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민주화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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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민주화 운동의 역사
서울의 봄5.18 광주민주화운동6월 민주항쟁
5.18 광주민주화운동 하위문서
5.18 민주화운동/왜곡5.18 광주민주화운동 명칭 과정5.18 민주화운동/학살
5.18 항쟁에 대한 역사왜곡
광주민주화운동 진보편향 명칭설5.18 역사왜곡/TV조선5.18 역사왜곡/채널A5.18 연고대생 북한간첩설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파일:Attachment/unesco-memoryoftheworld.gif
이름한국어1980년 인권기록유산 5·18 광주 민주화운동 기록물
영어Human Rights Documentary Heritage 1980 Archives
for the May 18th Democratic Uprising against Military Regime,
in Gwangju, Republic of Korea
국가·소장대한민국 : 국가기록원, 광주광역시, 육군본부, 5·18기념재단, 국회도서관
미국 : 국무부, 국방부
등재유형기록유산
등재연도2011년
제작시기1980년 ~
width=100%
광주민주화 운동에 대해 다룬 슈피겔지의 사진. [1]
5.18 광주민주화 운동
발생시기1980년 5월 18일 ~ 5월 27일
발생 위치대한민국
관련 기관12.12 군사반란을 통해 집권한 신군부
진행 과정 전개과정 문단 참고.
피해내역직접사망[2]165명
부상3,139명
구속 및 구금등의 부가 피해자1,589명
관련 문서10.26 사건
12.12 군사반란
서울의 봄
5․17 내란
광주학살
5.18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왜곡
5.18 북한개입설 보도사건
6월 민주항쟁
제5공화국
대한민국 전직 대통령 구속사건
사적지 목록
아아, 광주여 무등산이여

죽음과 죽음 사이에
피눈물을 흘리는
우리들의 영원한 청춘의 도시여

우리들의 아버지는 어디로 갔나
우리들의 어머니는 어디서 쓰러졌나
우리들의 아들은
어디에서 죽어 어디에 파묻혔나
우리들의 귀여운 딸은
또 어디에서 입을 벌린 채 누워있나
우리들의 혼백은 또 어디에서
찢어져 산산이 조각나 버렸나

하느님도 새떼들도
떠나가버린 광주여
그러나 사람다운 사람들만이
아침저녁으로 살아남아
쓰러지고, 엎어지고, 다시 일어서는
우리들의 피투성이 도시여
죽음으로써 죽음을 물리치고
죽음으로써 삶을 찾으려 했던
아아 통곡뿐인 남도의
불사조여 불사조여 불사조여. (후략)

-김준태, <아아, 광주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3]

선생님, 광주의 5월을 아세요

선생님, 광주의 5월을… 광주의 5월을 아세요
그날 꽃잎처럼 쓰러져간 언니, 오빠를 아세요
아이들은 몰라야 되나요 우리들은 알면 안 되나요
그날 남녘땅 이곳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선생님, 슬픔의 망월을 슬픔의 망월을 아세요
그날 거름처럼 묻혀져 간 언니, 오빠를 아세요

ㅡ아름나라 어린이 예술단, 2004년 5.18 민주항쟁 24주년 기념식 노래 <선생님, 광주의 5월을 아세요>

"시민 여러분, 지금 계엄군이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들이 계엄군의 총칼에 숨져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끝까지 광주를 사수할 것입니다. 시민 여러분, 우리를 잊지 말아 주십시오.”

ㅡ5월 27일 계엄군이 광주로 쳐들어 올때 한 여성이 말한 말

1 개요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충격적인 사건 중 하나이자 4.19 혁명, 부마민주항쟁등과 함께 오늘날에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친 민주화 운동 중 하나.

대한민국의 독재 군부에 의해 저질러진 무고한 시민에 대한 학살범죄로, 시민과 계엄군 모두에게 평생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1979년, 12.12 군사반란이 일어나자 전두환을 중심으로 구성된 신군부에 의해 군부가 장악되었고 서울의 봄으로 민주화 열기가 거세어지자 비상계엄 전국확대를 일으킨다.

12.12 군사반란이 만들어낸 계엄령대학들의 겨울방학, 연말이라는 점이 맞물려 이에 대한 대처는 뒤늦게 나타났으며, 대학들이 개학을 맞이한 3월 이후 안개정국에 대한 사항이 알려졌고 1980년 4월부터 이를 규탄하기 위한 집회가 끊이지 않았으며 1980년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대한민국전라남도 광주시[4]에서 대규모의 민주화 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사건 당시의 군부의 통제로 인해 언론매체는 '광주 사태'로 칭했으나 군부 정권이 끝난 이후 진상 조사가 이루어져, 광주사태라는 표현은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 다만 일부 민간인들을 중심으로 국민의 기본권과 민주주의가 군부에 의해 유린당했다는 것에서 따와 광주사태라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기는 하다.

미디어에 따라 광주민중항쟁, 광주학살, 광주사태등으로 부르며 보통 일어난 날짜만을 줄여서 5.18로 부르기도 한다.

전두환의 군사독재에 대항해서 일어난 시위가 진압군과의 격한 대립 끝에 광주에 진입하려는 진압군과 광주 시민들의 총격전으로 발전, 결국 진압되지만 수많은 사상자[5]가 발생하였으며, 군사정권에 의한 인권탄압과 민간인 살해 사례로서 많이 알려진다. 이 정도로 설명하기에는 당시 상황과 이후 여파가 어마어마하게 크다. 이 일련의 사태는 대한민국의 민주화 과정의 일부로서, 군부독재에 항거하는 시민들의 희생으로 의미가 재부상했다.

당시 계엄군으로 투입된 특전사 대원들에게도 당시 사건은 지우고 싶은 암울한 기억이다. 이들은 그 당시 시대사적 맥락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채, 상부로부터 빨갱이를 때려잡으러 간다는 대의명분을 갖고 이를 수행하였으며 진압당시 학생과 시민들을 진압하다 점점 폭력의 수위가 상승, 같은 나라 국민을 상대로 총구를 겨누는 상상도 하기 싫은 일을 다수 겪었다. 진압작전에 참가했던 계엄군들이 갖고 있던 "빨갱이로부터 나라를 지켰다는 긍지와 자부심"은 나중에 진실이 하나 둘 씩 밝혀지면서 "군사독재 정권의 앞잡이" 내지는 "잔인한 학살자"라는 불명예로 돌아왔다. 실제로 당시 계엄군의 상당수는 외상후 스트레스 증후군등 다양한 정신적 문제를 겪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결국 계엄군과 시민 양측 모두에게 심각한 상처로 남게 되었다.

계엄군이 시민을 사살한 것은 사실이지만, 모든 책임을 그들에게만 지워서는 안 된다. 그들은 자신의 의지에 따라서 행동한 것이 아니며, 어떠한 진실도 알지 못했던 시대의 희생자이기 때문이다. 1차적인 책임은 계엄군이 아닌 최종 결정권자이자, 명령권자인 전두환군정에게 있다. 계엄군에게만 모든 책임을 떠넘기고 시민 학살을 지시한 장본인의 중죄를 어물쩡 넘어가려는 행위가 절대 정당화되어서는 안 된다.

하지만 당장 /학살 문서를 들어가 보면 나오지만, 수하도 없는 사살, 어린아이에게 총격 행위 등등 계엄군의 만행은 그야말로 단순 "명령대로 따랐다" 라는 수위를 한참 전에 넘어섰기에 말단 계엄군도 잘한 건 하나도 없다. 과장 좀 보태면 1980년 5월 광주의 계엄군은 그 때 광주 사람들 입장에선 가히 유고슬라비아 내전의 세르비아군 이나 벨라루스 초토화작전독일 국방군과 같은 막장 전쟁범죄자 집단이었다. 이러한 잔혹한 만행들은 계엄군의 피해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일본군이나 나치 와 동급이라고 보면서 그럴 거면 저 두 집단의 말단 병사들도 피해자냐고 비꼬는 과격한 의견이 나오는 이유.

또한 5.18 광주민주화 운동을 유혈진압한 군부의 행동을 묵인, 사실상 전두환 군사정권의 편에 섰다고 여겨진 미국에 실망한 운동권과 지식층 중 일부가 공개적으로 반미를 주장할 명분을 제공하였고, 과격파 운동권에 의해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핑계로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 사건으로 대표되는 폭력을 동반한 반미주의 운동이 2000년대 중반까지 이어지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2 용어

용어에 대한 의견은 여러 가지 있는데 현재 일반화된 단어는 5.18 광주민주화운동이라는 단어다. 광주민주화운동이란 내란세력과 저항세력을 모두 함의하는 기계적인 중립 명칭이다. 용어의 시작은 민주정의당이다. 1988년 6월 21일에 5.18의 명칭으로 논란이 있을 때 민정당은 '광주민주화운동'이란 명칭을 주장했다. 이 명칭은 통일민주당평화민주당에게 격렬한 반대를 받았고 오후 늦게까지 절충을 계속 겪을 정도였다. 동아일보 1988년 6월 21일 기사. 사흘 뒤에 통일민주당은 결국 민정당의 요청을 받아들였으나 평화민주당은 여전히 반대했다. 1988년 6월 24일 동아일보 기사 급기야 평민당에선 "광주민주화운동"이라는 명칭을 쓰는 행위를 "배신행위"라고까지 했다. 이 단어가 얼마나 불쾌하게 받아들여졌는지 느낄 수 있다. 1988년 6월 24일 동아일보 기사 평민당은 27일이 돼서야 이 명칭을 받아들였다. 1988년 6월 27일 동아일보 기사

5.18 단체에선 상당히 긴 시간동안 5.18 광주민중항쟁이란 단어를 썼다. 일부에선 이걸 진보용어로 오해하기도 하는데 사실 '광주민중항쟁'이란 단어는 보수주의자유주의세력한테도 받아들여졌던 단어였다. 2000년대 초반에만 해도 동아일보같은 보수주의 언론이 그대로 썼을 정도였다. #, #, #

민주화운동이란 명칭이 일반화된 것은 노무현 정부부터였다. 이것 때문인지 노무현 정부 이후부터는 민중항쟁이 진보명칭인 것처럼 오해받는 일이 생기기도 했다.

진보나 좌파에서만 통용됐던 편향단어는 민주화운동도 아니고, 민중항쟁이란 단어도 아닌 광주혁명, 광주민중혁명이란 명칭인데 너무나 극단적이고 편향된 명칭이라 학계에서 씹혔다. 김영택 박사나 최정운 박사에 따르면 5.18은 민중혁명같은 게 아니며 오히려 시민군이 그런 걸 거부했다고 한다. [6]

유사역사학세력을 중심으로 폭동이라는 명칭이 사용되기도 하나, 학술적으로 보나 일반 인식에 비춰보나 올바르지 않은 명칭이다. 자세한 것은 5.18 민주화운동/왜곡 참고.

3 전개과정

디시위키의 518 민주화 운동 전개 과정 문서도 참고하면 좋다.

3.1 1980년 서울의 봄, 그리고 서울역 회군

해당 문서 참조

3.2 5월 17일

1980년 4월 이후 전국적으로 확산된 학생들의 민주화투쟁과 소위 사북사건 등으로 대표되는 노동자들의 투쟁이 격화되는 가운데 대한민국 국회에서도 비상계엄 해제를 논의하기 위한 본회의 개최를 결정하게 되자 신군부는 이를 막고 정권장악을 기도하게 된다. 그리하여 전두환, 노태우 등의 압박으로 열린 비상국무회의에서 1980년 5월 18일 0시를 기해 비상계엄 전국 확대를 단행하였다.

계엄사령부는 모든 정치활동의 중지 및 옥내 외 집회 시위의 금지, 언론 출판 보도 및 방송의 사전 검열, 각 대학의 휴교령, 직장이탈 및 태업파업의 금지 등의 조치를 취했다.17일새벽에 계엄군은 전국 대학교의 학생운동권 관련 학생들을 모조리 검거했고, 18일에는 김대중, 김종필 등 26명의 정치인을 학원, 노사분규 선동과 권력형 부정축재혐의로 연행하고 김영삼을 연금시키는 등 초법적 사태가 일어났다. 국회 또한 폐쇄되었다.

이러한 조치는 헌법에 규정된 국회통보 절차도 거치지 않고 계엄군을 동원, 국회를 무력으로 봉쇄한 채 취해진 불법조치였다. 비상계엄의 확대에 따라 전북 금마에 주둔하고 있던 7공수여단이 17일 저녁 10시경 광주에 투입되어 전남대학교, 조선대학교, 광주교육대학교 등에 진주하였다.

3.3 광주에서의 움직임

학생 시위는 서울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서 5월 14일의 광주에서는 민주 대성회라는 이름의 시위가 열리고 있었다. 여기서 전남대학교 학생회장이자 들불 야학의 멤버였던 박관현이 연설을 한다.

민주 대성회로 일어선 학생들은 5월 15일 서울에서 큰 시위가 열렸다는 말을 들었다. 이에 호응하여 다음날인 5월 16일에 학생들은 거리 시위로 나서고, 이것이 훗날 촛불집회 때도 알려진 횃불시위다. 이 시위는 별다른 충돌없이 조용히 끝났으나, 여기서 시위를 주도했던 학생회측은 만일 휴교령이 내려질 경우 학교에서 만나자는 행동지침을 내렸다. 학생회 간부들이 긴급연행되면서 지도부가 사라진 서울의 학생운동과는 이 부분에서 결정적인 차이가 생겼다.

3.4 5월 18일

첫 충돌은 5월 17일 23시부터 발생했다. "5.17. 23:00경부터 시위주동자에 대한 이른바 '예비검속'을 실시하여 재야인사와 학생회 간부 등 연행대상자 22명 중 정동년, 권창수, 오진수, 이승룡, 유재도 등 8명을 체포하는 등 전국적인 비상계엄의 위력을 과시하여 헌법과 법률에 정한 절차에 의하지 아니하고 신체의 자유 등을 침해하여 폭동"하였다.[7]

5.18. 10:00경에는 2백여 명에 이른 학생들이 공수부대원들의 학내 잔류 학생에 대한 구타행위를 비난하면서 비상계엄 해제하라, 공수부대 물러가라는 구호를 외치고 돌을 던지는 등 시위를 하자, 위 공수부대원들이 학생들의 강제 해산을 시도하는 과정에서 이들을 쫓아가 진압봉으로 어깨 외에 머리 등을 무차별 가격하고 체포한 학생들을 난폭하게 연행하여 충돌이 발생했다.[8] 공수부대원들은 도망가는 학생들을 쫓아가며 폭행을 가했고, 심지어는 신분을 밝힌 전남대 교수까지 폭행했다. 근처를 지나던 시내버스에서 공수부대원들의 진압에 항의하던 학생들도 폭행을 당했다. [9]

이 일로 학생들은 계엄군에게 쫓기면서 시내로 나와 시위를 시작했다. 이에 계엄군은 오후 3시부터 시내로 투입되어 진압을 시작하였다. 계엄군은 도청 앞과 금남로에 진출하여 시위 학생 뿐만 아니라 시위와 무관했던 일반 시민들까지 진압봉으로 무차별 구타하였고 3∼4명이 한조가 되어 시위현장의 주변 건물까지 샅샅이 뒤지며 진압작전을 전개하였다. 심지어는 여관에서 머무르고 있던 외지인까지 끌려나왔고 광주 공용터미널에서 청각.언어 장애인이 대답을 안한다는 이유로 계엄군에게 구타당해 사망하는 일들이 벌어졌다. 이러한 폭력에 광주 시민들은 분노하였고, 이것이 학생과 시민이 연대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5월 18일 부터 5월 26일 까지의 계엄군의 행동에 대한 상세한 문제점은 /학살 문서 참고.

3.5 5월 19일

어제의 사태에 놀란 시민들은 다시 거리로 나왔다. 11공수여단이 광주로 증파된 가운데 상황이 이렇게 되자 시민들은 금남로에 모여들었고 3000명의 시민들은 경찰 저지선 앞에서 “비상계엄 해제하라, 전두환은 물러가라, 김대중을 석방하라” 외치며 30분 정도 시위를 하였다. 전날의 계엄군의 폭력에 대한 소식이 시민들에게 전해지면서 분노한 시민들이 시위에 가세하게 된것이다.

그러나 공수부대는 전날과 마찬가지로 무차별적인 폭력을 행사했고 조선대학교로 철수했던 부대까지 가세하면서 강경진압으로 일관했다. 그러나 강경한 진압이 계속 될수록 시위에 참가하는 시민들의 숫자는 더욱 불어났다.

3.6 5월 20일

내리는 가랑비로 인해 오전에는 소강상태였으나 시내의 가톨릭 센터에서는 30여명의 남녀가 공수부대원들에게 붙잡혀 무차별로 구타를 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오후가 되면서 시장의 상인들까지 철시하고 시위에 나서기 시작하여 그 인파는 10만여 명이 넘었다. 윤상원 등 계엄령 전국확대 조치당시 일제검거 대상이 아니었던 들불야학의 멤버들이 사건의 진행추이를 자세히 담은 정보지 『투사회보』를 제작해 시내도처에 수천 매씩 배포하였다.

저지선을 사이에 두고 밀고 당기는 공방전이 전개되고 있을 오후 6시쯤, 공수부대의 만행에 격분한 택시기사와 버스기사들은 200여대 택시와 버스에 라이트를 켠채 유동삼거리에서 도청으로 들어왔다.[10][11] 차량시위로 인해 시위가 더욱 고조되며, 그런 와중에 노동청 쪽에서 달려들어온 버스에 의해 경찰 4명이 사망하자 계엄군은 최루탄을 쏘면서 차량을 공격하고 시민들을 진압하였다.

이런 가운데 시민들의 시위와 공수부대의 무자비한 탄압에 대해서 전혀 보도하지 않은 광주MBC에 분노한 시민들은 광주MBC 건물에 불을 질렀고,[12] 광주경찰서와 광주서부경찰서가 시위대에 의해 점거되었다. 한편 20일 밤중에 광주역 근처에서 계엄군이 발포하여 2명의 시민이 사망했다. 그러나 자정 이후 광주는 공권력의 통제를 벗어났으며, 신현확 내각이 이날 총사퇴했다.

3.7 5월 21일

5월 21일은 석가탄신일로 공휴일이었다. 전날 밤 광주역 근처에서 사망한 두 시민의 시체가 리어카에 실려 금남로에 등장했고 이를 목격한 광주시민들은 더욱 격분하게 되었다. 이날 새벽 아시아자동차 공장을 시위대가 점령, 군용트럭과 장갑차를 입수하였다.

이날 오전 10시경, 장갑차를 앞세운 시민들의 대열에 군의 저지선이 금남로3가 상업은행에서 금남로1가 전일빌딩으로 후퇴한 것을 기해 시청광장의 계엄군 병력에 대한 본격적인 실탄 지급이 실시되었다출처. 실탄 지급과 뒤이은 사격 명령의 책임자는 지금도 불명확한 상황에 있다.

계엄군은 시민들에 밀려서 전남도청 앞에 방어선을 구축했고 전남도청을 사수하라는 지시가 떨어진 상태였다고 한다. 광주시민들은 대형버스 2대를 앞세우며 저지선을 향해 돌진하였으며 곧바로 계엄군의 총소리가 났다. 하지만 계엄군의 총소리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광주시민들은 저지선을 향해 계속적으로 전진하였다. 발포 직전인 낮 12시 59분 경, 당일 오전 탈취한 시위대의 장갑차 돌진으로 계엄군측에 사망자가 1명 발생하였다[13]. 이 사건에 이어 전남도청 스피커에서는 애국가가 울려 퍼졌고 그때부터 군인들이 전남도청 앞을 피바다로 만들었다. 사격은 계속되고 어린이 남녀노소 상관없이 살해당했다. 56명이 숨지고 500명이 부상을 당했다.


도청 앞 집단발포로 인해 시민들은 무장 필요성을 느끼고 시위대는 화순, 나주, 해남, 영암 등 시외지역으로 진출해 무기고를 점거하고 무장했고, 공사현장의 폭발물과 다이나이마이트도 일부 무장으로 활용되었다는 증언이 있다. 이렇게 획득한 각종 무기들을 분배하고 10여명 단위로 임시 분대가 형성되며 '시민군'이 생겼다. 시민군들은 계엄군의 정식 발포가 시작된지 2시간 20분 정도가 지난 21일 오후 3시 20분경부터 응사를 시작하였다. 이때 모인 1,000여명이 넘는 시민군들은 공수부대와 혈전을 벌였으나 훈련과 장비, 조직력의 열세로 시민군측의 피해가 훨씬 컸다. 공수부대는 광주 시내 각 빌딩의 옥상에서 조준사격을 가했고 시민군은 이에 맞서 시가전이 벌어졌다. 그런 가운데 전남대병원 옥상에 2대의 중기관총이 설치되었고 결국 견디지 못한 계엄군은 조선대와 광주교도소로 철수하게 되었다.

3.8 5월 22일~26일

5월 22일 오후 3시 도청 앞에서는 제1차 시민궐기대회가 열렸다. 시민들은 이날부터 매일 오후 3시와 9시, 2차례씩 도청 분수대 앞에서 궐기대회를 갖기로 결정하였다. 원하는 사람에게 연설할 기회를 주고 시가행진의 코스와 선언문 내용, 그리고 시내 치안유지 방법 등이 토론되었다.

한편으로 광주의 원로급 인사들이 도청에 모여 수습위원회를 조직했지만 강경한 입장의 학생수습위원들과 마찰을 빚기 시작했다.[14] 이 수습위원들은 상무대로 들어가 계엄군에게 사태 수습 전에 계엄군을 투입하지 말고 과잉 진압을 인정하도록 하는 등의 내용을 담은 7개항의 수습안을 건의했다. 그러나 계엄군 대표와의 협상은 지지부진했으며 오히려 계엄사령부는 학생 시위를 배후에서 조종했다고 주장하는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중간 수사결과를 발표하여 광주 시민들을 더욱 분노케 했다.

그러나 결국 5월 23일, 학생수습위는 자체특공대를 조직해 무기회수에 나섰다. 한편으로는 부상자들을 위한 헌혈을 독려했고 도청 근처 상무관에는 사망한 시민들의 관이 안치되었다.

작전상 공수부대를 퇴각시킨 전두환과 신군부는 언론 플레이를 통해 여론조성에 나섰다. 이때가 돼서야 광주관련 보도들이 쏟아졌지만 실상을 전혀 알리지 않는 것들이었다. 당시 신문 기사에서 광주 사태는 '광주 소요 사태, 시민들 소총으로 무장, 도로 검거'와 같은 식으로 보도 되었으며, 보도 사진역시 불타는 도로나 부서진 자동차들이었다. 또한 광주로 통하는 모든 도로가 차단되고 통신수단과 교통수단이 모두 끊겼다. 군부는 광주를 철저하게 고립시켰다. 이 외곽봉쇄작전으로 인해 여러 실종자와 사상자들이 발생했다. 5월 23일 오후 1시, 지원동 근처 주남마을에서는 공수부대의 총격으로 17명이 사망하는가 하면, 그 다음날에는 저수지에서 수영하다가 군인을 보고 손을 흔들던 아이들에게까지 총격을 가하는 사건들이 일어났다. 그런가 하면 공수부대와 전교사 부대 사이에 서로를 오인한 총격전이 발생하여 사망자가 나오기도 했다.

5월 25일 미7함대 소속 항공모함 코럴시호가 부산에 출동했다. 광주시민들은 아무것도 모른 채, 5월 25일 시민궐기대회에서 미군 항공모함이 부산에 왔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시민들이 기쁨의 환호성을 질렀다. 그러나 미국은 아직 광주에서 대피하지 못한 자기 국민 130명을 안전한 곳으로 이동시키기 위해 항공모함을 파견한 것 뿐이었다.

5월 26일. 계엄군은 화정동에서 농성동 방면으로 진출했다. 사태가 악화되자 수습위원 중 재야인사로 구성되어 소위 남동성당파로 불린 홍남순 변호사, 김성용 프란치스코 신부, 이성학 장로 등은 계엄군의 진입을 막기 위해 농성동에서 죽음의 행진을 감행했다. 이와는 별개로 제5차 민주수호 범시민 궐기대회가 열렸고 도청에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도청의 시민군들은 새벽에 계엄군이 도청으로 진입할 것이라 발표하면서 여성과 어린 학생들을 돌려보냈다.

3.9 5월 27일

운동 10일째인 27일 0시. 계엄군은 광주시내의 전화선을 차단하고 진압작전에 돌입했다. 새벽 3시에 한 여성이 계엄군이 쳐들어 오고 있다며 우리를 도와달라는 애절한 내용의 가두방송 소리가 광주시내 곳곳에서 들려왔다. 새벽 4시가 되자, 계엄군은 전남도청 앞을 완전히 포위했고 처절한 전투가 벌여졌다. 전투는 1시간 정도 벌여졌다. 시민군은 죽을힘을 다해서 싸웠으나 탱크하고 중무장한 군인들을 이길수는 없었다. 1시간후, 완전 장악되었다.

당시 발표한 공식 피해자는 121명이었으나, 후에 192명으로 수정발표되었다. 부상자 또한 공식 집계로 852명이었으나, 수없이 많은 실종자가 발생했던 것을 생각해보면 이 수치는 최소 집계에 불과하다.

3.10 사건의 영향

5.18 광주민주항쟁은 한미관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것 때문에 로널드 레이건이 전두환에게 거부감을 보이거나 한미관계에 영향을 끼쳤을 정도였고, 이런 미국의 태도는 김대중의 석방에도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정상회담 교섭의 실무를 맡았던 손장래 전 주미공사는 4일 서울 마포구 동교동 김대중도서관에서 열린 국제학술회의에 참석해 당시 비공개 접촉을 회고하며 “미국 측은 레이건 대통령이 ‘취임하자마자 어떻게 광주에서 수많은 사람을 죽인, 손에서 피가 흐르는 사람을 만날 수 있겠느냐’며 정상회담을 거부했다”고 밝혔다.

정상회담 교섭이 교착상태에 빠지자 그는 내란음모 사건으로 사형을 선고받은 김대중대통령의 구명 문제를 에둘러 언급했고 당시 앨런 보좌관이 이를 레이건 전 대통령에게 귀띔해 비공개 접촉 1달 만에 정상회담이 성사됐다고 설명했다. 이 정상회담을 계기로 김대중 전 대통령은 감형을 받고 1982년 석방됐다.


“김대중 살려주면 전두환 美 국빈방문 허용 ‘韓·美 정상회담’ 거래 있었다”

또한 당시 국민들의 인식에도 큰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실제로 5.18 민주화운동은 5.16 군사정변과 달리 전두환의 정통성에 심각한 영향을 준 것으로 평가받는다. 심지어는 5.16 군사정변 당사자조차 내란세력이 저지른 짓이라고 인식할 정도였다.

김종필, 김재춘, 김계원, 장세동 씨 등 10여 명이 둘러앉았다. 전두환 씨는 불참.

국회가 화제가 되고 얘기는 80년 광주문제로 옮아갔다.
장세동(전두환 정권의 국가안전기획부장 경호실장) 씨가 광주사태는 진주민란이나 홍경래의 난 같은 것이라는 취지로 80년 5월의 광주상황을 설명해갔다. 그러자 김재춘씨(3代 정보부장)가 무뚝뚝하고 직선적인 성격 그대로 '무슨 그따위 얘기를 아직도 하고 있는 거요. 여기 여기 앉아 있는 사람들을 바보로 아는가. 당신네들이 총칼 들고 정권 잡아가지고 저지른 짓을 무슨 홍경래 반란이라고?'하며 내쏘았다. 그 자리에서 어떤 분은 웃으며 일어서면서 '국회에서 특위 조사할 것도 없이 결론이 이미 나와 버렸군' 하여 웃고 헤어졌다. (당시의 한 참석인사)


김충식, 2012, 남산의 부장들, 782

5.16 군사정변에 가담할 정도로 반공주의 성향이 강한 3대 정보부장도 저랬으니 일반 국민들 사이에 퍼진 인식은 어땠을지 짐작이 가능하다.

3.11 그리고 그 후…

  • 1980.5.29. 상무관에 안치되었던 5.18 희생자 129명의 시신이 망월동 시민묘지 제3묘역에 안장.
  • 1980.5.30. 서강대생 김의기가 서울 기독교회관 3층에서 "학살정권 물러나라"를 외친 뒤 투신자살.
  • 1980.6.9. 삼진특수철 노동자 김종태가 '광주시민항쟁의 넋을 위로하며'라는 제목의 유서를 남기고 분신자살.
  • 1980.12.9. 광주 미국문화원 방화사건이 일어남.
  • 1981.5.18. 5.18 제1주기 추모식이 경찰의 원천 봉쇄로 무산.
  • 1981.5.27. 서울대 도서관 앞 광장에서 5.18 1주기를 맞이해 침묵시위를 벌임. 이때 서울대생 김태훈이 "전두환 물러가라"를 세 번 외친 뒤 서울대 도서관 4층에서 투신자살함.
  • 1982.3.18.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 사건이 일어났다.
  • 1982.5.18. 5.18 제2주기 추모식이 경찰의 봉쇄로 무산되자 유족 30명만이 모인 채 위령제로만 진행.
  • 1983.5.18. 정부가 5.18 당시 희생자의 유족과 부상자에 대한 격리조치를 시행함에 따라 3주기 추모식이 무산됨.
  • 1983.11.12. 미국 대통령인 로널드 레이건이 방한하자 대학생들은 '광주학살 배후조종 등 내정간섭 금지'를 요구하며 반미 시위를 벌였다.
  • 1984.5.18. 6천여명의 광주시민이 모인 가운데 5.18 4주기 추모식이 무사히 치뤄졌다.
  • 1985.5.18. 5.18 5주기 추모식 개최. 이날 야당, 재야인사, 종교인 등 500여명이 참석했다.
  • 1988.5.18 ~ 5.27. 준합법적인 5.18 기념행사가 개최되었다.
  • 1988.11. 6공 정부, 광주민주화운동 진상조사 특별위원회 구성.
  • 1989.2.3. 최초의 5.18 진상규명 다큐멘터리 <어머니의 노래>, 광주 MBC에서 방영.
  • 1989.3.8. 5.18 진상규명 다큐멘터리 <광주는 말한다>, 광주 KBS에서 방영.
  • 1990. 광주 피해자 보상법 제정
  • 1993. 김영삼 대통령, 특별담화 통해 광주 수습책 제시. 12.12를 쿠데타 사건으로 규정.
  • 1995.7.18. 서울지검, 5.18 수사 결과 발표.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요지로 불기소 결정 → 국민들의 반발 일어남.
  • 1995.9.22. 국민회의 공소시효 만료 무효화 및 특별검사제 도입 등을 담은 법안 국회 제출
  • 1995.9.30. 민자당 대변인 논평을 통해 소급입법 추진 위헌의 소지 및 특별검사제는 우리 실정에 맞지 않다고 거부 의사 표시
  • 1995.10.17. 민자당 김윤환 대표위원 국회교섭단체 대표연설에서 특별법 제정 반대 입장을 분명히 함. 같은 날 국민회의 정대철 부총재는 특별법 제정 거듭 촉구
  • 1995.11.24 김영삼 대통령, 민자당에 5.18 특별법 제정 지시.
  • 1995.11.30. 12.12 및 5.18 사건 특별 수사본부 발족, 검찰, 재수사 결정.
  • 1995.12.2. 전두환, 연희동 자택에서 대국민 담화 발표 뒤 낙향 후 연행. 구속 수감.
  • 1995.12.21. 검찰, 전두환·노태우를 12.12 관련 혐의로 기소, '5·18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 제정.
  • 1996.8. 검찰, 전두환·노태우에게 각각 사형, 징역 22년 6월 구형
  • 1997. 대법원, 전두환·노태우 상고심 선고[15]
  • 1997.4.22. 국무회의, 5월 18일을 법정기념일로 제정.
  • 1997.5.1. 5.18 희생자 유해가 망월동 구 묘역에서 새 묘역으로 이전.
  • 1997.7.28. '5․18 완전해결과 정의실현, 희망을 위한 과거청산국민위원회'가 인권운동사랑방 홈페이지를 통해 '전/노 사면반대' 운동을 진행함.
  • 1997.7.29. 박종철의 부친 박정기 등 민가협, 유가협 소속 회원 16명이 '전/노 사면반대'를 호소하며 청와대 앞 대고각에 설치된 신문고를 두드리다가 청와대 경호원들에 의해 강제 연행되었다.
  • 1997.12.22. 김영삼 정부, 국민대화합 차원에서 전두환·노태우 사면. 당시 사면일이 12.22일이었는데 크리스마스 특별사면과 리스트가 혼동되어 1998년으로 보도되기도 했다.
  • 2000.5.18. 제20주년 5.18 민주화운동 기념식 개최. 이날 최초로 대통령이 참석함.
  • 2011. "5.18 광주민주화운동 기록"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Memory of the World)으로 등재

3.12 광주 어록 10년

  • 우리는 보았다. 사람이 개 끌리듯 끌려가 죽어가는 것을 두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그러나 신문에는 단 한 줄도 싣지 못했다. 이에 우리는 부끄러워 붓을 놓는다. 1980년 5월 20일 전남매일신문기자일동 전남매일신문사장 귀하. - 전남매일신문기자의 집단사직서.
  • 나에게 총이 있었다면 나도 (계엄군에게) 총을 쐈을 것이다. - 89.2.23. 국회청문회에서 천주교 광주대교구 조철현 비오 신부(몬시뇰)[16]
  • 임신 8개월의 딸이 숨졌는데 뱃속에는 태아가 뛰고 있었다. 민정당 의원들에게 더도 덜도 말고 한번만 똑같은 일을 당해보라고 얘기하려 했는데 아무도 안나왔으니 - 89.2.22. 국회청문회 안현녀 증인
  • 딸이 행여 살아서 돌아올까봐 대문을 잠그지 않고 있으며 밤에 바람소리만 스쳐도 집 밖에 나가보곤 했다 - 88.5.21. 행불자 추가 신고한 이옥순 씨
  • 졸업장을 준다니 고맙긴 하지만 광범이는 안 좋아 할거요. 그때의 주범들이 버젓이 활개를 치고 있는데 좋아할 리가 있겠소? - 88.12.3. 5.18 명예졸업장을 받은 방광범 군의 아버지 방두형 씨
  • 여보, 당신은 천사였오. 천국에서 다시 만납시다 - 임산부임에도 학살된 최미애 씨의 묘비명[17]
  • 아무리 생각해 봐도 우리 가족이 왜 총을 맞아야 했는가를 모르겠어요. 시위를 한 것도 아니고 고향에 돌아가려 했는데 왜 우리에게 무차별 총질을 했는지 모르겠어요. - 88.5.15. 최연소 부상자 김준향
  • 살아 생전 아들의 뼈를 찾아 양지바른 곳에 묻어주는 것이 소원이다. - 5.17 행방 불명자 부친 김점식 씨
  • 30년 전 6·25의 국가적 전란 때를 빼고는 가장 난삽했던 사태에 직면한 비상계엄군으로서 군이 자제에 자제를 거듭했던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중략) 신중을 거듭했던 군의 노고를 우리는 잊지 않는다. - 80.5.28 조선일보 사설
  • 중국 문화대혁명때 수천만명이 희생당하고 엄청난 피를 흘렸다. 이런 갈등, 이런 불화, 이런 피를 흘린 사건이 있었는데도 (책임자) 몇사람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한 사람도 처벌하지 않았으며, 등소평이 중심이 돼 그 원로들을 다 대접하고 활용했다. 거기에 비하면 광주사태는 아무것도 아니다. - 95.10.5 경신회[18] 모임에서 노태우

4 세계기록 유산 등재

2011년 5월 25일, 5.18광주민주화운동 기록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Memory of the World)으로 등재되었다. 등재된 페이지 유네스코한국위원회 페이지

기록 유산중 현대사 관련 자료중 최초의 등재자료이자, 유례없는 대규모 자료라 총 9개의 주제로 분류되어 기록된다.

9개 주제, 4,271권, 85만 8,904페이지, 흑백필름 및 사진 2,017컷으로 구성되어있는데 이중 미국이 제공한 기밀해제문서는 국가기록원의 자료를 보조하는 참고용으로 거론되었으나, 재검토과정에서 국회 진상규명회의에 참가한 당시 수뇌부들의 모순된 증언을 지적하는 증언자료로 변경되었고,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추진하게 되자 미국은 추가로 다량의 기밀자료를 공개, 독립카테고리로 승격했다.

4.1 등재과정까지의 여정

최초의 등재 요구 제출시기는 2010년 3월이었으나, 한국 내 유사역사단체인 이들이 '광주사태는 북한에 의해 조작된 것이며 기록이 투명하지 못해 기록유산으로 등재될 이유가 없다.'는 요지의 항의서한이 유네스코에 전해져 검토에 들어갔다.

총 7개의 유사역사 단체가 항의서한을 보냈었으며 이중 실존 단체이자 대표자의 신원이 확인것은 3명으로 국가정체성회복협의회의 박세환, 한미우호증진협회의 서석구, 사회발전시스템연구소의 지만원이다.

유네스코 측은 광주 민주화운동을 무력진압으로 진압하게 만든 수뇌부가 한국 헌법에 의한 법적인 처벌을 받았다는 점을 거론, 항의서한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또한 2011년 국무총리인 김황식도 이에 동참하는 발언을 국정회의중 하여 정부도 광주민주화 운동의 기록유산 등재를 원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리고 결국 2011년 5월 25일 등재가 확정되었다.

4.2 기록 구성

세계기록유산 등재에 서포터로 참가한 국가기록원은 그간 간행해온 5.18민주화 운동 자료를 제공했고, 광주시민 중 민주화 운동에 참가한 것으로 확인된 이들이 증언자료의 검토에 참가[19], 9개의 주제로 분류된 방대한 양의 자료가 만들어졌다.

  • 국가기록원이 간행한 5.18 민주화 운동 자료.
  •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자료 및 군사법기관 재판자료
  • 운동참가 시민들의 성명서와 선언문, 기자들의 취재수첩과 참가자들의 일기.
  • 2017컷의 사진자료.(흑백)
  • 민주화 운동 참가시민들의 증언영상 및 기록자료
  • 피해자들의 병원치료기록
  • 5.18 광주민주화 운동 진상규명회의록[20]
  • 미국 정부가 제공한 5.18 민주화 운동 관련 기밀해제 문서
  • 정부의 정식 보상내역서와 보상인 자료.

4.3 등재 허가의 주요 사유

훈민정음 등재를, '한글' 등재로 오해하는 것처럼 이 기록물 등재를 종종 민주화항쟁 자체가 등재된 것으로 오해받곤 한다.

유네스코 기록유산 가운데 근현대사 자료 중 가장 먼저 등록된 이유는, "5·18 광주 민주화운동의 발생과 억압에서부터 진상조사 활동과 보상에 이르기까지"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기록물들이기 때문이다.
즉, 민주주의 발전과 인권 향상을 보여주는 기록물이자 교과서인 셈이다.

특히 유엔 인권위원회가 진상 조사, 가해자 처벌, 명예 회복, 보상, 기념사업이라는 인권침해에 대한 보상 규칙을 결정하였는데, 그 모범이자 기준으로 5.18 민주화운동이 언급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들을 모두 모은 것이기에, 당연히 높이 평가되었다.

한편 유네스코에선 5.18 민주화 운동 기록물의 세계기록유산 등재와 관련하여 5.18 민주화 운동을 민주주의와 인권의 전환점으로 평가한다. 아울러 동아시아의 국가들의 민주화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보았다. 즉, 이 운동이 세계적으로 중요하다고 보았으며, 그렇기에 그 기록물 또한 높이 평가한 것이다.

5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역사적 의의와 운동 이후의 반응

5.18 광주민주화운동은 결국 전두환과 신군부에 의해서 무자비하게 진압되었으나 이는 도리어 전두환 정권의 원죄가 되고 말았다. 5.18은 87년 6월 항쟁까지 이어지는 80년대 민주화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사건이라 할수있다. 실제로 많은 80년대 학생운동에 뛰어든 대학생들은 대학교에 들어와서 80년 광주에서 일어난 사건의 실상을 알고 큰 충격을 받았으며 학생운동에 가담하게 되었다. 돌아오는 5월마다 5.18 추모 행사가 열렸고 이때마다 민주화 열기는 뜨거워졌다고 한다. 이는 많은 386 인사들이 증언하는 바이기도 하다.

한홍구 교수는 자신의 저서에서 적길 5월 27일 새벽의 저항이 그 이후 민주화 운동에 어마어마한 영향을 끼치게 됐다고 서술했다. 당시 보잘 것 없는 무장으로 공수부대와 최후의 항쟁을 했던 사람들은 일반 서민들이었다. 자신이 죽을 것임을 알고있음에도 도망치지 않고 신군부에 정면으로 맞섰던 것. 이것은 이후 대학생을 중심으로 한 인텔리 계층에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죽음으로 지키고자 했던 '민주주의'란 가치에 대해 고민하고 부끄러움을 이겨내기 위해 운동권에 투신했던 사람들이 폭증했다. 70년대에 비해 80년대 학생운동이 격해지고 활발해진 것은 99%는 5.18 때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게다가 5.18을 계기로 미국에 대한 학생운동의 인식이 크게 바뀌게 된다. 이전까진 입에 담을 수조차 없었던 반미의 구호가 대학가에서 대중화되는 데 5.18이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왜냐면 일반적으로 한국군미국의 동의없이는 병력이동자체가 불가능한데, 대규모 병력이 투입되어 시민들을 제압했다는 건 미국의 묵인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여겨졌기 때문. 그래서 80년대엔 전국 미 문화원은 학생운동의 주요공격 대상이 됐다.

5.18 이후로 군부정권은 본격적으로 수면 위로 드러나게 된다. 전두환김대중 등에게 '광주 사태'의 책임을 물어 내란음모죄로 사형을 선고했다. 이외에도 최규하 대통령이 하야선언을 한 직후, 8월 27일 소위 체육관 선거를 통해 전두환은 대통령 자리를 탈취했다.

5.1 북한의 간첩들이 폭동을 일으켰다?

신동아 : “5·18 당시 보안사령관으로서 북한군 침투와 관련된 정보보고를 받은 적이 있습니까

전두환 : “전혀.”
이순자 : “지금 그 말(북한군 침투설)을 하는 사람은 각하가 아니고 지만원이란 사람인데, 그 사람은 우리하고 한 번도 만난 적이 없고, 독불장군이라 우리가 통제하기도 불가능해요. 그걸 우리와 연결시키면 안 돼요.”
고명승 : “북한 특수군 600명 얘기는 우리 연희동에서 코멘트한 일이 없습니다.”
전두환 : “뭐라고? 600명이 뭔데?”
정호용 : “이북에서 600명이 왔다는 거요. 지만원 씨가 주장해요.”
전두환 : “어디로 왔는데?”
정호용 : “5·18 때 광주로. 그래서 그 북한군들하고 광주 사람들하고 같이 봉기해서 잡았다는 거지.”
전두환 : “오…그래? 난 오늘 처음 듣는데.”

신동아 인터뷰 전문

참고로 이 헛소리는 자유민주연합 문서를 봐도 알 수 있듯이, 5.18 특별법이 통과되기 이전인 1990년대 초중반만 해도 호남을 뺀 나머지 지역에서는 정설로 보는 사람이 많았다. 특히 전두환, 노태우의 지지기반이였던 대구광역시경상북도에서는 확실한 사실로 취급 받았던 헛소리다. (참고로 이건 지역감정을 일으키기 위한 서술이 아니라 사실이다.)

하지만 전두환, 노태우가 구속되고 5.18 특별법이 통과된 이후로 폭동이 아니라는 근거, 물증, 증언만 해도 수없이 많다. 폭동설은 현재 영구기관 수준의 공상허언급 헛소리 취급을 받고 있다. 다른 양반도 아니고 전두환 조차도 (지만원의 북한군 주장은) 오늘 처음 듣는 얘기라며, 과거 보안사령부에서 일한 측근들과 함께 반박한 사실이다.[21]

상술한 바와 같이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은 대한민국 입법부, 사법부, 행정부가 객관적으로 인정하고, 당시의 기록물이 보존되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데다가, 피해자 유족들이 생존해 있으며, 따라서 역사적 및 사회적 평가가 모두 끝난 상태다. 또한 국방부북한의 개입은 없다고 1980년대에 이미 인정했다. 그러나 2012년 대선 이래로, 인터넷의 보급과 함께 일부 세력들에 의하여 이러한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이 "북한이 개입한 폭동"으로 비하되고 있어 사회 전반에 큰 충격을 주고 있다. 심지어 최고책임자였던 사람이자 일베의 영원한 대통령이자 최고의 신적 존재라는 그 전두환조차도 북한군 따위 없다고 못을 박아버렸다는데 왜 일베는 계속 없는 얘길 지어낼까? 이거야말로 타진요랑 다를바 없는 짓이다.

이들의 주장은 크게 북한간첩이 5.18에 개입했다는 주장과, 5.18은 민주화운동이 아닌 폭동이라 불러야 한다는 두가지 주장에 기초하고 있다. 이에 대한 자세한 반박은 별도의 문서에서 따로 다루고 있으니 이쪽을 참고하면 된다.

2013년 5월경 TV조선채널A 2곳의 방송사에서 이와 같은 근거없는 주장을 그대로 보도함으로 인해 다시 사회 여론의 지탄을 받았다. 이 사건에 대해서는 5.18 북한개입설 보도사건 문서를 참고할 것.

미국 기자가 CIA 문건을 폭로하며 600명의 북한군 개입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 밝혔다.

참고로 디시위키의 해당 문서에선 맨 위에 일베충 틀과 반달당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내용의 틀, 극혐 틀을 달아놓은 채 폭동설을 쓰는 사람과 지우는 사람들과의 혈전이 벌어지고 있다(...).

또한, 삼성그룹 자본의 동양방송(TBC)은 전두환 정부 언론반의 위압기운(국가 관리 차원 실행)으로 KBS, MBC[22]에 알렸다는 (국가 내란 엄폐를 실현하기 위한) '북한 군중의 광주 장악설'로 위장 보도한 일에 대해 1980년 5월 22일에 동양 제3 라디오의 '뉴스 기상도' 프로그램에서 '5.18 광주 민주화 운동 현황' 보도로 정부한테 반박하다가 언론통폐합이라는 정부 공식 조정 방책에서 KBS로의 공식 강제 통합으로 흡파(흡수+파산)당하였다.[23]

5.2 5.18을 다룬 작품

1980년 6월 2일, 이 문서 맨 위에 실린 시인 <아아, 광주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가 전남매일신문에 실렸다. 그러나 군부의 검열 때문에 전부 실릴 수는 없었다고.

이 사건을 다룬 최초의 도서는 전남사회운동협의회와 당시 증언과 보도, 희생자/부상자 치료 기록 등의 자료를 공동 편집한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다. [24] 출간 당시 금서로 지정되고 관련자들이 줄줄이 잡혀들어갔으나, 80년대에는 운동권 대학생이라면 누구나 읽어야할 필독서로 여겨지기도 하였다.

강풀의 '26년'이나 1989년에 5.18을 최초로 다룬 독립영화 <오 꿈의 나라>와 <황무지>를 필두로 1990년에 최초로 5.18을 다룬 상업영화이자 이정국 감독의 데뷔작인 '부활의 노래[25]', 1996년 개봉했던 영화 '꽃잎', 2007년 개봉했던 영화 '화려한 휴가'의 기본배경은 이 사건을 두고 있고, 이창동 감독의 영화 '박하사탕'은 직접적으로 5.18의 장면이 등장하지는 않지만 주인공의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사건으로 묘사된다.

MBC드라마 제4공화국, 제5공화국SBS드라마 모래시계에서도 이 사건이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다.

또한 '오월의 노래'라는 노래가 만들어졌는데, 가사가 섬뜩할 정도로 당시의 상황을 잘 드러낸다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5.18을 다룬 노래로 '임을 위한 행진곡'을 빼놓을 수 없다. 이 곡은 국민의례에 대비되는 민중의례에서 사용할 정도로 중요하게 다루어진다. 민중의례에 쓰인다는 것 때문에 5.18 추모곡임에도 단순히 5.18만을 위한 곡으로 국한시킬 수 없다고까지 평가된다.

서독에서 활동하던 작곡가 윤이상은 1981년에 관현악 작품인 '광주여 영원히!(Exemplum in memoriam Kwangju)'를 작곡했고, 이 곡은 그 해 5월 8일[26]쾰른에서 와카스기 히로시 지휘의 쾰른 서부독일 방송 교향악단이 초연했다. 하지만 이 곡은 제목 부터 5.18을 암시하고 있기 때문에 1980년대 중반 한국에서 잠시 윤이상에 대한 언급이 허락되었을 때도 제목의 앞 단어만 뚝 잘라 '표본[27]'이라고만 지나가듯 언급되었을 뿐이었고 곡의 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함구해야 했다. 하지만 6월 항쟁 이후 민주화 과정에서 윤이상 작품의 공연이 해금된 뒤에는 한국에서도 여러 차례 연주되었고, 광주 소재 관현악단인 광주 시립 교향악단이 해마다 5.18 기념 공연에서 연주하기도 했다. 5.18이 본격적으로 재평가받기 시작한 1990년대 부터는 유병은의 관현악을 위한 시나위 제5번 '오월의 노래', 김선철의 오페라 '무등 둥둥' 등의 음악 작품들이 계속 창작되고 있다.

1981년 MBC 대학가요제 대상곡인 바윗돌 은 "광주에서 죽은 친구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만든 노래고 바윗돌은 친구의 묘비를 의미한다"고 말한 후 방송금지곡으로 지정되었다. 1984년 발표된 바위섬은 "5·18 광주를 생각하며 부른 노래"인 것이 방송금지 관리자에게 잘 알려지지 않아 가요 프로그램에서 2위를, 라디오 차트에서 1위를 기록했다. #[28]

모친을 5.18 현장에서 잃은 후 정신적인 충격으로 미처버린 피해자 소녀와 그녀를 돌보게 된 날품팔이 인부의 이야기를 담은 소설 저기 소리없이 한 점 꽃잎이 지고가 있다. 후에 이 소설을 바탕으로 하여 만든 영화 '꽃잎'이 태국에 방영 된 후 타이에서 일어난 군부의 대학생 시위 탄압 및 학살이 재조명되는 등 국제적인 영향을 끼쳤다. 베를린 국제영화제에 초청되어 호평을 얻어 글로벌 네임드작이 되었다. 덕분에 해외동포 2~3세대를 상대로 상대로, 한국역사를 강연한다며 광주민주화 운동에 대한 명백히 잘못된 사실을 홍보하던 속칭 해외파 극우인사들의 주장을 물먹이는데 일조하였다.

5.18을 다룬 소설로는 소설가 임철우의 '봄날'이 있다. 한국전쟁을 그린 장편소설 '붉은 산, 흰 새'의 후속작이라고 할 만한 내용으로, 소설의 주인공인 삼형제가 각각 시민군, 계엄군, 대학생을 대변하고, 5월 광주에서 일어난 일을 기반으로 한 사실성까지 더했다.

단편소설 소설가 윤정모의 '밤길'에서도 주된 사건이 민주화운동이며 그 이야기를 알리기 위해 외부로 나가는 신부와 학생의 고뇌를 그리고 있다.

힙합 그룹 클라우댄서당신은 어디 있었나요?도 광주 민주화 운동을 다룬 곡이다.

5.3 5.18에 대한 역사책들

5.18에 입문하는데 김영택, 5월 18일 광주 (광주민중항쟁 그 원인과 전개과정), 2010, 역사공간이 최고라 하겠다. 책이 두껍긴하지만(734쪽) 책 문장은 쉽게 쓰여있다. 입문용으로나 학술용으로나 완성도가 높은 책이다. 이 책은 2011년 대한민국 학술원 우수학술도서로 뽑혔다. #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가 유명하긴 한데 독재정권 당시 쓴 책이라 과장되거나 유언비어도 섞여있다. 책을 읽으면 사실인 것과 과장된 것이 섞여있다. 그리고 온건파를 투항파로 부르며, 과격파만 편향된 부분도 있다. 김영택 박사 책을 읽은 뒤에 보면 괜찮을 책일 것.

프레스바이플 에서 E북으로 낸 "기억하는 자의 광주"도 좋은 책이다. 이 책은 1990년에 돌베개에서 나온 책을 2010년에 개정한 것이다. 이거 책소개가 "유시민", "이해찬"으로 돼 있어서 마치 특정 진보세력이 쓴 것처럼 오해받을만한 책이다. 실제로 이 2010년 개정판에는 이해찬이 굉장히 진보편향스런 개정서문을 쓰기도 했다. 그러나 유시민 과 이해찬은 엄연히 "공동저자"일뿐이며 해당 책은 여러사람이 참여해서 쓴 책이다. 광주특위에 참여한 평민당 위원이 참여하기도 했다. 일반인은 볼 수 없는 중요한 군자료나 평민당 신고서 내용을 인용하며 청문회 자료도 잘 정리된 책이다. 이 책은 1990년에 쓴 책이라는 한계가 있으며 낡은 마르크스주의 사상이 깃들어있는게 단점이긴하나 그걸 감안할정도로 풍부하고 객관으로 쓴 내용이 많다. 김영택 박사 책을 읽은 뒤에 보면 좋을 것.

김영택 박사의 "5월 18일 광주"와과 평민당 위원이 참여했던 "기억하는 자의 광주"를 읽어 봤다면 최정운 정치학 박사가 쓴 "최정운, 오월의 사회과학, 2012, 오월의 봄"을 봐도 좋다. 이 책은 5.18 광주민주항쟁을 사회학으로 분석한 책이다. 이 책을 나중에 읽는 게 좋은 이유는 이게 사회학 분석에 초점을 둔 책이기도 하지만 최정운 박사가 역사학과 무관한 탓에 좀 잘못된 해석이나 과장도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김영택 박사의 책을 읽고 읽으면 좋은 책일 것.

5.4 미국에 대한 새로운 관점

“지금 미국항공모함부산항에 들어왔습니다. 시민 여러분 안심하십시오. 미국전두환의 학살을 막고 광주시민을 도와주러 왔습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광주시민들은 미국이 광주시민들을 도와주러 온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미국은 아직 광주에서 대피하지 못한 자기 국민 130명을 안전한 곳으로 이동시키기 위해 항공모함을 파견한 것 뿐이었다. 미국은 전두환에 대해서는 별다른 가치판단을 하고 싶지 않았고, 도리어 박정희 시절에 진행했던 핵개발 포기 등으로 말이 통하는 상대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던 듯하다. 당시 미국 입장에서는 한국의 민주주의는 후차적인 문제였다. 당장 라이벌 소련이 뒤를 봐주는 북한과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민주주의보다는 정권의 안정과 현상유지를 중요시했던 것이다. 따라서 한국이 반정부 시위로 정권이 바뀌는 사태를 원하지 않았을 테고, 때문에 이를 알고서도 방관하거나 유사시 미군을 투입해 정권을 지키지는 않았을까 하는 의혹을 사고 있다. 비슷한 사례로 남미 등에서 미국은 공산주의 확산을 막는다는 이유를 대면서 자국에서 인권유린을 하는 군사 독재자들에게 지원을 해줬다. [29]

5.18 광주민주화운동은 민주화운동의 불길을 당겼다는 평가와 더불어 미국에 대한 또다른 시선이 성장하는 (다르게 말하자면 반미 감정의 기원이 된) 계기였다는 점에서도 큰 의의가 있다. 80년 5월 전까지만 해도 ‘미국’에 대한 인식은 한국전쟁에서 남한을 도와준 우방국이라는 개념이었고 ‘민주주의의 나라이자 ‘한국의 가난을 구원해준 나라'라는 인식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미국이 신군부와 결탁하고 있다는 것은 여러 증거들이 발견되었다. 당시 평상시 군 통제권은 대통령이 아니라 주한미군 사령관에게 주어져 있었는데 신군부가 쿠데타를 위해 군대를 일으킨 것, 또 5.18 당시 계엄군을 이동 통솔시킨 것은 사전에 미국의 허락을 받지 않고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당시 군사 결정권은 미군 총사령관에게 있었고, 전두환 독단으로 군을 움직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외신이었던 뉴스위크는 광주 사태 이후 위컴 사령관이 유감을 표했다며 의례적인 제스처를 보여주었으나 지식인들은 이미 미국에 깊은 실망을 느낀 후였고, 이러한 반미 성향은 서울 미 문화원 점거 사건과 부산 미 문화원 방화 사건 등으로 이어진다. [30] 86년에 지어진 운동권 가요 '반전반핵가'에서 <양키 고홈>이라는 단어가 등장하는 것과, 5월의 노래에서 <양키놈 솟은 콧대야>라는 단어가 등장하는 것에서 이러한 성향을 엿볼 수 있다. 이러한 반미 성향에 80년대 운동권을 휩쓸었던 마르크스의 철학사상 등이 결부되며 사회주의에 대한 새로운 시각이 나타나고, '민족끼리 해결하자는' 목소리가 높아지며 80년대 후반에는 반미+친북 성향이 강하게 드러난다. [31]

5.4.1 반론

The Korean authorities gave the United States two hours' advance notice of the declaration of full martial law, which began at 0001 on May 18. The United States had no prior knowledge of the Korean military authorities' intentions to arrest political leaders and close the universities and National Assembly. On May 18, in both Seoul and Washington, the United States sharply and vigorously protested the implementation of martial law.
- 한국 당국은 미국에게 5월 18일 0001시에 시작한 전체 계엄령의 선언을 시작 2시간 전에 통지했다. 미국은 정치 지도자를 체포하고 대학과 국회를 닫는 한국 군사당국의 의도를 전혀 알지 못하였다. 서울과 워싱턴에서 5월 18일, 미국은 급격하고 강력하게 계엄령의 구현을 거부하였다.

The United States did not initially know the full extent of the violence in Kwangju. When it became aware of the seriousness of the situation, the United States repeatedly urged restraint by ROK military forces and issued a public statement on May 22 expressing concern over the civil strife in Kwangiu and calling for dialogue between the opposing sides.
-- The United States was assured by Korean authorities that its May 22 statement calling for dialogue would be broadcasted and distributed in the city. This never happened. Instead, official radio reports in Kwangju falsely asserted that the U.S. had approved the dispatch of Special Warfare Command (SWC) troops into the city.
- 미국은 처음에 광주에서 벌어진 폭력의 범위를 몰랐다. 이 상황의 심각성이 인식되었을 때, 미국은 반복적으로 한국군에게 자제를 촉구하고 광주의 민사 분쟁 우려를 피력하는 한편, 둘 사이의 대화를 촉구하는 공개 성명을 5월 22일에 발표했다. 한국 당국은 미국의 5월 22일 발표문을 방송하고 시내에 배포할 것이라고 보장하였다. 그러나 이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대신, 광주의 공식 라디오 보고서는 미국이 특수전사령부(SWC) 군대의 파견을 승인했다고 거짓 주장했다.

허나 주한미국대사관 홈페이지에는 미국이 전두환이 광주에서의 진압을 승인했다는 것처럼 묘사한 것에 대해 강력하게 불만을 표시하고 있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원문번역문

즉, 일부 유사역사학 성향의 잡지나 신문, 언론인 등이 주장하는 미국의 승인 하에 일어난 정당한 폭도진압이라는 주장을 주한미국대사관이 정면으로 부정하고 있다.

미군은 광주민주화 운동이 벌어진 당시, 결코 진압을 허가하지 않았으며 후에도 한국 정부의 발표(전두환측의 주장)과 달리 진압을 허가해준 일이 없다."'라고 불만을 표하고 있는 중이다.

또한 미국의 외교관 크리스토퍼 힐은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추모하기 위해 광주 묘역에 가서 조의를 표하기도 하였다.

5.5 5·18 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

1995년 12월 21일, 5.18 광주민주화운동에 관련된 것에 대해 특별법이 제정되었다.
국회 법률지식정보시스템 자료를 통해 공시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5·18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 [32]
제1조(목적) 이 법은 1979년 12월 12일과 1980년 5월 18일을 전후하여 발생한 헌정질서 파괴범죄행위에 대한 공소시효 정지 등에 관한 사항 등을 규정함으로써 국가기강을 바로잡고 민주화를 정착시키며 민족정기를 함양함을 목적으로 한다.
제2조(공소시효의 정지) 1979년 12월 12일과 1980년 5월 18일을 전후하여 발생한 「헌정질서 파괴범죄의 공소시효 등에 관한 특례법」 제2조의 헌정질서 파괴범죄행위에 대하여 해당 범죄행위의 종료일부터 1993년 2월 24일까지의 기간은 공소시효의 진행이 정지된 것으로 본다.
제3조(재정신청에 관한 특례) ① 제2조의 죄에 대하여 고소 또는 고발을 한 자가 검사 또는 검찰관으로부터 공소를 제기하지 아니한다는 통지를 받은 경우에는 그 검사 소속의 고등검찰청이나 그 검찰관 소속의 고등검찰부에 대응하는 고등법원 또는 고등군사법원에 그 당부(當否)에 관한 재정(재정)을 신청할 수 있다. 법률 제5029호 5·18민주화운동등에관한특별법 시행 전에 제2조의 죄에 대하여 공소를 제기하지 아니하기로 결정된 사건의 경우에도 또한 같다.
② 제1항의 재정신청에 관하여는 「형사소송법」 또는 「군사법원법」의 해당 규정을 적용한다.
제4조(특별재심) ① 5·18민주화운동과 관련된 행위 또는 제2조의 범행을 저지하거나 반대한 행위로 유죄의 확정판결을 선고받은 자는 「형사소송법」 제420조 및 「군사법원법」 제469조에도 불구하고 재심(再審)을 청구할 수 있다.
② 재심의 청구는 원판결의 법원이 관할한다. 다만, 「군형법」을 적용받지 아니한 자에 대한 원판결의 법원이 군법회의 또는 군사법원인 경우에는 그 심급(審級)에 따른 주소지의 법원이 관할한다.
③ 재심의 관할법원은 제2조의 죄를 범한 자가 그 죄로 유죄를 선고받고 그 형(刑)이 확정된 사실에 대하여 직권으로 조사하여야 한다.
④ 제1항의 재심 청구인이 사면을 받았거나 형이 실효(失效)된 경우 재심 관할법원은 「형사소송법」 제326조부터 제328조까지 및 「군사법원법」 제381조부터 제383조까지의 규정에도 불구하고 종국적(종국적) 실체판결(실체판결)을 하여야 한다.
⑤ 제1항의 재심에 관한 절차는 그 재심의 성격에 저촉되지 아니하는 범위에서 「형사소송법」과 「군사법원법」의 해당 조항을 적용한다.
제5조(기념사업) 정부는 5·18민주화운동 정신을 계승하는 기념사업을 추진하여야 한다.
제6조(배상 의제) 「5·18민주화운동 관련자 보상 등에 관한 법률」에 따른 보상은 배상(賠償)으로 본다.
제7조(상훈 박탈) 정부는 5·18민주화운동과 관련하여 상훈(賞勳)을 받은 자에 대하여 심사한 결과 오로지 5·18민주화운동을 진압한 것이 공로로 인정되어 받은 상훈은 「상훈법」 제8조에 따라 서훈(서훈)을 취소하고, 훈장 등을 환수한다.

1996년 12.12 군사반란의 주역들이 이 법에 의해 처벌받게 되자 헌법재판소에 이 법이 위헌이라는 헌법소원심판을 청구하였는데, 한정위헌의견 5, 합헌 의견 4로 위헌 결정에 필요한 정족수 6인을 채우지 못 해 합헌 결정이 나왔다. [33] 이를 두고 정족수 없이, 위헌 의견이 많으면 위헌이 되는 미국 대법원의 예를 들면서 '위헌 의견이 더 많았으니 사실상 위헌'이라고 정신승리를 하기도 하는데 이는 결정문도 제대로 안 읽어봤다는 반증이다.

헌법재판소는 전원 일치하여 이 법이 헌법 13조 1항의 형벌불소급 원칙 위반이 아니라고 보았으며, 공소시효 정지를 규정한 이 법 2조가 소급입법인지에 대하여 재판관 3인은 검찰의 소추권 행사가 불가능했으므로 당연히 공소시효가 정지되는 것이고 이 법률은 그것을 확인한 것에 불과하다고 하여 소급입법이 아니라고 보았고, 재판관 2인은 이 법률로 인해 공소시효가 정지된 것이라 하여 소급입법으로 보았으나 재판관 4인은 공소시효에 대한 판단권은 법원에 있다 하여 판단을 유보하였다.

만약 공소시효가 완성되지 않았다면 재판관 전원은 일치하여 이 법은 단지 진행중인 공소시효를 연장하는 이른바 부진정 소급입법으로서 위헌이 아니라 보았고, 공소시효가 이미 완성되었다면 재판관 5인은 이는 진정소급입법으로서 언제나 위헌이라고 보았고 4인은 '국민이 소급입법을 예상할 수 있었거나, 법적 상태가 불확실하고 혼란스러웠거나 하여 보호할 만한 신뢰의 이익이 적은 경우와 소급입법에 의한 당사자의 손실이 없거나 아주 경미한 경우, 그리고 신뢰보호의 요청에 우선하는 심히 중대한 공익상의 사유'가 있었을 경우에는 진정소급입법도 가능하다고 보았다. 설령 미국 대법원처럼 위헌 의견이 다수일 때 바로 위헌이 된다고 하여도 이 경우 '공소시효가 이미 완성되지 않았을 경우에 적용하는 것은 합헌'인 것인데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이 부분은 절대 말하지 않는다. 그저 5인의 위헌 의견이 있었으니 5.18 특별법은 위헌이라고 주장할 뿐이다. 그러나 이 5인 재판관도 전두환, 노태우가 '헌정질서파괴범죄자'임을 부정하지 않았다. 공소시효가 문제지 이놈들의 죄 자체는 당연하다는 것이다.

심지어 4인 의견에 대해 권력에 아부해 법리를 왜곡했다고 비난하기까지 하는데, 그러한 비난은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환수에 대해서도 똑같이 적용된다. 헌법재판소는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의 국가귀속에 관한 특별법에 대해 위의 4인 의견과 동일한 논리로 예외적인 경우 진정 소급입법이 허용된다고 하여 합헌 결정을 내렸기 때문이다. 논리의 일관성을 지키기 위하여는 5.18 특별법이 위헌이라면 친일파 재산환수도 위헌이라고 주장해야 한다. 참고로 4인의 합헌의견에 다음과 같은 표현이 있다. "우리 헌정사에 공소시효에 관한 진정소급입법을 단 한번 예외적으로 허용한다면 바로 이러한 경우에 허용하여야 한다고 할 것이다. 이러한 경우가 진정소급입법의 원칙적 금지의 예외에 해당하지 않는다면, 그 예외는 대체 어디에 해당되고 무엇을 위한 예외인지 진지한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즉, 이 특별법은 원칙적으로 금지되는 진정소급입법이지만, 사안의 특수성으로 인해 합헌이다. 헌법재판소에서 지금까지 심사해 온 수많은 진정소급입법 관련 사건중에 단 두 개만 합헌인데, 최초가 이 518특별법이고, 다른 하나는 앞서 말한 친일파 재산환수 특별법이다.

5.5.1 5.18 민주화운동 당시 외신 보도와 국내 언론 보도의 차이

전반부는 외신의 보도내용, 후반부는 국내 언론 보도를 담고 있다.

사건 당시, 북부독일방송 도쿄 지국 소속 기자 위르겐 힌츠페터가 광주로 잠입해 현장을 취재했다. 현재 80년 당시 남아있는 컬러영상 대부분이 힌츠페터가 촬영한 영상이다. 힌츠페터는 계엄군의 삼엄한 감시를 뚫고 5월 19일 광주에 잠입했고, 영상을 촬영한 후 필름을 과자통[34]에 숨겨 독일 본사로 보냈다. 이 영상이 북부독일방송의 저녁 뉴스 프로그램인 타게스샤우를 통해 방송되면서 세계에 광주의 실상이 알려지게 됐다. 힌츠페터는 5월 22일 2차 잠입 후 보강 취재하여 다큐멘터리를 제작해 독일 본사에 보냈으며, 이 다큐멘터리는 80년대 독일에서 유학하던 천주교 신부들이 녹화해서 국내에 들여와 당시 광주의 참상을 고발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35]

당시에 한국 천주교의 비밀 정보망을 이용하여 외신기자들의 사진을 광주에서 해외로 옮겨갔다는 관련자의 이야기가 있었다.

6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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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당시 광주시내 모 탄약창에 근무하던 배승일 씨는 계엄군의 도청 탈환작전 직전인 5월 24일 시민군의 손에 넘어간 전남도청 지하실에 설치된 엄청난 양의 폭약을 제거해 달라는 시민군 속 온건파 학생들의 요청을 받고 죽음을 무릅쓴 채 현장에 잠입하여 2,000여 개의 다이너마이트와 450여 발의 수류탄 뇌관을 제거한 공을 세워 그해 보국훈장 광복장을 받았다. 배승일은 1977년 전북 이리역 폭발 사고를 목격한 적이 있어, 지하실에 가득 쌓인 폭발물을 본 순간 자칫 광주 시가지 전체가 불바다로 변할 수 있다는 아찔한 위기감에 밤을 새 작업했다고 당시를 회고하였다.

그러나 2006년 3월, 노무현 정부가 당시 5.18민주화운동 진압작전 참가자 등 176명의 훈장 서훈을 취소하였고, 이 중엔 배승일도 포함되어 있었다. 배승일은 소송 끝에 2007년 훈장을 되찾을 수 있었다. 배승일은 비록 군무원 소속이었긴 하지만 진압 작전에는 참여하지 않았고, 무엇보다 수많은 광주 시민들의 생명을 위협하던 요소를 제거한 일을 했으므로 다른 계엄군 출신 인물들과는 달리 훈장을 박탈당하는 것이 부당했던 입장이다.

[1] 참조.

<친일파를 위한 변명>이란 책으로 욕을 드럽게 먹었던 김완섭도 광주 민주화 유공자 출신이다.

이 당시에는 아직 최고의 기자로서 활약하던 조갑제광주에 직접 들어가서 취재하기도 했다. 지금까지도 조갑제는 이 운동을 민주화운동으로 높이 평가하며 5.18 왜곡보도 등을 깠고 지금도 왜곡이 나올 때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작작 좀 지껄여라'라고 말하고 있다. [36]

그리고 어찌됐든 전두환은 잘 살고 있다. 물론 형이 선고되어서 신변보호를[37] 제외한 전직 대통령으로서의 법적인 예우는 못 받지만[38] 그동안 쌓아놓은 게 워낙에 많아서... 저지른 일들에 대한 비난을 받는 것은 기본이요, 청문회에 몇번 불려 나와야 하지, 여기에 온갖 비리 등으로 법정으로 불려나오고, 이 상황에 말 한번 잘못 했다간[39] 온갖 욕을 보통의 정치인보다 엄청 뒤집어쓴다. 하지만 어쨌든 전직 대통령이란 이유 및 권력으로 이리저리 잘도 피해다니고, 여전히 잘 먹고 잘 살고 있다.

1998년에 한국에 금서 해지되어 번역된 1980년 9월에 출판된 일본인 기자가 쓴 80년 5월 광주 봄의 대학살이라는 책이 있다. 이 책은 당시 광주를 방문해 광주사태를 직접 목격한 일본인 기자단의 이카리 아키라라는 기자가 당시의 충격에 바로 집필을 시작하여, 현재 논란이 되고있는 여러 이야기와 그에 대한 확대 생산이나 축소 논란에 빠지지 않고 3개월만에 나온 책으로 상당히 객관적으로 저술되어 오히려 요즘 나온 광주 민주화 운동에 대한 책들보다 냉정하고 정확한 해석을 보여준다.

당시 화려한 휴가 작전에 참가한 특전사의 인터뷰 : 다만 장갑차에 대한 진술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

1999년 위 동일인물이 쓴 당대비평에 실린 글

광주광역시에서는 5.18 운동이 일어난 현장 중 27곳을 사적지로 지정하여 관리하고 있다. 5.18 사적지 목록 참고.

2015년 초 기준으로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전남도청 리모델링 공사 현장 내부에는 아직도 5.18의 흔적이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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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기된 사진은 공식적인 촬영이 아닌, 당시 현장에 출입한 인원에 의해 촬영된 것으로서 현재의 보존 상황은 알 수 없다.

운동 당시 전남도청에서 마지막 방송을 했던 박영순씨가 35년만에 재심을 통해 무죄를 선고받았다.

광주의 참상 와중에서 피로 얼룩진 살육을 막으려던 양심있는 경찰이 있었는데, 바로 당시 전라남도 경찰국 국장 안병하 씨였다. 그는 공수부대들이 시민들을 폭력으로 진압하는 와중에도 진압 경찰들에게 무력진압을 하지 말아달라고 명령했다가 5.18 직후에 신군부에 의해 동빙고 분실로 끌려가 고문을 당했다. 이후 '자진사직' 조건으로 풀려났으나, 그 동안의 고문 후유증으로 투병하며 생활고에 시달리다 1988년 10월에 사망했다. 6월 항쟁 직후 부인인 전임순 씨 등의 진상규명 노력으로 2003년에야 광주민주화유공자에 등재되었고, 2005년에는 유해가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다.

2016년 6월 19일, 국가보훈처에서 5.18 현장인 구 전남도청(현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앞에서 6.25전쟁 기념 군사 퍼레이드를 진행하기로 하였는데 여기에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진압군으로 투입되 시민을 학살했던 제11공수여단이 참여하는 것으로 밝혀져 파문이 일었다. 기사 당연히 피해자인 5.18 광주 민주화 운동 유가족 및 유공자 단체는 크게 반발했고 더불어민주당, 국민의당은 성명을 내고 국가보훈처장의 해임을 주장하고 나섰다. 결국 이 계획은 여론에 부담을 느낀 제11공수여단이 불참을 결정하면서 논란은 일단락되었다.
  1. 위 사진에 침울한 표정을 짓고 있는 꼬마 상주는 조천호(당시 5살), 그리고 영정 속 남자는 아버지인 故 조사천(향년 34세)으로, 건축일을 하던 조사천 씨는 시위에 동참했다가 5월 21일 낮 1시 전남도청 앞에서 계엄군의 발포로 숨졌다. 이 사진은 외신 기자가 몰래 찍어 독일의 슈피겔지에 실린 후 5.18의 상징이 되었다. 한편 조천호씨는 훗날 "어렴풋하지만 당시엔 슬프기보다 배고팠어요. 너무 배가 고파서 힘이 없었습니다. 지쳐서 영정 사진에 기대 있었던 것 같습니다"라고 술회했다. 제대 뒤 5·18묘역 관리소에서 근무하다 결혼 후 광주시청에서 일하고 있다.
  2. 아마도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행방불명자 65명과 항쟁 뒤 부상 후유증 등으로 숨진 '상이 후 사망자' 376명을 제외한 수치다.
  3. 광주 민주화 운동에 대하여 처음으로 다룬 작품이라고 한다. 전남매일신문 80.6.2 게재.
  4. 광주광역시. 1986년에 광산군, 송정시와 통합해 광주직할시로 승격됐고 1995년 광주광역시로 개칭됐다.
  5. 1988년 제6공화국에서 공식적으로 밝혀진 바에 의하면, 사망 191명, 부상 852명이다. 참고문헌: 두산백과, 5·18 민주화운동 [2]
  6. 학술 쪽으로 깊이 파고 싶다면 김영택, 5월 18일 광주 광주민중항쟁 그 원인과 전개과정; 최정운, 오월의 사회과학 - 사회과학자의 시선으로 새롭게 재구성한 5월 광주의 삶과 진실을 참고할 것
  7. "피고인 이학봉의 지시를 받은 광주지구 보안부대가 5.17. 23:00경부터 시위주동자에 대한 이른바 '예비검속'을 실시하여 재야인사와 학생회 간부 등 연행대상자 22명 중 정동년, 권창수, 오진수, 이승룡, 유재도 등 8명을 체포하는 등 전국 각 지역에서 비상계엄 확대와 병행하여 실시한 예비검속 과정에서 총 2,699명을 체포하는 등 전국적인 비상계엄의 위력을 과시하여 헌법과 법률에 정한 절차에 의하지 아니하고 신체의 자유 등을 침해하고 동시에 헌법에 의하여 설치된 국가기관인 대통령과 국회의원 그리고 국무위원 등을 강압, 외포케하여 폭동하였다." 서울고법 1996.12.16, 선고, 96노1892 판결내용 인용.
  8. 서울고법 1996.12.16, 선고, 96노1892, 판결 참고
  9. 12.12, 5.17, 5.18 국방부 보고서 62쪽
  10. 택시기사들은 공수부대원의 구타로 다친 부상자들을 병원으로 싣고가다가 공수부대원들에게 공격을 당했고, 앞서 말했듯 시내버스의 경우에도 공수부대원들이 갑자기 들이닥쳐 승객들을 닥치는대로 구타했다. 이게 알려지면서 택시기사와 버스기사들이 시위에 가담하게 된 것.
  11. 제5공화국 드라마에서는 광주 최대의 버스회사인 대창운수 소속 차량이 대거 시위에 동원된 것으로 나오며, 이는 역사적으로 고증이 정확한 부분이기도 하다. 대창운수 문서 참고.
  12. 그러나 방화 여부에 관해서는 논란이 많다.
  13. 피해자의 정확한 인적사항에 관해서는 상반되는 증언이 있어 불분명하다.
  14. 송기숙 교수의 증언으론 남동성당에 모인 인사들은 도청에 모인 유지급 인사들의 과거 경력때문에 그들을 불신하는 기운이 있었던것 같다. 다른 한편으로 온건한 수습을 주장한 인사들을 후에 운동권에서 지나치게 매도한 감도 없진 않다.
  15. 전두환, 무기징역으로 감형
  16. 영화 <화려한 휴가>의 김 신부의 모델이 된 인물
  17. 당시의 표기는 "-이었오"만 쓰였고 "-이었소"는 없었다.
  18. 경북고등학교 졸업생중 정관계 인사들의 모임
  19. 개개인이 따로 참가한 것이 아니라 광주시의 이름으로 모인 시의 숙원사업 진행에 가깝다.
  20. 국회청문회 기록
  21. 단, 발포명령에 대해서는 부인했기 때문에, 향후 5.18 관련 연구는 "누가 발포 명령을 내렸는지?"에 대해서 전보다 더 초점이 맞춰질 전망이다.
  22. 그 중 광주MBC가 1980년 5월 20일에 광주 난민들한테 방화당하였음
  23. 1987년 10월 동안 전두환의 대통령 임기 날짜에 다가오기 전에는 이병철이 카톨릭 종교인들에게 마지막 네 번째 질문으로 "지구의 종말은 오는가?"라며 카톨릭 교의 배타성을 지적하기도 하였다.
  24. 황석영은 원래 완성됐던 책을 다듬기만 했지 책을 쓴 사람은 아니다. 편집자에 가까웠다.
  25. 그러나 노태우 정권 시기인 1990년에 공윤의 사전심의를 받지 않고 대학가에서 상영했다는 이유로 심의 불가판정을 받았으나 이후 공윤의 확대회의와 재심의에서 심의가 허가되었으나 도청사수 장면과 전야 횃불시위 장면 등 전체 분량의 22%가 '고증오류'를 빌미로 삭제하기로 했으나 또다시 심의를 거쳐 '미성년자 관람불가' 등급을 받고 철기가 총을 맞는 장면만을 편집한 채 개봉했다. 이후 문민정부가 들어선 1993년 5월에 무삭제로 심의가 허가되어 다시 개봉되었다.
  26. 공교롭게도 나치 독일제2차 세계대전에서 서방 연합군에 항복한 날이기도 했다.
  27. Exemplum
  28. 이 곡은 2015년 들어 재조명되기도 했다. 수필집 <밤이 선생이다>로 젊은 독자들에게 주목받은 원로 문학평론가 황현산 선생이 트위터에 "가사가 무슨 뜻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다"고 디스했다가, 트위터 이용자로부터 이 노래가 5월 광주를 상징하는 것이라는 지적을 받고 하룻밤 자고 일어나도 충격이라며 비아냥거렸던 것을 사과한다고 사과하는 해프닝이 있었기 때문. 시인 겸 평론가 권혁웅 역시 이현세의 만화 해왕도의 내용을 노래가사로 옮긴 것이라 생각했다고 밝혔다. 이 노래의 숨은 상징이 얼마나 알려지지 않았는지 잘 드러나는 부분이다.
  29. 다만 지미 카터 정부가 니카라과의 공산화와 이란 미 대사관 인질사태로 최악의 레임덕을 겪고 있었다는 것은 조금 감안해 둘 필요는 있다. 또한 이 당시는 냉전이 아직 진행중이었던 시기였기에 미국 입장에서는 한국에서 이란 인질극과 같은 일을 막는 것이 더 시급한 문제였다.
  30. 서울 미 문화원 점거 사건의 자료 사진을 보면, 점거한 대학생들이 창문에 '광주학살 책임져라'라고 쓰인 플래카드를 걸어두었음을 알 수 있다.
  31. 임수경문익환의 방북을 생각하면 된다. 물론 정부는 그렇게까지 풀려있지 않았기 때문에 이들은 귀국과 동시에 체포되었다.
  32. 1995년 12월 21일 제정, 2010년 3월 24일 개정, 법률 제10182호
  33. 종래 헌법재판소는 이럴 경우 '위헌불선언' 결정을 했는데 이 결정을 계기로 위헌 불선언 결정을 하지 않고 있다.
  34. 당시 조선호텔에서 팔던 수입과자를 담는 통이 필름크기과 비슷했다.
  35. 이 때문에 힌츠페터 기자는 푸른 눈의 목격자라는 이명을 얻게 되었다.
  36. 조갑제는 1979년 부마민주항쟁도 직접 취재했을 정도로 7-80년대에는 정부에 비판적인 굵직한 기사를 많이 썼다.
  37. 전직 대통령이 납치되어 국가기밀을 누설하는 걸 방지하는 것이 주 목적이다.
  38. 허나 골프라도 한번 치러 가려면 의무경찰들을 비롯한 경찰들의 보호를 받는다. 사실 이는 예우라기보다는 전술한 신변보호에 관한 것이긴 하다.
  39. 예를 들어 29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