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의 기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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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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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의 대한민국2010년대의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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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에는 우리도 남과 같이 좀 잘 살아야겠습니다… 여기에 현 정부가 표방한 경제제일주의의 목표가 있습니다… 우리도 독일과 같이 이른바 한강변의 기적을 낳기 위해 독일사람 못지않은 내핍과 근로가 있기를 바라 마지않습니다.

- 1961년 1월 1일, 제 2공화국 장면 국무총리의 신축연두사 中

경제정책이 성공하여 국민생활이 윤택해지면, 그야말로 한국의 에르하르트로 자부할 수 있고, 한강의 기적을 과시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여 정책입안자로서의 신중성이 더욱 요청되고 있다.

- 1961년 2월 8일, 경향신문 3면 기획/연재 中

한강의 기적이란 경제제일주의를 내세운 장면 내각에서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전한 서독선진국으로 빠르게 도약한 것'을 라인강의 기적이라 부른 것에 빗대어 6.25 전쟁을 치르고 국토와 인력이 넝마가 되어버린 대한민국도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역설하는 것에서 유래하였으며 장면이나 5.16 이후의 김유택, 송요찬 등 여러 관료, 경제인의 입에 오르내렸다. 오늘날에는, 1950년 6.25 전쟁이후 1997년 구제금융이 있기까지의 대한민국 경제 초고속 성장을 상징하는 말로 두루 쓰이고 있으며[1] 1990년대부터는 이를 외국에서 아시아의 네 마리 용 국가와 함께 동아시아의 기적(The East Asian Miracle)이라 부르고 있다. 따라서, 본 문서는 1945년부터 20세기 말까지의 대한민국 경제 행방, 그 배경과 원인, 과정을 살펴봄으로써 이해를 돕고자 한다.[2]

2 경제성장률

한국의 경제성장률중국과 견주어봐도 손색이 없다.

3 한국 경제의 행방

3.1 1940년대

3.1.1 배경

한정된 토지에 고착하여서는 격증될 국민의 경제생활을 건전케 할 수 없을것이다. 그러므로 국내에 잠겨있는 모든 자원을 개발함으로써 국제무역권에 참가하야 농업국으로서 산업국으로 발전향상 하여야 할 것이다. 미국 전문가의 관측에 의하면 조선의 생사업은 기술적으로 노력하면 1950년에는 일본, 중국보다도 우수하야 동양에서 수위를 차지할 수 있고 광업도 동양 2대 광산의 하나가 조선에 매장되어 있다고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단히 노력하야 우리나라의 산업화를 도모하여야 할 것이며… 지금 미국으로서는 여러가지 정확한 조사와 계획이 되어있으나 우리 정부가 아직도 수립되지 않았음으로 착수치 못하고 있다.

- 1946년 5월 27일 오전 1시, 돈암장 기자회견에서 이승만 박사의 연설 中

지금 조선의 자본과 기술진으로 외국시장을 확득하기에는 퍽 어려울 것 같아 보이며 장기간의 노력을 요하리라고 믿어진다. 우리의 수출품으로 굴지되는 것은 인삼, 엽연초[3], 생사[4], 해산물, 임금[5], 수공예품[6], 광산물 중의 흑연, 텅스텐, 등 몇가지를 들 수 있는데, 그 반면으로 가져와야만 할 물품은 1,000종이고 10,000종이다. 우리가 아무 물건이나 덮어놓고 외국물건을 사드린다는 것은 가난한 나라로서 도저히 용인할 수 없는 일이지마는 기계와 그 부속품, 석유, 생고무, 석탄 등 건축재급원료품이라든지 우리나라에서 당장 생산하지도 못하는 설탕, 모직물, 지류 등 생활필수품도 전연 없이는 살수 없는 형편이다.

- 1946년 6월 2일, 동아일보 칼럼 中

조선은행의 발표에 따르면 1948년 국민총소득은 2,000억원으로, 정부수립 당시 공정 환율로 환산해볼 때, 1인당 국민소득은 23불에 지나지 않았다[7]. 비록 이것을 정확한 수치라고 볼 수는 없지만[8] 8.15 광복대한민국 경제에 가한 충격을 잘 나타내고 있다고는 할 수 있을 것이다. 일제강점기 당시 대한민국의 연간 최대 무역규모는 1941년의 것으로 5,500억원을 상회하였지만, 1946년 대한민국의 연간 무역액은 4억원 밑으로 곤두박질치게 되었다.[9] 이는, 이출 곧, 대일무역의 비중이 80~90%인 상황에서[10] 제2차 세계대전으로 엔블록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그 결과 1946년 대한민국 국내 제조업 생산 규모는 1939년의 1/4 수준으로 가라앉았고 사업체와 노무자의 수는 1939년의 각각 56%, 41% 수준으로 줄어들었다[11] 그러나 남한의 인구는, 해외동포의 입국과 월남 등의 까닭으로, 해방을 전후하여 2년만에 17%가 늘어났다. [12] 게다가 설상가상으로 북한에 의해 철광석과 유연탄의 98%, 텅스텐, 무연탄, 금의 70% 등 한반도의 주요 매장 광물 과반수를 강탈 당하고[13], 비록 한반도의 중공업과 경공업 비율이 거의 비슷한 상태에서 남한이 경공업의 대부분을 가져감으로써 전체 생산시설의 경우 남이 북보다 상황은 나았다 할지라도 화학공업, 금속공업, 요업 그리고 결정적으로 발전소의 80% 이상 빼앗겼으니(남북분단)[14] 이렇다할 외화 없이는 물자부족에 시달릴 것이 기정사실이었다.[15]

3.1.2 처방

미국은, 물자부족과 그에 따른 만성적 초 인플레이션을 해결하고 제국주의 일본 체제로부터 한국을 이탈시키기 위하여, 1945년부터 5년간 GARIOA(점령지 행정·구제)자금으로써 남한의 민생, 산업 전반에 5억달러 규모의 무상 긴급수혈을 실시하는 한편[16], ECA(경제협조처)와 주한미군을 통해서 5천만달러 상당의 물자를 추가적으로 제공하였다.[17] 또한,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인 1948년 12월, 한국과 대한민국 및 미합중국 간의 원조협정을 체결하여, 한국이 외환 및 외국무역 통제 아래 수출산업을 신속하게 발전시키고 경제 안정을 위한 재정, 통화, 금융 개혁을 잇따라 실시하도록 규정하였다.[18] 이에따라 대한민국은, 1950년 상반기, 미국과의 협의 아래 대통령령으로 당면 경제안정 15원칙을 내놓게 되는데, 이는 이는 GHQ(점령군)[19]이 일본에 실시한 전후개혁과 내용, 방향이 거의 같은 것으로[20] 인플레이션 억제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물가 상승을 억제하고 대내외 통화 가치를 안정시켜야 비로소 시장경제 원리가 효과적으로 작동하기 시작하고, 투자(저축), 경제성장(생산량 증진)을 극대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당면 경제안정 15원칙

1. 통화 최고 발행제를 견지하고 재정 및 금융의 건전화 재정자금과 산업자금의 시기적 상호조정을 기하여 통화의 증발을 억제한다.

2. 행정기구의 간소화, 관비 절약 정부 부조금 철폐, 책임 지출 중지 등 모든 실질적인 방법에 의하여 세출을 철처히 긴축함과 아울러 경리 내용을 명백히 한다.

3. 조세부담을 조정 합리화. 증세 사무의 능률화를 목표로 징세 체계를 근본적으로 개혁한다.

4. 귀속 재산 및 관리 물자의 급속 불하에 의한 정부 세입의 증진을 도모한다.

5. 교통, 체신 양 특별회계 예산의 적자를 더욱 감축토록 경영의 극력 합리화, 요금의 적정 인하에 의한 독립 채산제를 조직한다.

6. 말단 행정의 정리 및 합리화에 의한 경비 절약과 지방 과세의 정상적 충실로써 지방 행정의 자치적 건전을 촉진한다.

7. 금융예산을 급속 확립하여 모든 융자는 반드시 본예산 내에서 취급하게 하는 한편 국민저축 운동을 조직적으로 추진하고 자치적 건전을 촉진하다.

8. 민간 부동 또는 잠재 자력의 안정 자본화를 촉진하여 기업의 자기 금융력의 실질적 강화를 도모한다.

9. 가격통제대책은 기초 물자 및 생활필수물자 중 물가조정의 거점이 될 품종에 국한하여 현유 재고량의 조사, 가격 보정, 적기 방출 등에 의하여 강력 유효한 신 물가체계의 기반을 확립한다.

10. 동력 및 수송력을 정비 강화한다.

11. 정부 대행 물자 취급기관을 전면적으로 재검토하여 합리적인 정상 배급기구 및 방법으로써 유통의 원활을 촉진한다.

12. 현유 생산조건(자재, 기술 및 경영능력)으로 단기간 내에 생산효과를 기대할 수 있는 중요 국내 자원을 적극 개발하여 수출 무역을 최대한 진흥하는 동시에 국내 생필품 증산을 위하여 절대적인 보호 및 조성을 가한다.

13. 전항 생산촉진에 사용될 긴급 물자 부족량의 수입은 품목을 지정하여 전항 생산에 의한 수출향의 범위 내에서는 당분간 이를 전적으로 허용한다.

14. 원조물자 활용 및 수출진흥을 위하여 국내 생산체제의 합리적 조화 및 정비를 단행한다.

15. 노무 및 임금이 생산량을 올리는 한편, 확고하고도 탄력성 있는 임금안정기준을 조급히 확립하여 임금과 물가와의 악순환을 봉쇄한다.

- 관리번호: BA0135047

3.1.3 한계

6.25 전쟁으로 인해 계획되었던 것들이 유야무야되었다는 비판을 받는다.

3.2 1950년대

3.2.1 배경

김일성의 남침으로 대한민국은 또 한번의 상처를 크게 입는다. 한국은 이로인하여 국부[21]의 4분의 1을 잃었으며, 공업생산은 절반 이하로 줄어들었고, 남한의 주력 산업이었던 면방직[22] 공업의 건물, 시설의 피해율은 64%에 이르렀다.[23] 당시 내무부 통계국에 따르면, 전쟁 피해액 4100억으로 집계되었는데 이는 1953년 국민총생산의 85%에 달하는 것이었다.[24] 일본 패망 이후부터 50년대 중반 사이의 한국은 초인플레이션(hyper-inflation)을 겪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금 쥐고 앉았던 부자들은 한순간에 모두 망해버렸다는 얘기. 이에 미국은, 휴전회담이 진행됨에 따라, 1953년 상반기 헨리 J. 타스카를 특사로 파견하여 한국 경제의 재건 방안을 조사토록 하였고 타스카는 한국인의 생활수준을 전쟁 이전 수준으로 신속히 복구하고 한국군의 군사력을 증강하기 위해 3년 동안 약 8.8억 달러의 원조가 필요하다는 보고를 올렸다[25] 그리하여 미국은 그해 하반기 한국과 경제재건과 재정안정계획에 관한 합동경제위원회 협정을 맺고 대한민국에 막대한 물자를 제공하기로 한다.[26]

3.2.2 처방

1950년 6.25 전쟁 휴전 이후, 1인당 GDP가 67달러라는 처참한 수치에서 1950년대 미국의 원조로 해방이후 만들수도 없던 설탕을 만들어 내는 등 공업위주의 성장을 하며 동시에 경제성장률에 집착하지 않고 초인플레이션과 통화증발 문제 해결하는데 주력하였다.

대한민국은, 1950년부터 1959년까지, UNKRA(국제연합한국재건단), CRIK(한국민간구호계획), 미공법 480호와 미국의 여러 대외원조기구을 통해서 36억달러 이상의 물자를 무상으로 들여올 수 있었고 이중 14% 이상은 식산흥업에 직접적으로 투입되었다. [27] 그 결과 대한민국의 경제는 전쟁직후 6여년간 질적, 양적으로 많은 변화를 경험하게 되었다. 한국 경제는 정전 직후인 1954년부터 1959년까지 연평균 4.4% 성장했으며, 이것은 당시 다른 후진국들에 비해 높은 편이었다.[28][29] 특히 1954년~1959년 제조업의 연평균 성장률은 12.5%를 기록하여 6여년만에 제조업 최종 생산량이 갑절으로 불어났는데[30] 이는 같은 기간 연율 1.7% 성장한 농업이나 연율 2.1% 성장한 서비스업에 비해 상당히 높은 수치로서, 당시 성장이 공업화를 중심으로한 성장이었음 시사해주고 있다.[31] 한편, 그와 동시에 총고정자본 비율이 7.3%에서 11.4%로 소폭상승하였는데, 국내총투자율과 총저축률은 소폭 감소하였다.[32] 이 시기 미국의 원조가 한국 GNP의 약 8%, 총고정자본 형성의 약 80%를 차지했다는 연구결과를 참고하면[33] 1950년대의 경제성장은 원조에 크게 힘입어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노동소득 분배율은, 같은기간 27.3%에서 꾸준히 상승하여, 1959년 40.0%를 달성하였으니, 이는 1960년대 모든 해의 그것보다 높았으며 1977년 이전까지 1%p이상 넘지 못한 높은 수치였다.[34] 그러므로 1950년대 원조는 한국의 생산량을 획기적으로 높이며 산업화를 촉진하였을 뿐만 아니라 빈곤 해소와 빈부격차 완화에 크게 기여하였다고 할수 있다.

3.2.3 한계

원조 할당 권한을 쥔 정부와 자유당에 꾸준히 정치자금을 수수하는 기업간의 정경유착에 대한 비판으로 원조에 힘입어 성장한 제당, 제분, 면방직 공업을 삼백산업이라 비하하기도 한다.

3.3 1960년대

3.3.1 배경

1960년대의 연간 원조 규모는 1955년 이전의 것을 능가하였으며, 무상 15억달러, 유상 8억달러 이상 도합 23억달러 이상이 국내로 조달되었다.[35] 다만, 1963년을 마지막으로 무상원조의 연간 액수는 2억 달러 밑으로 떨어졌고, 점차 차관이 이를 대체하기 시작하여 1969년에 이르면 유상원조가 무상원조의 두배를 웃돌게 되었는데, 그 총 규모는 1960년대 북한에 도입된 8억 8370만 달러와 맞먹는 것이었다.[36] 이에따라 60년대 초부터 한국정부는 외채 상환 압력을 받기 시작하였고, 박정희 정부는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미국의 요구를 수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3.3.2 처방

제2공화국의 환율 현실화 이후 수출 무역이 늘어나면서 경제가 급성장하기 시작했다. 1960년 1인당 국민소득은 공정환율로 볼 때 155달러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는 이승만정권이 일본처럼 고정환율을 유지하고 싶어하는 것에서 기인한 비현실적 저환율의 영향이 컸다. 이에 장면정부는 1961년 겨울, 두 차례에 걸쳐 화폐가치를 총 50% 떨어뜨리는 개혁을 단행하였고, 이로써 수출의 활로가 열렸다.[37][38] 공산품(원료별 제품) 1963년 수출이 계획보다 네 배가량 높았던 것이다[39].

이에 박정희 정부는 1964년 5월 3 일 다시한번 화폐가치를 50%가까이 떨어뜨렸고 그결과 1964년 연간 수출 증가율이 작년대비 15%p가량 증가하였으며 이듬해 미국의 요구에 따라 변동환율제로 완전히 이행하자 수출증가율은 6%p 다시 올라 42.4%를 기록하였다. [40] 그리하여 1965년에는 1인당 GNP 100달러를 돌파하며 최빈국에서 벗어났으나[41] 그해 1분기와 2분기 성장률이 각각 0%대로 가라앉고, 심지어 3분기에는 마이너스 성장을 하는 등 경제가 후퇴하기도 했다.[42] 이에 재정 팽창을 시작한 결과 경제가 다시 움직였으나 과열된 나머지 1968년 10월 일종의 외환위기를 맞는다.

그러나, 한일협정으로 꾸준히 들어오는 물자 등, 파독 광부, 간호사들의 송금, 베트남 전쟁 때 파병한 군인들에게서 떼먹은 돈[43] , 미국이 차관 형식으로 지원한 돈 등으로 장면내각의 경제 개발 5개년 계획 후속편을 만들어 이행하여 섬유산업, 신발산업 등 노동집약형 경공업위주의 수출증대 전략으로 성장을 해 왔다. 가발산업도 발달했는데, 인조 인모 같은 게 아니라 진짜 머리카락으로 만든 가발이었다. 조선시대에나 있을 일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머리카락을 잘라서 파는 일은 자주 있었다. 박정희 정부는 이러한 상황속에서 농림어업의 생산력을 증대하여(제1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 농가의 소득을 개선하고 식량자급을 실현하려 하였으며(제2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44], 전력, 사회간접자본, 기간산업(비료, 시멘트, 제강, 기계, 정유)을 장기적으로 육성하는 한편(제1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 특히 화학공업, 철강공업, 기계공업에 중점을 둔 기계화를 추진함으로써 수입대체산업화수출주도산업화를 통한 국제수지 개선을 도모하고 자립경제 체제를 달성하려 하였다. 그 결과 국내 총투자율은 16%p가 늘어나 목표치에 거의 근접하게 되었고 1960년대의 연평균 경제성장률은 9.7%에 이르러 불과 10여년만에 한국 경제의 몸집은 두배로 불어났으며[45] 1969년에 1인당 GDP에서 북한을 추월하고 ,국민소득상으로 빈곤국을 벗어나게 된다.[46]

3.3.3 한계

노동소득 분배율은 1964년까지 추락했다가 1969년에 이르러서 1960년도의 그것에 약간 못 미치는 수준으로 회복되었을 뿐이며, 5.16 군사정변 이후 미국의 권고를 어김에 따라 인플레이션을 조장하여 1950년대에 비해 가계 순 저축률을 개선하지 못하였고 그 결과 당초 동원하려던 내자에 한참 미치지 못하는 액수를 조달하여 투자재원 자립도는 1960년도에 비해 10%p 이상 떨어졌다. [47] 그나마 수출은 20배 이상 늘어나 실업률은 감소하였으나 국제수지는 더욱 악화되어 이또한 한 국제수지 균형을 달성하고자 하는 목적을 이루어내지는 못하였다.

3.4 1970년대

3.4.1 배경

1960년대 GNP는 2.2배 성장하였고 이에따라 1인당 국민소득도 94달러에서 194달러로 거의 같은 배율을 보이고 있다. 수출에 있어서는 3200만 달러에서 7억달러로 20배 이상 신장한데다, 산업구조에 있어서도 1차산업과 2차산업의 비율이 41.4%대 15.1%에서 28.1%대 26.1%로 변화함으로써 공업화 발전의 성과를 나타내고 있다. 이와같은 고도성장은 국내저축률이 1961년 2.5%에서 1969년 16.4%로, 해외저축률이 10.4%에서 11.3%로 각각 상승함에따라 GNP에대한 투자총액비율인 투자율이 10.4%에서 29.6%로의 대폭적인 증가한 것에의해 뒷받침되고 있으며 조세부담률이 10.2%에서 15.3%로 올라갔다는 국민의 희생적 부담또한 뒤따르고 있다…중략

그러나, 공업화를 주축으로 하는 확대성과의 모두가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었다는 것이 우리가 반성해야할 점이라 하겠다… 경제지지표에 의해서도 명백히 제기되고 있는 바와 같이… 농공간의 불균형이 국민경제의 파행성을 한층 더 심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공업소득이 상대적으로 높아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농업소득은 저하되고 공업부문의 유효수요를 감소시키고 있는 한편, 농업 자체의 생산 수준은 거의 진전이 없는 실정 하에 있다. 따라서, 1970년대에 접어든 경제정책의 주도력을 비단 수출과 공업성장의 측면보다는 농업구조의 근대화와 농업생산성의 제고 위에서 공업의 국제경쟁기반을 확고히 할 수 있도록 주도력을 획기적으로 이행하여야 할것이다…중략

지난 1960년대의 경제성과에서 볼 때, 우리나라 산업정책상의 가장 큰 허점이 있었다면 아마도 기업의 내부축적자본을 마련하지 못하였다는 점일 것이다. 정부는 정부대로의 외채와 차관을 주도해 왔고, 민간은 민간대로 대외차관을 크게 이권화하였다. 오늘날, 대기업의 경우 제조원가에 미치는 이자비용은 평균 10%선에서 어떤 경우는 20%선에까지 달하고 있고, 중소기업의 사채의존율은 평균 25%에 이르고있다. 참으로 자본구성면에서 너무나 취약한 기반이며 기업을 하고 있는 것 자체가 불합리한 지경에까지 다다르고있는 것이다. 정부는 정부 나름대로 강제저축의 폭을 확대하고 있고 기업은 기업 나름대로 자산부실화의 길을 걷고있는 것이다. 고금리, 고세율, 고원리금이 반복되는 악순환 속에서 기업은 본질적으로 생산원가 상승 압력의 폭을 한층 더 확대하고 있는 것이다. 산업구조의 고도화와 무역자유화에 대비할 수 있는 경쟁력강화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시설근대자금의 공급과 특히 중소기업에대한 보다 더 조직화된 장기시설자금이 요청되고 있는 것이다…후략

- 1970년 1월 1일, 매일경제 5면. 중앙대학교 교수 겸 한국산업개발연구소장 백영훈

3.4.2 처방과 한계

1971년 수출 규모는 1964년에 비해 10배 늘어나 10억 달러를 돌파했다. 그러나, 월남 특수 종료 및 1차 오일쇼크, 외채상환 압박, 부실기업 문제로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이에 대통령 박정희10월 유신과 그에의한 긴급조치 등으로 이를 무마하고, 베이비붐 세대 특수에 따른 노동력 및 미일의 원조를 바탕으로한 과다투자를 실시함으로써 경공업 수출 증가 둔화 속에서 제철이나 조선, 자동차제조 등 노동 집약형, 조립가공형 중화학 공업이 상대적으로 발달하였다.[48]

1973년에는 100% 식량 자급자족을 달성해 이듬해 북한에게 북한이 우리의 제의를 잘 따라준다면 식량 제공을 할 수 있다고까지 했다. 1974년에는, 8.3 사채 동결조치의 후폭풍 등으로 국가 부도 위기에 처하기도 했으나 대출을 통해 이를 막은 뒤 노동집약 건설업[49]을 통해 중동지역에서 다량의 오일달러를 벌어옴으로써 성장을 계속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대한민국은 1976년 세계 19위의 무역국에 올라서고, 1977년 1인당 GDP 1,000달러를 돌파함과 동시에 수출 100억달러 달성[50]하였으나 기술, 제품 등의 해외의존율이 높아 외화 가득률이 떨어져 부가가치세를 도입하는 등 순이익은 매출에 비해 크게 나아지 않았고 순부채는 못하고 꾸준히 누적되어 2차 오일쇼크 때에는 잘못하면 나라 망할 뻔했다.

미국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인 폴 볼커가 기준금리를 20%까지 끌어올리는 바람에 미국이 빌려준 차관에 대한 이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났기 때문이다. 게다가 1970년대에는 1973년을 제외하면 대체적으로 두자릿수대의 물가상승률을 보였으며 특히 2차 오일쇼크 이후로는 물가상승률이 연 20%대에 이르렀다. 그러나 박정희 정부는 국내 금리를 그보다 낮게 설정하여 실질적인 마이너스 금리를 실시함으로써 차입경영을 유도하였고, 한편 대외적으로는 빚을 더 많이 들여옴으로써 부실경영을 주도했다. 1977년 갚지 못한 차관이 68억달러나(원리금43억, 이자 22억) 남은 상황에서 박정희정부는 3년간 73억불을 새로 들여온 것이다.[51] 그리하여 1979년에는 세계 15위의 무역대국으로 올라서며 OECD로부터 신흥공업국이라는 타이틀을 얻게되며 개발도상국 선두에 서게 된다.[52]

1970년대 말부터는 서울 강남 개발에 본격적으로 착수하며 성장, 균형, 안정, 자립적 경제구조의 구축, 지역간 균형적 발전을 목표로 삼고 1979년에는 1인당 GDP 1,600달러를 달성하였다. 하지만 그만큼 주택 부동산가와 물가가 대폭 상승한 시기이기도 하다. 이에 제4기(~1982년)는 외적으로는 중화학공업의 제조업 비율 증가(53% 달성)를, 내적으로는 소득분배와 생활환경 개선, 주택 공급에 초점을 맞추었지만, 신통치 않았고 9% 성장의 목표에 비해 성장은 5.5%로 다소 부진하였다. 특히 1979년 2분기에는 0%대 성장을 하여 전분기 5% 성장과 큰 대조를 이뤘고, 3분기와 4분기는 -1%대, -2%대 연속 마이너스 성장을 하게 된다.

3.5 1980년대

3.5.1 개괄

1980년 1분기에는 다시 0%대 성장을 하였으나, 2분기 마이너스 성장을 하고, 3분기 2%성장을 하는 가 싶더니, 4분기에 -3%에 가까운 성장을 하여 그해 -1.5 ~ -1.7% 성장을 하였다.[53] 단, 오일 쇼크라는 역사에 남은 경제적 파동의 영향이 가중되었음을 잊으면 안 되겠다. 당시 미국 국채금리가 20%가 넘던 시절이었다. 전세계적으로 경제성장률이 마이너스를 찍던 시절이 바로 이시절이다. 물론 같은시기인 1980년 필리핀은 5%대 성장을 했고 중국은 7%대 성장을 하는 등 개발도상국이 다 그런 것은 아니었다.[54] 또 분기별로 따졌을 때 최초의 마이너스 성장도 아니었다. 박정희 집권 이후 무려 열다섯 번 째 마이너스 성장이었다.[55]

이후 1980년대 중반은 전 세계 경제가 발전하던 일명 3저호황 시기. 한국도 이 흐름을 타서 경제가 어느정도 회복되는데, 이를 기회로 한 전두환 정부의 과잉 및 중복 투자를 정리하는 산업합리화 조치가 크게 기여했다. 1982년부터 주식시장에 대한 제한조치가 풀리면서 코스피지수(당시 종합주가지수)가 상승해 1989년 4월 1일 처음으로 1000포인트를 돌파했다.

부마민주항쟁. 10.26 사건, 12.12 군사반란, 서울의 봄 등의 경제적, 정치적 혼란기를 버틴 대한민국은 1985년을 전후한 저금리, 저유가, 저달러[56] 임금 상승에 의한 내수 성장에 힘입어 연평균 10.4%의 고도 성장을 이어나가며 전 세계 1위를 기록했다. 솔로우 성장 모형 등지에서 소득이 높아질수록 성장률이 낮아진 점을 감안하면 전두환 시기가 박정희 시기보다 연평균 성장률이 높았다는 것은 특기할 만한 일이다. 특히 내수산업인 서비스업의 급성장(연 평균 11% 이상)이 두드러졌다.

박정희 정부의 정책 상당 부분을 자유경제에 맡기는 방식으로 개편이 이루어졌고, 성장 일변도의 박정희 정부와 달리 물가안정에 역점을 두기 시작했다. 특히 중소기업 육성책이 그러하였는데, 1981년 독점규제 및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 수정함으로써 독과점화와 경제력집중에 대한 규제를 보강한 것, 즉 기업결합과 담합에 대한 제한, 계열사간 상호출자와 상호지급보증의 제한, 순자산액의 25% 타사 주식 보유 제한, 30대 재벌 여신한도규제 등이 그것이다. 한편, 인건비가 크게 올라간 1970년대 말 이후 외국 기업들이 동남아 지역의 더 가난한 나라로 떠나기 시작하였으며 80년대 말에 이르면 한국기업도 떠나가기 시작하였는데 이에 전두환 정부는 "기술 혁신과 신기술개발투자를 촉진하고, 중소기업 및 부품공업을 발전시켜 대내외 시장에서 경쟁력 있는 비교우위산업을 육성"하는데 노력했다. 그결과 1980년 1,704달러를 기록한 1인당 GDP는 1989년에 5,737달러로 크게 올라갔고 1988 서울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개최하면서 북한과의 체제경쟁에서 승리했다는 확신을 심어주었고, 동서 화합과 동구 공산권 국가들의 민주화의 단초가 되었다.

3.5.2 한계

한편 임금 노동자를 위해 시행한 저곡가 정책은 도시화의 진행과 2,3차 산업의 발달과 맞물려 농촌의 상대적인 박탈감을 불러오게 된다.

3.6 1990년대

3.6.1 개괄

단군 이래 최대 호황이라 불리며 1990년 6000달러에 머물던 1인당 소득은 1995년 1인당 GDP가 1만 달러를 돌파하고 1996년 13,138달러에 달했으며 OECD에 가입하기에 이른다. 1990년대에는 민주화가 달성되고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금융실명제(1993년), WTO가입(1995년), OECD가입(1996년) 등 강한 개방정책을 폈다. 그러나 이는 한국에 걸맞지 않은 지위라며 비판이 많았고, 예상대로 불과 1년 뒤인 1997년 외환위기가 터지며 짧았던 밀월은 끝나고야 만다. 이는 한국 경제의 패러다임 자체를 바꿔버린 대사건으로 이전까지 통용되던 신화들을 상당부분 깨뜨려 버렸다. 상세 내용은 1997년 외환 위기 항목 참조. 이듬해인 1998년 GNI는 7000달러대로 떨어졌고, -6.9%라는 최악의 경제성장률이 나왔다. 그러나 IMF의 요구조건 수용과 금모으기 운동 등의 국민 참여로 1999년 9.5%성장을 기록하며 이를 반전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3.6.2 한계

현재 서민경제는 그 이전에 비해 몇 배는 성장했지만 체감상으로는 IMF 구제 금융 사태 이전에 비해 많이 차가워진 편이다. 다만 이는 일본처럼 1990년대를 기준으로 한 기대치만큼 자신들의 삶의 수준이 올라가지 못한 것과 고용 불안정[57]에 대한 결과로 보인다.

3.7 2000년대 이후

2000년대 초반의 경제침체와 2008년의 세계 경제 위기 당시 크게 미끄러지는 모습[58] 등으로 인해 중진국 함정에 빠진 것 아니냐는 비관론이 생겨나기도 했다. 2010년대에 들어서는 국제적으로 선진국으로 분류되지만, 한국 내에서는 대체로 개도국과 선진국 사이로 평가한다.

2010년대 초반 삼성 등의 기업의 약진, 2008년 9월 세계금융위기 이후 다른 선진국들이 아직도 그 후유증으로 고생하는 동안 크게 성장한 한국의 경제 규모와 그에 따른 국민 소득 2만 5000달러 돌파 등 전반적인 경제적 성과가 있지만, 한편으로는 1997년 외환 위기 이후 일본의 잃어버린 10년처럼 성장 동력을 잃어가는 모습, 노동자 처우 문제 등 문제점도 존재한다. 이는 대한민국/경제에서 서술하기로 한다.

4 배경

4.1 불리하면서도 유리한 요소

4.1.1 인구과잉

현재에도 세계에서 '인구 4~5천만 넘는 나라' 중 선진국 취급받는 나라는 정말 적다.[59] 선진화된 국가는 대다수가 인구가 수백만~2천만 이내 정도이다. 국가가 어느 정도 성장을 해서 그 인구를 부양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후엔 인구는 강력한 자원이 되지만, 그럴 생활수준이나 능력을 갖추지 못한 나라가 훨씬 많다. 나라가 근대화되지 못한 수준일 때는 인구가 많다는 건 성장에 상당히 어려운 점으로 작용한다.

8.15 광복이후 20여년간 대한민국의 연평균 인구성장률은 2.45 ~ 2.6 %에 이르렀다.[60] 그러나 해방 당시 대한민국은 인구의 80%가 농업 종사자로 있는 후진 농업국이어서 당장 이 모두를 흡수할만한 일자리를 늘리지 못하였다. 또한 지속적으로 농촌의 인구가 도시로 유출되었음에도 1967년까지 농가의 인구는 계속 늘어나,[61] 6.25전쟁으로 인해 공업의 60% 가량이 파괴된 것과 더불어 생필품 부족, 초인플레이션을 야기하였다. 때문에 정부는 긴축정책을 실시하였고 높은 실업률, 절대 빈곤 문제를 극적으로 해소하지 못했다. 또한 식량 가격을 안정시킴에따라 농가의 소득이 하락하기도 했다.

4.1.2 남북분단

휴전협상은 말 그대로 전쟁을 휴전한 협상이었다. 그렇기에 북한은 수시로 도발을 해대며 호시탐탐 적화통일의 기회를 노렸다. 특히 1960년대 후반에는 베트남에서 미국이 발을 떼기 시작하였고 북한과의 관계는 그야말로 반 국지전 상황이었다. 더 알고싶은 이는 북한/대남 도발사를 읽기 바란다. 이로인해 세계 4위 규모의 70만 대군을 함부로 감축할 수 없었다는 점, 대한민국이 사실상의 섬나라가 되버리면서 화물 운송과 유통 발달 면에서 한계가 존재하는 점 등이 불리한 점으로 지적되기도 한다. 또한 이러한 분쟁/대치 상황은 국제 자본가들 입장에서 그리 매력적인 투자처가 아니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한미군이 존재해서 일본, 미국 투자 잘만 받았다. 특히 미쓰이삼성전자, 히타치LG전자, 미쓰비시쌍용, 도시바는 대한전선(TEC, 나중에 대우전자로 넘어감), 테이진은 SK그룹, 도오레이는 코오롱그룹 등과 차관 내지 합작으로 결연 관계를 잘만 맺었다.[62]

4.1.3 부존자원

애초에 중동의 오일머니 같은 효과는 기대할 수 없었다. 지금이야 씁쓸한 해프닝 정도로 취급되는 이야기지만, 1976년 대통령 신년기자회견에서 영일만 부근에서 석유가 발견되었다는 소식이 터졌을 때 전 국민이 받았던 낯설음과 충격파, 설레임에 뒤이온 허탈함을 미루어 보면 천연자원에 대한 갈망은 유사(有史) 이래 오랜 세월 동안 존재해 왔다. 이후 2000년대 들어 동해상에서 천연가스와 소량의 석유를 생산하고 있으나, 안타깝게도 수요에 비해 매우 부족하다. 하지만 이 때문에 1차산품에 주력하던 다른 개도국들과 달리 2차산품에 집중할 수 있었고 그 결과 제조업이 더 발달하게 되었다.

4.2 긍정적 요소

한국이 살아남은 것은 냉전시대의 지정학적인 중요성(즉, 미국의 지원)에 따른 높은 투자와 높은 교육열, 그리고 높은 저축률같은 요인이 있었다. 이는 아시아의 네 마리 용이라는 아시아 유교권 국가에도 같은 사례가 발견되며 이는 그 나라의 국민성과 관련이 있다.

4.2.1 민족주의

민족 갈등, 종교갈등을 안고 있는 남아메리카동남아시아, 서아시아 등과는 다르게 한국은 오래 전부터 강력하고 유서 깊은 단일민족[63] 중앙집권제 국가 아래 그 정체성이 하나로 유지되어 왔다. 심지어 한반도 본토에서 멀리 떨어진 제주도나 울릉도의 사람들도 동일한 유대감을 갖고 살아간다. 중국에선 티베트위구르의 분리 독립 운동이 벌어지고 있고, 일본에서는 일본의 제국주의 팽창 과정에서 식민지로 점령한 류큐의 독립운동이 벌어지고 있으나 이러한 일도 없다는 점은 흔치 않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아프리카 국가들처럼 간헐적인 내전이 벌어지거나 종족 간에 살벌한 분쟁이 벌어지지는 않았다.[64] 그리하여 한강의 기적이 실현될 수 있었던 배경 중 하나로서 온 국민이 공유한 민족적인 유대감이 꼽힌다.[65]

4.2.2 민주주의

민주주의와 그 제도의 정착은 경제의 성장에 있어서도 꼭 필요한 조건인데 대한민국은 다른 독재국가들와는 다르게 비교적 최소한의 민주주의의 틀은 유지되면서 점진적으로 민주주의가 발전되었다. 또한 자원이 풍부한 남미나 중동처럼 미국의 개입과 간섭에 그 발전이 무너지지도 않았다. 그리하여 독재라고는 하여도 정권을 장악한 집단이 소소하게나마 변해 나가고 있었다는 점, 유신 시대를 제외하면 정권이 교체되면서 점차 사회가 자유로워진 점을 들어 한강의 기적이 중동이나 아프리카 등의 국가들과 비교되기 어렵다는 주장이 매우 많다.

왠 말인가 싶겠지만, 이승만 대통령이 1공화국이 만들어질 때부터 내세우기 시작한 독재정권 내내에도 '투표를 통해 정치인을 선출하는 제도'는 계속 유지되었다. 물론 독재정권 기간 동안 선거에 깡패나 공권력 등을 동원해 결과가 자신들 입맛에 맞도록 했지만 적어도 제도적 민주주의의 영향으로 이 행동이 올바르지 않음을 전 국민이 알 수 있었으며 민주주의가 도입된지 15년도 안 된 동네에서 민주주의를 수호하겠다고 4.19 혁명이 일어날 수 있었다. 유신 때에도 허울에 가깝지만 국회도 유지되었고, 독재타도를 부르짖던 운동권 학생들도 코렁탕을 먹어가면서도 대부분 정치적 사회적 활동을 이어갈 수 있었고 이후 한국 정치계는 이들이 주도하게 된다.

4.2.3 높은 교육열

해방직후 문맹률이 70%에 이르던 대한민국의 상황은 한글 보급, 의무교육의 확대 등의 이유로 문맹률이 1950년대에 10%~15%전후로 떨어지는 등[66] 빠르게 개선되어 제1공화국 때부터 기본적인 셈과 글을 읽고 쓸줄 아는 노동인력이 풍부해졌다. 또한 예로부터 한국은 부모님, 형제 자매들은 뼈 빠지게 일하고 죽어라 돈 마련해서 자식, 동생들을 대학에[67] 보냈다. 파독 광부,간호사를 다른 개도국보다 우선시 여겼던 것도 최소 고졸 이상의 학력이 있어서 파견이 가능했던것. 또 기술인력 측면에서도 당시 대체연구복무 + 인원 확충으로 기술인력이 대대적으로 증가했다.[68] 문화적 역사가 깊다는 것도 크게 유리한 부분. 이는 결과적으로 민주의식 발전에 따른 사회 자정작용 기능, 중산층의 확대로의 기능을 하였다.

4.2.4 저축과 투자

일본, 한국 등 동아시아 지역은 다른 지역에 비해 상당히 높은 저축률을 자랑한다. 이는 임금으로 지불된 자금을 은행을 통해 다시 자본으로 전환, 투자와 사업확장을 용이하게 해주었다. 여기에 덤으로 냉전체제의 최전방으로서 미국과 일본의 엄청난 차관과 기술적 지원을 받았다.[69] 펠드스타인-호리오카의 연구에 따르면 한 나라의 저축과 투자 간에는 높은 상관성이 도출된다. 원래 저축을 많이 했는지 경제성장 이후에 부각된 건지는 명확하진 않다. 그러나 국가가 저축을 해도 괜찮은 환경을 조성할 수 있던것 자체 가 능력이 좋다는 의미다. 최소한 화폐물가가 안정하다는 이야기. 미국의 원조 방침이 빛을 발하는 부분. 다만 현재는 중국을 제외한 한국과 일본의 저축률은 크게 낮아졌다.

5 이야깃거리

5.1 변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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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의 명목 GDP는 13억 달러. GNI는 겨우 67달러였다. 당시 1달러의 가치가 지금(2011년)보다 열배정도 높다는걸 감안하더라도 1,000달러 미만의 빈곤국이었던 것이다. 그런 소득이 60여 년간 25배가 뛰어 2006년에는 GDP가 1조달러를 돌파하고, 2008년 GNI는 20,265달러. 2013년에는 25,000달러에 달했다.

수출 규모도 1948년 4,300만 달러에서 2008년 3,720억달러까지 16,000배 이상 폭증했고, 무역 전체규모는 2011년 기준 1조 달러를 초과했다. 수출산업도 1950년대의 1차산업(농업)위주에서 2000년대에는 2/3차 첨단산업으로 완벽하게 바뀌어 버렸다.

5.2 민주화의 성취

동시에 대한민국은 1987년 6월 항쟁 등을 거치며 높은 수준의 경제 선진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달성한 드문 케이스로 알려져 있다.

이코노미스트지에서 내놓은 세계 민주주의 지수는 세계 각국의 민주주의 발달 정도를 수치 통계로 순위를 매기는데, 10점 만점에 8점이 넘어가면 '완전한 민주주의'로 분류한다. 대한민국은 원문 2012년부터 3년 연속 '완전한 민주주의' 등급으로 분류되었으며 2015년 22위로 아시아에서는 가장 높은 순위를 찍었으나 8점 이하를 기록하여 '결함 있는 민주주의' 랭크로 분류되었다.

5.3 박정희 대통령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제작한 '백년전쟁'에서는 프레이저 보고서를 왜곡해 박정희 정부는 미국의 명령대로만 했다고 왜곡 주장했다. 반대파에선 자기네 주장에 필요한 부분만 해석했다는 비판도 있는데 예컨대 박정희는 군사통치를 하면서 미국에서 시키지 않은 화폐개혁을 했다가 철회하였고 종합제철소 건립을 추진했다가 백지화해버린 바 있다. 한국경제성장의 상징인 중공업화 정책에 대해선 미국이 아직 이르다는 이유로 반대하였기 때문에 일본에서 차관을 구하는 등 온전히 미국의 도움만 있었던 것도 아니다. 또 포항 제철이 이후 한국 경제 개발에 어떤 역할을 했는가를 생각하면 단순히 미국의 꼭두각시였다는 것이 전부가 아닌, 결단력과 독재에 의한 저난도 리더십도 한몫 했으리라 봐야 마땅하다.

박정희의 중공업 정책 등 유신 후기의 관치 경제는 말년의 박정희도 문제점을 절감할 만큼 자유시장적 측면을 무시함으로써 제조업 과잉 중복 투자 등으로 문제점이 있었다는 것은 대다수의 학자가 동의하는 문제다. 그러나, 다른 개도국이나 과거에 비하면 당시에도 개선되고 있었다는 점 역시 고려해야 할 것이다.

박정희를 좋게 보는 외국 학자들이 많은데, 한국의 경제학자들보다 한국경제를 분석할때 통계적,수치적인 면에 관심을 가질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실제로 박정희는 국내에서 그 청렴함에 대해 갑론을박이 오가는 인물이지만, 외국에서는 보통 '독재자였지만 청렴했던 인물'로 평가한다.

제1차 5개년 계획이 장면 정부 때 만들어졌기 때문에 박정희가 아니어도 얼마든지 성장이 가능했다 따위의 이야기가 있는데 이는 무한한 가정 중 하나로서 학문적 의미가 없다. 역사에 만약은 없기 때문에, 박정희가 없다고 가정하는 순간 그 이후의 답은 무조건 알 수 없다가 정답이다. 다만, 이승만 정부가 물려준 산업기반과 제 2공화국의 제1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은 높이 평가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유의할 점은, 대한민국 경제의 틀이 잡힌건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한방에 이루어진것이 아니며,그 뒤를 따르는 제2차, 제3차 제4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은 온전히 박정희 정부 때 나온 것이다. 게다가 계획을 하는것과 그것을 성공시키는 것은 엄연히 다른 것이며, 계획들의 경우 새마을운동[70] 같이 성공한 것과 새마을공장 같이 실패한 것을 동등하게 다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만약 그랬다면을 가정하고 무의미한 말싸움을 반복하기보다는 객관적 사실을 보고 판단하는 것이 이로울 것이다.

5.4 관치경제

국가 주도형 성장을 하면서 심화된 정경유착, 금융부실 등 한국의 많은 장애물을 만들어 왔다. 70년대까지만 해도 한국의 경제성장 기반은 아직 취약한 상태였다. 1979년 2차 석유 위기 때에는 경제가 후퇴하기도 했었고[71], 1983년에는 세계 4위의 채무국으로서 외채가 넘쳐나는 나라였다. 이것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었으며 1969년, 1979년을 비롯한 수차례의 외환위기, 1974년에 있었던 국가 부도 위기[72]가 그것을 증명하며, 1979년 박정희 정부 시대의 외채는 180억불로 세계4위 (GDP대비 55%이상)이었고 정치적으로 혼란했던 1981년 전두환 정권시기엔 외채 550억불로 (GDP 대비 100%) 잠시동안 세계 1위를 기록했을 정도였다. 이 때문에 한국경기 조기 도산설이 일부 경제학계와 대학가 운동권에서는 횡행했고, 외채 1~3위였던 브라질, 아르헨티나, 멕시코는 이후 전부 다 도산했다.[73] 즉, 과거 한국 경제성장은 미국과 일본에서 쏟아부은 엄청난 양의 외채를 등에 업고 이루어졌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으며 체질개선이 본격적으로 시작 된 것은 1997년 외환 위기 이후로, 1999년 김대중 정권 때 최초로 순 채권국이 되고, 2014년 박근혜 정권 부터 순 자산국이 되는 등 오늘날 펀더멘털은 많이 나아졌다고 평가받고 있다.

정치적인 부분에 있어서는 기업과 정부의 협력관계를 지나치게 강화했던 것이 원인이 되어 로비를 통해 운용되는 금권정치를 강화하는 것으로 이어졌고, 이는 아직까지도 영향이 남아 의회에 대한 신뢰도를 떨어뜨리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여기에 그 시기에 축적했던 일국 내에서 통용되는 자본이 시장을 향한 투자가 아니라 개인의 부동산 자본 축적과 이어지게 되었던 심각한 부작용을 양산하게 되었는데, 이는 원자재의 가공을 통해 만들어지는 생산물, 즉 수출을 주도하는 중공업 기업들의 생산물이 그대로 건축자재로 쓰일 수 있었던 것을 그 원인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를 통해 건설사들에게 돌아가는 파이가 커지고, 결과 부동산 개발에 중점을 둔 정치체계가 자리를 잡게 되었고, 이는 여태까지도 한국 사회의 정치지형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5.5 대기업 중심의 경제

경제가 대기업 일변도로 발전하다보면 어느 시점부터 효용보다 기회비용이 더 커지게 된다는 견해가 있다. 절대다수의 중소기업들이 독자 생존하지 못하고 대기업의 아웃소싱 수준으로 떨어진다는 주장이다. 그리하여 박정희 정부 등은 중소기업 육성책을 꾸준히 내놓았지만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5.6 소비자 입장에서의 비판

수출위주의 제품생산이 내수용 제품의 질을 크게 떨어뜨렸다는 견해가 있다. 수출 제품이 싸고 질 좋다고 알려져 시장판로를 개척했다면 이는 물론 좋은 일이나, 이를 유지하기 위해 질 떨어지는 제품을 애국심을 앞세워 국내시장에 팔아먹었다는 주장이다.[74]

오늘날까지 같은 회사, 같은 제품인데 내수용은 성능도 나쁘고 비싼데 외수용은 값싸고 성능도 좋다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국내 소비자의 너무 까다로운 품질조건을 만족하지 못해서 환영받지 못하던 물건을 수출해 유명해진 일본이나 독일과는 정반대의 상황. 한때 이 나라들은 지나친 무역흑자 때문에 눈초리를 받아서 국가원수가 수입품 좀 쓰자고 광고를 하기도 했다.

5.7 분배

성장에만 치중했다곤 하지만 분배도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아니다. 지니계수의 시계열을 조회해보면 살펴보면 물가 폭등과 제2차 석유파동으로 경제가 어려웠던 70년대 후반을 제외할 경우 이전보다 오히려 개선되거나 지속적으로 0.3대 중반을 유지하였고 가장 높았을 때도 일반적인 개발도상국 수준인 0.4를 넘지 않는 양호한 수준이었다. 특히 1980년대 3저호황의 영향으로 지니계수가 급락하면서 IMF 외환위기 이전까지 웬만한 선진 유럽국가들 수준인 0.2대 중반을 기록하게 된다. 하지만 고도성장기가 끝나고 1997년외환위기, 2000년 IT 버블 붕괴, 2003년 신용카드 사태 등의 굵직굵직한 경제 위기를 겪고 신자유주의를 본격적으로 도입함에 따라 고용이 극히 불안정해지고 사회안전망도 붕괴되면서 2006년 지니계수는 다시 0.3에 진입하여 2013년의 공식 지니계수는 0.302이 되었다.[75] 오늘날 양극화란 말이 널리 사용되기 시작하고 계층 간 이동도 이전에 비해 크게 어려워졌다.

5.8 비판점 - 가마우지 경제?

중국 계림지방에서는 가마우지를 이용하여 낚시를 하는데 이는 가마우지의 목 아래를 끈으로 묶어 가마우지가 물고기를 삼키지 못하게 만든 뒤, 가마우지가 물고기를 잡으면 목에 걸린 물고기를 가로채는 방법이다. 한국이 부품 소재를 수입, 조립하여 완제품으로 다시 수출하는 것에 비유하여, 고무로 나오키(小室直樹)가 1989년 '한국의 비극'이라는 책에서 언급하였다. 이후로도 한국 경제를 비판할 때마다 사용되는 단골 용어이다. 물론 이를 방치했던 것은 아니다. 박정희 정부 등은 일찍이 이러한 문제점을 파악하고 기초산업에 대한 제도적 지원과 투자, 기술과학 육성. 국산화 등 이를 해결할 수 있는 정책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고, 여전히 부품은 일본에 의존하고 있다. 다만 근 20여년 동안 디스플레이, 모바일, 조선 등 완제품 점유율 등에서 드디어 일본을 압도하기 시작함은 물론, 일본 기업, 미국 기업과 특허 전쟁을 벌일 정도로 기술이 축적된 상황이 되자 가마우지가 어부를 잡아먹기 시작했다는 말도 나오고 있다. 이른바 역샌드위치론이다.

물론, 이것이 가마우지 경제를 반박하는 것은 아니다. 일례로 한국은 IT 및 전자 산업의 수출 규모는 매년 증가하고 있으나 전자 산업에 필요한 희토류의 수입량은 오히려 감소하고 있다. 이유는 중국과 일본에서 희토류 반제품이나 완제품을 수입해서 사용하기 때문이다. 원래 기초 기반 기술은 하루 아침에 따라잡기 어려우며 수십년이상 걸릴 수도 있다. 한국의 경제 성장으로 기술 개발 및 국산화 테크를 밟고 있다고는 하나 아직은 발전이 미적지근하다. 조선업의 대규모 적자의 까닭을 여기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한국 경제는 대일 무역에서 계속해서 적자를 보고 있으며 이는 2005년 243.8억달러 에서 2010년 348.8억달러로 늘어나는 등 수출이 증가하면 수입이 그보다 더 증가하는 굴레에 빠져있다.[76] 하지만 역으로 대중국무역에서는 자본재수출을 통해 지속적으로 막대한 흑자를 보고 있다. 우리의 대일무역수지 적자가 자본재에 의한것이라는 점을 보면, 개발도상국이 선진국에게 어떻게 시장을 만들어주는지의 예가 될 듯하다. 또한, LCD 같이 규모의 경제가 작동하는 분야는 부품 소재의 국산화도 상당히 진척 되기도 하는 등 개선도 이루어지고 있다.

5.9 환율

1950년대 후반 1달러에 50원 하던 것이 불과 5년만에 257원으로 다섯 배 넘게 뛰었는데, 이는 미국의 요구 사항이었다. 대부분의 경제학자들이 수출의 급증 원인을 환율에서 찾는데, 이는 미국이 원하던 것이었다. 이후 박정희 정부는 어느정도 미국의 의견에 대립을 보이지만, 결국 수출의 증가를 경제성장의 동인으로 여기자면 미국의 역할을 높이 사야 할 것이다. [77] 그 후 IMF가 터지면서 원화의 가치는 더 추락하여 1998년 한때는 1달러 1,700원까지 치솟게 되고 2007년에는 800원 대까지 원화 가치가 절상되었지만 2008년 금융위기로 다시 원화가치는 1,400원대까지 추락했다. 현재는 다시 원화가치가 절상되어 2016년 기준 1,200~1,250원 선을 유지하고 있다. 부동산을 잘못 건드린 결과 타격이 더 컸다고는 하지만, 플라자 합의로 엔화가 절상되는 바람에 경제에 엄청난 타격을 입었던 일본처럼 한국이 되지 않은 것은 다행이라 할 수 있다. 또, 가마우지경제를 고려해 결과론적으로 볼 때 이러한 조치는 한미일 구상무역으로 이해할 수 있다.

5.10 중화학공업

# 한국형 경제정책 연구소의 견해

오원철 경제수석[78] 등의 전략적 식견이 빛을 발한다고 극찬한다. 단순히 우리가 필요하니 공장을 짓는다는 개념에서 벗어나, 세계 시장을 겨냥하고 기술력 위주의 투자로 공장을 건설하였다는 것이다. 또한, 후진국에서 빠지기 쉬운 군수 전용 중공업 산업의 덫에 빠지지 않고 '국방 산업의 기반 육성'이라는 목표를 달성하면서도 민간 경제의 효율성을 살린 각 기업과 공장들이 세계 수준에서 경쟁력을 갖고 수출품목을 양산하는 데 성공함으로써 방산 산업 토대 건설 및 탄탄한 경제 기반 건설이라는 목표를 같이 달성했다고 보고 있다.

한국 경제가 중화학 공업을 육성하면서 자본이 쌓이기 시작했고 이를 다시 생산성에 투자하는 선순환이 일어나 한국의 실질임금이나 교역조건 등의 지표가 개선됨은 물론 기술 축적의 결과물이 나오기 시작했다는 주장이다. 물론, 50년대, 60년대 국내 여러 정치인, 군인들이 중공업화를 반대한 것은 아니다. 6.25 전쟁 전후로도 정부는 신속한 중공업 육성을 계획해 왔다. 그러나 훗날 삼성전자반도체 개발(80년대)과 현대자동차현대 알파 엔진(90년대) 등 결과물들이 나오면서 박정희 시절의 국가주도적인 방식보다는 전두환 이후의 시장친화적인 방식이 더 효율적이라는 의견으로 무게가 쏠렸다. 다만 이는 공밀레로 대표되는 저임금 고강도 노동을 통해서만 가능했던 것으로, 인재에 대한 푸대접이 심하고 성과는 크게 요구하는 경우가 너무 많아서 이런 처우에 질린 고급 인재들이 잇따라 한국을 떠나 미국, 중국 등으로 향하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는 어려울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반대측 의견으로는 부품을 들여와 조립해서 수출하여 '조립 산업'이라며 비아냥을 받았고 1970년대에는 오히려 맹목적인 경제구조 전환 기조가 경제에 큰 악영향을 끼쳤으며, 80년대의 중화학 기업 재조정이 있기 전까지는 사실상 짐이 된 측면이 더 크다는 견해가 있다.[79] 1970년대 박정희 정부의 자급자족을 위한 중화학 공업 육성정책에 대해서 학계는 강한 반대 의견을 제시했다고 알려져있는데, 이는 자본회전이 느리기때문에 개발도상국이 어설픈 공업화 시도를 하다가는 파산할 수 있다는 우려였다. 그러나 이는 일본의 자금, 기술 지원 및 아웃소싱으로 어느정도 해결되었다.[80]

본디 일본에서는 50년대부터 안보를 위해서라도 한국의 중공업을 육성시키자는 의견이 소위 친한파 내에서 오고갔었는데 1차 석유 위기 이후 노동집약적 중공업을 이전하는 수단으로서 이러한 의견에 힘이 실리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특히 중화학 공업은 1970년대 '이타이이타이병'(카드뮴 중독), '미나마타병'(수은중독)의 원인이 일본에서 규명되기 시작하면서 공해병 문제로 한국으로 이전되어 왔다고 한다. 1990년대 후반 중국의 경제 개방 후 먼저 들어간 산업도 이와같이 노동 집약 산업과 공해 산업이고 그것이 20여년 간 성장한 결과 오늘날 한국의 조선업, 전자제품 제조업 등에 위협을 가하고 있다.

또 이런 공해산업의 결과 현재 중국은 전세계 전자 폐기물의 70%를 수입하여 해체하면서 막대한 환경오염이 유발되고 있는데[81] 당시 한국 역시 공해산업으로 선진국에 종속된 채 환경만 망치는 경우를 심각하게 우려했었다. 비명을 찾아서에서 조선이 공업발전은 하나 환경공해산업이 내지(일본)에서 넘어오는 수준에 불과했다는 식의 묘사는 바로 이 상황을 풍자한 것이다. 이에 산림녹화니 자연보호니 환경 관련 구호는 요란했지만녹화 사업 정도를 빼면 그 성과가 거의 전무한게 문제다. 그나마 오늘날에는 환경 규제와 기술 발달로 각종 환경 지표는 1970, 1980년대 보다 크게 호전되고 있는 상태다.

그러나, 중화학공업에는 노동집약 산업, 공해산업만 있는 것이 아니다. 충분한 기술과 경험을 쌓고 안전 수칙을 준수하기만[82] 한다면 이미지와는 다르게 비교적 안전한 사업도 많다. 때문에 80~90년까지만 해도 반 제조업 운동이 세계적으로 존재하였으나, 기술의 진보에 따라 한국은 물론 선진국으로 분류되는 미국이나 유럽의 여러 국가들에서도 중화학 공업이 큰 역할을 하고 있다.

5.11 외국 비교

박정희 정부 당시에는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로 중화학 공업을 육성하고 있었다. 당장 북한도 역시 경공업과 자급자족을 중시한 김일성의 정적들이 숙청되면서 중화학 공업 위주로 성장이 진행되었고, 중국닥치고 철강 만들자고 했다가 제대로 말아먹은 대약진 운동을 하고 있었고, 남미에서도 중화학공업을 육성한 예는 숱하게 많았다. 그러나 북한의 경우엔 동구권이 몰락하면서 석유 수입로가 막히고 말아 실패하였으며 남미는 부채에 시달리다가 죄다 외국 자본에게 넘어가 버렸으니 북한이나 외세자본이 직접적으로 개입한데다 아예 기득권층이 출발 시점부터 대놓고 정부를 뒤흔든 남미와, 적어도 20세기 중에는 국가가 기득권층을 어느 정도 통제했으며 또한 국가 주도로 낮은 금리의 외채를 바탕으로 충분히 돈을 갚아나간 한국은 차원이 다르다는 견해가 있다.[83] 다른 남미국가들도 지금은 80,90년대의 부진에서 벗어나 빠르게 성장하고 있으며 한국은 한 때 잘 나가던 소련콤비나트가 국영 기업의 비효율성을 극복하지 못한 거대한 공룡 신세가 된 것에 비교하면 매우 양호하다.

5.12 결론

중도적 견해로 모방전략이 적절하긴 했으나 특별히 탁월했던 것은 아니라는 견해가 있다. 사실 이런 모델이 이전에 없던게 아니었다는 것. 소련이오시프 스탈린흐루쇼프 정권의 전략대로 기술력 위주의 중공업 국가 전략이 성공을 거두던 시기였고, 일본의 경우 엄청난 성장을 보이고 있었다.

처음에는 비교적 국가주도형 모델로 갔다가 시대에 맞지않자 1979년 4.17조치(안정화조치로 국가주도대신 시장우선으로 바꾸는것)같은 시장친화형(신자유주의) 모델비파 전환을 하게 되었고, 그것이 성공을 거두어 80년대 세계 경제를 맞아 활황을 맞았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흔히 박정희 정부와 전두환 정권의 경제정책이 비슷하다고 여기나 큰 차이가 있는데, 대표적으로 전두환 정권 초기 김재익 경제수석의 물가 안정&내수 신장&원칙적 자유화 전략이 있다. 김재익은 높은 개방성과 높은 복지를 함께 가진 스웨덴 모델을 주장하며 이를 통해 중산층이 발달하면 민주주의는 자동적으로 올 것이라고 예상했고, 그의 사후의 일이지만 6월 항쟁을 통해 그의 예상은 상당부분 맞아들어갔다.

훨씬 극단적으로 본다면 한강의 기적은 '당연히 일어났을 일'이라는 견해도 있다. 이 쪽에서는 동아시아 경제권은 19세기~20세기이후에 망했지만 그 이전항상 상위권에 속했던 곳들중 하나이며, 쉽게 말해원래 잘난 나라였으며 윗대가리가 누구라던 결국은 금방 올라올 나라였다는 거다.

그러나 한때 세계 7위 수준에 경제 선진국이었던 아르헨티나[84]나 한때 영국 못지 않게 제국주의 국가였던 스페인, 포르투갈이 정치적, 경제적 문제로 인하여 순식간에 몰락하게 되어버린 것을 보면 제 아무리 부강한 국가라 하더라도 제대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거나 미래를 내다보지 못한다면 얼마든지 몰락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스페인, 포르투갈이 잠깐 자신의 기대치를 뛰어넘었던 것일 뿐이라는 주장으로 반박될 수 있다. 또한 이에 대한 반박으로서 현재 유럽 최강국은 로마 제국을 건국한 이탈리아여야하고 문명의 산실이자 비잔틴 제국의 후손인 그리스는 지금도 유럽의 강국이어야 할 것이며 기원전으로 가면 메소포타미아,이집트>미국 아니냐 의문을 품는 사람도 있지만 고대 제국과 현대 국가 사이의 접점이 매우 떨어지기에 잘못된 접근이다.

중국이 세계 2위 수준의 경제대국이 된 것은 동아시아 문명권이 잘나서 그런 것이 아닌, 애초에 기초과학과 우주과학에서 강한 면모를 보여 왔고[85] 수없이 많은 인구를 바탕으로 저렴했던 노동력과[86] 내수 시장을 바탕으로 성공적으로 발돋움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오히려 이렇게 강점을 지닌 국가들 사이에 끼게 된다면 샌드위치화 되어서 경제 성장을 못하게 되는 경우조차 발생한다.[87] 그래서 대한민국은 중국의 문화대혁명[88]과 WTO 체제 가입 이전에 간신히 선진국으로서의 진입의 막차를 탔다는 말조차 나오는 것이다.

동아시아의 정세가 한국의 경제 발전에 어느 정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잠재적 적국이긴 하였지만 소련, 중국 적국인 북한 모두 체제가 후술할 곳들에 비하면 안정적으로 잡혀져 있는 편이었다. 만약 아프리카나 중동과 같이 허구한 날 분쟁이 일어나는 불안정한 지역이였다면 자원 없이 지금과 같은 위치에 오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또한 일본이라는 경제 대국을 이웃나라에 둠으로써 이들의 성공을 보다 쉽게 벤치마킹하고 이들 기업과의 제휴를 통해 고급 기술력의 부재를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었다. 이러한 이유때문에 한국의 주요 수출품이 일본과 겹치는 분야가 많다. 정부는 일본의 행정이 관료제에 따른 엄청난 업무처리능력에서 따라오는 효율로 인한 고성장도 중요하게 작용했다. 유럽에서도 산업혁명 당시 영국이 하는것을 벤치마킹을 해서 주변국에 퍼져나갔던 것을 보면 벤치마킹을 할 국가가 있는지 없는지 차이가 얼마나 극명하게 나오는지도 알려준다.

1990년대 이후 중국, 2000년대 이후 BRICS와 동남아시아 국가들이 부상하면서 급속한 경제성장이 비단 한국만의 일이 아니었음이 밝혀지면서 한국이 이룩한 경제 성장은 '기적적인 일'에서 대내외적 환경을 이용하여 '20~30년 정도 빨리 이루어 낸 것'일 수 있다는 주장은 어느정도 타당성이 있다. 하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당시에 기회를 놓쳤다면, 혹은 중국이 공산화되지 않거나 문혁 같은 바보짓을 하지 않음으로써 조기 경제발전에 착수했을 경우[89] 모든 기회가 다 중국에 빨려들어가고 여전히 개도국 수준에서 머물렀을 수도 있다는 것. 김정렴 前 비서실장은 이를 "선진국으로의 막차를 탄"것이라고 비유하기도 했다. 실제로 2000년대 초 중국의 경제 성장으로 동남아시아세계급 규모의 산업공동화를 겪었으며 특히 노동집약산업에 의존하는 국가들의 타격이 컸다. 이는 중국의 노동력 위주 산업 구조가 2010년대 이후 국민소득의 급속한 상향과 인력부족으로 인한 개편 때문에 조금씩 변해가면서 많이 나아지긴 했지만 대신 한국 등 몇몇 국가를 제외한 대다수 선진국들이 자동화시스템을 도입하고 고용은 여전히 줄이면서 크게 개선되지는 못했다. 2016년 기준 선진국으로 승격가능성이 큰 나라는 말레이시아,칠레,우루과이 정도밖에 없다.

정책 자체의 영향 또한 무시 못한다. 실제로 환경이 좋았음은 확실하나 그 환경에서 어떻게 정책을 이끌어가는지 또한 매우 중요하다. 그러한 면에서 단순히 한강의 기적을 행운 따위로 치부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당시의 국제적 환경, 국내외적 정책등의 복합적인 요소가 작용해서 일어난, 노력과 행운의 합작이라고 보는 것이 맞겠다.

현재 한국은 과거와 국제적 환경이 다르만큼 과거(IMF 이전)만큼의 당시의 급격한 성장을 다시 이루기는 어려우며 선진국 말석에서 진정한 발전을 이뤄 내기위해 노력해야 할것이다.

5.13 대외 평가

한국이 다른 국가와 달리 국가주도 산업화에 성공할수 있었던 가장 큰 까닭은 기업에게 정부가 여러가지 도움을 주면서도 정부가 요구하는 일정수준의 업적을 내지 못하는 기업에게는 도움을 끊는 징계 매커니즘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 MIT 앨리스 앰스덴[90]

거시지표로 보면 평균 성장률 8.5%의 고도성장시대였다. 하지만 경제 성장만 놓고 보더라도 폭과 깊이가 널뛰기했던 불확실하고 아슬아슬한 시기였다. 13%를 성장한 시기가 있지만 저성장에 이어 마이너스 성장으로 추락한 시기도 있었다. 외환보유액이 언제든지 바닥날 수 있는 불안한 나라였다. 8.5% 성장률 속엔 수많은 고민과 긴장과 갈등이 있다. 엄청난 리스크 테이크를 하는 모험가였다. 그는 보통사람이라면 택하지 않을, 또 택하지 못할 리스크를 계속 선택해 나갔다.

박정희의 전략은 3H로 설명할 수 있다. 고위험, 고성장, 고비용(High risk, High payoff, High cost)이다. 민간부문과 기업을 확장시켰지만 시장방식이 아니었다. 1965년엔 정기예금 금리를 하룻밤 새 연 15%에서 연 30%로 올려 은행으로 돈을 끌어 모았지만 대출 이자율은 그보다 낮춰 투자 위축을 막았다. 역금리제다. 또 사채시장을 혼수상태에 몰아 넣은 1972년의 8·3 사채 동결조치도 마찬가지다. 재정으로 기업을 지원하고 채무를 완화시켰다. 그런데 그런 돈이 기업 투자로 이어질 것이라고 누가 확신할 수 있었겠나. 대박 가능성이 높지 않았는데 대박 나게 만들었고, 그러기 위해 많은 비용과 희생이 따랐다.

박정희는 그런 길을 갔다. 규모가 중간 정도의 국가라면 60년대가 스스로의 힘으로 선진국 대열에 올라설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다. 케네디 라운드로 선진국의 관세 철폐가 대대적으로 이뤄져 수출 진흥을 통한 산업화의 창이 열렸다. 선진국이 된 일본은 해외에서 투자처를 찾기 시작했다. 한국의 산업화는 수요가 확대되면서 생산 쪽에선 기술이전이 가능한 시기에 일어났다.

절묘한 타이밍이다. 향후 세계무역은 그런 방식의 산업화가 어렵도록 체제가 바뀌었다. 한국은 당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로 갈 수 있는 막차를 탔다.그러나 막차인지 여부는 박정희도 몰랐을 것이다. 다만 잘살아 보자는 것이었다. 그런데 90년대 이후 두 자릿수 고속 성장으로 달려 나간 중국을 생각해 보자. 그때 기회를 놓쳤다면 한국의 산업화는 정말 어려웠을 것이다.

- 에즈라 보겔 하버드대 명예교수[91]

한국은 1960년 이후 개발원조위원회(DAC) 국가 중 유일하게 원조 수혜국에서 원조 공여국으로 전환한 국가로서 국제원조의 대표적인 성공 사례이다. 수백억 달러를 지원받은 대한민국은 1987년 대외경제협력기금(EDCF), 1991년 한국국제협력단(KOICA) 등을 설립하며 대외 원조를 시작하였고 1995년 세계은행의 지원 대상국에서, 1999년 공적개발원조(ODA)의 지원 대상국에서 졸업하며 마침내 2009년 11월 25일, 공적개발원조(ODA) 총액이 연간 1억달러를 넘거나 국민총소득(GNI) 대비 ODA 비율이 0.3%를 넘어야 가입할 수 있는 선진 원조 공여국들의 모임 개발원조위원회(DAC)에 24번 째로 가입하였다.

6 관련 인용구

예부터 치산치수가 나라를 운영하는 요체라고 했습니다만, 국토를 아름답게 가꾸고 사랑하는 것은 풍요와 인정이 넘치는 복지국가를 건설하는 터전이 되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자연을 보전하고 아름답게 가꾸어 가는 일에 우리의 위대한 저력과 슬기를 발휘해 나가야 하겠습니다.

자연은 우리가 사랑을 실천하고 스스로 돕는 자세를 가질 때만이 혜택을 가져다준다는 사실은 아무리 강조하더라도 지나침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번 한강개발의 준공으로 우리는 할 일을 다 한 것이 아니라 한강을 사랑하고 아끼는 운동의 첫걸음을 시작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스스로 조그마한 휴지나 쓰레기에서부터 폐수에 이르기까지 한강을 더럽히고 우리 자신을 더럽히는 일을 하지 않을 뿐 아니라 한강을 깨끗하고, 맑은 호수로 가꾸어 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리해서 한강이 한민족의 풍요와 번영을 상징하는 영광의 이름으로서, 그리고 우리의 활력과 힘을 북돋는 영원한 물줄기로서, 연연세세 겨레의 얼을 담아 흐를 것을 다함께 기원합시다.
끝으로 이제 열흘 후면 30억 아시아인의 축제인 아시아경기대회가 개최됩니다. 한강의 기적을 이룩한 우리 자신의 긍지와 자신감을 마음껏 과시하는 멋진 대회가 될 것을 국민 여러분과 함께 다짐하고 또 기대합니다
- 1986년 9월 9일, 전두환 대통령의 한강개발 준공 MBC 특집 대담 中 [92]

리하르트 폰 바이체커 대통령각하 내외, 그리고 귀빈 여러분. 나는 우리 내외가 귀국을 방문하도록 초청해 주시고, 오늘 저녁 이처럼 훌륭한 만찬과 함께, 나와 한국민에게 우정어린 말씀을 해 주신 대통령각하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나는 오랫동안 동,서독을 갈라온 고통과 불행의 분단장벽이 무너져내리는 역사적인 시기에 우방 독일연방공화국을 방문하게 된 것을 매우 뜻깊게 생각합니다.…

대통령각하. 독일 국민들에게 ‘라인강의 기적’이란 말은 다소 해묵은 감을 줄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한강의 기적은 그리 오래지 않은 말입니다. 독일이 이룩한 ‘라인강의 기적’은 우리 국민들에게 신선한 자극과 격려를 주었습니다. 냉전체제로 국토가 분단된 비극 위에 빚어진 침략전쟁으로 모든 것이 폐허가 된 잿더미 위에서 우리는 불사조처럼 일어나 신흥산업국가로 불리우는 오늘의 번영하는 나라를 일구었습니다. 우리 국민들은 경제적인 번영만으로 인간이 행복해질 수는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염원이 오랜 권위주의를 청산하고 새로운 민주주의 시대를 열게 했습니다. 한국은 이제 자유와 활력이 넘치는 새로운 민주주의의 나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작년 서울올림픽은 동서의 세계가 서로를 가르는 인종과 종교, 이념과 체제의 벽을 넘어 이해와 화합의 한마당을 이룬 훌륭한 축제였습니다. 우리 국민은 분단된 나라, 전쟁의 위험이 아직도 도사리고 있는 나라에서 열린 서울올림픽이 평화와 우정의 세계를 구현하는 올림픽의 정신을 한껏 고양 시킨 데 대해 큰 긍지를 갖고 있습니다. 서울올림픽은 한세대에 걸쳐 이룩한 발전의 바탕위에 민주주의에 의해 꽃피워 진 온 국민의 참여가 뭉쳐져 그처럼 성공적인 대회가 될 수 있었습니다.
대통령각하. 우리 두 나라 국민이 이룩한 큰 성취는 분명히 온 세계에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우리 두 나라는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에 근거한 민주주의만이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가치를 실현해 준다는 것을 실증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창의에 바탕한 자유시장경제와 개방사회만이 복지와 번영을 가져다 준다는 빛나는 실례가 되고 있습니다. 나는 독일과 한국의 사례가 오늘날 세계에서 자유와 민주주의, 개방을 고무하는 데 크게 기여하고 있는 데 대해 우리 모두 높은 긍지를 가져 마땅하다고 확신합니다.…
‘브란덴부르크문’은 열렸으나 판문점의 이 다리는 아직도 여전히 ‘돌아오지 않는 다리’입니다. 수백만의 이산가족들은 지난 40년간 북쪽에 남아 있는 부모형제, 친척과 전화 한 통화, 편지 한 장 교환할 수 없음은 물론 그들의 생사여부와 거처조차 알 수 없습니다. 북한은 개방을 받아들이는 마지막 땅은 될지 모르나 그것을 끝내 거부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나는 북한과 대화와 교류를 통해 상호 신뢰의 기반을 구축하고 대결과 적대의 관계를 화해로 바꾸어 나가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나는 지난 9월 남북한이 우선 연합의 형태로 공존공영하는 단계를 거쳐 자주,평화,민주의 원칙에 따라 하나의 나라를 이루는 ‘한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을 발표했습니다. 독일은 1970년대 ‘동방정책’을 통해 사회주의국가들과 관계개선을 이루었습니다. 한국은 ‘북방정책’을 추구하여 냉전체제로 부자연스럽게 관계가 단절되었던 나라들과 새로운 관계를 열어 가고 있습니다..…
대통령각하 내외분의 만수무강을 위하여, 우리 두 나라 국민의 영원한 우호와 친선을 위하여 축배를 들겠습니다.
- 1989년11월 20일 노태우 대통령의 만찬사[93]

7 관련문서

  1. [1], [2]과 본 문서 관련 인용구 참고. 일부에서는 경제용어라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Economist나 WSJ급의 경제저널들에서는 용례를 찾을 수 있으므로 "학계에서도 쓸 수 있는 관용어" 정도로 보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2. 솔로우 모형에 따르면, 인적, 물적 자본 축적이 경제성장을 야기한다. 그런데, 이러한 인적, 물적 자본의 축적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또한 경제정책의 성과는 단기적으로만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로스토우의 도약 단계를 논한다면, 도약 준비 단계, 전통적 사회에 대한 이해가 선행돼야 할 것이다.
  3. 말린 담뱃잎
  4. 가공하지 않은 명주실
  5. 한국 토종 사과 능금을 말함
  6. 나전칠기, 슬리퍼, 왕골(莞草)공예품, 자수품, 대나무제품, 동제 촛대, 재떨이, 담뱃대, 태극부채, 인형 등
  7. 1948년 11월 9일 동아일보 1면 참고
  8. 한국은행의 국민계정 통계는 53년부터이고, 미국의 WPI(도매물가 지수)로써 추계하지 않고 그대로의 환율을 적용한 것은 80년도부터.
  9. 1947년 기준 불변가격. 최상오, 외국원조와 수입대체 공업화. 1948년 무역규모는 1947년 불변가격 기준 100억원으로 회복되었으나 이는 불변가치로 1941년의 2%밖에 되지 않는 수준이었다
  10. UN보고서에 따르면 1938년 수출의 88.2%, 수입의 80.8%가 일본에 대한 것이었이며 만주, 대만, 류쿠 등을 포함하면 그 비중은 그 이상이다.
  11. 조선경제연보
  12. 1944년 봄 ~ 1946년 여름 남한. 위와같음
  13. 조선경제연감(1949)에 따른 1942년 매장량 기준
  14. 발전소는 발전능력 기준. 조선경제연감 1949. 1946년 남한 자체 25000kW, 북한이 보내준 전력 51000Kw, 1947년 남한 자체 31000kW, 북한이 보내준 전력 63000kW, 1948년 남한 자체 46000kW, 5.14단전까지 북한이 보내준 전력 23000kW
  15. 1946년 11월 실시된 남조선산업노무력 임금조사에 따르면 실제로 휴업체 70%가 원료부족을 이유로 들었고 기계설비, 자본 부족의 이유가 9%, 7%를 차지하였다.
  16. [3] 식료, 비료, 의류, 이외 석탄, 고무 등 공업용품 등
  17. OFLC나 군정 종료시 잉여 물자 무상 증여
  18. 한미경제협정 2조. 미국은 5.16 쿠데타 이후로도 이를 견지하였다.
  19. General Headquarters, 聯合國軍最高司令官總司, 1945. 10. 2. ~ 1952. 04. 28.
  20. 이대근, 2002, 해방 후 1950년대의 경제 : 공업화의 사적 배경 연구, 삼성경제 연구소
  21. 최근들어 국민순자산이라고 국내에서 집계되고 있으며, 부동산 따위를 말하는데 경제발전에 관련하여 상당히 중요한 개념 중 하나다. 국부가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으면 상품가치가 제한되기 때문에 고액의 최종생산재 생산이 크게 늘지 못하고, 곧 경제성장이 더뎌지게 된다.
  22. 조선경제연감 1949에 따르면, 남한은 한반도 전역 방직산업의 85%를 물려받았다. 이는 65%를 물려받은 목공, 식음료 제조업이나, 72%를 물려받은 기계공업에 비해 훨씬 높은 비율이다. 따라서 원조 물자의 지원을 통해 주력산업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23. 구현우&우양호, 1950년대, 약탈국가론, 그리고 연속과 단절: 경제적 자원에 대한 국가의 통제권을 중심으로, 행정논총 제50권 제1호 p.243~277 에서 다음을 2차인용하였음. 이대근은 2008, 현대한국경제론: 고도성장의 동력을 찾아서, 경기: 한울 아카데미, p.60에서 전쟁피해액을 위와같이 기술하였음. 이승만의 말에 따르면, 이는 30억달러의 피해.
  24. 내무부 통계국. 주택 40%, SOC 30%, 기업 15%, 정부시설 10% 등. 전재민에 대한 연구에 따르면, 1953년에는 전국민의 절반가까이가 전재민으로 분류되었음.
  25. 이대근, 2002, 해방 후 1950년대의 경제 : 공업화의 사적 배경 연구, 삼성경제 연구소. 타스카 보고서
  26. 이내영, 한국경제의 관점, 1987, 백산서당 P.143에 따르면 1946년~1962년 미국 대외 경제원조 규모는 총 660억불인데 이 중 대한민국은 무려 5%를 차지했다. 이는 같은 기간 이루어진 베트남과 필리핀 두 국가에 대한 미국의 경제원조 합보다 4억불이나 많은 것이었으며,이러한 규모의 원조를 받은 국가로는 인도가 있는데, 인도는 차관비율이 70%에 이르는 반면 한국은 고작 2.3%였다. 별도로 같은 기간 20억불 이상의 군사지원이 병행되었다. 참고로 1948년 ~ 1951년에 실시된 마셜플랜의 규모는 114억달러였고 한국전쟁 수행비는 160억 달러였다
  27. [4]
  28. 김충남, 2006, 대통령과 국가경영: 이승만에서 김대중까지, 서울대학교 출판부.
  29. 1950년대 아시아 주요국의 경제성장률을 살펴보면, 태국 6.4%(1950∼60년), 말레이시아 4.1%(1955∼60년), 인도네시아 0.5%(1958∼60년), 필리핀 5.5%(1950∼60년), 인도 3.7%(1950∼60년), 파키스탄 2.7%(1950∼60년) 등이다(이대근, 2008, 현대한국경제론: 고도성장의 동력을 찾아서, 경기: 한울 아카데미, p.528-529). 한편, 2015년 현재 개편된 국민계정을 따를경우 이 시기의 연평균 경제성장률은 5.5%에 조금 못미치는 것으로 나타난다.
  30. [5]
  31. 위와 같음
  32. 위와 같음
  33. 하연섭, 1993, 수출지향산업화로의 전환: 국가중심론적 해석에 대한 비판을 중심으로 정책학회보. 2.
  34. 위와 같음. 특히 1964년의 그것보다 무려 11%p가 높았다.
  35. 한국수출입은행 경제협력본부 경헙기획실, 국제 ODA 동향, 2006. 9. 경협조사자료
  36. 한국개발연구원, 북한경제지표집 , 서울: 한국개발연구원, 1996, p.161. 의 양문수,1970년대 북한경제와 장기침체 메커니즘의 형성, 현대북한연구, 6권 1호, 2003, pp.59-65
  37. [6]
  38. 세계은행에따르면, 한국의 1961년 1인당 GDP는한국은 91달러. http://www.ggdc.net/maddison/maddison-project/data.htm
  39. 경제기획원 자료
  40. 한국경제 60년사
  41. 100불
  42. 한국은행 통계 참고. 대한민국/경제성장률에서 볼 수 있다.
  43. 흔히 파병 군인들의 외화 송금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현실은 시궁창. 당시 미군은 한국군에게도 동일 계급 미군병사와 같은 급여를 주었는데 이 중 아주 일부만 본인에게 주고 대부분을 떼먹었다. 계급이 병장인 경우 월 급여가 500달러였는데 이 중 10달러만 본인에게 주고 490달러는 적금이라는 명목으로 정부가 가져갔다가 나중에 한국으로 복귀한 후 45달러를 원화로 환전해서 주었다고 한다. 월남병장 한사람당 월 445달러씩을 떼먹은 셈인데 이게 현재는 50만원 정도 밖에 안되는 돈이지만 당시 물가와 환율을 생각해보면 어마어마한 돈이다. 이것이 파병이라는게 무슨 돈벌이가 되는 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월남파병이 주요 외화벌이 수단 중 하나로 꾸준히 거론되고 있는 이유이면서 동시에 파병 군인들이 돈을 송금할 수 있는 능력이 안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 떼먹은 돈은 현재 약 2013년 쯤 부터 참전용사 수당으로 상환하고 있는 셈이 된다. 무려 월 12만원으로...
  44. 원래는 일시적으로 농림어업을 통한 수출의 증대를 꾀함과 동시에 신속히 광공업에 대한 투자를 늘려 공산품을 자급자족함은 물론 이를 해외시장에 판매함으로써 얻은 외화를 농촌 개발에 투입하는 것이 대통령 박정희의 구상이었다. 다만, 군부의 예상과 다르게 1~2 공화국의 경제 기반은 튼튼하였고 덕분에 이를 조기에 시행할 수 있게 되었다.
  45. [7]
  46. 200불 돌파
  47. [8]
  48. 1980년도 주요 산업별 취업계수는 다음과 같다. 반도체54.65, IT 39.21, 음식숙박 39.44, 농림어업 30.04, 정밀기계 29.62, 전자부분품 21.92, 자동차 19.24, 일반기계 19.21, 도소매 15.86, 섬유의복 14.79, 자동차를 제외한 수송기계 14.02, 가전 13.71, 화학 12.41, 음식료품 9.7, 1차금속제품 7.08, 비금속광물 9.67, 건설 6.71, 광업 3.82, 금융서비스 2.09, 석유석탄 1.76. 한편 자본집약도가 그나마 올라간 2000년도의 경우 반도체는 0.86, IT 3.53, 농림어업은 8.96, 정밀기계는 4.22, 전자부분품은 1.74, 자동차는 2.55, 도소매 10.97, 석유석탄 0.48, 음식료품 3.76, 광업 0.85. 덧붙여 21세기 제조업은 조선업 등을 빼고 1 밑으로 빠르게 떨어지고 있으며 취업계수가 낮을수록 자본집약도가 높은 것이다. 다시말해 이 시기의 중공업은 일자리를 늘리는 데 크게 기여하는 노동집약 중공업을 위주로 발달한 것이다. 이외에 [9], [10] 등 참고
  49. [11], [12]
  50. 1977년 12월 22일
  51. 이대근, 한국무역론 : 한국경제선진화의길 제2판 248쪽
  52. 신흥공업국 문서 참고
  53. 한국은행 통계 참고. 대한민국/경제성장률에서 볼 수 있다.
  54. 필리핀/경제성장률중화인민공화국/경제성장률 참고.
  55. 2008 SNA 한국은행 2010 국민계정 대한민국/경제성장률 참고
  56. 플라자 합의로 달러 가치가 낮아지고 마르크화와 엔화의 가치가 대폭 절상되면서 상대적으로 한국 상품의 수출에 유리한 환경이 조성되었다.
  57. 1990년대보다 확실히 나빠진 요소라는 데 대부분 동의한다.
  58. 그나마 다른 선진국 보다는 선방했다. 대한민국/경제성장률 참조.
  59. 2016년 기준으로, 4천만이 넘는 인구를 가진 국가 중 선진국으로 취급되는 국가는 인구 순으로, 미국, 일본, 독일,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한국, 스페인이 전부다.
  60. 1944년, 자료가 없는 제주를 제외한 남방 5도 전역의 조선, 일본인 수는 17,004,432명. [13], 1966년 남한의 인구수는 29,159,640명.[14] 이 둘을 따져보면 인구증가율은 연평균 2.483%, 조선인만 따질경우 그것은 2.6%인데, 이는 80년대에 50,000,000만명을 돌파하는 증가세다. 통계청, 행안부에 따르면 5000만 돌파는 실제로 2010년 이후
  61. 1607만명
  62. 박정윤, 신동아 74년 11월 호 94~95면
  63. 항목참조, 단일 민족의 정의는 혈통보다는 사상의 통일의 개념이다
  64. 이 지역의 비극은 식민지 시절 제국주의 국가들의 땅따먹기와 관련이 깊다. 이 때문에 서로 원수인 여러 부족을 같은 영토에 살도록 강요하거나 같은 부족이 나눠지는 비극이 일어나기도 했다. 게다가 이것이 오늘날까지 유효하다는 게 한국과의 결정적 차이다.
  65. 20세기 동안 일본의 식민지배, 북한이 일으킨 한국 전쟁에 중국/미국/소련 등의 강대국의 개입 등을 겪으며 한국인들의 결속력이나 민족주의가 더 강해졌다는 주장도 있다.
  66. 징병제도 한몫했다. 군에서 한글을 배웠던 것.
  67. 대학을 상아탑(象牙塔)이라고 하는데, 이 말에 빗대 우골탑(牛骨塔)이란 말이 유행했다. 소뼈, 그러니까 소 팔아서 자식 등록금 마련했다고 해서.
  68. 지금도 한국이 배출하는 대학기술인력은 인구가 6배인 미국과 비슷한 수준이다. 다만, 그 질적 수준은 장담 못한다.
  69. 남베트남보다 두배 가까이 받았다. 물론,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우크라이나, 그리스처럼 돈을 쏟아부어도 답이 없는 케이스도 많지만, 그에 비하면 한국은 그래도 많이 나은 수준이었다.
  70. 새마을 운동 자체는 이미 농촌에서 자발적으로 실천하고 있던 자립 계획들을 박정희 정부가 하나의 운동으로 재명명 한 측면이 강하다는 평가도 있다. 물론 각 마을단위로 확고한 방향성과 통일성 없이 두루뭉실하게 놀던 것을 국가적 사업으로 묶어 추진한 것은 높이 살 만한 일이다
  71. 부마항쟁은 그에 따른 소득세 인상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되어있다. 한편, 이 소득세와 부가가치세는 지금도 폐지되지 않고 있다.
  72. 1972년의 8.2 사채 동결조치가 원인이었다. 사채를 많이 쓴 기업들의 재정난은 해소시켜줬지만, 편법적인 방법과 역설적인 자금난(사채가 없으니 빌릴 곳도 없다)으로 역폭풍이 밀려왔다. 사채를 적게 쓴 기업보다 많이 쓴 기업이 이익을 보는 조치였기 때문에 도덕적 문제 뿐만 아니라 경제적인 문제도 있었다. 한편,, 72년도의 8.2 사채 동결조치는 60년대의 국내의 여러 지적을 해결하지 못하다가 1차 석유 위기로 더이상 모른척 할수 없었던 까닭이 크다.
  73. 웃기는건 이 부채 문제가 1983년 FIFA 청소년 월드컵의 결과와 웃기게 맞물리면서 회자되었다는 것이다. 1983년 항목 참조. 참고로 이중에 아르헨티나는 아예 국가가 파탄났고, 멕시코는 준 무법천지다. 브라질도 사정이 좋지 않다.
  74. 다만, 여기에 대해 내수시장의 규모가 작아서 그럴 수밖에 없다는 반론도 존재한다. 상대적으로 적은 대한민국의 인구수와 국민소득을 생각한다면, '규모의 경제'를 고려하는 대기업들로서는 국내시장에 신경을 덜 쓸 수밖에 없다.
  75. 2014년 통계청 가계동향조사를 토대한 공식자료. 2013년 11월에 나온 가계금융복지조사를 베이스로 한(통계 생산 초기에 필요한 보정, 분석작업을 거치지 않은 수치) 중간 수치는 0.353이다.
  76. 2011년 동일본 대지진 이후 부품 국산화의 진척과 지진으로 인한 공급 불안정 우려로 수입선을 유럽 등 다른 곳으로 돌리는 영향으로 적자규모가 매년 줄어들고 있다.
  77. 마지막 고정환율 체제였던 1997년에는 1달러에 800원까지 끌어올리게 되었다. 1961년 1달러에 130원이었으니 원화의 가치는 1/6 수준으로 떨어진 것. 물론 당시에 비해서 1/7로 떨어졌다 해도 양국간의 물가변화도 따질 필요가 있다. 지금의 1달러와 125원의 가치가 당시의 가치와 확연히 다르다는 것. 저 당시에 125원이면 전부 지폐였다.
  78. 공대 출신이었다
  79. 대한민국은 중화학 공업을 하면 안 된다는 것이 김재익을 위시한 대한민국 경제학자들의 80년대 당시의 일반적인 견해였다. 물론 현재는 저보다 평가가 호의적이지만 그 당시에도 그만큼 중공업 정책이 까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80. 이외에 리처드 닉슨금본위제도 폐지를 꼽을 수 있다. 통화량이 증가하면 당근 후진국에게 유리해진다.
  81.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1&oid=112&aid=0002196622
  82. 이게 잘 지켜지지 않아서 문제긴 하지만. 한국의 경우는 사회적 약자의 생명과 신체를 우습게 보는 경향이 너무 짙어서 지표상으로는 선진국인데 사람 대접은 개도국과 큰차이 없는 경우도 꽤 많다.
  83. 이전 글에서는 칠레를 예로 들었는데, 칠레는 아르헨티나같은 이웃국가들에 비하면 정부가 비교적 기득권층을 통제하고 구조조정을 성공적으로 벌인 케이스였다. 농업이나 구리 광업에만 의존한다는 등의 이유로 산업 기반의 빈약함을 지적하는 주장도 있지만, 칠레의 경우는 오히려 구리장사를 해서 버는 돈이 아옌데 시절의 산업 육성으로 번 돈 보다 더 많았다.칠레/경제 참조. 이 외에 노르웨이같은 경우도 나라 경제의 60%를 석유에 의존한다. 경제는 결국에는 양적 변수가 깡패다.
  84. 엄마 찾아 3만리에서 주인공의 어머니가 일하러 갔던 곳이 바로 아르헨티나다.
  85. 다만 중국의 경우는 진나라의 통일 이래 역사적으로 리즈시절이었던 적이 그렇지 않았던 적보다 좀 더 많았던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 해도 아랍 문화권과 달리 고대로부터 이어져온 과학, 수학분야의 포텐을 끝까지 유지했다가 한꺼번에 분출시키는 것도 그리 쉬운 일이 아님을 감안하면 이 역시 단순한 우연이라 할 수 없다. 더구나 문화대혁명 이래 허허벌판에서 다시 시작해야 했다는 것은 동시대 한국이 겪었던 것과 별 다를 바 없기 때문에..
  86. 2014년 기준으로도 아직 저렴한 편이다. 물론 캄보디아, 라오스, 베트남, 방글라데시 등 그보다 저렴한 나라들이 많긴 하지만 하나같이 내부 상황이 막장이라 좀 비싸도 수준 높은 중국 노동력이 반사이익을 보는 것.
  87. 그런 의미에서 조금 냉정한 소리이긴 하지만 일본이 지금처럼 되지 않고 계속 잘나갔다면 더더욱 이런 상황에 놓이게 되었을 수도 있다.
  88. 아이러니하게도 이것 때문에 공과나 이과에 대한 대접이 좋아졌다. 항목 참조
  89. 1990년대 초에나 시작된 경제성장이 1950년대 혹은 1960년대 초부터 시작되었을 경우. 참고로 동유럽 국가들중에서 헝가리가 비슷한 테크트리로 공산진영 중 제일 먼저 민주화를 이루는 데까지 갔다.
  90. Alice H. Amsden, Asia's Next Giant(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1989), pp.145-147
  91. http://www.eai.or.kr/type/panelView.asp?category=&searchkey=&searchopt=&code=kor_eaiinmedia&catcode=&idx=9858&bytag=n
  92. http://pa.go.kr/research/contents/speech/index.jsp?spMode=view&artid=1307265&catid=c_pa02062
  93. http://www.pa.go.kr/research/contents/speech/index.jsp?spMode=view&artid=1307462&catid=c_pa020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