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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보건복지부 장관 | ||||
43대 김근태 | ← | 44대 유시민 | → | 45대 변재진 |
이름 | 유시민(柳[1]時敏) |
출생일 | 1959년 7월 28일 |
출생지 | 대한민국 경상북도 월성군[2] 내남면[3] |
본관 | 풍산 |
종교 | 무종교 |
학력 | 수성초등학교 대륜중학교 심인고등학교 서울대학교 경제학과 마인츠대학교 대학원 경제학 석사 |
정당 | 정의당(평당원)[4] |
배우자 | 한경혜 |
가족 | 4남 2녀 중 4남 [5] |
자녀 | 1남 1녀[6] |
혈액형 | A형 |
경력 | 서울대학교 총학생회 대의원회 의장 개혁국민정당 대표집행위원 제44대 보건복지부 장관 (참여정부) 국민참여당 참여정책연구원장 통합진보당 공동상임대표 재선 국회의원(16대, 17대)[7] |
목차
1 개요
"슬픔도 노여움도 없이 살아가는 자는 조국을 사랑하고 있지 않다."
ㅡ 유시민의 항소이유서 중에서.[8]
대한민국의 작가이자 전직 정치인.
경상북도 월성군(현 경주시) 출생. 대한민국의 前 정치인으로 16, 17대 국회의원과 보건복지부 장관을 역임했으며, 정계에서 물러나 현재는 본업이었던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본인을 '지식소매상'으로 지칭하기도 한다. 서애 류성룡의 13대 직계손이다. 탤런트 류시원과 같은 항렬이다.
2 생애
2.1 유년 시절
아버지 유태우와 어머니 서동필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교사였으며, 어머니는 요즘말로 슈퍼마켓 같은 구멍가게를 했다고 한다. 아주 가난하진 않고 굶을 정도는 아닌 그야말로 소시민 집안이었다. 그래서 본인을 쁘띠 부르주아 리버럴(자유주의적 소시민계급) 태생이라고 말한다. 교사였던 아버지는 어릴 적부터 자식들에게 각종 어린이 신문을 구독하게 하였고 식사 시간에는 자주 역사 이야기를 들려 주거나 한 주제를 두고 자식들과 진지하게 토론했다고 한다.
2.2 학창 시절
학력으로는 수성초등학교, 대륜중학교,심인고등학교[9]를 졸업했다. 중학교 시절에는 평범한 학생이었으나 고교 시절부터 성적이 아주 우수해서 이미 갈 대학(서울대학교)은 정해졌고, 과만 자기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고 한다.[10] 그러나 수학에는 재능이 없어서, 수학책 세 권을 통째로 암기했다고 술회했다. 진로를 선택하는 과정에서 그의 아버지는 영어영문학과에 진학해 영어를 배워 서양으로 가서 서양 철학을 배우고 다시 귀국해 동양 철학을 배워 동서양을 잇는 철학가가 되라고 조언했다. 하지만 유시민은 부유하지 못한 집안을 일으켜 보고자 법학과를 가서 판사가 되기로 결심하여 서울대학교 사회계열에 진학한다. 참고로 당시의 서울대는 신입생 선발시 과별 모집이 아니라 계열별 광역모집제였고 2학년 올라갈 무렵에 학과를 정하도록 돼있었다. 사회계열 입학생들은 2학년 올라갈 때 법학과, 사회대 학과들, 경영학과 중에서 한 학과로 전공진입을 하는 구조였다.
2.3 대학 입학 후
2.3.1 서울대 재학
입학 후 농촌법학회[11]라는 서클에서 가입하게 되는데 신입생 환영회에서 "역사는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변하는 것이다" 라고 주장해 선배들을 당혹시켰다.[12] 이후에 유시민은 2009년에 쓴 '청춘의 독서'라는 책을 통해서 당시만 해도 랑케의 '젊은이를 위한 세계사'를 읽고서는 랑케를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바람에 나왔던 무지의 소치였다고 회고했다.
그때부터 그의 토론 실력은 발군이었다고 동문들은 회자했다. 그렇게 학생운동을 시작한 후 선배들이 법정에 나와 유신 헌법으로 처벌 받는 것을 목격한 후 법관의 꿈을 접는다. 유신 정권 당시 중앙정보부와 검찰은 아무 죄 없는 사람들을 잡아다가 사형, 무기징역, 징역 몇십 년 등을 예사로 때리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모든 법조인이 그랬던 건 아니고, 故 조영래 변호사나 故 노무현 대통령, 강금실, 김형태, 김선수 변호사처럼 시민 운동에 평생을 바치고 올바른 판결을 내리려 노력했던 올바른 법조인들도 많다.
그러나 공부 못해서 법대 못 갔다는 말은 듣기 싫어서 그 당시 서울대에서 법대 못지 않은 인기 학과였고 가장 뛰어난 인재들만 간다는 경제학과로 전공진입한다. 이후 공업단지의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야학에 활발히 참여하는데 이때 그를 야학으로 이끌어 준 사람이 바로 심재철.
이름이 비슷하여 친척간이냐고 오해받을 수 있는[13] 유승민 새누리당 의원과 아무런 혈연관계가 없지만 (성씨의 한자부터 다르다) 대신 대학교 선후배 사이다. 같은 서울대학교 경제학과 출신. 썰전 출연 당시 유시민이 "유승민 의원은 21세기 합리적 보수 성향이다"라고 하자, 전원책이 유시민에게 "유 장관이랑 유승민 의원이랑 같은 과 아닙니까?"고 했고, 유시민이 어이없어하며 "무슨 소리세요? 우리는 전혀 (정치적으로) 같은 과 아니에요."라고 반발했다가, "물론 대학은 같은 '과' 나왔는데.. (정치 성향은) 달라요."라고 하고 넘어갔다. 그러나 유시민이 정치계에 있을 때 두 사람은 정치적 입장으로 대립하던 사이였다. 100분 토론에서 만났었던 두 사람
2.3.2 서울역 회군
3학년 때 서울대 총학생회 대의원회 의장이 된다. 이때 서울대 총학생회 회장은 심재철이었다.[14] 전두환이 이끄는 신군부 세력이 12.12 군사반란을 일으킨 후 1980년 봄이 되면서 민주화 운동은 더욱 가속화 되고 5월 15일 서울역에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난다. 이날 서울역 광장에서 수만 명의 학생들이 계엄 해제 및 신군부 퇴진을 요구했다.
밤 8시까지 계속된 시위에서 시위 지도부는 계속 시위를 할 것인지 해산할 것인지를 두고 격렬한 토론을 벌였고 심재철은 철수를, 이해찬과 유시민은 철수 반대를 주장했다. 결국 심재철의 의견에 따라 운집한 학생 시위대는 해산하게 되는데, 이것을 '서울역 회군'이라고 한다. 훗날 이 두 사람은 각각 더불어민주당 & 정의당으로 가게 됐고 심재철 학생회장은 새누리당으로 가게 된다.
이후에도 교내 학생 운동에 활발히 참여하다가 군사 정권에 의해 투옥되었다. 당시 민주화 운동가들을 감옥에 보내는 대신, 최전방으로 입대시켜 고생을 좀 하게 하는 이른바 녹화사업에 의해 1980년 강제 징집되어 화천군에서 복무한 후 육군 병장으로 만기전역했다. 입대해서도 군사 정권에 의해 관심사병으로 지정되어 몇 번이고 전출과 전입을 반복하고 사상 검증이랍시고 끌고 가서 고초를 겪었다고 한다.
2.3.3 서울대 프락치 사건과 항소 이유서
서울대 프락치 사건 피의자 당시의 모습 |
"그러나 본 피고인 자신도 조사를 위한 감금에 명백히 찬동했으며, 또 잠시나마 직접 조사에 임한 적도 있기 때문에 법률을 어긴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며, 그에 따른 책임이라면 흔쾌히 감수할 것입니다."
ㅡ 유시민의 항소이유서 중에서. 자신이 민간인 감금과 조사에 가담했으며 폭행을 묵인했다고 시인하는 부분이다.
유시민의 흑역사이면서, 동시에 그의 필력을 통해 일약 유명세에 오르게 만든 사건. 일명 서울대 프락치 사건 (학생운동권의 민간인 고문 사건)으로 그 유명한 항소이유서를 써서 화제가 되었다. '서울대 프락치 사건'이 역사적으로 굳어진 사건명이지만, 프락치로 몰린 전기동 씨가 언론중재위원회의 중재요청 등으로 일부 언론에서는 '서울대 민간인 감금폭행 고문조작' 사건으로 변경해 부르기도 한다.
사건은 그가 복학한 후인 1984년 9월 17일 있었던 서울대 복학생협의회 창립총회(회장 경제 4학년 유시민)부터 시작된다. 총회 이후 이어진 술자리에서 한 학생이 자신이 '78학번 공법학과 출신으로 군에 강제징집되어 복학한 임신현'이라고 소개했는데, 당시 워낙 군에서 프락치를 많이 파견할 때라(유시민도 군에서 프락치 권유 받은 적이 있다. 물론 말로 권유 하는 게 아니라 코렁탕과 함께) 학생들이 수상히 여겨 조사한 결과 "나는 가짜 학생이다. 복협이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알아보러 왔다."라는 자백을 얻어 낸 것이다. 이때 이과정에서 총 4명이 프락치로 몰렸고 폭행이 있었다.
단순한 폭행이 아니라 안기부 스타일의 고문이 행해졌다. 고문방식은 구타와 함께 입에 재갈을 물리고 코에 주전자 물을 들이 부었다고 한다.폭행하던 측이 평소 기관에 끌려갈 때마다 당하던 고문을 그대로 써먹은 것 같은데 시대의 아픔이라고 치부하기에는 민간인들에게는 그야말로 날벼락이였다. 손현구씨의 경우, 당시 서울대 학생들에게 자신이 프락치였음을 고백해 의혹이 일기도 했다. 하지만 다른 피해자들은 자신들이 '가짜대학생' 노릇을 한 점은 인정하면서도 프락치는 아니었다고 말했다. 그중 하나가 전기동 씨로 엠뷸에 실려서 관악병원 응급실로 갈 정도로 중상이였다. 다시말해 독재정권에 항거하시는 분들이 독재정권과 똑같은 짓을 한것이다. 설렁탕 살돈이 부족했나?
이 사건이 서울시 경찰에 의해 '학생들이 임군을 감금, 기관원 자백케 하고 철야심문하며 구타했다."라고 발표된 것이다. 재판결과 유시민 등 3인은 징역 1년 6월을 받았다. 이후 2006년 2월 당시에 서울대 프락치 사건을 수사했던 관악서 수사과장은 엠뷸런스를 부르고 수습한 사람이 유시민이었으며, 피해자 중에는 유시민 얼굴도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이 있었고, 상부에서 유시민으로 엮으라고 지시했다고 밝혔다. # 여기서 전동차 사고 사진 오른쪽에 나와 있는 기사를 보자. [15]
항소이유서는 원래는 변호사가 쓰지만 당시 사건을 담당하던 이돈명 변호사가 피고인 유시민에게 작성을 권유하여 쓰게 된 것이라고 한다. 황호택 기자가 그 항소이유서를 작은 박스 기사로 신문에다가 기재했는데, 그것으로 인해 독자들의 격려전화가 많이 왔었다고 한다. 우여곡절 끝에 대학교는 1992년에 졸업하였고, 이후 독일로 건너가 마인츠 대학교 대학원에서 경제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16][17]
한참후의 일이지만 유시민이 보건복지부 장관에 임명된다고 하자 전기동 씨가 자신을 프락치로 몰았던 사람이 장관이 되면 안 된다며 1인 시위를 하여 보수언론과 한나라당에서 이 사건을 대서특필하며 매우 좋아하였다. 이에 한나라당에서는 전기동 씨를 유시민 인사청문회 증인으로 신청하였는데 거부당하자 대신 기자실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때 한나라당 의원들이 유시민에게 폭행당한 사실을 증언하라고 하자, 전기동 씨는 유시민은 폭행에 가담하지 않았다고 증언을 했다. 그럼 누가 폭행했냐고 묻자 현직 한나라당 의원이자 '서울역 회군' 당시 서울대 총학생회장인 심재철 의원이 폭행에 가담했다고 증언했고, 이에 당황한 한나라당 이성구 의원이 즉시 기자회견을 중단시키고 전기동 씨를 돌려 보내며 이사건은 어영부영 끝나 버렸다.
당시 전기동씨의 주장은 자신은 (가짜 서울대생이였지) 프락치가 아님에도 여러사람이 자신에게 폭행을 가했고, 유시민은 폭행이 일어날 때 마다 자리를 피했다가, 끝나고 나타나는등 교묘하게 뒤에서 지시하였다라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에 나타나 자신을 보고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폭행 가담자들에게 자신은 돌려 보내라지시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볼때 폭행을 뒤에서 조종한 자가 유시민이 확실하다는 주장이다. 다만 직접 폭행을 가한 사람은 심재철한나라당 의원이라고... 이때문에 보수언론의 관심이 급속히 냉각되어 이후 전기동씨의 소식을 들을 수 없었다.
결국 유시민의 주장과 전기동의 주장은 서로 일맥상통하며 서로 대립되는 부분이 없다. 유시민도 항소이유서를 통해 자신이 무고한 민간인에 대한 감금과 조사에 가담하였고, 폭력행위를 알면서도 방치했다고 시인했다.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1. 복학생 협의회에서 전기동씨등 가짜 대학생 4명을 적발하였다.
2. 그리고 실제로 손현구씨 등이 프락치로 밝혀졌다.
3. 이과정에서 폭행과 고문이 수반되었고, 유시민은 직접 린치를 가하지 않았을뿐 뒤에서 조정하였다.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75942
또한 17대 총선의 홍보책자에서 이 사건을 계기로 '민주화 유공자'가 되었다고 허위사실을 유포하다가 검찰에 기소되었다. 판결 자체는 무죄가 났으나 이는 '허위사실을 기재하였지만 본인은 허위라고 생각을 안했으므로' 라는 이유로 무죄가 뜬 것이다. 참고로 이 허위사실 기재로 인해 선관위로부터 경고를 받았다.
분명 민주화를 위해 투신하던 사람들이 옳은 가치를 위해 투쟁한 것은 분명하고 항소이유서 자체는 의심할 여지가 없는 명문이지만 그렇다는 이유만으로 민간인에 대한 납치, 감금, 폭행이 옳다고 생각하거나 어쩔 수 없는 일이였다고 넘기는 것은 그렇게 저항하던 불의 그 자체로의 한발자국일 수도 있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도 항소이유서가 나온 경위나 시대상황을 감안해서 글을 읽되 잘못한 점은 분명하게 짚고 넘어가는 비판적인 독서 자세를 견지하는것이 바람직 할 것이다.
다시 유시민의 재학시절로 돌아가서, 당시 선배가 경영하는 작은 출판사에서 일하기도 하고, 졸업 후에는 그와 친한 방송국 PD의 배려로 드라마 각본가로도 활동했는데, 앞서 서술했던 학생 운동 때문에 수배령이 내려진 상태라 위장을 하며 '유지수'라는 가명을 쓰기도 했다.[18] 썰전에서 유지수 시절을 흙역사라고 말한 적 있다.
이후 몇 년간 언론인[19] 및 성공회대학교 겸임교수를 거치며 정계에 진출하기 시작했다.
2.4 정계 활동
2.4.1 입문
정치 활동 시작은 1988년 13대 국회의원 선거에 당선된 이해찬 당시 평화민주당 의원의 의원실 자원봉사자. 이때는 공식 보좌관이 아니라 보좌관 급여를 나눠 썼다고 한다.[20]
이때 이후로는 작가등의 길을 걷다가 2002년 절필을 선언하고 전업 정치인으로 전향, 정계에 진출하며 개혁국민정당을 창당했고[21] 이듬해 보궐선거에서 고양 덕양 갑에 출마해서 당선되어 정계 활동을 시작하게 됐다. 그 이후 개혁국민정당을 탈당해 열린우리당의 창당에 참여했고,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재선에 성공하였다. 정치적 성향은 진보로 분류되고 있으며 주 지지층은 20~40대였다. 정통 운동권치고도 야당 당적을 굉장히 많이 옮긴 편에 속한다.
2.4.2 16대 국회의원
16대 보궐로 당선되어 여의도에 입성했을 때부터 전설적인 빽바지 사건으로 어그로를 잔뜩 끈 덕에 정치생활 내내 싸가지 없는 좌파의 상징이었다.[22] 참여정부 시절 친일 재산 환수같은 친일청산을 내세우다가 이에 맹렬히 반대하는 보수세력에 의해 열린우리당의 몇몇 인물들의 친족들의 친일 전력이 나오면서[23] 열린우리당이 크게 당혹해했을 때 유시민 역시 피해자에 해당했다. 유시민의 부친과 백부가 친일파였던 의혹이 제기된 것이다. 이에 유시민은 이에 대해 반박하면서 나, 아버지 그리고 국가정체성이란 글을 올려 친일파 논란에 대한 소회를 밝혔다.
2.4.3 이후 선거
이후 선거에서는 줄줄이 낙선했다.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선 대구 수성 을에 출마하여 친이진영의 주호영 의원과 맞붙었고, 이어진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 경기도지사 야권단일후보로 나서서 김문수에게 석패했고,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 비례대표 12번으로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여담으로 꽤나 자유로운 영혼을 지닌 듯하다. 처음으로 국회에 입성하던 시절에 정장이 아닌 캐주얼 차림과 흰색 하의(일명 빽바지)를 입고 등장하여 논란을 일으킨 적이 있었다.긴 말이 필요없다. 직접 보자. 출처는 딴지일보 물뚝심송이 쓴 기사.[24][25] 또한 프로야구경기나 학교 운동회 등 국가 업무와 관련되지 않는 곳에서 하는 국기에 대한 경례는 파시즘적이라며 반대의사를 표명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통진당 시절에는 당권파가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지 않자 유시민은 우리 당은 국가와 국민을 위해서 일하는 사람들인데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지 않는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고 주장했다. 공과 사를 구분하여 했던 발언인 것.
2.4.4 장관으로서 업무수행
참여정부에서 2006년 2월 10일부터 2007년 5월25일까지 1년 3개월 가량 재임했던 참여정부 시절 보건복지부 장관 역임 이력이 가장 상징적이다. 현직 정치인이나 은퇴한 정치인을 칭할 때는 그 전에 맡았던 가장 높은 직책을 불러주는 것이 관례라는 점에서 현재도 유시민 前 장관이라고 꽤 부르는 편이다. 이 당시 정책을 많이 펼쳤으나 그만큼 욕을 바가지로 얻어먹기도 했다. 당시 주요 정책으로는 의료급여제도와 말이 많았던 국민연금 등이 있었다. 장관 재임 시절 기초노령연금을 신설할 것을 제안해서, 당시 한나라당의 극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통과되도록 강력히 추진했다. 보통 연세가 많으신 분들은 유 작가를 버릇없다고 싫어하는 경우가 많은데[26][27] 유 작가 덕에 좀 더 많은 연금을 받게 된 것이 아이러니. 또한 국민연금 개혁을 실행하기 위해 국회에서 직접 발로 뛸 정도로 열정적으로 추진했으나 당시 한나라당의 극심한 반대로 보험료율을 15.9%로 인상하는 대신 소득대체율을 60%에서 2028년까지 40%로 점진적으로 인하시키는 것으로 타협했다.
특히나 유시민은 장관 임명과정 자체도 매우 드라마틱했다. 유시민을 입각시키기로 결정하기 직전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최고위원은 당시 정계의 화두 중 하나였던 상시 청문회법을 확대하여, 국무총리가 아닌 국무위원의 임명에도 인사청문회를 의무화하는 강력한 법안을 발의시켰고 통과시켰으며, 노무현 대통령이 열린우리당의 반대에도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고 통과시켜서,[28] 개정된 인사청문회법의 하필이면 첫 적용대상으로 빽바지 사건 등으로 찍힐 대로 찍힌 유시민이 보건복지부 장관으로 내정된 것이다.
그래서 인사청문회라는 난관을 뚫어야 하는 유시민이 맞은 화두는 한나라당 내부의 거센 유시민 안티는 물론 당시 주요 정책 화두였던 의료급여제도와 말이 많았던 국민연금 등이 있었다. 이를 위해 유시민은 직접 한나라당 지도부를 방문하여 박근혜 최고위원을 비롯한 여러 한나라당 의원들을 만나 설득하면서 무려 6주에 걸친 청문회와 적십자비 한 번 안 내서 절대 부적격 장관취급당했다는 해프닝을 남기고 결국 인사청문회 보고서가 채택되어 보건복지부 장관에 임명되었다. 이 과정에서 한나라당 위원들을 설득하는 장면은 YTN 돌발영상 레전드로 남아있기도 하다. 박근혜 최고위원과의 면담.
장관 재임시에 연금제도를 중점적으로 손보았는데 이는 그가 기존의 연금제도가 부도덕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국민연금이 도입되던 1988년대와 그 전후의 노년 세대에 대한 대책은 빠져있어서 노인세대에 대한 책임을 가정에게 떠넘겼으며 또한 보험요률이 3%, 인상한 뒤에도 9% 크게 높지 않은데 비해 소득대체율은 60%로 높은 편이라 그 부담을 후세대에게 떠넘기는 것이 되기 때문에 부도덕하다는 게 그의 주장이었다.
실제로 한국에서 기초노령연금 관련 논의를 정부 내에서 최초로 제안한 사람은 유시민이고 이후로 논의를 거쳐 강기정 의원이 대표 발의하였으며 한나라당[29] 의원들이 전원 퇴장한 가운데에 통과가 되었다. 소득 수준에 상관없이 기초노령연금 20만원을 60% 이상의 노인들이 지급받을 수 있는 방안을 만든 유시민은 어르신들에게 엄청난 비난을 받는 반면 전원이 퇴장하면서까지 반대한 새누리당은 노인분들께 큰 지지를 받는 데서 아이러니를 느끼는 사람들이 많다.
재임 중에 연금의 소득대체율을 기존안보다 30% 낮추었고 이에 대해서 엄청난 비난을 받았고 지금도 받고 있다. 다만 유시민은 인구구조가 노년 세대보다 청년 세대가 더 줄어들고 있는 상황에서 기존 소득대체율을 유지하자면 미래세대에 주어지는 부담이 너무 과중하다는 점과 만약 소득대체율을 더 높이고 싶다면 세금을 더 높히는 것이 불가피 한데 국민정서상 세금을 더 부과하면서 연금 지급액을 높이는 것은 너무 저항이 클 것이라고 생각해서 소득대체율을 낮추고 미래세대의 부담을 덜어주는 쪽으로 결정을 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여담이지만 썰전에 같이 출연 중인 전원책 변호사의 평가로는 "장관으로서 일을 매우 열심히, 잘한 사람"이라는 평을 했는데, 단순한 립서비스가 아니고 실제로 좌우를 막론하고 유시민 장관시절 업무 추진 및 실천 능력에 대해선 평가가 높은 편이다.
유시민의 업무수행 내용이나 장관 퇴임 후 본인의 발언을 통해서 유추해 보면 복지 확장을 위해서 노력하지만 국민 여론을 거슬러가면서 세수나 예사는 확장하지는 않는다.는 생각을 가지고 보건복지부장관 업무를 수행한 듯 하다. 위에서 이미 언급한 국민연금 문제가 생겨났을 때도 처음에는 유시민도 세율을 높혀서 소득대체율을 60% 정도로 유지할려고 하였으나 한나라당[30]의 격렬한 저항과 세금인상에 따른 국민여론의 저항을 뚫지 못하고, 혹은 뚫지 않고 세율을 덜 높히는 대신 소득대체율을 크게 낮추었다.
이외에도 최근 문제가 되고 있는 국공립유치원 문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그가 보건복지부 장관 재직 당시 다른 국무의원들에게 건의했었고 노유진의 정치카페에서 재차 이야기한 바에 따르면 국민들이 유아보육에 추가로 세금을 납부하는 데 합의하지 못한다면 애써 국공립유치원을 늘리는 것은 힘들다는 입장이다. 즉 기성정당 들이 주장하는 보육료 인하와 국공립확장, 그리고 보육교사 처우 개선 문제는 병립하기 힘들다는 것이 그의 입장이다. 만약 국공립유치원을 늘리고 보육교사를 공무원으로 전환한다면 마땅히 더 많은 예산이 필요하다. 이 예산을 부유층에서만 끌어올 수는 없는 노릇이고 소득에 상관 없이 전국민이 더 많은 세금을 부담해야한다. 만약 세금을 높히지 못하고 국공립유치원만 늘리고 보육 공무원을 늘린다면 너무 재정압박이 심해진다. 국민여론이 세금인상에 호의적인지 굉장히 회의적임으로 기존의 국공립유치원은 저소득층과 장애아동, 편부모가족 등 취약계층을 위한 복지시설로 재편하고 일반 가정에게는 유동적으로 예산조정이 가능한 육아 바우처를 지급해 민간 보육원 이용요금을 보조하자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2.4.5 정당 변천사
보건복지부 장관 시절 | 노무현 사망 당시의 모습 |
개혁국민정당 - 열린우리당 - 대통합민주신당 - 무소속 - 국민참여당 - 통합진보당 - 무소속 - 정의당
정당은 그에게 있어서 동고동락을 했던 존재였고 2000년대 요동쳤던 진보계열 정당 변천사의 산 증인이라고도 할 수 있다. 흔히 철새의 대명사로 알려진 이인제는 정치 성향에 크게 구애받지 않고 여러 정당을 상황에 따라 옮겨 다닌 반면, 유시민은 자신의 정치관에 따라 정치 활동을 한 것 뿐이라는 옹호도 있다.
그러나 논란 항목에서 보다시피 유시민 또한 당적에 따라서 특정 사안에 대한 견해를 바꾼 적이 있다. 이인제는 어떻게든 살아남았고 19대 국회까지 (2016년 임기 종료) 원내에 남아 있었지만 유시민은 참여정부 이후 어떠한 선거에서도 당선 된 적이 없다.
이인제는 정치인생 28년간 13회지만(2.1년에 한번꼴) 유시민은 11년동안 7회(1.6년당 한번꼴)다. 단순히 변경한 빈도만 보면 유시민이 더 하다. 다만 피닉제로서 인터넷에서 희화화되기 시작한건 2008년 총선에서 무소속 출마, 최저득표로 당선되면서였는데 동 시기 기준으로 당적변경 이력은 이인제가 유시민보다 훨씬 위였다.
앞서 언급했던 정계 진출의 시발점이었던 신당인 개혁국민정당으로 활동하다가 본인의 주도로 열린우리당과 합당하게 되었다.[31] 열린우리당 시절은 그의 정치활동 전성기라고도 할 수 있다. 여당의 주요 멤버로서 보건복지부 장관으로 큰 명성을 떨쳤던 것도 당시의 일이었다.
2007년 제17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열린우리당은 대통합민주신당과 합당하게 되었다. 격랑의 소용돌이였던 당시 진보정당 변천속에서 탈당쇼가 일어나며 열린우리당 내부에서도 합당 반대의 목소리가 났지만, 유시민은 찬성하며 새로운 당을 키워나갈 포부를 밝혔다고 한다. 경선 끝에 대선 후보로 선출된 정동영을 원조하며 문국현 후보와 단일화를 진행했다. 하지만 단일화는 입씨름으로 끝나며 실패로 돌아갔고, 2007년 대선에서 정동영은 이명박에 패해 맥없이 낙선하고 말았다. 대선 이후 콩가루 그 자체였던 대통합민주신당은 오래 유지될 리 없었고 결국 총선을 앞두고 유시민과 이해찬 등의 거물 정치인들이 줄탈당하기까지 이르렀다.
탈당 후 한동안 무소속 신분으로 지내며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대구광역시 수성구 을 선거구로 출마하는 무리수를 던기지도 했다. 철새 논란도 있긴 했지만 그의 출신지가 경상북도인지라 연고가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32]
게다가 진보 진영의 유명한 정치인이 대구광역시에 나선지라 대부분은 도전이라고 받아들였다고. 한나라당의 주호영[33] 후보와 경쟁했으나 어찌보면 당연하게도 낙선하고 말았다.
그래도 네임밸류의 영향은 있었는지 당초 예상보다 높은 32%의 득표율을 기록했다.[34] 이에 민주 & 진보 쪽 인사는 크게 고무되었고 이후 김부겸이 당선을 노릴 수 있게 된 계기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막상 유시민의 행보가 김부겸에 딱히 도움이 되었다고 할 수는 없는게, 실제로 유시민이 총선에서 떨어진 이후 대구광역시에 뼈를 묻을 것 같이 행동하다가 바로 2010년 6.2 지방선거 때 경기도지사 후보로 출마하면서 대구광역시 사람들은 유시민이 먹튀를 한 걸로 받아들였다. 이는 나중에 김부겸이 수성구 갑에 첫 출사표를 던졌을 때 많은 사람들이 표를 망설이게 된 이유가 되었다.
그때 당시에도 이한구가 지역구에서 깽판쳤던 전력으로 인해 수성갑에서 이한구에 대한 민심이 흉흉했었기에 이걸 잘 캐치한 김부겸이 출사표를 던졌을 때 반겼던 사람도 많으나 막상 표를 찍을 때는 '인물은 좋은데 당이 별로라서...'라는 의견과 함께 '유시민처럼 한 번 떨어지면 그냥 도망가겠지' 하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부겸은 유시민과 달리 도망가지 않았고,[35] 끝까지 대구광역시 출마를 고수했기에 수성구민들이 김부겸에게 화답을 보냈던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만약 유시민이 이때 1회성 출마에 그치지 않고 김부겸처럼 대구시장 등을 비롯해 대구광역시의 장벽을 뛰어넘으려고 했다면 김부겸과 같이, 운이 따라줬다면 김부겸보다 더 일찍 대구광역시에 입성했을 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만약 그러한 성공을 거두었다면 김부겸 의원처럼 민주 & 진보 진영의 유력한 대권 다크호스로 주목받았을 지도 모른다.[36]
그후에는 참여정부 핵심인사들이 모여 국민참여당을 창당했고, 유시민도 뒤따라 입당하였다. 그곳에서 정치인으로써 마지막 본선 맞대결로 2010년 6.2 지방선거에서 경기도지사에 도전했다. 경선에서는 민주당의 김진표[37] 후보와 단일화 경선에서 승리하는 이변을 냈으나 본선에서는 경기지사 재선 도전을 한 한나라당 김문수 후보에게 밀려 2위로 낙선하고 말았다.
경기도 내에 큰 지지 기반이 없었음에도 선전했다는 평이지만, 당시 표차가 4%p에 불과했다는 점과 심상정 당시 진보신당 후보와의 단일화 실패로 무효표가 김문수 당선자와의 격차보다 더 많이 나왔다는 점 때문에[38] 지지자들의 아쉬움이 많았다고 한다.[39] 애초에 민주당과 국민참여당이 한 지역씩 주고 받는 연대 방식을 취할 수 있었음에도, 한 자리가 아쉬운 민주당과 경선을 통해 단일화 하는 방식을 고수해서 정치적 권모술수를 적극 활용하는 마키아벨리스트라는 비난도 받았다.
2011년 국민참여당 대표에 오른 그는 2011년 상반기 재보궐선거에서 경상남도 김해시 을 지역구 국회의원 선거를 지휘하게 되었다. 그로서는 의석을 확보한다면 잇다른 패배를 만회하고도 남을 의미깊은 선거였다. 김해는 국민참여당의 모토인 노무현 전 대통령의 출생지이기도 하고 PK 중에서도 민주당 지지세가 제법있는 지역이기도 했다.[40] 더욱이 한나라당의 실책은 야권에게는 큰 호재가 되기도 했다. 말도많고 탈도 많던 민주당과의 후보 단일화를 거치며 이봉수를 후보로 세우며 원내 진출을 꿈꾸었으나 현실은 시궁창. 김태호 후보에게 밀리며 좌절되었다.[41] 당선되었더라면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원내 교섭단체를 이루는데 교두보가 되었을 선거였기에 좌절감은 더 컸고, 야당 측 대권 주자 1위를 굳건히 지키던 그였으나 그것마저도 손학규에게 넘겨주게 되었다.
잇다른 타격을 입은 국민참여당은 존재 의의를 잃어버린 채 민주당에 흡수될 위기에 처했으나, 유시민은 진보신당과 대통합을 하는 방향으로 활로를 돌렸다. 참여당은 당원 투표로 통합을 결정짓고 민주노동당, 진보신당과 우여곡절의 협의 끝에 대통합 진보 정당인 통합진보당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이 통합은 그의 정계 은퇴의 시발점이 됐다.
결성 직후 당분간 통합진보당의 공동대표로 활동했으며, 당시 경기동부연합에 속한 인물군에 대해서 친북 성향 논란이 보수 언론에 노출되자 유시민은 매카시즘이라고 항변을 했다.[1]
그러나 통합 정당의 한계였는지 통합진보당 내부에서는 계파 갈등이 만연하였고 유시민은 이를 비판하며 직무를 거부했다 복귀했다를 반복했다. 결국 통합진보당 비례대표 후보 부정경선 사건이 터지게 되고, 유시민은 '총체적 부정선거'임을 인정하고 비례대표 전원 사퇴를 주장하였으나 당시의 당권파였던 NL계가 반발하며 계파 갈등은 폭발하게 된다. 결국 비당권파 당원들의 대규모 탈당이 시작되었고 유시민도 그중 하나였다. 그러나 국참계도 부정경선에 주체였으며 일방적 피해자로서 코스프레한 것이라는 지적이 있다. 실제로 검찰 수사를 하면서 참여계가 대거 구속되었다.[2]
탈당한 인물들(유시민, 노회찬, 심상정 등)은 진보정의당(현 정의당)을 결성했다. 유시민도 초창기 주요 멤버로서 큰 활동을 펼쳤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정계 은퇴를 선언함으로서 파란만장한 그의 정치 인생은 일단 마감하게 되었다.[42] 그의 재능을 아쉬워하는 진보 진영 지지자들이 가끔 정계 복귀할 생각은 없느냐며 묻는 모양이지만, 그때마다 '정계를 떠난 지금의 삶이 더 행복하다'며 단호히 선을 긋고 있다. 손석희 JTBC 보도 담당 사장이 같은 질문을 건넸을 땐 '다음 생에 하겠다'고 하기도. 하지만 손학규 전 경기도지사처럼 정치인의 정계 은퇴 번복이 드문 일은 아니기 때문에 그가 정계에 다시 복귀할 가능성이 전무한 건 아니다.
2.4.6 친노
"저는 뼛속까지 친노죠. 노무현 대통령 좋아하니까..."
ㅡ 2016년 3월 17일 JTBC 썰전 1부 도중. 전원책 변호사가 유시민 작가에게 친노냐고 묻자 대답에서.
"자기는 그렇게 생각하는지 안 하는지 모르지만 내가 보기엔 노무현 과에 속하는 정치인이 하나 있습니다.""가장 어려울 때 저를 지켜줬어요. 여러분이 그랬듯이 어려울 때 친구가 친구고 어려울 때 견디는 정치인이라야 진짜 정치인입니다."
ㅡ 노무현 前 대통령의 퇴임 직후 봉하마을 연설 中에서.
"노무현 대통령은 정치적으로 보면 제 아버지나 비슷하다. 아버지가 동네에서 욕을 먹는다고 아버지를 내버릴 수는 없지 않냐. 제가 노 대통령 때문에 정치에 입문했고, 또 노 대통령 지지를 밝히면서 국회의원에 두 번 당선됐고, (노 대통령이) 여러 반대를 무릅쓰고 저에게 장관으로 일할 기회도 줬다. 그런데 이제 국민들의 노 대통령에 대한 평가가 안 좋으니까 저를 ‘경호실장이다’ 이렇게 묶어서 가지만 그것은 다른 분들의 견해니까 제가 듣고 그냥 간다."
정치인 유시민을 논할 때는 반드시 친노를 떼어놓고 이야기를 할 수가 없다. 유시민은 그 누구도 부인하지 않는 친노계의 적통이나 다름 없는 정치인이면서도 일반적인 친노 정치인들과는 상당히 색다른 경력과 과정을 거쳤다.
이유는 유시민이 노무현 전 대통령과 학연, 지연, 혈연, 당적, 경력에서 겹치는 부분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서울대학교를 졸업해 독일 유학을 했던 유시민과는 달리 노무현 전 대통령은 부산상업고등학교 졸업이 최종 학력이었고, 경북 월성에서 태어나 청년기를 서울에서 보낸 유시민과 경남 김해에서 태어나 대부분의 활동을 부산 지역에서 했던 노 전 대통령은 지역적으로 겹치는 부분이 없었다.
노무현 당시 후보가 새천년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던 당시 유시민은 새천년민주당 당원도 아니었으며, 오히려 개혁국민정당을 창당해 새천년민주당내에서 '후보교체론'을 들고나와 위기에 처해 있었던 노 후보를 바깥에서 도왔다. 인권 변호사 & 노동 변호사로 활동했던 노 전 대통령과는 달리 유시민은 서울대 경제학부 전공자였다.
본인이 밝힌 바에 따르면 학생 운동을 했던 명문대 출신 운동권 정치인들이, 나름 뛰어난 능력과 신념을 가졌는데도 고졸 출신이라며 노무현을 깔보는 거 같아 심기가 불편했었다고 한다. 그래서 일종의 반발심리로 '나도 당신들처럼 명문대 나왔고 학생 운동했던 사람이다. 그러나 나는 기꺼이 노무현의 밑에 들어가 일하겠다'는 걸 보여주려고 노무현과 정치 역정을 함께 하게 됐다고도 한다.
"대학교 출신 선배들이 노무현을 우습게 아는 것도 저는 좀 우스워요. 이 사람은 경제 전문가들과도 어느 정도 토론을 비슷한 레벨에서 할 수가 있는 사람이고, 또 자갈치 시장 아줌마들과는 또 그 레벨에서 같은 주제로 대화를 할 수가 있는 사람이거든요?
근데 왜 (그런 능력을 가진) 노무현을 사람들이 평가해주지 않는가? 전 굉장히 서운해요. 특히, 학생 운동 출신 선배들이 그렇게 하지 않는 것 또는 386 의원들 조차도 그런 기색을 보이는 것. 이런 것은 솔직히 말하면 노무현이 대학 안 나왔다고 차별하는 거예요. 만일, 노무현이 일정 정도 수준의 대학을 다녔고 거기서 민주화 운동, 학생 운동과 일정 정도의 연관을 맺은 상태에서 오늘까지 왔다면 절대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아요.
사람들이 너무나 노무현을 가볍게 생각한다. 그 점이 저는 개인적으로 굉장히 서운하고 이것 역시 운동권 출신들의 오만이다, 그렇게 봅니다. 제가 이렇게 노무현 지지를 공개적으로 선언하는 중요한 정서적인 이유 중의 하나는 이른바 서울대 출신 중에서 나도 좀 잘 났다는 얘길 들은 사람인데 내가 노무현 밑에서 확실히 기고 들어가서 그 사람을 위해서 일할 의사가 있다. 이걸 난 보여주고 싶어요.
노무현 씨는 그럴 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이고, 그럴 만한 능력이 있는 사람이에요. 그런 대접을 받을 만한 기여를 한 사람인데 왜 인정해주지 않는가... 그 점에 대해서 저는 운동권도 주류다, 오만하다, 그렇게 보는 거고... 그리고 오늘의 이 사태에 노무현이 가는 데마다 왕따당하고 모욕당하고 냉대받고, 그렇게 해서 하이에나들이 어슬렁거리는 들판 위에, 나무 위에 혼자 매달려가지고 지금 이런 상황에서 그 모든 것들을 등가적으로 정치인들 사이의 전쟁 또는 세력 다툼으로 보면서 옳고 그름의 잣대로 이것을 보려 하지 않는... 이 지식인들... 한 번 좀 다시 생각해보자. 과연 이게 그렇게 우리가 그렇게 치부하고 넘어갈 수 있는 문제인가 그 점이 진짜 안타까워요.." 실제 인터뷰 4분 15초부터
이렇듯 전혀 연관성이 없어보이는데도 불구하고 "노무현 대통령을 좋아하니까" 친노가 된 사람의 대표격이 유시민이라고 할 수 있겠다.[43]
유시민은 민주당으로 가기를 거부한 친노 인사들과 힘을 모아 국민참여당을 창설했고, 당의 성향을 민주당계 정당보다 더 진보적인 쪽으로 잡았다. 고로 민주당에 소속된 친노 인사들과도 어느 정도 거리를 두게 됐다. 그러나 국민참여당이 정치적으로 상승세를 타질 못하자 참여정부 시절엔 불편한 관계였지만 '민주당을 긴장시킬 제3당이 필요하다'는 것엔 서로 동의하던 진보 진영과 손을 잡아 통합진보당을 창당했다.
그러나 19대 총선에서 통합진보당은 13석을 얻는데 그쳤고 총선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심각한 내부 분열을 겪게 된다. 그러자 통합진보당을 탈당해 함께 탈당했던 노회찬, 심상정 등과 함께 진보정의당 - 정의당을 창당했다.
정계 은퇴를 선언한 뒤에는 그냥 정의당 평당원으로 지내고 있는데, 민주당을 비판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는 진보 정당 쪽에서 정치한 경력이 더 많음에도 민주당의 친노계 의원과 친밀한 관계가 있는 것이 유시민이라는 사람만의 특징이다. 그 이유로는 비록 정당은 달라도 문재인 전 의원 등 다른 친노계 민주당 의원들과도 정치적으로 많은 도움을 주고 받았으며[44], 사적으로도 참여정부 시절 맺었던 끈끈한 관계를 여전히 잘 유지하기 때문인 듯하다. 노 전 대통령을 기리는 행사가 열릴 때에면 자주 민주당 소속 친노계 정치인들과 함께 무대에 올라 입담을 과시하곤 한다.
유시민이 있던 진보 정당들의 강령도 노무현의 신념을 그대로 이어받은 듯한 뉘앙스를 풍기고, 그로 인해 진보 정당과 민주당계 정당의 거리를 좁힌 인물로 손꼽히기도 한다. 실제로 그가 민주당계 정당과 진보 정당 사이에 끼친 영향은 크며, 친노 성향의 의원들이 이 둘 사이의 화합을 유도하는 행동도 자주 하여 유시민도 그 중 하나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2.5 정계 은퇴와 작가로의 복귀
작가로 돌아온 유시민. |
원외 정치인으로 활동하였으나 현직 정치인 시절처럼 고초가 꽤나 많았고 결국 2013년 2월 19일에 정의당의 평당원으로 남을 것임을 천명함으로써 정계 은퇴를 선언하고 작가로 복귀하게 되었다.
2013년엔 당시 딴지라디오 아까부터 팟캐스트 시대에서 유시민 백수님이라고 하면서 소개를 해 줬고 이때 유시민 본인의 목소리를 녹음한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책의 홍보광고가 꾸준히 방영됐는데 컬트적인 인기(?)를 끌면서 나름 유명해졌다.그런데 이 책 광고에 관한 비화가 있는데, 원래는 1개월만 방영하기로 계약하였는데 계약이 끝난 줄 모르고 계약기간을 초과해서 계속 어뜨케.. 살 끄신가..가 계속 방영되었다고 한다.
이때 같은 딴지라디오의 '딴지 이너뷰'에 출연해서 물뚝심송이 인터뷰를 했는데 제목이 정신승리의 달인 백수 유시민이라고 당시의 근황을 확인사살 당했다. 이 방송을 통해 서울대 성폭력 대책위 사건의 피해자인 유수진 前 사회과학대학 학생회장이 소개되기도 했고, 그 사실을 아버지가 뉴스를 보고서야 알았다고 한다. [45]
그러다가 팟캐스트 <노회찬, 유시민의 저공비행>을 진행했으나 그 이름값에 비해 현저히 낮은 재미 없음에 결국 망했다가 2014년부터 진중권 교수까지 참여한 <노유진의 정치카페> 고정멤버로 출연 중이다. 노유진의 정치카페에서는 '유시민의 타임라인'이라는 코너를 맡아 진행하고 있다. 한 주간 있었던 굵직한 시사 문제에 대해 분석하고 향후 상황이 어찌될 지 예측을 내놓는 시간인데, 유시민 작가의 예측이 들어맞는 경우가 은근히 많아 댓글란에 '돗자리 깔았다'는 댓글이 달린다. 예측이 계속해서 적중하자, 사회자 진중권 교수도 "이번에도 돗자리 까는 겁니까?"하며 능청을 떨며 언급할 정도. 유시민의 논리적 사고와 추론, 그를 뒷받침하는 정보력과 명확한 사실관계 파악을 고려할 때, 예측이 틀리는 게 이상하다. 특히 많은 정당에 몸담았던 경험 때문에 다른 진행자들에 비해 그쪽에 대해 빠삭한 편이며 재선의원 및 보건복지부 장관으로 일하며 정부,국회,청와대를 드나들었던 경험이 있어서 내각 시스템이나 청와대 시스템에 대해서도 두 진행자들에 비해 아는 게 더 많다.
노유진의 정치카페에서 2015년 국회법 문제로 유승민 당시 새누리당 원내대표가 사퇴한 일을 방송 소재로 다룬 적이 있었다. 이때 유승민과 이름이 비슷하다고 간혹 자신을 언급하는 경우가 있었다고 하는데 이에 관한 하소연(?)이 재미있었다. "나는 버들 유씨고, 그 사람은 유비 할 때 유씨예요." 실제로 유시민의 이름 한자는 柳(버들 류)時敏이고, 유승민의 이름 한자는 劉(성씨 류)承旼이다.[46]
주호영에게 패해 낙선한 후 2009년에는 경북대학교에서 경제학 교양 강의를 맡은 적이 있었다. 400명 분량의 답안지를 채점하느라 힘들었다고 술회했다.
한참 국정 국사 교과서 문제로 시끄러웠던 무렵인 2015년 11월에는 모교인 심인고등학교를 방문해 국사 교과서의 국정화 문제에 대한 강연을 했다.-
2016년 1월부터 JTBC의 시사 예능 프로그램인 썰전의 이철희의 후임자로 진보 측 패널로 출연하고 있다. 보수 진영을 대변할 패널로는 전원책 변호사이다. 2016년 1월 21일 방영분의 시청률은 4.2%로 자체 최고 시청률을 갱신했다
'표현의 기술' 북 콘서트에서 전원책 변호사가 귀엽다고 언급했다.
정치를 하던 시절 출연했던 생방송 토론과는 다르게 썰전은 녹화방송이라 제작진이 편집을 잘 해 줘서 좋다고 한다. "썰전은 소풍가는 기분으로 가죠." 라고 언급했다.
2016년 10월 7일 언니들의 슬램덩크에 환경에 관한 주제를 다루면서 게스트로 출연하였다
3 저서
정치색이 뚜렷한 책이 아니면 기본으로 10만 부는 팔 수 있는 베스트 셀러 작가다. 서울대학교 경제학과 출신이고 독일 유학을 통해 마인츠 요하네스 구텐베르크 대학교에서 경제학 석사 학위를 받았던 인물이라 경제 관련 저서로 '유시민의 경제학 카페'가 꽤 유명하다.
다른 분야의 책도 많이 집필했는데 '거꾸로 읽는 세계사', '후불제 민주주의', '국가란 무엇인가', '어떻게 살 것인가' 등을 집필했고, 2013년에는 노무현 전 대통령 이후의 NLL대화록 관련하여 중립적인 시선에서 기술한 '노무현 김정일의 246분-남북정상회담 대화록의 진실'이 있다.
2014년에는 자신이 태어난 1959년부터 2014년까지의 우리나라 현대사를 서술한 '나의 한국현대사'를 출판했으며 2015년에는 글쓰기로 고민하는 이들을 위한 책이라는 '유시민의 글쓰기 특강'과 '유시민의 논술 특강'을 출판했다. 본인의 소개에 따르면 '어떻게 글을 잘 쓸 수 있을까'에 대한 책이라기 보다는 '어떻게 해야 글을 잘 쓸 수 있는 사람이 될까'에 대한 책이라고. 글쓰기 특강의 경우에는 다음 크라우드 펀딩 유시민의 글쓰기 고민상담소를 통해 먼저 진행했다.
자녀의 대입 논술도 스스로 가르쳐 본 적이 있다고 한다. 주변에서는 그렇게 자기 방식대로 가르쳐서야 되냐고 투덜댔지만, 자녀인 유수진 씨는 아버지를 이어 서울대학교에 진학했다.[47]
4 논란
가독성 문제로 문서를 분리한다. 유시민/논란 참조.
5 선거이력
당 내부 선거가 아닌 대한민국 선출직 공직자 선거 결과만 기록한다.
연도 | 선거종류 | 소속정당 | 득표수(득표율) | 당선여부 | 비고 |
2003 | 2003년 상반기 재보궐선거 (고양시 덕양구 갑) | 개혁국민정당 | 34,833 (53.3%) | 당선 (1위) | 2003년 11월 3일 열린우리당 합류 |
2004 |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고양시 덕양구 갑) | 열린우리당 | 40,288 (47.6%) | 당선 (1위) | |
2008 | 제18대 국회의원 선거 (대구 수성구 을) | 무소속 | 23,005 (32.6%) | 2위 (낙선) | |
2010 |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 (경기도지사) | 국민참여당 | 2,079,892 (47.6%) | 2위 (낙선) | 야5당 연대후보[48] |
2012 | 제19대 국회의원 선거 (비례대표 12번) | 통합진보당 | 2,198,082표 (10.3%) | 낙선[49] |
6 여담
- 양조위를 묘하게 닮아서 그런지 느와르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사진#이 여럿 있다. 인터넷에 유시민 느와르라고 쳐보면 느와르 영화와 비슷한 구도로 된 사진을 흑백으로 만든 사진#이 여럿 있다. 특히 노무현 영결식에서 촛불에 담배불을 붙여 담배를 바치는 장면은 유시민 느와르의 백미(?)다.참고사진
- 민주 & 진보 진영에 속한 논객들 중에서 거의 끝판왕 급으로 평가받을 정도로 언변이 뛰어나다. 딴지일보 김어준 총수는 그를 일컬어 "말을 길게 하는데도 주어와 술어가 완벽하게 맞아 떨어진다. 재수없다"(...)고 평했다. 그만큼 비문 없이 논리적으로 말한다는 의미.
- 달변가라고 평가받는 이들도 문장이 길어지고 많아지면 비문이 많아지게 마련인데, 유시민은 그런 부분에서 굉장한 강점을 가지고 있다. 그의 논리적 정합성 넘치는 언변을 느끼고 싶다면 노유진의 정치카페 시즌 1을 통해 확인하거나 유튜브에 유시민 토론 영상을 검색해보라.
- 그러나 한창 정치를 하던 시절 말을 날선 스타일로 하곤 했는데 이 때문에 유시민 특유의 강경한 발언을 두고 민주당 최고위원을 지냈던 더민주 소속 김영춘 의원이 옛날에 "저토록 옳은 얘기를 어쩌면 그렇게 싸가지 없이 할까"라면서 대놓고 디스했던 적이 있었다.
- 취미는 낚시라고 한다. 물고기가 낚일 때까지 그냥 가만히 앉아 있으면 머릿속이 정리되는 것 같아 그게 좋다고 한다.
- 노유진의 정치카페의 부록편이라 할 수 있는 '정치카페 테라스'에 출연했을 때 친구인 정태인 성공회대 겸임교수와 낚시를 다니기도 했지만 낚시는 안 하고 술만 마셔서 애먹이는 바람에 지금은 데리고 다니지 않는다고 말했고, 파주에 있는 계곡 저수지에 낚시를 하러 갔을 땐 너무 낚시가 잘 돼 노회찬 정의당 전 의원을 초대했지만 정작 그날은 낚시가 전혀 안 되는 바람에 미치는 줄 알았다며 기억을 더듬었다.
- 그리고 낚시터를 고를 때 물고기가 잘 낚이는 곳이냐를 많이 따지지만, 맛집이 있는가도 그 만큼 중요하게 본다고 한다. 그래서 정치카페 테라스에서 자신이 다녀본 맛집들도 함께 소개했으며 그 중에서 진도에서 먹은 간재미 회무침을 최고로 꼽았다.
- 팬클럽 시민광장에서는 '첨맘'님이라고 불린다. 팬카페 시절 만들었던 유시민 본인의 아이디로 호칭하는 것. '처음마음初心'을 빠르게 발음한 '첨맘'이 당시 닉네임. 참고로, 국민참여당에서는 오프라인 토론회 때 당원들이 나이에 관계없이 서로를 닉네임으로 호칭하는 것이 디폴트였다. 이는 개혁국민정당부터 이어진 전통으로 추정된다.
- NLPDR의 '김대중 비판적 지지'의 영향력이 강하던 80년대 운동권 출신답지 않게 故 김대중 전 대통령을 추종하지 않고 오히려 비판적인 노선을 견지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대표적인 예로 대통령 선거가 있었던 1997년 5월에 발간한 '1997 대선 게임의 법칙'이라는 책을 통해 "영남과 군부의 맹목적 비토를 당하는 김대중이 대통령에 당선될 확률은 낙타가 바늘 구멍을 뚫을 확률보다 낮다.", "조순 씨 같이 이미지가 좋은 제3후보가 야권 단일 후보로 나서고 신한국당 측이 헛발질을 하지 않는 한 정권 교체의 가능성은 없다"고 주장했던 것인데 그해 대통령 여론 조사에서 김대중 당시 후보는 줄곳 선두를 유지하다 대세론 까지 나왔고 이회창 후보의 병풍으로 싱겁게 끝나나했다가, 막판 영남권 표 결집과 북풍과 색깔론이 나오며 40.3%의 득표율을 얻어 극적으로 당선되었다. 그러나 노무현 대통령 당선후 김대중 부채 승계론을 주장했고 이명박 대통령 집권 이후 출간한 저서인 <청춘의 독서>와 <나의 한국현대사>를 통해 김대중에 대한 재평가를 시도했고, 2009년 8월 19일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세상을 떠나자 "나의 첫 대통령, 사랑했습니다"라는 추모사를 남기기도 했다. 2010년엔 이희호 여사를 방문하여 "시사평론할 때 몇 차례 비판했던 것 늘 마음에 걸렸다. 사과말씀 드리고 싶었다"면서 "정부에 있어보니 김대중 대통령님이 얼마나 힘든 과정을 뚫고 거기까지 이루셨는지 알 것 같았다"고 고개를 숙였다.
- 유시민은 존재 자체만으로도 대한민국에 흔치 않은 리버럴 지식인이지만, 그런 포지션에 있던 지식인들 중에는 유일하게 국회의원(2선)과 장관, 당대표(2회)를 지낸 전직 정치인이다. 이러한 경력은 여타 진보 & 리버럴 진영 참석자들과는 확연하게 차별화를 꾀할 수 있는 요소이며, 토론회 등을 보면 그가 이러한 경력들을 활용하여 주제의 맥을 짚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다.
- 2016년 1월 25일 JTBC의 비정상회담에 패널로 출연하였다. 이 자리에서 정계 은퇴에 대해 묻는 질문에 대해, 국민이 자신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을 3번 확인(낙선)했고 다시 정계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고 못을 박았다. 작가로 사는 게 더 좋다고. 이 와중에 기욤이 방글방글 웃으면서 던진 자기 포장에 세 차례 실패한 거 아니냐는 돌직구에 떡실신당한 건 덤. 또 출연자들에게 언젠가부터 너무 한국에 좋은 말만 한다며 속시원하게 하고 싶은 말 하라고 직구를 날리기도. 한편 독일 유학파로서 다니엘과 독일어 프리 토킹을 했는데, 다니엘이 진중권 교수보다 발음이 좋다고 평가할 정도로 녹슬지 않은 독일어 실력을 보여줬다.
- 키가 168cm 정도였던 노무현보다 조금 큰 것을 보면 키는 170cm 초반인 것으로 보인다.
- 2016년 1월 28일에 방영된 썰전에서 검찰이 과거 이명박 전 대통령 측근들의 계좌를 추적한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자기들이 집권한 이후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어떻게 했는데, 다른 사람은 몰라도 MB는 화를 내면 안 된다"며 날선 반응을 드러냈다. 이 사건에 대해 한 줄 논평을 내놓을 때에도 '뿌린대로 거두리라'라는 말로 여운을 남겼다.
- 우파 성향인 극단주의적 인디 만화가 최지룡 작품에 그를 풍자한 듯한 인물이 나온 적이 있다. 축생도 외전에 국민연금을 풍자한 것으로 추정되는 인민연금을 내라고 독촉하는 정부 관료로...
- 통진당 사태 당시 통진당 당권파 중 일부는 자파 조직원들에게 유시민은 CIA의 사주를 받아서 통진당을 파괴시키려 했다(...)라고 교육했다고 한다. 재미있는 사실인데 유시민은 극우 인사들에겐 종북이라고 비판을 받기 때문이다. 극우에게는 종북이라고 비판받고 극좌에게는 미국의 졸개로 비판 받으니 둘 다 거짓말이란 것을 알 수 있다.
- 병역은 제7보병사단에서 소총수로 복무를 마쳤다. 병장 만기제대했으며, 심지어 GOP에서 철책 근무까지 했다고. 이 점을 이용해서 경기도지사 유세 때 미필자 고위층들을 신랄히 깠다.
7 발언
- "대학교 출신 선배들이 노무현을 우습게 아는 것도 저는 좀 우스워요. 이 사람은 경제 전문가들과도 어느 정도 토론을 그 레벨에서 할 수가 있는 사람이고, 또 자갈치 시장 아줌마들과는 그 레벨에서 같은 주제로 대화를 할 수가 있는 사람이거든요? 근데 왜 노무현을 사람들이 평가해주지 않는가? 전 굉장히 서운해요.
특히, 학생운동 출신 선배들이 그렇게 하지 않는 것 또는 386 의원들 조차도 그런 기색을 보이는 것. 이런 것은 솔직히 말하면 노무현이 대학 안 나왔다고 차별하는거예요. 만일, 노무현이 일정정도 수준의 대학을 다녔고 거기서 민주화 운동, 학생운동과 일정 정도의 연관을 맺은 상태에서 오늘까지 왔다면 절대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아요.
사람들이 너무나 노무현을 가볍게 생각한다. 그 점이 저는 개인적으로 굉장히 서운하고 이건 역시 운동권 출신들의 오만이다, 이거는 그렇게 보고 제가 이렇게 노무현 지지를 공개적으로 선언하는 중요한 정서적인 이유 중의 하나는 이른바 서울대 출신 중에서 나도 좀 잘났다는 얘길 들은 사람인데 내가 노무현 밑에서 확실히 기고 들어가서 그 사람을 위해서 일할 의사가 있다. 이걸 난 보여주고 싶어요. 노무현씨는 그럴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이고, 그럴만한 자질이 있는 사람이고 그럴만한 능력이 있는 사람이예요. 그런 대접을 받을만한 기여를 한 사람이고 왜 이것을 인정해주지 않는가... 그 점에 대해서 저는 운동권도 주류다. 그런 점에서 보면....운동권도 주류다, 오만이다. 그렇게 보는거고...
그리고 오늘의 이 사태에 노무현이 가는데 마다 왕따당하고 모욕당하고 냉대받고, 그렇게 해서 하이에나들이 어슬렁거리는 들판위에 나무위에 혼자 매달려가지고 지금 이런 상황에서 그 모든 것들을 등가적으로 정치인들 사이의 전쟁 또는 세력다툼으로 보면서 옳고 그름의 잣대로 이것을 보려 하지 않는...이 지식인들... 한번 좀 다시 생각해보자. 과연 이게 그렇게 우리가 그렇게 치부하고 넘어갈수 있는 문제인가 그점이 진짜 안타까워요.."
- 2002년 대선 당시 노무현 후보의 교체 이야기가 나오자 유시민이 노무현을 지지하면서 했던 말이다.
- 모든 사람에게 칭찬받는 사람은 정말 좋은 사람이 아니다. 좋은 사람에게는 칭찬을 받고 나쁜 사람에게는 미움을 사는 사람이 정말로 좋은 사람이다.
- 노유진의 정치카페 中[50][51]
- 참여정부 5년 동안 재정 적자를 다 합쳐봐야 18조 5천억 원 밖에 안 됐어요. 건전하게 재정을 운영했다고요. 그러면서도 보육비 지원도 늘리고, 기초 연금도 도입하고, '장기 요양 보험제'도 도입하고, 건강 보험도 혜택을 많이 늘렸어요. 그러면서도 18조 5천억 원 밖에 재정 적자가 안 났어요. 그게 정부가 적자를 좀 보는 건 괜찮거든요. 왜냐하면 전체 GDP중에서 1~2%의 적자를 보는 것은 큰 문제가 없어요. 왜냐하면 1억 연봉 버는 사람이 백만 원 정도 빚진다고 문제될 건 없잖아요. 그래서 그 당시의 우리나라 GDP에 1천조 정도 넘었으니까 그 당시엔 한 십조 정도 빚지는 것은 5년 정도 큰 문제 없어요.
이명박 대통령 5년 간 국가 부채 중에 어떤 것은 돈을 빌려서 산 것도 있기 때문에, 금융성 채무는 또 달라요. 문제는 적자성 채무인데 '벌어들인 돈보다 지출이 더 많은 거'요. 우리가 IMF때 은행들 살리려고 정부 자금을 투입해서 주식을 취득하고 정상화시킨 다음에 되팔아가지고 많이 회수했잖아요. 그런 금융성 채무는 괜찮아요. 화폐 가치를 안정화시키려고 외국환 평형 채권 기금을 발행해서 거기에서 빚을 얻어서 거기서 달러를 매입해서 외환보유고를 축적하고 나중에 달러 팔면 돈이 생기는 거니까 괜찮다고요.
문제는 적자성채무인데 이 적자성 채무가 이명박 정부 5년 동안 160조였어요 연평균 32~33조 원. 근데 박근혜정부 들어서 565조 원이에요, 그것도 3년간이요. 이대로 가면 박근혜 대통령 5년 동안 250조 원 정도의 적자성 채무를 남기게 돼요. 문제가 엄청 심각하거든요. 다음 정권 교체를 해서 야당이 집권을 한다고 하면 쓸 돈이 없어요. 펑펑 다써가지고. (이 많은 돈을 다) 어따 퍼줬냐? 국민들에게 퍼준 게 아니고 재벌들한테 퍼준 거예요. 이명박 대통령이 했던 감세(= 부자 감세 정책) 그걸 원위치를 안 시켰기 때문에(= 부자 증세 정책으로 바꾸지 않았기 때문에) 법을 한 번 고쳐놓으면 항구적으로 감세가 되잖아요. 그게 누적되면서 그 효과가 계속 쌓여서 연간 50조 이상의 적자 재정을 보고 있잖아요. 아주 나라 경제를 망쳐놓고 성장률은 2% 밖에 안 되고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 시대에 평균 4%의 경제 성장률을 기록했잖아요. 근데 지금 2%예요.
- 노유진의 정치카페 中 2016.04.11 # -
- 적자성 채무는 세입보다 세출을 많이 썼기 때문에 돈이 모자르는 거니까 나중에 생으로 갚아야하는 돈이에요. 그게 참여정부 5년 동안 적자성 채무가 18조 5억 원 정도였어요. 이명박 정부 5년 동안 89조 원대 정도로 추산됩니다. 4대강 사업 8조 원은 수자원공사에 떠넘겨 놨으니까 포함이 안 된거구요. 그거까지 합치면 100조 원 정도의 적자성 채무를 졌어요. 근데 박근혜정부는 이 추세로 가면 MB 정부를 초월하는 적자성 채무를 기록할 것으로 예측이 돼요.
이명박 정부도 초기에 이 문제가 제기 되어서 정부가 단년도 예산안을 내는 거 말고도 5년 짜리 옛날 중기 기획, 지금은 국가 재정 운영 기획이라고 부르는 것을 해마다 향후 5년치를 예상하는데 기획재정부에서 이걸 냈어요. 이걸 보면 U커브인데요 '첫해는 적자성 채무가 많아서 재무가 불건전하고 해마다 노력해서 줄여가서 임기 말에는 균형 재정으로 간다'. 이게 이명박 정부 초기에 나온 거와 똑같은 그림이에요. 이명박 정부 말대로 됐으면 2013년에는 균형 재정이 됐어야죠. 근데 2014년~2015년 오면서 적자성 채무가 커지기만 해서 이제 단년도에 30조에 육박하는 수준이 됐단 말이에요. 그럼 2018년에는 균형 재정으로 간다는 말인데 '그럼 2018년 되면 올라가 있냐'고 하면 그렇지 않고 마찬가지로 20~30조 원 상태의 적자상태로 있을 확률이 굉장히 높아요.
이거는 확장적 재정 정책을 쓰지 말라는 것이 아니고, 쓰더라도 정직하게 말하고 써야지 5년 짜리 국가 재정 운영을 엉터리로 작성해서 낸다. (중략) 국가 채무에 관해서는 유럽 연합이 경제 통합을 할 때, 통화 통합을 할 때의 기준이 국가 채무가 GDP 기준의 6%가 기준이었어요. 해마다 지는 거. 해마다 GDP 3%에 기준으로 잡았단 말이에요. 우리가 1억을 연봉을 버는 사람이 한 6천만 원 부채를 안고 있는 거라 생각하면 돼요. 해마다 6%를 유지하려면 해마다 그 정도 빚지면 되는 거예요. '그렇게 하면 국가는 부도가 안 나니까 괜찮다' 뭐, 이런건데 제가 사실 채무 걱정을 하는 것은 '제대로 쓰면서 채무를 지는 거냐'는 문제 하나가 있고요, 두 번째는 '국가 채무를 질 수 밖에 없는 상황인가' 문제 의식이 또 하나 있어요.
지금 내년도 예산안이 통합 재정 기준 기금까지 합쳐서 376조 원인데 복지 분야가 3%를 넘었다고 정부에서 엄청 이야기 하잖아요. 내년도 보건복지의 고용의 예산액이 통합 기준으로 기금 포함해서 155조 원이에요. 근데 이게 금년도 보다 얼마 늘어났냐하면 9조 천억 원 정도 늘어난 거예요. 이 9조 천억 원의 대부분은 국민연금 수급자가 늘어나서 지출액이 많아지는 거 하나하고, 기초 연금 도입해서 금년도에 7월 달부터 줬기 때문에 1년 내내 주는 것에 3조 원 주는 것이 거의 다예요. 나머지는 늘어난 게 아주 미미합니다. 보육이라든가, 학교 무상교육이라든가, 실업자 지원이라든가 여기선 미미한 증가 밖에 없고요, 나머지는 2014년 예산안에서 각 부처별로 조금씩 조금씩 늘린 거예요.
특별히 늘었거나 줄은 게 없고 SOC[52] 건설 예산안은 7천억 늘었고요, 일반 지방 행정은 2조 원 늘었고요. 다 비슷비슷 늘어난 거예요. 그럼 재정 능력이 없어서 빚을 지는 거냐? 이건 또 아니라는 거예요. 김무성 대표가 '부자 감세라는 건 야당의 선동'이라 이야기하는데 (중략) 법인세, 소득세, 법인소득세, 개인소득세, 감세시켜준 게 이명박 정부 때 감세해준 게 지금까지 누적이 되고 있잖아요. 그러니까 세수(국민에게서 조세(租稅)를 징수하여 얻는 정부의 수입)가, 지금 내년도에 법인세가 0.1% 밖에 안 늘어나는 걸로 잡히는데 그러니까 돈을 낼 능력이 있는 사람, 세무 행정의 기본 원리는 '능력에 따라 납세'인데 돈을 많이 버는 사람에겐 세금을 안 걷고 한쪽으로 담배며 상업용 자동차며 무슨 주민세며 이런 걸 인상해서 돈을 걷는다는 이런 발상 자체 제가 볼 때에는 빚을 30조 원 지게 만드는 근본 원인이기 때문에 이것은 불건전 예산이다.
- 노유진의 정치카페 2014.09.22# -
- 2005년도인가 국회에 와서 노무현 대통령이 시정 연설을 했는데요. 국회 시정연설 중에 보건 의료 서비스 무역 수지 적자가 1조 원이라는 대목이 있어요. 그걸 근거로 해서 '의료 산업 선진화 위원회'라는 걸 국정 과정 위원회로 만들어서 국무총리가 위원장을 하고, 대통령 보고에도 몇 차례 하고 그랬어요. 그게 민간 합동 위원회인데 정보쪽 간사[53]를 보건복지부 장관이 했고, 그리고 민간에도 간사가 있어요.
이렇게 해서 여러 번 회의를 했는데 제가 장관 되자 마자 1조 원이라는 데이터가 어디서 나왔냐고 물어봤죠. 그때는 기획재정부가 아니고 재경부(재정경제부)에서 나온 데이터래요. 그래서 제가 재경부 국장에게 물어봤죠. 회의 중에 제가 '이거 재경부에서 데이터를 냈다고 그랬는데 출처를 밝혀보시오'라고. 연구보고서에도 있는 거라고 하더군요. 어디서 만든 보고서냐 제목이 뭐냐 물었더니 다음 회의 때 보고 드리겠다고 해서 한 달 후 다음 회의 때 또 물어봤어요 제가. 그랬더니 민간 병원의 연구보고서에 있는 거래요. 그래서 '민간 병원 어디서?' 물어봤더니 미즈메디 병원에서 나온 연구보고서래요.
그러면 미즈메디의 연구보고서라면 틀림없이 정부 데이터를 근거로 산출했을 텐데 미즈메디 병원이면 우리 외환 관련 자료를 못 가지고 있지 않냐, 틀림없이 한국은행 자료나 참고했을 텐데 미즈메디 병원 연구보고서에는 이 1조 원이라는 산출 내역이 어떻게 되어있고 산출 내역이 되는 데이터는 어디서 가져온 걸로 밝혀졌더냐 물어봤더니 그거까진 미처 확인을 못했다고 그러더라고. 그래서 제가 열을 냈죠. 아니 이런 불분명한 데이터를 대통령 시정 연설에 넣고 이렇게 회의 자리에 맨날 넣어놓으면 어떡하냐고. 그랬더니 그 당시 산자부(산업자원부) 장관하던 정태익, 정세균 장관이 (저랑) 같이 화를 벌컥내면서 이런 식으로 데이터를 해놓으면 정부 공문서 전체가 불신 받지 않냐, 그래서 제가 돌아와서 제가 직접 조사했죠. 한국은행과 협조해서 그 유학생이나 상사주재원 교민 말고, 치료를 목적으로 출국한 사람 환전 기록을 데이터로 조사해서 해봤더니 적자 폭이 56억 원이라고. 1년 동안이요. 그래서 56억 원이면 곧바로 흑자로 전환할 수있습니다. 그래서 해외 환자 유치를 위한 컨소시엄을 민간 합동으로 만들고 그래서 바로 흑자로 전환시켰죠. 대통령이 나중에 보고를 받고 징계하라고 했어요, 책임자를.
근데 재경부에서 징계 안 하고 넘어갔습니다. 이렇게 관료들이 다 짜고하는 거예요. 노 대통령은 상당히 머리 좋은 분이잖아요. 정치적으로 싫어하더라도 그건 인정할 거예요. 그런 (머리 좋은) 대통령도 데이터가 그렇게 올라오면 그걸 믿을 수 밖에 없는 거예요. 시정 연설 와서도 읽는 거라고요. 지금 박근혜 대통령은 이번 담화문에, 이건 근거가 없는 터무니 없는 이야기예요. 일국의 대통령의 담화문에 이런 게 들어가면 안 되는 거예요. 이것만 이렇게 했어요 (중략) 밥 먹고 취재하는 게 일인 언론인이나 학자들 있잖아. 이거 뭐하는 거예요. 지금 이게 아무런 근거가 없는 거예요. 대통령 담화문이.
- 노유진의 정치카페 中 2016.01.18 # -
- 묘한 기사들이 나왔더라고요. '보험업계 걱정 지금 손보자'라든가. 생보사(생명보험 회사)에서 그동안에 여러가지 미끼 상품으로 종신 연금을 많이 팔았거든요. 근데 소득대체율(소득이 없을 때 소득을 대체할 수 있는 금전의 비율)은 40%~50%로 올리게 되면 보험료도 올려야 되고 안 올릴 순 없어요. 보험료를 올리게 되면 민간 가계 가처분 소득이 줄어들 뿐만 아니라 노후 소득 공적 연금 노후 소득 보장율이 높아지니까 사적 연금이 줄어들 거라고 수요가.
이것 때문에 보험업계에서 엄청 로비를 하는 건 불보듯 뻔한 거고 (중략) 국민연금의 문제점의 하나가 가입하면 무조건 이익을 봐요. 가입하지 않은 사람은 무조건 손해를 봐요. 나중에 세금이 들어가게 되면 아무리 소득 수준이 높은 사람도 국민연금은 다른 민간 보험 상품보다 수익율이 높아요. 왜? 단순한 이유예요. 우선 이윤을 안 남겨요. 주주에게 배당하는 것도 없고, 경영진이 수십억 연봉 가져가는 것도 없고, 관리비도 국가에서 다 대요. 국민연금 기금의 국민들이 내는 보험료 기여금, 이거는 고대로 기금 운영을 해서 돌려주기 때문에 민간 보험과 견줄 수 없어요. 그럼 나중에 부가식으로 전환하는 걸 전제로 해서 국가가 지급 보증을 하게 되면 이 국민연금의 수익율은 고소득 계층에게 있어서도 민간 보험보다 무조건 유리하고 중간 소득 이하 계층들은 수익율이 더 높고, 거기다가 비용 근로자는 회사에서 반을 내줘, 무조건 이익인 거예요.
그러니까 중산층 강남3구 중산층 주부들이, 임의 가입자들이 많다니까 이게 최고의 금융 상품이기 때문에 꼭 가입할 필요가 사람들인데도 한 달에 40만 원, 50만 원 막내서 가입하는 거야. 그래서 이게 없는 사람만 몰라서, '나는 국민연금 싫어', '나는 손해보는 거야'라고 생각한다는 거. 이 점이 좀 안타깝고요, 두 번째는 합의 기구 구성 문제인데, 저는 이거 야당이 50%를 굳이 명시 안 한다고 해도 된다고 봐요, 그냥 '일원 정도로 소득대체율 50% 인상 문제를 포함하여 배제하지 않는 걸로 포함하여', 뭐 여부 못박기 싫으면, '50% 소득대체율 인상을 할 지 여부를 포함하여' 그렇게 (법안 문구를) 합의를 보면 청와대에서 뭔 말 못해요. 50%로 못박은 것도 아니고 무조건 한다는 것도 아니야.
그러나 국회에서 사회적 합의를 이루기 위해서 국회와 민간이 다참여 하는 논의 기구를 만들어서 여러 활동을 체계적으로 논의를 하고, 그렇게 해서 합의가 이뤄지면 하면 될 거 아니야. 이거는 서로 간의 정치 공방을 주고 받고, 나라를 망하게 만든다, 이렇게 싸울 이유가 없는 거예요. 이건 그냥 돈 계산하고 따지면 되는 문제인데. 그래서 이런 거는 국회에서 구성을 해서 몇십 년을 하는 거야. 계속 왜냐하면 모든 것은 예상과 다르게 변할 수 있고 국민연금은 50년, 100년을 내다보고 가는 것이기 때문에 이런 건 함구적으로 국회의장 산하에 사회적 합의기구를 구성해놓고 국회 정당이 참여하고, 민간 전문가도, 가입자 단체, 이익자 단체, 관련자 단체 다 참가해서 논의를 정권이 바뀌건 국회가 선거를 새로하든 상관 없이 상시적으로, 인적 구성은 바뀌더라도 상시적으로 가동하면 돼요 근데 뭘 대통령이 뭐 공무원 연금만 통과시키고, 나머지는 이야기하지 마라
- 노유진의 정치카페 中 2015.05.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