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위 항목: KBO 리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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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단법인 한국프로야구선수협회(韓國프로野球選手協會) Korea Professional Baseball Players Association | |
설립일 | 2000년 1월 22일 |
주소 | 서울특별시 서초구 양재천로13길 23 에이스빌딩 3층 |
회장 | 이호준(9대) |
사무총장 | 공석[1] |
공식 홈페이지 |
목차
1 개요
줄여서 통칭 선수협이다. 프로야구 선수의 이익을 대변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2013년 7월 비영리 사단법인화 되었다.
선수협 연혁
2016년 현재 회장은 이호준이다. 사무총장은 박충식이었으나 2016 프로야구 승부조작 사건에 대해 책임을 지겠다며 2016년 8월 11일에 사임함으로써 현재는 공석이다.
2 현황 및 노조화 문제
바로 위에서 설명된 것처럼 선수의 이익을 대변하는 단체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익을 대변할 수단과 방법이 한정되어 있다는 점이다. 특히 선수협은 노동조합이 아니므로 노동3권을 보장받지 못한다.
우선, 선수협은 구단이나 한국야구위원회와 교섭이 불가능하다. 선수협이 어떤 문제에 대해서 성명서를 발표하면, 구단과 KBO는 상콤하게 이를 무시하는(...) 것이 오늘날의 상황이다.[2] 또한, 파업과 같은 단체행동도 불법이다. 선수협이 어떤 문제를 이유로 파업을 하게 되면 불법파업이 되어 1990년대 전교조처럼 되는 꼴을 맛보게 된다. 그러나 프로야구선수는 법적으로 노동자가 아니어서[3] 자유 불법 파업이란 걸 하려고도 할 수가 없다. 즉 불법 파업 자체가 성립이 안된다는 것.
따라서 선수협의 노조화는 최우선적인 목표이지만, 구단의 강력한 반발이 예상되기 때문에 굉장히 험난할 것으로 예상된다. 애초에 노조가 아닌 선수협이 설립된 것은 일종의 타협안이었는데, 이마저도 매우 힘든 과정을 겪어야 했다.
이런 이유로 현재 선수협의 활동 내용은 한정되어 있다. 가장 본질적인 문제들인 선수 계약, 트레이드, 방출 등에 대해서는 입도 뻥끗하기 어려운 상황. 게다가 선수협 자체의 흑역사도 꽤 많기 때문에 선수협 자체에 대한 여론도 긍정적 여론과 부정적 여론이 극과 극을 달리는 상황.
3 역사
3.1 1차 선수협 사태(1988)
프로야구 출범 후 겨울만 되면 선수들과 구단간에는 연봉 협상 때문에 신경전이 벌어졌다. 선수들은 뛰어난 성적을 올렸으니 그에 마땅한 대우를 해주길 원했지만 구단에서는 갖은 핑계를 대며[4]를 대며 최대한 연봉을 안 올려주려 하고, 선수들은 그에 반발해 연봉조정 신청을 하겠다고 엄포를 놓고, 그제야 구단에서 마지 못해 겨우 재계약하는 일이 매해 겨울마다 벌어졌다. 그렇게 구단에 대한 선수들의 불만이 조금씩 쌓여갔다.
선수협 결성의 가장 결정적인 계기가 된 건 1988년 8월 28일 김대현의 사망사고였는데 당시 해태 타이거즈 소속이었던 김대현은 선배인 이순철과 같이 차를 타고 전주시에서 다음 경기가 열리는 서울특별시로 향했는데, 도중에 사고를 당해 운전하고 있던 김대현은 즉사하고 말았다. 그러나 현역 선수가 시즌 중 불의의 사고로 운명을 달리했음에도 해태 구단은 김대현의 유가족에게 아무런 지원을 하지 않았다. 이를 참다 못한 주요 선수들이 선수들의 처우개선을 목표로 삼아 최동원을 필두로 선수협 결성을 시도했으나, 당시 구단주들의 강력한 반대로 무산되었다. 이후 최동원은 김용철 등과 묶여 삼성 라이온즈의 김시진과 장효조 등을 상대로 징계성 트레이드되었다. 1980년대에는 프로야구가 지역연고 대항전이나 다름없었으므로, 연고팀에서 타팀으로 트레이드되는 것은 고향 팀으로부터 버림받는 것과 동일시되었다.[5] 게다가 삼성과 롯데는 무노조 경영으로 악명 높았다. 그나마 롯데는 현재 부분적으로 허용하고 있으나 삼성은 예나 지금이나 철옹성이다. 물론 삼성도 노조가 있긴 하다. 근데 그게 어용 몸빵 노조라서... 이때 롯데를 떠밀려나가게된 최동원은 끝끝내 사직야구장으로 돌아오지 못하게 된다. 사후에 동상으로 돌아오게 된다.
3.2 2차 선수협 사태(2000)
3.2.1 선수협 결성 움직임과 선수들 간 대립
이후 선수협은 2000년 초 한화 송진우, 최익성[6], 롯데 마해영, 박정태, LG 김재현, 해태 양준혁, 두산 심정수, 강병규[7] ,SK 최태원을 중심으로 다시 결성 움직임을 보였다. 반면 LG 유지현, 삼성 김기태, 현대 김경기, 두산 김태형, 해태 이호성[8] 등은 대놓고 선수협 결성 움직임을 비판하며 선수협의 중심에 서 있던 선수들과 대립각을 세우며 구사대(노조를 탄압하기 위해 회사가 고용한 어용직원모임)로 활동한다. 선수협에 반대한 5명은[9]일명 선수협 오적'으로 불린다.
이 선수들 사이의 의견은 감정의 대립으로까지 치달았는데, 김기태와 양준혁이 서로 멱살을 잡고 주먹다짐 직전까지 갔던 것은 유명한 이야기이다.그 뿐만 아니라 선수협에 가입하려던 이승엽을 김기태가 끌고가기까지 했다. 나중에 이승엽은 뜻을 같이 하기로 해 일단 가입은 했다... 다만 활동은 안하기로 선을 그었지만. 또 친구단 성향이었던 유지현[10]은 선수협 결성을 위한 선수들의 모임에서 김재현을 제외한 LG 트윈스[11] 선수들을 전부 데리고 나오기까지 했다. 여담이지만 창단 총회 때 어느 팀이 먼저 들어가는가를 두고 서로 늦게 가기 위해 유지현과 김기태가 멱살잡고 싸우기도 했고, 결국 가장 먼저 들어간 곳은 두산이었다.
이 일을 계기로 입단 동기였던 유지현과 김재현은 서로 등을 돌리게 된다. 당시 후배 입장이었던 이병규(큰 이병규)의 후일담을 들어 보면, 당시 LG 선수들은 선수협을 반대하는 유지현과 선수협 핵심 멤버였던 김재현과 양준혁 사이에서 상당한 갈등을 겪었으며 심정적으로는 선수협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2000년 1월 22일 결국 프로야구 선수협의회가 결성된다.
그러나 선수협이 혼자서 결성한 것일 뿐 실제로 구단측과 KBO측은 인정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그후 1년간의 투쟁을 거쳐서 2001년 1월에 구단측이 선수협과 합의서를 작성한 것을 실제로 선수협이 결성된 것으로 봐야 한다.
3.2.2 선수협 설립을 배신한 선동열?
선동열은 선수협과 관련하여 양준혁의 주장 때문에 비판을 받았다. 양준혁은 "나고야에 전화를 서른 번도 넘게 하고 메시지도 남겼는데 연락이 안 됐다. 배신감 컸다."고 주장하고 있다. 선동열은 이에 대해 어떠한 대응도 지금까지 하지 않았으나 어디까지나 양준혁의 언플에 불과한 것으로 드러났다. 선동열의 귀국시에 양준혁과 만나 찍힌 사진 또한 존재하고 선동열은 양준혁을 피하지 않았다. 해외리그에서 은퇴를 준비하던 선수에게 선수협 설립의 책임을 묻는것은 어불성설이다.
3.2.3 선수협을 배신하고 구단편에선 선수협 설립 멤버들?
2011년 10월 이후 강병규가 양준혁에 저격을 시작하였다. 이에 의하면 양준혁은 선수협에 앞장섰다가 상황이 불리해지자, 구단측에 붙어서 선수협을 배신하였고, 그 이후 삼성으로 이적한후 선수협을 모른체한 배신자라는 주장이며, 이 주장이 많은 사람들에게 마치 사실처럼 알려졌으며, 현재도 믿는사람이 있다. 이 내용과 더불어 그 당시 선수협 지도부가 모두 구단측에 붙어서 합의한결과 힘없는 선수들이 희생되었다는 잘못된 사실이 퍼져나갔다.
게다가 이 대해 당시 선수협에 참여했다가 구단측으로부터 일방적 보복을 당한 최익성도 강병규 주장에 힘을 실어주었으나, 역시 조기은퇴당하고 야구계에서 퇴출되어 이민까지 갔다 온 박충식등은 양준혁을 지지하였고, 그 당시 자세한 내용이 밝혀지면서, 강병규의 거짓이 알려지게되고 결국 그 당시 사회적으로 거의 매장을 당한 강병규의 재기를 위한 몸부림쯤으로 결론지어지고 있다.
- 양준혁이 선수협에서 도망갔다?
강병규의 발언에 의하면 한참 선수협이 힘들때 양준혁이 도망가서, 삼성에 가서 잘 먹고 잘 산것처럼 묘사되어 있다. 실상은 2001년 1월 선수협과 KBO와 구단측이 모여서 합의안도 출할때까지 주축 멤버중의 하나가 양준혁이다. 더군다나 양준혁은 선수협 경력 때문에 2002 시즌 전 삼성과의 FA계약에서 실력대비 헐값에 계약을 해야 했다.
- 양준혁을 비롯한 선수협 주요멤버들의 구단편으로 변절하였다??
선수협 사태를 강경대응하던 한국야구위원회는 2000년 12월 양준혁, 송진우 등 6명을 전격 방출했다. 선수생명을 끊은 것이었는데 팬들의 엄청난 반발로 주요 6인의 방출을 철회했다. 여론이 악화되자 당시 문화복지부 장관 김한길까지 나서게 된다.[12] 대기업으로써는 장관까지 합의를 종용하는 상황에서 2001년 1월 어쩔수 없이 선수협의 실체를 인정하게 되었다. 그러나 구단측에서는 양준혁, 송진우, 마해영은 사퇴하고, 2차 지도부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내용을 강력히 주장하여 결국 합의문에까지 들어가게 되었다. 선수협 사태 종결 당시 기사
즉, 마지막까지 양준혁 송진우 마해영 등 선수협 주요멤버는 구단의 눈의 가시였다. 강병규는 그 당시 이미 티비로 진출해서 구단의 견제 명단에도 없었다. 더군다나 방송인이 되고 연제협 사건에도 가담했으니 양준혁에게 뭐라 할 자격이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 선수협 주요멤버들에 대한 구단의 보복
의리의 회장님을 가진 송진우와 이미 트레이드된 양준혁을 제외한 전원이 합의안 발표 한달도 안지나서 보복 트레이드 되었다. 그 당시 선수협 집행진이 구단편에 붙었다면 그런 일이 있었을까.
그 이후 선수협 지지하던 선수들중 기량 모자라거나 저하된 선수는 야구계에서 밀려나는 경우가 많았고, 기량이 여전히 좋아서 팀에 쓸모가있는 선수는 선수생활 유지했다. 강병규나 최익성도 그러했지만, 양준혁을 지지하는 박충식 등도 조기은퇴후 프로야구계에서 남지 못하고 결국 이민가서 10년이나 호주가서 살다 돌아왔다.
선수협 5적이라 불리는 선수들은 거의 자기 팀에서 은퇴하고 코치를 하거나 감독까지 되었지만[13], 양준혁을 비롯 선수협 주요멤버들 중에서 보복 트레이드후 선수 생활을 계속한 선수들도 어떤 이유에선지 은퇴 이후 거의 대부분 코치 등으로 친정 구단에 남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인용 오류: <ref></code> 태그를 닫는 <code></ref>
태그가 없습니다는 이민까지 갔다. 과거 1차 선수협 당시 최동원 역시 은퇴 후 방송등 야구로 돌아가지 못하다가 거의 20년 만에 잠시 코치 생활을 했었다. 다만 최태원이나 박정태는 코치 생활을 제법 했고, 김재현도 해설위원을 몇 년 하다 2015년에 코치를 하고 있다.</ref>
- 양준혁 FA미아설
선수협과 구단의 합의가 2001년 1월에 있었고, 그 후 11개월후 2001년 11월 양준혁은 FA가 되었는데 강병규의 말과는 다르게 선수협 사태가 끝난 한참뒤에 FA가 된 것. 강병규에서 촉발된 양준혁에 대한 음모론은 양준혁의 FA미아도 거짓이고, 이미 구단측에 붙어서 삼성에 가기로 합의햇다는 식의 내용이 마치 사실인 양 떠돌고 있다. 그러나 FA 미아설은 양준혁이 소설로 쓴 게 아니다. 그 당시 김응용 감독이 영입생각이 없던 삼성사장에게 영입을 요구했다고 직접 언론에 여러 번 밝혔다 [14]관련기사 김성근 감독 역시 그 당시 FA당시 선수협관련해서 양준혁이 힘들었는데 LG에 잡아 달라고 요구하였다고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15]
- 그 당시 실제 선수협을 구성하는 수백명 선수들과 양준혁
강병규가 티비에서 잘나가던 그 시절, 2001년 12월 선수협 500여명의 선수가 모여 총회를 열었고, 그 총회에서 선수협의 불안한 미래를 걱정하는 목소리에 더불어, 양준혁의 FA미아를 걱정하는 목소리가 컸다. 강병규는 모르는 실제선수들의 목소리다. [[ http://cafe.daum.net/bluetwins/5Wv/890?q=%BE%E7%C1%D8%C7%F5%20%C1%B7%BC%E2&re=1%7C선수협총회 당시기사]]
3.2.4 KBO의 뻘짓과 선수협 결성, 그리고 보복트레이드
노조의 설립을 당연히 반기지 않을 사용자 측에서는 자신들의 대리인이나 다름없는 KBO를 내세워 언론플레이를 하면서 한편으로는 선수들을 탄압했는데, 그 언플 수준이 상식 이하였다. 어느 정도였나면 당시 100분 토론에서 선수협 문제를 다뤘을 때 출연한 KBO 쪽 양반과 위에서 말한 이호성이 "선수협 결성을 사주한 배후가 있다.", "선수협 주동자들은 사회주의자들이나 마찬가지다."등의 망언까지 할 정도였다.
100분 토론에 대해 첨언하자면, 2000년 2월 10일에 방영되었고, 故 정운영 교수가 사회자를 보던 시절이었다. 선수협 측에서는 당시 선수협 대변인이었던 강병규와 민변 소속의 김도형 변호사, KBO측에서는 이상일 당시 사무차장과 김응식 조선대 체육학부 교수가, 그리고 중재인 측으로 허구연 해설과 신문선 해설이 출연했었다. 방청석에도 마해영, 송진우 등 당시 선수협 핵심 주축 멤버들이 있었던 상황. 토론 과정에서 이상일 사무차장이 주옥같은 개드립들을 쏟아냈는데 한 토막이 이렇다. 방청석에 있던 송진우 당시 회장과 이상일 사무차장과의 대화이다.
이상일 : 제가 하나 그러면 보충해서 묻겠습니다. 송진우 선수에게. 그러면은 지금 선수 협의회는 노조입니까, 친목단체입니까? 어느 쪽입니까? 확실하게 좀 해 주십시오송진우 : 협의회입니다.
이상일 : 협의회 성격이 뭡니까? 노조입니까? 아니면 친목단체입니까?
송진우 : 노조 아닙니다.
이상일 : 노조 아닙니까? 그러면 제가 노조라고 느끼는 부분에 대해서 답변을 좀 해주시겠습니까? 저는 제가 노조라고 느끼는 부분이 4가지가 있습니다. 선수회는 노조가 아니라면서 노조처럼 행동하는게 있는데요,
① 선수들을 가입을 은밀하게 일부 선수들에게 가입서를 받으면서 했던 점, ② 시민단체라든가 정당을 쫓아다니면서 서명을 받는 행위, 지원의 부탁하는 행위, 이런 행위, ③ 쌍방울 선수를 강제로 밤중에 납치하면서 데려오는 등 도저히 일반 선수협의회로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을 한 점, ④ 친목단체인데도 선수협의회에 굳이 지금 집행부가 본인들만이 대표여야 된다. 다른 사람은 대표가 안된다 라고 주장하고 연연하는 점, 이 부분에 대해서 한번 설명을 해주시겠습니까?정운영 : 제가 먼저 질문을 좀 정리하겠습니다. 가입의 은밀성, 외부지원을 부탁한다. 경우에 따라선 납치와 같은 그런 무리한 행동이 있었다. 또, 대표성의 어떤 독자성 같은 걸 이해하기 힘들다. 그렇기 때문에 노조라는 말씀입니까?
이상일 : 제가 생각해서는 지금 선수들의 협의회는 결국 노조를 하기 위한...
정운영 : 그러면 노조는 지금 말씀하신 그런 것 하는 게 노조입니까?
이상일 : 그런 것도 그 중에 하나일거라고 생각이 됩니다.
정운영 : 그건 노조에 대해선 대단히 잘못 생각하고 있습니다.
ㅡ 당시 방송 전문
이게 얼마나 어이없는 개소리였냐면, 양측의 의견을 정리하고 중재하는 역할을 해야 하는 사회자인 정운영 교수가 이 소리를 듣고 대놓고 면박을 줄 정도였다. 네티즌들 사이에서도 상당한 논란을 빚은 발언이었고, 다음 날인 11일에는 한국의 양 대표노조인 민주노총, 한국노총에서 이상일 사무처장의 저 발언에 대해 사과를 요구하며 KBO에 항의방문하는 일까지 있었다. 당시 KBO의 인식이 이 지경이었다.
차라리 자유계약선수 제도를 구단 측에서 먼저 허용한 점이라든가, 선수노조와 구단의 대립으로 시즌이 도중에 취소되었던 1994년 메이저리그 등을 근거로 들었더라면 그렇게까지 바보 취급은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선수협 주동자에게 빨갱이라는 개소리를 한 이호성은 호남출신에 해태 타이거즈 선수였다는 이유로 죽은 뒤[16] 좌파이니 무작정 지역 드립이나 그냥 무턱대고 전라도이니 진보 또는 보수에서도 지지하거나 반대 태도를 취하면 욕할때 쓰는 아이콘이 되었는데 자세한 건 호성드립 참조.
거기에 당시 KBO 총재인 故 박용오 [17]는 KBS 뉴스 인터뷰에서 이러면 프로야구를 없애버리면 그만이다라는, 총재직으로서 망발까지 당당하게 선언했다. 즉 회사 노조 만들면 회사 문닫으면 된다라는 대기업 회장다운 망언이라는 비난이 펑펑 터졌고 이걸 계기로 선수노조에 대해 회의적인 시선을 가졌던 많은 야구팬들이 선수협을 만든다는 건 좀 우리가 보기에도 익숙하지 않지만 저런 천하의 개쌍놈들이 프로야구를 좌지우지하는 꼴은 못본다.며 선수협을 지지하게 되고, 2000년 12월 20일 선수협 관련 주축멤버 6인 송진우 양준혁 마해영 박충식 최태원 심정수가 구단들에 의해 강제로 자유계약공시가 되자 팬들의 여론이 들고일어나 당시 문화관광부장관 이었던 김한길이 개입하게 되었고 구단들 입장에서도 장관급의 개입은 무시할수가 없는 압박으로 다가왔다.관련기사
김한길이 개입하자 한달도 안돼서 공정거래위원회가 선수협 손을 들어 주면서 2001년 1월 준 노조의 성격을 지닌 선수협이 결성되기에 이른다.[18] 정확히 말하면 노조는 아니었으나 실질적으로는 노조 역할을 담당하는 단체가 만들어진 셈이다.
그러나 선수협에 열성이었던 선수들을 곱게 봐 줄 생각이 없었던 구단 측에서는 이후 각 선수들이 팀의 기둥 전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매우 적은 대가로 다른 구단으로 가차없이 보복성 트레이드를 시행했다.
- 강병규: SK 와이번스로 현금 트레이드[19] 다만 두산 프런트가 이전부터 놀기 좋아하던 강병규를 선수협을 빌미로 팔아버렸다는 설도 있다. 결국 강병규는 햇빛알레르기 같은 드립이나 치다가 결국 SK 프런트에게도 찍혀서 방출되어 은퇴한다.
트레이드를 당하지 않은 선수들도 피해를 입기는 마찬가지였다. 선수협 사태 직후 고관절 부상으로 수술을 받아 선수생명의 기로에 섰던 김재현은 수술 뒤 복귀하여 정상급의 기량을 과시했음에도 불구하고 연봉협상 과정에서 부상으로 인한 시즌 중 은퇴는 전적으로 선수 자신의 책임이라는 등 각종 개드립으로 얼룩진 각서에 동의할 것을 구단측으로부터 강요받는 수모를 겪었다. 이후 김재현은 2004년 말 FA 자격을 얻자마자 당연히 LG를 떠나 SK 와이번스와 계약한다. 그리고 이렇게 양준혁과 김재현을 떠밀어 보낸 LG 트윈스는 병크에 대한 천벌로 그 이후 한없이 추락했었다.(…)
소위 선수에 대한 의리를 기업운영의 구호로 삼았던 팀에 소속되었던 송진우 정도가 이 광풍에서 유일한 생존자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후에 밝혀진 바에 의하면 2004년 즈음에 삼성으로 트레이드 하려다가 말았다고 한다. 했으면 암흑기가 더 일찍 찾아왔을 듯 이에 대해선 2000년 FA 당시 3년 7억을 제시했던 한화와 동기간 12억 이상을 제시한 삼성 사이에서 한화를 선택한 송진우의 선택이 크게 미쳤다고 봄이 타당하며 이후 한화는 먹튀가 즐비하던 FA시장에서 돈값을 한 송진우를 아주 제대로 프랜차이즈 대접하기에 이른다.
3.3 암흑기 (2001 ~ 2007)
어째 창립하자마자 암흑기
창립 1년만에 2001년 1월 선수협은 구단측의 인정을 받고 정식으로합법 단체로 거듭난다. 그러나 창립 후유증이 있었는데,회장 송진우를 비롯 창립멤버 전원이 일선에서 물러나고 선수협 반대 세력이었던 이호성이 회장직에 오른다. 다만, 일반의 인식과 달리 이때 선수협 운영진 전체가 반대파로 구성된 것은 아니었고, 오히려 장종훈, 안경현, 김정민과 같은 온건 유화파도 들어가 있었다. 간단히 말해 창립멤버였던 강경파들이 물러나고, 반대파 + 온건중립파로 2기 선수협이 새출발한 것.
지도부가 교체된 가장큰 이유는 2001년 선수협사태에 김한길 장관이 관여하면서 선수협과 구단간에 합의를 주선했고 이때 구단이 요구한 중요한 사안이 바로 기존 강성 창립멤버의 하차였기 때문이다.관련기사 즉, 구단측 선수협을 인정해주는 대신 기존 운영진은 하차시키는 요구를 강하게해서 그걸 거부하기가 힘들었던 것이다. 그 외의 이유들도 있지만 제일 큰 이유는 바로 이것이었다.
한국 프로야구선수협회와 KBO 간의 합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 구단 대표 6명 방출조치 철회
- 송진우 회장, 양준혁, 마해영의 집행부 사퇴
- 선수들의 자율에 따른 새 집행부 구성
- 선수협 사무국은 새 집행부에서 구성
- 선수협 참여선수에 대한 불이익 금지
이런 이유로 양준혁을 비롯 창립멤버 전체가 선수협의 운영진에서 물러나버린다. 당시로서는 그럴듯한 결정이었으나 훗날 선수협이 파행적으로 운영되는 원인이 되어버린 셈. 이들, 특히 양준혁이 은퇴 후 선수협과 관련하여 비판받는 것처럼 단순히 이기적이라서 선수협에서 손을 놔버린 것은 아니고 위 서술과 같이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또, 시간이 흐른 뒤에는 이들 중 대부분이 은퇴하거나 최고참급 선수가 되었기 때문에 더 젊은 세력이 주축이 된 선수협 운영에 참견하기 어려운 상황이 되어버렸다. 어쨌든, 이들이 선수협에서 멀어지자 핵심 동력이 사라지는 결과를 낳게 된 것은 분명하다.
이렇게 구성된 2기 집행부는 사실상 최악의 결과가 낳게 되어버렸다. 간단히 말해, 처음을 제외하고 전반적으로 무능력했다. 일단 선수협 두번째 회장은 이호성이었는데, 사실 이호성이 회장 자리를 유지한 기간은 그리 길지 않다.
이는 구단의 어용으로 예상되었던 이호성이 예상외로 선수협을 바탕으로 선수의 목소리를 아주 잘 대변했기 때문. ### 당시 천만원이였던 최저연봉의 단계적 인상, 연봉 상한선 철폐[27], 선수협 복지기금 마련[28] 등의 목소리를 내자, 이에 당황한 구단측에서 2기 선수협에 회장직을 아예 없애버렸으므로 이호성 개인이 선수협과 장사급 힘을 바탕으로 선수의 권익을 대변할 기간 자체도 얼마 없었다. [29]
회장문제를 떠나서, 2기 선수협은 운영진 구성 방식 자체에 큰 문제가 있었다. 각 구단별로 5명씩 대의원이 정해졌는데, 각 팀의 주장은 자동적으로 대의원이 되며, 이들이 대의원 대표로 자동임명된다는 것. 주장이라는 자리가 민주적인 절차로 정해지는 것도 아니고, 선수협 활동을 전제로 한 자리도 아니다. 심지어 구단에 의해 일방적으로 임명되는 주장도 있었다. 대표가 구단 스파이 내지는 쁘락치 게다가 같은 대의원이라 해도 대의원 대표이자 팀의 주장이니 어느 정도 영향력을 가질 수 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회장 또한 따로 뽑지 않았다. 회장 대신 간사를 두고 의사 진행이나 대외 홍보 역할만 맡겼다. 간사제도로 운영했던 이유는 8개구단 전체 대표가 각자 평등하게 상의한다는 것이었는데, 사실상 회장을 아무도 안 하려고 해서였다(..). 회장을 아무도 안하려고 했던 이유중 가장 큰 이유는 구단들의 보복때문이었다.
앞서 언급되었던 주축선수들의 강제 트레이드와 더불어 구단에 맞서던 이호성 신임 회장이 조기 은퇴까지 당하게 되자 모두들 회장직을 맡지 않으려고 했다. 이런 분위기에서 경주에서 열린 선수협 총회 당시 양준혁이 FA에서 어려움을 겪는다는 소식까지 들리자 이종범 유지현등이 회장직을 고사하는 등[30] 더욱더 회장직을 기피하게되었다. 당시 기사 그러나, 이런 상황이 지속되자 선수협에서는 2007년 회장을 다시 선출직으로 하기로 결정,[31] 이종범이 회장직에 선출한다. 하지만, 이종범 역시 선수협 운영에 대한 특별한 운영 목표나 의지는 없었고, 단순히 인망이나 유명세 때문에 뽑힌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종범이 회장으로 있는 동안에도 선수협은 이전과 마찬가지로 대외적으로 별다른 활동이 없었다.
다만, 이종범 회장 두번째 해에 선수협 대표 구성 방식에 중요한 변화가 있었는데, 바로 "주장 = 자동적으로 선수협 대표" 방식이 아니라, 각 팀의 협회원들이 팀 대표를 따로 뽑는 방식으로 바꾼 것.
요약하자면, 주요 창립멤버들은 구단측의 요구로 선수협지도부에서 나갔다. 게다가 후임 이호성은 구단에서 강제 은퇴시켜버렸다. 그 빈 자리에는 화합을 핑계로 구단의 프락치 반대파들이 들어와서 혼란해졌고, 이런 상황에서 누구 한 명 나서는 사람도 없었으며, 회장 자리까지 없애버려 난국을 헤쳐나갈 리더십이 없었다. 그나마 이호성이 제대로 역할을 하지도 않았다면 저 시기에 어용 단체로 전락하고 완전 해체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불행하게도 이호성은 이렇게 되는 바람에 구단의 눈밖에 나서 선수생활을 빨리 접고 2001년에 플레잉 코치가 되었다가, 2002년에 아예 야구계를 떠나게 되었다. 그 사건 이후는... 사실 선수협이 이호성 회장 시절 이전이나 이후에 이보다 더 좋은 모습을 보여준 적이 없다(2013년 임찬규 물벼락 사건의 경우 더 퇴보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KT신고선수 사태에도 손 놓고 있었으니....)는 점을 볼때 이호성의 몰락 과정은 정말 불행한 사례 맞다.
3.4 손민한 회장 시대(2008 ~ 2011)
2007년까지의 활동에 대한 반성으로 선수협이 보다 적극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또한 선수협 2기 때 부실하게 운영된 원인 중 하나로 카리스마 없는 사무총장의 무능함으로 보고 나진균을 사퇴시키는 대신 권시형 초대 사무총장[32]을 다시 불러왔다. 그러나 이는 결국 잘못된 선택이었음이 드러나게 된다.
3.4.1 선수노조 결성 운동(2009)
공식단체로 결성되었으나 노조의 지위를 획득하지 못했던 선수협은 2007년 말 손민한을 회장으로 선출하고 본격적으로 노조를 지향하게 된다. KBO와 각 구단은 예나 지금이나 열렬히 반대하는 중이며요태까지 그래와꼬 아패로도 계속, 최초 선수협 결성 당시 지지했던 팬들도 지금은 양분되어 있는 상황이다. 히어로즈의 문제가 현재진행형인 상황에서 굳이 지금 노조전환을 하는것이 옳은 것인가에 대해서 공감하는 팬들이 많다고는 보기 힘들다. 특히 수술 뒤 기량을 채 회복하지 못했으며, 강병철, 제리 로이스터 등 감독들을 공공연히 비난하고 다녔던 손민한이 회장을 맡았다는 점을 비판하는 팬들이 적지 않다.
손민한이 이렇게 강경하게 나갔던 가장 큰 이유는 전임 회장이었던 이종범의 활동이 외국인 엔트리 확대 반대로 대표되는 이른바 밥그릇 지키기에 머물렀기 때문이다. 사실상 동대문야구장 철거 반대운동을 빼면 활동이 별로 없는 이종범에 대한 반발심리가 강했을 것이다. 이렇게 강경하게 나간 덕분에 2군 선수 복지향상, 대졸 군필자의 FA 취득년수 개선, 일본 선수협의 지지성명 등 눈에 띄는 성과들을 이뤄낼 수 있었다.
LG 트윈스와 삼성 라이온즈 선수단의 경우는 선수노조로 전환하는 표결이 이루어지는 협회장소에서 아예 나와 버리기도 했다. 선수들도 고용인이고 노조를 극도로 싫어하는 모기업을 두고 있으니 아예 이해하지 못할 일은 아니지만, 매우 아쉬운 일이다.
아이러니하게도 표결 당시 삼성 선수들을 이끌고 퇴장한 것은 선수협의 초대 멤버였던 양준혁이었다는 썰이 돌지만, 근거가 없다. 그런 썰이 돌뿐 구체적인 증언이나 근거가 잘 제시되지 않고 잇다. 사실 이 이야기는 강병규가 삼성 선수단의 퇴장을 두고 양준혁이 책임져야함을 이야기하는 몇 줄의 글에서 비롯된 것으로, 양준혁이 선수단 데리고 갔다는 주장을 강병규가 한것도 아니다.
2010년 9월, 음주운전으로 입건된 이용찬에 대한 처벌 수위가 과하다고 주장했다. 처벌 자체가 잘못이라는 것이 아니라 처벌수단이 잘못되었다는 것이었다. 핵심은 '내년도 연봉 동결'. 프로야구 선수의 고용관계는 일반직장과 같이 사용자와 근로자의 관계가 아닌 사업주와 개인사업자인 상황에서 일방적으로 한 쪽에서 연봉을 확정지었으며, 다음 해의 연봉을 직무 외적인 일로 판결이 아직 나오지 않은 상황에서 결정지은 것을 통해 지나친 권익침해를 한 것이 아니냐는 문제제기를 한 것이다.
애당초 선수협회는 선수의 권익을 보호하는 '이익단체'지 '공익단체'가 아니다. 메이저리그 선수노조(MLBPA)도 어떤 사안이건간에[33] 지나친 권익침해가 일어났다고 하면 선수를 보호하고 나선다. 그러나 국내 프로야구의 현실은 선수협을 이익단체로만 두게 하지 않고 있다. 선수협이 FA 미아가 된 이도형,[34] 최영필 문제에 대해 침묵으로 일관한 것에서도 보이듯이 선수협은 단순한 이익단체로 머물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2006년 이후에 선수협이 강하게 주장하고 있는 것이 비활동기간(12~1월) 준수인데... 이에 대해서는 매년 겨울마다 되풀이되는 논쟁이며 2014년 12월에 전보다도 논란이 격해졌다. 이에 대해서는 하술.
참고로 미국의 메이저리그선수노조(MLBPA)는 1969년 미국 연방노동위원회 의결에 따라 합법적인 노조 지위를 부여받았다. 일본의 경우는 도쿄지방노동위원회는 1985년 11월 일본프로야구선수회가 제출한 노조자격심사를 통과시켰다. 일단 NPB와 구단은 선수를 근로자로 인정하는 것을 거부하고 있지만, 단체협약을 맺고는 있다.
선수협의 현재 상황은 선수협 결성 초기때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구단이나 KBO와 1:1로 대화할 수 있는 정도의 위치가 아니며, KBO가 자발적으로 선의에서 자리를 만들어주지 않으면 각종 위원회나 자리에 참여할 수 없다. 일반회사에서도 징계위원회를 열때 노조위원들을 참석시키지만, 현재의 KBO는 KBO에서 일방적으로 구성한 상벌위원회를 통해 처벌하고 있는 상황이다. 선수노조를 설립하고자 하는 것은 이 상황을 탈피하여 동등한 입장에서 대화하기 위함이며, 결론적으로는 현재의 MLBPA처럼 단체규약을 맺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으로 보인다.
3.4.2 9구단 창단과 용병 기용에 대하여
2009년 창원시를 연고로 한 엔씨소프트의 9구단 창단 소식에 대하여 환영하는 의사를 표시했다. 동시에 9구단 창단이 제대로 이루어질 경우 기존에 각 팀에서 보유하는 외국인 선수의 한도를 2명에서 3명으로 증가시키는 것에 대해서도 찬성할 수도 있다고 표명했다. 기존에 외국인 선수 한도에 대하여 외국인 용병 숫자를 2명을 초과하여 기용하는 것에 대해서는 죽어도 안된다고 못박았던 선수협에서 이런 말을 꺼냈다는 것은 선수협에서 9구단 창단에 대해 매우 긍정적인 메시지를 보냄과 동시에 매우 큰 양보를 한것.
정작 구단들이 9구단 NC 다이노스의 1군 승격을 논의하면서 외국인 선수 보유를 현행대로 하고 NC만 2년간 3명 보유로 하기로 하면서 외국인 선수 한도 확대는 다시 미뤄졌다.#
그러나 결국 9구단과 10구단인 KT 위즈의 창단이 허가되면서 기존 구단들의 외국인 선수도 3명 보유, 2명 출전으로 늘어났고 NC 와 kt 는 창단후 2년간 4명 보유, 3명 출전으로 바뀌게 되었다.
3.4.3 온라인 야구게임 초상권 로비사건
2011년 5월 온라인 야구게임 슬러거의 개발사 와이즈캣이 프로야구 선수들의 초상권을 독점계약하기 위한 로비관련 검찰이 선수협 권시형 사무총장을 기소했다. 선수협 최악의 흑역사의 시작 권 총장은 수십억원의 뇌물을 받은 것으로 밝혀졌고 선수협에서 간부의 비리를 인지하고 있었음에도 미온적으로 대처한 것으로 밝혀져 개인 차원이 아닌 조직적인 비리로 의심받고 있다. 이후 강병규가 여러 의혹들을 계속해서 주장하며 관심을 끌었다.
결국 각 구단의 대표선수들이 대전에서 모여 이 문제를 집중 성토했고 이어 열린 대의원 회의에서는 당초 손민한 회장과 비리혐의로 재판중인 간부를 사퇴시키고 이대진을 임시회장으로 임명하려다가 12월까지 현 집행부 체제를 유지하는것으로 한발 물러섰다. 하지만 이런 움직임에 FA 파동으로 옷을 벗게된 이도형은 '고참 선수들이 잘 했어야 했다'면서 선수협 파동에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3.5 박재홍 회장 시대(2012)
3.5.1 신임 집행부의 특별 회계 감사
이 사건을 통해 집행부가 바뀌게 되었으며, 표결 끝에 서재응을 누르고 박재홍이 11년 12월 9일자로 신임 회장이 되어 특별감사를 시작하였다.
12월 15일부터 약 2주 간 회계감사를 실시한 결과는 전임 권시형 사무총장이 거액의 횡령을 한 점이 발견되어 그야말로 충격과 공포. 야구게임 초상권으로 커진 선수협의 재정을 유령회사를 통해 마음대로 자기 주머니처럼 빼내어썼다. 그나마 그 초상권 계약 조건 조차도 선수협에게 불리하다는 모양. 게다가 전임 회장인 손민한은 자의적으로 3년인 사무총장의 임기를 2018년까지 보장했다. 서로 주고 받은 게 있다는 추측이 힘을 얻는 상황. 이후 박재홍 신임 회장에 대한 야구팬들의 지지가 급격히 늘었다.
박재홍은 투표 결과에 의해 박충식을 신임 사무총장으로 선임했다. 은퇴 이후 호주에서 거주하고 있었기에 현재의 야구계에서 떨어져 있었다는 것이 그 이유. 그러나 이에 대해 각 구단의 대표임을 천명하고 나선 박명환, 현재윤, 이혜천, 김상현[35]이 12월 28일 보도자료를 내면서 반발하였다. 결국 1월 3일 임시총회에서 긴 토의를 거쳐 박재홍 회장이 박충식에 대한 신임대표 대신 반대파가 주장한 절차 재진행에 동의하여 재투표를 거쳤고, 박충식(182표)-이도형(139표)-이종열(4표)-양준혁(0표)[36] 중에 결국 박충식이 확정되었다. 최종적으로 박충식이 확정되자 반대측에 섰던 3개 구단 선수단도 문제가 봉합되었음을 선언하였다. 한편 박재홍은 입방정강병규와 거리를 두겠다고 밝혔다. 강병규가 선수협을 쥐락펴락하려한다는 의혹에 대한 나름의 대처.
사무차장은 투명성을 위해 인터넷을 통해 공모하겠다고하며, 매달 회계감사를 받겠다고 했으나 그건 불가능에 가깝고 6개월마다 하는 것도 힘들다는 지적에 따라 6개월마다 회계자료를 공개하고 감사를 받기로 결정하였다.
박재홍 회장은 1월 3일 임시총회에서 초상권의 대가로 받은 61억 중에 선수들에게 지급된 금액과 경비를 제외한 20억가량이 행방을 알 수 없음을 밝히고, 이에 관한 진정을 인천지방검찰청 부천지청에 냈음을 밝혔다.
3.5.2 2012 올스타전 거부 사태
2012년 6월 KBO 임시 이사회에서 10구단 창단에 대해 당분간 유보 결정이 나오자 선수협에서 올스타전을 거부하겠다고 선언했다. 자세한 내용은 프로야구 제10구단 관련 논란 참조. 선수협과 관련된 부분만 놓고 보면, 그야말로 신의 한 수.
무엇보다도 언론과 팬들이 선수협을 지지하고 있으며, 올스타전 거부 이유가 자신들의 이익이 아닌 프로야구 전체의 이익 문제라는 점에서 강력한 명분이 있다. 게다가 사실상 파업에 가까운 행동이지만, 파업으로 보기 애매하다는 것도 그럴 듯한 부분. 시즌 전체나 일부를 거부하는 파업과는 달리 보너스 성격의 올스타전만을 대상으로 하고 있는데다 올스타전에 참가하는 선수는 프로야구 전체 중 일부이기 때문에 법적으로 파업에 해당하는지 판단하기가 어렵다.
만약 실제로 올스타전이 열리지 않게 되면 선수들이 실제로 행동에 나설 수 있다는 전례가 될 수 있으므로, 구단 입장에선 결코 가볍게 넘길만한 문제가 아니다. 이 때문에 시즌 중단이나 징계, 제2의 선수협사태라는 얘기까지 흘러나오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던 7월 13일, 일단 선수협은 올스타전 보이콧은 철회하겠다는 입장을 발표하었다. "KBO로부터 한국시리즈 직후 10구단 창단 승인을 위한 이사회를 소집하여 연내에 10구단 창단을 승인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계획과 의지를 확인했다."는 공식 발표를 했지만, 구절을 확인해보면 창단을 승인한다는 말은 결국 없다. 구단은 KBO에게, KBO는 다시 구단에게 책임을 돌리며 시간을 끈 꼴. 팬들은 더 강하게 밀어붙였어야 했다며 언짢아하였다. 롯데만 신났다 하지만 선수협으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으로 선수들의 목소리를 냈다는 점에서, 그리고 나름 출구전략을 잘 마련했다는 점에서 긍정적은 평가를 받았다.
3.6 서재응 회장 시대(2013~2015)
2013년 1월, 박재홍이 현역 은퇴를 선언하면서 공석이 된 회장 자리를 서재응이 맡게 되었다. 7월에는 오랜 진통 끝에 '사단법인'으로써 등기를 마쳤다.
3.6.1 임찬규 물벼락 사건
2013년 5월 26일 LG 트윈스와 SK 와이번스와의 경기 후 선수 인터뷰에서 일어난 사건. 이 날의 경기는 LG의 정의윤의 끝내기 안타로 LG가 1:0 승리를 거두어 정의윤이 수훈선수로 인터뷰를 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 인터뷰에서 LG의 임찬규가 정의윤에게 물벼락을 날렸고 그 옆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던 아나운서 정인영도 정의윤과 함께 물벼락을 맞고 물에 빠진 생쥐꼴이 되었다. 자세한 사항은 임찬규 물벼락 사건 항목에서 확인할 수 있다.
KBS N 스포츠 제작 팀장은 위의 사건이 재발한 것에 대해 선수들의 인성을 비난하며 LG의 인터뷰를 보이콧하는 것으로 대응했고, 이에 관해 선수협은 임찬규의 행동에 대해서는 사과하지만 뒤이어 방송사 쪽에서 인성 운운하는 등 집단을 비하하는 것에 대해서는 강력 대처하겠다고 한다. 사과의 뜻을 밝히는 입장표명이라는데 내용은 어째 사과 반 선전포고 반이라서, 모든 운동선수들을 싸잡아 비난하기에 선수협 측을 지지하는 의견과 사과를 할 거면 확실히 해야지 거기에 무슨 협박이 들어가냐 사과의 뜻도 모르냐며 비난하는 의견이 엇갈리는 덕분에 선수협 홈페이지 서버는 버티지 못하고 터져버렸다.
3.6.2 야구 기록사이트 kbreport 오픈
기존에 있던 스탯티즈와 이닝이 사라진후 야구 기록 사이트가 전무한 상황에서 2013년 한국프로야구선수협회에서 "우리가 스탯티즈를 인수하겠다"라고 밝혔다. 그후 한동안 소식이 없다가 2014년 4월, 박동희가 블러그에서 kbreport가 개장된다고 밝혔다.
웹 디자인은 조금 아쉽지만 그동안 야구기록에 목말라 했던 팬들의 기대치에 만족할만한 사이트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반응이다.
3.6.3 비시즌 단체훈련 금지 관련 논란
창설 후 최대의 위기
김성근이란 한 개인의 인기로 인한 무서운 파급력을 보여주는 사건
한국프로야구는 창립부터 선수활동시기에 관한 규정을 만들었고 바뀐적이 없다. 그 조항에 비추어 보면 활동기간이 아닌 시기는 자동으로 비활동기간이 되며 이때는 당연히 구단에 의한 단체훈련을 할 수 없다. 애초에 연봉도 활동기간 10개월 동안만 나눠서 준다. 비시즌 동안 서류상 실업자인 선수들의 입장에서 보면 당연한 권리행사지만, 처음부터 이것은 무시되어왔고 프로초창기에도 용기있는 기자들에 의해 지적을 당해왔으나 한국사회 전체가 긴 근로시간과 노동에 대한 정당한 댓가를 받던 시기가 아니라서 그냥 넘어가는 실정이었다. 소위 다음 시즌 잘하자고 훈련하는데 왜 반대하냐는 논리가 깔린것이다. 2000년대 초 선수협이 생기는 과정에서 최저연봉 상승 뿐 아니라 비활동기간 단체훈련 금지도 수면위로 올라왔다. 그러다가 2008년 말 단장회의에서 당시 단장들은 '비시즌 훈련금지'를 결의하였는데, 이는 훈련을 강조하는 SK가 2007년과 2008년 정규시즌과 한국시리즈를 모두 쓸어 담자 SK를 견제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현실은 너도나도 캠프를 차리는 악순환이었다. 김성근이 저렇게 훈련을 많이 시키니 우승하는것 아니냐? 너희들은 놀면서 잘하려고 하냐는 압력은 구단 고위층 뿐 아니라 팬들 사이에서도 나왔다. 이런 현상 때문에 당시 선수협 회장 손민한 을 비롯하여 비시즌 단체훈련 금지 결의안을 지키라는 목소리가 선수들 사이에서 높아져갔고, 이에 다음과 같은 규정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합동훈련은 구단 코칭스태프가 관여된 훈련을 뜻한다. 3년차 이하 선수·군 제대 선수·재활 선수는 비활동기간에도 합동훈련이 가능하다. 구단 시설을 이용해도 되고, 구단 코치의 지도를 받을 수 있다. 재활 선수의 경우, 연차에 상관없이 구단이 11월말까지 진단서와 명단을 제출해주면 된다. 명단에 포함된 선수들은 구단 시설과 구단 트레이너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이 규정이 실질적으로 효력을 발휘하게 된 것은 후임 박재홍 회장 때 부터이다. 김성근 감독의 경질 이후에 이 규정이 효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이미 비시즌 단체훈련 문제가 김성근이라는 사람의 존재와 상당히 관련이 깊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김성근 감독이 현역으로 복귀한 이후에, 비시즌 단체훈련 문제는 마치 운명처럼 다시 수면위로 올라오게 된다. 이 문제가 언론을 통해 표면화되기 시작한 것은 한화 이글스의 김성근 감독이 재활선수 명단에 김태균, 김태완 등 상대적으로 부상정도가 경미한 선수들을 포함한 주전급 20명을 재활훈련 명단에 포함한 것이 확인된 이후였다. 이에 선수협은 총회를 거쳐 비시즌 단체훈련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밝히고, 투표를 통해 야구규약 제 138조에 규정되어있는 '비활동 단체훈련 금지'를 지킬 것을 재확인하고, 이를 어길 시에는 벌금을 부과하는 등 강력한 제제를 하겠다며 강경한 입장을 밝혔다.
이 규정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것은 재활훈련이 금지된 것이다. 아래에서 다루겠지만, 재활훈련은 그간 2군선수들과 신고선수들을 위한 규정이 되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으로 1군선수들을 위한 훈련으로 변질된 상태였다. 박충식 사무총장 역시재활훈련이 실질적으로 기량향상을 위한 추가훈련으로 변질될 것을 우려하여 재활훈련을 폐지했다고 설명했다. 이에 한화 이글스 구단은 재활훈련을 위한 오키나와 훈련 일정을 출발 직전 취소하였고, 김성근 감독은 “비시즌활동 단체훈련 금지는 자살행위”라는 인터뷰를 통해 비시즌 단체훈련 금지를 비판하였다. 그러나 여러 포털의 댓글에서 확인되듯이, 이 조치는 여론의 상당한 반발에 부딪쳐야 했다. 성적을 올리기 위한 훈련이 왜 문제가 되어야 하느냐는 것이 주요 논지였다. 이 문제가 단장들에 의해 처음 제기되었고, 아래에서 설명할 선수들의 계약과 관련이 깊은 부분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선수협의 강경한 태도는 일단 맞는 말이다.
거기에 원칙적으로는 이 시기 구단의 비시즌 기간에 선수가 심각한 부상을 당한다 하더라도, 구단은 그 선수를 책임질 의무가 없다. 어떤 선수가 그런 위험성을 감수하면서까지 훈련에 참가하려 하겠는가? 정말로 성적이 절실한 2군 선수들이다. 임수혁선수 사건 이후로, 그리고 야구팬의 수가 증가한 이후로 구단은 선수들의 의료적 지원에 많은 공을 들이고 있지만, 그것은 1군 선수들의 이야기이고 2군 선수들은 훈련 중에 부상을 당한다 하더라도 제대로 된 도움을 받지 못하는 실정이다. 법적 근거가 없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2군 선수들의 처우를 앞세우면서 비시즌 기간의 훈련에 대해 주장하는 것은 상당히 위험한 주장이다.[37]
선수노조와 비활동기간 준수 등의 문제도, 여론에서는 있는 놈들의 자기 뱃속 챙기기라는 비판을 듣고 있지만, 그 근원을 논하자면, 구단에 근무하고 임금을 받는 사실상의 근로자인 야구선수를 구단측의 편의로 개인사업자로 보는 것이 야기한 것이다.
처음부터 비시즌 기간을 근무기간으로 인정하고 계약서 쓰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으며, 다들 그렇게 알고 있다. 하지만 현행 제도상 프로야구 선수들은 개인사업자로 분류되고 매년 10개월짜리 고용계약을 받은뒤 2개월동안 서류상 실업자로 지내다가 재취업하길 반복한다. 엄연히 비시즌도 근무활동의 연장선(시즌 준비)에 있음에도 이를 계약서상에 빼는건, 1년 12개월 전체계약을 할 경우 프로야구 구단은 선수들에게 현행법상 퇴직금을 지급할 의무가 생기고 4대보험도 직장보험으로 의무가입해야 한다. 나아가 법리상 2년 이상 계약이 지속될경우 무기계약직 전환되어 해고가 제한되는 노동법 법리까지 인정받아서 선수단 인원제한이나 임의탈퇴같은 제도를 근본적으로 다시 써야한다. 1982년 프로야구의 출발때부터 구단이 지출해야하는 노동법상 선수의 권리와 복지에 들일 돈을 주지 않기 위해 정부와 프로야구협회가 이런식으로 CBA를 작성한게 지금까지 이어진 것.
따라서 모든 프로야구 선수들은 이렇게 매년 구단과 10개월 계약이란 것을 하게 되고, 선수들은 12월 1일부터 2월까지 백수로 지내다가 재취업하는 것을 반복한다. 결국 비시즌 훈련은 계약서도 쓰지 않은 백수를 "지금까지 일했으니까 너 돈 안받아도 나와서 훈련해."라는 말과 똑같다. 당신이 일개 아르바이트생이라도, 계약서도 안쓰고 돈도 못받는 일을 두달동안 하라면 하겠는가? 돈 못받는건 둘째치고 프로훈련이라는 육체적 고통과 부상의 위험이 매우 높은 일을 추가근무 수당은 커녕 다치면 보험처리도 안되는 일을 자기 돈들여 하는 것이다.
현재의 계약된 근로자로서의 지위를 보장해주면 비활동기간 문제는 생길 이유가 없지만 그것은 실현되지 않고 있다.
그 무슨 전과를 들먹이며 선수협 측의 변명을 봉쇄해도, 이것이 근본적 원인임은 부정할 수 없다. 따지고 보면, 사실 선수들에게 최상의 결과는 단체훈련을 폐지하는 것이 아니라 나머지 두 달에도 돈을 줘가며 훈련시키는 방식으로 '비활동기간 준수'를 하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를 지적한 글 구단들은 저연봉 선수들이 훈련비용에 부담을 느끼기 때문에 단체훈련을 하자고 하지만, 그렇다면 연봉을 올려면 해결되는 문제인데 실제로는 최저연봉 인상에 매우 인색한 모습을 리그 창립부터 지금까지 보여주었다. 그러나 선수협의 고질적인 정치력및 일관적인 협회 운영 철학 부재 및 자가당착이란 말이 전혀 틀리지 않을 정도로 언론 플레이에서 보여주는 무능한 모습에 싸늘한 시선만 받는 것이 현실. 따라서 자업자득이라고 평가하는 이들도 있다.
한편으로는 제도가 어느 방향으로 바뀌던 가장 큰 피해를 보는 선수들은 무명 2군 선수들이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재활훈련을 금지시키면서까지 비활동기간을 준수하게끔 박충식 사무총장이 강하게 주장한 배경에는 2군선수들의 처우 문제도 있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2군 선수는 어차피 해외에 가지 못한다 고 선수협 관계자가 인터뷰한 것을 보면, 재활훈련도 구단은 이미 1군 선수들과 1.5군 선수들에게만 코치를 붙여서, 해외까지 내보내며 수행하던 중이었다. 재활이라는 본래의 기능을 상실하여 기량 향상을 위한 훈련이었다고 선수협이 판단할 근거는 충분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한화에서 주전명단이 대거 포함된 재활훈련 명단을 받아든 이후에 재활훈련 폐지를 선언한 것은 명백하게 선수들의 무기명투표를 통해 의결된 것임음 분명하다. 그러나 이에 대해 정말 명단이 문제가 있었는지에 대한 지적도 있다.
계약과 관련된 문제 이외에도, 재활훈련이 과연 선수의 재활에 필요한 것인가에 대한 의문도 제기되고 있다. 정말 재활이 필요한 선수들은 재활이 아닌, 의료시설에서 정해진 스케줄에 따라 세심한 관리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구단 트레이너가 아무리 전문가라 할지라도 부상정도가 심한 선수들은 트레이너의 역량 밖일 수 밖에 없다. 다른 예를 들면, 해외축구에서는 구단 트레이너의 역할과 구단 의료진의 재활치료가 확실하게 구분되어 있다. 반면 우리나라는 그런 분업이 삼성 라이온즈를 제외하고는 확실하게 이루어지지 않고 있기 때문에, 일정 수준 이상의 부상을 입은 선수는 회복하지 못하거나 원래의 기량을 잃어버리는 경우가 대다수이다. 그런 선수들이 병원에 입원하면 되는 문제가 아니냐는 병원만능주의 역시 등장하고 있는데, 4대보험이 적용되지 않는 상황에서 병원비를 모두 자비로 부담해야 하는 선수들의 입장을 생각해볼 때 이는 쉬운 문제가 아니다. 그나마 1군 주전급의 선수들은 구단의 배려를 받아 일본이나 미국 등에서 전문적인 재활치료를 받을 수 있지만, 신고선수나 2군 선수에게는 얄짤없다. 그리고 병원의 재활치료 과정과, 구단 의료진의 재활치료 과정, 트레이너의 관리작업은 해외의 경우 각각의 전문적인 인력을 양성하고 있다. 병원이 다가 아니라는 것. 모범사례로 바이에른 뮌헨이 있다.
선수협의 기자회견이 있은지 며칠후 넥센 히어로즈가 선수협의 결의안을 어긴 사실이 보기 좋게 발각되었다. 하지만 선수협 측은 강경한 입장을 전달했을 뿐 징계는 하지 않는다는 의견을 표명했다. 이미 이것만으로도 자가당착에 빠졌다는 비판을 피해가기가 어렵다. 박충식 사무총장의 발언을 되짚어 보면, 그는 인터뷰에서 "한화에서는 개인 운동이라고 하는데, 코칭스태프가 지켜보는 상황에서 어떻게 개인 운동이 되는가."라고 말했었으나, "넥센의 경우 선수들이 자발적으로 훈련을 했다. 코치들은 선수들의 요청에 조언을 해줬다고 한다"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박충식 사무총장은 거기에 더해 한화 이글스와 김성근 감독을 논란의 원인으로 지목하며 완전히 기름에 불을 붙이고 말았다. 박충식 사무총장의 인터뷰의 요지는 이번 비활동기간 활동금지 규정 위반 사태의 원인이 김성근 감독에게 있다는 것으로, 한화의 전 감독인 김응룡 감독도 취임했을 때 하려고 했으나 선수협의 입장을 듣고 뜻을 철회하는 등 그동안 잘 지켜지고 있던 규칙이 김성근 감독의 12월 해외 전지훈련 진행 시도와 비활동기간 활동금지 비판으로 인해 흔들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넥센의 경우 "규칙에 위반되는 행위를 한 것으로 드러나면 그에 맞는 조치를 취할 것이다"라고 했으나 뒤에 “어떻게 보면 넥센도 피해자가 될지도 모른다. 한화 김성근 감독이 정해놓은 규칙을 준수하지 않으려 하면서 이런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라는 말을 덧붙여 결국 이번 논란의 원인이 김성근 감독에게 있다는 것을 강조했다.
물론 박충식 사무총장의 다른 인터뷰를 보면, 김성근 감독은 마무리 훈련을 12월까지 연장하려고 했었다. 여기에 마무리 훈련을 마치고 돌아온 이후에 비시즌 훈련에 대한 반대의견을 야구계에 영향력이 매우 강한 김성근 감독이 낸 것을 보고 비시즌훈련의 근간이 흔들렸다고 선수협이 판단할 근거는 충분히 있었다. 게다가 이 문제가 김성근 감독과 무관하지도 않은 점을 고려한다면, 선수협의 예민한 반응은 이해할만 하다.
결국 선수들이 제대로 된 지위를 가지지 못하는 상황에서 발생한 현 야구계의 총체적인 시스템의 문제가 이번 비시즌 기간 훈련 문제를 통해 촉발된 것이다. 그러나 선수협은 문제의 총제적 원인인 구단들을 공격하지 않고 엉뚱한 사람을 타겟으로 잡는 병크를 저질렀다.
이것이 아니었으면 선수협의 행동은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것이다.
12월 19일, 선수협은 훈련 가이드라인을 다시 제시했다. 여기서도 중심이 되는 것은 재활선수의 훈련 참가 여부이다. 선수협은 기존의 재활선수 훈련 참가 금지 입장에서 크게 후퇴하였다.
신인선수, 군 제대 선수, 재활 선수, 신고 선수의 경우 구단이 단체 훈련을 할 수 있다. 단 재활 선수의 경우 수술을 했거나 지난 시즌(2014시즌)에 경기에 나서지 못했거나 앞으로 수술이 예정되어 있는 선수를 뜻한다.
말 그대로, 1군경기에 참여하지 못할 정도로 부상이 심각했던 선수에게만 재활훈련을 허용한다는 것이다. 박충식 사무총장은 이번에도 2군선수가 재활훈련에 참가하지 못하는 현실을 강조하였지만, 여전히 아무 죄 없는 한화 이글스와 김성근 감독이 재활훈련을 악용하려 했다는 태도를 고수하면서 악화된 여론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고 있다.
그러나 이 사건의 숨은 이유가 2016년 5월 11일 알려졌다. 선수협에 구원을 요청한건 바로 한화 선수였다
SK 시절과는 달리, 김 감독은 한화에서 선수단 장악에도 어려움을 겪고 있다. 김 감독은 과거부터 강도 높은 훈련을 체벌처럼 활용해서 자신의 권위를 세워 왔다. 한화 부임 직후에도 마무리훈련에서 주력 선수들을 초주검으로 만들면서 기선제압에 나섰다. 마무리훈련이 끝난 뒤에는 곧바로 대규모 국외 전지훈련을 계획했다. 비활동기간인 12월에도 휴식 없이 지옥훈련을 해야 하는 상황이 되자, 선수단에서 불만의 소리가 터져 나왔다. 결국 한화 최고참 선수가 총대를 메고 선수협에 구원 요청을 했다.선수협 사정을 잘 아는 한 관계자는 “선수협은 과거 김성근 감독의 SK 시절에도 비활동기간 준수 문제로 대립한 바 있다”며 다음과 같이 전했다. “김성근 감독이 리그에서 사라진 이후, 완벽하지는 않아도 어느 정도는 비활동기간이 정착되는 분위기였다. 그런데 김 감독 복귀와 함께 다시 비활동기간을 무시하고 대규모 팀 훈련을 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선수들이 거듭 문제 제기를 하자 선수협이 상황을 매우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당시 선수협이 이례적으로 김성근 감독과 강하게 대립각을 세운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김성근과 한화의잘못된만남
3.6.4 선수협이 기득권을 위한 단체이다???
비시즌단체훈련 관련해서 음모론 이 퍼졌다.
이 음모론의 구체적 내용들을 보면
1. 선수협은 기득권 스타 선수들이 구성하고있다.
2. 2군 선수 재활 선수들의 인권은 철저히 무시되는 기관이다.
3. 2군 선수 재활선수는 비시즌도 단체훈련하고 싶은데, 기득권층에서 그들의 기량이 좋아지면 자리를 빼앗길까 두려워서 비시즌에 훈련을 못하게 하는 목적으로 선수협의 여론을 강압적으로 조성하였다.
이 내용들은 쉽게 반박이 가능하다. 신인급 스타가 아닌 일정경력이상을 쌓은 스타급들이 간부를 하지 않으면 누가 할것인가? 그들이라고 다 하고 싶어서 하는게 아니다. 협회장만 해도 투표로 결정되며, 그 아래에 각 팀에서 1명씩 선수협 간부를 의무적으로 맡아야 하기 때문에 누군가가 그 자리에 앉아있는것이다. 스타급이 간부자리를 차지하는게 불만이면 2군들이 하면 될텐데 과연 하려고 할까? 팬들도 야구못해 2군에 있으면서 감투 쓰고 있다고 말할게 뻔한 상황. 선수협에서 1군, 2군 할것 없이 600여명의 선수가 모인 총회에서 처리한 안건이 비시즌단체훈련금지 조항 재확인이다. 프로야구 구단은 주전급 스타선수보다 비주전과 2군 선수가 압도적으로 많다. 1인 1표인데 이 안건이 총회에서 처리되었다는 것은 2군 선수들도 이에 동의한다는 뜻이 된다. 그런 사안을 제3자가 나서서 이번 결정은 선수협이 2군선수의 인권을 생각하지 않는걸 보여준다고 주장하는건 코미디다. 그리고 총회에서는 비밀투표를 통해 해당 안건을 처리하였다. 무슨 투표함을 빼돌렸다는 식의 구체적 정황이 있다면 모를까, 선수협의 저 결정에 특정 몇몇 스타들의 입김이 작용했다고 볼만한 근거는 하나도 없다. 그런데도 이런 근거 없이 무작정 음모론이 퍼진 것은 분명히 문제가 있다.
"여기가 최고인 것 같아요". 정근우(한화)는 괌에 들어설 새로운 야구장 부지를 보고 만족감을 드러냈다. 한국프로야구선수협회(이하 선수협)는 지난 2일 정기총회를 열고 괌 관광청과 양해각서(MOU)를 체결했다. 괌 관광 활성화와 한국 프로야구 선수들의 복지 향상이 주된 목적이다. 선수협의 서재응(KIA) 회장은 "이번 MOU를 통해 2~3군 선수들이 혜택을 누릴 수 있게 된 점이 가장 중요하다"고 했다. 서재응 회장과 이호준(NC)·박진만(SK) 이사, 정근우(한화)·김주찬(KIA) 등은 괌 관광청의 초청으로 지난 8일부터 괌 현지의 훈련 시설을 둘러봤다. 관련기사
실제로 충분치는 않지만, 선수협은 괌과 협력해서 적은 비용으로 괌에서 훈련할수 있게 노력을 했고, 저 기사에 나오는 선수협의 한화대표가 누구인지 유심히보라.
3.6.5 비시즌 단체훈련과 관련한 선수들의 인권 문제
결국 비시즌 단체훈련 논란이 커진것은 박충식 사무총장이 넥센과 한화 관련해서 대처과정에 공평치 못한 대응과 말실수를 한것에서 비롯되었다.
일부에서는 어떤 직장이 일년에 11개월만 일하고 1개월을 쉬느냐는 원색적 비난도 있다.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은 실제로 선수들이 어떤 식으로 시즌을 치르는지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것이다. 프로야구 선수는 민족의 양대 명절이라는 추석과 설날도 제대로 챙기지 못한다. 부인이 출산시에도 맘대로 가지 못하며, 부모가 위독할때 임종을 보지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시즌 중에도 마찬가지지만, 전지훈련시에는 더욱 자유가 없다. 더욱이 위에도 언급되는 부분이지만 비시즌 중에는 급료는 커녕 부상을 당해도 일체의 보상을 받지 못한다. 즉 프로야구선수는 1년내내 고용되어 일하는 정직원이 아니라 시즌중에만 계약되어 돈받고 일하는 계약직인 것이다. 돈도 못 받는데 나와서 자유시간도 없이 일하라면 어느 누가 그런 일을 하겠는가?
2015시즌 중에 롯데 손아섭 선수가 부친의 임종을 보지못할 뻔한 사건이 터지면서 롯데 코칭스텝의 선수인권 유린이야기가 나오지만, 실제로 손아섭이니까 불거진 것이지 대다수의 선수가 아예 말도 못하고 임종을 못보는 경우가 허다하다. 송은범 선수가 부모님이 이혼하고 막노동까지 하면서 자신을 키워준 조부의 발인식에 가고 싶었으나 당시 감독이었던 조범현 감독이 못하게해서 임종도 못보고 깊은 상처를 입었고, 김성근 감독은 2군 코치가 2군 경기 없는날 조부제사에 갔다왔다가 전쟁중에 장수가 어떻게 이탈을 하느냐며 심한 질책을 했던 사례도 있다.그리고 본인은 송창식을 벌투시키고 경기중에 아픈걸 핑계로 튀는 막장행위를 보여주었다. 더욱이 무명 선수의 경우는 아예 부모가 사망할때 전지훈련 기간이면 아예 알리지 않는것이 미담처럼 나오는 판이다.
저니맨 최익성 선수의 경우 시즌중에 경기장 근처 얻은 방에 빨래를 물에 불려놨다가 졸지에 트레이드 되는 바람에 몇달이 지나서야 다시 그 집에 가서 썩은 빨래를 치운 사례가 있다. 즉, 자기 자신을 돌볼 시간적 여유가 없다. 이렇듯 야구 이외의 사회적 존재로서의 "나"를 챙길 여유 따위는 없다. 비단 야구뿐만 아니라 프로 스포츠 선수들은 선수생활이 길어질수록 감옥 아닌 감옥 속에서 경기와 훈련만 하게 되고, 따라서 점점 더 사회, 심지어 친구, 가족과도 멀어진다.
물론 평생 야구란 직업으로만 먹고 살수 있고, 장가 잘가서 부인에게 통장에 충분한 돈만 넣어주면 나머지는 부인과 가족들이 알아서 해결주는 스타 플레이어들은 아무 문제가 없을수도 있다. 그런데 이런 스타가 야구판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거의 없다. 장윤정처럼 돈벌었더니 엉둥한 놈이 펑펑탕진하는 경우는 가족이 원수지만 1년동안 드래프트에 600명이 나오지만, 그 중 프로 구단의 지명을 받는 선수는 100명 남짓이다. 그리고 그 100명중에서 몇년 안에 대다수가 운동을 그만두게 된다. 즉, 그 드래프트에 나온 600명중에서 최대 10명 정도만이 선수로써 돈벌고, 나중에 코치나 해설가등으로 평생 야구만 보고 살아도 문제없는 경우가 되고 나머지는 대부분 야구말고 다른걸로 먹고살아야되는게 현실이다.
반면 최저연봉 2400만 원(2013년 기준)만 받고, 선수생활이 언제 끝날지도 알수없는 무명 선수와 비주전 선수에게는 사회와 잠시라도 소통할 수 있는 시간이 더욱 절실하다. 가족과 여행을 가거나, 오랜 친구와 술한잔하면서 인맥을 유지하는 등등의 소통을 할 수 있는 시기는 1년 중에 이 때밖에 없다. 아무리 친한 친구도 10년 안만나면 서로 할말이 없어진다.
최근에서야 학생 체육 선수들에 관한 제도가 바뀌어서, 중고교 선수들은 정규 수업을 반드시 듣고, 방과 후나 주말에만 훈련 및 경기 출전을 할 수 있다. 물론 야구와 학업을 병행해서 좋은 학자가 나온다면 더욱 좋겠지만, 우리는 그 선수들이 수능을 쳐서 명문대를 가는 것까지 바라진 않는다. 교실에서 야구부원이 아닌 친구들과의 생활도 해보고, 다른 아이들이 노는 것처럼 놀아봐야 기본적인 사회성과 인성을 함양할 수 있는 것이다.
실제로 이 제도를 시행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학생들이 운동만 하지 말고 사회에서도 참된 사람이 될 수 있게 가르치려는 것이다. 멀리 갈것도 없이 장성우, 그리고 프로게이머 출신 BJ들 중 노인성으로 꼽히는 염보성, 김정우, 김윤중만 봐도 사람이 되지 못하고 "운동하는 기계"가 되면 어떻게 되는지를 잘 알수 있다. 이에 대해 조범현 감독이 주전 포수를 전반기에 출전시키지 않는 리스크를 각오하고 남긴 명포수로는 못 만들어도, 된 사람으로는 만들겠다.는 말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해준다.[38]
3.6.5.1 운동에만 전념하면 과연 경제적으로 풍요로울까
한국에서는 운동선수에게 100% 운동에만 올인하고 운동으로 성공하는것 외에는 다른 모든걸 끊는 생활을 하도록 강요하는 경우가 많다. 만약 운동기계가 된다면 풍요로운 미래가 저절로 와줄까?
일단 이렇게 죽도록 운동에 매달려봤자 프로진출 자체가 무척 힘들다. 아주 일부의 학생 선수만이 프로에 진출하며, 프로진출한 선수의 대부분 역시 선수생활 이후의 대책은 없는게 현실이다.
필자는 우선, 우리나라와 다른 나라 운동선수들이 대학을 졸업한 후 얼마나 프로에 들어가는지를 알아보았다. 예상했던 대로 심각했다. 우리나라의 경우 10명 중 한 명만이 프로의 문을 통과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미국의 경우는 상상을 초월했다. 미국 대학(NCAA) 디비전I 소속 대학 출신 가운데 남자농구의 경우 1.2%만이 프로 입문에 성공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여자농구는 1.9%.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 미식축구는 1.6%에 불과했다. 축구는 1.9%였으며 아이스하키의 경우 불과 0.8%였다. 야구는 9.4%로 그나마 좀 나은 편이었다, 그러니까, 전체적으로 볼 때, 대학교에서 운동선수로 뛰었던 선수가 프로에 입단할 수 있는 확률은 불과 2%라는 것이다. 98%는 다른 길을 찾아야 한다.미국 선수들은 대학 후 진로에 대해 그리 크게 걱정하지 않는다는 점이 우리나라와 다르다. 이들은 대학에 입학하면서 ‘제2의 플랜’을 미리 마련해 놓는다. 프로에 들어가지 못해도 자신의 전공과 관련된 직업을 찾기 위해서다. 그래서 대학 4년 동안 공부와 운동을 병행한다. 결국, 졸업과 동시에 이들은 일반 학생들에 뒤지지 않는 경쟁력을 갖추게 되는 것이다.
(중략)...이렇듯 운동선수들이 비록 프로 진출에 실패했다 해도 다른 직업을 쉽게 구할 수 있는 것은, 미국 대학들이 실시하고 있는 ‘운동선수들에 대한 특별 프로그램’ 덕분이다. 운동 선수일지라도 학점이 4.0 만점에 2.0이 되지 않을 경우, 운동을 하지 못하도록 못을 박아놓고 있는 것이다. 또 운동과 공부를 병행하기가 쉽지 않다는 현실을 인정하기에 이들 대학은 1대1 과외와 같은 프로그램을 실시하여 운동선수들의 학업을 돕고 있다.
....(중략)...그러나 한국의 현실은 너무나 비참하다. 대학을 졸업해도 영어로 입국 신고서를 작성하지 못하는 운동선수들이 부지기수다. 자연히 이들은 프로에 들어가지 못하면, 달리 취업할 방법이 없다. 그나마 메달리스트가 아니면 체육 관련 기관에도 취업할 수도 없다. 설사 운이 좋아 프로에 들어간다 해도 경쟁에서 살아남기가 쉽지 않다.
프로에 입단했지만, 불미스러운 일로 중도 하차한 선수들의 그 후 생활상을 접하다 보면 안타까운 사연을 목도하는 경우도 있다. 프로농구 A 선수는 실력도 출중하여 팬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그러나 좋지 않은 일에 휘말려 중도에 은퇴할 수밖에 없었다. 은퇴 후 그는 마땅한 일을 할 수 없었다. 결국 또 다른 불미스러운 일에 연루되고 말았다. 운동선수들이여, 인생의 '플랜 B'에도 충실하라
미국같이 학업과 운동을 겸할 경우 프로운동 선수로 성공하지 못해도 플랜B를 가지고 인생을 살아가지만, 한국처럼 엘리트 스포츠에서 운동에만 올인하면 그것이 불가능하다.
그럼 만약 일부 프로스포츠에서 크게 성공하고 경제적으로 부유해진 선수는 인생이 계속 풍요로울까?
‘프로는 돈’이라는 공식으로 통하는 프로스포츠 세계에서 큰 부를 획득한 선수들이 운동 선수 이후 파산하는 이유는 이러한 심리적 요인을 들어 설명이 가능하다.미국도 스포츠 스타들이 은퇴이후 사업에 뛰어들거나 돈 관리를 제대로 못해 파산하는 경우가 많다. 2009년 3월 미국 스포츠 주간지 스포츠일러스트레이티드지는 ‘운동선수들이 파산하는 이유’라는 특집기사에서 불경기이건 불경기가 아니건 간에 많은 NFL, NBA, MLB 선수들이 재산을 탕진해 선수들이 얼마나 많이 버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관리하는 것이 더 중요할 수 있다고 보도했다. 이 잡지는 NFL 선수들 가운데 78%가 은퇴이후 2년 안에 파산하거나 심각한 재정위기를 겪고 있으며 NBA 선수들 중 60%가 은퇴 후 5년 안에 비슷하게 재정적인 어려움을 당한다고 밝혔다. 운동선수들이 파산하는 이유
한국이 아닌 미국이 운동선수의 플랜B가 더 많은것도 사실이고, NBA나 NFL같은 경우 일단 선수로 뛰기만 해도 최소 수십억에서 수천억의 거액을 벌수 있는데도 이게 현실이다. 결론은 미국도 운동선수가 은퇴하자 얼마 안되서 파산하는 경우가 다수이다. 특히 젊은시절 돈을 엄청나게 벌어도 순식간에 재산을 탕진하는 경우가 많다.
사람이 경제적으로 실패하는 데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지만, 스포츠 선수들의 경우에는 운동에만 집중해서 공부를 안하고, 사회를 모를수록 인생이 파탄날 확률이 높다. 여기에는 NBA가 얼리 엔트리(early entry) 제도를 도입하여 고졸선수를 빠르게 프로구단에 입단시키는 일이 늘어난 것도 큰 원인이다. 그 결과 아직 인성이 덜 발달했고 사회경험이 없는 어린 선수가 프로에서 좌절하고 방황하거나, 성공하였더라도 무절제한 생활을 통해서 망가지고 은퇴 이후 경제적으로 금방 파산하는 식의 경우가 더욱 늘어났다. 대학에 진학한 운동선수들은 학교에서 선수들이 운동뿐 아니라 사회적 경쟁력을 가진 인간이 되도록 지원해 주지만, 그 과정을 거치지 않은 고졸 선수들은 상대적으로 더욱 사회에 안착하기 힘든 것이다.
거물들 중에서도 은퇴이후 몰락하는 경우가 굉장히 많다. 최근에도 앨런 아이버슨, 커트 실링 등 거물들이 잇따라 파산을 했으며, 한국의 스타 박종팔, 김재엽, 현주엽 등도 경제적으로 몰락했다. 심지어, 이호성은 사업실패로 수십억의 빚을 지고 내연녀 가족을 살해하는 짓까지 저지르고 자살했다. 그 이외에 셀수도 없는 선수들이 경제적으로 급락했다. 커트 실링이야 사업실패가 원인이지만, 앨런 아이버슨이나 타이슨 등은 무절제한 생활과 낭비 등이 주원인이다. 야오밍, 매직존슨, 서장훈, 강호동처럼 은퇴이후 더욱 성공적으로 인생을 살고 재산도 많이 늘어나는 상황은 아주 일부의 예일뿐이다. 물론 은퇴이후 더욱 성공적인 인생을 사는 경우는 일반적으로 대인관계나 사회성 등이 좋은 경우가 많다는 공통점이 있다.
요약하면 이렇다.
* 일반적으로 운동을 해서 프로에 진출하는 경우는 아주 드물고, 프로진출이후에도 경제적으로 성공할 가능성은 생각보다 낮다.
- 특히 운동에만 올인하는 한국의 경우 운동으로 경제적 풍요를 잡지 못하는 대부분의 운동선수는 운동이외의 다른 것으로 평생 재테크를 해야하는데, 운동 이외에 다른 사회생활을 모르기 때문에 적응이 쉽지 않은 경우가 많다. 결국,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힘든처지가 될 가능성이 높다
- 젊은 시절 경제적으로 성공한 프로 선수가 은퇴 이후 그 경제적 성공을 유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 그 이유는 사회성 부족이 크다.
- 대부분의 운동선수는 결국 운동이 아닌 다른 것으로 평생 먹고 살아야하는데 운동에만 올인한 경우 사회성이 부족해서 나락에 빠질 가능성이 더 높고, 운동해서 돈을 많이 번 아주 일부의 경우도 그 부를 유지하거나 다른 분야에서 성공적으로 살아가려면 사회성과 인성이 상당히 중요하다.
4 역대 집행부
- 1기
- - 선수협회장 : 초대 송진우(한화)
- - 사무국장 : 차영태
- - 초대대변인 : 강병규(SK)
- - 선수부회장 : 박정태(롯데), 양준혁(LG), 최태원(SK)
- - 감사 : 김재현(LG), 마해영(롯데)
- 2기
- - 선수협회장 : 초대 송진우(한화)
- - 사무국장 : 차영태
- - 선수부회장 : 마해영(롯데), 양준혁(LG)
- - 이사 : 박충식(해태), 심정수(현대), 최태원(SK)
- - 감사 : 박정태(롯데)
- 3기
- - 선수협회장 : 2대 이호성(KIA)
- - 사무국장 : 나진균
- - 선수부회장 : 양용모(SK), 장종훈(한화)
- - 이사 : 강상수(롯데), 김정민(LG), 김태균(삼성), 안경현(두산)
- - 감사 : 김인호(현대)
- 4기
- 5기
- - 간사 : 김한수(삼성)
- - 사무국장 : 나진균
- - 선수회장 : 김기태(SK)[39], 김민호(두산), 박현승(롯데), 유지현(LG), 이숭용(현대), 이종범(KIA), 임수민(한화)
- 6기
- 7기
- - 선수협회장 : 3대 김동수(현대)
- - 사무총장 : 나진균
- - 선수회장 : 강성우(SK), 김동주(두산), 김종국(KIA), 염종석(롯데), 이도형(한화), 조인성(LG), 진갑용(삼성)
- 8기
- - 선수협회장 : 4대 이종범(KIA)
- - 사무총장 : 나진균
- - 선수회장 : 김재현(SK), 서용빈(LG), 손인호(롯데), 이도형(한화), 이숭용(현대), 진갑용(삼성), 홍성흔(두산)
- 9기
- - 선수협회장 : 4대 이종범(KIA)
- - 사무총장 : 나진균
- - 회장 : 권오준(삼성), 김원형(SK), 이도형(한화), 이정훈(롯데), 이종열(LG), 장성호(KIA), 정재훈(두산), 조용준(현대)
- 10기
- - 선수협회장 : 5대 손민한(롯데)
- - 사무총장 : 나진균 → 권시형<직무대행>
- - 회장 : 권오준(삼성), 이도형(한화), 이정훈(롯데), 이종열(LG), 이종욱(두산), 이호준(SK), 장성호(KIA), 조용준(우리)
- 11기
- - 선수협회장 : 5대 손민한(롯데)
- - 사무총장 : 권시형
- - 회장 : 강병식(히어로즈), 김상훈(KIA), 김재현(SK), 배영수(삼성), 이범호(한화), 이정훈(롯데), 이종욱(두산), 조인성(LG)
- 12기
- - 선수협회장 : 6대 손민한(롯데)
- - 사무총장 : 권시형
- - 회장 : 강봉규(삼성), 김상훈(KIA), 김선우(두산), 김일경(넥센), 박용택(LG), 박정권(SK), 이정민(롯데), 최영필(한화)
- 13기
- - 선수협회장 : 6대 손민한(롯데)
- - 사무총장 : 권시형
- - 회장 : 김상훈(KIA), 김일경(넥센), 류현진(한화), 박용택(LG), 박정권(SK), 송승준(롯데), 이혜천(두산), 현재윤(삼성)
- 14기
- - 선수협회장 : 7대 박재홍(SK)
- - 사무총장 : 박충식
- - 사무국장 : 김선웅
- - 이사 : 김동건(NC), 박명환(LG), 송승준(롯데), 이택근(넥센), 이혜천(두산), 장원삼(삼성), 정근우(SK), 정원석(한화), 차일목(KIA)
- 15기
- - 선수협회장 : 8대 서재응(KIA)
- - 사무총장 : 박충식
- - 사무국장 : 김선웅
- - 이사 : 김상훈(KIA), 김태균(한화), 박준서(롯데), 박희수(SK), 손승락(넥센), 이진영(LG), 이호준(NC), 임재철(두산), 장원삼(삼성)
- 16기
- - 선수협회장 : 8대 서재응(KIA)
- - 사무총장 : 박충식
- - 사무국장 : 나진균(전 선수협 3 ~ 10기 사무총장)
- - 이사 : 이범호(KIA), 고동진(한화), 박준서(롯데), 박진만(SK), 이택근(넥센), 이진영(LG), 이호준(NC), 홍성흔(두산), 최형우(삼성)
- 17기
- - 선수협회장 : 9대 이호준(NC)
- - 사무총장 :
박충식(사임) - - 사무국장 : 김선웅(변호사)
- - 이사 : 박한이(삼성), 이종욱(NC), 홍성흔(두산), 윤석민(넥센), 김강민(SK), 정근우(한화), 이범호(KIA), 최준석(롯데), 류제국(LG), 박경수(kt)
5 플레이어스 초이스 어워드
2013년 부터 수상하고 있다. 자세한 것은 플레이어스 초이스 어워드 항목 참조.- ↑ 4대 사무총장이던 박충식 사무총장이 2016 프로야구 승부조작 사건이 터진 책임을 지고 2016년 8월 11일에 사임했다.
- ↑ 그나마 구본능 총재 체제에서는 일단 협력의 제스쳐가 나오고 있다. 외인 문제나 기타 문제들도 일단'은' 선수협과 협의를 통해 진행한다.
- ↑ 프로야구선수는 연예인과 마찬가지로 소득세법상 개인사업자로 분류된다. 구단들이 연봉 지급 기준을 12개월이 아니라 10개월로 잡은 이유가 바로 이때문. 노동자로 분류되지 않도록 편법을 쓴것이다.
- ↑ 예를 들어 "실력이 뛰어나니 그 정도 성적을 올리는 건 당연한 거 아니냐.", "우리가 말이 프로지 아직 세미프로 수준이지 않냐." 등. 심지어는 연봉을 못 올려주겠다고 대놓고 협박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특히 오늘날의 넥센 히어로즈만큼이나 자금 사정이 열악했던 해태 타이거즈의 경우 부라보콘 드립까지 나올 정도로(...) 상황이 심각했다.
- ↑ 이런 경향은 최근에도 남아 있다.
- ↑ 최익성은 FA 보상선수가 되어서 LG로 가버렸다.
- ↑ 강병규는 이후의 행보 때문에 그 진실성을 의심하는 사람들도 있으나, 초기에 선수협 대변인으로 활발하게 활동한 것은 부인할 수 없다.
- ↑ 그러나 그는, 선수협 사태 합의 과정에서 작용한 구단측의 의향으로 3대 선수협 회장으로 선출되고, 그 이후 그가 선수협 회장을 하는 기간 동안의 선수협은 '어용'이라는 비난을 사게 된다. 그리고 재임기간도 길지 못했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 참조.
- ↑ 사실
칰무원조경택도 초반엔 이들 못지않은 대활약을 했다. 그러나 김경기가 전준호 폭행을 하는가하면, 이호성이 사회주의자 드립을 치는바람에 곧 잊혀졌다. 김태형(2015시즌 두산 감독 맞다!)은 당시 네임밸류가 5적 중 가장 떨어졌는지 조경택보다도 묻혔다...듣도보동 - ↑ 유지현의 아버지가 엘지가 하청을 맡기던 회사의 높은 자리에 있어서 그랬다는 말도 있다.
- ↑ 당시 LG에서는 베테랑 김기범과 주장인 송유석이 주가 되어 선수협에 참여하였다. 결국 송유석은 FA 신청 + 선수협 때문에 제대로 찍혔고 헐값 FA로 한화로 이적한다.
- ↑ 정치인으로서의 김한길은 좋은 평을 받지 못하나, 저 일은 잘했다는 것이 중론이다.
- ↑ 당장 칰무원의 상징인 조경택만 봐도 한화에서 공무원으로 오래 살았으며 김기태도 이승엽과의 계약조건에 맞춰 삼성의 제안을 받아 요미우리에 코치로 파견되었다. 그러다가 LG를 거쳐서 KIA의 감독이 되었다. 또한 김태형도 친정팀인 두산에서 오랫동안 코치를 했으며 2015년 감독 자리에 올라 우승시키기도 했다. 김경기의 경우가 예외(?)인데 김경기는 이숭용과 용병에게 기량에서 밀렸고 결국 자진해서 연고 이전한 옛 고향 연고팀을 떠나서 새로 창단된 고향 연고팀으로 가서 2002년에 은퇴해서 코치를 하고 있다.
- ↑ 김응용 감독은 우승 청부사로 삼성에 영입된 감독. 그가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들어주는것이 그 당시 삼성 방침이었다. 게다가 김응용이 삼성그룹 이학수 부회장의 고교선배로 삼성 구단 사장도 정말 선배처럼 예우해 줬다.
- ↑ http://sports.media.daum.net/sports/baseball/newsview?newsId=20100730203420591 김 감독은 "양준혁은 효자다. 기본적으로 착하다. 2001시즌이 끝나고 FA로 풀렸는데, 당시 선수협 문제가 있었다. LG 구단에게 '양준혁은 충분히 제 역할을 한다. 기본적으로 착한 아이다. 내가 책임질테니 LG에서 꼭 계약을 했으면 좋겠다'고 요청했는데, 결국 LG에서 잡지 못하고 삼성으로 갔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 ↑ 특히 2009년 KIA 타이거즈 우승 이후. 이 때부터 야갤이 정사갤의 멀티로 완전히 전락하였다.
- ↑ 후에 두산 그룹 경영문제로 인해 동생들에 의해 축출되고 자신 몫으로 돌아온 성지건설의 운영을 비관하여 자살한다.
- ↑ 여담으로 위에서 언급된 박용오와 이호성등 선수협 반대 인사 상당수가 우연의 일치인지 불행한 최후를 맞게된다.
인과응보. 결국 정의는 승리한다. - ↑ 선수협 반대파 대표선수 중 하나인 김경기도 이 때 SK로 트레이드되었으나 이는 자신이 자원하기도 했고 당시 신생팀이었던 SK 측에서도 흔쾌히 승락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 ↑ 그 여파로 FA협상에서 구단 눈 밖에 나서 재계약에 실패해 사인 앤 트레이드로 이적했다.
- ↑ 강병규,송유석,최익성과 더불어 비교적 일찍 트레이드된 경우이다.
- ↑ 이것은 보복이 아니라 김응용 감독이 해태에 오면 1년후 트레이드해주겠다는 약속을 지킨 것 뿐이다. 손혁은 해태에는 안 간다고 트레이드 거부를 했으나, 후에 팀에 합류하였다.
- ↑ 마해영과 심정수, 이 두 트레이드는 한국프로야구 역사에 남을 뻘트레이드가 되었다. 다만 두산도 단 1시즌이긴 하지만 심재학이 2001년 우승의 주역이었던지라...
- ↑ 김응룡이 양준혁 재영입을 원햇으나 엘지가 임창용, 노장진 원해서 결렬
- ↑ 중심타자 둘을 받아오는 트레이드였지만, 팀의 기둥마무리+선발투수를 내주는건 모험에 가깝다. 특히 김응용 입장에선, 중무리 투수인 임창용을 내주고 양준혁을 받아왔지만 마무리 부재에 시달린 적이 있었기에 거절했다.
- ↑ 이 기사에서 볼 수 있듯이 실시될 뻔했지만, 실패했고 송진우는 그 뒤 FA계약에서 금액차이가 컸지만, 한화와 삼성중 한화를 선택해 다시 구단과의 관계가 어느정도 회복되었다.
- ↑ 기존 연봉은 무조건 100% 이상 인상이 불가능했다.
- ↑ 당시 초상권과 같은 선수협 수입이 없었기 때문에, 1군 선수들의 연봉에서 10%를 갹출하고, 구단들이 만든 기금으로 이를 마련했다.
- ↑ 그리고 이호성은 선수협 회장 1년만에 강제로 은퇴하였고 그 뒤로 사업가로 성공한 뒤...
- ↑ 사실 이종범 입장에선 당시 국내복귀 첫 시즌이란걸 감안하면 나서봐야 오히려 구단내의 입지가 큰 편은 아니여서 나서지 않는게 더 나은 상황이었다. 그리고 유지현은, 구단측의 징계성 트레이드에 반발하여, 선수협에 가입했지만, 구단의 눈치가 보였던건 사실이다.
- ↑ 이미 그 전해에 회장직을 다시 만들고 김동수가 회장이 되었다. 다만, 이때의 회장은 기존의 간사명칭을 회장으로 바꾼 것에 지나지 않았다.
- ↑ 본업이 정치인인지라 항목이 없다. 2000년에는 민주당 내에서 요직을 차지하고 있었다.
- ↑
천하의 #망나니존 로커 같은 민감한 인종차별 발언을 한 경우에도(...) - ↑ 이도형은 결국 본인이 은퇴를 감수를 해가며
개크보KBO의 FA 계약의 보상규정 및 계약제한기간 규정의 효력정지 가처분 신청 소송을 벌였고, 결국 승소판결을 받았다. - ↑ 김상현은 처음에는 참여하였으나 1월 3일 임시총회에 불참하였고, KIA의 주장인 차일목은 이들이 발표한 보도자료에 선수단이 동의한 적이 없음을 밝혔다.
- ↑ 현재윤 삼성대표가 양준혁을 후보로 올렸으나, 정작 자기도 양준혁을 안뽑았다.
- ↑ 다만 이 부분에 있어 김성근 감독을 지적한 것이 또 애매한 문제가 된다. 이번 한화 이글스 전지훈련 명단은 밝혀진 바가 없어 알기 어렵지만, SK 와이번스 시절 김성근 감독의 전지 훈련은 보통 50-60명에 달하는 인원이 이동하였고, 2군 선수들의 훈련이 중요하다는 김성근 감독의 신념에 따라 1.5군을 넘어 2군 선수도 다수가 포함되었다. 심지어 이 과정에서 드는 비용 문제는 김성근 감독 경질건의 중요한 요소 중 하나로 작용하였다.
- ↑ 참고로 조범현 감독은 KT 구단에서 장성우에 대한 징계 수위를 결정하는 회의에 직접 참석하였고, 구단의 결정을 존중한다는 의사를 밝혔다.
- ↑ 선수협 안하겠다고 깽판친 런동님이 선수회장을 맡은 것이 상당히 의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