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사 삼국지

(삼국지정사에서 넘어옴)
중국의 정사서
흠정 24사
순서이름저자권수
1사기\[[[전한]]\] 사마천130
2한서\[[[후한]]\] 반고100
3후한서\[[[유송]]\] 범엽120
4삼국지\[[[서진]]\] 진수65
5진서\[[[당나라|당]]\] 방현령130
6송서\[[[양나라|양]]\] 심약100
7남제서\[[[양나라|양]]\] 소자현59
8양서\[[[당나라|당]]\] 요사렴56
9진서\[[[당나라|당]]\] 요사렴36
10위서\[[[북제]]\] 위수114
11북제서\[[[당나라|당]]\] 이백약 등50
12주서\[[[당나라|당]]\] 영호덕분 등50
13수서\[[[당나라|당]]\] 위징85
14남사\[[[당나라|당]]\] 이연수80
15북사\[[[당나라|당]]\] 이연수100
16구당서\[[[후진]]\] 장소원 등200
17신당서\[[[북송]]\] 구양수225
18구오대사\[[[북송]]\] 설거정 등150
19신오대사\[[[북송]]\] 구양수74
20송사\[[[원나라|원]]\] 탈탈496
21요사\[[[원나라|원]]\] 탈탈116
22금사\[[[원나라|원]]\] 탈탈135
23원사\[[[명나라|명]]\] 이선장210
24명사\[[[청나라|청]]\] 장정옥 등332
기타 정사서
-동관한기\[[[후한]]\] 유진 등22
-신원사\[[[중화민국]]\] 커사오민 등257
-청사고\[[[중화민국]]\] 자오얼쉰 등536

三國志, (영어)Records of the Three Kingdoms (3세기 경)

1 개요

서진진수(陳壽)가 지은 삼국시대의 인물들을 다룬 역사서로, <위지(魏志)> 30권, <촉지(蜀志)> 15권, <오지(吳志)> 20권, 합계 65권으로 되어 있다. 중국의 정사인 24사[1] 중 하나이며, 특히 ≪사기≫,≪한서≫,≪후한서≫와 함께 전사사(前四史)로 분류된다.

기전체 사서이나 표(表)나 지(志)는 포함되어 있지 않고 기(紀)와 전(傳)으로만 구성되어 있다. 이는 나라에서 만든 관찬서가 아니라 개인이 만든 사찬서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사기≫, ≪한서≫, ≪후한서≫, ≪삼국지≫는 모두 사찬서로, 편찬 순서는 ≪사기≫, ≪한서≫, ≪삼국지≫, ≪후한서≫ 순인데, ≪진서(晉書)≫ 이후로는 모두 관찬서다.

이하 별다른 경우가 아니면 진수의 ≪정사 삼국지≫는 ≪삼국지≫로 표기한다.

2 구성

원래는≪위국지(魏國志)≫, ≪촉국지(蜀國志)≫, ≪오국지(吳國志)≫로 따로 독립된 역사서로 분류되었지만, 점차 한 묶음으로 보아 북송 시기에 와서는 통틀어서 ≪삼국지≫라는 이름으로 부르게 되었다. 특징이라면 전체적인 역사보다 다양한 유명 인물들의 열전을 중심으로 서술되어 있다는 것이다. <위지>는 왕침이 쓴 ≪위서≫ 등을 인용했고 <오지>는 위소가 쓴 ≪오서≫를 인용했다. 일단 국력이 가장 컸던 위나라의 기록이 가장 많고, 촉한의 기록이 가장 적은데, 특히 관우, 장비 등의 창업 공신들의 기록은 매우 짧다.

이에 대해 <후주전> 말미에 있는 진수가 제갈량과 유선을 까면서 쓴, "사관을 두지 않았다."[2]는 문장을 인용하는 경우도 있는데, <후주전>을 보면 알겠지만 정작 바로 몇 줄 위에 있는 경요(景耀) 원년에 사관이 기록한 내용이 있으며, 당나라의 유지기(劉知幾)는 진수의 말은 사실이 아니라고 하고 있다.

景耀元年, 姜維還成都. 史官言景星見, 於是大赦, 改年。

경요(景耀) 원년(258년), 강유가 성도로 돌아왔다. 사관(史官)이 경성(景星-도가 있는 나라에서 보인다고 하는 상서로운 별)이 보였다고 말하자 이에 대사령을 내리고 연호를 고쳤다.

陳氏≪國志ㆍ劉后主傳≫云:"蜀無史職,故災祥靡聞。" 案黃氣見于姊歸,群鳥墮于江水;成都言有景星出,益州言無宰相氣;若史官不置,此事從何而書?蓋由父辱受髡,故加茲謗議者也。

(진수가 ≪삼국지≫ㆍ<후주전>에 이르기를, “촉에는 사관(史官)이 없어서 천재지변과 상서로운 일들에 관한 이야기를 듣지 못하였다.” 라고 했다. 그러나 기록을 보면, 자귀현(秭歸縣)에 누런 안개가 끼고, 강주현(江州縣)에서 새 떼가 물에 떨어졌다고 하였으며, 성도에 상서로운 별이 나타나고, 익주에 재상의 기운이 없다고 하였다.[3] 사관을 두지 않았다면 이런 것들은 어떻게 기록됐단 말인가? 아마도 아버지가 제갈량에게 머리칼을 밀리는[4] 치욕을 당했기 때문에 이렇게 헐뜯었을 것이다.)
- 유지기,≪사통(史通)≫권 7ㆍ<곡필(曲筆)>[5]

2.1 위서(魏書)

권1 위서1 무제기(武帝紀): 조조(曹操)
권2 위서2 문제기(文帝紀): 조비(曹丕)
권3 위서3 명제기(明帝紀): 조예(曹叡)
권4 위서4 삼소제기(三少帝紀): 조방(曹芳), 조모(曹髦), 조환(曹奐)
권5 위서5 후비전(后妃傳): 무선변황후(武宣卞皇后), 문소견황후(文昭甄皇后), 문덕곽황후(文德郭皇后), 명도모황후(明悼毛皇后), 명원곽황후(明元郭皇后)
권6 위서6 동이원유전(董二袁劉傳): 동탁(董卓), 이각(李傕), 곽사(郭汜), 장제(張濟), 양봉(楊奉), 원소(袁紹), 원담(袁譚), 원상(袁尙), 원술(袁術), 유표(劉表)
권7 위서7 여포장홍전(呂布臧洪傳): 여포(呂布), 장막(張邈), 장홍(臧洪), 진등(陳登)
권8 위서8 이공손도사장전(二公孫陶四張傳): 공손찬(公孫瓚), 도겸(陶謙), 장양(張楊), 공손탁(公孫度), 공손강(公孫康), 공손공(公孫恭), 공손연(公孫淵), 장연(張燕), 장수(張繡), 장로(張魯)
권9 위서9 제하후조전(諸夏侯曹傳): 하후돈(夏侯惇), 하후연(夏侯淵), 조인(曹仁), 조홍(曹洪), 조휴(曹休), 조진(曹眞), 조상(曹爽), 하후상(夏侯尙), 하후현(夏侯玄)
권10 위서10 순욱순유가후전(荀彧荀攸賈詡傳): 순욱(荀彧), 순유(荀攸), 가후(賈詡)
권11 위서11 원장양국전왕병관전(袁張凉國田王邴管傳): 원환(袁渙), 장범(張範), 양무(凉茂), 국연(國淵), 전주(田疇), 왕수(王脩), 병원(邴原), 관녕(管寧)
권12 위서12 최모서하형사마전(崔毛徐何邢鮑司馬傳): 최염(崔琰), 모개(毛玠), 서혁(徐奕), 하기(何夔), 형옹(邢顒), 포훈(鮑勛), 사마지(司馬芝)
권13 위서13 종요화흠왕랑전(鍾繇華歆王朗傳): 종요(鍾繇), 종육(鍾毓), 화흠(華歆), 왕랑(王朗), 왕숙(王肅)
권14 위서14 정곽동유장유전(程郭董劉蒋劉傳): 정욱(程昱), 곽가(郭嘉), 동소(董昭), 유엽(劉曄), 장제(蔣濟), 유방(劉放), 손자(孫資)
권15 위서15 유사마양장온가전(劉司馬梁張溫賈傳): 유복(劉馥), 사마랑(司馬朗), 양습(梁習), 장기(張旣), 온회(溫恢), 가규(賈逵)
권16 위서16 임소두정창전(任蘇杜鄭倉傳): 임준(任峻), 소칙(蘇則), 두기(杜畿), 두서(杜恕), 정혼(鄭渾), 창자(倉慈)
권17 위서17 장악우장서전(張樂于張徐傳): 장료(張遼), 악진(樂進), 우금(于禁), 장합(張郃), 서황(徐晃), 주령(朱靈)
권18 위서18 이이장문여허전이방염전(二李臧文呂許典二龐閻傳): 이전(李典), 이통(李通), 장패(臧覇), 손관(孫觀), 문빙(文聘), 여건(呂虔), 허저(許褚), 전위(典韋), 방덕(龐德), 방육(龐淯), 염온(閻溫)
권19 위서19 임성진소왕전(任城陳蕭王傳): 조창(曹彰), 조식(曹植), 조웅(曹熊)
권20 위서20 무문세왕공전(武文世王公傳): 조앙(曹昂), 조삭(曹鑠), 조충(曹沖), 조거(曹據), 조우(曹宇), 조림(曹林), 조곤(曹袞), 조현(曹玹), 조준(曹峻), 조구(曹矩), 조간(曹幹), 조상(曹上), 조표(曹彪), 조근(曹勤), 조승(曹乘), 조정(曹整), 조경(曹京), 조균(曹均), 조극(曹棘), 조휘(曹徽), 조무(曹茂), 조협(曹協), 조유(曹蕤), 조감(曹鑑), 조림(曹霖), 조례(曹禮), 조옹(曹邕), 조공(曹貢), 조엄(曹儼)
권21 위서21 왕위이유부전(王衛二劉傅傳): 왕찬(王粲), 위기(衛覬), 유이(劉廙), 유소(劉劭), 부하(傅嘏)
권22 위서22 환이진서위노전(桓二陳徐衛盧傳): 환계(桓階), 진군(陳羣), 진태(陳泰), 진교(陳矯), 서선(徐宣), 위진(衛臻), 노육(盧毓)
권23 위서23 화상양두조배전(和常楊杜趙裴傳): 화흡(和洽), 상림(常林), 양준(楊俊), 두습(杜襲), 조엄(趙儼), 배잠(裴潛)
권24 위서24 한최고손왕전(韓崔高孫王傳): 한기(韓曁), 최림(崔林), 고유(高柔), 손례(孫禮), 왕관(王觀)
권25 위서25 신비양부고당융전(辛毗楊阜高堂隆傳): 신비(辛毗), 양부(楊阜), 고당융(高堂隆)
권26 위서26 만전견곽전(滿田牽郭傳): 만총(滿寵), 전예(田豫), 견초(牽招), 곽회(郭淮)
권27 위서27 서호이왕전(徐胡二王傳): 서막(徐邈), 호질(胡質), 왕창(王昶), 왕기(王基)
권28 위서28 왕관구제갈등종전(王毌丘諸葛鄧鍾傳): 왕릉(王淩), 관구검(毌丘儉), 제갈탄(諸葛誕), 문흠(文欽), 당자(唐咨), 등애(鄧艾), 종회(鍾會)
권29 위서29 방기전(方技傳): 화타(華佗), 두기(杜夔), 주건평(朱建平), 주선(周宣), 관로(管輅)
권30 위서30 오환선비동이전(烏丸鮮卑東夷傳): 오환(烏丸), 선비(鮮卑), 부여(夫餘), 고구려(高句麗), 동옥저(東沃沮), 읍루(挹婁), 맥(濊), 한(韓), 왜(倭)

2.2 촉서(蜀書)

권31 촉서1 유이목전(劉二牧傳): 유언(劉焉), 유장(劉璋)
권32 촉서2 선주전(先主傳): 유비(劉備)
권33 촉서3 후주전(後主傳): 유선(劉禪)
권34 촉서4 이주비자전(二主妃子傳): 선주감황후(先主甘皇后), 선주목황후(先主穆皇后), 후주경애황후(後主敬哀皇后), 후주장황후(後主張皇后), 유영(先主子永), 유리(先主子理), 유선(後主太子璿)
권35 촉서5 제갈량전(諸葛亮傳): 제갈량(諸葛亮)
권36 촉서6 관장마황조전(關張馬黃趙傳): 관우(關羽), 장비(張飛), 마초(馬超), 황충(黃忠), 조운(趙雲)
권37 촉서7 방통법정전(龐統法正傳): 방통(龐統), 법정(法正)
권38 촉서8 허미손간이진전(許麋孫簡伊秦傳): 허정(許靖), 미축(糜竺), 손건(孫乾), 간옹(簡雍), 이적(伊籍), 진밀(秦宓)
권39 촉서9 동유마진동여전(董劉馬陳董呂傳): 동화(董和), 유파(劉巴), 마량(馬良), 진진(陳震), 동윤(董允), 여예(呂乂)
권40 촉서10 유팽요이유위양전(劉彭廖李劉魏楊傳): 유봉(劉封), 팽양(彭羕), 요립(廖立), 이엄(李嚴), 유염(劉琰), 위연(魏延), 양의(楊儀)
권41 촉서11 곽왕상장양비전(霍王向張楊費傳): 곽준(霍峻), 왕련(王連), 상랑(向朗), 장예(張裔), 양홍(楊洪), 비시(費詩)
권42 촉서12 두주두허맹내윤이초극전(杜周杜許孟来尹李譙郤傳): 두미(杜微), 주군(周羣), 두경(杜瓊), 허자(許慈), 맹광(孟光), 내민(來敏), 윤묵(尹黙), 이선(李譔), 초주(譙周), 극정(郤正)
권43 촉서13 황이여마왕장전(黃李呂馬王張傳): 황권(黃權), 이회(李恢), 여개(呂凱), 마충(馬忠), 왕평(王平), 장억(張嶷)
권44 촉서14 장완비의강유전(蒋琬費禕姜維傳): 장완(蔣琬), 비의(費禕), 강유(姜維)
권45 촉서15 등장종양전(鄧張宗楊傳): 등지(鄧芝), 장익(張翼), 종예(宗預), 양희(楊戯)

2.3 오서(吳書)

권46 오서1 손파로토역전(孫破虜討逆傳): 손견(孫堅), 손책(孫策)
권47 오서2 오주전(吳主傳): 손권(孫権)
권48 오서3 삼사주전(三嗣主傳): 손량(孫亮), 손휴(孫休), 손호(孫皓)
권49 오서4 유요태사자사섭전(劉繇太史慈士燮傳): 유요(劉繇), 태사자(太史慈), 사섭(士燮)
권50 오서5 비빈전(妃嬪傳): 오부인(吳夫人), 사부인(謝夫人), 서부인(徐夫人), 보부인(步夫人(練師步皇后)), 대의왕황후(王夫人(大懿王皇后)), 경회왕황후(王夫人(敬懷王皇后)), 반부인(潘夫人(潘皇后)), 전황후(全夫人(全皇后)), 주황후(朱夫人(朱皇后)), 소헌하황후(何姬(昭憲何皇后)), 등황후(滕夫人(滕皇后))
권51 오서6 종실전(宗室傳): 손정(孫靜), 손분(孫賁), 손익(孫翊), 손보(孫輔), 손광(孫匡), 손소(孫韶), 손환(孫桓)
권52 오서7 장고제갈보전(張顧諸葛步傳): 장소(張昭), 장승(張承), 장휴(張休), 고옹(顧雍), 고담(顧譚), 제갈근(諸葛瑾), 보즐(步騭)
권53 오서8 장엄정감설전(張嚴程闞薛傳): 장굉(張紘), 장현(張玄), 엄준(嚴畯), 정병(程秉), 감택(闞澤), 설종(薛綜)
권54 오서9 주유노숙여몽전(周瑜魯肅呂蒙傳): 주유(周瑜), 노숙(魯肅), 여몽(呂蒙)
권55 오서10 정황한장주진동감능서반정전(程黃韓蔣周陳董甘凌徐潘丁傳): 정보(程普), 황개(黃蓋), 한당(韓當), 장흠(蔣欽), 주태(周泰), 진무(陳武), 동습(董襲), 감녕(甘寧), 능통(凌統), 서성(徐盛), 반장(潘璋), 정봉(丁奉)
권56 오서11 주치주연여범주환전(朱治朱然呂範朱桓傳): 주치(朱治), 주연(朱然), 주적(朱績), 여범(呂範), 여거(呂據), 주환(朱桓), 주이(朱異)
권57 오서12 우육장낙육오주전(虞陸張駱陸吾朱傳): 우번(虞翻), 육적(陸績), 장온(張溫), 낙통(駱統), 육모(陸瑁), 오찬(吾粲), 주거(朱據)
권58 오서13 육손전(陸遜傳): 육손(陸遜), 육항(陸抗)
권59 오서14 오주오자전(吳主五子傳): 손등(孫登), 손려(孫慮), 손화(孫和), 손패(孫覇), 손분(孫奮)
권60 오서15 하전여주종리전(賀全呂周鍾離傳): 하제(賀齊), 전종(全琮), 여대(呂岱), 주방(周魴), 종리목(鍾離牧)
권61 오서16 반준육개전(潘濬陸凱傳): 반준(潘濬), 육개(陸凱)
권62 오서17 시의호종전(是儀胡綜傳): 시의(是儀), 호종(胡綜)
권63 오서18 오범유돈조달전(吳範劉惇趙達傳): 오범(吳範), 유돈(劉惇), 조달(趙達)
권64 오서19 제갈등이손복양전(諸葛滕二孫濮陽傳): 제갈각(諸葛恪), 등윤(滕胤), 손준(孫峻), 유찬(留贊), 손침(孫綝), 복양흥(濮陽興)
권65 오서20 왕누하위화전(王樓賀韋華傳): 왕번(王蕃), 누현(樓玄), 하소(賀邵), 위요(韋曜), 화핵(華覈)

3 내용

인물의 알려진 일대기를 작성한 뒤 마지막에 각 인물의 평을 적는데, 조조는 시대를 초월한 영걸(英傑), 유비유방의 풍모가 있는 효웅(梟雄)) 등으로 묘사하며 하후돈조운, 한당은 거의 결점이 없는 모범적인 장수로 표현되는 점으로 볼 때 ≪삼국지≫가 위나라 편애라는 설은 좀 억측이다. 그러나 ≪삼국지≫의 내용을 얕게 이해하는 사람들에 의해 그렇게 주장되기도 한다. 예컨데, 하후돈의 경우 사람됨으로 볼 땐 무결점이나, 군공을 따져 볼 땐 상당히 안습하게 나오는데, 여기서 하후돈의 군공 문제를 끈질기게 물고 늘어진다든가 하는 경우이다.

삼국을 다룬 시각에선 위나라를 정통으로 보아 조조를 무제(武帝)로, 조비를 문제(文帝), 조예를 명제(明帝) 등으로 호칭했고, 촉한유비, 유선을 각각 선주(先主), 후주(後主)로 불렀다. 그러나 오나라는 얄짤없이 모두 그냥 이름으로 불렸다. 이렇게 위나라가 정통이지만 촉나라는 오나라보다는 더 권위있게 표현했다. 위는 선양받았고 촉은 유씨니까 그걸 이을 수 있었던건데 손오는 명분이 아예 없잖아. 조조가 위왕(魏王)에 오를 때는 깔끔하게 위왕이 되었다고만 썼지만 유비가 한중왕(漢中王)이 될 때는 신하들과 유비 본인이 한나라 황제에게 올리는 글들을 자세히 실어 좀 더 비중 있게 표현한다. 하지만 이것마저도 후대의 촉한정통론을 주장하는 유학자들에게는 불만이 있었는지, 촉의 군주를 더욱 높이고(선주 → 소열제), 위의 군주는 그냥 조조, 조비 등으로 표기한 판본이 나오기도 했다.

서진 때 만들어졌기 때문에 사마의, 사마사, 사마소, 사마염본명으로 부르지 않는다. 사마의를 사마선왕 또는 선제, 사마사를 사마경왕 또는 경제, 사마소를 사마문왕 또는 문제라고 지칭하며 사마염은 무제라고 지칭한다. 따라서 이들의 전기는 ≪삼국지≫에는 없으며 ≪진서(晉書)≫에 있다.

위나라를 비호하는 모습이 좀 있긴 한데, ≪삼국지≫가 나온 시기가 위나라의 후예인 서진이 집권하던 시대이다 보니 시대상 도저히 어쩔 수가 없다. 공명정대하게 위나라라도 깔 때는 깐다라는 정신 자세로 글을 쓸 생각이었다면 일단 목숨은 집 밖에 내놓고 시작할 수 밖에 없었던, 지금 시대와는 완전히 다른 군주제 체제라는 시대적 한계를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그런 것 치고는 나름 균형이 잡힌 편이라는 평을 듣는다. 최고의 역사서 중 하나로 칭송 받는 ≪사기≫ 역시 당연하게도 이런 한계는 전혀 벗어날 수가 없었다.

삼국시대 이전, 즉 후한 말의 군벌들에 한해서는 대체로 기록이 간략한 편이고, 좀 심하게 까이는 경우가 많다. 가장 좋은 예는 원소이다. ≪후한서≫의 <원소전>을 참고하면 원소도 뛰어난 군벌에 우유부단한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진수의 평에선 엄청나게 까인다.

4 한국의 역사와 관련된 내용

삼국의 이야기 말고도 <위지>의 끝 부분에는 <오환선비동이전(烏丸鮮卑東夷傳)>이라고 하여 오환, 선비, 동이, 등 중국 밖의 이민족 세력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다. ≪사기≫ㆍ<조선열전>에서 위만조선에 대한 내용이 있긴 하지만 그 내용은 한무제의 조선 원정과 그 멸망 과정만이 중심이 되어 있기 때문에 본격적으로 한반도 일대의 고대 국가에 관한 위치와 사회상, 풍속까지 기록한 가장 오래된 사료는 ≪삼국지≫의 <동이전>이 된다. 게다가 삼국시대와 가장 인접한 시기에 작성되었으므로 더할 나위 없이 한반도 고대사 연구의 중요한 자료다. 어찌보면 이런 값진 기록들을 남기게 해준 공손도 일족과 관구검에게 감사해야 될지도 모르겠다. 아이러니의 끝

삼국사기≫, ≪삼국유사≫가 지금은 유실된 옛 기록을 참고해서 썼다고는 하나, 편찬연대로 따지면 동시대에 집필된 삼국지의 내용과는 거의 800~1,000 년이나 차이가 나는데다가, 초기 기록 중 많은 부분이 삼국지를 참고하여 쓴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예전(일제강점기~대한민국 초기)의 역사 학계에선 ≪삼국지≫ <위지>의 기록을 ≪삼국사기≫의 기록보다 우선적인 연구 대상으로 간주했다. 물론 지금은 ≪삼국사기≫도 기록을 뒷받침하는 고고학적인 증거가 다수 발굴됨에 따라 100%까지는 아니라도 어느 정도는 신뢰를 받게 된 상태다. 마찬가지로 일본에서도 고대사를 연구하는데 <왜인전>을 중요한 자료 중 하나로 여겨지고 있다.

다만 ≪삼국지≫에도 아쉬운 부분이 있다. 일단 바다 건너의 정보들을 모아 쓴 것이므로 그리 정확하지 않은 부분도 많을 수밖에 없다는 점이 있고, 가장 큰 단점은 1차 자료가 아니라 고대 중국인이 자국의 시점으로 가공한 자료라는 점. 특히, 주석을 단 배송지가 원래 ≪위략≫에 실려있던 기사들을 편집 축약한 내용을 달아았다는 것이 상당히 아쉬운 점이다.

간략하게 내용을 설명하면, 거의 같은 계통의 민족이라고 볼 수 있는 부여고구려의 나라 묘사 내용이 극과 극을 오간다. 부여 사람들의 풍습은 호의적으로 묘사하는 반면, 고구려 사람들은 대놓고 성질이 흉악하고 노략질에 맛들인 족속으로 적어 놓았다. 아무래도 중국과의 관계가 우호적인지 적대적인지 여부에 따라 설명을 다르게 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이 당시 고구려는 만주벌판을 달리는 그런 강한 나라가 아니라 국내성 일대의 험한 산골짜기에 자리잡은 나라라서 관구검에게 발린 이야기 정도만 나와 있다. 풍습을 보고 "음란하다." 라고 서술한 대목들이 있지만, 이런 표현들은 이민족을 경시하는 중화사상, 체통머리 없는 것을 혐오하는 유교사상의 관점에서 나왔다는 것을 염두에 둬야 한다. 또한 단순히 '음(淫)'의 또 다른 뜻들인 '방종하다', '지나치다', '어지럽다' 등의 뜻으로 쓰인 경우도 있을 수 있다. 성진국이라는 소리가 아니다! 혹시 모르지..

書籍有≪五經≫、≪三史≫、≪三國志≫、≪晉陽秋≫[6]

(책으로는 ≪오경≫, ≪삼사≫, ≪삼국지≫, ≪진양추≫가 있다.)
- ≪주서(周書)≫권 49ㆍ<이역상(異域上)>ㆍ<고구려>[7]

《북주서》(즉 ≪주서≫)에 따르면, 후대의 고구려 사람들도 삼국지를 읽었다. 본격 욕하면서 읽는 책. 생각해보면 우리나라에서 위빠촉빠의 투쟁은 훨씬 오래 전부터 시작됐을지도 모른다. 오(吳)덕후들은 그저 吳吳거리며 웁니다ㅠ

5 주의점

5.1 다른 역사서와의 비교

기전체 사서는 인물 단위로 전기를 기록하는 구조이며, 해당하는 인물의 전기에서 그 인물의 공적은 강조하고 과오는 축소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여러 명이 관련된 큰 사건은 한 인물의 전기만 읽어서는 사건의 전체상을 잘못 파악할 위험이 있으므로 주의가 필요하다. 예를 들어 <무제기>만 읽으면 적벽대전은 없었던 것 같다. 실제 2000년대 초 삼국지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드러내고자 하는 몇몇 책들을 보면 무제기의 기록을 들어 적벽대전이 실제하지 않았던 것처럼 쓴 경우가 있다. 하지만 <선주전>, <주유전> 등을 읽으면 적벽대전은 분명히 존재했으며 조조는 대패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외에도 다른 인물의 열전에 다른 사건이 기록돼 있는 경우도 있으므로 하나의 사건을 파악하려면 기, 전을 앞뒤로 열심히 뒤져봐야 한다.

삼국지는 정사이기는 하나, '표'와 '지'가 포함되어 있지 않은 결함이 있다. 이 부분은 ≪후한서≫나 ≪진서(晉書)≫를 참조하여 보충해야 한다.

후한 말의 인물(헌제, 왕윤 등)에 관한 것은 ≪후한서≫의 기록이 더 자세한 경우가 많으므로 ≪후한서≫도 구할 수 있다면 참조하는 것이 좋다. ≪삼국지≫만 참조해서는 기록 누락으로 전체적인 그림을 잘못 그릴 수 있다. 그리고 ≪삼국지≫는 원소공손찬 같이 이름을 떨쳤던 후한말의 군벌들에 대해서 대차게 까기 때문에 《후한서》를 참조해야 그들의 좀 더 참된 모습을 알 수 있다. 그것의 가장 극단적인 예가 바로 원소다. 항목에서 볼 수 있듯이 ≪후한서≫의 범엽의 평과 ≪삼국지≫의 진수의 평은 아주 때깔부터 다르다. 촉한의 인물에 관해서는, 이복에 대한 기록은 있는데 그 아들 이양에 대한 기록이 없어 고의로 누락한 것이 아닌가 의심되고 있다. 서진의 인물의 기록은 물론 ≪진서(晉書)≫가 더 자세하지만, ≪진서≫ 역시 신뢰성에 의문이 가는 사서인지라 주의해서 봐야 한다.

그리고 패배를 좀 순화시키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자면 <무제기>에선 조조유비와 싸웠는데 불리했다고만 적혀 있지 패배를 언급 안 하고, <하후연전>에서 마초와 싸울 당시 불리했다고 적혀 있지만 패배는 언급 안 한다. 다행인 점은 ≪자치통감≫은 편년체로 작성되어 있어서 이 또한 참고하면 수많은 기, 전을 참조할 것 없이 한 번에 사건을 이해할 수도 있다. 예를 들자면 관우의 북진을 세세하게 이해하려면 <관우전>, <무제기> 말고도 <조엄전>, <동소전>, <서황전> 등의 열전을 뒤져봐야 하는데 ≪자치통감≫은 이를 하나로 엮어서 간편하게 읽을 수 있다.

하지만 ≪자치통감≫도 사건을 간략하게 축소하거나 나라의 정세에 큰 영향이 없는 일화들은 기록을 안 하기도 한다. 예를 들자면 하후연의 죽음도 <하후연전>과 <장합전>을 보면 꽤 세세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자치통감에선 그냥 하후연이 황충한테 죽었다는 식으로 짧게 기록되어 있다. 또 다른 예로, 전예의 활약상을 알고 싶다면 <위지>ㆍ<전예전>을 보는 게 ≪자치통감≫에서 자료를 얻는 것보다 훨씬 이득이 많다. 전예가 마성(馬城)에서 가비능에게 포위된 것까지는 나오는데, 포위를 뚫고 나온 것이 기록되지 않아서 위나라가 불리한 상태에서 일방적으로 화친을 구걸한 것처럼 되어버렸다.

세세하게 사건을 파헤치고 싶다면 ≪자치통감≫을 뼈대로, ≪삼국지≫의 열전으로 살을 붙이는 식으로 살펴보면 매우 좋다. 다만 삼국시대 연구에 매우 중요한 사료이지만, 기전체로 쓰여 있는데다가 너무 오래된 서적이라 제대로 이해하는 데는 어려움이 많이 있다. 다른 기록과의 교차 대조나 당시의 시대상에 대한 깊은 이해가 없으면 오히려 주화입마에 빠질 수 있다.

5.2 주석 문제

진수는 ≪삼국지≫를 유려하고 간결한 명문장으로 썼지만 워낙 간결해서 후대에 이 정사에 주석을 달았다. 이것이 송나라(유송) 문제 유의륭의 명령으로 배송지가 단 주석이며 부족한 정사에 추가를 한 것이다. 배송지의 주석은 100여년 뒤에 붙여진 것이지만, 주석으로서 기록된 사료 중에는 왕찬의 ≪영웅기≫를 비롯하여 ≪삼국지≫보다 시대가 앞선 1차 사료도 풍부하게 있으므로 가치가 높다. 배송지는 주석을 달 때150가지 사서를 인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만 신뢰도가 낮은 책의 기록이 주석으로 되어 있는 경우도 있으므로 기록의 출전을 살펴보고 책에 따라서 신용도를 달리하는 것이 좋다. 이에 대해 논란이 가장 많은 주석이 ≪위략≫이다. 그리고 ≪수신기≫나 ≪세설신어≫는 실제 역사적 사실이라기보다는 '당시 이런 이야기가 돌았다.' 라는 정도로 받아들이는 것이 좋다.

5.3 저자 본인에 관한 문제

진수와 관련된 오해가 몇 가지 있는데 그 첫째로, 진수의 아버지가 진식인데, 진식이 제갈량에게 처형당해서 진수가 제갈량에 대해 안 좋게 썼다는 설이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진식이 진수의 아버지라는 설은 근거가 희박하다. 진식은 230년에 죽었고 진수는 233년에 태어났으므로 진수가 진식의 아들이라면, 진수의 어머니가 3년 만에 진수를 출산했거나 진식의 유령에 의해 임신했다는 얘기가 된다. 더군다나 진식이 제갈량에 의해 처형당하는 것은 소설에서만 나온다. 정확히 말하면 진수의 아버지는 1차 북벌 당시 산을 타던(...) 마속의 부장이었는데, 패배의 책임으로 처벌을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비슷한 맥락에서, ≪22사차기(二十二史劄記)≫(1795년)를 지은 청나라 고증학자 조익(趙翼; 1727년 ~ 1814년)은 <진수전>에서 제갈량이 진수의 아버지를 욕보였기 때문에 진수가 제갈량의 군략을 까내렸다는 기록에 대해서, "이것은 진짜로 무식한 소리다!"[8]라고 평했다.

둘째로, 제갈첨에게 무시를 당해 제갈량과 제갈첨에 대해 안 좋게 썼다는 것인데 이는 오해다. 특히 제갈량 같은 경우 진수는 '해마다 군사를 일으켰어도 공을 이루지 못 했으니, 아마도 임기응변의 용병술은 그의 장점이 아닌 것 같다.' 라고 그의 전술적 역량이 정치력에 비해서 못했을 뿐이라고 했고, 이조차도 모자랐다나 무능했다는 뉘앙스가 아니라, 다 좋았는데 아쉬운 점이 있었다는 뉘앙스다. 정치에 관해서는 관중소하에 버금간다고 하는 등 상당히 긍정적으로 평했다. 재상으로서 두 인물이 중국 역사상 어느 정도의 위치에 있는지를 생각하면 진수가 제갈량을 편애한다고 볼 수도 있는 부분이다. 게다가 제갈량전 분량 자체도 다른 열전에 비교해봐도 서술량이 상당히 많다. 오히려 이것 때문에 진수가 사마염에게 사죄와 해명을 하기도 하였다. 제갈량을 높이 평가하고 죽을 죄를 지었다는 내용이 상주문(上奏文)에 있다. 제갈량전 말미 상소문에서 진수는 "엎드려 생각건대, 폐하께서는 옛 성인을 힘써 본받으시고 호탕하여 꺼리는 바가 없으시니, 이 때문에 비록 적국(敵國)의 비방하는 말일지라도 모두 싣게 하고 고치거나 숨기는 바가 없어 이로써 대통(大通)의 도를 밝히셨습니다. 삼가 베껴 적어 저작국에 올렸습니다. 신 진수는 실로 두렵고도 두려워, 머리를 조아리고 또 조아립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 태시(泰始) 10년(274년), 2월 1일 계사일, 평양후 상(平陽侯相) 신 진수(陳壽)가 올립니다."고 하여 제갈량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그리고 제갈첨에 관해서도 안 좋게 평가하지 않았다. 다만 부정적인 면을 기록한 것은 사실이다. 아버지(제갈량) 덕에 본인의 공적이 아닌 것에 대해서도 칭송을 받는다고 기록했다. 뒤집어 말하면 알려진 것보다 실속이 없는 인물이라는 평가라고 할 수 있는데, 사실 제갈첨의 승진이 워낙 빠른 것도 있고 미처 재주를 펼치기 전에 젊은 나이로 전사했으니 그의 위치에 비해 공적이 부족했던건 어쩔수 없다고 봐야 할 것이다.

저자 본인에게도 문제점이 있었다는 주장도 있다. 예컨데, 정의, 정이 형제는 의 이름난 사람인데, 진식이 그 자식들에게 쌀을 주면 열전을 써주겠다고 했다가 거절당해 ≪삼국지≫에 이 '정씨 형제'의 전(傳)이 없다는 것이다. 다만 정의를 비롯한 그의 가문은 남자들이 모두다 조비에게 제거당했기 때문에 후손이 있을 수가 없어서 모순되는 내용인지라 꾸며낸 일화일 수도 있다. 저자에 얽힌 문제들은 진수 문서에서 '≪삼국지≫의 공정성에 대한 의문' 항목도 참조하자.

5.4 결론

결론을 내자면, 충분한 사전 지식이 필요한 책으로 섣불리 건드릴 수 없다. ≪삼국지≫는 어디까지나 역사서이며, 때문에 연의 읽듯이 가볍게 읽으려다간 피만 볼 것이다. 사실 '천 년도 더 전에' 쓰인 책을 그냥 읽기만 한다고 쉽게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부터가 문제다. 그렇게 쉽게 된다면 역사학자들이 있지도 않을 것이다. 더군다나 '옛날의 일화'[9]를 예로 드는 경우가 많이 있기 때문에 단순히 삼국시대 관련 기록만 읽는다고 될 문제가 아니다. 괜히 ≪삼국지≫를 번역하고 있는 파성넷에서 예전 일화에 대한 소개를 하고 있는 게 아니다.

결국 당대의 사회와 문화, 고전에 정통하지 않으면 ≪삼국지≫를 올바르게 해석할 수 없다. 따라서 ≪삼국지≫를 읽고 이해하는 것은 전문적인 학술 영역에 들어가는 작업이다. 실제로 ≪삼국지≫ㆍ<위지>ㆍ<동이전>만 가지고도 한국에서는 논문이 몇 개씩 나올 정도다.

2000년대 이후에 정사 ≪삼국지≫를 어설프게접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아니면 어디서 주워 들은 것을 말하며, 촉나라의 단점을 지나치게, 혹은 말도 안되는 식으로 비약하여 까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을 왜곡하거나 무시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어떤 삼국지 관련책에선 촉의 명신 중 한 명으로 꼽히는 동윤이 간신 진지를 총애하며 코드인사를 단행했다고 깠는데, 실제로 진지를 좋게 보고 중용한 건 비의다. 또 제갈량의 후계자인 장완과 관련된 일화를 앞뒤 잘라먹고 가져와 장완을 복지부동 공무원이라고 깐 적도 있는데, <장완전>을 처음부터 읽어 보면, 제갈량이 죽은 뒤 장완이 제갈량만 못하다며 못 미더워 하는 사람들의 시선을 유연하게 받아넘겨 죽은 제갈량의 권위를 더욱 높여주고 자신의 평판도 올리는 장완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위의 사례들은 대체로 ≪삼국지≫의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거나, 혹은 유리한 내용만을 취사선택하여 주장한 것이 대부분이다

그러니 인터넷이나 대중 작가들이 흔히 그러듯이 그냥 이거 훑어보고 정사가 이렇다 저렇다 하고 단정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물론 다른 시대의 역사서에 비해서는 관련 연구가 풍부한 편이므로 참고할 만한 것이 많다. 질 좋고 연구가 잘된 정사 삼국지 관련 자료를 보고 싶다면, 일단은 도서관, 서점에서 책으로 출판된 자료들을 찾아보는 것이 최선이다. 그 외에 어느정도 검증된 사람들의 블로그를 찾아가서 읽거나, 삼국지 팬카페등을 들어가서 둘러보면좋다. 나무위키 항목 중에서도 군데군데 링크가 있으니 참고해 보도록 하자.

6 번역

대한민국에 ≪정사 삼국지≫라고 출판된 건 김원중 역 밖에 없는데 평가는 매우 좋지 않다.

우선, 오역이 많다. 예를 들면 <손호전>의 다음 구절을 보자.

八月。以軍師張悌爲丞相,牛渚都督何植爲司徒。執金吾滕循爲司空,...

("8월, 군사 장제를 승상으로 삼고, 우저도독 하식을 사도로 삼았다. 집금오 등순을 사공으로 삼았지만 ...")

번역하면 이 정도가 될 것이다. 그런데 김원중 역을 보면 다음과 같다. “8월, 군사 장제를 승상으로 임명하고, 우저를 사공으로 임명하였지만 ...”
이 번역은 문장을 이렇게 본 꼴이다.

八月。以軍師張悌爲丞相,牛渚爲司空,...

("8월, 군사 장제를 승상으로 임명하고, 우저(를) 도독 하식을 사도로 임명했다. 집금오 등순 사공으로 임명하였지만 ...")

중간을 이유 없이 잘라먹은 상황이다. 같은 역자의 ≪사기≫ 번역본이 좋은 번역으로 인정받는걸 생각해 보면, 왜 이런 결과물이 나왔는지 알 수가 없다.

또, 배송지 주석을 일부만 번역했다. 물론 다른 이십사사 번역본도 주석은 잘 번역하지 않는 경우가 많으니, 단순히 주석을 다 번역하지 않았다고 비난하는 건 지나친 처사지만, 할 거면 다 하든지 아니면 아예 하질 말든지, 어떤건 하고 어떤건 안해서 중간중간 구멍이 숭숭 나버렸다. '주석 하나'를 중간에 잘라먹은 사례도 하나 있다. <여범전>에, 배송지가 주석으로 <강표전>을 인용해서 손권여범노숙을 칭찬하고, 엄준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자 손권이 이유를 설명해 주어 엄준을 설득하는 이야기가 있다. 그런데 이걸 뒤에 나오는 손권의 설득을 빼먹고 엄준의 말에서 번역을 끝맺는 바람에 결론이 이상하게 나버렸다. 차라리 배송지 주석을 번역하는 데 들일 수고로 본문 번역에 더 정성을 들이는 게 나았을 것 같다. 심지어 김원중은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정사의 절반이라 할 수 있는 배송지 주석을 안 좋게 평가했다. 배송지의 주석은 "번잡하고 초점이 없"다고 깠는데, 그래놓고선 자기의 번역은 자기만의 연구가 들어간 정본이라는 논리를 내세웠다. 그의 책이 국내에서 유일한 ≪삼국지≫ 번역본인게 현실이긴 하나, 이것이 어느 한 번역본이 정본으로서의 권위를 인정받을 수 있는 중요한 조건인 "엄밀성"을 보장해 주는 것은 아니다. 또한 '소설'인 ≪삼국지연의≫가 "역사흐름을 왜곡"한 것이 "중국의 동북공정과 맥을 같이" 한다는 드립은 매우 뜬금없다.[10]

일부 팬들은 국역 ≪자치통감≫은 번역이 괜찮은 편이라면서 국역 ≪삼국지≫보다 차라리 국역 ≪자치통감≫의 삼국 시대 부분을 읽는 것을 권하기까지 한다. 가격이 부담스럽긴 하지만, 앞에서 언급했듯이 편년체라서 읽기 편하다는 장점도 있다. 물론 어디까지나 기본 뼈대는 정사이므로 ≪자치통감≫은 보조적으로 참조하는 선에서 그쳐야 한다.

≪자치통감≫의 중립적 관점이 문제가 될 수 있겠는데, 연호 같은 경우는 의 연호를 쓰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연도를 세기 위해서 위ㆍ진의 연호를 기준으로 삼은 것일 뿐이다. 공식적으로 헌제가 양위한 후에 바로 위 문제가 황제로 즉위했고, 역시 조환을 폐위하고 사마염이 진의 황제로 즉위했으니 위ㆍ진의 연호를 따르는것이 편년체로 서술한 ≪자치통감≫에 어울렸기 때문이다. 사마광도 직접 '삼국 중 어느 쪽도 정통으로 삼지 않았다.' 라고 ≪자치통감≫에 명시해 놨다. 다만 사마광의 조상이 사마부라는 점 때문에, 현대인들 중에선 ≪자치통감≫이 '위ㆍ진정통론'을 주장하는 것으로 착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참고로 남송 시대 주희가 ≪자치통감≫을 재분류한 ≪자치통감강목≫에서는 사마광의 견해를 까내리며 '촉한정통론'을 내세웠다.

인터넷에서는 한 때 파성넷에서 번역을 꾸준히 해서 일단 정사 원본의 번역을 끝내고 데이터베이스를 꾸렸으나, 운영자가 관리 안 하는 사이에 사이트가 폭파되었다. 여기서 끝났으면 그나마 나았겠지만 문제는 홈페이지가 야후에 계정을 두었다는 것이었다. 즉, 야후코리아의 철수로 정보가 모두 날아가 복구가 불가능한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백업해둔 곳이 있어 파성넷 운영자 견초와 함께 사이트를 하나 새로 세웠다는 것이다. 김원중 역 ≪삼국지≫를 바탕으로 시작을 했기에 오류가 많아 번역이 미진한 부분도 있어서 주의가 필요하긴 하나, 이 부분은 오래전부터 발견 즉시 오류를 수정하는 사후 작업이 계속 이루어지고 있다. 삼국전투기의 작가 최훈은 마지막 글에서 파성넷에 대한 감사함을 표시하기도 했다. 파성넷이 날아갔을때는 진짜 난감했었다고 한다.

7 관련 문서

8 참고 링크

링크에 있는 중국정사조선전은 동북아역사재단에서 역주(譯註) 중국정사외국열전 시리즈로 낸 바 있으므로 도서관 등에서 열람할 수 있다. 단, 이 기사들은 철저하게 당대 중국인들의 관점에서 쓰인 것들이라는 것을 사전에 염두에 두어야한다. 그 외에 한자 단어의 한글 표기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것이 많다.
한국의 ≪삼국지≫ 원문 및 기타 역사 등 한문 고전 번역 데이터베이스. 전체 검색은 오른쪽 위에 있고 원문 번역문만을 검색하기 위해서는 삼국지 자료실 탭을 클릭하면 나오는 창을 사용하면 된다.
  1. ≪청사고≫를 넣어 25사, 25사에 ≪신원사≫를 넣어 26사라고도 한다.
  2. ≪삼국지≫권 33ㆍ<촉서>ㆍ<후주전> : 國不置史,注記無官 ...출처
  3. ≪정사 삼국지≫ㆍ<촉서>ㆍ<비의전>에 '연희(延熙) 14년 여름에 (비의가) 성도로 돌아왔는데, 성도의 망기(望氣; 안개ㆍ구름을 살펴 길흉을 점침)하는 이가 도읍에 재상(宰相)의 자리가 없다고 말하였으므로 겨울에 다시 북쪽으로 가서 한수(漢壽)에 주둔하였다.'라는 기록을 두고 하는 말인듯 하다. (... 十四年夏,還成都,成都望氣者云都邑無宰相位,故冬復北屯漢壽。)
  4. 곤형(髡刑) : 고대에 죄인의 머리카락 전부 또는 일부분을 밀어버리는 형벌.
  5. 출처
  6. 진(晉)나라의 손성(孫盛)이 쓴 진나라 역사서
  7. 출처
  8. ≪22사차기≫권 6ㆍ<삼국지> : ... 此真無識之論也!출처
  9. 전고(典故)
  10. 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