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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스앤젤레스 갤럭시 No.8 | |
스티븐 조지 제라드 (Steven George Gerrard, MBE)[1][2] | |
생년월일 | 1980년 05월 30일 |
국적 | 잉글랜드 |
출생지 | 머지사이드 주 리버풀시 휴이턴 |
포지션 | 미드필더[3] |
신체 조건 | 183cm[4], 83kg |
주로 쓰는 발 | 오른발 |
등번호 | 국가대표 - 4번 로스앤젤레스 갤럭시 - 8번 |
유소년 클럽 | 리버풀 FC (1987~1998) |
소속 클럽 | 리버풀 FC (1998[5]~2015) 로스앤젤레스 갤럭시 (2015~ ) |
국가대표 | 114경기 / 21골 |
별명 | 캡틴[6], Stevie G[7] |
리버풀 FC 역대 주장 | |||||||||||
사미 히피아 (2001~2003) | → | 스티븐 제라드 (2003~2015) | → | 조던 헨더슨 (2015~) |
잉글랜드 국가대표팀 역대 주장 | |||||||||||
존 테리 (2006~2012) | → | 스티븐 제라드 (2012~2014) | → | 웨인 루니 (2014~) |
2007 FIFPro World XI | |||||||||||
FW 호나우지뉴 | FW 디디에 드록바 | FW 리오넬 메시 | |||||||||
MF 스티븐 제라드 | MF 카카 | MF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 |||||||||
DF 카를레스 푸욜 | DF 존 테리 | DF 파비오 칸나바로 | DF 알레산드로 네스타 | ||||||||
GK 잔루이지 부폰 | |||||||||||
2008 FIFPro World XI | |||||||||||
FW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 FW 페르난도 토레스 | FW 리오넬 메시 | |||||||||
MF 카카 | MF 스티븐 제라드 | MF 사비 에르난데스 | |||||||||
DF 카를레스 푸욜 | DF 존 테리 | DF 리오 퍼디난드 | DF 세르히오 라모스 | ||||||||
GK 이케르 카시야스 | |||||||||||
2009 FIFPro World XI | |||||||||||
FW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 FW 페르난도 토레스 | FW 리오넬 메시 | |||||||||
MF 안드레스 이니에스타 | MF 사비 에르난데스 | MF 스티븐 제라드 | |||||||||
DF 파트리스 에브라 | DF 네마냐 비디치 | DF 존 테리 | DF 다니에우 아우베스 | ||||||||
GK 이케르 카시야스 |
2005 Ballond'or | ||
수상 호나우지뉴 | 2위 프랭크 램파드 | 3위 스티븐 제라드 |
2005 UEFA 올해의 클럽 축구 선수 | ||
스티븐 제라드 |
영원한 리버풀의 심장
리버풀 역사상 최고의 주장[8]이자 2000년대 EPL을 대표했던 월드 클래스 미드필더
목차
1 개요
로스앤젤레스 갤럭시 소속의 축구선수.
28년이라는 긴 시간동안 리버풀이라는 클럽 하나에만 충성한 붉은 심장. 2000년대 리버풀의 최전성기를 함께하고 숱한 월드클래스급 동료들을 빼앗기며 암흑기에 접어든 리버풀을 묵묵히 지켰던, 내로라 하는 수많은 라이벌과 강팀들이 던지는 수많은 이적 제의[9]에도 불구하고 리버풀에 남았다. 말년까지도 여러 빅리그 팀들의 구애가 있었으나 "리버풀을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 라는 한마디를 남기며 LA갤럭시로 이적했다. 그야말로 리버풀에 모든 것을 바친 리버풀의 자존심.
2 플레이 스타일
다재다능한 미드필더의 표본
육각형 선수로 축구 선수로서 갖춰야 할 모든 덕목을 두루 겸비한 미드필더. 헤더, 골, 어시스트, 중거리 슛, 프리킥, 코너킥, 수비, 공격, 리더십, 투쟁심 등 뭐 하나 빠질 것 없이 다 갖춘 팔방미인. 때문에 골키퍼나 전문적인 수비 능력이 필요한 수비 포지션을 제외하고 어떤 포지션에 세워도 제 역할을 충실히 해주는 만능 플레이어이다.
전성기 시절엔 주력도 나름 되어 가끔 윙어도 봤었다.
데뷔는 수비형 미드필더로 출발했지만 공격적인 재능이 있어서 박스 투 박스에서 공격형 미드필더까지 미드필드 전지역에서 활약하다가 이후에는 다시 수비형 미드필더 자리로 와서 딥라잉 플레이메이커 역할까지 맡았다.
3 클럽경력
3.1 리버풀
Liverpool No. 8
리버풀 근교인 휴이턴에서 태어나 8살에 리버풀 FC에 입단하여 리버풀의 상징으로 활약했다. 23살의 어린 나이에 사미 히피아로부터 캡틴밴드를 물려받고 뛰어난 리더십으로 팀을 이끄는 모습을 보여주었었다.
데뷔 시절에는 이런저런 땜빵으로 들어가다 어느 정도 자리잡았던 시절에는 투쟁적인 태클이 일품인 수비형 미드필더였다. 그 공격적 능력이 매우 뛰어나 점차 공격적인 롤을 소화해가기 시작해가면서 중앙 미드필더, 사이드 미드필더와 같은 자리에서도 매우 뛰어난 모습을 보인다. 한때는 페르난도 토레스의 밑자리에서 쉐도우 스트라이커와 같은 롤을 소화하기도 했다. 하지만 일단은 공격적인 롤을 맡는 중앙 미드필더가 주 포지션. 대포알 같은 중거리슛이 일품인데 이 골이 결승골 또는 역전의 시발점이 되어서 해결사의 역할을 해주기도 한다[10]. 대표적인 경기로는 04/05 챔스 올림피아스코스 전과 05/06 FA컵 결승전이 있다. 중거리슛 뿐만 아니라 돌파, 헤딩, 크로스, 태클 모두 정상급인 전천후 축구머신. 거친 플레이도 불사하는 투지 넘치는 플레이어이며 경기 시작부터 끝까지 피치 이곳저곳을 종횡무진 누비는 활동량은 짬이 삐약거리던 시절부터 최고참인 지금까지 변함이 없고, 피지컬적으로도 강인하다. 다만 플레이메이커로서의 창조성은 좀 아쉬운 부분, 13/14시즌의 제라드는 결국 창조성까지 월클을 찍었다;; 투지넘치는 플레이와는 대조적으로 의욕없는 표정이 인상적이기도 하다. 슛 한번 쏘고 세상에서 제일 축구하기 싫은 사람같은 표정을 짓는걸 보면...
04-05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에서 AC 밀란에게 3-0으로 뒤져 있는 상황에서 첫골을 만들어 분위기를 살려냈고, 이후 3-2까지 따라붙은 상황에서 젠나로 가투소와의 경합과정에서 넘어져 패널티킥을 얻어내 3-3 동점을 만들었다. 통칭 이스탄불의 기적. 결과적으로 승부차기까지 가는 접전 끝에, 리버풀의 승리로 마감된 이 경기에서 스티븐 제라드의 활약상은 절대적이었다.
또한 이 경기에서 주장완장을 찬 스티븐 제라드는 역대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을 우승으로 이끌었던 주장들 중 두 번째로 어린 나이라는 기록을 달성하였으며 이는 현재까지도 유지중인 기록이다. 이 기록의 1위는 1993년 대회의 우승팀인 올림피크 드 마르세유의 주장이었던 현 프랑스 축구 국가대표팀의 감독 디디에 데샹.
05-06 FA컵에서 웨스트 햄 유나이티드와의 결승전에서 3-2로 뒤져있는 상황에서 후반 90분에 통쾌한 중거리슛으로 연장까지 끌고가 결국 승부차기까지 끌고 갔고 리버풀이 우승을 하게 하였다. 이 때 골을 허용한 웨스트햄의 트리니다드 토바고 국가대표 샤카 히즐롭 골키퍼는 불과 한달 뒤 월드컵에서도 제라드에게 실점을 했다.
08-09 시즌에는 자신의 커리어 최다골(16골)을 만들고 최초로 해트트릭도 기록하고 리그 우승을 노렸지만 1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승점 4점차로 아쉽게 실패. 발롱도르 순위 5위.
여러 추문에도 불구하고 케니 달글리시나 이안 러쉬 등 클럽의 레전드 선수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실로 리버풀을 대표하는 선수임에는 이견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정도 선수임에도 만 30이 되는 지금까지 "단 한번도 리그 우승이 없어서 이러다가 은퇴할 때까지 리그 우승도 못해보는거 아니냐?"라는 우려도 많다. 비슷한 예로는 이 분이 있다.
그리고 2010년 5월 2일, 첼시 FC와의 결전에서, 디디에 드록바에게 패스미스를 해, 팀의 패배에 기여했다.[11]
2010년 여름 레알 마드리드로의 이적설이 터졌고 한때 기정사실이 되는 분위기까지 갔으나 결국 고향을 택하며 잔류를 선언, 10/11시즌도 리버풀에서 뛰게 되었다. [12]
하지만 2011년에도 호지슨 전술에서 제라드가 짊어지는 부담이 커진데다, 토레스의 부진, 자신의 부상까지 겹치면서 리버풀은 나락까지 떨어졌다. 케니 달글리시 부임 이후에 제라드 자신도 살아나고 토레스도 부활하나 싶더니...토레스가 배신 때리고 첼시 가버렸다. 하지만 몇 년 후 첼시 팬들은... 정말 안타까운 것은 이적 며칠 전까지만 해도 아이들과의 인터뷰에서 제라드가 토레스가 드록바보다 훨씬 더 잘하지라고 끈끈한 애정을 과시했던 것.
2012년 3월 13일 안필드에서 펼쳐진 머지사이드 더비에서 해트트릭을 기록하며 3:0으로 팀을 승리로 이끌었다.
2012-2013 새로운 감독 로저스 체제에서 초반 부진을 면치 못하며, 제라드 없는 리버풀을 생각해야 한다는 팬들이 늘어났으나 리그 절반이 지난 2013년 1월 3일 현재 리그 5골 10어시로 클래스를 보여주는 중. 특히 중원 처진 자리로 내려간 후에 얼리크로스나 빵빵 차는 롱패스를 기가 막히게 선보이며 내가 제라드고 내가 곧 뻥글랜드니 이게 진짜 뻥축구란 걸 세간에 알리고 있다. 공미 자리에선 부족해 보이던 창조성이 중원 아래로 내려가니까 뻥패스와 더불어 생겨났다. 짧은 패스를 바탕으로 한 점유율 축구를 추구하던 로저스 감독 체제에서도 초반에 홀로 이질적인 뻥패스를 구사하며 삐그덕거리는 탓에 세월에 뒤처졌나 싶더니 어느새 점유율도 적당히 지키고 뻥축도 적당히 하는 기묘한 축구를 구사하고 있다. EPL 도움 순위도 27라운드가 끝난 현재 13도움으로 카를로스 테베스와 함께 공동 1위에 올라 있다.
맨시티 전에서 오랜만에 중거리포를 넣었다.
몸상태가 회춘한것인지 12-13시즌의 전경기를 출장하던 중, 결국 시즌 막바지에 어깨수술때문에 전경기출장을 기록하진 못했다. 하지만 팀내 어시스트 1위를 기록하고 어깨수술전까지 리그경기를 모조리 출전한것으로 보아 포지션을 밑으로 옮긴것이 상당히 유효했던 모양.
13-14시즌에 새로 영입된 콜로투레가 리버풀에 오자마자 “제라드로부터 리버풀 정신 봤다”라는 인터뷰를 했고 수아레스와 로저스의 화해자리를 주도하는 등의 모습을 볼 때 주장으로서의 역할 그 이상을 해주고 있다. 영원히 고통받는 제라드
13년 10월 19일 뉴캐슬과의 경기에서 루이스 수아레스가 만들어낸 페널티킥을 성공시키며 프리미어리그 447경기 통산 100호 골을 달성했다. 프리미어리그에서 100골 이상을 넣은 선수로는 24번째이며 디디에 드록바와 같은 기록이라고.
12-13시즌부터 롱패스 성공률 1위를 기록하고있다. 제라드 밑으론 죄다 골키퍼들이 순위권이기 때문에 더욱 놀라운 기록. 국대에서도 롱패스로 먹여살렸었고, 나이가 들면서 시야도 더 넓어졌기 때문인듯. 사실 예전부터 롱패스는 기가막혔는데 포지션을 밑으로 옮기면서 더욱 횟수가 늘어나서 눈에 보이는 스탯으로 보여지는것.
13-14 시즌 리버풀은 후반기에 역대급 페이스를 보이며 프리미어리그 출범 후 첫 우승을 눈앞에 뒀었다. 특히 우승경쟁 최대의 라이벌인 맨시티를 홈에서 극적으로 3:2로 눌렀을 때 제라드가 흘린 기쁨의 눈물은 거의 모든 콥들의 가슴을 아리게 만들었다. 그리고 노리치 시티전까지 11연승을 이어나가며 남은 3경기에서 2승 1무만 해도 자력 우승이 가능한 상황이라 콥들의 우승에 대한 기대치는 최고조에 달했고, 그랬기에 다음 라운드 첼시와의 홈경기가 그 어느때보다 중요했는데.... 0-0으로 팽팽한 균형을 맞추고 있던 전반전 종료 직전, 제라드는 사코의 패스를 받던 도중 미끄러져 넘어지고 말았고, 때마침 근처에 있던 뎀바 바가 볼을 낚아채면서 그대로 선취골을 했다.[13]다급해진 리버풀은 후반전에 10백 형태로 나오는 첼시에게 맹공을 퍼부었으나 좀처럼 첼시의 방패는 뚫리지 않았고, 결국 경기 종료 직전 토레스의 패스를 받은 윌리안에게 추가골을 허용하면서 무너져내렸다. 그렇게 패배하면서 자력 우승의 기회는 맨시티에게 넘어갔다. 일정 상으로는 맨시티가 너무나도 유리한지라 만약 이대로 맨시티가 2연승으로 우승을 확정짓게 된다면 이 실수는 콥들에게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제라드 본인에게 평생 잊혀지지 않을 뼈아픈 기억이 될 것이다. 그러나 콥들은 억장이 무너지는 가운데서도 그 누구보다도 리버풀의 리그 우승을 갈망했던게 바로 제라드라는걸 알고 있기에 차마 그 실수로 그를 비난하지 못했다.
14-15시즌에는 폼이 매우 떨어져 좋지 않은 경기력으로 비판을 받고 있다. 압박을 쉽게 풀어나가지 못하고 나이에 따른 기동력 저하로 수비가담에서도 한발 늦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고 제라드를 빼자니 최근 리버풀 상황이 상황인지라 축구팬들은 전문 수비형 미드필더를 배치하여 제라드의 수비가담 부담을 덜어주고 제라드를 공격적인 역할에 치중하게 할 것을 주장하고 있는데 실제로 수비적인 부담이 적은 역할을 맡았을때 제라드가 기존보다 향상된 경기력을 보여줬다.
BBC에서 14-15 시즌이 끝나고 제라드가 리버풀을 떠난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BBC의 공신력을 생각해보면 시즌이 끝난 후 제라드가 이적할거라는 것은 기정사실로 보인다. 결국 리버풀 공식 홈페이지에 제라드가 떠난다는 내용의 기사가 올라오면서 유스 시절 포함 27년간의 리버풀 생활을 마무리하게 되었다. 당초 예상되었던 미국행에 대해서는 아직 결정된 것이 없다고 하였으나 2015년 1월 4일자 ESPN 보도에 따르면 LA 갤럭시와 연봉 66억원의 1년 계약을 맺었다고 한다.
Goodbye Captain
마지막 노스웨스트 더비에서는 교체로 나온 지 30초만에 퇴장당하며 씁쓸히 마감하였다.
아스톤 빌라와의 경기에서는 별다른 활약을 하지 못하고 팀의 1:2패배를 바라봐야 했으며 이걸로 리버풀에서의 마지막 시즌도 무관으로 마감하게 되었다.
QPR과의 경기에서 PK를 실축하면서 또다시 역적이 되나 했으나 쿠티뉴의 크로스를 받아 역전골을 터뜨리면서 팀의 2:1승리의 주역이 되었다.
그리고 5월 17일, 홈에서 크리스탈 팰리스와의 안필드 고별전에서 풀타임으로 뛰며 만감이 교차하는 표정으로 그라운드를 뛰어다녔다. 하지만 리버풀은 1-3으로 패배의 고배를 마셨다.
38차전 리그 마지막 경기인 스토크 시티 원정에서는 팀이 전반에만 무려 5골을 처먹는 결과를 봐야했다. 바로 제라드가 후반에 1골을 넣으며 은퇴경기에서도 리그 골을 기록했지만 또 1실점을 당하며 팀은 1-6, 시즌 최다 실점패를 당하며 제라드의 은퇴경기를 말아먹었다....같은 날, 리그 우승한 첼시 FC가 마지막 선더랜드 전을 3-1로 역전승하며 1골을 터뜨린 드록바가 찬사를 받으며 마지막 프리미어리그 은퇴경기를 끝낸거랑 대조적이었다...오죽하면 외신에서도, 국내 기사에서도 <두 레전드의 극과 극인 마지막 프리미어리그 은퇴경기>라는 제목을 달았다.
축구인생의 전성기에 다른팀으로 이적해서 더 많은 명성과 우승컵을 얻을 수 있었지만 그는 끝내 리버풀에 남았고, 이제 그 리버풀을 떠난다.
3.2 로스앤젤레스 갤럭시
제라드는 LA갤럭시 가서도 등번호 8번을 달았다. 잉글랜드의 램파드와 제라드를 이제는 EPL이 아닌 MLS에서 볼 수 있다.
7월 12일, 기네스 컵에서 멕시코의 클럽 아메리카와의 경기에서 비공식 데뷔전을 치뤘다. 7월 14일 US 오픈 컵 8강전에서 레알 솔트레이크를 상대로 미국에서 데뷔전을 치뤘다. 46분 출장에 팀은 0:1로 패배. 7월 18일 산 호세 어스퀘이크 전에서 MLS 데뷔전을 치뤘고 MLS 데뷔 경기에서 1골 1어시 기록했다.
MLS에서 고작 1경기만 뛰고 2015 MLS 올스타에 선정되어 7월 29일 토튼햄 핫스퍼와의 경기에 출전하게 되었다. 다만 1경기만 치루고 MLS올스타에 선정된것에 대하여 기존 MLS선수들의 불만이 있었다.
그렇게 2015 시즌을 끝내고 나온 기록은... 총 19경기 출전 3골 4어시. 괜찮은 활약이었지만 투자한 만큼 좋은 활약을 기대했었던 팬들은 먹튀라고 욕하고 있다.
2015년 10월 8일 미러에서 클롭이 제라드의 은퇴 후 코치진을 보장한 복귀를 추진한다고 기사가 났다. 만약 이게 현실이라면 LA갤럭시는 초비상.
하지만 제라드 본인은 아직 현역 생활을 지속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고 한다. 그리고 LA 갤럭시와 계약이 만료되는 2016년 12월 31일에 현역 생활을 마무리한 뒤 리버풀의 코치로 돌아온다는 보도가 나왔다. 이게 사실이라면 일단 MLS에서 최소 한 시즌 더 뛰는 건 확정인 듯.
4 국가대표
국가대표로서는 괜찮은 활약을 펼치지만 램파드-제라드 중앙 미드필더 조합이 서로 같은 공격형 미드필더이고 활약도 비슷하여 동선이 겹치는 바람에 영 신통치 않아서 딱히 좋은 맛은 못봤다.[15][16] 잉글랜드 중원은 1+1=0 이다 라는 농담이 여기서 나왔다. [17]
남아공 월드컵에서는 존 테리의 삽질로 당초 대표팀 주장이었던 리오 퍼디난드가 부상으로 이탈함에 따라 주장 완장을 차고 출전했다. 조별리그 첫 경기 미국전에서 선제골을 넣었다. 하지만 대표팀에서 제라드와 램파드의 조화를 이뤄낼 중요한 카드였던 가레스 배리가 부상 후유증으로 폼이 완전히 올라오지 않았기 때문에 모두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램파드-제라드 라인은 안습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다만 3차전에서는 볼배급은 램파드에게 맡기고 자신은 측면에서 경기를 풀어나가면서 둘의 조화가 제법 이뤄졌다는 평가가 많다.
브라질 월드컵에서도 어김없이 주장 완장을 차고 출전했다. 리버풀에서처럼 좋은 경기력을 보여주었으나 이탈리아전에서 패배하고 이어서 우루과이전에서는 루이스 수아레스에게 찔러넣은 전혀 위화감 없는 킬패스 뼈아픈 실책으로 패배하면서 조별리그 탈락을 하고 말았다. 월드컵이 종료된 후인 2014년 7월 21일에 대표팀 은퇴를 선언했다. 최종적인 국가대표 기록은 114경기 출장[18] 21득점. 같은 팀 동료이자 국가대표 동료이기도 한 조던 헨더슨은 그에 대해 잉글랜드 역사상 최고의 리더이자 선수였다며 극찬했다.
5 제라드 vs 램파드
최고의 미드필더라든지 최고의 리더십 떡밥엔 빠지지않고 출석하며 악명높은 램파드 vs 제라드 논쟁의 주인공. 이 문서에서도 이 것으로 많은 싸움이 일어났다. 괜히 여기서 논쟁 일으키지 마시길
6 리더십
주장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선수. 게다가 리버풀 FC의 프렌차이즈이며 주장 생활을 24세부터 했으니까 엄청난 정신적 지주.
그의 리더쉽이 돋보이는 일화는 여러가지가 있다.
6.1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다
AC 밀란과의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에서 3대0으로 뒤진 상태로 전반을 마친 상황이었다. 그때 라커룸에서 풀이 죽은 선수들을 분위기 살린 일화는 유명하다. 그 뒤에도 제라드는 몸소 최선을 다하며 선수들의 사기를 이끌며 파이팅을 외쳤고 직접 골도 넣고 페널티 킥도 얻어낸다.밀란 팬들한텐 금지 발언 특히 리버풀의 첫 골을 득점한 후 제라드의 세리머니는 선수들과 리버풀 관중들 모두에게 기죽지말고 아직할수 있다고 팔을 힘껏 위로 올리는 세리머니를 했다. 결국, 그에 대한 결과가 우승이었다.
파일:5qVqgFv.gif
그리고 트로피를 가장 맛깔나게 드는 주장 제라드였다. 이 사건을 이스탄불의 기적이라고 부른다.[19]
6.2 감독들이 많이 좋아한다
물론 어느 포지션에서나 뛸수있다는 팔방미인적인 요소 때문일수도 있으나 그 정신적인 지주 역할과, 감독에 자기 의견을 강력하게 피력하는 스타일이 아닌 묵묵히 따르면서 자기의 의견을 조금씩 제시하면서 절충하는둥, 감독과 같이 가는 동반자의 스타일 성향 이기 때문에 좋아한다. 그렇기에 감독과의 불화가 전혀없다.[20] 거기다 대부분의 감독들은 꼭 제라드 리더쉽에 대해 한마디는 꼭한다. 물론 그가 주장이라 립서비스를 했을지도 있겠으나, 그러기엔 다른 선수와 비교했을때 제라드의 리더쉽과 관련된 기사가 많이 나온다.
같은 리그내 유명구단들 정신적 지주들과 상당히 비교되는 항목이다.
6.3 선수들을 하나하나 챙긴다
주장으로써 당연한거지만 입증이 되는 사진과 기사들이 많다. 갓 국가대표에 승선한 선수들이라던지 리버풀로 갓 이적온 선수라던지 이들은 새로운 선수로써 사진이 많이 찍히는데 거기 옆엔 항상 제라드가 있다. 선수들을 적응시켜줄려고 신입들을 잘 챙기는듯하다.
2012년 9월에 출간된 그의 두 번째 자서전에 의하면 페르난도 토레스의 첼시 이적 때문에 마음고생이 심했던 듯하다. 애초에 토레스가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에서 리버풀로 온 것도 챔피언스 리그 출전 등 유럽 대회에서 나가고 싶었던 것이었지만 하필이면 라이벌 클럽인 첼시로 가고 싶다고 했으니..[21]
당시 리버풀 보드진과 케니 달글리시 감독대행이 토레스 이적에 반대하자 토레스는 제라드에게 자기가 이적할 수 있도록 말 좀 잘 해달라고 땡깡도 아니고 부탁까지 했다. 그것도 제라드에게 직접 "나는 충분히 했고 클럽을 떠나고 싶다.[22] 주된 라이벌팀 중 하나로 가고 싶다." 라고. 오랜 시간 동안 리버풀의 주장으로서 자신을 포함해 많은 선수들의 사건사고를 겪었지만, 그때만큼 충격적인 일은 없었던지 토레스의 그 말을 듣고 심장을 칼로 찔리는 기분이었다 라고 회고했다.리버풀 심장의 심장이 아파요 ㅠㅠ 어쨌든 이 말까지 듣고 나서는 자기도 포기했는지 케니 달글리시 감독한테 이적을 허락해 주자고 말했다고 한다. 그 전부터 조금씩 늘어나던 이마 주름은 이 때를 기점으로 선명해진다. 토레스 이적과 관련해서 많은 마음고생을 한 모양이다. 하기사 리버풀 로컬로 유소년 팀에 입단하여 소년기와 청년기의 대부분을 헌신한 클럽의 주장이 저런 말을 듣고 상처받지 않을 수야 있겠냐만.[23]
주장이 설득해야하는데, 주장을 설득하는
하지만 이걸 경험으로 설득 스킬이 생겨 다음 땡깡 팀원한텐 절대로 실수 하지않는다.
루니가 힘들때 제라드와 상의했던 것도 유명하다.
제라드와 상의한 루니
그리고 수아레스도 이적설이 떴다.리버풀 다 죽게 생겼다 이놈들아 토레스 만큼이나 파격이 컸었으나 [24] 결국엔 잔류를 했다. 거기엔 제라드의 역할이 아주 컸다고 수아레스가 직접 말했다. 그리고 결국... 하지만 제라드의 조언은 역대급 조언이었다.
엠레찬이 보는 제라드
실수를 해도 격려를 해서 감싸준다고 한다.
[1]
제라드가 경미한 부상으로 후반전에 빠졌었다. 그 경기가 끝나고 난뒤 선수들이 나가는 출구에 나가지 않고 기다리며 일일이 한명한명씩 고생했다고 챙기는 모습.
특히 그 시기에 부진했던 미뇰렛에게 격하게 챙겨주는것이 포인트.
6.4 감독과 선수 사이의 중간다리 역할을 잘 한다
수아레스가 이적 소동 때문에 로저스와 사이가 무척이나 소원하고 어색해졌는데 제라드가 화해를 주선하며 둘의 사이를 잘 조절했다고 한다.
위의 토레스같은 경우도 같은 경우라 볼 수 있다.
6.5 현지에서의 여론도 크게 지지받고 있다
국대에서 한때 테리가 주장일때 있었는데, 그전에 누가 주장이 어울리는가 하며 여론 조사를 했다고 한다. 거의 제라드와 테리가 양분하면서 압도적이었고 그뒤를 퍼디난드가 조금 잇다시피 했다. 테리가 근소한차이로 제라드를 앞서갔다.그때의 감독은 수비수에게 주장주는 성향이 있어서 주장은 테리에게로 넘어갔다. 하지만 테리의 어떤 이유(누구나 다 아는) 때문에 주장직이 박탈이 돼버리고 지금은 제라드가 압도적으로 지지율이 높다.
선수들에게도 많은 지지를 받는듯 하다.
6.6 주장들의 주장
다니엘 아게르 - 국대 주장
루이스 수아레스 - AFC 아약스 주장
루카스 레이바 - 청대시절 주장
조던 헨더슨 - U21 국대 주장
마르틴 스크르텔 - 국대 주장
콜로 투레 - 아스날 FC 주장
마마두 사코 - 파리 생제르맹 FC 주장
안드레 위즈덤 - U19 국대 주장
조던 로시터 - U16 국대 주장
로비 파울러 - 리버풀 FC 전 주장[25]
페르난도 토레스 -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주장
크리스티안 폴센 - 국대 주장
사미 히피아 - 국대 주장
조 앨런 - 국대 주장
아담 랄라나 - 사우스햄튼 FC 주장
리키 램버트 - 사우스햄튼 FC 부주장
엠레 찬 - 청대시절 주장
등.
유스와 과거 리버풀에 몸담았던 선수를 보더라도 각팀의 주장들의 주장이라는 점이 위엄이 느껴진다. 원래 굴러온 돌이 박힌돌을 빼기 힘든법이라 이런 현상은 당연하다. 하지만 아무리 제라드가 리버풀의 프렌차이즈 스타이고 터줏대감이지만,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고 이런 리더 출신들을 뛰어넘는 리더쉽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주장 대접을 받긴 힘들다. 하지만 그들 모두가 제라드를 인정하며 따른다.
제라드를 제외한 팀원들간이라도 자기 목소리를 내지 싶은데 그런것도 전혀 없다. 오히려 팀분위기는 성적이 나빠도 매우 좋고행복풀 파벌같은 것도 없으며 두루두루 친하다.[26][27] 리버풀팬들은 많이 봐서 잘 알겠지만 경기 전 트레이닝 사진들을 볼때 감독[28] 코치 포함해서 95%이상이 웃고 있다. 카메라 비칠때마다 항상 찡그리는 표정의(...) 제라드 마저도 그냥 잘만 웃는다. 이게 바로 행복풀이구나 ㅠㅠ 하도 이런 좋은 분위기라 그런지 이적생이 14/15시즌엔 8명이나 영입이 되었는데도 트레이닝 사진보면 어색한거 전혀없이 서로 부둥켜껴안으며 잘만 웃고 있다.웃음 바이러스
이만 하면 팀 분위기 조성에도 한 몫하는 듯.
2014년 4월 13일 리그 우승으로 가는 길목 중 가장 중요한 맨시티전을 승리로 장식한 후, 제라드의 퍼포먼스(현장음 버전, 한국 중계 버전.)[29]는 전세계의 축구팬들에게 감동을 선사하는 동시에 그의 뛰어난 리더십을 보여주었다. 박문성의 감탄사는 덤. 이건 영화가 아니다.
"We go to Norwich and do exactly the same. We go again. COME ON!!!”
우승으로 가는 길목 중 제일 큰 고비를 아슬아슬하게 승리로 장식하면서 복받치는 눈물을 금방 자제하며 승리에 흥분하는 선수들을 한대 모아놓고 앞으로의 방향에 대한 정신교육을 시킨다.
이 영상에서 볼수있는것은 선수들의 단합력과, 그가 팀에서 차지하는 위상, 팀멤버들이 그에게 보내는 신념을 볼수있다.
그리고 일단 영상을 보면 우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30] 그 동안 그가 얼마나 리그 우승에 목말라했는가와 얼마나 많은 고생을 했는가[31], 그가 얼마나 리버풀을 사랑하는 가를 볼수 있다. 이런 리버풀을 위해(수 많은 유혹도 뿌리치며) 축구 인생을 바쳐왔으니 선수들이 굳이 그의 리더쉽을 안보더라도 따를수 밖에 없을것이다.
또한, 상술하였듯 이 경기는 '힐스브로 참사 25주기' 헌정 경기였다. (그래서 이 주, FA가 주관하는 전 경기가 7분씩 늦춰져서 킥 오프하였다.) 이 당시 희생 된 96명의 희생자 중, 제라드의 사촌(참고로 희생자 중 가장 어린 희생자였다.)이 있었기에 제라드 본인은 힐스브로 참사를 겪은 유가족 중 한 명이기도 했다. 그런 의미 깊은 날에, 의미 깊은 (24년만에 첫 우승에 가까워 진) 승리를 거두어 감정이 복받쳐 올랐다고 한다. 그런 상황에서도 곧 마음을 다잡고, 들떠있는 선수들을 진정시키는 리더십이 돋보였다고 할 수 있겠다.
제라드의 역대급 명장면이 된 씬이었고, 실제로 다음 경기인 노리치 전에서도 리버풀이 승리를 거두었지만 첼시 전에서 다름아닌 제라드가 미끄러져 우승컵이 멀어진 실수를 한 후에는 타팀팬이자, 리버풀 안티들이 비웃는 의미로 이 씬을 언급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주로 제라드가 설레발을 떨었다면서 비꼬는데 이것은 사실 위의 제라드의 언급에도 보듯이 오히려 설레발 자제 라며 다음 경기에 신경써라는 뜻이다.
15.2.20 베식타스전때 제라드가 부상으로 주장으로 헨더슨이 나왔었다. 리버풀이 1:0 PK골로 으로 승리했지만 옥에 티가 있었는데 PK차기전에 헨더슨-발로텔리가 서로 찰려는 신경전이 있었다. 로저스가 이 사건에 대해 말하길, "주장이 없으면 부주장이 주장하는거 처럼 페널도 그와 비슷하다. 제라드가 없으면 발로텔리가 두번째 키커다."[32] 이런 두가지의 규칙이 모순이 되어서 해프닝이 난것이다.그러면서 아직 헨더슨이 차기주장으로 확실히 된게 아니라는 발언까지.. 제라드는 헨더슨의 손을 들어주며 발로텔리에게 일침을 가하였다.[33] 발로텔리가 PK경험이 많지만 헨더슨이 주장이기에 주장에 힘을 더 실어주는듯하다.[34]
어찌보면 제라드가 없음으로 인해 벌어진 해프닝이기에, 그의 존재가 있고 없고의 차이를 보여준 해프닝이라 볼수 있겠다.곧 나가는 데 큰일이다
7 흑역사
7.1 다이빙(05~08)
어쨌든 제라드는 국내에도 굉장히 팬층이 두터운 선수이지만 2009년 연이은 스캔들로 그 위상이 많이 실추되었다. 평소의 모범적인 이미지와 상반되는 양면성이 드러났기 때문인데, 그는 시뮬레이션 액션 및 그런 행위를 일삼는 선수를 향해 일관적으로 비판적인 입장을 취해왔다.
"상대 선수가 근처에 있지도 않았는데 시뮬레이션 액션을 하는 것 만큼 나쁜 것은 없다고 생각해요. 그건 축구를 망치는 길이죠. 만약 제 팀 동료가 그런 행동을 한다면, 전 그에게 따끔하게 한 마디 할 겁니다."(2006년 데일리 메일과 가진 인터뷰에서) 사실 상대선수가 근처에 있을때 다이빙 하라는 조언이다
특히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나 히카르두 카르발류는 직접적으로 축구를 망치는 존재로 거론할 만큼 시뮬레이션 액션에 대해 비판적이었지만 본인이 그렇게 함으로써 비판을 받았다.참고
특히 움짤에도 있는 07-08 시즌 11월 4일 챔피언스리그 조별리그 AT마드리드와의 원정 경기에서 논란이 심한 헐리웃 액션을 보여주면서 그 비판이 절정에 달했고, 결국 위선자라고 무진장 까였다.
7.2 구타 사건 및 기타 스캔들
술집에서 싸움을 벌여 시민을 구타해서 법원에서 재판을 받았다. 같이 싸움 벌인 사람들은 대부분 유죄 판결 났는데, 혼자 무죄 판결나서 뭔가 의혹이 생기는 중.[35] 2010년 3월에는 위건에게 리버풀이 패배한 경기에서 심판에게 V사인(두 손가락으로 V자 모양을 만들어 손등을 상대에게 보이는 것으로, 영국에서는 중지를 올리는 것과 비슷한 용도)을 보였고, 다음 경기인 포츠머스 FC와의 경기에서 상대편 주장 마이클 브라운에게 팔꿈치를 날렸지만, 두 사건에 대해 징계는 받지 않았다.[36]
파일:Attachment/uploadfile/chadobox.jpg
차가운 도시의 복서
덕분에 요새(08년도 기준)는 불명예스러운 별명들이 잔뜩 생겨났다. 스티붕 구라드, 스티븐 구타드, 스티범 죄라드 등.
평소에는 별로 말이 없지만, 다혈질인 성격으로 알려져있다. 비슷한 성격인 가레스 배리와는 둘도 없는 절친. 둘이 만나면 어떻게 놀지 궁금하긴 하다(...). 배리를 리버풀로 꼬셔보려고 열심히 노력했지만 결국 맨체스터 시티의 쇼미더머니에 버로우.[37] 그리고 배리가 빠꾸먹인 09년 후반부터 리버풀의 악몽이 시작됐다(...)
다만 악동 이미지를 달고 망아지처럼 뛰어다니던 예전에 비하면 요새는 나이도 그렇고 쓴맛을 많이 본 탓인지 성격이 많이 죽은 듯 하다... 실제로 어느 시점에서부터인가 사진이나 인터뷰에서 빵긋 웃는 모습이 많이 보인다!
이런걸 보면 여전한거 같기도 하다(...) - [38]
7.3 중요할 때 범하는 실수들
마가 끼었다.
물론 누구나 실수는 할수 있지만 그게 하필 결정적인 것들이라 여러모로 회자된다.
02/03 시즌 첼시전 - 챔피언스리그 진출 티켓이 걸린 시즌 마지막 경기[39]에 팀이 2:1로 뒤진 상황에서 불필요한 파울을 범하며 퇴장당했다.
유로 2004 프랑스전 - 앙리에게 백패스를 하여 결승골이 되는 페널티킥을 헌납했다.
2005 칼링컵 결승 첼시전 - 1대0으로 앞서던 상황에서 동점 자책골..
09/10 시즌 첼시전 - 드록바에게 백패스를 해서 맨유와 경쟁하던 첼시의 우승을 간접적으로 나마 기여하였다.
13/14 시즌 첼시전 - 하프라인에서 공을 받다가 미끄러지면서 뎀바 바한테 공이 흘렀고, 뎀바 바는 이를 결승골로 연결시켰다. 리버풀 입장에서 이 경기만 잡았으면 자력우승이 가능했지만 끝내 뒤집지 못했고, 결국 제라드의 이 실수 한 번으로 24년만에 찾아온 절호의 우승기회를 날려버린다.
2014 브라질 월드컵 - 우루과이와 1대1로 비기던 상황, 공중볼 다툼하다 따냇지만 그게 하필 수아레스에게(...) 패스가 되어 결승골을 헌납했다.
14/15 시즌 맨유전 - 맨유와의 챔스 티켓을 경쟁하는 중요한 경기에 교체출전 하였으나, 그라운드에 들어온지 38초만에 퇴장당했다.[40] 경건하게 묵념하고 나니 제라드가 없어졌다!
8 제라드에 대한 말, 말, 말.
월드클래스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램파드, 파브레가스, 이니에스타다. 제라드는 이 범주에서도 원 오브 더 베스트에 들어간다. - 카를로 안첼로티[41]
영리한 선수는 그 역할에 잘 적응할 수 있는데 제라드는 그럴만한 능력이 있다. 그는 훌륭한 패서이고 영리한 축구 지능을 가지고 있다. 그에게는 위대한 비전이 있다. - 안드레아 피를로
AC밀란 시절 안첼로티는 내게 제라드와 함께 뛰는게 어떻냐고 물어봤고 나는 망설임없이 '그를 데려오자'고 답했다. 전성기의 그는 유럽에서 가장 완벽한 미드필더였고 당연히 나는 그와 함께 뛰고 싶었다. 몇주 뒤 안첼로티에게 영입이 어떻게 돼가고있냐고 물어보니 '제라드는 AC밀란의 제의를 단호하게 거절했고 리버풀과의 강한 유대감을 도저히 깰수가 없다'고 답했다. - 안드레아 피를로
(리피 감독이 데 로시에게 제라드와 비슷한 선수라고 하자) 로마와 이탈리아 대표팀에서 발전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리피 감독의 칭찬이 매우 기쁘다. 제라드와 같은 대단한 선수와 비교되는 것은 당연히 기쁜 일이다. - 다니엘레 데 로시[42]
델 피에로는 언제나 나의 우상이었다. 그는 전설이다. 그치만 나의 포지션에서는 제라드에 닮기를 열중했다. 그만큼 완벽한 미드필더를 본 적이 없다. 나는 유벤투스의 제라드가 되고싶다. - 클라우디오 마르키시오[43]
나는 제라드를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선수로 꼽을 것이다. 물론 잉글랜드가 아닌 전 세계에서 말이다. 어린 시절부터 제라드는 경기를 결정 짓는 선수였다. 더불어 그는 아직도 리버풀을 위해 헌신한다. 제라드에게 경의를 표한다. 그는 전설 그 자체이다. - 프란체스코 토티
제라드 같은 선수가 있었기 때문에 나도 오늘날 이런 감독이 될 수가 있었다.나는 내 선수들뿐만이 아니라 상대팀 선수 중 최고의 선수들을 통해서도 많은 걸 배운다. 그들은 항상 내게 풀어야 할 문제를 제시하기 때문이다. 제라드는 나를 생각하게 하고 철저히 분석하게 한 대표적인 선수이다. 내가 최고가 된 건 최고의 적인 제라드가 있었기 때문이다. - 조세 무리뉴[44]
제라드는 리버풀의 영혼이다. 제라드는 환상적인 선수다. 또 세계 최고 선수 중 하나다. 그는 너무나 많은 능력을 가지고 있고 어떻게 팀 동료들을 돕고 이끌지도 잘 알고 있다. 제라드가 곧 리버풀이다. - 라울 곤잘레스
2010 남아공 월드컵 기간에 토레스에게 들은 이야기가 있다. 토레스는 리버풀에서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고, 리버풀을 사랑한다. 리버풀에서 자신의 미래를 생각하고 있다. 토레스는 자신의 스트라이커 파트너로 제라드를 생각하고 있다. 그는 최고의 스트라이커 파트너는 제라드라고 나에게 말했다. 스페인 대표팀 다비드 비야보다도 훨씬 더 잘 맞는다고 했다. 토레스가 올시즌 리버풀이 더욱 강해질 것이라 기대하는 것 역시 제라드가 있기 때문이다. 리버풀의 감독이 공격수 조합에 토레스와 제라드를 다시 생각하기를 바란다. 만약 실제로 그 조합이 이뤄진다면 성공적인 시즌이 될 것이다. - 안드레스 이니에스타
제라드는 내가 너무 사랑하는 선수야. 스티븐 제라드! 그에 대해 한 가지 문제가 있어. 나는 그의 이름에 r이 한 개 들어가는지 2개 들어가는지 모르겠거든. 그래도, 그의 모든 것들과 그의 플레이를 나는 사랑해. 그는 생기를 불어넣어주는 리더야. 골을 넣고, 좋은 패스를 보내며, 파워풀하게 뛰어다니지. 그의 태클까지...모든게 훌륭해. 실로 완벽한 선수지. - 다비드 비야
제라드는 메시나 호날두 만큼의 주목을 받진 못하지만 그가 세계 최고라고 생각한다. 팀의 엔진과 같은 존재인 제라드는 팀 전체에 영향력을 행사한다. 레알은 클로드 마켈렐레의 도움이 없이는 성공을 거둘 수 없었다. 제라드도 마켈렐레와 마찬가지로 팀에 중요한 선수다. 그는 패스, 득점, 태클 모두에 능하며 무엇보다도 자신감을 갖고 주위 선수들을 이끄는 리더십을 갖췄다. 이러한 재능은 배울 수도 없이 그저 타고나야 하는 것. - 지네딘 지단
(퍼거슨 감독이 자서전에서 제라드가 톱 플레이어가 아니라고 하자) 2 ~ 3년간 제라드는 세계 최고의 미드필더였다. 지금까지도 제라드는 리버풀과 잉글랜드에서 최고 레벨의 플레이를 선보이고 있다. 제라드는 리버풀맨으로서 충성스러운 경력을 이어왔다. 그러나 만약 그가 4 ~ 5년 전에 이적을 원했다면 유럽의 모든 톱 클럽들이 영입전쟁에 나섰을 것이다. 그리고 그를 영입하기 위해서는 이적 최고액 기록을 깼어야만 했을지도 모른다. 퍼거슨 감독이 가장 성공한 감독중 하나인 것은 분명하지만 스티븐 제라드에 대한 그의 코멘트는 매우 이상하다고 생각한다. 제라드가 톱 플레이어가 아니라는 말은 옳지 않다. - 지네딘 지단
제라드는 나의 롤 모델이다. 그는 수년간 리버풀의 심장 역할을 해왔다. 또한 잉글랜드 대표팀에서도 그는 매우 모범적인 선수다. 나 역시 그처럼 되길 원한다. 제라드는 위대한 선수다. 물론 나와는 조금 다른 스타일이다. 그의 롱패스가 나보다 더 정확하다. 제라드가 리버풀에서 그랬듯이 나도 아스날의 승리를 이끌고 싶다. - 잭 윌셔
제라드는 환상적인 선수다. 제라드는 충성심이 강하며 리버풀을 이끌고 수많은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렸다. 제라드는 부상이 없을 때 항상 좋은 경기력을 보여주며 함께 뛰고 싶은 선수다. 또한 제라드는 기술이 뛰어나고, 경기에서 정교한 볼 터치를 보여준다. 난 그런 제라드를 존경한다. -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
나는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의 스티븐 제라드가 되고싶다. - 코케
내가 함께 뛰어본 선수 중 최고는 제라드이다. - 페르난도 토레스
나는 항상 제라드에게 존경심을 품어왔다. 그는 다른 선수들을 돋보이게 한다. - 프랭크 램파드
세계 최고선수 3명을 꼽자면 메시,호날두 그리고 제라드이다. 메시와 호날두는 빠른 스피드와 기술,재능 등을 가졌지만 현대축구의 관점에서 제라드는 완벽한 선수이다. 나는 스티븐 제라드의 엄청난 팬이다. 그는 사자의 심장을 가지고 있으며 공수에 능한 현대 축구 선수의 아이콘이다. - 카카
8.1 헌정사
제라드의 안필드 마지막 고별경기가 있던 날 전, 수많은 현직 유럽축구 슈퍼스타들과 감독들, 유명인사들이 SNS를 통해서 제라드에게 헌정사를 남겼다.
위 헌정사를 올렸던 선수들의 면면이 그야말로 지구방위대급이다. 현재 리버풀 소속인 선수들을 제외하면 아래와 같다.
<전 리버풀 소속 선수>
루이스 수아레스, 닐 멜러, 디트마르 하만, 루이스 가르시아, 디르크 카윗, 다니엘 아게르, 페르난도 토레스, 에밀 헤스키, 피터 크라우치, 필 톰슨, 알베르트 리에라, 앤디 캐롤, 막시 로드리게스, 요시 베나윤, 라이언 바벨, 이안 러시, 로이 에반스, 베가드 헤겜, 라울 메이렐레스, 욘 아르네 리세, 티티 카마라, 알바로 아르벨로아
<리버풀 소속이 아니었던 축구선수 또는 감독(대표 소속팀)'>
알레산드로 델 피에로(유벤투스 FC), 티에리 앙리(아스날 FC), 조이 바튼(퀸즈 파크 레인저스 FC), 아르다 투란(아틀레티코 마드리드),에스테반 그라네로(레알 소시에다드), 주니뉴 페르남부카누(올림피크 리옹), 알레산드로 네스타(AC 밀란), 안드레아 피를로(AC 밀란, 유벤투스 FC), 카카(AC 밀란), 아데바요르(아스날 FC), 안드리 셰브첸코(AC 밀란), 세스크 파브레가스(아스날 FC, FC 바르셀로나, 첼시 FC), 아스미르 베고비치(스토크 시티 FC), 앨런 시어러(뉴캐슬 유나이티드 FC), 팀 케이힐(에버턴 FC), 데이비드 베컴(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레알 마드리드 CF), 파올로 말디니(AC 밀란), 프란체스코 토티(AS 로마), 루디 가르시아(AS 로마 감독), 게리 리네커(FC 바르셀로나, 토트넘 핫스퍼)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는 동영상으로 헌사를 하였다. 밑으로 내리면 유튜브 동영상이 있다.
제라드 열혈팬인지네딘 지단도 역시나 당연하게도제라드 마지막 홈경기 끝난뒤 헌사를 하였다.
<축구선수가 아닌 유명인사>
캐롤린 워즈니아키(2015년 5월 시점 여자 세계랭킹 1위인 덴마크의 테니스선수)
이쯤되면 스티븐 제라드가 동시대를 뛰었던 선수들에게 어떤 존재였는지 충분히 설명이 되리라 본다.
8.2 여담
- 몬톨리보도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선수는 제라드라 하였고 브라질 월드컵 이탈리아 vs 잉글랜드 전에서 라치오의 미드필더 파롤로까지 제라드가 아이돌이라 밝혔다. 경기 후 제라드에게 유니폼을 요구했었는데 이미 다른 선수와 선약때문에 유니폼 교환을 못했다고...
- 피오렌티나의 마누엘 파스쿠알이 제라드의 광팬이다. 아퀼라니를 통해 제라드의 주장완장을 선물로 받았는데 그후 주장으로 출전하는 경기에는 반드시 그 암밴드를 차고 나온다고. 교체되어 들어갈 때에는 그후 주장을 맡을 선수에게 제라드의 암밴드를 넘겨주는 건 물론 아니고 교체 선수가 다른 주장완장을 배달해준다(…). 누가봐도 EPL 주장 완장이다.
- 지네딘 지단은 제라드가 리버풀 나가길 결심하고 또다른 도전을 한다고 하자, 덕담을 하면서 선수시절 레알 회장에게 제라드와 같이 뛰고 싶다고제라드 영입을 요구했다고 한다.
- 그외 제라드에 대한 지단 발언들.
지단 "제라드의 대표팀 은퇴, 리버풀엔 호재"
'레전드' 지단이 꼽은 최고 MF
9 풋볼(리버풀) 드립(13년 9월~ 기준)
해당항목 참조
10 그 외
아디다스 CF에선 출연하지도 않았는데 데이비드 베컴을 관광보냈다.
'"좋아하는 축구 선수가 누구니?"'
'"제라드요."'
소년의 무심한듯 시크한 대답은 양자택일의 기로에 서 있을 때 대충 고자되기와 비슷한 의미로 쓰인다. 아니, 애초에 리버풀 팬에게 물어 본다는 것 자체가...
리버풀이 한창 굴곡진 팀생을 보냈던 시기와 제라드가 선수로서 늙어가는 시기가 겹쳤던지라 제라드가 꼬꼬마 시절일 때부터 봐온 올드팬들은 내가 악동이 성자가 되는 과정을 지켜보고 있다며 감격인지 한탄인지 모를 하소연을 한다 카더라. 현재는 수아레스마저 팀을 떠나고 싶어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지라 팀의 순위와 더불어 고통의 아이콘이 되었다(...) 수아레스마저 떠날까 봐 밤에 잠을 설쳤다고 한다. 아아...
결국엔 수아레스가 남아서 리버풀에서 골 잘넣고 잘살고 있다..가 14/15시즌전 나갔다.어째 애지중지 했던 사람만 떠나는거 같다
[2]
수아레스를 붙잡기 위해 자신도 작년에 챔스나가는 팀에게 제의가 들어왔지만 거절했다고 밝혔는데, 많은 언론들이 이 클럽을 뮌헨으로 추측했다.
사실 경기 도중 최민수에게 살해당했다고 한다1분 54초부터
여기에 호날두를 생각했다면 축구좀 많이본거다
대한민국 고등학교 교과서에 등장한 바 있다. 2008-09 시즌 챔피언스리그 조별예선 마르세유 원정 때 페널티킥을 넣는 장면으로, 지학사의 수학 적분과 통계 익힘책에서 등장했다. 정확히는 빨간 유니폼의 선수들과 하늘색 유니폼의 골키퍼가 나오는데 스폰서 칼스버그 마크가 없어도 그 경기와 이 교과서를 모두 본 리버풀 팬들은 기억이 떠오르며 감동의 눈물을...[45] 페널티 킥이 삽화로 나온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등장한 위치는 확률 쪽 단원.
최근 자서전에 충격적인 이야기를 담았는데, 선수로서의일 외에 선수 영입 관련 업무(...)도 수행했다고 한다. 지금은 첼시의 선수인 윌리안에게 문자 메세지를 보내 의중을 묻기도 했다고. 물론 리버풀의 성적이 하향세를 그리며, 그리고 리버풀이라는 몰락 탄광 도시를 홈으로 삼고 있는 것 때문에 거절도 많이 당했지만 그에 대해서 이해한다는 이야기를 했다.[46]
가장 충격적인 건 2014년 브라질 월드컵 이후 브렌던 로저스 리버풀 감독의 요청을 따라 토니 크로스에게 리버풀 행을 권유한 것. (...) 제라드는 로저스와 달리 현실적인 감각을 지니고 있었기에 '2014년 월드컵 우승팀의 주축을 챔피언스 리그 우승팀인 레알 마드리드가 노리고 있는데 이건 미친 짓이다' 라며 만류했지만 로저스는 그냥 미소만 지어댔다고 한다. (...) 당연히 크로스는 레알 마드리드로 가버렸고, 그나마 다행히 크로스는 제라드를 바보 취급 안 하고 최대한 정중하게 거절한 모양. 제라드는 자서전에서 '크로스는 내가 바보같이 느껴지지 않도록 나를 배려해 주었다.' 며 그가 훌륭한 인격자라고 감사를 표했다.
11 경력
11.1 우승 기록
- 리버풀 FC (1998/99 - 2014/15)
- FA컵 : 2000/01, 2005/06
- 풋볼 리그 컵 : 2000/01, 2002/03, 2011/12
- FA 커뮤니티 실드 : 2001, 2006
- UEFA 챔피언스 리그 : 2004/05
- UEFA컵 : 2000/01
- UEFA 슈퍼컵 : 2001, 2005
11.2 출전 기록
시즌 | 클럽 | 소속리그 | 리그 | FA컵 | 리그컵 | 대륙대회 | ||||
경기 | 득점 | 경기 | 득점 | 경기 | 득점 | 경기 | 득점 | |||
1998/99 | 리버풀 FC | 잉글리시 프리미어 리그 | 12 | 0 | 0 | 0 | 0 | 0 | 1 | 0 |
1999/00 | 리버풀 FC | 잉글리시 프리미어 리그 | 29 | 1 | 2 | 0 | 0 | 0 | - | - |
2000/01 | 리버풀 FC | 잉글리시 프리미어 리그 | 33 | 7 | 4 | 1 | 4 | 0 | 9 | 2 |
2001/02 | 리버풀 FC | 잉글리시 프리미어 리그 | 28 | 3 | 2 | 0 | 0 | 0 | 15 | 1 |
2002/03 | 리버풀 FC | 잉글리시 프리미어 리그 | 34 | 5 | 2 | 0 | 6 | 0 | 11 | 2 |
2003/04 | 리버풀 FC | 잉글리시 프리미어 리그 | 34 | 4 | 3 | 0 | 2 | 0 | 8 | 2 |
2004/05 | 리버풀 FC | 잉글리시 프리미어 리그 | 30 | 7 | 0 | 0 | 3 | 2 | 10 | 4 |
2005/06 | 리버풀 FC | 잉글리시 프리미어 리그 | 32 | 10 | 6 | 4 | 1 | 1 | 12 | 7 |
2006/07 | 리버풀 FC | 잉글리시 프리미어 리그 | 36 | 7 | 1 | 0 | 1 | 1 | 12 | 3 |
2007/08 | 리버풀 FC | 잉글리시 프리미어 리그 | 34 | 11 | 3 | 3 | 2 | 1 | 13 | 6 |
2008/09 | 리버풀 FC | 잉글리시 프리미어 리그 | 31 | 16 | 3 | 1 | 0 | 0 | 10 | 7 |
2009/10 | 리버풀 FC | 잉글리시 프리미어 리그 | 33 | 10 | 2 | 1 | 1 | 0 | 13 | 2 |
2010/11 | 리버풀 FC | 잉글리시 프리미어 리그 | 21 | 4 | 1 | 0 | 0 | 0 | 2 | 4 |
2011/12 | 리버풀 FC | 잉글리시 프리미어 리그 | 18 | 5 | 6 | 2 | 4 | 2 | - | - |
2012/13 | 리버풀 FC | 잉글리시 프리미어 리그 | 36 | 9 | 1 | 0 | 1 | 0 | 8 | 1 |
2013/14 | 리버풀 FC | 잉글리시 프리미어 리그 | 34 | 13 | 3 | 1 | 2 | 0 | - | - |
2014/15 | 리버풀 FC | 잉글리시 프리미어 리그 | 29 | 9 | 3 | 2 | 3 | 0 | 6 | 2 |
2015 | LA 갤럭시 | 메이저리그 사커 | 1 | 1 | 1 | 0 | - | - | 0 | 0 |
11.3 개인 수상
- PFA 올해의 신인 선수상 : 2001
- PFA 올해의 선수상 : 2006
- PFA 팬들이 선정한 올해의 선수상 : 2001, 2009
- PFA 연간 베스트 일레븐 : 2001, 2004, 2005, 2006, 2007, 2008, 2009, 2014
- FWA 올해의 선수상 : 2009
- FWA 공로상 : 2013
- 프리미어 리그 이달의 선수상 : 2001년 3월, 2003년 3월, 2004년 12월, 2006년 4월, 2009년 3월, 2014년 5월
- 리버풀 탑 골을 넣는 선수(Goalscorer) : 2004/05, 2005/06, 2008/09
- 스탠다드 차터드 이달의 선수상 : 2012년 3월
- 시즌 최우수 골 : 2006
- 잉글랜드 올해의 선수상 : 2007, 2012
- ESM 올해의 팀 : 2008-09
- BBC 올해의 스포츠인상 : 3위 (2005)
- UEFA 챔피언스 리그 MVP : 2004/05
- FIFA 클럽 월드컵 : 실버볼 (2005)
- UEFA 올해의 클럽 축구 선수 : 2004/05
- FIFA/FIFPro 월드 XI : 2007, 2008, 2009
- UEFA 올해의 팀 : 2005, 2006, 2007
- 발롱도르 : 3위 (2005)
- 유로 2012 올스타팀
- 유로 2012 맨 오브 더 매치 : vs. 우크라이나 (조별리그)
- ↑ 이름 뒤의 'MBE'는 2007년 받은 대영제국 훈장 5등급(MBE; Member of Order of the British Empire)을 나타낸다.
- ↑ 이게 기사작위로 굉장히 폭넓게 잘못 알려져 있기 때문에, 설명을 더 붙인다. 대영제국 훈장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MBE와 기사작위는... 많이 차이난다. 대중음악계의 예를 들자면 기사작위까지 받은 뮤지션으로는 폴 매카트니(1997년 Knight Bachelor 서임)가 있으며, MBE만을 받은 뮤지션으로는 아델(2013년 MBE 수훈)이 있다.
- ↑ 중미, 공미, 수미 모두 소화한다. 전성기 시절에는 페르난도 토레스와 제토라인을 이루며 공격형 미드필더로 주로 출전하였으나, 수아레즈가 뛴 13-14시즌에는 필리페 쿠티뉴 조던 헨더슨에게 공격형 미드필더 자리를 내주고 중앙 미드필더로 주로 출전하였다.
- ↑ 호날두, 베일, 포그바, 현 유벤투스선수들과 더불어 몇안되는 맨발키가 프로필인선수다. 참고로 10여 년 전 제라드의 젊은 시절엔 프로필 상 188cm로 기재되었던 적도 있었다.
- ↑ 프로 계약은 97년부터 했다.
- ↑ 동서양을 불문하고 제라드하면 가장 생각나는 단어.
- ↑ 팀메이트들과 해설자 등, 현지에서 그를 지칭할때 많이 쓰는 말이다. [3]
- ↑ 리버풀 팬투표에서 케니 달글리시와 제이미 캐러거 등을 제치고 구단 역대 최고의 선수로 선정되었다.
- ↑ 이스탄불의 기적이 일어났던 04/05 시즌에 레알 마드리드로부터 이적 제의가 왔고, 제라드도 그 제안에 심히 고심한 적이 있었다. 그리그 그의 전성기 내내 숱하게 이적설이 쏟아지며 빅클럽들이 관심을 가졌지만 리버풀을 떠나지 않았다. 특히 무리뉴의 사랑이 대단했는데 첼시시절과 레알 마드리드,인테르시절 모두 영입하려 했었다.
- ↑ 이스탄불의 기적으로 불리는 04-05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이었던 대 AC 밀란전에서 0:3으로 뒤지던 후반에 추격골을 터뜨려 대 역전의 서막을 알렸다.
- ↑ 이런 말이 나올 수 밖에 없는 것이...첼시가 맨유에게 승점 1점차로 우승경쟁에서 앞서 있는 상황이어서 만약 리버풀이 첼시에게 이기거나 비긴다면 맨유의 우승가능성이 압도적으로 높아지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맨유가 09-10시즌에서 우승을 한다면 영국 리그 최초로 4연속 우승+총 우승수에서 리버풀을 넘어서는 기록을 세우게 되는 상황인지라 경기 전부터도 리버풀이 맨유 우승하는 꼴 못봐주니 첼시에게 일부러 져 줄 수도 있다라는 농담까지 나오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 ↑ 자서전에서 밝히길 살해협박 같은 건 없었다고 한다. 모두 언론의 개소리였다고.
- ↑ 이 실수로 악의적인 타팀팬들이 뎀바 바의 개라는 별명을 미는 중이다.
- ↑ 실제로 첼시 감독인 무리뉴는 제라드가 이적하면서 남긴 말인 "리버풀을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를 14-15 캐피털 원 컵 경기 전 인터뷰에 언급하면서 램파드를 깠다.
- ↑ 사실 잉글랜드의 무전술이 이 두 선수를 활용 못하기도 했었다. 수비진에서 공격진으로 롱볼로 넘기거나 베컴한테 몰아주거나 아니면 조콜 혼자서 미친 짓을 했으니...
- ↑ 팀의 미드필더진이 베컴이랑 조 콜 빼고는 매크로니까. 분배만 좀 틀리다 뿐이지 적당히 수비하고, 태클하고, 슛하고, 패스하고, 드리블하고, 막 뛰어다니는 놈들...전문적인 수미 하나 없다. 누가 중원에 서든 결국 활로는 베컴의 택배 크로스.
- ↑ 이 당시 잉글랜드 대표 멤버가 ㅎㄷㄷ했다. 누구나 월클이라 인정하는 베컴과 제라드, 램파드가 중원을 구성했고, 조 콜이 전성기를 구가했으며 오웬도 아직 건재하던 시기였고 루니가 신성으로 떠올랐다. 수비진은 퍼디난드와 존 테리가 중심으로 자리잡았다. 하지만 잉글랜드는 큰 대회에서의 활약이 떨어지는 전통을 넘어서지 못 했고, 중원을 씹어먹을 줄 알았던 제라드-램파드 조합의 부조화와 뻥축으로 대표되는 무전술로 유로대회나 월드컵에서 무기력한 모습만 보여줬다.
- ↑ 이 기록은 잉글랜드 국가대표 선수 중 3번째로 많은 기록이다. 1위는 125경기 출장기록을 가진 골키퍼 피터 쉴턴, 2위는 제라드보다 1경기 많은 115경기의 데이비드 베컴.
- ↑ 이 때의 인상적 세리머니 때문인지 축구팬들은 흔히 우승 세리머니가 잘 어울리는 주장으로 제라드를 많이 꼽는다. 상남자 스타일이고
어쩔땐 귀염상기럭지도 길쭉하고 머리가 작다. 비율적으로보나 외모로 보나 뛰어나서 멋있게 보이는 것도 있다.카메라맨의 각도 조절의 공도 크다 - ↑ 에릭손, 호지슨, 케니의 낮은 성적과 함께 해도 불화 한번 없었다는 것은(케니는 또다른 리버풀 레전드라 그렇다 치더라도) 잘하든 못하든 감독의 위치를 존중하는 듯하다. 심지어 브렌던 로저스가 토니 크로스 등의 영입을 위해 제라드에게 영업을 해 달라고(....) 요구하자, 그게 바보 같은 짓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군말없이 문자 보내고 전화하고 그랬단다.
- ↑ 마이클 오언 또한 리버풀이 챔피언스 리그 진출을 하지 못한 시즌에 이적했지만, 그래도 다른 리그인 레알 마드리드로 가서 그 당시에는 어느 정도 동정을 샀다.
나중에 불구대천의 숙적으로 가서 문제였지. - ↑ 당시 리버풀은 매각이 진행중이었고, 토레스의 존재는 팀의 브랜드 가치 상승에 중요했다. 그렇기에 토레스는 여름 이적 시장에 이적하지 않았고 결국 리버풀은 FSG에 매각될 수 있었다.
- ↑ 제라드의 두 번째 자서전에서 이 대목을 읽은 리버풀 팬들은 화가 날 대로 나서 그때까지도 조금이나마 갖고 있던 토레스의 리버풀 리턴 가능성을 스스로 접어버렸다.
그리고 한국 한정으로 토레기라는 별명을 쓰기 시작한 리버풀 팬들도 늘어났다. - ↑ 레알하고 아스날 이적설이 끊임없이 돌았다. 거기다 이적하고 싶어서 본인이 직접 기자불러서 인터뷰까지하고, 팬들이 수아레스 유니폼도 불태우고 말도 아니었다.
- ↑ 이적 후에 리버풀로 다시 왔는데도 쭉 제라드가 주장
- ↑ 남미선수들끼리 특히 친하긴 한데 이들은 남미가 아닌 다른 선수들하고도 친하게 지낸다. 단지 지들끼리 더 친하다는 그런 개념이다.
- ↑ 세레머니때도 알수 있는데 특히 플라나간의 첫골을 넣었을때 미뇰렛(골키퍼)을 제외한 모두가 우르르 몰려와서 지네들이 넣은양 아예 인간 햄버거를 만들었다.
누가 보면 리그 우승한듯. - ↑ 감독부터가 위트나 조크를 잘하며 선수들을 친자식처럼 대한다고 한다.(제라드가 인터뷰 中)
- ↑ 페예그리니의 행동도 화제거리다. 맨시티 선수들은 끝나고 라커룸으로 들어갔지만, 페예그리니는 리버풀 선수들의 세레머니가 끝날 때까지 라커룸 입구에서 기다리며 한 명씩 승리를 축하해주었다고 한다.
- ↑ 마침 또 힐스브로 참사 25주년이다.
- ↑ 함께했던 A~S급의 선수들이 이적 하는것을 지켜보고, 리버풀 암흑기인 중위권으로 시즌을 마치는 기간을 몸소 체험한 산증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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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장이 힘이 없어지면 리버풀 분위기를 잡을 구심점이 약해지기 때문에 주장에 힘을 실어줌으로써 확실히 질서를 지키려고 하는 마음이 엿보인다.
- ↑ 리버풀 법원에서 무죄판결을 해서 시끌시끌 했었다. 처음에 폭행한 적이 없다고 주장했던것이 CCTV 증거물에 찍힌 동영상으로 자기의 주장이 완전 거짓으로 밝혀진것. 하지만 배심원제로 무죄의 판결을 받았다.
- ↑ 사실 포츠머스전에서의 사건은 잉글랜드 축협으로서는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축협 규정에는, 심판이 직접 보고 나서 문제가 없다고 판단한 상황에 대해서는 축협이 어떤 조치도 취할 수 없다는 사항이 존재하기 때문. 당시, 주심은 그 사건을 눈앞에서 봤지만 구두경고로 끝났다. 그리고 그 직후, 라파 베니테즈 감독은 제라드를 교체했다(...).
- ↑ 베리는 그 뒤에 시티에서 자리를 잡지 못하고 또다시 이적했는데 하필 그 팀이 에버튼(...)
- ↑ 상대적으로 아스날 주장에 비해서 하는 행동과 제라드의 표정때문에 안좋게 보일수 있는건 맞지만 위에서 말한것과 같이 원래표정이 저렇다. 거기다 그냥 버리는게 아니라 저 던진걸 가지고 가는 사람한테 주는거다. 우리나라에선 던진다는 것 자체가 버릇이 안좋게 보일수도 있으나 서양에선 해당이 안된다. 거기다 다른 팀 주장들도 다 저렇게 한다고 한다.
- ↑ 37라운드까지 첼시와 리버풀의 승점은 동률이었고 첼시가 득실차로 4위를 차지하고 있었던 상황이다.
- ↑ 에레라의 다리를 밟았다.
- ↑ 희한하게 이탈리아 미드필더들이 제라드를 엄청 좋아한다. 선수 시절 수비형 미드필더였던 안첼로티 감독은 자신의 자서전에 세계 최고의 미드필더는 제라드라며 칭찬하였고, 실제로 밀란 시절에 영입하려 했다고 밝혔다. 여담으로, 안첼로티는 밀란 시절에 피를로가 같은 팀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미드필더의 정점을 제라드로 잡고 그 바로 밑이 피를로라고 평했다. 그 다음으론 데 로시.
- ↑ 또한 제라드가 자신의 우상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 ↑ 이탈리아와의 월드컵 경기에선 전반전이 끝나곤 마르키시오와, 후반전이 끝나곤 피를로와 유니폼을 교환하였다.
- ↑ 무리뉴도 제라드에 아주 목말라있는것도 유명하다. 예전 첼시 시절 2번, 레알 마드리드 시절 1번. 총 세 번이나 제라드를 영입하려 했다고 한다.
- ↑ 이 경기가 치뤄진 시기는 이 개정 교육과정의 첫 세대인 1993년생들이 중학교 3학년일 때였다. 또한 이 경기에서 제라드는 페널티 킥으로만 두 골을 넣었는데 해당 사진이 첫째인지 둘째인지는 확인 바람.
- ↑ 구단의 역사나 비전은 선수가 이적할 때 주로 고려되는 사항이지만, 클럽이 위치한 연고지의 치안이나 거주 문제도 중요시된다. 리버풀은 잉글랜드에서도 치안이 나쁘기로 소문이 나 있어서, 외국 선수가 쉽게 터를 잡기엔 리스크가 있는 것. 선수 본인은 물론 가족들의 안전도 중요한 문제니까...스티븐 제라드 본인도 이것을 알고, 런던을 연고지로 하는 첼시로의 이적에 대해 이해한다는 식의 글을 자서전에 수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