝까지 경쟁하다가 겨우 2게임 반차로 아슬아슬한 2위를 거머쥔 2015시즌, 역시나 첫 포스트시즌을 치루던 김태형 감독의 두산 베어스에게 패승승패패로 완파당했다. NC가 이긴 2차전에서는 물론 흔들려 준 함덕주덕분도 있다만 여러 과감한[40] 작전이 성공하여 이겼고 3차전은 선발 손민한의 호투에 힘입어서 위키러가 감독을 하고 있었어도 무난히 이겼을 어마어마한 점수차의 대승리를 거두었다. NC가 패배한 1차전에는 니퍼트의 압도적인 구위에 팀 타자들이 아무 것도 못했고, 그 니퍼트를 4차전에 다시 만났을 때도 니퍼트가 완봉승 뒤 3일 휴식 후 7이닝 무실점을 시전하는 동안 어떤 해결책도 제시하지 못하고 스무스하게 발렸다. 하지만 대망의 5차전에서는 초반 2대0 리드를 잡았으나, 2차전 완투승 후 피로가 누적되어 계속해서 정타를 맞는 스튜어트에게 그 놈의 믿음의 야구를 또다시 시전하다가 5회 초, 4회 말을 4구로 지워버린[41][42] 두산 선발 장원준에게 보답하는 듯한 두산 타자들의 김재호 2루타 - 정수빈 1타점 2루타 - 허경민 안타 - 민병헌 볼넷 - 김현수 2타점 2루타로 5타석 연속 출루를 기록하면서 스튜어트는 아웃카운트를 하나도 못 잡은 상태에서 3점을 내리 쳐맞고 멸망, 여기에다 경기 마지막에 나성범을 마운드에 올리면서 지명타자를 소멸시키는 쓰로잉까지 보여주며 가을야구에서 또다시 주저앉고 말았다. 시리즈 내내 부진했던 스파이를 끝까지 믿고 3번, 6번타자로 기용한 실책이 결과적으로 부메랑이 되고 말았다. 또한 두산에 비해 상당히 두꺼웠던 불펜 뎁스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다. 김태형 감독이 이현승의 2이닝, 3이닝 세이브라는 신의 한수로 불펜 약점을 커버한 데 비하면, 질적 양적으로 우세한 불펜이 있음에도 5차전에서 선발 스튜어트를 끝까지 믿었던 그의 선택은...두사엔보를 실천하시는 감동님
2015년 현재까지 가을야구에 8번 진출하여 코시에 3번 올라갔고 결국 우승은 모두 실패했다. 또한 페넌트레이스 우승 경력은 한 번도 없다. 감독 커리어는 우승 억제기라고 불려도 할 말이 없는 수준. 두산은 그가 떠나고나서야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릴 수 있었다.
김경문이 처음 간 한국시리즈에서 시리즈를 내줬던 감독의 말에 따르면, 사실 김경문은 꼴찌를 3번이나 했다 카더라
6.3 김성근 감독과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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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사람의 관계는 흔히 악연으로 묘사되고 있다. 2007년부터 SK와 두산의 라이벌 구도 속에 두 감독간에도 여러가지 일이 있었다.
- OB 시절 조범현과 주전경쟁을 하는 과정에서 김성근 감독이 충암고등학교 시절 사제관계였던 조범현을 중용하느라 출장기회가 적었다고 하는 말이 있다. 여러가지 자료를 살펴보면 당시 계형철 등은 조범현을 선호하고, 박철순은 김경문을 선호했다고. 두 포수는 번갈아 기용되었지만 처음에는 김경문이 더 많이 출장했다. 하지만 2년후 김영덕 감독이 물러나고 코치였던 김성근이 감독으로 승격되자 김경문의 출장기회가 줄고 조범현의 출장이 늘어났다.
- 2007년 김성근이 시즌 내내 두산 외국인 투수 리오스와 랜들의 투구폼이 보크라고 항의했다. 심판위원회에서 몇 차례 보크가 아니다라고 판정했지만 한국시리즈에서 까지 문제 삼았고 심지어 "리오스가 심판을 속이고 있다. 악질적이다. 한국야구를 우습게 알고 저러는 것이다."면서 리오스의 멘탈까지 지적하자 김경문 감독은 몇번 참다가 "이런 식으로 따지면 문제 되지 않는 투수가 없을 것이다. 괜한 트집으로 프로야구를 재미없게 만들고 있다." "저렇게 까지 해서 우승하고 싶나" 등으로 반박했다. 그 후 2008년 일본프로야구에 진출한 리오스가 4월에 보크판정을 무더기로 받자 김성근 감독의 지적이 옳았다는 주장이 맹위를 떨쳤다. 하지만 메이저리그에서 멀쩡하게 던지던 박찬호가 일본에서 무더기로 보크판정을 받았던 것으로 보면 알 수 있듯이 보크 판정의 기준은 나라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다.
- 2007년 한화와 2위다툼을 하는 과정에서, "SK가 만만한 한화를 밀어줄 수 있다"고 언론에 발언, 이에 대해 김성근 감독은 말도 안되는 소리라며 일축했다. 당시 한화의 김인식감독이 "젊은 감독이 말을 너무 함부로 한다."며 크게 발끈하기도.
- 2007년 두산과 SK가 맞붙은 한국시리즈에서 SK측의 비매너 플레이로 양측의 감정 싸움이 극에 달했다. 두산 안경현이 SK 채병용의 공에 맞아 손가락 골절상을 당하여 전력에서 이탈했고, 이종욱이 정근우의 스파이크에 찢겨 부상으로 당하고 또 정근우가 주루하는 이종욱의 다리를 붙잡았다. 또 1,2,3차전에서 도합 9회의 사구가 나왔는데, 그가운데 7개가 SK가 던진 것이었다.
-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예선을 위한 선수 차출 후 김성근 감독이 "선수관리를 엉망으로 했다. 애들 몸상태가 안 좋다. 대표팀에 선수들을 보내 줬는데 고맙다는 인사 한 마디 없더라." 라고 비난하자 김경문 감독이 "그럼 직접 대표팀을 맡으시라.", "그런 식으로 말씀하시면 올림픽 본선에서 SK 선수는 뽑지 않겠다." 라고 응수하기도.
- 2008년 4월 19일 두산-SK 경기에서 빈볼 사건이 발생하자 이전부터 김성근 감독에게 감정이 쌓여있던 김경문 감독은 "받은 만큼 돌려주겠다." 라고 분개했는데, 이 때문에 김성근 감독 팬들에게 맹공을 당했다. 또 김인식 감독이 끼여들어 김경문 감독을 디스한 것도 작용했다.
- 2008년 한국시리즈에서 대결하여 SK에게 패하고, 2009년 플레이오프에서 SK와 다시 붙었으나 또 졌다. 김성근 감독과의 가을야구 감독 대결로 3연패. 2009년 플레이오프 5차전에서 일찌감치 크게 지고 있자 전년도 한국시리즈에서 SK 투수들이 던진 무수한 빈볼들에 대한 항의로 두산 투수들이 SK 선수들에게 수차례 빈볼을 던지는 일이 있었는데, 경기가 끝난 후 SK 덕아웃으로 직접 찾아가 김성근 감독의 품에 썩소를 지으며 안기기도. 김경문 감독은 이 날 인터뷰에서 "경기를 엉망으로 만들어놨으니 찾아가서 사과할 수 밖에 없었다." 는 묘한 인터뷰를 남겼다. 관련 기사
- 2000년대 후반부터 김성근 감독과의 라이벌 관계가 이어지고, 위에서 나왔듯이, 서로를 디스하는 일이 여러번 있었지만 두 사람의 사이는 표면적으로는 나쁘지 않다. 2010년 김동재 KIA 수비코치를 돕기 위한 일구회 올스타와 천하무적 야구단과의 자선시합에서 김성근 감독과 배터리를 이뤄 공을 받아줄 정도였으니... 인터뷰 등에서도 서로 좋은 말을 해주는 편.
- 하지만 이는 단지 표면적인 관계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2007년, 2008년에 김성근 감독과 김경문 감독의 대립 과정에서 서로가 과거 사제지간이었다는 점 때문에 김경문 감독이 김성근 감독에게 당하고 있는 형편임에도 불구하고 맞대응하면 김성근 감독의 지지하는 팬들이 스승에 대한 예의를 지키지 않는다며 맹공을 퍼부었기 때문이다. 2008년 4월 19일 두산-SK전 빈볼 사건 이후 김경문 감독은 이전보다 김성근 감독에 대한 맞대응을 삼가하는 모습을 보였다.
- 2015년 김성근 감독이 한화 이글스 감독으로 부임하면서 두 사람의 라이벌 구도가 다시 이어질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하지만 한화가 NC보다 훨씬 약한 팀이어서...
- 2016년, NC 다이노스의 15연승을 리그 꼴찌 한화 이글스가 저지해 내면서, 다시 이 관계가 주목받고 있다.
- 2016년, 8월 7일 한화-NC전에서 한번 크게 충돌한 일 이 생겼다.
김성근 감독은 전부터 좋지 않게 보던 헤커의 투구동작에 대해 이중동작이 아냐냐 항의하였고, 심판들은 3년이상 던지고 있는 해커의 동작이 문제 없다고 하였다.
다음 항의는 김경문 감독이었다. 3-3으로 맞선 6회초. 2사 1,2루 득점 기회. 이종욱의 타구가 유격수 글러브를 맞은 뒤 중견수 쪽으로 굴절됐다. 이때 3루 송구가 이어졌고, 3루에 있던 테임즈가 홈으로 쇄도하기 시작했다. 이어진 홈 송구. 홈에서 접전이 벌어졌으나 허도환의 태그가 빨랐다. 태그 아웃. 그런데 이 과정에서 NC가 테임즈의 홈 태그 아웃 과정과 관련해 합의 판정을 요청했다. 비디오 판독 결과, 허도환이 공을 잡은 이후 테임즈가 홈플레이트를 가로막은 허도환의 발을 차고 들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하지만 첫 판정 결과는 번복되지 않았다. 태그 아웃. 이닝 종료. 이때 NC 김경문 감독이 심판조장인 나광남 3루심에게 가서 홈충돌방지 조항을 위반한 것이 아니냐며 항의를 하기 시작했다. 항의는 약 4분 간 이어졌다. 그러나 규정상 합의 판정 결과는 번복될 수 없었다. 김경문 감독은 다소 강한 어조로 항의한 뒤 더그아웃으로 돌아갔다.
그러자 이번엔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김성근 감독이 박종철 구심에게 다가왔다. 이어 나광남 3루심 쪽으로 자리를 옮겨 항의를 하기 시작했다. 김경문 감독의 항의에 대한 어필로 풀이됐다. '2016 KBO리그 규정' 28조 11항 합의판정 신청 및 결과는 최종적 '3'에 따르면 '합의판정이 실시되면 선수단 및 양 구단의 관계자는 더 이상 심판팀장의 결정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 이 조항을 위반할 경우 심판은 선수단 및 관계자에게 퇴장을 명한다'고 명기돼 있다. 그러나 심판진은 김 감독에게 퇴장 명령을 내리지 않았고, 김 감독 역시 더그아웃으로 돌아갔다. 경기 후 심판진들은 경기가 과열될 위험이 있어 김경문 감독을 퇴장시킬 수 없었다고 하였다.
6.4 그외
- 지병인 두통을 앓고 있는데 비만 오면 특히나 아프다고 한다. 이렇게 된 원인은 고교 시절 경기중 상대학교 선수의 고의로 추정되는 배트 스윙에 머리를 강타당하는 사건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경기장에서 실신했으며 김경문의 어머니가 해당 선수를 경찰에 고소했을 정도로 당시에 크게 뉴스에 나왔던 일화. 사실 이건 웬만한 내공의 야구골수팬들도 전혀 알지 못하던 건데 장성우 건 때문에 드러난 것.
이런 사정이 있는데 그걸 가지고 쌍욕을 해댄 장성우 - 박석민의 어머니가 김경문 감독의 팬이다. 그래서인지 2008년 베이징 올림픽 금메달을 딴 후 박석민을 통해 김경문 감독에게 꽃다발을 전했다. 정작 박석민과 김경문은 직접적인 인연은 없지만 박석민이 NC로 이적하면서 같은 팀의 선수와 감독이라는 인연이 생겼다. 김경문도 꽃다발을 받은 걸 기억해서인지 박석민 이적 관련 인터뷰 때 언급.
- 비틀즈의 폴 매카트니와 닮았다는 의견이 있다.
- 대단한 커피광으로,지하철 8호선 몽촌토성역 부근(올림픽공원 남문 대로 맞은편)에 'MOON CAFE(문카페)'라는 본인의 커피숍도 운영하고 있다.까페 이름 'Moon'은 본인의 이름 끝글자이면서,별명인 'Moon'에서 따온 것으로,처음 개업했을 때에 비해 지금은 인테리어와 외관이 많이 화려해졌다.내부에는 다양한 사인볼을 비롯,야구와 관련된 공간임을 느낄 수 있다.비시즌,비전지훈련 기간에는 가게에도 자주 나가서,본인이 직접 커피를 다리고 나른다고 한다.
김진욱과 붙어보자 - KBO 리그 감독 중 유일하게 EQ900을 타는 감독이다.
- 두산 베어스와 NC 다이노스 감독으로 재임하면서 선택한 등번호인 74번은 "인생은 행운(7)과 불행(4)가 함께 공존한다"라는 뜻을 담고 있다고 한다.영상
7 역대 감독 성적
역대 감독 전적 | ||||||||
연도 | 소속팀 | 경기수 | 승 | 패 | 무 | 정규리그 | 포스트시즌 | |
2004 | 두산 베어스 | 133 | 70 | 62 | 1 | 3위 | 3위 | |
2005 | 126 | 72 | 51 | 3 | 2위 | 준우승 | ||
2006 | 126 | 64 | 60 | 3 | 5위 | - | ||
2007 | 126 | 70 | 54 | 2 | 2위 | 준우승 | ||
2008 | 126 | 70 | 56 | 0 | 2위 | 준우승 | ||
2009 | 133 | 71 | 60 | 2 | 3위 | 3위 | ||
2010 | 133 | 69 | 61 | 3 | 3위 | 3위 | ||
2011 | 57 | 23 | 32 | 2 | 7위[43] | - | ||
통산 | 960 | 512 | 432 | 16 | ||||
연도 | 소속팀 | 경기수 | 승 | 패 | 무 | 정규리그 | 포스트시즌 | |
2013 | NC 다이노스 | 128 | 52 | 72 | 4 | 7위 | - | |
2014 | 128 | 70 | 57 | 1 | 3위 | 3위 | ||
2015 | 144 | 84 | 57 | 3 | 2위 | 3위 | ||
2016 | 144 | 83 | 58 | 3 | 2위 | |||
통산 | 544 | 289 | 244 | 11 | ||||
총계 | 1504 | 801 | 676 | 27 |
- ↑ 2011 시즌 도중 자진 사퇴.
- ↑ 한 학년 아래로 양상문이 있었으며, 방장 시절에는 여드름으로 고생하던 신입생 방졸 선동열을 데리고 피부과에 간 일화도 있다. #
- ↑ 과거 젊었던 선수시절에 영화배우 손창민씨의 청년시절의 외모를 보면 매우 비슷하게 닮았던터라, 예나 지금이나 손창민과 형동생처럼 지낼정도로 친분이 매우 깊다. 게다가 손창민씨도 달감독님 왕팬이시다.
- ↑ 야구친구의 2014년 3월 6일자 상식과는 조금 다른 야구 이야기 코너에 의하면 김경문이 500경기 이상 출전했던 은퇴 선수들 중 타율이 가장 낮은 '역대 최악의 타자 10위'라고 한다.
- ↑ 참고로 역대 최악의 타자 2위가 바로 조범현(0.201), 1위는 前 넥센 히어로즈의 감독인 염경엽(0.195).
- ↑ 이시기 삼성은 1차 암흑기로 양준혁, 이승엽 둘이서만 야구할 정도로 흑역사 오브 흑역사다.
- ↑ 역시 이 경쟁 속에서 이광환 감독이 사퇴한 다음 LG의 선택은 이순철...
- ↑ 롯데 자이언츠 - 두산 베어스를 거친 투수 출신 프런트. 2000년 5월 김영수를 상대로 두산 베어스에 트레이드된 후에는 두산에서 2002년까지 선수 생활을 하고 프런트로 몸담았으며, 현재는 NC 다이노스의 1군 매니저다. 두산에 사직서를 낸 이후에는 "문 카페"의 운영을 잠시 맡았다고 한다.
- ↑ 이후 두산 베어스 갤러리는 극렬한 김경문 안티로 돌아선다.
- ↑ 자진사퇴라 지급을 안해도 된다. 그간의 공을 생각해서 준 것일 뿐.
- ↑ 당시 박승호 2군 감독, 김광림 타격코치, 강인권 배터리코치. 그나마 강인권은 15시즌 두산으로 컴백했다.
- ↑ 고창성은 10년 포스트시즌 10경기 연투를 버티지 못하고 후유증으로 고생하다가 2차 드래프트에서 NC로 가게 되면서 다시 고통받게 되었고, 임 모씨는 사생활 문제가 크긴 했지만 그 전부터 혹사로 인해 허리 통증이 왔고, 혹사로 인해 구위가 떨어지면서 2010년에는 피홈런 1위
홈런 공장장라는 불명예스러운 타이틀을 획득했다 사생활문제가 없었어도 망가졌을거라는 의견이 있다. 이재우는 13년에 선발 투수로 마지막 불꽃을 태웠지만 그 후에는 별다른 활약이 없고, 그나마 가장 관리해줬던 이용찬이 군 제대 이후 어떤 모습을 보여줄 지는 좀 더 두고봐야 한다. - ↑ 이렇게 좋지 않은 투수진을 가지고도 2015년 전반기 내내 1위 경쟁을 했으며, 연패를 찍던 후반기 때도 4위 밑으로 내려간 적이 단 한 번도 없다는 점이다. 김진욱 전 감독 시절 기틀을 다져놓은 선발야구의 힘이라고 볼 수 있다. 김태형 감독은 시즌 내내 계산 서는 선발이 유희관과 장원준 딱 둘뿐이었음에도 어떻게든 대체선발을 올려가면서 선발 투수를 당겨쓴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이 때 대체선발로 올라온 진야곱(4월 8일), 허준혁(6월 23일), 이현호(8월 17일)가 당해 두 달 간격으로 차례차례 데뷔 첫 선발승을 따내면서 두산은 의외의 선발 자원들 또한 발굴해 낼 수 있게 되었다.
- ↑ 이용찬은 당시 선발로 이미 전향한 상황이었다.
- ↑ 수비력은 신인 시절부터 알아주던 선수였으나 그 전까지는 경험 부족에 포지션도 고정되지 않아 안정되지 못했던 게 컸다.
- ↑ 이종욱은 플레이오프는 MVP를 2년연속 수상 할 정도로 엄청난 활약을 했지만 한국시리즈에 올라가면 귀신같이 삽을 펐다.
- ↑ 이마저도 김경문의 육성능력이 뛰어나다기 보단 두산의 화수분 시스템이 뛰어났기에 가능하단 의견들도 있다
- ↑ 임태훈 건으로 사퇴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위에서도 보이듯이 사퇴 의사를 처음 밝힌 건 5월 5일, 고 송지선 아나운서의 싸이월드 글이 올라온건 5월 7일, 고인이 사망한 날은 5월 23일이다.
- ↑ 물론 선수가 팀을 배신한것과 감독이 팀을 버린것의 차이가있다
- ↑ 일정 성적은 거둬도 그리고 주전혹사와 불펜혹사가 심했던 감독인것도 비슷하다. 차이점은 그래도 이상범 밑에서 사고 친 선수들의 죄는 덜하기는 해도 사고 친게 비슷해서 그렇다.
- ↑ 이 시즌에 다른 KBO 리그 감독과는 달리 연도별 개별 항목이 만들어지지 않았다.
- ↑ SK는 내부 FA 3명이 타팀으로 유출되었고, 삼성은 윤안임, 용병3명, 박석민까지 팀 전체 WAR가 반토막났다. 넥센 역시 박병호, 벤헤켄의 해외 진출과 유한준, 손승락의 타팀 이적으로 WAR가 거의 반토막났다. 두산은 저 팀들에 비하면 전력 유출이 덜하지만 그래도 김현수의 해외 진출은 타격이 크다.
- ↑ 암 수술 이후 150km의 속구를 던지던 원종현은 구위가 계속 하락하고 있고 선발과 불펜을 오가는 최금강과 이민호, 연투 마무리 임창민까지 혹사를 당하고 있으나 이 분 덕에 (...) 별로 욕을 먹지는 않고 있다.
- ↑ 삼성 시절은 암흑기고 간통 루머로 인해 팀을 떠나 평가가 박하다.
- ↑ 김경문의 공이라기보단 두산의 전통적인 화수분 야구 덕분에 이룬 결과로 보는 시각도 있다.
- ↑ 반면 후임 김진욱 감독은 단 2년 만에 선발 투수를 키워내면서 그 긴 재임 기간 동안 단 한 명의 선발 투수도 못 키워 낸 김경문 감독과 비교가 된다. 두산 팬들은 이 때 두산 야구 보면서 처음으로 5선발 로테가 두산에서도 돌아갈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 ↑ 8시즌 960경기 승률 0.542
- ↑ 한국시리즈 사상 첫 2연승 후 4연패 기록이기도 하다.
- ↑ 2005년 2패, 2007년 3패, 2008년 3패, 2016년 2패.
- ↑ 전시즌 월드시리즈 엔트리에 포함되었던 니퍼트를 영입했고 일본에서 돌아온 이혜천을 재영입했다
비록 핵이되어서 먹튀가 되었지만 - ↑ 사실이 아니다. 임태훈 논란은 5월 7일 송지선 아나운서의 미니홈피 글에서 시작되었다. 임태훈 논란으로 팀의 분위기가 가라앉은 뒤 사퇴의사를 전했다는 것은 시기가 맞지 않는다. 상술했듯 5월 5일 어린이날 대패 후 사퇴의사를 전했고, 구단은 계속 만류했다.
- ↑ 이때는 두산 팬들이 진짜로 은퇴하고 문카페 차리고 야인으로 돌아가는 줄 알았다.
- ↑ 2011년 말 김재환이 도핑 사건을 일으키긴 했으나 김경문이 자진사퇴한 이후 새 감독이 선임되기 전 어수선한 상태에서 일어난 것이고, 감독이 바뀐 2012년 이후로는 선수관리가 제대로 되어 2014년 이용찬이 신고만 가능하면 아무 문제 없이 사용 가능한 스테로이드계 피부약을 신고를 안해서 도핑에 걸려서 잠깐 구설수에 오른 일 딱 하나 뿐이었다.
그리고 이때도 사실 감독이 쪽동님이라 선수관리가 제대로 됐을 것 같진... - ↑ 특히 김경문이 나간뒤 2016년 현재까지 음주운전이나 승부조작 등 현행법을 어긴 선수는 하나도 없다.
- ↑ 삼성코치시절 2차례 간통 혐의로 고소당한 걸 빗대서 붙은 별명. 참고로 삼성은 김경문이 코치로 재임했던 기간인 94~96년도에 1차암흑기를 겪는다. 물론 책임은 김성근에게 물었지만....
- ↑ 한국시리즈 사상 첫 2연승 후 4연패 기록이기도 하다.
- ↑ 2005년 2패, 2007년 3패, 2008년 3패, 2016년 2패.
- ↑ 디씨위키 김경문 항목에서도 이를 반영한 모습을 보였다.
- ↑ 페넌트 우승은 데뷔시즌이던 1987년에 한번 경험했지만 최종보스 해태를 못넘어서...
- ↑ 번트 앤 슬래시와 런 앤 히트, 하나라도 실패했다면 감독이 욕만 먹었을 엄청난 작전들이다.
- ↑ 손시헌 초구 2루수 뜬공 - 지석훈 초구 2루수 뜬공 - 김태군 2구 중견수 뜬공
- ↑ 이게 결정적이었다. 스튜어트가 4회에 양의지에게 홈런을 맞는 등 불안했는데, 4회 말이 단 4구로 끝나버리면서 스튜어트는 페이스 조절에 치명타를 맞게 되었고 그 결과는 모두가 알다시피...
- ↑ 사퇴 당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