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도전

(삼봉에서 넘어옴)


권오창 화백이 그린 문헌공 정도전 표준영정. 공식적으론 흥선대원군 섭정 때 복권되기 전까지 450년 넘게 역적 취급을 받았기 때문에 당대에 그려져 전해지는 정도전의 초상화는 없다.

이름정도전(鄭道傳)
본관봉화 정씨(奉化 鄭氏)
종지(宗之)
삼봉(三峰)
생몰연도1342년(고려 충혜왕 복위 3년)[1] ~ 1398년(조선 태조 7년) 음력 8월 26일, 양력 10월 6일
국적고려조선
시호문헌(文憲)

1 개요

"백성(下民)은 지극히 약하지만 힘으로 위협할 수 없고 지극히 어리석지만 지혜로써 속일 수 없는 것이다. 백성(民)의 마음을 얻으면 백성(民)은 복종하지만 백성(民)의 마음을 얻지 못하면 백성(民)은 인군(人君)을 버린다." ㅡ 《조선경국전》
"나라도, 임금도 백성을 위해 존재할 때만 가치가 있다."

ㅡ 《삼봉집》

조선왕조의 뿌리를 설계한 정신적 건국자
유교적 이상으로서 신세계를 창조하려 했던, 시대를 앞서간 불세출의 혁명가

조선 왕조 건국을 논할때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인물. 그리고 한국 역사상 희대의 풍운아. 조선 창업과 개혁작업을 이끈 정치가로서도 중요하지만 철학자이자 사상가로서도 굉장히 중요한 인물이다. 작위는 봉화(奉化伯).

2 일대기

경상도 봉화군 지방 향리 집안 출신이다. 그의 본관인 봉화 정씨는 봉화지방에서 대대로 호장을 세습해 온 호족세력으로 정도전은 이런 연고로 인해 봉화백으로 작위를 받기도 하였다. 혹은 인근 지역인 충청북도 단양군 출신으로도 알려져 있다.[2] 산골출신

부친 정운경(鄭云敬)이 과거에 급제하여 중앙관료가 되어 벼슬을 시작해서 본인도 개경에서 이제현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젊은 시절 신진 사대부로서 강직한 성품을 지니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과거 급제 후 젊은 신진파로서 공민왕의 총애를 받기도 했으나, 공민왕 시해 이후 고려의 토지개혁의 남은 성과마저 무너지고, 친원파 권문세족의 세도와 부패한 불교계의 폐단, 왜구의 침탈과 학살 등으로 민생이 무너지는 현실을 목도하게 된다.

중국 대륙에서는 원나라가 서서히 몰락하고 있었다. 이 시기에 정도전은 권문세족들을 비판하고 원과의 관계를 단교하고 명나라와 친해지자는 주장을 피고 있었는데 이것 때문에 권문세족의 눈 밖에 나 결국 관리 자리를 잃고 낙향하게 된다. 우왕의 실세이자 친원파 세족이던 이인임의 정책에 반대한 것이 원인이 되어 유배되었고, 정의로워 불의에 타협할 줄 모르는 강직한 성품으로 인해 복직되지 못한 채 떠돌아다니는 신세가 된다. 이때 같이 이인임을 공격하던 동류들은 살해되지 않는 한은 대개 복직되었고, 염흥방처럼 변절하는 무리들도 있었다.

이후 여기저기를 떠돌아다니며 후진들을 양성했지만 그때마다 반대 세력에 의해 학당이 박살나는 일이 벌어졌다. 정도전은 유랑을 다니고 후진들을 양성하면서 그동안 몰랐던 백성들의 삶을 직접 보고 깨달으면서 마침내 더 이상 고려 왕조로는 그 어떤 희망도 없으며 새로운 왕조를 세우는 것만이 개혁을 위한 유일한 방법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정도전은 황산대첩으로 영웅이 된 북방의 이성계를 찾아가 그의 측근이 되었다.

위화도 회군 이후 정도전은 조준, 이행, 조민옥 등과 함께 사전(私田) 개혁을 주장하였다. 공양왕 2년(1390년) 기존의 모든 토지 문서(공사전적, 公私田籍)를 서울 한복판에 쌓아놓은 다음 불을 질렀다. 그리하여 여러 날 동안 토지 문서가 불타는 것을 백성들이 보게 되었다고 한다.(고려사 식화지) 그리고 공양왕 3년(1391년)에는 과전법(科田法)을 발표했다.

공양왕을 압박하는 한편, 정적인 정몽주 등과의 정쟁에서 한때 위기에 몰려 정몽주에 의해 유배된 채 살해될 지경까지 이르렀으나, 정몽주가 피살되면서 해배되어 복직, 마침내 고려 왕조를 무너트리고 조선 왕조를 건국하는 데 큰 공을 세우게 된다. 공양왕 말기의 전제개혁에서도 남은, 조준과 함께 강경개혁파로서 개혁 달성에 큰 공을 세운다. 그러나 그가 처음 주장하던, 모든 사전을 몰수하고 백성에게 재분배하는 것이나 노비 해방까지는 이루어지지 못한 채 조준의 비교적 온건한 대안으로 진행되기는 했다.

이후 정도전은 이성계의 무한한 신뢰로 사실상 왕 다음으로 가장 큰 권력을 가지게 되어 나라가 세워지는 과정 거의 모든 부분에 참여해 조선의 기틀을 잡는 역할을 담당했다. 이성계의 한양천도 계획에 찬동하였고 궁과 성벽 건설을 주도했으며, 경복궁의 전각이나 문 등의 이름을 대부분 정했고, 국정제도 전반을 개혁했으며, 삼군부를 설치하고 사병을 혁파하여 군권을 장악하였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급진적인 개혁 성향과 강한 권력을 독점하다시피한 정도전에게 반감을 품은 세력들이 속속 생기게 되고, 사병이 전부 혁파되지 못한 채 남아 있었다. 그리고 명나라와의 외교 서한에 대한 표전문제가 발생해 정도전을 소환하라는 위기까지 초래되었다.[3] 이런 상황은 정도전이 다른 공신출신 재상들에게서도 고립되는 결과를 초래한다. 결국 1차 왕자의 난에서 정적인 이방원에게 살해되었다.

3 인물됨

냉철한 지성과 강직함을 지니고 있었던 혁명적 사상가의 이미지와는 달리 상당히 덜렁대는 성격이었다고 한다. 신발을 짝짝이로 신고 외출을 했는데 말을 몰고 가는 하인이 "대감, 서로 다른 신발을 신고 나오셨습니다"라고 지적하자 정도전은 "상관없다. 이렇게 말을 타고 가면 오른쪽으로 지나가는 사람은 오른쪽 신발만 볼 것이고, 왼쪽으로 지나가는 사람은 왼쪽 신발만 볼 테니까."라고 웃으며 그대로 짝짝이로 신발을 신은 채로 있었다고. 쿨가이인지 귀차니스트였던 건지 앞이나 뒤에서 보면 어쩌려고? 육룡이 나르샤 1화의 정도전의 어수룩한 모습은 고증이였네. 공양왕 시절에는 반이성계파 인사였던 우현보를 탄핵하려던 계획을 세웠는데, 이것이 사실은 이성계 일파의 참모진들 외에는 기밀사항이었다. 그런데 이를 실수로 주변 사람들에게 흘리는 바람에 반이성계파 대간들이 이를 두고 정도전을 집중적으로 탄핵했고 결국 공신녹권 박탈에 유배 크리까지 당해서 큰 위기를 겪기도 했다. 또 태조가 문득 불쌍해보이거나 안쓰러워 보이면 자리를 가리지 않고 어린아이처럼 대성통곡하고는 했다는 기록이 있어 매우 감정표현에 솔직한 인물임을 드러내고 있다.

또한 강직한 성품으로 인해 권신들과 감정적 대립 역시 심했고, 그가 우왕대 복직되지 못하는 원인이 되었다. 당장 다른 신진 사대부들이 하나 둘 현실과 타협했지만 끝까지 버틴 인물이 바로 정도전이다. 그러나 그런 과정에서 부로를 훈시하던 오만함이, 유배된 부락의 천인들과의 정서적 교류, 그들의 지식과 지혜에 대한 파악과 이해를 거치면서 크게 바뀌었다. 이후 백성을 중시하며 실용을 중시하는 사고관이 자리잡게 된다. 드라마 '정도전'에서도 이 점을 지적한다.

다만 주변사람과 충돌하고 과격하게 행하는 면모는 이후로도 고치지 못했으며 한번 가진 은원을 잊지 않고 있다가 나중에 철저히 갚는 면모도 있었다. 전반적으로 프로 어그로꾼(...) 성질이 매우 다분한 인물이었던 것은 사실이다, 경복흥, 이인임 같은 조정의 권신들에게 개기다가 유배 당했는데 거기서 또 악에 받힌 소리를 하고 떠나서 곤장 맞을 뻔하기도 하고 유배지에서 백성들에게 가서도 그랬다가 반성하기도 하지만 나중에 유배에서 풀려나와 삼각산 등지에서 후학을 가르칠때도 혹세무민하는 요망한 인간을 매우 까는데 같이 까던 승려도 '석가모니나 저놈이나 다를게 뭐냐?'는 식으로 면박을 줘서 데꿀멍하게 만들지 않나...그냥 마음에 안들면 가리지 않고 막 까는 인물이었던 것.

애시당초 정도전을 까는 졸기에서도 처음엔 스승과 동문들간의 사이가 두터웠으나 나중에 원수같이 되었다고 되어 있다. 그리하여 개국에 반대한 이색과 그 동문들은 작정하고 작살낸다. 스승인 이색이나 동문 이숭인, 정몽주와는 나중에 원수가 되었다고 할 정도였으며 이숭인은 유배지에서 정도전이 보낸 사람에 의해 맞아 죽었다. 거기에 또 다른 동문 후배인 하륜은 아예 '술수하는 자 따위의 말은 믿을 수 없습니다'라고 까기도 했다. 또 자신의 내력을 알려 승진을 막았다고 생각한 우현보의 집안을 아주 작살내 버렸다. 가장 압권은 스승 이색이 조선 개국 이후 유배를 갔을때인데 정도전이 외딴 섬인 자연도로 보내려고 하니 그 말을 들은 경기 계정사 허주가 자연도에는 사람이 없다며 난색을 표하자 "섬에 귀양보내자는 것은 바로 바다에 밀어넣자는 것이다" 라고 대답했다. 참고로 이건 너무 심하지 않느냐며 이색을 육지로 유배보내준 게 태조였다(…). 한 마디로 정작 주군인 태조 이성계가 개국 과정에서 많은 이들에게 관용을 베풀려고 했던 것과는 상반된 모습들이다. 이 때문에 많은 반감을 샀으며 1차 왕자의 난 때 이 성격으로 미움받아 죽었다는 말을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한편인 남은이 말했을 정도였다.

게다가 조선왕조의 실질적 설계자임에도 불구하고 조선이 건국된 후에는 무리수를 남발하는 모습도 보여진다. 내부적으로나 외부적으로나 답이 없을 정도로 혼란스러웠을 뿐만 아니라 막 건국된 국가였던 국가에서 요동정벌을 추진하고, 막내를 세자로 세우려는 것을 방관한 데다[4] 공신들과 종친들을 전부 장악하지도 못한채 사병 혁파를 추진하는 등 조선이 건국된 후에는 치밀하지 못한 모습을 보여줬다.

다만 이부분은 정도전이 치밀하지 못했다기보다는 온갖 악재가 겹쳤다고 보는 편이 타당하다. 고려는 망했지만 구세력 상당수는 살아남았고(이색 계열 포함), 개혁정책에 대한 반발은 컸다. 그 상황에서 명나라까지 딴지를 걸어왔다. 이때문에 개혁은 지지부진하고 반대파는 기세등등해지는 이 상황에서 불안감을 느낀 정도전이 점점 무리수를 두게 된 것은 이해하지 못할 일이 아니다. 윗 문단에서는 제대로 공신과 종친을 장악하지도 못했으면서 사병 혁파를 추진했다고 비판하지만, 애초에 정도전 혼자서 대다수가 반대하는 개혁을 끌고나가는 마당에 치밀하건 못했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요동 정벌 자체도 실제로 명과의 전면전을 추진했다기보다는 명에게 보내는 경고성 제스처에다가 덤으로 이를 명분삼아 군제개혁을 이끌어내려는 시도에 더 가까웠을 가능성도 높다.

워낙 문(文) 쪽으로만 치우쳤는지 체구는 뚱뚱했다고 한다. 배가 불룩 나왔다고 하는 묘사가 사서에 있을 정도. 이 점은 본인도 '농부에게 답하다'라는 글에서 '뺨이 풍요하고 배가 나왔다'라고 자신의 외모를 묘사했다. 또한 정도전의 후배이자 정치적으로는 반대 입장이었던 권근은 정도전의 용모를 "온후한 빛과 엄중한 용모는 쳐다보면 높은 산을 우러러 보는 듯하고 다가서면 봄바람 속에 앉은 듯하다. 그 얼굴이 윤택하고 등이 펴진 것이 온화함과 순함이 속에 있음을 알겠다"라고 묘사했다. 실록에서도 정도전이 죽을 때 이웃집으로 도망치자 그 집 주인이 '배 불룩한 사람이 저희 집에 숨었습니다'라고 이방원에게 고발하기도 했다. 이 부분은 실록에서도 앞뒤가 안 맞는 대표적인 부분이다. 이방원 집권 이후 이미지 왜곡을 위해서 넣었다고 보는게 맞을지도. 이로 미뤄 보면 정도전은 꽤 풍채가 좋은 스타일이었던 것 같다. '등이 펴졌다'는 권근의 묘사를 보면 단순 비만형은 아니라 제법 늠름한 인상이었던 듯. 뒷날 조선 후기의 학자 박지원과 비슷한 스타일이었다고 상상하면 될 듯하다. 난 뚱뚱이 아냐! 통통이야!

하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이 서거정의『태평한화』에 의하면 하루는 정도전이 이숭인, 권근과 더불어 각자가 인생에서 가장 즐거운 일이라고 생각하는 바에 대해 얘기했는데, 이숭인은 조용한 산방에서 시를 짓는 것을 평생의 즐거움이라 했고, 권근은 따뜻한 온돌에서 화로를 끼고 앉아 미인 곁에서 책을 읽는 것을 최고의 즐거움으로 꼽았다. 이에 정도전은 “첫눈이 내리는 겨울날 가죽옷에 준마를 타고, 누런 개와 푸른 매를 데리고 평원에서 사냥하는 것이 가장 즐거운 일”이라고 했다 한다. 개국 이후 직접 병서를 지어 직접 군사훈련을 지휘했다는 점을 감안해봤을 때 정도전은 다른 문인들에 비해 무(武)의 성향도 어느 정도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실제로 그가 전장에 나가서 공을 세우거나 병재(兵才)를 입증한 바는 없다.병법을 연구하는 정도였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병재라는 것은 야전에서 공을 세우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개국초에 정도전과 개혁파가 고안한 병제개혁안은 군사들의 처우까지 세심하게 살핀 포괄적인 개혁안이었으며, 정도전의 진법은 기본에 충실하고 균형잡힌 것이었다. 이를 보여주는 예는 매우 많다. 실제로 정도전이 진법을 지어올렸을때 태조는 매우 좋다고 반응하였다. 주지하다시피, 태조는 야전에서 숱한 경험을 쌓은 노장이다. 또한 정도전을 제거한 태종도 다시 군제를 재정비할때 진법을 담당할 무관을 임명하면서 "정도전에게 배운 진도를 기억하는가"라고 묻고 군사들에게 그대로 가르치라고 명했다. 마지막으로, 세종 초(즉 군사에 대한 실권이 아직 태종 손에 있을때), 향후 채택할 진법을 놓고 하륜의 안과 정도전의 안을 비교했는데, '삼봉의 진법은 가장 치밀한 계책으로 다른 학설은 여기에 미치지 못한다'는 변계량의 강력한 주장으로 결국 정도전의 안에 채택되었다.

이숭인은 이런 얘기까지 나올 정도로 가까운 사이였지만 후일 그는 유배를 가서 정도전이 보낸 이한테 장살당한다. 그것도 이성계는 살려주려고 굳이 장을 치는 것으로 형을 감했는데도 불구하고 정도전이 몰래 남은과 짜고 때려죽인 것. 이 사건은 후에 다시 조사되어 정도전과 남은이 사후에 다시 비난받는 이유가 되었다. 일설에 따르면 이숭인을 장살한 것은 정치적 이유보다 그가 자신보다 문재가 뛰어나서였다는 말이 있다.

이성계와의 관계는 그야말로 수어지교였던 듯. 이성계는 왕이 된 후에도 정도전에게 스스로를 '송헌거사'라고 칭하면서 편지를 쓰기도 했었고, 한양 천도 후 연회 자리에서 정도전이 지은 '문덕곡'이 연주되자 이성계는 정도전에게 "이거 니가 지은 노래니까 당장 일어나서 춤 좀 춰봐"라고 명했고, 정도전은 즉시 그 자리에서 일어나 춤을 추었는데, 이성계는 웃옷을 벗기고 춤을 추게 하며 흥겹게 놀았다고 한다. 본격 일등참모 능욕 이 일화는 용의 눈물에도 재현되어 있다. 다만 정도전이 웃옷을 벗지는 않고 곱사춤만 추는 정도로 표현되었다. 해당 장면. 또한 이성계가 묏자리를 찾으러 돌아다닐 때 정도전도 이를 수행했는데, 정도전은 이성계가 노년이 되어 죽음을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이 안쓰러웠는지, "오늘날 묏자리를 잡으러 다니시는 것을 보니 슬픔을 금치 못하겠나이다"라며 술잔을 올리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정도전의 죽음을 전해들은 이성계는 "나의 원훈을 죽였구나!"라고 통곡했다고 한다.

정도전의 장남 정진에 의하면, 정도전은 스스로 시문을 쓰지 않고 입으로 읊은 것을 다른 사람에게 베끼게 하는 버릇이 있었는데, 다른 사람이 듣고 작성한 원고가 마음에 안 들면 그 원고를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정진이 삼봉집을 간행할 때 아버지가 직접 저술한 원고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가지고 있었던 정도전의 시문을 모아서 아버지의 문집을 편찬했다고 한다.

4 정치와 사상

정도전은 왕권(王權)을 견제하는 신권(臣權) 중심 정치질서를 구상해 조선 민본정치의 기틀을 닦았다는 게 대체적 평가다. 나중에 조선 3대 임금 자리에 오르는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에게 죽임을 당한 비극적 생애도 그의 미래구상을 신권 중심으로 파악하는 데 이바지했다. 전제적 왕권을 구축하려 한 '야심가' 이방원과의 정치적 견해 차이가 결국 숙청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5] 정도전의 생각은 다음과 같다. 재상이 6조를 통솔한다. 재상은 임금의 행동을 감시한다. 재상은 사간원에 제체를 받는다. 별로 특별할 것 없어볼일지도 모르지만 유교적 정치문화하에서는 가히 혁명적이고 새로운 생각이다. 왕의 폭정을 정 제어할수 없을 때 갈아치워버리는 (중종반정) 일이 일어날수도 일어났다는 걸 고려해볼 때 재상이라는 더 취약한 대상으로 권력을 집중시키기 때문이다.

근거는 크게 두 가지다. 첫째는 정도전이 조선의 정치체제를 짜면서 중국 하(夏)·상(商)·주(周) 삼대 성왕의 공고한 왕권을 기록한 '서경'을 참고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고려말 권신(權臣)의 난립으로 조선이 건국된 시대적 배경이다.

지금까지 학계는 정도전이 주나라 예제를 기록한 '주례'를 이념적 모델로 삼았다고 파악했다. 주례에서는 관직제도를 육관(六官)으로 나누고 '천관총재'가 육관을 총괄한다. 정도전은 '경제문감' 등의 저작에서 주례를 여러 차례 직접 언급하고 있다.

송 박사는 '서경'과 정도전 저서의 관계에 주목한다. 기자(箕子)를 조선 문명의 모델로 삼은 정도전은 '조선경국전'에서 "위대하도다, 왕의 말씀이여!"라는 '서경'의 구절을 인용한다. 이성계도 '조선경국전'을 받고 나서 '서경' 속 삼대의 정치를 기약하는 저작으로 평가한다.

정도전의 군주론인 '경제문감별집'에서도 '서경'에 등장하는 성왕들이 이상적인 모델로 제시된다. 송 박사는 "정도전의 문제 의식은 제도에서 인간의 문제로, 신하에서 신하를 등용하는 군주의 문제로 확장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권신들의 국정 농단으로 고려말 사회가 엉망이었다는 조선 초기의 인식은 이런 분석을 뒷받침한다. 권신들이 난립한 결과 역성혁명을 일으켰다는 조선 건국의 정당성을 확보해야 하는 상황에서 과연 신권 중심의 정치를 구상했겠냐는 문제 제기다.

정도전은 '조선경국전'에서 "권신 이인임, 임견미 등이 정치의 권한을 마음대로 하여 공사에는 손해되게 하고 사사에는 후하게 하는가 하면…"이라며 고려 후기 권신들을 비판한다.

송 박사는 "태조 시대는 오히려 난립했던 신권을 억제하고 왕권으로 대표되는 국가권력의 위상을 확립해야 하는 지상과제를 내포하고 있었던 시기"라며 "그는 창업기에 왕정의 정상화라는 지상과제를 해결하고자 고민했다"고 말했다.

역성혁명에서 가장 중요한 건 명분이다. 고려왕조를 고치는 게 아니라 갈아엎어야 한다고 주장한 근거는 ‘혼탁한 권신의 난립’이었다. 이인임, 임견미 등으로 상징되는 권신들을 척결했다는 명분은 조선 왕조 개창 직후뿐 아니라 100년도 더 지난 9대 왕 성종 때까지 계속 거론됐던 얘기다. 건국 직후엔 이 같은 논리가 강할 수 밖에 없다. 조선의 첫 과제는 당연하게도 ‘왕정의 정상화’이지, 신권 강화일 수 없다는 얘기다.

사상적으로 보면 오늘날 봐도 진보적인 부분이 꽤 있다(예를 들자면 모든 토지를 무상몰수해서 모든 농민에게 균등하게 무상분배). 민본주의 정치를 이상적으로 삼았던 인물이니만큼 그와 관련한 글들도 많이 남겼다. 그러나 노비 해방이나 토지 분배 등은 지방 호족이나 향리층 및 관인층의 반발이 극심해 이성계의 힘만으로도 추진하기에는 버거운 일이었고, 개혁파 내부에서도 크게 호응받지 못했다. 사실 윤소종, 조준 같은 강경 개혁파들도 여기에는 미치지 못했다. 윤소종은 강경 개혁파 선봉장이었으나 노비 문제로 송사를 벌인 전력이 있었고, 귀족 출신이면서도 이성계를 따라 개혁에 앞장 섰던 조준도 그보다는 온건하며 현실적인 고려를 담은 방안을 마련했다.

고려 말 원의 간섭기를 살아온 경험 때문인지는 몰라도 자주성에 대해서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듯하다. 이것은 고려 후기 신진사대부라면 드물지 않은 부분이었다. 명나라가 워낙 막강한 국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일단 지성사대의 예로서 섬기기는 했으나 주원장이 고의적으로 조선과 외교적인 마찰을 벌이고 노골적으로 정도전을 중국으로 보낼 것을 요구현피신청하면서 점점 틀어지게 된다. 주원장은 사병 혁파 같은 조선의 군제 개혁이 명을 공격하려는 준비를 하는 것이 아닌가 의심했고 그 중심에 선 정도전을 상당히 위험한 인물로 여겼다. 조선에서 사신이 올 때 정도전파는 억류하거나 죽였고 이방원파는 친근히 대하는 모습을 보였다. 조선에서는 명나라의 침략을 대비해 전시 태세에 들어갔을 정도였고 정도전은 아예 요동을 선제공격할 계획까지 생각하고 있었다. 이렇게 양국 관계가 삐걱거렸다. 주원장은 조선을 승인하긴 했지만 이 얘기를 듣고 왕을 상징하는 금인과 고명을 보내주지 않았다. 결국 이성계는 주원장이 금인과 고명을 보내줄 때까지 '조선 국왕' 호칭을 쓸 수 없었고(...) 한동안 고려 태조 왕건 시절부터 쓰던 임시 칭호인 '권지고려국왕사(權知高麗國王事)'라는 칭호를 써야 했다. 안습. 결국 양국 관계는 주원장과 정도전이 죽고 나서야 해결될 수 있었다.

당장 이 문제에 대해선 같은 조선 건국의 주체인 조준을 비롯 다른 개국 공신들이나 왕족들도 반대가 심했다. 다음은 요동 정벌에 대한 다른 공신들의 반응과 정도전과 조준이 요동 공략에 대해서 의견을 주고 받은 부분이다. 조준의 반대 부분도 당시 조선의 사정을 생각하면 현실적인 부분이 많음을 알 수가 있다.

대사헌 성석용(成石瑢) 등이 상언하였다.

“전하께서 무신(武臣)들에게 《진도(陣圖)》를 강습하도록 명령한 지가 몇 해가 되었는데도, 절제사(節制使) 이하의 대소 원장(大小員將)들이 스스로 강습하지 아니하고 그 직책을 게을리 하오니, 그 양부(兩府)의 파직(罷職)된 전함(前銜)은 직첩(職牒)을 관품(官品)에 따라 수취(收取)하되 1등을 체강(遞降)시킬 것이며, 5품 이하의 관원은 태형을 집행하여 뒷사람을 감계(鑑戒)하게 하소서.”

임금이 말하였다.

“절제사 남은·이지란(李之蘭)·장사길(張思吉) 등은 개국 공신(開國功臣)이고, 이천우(李天祐)는 지금 내갑사 제조(內甲士提調)가 되었으며, 의안백(義安伯) 이화(李和)·회안군(懷安君) 이방간(李芳幹)·익안군(益安君) 이방의(李芳毅)·무안군(撫安君) 이방번(李芳蕃)·영안군(寧安君) 양우(良祐)·영안군(永安君) 〈이방과(李芳果)〉【상왕(上王)의 예전 이름.】·순녕군(順寧君) 지(枝)·흥안군(興安君) 이제(李濟)·정안군(靖安君) 〈이방원(李芳遠)〉【우리 전하(殿下)의 이름.】은 왕실(王室)의 지친(至親)이고, 유만수(柳曼殊)와 정신의(鄭臣義) 등은 원종 공신(原從功臣)이므로 모두 죄를 논의할 수 없으니, 그 당해 휘하 사람은 모두 각기 태형 50대씩을 치고, 이무(李茂)는 관직을 파면시킬 것이며, 외방(外方) 여러 진(鎭)의 절제사로서 《진도》를 익히지 않는 사람은 모두 곤장을 치게 하라.”

처음에 정도전과 남은이 임금을 날마다 뵈옵고 요동을 공격하기를 권고한 까닭으로 《진도》를 익히게 한 것이 이같이 급하게 하였다. 이보다 먼저 좌정승 조준이 휴가를 청하여 집에 돌아가 있으니, 정도전과 남은이 조준의 집에 나아가서 말하였다.

“요동을 공격하는 일은 지금 이미 결정되었으니 공(公)은 다시 말하지 마십시오.”

조준이 말하였다.

“내가 개국 원훈(開國元勳)의 반열(班列)에 있는데 어찌 전하를 저버림이 있겠습니까? 전하께서 왕위에 오른 후로 국도(國都)를 옮겨 궁궐을 창건한 이유로써 백성이 토목(土木)의 역사에 시달려 인애(仁愛)의 은혜를 받지 못하였으므로 원망이 극도에 이르고, 군량(軍糧)이 넉넉지 못하니, 어찌 그 원망하는 백성을 거느리고 가서 능히 일을 성취시킬 수 있겠습니까?”

또, 정도전에게 일렀다.

“만일에 내가 각하(閣下)와 더불어 여러 도(道)의 백성을 거느리고 요동을 정벌한다면, 그들이 우리를 흘겨본 지가 오래 되었는데 어찌 즐거이 명령에 따르겠습니까? 나는 자신이 망하고 나라가 패망되는 일이 요동에 도착되기 전에 이르게 될까 염려됩니다. 임금의 병세가 한창 성하여 일을 시작할 수 없으니, 원컨대 여러분들은 내 말로써 임금에게 복명(復命)하기를 바라며, 임금의 병환이 나으면 내가 마땅히 친히 아뢰겠습니다.” - 태조 7년 8월 9일의 기록

그리고 정도전은 이 일이 있은 지 17일 후에 이방원에게 살해당했다.

4.1 토지개혁

토지개혁 문제에서 정도전의 주장은 민본적이었는데, "전제(田制·토지제도)가 무너지면서 호강자(豪强者)가 남의 토지를 겸병하여 부자는 밭두둑이 잇닿을 만큼 토지가 많아진 반면 가난한 사람은 송곳 꽂을 땅도 없게 되었다."(부전(賦典) <조선경국전>) "옛날에는 토지를 관에서 소유하여 백성에게 주었으니, 백성이 경작하는 토지는 모두 관에서 준 것이었다. 천하의 백성으로서 토지를 받지 않은 사람이 없었고 경작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부전')고 고려말의 현황을 비판하였다.

정도전은 국가가 토지를 몰수하여 공전(公田)으로 만든 다음, 경작을 담당하는 백성들 개인에게 나누어주는 계구수전(計口授田) 또는 계민수전(計民授田) 방식을 추구했다. 하지만 반포된 과전법은 권세가들의 반대 때문에 후퇴한 형태였다.

"전하(이성계)께서는 잠저(潛邸·즉위하기 전에 거주하던 집)에 계실 때 친히 그 폐단을 보고 개탄스럽게 여기어 사전 혁파를 자기의 소임으로 정하였다. 그것은 대개 경내의 토지를 모두 몰수하여 국가에 귀속시키고 인구를 헤아려서 토지를 나누어주어서 옛날의 올바른 토지제도를 회복시키려고 한 것이었는데, 당시의 구가(舊家) 세족(世族)들이 자기들에게 불편한 까닭으로 입을 모아 비방하고 원망하면서 여러 가지로 방해하여, 이 백성들로 하여금 지극한 정치의 혜택을 입지 못하게 하였으니, 어찌 한탄스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백성에게 토지를 분배하는 일이 비록 옛 사람에게는 미치지 못하였으나, 토지제도를 정제하여 1대의 전법을 삼았으니, 전조(前朝·고려)의 문란한 제도에 비하면 어찌 만배나 낫지 않겠는가?"('부전' <조선경국전>)

정도전은 이에 대해서 문제는 있으나 이전보다는 훨씬 나은 개혁이었다고 자평했다.

4.2 철학사상

비록 역성혁명을 일으켜 보수적 성리학과 괴리되는 정치현실을 스스로 만들어 냈으나, 성리학에 대한 이상과 믿음이 강했던 그는 당시 유학자들에게 사적으로 용인되거나 학문적으로 타협되던 불교를 정면으로 비판하기도 했다. 《불씨잡변》은 그러한 정도전의 사상이 잘 드러난 책이다. 그밖에도 성리학 관련 저서들을 집필했다. 《고려사》 편찬에도 참여했는데, 이 부분은 태종세종대에 공민왕 이후 기록이 왜곡되었다는 지적을 받게 되고 그리하여 개수되기도 했다.

사실 각종 필화사건이 난무하고 일원화된 사상적 압제가 통상화된 조선시대의 사상적 경향성에 있어, 정도전의 그림자가 언뜻 비추고 있다는 사실도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이다. 고려조에는 승려 신분이었던 신돈의 경우, '공자는 만세의 스승'이라고 공인하면서 성균관을 재건했을 정도로 다른 사상에 대한 유연성에서 별 다른 경직성이 보이지 않으나, 정도전은 불교는 물론이고 풍수지리 같은 것도 술수라며 믿지 않을 정도로 다른 사상에 대해 지독히 배타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정도전이 단순히 교조주의라서 다른 사상을 배척한 것은 아니다. 우선 그가 불교를 비판한 것은 불교의 폐단이 극대화된 시기였기 때문이다. 이는 불교의 폐단이라기 보다는 타락한 종교의 폐단이라고 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 고려 말은 사찰의 난립과 횡포로 인해 국고는 국고대로 탕진되고, 민생은 더 없는 나락으로 떨어졌던 시기이다. 그렇기에 새로운 왕조는 불교와 확실히 선을 그을 필요가 있었고, 그러한 정치적인 목적에 의해 쓰인 것이 《불씨잡변》이었다. 하지만 정치적인 목적이 아니라고 해도 유학자의 입장에서 불교는 비판의 대상일 수밖에 없었다.

《불씨잡변》 중 '불씨지옥의 변'을 보면 이런 구절이 나온다. 훗날 리처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에서도 같은 논리가 나온다.도킨스가 같은 말 했다고 하면 신뢰성이 떨어지잖아

옛날에 어떤 이 나에게 묻기를, "만일 지옥이 없다면 사람이 무엇이 두려워 악한 짓을 안 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나는 이렇게 답하여 말하기를,

"군자(君子)가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함은, 마치 좋은 색을 좋아하고 나쁜 냄새를 싫어함과 같아 모두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것이지 무엇을 위해서 하는 것은 아닙니다. 한번이라도 악명(惡名)이 있게 되면 그 마음에 부끄러워하기를 마치 시장에서 종아리를 맞는 듯이 여기니, 어찌 지옥설 때문에 악한 짓을 하지 않는다고 하겠습니까?"

하였더니, 그 중은 아무 말도 못하였다. 여기에 이 사실을 아울러 써서 그 설에 미혹되는 세상 사람들이 분변할 있도록 하고자 한다.

이것은 단순히 정도전 개인의 사상이 아니라 유교의 기본적인 사상이기도 하다. 유교는 뜬구름 잡는 개소리라 여기는 많은 사람들의 생각과는 달리 유교는 현실참여형 정치사상이고, 그렇기에 특히 사후세계같은 것을 끔찍할 정도로 싫어한다. 왜냐면 이러한 사후세계관이 결국에는 거지 같은 현실을 바꾸려는 민중의 의지를 꺾어버리기 때문이다. 이건 곧 유학자의 입장에서 보면 혹세무민이었고, 그래서 비판을 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런 이유로 조선 후기의 천주교가 유학자들에게 극딜을 당하기도 했다. 유학자 입장에서 보면 이건 뭐 불교 시즌 2였으니까. 다만 제사 문제만 없었다면 천주교는 그럭저럭 조선에 융화될 수 있었을 것이다. 표면적으론 불교를 극딜했던 조선의 선비들이지만 그들도 죽을 때가 되면 불교의 승려들을 찾는 경우가 많았고, 백성의 종교에 대한 수요도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위에서 본 것과 같이《불씨잡변》에서 정도전이 전반적으로, 또한 궁극적으로 공박하는 대상은 단순하게 세속화된 불교의 통시적인 폐단 정도가 아니라 연기론이나 윤회론 같은 불교의 핵심적인 이론이다. 유학자로서 사물의 생멸과 무궁한 변화를 전제하는 불교의 관점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라고는 하나 그 비판에 있어 철학적인 사유의 한계가 다분하고 무엇보다 중국 당나라시대 유학자인 한유의 배불론에서의 논리를 기계적으로 되풀이하고 있다. 하지만 유학의 관점이 크게 변하지 않았으니 같은 논리로 비판을 한 것이고, 또한 이 논리가 크게 틀렸다고 볼 수도 없다. 아니 현대의 회의주의적인 관점으로도 불씨잡변과 같은 맥락에서 불교를 비판할 수 있다. 사실 불교에서 수행과 그를 뒷바침하는 철학적인 텍스트를 거세한다면 다분히 비의적이고 종교적이다. 그리고 유교는 비의적이고 종교적인 것에 대해서 지극히 배타적이다.

사실 그의 스승이었던 목은 이색의 불교비판에 접근하는 방법론에 비교하자면 정도전의 불교에 대한 관점은 어디까지나 비판이 아닌 폭력에 더 가까이 접근해 있다.

정도전 사상의 독창성에 문제를 제기하는 견해도 있다. 정도전이 조선의 정치체제 구상을 밝힌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 '경제문감(經濟文鑑)' 같은 저술은 '주례정의(周禮訂義)', '산당고색(山堂考索)', '서산독서기(西山讀書記)' 등 중국의 주자학과 사공학(事功學·정치적 실제 효과를 중시하는 학문) 계열의 저작을 상당 부분 그대로 옮겨썼다는 것이다. 도현철 연세대 교수는 "정도전은 인용 전거를 밝히지 않고 자신의 의견처럼 기술하기도 했는데 이는 당대의 기준으로 볼 때도 학문적 엄밀성이 떨어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5 최후

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나는 그의 최후는 매우 비굴한데 이방원에게 "예전에 정안군(태종 이방원)께서 저를 살려주셨으니 이번에도 저를 살려주시지 않겠습니까?"라고 빌자 이방원은 "네가 조선의 봉화백이 되고도 그리 부족하냐? 어째서 이 지경으로 악행을 저지르느냐?"라고 일축하며 베어버렸다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바로 뒤에 분위기가 다른 장면을 실어 놓았는데, 아들 정담이[6] "오늘은 정안군께 빌어야 하는 것 아닐까요?"라고 말하자 "내가 이미 고려를 배반했거늘, 또 이쪽을 배반하고 저편에 붙는다면 마음에 부끄러움이 없겠느냐?"라고 거절했다. 절명시로 알려진 <자조>에서도 비굴한 모습과는 사뭇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마음을 보존하고 성찰하기에 한결같이 공력을 다 기울여,
서책 속 성현의 교훈 저버리지 않았다네.
삼십 년 긴 세월 쉬지 않고 고난 속에 쌓아온 사업,
송정에 한 번 취하니 모두 허사가 되었구나.
(操存省察兩加功 不負聖賢黃卷中 三十年來勤苦業 松亭一醉竟成空)
-자조(自嘲: 스스로를 비웃다)

여기서 '송정(松亭)'을 남은의 첩이 있던 곳이자 한양의 지명인 '송현방'의 정자로 해석하기도 하는데, 송현방은 오늘날의 서울 종로구 한국일보 사옥 주변. 경복궁 동십자각 건너편 일대다. 정도전이 최후를 맞은 곳이며 여기서 操存省察(조존성찰)은 맹자와 주자가 이야기한 성리학의 수양방법을 의미한다.

다만 이 시는 정도전의 절명시가 아닐 가능성도 높다. 참고. 현재 시중에 나온 삼봉집 단행본에는 자조가 맨 마지막에 실려 있지만, 실제 삼봉집의 편제에는 자조가 맨 마지막이 아닌 삼봉집 시편 중간에 실려 있다는 것. 드라마 정도전이 참고한 <건국의 정치>에서는 정도전의 자조를 절명시가 아니라 이성계를 만나고 돌아올 때 즈음 지었던 시로 해석하고 있다. 이 해석대로라면 자조는 정도전의 절명시가 아니라 "고려를 부흥하기 위해 학문에 힘써 왔는데, 어쩌다가 내가 이렇게 나라를 뒤집을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라는 식의 자조가 되는 셈이다. 이 견해에 따르면 '송정'은 사실 이성계의 잠저 시절의 호 '송헌(松軒)'을 의미한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사실 현실적으로 생각해 봐도 시간이 촉박한 쿠데타 때 정도전에게 이렇게 시까지 남길 시간이 있었을지도 의문. 죽기 직전에 이 시를 읊었다고 한다면 예전에 미리 지어 놓은 이 시를 죽음에 임박해 떠올려서 읊조렸다는 식으로 해석하면 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정도전은 이방원에게 끌려가기 전에 침실 안에서 단검을 쥐고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물론 실록 기록에서는 단검을 쥐었어도 소심한 모습으로 걸어나왔다고 하고 곧 이방원의 종자 소근의 호통을 듣고 단검을 버린 뒤 끌려나와 위의 비굴한 최후를 맞았다는 기록으로 이어지지만, 비굴하게 목숨을 구걸했다는 사람이 '단검'을 왜 쥐고 있었는지는 의문. 이 기록도 정도전이 끝까지 저항했을 가능성을 암시한다는 해석도 있다.

어쨌든 비록 자조가 절명시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남아 있는 여러 기록들 때문에 실록 속의 비굴한 최후는 이방원 일파에 의해 비하된 감이 있다고 보는 의견이 많다. 사실 태조실록에서 왕자의 난 부분은 다소 비판적으로 읽어야 하기도 하고. 단, 정도전의 절명시 자조는 실록에 없고 정도전의 문집인 《삼봉집》에 있는 기록이다. 하지만 아들의 말에 대한 대답 "내가 이쪽을 배반하고 저편에 붙는다면 마음에 부끄러움이 없겠느냐?"는 분명 실록에 있으며 목숨을 구걸하는 장면과는 많이 다른 장면이라서 최후의 비굴한 모습은 정도전을 비하하기 위한 기록일 가능성이 있다.

다만 그의 죄목은 반역을 꾸몄다는 역모죄가 아닌 종친들을 이간질시키고 해하려 했다는 종친모해죄였다.

삼봉집의 부록 <사실>의 주석에 의하면 정도전이 죽을 무렵에 "남산에 가서 돌을 깨니, 정(釘)이 남아나지 않는구나(南山往伐石釘無餘)"라는 노래가 돌았다고 한다. 여기서 '남'은 남은을 뜻하고 '정(釘)'은 '정(鄭)'과 읽는 음이 같아 정도전을 뜻한 것이라고 하는데, 과연 정도전과 남은은 같은 날에 살해되었다. 말하자면 사망 플래그가 당대에도 돌았다는 이야기.

6 졸기

정도전의 는 종지, 는 삼봉이며, 본관은 안동 봉화이니, 형부 상서 정운경의 아들이다. 고려 왕조 공민왕 경자년에 성균시에 합격하고, 임인년에 진사에 합격하여 여러 번 옮겨서 통례문 지후에 이르게 되었다. 병오년에 연달아 부모의 상을 당하여 여막을 짓고 상제를 마치니, 신해년에 불러서 태상 박사로 임명하였다. 공민왕이 친히 종묘에 제향하니, 도전이 도면을 상고하여 악기를 제조하였다. 예의 정랑·예문 응교로 옮겨서 성균 사예로 승진되었다. 갑인년에 공민왕이 하여, 을묘년에 북원의 사자가 국경에 이르니, 도전이 말하였다.

선왕께서 계책을 결정하여 명나라를 섬겼으니, 지금 원나라 사자를 맞이함은 옳지 못합니다. 더구나 원나라 사자가 우리에게 죄명을 가하여 용서하고자 하니, 그를 맞이할 수 있습니까?”

그때의 재상이 듣지 않으므로, 도전이 굳이 이를 말하다가, 노여움을 당하여 회진으로 폄직되었다. 갑자년에 하성절사 정몽주가 그를 천거하여 서장관으로 삼아 수도에 갔다가 돌아와서 성균 사성에 임명되었다. 정묘년에 외직을 자원하여 남양 부사가 되었다. 무진년에 임금께서 국정을 맡게 되매 불러서 대사성에 임명하였다. 여러 번 계책을 올려 밀직 제학과 지공거로 승진되고, 십학 도제조가 되어 상명·태일 등 여러 산법을 가르치고, 예문 제학으로 옮겨서 《진맥도결》을 지었다. 기사년에 조준 등과 더불어 사전을 혁파하기를 청하였다. 공양왕이 왕위에 오르매, 삼사 우사에 승진되고 중흥 공신으로써 충의군에 봉해졌다. 경오년에 정당 문학에 승진되고, 윤이·이초의 무망한 옥사가 일어나자, 도전이 그 의논을 극력 주장하였으나, 정몽주가 임금에게 말하여 이 일을 그만 중지하게 하였다. 도전이 계품사로써 수도에 갔다. 신미년에 형벌과 상여의 잘되고 잘못된 점에 관하여 말씀을 올리니, 공양왕이 능히 용납하지 못하여 나주로 폄직되었으나, 임신년에 불리어 돌아왔는데, 남은 등과 더불어 계책을 정하여 임금을 추대하였다.

임금께서 왕위에 오르매, 공훈을 책정하여 1등으로 삼고 문하 시랑찬성사 겸 판상서사사를 가하였다. 또 계품사로써 수도에 갔다가 돌아와서 판삼사사 겸 판삼군부사로 승진되고, 삼도 도통사가 되어 《진도》·《수수도》·《경국전》·《경제문감》을 제작하고, 또 악가를 지었으니, 몽금척·수보록·문덕·납씨·정동방 등의 곡이 있었다. 정총 등과 더불어 《고려국사》를 수찬하였다. 봉화백으로 봉해지고, 관등은 특별히 숭록 대부로 승진되었다. 병자년에 동지공거가 되어 처음으로 초장 강경의 법을 시행하였다. 정축년에 동북면을 선무하여 의 이름을 정하고 공주성을 수축하였다. 무인년 봄에 돌아오니, 임금이 맞이해 위로하고 후하게 대우하였다. 도전은 타고난 자질이 총명하고 민첩하며, 어릴 때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많은 책을 널리 보아 의논이 해박하였으며, 항상 후생을 교훈하고 이단을 배척하는 일로써 자기의 임무로 삼았다. 일찍이 곤궁하게 거처하면서도 한가하게 처하여 스스로 문무의 재간이 있다고 생각하였다.

임금을 따라 동북면에 이르렀는데, 도전이 호령이 엄숙하고 군대가 정제된 것을 보고 나아와서 비밀히 말하였다.

“훌륭합니다. 이 군대로 무슨 일인들 성공하지 못하겠습니까?”

이에 임금이 말하였다.

“무엇을 이름인가?”

도전이 대답하였다.

왜구를 동남방에서 치는 것을 이름입니다.”

군영 앞에 늙은 소나무 한 그루가 있었는데, 도전이 소나무 위에 를 남기겠다 하고서 껍질을 벗기고 썼다. 그 시는 이러하였다.

“아득한 세월 한 주의 소나무

몇만 겹의 청산에서 생장하였네

다른 해에 서로 볼 수 있을런지

인간은 살다 보면 문득 지난 일이네.”

개국할 즈음에 왕왕 취중에 가만히 이야기하였다.

한 고조장자방을 쓴 것이 아니라, 장자방이 곧 한 고조를 쓴 것이다.”

무릇 임금을 도울 만한 것은 모의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므로, 마침내 큰 공업을 이루어 진실로 상등의 공훈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도량이 좁고 시기가 많았으며, 또한 겁이 많아서 반드시 자기보다 나은 사람들을 해쳐서 그 묵은 감정을 보복하고자 하여, 매양 임금에게 사람을 죽여 위엄을 세우기를 권고하였으나, 임금은 모두 듣지 않았다. 그가 찬술한 《고려국사》는 공민왕 이후에는 가필하고 삭제한 것이 사실대로 하지 않은 것이 많으니, 식견이 있는 사람들이 이를 그르게 여겼다. 처음에 도전이 한산 이색을 스승으로 섬기고 오천 정몽주와 성산 이숭인과 친구가 되어 친밀한 우정이 실제로 깊었는데, 후에 조준과 교제하고자 하여 세 사람을 참소하고 헐뜯어 원수가 되었다. 또 외조부 우연(禹延)의 장인인 김진이 일찍이 중이 되어 종 수이의 아내를 몰래 간통하여 딸 하나를 낳으니, 이가 도전의 외조모 이었는데, 우현보의 자손이 김진의 인척인 이유로써 그 내력을 자세히 듣고 있었다. 도전이 당초에 관직에 임명될 적에, 고신이 지체된 것을 우현보의 자손이 그 내력을 남에게 알려서 그렇게 된 것이라 생각하여 그 원망을 쌓아 두더니, 그가 뜻대로 되매 반드시 현보의 한 집안을 무함하여 그 죄를 만들어 내고자 하여, 몰래 황거정 등을 사주하여 그 세 아들과 이숭인 등 5인을 죽였으며, 이에 남은 등과 더불어 어린 서자의 세력을 믿고 자기의 뜻을 마음대로 행하고자 하여 종친을 해치려고 모의하다가, 자신과 세 아들이 모두 죽음에 이르렀다.

태조 14권, 7년(1398 무인 / 명 홍무(洪武) 31년) 8월 26일(기사) 2번째기사
다만 정도전의 출신에 관한 실록의 기록은 왜곡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이방원 세력이 정도전의 출신을 문제삼고 왕자의 난을 정당화 하기 위해 일부러 종의 자식으로 교묘하게 조작하였다는 것이다. 실록의 왜곡을 지적하는 이들은 정도전의 아버지인 정운경의 행장에는 외조부의 이름을 영천 우씨 우연(禹淵)으로 적었지만 실록에서는 단양 우씨 우연(禹延)으로 적어 한자가 다르다는 점을 근거로 든다.관련기사

7 후일담

이방원의 정도전 숙청은 애시당초 정치적인 목적으로 이뤄졌기 때문에 다행히도 그 가족은 대부분 해를 입지 않았고, 설사 노비 등으로 전락했다고 해도 몇년 후 대부분 복권되었다.

정도전에게는 형제가 둘 있었는데 두 동생 중 첫째 동생인 도복은 한성판윤으로 있었다. 한성부를 관할하는 판윤이라는 말로써, 요즘으로 치면 대략 서울시장+서울 고등 법원장+서울 고등 검찰청장 정도에 해당한다. 둘째 동생인 도존은 무인정사 당일 정도전과 함께 피살되었고 큰동생 정도복은 정도전이 죽자 관직을 버리고 고향인 영주로 낙향했다

정도전에게는 경주 최씨 가문 출신으로 최습의 딸인 경숙택주 최씨라는 아내와 아들이 네 명이 있었고 정진, 정영, 정유, 정담이라고 하지만 아들이 세 명이라는 기록도 있는데, 자세한 것은 정영, 정유, 정담 문서 참고.

둘째, 셋째, 막내아들인 정영, 정유, 정담도 아버지, 삼촌과 함께 무인정사 때 이방원과 싸우다 전사. 살아남은 한 명의 아들은 바로 맏아들인 정진(鄭津, 1361∼1427)으로 지방에 내려가 있다가 화를 면하였다, 이후 전라도 수군(水軍)의 일개 병사로 신분이 강등되어 수병 생활을 9년간 하게 되었으며(조선시대 수군은 천역에 속했다) 아내 최씨 역시 노비로 전락했다.

그러나 불과 몇년 후 태종은 정진을 판 나주목사로 임명하는 방법으로 복권시킨 건 물론 여기에 정도전의 정책 대부분을 그대로 시행했다. 태종이 정책 시행이야 그렇다 쳐도 왜 정적의 아들인 그를 아무 대가도 없이 복권시켰는지는 분명치 않다. 다만 적어도 태종은 그를 종친 모해죄로 몰았고 정적으로 생각했지, 적어도 역적으로 생각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역적으로 몰았더라면 삼족을 멸했을텐데 그의 후손이 이어져오고 있기 떼문이다. 사실 태종만 그렇게 생각한게 아니라 태종의 숙부인 의안대군 이화1차 왕자의 난 당시에 단순한 집안 싸움이라고 일축했던 사례가 있었다. 그리고 묘하게 태종은 자기가 죽인 정몽주도 직접 복권시킨 전례가 있다.

어쨌거나 정진은 이후 여러 지역의 목민관을 역임하였고 판한성부사를 지냈으며 세종조에 형조판서까지 역임하는 등 높은 지위에 올랐다. 개인적인 인품이나 평가도 좋았으며 그가 졸했을 때 세종이 조회를 폐하고 부의를 내리기도 했다. 정진은 아들 둘을 두었는데 맏이는 용인현령을 지낸 정래이고 둘째는 직산현감을 역임한 정속이다. 이 중 정속의 아들 정문형은 세종때 문과에 급제하여 세조 시기엔 우의정[7], 성종 시기엔 영의정에 이르렀다.[8] 이를 보면 정도전 개인은 거론하는 것조차 금기시된 역적이 되었으나, 그의 후손들이 멸족하지는 않았고 오히려 사대부로서 영달을 누렸음을 알 수 있다. 그 후로도 정도전의 후손들은 가문을 이어 대대로 고관대작을 지냈다.

다만 정도전 본인은 조선이 끝나기 직전까지 신원되지 못했다. 하지만 이건 국가의 공식 입장이었던 거고 민간에서는 의견이 갈렸는데, '선유(先儒)'로 존경하는 사대부들도 나타나는 등 15세기 중반부터 이미 역사적으로는 어느 정도 복권이 된 상태였고 정도전의 이데올로기를 담은 삼봉집의 간행도 딱히 금지되지 않았다. 심지어 태종 즉위 이후 공신들부터가 이미 태종의 지나친 정도전 죽이기(직접 문제시된 부분은 이숭인 등을 장살한 혐의)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태종 면전에서 표한 바 있다. 참고로 이 공신들은 태종과 함께 정도전 일파를 제거한 주역들, 조영무, 조온 같은 이들이다(!!!) 공신들은 태종에게 "정도전, 남은이 이숭인 등을 죽인 것은 비록 임금을 속인 행위이나, 어디까지나 사직을 위한 것이었다"고 항변하였다. 조영무는 대놓고 "정도전이 잘했다는건 아니지만, 당시 상황을 생각하면 용서할만 하다는 뜻"이라고 말했다. 그 태종도 정도전을 죽인 직후에는 함부로 정도전을 폄하하지 못했고 오히려 양정(兩鄭)이라고 해서 정몽주와 동급으로 두었다. 본격적으로 정도전의 명예를 폄하하던 것은 그 이후다.[9]

또한, 문집의 서문을 써 주는 것 자체가 후학으로서 문집을 저술한 이를 존경하는 뜻을 표하는 행동인데, 처음 <삼봉집>을 교정하고 서문을 쓴 이는 다름아닌 정도전의 정적이었던 권근이다!(참고로 권근은 조준과 함께 태종에게 정도전의 장남 정진의 복권도 건의했다. 이를 보면 정치적으로는 대립했을지언정 원수진 정도는 아니었던듯.) 사실 권근은 <불씨잡변>을 비롯해 정도전의 저작 상당수의 서문을 쓰기도 했다. 그리고 그의 문집 《삼봉집》을 재편찬하고 거기에 서문을 쓴 이는 바로 세조 때의 재상인 신숙주였다. 신숙주가 정도전의 증손자였던 정문형과 친분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신숙주는 《삼봉집》에서 "당시 영웅호걸이 난립했지만 선생 만한 인물은 없었다"라고 그를 높이 평가했고 사림파의 거두인 김종직도 정도전을 최고의 선비로 평가했다. 광해군 때의 허균은 대놓고 정도전을 대현인이라고 평가했으며 조선 후기의 영조정조도 정도전을 높이 평가했다. 공식적으로 역적으로 단죄된 인물이었다면 문집이 편찬되는 것은 물론, 조정의 중신들이 대놓고 서문을 써주거나 문집이 출간되는 등의 행동은 상상하기 힘들다. 즉, 정도전의 위치는 완전한 역적도 아니지만 공식적으로는 상당히 폄하되고 있는 미묘한 상태였다는 얘기.

그러나 정도전은 유학 국가의 시스템을 건설한 사람이면서도 고려 왕조를 쓰러뜨림으로써 유학의 제일 원칙인 충성을 저버린 사람이기도 하기 때문에, 공식적인 평가 면에서도 조선 초기의 많은 흑역사들을 모조리 뒤집어쓰고 말았고, 그 행적에 대해서도 많은 사대부들이 정도전은 주군을 배신하고 나라를 멸망시킨 간적이라는 이중적인 평가를 하기도 했다. 특히, 송시열을 비롯한 사림파는 정도전을 높게 평가하지 않았다. 반면 정몽주는 고려의 충신으로 성리학에서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충신이었다. 따라서 그의 행적과 무관하게 이를 활용할 필요가 있었다. 때문에 정도전은 정몽주가 태종 때 복권되고 중종 때 문묘에 배향된 것과는 다른 대접을 받았다. 정도전은 성리학 이상국가를 창조해내었으나, 도리어 그 행동으로 인해 결국 그 국가에서 버림받게 되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복권 움직임은 후대의 정조 말년부터 <<삼봉집>>을 다시 간행하면서 나타났지만, 정도전이 공식적으로 복권되고 명예를 회복한 것은 흥선 대원군 섭정기에야 이루어졌다.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증건하면서 그 설계자인 정도전의 공로를 인정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 1865년(고종 2년)에 대왕대비가 정도전의 훈봉(勳封)을 회복해 주고 시호(諡號)를 내리며 봉사손(奉祀孫)의 이름을 물어서 건원릉 참봉(健元陵參奉)으로 의망하여 들이도록 전교하였다. - 조선왕조실록 고종 2권, 2년 9월 10일 3번째 기사
  • 1867년(고종 4년)에 고종이 경복궁에서 근정전에 앉아서 공식적으로 정도전의 업적을 찬양하면서 정도전에 대한 사면을 반포하였다. - 조선왕조실록 고종 4권, 4년 11월 16일 1번째 기사
  • 1870년(고종 7년) 예조에서 정도전 16대손 정응기(鄭應夔)를 사손으로 정할 것을 청하여 고종이 윤허하였다. - 조선왕조실록 고종 7권, 7년 8월 21일 2번째 기사
  • 1870년 정도전에게 문헌공(文憲公)이라는 시호를 내려주었다. - 조선왕조실록 고종 8권, 8년 3월 16일 4번째 기사
  • 1872년(고종 9년)정도전의 묘에 지방관을 보내서 제사를 지내게 하였는데 무덤이 없어서 후손들이 신주에 제사를 받겠다고 하여 예조에서 고종에게 아뢰자 고종이 신주에 제사를 드리라고 하교하였다. - 조선왕조실록 고종 9권, 9년 3월 23일 1번째 기사

정감록》의 저자로 지목된 인물이기도 하다. 물론 《정감록》은 영&정조시기에 형성된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사실이 아니지만, 정도전이 경복궁의 위치를 잡는 등의 일로 인해 민중들에게는 풍수도참에 능통한 인물로 알려졌고 또한 조선 왕조에 의해 죽임을 당한 패배자였기 때문에 그런 이미지들이 종합적으로 엮여서 그를 정감록의 저자로 내세우게 된 게 아닌가 하는 분석이 있긴 하다. 그러나 정도전의 이상이 철저한 성리학 국가 건설이었으며, 한양 천도 때 하륜과 대립했을 때 한 말인 술수하는 자들의 말은 믿을 수 없다는 말만 봐도 이는 설득력이 떨어진다. 실록에서 실제로도 정도전 본인이 직접 "신은 술수 따위는 배우지 않아서 잘 모릅니다"라는 말을 하고 있다. 단지 그런 거 치고는 또 본인 산문집인 금남잡제에 실려있는 사이매문이란 글을 보면 민초들이 믿던 이매 같은 건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이기도 했던 듯 하다. 글 제목 자체가 이매에게 보내는 사과문이란 뜻이기도 하고. 이 글은 주변에 도깨비가 모여들어 정신이 사납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 도깨비가 사실 유배 간 곳의 민초들을 상징하는 메타포로 쓰였다는 말이 더 많기 때문에 이 경우엔 그냥 비유적인 용도로 가져다 쓴 쪽에 가까울 것이다. 최영을 토르에 비유했다고 비유한 사람이 진짜 세상에 번개의 신 토르가 있다고 믿지는 않듯이. 원문은 여기 에서 확인 가능.

8 묘소

정도전은 신원되었지만 오랜 시간 동안 흘러오면서 무덤이 실전되어 후손들은 가묘를 만들어 제사 지내고 있다. 족보에는 경기도 광주시 사리원이며 부인 최씨의 묘는 양재역 상초리에 있다고 적혀 있다. 또 반계 유형원이 쓴 《동국여지지》에 의하면 '정도전의 무덤은 과천현 동쪽 18리에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래서 옛날 과천현청이 있던 곳에서 동쪽으로 18리를 떨어진 곳을 분석한 결과 서울특별시 서초구 양재역 인근 외교안보연구원(현 국립외교원) 우면산 기슭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 곳에는 오래된 무덤 몇 기가 있었는데 그 중 정도전의 무덤으로 보이는 무덤을 1989년 한양대학교에서 발굴했다.

그러나 이 무덤은 오래 전에 도굴꾼들이 여러번 도굴한 탓에 유물이 적었다. 그러나 내부에서는 질이 우수한 백자들이 다수 발견되었으며 목관에서 머리만 있는 유골이 발견되었다. 아무리 찾아봐도 몸통이 없는 걸로 보아 애초에 머리만 묻힌 무덤으로 보였다.[10]

무덤의 규모는 조선개국 1등공신이라고 하기에 너무나 초라했지만 부장품의 질, 남아있는 인골의 상태 등으로 볼 때 참수당한 정도전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나 아쉽게도 도굴꾼들이 가져갔는지 지석이 있을 자리에 지석이 사라지고 없었다. 이에 문중에서는 결정적인 증거인 지석을 찾기 위해 백방으로 수배하고 찾아다녔으나, 지금까지 찾지 못했다. 정황상 유골이 자신들의 조상일 가능성은 높아도 물증이 없었지만 문중에서는 일단 정도전이 아니라고 해도 오래 전에 돌아가신 우리의 조상이라면서 삼봉사 뒤편에 일단 가매장했다. 언젠가 정도전의 것으로 확정이 되면 정식으로 매장하려는 듯. 그래서 삼봉의 가묘는 양재동에 있는게 아니라 경기도 평택시 진위면 은산리 산대마을에 있다. 산대마을은 정도전의 후손인 봉화 정씨 집성촌이기도 하다. 정도전의 사당인 문헌사와 정도전 기념관도 이곳에 있다.

9 사극에서

역사학계의 재평가 바람을 타고 긍정적으로 그려지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는 위대한 혁명가로 묘사되기도. 다만 창작물 내용에 따라서는 신원되기 전의 평가인 음흉하고 간사한 인물로 등장하는 경우도 간혹 있다.

용의 눈물》에서는 故 김흥기가 배역을 맡아 열연했다. 김흥기는 《개국》에서도 정도전 역을 맡았던 바 있었는데 단순히 배역만 자주 맡은 것에서 끝난 것이 아니라 정도전과 그의 사상에 대해 전문가 수준으로 알고 있었다고 한다. 《용의 눈물》이 방영되었던 1997년에 김 씨가 국민대학교에서 정도전의 정치사상을 주제로 강연을 했을 정도. #



《용의 눈물》에서 태종으로 출연했던 유동근의 회상에 의하면 촬영장에 올 때마다 항상 극에 대한 고증을 해 온 선배후배들이 역사 공부를 하도록 만들었다고 한다. 이 점은 사극 작가들이나 배우들이 본받을 점이다. 《용의 눈물》의 원작인 박종화 선생의 <세종대왕>에서는 소인배 스타일로 등장했는데 용의 눈물에서는 고증을 통해 폭풍간지 혁명가로 재조명했다. 여기서는 실록의 비굴한 최후와는 달리 영웅적인 최후를 맞는 것으로 각색되었다. 이방원에게 "이제 편히 쉬게 해 주게. 조카"라고 말한 후 절명시인 <자조>를 읊조리는 장면은 정말 압권.# 이 장면에서는 특히 NG가 많이 났었다고 한다. 김흥기의 대사나 연기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원인은 다름아닌 소음공해(...) 때문이다. 하필이면 대사를 하는 타이밍에 비행기가 휭~하고 날아가기도 하고 어디선가 자꾸 우렁차게 울어대는 염소 때문에 계속 NG가 나자 김흥기도 결국 대사를 하다 말고 "저 염소X끼!" 하면서 짜증을 내기까지 했다고. 소음공해 이외에도 어디선가 파리가 날아들기도 해서 NG가 많이 나자 나중에는 "참으로 죽기 힘들구나"라는 말을 사극체 그대로 드립치기도 했다. 방영 이후 특집편의 NG기록을 보면 정말 죽기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

뿌리깊은 나무》에서는 드라마의 또다른 중심축인 비밀결사 '밀본'을 만든 인물이며 작중에서는 이미 고인이지만 상당히 중요한 역할이다. 공홈의 기획의도에도 '조선은 성리학의 나라이며 사대부의 나라이고 정도전의 나라이다'라고 언급하면서 정도전의 사상과 이상을 보여주는 것을 기획의도로 밝히고 있다. 그런데 작중 밀본의 주장대로라면 여기서의 정도전은 "사대부 중심의 나라"를 부르짖는 귀족주의자. 사실 이 드라마는 퓨전사극의 한계로 가장 기본적인 고증에 문제가 많았다. 정도전의 후손들은 당장 아들대부터 복권되어 영달을 누렸는데 정도전의 생질이 숨어살며 비밀결사를 만든다는 것부터가...

이 드라마를 보면 정기준이나 밀본이 정도전의 사상을 잘못 이해하고 있거나 자신들의 유리한 쪽으로 왜곡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작중에서 세종이 "삼봉이라면 나를 이해할 것이다"라고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보면 작가들이 정도전의 사상을 잘못 이해한 것 같지는 않다. 역사상 세종은 정도전에 대해 이렇다할 언급이나 평가를 내린 적은 없지만 백성이 나라의 근본이라고 생각했으며 의정부서사제를 실시하여 재상중심체제를 구현한 세종의 정치 이념이나 사상 등을 보면 궁극적으로 정도전의 민본주의 사상과 일맥상통한다.[11]

17화에서는 아예 세종이 정도전의 제자인 혜강에게 "삼봉은 자신의 문집에서 요순시절에는 언관이 없어도 언로가 안 막혔는데 한자를 아는 관료들이 등장하면서 오히려 언로가 막혔다고 까고 있는 거 모름?"이라며 삼봉의 주장을 한글창제 논리를 옹호하는 데 쓸 정도.

대풍수》에서는 등장하지 않을듯 하다가 30화가 되어서야 등장했다. 헌데 연기톤부터 하는 행동까지 전형적인 간신배. 풍수지리를 술수라고 비난한 정도전이라서 풍수지리를 소재로 한 드라마에서 까이는 듯. 신덕왕후 편에 붙어서 방석을 세자로 만들고 방원을 죽이려 모략을 꾸미는 게 주된 역할. 정몽주의 죽음도 이방원의 결단이 아니라 이방원이 자신을 죽이려는 정도전의 낚시질에 걸려 저지른 것으로 나온다. 역사를 아는 시청자 입장에서 보면 차곡차곡 사망플래그 적립중. 그러나 드라마시청률이 저조해서 왕자의 난이 일어나기도 전에 끝나서 최후는 그려지지 않았다. 참고로, 배우는 백승현.

KBS에서 《대왕의 꿈》 후속 작품으로 그의 이야기를 다룰 대하드라마정도전》이 2014년 1월부터 방영되기 시작하였다. 정도전 역에는 조재현이 캐스팅되었다. 일단 드라마 자체야 '간만에 등장하는 제대로 된 명품 정통사극'이라며 대호평을 받았지만, 이와는 별개로 조재현의 연기에 대해서는 초반에 호불호가 다소 엇갈리기도 했다. 다만, 작품이 초반부를 벗어나 중반을 넘어간 이후로는 故 김흥기 버전의 정도전과는 차별화되는, 꾸준히 정치력을 쌓아 정치 9단에 이르는 정도전의 모습을 무척이나 잘 표현했다는 호평이 많아졌다. 자세한 것은 문서 참고.

한편 MBC에서도 정도전과 이방원의 대결을 그린 《파천황》을 2014년 4월부터 방영될 예정이었으나, 무기한 연기되었다가 결국 2015년에야 SBS에서 육룡이 나르샤라는 새 제목으로 방영이 확정되었다. 불멸의 이순신에서 이순신으로 분했던 김명민이 정도전 역으로 캐스팅되어서, 김명민의 10년만의 사극 드라마 복귀작이 되었다. 자세한 것은 문서 참조. 그리고 이 드라마가 뿌리깊은 나무의 프리퀄로 확정되었는데 결국 육룡이 나르샤에서의 정도전의 이상은 뿌리깊은 나무의 세종과 똑같은 것이었고 밀본은 창시자의 뜻을 잊어버리고 오히려 배신한 천하의 개썅놈들임이 확정되었다.

2014년 영화 해적: 바다로 간 산적에도 등장. 안내상이 연기했으며, 위화도 회군과 조선 건국을 부정적으로 평가한 영화 내용상 대풍수에서와 비슷한 음흉한 간신배로 등장했다.

2015년 영화 순수의 시대에서는 이재용이 연기했다.

10 기타

조선 건국 후 한양의 주요 건물의 위치를 설계하고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경복궁의 경우 정도전은 북악산 남쪽을, 무학대사는 북악산 서쪽을 주장했는데, 무학대사는 북악산 남쪽에 경복궁을 지으면 정룡(장자)이 쇠하고 방룡(장자 이외의 아들)이 흥하기 때문에 정도전과 대치했다고 한다. 정도전이 경복궁을 북악산 남쪽으로 한 이유는 태조의 막내 방석(방룡에 해당)을 밀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야사가 있다. 조선왕조 장자 수난을 만드신 분. 단 야사는 어디까지나 야사다. 정도전은 풍수지리를 '음양, 술수의 학'으로 배격했던 철저한 성리학자였음을 기억하자.

경복궁 동십자각 너머에 거주하였는데 이는 주한 미대사관 뒤이고 오늘의 종로구청 자리이다. 그래서 종로구청 민원실 앞에 정도전 집터임을 알려주는 작은 표석이 세워져 있고, 종로구청 주변 도로 이름도 정도전의 호에서 따온 '삼봉로'.

후배인 권근핵심 실세 선배님한테 아첨하여 콩고물이라도 좀 얻어먹어 보려고 "선생은 진실로 동방의 맹자"라며 극찬하기도 했다. 정도전과 맹자의 관계를 생각해 보면... 본인은 아첨인 줄 알면서도 꽤 흐뭇해 했을 듯.

11 관련 항목

  1. 이전에는 1337년생 설과 1342년생 설로 나뉘어져 있었지만 현재 학계에서는 1342년생 설을 정설로 보고 있다.
  2. 단양팔경 중 하나인 도담삼봉은 정도전과 관련된 곳이다.
  3. 이에 대해 정도전은 요동정벌로 화답(...)하고자 했다.
  4. 군력으로 나라를 취한후 혈기와 통합된 군력을 다른나라에 침공으로 푸는 행위는 역사상 계속 있어왔다태조 : 이제 한반도 군력이 다 내맘대로니 주원장도 삶아먹을수있을거 같아 이 부분은 태조가 너무 강경하게 나와서 재상들도 별 방법이 없었다. 이걸 기회주의니 뭐니 할수가 없는게, 태조는 겉으로는 우유부단했으나 실제로는 자기 주관이 강하고 자기 고유 영역이라고 생각되는 부분에서는 상당히 단호했다. 사료를 주의깊게 읽어보면 공신책봉과 세자 책봉은 어디까지나 태조 스스로 주관한 것이었지, 정도전 일파의 견해가 반영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애초에 조준 등 3정승의 입장은 나이가 많거나 공이 많은 아들을 세우자는 입장었다. 그러나 태조가 워낙 강경하니 결국 셋이서 합의를 보고 배극렴이 막내 방석을 추천했던 것이다.
  5. 물론 이에 대해서는 반론이 존재한다. 고려대 송재혁 박사(정치외교학)는 논문 '정도전의 신질서 구상과 서경'에서 " 정도전이 꿈꾼 국가질서는 신권이 아닌 강력한 왕권 중심의 정치체제였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역사학자들은 그것이 입헌군주제를 표방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사실 어는게 맞냐기 보다는 왕권중심의 세계관에서 정말 급진적인 예를 들면 현재의 삼권분립 민주주의는 체택되기 어렵다는게 역사학자들의 평 그래서 훌륭한 왕들을 살피면서 입헌군주제 형식으로 가는 민주주의를 표방할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뭐 삼봉이 군대를 직접일으키거나 이인임 같은 권력자이면서 세력이 강했다면 급진민주주의로 정말 삼권분립을 하거나 공화정으로 갈지는 의문이다.
  6. 이 아들은 아버지가 죽을때 자결했다.
  7. 《삼봉집》에<경제문감>·<조선경국전>·<불씨잡변> 등, 추가하여 1464년 목판본으로 중간했다.
  8. 다만 벼슬살이를 50년이나 해먹었어도 큰 업적이 없어서인지 연산군 때 또 정승에 제수되었는데 대간이 벌 떼 같이 항의해서 결국 파직했다. 그러나 이건 정문형 개인이 문제가 있었다기보다는, 대간에 의한 새 임금 길들이기 성격이 더 강했다. 정문형은 재수 없이 걸렸던 것.
  9. 공신으로서의 화상, 녹권 등 박탈, 그리고 이숭인 등을 장살한 건을 이용한다던가.
  10. 한양대학교 박물관에 발굴당시 찍은 사진이 있다.
  11. 본격적으로 조선이 왕과 그 측근 및 권신들을 중심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세조 때 부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