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성특급시/역사

1 개요

개성특급시의 과거를 서술하는 문서.
한줄로 요약하자면, 분단 초기 대한민국의 영토였으나 6.25 전쟁 이후 북한에 빼앗긴 도시로, 현 상황을 보면 그야말로 비운의 도시라고 할 수 있는 도시다.

2 후기 신라시대

경덕왕때 지명의 한화로 송악군, 개주현이라고 불렀다. 이 개주현이 고려시대 개경 전체를, 송악군이 왕성만를 가리키는 뜻이 되면서 상하가 뒤집힌 게 개성이란 이름의 시작. 후삼국시대 후고구려 초기에 잠깐 수도였고 이것이 개성의 전성기의 시작. 궁예는 한때 철원으로 천도했지만 왕건쿠데타로 도읍은 다시 개성으로 돌아왔다.

3 고려시대

개성의 전성시대

고려 시대에는 왕조의 도읍이었기 때문에 개(開)이라고 불렸다. 인구는 당시 약 10만 호 정도로 추정하는 경우도 많은데, 변수가 많지만 한 호당 5명으로 치는 일반적인 계산법을 따르면 약 50만 명으로, 현재 개성의 인구를 능가할 수도 있다. 만약 50만 명이었다면이건 고려보다 인구가 훨씬 많던 조선의 수도인 한양보다도 인구가 많았단 소리다! 심지어 현재 대한민국 역시 한 도시의 인구가 50만 명이 넘으면 대도시로 분류하며, 이 규모는 현재의 남양주시, 포항시, 김해시와 동급으로, 전국 20위 내에 들 만큼 상당한 수치다.

대몽항쟁(몽골의 침략) 때 강화도(강도)로 피난간 38년을 제외하면 446년간 고려의 수도였다. 주요건축물인 만월대는 왕건 즉위 직후인 919년(2600칸 왕궁)에 지어졌으며, 여요전쟁으로 파천 당시 신명나게 털린 이후에 전후 강감찬 장군의 건의로 1029년(현종 20년)에 외성(外城)인 라성(羅城)이 축성 되었다. 이가도가 장정 24만명과 기술자 8천여명과 현종 즉위년부터 20년간 쌓았으며, 현종 당시 성안의 관아 및 민가들은 5부(동, 서, 남, 북, 중) 35방 344리로 구성되었다고 한다. 광종 11년에 칭제건원하면서 잠시 황도로 불리기도 했다. 개경의 당시 모습

개성은 지형조건에 맞추어 구획되었기 때문에 질서정연한 정(井)자형 도시와는 기본적으로 큰 차가 있어 당나라의 장안성, 신라금성, 발해상경용천부, 일본 헤이안 시대헤이안쿄와 같이 질서정연한 형태의 도시구조가 아닌 풍수지리적인 자연스러운 도시형태를 보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당시 북송의 수도 역시 운하로 둘러싸인 카이펑이었으니 중세 수운에 걸맞는 수도라고 할만하다. 다만 후대의 한성이나 송의 카이펑과는 달리 수도 인접 지역에 큰 강이 없었던게 당대에도 약점으로 지목되고 있었던듯.[1]

여러 전란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이때의 많은 유적이 남아있다. 개성 남대문, 선죽교, 만월대터, 공민왕릉, 박연폭포, 송악산 등. 고려인삼, 화문석으로 유명하며 한국전쟁 이후에는 강화도로 이주한 개성사람들이 이런 문화를 이었다고 한다. 개성 남대문 외에도 내성에는 동대문, 동소문, 서소문, 북소문, 진언문 등 6개의 성문이 더 있었는데 문루는 대개 없어지고 남대문만 1954년에 복원 한 모습대로 남아 있다.

4 조선시대

조선 건국 직후에는 수도의 위치를 유지했으나, 태조 이성계는 곧 수도를 남쪽의 한양으로 이전하게 된다. 이때 나성 안쪽에 다시 내성(1391~1393, 반월성)을 쌓았다. 정종 시대에 일시적으로 개성으로 복귀했으며, 개성 시내에서 제2차 왕자의 난이 벌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태종 이방원이 한양으로 이전한 뒤로는 개성은 정치적으론 완전히 찬밥 신세가 된다.[2]

조선 말기에 조선을 여행한 서양인들의 기행문에 의하면 개성 사람들은 그 때까지도 고려를 멸망시킨 조선 왕조를 싫어하였다고 한다. 개성에는 본래부터 고려의 관료와 지지층이 적지 않았기 때문에 조선왕조도 개성에서 한양으로 이전하고 그 풍조가 500년 뒤에도 내려온 것일 수도 있고, 또 수도의 지위를 빼앗긴 것이 개성 사람들의 자존심에 큰 타격이 된 것이 원인일 수도 있지만 아무튼 500년 동안이나 싫어한다는 것도 대단하다. 심지어 개성 사람들은 서울(한양)에 가는 것을 서울에 내려간다고 표현할 정도였다. 위도로 따지면 남쪽으로 내려가는 게 맞긴 하다 평양에도 내려간다고 할려나?[3]

이성계가 1335년생[4] 돼지띠였으므로, 돼지를 잡으면서 돼지는 무슨 죄지? 잠깐, 돼지? 성계육이라고 불렀다는 이야기도 기록되어 있고, 무학대사, 노린 것인가! 다른 곳에서 난 은 이쌀(李쌀)이라고 부르고, 개성에서 난 쌀은 왕쌀(王쌀)이라고 불렀다는 이야기도 있다.
한편 개성의 유명음식 중 하나인 조랭이 떡국은 이성계의 주리를 튼다고 해서 조랭이 떡국이다. 다른 떡국 떡과 달리, 가늘게 뽑은 뒤 손으로 작게 두 덩어리를 떼어내어 둥글게 만든 뒤에 비틀어 이어 붙인다. 조선시대에 대놓고 이성계를 욕할 수는 없으니까, 설날 떡을 빚으며 이성계의 주리를 트는 것(...)으로 원한을 달랬던 듯. 하지만 정작 개성에서는 설날에 만두를 먹었다. 조랭이 떡국은 만둣국에 곁가지로 들어갔을 뿐이다. 아라사에서는 이성계가 개성 주민들의 주리를 틉니다!

조선왕조 초기에 개성에는 미신이 횡행하였으며, 많은 사람이 산을 돌아다니며 미신을 숭배했다는 기록도 있다. 아마 왕조와 수도를 박탈당하고, 고려의 국교였던 불교도 조선왕조 치하에서는 억압당하자 일종의 아노미 상태에 빠져 신흥종교가 유행한 듯하다. 학문적으로는 서경덕을 비롯한 북인의 거점이었으나, 인조반정 이후 그나마의 기반도 날아갔다. 근데 사실 서경덕계 북인은 북인 중에도 이미 소수파였다. [5] 게다가 서경덕은 주기론을 주장했는데, 북인의 주류인 조식주리론을 주장했다. 콩가루네)

그와는 별개로 서경덕, 황진이, 박연폭포가 '송도 3절'로 유명했다고 한다. 여기서 절(絶)을 '절개'로 보는 경우가 많지만, 이 글자에는 '빼어나다'라는 뜻도 있다.

5 일제강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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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0년에 분리된 개성부(구 개성군 읍내시가지역) 지도

일제강점기 때에도 이곳에는 일본인들이 거의 발을 붙이지 못했다. 일제 때 이 도시에 있던 일본인 상점이 단 한 곳뿐이었다고 하니. 조선시대부터 유명한 상업도시여서 그런지 일본인들도 진출하려고 애썼지만 서비스고 가격이고 뭐고 무조건 개성 사람의 가게만 쓰는지라서(…) 그것도 하지 못했다고 한다. 오오오.

기반자체가 없으니 발을 붙이지 못하는 상황이 되자 도량기구는 일본인만 취급하게 했지만 그마저 개성 외부로 떠나는 사람에게 부탁해서 사서써서 결국은 도량가게라도 기반을 다지게 하려던 게 실패했다는 일화도 있을정도.[6] 그래서 당대의 개성은 일본인 인구비중이 2%(1944년)에 불과해, 일본인 인구비중이 가장 적었던 부(府) 도시였다.[7] 1925년 인구조사에서 개성(송도면)의 인구는 4만 6천 명으로 조선 6위의 대도시였으며, 면 중엔 단연 1위[8]로 개성보다 인구가 적은 부가 7곳이나 있었음에도 일본인이 적어서 승격이 늦어졌다고도 한다.

부군면 통폐합 때 풍덕군을 흡수하여 개성군이 되었다.

1930년 개성군 송도면이 개성부로 승격되고, 개성군의 나머지 지역은 개풍군으로 개칭되었다.

1940년 당시 인구 7만2천, 1944년 당시 인구 7만6천으로 전국 10대 도시, 전국 15대 도시에 들어갔다. 이 이야기는 개성의 입지를 나타내는 거지만, 거꾸로 말하면 1940년대 시작한 도시화에도 불구하고 개성의 인구가 당시 크게 늘지는 않았다는 이야기가 된다.

6 광복 이후

1945년 해방 때부터 1950년 한국전쟁 발발 직전까지는 38선 이남에 아슬아슬하게 걸쳐 대한민국의 행정권이 미치는 도시가 되었다.[9] 서로 적대하는 체제의 접경지역이라는 특성상 개성의 주민수가 크게 늘어나지 않은 것(사실상 줄어 들은 것)이 당시의 사정이었다. 실제로 1948년 당시 인구는 인구 87,962명, 1949년 당시 인구는 8만9천이었으며, 이는 일제강점기 인구가 더 적었던 목포시(11만)나 전주시(10만), 마산시(9만)보다도 인구가 작았다. 결국 남한에서도 7대 도시에서 남한 10대 도시가 되어버린 것이다.(...)북한 이 천하의 개쌍놈!

게다가 개성 바로 북쪽에 있는 송악산은 38선 이북이었고 덕분에 38선 이남의 방어진지와 개성 시가지가 다 내려다 보이므로 대한민국이 방어하기 어려운 곳 중 하나로 선정될 지경이었다. 참고로 개성 외에도 연백 평야옹진반도 일대도 전면전시 일단 철수하는 지역으로 결정되었다. 게다가 이 결정은 당시 이 지역을 지키던 제1보병사단의 건의에 따른 것이며, 그 전에는 현실을 망각한 채 병력과 장비도 안주고 1개 사단에게 적이 고지대에서 빤히 쳐다볼 수 있고 38선 후방에 평야와 바다가 펼쳐진 총합 100km의 전선을 담당하라는 어이없는 명령만 있던 상태였다.

당장 한국전쟁 이전에도 개성은 송악산에 있는 북한의 야포 때문에 무진장 두들겨맞는 도시였다(…). 게다가 1949년에는 북한군이 개성 시가지를 포위하는 상황이 발생해서 국지전에서는 보기 힘든 사단급 전투가 벌어지기도 했다. 육탄10용사 사건도 이때 벌어진 것.

제헌 국회의원 총선거에서는 여기 출신의 이성득 의원이 당선되었다. 민선 개성시장을 지냈으나, 임기를 마친 직후 한국전쟁이 벌어져 전쟁중에는 전라북도 지사(1951~52)를 지내야했다. 또 제2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는 일제강점기 당시 미국 유학으로 유명한 신문 만화가, 삽화가였고[10] 초대 공보처장을 지낸 김동성 화백이 2대 국회의원이었는데, 당선 직후 피난을 해야했고 이후로 1954년까지 명목상의 임기만을 지냈다.

여담으로 해방 이후에 일제 강점기 때 건설된 박물관이 전국에 몇 개가 있었다. 본관은 서울, 분관은 부여, 공주, 대구, 평양, 개성에 있었다. 그런데 38선이 그인 후에 북한은 평양 쪽만 소유하게 되었다.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개성 지역이 북한에 너무 가까워 불안한 나머지 개성 박물관에 있던 상당량의 문화재를 열차에 실어 서울로 옮겼다. 전격 한국판 국립고궁박물원, 빈 자리는 잠시 서울의 박물관에서 몇몇 전시물을 대여해서 전시했다가, 결국 무기한 휴관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나중에 북한에 개성을 점령했을 때는 거의 텅 비어 있었다. 물론 옮기는 도중에도 북한의 도발은 수시로 벌어졌고, 유물들을 기차에 싣고 있는데 역 앞 광장에 야포탄이 떨어지는 아찔한 순간도 있었다. 현재 남한 지역 박물관에 있는 고려청자들이 (간송미술관의 매병 등을 제외하면) 대부분 이 때 옮긴 것이다.

6.1 6.25 전쟁

결국 6.25 전쟁 개전 초기에 북한군 제6사단이 비밀리에 철도를 수선한 후 열차에 탑승하여 돌격하는 바람에 함락되었다(…)는 설이 있어 논쟁 중이다.[11]

그 후에는 인천 상륙작전으로 잠시 탈환되었다가 1.4 후퇴 때 다시 북한에게 넘어간 후 휴전협정이 벌어지던 판문점은 개성 이남에 있었기 때문에 서부전선에서 한국군은 이 이상 북진할 수 없었고[12], 결국 휴전선이 개성 남쪽을 지나는 바람에 현재는 북한 영토가 되었다. 개성은 그냥 도시가 아니라 고려시대 시절 한민족의 수도였던 곳이며, 당시 대전광역시보다도 더 큰 도시였다. 개성은 대한민국으로 따지면 광역시에 해당되는 대도시였기 때문에 도시규모상으로만은 이 전쟁으로 인하여 남한 측이 손해를 봤다. 반면 당시 동부 전선에서는 원산 이남까지 밀고 가기 위해 일단 고성군의 거진읍을 점령하고 금강산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이렇게 전쟁 초기보다 동부 전선이 상당히 올라가자 휴전 회담에서 북한은 전쟁 이전의 영토, 즉 38선으로 돌아가자고 주장하기도 했다. 당연하게도 UN군은 거부했는데, 그 이유는 한국전쟁 전과 같이 개성은 대한민국 영토가 되었을 것이지만 방어가 거의 불가능한 상태에 놓이며, 싸워서 쟁취한 강원도 북부 지역이 다시 북한의 영토가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승만은 상징성 높은 도시인 개성을 잃은 것을 상당히 분통해하여 개성의 반환 없이는 휴전도 없다는 입장을 여러 차례 내비치기도 했지만 현실적으로(...)

이후 대한민국 정부차원에서도 개성, 연백, 옹진의 영유권을 휴전 이후 꽤 오랫동안 주장했다.[13] 정부차원에서 1957년정도까지 지속적으로 각종 궐기대회를 조직하거나 항의를 하는 경우가 많았었다.[14] 함락 이후에도 경기도청에서도 임시로 개성시청을 두기까지 했던 것으로 보인다.[15] 참고로 한국전쟁 직전에 실시된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선된 개성시, 개풍군, 장단군, 옹진군, 연백군의 국회의원들은 1953년 휴전 이후 자신들의 지역구를 상실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임기와 직책, 지역구를 다음 총선이 있는 1954년까지 그대로 유지하였다.

이후 1976년 북한의 판문점 도끼만행사건 당시 휴전선의 고질적인 문제였던 서해안 부분을 정리하기 위하여, 현재도 간간히 언급되는 개성 및 연백평야로의 진격, 옛 38선 이남 대한민국령의 회복, 그리고 개성의 탈환을 충분히 고려하기도 했지만 북한이 쫄아 버로우타서 실행되지는 못하였다. 끝내 개성은 북한의 치하에 넘어갔고 이는 현재진행형이다.

7 북한 치하의 개성

해방 당시를 기준으로 개성은 38선 이남 한정으로 경성(서울), 부산, 인천, 대구, 광주에 이어 6위였다. 북한 지역까지 합하면 평양, 흥남, 청진, 신의주, 원산, 함흥, 해주에 이어 13위의 인구 규모를 자랑했다. 대체로 남포, 광주, 해주(셋 다 82,000여명)보다 약간 적고 대전(76,202명)과 비슷했다. 6,25 이후 북한에 편입되고도 사실상 도청소재지급 도시의 위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다른 도시(함흥, 청진, 남포)에 비해 인구 성장이 정체되었고, 개성특급시로 장풍군 등을 분리시킨 이후로는 단천시, 개천시, 사리원시[16] 등의 도시에 밀려 2008년 기준으로 북한에서도 8~9위권이 되었다. 남한으로 치면 순위 외일 것이다. 안습.[17]

1944년 인구 통계를 보면 개성부 76,360명, 개풍군 91,697명으로 총합 168,057명이 살고 있었는데 2008년 북한 통계에서는 308,440명이 거주하고 있다. 64년동안 한반도의 인구는 2500만명에서 7400만명으로 3배 가까이 늘었는데, 개성의 경우 고작 184% 늘어났다. 결국 북한치하에서 개성의 인구는 한반도의 평균 인구증가율(60년간 2.5배)에도 못 미치게 증가한 셈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다른 동네로 이사간 개성 사람들이 타지에서 전입온 사람보다 더 많았다는 이야기이다(...).

순위가 떨어진 이유로는 북한 도시들이 죄다 30만명 선에서 고만고만(...) 해서 순위가 밀리기 좋기 때문이기도 하다.[18] 단, 장풍군의 인구를 더하면 개성권역의 인구는 37.7만명 선인데, 이렇게 되면 역시 인구가 행정개편으로 반토막난 남포(36.7만명)보다 많아 북한 제4의 도시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다. 문제는 남포가 특별시로 승격하면서 주변 지역을 합병해 인구가 100만 명을 넘어섰다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도시에 비해 인구증가가 더딘 것은 분명하므로 현 상태가 유지된다면 향후에는 밀려날 가능성이 높다. 그러니 개성시민들은 지역 발전을 위해 통일을 지지해야 한다. 그러다가 반동분자로 낙인찍힐라 대신 통일 이후엔 민주화의 성지가 되겠지.

7.1 개성직할시 - 북한 치하의 경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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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전을 하면서 경기도도 강원도처럼 남북으로 잘렸는데 상당부분이 북쪽으로 잘린 강원도에 비해 경기도는 거진 대부분을 남한이 먹었다. 그래서 얼마 되지 않는 북한 경기도의 대부분은 개성 근처인데 북한의 김씨 왕조는 북한 경기도를 아예 개성으로 싹 묶어버렸다. 그래서 북한 경기도는 그냥 개성 하나였다. 다만 일제시대 때 경기도 연천군에 속했던 일부 지역은 강원도 철원군으로 편입시켰다. 다만 지금은 황해북도 소속으로 치는 듯.

전쟁 중인 1951년부터 개풍군을 폐지하고 "개성지구"로 만들었으며, 1955년에는 북한이 점령한 경기도의 나머지 지역인 장풍군, 판문군을 편입시켜 개성직할시(1957년 6월)로 만들어버렸고, 1960년에는 강원도와 황해북도에서 추가로 확장하였다.

이후로는 부침이 있었다. 예컨데 개성직할시의 리즈 시절인 1972년에는 인구 32만으로 당시 북한 4대 도시(평양, 함흥, 청진 다음)였던 적도 있었다. 함흥은 1960년에 직할시로 승격되었으나 다시 1970년에 강등되었으므로, 진정 리즈 시절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80년대 잠깐 개성시로 격하되었으며, 이때 인구가 1/3토막(10~11만 명)이 났다(...) 다시 1980년대 중반 이후 복귀하여 1993년 당시 33.4만 명으로 그래도 이 때만 해도 북한 5위권이었으니 북한의 주요 도시라 할 만했다.

그러나(...)

7.2 개성특급시 - 개성공단과 개성관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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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11월 개성직할시의 판문군(1개읍, 16개리)이 폐지되었다. 폐지된 판문군은 판문읍이 봉동리로 변경되어 봉동리, 진봉리, 평화리, 동창리, 판문점리와 삼봉리 일부, 전재리 일부를 개성시에, 개풍군의 해선리 일부를 개성시 송악동에, 판문군의 전재리 일부를 선적리에 합치고 선적리를 장풍군에, 판문근의 삼봉리 일부를 상도리에 합치고 상도리, 대련리, 화곡리, 령정리, 신흥리, 월정리, 조강리, 림한리, 덕수리, 대룡리를 개풍군에 편입시켰다.

2003년 6월 개성직할시의 장풍군과 개풍군이 황해북도로 편입되었다. 2003년 9월 개성직할시의 개성시가 황해북도로 편입되면서 개성직할시가 폐지되고 구 개성시는 개성공업지구로 변경되었다.[19]

이렇게 판문군이 분할 폐지되고, 개풍군과 장풍군(長豊郡)이 분리되어 나가 개성특급시로 황해북도에 강등 및 편입되면서 인구가 일부 빠져나갔을 것으로 추정된다. 2008년 UN 조사단을 통한 북한 인구 센서스에서 개풍군의 인구는 없으며, 장풍군의 인구는 6만 9천 명이다. 장풍 역시 순서에서 개성의 바로 아래에 있는 등으로 보아, 개성의 인구에 개풍의 인구가 편입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개성공단 덕분에 개성주민들은 평양만큼은 아니지만 꽤나 잘사는 편이라고 한다. (물론 그 이전에도 휴전선과 가깝기 때문에 상당한 특혜를 누렸기도 했지만.) 2003년 당시 개성특급시 일부와 구 판문군 일부를 합쳐, 개성공업지구를 신설했으니 여기에 개성공단이 있다. 항목 참조. 2000년 김정일정몽헌 현대그룹 회장(현대아산)의 합의로 정해져 2003년 6월 기공, 2006년 완공되었다.

개성공단으로 남북관계와 개성의 새로운 전기가 되었으며 현대아산편으로 개성시내관광(물론 제한된 장소만)을 하기도 했지만, 2008년 금강산 관광객 피격사건 이후로 금강산과 함께 중단되었다. 남북경협의 상징인 개성공단도 이것 역시 2010년대 들어 남북관계 악화와 함께 매우 지지부진해졌다.

2013년에 이곳에 존재하는 개성의 성곽과 남대문, 고려 성균관, 숭양서원, 선죽교, 표충사, 왕건릉과 공민왕릉 등 고려 왕릉들이 '개성역사유적지구'라는 이름으로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8 통일 한국의 개성

통일 이후에는 행정구역 측면에서의 논란이 많을 것으로 예상된다. 기타 지역은 개편이 되더라도 권역 내에서 왔다갔다 하는 거지만, 개성은 개편시 수도권 - 황해권이라는 권역 단위로 움직이게 되는 경우를 상정해야 하기 때문. --도시 자체는 결국 수도권과 엮여서 놀게 될 가능성이 크다.

혹은 세종시의 경우처럼 별도의 독립 행정구역으로서 황해도나 경기도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행정구역으로 할 가능성 역시 존재한다. 어차피 통일이라는 가정적 상황에서 또 다시 개성을 어떻게 할지를 가정해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고(...)

더 자세한 사항은 남북통일/행정문제/황해권 문서를 참조.

일각에서는 파주시철원군, 고양시 등과 함께 통일 한국의 수도로 삼자떡밥이 있으나, 과연 그것이 가능할지는 미지수.

다만, 남북 화합차원의 상징적 차원[20]을 이유로 만약 서울 이외에 다른 곳을 통일수도로 선정한다면, 통일수도가 될 확률이 다른 지역보다도 제일 높다고 할 수 있다.

자세한 사항은 남북통일/수도 문제 항목 참고.

통일이 된 뒤 통일 한국의 수도로 개성이 될지 안 될지 확실히 정해지지는 않았지만, 수도권과 하나가 되거나 수도권의 직·간접적인 영향권에 들어서서 통일 이후에는 북한 지역에서 가장 빨리 성장할 도시 가운데 하나가 될 것임은 틀림이 없다. 더구나 남한에서 장기간 개성 지역에 투자를 많이 했으므로, 인프라도 평양이나 라선을 제외한 북한 도시들 중에서는 가장 잘 갖추어진 편이다.

다만, 개성시에 있는 고려 시대 유적지가 유네스코 세계 문화 유산으로 지정되어 있기 때문에 개발에는 제한이 있으므로 개발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개발은 유적지가 몰려 있는 개성시내가 아니라 그 옆 개풍군, 장단군 지역을 편입 개발하면 문제가 될 것이 없다는 주장도 있다. 대개성 계획?
여기서 또 회의적인 시선을 보내는 이들은 실제로는 난개발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개성뿐만이 아니라 개풍 전체가 산투성이 땅이기 때문이다. 거듭 말하지만 정도전이 괜히 한 목소리로 개성 잔류를 희망하는 사대부층에 홀로 맞서 개성을 대놓고 깐 게 아니라는 것. 결국 뚜껑을 까봐야 알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개성시에는 공항이 없으므로 인천국제공항, 김포국제공항을 이용하게 될 가능성이 큰 편인데 김포국제공항국제선 노선 취항에 제약이 걸려 있으므로 인천국제공항이 실질적인 관문의 역할을 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 경의선 - 공항철도 타고 가면 금방이다. 공항은 활주로 용량이 허용하는 한 한 데 뭉쳐 허브가 될수록 좋기도 하고. 또한 철도도 수도권 전철 경의선이 개성까지 연장될 가능성이 크고 경의고속선, 경의고속도로등의 기점이 될 수도 있다.

여하간 수도를 차지하더라도 정치 문제를 배제하고 문화 측면에서 봤을때 만약 수천 채에 달하는 옛 한옥들이 남아 있다. 통일 이후에도 경주시부여군처럼 개발제한 크리를 먹을 가능성이 높은 도시다. 전주시처럼 한옥마을 및 역사-관광도시로 개발될 가능성도 있다. 교외에는 왕건릉, 흥왕사지, 대흥산성과 박연폭포 등의 명승고적들이 많다. 2013년에 개성 성곽, 개성 남문, 만월대, 첨성대, 성균관, 숭양서원, 선죽교, 표충비, 왕건왕릉, 7왕릉, 명릉, 공민왕릉의 12개 유적군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평양지역의 고구려 고분군에 이어 북한의 2번째 세계유산.

남한 주도의 통일 한국이 세워질 경우 고려 왕조 시대의 찬란했던 귀족 문화를 바탕으로 경주처럼 '고려 문화 지구' 같은것이 형성되어 역사 문화/관광 산업을 중심으로 발전 할 것이고, 만월대보제사등 고려의 크고 아름다웠던 건축물등이 복원 될 가능성이 크다. 참고로 개성은 이미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서 발전에 쉬울 것으로 예상된다.[21] 옛 고려 개경의 영화를 재현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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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예성강, 임진강이 동서로 지나기는 하나 시가지에서 꽤 멀리 떨어져 있다. 반면 한양은 위의 두 하천보다 넓은 한강이 지척에 위치하여 수운에서는 유리했다.
  2. 그래도 전 왕조의 수도였던 만큼, 현재의 광역시급인 유수부를 두었다. 참고로 조선 4유수부는 개성, 강화, 경기 광주(廣州), 수원.
  3. 여담이지만, "내려간다"느니 "하행선"이라는 표현은 북쪽에서 남쪽으로 가는 게 아니라 서울에서 지방으로 가는 것을 의미한다. 다만 현대의 한국은 분단된 상황이며, 남한으로 한정하면 서울이 거의 최북단 끝 지점이 되어버렸기 때문에 내려간다고 하면 자연히 서울에서 남쪽인 삼남지방(호서, 호남, 영남)으로 가는 것을 의미하게 된 것 뿐이다. 물론 일제시대 때는 도쿄로 가는 것이 상행이라 부산 방면이 상행 지금도 부산에서 서울 가는걸 서울 내려간다고 표현하는 부산 사람도 있다.
  4. 그러니까 1995년으로부터 660년 전 태생이다.
  5. 있어봐야 허난설헌허균의 아버지 허엽근데 이분도 이황이랑 공동 제자네?, 이산해, 멀리는 허준이 분은 아예 중인이네? 의술만 배웠네?정도.
  6. 참고로 당시 개성의 경제력은 웬만한 일본 도시에 뒤지지 않았다고 한다.
  7. 참고로 1944년 당시 타 도시의 일본인 인구비중은 예를 들어보면 경성 16%, 부산 19%, 광주 11%, 대구 10%, 진주 6%, 평양 9%, 나진 26%였다.
  8. 참고로 개성군 송도면 다음은 제주군 제주면(3만 9천)과 고양군 용강면(3만 2천) 순. 다만 제주면은 행정구역 자체가 매우 넓었고, 용강면은 사실상 서울의 연장이었다.
  9. 구역 상으로는 송악산의 남쪽 사면의 북쪽 일부가 북측에 속했지만 북측의 행정상 개성시가 설치되지는 않았다. 후술하지만 그곳에는 북한군이 주둔하여 남한을 무진장 괴롭혔다.
  10. comic을 (아마도 일본을 거쳐서였겠지만) '만화'라고 번역한게 1923년 이 분이 최초라고 여겨지고 있다!
  11. 철도 수송설은 한국 전쟁 서적중 가장 유명한 데이비드 햄버스탬의 콜디스트 윈터에서도 소개되었다. 또한 저명한 역사 다큐멘터리 작가인 존 톨랜드의 서적에서는 거의 정설로 쓰여져 있다.
  12. 개성에서 판문점으로 협상장소를 옮긴 것은 고도 개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공산 측에서 의도했다는 설이 있다
  13. 그건 이북 5도 전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긴 했지만.
  14. 휴전 직후 신문기사에서 개성시를 검색해보면 대부분 이런 기사이다.
  15. 물론 현재도 이북 5도 위원회에서는 북한 치하의 모든 도·시·군·읍·면·동의 장(長)을 계속 임명하고 있다.
  16. 황해북도 도청소재지. 2008년 인구가 거의 동일하다.
  17. 도시권 전체를 합쳐 37만 명이라고 치더라도 2010년 남한의 인구 별 도시 순서에 대입하면 당시 기준 39만 명의 평택시나 34만 명의 진주시와 비견되는 인구이다. 그러면 대략 27~28위. 개성 하나만 두고 보면 원주시, 익산시랑 비슷한 수준으로, 31~32위 정도다. 두 도시는 이런저런 지원으로 성장가능성이 높은데 개성은(...) 안습2
  18. 평양, 함흥, 청진을 제외하고는 10여개 도시가 모두 27~36만명선.
  19. 승전동(옛 사목동, 社穆洞), 내성동(옛 태평리, 太平里), 성남동(옛 손하동, 孫河洞), 박연리(옛 산성리, 山城里) 일대
  20. 서울에 버금가는 고려 500년 수도의 역사성, 인지도, 개성공단이나 개성관광 같은 남북협력 시도의 현장, 한때나마 남한 관할이었던 점 등.
  21. 통일이 되면 대성리 대신 개성 (+ 그 주변의 황해도 지역)으로 MT를 가는 대학이 늘어날 듯하다. 아마 연세대홍익대, 서강대등 서울 서부지역의 학교가 주로 개성으로 MT를 갈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