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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월 27일 (금) 13:46 기준 최신판

더글러스 맥아더
Douglas MacArthur
MacArthur_Manila.jpg
생애1880년 1월 26일 ~ 1964년 4월 5일
출생지미국 아칸소 주 리틀록
사망지미국 워싱턴D.C
종교장로교
부모아버지: 아서 맥아더 주니어(예비역 미국 육군 중장 출신)
어머니: 메리 핑크니 하디 맥아더
배우자진 마리 페어클로스 맥아더(재혼)
헨리에타 루이즈 크롬웰 브룩스 매카서 애트윌 하이버그(이혼)
자녀아서 더글러스 맥아더(1938년 2월 21일 ~ )
친척형 : 핀릴 맥아더(1876년 - 1924년)
형 : 맬컴 맥아더(1878년 - 1893년)
복무미국 육군
필리핀 육군
복무기간1903년 ~ 1937, 1941 ~ 1964년[1]
최종계급미국 육군 원수(General of the Army U.S. Army)
필리핀 육군 원수(Field Marshal Philippine Army)
근무UN군 사령부
지휘UN군 사령관
참전멕시코 혁명(1910~1920)
1차 세계대전(1914~1918)
2차 세계대전(1939~1945)
한국전쟁(1950~1953)
훈장내역명예훈장
수훈 십자 훈장
육군 수훈 복무 훈장
해군 수훈 복무 훈장
공군(전) 수훈 십자 훈장
은성 훈장
청동성장
공군 수훈장
퍼플 하트 훈장
더글러스 맥아더 훈장내역정리(영어)
Old soldiers never die. They just fade away

노병은 결코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

이 전투가 내 마지막 전투가 되질않는다.

-노병은 죽지 않는다. 그리고. 사라지지도 않아-[2]

1 개요

통칭 '맥아더 원수'. 미국장군.

Douglas MacArthur. 외래어 표기법 원칙을 엄격히 적용한다면 '매카서'가 되어야 한다[3]. 하지만 관용 존중 차원에서 통용되는 표기인 '맥아더'가 단독으로 인정되었다[4]. 한국에서는 그를 맥장군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미국 역사상 가장 많은 찬사와 비난을 함께 받는 군인. 국내에서는 인천 상륙작전의 주역으로 유명하며, 아래에서 곧 이야기하듯이 미군 역사에서 전설적인 군인 중 하나. 하지만 군인은 상명하복이 기본임에도 군 통수권자인 대통령의 명령도 무시하는 독선적인 면이 군사적 성공에도 불구하고 결국 자신이 가졌던 대통령에 대한 야망의 실패는 물론 역사적 평가조차 떨어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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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차림새도 특이해서 필리핀 육군 원수 정모에 짙은 선글라스, 수제 콘파이프(옥수수 자루로 만든 담배 파이프)가[5][6] 트레이드 마크. 탈모가 있어서 전쟁 중 사진에는 모자를 벗은 것이 없다.(...)

그리고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은데 1차 세계대전 때에도 현역으로 뜀은 물론이거니와, 당시에도 장군이였다. 1차대전-2차대전-한국전쟁까지 거의 40여년 이상을 장군을 한 사람이다.[7]

2 이력

2.1 1차 대전까지

그의 이름에서 알 수 있듯 맥아더는 스코틀랜드계 미국인이다. 저 맥(Mac.)이라는 호칭이 붙는 성씨는 스코틀랜드의 성씨이다.

할아버지는 위스콘신 주지사, 아버지[8]남북전쟁, 미국-스페인 전쟁, 미국-필리핀 전쟁에 참전한 소년 영웅이자 장군겸 3대 필리핀 총독이었고 어릴 때 같이 놀던 필리핀 꼬마는 후에 필리핀 2대 대통령이 된 마누엘 L. 케손(Manuel L. Quezon)…게다가 2차대전 중 미국 대통령이던 프랭클린 D. 루스벨트와 영국 총리 윈스턴 처칠과는 먼 친척 관계. 여러 의미에서 진정한 엄친아[9]. 어릴 때 어머니 때문에 여장했다는 소문이 한국에 퍼져있으나, 정확하게는 어머니가 더글러스가 여자아이처럼 머리를 기른 모습을 좋아했다고 한다. 한국에서 출판된 위인전 중 맥아더를 주제로 한 책에서 그의 가족 사진이 나온다. 그 사진에는 미소년에 가까운 그의 유년시절 모습이 있다.[10]

특히 어머니 핑키 맥아더는 중류층 이상의 아가씨가 맥아더의 아버지와 결혼하면서 인프라 따위는 없는 서부에서 십수년간 모진 고생을 한 바람에 억척스런 의지를 보이며 여러모로 치맛바람의 궁극이라 할 만한 인물인데, 웨스트포인트에 입학시키는 것도 연줄을 동원해서 밀어넣은 것은 연방 의원의 추천서가 있어야 입학이 가능하기 때문, 그 의원에게 신청자가 너무 많아서 시험으로 결정하려 하자 시험 대비를 위해 고등학교 교장을 고용해 개인교습을 시켰다.(…) 흠좀무.

하지만 이 정도는 기본인 것이 재학 내내 가까운 지역의 특급호텔에서 아예 살면서 모든 일거수일투족을 예의주시했다고 한다. 엄마가 너 잘 되라고 이러는 거야. 임관 이후에는 맥아더의 상관들에게 반복적으로 진급시켜 달라고 편지를 보내기도 하였으며, 이로 인해 아들을 미국 역사상 가장 빨리 별을 달게 해 주었다(심지어 준장을 소장으로 진급시켜 달라고 엄마가 편지를!). 첫 며느리감을 차고 남편을 떠받들어줄 며느리감을 직접 골라 붙여줄 정도로 철저했다. 맥아더는 첫 아내와 결혼하기 위해 난생 처음 어머니와 대판 싸우기까지 했다. 이때 핑키는 꾀병까지 부려가며 결혼을 반대했다. 결국 첫 아내와 뒤에 이혼했으니 핑키 의도대로 된 것.

그러나 이 부분은 약간의 부연 설명이 필요하다. 맥아더의 첫 아내는 '루이즈 크롬웰 브룩스'라는 엄청난 명문가 부잣집 출신의 사회운동가인 여자였다. 지금도 사회운동 하는 여자들에 대해서 좋은 일 하는 사람들이지만 자기 주장이 강할 거라는 편견이 있는 상황인데 맥아더가 결혼한 1920년대에야...게다가 더 큰 문제는 이 여자에게 맥아더가 두 번째 남편이었단 것이다. 아들에 대한 자부심이 넘치는 핑키의 입장에선 이건 말도 안되는 결혼이었다는것이 전혀 이해 안가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정작 크롬웰 집안에서도 반대했다. 사유는 맥아더 집안의 레벨이 자신의 집안에 비해 부족하다는 이유였다. 그리고 이 여자는 맥아더와 7년뒤(1929년)에 이혼하고 1930년에 배우인 라이어널 앳윌과 결혼, 13년 뒤(1943년)에 이혼한다. 그리고 또 1년 뒤(1944년) 알프 하인버그와 결혼, 그러나 이 남자와도 결국 이혼한다. 재미있는 얘기는 밑에 나오는 맥아더의 상관인 퍼싱이 이 여자에게 관심이 많아서 맥아더를 필리핀으로 보내버렸다는 설이 있다.(남편인 맥아더를 루이즈로부터 떨어트리고 자신이 접근하려고) 이는 맥아더 전기의 작가 윌리엄 맨체스터가 맥아더 전기 '미국의 카이사르: 더글러스 맥아더(American Caesar: Douglas MacArthur)에서 언급한 내용이고, 루이즈 본인 스스로도 4성장군인 퍼싱이 만약 루이즈가 맥아더와 결혼한다면 별하나 짜리였던 그를 필리핀으로 보내버리겠다고 위협했다고 발언했고, 실제로 이를 실천했다(…). 두 번째 부인인 진 맥아더는 핑키가 데리고 온 여자(이 부분은 출처가 필요하다.). 맥아더보다 18살 연하였는데 맥아더가 죽을 때까지 해로했다.

물론 이런 것들도 한국에서 출판된 맥아더 위인전에선 전부 위대한 어머니로 포장되었다…심지어 학생들이 선배에게 복싱의 형태로 구타를 당하던 이른바 '전통'을 고발한 사태에 대해서 미군의 명예를 위해 아무것도 모른다[11]고 말하라고 시킨 것이 당당하게 위인전에 실렸다. 대체 뭘 잘한걸까? 아들아 출세를 위해 입을 다물어라?

하지만 육군사관학교를 연줄로 밀어넣었다고 해도, 입학 이후 맥아더의 성적은 연줄 따위 언급도 못할 정도로 넘사벽이긴 했다. 미 육군사관학교를 거의 언제나 줄수석을 차지하며 연대장 생도까지 겸한다. 연대장 생도 겸 졸업수석으로서 졸업, 한동안 그의 졸업성적 기록을 깬 생도가 없었다고 한다. 당장 웨스트포인트 역사상 맥아더 이상의 성적이 나온 사람이 두 명 뿐이다. 그 중 한 명이 남북전쟁 영웅이자 남군의 먼치킨중에 하나인 로버트 리 장군이다. 여기에 더해서 연대장 생도 겸 졸업 수석이 힘들다는 것은 사관학교 출신만 알 수 있는 공공연한 비밀인데, 연대장 생도같은 경우에는 다른 생도가 잘못을 저질러도 연대책임이 들어가는 확률이 매우 높기 때문이다. 이렇게 군 생활을 시작부터 압도적인 카리스마로 시작했고, 그 이후 진급 과정도 초절정이다.

제1차 세계대전시에는 30대 나이에 사단장을 맡아(42보병사단)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미군 사단장에서 가장 많은 15번의 훈장을 수여받을 정도로 출중한 능력을 보여 주었다. 하지만 의외로 당시 미국 유럽원정군의 사령관이였던 존 조지프 퍼싱에게 낮은 평가를 받았다고 한다. 이건 벨로 숲에서 퍼싱이 "군인은 모름지기 당당하게 서서 총을 쏴야 한다."며 미군 수천명을 순식간에 죽게 만든 거에 대해 맥아더가 미친짓거리 그만하라고 일갈했던 것의 영향이 크다. 이 일을 계기로 퍼싱은 맥아더와 사이가 매우 안 좋아졌는데, 문제는 퍼싱이 미군 내에 최대 파벌을 이끌고 있었던데다 1940년대까지 살아남아 사사건건 맥아더를 방해했다는 것이다. 참고로 2차 세계대전에서 육군참모총장을 지낸 조지 C. 마셜이 퍼싱 파벌에 속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웃긴 것은 자신의 가장 큰 정적이였던 퍼싱을 개인적으로는 존경했고, 훗날 해리 트루먼 대통령이 자신을 6성장군으로 봉하려고 하자 정중히 거절하면서 "미국 역사상 6성 장군은 조지 워싱턴 대통령과 그리고 존 조지프 퍼싱 원수님밖에는 없어야 할 것입니다."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본인 스스로가 퍼싱보단 모자랐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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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은 미약한 군인이노라
이 사진이 찍힌 건물을 복원하느라 부하들이 개고생을 했다고 한다.

2.2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전

1차 세계대전이 독일의 항복으로 끝나자 본국으로 귀환, 당시로서는 보기 드물게 계급강등을 당하지 않고 육군사관학교 교장에 임명되었다. 당시 미국의 군사교육은 19세기에 머물러 있어 군사학만을 다루고 있었는데, 여기서 손을 대서 군사학만이 아닌 다른 전공과 함께 군사학을 가르치는 오늘날 사관학교제도의 기틀을 잡았다.

이 시기 앞서 말한 첫 번째 아내와 결혼, 퍼싱은 위협했던 대로 그를 필리핀으로 보내버렸다(...). 망했어요 이렇게 필리핀에서 3년을 세월을 보낸뒤 미군 내 최연소 소장으로 승진, 본국으로 귀환해 3군단장을 맡게된다. 1928년에는 암스테르담 올림픽에 단장으로 참가하기도 했고, 1930년에는 나이 50에 소장에서 대장으로 승진하며 최연소 진급기록을 갈아치우며 육군참모총장(Chief of Staff)에 임명되었다.

솔직히 말해서 안정된 국가에서 평시에 군의 실력자의 눈밖에 나면서도 이런 폭풍 진급을 보여준 군인은 세계적으로 거의 없다. 당시 강대국중 그를 능가할 만한 폭풍 진급을 보여준 사람은 30대에 해군 장관이 된 니콜라이 쿠즈네초프 소련 해군 원수 정도다.

그가 육군참모총장이 되었을때는 대공황 시기라 그는 예산을 깎으려고만 하는 대통령과 의회와 대립했고, 32년에는 보너스 군대(Bonus Army) 사건에서 허버트 후버 대통령이 육군에 개입을 지시하자 참모총장인 본인이 직접 나섰다. [12]

후버는 육군성을 통해 일단 정부청사 구역을 점거한 시위자들을 캠프로 쫓아낼 것까지만 지시했으나 항명 전문맥아더는 이를 무시하고 보너스 군대가 머물던 캠프까지 병력을 진격시키고 시위자들을 체포하였다. 발포는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최루탄 등에 의한 사상자가 발생하였고 캠프는 불길에 휩싸였다. 참전군인들에 대한 강경진압으로 인해 맥아더는 여론의 비판을 받게 되었고, 이 부분은 후대에서도 평가가 좋지 않다. 맥아더는 진압 다음날 언론에 대통령의 빠른 결단으로 사태가 더 번지지 않고 수습되었다고 언플을 하였고, 명령 불복종은 후버도 문제삼지 않아 그냥 조용히 묻혔다. (...)

한편 이 시기에 맥아더는 병력의 감축. 그중에서도 특히 단시간에 양성이 불가능한 장교단의 감축을 줄이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했으며 기동전을 시험해 보기위해 소규모의 차량화 부대, 전차 부대를 창설, 알보병 일색이던 미군에게 기동전에 대한 이해를 깊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허버트 후버 대통령이 물러나고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이 취임하자 더더욱 강하게 쥐어오는 예산삭감 압력에 대통령 및 의회와도 대판 싸우는 바람에 결국에는 군 주류파에서 밀려버리는 결과를 만든다. 예산 삭감을 종용하는 루스벨트 앞에서 분노하며 대놓고 "다음 번 전쟁에서는 우리 병사들이 맥아더의 이름이 아니라 루스벨트의 이름을 저주하면서 죽어가게 될거요!"라고 외치고 사임하겠다고 외쳤다. 루스벨트는 "당신, 대통령에게 그런 방식으로 말해선 안돼!"라고 받아쳤지만, 사임을 받아들여주진 않았다. 맥아더는 발길 채이는 걸음으로 백악관을 나갔지만 1935년까지 임기를 연장받을 수 있었고, 자성훈장 두개를 받았다.

나중에 대통령이 되는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는 맥아더가 참모총장이던 시절, 부관을 맡고 있었고 당시에 너무나 데인 바람에 이후로도 맥아더를 경계했다고 한다. 사실 아이젠하워는 맥아더가 참모총장을 맡고 있던 시절 워싱턴에서 5년간 부관을 맡았고, 이후 참모총장에서 물러나고 필리핀에 군사고문으로 파견되자 그때도 맥아더가 끌고가(...) 필리핀에서 4년 모두 합쳐 총 9년(...)동안 부관으로 맥아더 옆에 있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소령 ~ 중령기간동안 다른거 못해보고 맥아더의 부관만 했다. 대대장 한번 못해보고 맥아더의 뒤치닥거리만 했다는 소리다.[13] 이 모든 걸 상징하는 맥아더의 말, "아이젠하워는 내가 지금까지 만나본 사람중 최고의 사무원(clerk)이다."

여러 사건 중에서도 아이젠하워가 가장 큰 학을 뗀 사건은 위에 적힌 보너스 군대 사건. 당시 수석부관이었던 아이젠하워는 맥아더가 이 시위진압에 직접 개입하는 것을 반대했지만 결국 그는 듣지 않고 직접 진압과정에 나가 강력하게 진압했다.

2.3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일단 현역에선 물러났다. 하지만 이미 이 시점에서 영웅이었던 아버지에 못지 않는 공적을 세웠기 때문에 이제 막 미국에서 독립한 신생 필리핀군 군사 고문이자 '최고사령관'에다가 당시 대통령 케손에 의해 필리핀 육군 원수 계급에 임명되었다. 흔히 맥아더라고 하면 생각하는 선글라스, 담배에 이어 그의 트레이드 마크인 모자는 사실 필리핀 육군의 원수 정모다. 미군 장군이 자기나라 군 피복을 안 입는다는 건 이것만 봐도 그의 독불장군 기질이 잘 드러난다. 군단장도 안 입는데 자기도 규정대로 입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을지도

필리핀군 원수 직함만 가지던 시절에는 필리핀의 방어를 위해 미국에 줄기차게 장비지원을 요청하였으나, 이미 앞서의 사건으로 인해 미운털이 박혀 있는데다가, 미국 자체도 본격적인 전쟁에 돌입하기 전 상황이라 주고 싶어도 줄 장비가 없었다. 그래서 미국은 필리핀에게 드럼 요새 같은 중장갑 요새시설을 이미 10여년 전에 구축하였으니 안심해도 좋다고 말로만 위로하였는데, 그 정도로는 방어에 불충분하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던 맥아더는 상당히 분노했다고 한다.

이러다가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현역에 복귀했으며, 이후 미군 극동 사령관, 남서태평양 사령관 등에 부임하며 제2차 세계대전말 태평양 전선의 절반을 총 지휘했고[14], 이후 일본점령군 총사령관을 맡게 된다.

일본군의 침공 초기에 필리핀 방면 사령관으로 있었는데, 초반 잘못된 대응과 함께 일단 일본군이 쳐들어오더라도 요격이 가능하다는 지나친 낙관론으로 개발살났다. 당시 필리핀 방어부대의 전력은 미군은 육군만 3만 1,095명이 있었는데 대다수가 해안방어와 항공, 근무지원 부대였다. 전투부대는 보병31연대 2,100명과 중국에서 막 도착한 해병 4연대 소속 7,50명 뿐이였다.

필리핀군은 10개 예비군 사단과 2개 정규사단(1개사단은 경찰로 구성)을 합쳐 12만명이 있었고, 그중에서 필리핀 스카우트 1만1,957명은 훈련과 군기면에서 뛰어난 전력이였다. 특히 미군과 필리핀 스카우트로 구성된 4개 포병대대와 2개 경전차대대로 이루어진 1개 전차단이 맥아더 휘하의 핵심 전력이였다. 즉 미군 3만, 필리핀 12만 합쳐 총 15만 병력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에 비해 일본군은 14군 사령관 혼마 마사하루 중장 지휘아래 총병력 4만 3,110명이며 이중 3만4,856명은 전투병이고 나머지는 수송부대와 항공부대에 속했다. 예하부대는 16사단과 48사단, 65여단, 4전차연대, 7전차연대로 구성되었다.

초전에는 일본군 16사단에게 박살나고, 이후에는 수만명의 미군-필리핀군 대군이 겨우 65여단 하나에게 몰려서 바탄반도 속까지 몰린 것이다. 일본의 2선급 부대이자 예비역으로 구성된 48사단은 할일이 없어 별다른 전투 없이 그냥 네덜란드령 동인도로 갔다. 필리핀의 10개 예비군 사단이 겨우 5개월반 군사 훈련을 받고 예비역이 되었다고 하지만, 일본의 65여단은 소집되어 4주 훈련 받고 필리핀으로 온 병력이다.

이럴 졸렬한 패배의 가장 큰 이유를 보자면, 일본의 공격의도와 시기에 대한 전략적 오판도 있지만, 전술적으로 보자면 지나치게 해안방어에만 집착한 맥아더의 잘못도 있다. 전쟁 전에도 부대 배치가 해안방어에 집중하여 사방 팔방에 흩어져 있어 일본군 16사단이 상륙후 일직선으로 필리핀을 종단하여 관통하고 주요 도시를 다 점령 시킬 때도 맥아더는 해안방어 부대의 전용을 거부하였다. 이때문에 일본군 16사단은 별다른 전투 없이 무인지경으로 내륙을 관통한 것이다. 필리핀의 해안선은 미국 전체의 해안선 보다 훨씬 긴데 이것을 15만명의 병력으로 둘러칠려고 했으니 처음부터 불가능이였다. 이때문에 해안방어 대신 내륙지방의 거점 방어를 하자는 의견도 있었지만 맥아더는 해안방어에만 집착하였다.

개전 첫날인 1941년 12월 8일 오후 35분, 일본 해군 항공대 195대에 의해 필리핀의 미군은 싹 털려 이후 일본군에게 일방적으로 밀린데 일조 하였다. 심지어 제2의 진주만 사태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로 심각한 피해였다. 미군의 B-17 전략폭격기 19대중 12대, P-40 전투기 91대중 34대, 기타 항공기 28~33대가 지상에서 파괴되었지만, 전투기/폭격기 보다 큰 손실은 필리핀내 유일한 레이더 시설이 파괴되어 이후 눈뜬 장님이 된 것이다. 일본 항공기의 손실은 겨우 7대였다.
이런 엄청난 피해의 원인은 방심이였다. 진주만은 방심한 가운데 기습 공격까지 당했으니 그렇다고 치고, 필리핀에서 맥아더는 이미 아침 3시 40분에 진주만 기습 소식을 통보 받았지만 어떠한 대비도 하지 않았고, 전투기/폭격기들은 분산되어 엄폐시키는 대신, 공격작전을 위해 한군데 모여 있었다. 이에 1953년에 작성된 미국 육군 공식 역사는"일본군은 단 한번의 타격으로 그들의 남방 진격에 가장 큰 걸림돌을 제거했다."라고 결론 내렸다.
다만 제2의 진주만이라고 하는 것은 너무 과한 감이 있었다. 진주만은 사상자가 2400명이 나왔지만, 필리핀의 항공폭격에서는 사망 87명에 부상 148명정도였다. 진주만 기지 사령관등 방어 책임자들은 일제히 문책당하여 다시는 전사에 나타나지 않았지만, 필리핀에서는 맥아더등 이와 관련하여 처벌 받은 사람은 없이 유야무야 넘어갔고, 한번도 대규모 조사가 없어 사건이 묻힌 감이 있다.

다음 문제로 바탄반도의 방어전이 보급이 부족하여 항복했다고 하는데, 그 근본적인 이유는 미군의 보급품이 주로 해안방어 지대에 집적해 놓았기 때문에 적시에 바탄반도로 같고 들어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처음부터 보급품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보급품의 위치 선정이 잘못 되어 있었고 너무 뒤늦게 해안방어를 포기하고 후퇴지시를 했기 때문이다. 즉 본국에서 보급품을 부족하게 준 것이 아니라 맥아더가 잘못된 위치 선정과 이동 명령을 했기 때문이였다.[15]

여기에 그치지 않고 바탄반도로 들어 갈때는 부족한 식량을 대신하기 위해 필리핀 민가에서 강제로 징발하자는 제안을 거부하였다. 심지어 피난가는 필리핀 민간인 7만명을 데리고 함께 바탄반도로 들어 간 것이다. 가뜩이나 부족한 보급품을 필리핀 민간인과 함께 나눠 먹으니 급속하게 소진 되었다. 이때쯤이면 일본군도 미군은 알로보기 시작하여 예비역 부대인 48사단은 동인도로 보내 버리고 65여단 단독으로 미군을 공격한다. 그것도 7천명 밖에 안되는 병력으로 바탄반도를 향해 삼면 공세를 취하는데 그걸 또 미군은 패하면서 전선이 축소된다. 이당시 양진영의 병력 비율을 1:10 정도. 물론 미군-필리핀군이 10에 해당되는 7만명이다. 그리고 아래 항목에도 다시 언급되지만 이당시 맥아더는 1차대전 당시처럼 최전방에서 돌격하며 사기를 이끌었던 것과 달리 한달 반동안 최후방의 참호속에 들어가 "참호속의 더그Dugout Doug"라는 수치스러운 별명을 얻으면서 까지 침묵하고 있었다. 이당시 그가 어떠한 지휘를 했다는 증거는 찾기 힘들다. 아무런 명령도 내리지 안고 사태를 방관했다던지 포기하고 있었다는 의혹까지 사고 있다.

변명을 해주자면 개전 초반 전수방어를 고집하고 항공기를 허무하게 잃은 실수를 제외하면 개발살이라고도 말하기가 힘들다고 볼 수 있다. 필리핀을 수비하던 병력중 미군 1개 사단과 필리핀 스카우트 사단 이외 수적주력의 상당수를 차지하는 필리핀 사단들은 사단내 포병대가 없는것은 물론이고 박격포, 기관총조차 없는 부대가 많았고, 이를 지휘하는 미군 장교는 영어를 하는데 필리핀 사병들은 따갈로그어를 해 의사소통조차 제대로 되지 않았다. 이런 전력을 가지고 잘 훈련된 정예 병력을 가지고 쳐들어온 홈마 중장의 일본군에게 나름데로 버텼다. 싱가포르의 영국군 보다 오래 버티기는 했지만, 항복한 날짜가 아니라 일본군이 실제로 작전한 날짜로 따지면 필리핀의 미군이 더 빨리 항복했다고 한다.

또한 진주만 공습으로 미국 태평양 함대가 한동안 반신불수가 되는 바람에 15만 군병력중 후퇴에 성공한 7만여 명의 미군과 필리핀군, 그리고 필리핀 민간인 피난민 7만명은 바탄 반도로 후퇴하였다.이때 공격해 온 일본군 65여단은 7천명이였다. 작전계획상 온다던 증원군은 올기미가 안보이고 해군마저 떠나버려 잠수함이 몇번 온 것을 빼고는 물자공급을 전혀 받을 수가 없었는데다가, 포위된 병력의 구출마저 포기했다. 결국 맥아더는 물자부족으로 인해 점점 궁지에 몰리게 된다.(다시 말하지만 대부분의 물자는 전수방어를 위해 해안가에 있었다.)

결국 바탄 반도로 후퇴한지 3개월 후 루즈벨트의 명령으로 그 유명한 '언젠간 다시 돌아오겠다'(I shall return)라는 말을 남기며 사실상 단신으로 오스트레일리아로 도망쳤다. 반면에 리처드 B. 프랭클린의 책에는 맥아더가 호주에 도착하여 기자회견을 할 때 기자들에게 "나는 다시 돌아가겠다."라고 했다는 것에서 기원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말이 언론에 의해 대서 특필되어서 유명해졌다고 한다.
앞의 이야기는 영어 위키백과에서 그 당시 상황 등 잘 드러나는 글이 있다. 영어 위키백과 글 당시 육군참모총장 조지 C. 마셜은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맥아더를 오스트레일리아로 보낼 수 있겠냐는 질문을 받고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그는 그곳에서 죽을 겁니다. 그를 바탄 반도에서 빼내려면 강경한 어조로 명령을 해야 합니다." 이때 연합국은 아시아 지역에서 연전연패에 순식간에 싱가포르까지 넘어간 상황이라 바탄에서 힘겹게 버티는 맥아더는 미국인의 영웅이었다. 때문에 정치적으로 맥아더의 전사가 부담스러운 루스벨트는 사이가 나빴던 맥아더에게 강경하게 오스트레일리아로 후퇴할 것을 명령하고 명예 훈장을 수여했다.

이렇게 초반에 필리핀에서 신나게 깨진 맥아더는 항공기의 중요성을 뼈저리게 느꼈다. 그리고 앞서 설명했듯이 미국 정부의 명령에 따랐지만 도망친 것은 사실이므로 자신의 위신을 회복하기 위해서라도 도망간 호주에서 동부해안을 방어선으로 삼자는 대다수의 의견을 묵살, 오히려 뉴기니 제도를 방어선으로 삼아 북아프리카에서 롬멜에게 붙잡혀 있는 호주 정규군 사단 대신 호주 민병대를 주축으로(…) 공세에 나섰다. 결과부터 말하면 뉴기니 전역에서 동원된 일본군 20만 명 중 18만 5천여 명이 살아돌아오지 못했고, 미군과 호주군 연합군의 피해 정도는 자료마다 차이가 있으나 고작 1만~2만여 명 수준에 불과했다. 문제는 이게 맥아더의 전술 능력 덕분이라기보단 일본군이 제대로 전투 지역에 도착하기도 전에 뉴기니의 험준한 대자연에게 패배(...)해버린 게 큰 몫을 했다. 정작 맥아더는 코코다 트랙 전투에서 보면 알 수 있겠지만 이래저래 전황과 지형 파악에서 미스를 많이 보여줬다. 보급 차단은 애시당초 산맥과 정글의 존재를 몰랐던―이후 알게 된 다음에도 무시했던 일본군이 자초한 일이며, 게릴라전 위주로 일본군을 혼란시킨 것이나 압도적인 교환비를 올린 것은 야전 부대들이 병력도 거점도 무기도 없다시피한 상황에서 살아남기 위해 한 일들이지 맥아더의 명령은 아니었다. 오히려 적군 규모와 아군 규모를 오판하고 지형을 잘못 읽어 부대 배치부터 불리하게 하질 않나, 도저히 진격은 커녕 진지를 만들고 사수할 수도 없어 게릴라전이 불가피한 상황인데도 무작정 공세 작전을 지시하질 않나, 호주 민병대가 작전 지시를 이행하지 못하자 호주 병사들은 투지가 없다고 워싱턴에 대고 까는 등 지휘관이 일선 부대에게 해줄 수 있는 트롤링은 다 했다! (...) 이것은 필리핀에서의 분전이나 이후의 전공이 없었더라면 이것만으로도 큰 비판을 받을 만한 실수였으며, 그나마 대자연의 도움으로 일본군이 대패했기에 망정이지 맥아더의 주장대로 연합군이 먼저 진격해 들어갔다면 연합군이 그 꼴 났을 거다. 누군진 몰라도 일선 지휘관의 판단이 수많은 민병대원의 목숨을 구하고 전투를 승리로 이끈 케이스. 애초에 현장에선 그 외의 선택지는 없는 거나 다름 없었지만 말이다. 맥아더만 몰랐다

하여튼 이런 사정으로 뉴기니에 주둔했던 일본군은 궤멸을 넘어 소멸 수준의 피해를 입었고, 덕분에 일본군 쪽에서는 이런 이야기도 있었다고 한다. "자와낙원, 버마지옥, 죽어서도 돌아올 수 없는 뉴기니."

전쟁 후반 자신의 정치적 입장 때문에 대만에 비해 상대적으로 군사, 지리적 가치가 떨어지는 필리핀에 해군의 반대[16]를 무릅쓰고 상륙 계획을 감행하였다. 그냥 뉴기니-과다카날-오키나와-큐슈 루트로 일본을 바로 치면 안되는거야? 맥아더가 이렇게 한 이유는 자신의 개인적 야심인 필리핀 탈환이 상당한 부분을 차지하는데, 맥아더의 아버지가 필리핀 총독이었고 본인도 필리핀에서 성장해 많은 연줄이 있으며, 필리핀인에게 다시 돌아온다고 멋지게 선언하고 혼자 보트타고 도망나왔다는 사실을 상기해보자. 맥아더 입장에선 명예회복을 위한 필리핀 탈환이 필수적이었다. 이때문에 전략상 필리핀은 아무 의미가 없는 2선급 전투라 대부분의 2차대전 역사책에서는 필리핀 전투가 아예 빠져있다. 무려 40만명 Vs. 40만명이라는 태평양 전쟁 통틀어 가장 큰 규모의 대군들이 격돌한 전투임에도 불구하고 그러하다.[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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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진을 찍을려고 하는 과정에서 해변에서 다섯번 이상 넘어졌다고 한다.허세킹

그러나 이러한 정치적 배경을 떠나 필리핀 전역에서 당시 맥아더의 전공은 대단한 것이었다. 당장 맥아더 소속의 미 제7함대중순양함이 그나마 가장 큰 함선이었고 몇 척 있지도 않은데다가[18] 구축함급도 안되는 어뢰정들이 함대구성의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항공모함 지원도 거의 없어서 얼마 안되는 육상기로 주요 작전을 시행했다. 해병대의 지원도 미약해서 상당수의 상륙은 육군이 담당했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일본군이 맥아더의 공격을 조공으로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효과가 엄청났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필리핀 탈환전에서 미국군 40만 vs 일본군 40만 드림매치를 펼쳐 1만여 명의 전사자 피해를 입고 일본군에게 자그마치 그 40배에 달하는 전사자를 발생시켜 종전때 일본군은 만여명이 겨우 넘는 병력만이 항복할 수 있었다.[19][20] 이정도의 성과라면 어디 내놔도 죄다 명장 소리를 듣는다. 독일 국방군도 초기의 소련군 상대로 교환비로 이렇게 큰 전과를 낸 경우는 몇 건 없다. 그리고 맥아더는 이렇게 엄청난 교환비를 자주 이끌어냈다. 무의미한 전투였다고 욕먹는 펠레리우 전투에서도 교환비는 미국군 1명당 일본군 9명이였다. 초반에는 일본을 공격하기 위한 중요한 기지인 클라크 공군기지들과 마닐라등 주요 도시를 탈환 하며 일방적으로 일본군을 관광시켰다. 이 때문에 보급도 끈기고 고립된 좁은 섬을 지키는 소수의 일본군이 압도적인 다수의 미군에게 섬멸당하던 전투가 아니라, 비교적 넓은 땅에서 비슷한 병력으로 미군과 싸웠는데도 일본군이 밀린 전투 사례로 꼽히기도 하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비슷한 시기의 필리핀 해 해전 때문에 이미 일본은 제공권 및 제해권을 잃어버려서 필리핀의 일본군은 무력화된 상태였다.

여기까지는 좋았다. 그러나 이후 맥아더는 필리핀 전역에서 일본군을 몰아내라는 지시를 내린다. 주지의 사실과 같이 필리핀은 전세계에서 가장 섬이 많은 나라이다. 이때문에 미군의 40만 대군은 이후 태평양 전쟁의 흐름과 전혀 관련 없는 쓸데없는 소모전을 벌인다. 맥아더가 2차대전중 가장 칭찬 받은 것이 개구리 뛰기라고 하여, 일본군의 주요부대를 우회하여 꼭 필요한 섬만 점령하며 일본을 향해 뻗어 나간 것이고, 일본의 주요부대들은 고립시켜 말려 죽이며 미군의 희생은 피한 것이다. 그러나 필리핀 전투는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수천개의 섬을 점령하라는 지시를 내려 미군에게 불필요한 희생을 강요 하였다. 그동안 개구리 뛰기로 얻은 이미지를 이 전투를 통해 깍아 먹었다. 그리고 사실상 태평양 전쟁에서 사라진 맥아더 대신, 전국의 주도권은 태평양 전역사령부의 니미츠 원수가 쥔다.[21] 이후 필리핀 전투는 쓸데없는 전투를 벌였다는 이유로 또 다른 졸전인 파푸아 전투와 함께, 맥아더가 가장 욕먹은 전투가 되었다.

해군 뿐만 아닌 해병대에게서도 상당히 미움을 받았는데 이는 맥아더가 적전 상륙은 해병대에게 맡겨 온갖 고생 다 시키고는 잔적 소탕과 점령 임무는 휘하 육군에게 맡겨 언론의 주목을 받게하는 수법을 종종 써먹었기 때문이었고, 그래서 해병대를 맥아더가 태평양 전쟁에서 대규모로 써먹을 수 없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달라서 태평양 전쟁에서 맥아더가 해병대를 사용하지 못 한 것은 가용 가능한 해병대를 니미츠의 해군이 다 가져간 탓이지 그와 해병대와의 불화탓이 아니다. 때문에 맥아더는 미 육군과 호주 육군만 거느리고 싸워야 했다. 맥아더의 구역에서 해병대가 전투를 한 것은 카트휠 작전의 후반부인 뉴브리튼 섬 전투가 유일한 사례이며 나머진 니미츠 제독의 구역에서 전투를 해왔다. 다만 뉴브리튼 섬 작전 막바지에 맥아더장군이 해병대를 돌려주기 싫어서 일정지연을 시킨 기록은 있다. 참고로 맥아더와 해병대의 관계는 인천 상륙작전 직전에 최악이었다가 작전의 성공으로 회복되었다가 장진호 전투로 완전히 파탄나버렸는데, 해병대를 중공군 사이에 고립시킨 장본인이 맥아더였고, 해병대의 상급 부대 지휘관이었던 알몬드가 맥아더의 최측근 중 한 명이었다. 그리고 알몬드는 장진호 전투에서 수준 이하의 지휘능력을 보여주는 것은 물론이고, 전선에서도 호화 생활을 하여 장병들의 빈축을 샀다.

이후 핵폭탄 두 발 맞고 항복한 일본과의 항복협상에 대표로 참석해 전함 미주리호 함상에서 항복조인서에 직접 사인하고 일본의 항복을 받아냈다.[22]

종합하자면 거만하고 독불장군이며 아전인수적인 면이 있으나, 최소의 희생으로 최대의 결과를 가져왔고, 개인의 명성을 추구하면서도 실적이 좋았기 때문에 과거 전쟁에서의 공적까지 감안하여 1944년에는 미 육군 원수(General of the Army) 계급이 되었다.[23]

2.4 일본 점령군 사령관 시절

[24]

일본쇼와 덴노GHQ에 불러서 덴노의 시종들을 모두 물리치고 둘이서 함께 찍은 유명한 사진. 이 사진 한 장은 패전 후의 일본인들 마음에 남아 있던 자존심과 저항의식을 완전히 상실시켰다. 이때의 일화가 있다. 맥아더 장군과 미군이 일본에 들어온 지 1달이 넘었는데도 덴노 쪽에서 아무런 움직임이 없자 연락을 취할까 했는데 덴노 스스로 직접 맥아더를 찾아왔다고 한다. 덴노 스스로 궁 밖으로 나간 게 2000년만의 일이라고.그렇게 맥아더를 만나러 왔으나 맥아더의 비서도 아닌 군의관이 맞이를 했다고 한다.[25] 최대급의 모욕을 받은 셈이었으나, 대화 자체는 화기애애하게 진행되었고, 금방 감정을 풀어버렸다고 한다. 이 사진 말고 덴노가 맥아더에게 인사를 하며 고개 숙인 사진이 있었는데, 일본 정부의 공작이 엄청났고 미국에서도 덴노의 체면을 생각하여 관련 사진을 쓰지않게 되었다는 얘기가 있다.

일본인들 입장에서는 자신들이 신처럼 모시던 덴노가 직접 최고급 양복까지 차려입고 불려간데다가 당시 맥아더는 정복도 아닌 (당시에는 규정상 전투복을 겸할 수도 있던)허름한 육군 열대용 근무복 차림에 시큰둥한 표정과 모양새로 찍힌 사진을 봤으니 진정한 멘탈붕괴의 현장이었다. # 라이프지 사진은 더하다

종전후 일본 점령군 사령관으로 GHQ 꼭대기에서 군림하며 제2의 전성기를 누렸다. 당시 그를 가리켜 일본 최후의 쇼군이라 말할 정도이고 이후 미국 대통령직에 그다지 집착하지 않은 것도 이때 정치적 허영을 충족시켰기 때문이라는 말이 있다[26]. 사실 미국 정부에서는 일본 황실을 비롯한 전범들을 박살내고 싶어했지만 일본인들이 들고 일어날 것을 우려해서 그걸 막았다고 전해진다. 심지어 태평양 전쟁을 일본의 방위 전쟁이라 주장하며 사실상 자국과 미 해군을 비판하는 모습까지 보이기도 했다.

그 결과 미군의 점령 초기에 일본에서는 '맥아더 숭배' 현상이 일었다. 대다수 일본인은 점령군 사령관을 '외국인 천황'으로 받아들인 것이었다. 많은 일본인들이 맥아더에게 편지와 선물을 보냈다. 편지는 점령 첫 해에 가장 많은 양이 배달되었는데, 당시의 우편물 접수 대장은 SCAP(연합군최고사령부)의 기록에 남아 있지 않다. 하지만 1946년 9월부터 1951년 5월까지 연합국 번역통역반(ATIS)에서 44만 1,161통의 편지 엽서를 읽고 처리했다는 공식 기록이 남아 있다. 발신인의 신분은 다양했으며 영어로 씌어 있는 것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일본어였다. 소데이 린지로 교수는 일본 성인 인구의 약 0.75%가 자발적으로 편지와 엽서를 보낸 셈이며, 정복자와 피정복자 사이의 이와 같은 교류는 인류 역사상 전례가 없는 일이라고 했다. [27]

거기에는 맥아더에 대한 존경심과 그의 관대함에 대한 감사의 말들로 가득했으며, 편지의 발신인은 맥아더 장군의 '신령님 같은 자비'를 찬양하고, 그를 '살아있는 구세주'라 불렀다. 전쟁과 조금이라도 관련이 있는 자들은 상관과 천황의 명령이었을 뿐 자신에게 책임이 없다고 변명하기 급급했다. 심지어 아오모리 현의 한 노인은 "예전에는 아침저녁으로 천황 폐하의 초상을 신처럼 모셨습니다만 지금은 맥아더 장군님의 사진을 향해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라고 쓰기도 했다.[28]

2.5 인천상륙작전


이승만 전 대통령과 더글러스 맥아더

1945년 9월, 미군이 한반도에 진주했을 때 이른바 맥아더 포고령 혹은 맥아더 포고령 제1호가 발표되었다. 이 포고문을 통해 미군이 직접 한반도를 통치하는 미군정을 선포하였으며, 건국준비위원회는 물론 인민위원회, 자칭 '조선인민공화국'은 부정되었고, 심지어 대한민국 임시정부까지도 인정하지 않았다.

포고령 제2호를 통해 일제강점기시절 때 일제에 부역행위를 한 인사들이 대거 미군정에 고용되어 편입되었다. 당시 미군은 한반도에 아무런 사전지식도 없었고 구체적인 통치계획도 없었다. 따라서 미군 입장에선 기존 관료기구를 활용하는게 가장 효율적이었던 것이다. 이와 별도로 미군과 대화가 되고 미국의 사고방식을 이해하는 인물들, 즉 미국유학파 한국인 박사들을 찾아서 미군정 고문에 임명한다. 대체로 개신교회 미국선교사의 후원으로 미국유학을 다녀온 엘리트들이 미군정 치하에서 강력한 실세로 부상한다.

다만 실제 한국에 맥아더의 권한이 미쳤는지는 미지수이며, GHQ가 한국에 얼마나 관여를 했는지는 아직 실증 연구가 부족하다. 맥아더 자신도 일본의 통치에 집중하여 한국까지 손대려고 하지 않았으며, 실제로 한국에 관심을 보인 것은 한국전쟁이 발발한 후의 이야기다. 따라서 맥아더가 해방에서 한국전쟁 전까지의 혼란한 한국 정계에 영향을 준 것은 저 포고령 2개 밖에 없다고 보면 된다. 저 2개로 인해 한국 정계가 큰 혼란에 빠졌다는 건 무시하자

한국전쟁 발발 직후 한국으로 건너와 한국의 급박한 상황을 확인하고는 자신의 재량권으로 최대한 많은 전투력을 투입하여 한국군의 급격한 붕괴를 막기도 했다. 이후 UN군 총사령관으로서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상륙작전으로 평가받는 인천 상륙작전을 성공시켜 군인으로서 아직 녹슬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기도 했다.


인천앞바다에서 전황을 살피는 더글러스 맥아더

당시 워싱턴의 미국 국방부와 합참은 조수간만의 차이로 인천 상륙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군산 상륙을 강력하게 권고하였다. 그러나 맥아더는 원수 계급과 자신의 명성을 이용해서 독단적으로 인천 상륙작전을 성공시켜서 워싱턴을 데꿀멍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것이 맥아더의 마지막 영광이었다.

맥아더 장군이 전쟁 속에서 한강 이북의 전황을 관찰하고 있었고, 그때 후퇴하지 않고 참호 속에 남아 있던 국군 이등병을 발견한 맥아더 장군은 그 이등병에게 물었다.

맥아더 - 자네는 왜 후퇴하지 않나?
이등병 - 상관의 후퇴 명령이 없습니다. 명령이 있기 전에는 이 참호를 지켜야 합니다.
맥아더 - 훌륭하다. 자네 무슨 소원이 없는가?
이등병 - 저한테 총과 총탄을 주십시오.
맥아더 - 그럼 주고말고! 그런데 자네 다른 소원은 없는가?
이등병 - 없습니다.

대답을 들은 장군은 너무 감격하여 전속부관에게 말했습니다.
맥아더 - 우리의 모든 전력을 동원하여 이 나라를 지켜야 한다.”

당시 채병덕을 육참총장에서 잘라 버리라고 이승만에게 요구했다. 한국전쟁 초기에 한강방어선이 무너지게 생기자 맥아더는 채병덕이 지휘관으로서 능력이 어떤가를 알아내기 위해 이승만이 보는 앞에서 채병덕에게 어떻게 지휘해서 방어해낼 것인지를 물었다. 채병덕은 여기서 200만 한국 장정 훈련을 언급했다. 맥아더 코앞에서 맥아더의 생사대적(?)이었던 퍼싱의 사고방식대로 대답한 셈이다. 여기서 채병덕이 정치감각과 군사감각 둘 모두에 무식, 무지했다는걸 알 수 있다. 그리고 결국 한강 방어선이 무너졌다.

맥아더는 채병덕이 똥별이라는 것을 바로 간파해 냈지만 채병덕이 병림픽을 벌일까봐 이 자리에서는 크게 칭찬한 반면 그날 저녁 이승만과 독대를 요구한 뒤 이승만과 단 둘이 독대면을 하는 자리에서는 불같이 화를 내며 채병덕을 경질시키라고 길길이 날뛰었다. 이승만은 그 다음날 아침에 기상하자마자 자신의 업무를 시작하기도 전에 이를 칼같이 이행했다. 후임 육참총장으로는 정일권을 임명했다.

2.6 몰락 - 파면과 은퇴

I fired him because he wouldn't respect the authority of the President. I didn't fire him because he was a dumb son of a bitch,

나는 그자가 대통령의 권위를 존경하지 않아서 파면했다. 나는 그자가 멍청한 개새끼라서 파면한 게 아니였다.
트루먼 대통령 1960년에 맥아더를 자른 이유를 묻자[29]

인천 상륙작전으로 맥아더의 명예는 절정에 이르렀다. 그러나 맥아더는 이후부터 오판을 남발하며 1950년 겨울의 대참패에 일조했다. 마오쩌둥저우언라이는 미군이 38선을 넘으면 중국이 개입할 것이라고 거듭 경고했지만 맥아더는 그것을 허풍으로 치부했고, 중국이 설령 참전한다 해도 미군의 상대가 되지 못할 것이라고 자신했다. 당장 맥아더는 중공군이 압록강을 건너면 "역사상 최대의 참사"가 벌어질 것이라고 호언장담했다. 결국 이 말은 맥아더가 바란 것과는 정반대의 의미로 현실이 되었다.[30][31]

따라서 중공군이 남진하고 있다는 첩보는 맥아더와 그 휘하 참모들에 의해 보기좋게 무시당했고, 해리 S. 트루먼 대통령과의 10월 15일 웨이크 섬 회담에서도 맥아더는 중국은 문제가 못된다고 자신만만하게 선언했다. 덕분에 중공군의 참전 이후 트루먼은 맥아더에게 속았다며 길길이 뛰었다. 11월까지도 맥아더는 중공군의 침투는 공군력으로 간단하게 저지할 수 있다고 주장했지만 당시에는 무려 30만 명인민지원군이 압록강을 건너 매복을 완료한 상태였다.

전선의 장교들은 중공군이 이미 압록강을 넘은 것이 확실하다며 진격속도를 늦출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맥아더는 진격을 늦추기는커녕 크리스마스까지는 전쟁을 끝내겠다며 마지막 총공격을 개시할 것을 명령했다. 결국 미군은 중공군 30개 사단의 거대한 포위망 한가운데로 병력을 흩어 놓은 채 걸어들어가는 미군 역사상 최대의 실수를 범하게 된다.

맥아더는 트루먼에게 압록강 진격을 승인해줄 것을 요구했고, 11월 21일에 트루먼은 중공군은 별 위협이 못된다는 맥아더의 보고를 토대로 "중공군의 실질적인 저항이 없을 것(no effective resistance)"을 조건으로 하여 맥아더의 압록강 진격을 승인했다. 그러나 고작 1주일 뒤인 11월 28일, 중공군의 총공세가 시작되었다.

11월 말부터 시작된 중공군의 포위 대공세로 미군은 그야말로 역사적인 대참패를 당했다. 중공군의 공격으로 미 8군과 10군단의 선봉대는 단숨에 궤멸되었고, 일선 사령관들조차 전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대혼란에 빠져 허우적댔다. 10군단장 에드워드 알몬드 장군은 군단이 파멸 직전까지 몰렸다는 것도 모른 채 공격을 강요했으나 현장 장교들의 항명에 가까운 저항에 직면한 다음에야 후퇴를 허락했다. 결국 미군은 청천강에서 평안남도 순천시에서 수십 km나 후퇴한 후에야 전열을 재정비할 수 있었다. 이후 국무장관 딘 애치슨은 청천강에서의 대패가 "미군 역사상 최대의 참패"였다고 회상했다. 맥아더가 중공군이 건너오면 "역사상 최대의 학살"이 벌어질 것이라고 예견했던 것을 생각하면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중공군의 개입을 헛소리로 치부하며 완전승리를 자신하던 맥아더는 11월 28일에는 "새로운 전쟁이 시작되었다.", "상황은 우리의 통제를 벗어났다."라고 선언, 주위를 어이없게 만들었다.

사실 중공군의 참전 당시 계획은 참전 이후 6개월간, 연합군이 청천강-원산 선에서 선제공격을 하지 않는다면 공산측도 선제공격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한국전쟁 기간 내내 공산군은 중공이라는 병력공급원천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연합군의 총병력을 넘지 못했고[32], 심지어 청천강에서의 패배 이후 평양을 사수하며 제대로 된 방어선을 펼쳤다면 중공군의 보병 기동전을 차단하며 전세를 유리하게 펼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맥아더의 도쿄 사령부는 별다른 대책을 제시하지 못한 채 시간만 허비, 미군이 지휘체계도 회복하지 못한 채 대공황 속에서 속수무책으로 밀리는 사태를 초래하고 말았다.[33] 맥아더는 한국전쟁을 지휘하는 총사령관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에 상주하고 있었다.(그가 한국에 머문 시간은 다 합쳐봐야 몇 주일에 불과하다.)

맥아더는 중국군의 증원을 차단하기 위해 만주폭격을 주장했지만, 확전을 우려한 워싱턴 수뇌부는 미군의 압록강 월경을 금지한다. 이에 따라 통칭 "Yalu River Restriction"이라 불리는 <공군기의 중국 영공 침범 금지령>이 내려졌지만, 상당수의 파일럿들이 그 명령을 무시하고 중국 영공으로 쳐들어갔다.[34]

맥아더는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제한전이 아닌 중국과의 전면전이 필요하다고 주장, 제3차 세계대전으로의 확전을 우려한 트루먼 행정부와 정면으로 충돌하게 된다. 트루먼 행정부는 38선을 회복하는 수준에서 평화조약을 체결할 방침이었지만, 맥아더는 만주에 대한 핵공격중화민국에 있는 중국 국민당군의 동원까지 주장했다. 트루먼 행정부는 대전략 수립은 행정부의 몫이라며 맥아더에게 함구령을 내린다. 그러나 맥아더는 트루먼의 함구령을 무려 6차례나 무시하며 독자행동을 계속했다.
브루스 커밍스에 따르면 맥아더는 만주에 30여발의 원자폭탄을 투하하고 방사성 코발트를 동해부터 서해까지 살포해 방사능지대를 만들것을 주장했다고 한다.

맥아더는 자신에게 대전략을 수립할 권한이 있다면 핵무기를 떨어뜨리고 만주를 침공하며 타이완의 중화민국군을 활용해서라도 중국군을 섬멸할 것을 공언했다. 다만 그렇게 해서 벌어질 세계적인 확전과 사상자 수의 급증은 정치가들의 문제이지 야전사령관인 자신이 상관할 바가 아니다라고 대답한다.

맥아더가 기자회견에서 대만군의 참전을 역설하자 마침내 트루먼의 분노가 폭발했고. 결국 맥아더는 전쟁 지휘 중 파면당하고 만다. 아이러니하게도 국방부와 합동참모본부의 동료 장군들조차 맥아더의 파면에 만장일치로 동의했다.

일부에서는 그의 인기를 두려워한 트루먼의 계략이라고 하지만 당시 맥아더 자신의 나이가 많은데다 오랜 외국 생활로 국내정치 기반이 전무했기 때문에 의미없는 이야기였다. 맥아더는 44년과 48년 모두 공화당 대통령후보 선출 경선에 관심을 보였지만 추대를 받고자 했을 뿐 경선을 거치려 하지 않았다. 모든 걸 내려놓고 당내 경선을 하러 본국으로 귀환하기에는 맥아더가 가지고 있던 것들이 너무 많았다. 맥아더도 별 관심은 없었는지 44년에는 자기 스스로 아무 선거 운동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쪽 사람들은 장군은 너무 바쁘셔서 선거운동할 시간도 없으십니다라는 유세를 했다. 맥아더는 40년대에는 미국 본토에 발을 들인 적조차 없다.

1951년 퇴역식 당시 남긴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Old soldiers never die; they just fade away.")라는 명언은 지금도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사실 그의 오리지널 명언은 아니고, 웨스트포인트의 훈련가 중 하나를 연설 서두에 인용한 것.

맥아더의 퇴역 직후 인기는 하늘을 찔렀으나 보통 미국인들의 입장에서 피부로 잘 와 닿지 않는 필리핀, 일본, 한국에서의 활약으로 얻은 인기는 생각보다 빨리 사그라들었고 맥아더 또한 정계 진출을 포기하게 된다.

2.6.1 미국의 맥아더 비판

한국전쟁 당시 맥아더의 행보에 대해서는 수많은 현장 증인들과 학계의 권위자들이 가혹한 비판을 가했으며, 이는 현재까지도 미국 정부와 군에서 맥아더를 쉽사리 거론하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전쟁과 국제정치질서의 상관관계 연구로 잘 알려진 미국의 정치학자 로버트 저비스(Robert Jervis), 스티븐 밴에버라(Stephen Van Evera)는 맥아더의 38도선 북진 결정을 "전략적 오판의 대표적 케이스"로 비판했다. 밴에버라는 38도선 돌파가 "미국의 군사력이 중국에게 가할 수 있는 위협을 과소평가했고, 중국이 한반도에게 가진 이해관계도 과소평가했다. 그 결정은 중국의 이익도 관점도 고려하지 않았다."고 한 것이다. [35]

대통령 트루먼은 자신의 회고록 "Memoirs"에서 맥아더가 워싱턴의 수뇌부를 기만했다고 분노했으며,[36] 국무장관 딘 애치슨은 맥아더의 폭주가 미국과 동맹국들과의 관계를 파국으로 몰아넣고 있다고 비판했다. 실제로 확전가능성이 언급되지마자 영국의 클레먼트 애틀리 수상이 황급히 미국을 직접방문, 확전을 중단할 것을 요구했다. 애틀리는 "아시아에서의 전쟁은 NATO를 약화시킬 것이다"고 트루먼에게 호소했다.

미국 군부의 대부이자 2차 대전 승리의 주역이었던 조지 마셜 원수도 중공군 참전 이후 한국에서의 전쟁은 전전 현상유지(status quo ante)의 선에서 마무리되어야 한다는 것에 동의한 상태였으며 트루먼, 애치슨, 마셜 등 당시 미국의 수뇌부 전원은 전쟁의 지속과 확대는 소련을 유리하게 할 뿐, 자유진영의 불안정을 불러올 것이라는 점에 의견이 일치하고 있었다.[37]

특히 마셜과 애치슨이 수립한 냉전기 대전략은 동맹국들을 전세계적 단위에서 결속, 소련을 전방위 압박하는 봉쇄정책(Containment)에 기반하고 있었다. 그러나 게리 헤스(Gary Hess)에 의하면 맥아더의 독자행동은 NATO와 UN 내부에서 미국의 폭주가 소련을 자극하는 것에 대한 공포를 불러일으키고 있었고, 이는 고작 장군 한명이 국가의 세계전략을 손상시킬 수 있는 위험을 내포하고 있었다.[38]

이렇게 수뇌부가 전쟁중단으로 결론을 내린 상태에서 맥아더의 명령불복종은 미국 정치학계의 권위자 리처드 노이스탯(Richard Neustadt)이 맥아더의 지휘기간은 미국의 민군관계(civil-military relations)가 역대 최악으로 전락한 시기였다고 평가했다.

3 말년

맥아더는 해외에서의 기나긴 여정을 마치고 1937년 이후 약 14년만에 미국 본토로 다시 돌아왔다. 맥아더가 퇴임 직후 뉴욕에서 벌인 시가행진에 모인 사람의 수는 700만 명에 달했으며 이는 지금까지도 깨어지지 않는 기록이다. 이 기록적인 환영 인파에 정치인들이 무지 당황했음은 물론이고 차기 대권을 노리고 후보 지명을 기다리고 있던 아이젠하워는 그야말로 좌불안석이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세간의 우려(혹은 기대)와는 달리 맥아더는 출마하지 않았다. 그는 전당대회에서 아이젠하워가 아닌 후보(로버트 태프트)를 지지했으나 595:500으로 아이젠하워가 지명되었고, 그 해 선거에서 당선되었다. 결국 한국전쟁 관련 문제로 아이젠하워와 화해하고, 회고록을 출판하는 등 남은 12년간 조용히 여생을 마친다. 향년 만 84세.

1962년 10월부터 11월까지 미국을 방문 중이던 김종필을 만났다. "한국이 하루빨리 통일이 되기를 바란다. 나는 한국이 통일될 때까지 죽을 수 없다."라고 말했으나... 140살 살아보시려고 하셨습니까

존 F. 케네디 대통령 재임시 민간인 자격으로 자문을 했던 적이 있는데 바로 피그스만 사건과 베트남 전쟁이다. 그는 피그스만 사건 실패에 오리발 내밀기에 급급한 펜타곤을 강도 높게 비판했고 강력한 직접 개입을 주장했다. 또한 베트남에서도 더 이상의 개입을 중지하고 조속히 손을 떼야 한다고 역설했다. 후일 베트남에 대한 지적은 미군의 패배로 맥아더의 시각이 옳았음이 증명된다.

사실 맥아더는 일본이나 필리핀을 제외하고는 아시아의 전략적 가치에 대해서 피상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에게는 베트남은 듣보잡 수준의 무가치한 부동산일 뿐이었고 차라리 주변국의 연합체로서 수비하거나 잃거나 해도 좋은 나라였다. 문제는 미국 정계와 군계의 유력한 사람중에 맥아더 정도의 인식수준을 가진 이조차 거의 없었다는 것. 대부분이 맥아더 수준 이하였다는 것이 안습. 게다가 베트남을 정말로 잃어버려도 아무 일도 없었다.[39] 물론 미국의 지도자층이 다 바보는 아니라서 전략적, 전술적으로 베트남전을 비판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바로 매튜 B. 리지웨이였다. 그는 한국에서의 경험을 비추어 제한전 상황에서의 공군력의 우위는 허상이라는 이론으로 북폭을 비판했는데 그게 정확한 지적이었다.

4 그의 인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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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원지간.jpg 네가 전쟁영웅이든 별이 몇개든 상관없어. 난 대통령이거든

"그건 나에게 주피터처럼 벼락까지 쳐가며 요란하게 떠드는 얼간이(horse's ass)가 되지 말라는 점을 상기시켜 주거든."

체스터 니미츠, 정보 참모 레이턴 대령이 왜 책상 위에 맥아더 사진 액자가 있냐고 묻자[40]

마셜이나 아이젠하워를 멘토로 삼지말고 맥아더를 멘토로 삼아야 돼요. 저렇게는 되지 말아야지...죽어도 저렇게는 늙지말아야겠다.
천성적인 카리스마와 쇼맨십, 언론 플레이로 자신을 언제나 화제의 중심에 있게 만들었다. 기본적으로 부하들이 자신을 제치고 유명세를 타는 것을 원치 않았고, 자기 관할의 모든 보도 자료에 '맥아더 사령부'라는 표시를 했다. 허나 그 탓에 대통령과 참모본부는 물론이고 해군과 해병대까지 들러리로 만드는 바람에 적들을 떼거리로 양산해낸 결과를 초래하기도 했다. 특히 트루먼 대통령은 특유의 패션(빳빳하게 각을 세운 바지와 썬글라스, 담배 파이프)을 두고 "70대의 원수가 20대 소위처럼 하고 다닌다."며 못마땅해 했다고 한다. 또한 "저 인간이 대통령이야, 내가 대통령이야? 자기가 마치 대통령이나 되는 듯이 행세하고 다니잖아!"라는 말도 남겼다고 한다. 사실 맥아더는 대통령이 아니고 일본의 백인 쇼군이었다.

아이젠하워가 괜히 과장이 심하다고 비난한 게 아니다[41] 리처드 B. 프랭크의 책 "맥아더"를 보면 그는 관중들을 앞에둔 무대의 배우처럼 과장되게 말하며 통성기도를 하는 것 같이 격렬함을 갖고 있다고 한다. 사적인 자리에서는 스스로 3인칭화 시켜서 말하며 "맥아더는 지금 물을 먹기를 원한다"라던지...

1차대전 당시 42사단 참모장이였는데, 예하의 168 보병연대의 참호 습격에 합류하여 최전방에서 돌격했던 일화가 있다. 패튼이나 롬멜도 이런 종류의 일화는 종종 있다. 누군가 심리학자에게 이런 행동의 근원에는 어떤 감정이 있냐고 묻자. 자살이라는 대답을 들었다고 한다.[42]

참모장으로서 의무는 내버리고 일개 소대장 처럼 행동 한 것인데, 당시 군목인 프랜시스 P. 더피 신부는 "맥아더는 전투를 수행하는 대신 지시를 내려야 하는 자기 본연의 임무에 짜증을 내며 급습이나 습격작전에 직접 참가했다"라고 할정도로 당시는 유명했던 것 같다. 이상시에 나왔던 말이 그 유명한 "독일인이 전부 달려들어도 나를 죽일 포탄을 만들수는 없다" 였다.

이런 '쇼맨쉽'을 정말 필요한 곳에선 써먹지 않았다는 비난을 받기도 한다. 제2차 세계대전 초기에 일본군이 필리핀을 침공했을 때, 그가 기지 밖으로 안 나온다는 이유로 병사들이 그를 '덕아웃 더그'라고 조롱한 바 있다. 조롱할 만한 것이 이 당시 미군 병사들은 바탄 반도에 갇혀 전염병 및 식량부족으로 온갓 생고생을 하면서 전투하고 있었는데 이놈의 원수란 작자가 이렇게 어려운 시기에 후방을 돌아다니면서 병사의 사기를 복돋아주어야 하는데 하지를 않고 참호에 몸을 숨긴 채 도망갈 궁리나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는 그렇게 욕했지만...거만함에 있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그에게는 대단한 굴욕이었을 것이다. 무려 한달 반 동안 한번도 바탄 반도를 방문한 적이 없고 참호 속에서만 있었다고 한다.

이당시 굴욕적인 별명을 얻으면서 까지 방공호에 있었던 것은 두가지 원인이 꼽히고 있는데, 첫번째는 정신적 충격을 받아서이다. 전혀 예상 못한 일본군의 공격에 한방에 일패도지하여 최후방 까지 몰리자 충격을 받아서 예전처럼 최전방에서 돌격하기는 커녕 후방에서 이렇다할 지휘도 하지 않고 은둔하고 있었다. 이는 10년후 한국전쟁 당시 중공군의 2차 대공세에 의해 대패하자 한동안 일본의 지휘소에서 이렇다할 명령도 내리지 않고 은둔 했을 때도 반복하여 보였던 패턴이다. 역경에 약한 사나이

둘째로 방공호 안이 지휘통제에 더 유리한데다가 개전 전 세워진 작계에 따라 오지도 않을 구원군을 기다리며 내키지 않는 방어전을 해서 그랬을 것이다. 통신기도 거기 있었다. 그리고 맥아더도 할말이 있는 게 일본이 필리핀을 침공할 가능성을 설파하면서 몇 번이나 본국에다 증원과 장비 보급을 요청했지만 이걸 씹은 건 미국 정부였다. 결국 일본이 필리핀을 침공했을 때 맥아더 수중에 있던 병사는 식민지 경비대 수준에 불과한 약간의 미군과 훈련과 장비가 턱없이 부족한 오합지졸 필리핀군 뿐이었다. 그리고 그는 절대 도망칠 생각이 없었지만 최고위 장성을 포로로 만들 수 없다는 미정부의 판단에 의해 호주로 탈출할 것을 명령받게 된다. 이때 육군참모총장 조지 C. 마셜은 맥아더가 절대 도망칠 위인이 아니니까 루즈벨트에게 탈출권고 따위가 아닌 미군의 최고 통수권자로서 단호하게 명령할 것을 요구했고 맥아더는 이런 루즈벨트 대통령의 강경한 명령에 어쩔 수 없이 호주로 탈출하게 된다. 이때만 해도 대통령 명령을 안 씹고 잘 들었다. 아무래도 루즈벨트가 트루먼보다는 좀 무서웠을지도 모른다.[43]

모든 국가의 모델은 미국이라고 믿었던 인물이기도 하다. 참모장이[44] 파시즘을 찬양하자 민주주의의 장점과 파시즘의 한계에 대한 일장연설을 쏟아냈다. 한국전쟁에서 항명사건을 일으켜서 문민통제에 대해 반하는 모습을 보여서 잘 믿어지지 않을 지도 모르지만 민주주의의 가치에 대해 잘 알고 깊게 신봉하는 사람이었다. 문제는 그걸 잘 실천을 안 해서 그렇지 여담이지만 맥아더의 참모 중에는 유럽 최후의 파시스트 소리를 들은 스페인의 프랑코 지지자도 있었다고 한다.

전사연구가 마이클 샬러 교수는 자신의 저서 《더글러스 맥아더》를 통해 맥아더의 인간됨과 그로 인한 마찰, 불합리한 작전 입안 및 실행, 사령관으로서 부적절했던 점을 신랄히 지적하였다. 뛰어난 재능 이상으로 자기 중심적인 탓에 너무도 쉽게 비합리적인 방향을 택하는 사람이라는 것이 샬러의 평가이다. 또한 근간된 데이비드 핼버스탬의 《콜디스트 윈터》에서도 작정하고 맥아더를 깐다고 느껴질 정도로 맥아더의 인간적 단점과 판단 오류에 대해 맹렬히 비판하고 있다. 여기에 따르면 맥아더는 일본 진공 시점에서 이미 너무나 전설화된 상태라 아무도 감히 비난하지 못하고 이후 인천 상륙작전이라는 잭팟 때문에 거의 불가침 영역으로 승화했다는 것. 설상가상으로 주위에 예스맨들이 모여 바탄갱과 같은 세력이 구축되었다. 그중 맥아더의 참모장을 지낸 리처드 서덜랜드와 같은 장군은 중간에서 정보를 가로막고 독단적 전횡을 많이 저질러 맥아더 휘하의 육군항공대, 해군뿐만 아니라 육군에게도 공분을 샀다. 결국은 파병나간 호주군 장교의 부인을 꼬셔 그녀를 위해 호화스러운 막사를 만들어주는 일까지 벌어지자 맥아더에 찍혀 버렸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예스맨만을 남겨두는 나이먹은 사람 특유의 좋은 말만 가려듣기 신공으로 전장에서 싸우는 부대들의 정보나 요구에 완전히 귀를 막고 있었다고 한다. 모든 보도기사와 사진을 일일히 검사하여 위엄이 드러나는 문구와 각도만을 허용하고, 회의에서도 일방적으로 자신의 연설만을 전달하는 전형적인 제왕적 지휘를 고수했다 한다. 인천 상륙작전을 봐도 잘 알 수 있는데 다른 장군들이 반대를 하건 말건 간에 "내 생각이 옳다!"를 밀어붙이는 독불장군의 모습을 아주 제대로 보여주며 자기가 깠던 전체주의의 한계인 경직된 의사결정을 몸소 보여주었다.근데 군대 지휘체계가 민주주의 방식으로 굴러가는게 가능하긴 한건가?

더불어 6.25 전쟁 당시 낙동강 전선을 지키는 수하들에게 "버티지 못하면 죽어라!"라는 명령을 내려 "무슨 일본의 군국주의자냐"라는 미국 여론과 언론의 비난에 시달리던 부하 8군 사령관 월튼 워커 중장을 두둔하면서 "전쟁에 민주주의가 통하지 않는다"라는 말을 했다가 워커가 맥아더와 친하기 때문에 그를 옹호했다며 그도 논란이 된 적이 있다.[45] 참고로 워커 중장은 한국전쟁 당시 미 8군 사령관으로 복무 중 교통사고로 사망했으며, 사후에 공적을 기려 그가 사망한 지역에 그의 이름이 붙여 워커힐이라 부르게 되었다. 워커힐 호텔이 있는 그 자리로 이는 한국 지명에 서양인의 이름이 붙은 최초의 사례다.

여담으로 그의 외아들은 아버지의 소망과 달리 군인이 되지 않았고 맥아더라는 성마저 버렸다. 맥아더가 지은 시인 "아들을 위한 기도"는 한국에서 꽤 유명한데, 이 시의 주인공인 그의 외아들 아서 맥아더 4세는 아버지의 장례식 이후 자신의 성을 바꾸고 잠적했으며, 친한 친척들하고만 연락이 되고 있고 다른 행방은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 그들에 의해 뉴욕시에 거주한다는 것만 알려진 상태다. 2000년에 어머니인 진이 사망했을 때도 언론에는 한 번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아들이 햄버가 가게의 주인이 되었다는 소문도 있지만 완전 허구다. 오죽했으면 2000년대 중반쯤에 죽었다는 소문이 돌았으나, 그와 연락이 되는 친척들에 의해 부정되었다. 솔직히 이름 바꾸고 숨어버릴만 한게 그는 어릴 때부터 너무나 유명한 아버지로 인해 세간의 관심을 지나치게 받았다. 아버지가 원수 계급장을 달 정도가 되면 대개의 경우 그 아들은 이미 장성해서 사회의 중견이 되어 있지만[46] 아서 맥아더 4세의 경우 맥아더가 58세가 되어서야 본 늦둥이라 그가 태어났을 때 이미 맥아더는 미군 최고위 장성이었다. 그리고 2차대전을 겪으며 맥아더의 명성이 하늘을 찌르자 그에 대한 세간의 관심도 비상해져서 어렸을 때 이미 라이프지의 표지모델이 될 정도였다. 또 맥아더가 일본의 실질적인 통치자가 되었을 때도 그는 고작 7살 꼬마에 불과했다. 이 정도면 유럽 어느 나라의 왕자나 다름없는 위치였고 세간의 관심 또한 평범할 리가 없었다. 하지만 어렸을 때는 몰라도 장성하면서 그는 이런 세간의 관심을 점점 견디지 못했고 결국 아버지가 죽자 이름을 바꾸고 은거하게 된다. 그의 친척들도 이런 그의 심정을 잘 알기 때문에 절대 그에 대해서 노출하지 않고 있다고 한다.

더글러스 맥아더는 형인 아서 맥아더 3세와는 사이가 좋았는지, 서로 자신의 아들의 이름을 자신의 형제 이름을 붙여 줬다. 그래서 미국의 외교관인 더글러스 맥아더 2세는 실제로 더글러스 맥아더의 조카이고 더글러스 맥아더의 아들 이름은 아서 맥아더 4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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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아더 원수의 무공 훈장에 네 번째 백엽 장식을 서훈하는 트루먼 대통령. 사진 맨 오른편은 오마 브래들리 원수. 1950년 10월 15일 웨이크 섬.

웨이크 섬의 회담에서 맥아더는 트루먼 대통령을 마중하기 위해 몇 시간 먼저 도착해 있었다. 그런데 기다리는 시간 동안 잠시 눈을 붙인다고 한 게[47] 나이 때문인지 아니면 수하들이 감히 그의 잠을 깨우지 못한 건지 모르지만 트루먼이 도착해서 비행기 문이 열릴 때까지 미처 마중나가지 못하고 트루먼은 비행기 문에 서서 마중나오는 그를 한참이나 기다려야만 했다. 그 뒤에 트루먼의 표현을 빌자면 "70살 쳐먹은, 그것도 원수라는 인간이 19살 소위처럼 빌어먹을 선글라스와 채우지도 않은 상의와 부착물들이 잔뜩 달린 모자를 쓰고 나온" 맥아더를 접견하고 같이 차를 타고 가면서 트루먼이 "난 당신을 만나려고 지구 반바퀴를 돌아서 왔소. 하지만 내가 말하고 싶은 건 그따위 것이 아니오. 당신이 해리 트루먼이란 인간을 어떻게 대접하던 어떻게 생각하던 난 신경 안쓰지만 다시는 군 통수권자를 기다리게 일 따위는 절대로 일어나지 않게 하시오. 알아들었소? "라고 말하며 무안을 주었고 맥아더는 이때 얼굴을 붉혔다고 한다.[48] 그리고 너무 무안했던 맥아더 자신은 나머지 중공군이 위협이 안된다는 뻘브리핑을 시전하고 말았다 맥아더는 트루먼의 전전전전전전전임 대통령 때부터 장군이었으니 대통령 보기를 말년원사가 신임소위 보듯이 한 듯

5 그의 명언들

  •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 - 퇴역식에서 한 말. 사실은 옛 군가의 한 구절을 인용한 것인데, 오늘날에는 맥아더의 어록으로 더 기억되고 있다.
  • "의무, 명예, 국가(Duty, Honor, Country)." - 1962년 5월 모교인 웨스트포인트 미 육군사관학교를 방문하여 후배 생도들에게 '군인이 명심해야 할 가치'로 역설한 말. 위에 소개된 '노병은 죽지 않는다'와는 달리, 이 말은 맥아더의 오리지널 어록이다.
  • "우리는 이제 실업자가 되겠군." - 핵무기의 위력을 보고 한 말이다.
  • "I shall return." - 일본군의 침공으로 필리핀을 탈출하면서 한 말로, 그는 결국 이 약속을 지켰다.
  • "일본은 12살의 소년이다." - 일본에서 미국으로 돌아간 후에 한 말이다.
  • "일본인은 쇼군에게 칼을 대지 않습니다"[49]
  • 군대에는 민주주의가 없다. 혹은 전쟁에는 민주주의가 통하지 않는다.
  • "펜이 칼보다 강하다는 사람들은 자동화기의 위력을 못 본 사람들이다.(Whoever said the pen is mightier than the sword obviously never encountered automatic weapons)"
글의 힘이 총보다 위대하다고 믿는 자는 아마도 최신식 무기를 경험하지 못한 사람일 것이다.
마지막까지는 결코 무시할수 없는 용기이다. 그것은 도덕적인 용기, 확신을 갖는 용기, 꿰뚤어 보는 용기이고, 세상은 항상 용기있는 사람을 모함하려 하고 있다. 그러나 군중의 고함과에 맞서는 양심의 목소리가 있다. 그것은 역사만큼 오랜싸움이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용기를 잃어서는 안 된다. 용기는 역사를 이끌어 간다.
우리는 돈이 아니라 조국을 위해 싸웠고, 대공황의 해법은 열심히 일하는 것인지 손을 벌리는 것이 아니다.
일본 사회는 철학을 잊어버리고, 윤리를 등한히 여기며 미학을 멀리한 사회이다.
우리는 모든 전력을 다하여 이나라를 지켜야 한다.
인천상륙작전은 5000대 1의 도박이라는 것을 나는 알고있지만 나는 그런 모험에 익숙해져 있다. 우리는 인천에 상륙할 것이며 적을 분쇄할 것이다.
전투에서 실패한 지휘관은 용서할 수 있지만, 경계에서 실패하는 지휘관은 용서 할수 없다.
전쟁이 불가피하다면 유효한 수단을 동원해 신속히 그 전쟁을 끝내는 것 말고 달리 대안이 없다. 전쟁의 최고의 목표는 우유부단하게 끄는 것이 아니라 승리이다. 노병은 결코 죽지 않고 사라질 뿐이다. 이제나는 군인으로써 생애를 마치고 사라진다.

6 뒷이야기들

  • 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6월 27일 맥아더는 수원비행장에 도착해서 한강 이북의 전황을 살펴보고 있었다. 그때 후퇴하지 않고 참호 속에 남아 있던 어느 한국군 일등병 (후에 신동수 일병으로 밝혀졌고 당시 16세 소년병이었다 신동수 옹은 2013년에 사망했다)에게 맥아더가 왜 후퇴하지 않느냐고 묻자, 신 일병은 "상관의 후퇴 명령이 없습니다. 명령이 있기 전에는 이 참호를 지켜야 합니다."라고 대답했다. 이에 탄복한 맥아더는 무슨 소원이 없냐고 묻자, 신 일병은 "국군에는 소총밖에 지급되어있지 않고 그나마도 탄약이 부족합니다! 적들을 저지하기위해 필요한 충분한 무기와 탄약을 주십시오!"라고 말했다.[50] 이에 감격한 맥아더는 바로 지원군 파견을 승인했다.[51] 참고로 이 때 맥아더의 시찰 비행 기록은 현재까지 남아 있다.#
  • 한국에서의 임팩트는 정말 커서 일부 무속신앙에서 신앙의 주체로도 나타나기도 했다. 옛날 옛적 양담배가 금지되었던 시기 그를 모시는 무속인들이 양담배를 불법으로 입수하여 제물로 써서 신문지면에 오르내리기도 했다. 지금도 그를 모시는 무속인들이 남아 있다. 이 때문인지 다음 만화속세상 '도사랜드'에서 무당인 주인공의 어머니가 섬기는 제네럴 보살이라는 이름으로 3화부터 등장하기도 한다. 현대판 관운장 정작 맥아더 본인은 장로교 개신교 신도다.
  • 인천광역시 자유공원에는 시민들의 성금으로 세워진 그의 동상도 서 있는데, 이 동상의 철거를 요구한 일이 있기도 했다. 서울 자하문 터널 옆에도 동상이 있다고 알려져 있지만, 자하문터널 옆 정확히는 자하문 고개에 있는 동상은 김신조 외 20여명이 박정희를 암살하러 왔던 1.21사태 당시 현장에서 사망한 종로 경찰서장 최규식 경무관이다. 다만 맥아더 장군 동상이 1960년대 말까지 경복궁 내와 반공회관(현 광화문 KT 사옥) 앞에 있던 적이 있긴 했다. 물론 지금은 그런 거 없다.
  • 호주에서도 평가가 엇갈리는 인물. 호주는 태평양전쟁 발발 당시 영연방의 일원으로서 주력 사단이 대부분 북아프리카 등 유럽 전선에 파병나간 상황이라, 예상되는 일본의 공격에 상당히 취약한 상태였다. 그러나 맥아더가 미국의 급조된 2선급 사단과 준정규군인 호주 민병대를 이끌고 뉴기니 전선에서 악전고투, 일본군의 전력을 야금야금 깎아먹으면서 버텨내고, 산호해 해전에서 미 함대가 극적인 무승부를 이끌어내면서 호주는 일본의 위협에서 한숨 돌리게 되었다.

이후 뉴기니 전선에서, 그리고 미군의 과달카날 상륙 이후 과달카날에서 일본군 지상전력이 급격히 소모되면서, 호주에 대한 일본군의 위협은 완전히 일소되었다. 소규모 일본군 병력이 서호주에 상륙했다는 떡밥이 있긴 한데, 어차피 전황에 손톱만큼도 영향을 주지 않은 관계로(...).

이렇게 보면 호주에서 맥아더를 높이 평가해야 맞겠지만, 막상 미군이 태평양 전선에서 공세로 돌아선 이후로는 맥아더는 호주군의 주 업무를 전략적으로 가치가 떨어져 미군이 지나친 섬들에 대한 토벌전 정도로 한정지었다. 개전 초기, 가장 어려운 전선에서 열악한 여건에도 용감히 싸웠던 호주 사람들은 당연히 격분했다.

  • 3인칭화로 자신을 지칭하는 버릇이 있었다. 부하들 앞에서 뿐만 아니라, 대통령 특사나 장차관들 앞에서도 종종 이런 말투를 썼다고 한다(…). 이는 스스로를 인류 역사에 남을 역사적 위인으로 생각한 맥아더의 자기인식이었겠지만, 처음 접한 사람들은 다들 기겁했다고. 물론 비슷한 사람이 아주 없었던 건 아니다
  • 맥아더는 군생활을 공병 장교로 시작했다. 당시 미군에서는 엘리트 코스가 공병이었다고 한다. 이는 이종찬 장군과 비교되는 점이라는 말이 있다.
  • 이승만이 선물한 향로를 부대에도 가지고 와 전시했는데 적군의 기습으로 급히 비행기로 퇴각하다 한 장교가 향로를 태평양 한가운데에 떨어뜨린것에 분노, 열흘간 온 해군을 소집해 태평양 지대를 뒤진다. 작전명은 '향로 찾기'.모래밭에서 바늘찾기 그것은 좋은 것이다

7 대중매체 등

  • 닐 스티븐슨의 소설 <크립토노미콘>에 보면 강력한 포스를 뿜어내는 동시에 은근 웃기게 나온다.
  • 일본 우익 만화나 가공전기에선 포로로 잡혀 참수당하기도 한다(…)[52]. 꼴에 무사의 자비랍시고 담배 파이프를 물게 해줬다. 감히 이 맥아더 쇼군을 참수하려고 하다니! 참고로 그 만화의 작가는 마루오 스에히로로서, 해당작품의 이름은 "일본인의 혹성". 흔히 우익이라고 잘못 알려져 있지만, 마루오 스에히로 자체는 반전주의자에 일본 제국주의를 혐오하는 인물이다.
  • 일본 가공전기 만화 몽환의 전함 야마토에서는 주적으로 등장. 다만 육군이라 주인공인 쿠루스와 별접점이 없어서 비중은 낮다. 어째서인지 실제보다 젊은 모습으로 나오며 상당히 경박한 모습이다.
  • 일본식 발음으로는 막카-사-(マッカーサー). 일본어로 진적좌(眞赤左)와 발음이 같다. 그래서 재벌 해체와 노조 허용, 토지 개혁 등의 조치로 일본에서는 '진짜 좌익 빨갱이'라는 뜻으로 비꼬기도 했다.
  • 한국에서도 번역가 류한수 등이 '매카서'라고 읽어야 한다고 주장하긴 한다. 그래서인지 몇몇 번역본에선 매카서라고 쓰기도 하는데, 그래서 대체 이 인물은 누구냐 하는 독자들의 불편함을 자아낸 경우도 많다. 하지만 현행 외래어 표기법상 매카서라고 표기하는 게 맞다. 다만 위에도 기술되어 있듯이 관용 존중 차원에서 맥아더라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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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당연히 영화로도 나왔다! 1977년 영화 맥아더에서는 그레고리 펙이 주연을 맡아 열연했다. 그레고리 펙을 캐스팅한 이유는 실제 맥아더와 닮아서라고[53]. 1962년 5월 맥아더가 모교인 웨스트포인트 미 육군사관학교를 방문하여 후배 생도들에게 고별 연설을 하는 장면을 시작과 마지막에 넣고, 그 사이에 2차대전과 6.25 전쟁 시절을 회상 방식으로 보여주는 구성이다.
2차대전 장면은 적절한 고증을 보여 주지만... 한국전쟁 컷에서 패튼 전차가 나온다, 근데 2차대전 때에는 멀쩡하게 셔먼이 나온다. 그리고 F-4도 나온다. 맥아더 미화 때문에 트루먼이나 루즈벨트가 약간 찌질이로 나오지만 의외로 맥아더에 대한 연대기 서술이나 보통은 잘 잊어버리는 일본 군정 시기도 심도 있게 다루고 있다. KBS 방영판에서 맥아더 성우는 유강진.
  • 전설의 망작 오! 인천에도 당연히(?) 나온다. 당연히 그레고리 펙을 캐스팅하려고 했지만 통일교 문제로 시끄러워서 본인이 거부하고 로렌스 올리비에가 캐스팅되었다. 상당히 망작 연기를 보여주고 있다. 변명하자면 이 영화 촬영 전에 그가 사경을 해맬 정도로 힘든 수술을 했다는 점이다. 사실 그런 점에서 나름 싸게 먹혔고 본인도 돈이 궁했다는 게 정설. 그 자신도 이 영화를 흑역사로 생각해서 언급을 안한다.
  • 한국 드라마에서는 대부분 주한미군을 불법으로 섭외해서 나오는 지나가는 역이나 공기의 비중이다. KBS에서 80년대 방영한 세미 다큐드라마 <전쟁 6.25>와 <휴전 6.25> 연작에서는 당시 유명한 외국인 배우 데니스 크리스틴이 열연했다. 이 배우는 80년대 거의 유일한 외국인 전문 연기자였다. 망작인 <죄 없는 병사들>의 주연 및 제작 감독이기도 했고 가장 최근작인 여명의 눈동자에서 장하림의 상관으로 나왔다.
  • 당연히 북한영화에서는 악의 축 그 자체로 묘사된다. 대전 전투를 다룬 북한 영화에서는 남조선군을 선발에 세우고 부상병을 대포밥으로 만들어라라고 킬킬대는 천하의 개쌍놈 기믹으로 나온다. 물론 따까리는 윌리엄 딘 소장, 결국 영화에서 맥아더는 발리고 딘은 찌질하게 손을 들고 투항한다. 외국인 연기자를 구하기 어려운 나라인지라 딘이나 맥아더 모두 북한 배우들이 연기했고 유창한 한국어를 구사한다.
  • 미군은 지금까지 그 어떤 무기에도 맥아더의 이름을 붙이지 않고 있다.[54] 같이 윗사람에게 대든 알레이 버크 제독의 이름이 알레이버크급 이지스구축함에 붙어있는 걸 보면 맥아더가 얼마나 정치가들에게 미움을 받는지 알 수 있다. 다만 일반 시민들의 지지는 높아 맥아더의 이름을 딴 공공건물이나 도로, 거리 이름은 어지간한 대통령보다도 많다. 그 중 하나는 로스앤젤레스의 맥아더 공원. 간헐천으로 유명하고 덕분에 영화 볼케이노에서는 화산 폭발이 일어난다.
  • 해리 터틀도브의 타임라인-191 시리즈에서는 북부의 명장이자 맥클레런을 존경하는 다니엘 맥아더로 나온다. 웃긴 것은 실제의 맥아더는 스톤월 잭슨을 존경했다. 다만 이 작품의 시대는 남과 북이 갈려 있으니 이야기가 다르다. 1차 대전 당시 최연소 사단장으로 출연해서 그때까지 살아 있는 조지 암스트롱 커스터장군과 경쟁자 겸 수제자로 나온다. 둘이 최초로 조우하는 부분은 명장면. 이후 2차 세계대전에는 필요하다면 남부연합을 독가스로 선제공격하는 전략을 수립하고 남부연합 후방지역에 대한 기습상륙을 입안하는데...뒤의 비중은 거의 공기 수준. 다만 등장 인물의 언급으로 2차 대전 내내 리치먼드 북방에서 남부연합의 방어망에 걸려서 고전하는 것으로 나오긴 한다.
  • 대체역사물 스탈린의 편지에서는 소련이 대화상대로 맥아더를 점찍으면서 맥아더의 해임이 취소되고 미국과 소련의 비밀 거래를 통해 중국과 북한 전체에 미국이 핵무기를 사용하면서 한국전쟁이 동북아전쟁으로 확대되고, 한미연합군의 승리로 종전한다. 이로써 맥아더는 미국에서 살아있는 신이나 다름 없는 취급을 받게 된다.
  • 만화 보스의 두얼굴에서는 성기컴플렉스를 가진 FBI 수사관 맥더아로 패러디된다. 일본의 맥아더에 대한 열폭때문인지 온갖 찌질한 짓을 하다가 결국 미쳐서 본국에 소환당했다가 나중에 총맞고 죽는다.
  • Steele에서는 1942년 필리핀에서 탈출할 무렵에 강철의 대통령에 의해서 반역죄를 뒤집어쓰고 숙청당했다. 애초에 강철의 대원수 동무가 미국의 대통령인 이상 대통령을 무시하고 안하무인적인 행동을 하는 맥아더가 멀쩡히 살아있는게 더 이상하지... 실제 역사에서의 맥아더의 행적을 감안하면 위대한 스탈린께서 맥아더를 가만히 냅둘리가 없지..
  • 미일 합작 영화 <EMPEROR>에선 토미 리 존스가 분했다. 외모 면에서는 싱크로율이 아주 높지는 않으나 맥아더의 거들먹거리는 모습이나 오만에 가까운 행동거지를 매우 적절히 표현했다. 여담으로 이 영화는 한국에는 <맥아더: 일본 침몰에 대한 불편한 해석>이란 괴이한 제목으로 개봉했다. 제목만 보면 맥아더가 주인공처럼 보이지만 실제 주인공은 맥아더의 부관 정보장교였던 보너 펠러스(Bonner Fellers) 준장으로, 이 인물은 덴노의 전범 혐의 수사를 맡았던 일본에서의 행적 외에도 북아프리카 전역에서의 행적 또한 논란의 대상이라 후세 전사학자들에 의해 자주 언급되는 인물이다. 영화는 가공의 사랑타령 때문에 역사에 집중하지 못한다는 혹평을 들었지만 맥아더 캐릭터만큼은 좋게 평가받았다.
  • 강해설교자로 유명한 미국의 목사 존 맥아더가 더글라스 맥아더의 먼 친척이다. 독선적인 성격은 비슷하다
  1. 한국어 버전은 1951년으로 되어있었는데 이것은 말 그대로 현역에 있었던 기간에 한정해서 그렇다. 맥아더는 1944년 말에 원수로 진급했고 원수는 정년이 종신복무로 규정되어있어, 비록 은퇴하여 실제 현역임무를 맡지않더라도 군에서 받은 의전예우 그대로 받으면서 지내는게(이 부분에 있어선 4성급 장성으로 전역한 이들도 누리지 못한다고 들음) 가능한 맥락일듯.. 최소한.. 대장으로 예편한 장성들보다 더 포스있고 혜택쩔고 영향력있다고 이해하면 될듯싶다.
  2. 애초에 이 대사가 맥아더 장군의 패러디다.
  3. 일본어에서는 이 발음을 따른 '맛카사'(マッカーサー)라고 부른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이것과 거꾸로 처박혔다는 뜻의 '맛사카사마'(真っ逆さま)를 이용해 말장난을 하기도 했다.
  4. 당시 한국에서도 이 발음을 몰랐을 리는 없지만 스코틀랜드계(MacArthur 성씨 자체가 스코틀랜드에서 유래하였다.) MacArthur를 분리한 상태에서 읽고 그 원형에 맞춰 아더로 표기하게 되었다. 사실 '맥, 아더'하는 식으로 끊어 읽으면 받침 ㄱ에서 {k} 발음이 나겠지만, 뒤에 바로 모음 '아'가 이어지는 바람에 받침 ㄱ이 유성음화되어 {매가더}의 {g} 발음으로 실현된다는 게 좀 에러다. 또한 Arthur의 'th'발음은 과거에는 유성음과 무성음에 관계없이 'ㄷ'으로 옮겼으나 무성 치 마찰음 {θ}가 맞다. 대처(Thatcher)도 비슷하게 잘못 옮겨진 경우로, '새처'가 옳은 표기다. 항목 참고.
  5. 필리핀 원수 정모, 선글라스와 함께 맥아더의 아이콘으로 유명한 콘파이프지만 사실 그는 싸구려 콘파이프를 그다지 애용하지 않았고 실제로는 브뤼에르 나무로 만든 고급 수제품을 애용했다고 한다. 그렇다고 일부러 검소한 이미지로 보일려고 콘파이프를 사용한 건 아니고 바빠서 고급 파이프를 챙기지 못하고 콘파이프를 물고 있을 때 사진을 찍혔는데 하필 이때의 사진이 대단히 유명해져서 콘파이프가 그의 아이콘이 되어 버렸던 것이다. 또 맥아더 자신이 이런 이미지의 가치를 잘 아는 사람이라 그 뒤로 기자들 앞에서 포즈를 취하거나 대중 앞에 나설 때는 항상 콘파이프를 들고 있었다고 한다. 정치인들조차 대부분 이런 식의 이미지 관리에 신경을 쓰지 못하던 시절에 그는 시대를 앞서 이런 이미지 관리의 중요성을 알고 실천했던 사람이었다.
  6. 사실 옥수숫대 파이프(흔히 콘콥이라 부른다.) 같은 경우, 어지간한 파이프 흡연자들 사이에서도 별로 인기 없는 물건이다. 가격이 저렴하기는 하지만 내구성(특히 내열성)이 별로라 오래 쓸 수가 없다. 2015년 한국 기준으로 보더라도 저렴한 것은 3만원대, 어지간한 것은 7~8만원대 정도인 브라이어(브뤼에르) 목재 파이프의 경우 관리만 적당히 해 주면 10년 이상 반영구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데 비해, 콘콥 파이프는 가격은 1~2만 원대지만 잘 써도 1년 쓰기가 어렵다. 즉, 가격은 싸지만 오래 쓸 수 없어서 오히려 비경제적인 것. 따라서, 콘콥 파이프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주로 애용하는 파이프는 따로 있지만 파이프 관리가 힘든 상황에서 막 쓰는 파이프로 사용하거나, 아니면 굳이 돈 주고 파이프를 사지 않고 직접 만들어 사용하는 경우다.(옥수수 농사를 많이 짓는 미국 농촌에서는 직접 농사를 짓거나 이웃집 옥수숫대를 좀 얻어서 햇볕에 말려뒀다가 직접 속을 파내서 파이프로 만드는 것이 어렵지 않다고 한다.) 즉, 맥아더의 아이콘인 콘콥 파이프의 경우 여기저기 전쟁터로 출장(...)다닐 일이 많은 맥아더가 예비용 파이프로 가지고 있던 것을 들고 있다가 사진이 찍혔고, 이후 대중적 이미지 조성을 위해(특히 맥아더를 지지할 가능성이 높은 보수적인 농촌 주민들에게 콘콥 파이프는 몇 번씩 직접 만들어서 써 본 소박하고 익숙한 아이콘이다.) 사용했다고 보는 정도가 가장 적절할 것이다.
  7. 1918년 준장으로 진급
  8. 아버지인 아서 맥아더도 미국에서 유명한 군인이다. 19세에 명예 대령이 되었을 정도니... 재미있는 건 1865년에 퇴역하고 법율공부를 하다 1년도 안 되어 때려치고 다시 군대에 들어갔는데, 나이가 너무 어렸던 터라 다시 소위에서 시작했다. 이후 대위까지 승진했고, 20년간 대위에 있었다. 하지만 부대 내에선 영관급 대우를 해줬다고.
  9. 다만 루스벨트와는 매우 사이가 나빴다. 루머에 의하면 루스벨트가 몸만 성했더라도 결투 신청이라도 보내려 했을 정도라고.
  10. 맥아더의 어린 시절에 인기를 끌었던 소공자의 영향으로 당시 많은 엄마들이 아들내미들을 소공자 주인공 세드릭처럼 꾸미는 게 유행이었다고 한다. 무슨 짓거리야. 근데 내용이나 삽화보면 세드릭이 상당히 여성스러운 패션인지라(...). 프린스 메이커
  11. 출판된 한 맥아더 위인전에선 이 일을 인간으로써의 신의를 지킨 모범적 사례라고 써 놓았다. 한국위인은 표지가 초록, 해외위인은 파란이었는데 어디 위인전인지 추가 바람. 우선 1990년대 초반 발행된 계몽사의 세계위인전집에는 저 내용이 분명히 실려있다.
  12. 이때 부관인 아이젠하워는 "총장이 직접 가시는건 적절하지 않다"고 하였으나 맥아더는 사태가 심각하다면서 무시했다.
  13. 그래도 아이젠하워가 필리핀을 떠났을때 맥아더가 워싱턴에 아이젠하워의 대령 진급을 요청해 주었다고 한다.
  14. 나머지 절반은 니미츠가 지휘. 엄밀히 말하면 사령부의 서열은 니미츠 쪽이 더 높긴 했다. 실질적으로 승전 기여도 역시 맥아더의 뉴기니-필리핀 진공보다는 니미츠의 중부태평양(마샬 군도-마리아나 제도-오키나와) 진공이 더 컸다는 것이 일반적 평가.
  15. 재미 있는 점은 이후 일본군은 각 섬에서 죽어갈때 해안방어를 고집하다가 연전 연패 하였다. 그 유명한 이오지마 전투에서 일본군은 대장인 쿠리바야시의 지휘아래 처음으로 해안방어를 포기하고 후방의 거점방어를 하여 미군에게 큰 피해를 입히게 되었다. 이때문에 이오지마 전투가 미군의 무덤이 되어 유명해진 것이다.
  16. 윌리엄 홀시는 맥아더의 계획에 찬성해서 해군 장성임에도 불구하고 육군인 맥아더와 사이가 굉장히 좋았다고 한다.
  17. 한국과도 전혀 연관이 없지 않다. 일제에게 징용당한 할아버님들이 기억하는 전역이 이곳이다. 당시 일본은 현/군 단위로 한꺼번에 징병해 갔는데, 같이 형 동생하던 동네 청년들이중에서 혼자만 살아남았다는 분들이 종종 계셔서 안타까움을 더 한다. 운 좋게 살아남은 경우도 대부분 미군에게 포로로 잡힌 케이스들이다.
  18. 이때문에 7함대 지휘관인 킨 케이드 제독은 필리핀 상륙전에 화력지원용으로 태평양 함대에서 잠시 빌린 구형 전함들을 끝까지 반납하지 않으려고 하였다. 하지만 카미카제에 당해 반납크리(...)
  19. 보급로가 두절되었다는 사실은 염두에 두어야 한다.
  20. 저 전사자 중에서 한국인들도 있었다.
  21. 이미 필리핀 해 해전을 통해서 공은 니미츠 원수에게 넘어간 상태였다.
  22. 참고로, 제2차 세계대전 말기에 일본에 핵을 투하하고서도 일본이 항복하지 않을 경우에 대비한 몰락 작전이라는 상륙 계획이 있었는데 이 작전에서 더글라스 맥아더가 최고 사령관을 맡는것으로 되어 있었다.(주 전장이 일본 본토이니 해군보다 육군이 맡는것이 당연한 것. 맥아더는 일본과 오래 싸워왔고, 또 성과도 좋았기 때문에 최고 사령관의 자리는 예정된 수순이나 다름없었다.)이 계획은 일단 70만 명 이상의 병력과 100척 이상의 항공모함을 포함하는 규모이며 영국군 역시 지원세력을 보낼 예정이었고 상륙시 수발의 핵폭탄과 독가스를 투하하여 일본의 병력밀집지역을 초토화시키는 데서 시작하는 것이 주요 골자다. 이게 실행됐으면 그야말로 아마겟돈, 아포칼립스...다행스럽게도(?) 일본이 핵폭탄 두 발에 항복한 덕에 실행되진 않았다.
  23. 니미츠와 동시에 원수 계급을 달았는데, 니미츠와 직접 만났을 때 니미츠만 원수 계급장을 달고 있는 걸 보고(본토로부터 계급장이 도착하기 전이라 둘 다 대장 계급장을 달고 있었는데, 니미츠는 태평양함대 사령부의 제독들이 자신들의 여분 계급장의 별을 하나씩 떼서 원수 계급장을 만들어 선물해 줘서 맥아더보다 먼저 달고 나타났다.) 빡쳐서 휘하 장군들의 계급장에서 별 하나씩 차출해(...) 자기도 원수 계급장을 만들어 달았다는 일화가 있다고 하지만 사실일 가능성은 낮다. "사실일 가능성이 낮다"가 아니라 사실이 아니다. 왜냐면 4성장군까지는 별이 한 개씩 늘어나는 형태이나 원수인 5성장군은 1~4성 장군들이 다는 계급장 크기보다 훨씬 작은, 별 다섯개를 정오각형 형태로 만든 계급장을 부착하기 때문이다. 계급장의 별이 하나씩 따로 떨어지는 물건도 아니고 이 부분도 잘못된 것이 한국군의 경우 장성 계급장이 모두 하나로 합쳐져 있지만 미군은 각 별모양은 각개 계급장을 따로 하나씩 부착한다. 한국군도 과거에는 미군처럼 각개로 부착하는 형식이었으나 이후 하나로 합친 형태로 바뀌었다. 당시 미군 장성들은 장성 진급시 바로 그 자리에서 솜씨 좋은 병사가 은화 따위를 두들겨서 계급장을 만들곤 했다. 장성 계급장 같은 건 만들기 쉬운 물건이라 손재주만 조금 있으면 초보자도 만들 수 있다.
  24. 맥아더의 키가 182cm이다. 쇼와 덴노는 키가 아주 작다.
  25. 덴노가의 예법에 따르면, 아랫사람이 덴노에게 전할 말이 있으면 시종에게 말한 다음, 그 시종이 시종장에게 전달해서 최종적으로 시종장이 덴노에게 말한다(반대의 경우엔 역순).
  26. 맥아더는 1948년1952년 대통령 출마를 고려했다. 특히 해임된 직후인 1952년에는 정치가로 제대로 전업할 적기이기도 했다. 다만 (후에 아이젠하워가 그랬듯) 추대를 받아 나서고 싶어했기에자기가 이 사람도 아니고... 선거운동에 나서지 않았고, 결국 일부의 의미없는 득표만을 남기고 고사되었다. 더구나 1948년에는 그가 일본에서 현직 연합군 사령관을 하고 있어서...여하간 트루먼이 그를 우려해서 재선도 하지 않고 아이젠하워에게 후보직을 넘기려고 했을 정도.#
  27. 맥아더가 트루먼으로부터 해임 통보를 받자 일본 전역이 충격을 받았고, 덴노가 위로차 맥아더를 방문했을 정도이니...
  28. 존 다우어 <패배를 껴안고> 최은석 옮김, 민음사 펴냄
  29. 출처: 1973년 12월 3일 타임지 기사 중
  30. 단, 맥아더가 멍청해서 오판했다고는 볼 수가 없다. 전력의 차이를 생각하면 당시 군사학에서는 당연한 말이었다. 다른 장군들도 싸구려 무기당시 중국의 기술상 면허 생산이든 뭐든 자체적으로 생산한 것들은 신뢰도도 의문이었다.와 형편없는 보급 체계를 가진 중공군이 제대로 전쟁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서 별다른 대비를 하지 않고 당면한 위협을 무시한 체 이미 이긴 것 같은 기분을 가졌던 것이다.
  31. 사실 중국 측에서도 공산당중앙당사 등에서 나름 당시 군사학을 알던 정규 엘리트들은 상당히 회의적으로 생각하고 있어서 미군에 대항할 작전을 위해 야전사령관들이 요구하는 정예 병력들을 강제로 어린애와 같은 총알받이들로 때우게 하기도 했다.
  32. 참전 병력은 미지수이지만 최소한 주둔 병력은 보급 체계가 좋지 않아 일정 수를 넘기 힘들었다.
  33. 심지어는 지평리전투에서 패배할 경우 연합군은 한국에서의 철수도 고려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대한민국 멸망.
  34. 정확하게 말하자면 압록강의 절반 부분만 비행영역이기 때문에 그걸 FM대로 지키려면 비스듬한 상태에서 비행해야한다. 그래서 대부분의 조종사들은 최대한 강까지 간 후 급커브를 돌리게 된다. 이런 경우 당연히 중국영공으로 월경하는 것 만주에 대한 미군의 세균공격 의혹이 이런 비행에서 초래되었다고 한다.
  35. Stephen Van Evera의 MIT American Foreign Policy and Method 강의 중에서
  36. 맥아더는 트루먼과의 웨이크 섬 회담에서 "중공군의 참전가능성은 문제가 되지 않으며, 참전하더라도 역사상 최대의 참사가 일어날 것"이라고 자신한 바 있었다.
  37. Stephen Ambrose, The Cold War: A Military History
  38. Gary Hess, Presidential Decisions for War: Korea, Vietnam, the Persian Gulf, and Iraq
  39. 매카시즘 문서에 자세히 나와 있지만, 사실 펜타곤의 베트남 정책도 베트남 자체에 대하여 중대한 이권이 걸려 있고 현지 상황을 파악하고 있던게 아니라 공산화 된 중국에 대한 막연한 공포와 견제 심리만으로 무조건 도미노 이론과 연관 된 대중포위망 형성이란 피상적인 대국 전략만 생각하고 설립 된 것이었다. 아시아 역사에 대해서 조금만 아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아무리 표면적으로는 같은 공산권이라 해도 베트남이 중국을 덜컥 신뢰하고 그 세력권에 자발적으로 들어간다는게 얼마나 허황된 소리인지 대반에 알 수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매카시즘 광풍이 한차례 불고 지나간 미국의 정계와 지식인 사회는 그만큼의 초보적인 현지 사정도 모르거나, 아는 관계자들이 조언을 해도 묵살해버렸다.
  40. Edwin T. Layton, Rear Admiral, USN (Ret.) interviewed by E. B. Poter, U.S. Naval Institude, DVD, March 19, 1970
  41. 이전 문서에는 과대망상증이라고 욕했다지만 연기하듯이 과장이 너무 심하다는 거였지 과대망상증이라고 한 건 아니다. 아이젠하워는 맥아더에 대해서 "나는 7년동안 그의 아래에서 연극적 과장을 배웠소(I studied dramatics under for seven years!"라고 말했다.
  42. 예전에는 남태평양 전역 사령관일 때 최전방 돌격 했던 것 같은 늬앙스의 글이 있었는데, 근거하는 자료를 찾지 못해 실제 있었던 1차대전의 꼬꼬마 시절 일화로 대체
  43. 트루먼쪽이 좀 더 만만했던 이유는 태평양 전쟁 당시에는 마셜이나 아놀드같이 그나마 자기와 짬이 그닥 차이 안나는 이들이 상관이었고 계급도 같았지만 한국전쟁 당시에는 자기의 부하의 부하였던 브래들리가 합참의장이었으며 원수 계급장 역시 맥아더가 먼저 달았다는 점, 즉, 연공서열 차이가 더 심했던 것을 들 수 있다. 실제로 한국전쟁 당시 맥아더는 자기가 직접 워싱턴으로 날아간 게 아니라 미육군 수뇌부를 한국으로 불러오기도 했다.
  44. 이 말을 했던 사람이 후일 맥아더의 참모장을 맡게되는 리처드 서덜랜드였다고 한다.
  45. 이전 문서에는 2차대전 당시 일본과 싸우던 당시의 일화라고 되어 있었지만 워커 장군은 2차대전 당시 유럽 전선에서 싸웠다. 위의 일화는 6.25 전쟁 당시의 일화다.
  46. 체스터 니미츠 원수의 아들인 체스터 니미츠 주니어는 일찍이 아버지와 같은 전장에서 잠수함 함장으로 활약했으며, 1957년에 해군 소장으로 예편한 뒤 Texas Instruments에 입사하였다. 미 해군사관학교 엘머 B. 포터 교수의 저술로 1977년에 나온 니미츠 전기에 의하면, 니미츠 주니어는 부친의 후광과 그 자신이 전쟁에서 세운 공적으로써 충분히 4성 제독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시대가 지나면서 변질된(?) 해군장교에 대한 가치관의 혼란이 생겨 결국 전역을 결심하게 되었다고 한다. 물론 니미츠 원수는 아들이 해군을 떠나는 것을 달가워하지는 않았으나, 따뜻한 지지를 보냈다고 한다.
  47. 여기서도 맥아더는 잠시 눈을 붙였다고 하고 트루먼 회고록에서는 쿨쿨 잤다고 깠다.
  48. 트루먼이 말년에 쓴 회고록에서 나오는 이야기로 이 회고록은 맥아더를 사정없이 까는 걸로 꽤 유명하다. 거짓말은 아니겠지만 트루먼이 맥아더를 철저하게 미워하게 된 이후의 증언이라 좀 가려 들어야 할 필요가 있다. 70대의 원수가 19살 소위처럼 군다. 운운하는 이야기도 여기서 나온다.
  49. 한국전쟁이 발발하여 일본에 주둔한 미군이 한국으로 가면 일본군이 반란을 하지 않겠냐는 미국 기자의 질문에 껄껄 웃으면서 대답했다고 한다. 과연 실제로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오히려 종전 후 맥아더가 본국으로 돌아갈때 수많은 일본인들이 울면서 환송식을 했다고 한다. ㅎㄷㄷ 미국의 재조지은
  50. 이는 영화 인천상륙작전(영화)에서 나왔다.
  51. 하지만 이와 별개로 다른 미군 장교들은 한국군의 군기와 전투력을 매우 회의적으로 보았다. 문제는 투입된 스미스 대대의 군기와 전투력도 개판 오분 전이었다는 사실.
  52. 맥아더가 태평양 전쟁 이후 '일본이 전쟁을 일으킨 목적은 침략이 아니라 자신들의 안전보장이었다'라고 주장하거나 천왕을 전범재판 대상에서 제외시키는 등 가장 일본을 감싸고 도는데 열성적인 인물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그야말로 뒤통수를 후려갈기는 짓이다(…).
  53. 하지만 연기자체는 별로였는지 그레고리 팩은 이 영화로 골든 라즈베리상에서 남우주연상을 탔다는 루머까지 돌고 있다. 하지만 실제 골든 라즈베리는 1980년부터 시상을 시작했기 때문에 불가능한 이야기. 아래의 오 인천의 로렌스 올리비에와 혼동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54. 육군 원수 아이젠하워의 이름은 니미츠급 항공모함에 붙어있다. 위대한 대통령이기도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