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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2월 3일 (금) 05:13 기준 최신판
{{틀:센트럴 리그}}
180px | |
팀 엠블럼 | 마스코트[1] 토라키(トラッキー)[2], 키타(キー太)[3], 럭키(ラッキー)[4] |
한신 타이거스 | |
Hanshin Tigers タイガース | |
구단 법인명 | ㈜한신 타이거스 (株式会社阪神タイガース) |
창단 | 1935년 12월 10일 |
연고지 | 효고 현 니시노미야 시 |
구단 연고지 변천 | 오사카 부(1935~1960) 효고 현 (1961~2004, 2008~) 효고 현 & 오사카 부 (2005~2007) |
구단명 변천 | 오사카 타이거스 (1935~1939) 한신군 (1940~1946) 오사카 타이거스 (1947~1960) 한신 타이거스 (1961~) |
홈 구장 | 한신 고시엔 구장 (1935~) 교세라 돔 오사카 (코시엔 기간 중) |
2군 구장 | 한신나루오하마 구장 (1995~) |
모기업 | 한신 전기철도 |
감독 | 가네모토 도모아키 (金本 知憲) |
킷 스폰서 | 미즈노 |
일본시리즈 우승 (1회) | 1985 |
센트럴리그 우승 (5회) | 1962, 1964, 1985, 2003, 2005 |
센트럴리그 클라이맥스 시리즈 우승 (1회) | 2014 |
일본야구연맹 리그 우승[5] (4회) | 1937 추계, 1938 추계, 1944, 1947 |
공식 홈페이지 |
1985년 일본시리즈 우승 팀 | ||||
히로시마 도요 카프(1984) | → | 한신 타이거스 | → | 세이부 라이온즈(1986) |
목차
1 개요
일본프로야구 칸사이권을 대표하는 센트럴리그의 인기 프로야구팀. 연고지는 일본 한신[6] 효고 현 니시노미야 시[7]/오사카 시[8]. 홈 구장은 한신 고시엔 구장. 구장 위치가 효고현 동쪽 끝[9], 그러니까 오사카부와 효고현의 경계쪽에 있어서 사실상 칸사이 지방의 대표구단적인 존재이며, 일본인들조차 오사카(大阪)에 있다고 생각하는 게 보통이다. 타이거스 보려다 버팔로스 보겠다. 고시엔 구장이 오사카에 있다는 말을 듣고 화내면 효고 사람이라는 농담이 있을 정도다. 대충 오사카에서 고베 가는 길에 있다고 보면 된다.
팀의 상징은 호랑이. 팀 컬러는 옐로우.[10] 그리고 홈 유니폼의 버티컬 스트라이프(세로줄무늬). 모기업은 이 팀 덕분에 먹고 사는 한신 전기철도다.
주니치 드래곤즈, 요미우리 자이언츠와 함께 프로야구 출범 시절부터 계속 이어진 뼈대 깊은 야구단이다. 또한 둘과 달리 지역명칭을 팀명에서 제외하지 않고 있다. 사실은 모기업 네이밍 센스 때문에 그런 거지만
2 구단 명칭
영문 표기는 HANSHIN Tigers로 해태/기아 타이거즈 때문에 한신 타이거즈로 부르는 사람이 많지만,[11] 구단 정식명은 어디까지나 탁점을 붙이지 않은 阪神タイガース이다. 물론 일본어 표기 때문에 한국어로도 한신 타이거스로 적어야 하는 건 아니다. 물론 한신 타이거스 측에서 원한다면 그렇게 적어주는 게 좋겠지만, 공식적으로 그런 요청이 들어온 것이 아닌 이상 딱히 강요할 필요는 없다. 한국의 프로야구 팀의 '스' '즈' 표기도 일본어로 일관성 있게 옮겨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 단, 현지 한신 아재 앞에서 타이거즈로 발음했다가는 죽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우리도 '-s'는 '-스'로 적어야 맞는데?? 그리고 일본어 단어의 어원이 되는 영어만 생각해서 타이거스냐 타이거즈냐 따지지 일본어대로 하면 둘 다 아니다. '다이가스'다.
구단 이름에 걸맞게, WWF 일본지부와 협력하여 호랑이, 표범을 비롯한 고양이과 동물 보호 운동을 하고 있다. 실제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후손이자 WWF 일본지부 회장인 도쿠가와 츠네나리도 한신 팬. 그런데 가족들은 요미우리 팬이라고 한다 링크
3 홈구장
홈구장은 효고 현 니시노미야시[12]에 위치한 한신 고시엔 구장(阪神甲子園球場). 1924년에 지어진 야구장으로 한신 타이거스의 홈구장임과 동시에 고교야구의 성지라고 불리운다[13]. 이 때문에 철저한 개보수를 하고 있어 연식에 비해 매우 아름다운 경관을 볼 수 있다. 참고로 구장 내부도 구장 외부 못지 않게 고급스러우며, 내부는 리모델링 공사를 거치며 최근에 지어진 구장 저리 가라 할 정도의 최신 시설을 갖추고 있다. 일본고딩들 침 흘리게 만든다
여담으로 홈구장의 이런 특성으로 인해 3월 말과 8월 중순에 일본 고교야구 전국대회를 치르기 위해 지옥의 원정을 다니기도 한다. 3월의 경우는 아직 개막전이라 큰 지장이 없지만 가끔 프로야구 개막전과 일정이 겹쳐서 개막전을 원정경기로 치르는 경우도 있으며, 8월에도 프로야구 시즌은 계속되기 때문에, 한신 타이거스는 가장 더운 8월초 중순의 약 3주일에 가까운 기간동안 원정경기만 다니는 일명 '죽음의 원정(死のロード)'을 치뤘었으나, 오사카 왕따 오릭스 버팔로즈에게 쿄세라돔을 빌려서 홈경기를 하기 시작한 때부터 죽음의 원정까지는 안 한다.[14]덥고 습하고 비도 많이 오는 8월의 교시엔구장보다는 에어컨 나오는 교세라돔이 더 낫지 않을까? 그리고 성적 저하가 죽음의 원정 탓이 아니라는 것이 밝혀졌다(...).
농담으로 도쿄에 있는 메이지진구 구장도 한신 홈구장이라는 이야기가 있는데Here is another Koshien Stadium!, [15] 팬수가 많아서 보다는 야쿠르트 홈구장에 가서 야쿠르트는 안 까고 요미우리를 까기 때문(…). 한신-야쿠르트 전에서는 한신 팬들이 야쿠르트 공식 응원가인 도쿄온도(東京音頭)에서 야쿠르트 팬들이 외치는 '죽어라 요미우리'[16] 부분을 더 크게 따라 부르는 경우가 종종 벌어지기도 한다.
한신-오릭스 전에서의 오사카 교세라돔도 'Here is another Koshien Stadium'을 외칠만큼 한신팬수가 압도적이다.그나마 홈구단인 오릭스 굿즈 매장이 먼저 들어왔다는 게 위안거리
4 유니폼
한신 타이거스/유니폼 항목 참조.
5 인기
요미우리 자이언츠와 함께 일본 프로야구 구단 중 가장 많은 팬 수를 보유한 팀 중 하나.
칸사이권에서 한신의 인기를 보여주는 짤.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17] 먹이사슬을 잘 알수 있게 되는 짤이라 카더라 21세기 신생아와 더불어 1번만 일본시리즈 우승한 팀 VS 現 일본 프로야구 단 중 제일 일본시리즈 우승 많이 한 팀
흔한 칸사이의 요미우리 취급.jpg[18]
미디어의 발달로 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TV에서 볼 수 있는 팀이 요미우리 뿐이라 요미우리 팬이 됐던 사람들이 다른 팀으로 옮겨가서 요미우리 팬의 숫자가 줄어든 영향도 있고. 그리고 칸사이 지역의 팀은 1980년대까지 4개였으나 현재는 2개로 줄어들면서 상대적으로 인기가 높았던 한신에 인기가 집중되게 된 탓도 있다. 인기는 엄청 좋은데 성적이 시원치 않다는 점은 비밀이다. 인기는 성적순이 아니라는걸 증명해주는 구단.[19]
인기가 많은 만큼 극성팬이 많다. 팀 선수가 특정 경기에서 활약하면 거의 찬양하다시피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며 애정을 쏟아붓는 반면에 못하면 간판 선수고 뭐고 상관 없이 전범 취급을 하며 가루가 되도록 까는 것이 한신 팬들의 모토. 그 임팩트가 크면 클수록 더더욱 까인다. 그래서 2014년 일본시리즈 5차전 시합이 끝난 뒤 팀 내 인기 선수 중 하나인 니시오카 츠요시가 신명나게 까이고 또 까였다. 그 전 날엔 이 분이(...) [20] 그리고 이 날 시합은 소프트뱅크가 일본시리즈 우승을 확신하던 시합이었던 만큼 한신팬들의 분노가 절정으로 치솟아 있던 상태였던지라 후쿠오카 야후 옥션 돔 외야 쪽엔 분노로 가득찬 한신 팬들이 집어던진 것으로 추정 되는 아니 확신 되는 무수의 한신 응원도구들이 쫙 깔려 있기도 했다.
특히 상황에 따라 호불호가 갈릴 수 밖에 없는 마무리투수라는 포지션 같은 경우, 오승환으로 예를 들자면 조금이라도 불안한 모습을 보여주면 한신팬들은 트위터나 2ch 실황 중계에서 기다렸다는듯 후지카와 큐지 데리고 와라, 오승환 죽어라ww 등의 욕으로 도배 되고 한신-교진전과 같은 중요경기에서 일이 터지면(?) 거의 반년이 넘도록 우려먹어지는데[21] 그 다음 날, 곧바로 퍼펙트 피칭으로 지난 경기를 만회하는 피칭을 보여주면 하루만에 태세전환을 하면서 역시 한신 수호신은 승환이야, 승환 대단해라며 언제 그랬냐는듯 태도를 바꿔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는 것이 이들에게 있어서 흔한 일상이다. 근데 이렇게 써놓고보니 삼갤러들의 오승환 취급과 조금도 다를바가 없다는게 함정[22]
한국의 롯데 자이언츠와 자주 비교 대상이 되는 센트럴 리그 대표.[23] 훌리건급의 열광적인 팬들이라 쓰고 전투종족이라 읽는다을 가진 구단으로 유명하다. 거기다가 해야갤에서도 꼴신으로 불린다. 거기다 지역밀착형이라 칸사이 지방 사람들의 절대적인 지지와 사랑을 받고 있는 구단[24]. 이 반작용으로 성적만 안 좋으면 언론에서 가루도 안 남을 정도로 까이고 또 까이며, 뭇 칸사이인들의 술안주가 된다. 오릭스는 잘 하든 못 하든 관심이 없다. 정말 한국의 롯데 자이언츠 그 자체(…). 오죽하면 칸사이 지방을 빗대서 한신국(阪神国)이라는 소리까지 나온다. 오오 아시아의 보스턴[25]
어느 정도냐 하면 팀 성적이 바닥을 긁던 1990년대 말에도 "관중석에 빈 자리가 좀 보이더라" 레벨이었고[26] 팀 성적이 좋아진 2000년대에는 원정 서포터즈석을 제외하면 사실상 무조건 만원이었다. 하지만 팀성적이 바닥을 헤메던 1980년대 중후반~1990년대 중후반에는 관중 동원력도 떨어져 그 넓은 고시엔 구장의 절반가량을 공기로 채우고 경기를 했다고 한다. 그래도 1992년처럼 잠깐 반등한다 싶으면 금새 다시 꽉 찼다. 츤데레 그 당시를 기억하는 올드팬들로부터는 "그때는 아무 때나 가도 표가 있었는데 요새는 팀이 성적이 좋아지니까 표 구하기가 힘들어졌다."면서 배부른 푸념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물론 창원 마산 종합운동장 야구장처럼 외야가 널럴해도 삼겹살은 못 구워먹는다.
한신 타이거스 팬 자격시험을 돈을 받고 보기도 하며, 예상 문제집을 만들어서 팔기까지 한다. NPB 구단 중 유일하게 특정 팀만을 위한 게임으로 제작되기도 했다. 이름하여 '한신 타이거스 DS'라고…. 흠좀무.
때문에 우승 한 번 했다 치면 칸사이가 난리가 난다. 2003년에 센트럴리그 우승을 했을 당시에는 오버좀 섞어서 전 도시가 세로줄무늬(한신 유니폼)로 칠해졌었으며, 우승 기념으로 출시된 세로줄무늬에 한신 엠블렘이 박혀있는 한신 우승 기념 게임큐브 한정판#[27]이 순식간에 매진되었다고 한다. 참고로 게임큐브의 제작사인 닌텐도의 본사가 칸사이 지방인 교토에 위치하고 있어서 만들어진 한정판. 사실 이 한정판은 당시 닌텐도 사장이었던 야마우치 히로시 사장이 올해 한신 우승하면 게임큐브 한정판 제작하겠습니다.라는 말을 했던 것에 대한 실제 제품에 해당된다[28].
5.1 팬덤
어지간한 야덕이 아니라면 오사카 및 칸사이 지역에 가서 절대로 한신 이야기를 하지 말 것. 괜히 얘기 꺼냈다가 밤새도록 한신 얘기를 지겨울 정도로 듣게 될 수도 있다(...) 더군다나 "외국인"이 한신 팬이라는 걸 알면 아마 크게 놀라면서 밤새도록 같이 술마시며 롯코오로시를 불러야 할지도 모른다. 반면 일본 오사카나 칸사이로 무전여행 중 돈이 없을 경우 한신 얘기 잘 꺼내면 술이나 음식같은 거 얻어먹을 수 있을 듯(...) 물론 야구빠에다 일본어를 잘해야 통하는 얘기지만. 하지만 2005년 이야기를 하면 어떻게 될까? 죽을 것이다
사실 한신이라 가능한 이야기인데, 일본에서 야구를 보다보면 야구장에 혼자오는 사람을 꽤 많이 볼 수 있지만 혼자 온 관중끼리 스스럼없이 대화를 틀 수 있는 구단은 아무래도 한신이 가장 가능성이 높다. 타 구단 팬이라고 다 그런건 아니지만, 보통 초면 및 타인에게 조심스러운 일본인 특성상 같은 구단을 응원한다고 해도 옆사람에게 쉽게 말 걸면서 대화하는 경우는 매우 드문 케이스이다. 하지만 한신팬의 경우는 상대적으로 한신팬심을 공유하고자 하고 싶어하는 성향이 매우 강하다는 것이 일본의 TV등에서 여러 사례로 증명되어 있다. 참고로 어떤 TV 프로그램에서 실제로 한 실험으로, 오사카 지역의 술집에서 술을 마시면서 한신 얘기를 하고 있으면, 옆에 앉아있던 생판 처음 보는 다른 사람이 매우 높은 확률로 대화에 끼어드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따라서 한신 관중석에 혼자 앉아 있다고 해도 분위기가 좋아지면 초면인 사람과 대회할 기회가 타 구단에 비해 충분히 있을 수 있으니 참고하자.
이렇게 무시무시한 팬심과 유명세에 비해서 초라하기 짝이 없는 역대 성적 탓에, 구단 직원들 중에서도 솔직히 말해서 역사가 긴 팀이고요, 칸사이에 있고요, 무엇보다 '안티 거인'이라는 이유로 살아남는 팀이죠라고 평가하는 사람까지 있다. 또한 일본 프로야구 선수들한테 너무 인기가 좋은 팀이라서(부담스럽다), 그리고 우승할 수 있는 팀으로 가고 싶습니다라는 이유로 기피대상이라고 한다.
6 최근 5년간 관중수 추이
2012년 | 2013년 | 2014년 | 2015년 | 2016년 | |
연 평균 | 2,727,790명 (-5.9%) | 2,771,603명 (+1.6%) | 2,689,593명 (-3.0%) | 2,878,352명 (+7.0%) | 2,910,562 (+2.5%) |
일일 평균 | 37,886명 | 38,494명 | 37,355명 | 39,977명 | 40,994명 |
7 구단 역사
구단 창단은 무려 1935년. 그러니까 요미우리 자이언츠, 주니치 드래곤즈 등과 더불어 일본야구 초기 창단 구단 중 하나이다. 창단 당시의 이름은 "오사카 타이거스". 1940년에 당시 적대국이었던 미국과 영국의 언어인 영어를 쓰지 말자는 운동이 일어나 이름을 '한신군'(阪神軍)으로 바꿨으나 태평양 전쟁 패전 후인 1946년에 이름을 '오사카 타이거스'로 환원했다가 1961년에 연고지를 오사카에서 효고 현 니시노미야로[29] 옮기면서 이름을 지금의 한신 타이거스로 바꿨다.
센트럴 리그 팀들 중 유일하게 마이니치 오리온즈 가입에 찬성했던 구단이다. 그러다 리그가 분열할 모양새가 보이자 '마이니치의 프로 참여는 인정하지만 우리는 자이언츠와 같은 리그에 뛰겠다'라고 하며[30] 찬성 측 중 유일하게 센트럴리그에 참가한 구단이 되었다.
그러나 열광적인 팬에 비해 솔직히 과거 성적은 초라할 정도. 그래도 1970년대까지는 주니치와 더불어 요미우리의 독주에 딴죽을 거는 라이벌이었지만, 우승 경력은 믿을 수 없을만큼 적은데, 만년 2위 주니치 드래곤즈나 답 없기로 유명한 요코하마 디엔에이 베이스타즈조차 두 번 해본[31] 일본시리즈 제패를 이 유명한 구단이 딱 한 번[32]한 것은 지금도 일본의 미스테리. 카케후 마사유키-랜디 바스-오카다 아키노부 클린업을 앞세운 1985년이 한신의 유일한 일본시리즈 우승이다.[33]
그나마 주니치는 콩라인이더라도 강팀의 반열에 들어가니까 쪽팔릴 게 없는데, 센트럴 리그 3약으로 분류되는 야쿠르트(일본시리즈 우승 5회), 히로시마(일본시리즈 우승 3회), 요코하마(일본시리즈 우승 2회)보다도 일본시리즈 우승 횟수가 적다. 이 우승으로 충격받은 일본인 중 하나인 소설가 타카하시 겐이치로는 <우아하고 감상적인 일본 야구(優雅で感傷的な日本野球)>라는 정신줄 놓아버린 듯한 소설을 써서 내놓기도 했다.
더욱 충격적인 건 1985년 폭풍간지로 리그우승-시리즈 우승을 따놓고 그 다음 리그우승은 무려 18년이 지나서 호시노 감독 2년째인 2003년이다(…). 2003년 우승 때는 그 고이즈미 총리까지 떠벌릴 정도로 나라에 난리가 났었다. 더 웃기는 건 고이즈미 총리는 카나가와현 출신이다.
리그 우승도 1950년 양대리그제로 나뉜 때부터 따지면 5회뿐이다. 이는 2리그 분할 이후로 따져서 센트럴리그 6개 구단중 5위. 아래로는 현 요코하마 디엔에이 베이스타즈뿐이다.[34] 60년대 후반 전까지 시민들이 성금 모아서 간신히 연명하던 히로시마 카프보다도 리그 우승 횟수가 적다.[35]. 거기다 2003년까지는 통산 승률이 5할 아래로 밑돌 정도였었다.
8 응원곡
가사 원문 | 한국어 번역 | |
1절 | 六甲颪(おろし)に 颯爽(さっそう)と 蒼天(そうてん)翔(か)ける日輪(にちりん)の 青春の覇気 美(うるわ)しく 輝く我が名ぞ 阪神タイガース ※(후렴) | 롯코의 강풍에도 기세좋게 푸른 하늘 가르는 일륜의 청춘의 패기 아름답게도 빛나는 우리 이름이다 한신 타이거스 (후렴) |
2절 | 闘志溌剌(とうしはつらつ) 起(た)つや今 熱血既(すで)に 敵を衝(つ)く 獣王の意気 高らかに 無敵の我等ぞ 阪神タイガース ※(후렴) | 투지가 발랄하게 솟구치네 지금 열혈은 이미 적을 꿰뚫었네 수왕의 의기 드높게도 무적의 우리들이다 한신 타이거스 (후렴) |
3절 | 鉄腕強打 幾千度(いくちた)び 鍛えてここに 甲子園 勝利に燃ゆる 栄冠は 輝く我等ぞ 阪神タイガース ※(후렴) | 철완강타 몇천번이나 단련하여 여기에 코시엔 승리에 불타는 영광의 왕관은 빛나는 우리들이다 한신 타이거스 (후렴) |
※(후렴구) オウ オウ オウオウ 阪神タイガース フレフレフレフレ 오,오,오오 한-신 타이거-스, Hooray- Hooray- Hooray- Hooray- |
9 징크스?
9.1 프랜차이즈 스타는 그냥 은퇴하고 해설이나 해!
대대로 구단의 선수출신들이 감독을 맡으면 팀이 막장화되는 경향이 있어서[38] 구단에서 활약했던 스타선수들이 은퇴하고 감독을 맡는 것을 팬들이 달가와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바다 건너 비슷한 팀에도 이런 경향이 있다 2009년에 부임한 마유미 아키노부 감독도 야구의 급격한 예능화로 2011년 시즌을 끝으로 경질돼버리고 말았고 그 뒤를 이은 와다 유타카는 아예 투타 모두 폭망. 예능야구도 못하는 지경이다.
1962년의 양대리그 이후 첫 센트럴리그 우승과 2년 뒤인 1964년 센트럴리그 우승은 교진군 출신의 후지모토 사다요시 감독 밑에서 거두었다. 1985년의 유일한 일본시리즈 우승은 팀 레전드인 요시다 요시오 감독 밑에서 일구어냈지만 불과 2년만에 최하위로 전락하면서 막장화. 그 후 무라야마 미노루[39]-나카무라 카츠히로[40]-후지타 타이라-그리고 돌고 돌아 다시 감독을 맡은 요시다 요시오 등등 선수시절에는 팀을 대표하던 스타들이 줄줄이 감독을 맡았지만 돌아온 것은 길고 긴 암흑기. 1987년부터 2002년까지 16년간 6-6-5-6-6-2-4-4-6-6-5-6-6-6-6-4(...). 중간에 2가 하나 보이기는 하지만 그 주변 성적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뭔가가 잘못돼서 1년 반짝한 거다.[41] 무엇보다도 최하위인 6만 10번을 찍었다.
그 후 야쿠르트를 4번의 리그 우승과 3번의 일본시리즈 우승으로 이끌며 세리그의 신흥강호로 만든 데이터야구(일명 ID야구)의 대가이자 난카이 호크스 출신인 노무라 카츠야 감독을 기용하면서 3년 간의 리빌딩을 거쳐[42], 주니치 드래곤즈 출신인 목메달 콩라인(~2013) 호시노 센이치를 데려오고 나서 첫 해인 2002년은 비록 B클래스인 4위로 끝났지만 2003년 18년만의 센트럴리그 우승을 거두면서[43] 이 시기를 기점으로 대대적인 명예회복에 나서기 시작했다. 2003년 세리그 우승 후 2005년 오카다 아키노부 휘하에서 또다시 세리그 우승을 거두고 그러나.. 2010 시즌까지 A클래스(3위권)를 유지하는 등 회복세를 보이고 있었다. 하지만 밑에 2008, 2013년 시즌 요약을 보면 알겠지만 상위권에 있었다고 해서 막장기가 안 보였던 건 아니다. 그리고 2013년 호시노는 콩라인 탈출과 교진군 타도라는 인생목표를 동시에 달성~~
하지만 그 회복세도 거듭되는 클라이맥스 시리즈에서의 삽질로 빛이 바래던 중에 프랜차이즈 스타 출신 오카다 아키노부에 이어 또다시 구단 OB인 마유미 아키노부가 2009년부터 감독을 맡으면서 다시 안습상황이 되어 버렸다.[44] 설상가상으로 2007년부터 2008년까지 활약했지만 결국 마유미 감독에 의해 방출되었던 외국인 투수 라이언 보겔송이 메이저리그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로 가서 괴물급 활약을 보여주고 있다. 그것도 지톸ㅋㅋㅋㅋ를 대신한 5선발로.[45]
이 때문에 같은 칸사이 지방의 킨테츠 버팔로즈에서 선수생활을 했고 감독이 되고 나서 킨테츠와 닛폰햄의 두 팀을 리그 우승으로 이끈 명장 나시다 마사타카 감독을 선임하자는 주장이 팬들 사이에서 나왔고 보도매체에서도 그렇게 전망[46]했으나 웬걸. 오카다-마유미에 이어 구단 OB인 와다칸 와다 유타카 타격코치를 감독으로 선임하며 OB 감독으로 3연타를 날렸다. 그리고 나시다는 2016년 도호쿠 감독행 과연 와다 감독이 다시 한신을 일으켜 세워서 OB 감독 막장화 징크스를 털어낼 것인지 아니면 198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 초까지 계속 된 암흑시대 시즌 2를 찍을지 귀추가 주목되었으나... 2012년 와다 감독은 우려했던 대로 센트럴리그 5위를 찍으며 한신의 흑역사를 찍고 있다. 특히 2012년 한신 타선은 아예 멸종된 상태라, 10게임 연속 2득점 이하라는 굴욕적인 기록까지 선보였다. 한점 타이거스 바다건너 이름 같은 팀도 고생 좀 했다 특히 타코 출신이라는 와다가 지휘봉을 잡은 뒤 마유미 시대보다 타선이 더 폭망해, 결국 시즌 후반에 접어들며 팀이 리빌딩에 들어간 상태. 이제부터 우리는 위대한 도전에 나섭니다
그리고 2013년엔 그나마 정규시즌 2위로 올라섰으나, 센트럴 콩라인 주니치도 아닌 오랫동안 얼굴을 못 내민 승률 5할도 안 되는 3위 히로시마 도요 카프에게 발리고 광탈. 2014년에는 2013년의 수모를 되갚고 숙적 요미우리를 4연승으로 일축하면서 일본시리즈에 진출하여 지긋지긋하던 플레이오프 징크스를 털어내나 했더니 일본시리즈에서 우세라는 평가에도 불구하고 1차전 승리 뒤에 내리 4연패로 또다시 일본시리즈 우승에 실패했다. 게다가 X맨 니시오카 츠요시의 3피트라인 룰 위반에 따른 수비방해라는 사상 초유의 막장플레이로 시리즈의 막을 내리면서 모처럼 분전했던 2014년도 개운치 않은 뒷맛을 남기며 마무리했다. 이어진 2015년에도 1위인 상태로 9월에 돌입했으나 이제 신 가을의 풍물시라고 불릴만큼 고질화된 막판 붕괴로 3위로 추락. 그 와중에 야쿠르트의 14년만의 우승을 결정짓는 경기에서 조력자 노릇이나 하고, 히로시마와의 시즌 마지막 경기를 패하면서 시즌의 운명을 히로시마 손에 맡기는 상황까지 연출했다. 결국 히로시마가 시즌 마지막 경기를 진 덕분에 홈런 오심에 어부지리로 간신히 클라이맥스 시리즈에 진출하는 꼴사나운 모습을 보였다. 결국 와다 감독도 2015년 시즌을 끝으로 경질되었다. 그리고 나서도 이번에는 OB에 외야수이기까지도 한 가네모토 도모아키를 감독으로 선임했다.
9.2 국제대회
여담으로 올림픽, WBC 등 국제대회에 선수가 차출되어 나가면 꼭 한둘씩 망가져서 돌아오는 안 좋은 징크스가 있다. 특히 아라이 타카히로. 하나둘 셋이야!
10 반 요미우리
한신은 일본 야구 구단 중 인기가 좋고 매니아가 많은 팀으로, 반 요미우리의 선봉 역할을 맡고 있다. 그 이유는 1945년에 제2차 세계대전으로 프로야구가 중단될 때까지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우승을 3차례나 저지했기 때문.(1937,1938,1944년) 참고로 일본프로야구가 출범된 1936년부터 1944년까지 우승팀은 요미우리 자이언츠와 한신 타이거스 뿐이며, 이로 인해 자연스레 한신 타이거스가 반 요미우리의 선봉 역할을 맡게 되었다. 2리그제가 시행된 1950년 이전에도 우승팀은 총 3팀뿐(요미우리, 한신, 킨키 그레이트링[47] 뿐이며, 킨키 그레이트링의 경우 당시 연고지가 오사카였다.(현재 연고지인 후쿠오카에 이전한 건 1989년부터)
그러다보니 여러 매체 등에서는 항상 요미우리 자이언츠와 라이벌 관계다. 관서VS관동의 대립구도? 한국으로 치자면 해태 타이거즈와 삼성 라이온즈과의 관계, 국가 내 지역구도를 떠나서는 미국으로 치자면 보스턴 레드삭스와 뉴욕 양키스의 관계에 비유할 수 있다. 프로야구 최초의 구단이 거인군(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전신)이었고, 이후 오사카 타이거스(한신 타이거스의 전신)가 생겼는데, 알다시피 요미우리는 일본 야구계를 지배하고 있고 야구팬은 요미우리 팬과 안티로 나뉜다고 할 정도로 입지가 굳다.[48]
이게 어느 정도냐면, 어떤 한국 야덕이 일본에 가서 홀로 한신 원정석에서 응원을 하다가 우연히 옆에 앉은 한신빠 칸사이 아재(...)와 이야기를 트게 되었다고 한다. 한참 경기가 진행되는데 한신빠 아재가 "너는 외국인인데 한신 팬인게 신기한걸? 왜 한신 팬이 됐냐?" 고 물었단다. 이에 기지를 발휘해서 "요미우리가 싫어서요" 라고 대답하자, 한신빠 아재가 그 순간 낯빛이 변하더니만 그 자리에서 맥주파는 직원을 불러세워서 말없이 맥주를 쏘더라는 훈훈한 이야기가 있다(...). 실화다.
11 이야깃거리
NPB 역사상 최단시간시합과 최장시간시합 기록을 모두 가지고 있는 구단이다.
최단시간은 1946년 7월 26일의 55분(쇼치쿠 로빈스 전).
최장시간은 1992년 9월 11일의 6시간 26분(야쿠르트 스왈로스 전). 참고로 한국프로야구기록은 최단시간 1시간 33분, 최장시간 5시간 58분.
또 양대리그제 시행 이전 현재까지 남아있는 6개 구단 중 유일하게 돔구장을 홈구장으로 쓰고 있지 않다.(오사카 돔은 코시엔 때만 쓰니까)
예전에 비해 FA영입 등에 돈을 많이 풀고 있는데 용병, 일본 내 FA 중 주로 히로시마 도요 카프에서 대어를 낚아대는 바람에 히로시마 구단 팬들과 미묘하게 사이가 안좋기도 하다. 대표적으로 현 4번타자이자 재일교포인 카네모토 토모아키라든가 아라이 타카히로라든가, 앤디 시츠 등 이상하게 히로시마 제들을 데려오면 대박 성공. 때문에 농담으로 히로시마는 한신의 팜(2군)이냐 라는 소리까지 나오는 실정(...). 어쨌든 이런 투자 확대등으로 현재는 과거의 강호의 이미지 회복에 성공했다. 근데 우승은?(...).
그 예로 2003 시즌과 2005 시즌에 세리그 우승으로 일본시리즈에 진출했지만 2003 시즌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에게, 2005 시즌에는 당시 이승엽이 소속된 치바 롯데 마린즈에게 4전 전패의 치욕을 당하고 또다시 준우승에 머물렀다. 게다가 2005년 일본시리즈에서는 4게임동안 총 득점 4대33으로 처절하게 발렸다. [49]
호시노가 건강문제로 사임한 뒤 오랫동안 2군감독을 맡으면서 지도자 수업을 받은 구단출신 오카다 아키노부가 감독자리에 오르게 된다. 오카다가 감독을 맡은 2005년에 다시 리그우승을 하지만 대부분의 평가는 노무라-호시노가 남겨준 유산 덕분. 다만 센트럴 리그는 우승했지만 그 해 일본시리즈는 그야말로 쫄딱 망했다. 2006년, 2007년에도 우승전선에는 뛰어들었지만 뒷심 부족으로 주니치, 요미우리에게 우승을 넘겨주고 말았다.
일본 야구계의 양대 기인이라고 할 수 있는 신죠 츠요시와 이가와 케이가 선수생활을 시작했던 구단이기도 하다. 그런데 후자는...
포켓몬스터의 야빠 캐릭터 나진이 좋아하는 에레브스는 바로 이 한신 타이거스를 모델로 한 야구팀이다. 이미지 컬러가 노랑이고 세로 줄무늬[50]가 특징이며, 성적이 안습한 점이 유사하다. 특히 포켓몬스터가 제작된 90년대 말은...
일본 만화의 신이라 불렸던 데즈카 오사무도 한신의 팬이었다고 한다. 1950년의 연하장에는 "한신이 부진해서 야구만화 그릴 생각이 안 든다"(!)라고 적었을 정도였다. 연하장에 꼬박꼬박 한신 유니폼을 입은 호랑이를 그려서 보낸 건 기본. 저렇게 푸념한 1950년이 마침 호랑이 해인 경인년이기도 해서 연하장에다 데즈카 선생이 그린 호랑이 마스코트가 바로 위의 그림이다. 그러고 보니 돌아가시기 전에 일본시리즈 우승은 했으니까 여한은 없었겠네.
유명 성우이자 가수 미즈키 나나도 아버지의 주입식 교육[51] 덕분에 한신 타이거스의 골수팬. 특히나 야노 아키히로 선수의 팬이라고 하며 콘서트에서 직접 사인을 전달받고 기뻐서 눈물을 흘린 에피소드도 있다.
일본 방송계에서도 굴지의 한신 빠로 알려져 있는 치아키라는 여성 탤런트는 아예 "어렸을 적엔 요미우리 선수들을 '적'이라고 인식하고 있었을 정도"라고 한다. 집안 자체가 골수 한신 팬 집안이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고. 요미우리에 대한 편견을 지운건 성인이 되어 방송계에 입문한 후 은퇴한 요미우리 출신 선수들과 관계를 갖게 된 뒤부터라고 할 정도.
나무위키에 항목이 개설되어 있는 작품중엔 호텔 퀸시라는 제목으로 정발된 컨시어지라는 만화에 골수 한신팬이 등장한다. 퀸시호텔 사장인 마츠오카 슌이치로와 그 일족들인데, 아예 이 캐릭터가 개그하는 장면의 90%는 한신 관련일 정도다. 작중에서도 4컷만화의 소재[52]로 쓰이기도 하고, 본편에도 한신관련 소재는 심심하면 등장하는 수준.중요한 업무관련 이야기는 10분 정도 나누고 한신의 가상 라인업 짜기로 2시간 통화하기라던가..
실황 파워풀 프로야구 시리즈의 제작사인 파워프로 프로덕션도 한신과 밀접한 관서지방에 있어서인지 제작진 대부분이 한신빠이다. 그래서인지 시리즈 대대로 한신 타이거즈의 선수들은 실제의 활약상보다 능력이 좋게 나오는 편. 그러다보니 페넌트레이스 모드에서도 거의 만년 상위권이다. 물론 현실에서는 절대 있을 수 없는 일(…). 하지만 프로야구 스피리츠 2013에서 한신 타자들의 능력치 책정에는 자비가 없었다.
오토타케 히로타다가 가장 좋아하는 야구팀이다.
아즈망가 대왕의 등장인물 타키노 토모가 한신의 열성팬이다. 그런데 미하마 치요가 요미우리의 팬인지라 가지고 대차게 놀린다.본인도 놀릴 처지가 아닐텐데
11.1 한국선수 영입 낚시
유독 한국 선수를 영입하겠다는 의사를 언론에 많이 흘리지만 실제로 영입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가 드디어 오승환을 영입했다.
- 이승엽 : 일본 진출 시 영입의사를 표시했고, 치바 롯데 마린즈와의 계약이 끝날 때 쯤 또한번 미끼를 던졌으나 결국 영입하지 않았다. 오히려 2005 재팬시리즈에서 이승엽에게 호되게 얻어맞으며 스윕을 당했고, 요미우리 자이언츠 4번타자로서 센트럴리그에 합류한 이승엽의 충실한 샌드백 역할을 했다. [53]
- 김동주 : 2008년, 첫 FA를 맞이한 김동주를 영입하고 싶다는 보도를 흘렸으나 결국 김동주는 두산과 계약했다.
- 이택근 : 일본 언론에서 베이징 올림픽 이후 한신이 이택근을 지켜보고 있었다고 보도했지만 나중에 사실무근이라는 정정보도를 냈다.
이젠 친절하게 정정보도까지. - 김태균 : 소문 뿐이었다. 결국 치바 롯데 마린스로 갔다.
- 이범호 : 소문 뿐이었다. 결국 후쿠오카 소프트뱅크로 갔다.
- 임창용 : 소문 뿐이었다. 결국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로 갔다. 이후 야쿠르트와의 계약이 끝날 때 한신이 엄청난 거액을 준비중이라는 이야기가 기정사실처럼 퍼졌으나 임창용 본인이 미국무대 도전을 원하여 시카고 컵스로 떠났다.
어차피 여기서 우승 못하나 거기서 우승 못하나 - 이대호 : 소문 뿐이었다. 결국 오릭스 버팔로스로 갔다. 그리고 2013년 이대호가 일본야구에 적응하고 펄펄 날아오르자 한신이 2013년 이후 오릭스에서 FA가 되는 이대호를 관심깊게 지켜보고 있다는 기사가 떴다. #
또다시 관심만 줄듯결국 2013년 12월 5일,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와 계약에 합의했다. - 김광현 : 2009년자 보도로 2015년 김광현의 FA를 대비하여 한신이 무려 6년동안의 장기 영입 프로젝트를 준비중이라는 초특급 설레발기사가 나왔다.
- 오승환 : 2013년에 FA가 되는 오승환을 관심있게 지켜보고 있다는 소식에, 일본 언론쪽에서 한신이 시즌후 구단동의 해외FA가 가능한 오승환에 대해 영입조사를 착수했다는
설레발기사가 떴다. #, 위의 경우와는 달리 신빙성이 뒷받침 되는 이유는 2012시즌부로 한신을 떠난 마무리투수 후지카와 큐지와 오승환의 스타일이 상당히 닮았기 때문이다.[54] 오승환의 경우는 위의 경우와 또 다른 것이 시즌이 끝나지 않았음에도 계속해서 언론을 통해 오승환에게 러브콜을 보내고 있으며 오승환을 보기 위해 단장인 나카무라 카츠히로가 직접 내한했고, 이제는 오승환 영입을 위해 7억엔이라는 실질적인 금액과 대우까지 제시된 상태이다. 결국 2013년 11월 22일, 2년 최대 9억엔 조건으로 계약에 성공.# - 손승락 : 오승환이 팀에서 떠날때를 대비해서 오승환의 대체선수로 손승락을 눈여겨보고있다는 닛칸스포츠의
설레발기사가 나왔다. # - 양현종 : 손승락과 비슷한 맥락으로 오승환이 한신을 떠날 걸 염두해두고 앞서 거론 된 김광현과 더불어 양현종에게 눈독 들이고 있다며 일본 언론은
늘 그렇듯 설레발언플질을 했다. # - 김현수, 최형우 : 2015년 들어서 김현수와 최형우를 눈여겨보고 있다는 떡밥을 흘렸다. ##
- 이러다보니 국내 야구팬들에게는 양치기 소년 이미지가 굳어졌으나 오승환 영입으로 이제 한국에서도 관심받는 팀이 되었다.
11.2 켄터키 할아버지와의 악연
1985년 센트럴리그 우승 후의 에피소드 때문에 30년 동안 우승을 못하고 있다는 이야기, 커넬 샌더스의 저주 항목을 참조.
12 시즌별 성적
12.1 2005년
정규시즌에서 강력한 퍼포먼스를 보여줬지만, 일본시리즈에서 아주 큰 흑역사를 남기고 말았다. 자세한 사항은 33-4 항목 참고.
12.2 2008년
파일:Vyanen.jpg
전설적인 설레발로 남은 《Vやねん!タイガース 08激闘セ・リーグ優勝目前号》(우승 아이가! 타이거스 08격전 센트럴리그 우승 눈앞에). 그 외에도 표지에 적힌 헤드라인을 보면 헹가래 개봉박두, 너무 강해서 어쩔 줄을 모르겠습니다, 이겼다 이겼다 맥진 V가도, 오카다 아키노부, 명장으로 가는 길 등등 온갖 설레발이 넘쳐 흐르고 있다(...) 그리고 7년 후에 똑같은 실수가 반복된다. 타어강 일본버전
잠깐, 둘다 타이거즈?
13게임차로 1위를 신나게 달리고 있다가, 기록과학적인 DTD를 보이면서 검은 유니폼을 버리고 막판 10연승을 달려버린 요미우리 자이언츠에게 역전 우승을 허용하는 캐안습 굴욕을 보였다(...). 참고로 이 기록은 센트럴리그 역대 최다승차 역전 우승이다. 참고로 퍼시픽리그에서는 1963년 니시테츠 라이온즈가 난카이 호크스와의 14.5경기차를 극복하고 역전 우승을 따낸 적이 있다. 절치부심하고 나간 클라이맥스 시리즈에서도 3위 주니치에 밀려 가을야구와 작별. 안습
그리고 이 역사에 남을 만한 대역전극의 희생양이 된 덕분에 서포트 해준 거에 비하면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어느정도 괜찮은 성적을 내던 오카다 아키노부는 감독직을 내놓아야 했다.
12.3 2009년
팀의 프랜차이즈 선수 출신인 마유미 아키노부가 새 감독으로 취임. 프랜차이즈 선수 출신이 감독을 맡으면 하나같이 망한다는 기분 나쁜 징크스를 그대로 반영하듯 2009 시즌에서는 시즌 초반 5위로 추락하며 망했어요가 되려다가,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의 연패에 힘입어 시즌 중반 3위까지 치고 올라갔으나 시즌 막판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와의 2연전에서 내리 패하며 결국 최종성적 67승73패4무로 4위에 그쳤다.
12.4 2010년
2010년 시즌은 전 해의 불안감을 날리듯 아카호시 노리히로의 은퇴 후 영입한 외국인선수 맷 머튼과 메이저리그 생활을 청산하고 돌아온 죠지마 켄지가 대 활약하였다. 맷 머튼은 스즈키 이치로의 210안타 기록을 갱신하는 등 214안타를 때려냈고, 죠지마 역시 28홈런을 치며 타선에 힘을 불어넣는 등 전년도에 비해 타선이 매우 좋아져 줄곧 선두권을 유지하였으며 한때는 1위까지 올라갔으나, 시즌 막판 계투진 붕괴로 3위 팀에게 매직넘버가 켜지는 진기록을 세웠다가 결국 주니치 드래곤즈에게 우승을 넘겨주고 말았다.
그리고 2010년 센트럴리그 클라이막스 시리즈 1회전에선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2패로 광속탈락. 1차전에선 요미우리의 선발투수 토노에게 꽁꽁 묶였고 2차전은 경기 초반부터 점수를 차근차근 쌓아나갔으나 후지카와 큐지가 불을 지르며 결국 시망.-_- 2003년 일본시리즈 6차전 이후로 포스트 시즌 경기에서 1승 12패를 기록했다.
반면 한신 2군은 프랜차이즈 스타인 히라타 카츠오[55] 2군 감독의 지휘 하에 4년만의 웨스턴리그 우승을 했으나, 한신 팬들의 연임요청에도 불구하고 캐막장 프런트에 의해 해임당했다.
12.5 2011년
한마디로 표현하면 타어강의 일본판 선행버전.
2010년의 반등세에 자신을 얻었는지 구단 차원에서 1985 AGAIN을 외치면서 돈지랄에 나서서 연봉총액이 그동안 매년 돈지랄이라고 까던 라이벌 요미우리 자이언츠를 능가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 결과 2011년 시즌 시작 전에 전문가들은 만장일치로 한신의 우승을 예상했다.
그런데 막상 시즌이 시작되자 시즌 중반이 지나도록 우승은 커녕 플옵 커트라인인 3~4위를 왔다갔다 했고, 기어이 2011년 6월 한신 전기철도 주주총회에서 마유미 감독을 성토하는 말까지 나왔다. 급기야 시즌 막판에 포스트시즌 커트라인과 점점 멀어져가면서 관중석에서 응원 메가폰이 날아 들어오기 시작했고, 심지어 고시엔 구장의 유료 입장관중이 2만명 대로 추락하여 자리가 남는 사태가 벌어졌다. 결국 마유미 감독은 10월 16일 클라이맥스 시리즈 진출 실패에 따른 책임을 지고 사임하게 된다. 결말은 한국의 타이거즈와 다르다.
12.6 2012년
마유미 아키노부 감독이 짤리고 타격코치였던 와다 유타카 코치가 내부승격을 통해 감독으로 선임되었고, 구단 프랜차이즈 출신이 감독이 되면 망한다는 징크스 때문에 한신팬들은 우려했으나,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전해 부상때문에 38게임 출장에 그쳤던 조지마 겐지는 재활 끝에 복귀는 했으나, 포수가 아닌 일시적으로 1루수로 출장하게 되었고, 맷 머튼도 부상 때문에 초반 결장하는 등 어째 영 좋지 못한 기운이 감돌았는데...
한마디로 망했어요.
카네모토 토모아키는 초반 주전으로 출장하다 대타로 밀려났고 아라이 타카히로 역시 부상에 시달렸으며 조지마 겐지는 24게임만 뛰고 또다시 부상을 당했다. 중심타자 맷 머튼은 에이스 노우미 아츠시와 트러블을 일으키는 등 팀은 개박살이 났다. 게다가 조지마 겐지는 복귀를 시도하다 2군 경기 도중 또 부상을 당해 그대로 은퇴를 선언했고, 같은 달 카네모토 토모아키 역시 은퇴를 선언했다. 시즌 최종 성적은 55승 14무 75패로 히로시마에도 뒤진 5위를 마크했다.
결국 시즌 종료 후 미네소타 트윈스에서 자진 퇴단한 니시오카 츠요시와 일본 복귀를 선언한 후쿠도메 고스케에게 접촉, 영입에 성공하는 등 폭풍 돈질을 시전했다. 포수 공백 역시 오릭스에서 히다카 타케시를 데려와 메웠다.
하지만 아예 소득이 없던 것도 아니어서, 유망주 수준이었던 아라이 타카히로의 동생 아라이 료타가 시즌 초반 이후 4번 타순에 들어서며 커리어 처음으로 두자릿수 홈런을 때리는 등 분전했다. 료타 역시 30줄에 접어드는 적지 않은 나이이지만
12.7 2013년
후쿠도메 고스케는 타율이 1할대에 머물다 부상으로 라인업에서 빠졌고 크레이그 브라젤의 공백을 메워줄 것으로 생각된 외국인 브룩스 콘래드는 그 흑역사가 많은 한신 외국인 타자 중에서도 유일하게 0홈런 0타점(57타수 10안타)을 기록하는 맹활약(?)을 보이다 방출되었으나, 니시오카가 1번에서 활약해주고 루키 후지나미 신타로와 이번 시즌에 첫 선발투수로 나서는 에노키다 다이키가 선발진에 안착하며 시즌 초반까지는 순항하고 있다. 요미우리의 독주속에 한신이 추격하는 게 세리그 초반의 판도. 특히 요미우리를 상대로 성적이 좋은데, 첫 3연전에서는 역사상 처음으로 요미우리에게 3경기 연속 무득점의 수모를 안겼으며[56] 5월 8일에는 도쿄돔에서 요미우리를 상대로 6년만에 스윕에 성공했다. 잠깐 요미우리를 제치고 1위가 된 적도 있었지만, 후반기들어 주춤하며 8월 시점에서 7게임차로 벌어져 1위는 사실상 멀어졌다. 그래도 3위권과 10게임차를 벌리며 순항하다 9월 이후에 주춤해서 3위와 4게임차로 좁혀졌지만 어쨌든 3년만에 2위로 A클래스 복귀.
그러나 홈에서 벌어진 클라이맥스 시리즈 퍼스트 스테이지에서 승률 5할도 안되는 3위 히로시마 도요 카프에게 처절하게 발리며 2연패로 광탈. 2013년에도 또(!) 플레이오프 광탈 징크스를 끊지 못했다. 심지어 돈 별로 없는 시민구단에게![57] 한신 팬들이 할 수 있었던 거라고는 히야마 신지로가 현역 마지막 타석에서 친 대타홈런으로 정신승리하는 것 뿐이었다.. 이로써 오카다 감독 이래로 포스트시즌 성적은 통산 1승 12패. 클라이맥스 시리즈 탈락만 네번. 포스트시즌만 하면 유불리를 막론하고 실패를 거듭하는 퍼시픽리그의 이 팀과 어깨를 견줄 정도. 아니 그 팀은 하다 못해 퍼스트 스테이지 통과는 몇번 해봤다. 그리고 2011년에는 일본시리즈 우승까지 해봤다. 이 팀은 퍼스트 스테이지 조차도 통과 못하니 더 안습.
오프시즌에는 주니치의 선발 나카타 켄이치, 니혼햄의 포수 츠루오카 신야등 여러 FA를 노렸으나, 결국 빈손으로 돌아왔다. 오승환을 데려오며 마무리 자리를 채웠지만, 외국인 선수 엔트리 제한 때문에 준수한 선발 스탠드리지를 떠나보내야 했다.[58] 베테랑 선발 구보 야스토모도 FA권을 행사해 요코하마 DeNA로 떠나며, 고정 선발은 3명(노미, 메신저, 후지나미) 밖에 남지 않아 선발진을 채우는 게 큰 과제로 남게 되었다. 하지만 구보의 보상 선수를 '요코하마의 전력 약화'를 노린다며 베테랑 포수 츠루오카 카즈나리를 데려오면서 선발진 공백은 유지된 채 주전 포수 경쟁만 더욱 큰 미궁 속으로 빠지게 되었다...[59]
여담으로 블라디미르 발렌틴의 홈런 기록을 위한 여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일본 기록 타이인 55호, 일본 기록을 경신하는 56호, 사상 최다인 60호포 모두 한신전에서 뽑아냈다.
12.8 2014년
12.9 2015년
12.10 2016년
12.11 2017년
13 대표적인 선수들
13.1 현역 선수들(2016년 기준)
13.1.1 투수
- 13. 에노키다 다이키
허용투수 - 14. 노우미 아츠시
- 16. 안도 유야 : 얼굴이 이 사람과 닮았다는 소릴 많이 듣는다.
그래서인지 오승환과 친하다 - 17. 이와사다 유타
- 18. 후지카와 큐지
- 19. 후지나미 신타로
- 21. 이와타 미노루
- 26. 사이우치 히로아키
- 28. 후쿠하라 시노부
- 34. 다카미야 카즈야
- 38. 마르코스 마테오 : 오승환의 후임으로 가용 될 새로운 한신 마무리투수로 유력하다.
- 48. 가네다 가즈유키
- 54. 랜디 메신저
- 56. 마츠다 료마 : 루키 선수. 일본 현지에서까지 포스트 오승환이라고 불리고 있을 정도로 피칭 스타일이 오승환과 제법 흡사하다. 주 무기는 속구로 볼 끝이 좋다. 다만 아직 신인 투수라 위기 상황에 크게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는 등, 멘탈이 약한 부분이 없잖아 있다.
- 59. 이와모토 아키라
- 64. 쿠와하라 켄타로
- 66. 후타가미 카즈히토
- 67. 이와자키 스구루
13.1.2 포수
13.1.3 내야수
- 1. 토리타니 다카시
- 2. 호조 후미야
- 4. 우에모토 히로키 : 준수한 외모로 일본 내 얼빠들이 많은 선수 중 하나.
허나 사마귀를 연상케하는 특유의 타격 자세로 국내 넷상에선 영원히 고통 받고 있다 - 5. 마우로 고메즈
- 7. 니시오카 츠요시
- 32. 아라이 료타
- 35. 사카 카즈히코
- 36. 맷 헤이그
- 49. 이마나리 료타[61]
- 58. 아라키 후미야
13.1.4 외야수
- 00. 시바타 코헤이
- 0. 야마토(본명 마에다 야마토) :
하찮은공격력과는 어울리지 않게 등장곡과 응원가는 우주전함 야마토 주제가라고 한신 중계를 보는 한국팬들로부터[62] 비웃음 받지만 수비력만큼은 국가대표급인 선수라며 극찬을 받고 있는 선수다. 보통 잘하는 정도가 아니라 수비 센스 하나 만큼은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힐 정도로 정말 뛰어나다. 이미 오승환도 몇 차례 도움을 받은 적 있으며 그중 대표적인 호수비로 꼽히는 것이 2014 클라이맥스 시리즈 파이널 스테이지 3차전, 9회말 2아웃 상황에서 나온 호수비다. 우리나라의 누구들 못지않게 수비 범위가 넓고 다이빙 캐치가 취미 수준인 선수. 원래 포지션이 2루수였던 만큼 정말 아주 가끔씩 2루수로 출장할 때도 있으며 내야수비 역시 뛰어나다.여기에 공격력만 갖춰졌다면 국가대표 선수로도 꼽혔을텐데 - 8. 후쿠도메 고스케
- 9. 타카야마 슌
- 24. 요코타 신타로
- 25. 에고시 타이가
- 51. 이토 하야타
- 61. 타가미 켄이치
- 68. 슌스케(본명 후지카와 슌스케)
- 99. 카노 케이스케
13.2 OB
13.2.1 영구결번, 준영구결번
한신 타이거스 영구결번 | ||
No. 10 | No. 11 | No. 23 |
후지무라 후미오 | 무라야마 미노루 | 요시다 요시오 |
이하 굵은 글씨는 영구결번.
- 10. 후지무라 후미오 : 초대 미스터 타이거스로 사랑받았던 한신의 프랜차이즈 스타. 호쾌한 장타로 홈런타자의 이미지가 강했던 선수로 일본프로야구 양대리그 이전 일본 야구연맹 시절부터 1950년대까지 한신을 이끌었던 클럽하우스 리더이기도 했다. 물론 당연히 구단 최초의 영구결번자다.
- 23. 요시다 요시오 : 우시와카마루(牛若丸)란 별명에서 볼 수 있듯 투쟁심 강한 선수. 요미우리의 히로오카 타츠로와 '세기의 명 미기(美技)'를 다툴 정도로 유명한 센트럴리그의 명유격수다. 또한 1985년 한신 타이거스의 유일한 우승을 이끈 감독이다.
물론 감독 취임 2기의 흑역사는 안 자랑.
- 11. 무라야마 미노루 : 일명 자토펙 투수. 역시 한신의 전설적인 투수로 양대리그 이후 대졸 출신으로서는 유일무이한 통산 200승 투수(통산 222승)이기도 하다. 특히 나가시마 시게오와의 불꽃튀기는 명승부가 유명할 정도로 교진군 킬러이기도 했다. 이 선수는 그냥 요미우리 킬러도 아니고 입단 전부터 '골수 한신팬+반 요미우리'를 표방했는데 얼마나 대단했냐 하면 입단교섭 당시 요미우리가 한신보다 4배나 많은 계약금을 제시했음에도 요미우리를 뻥차버리고 한신에 입단했을 정도였다.
- 53. 아카호시 노리히로 : 1번타자로 활약하며 많은 안타와 도루를 기록하였으나, 2010년에 중심성척수증후군이라는 희귀병으로 인해 조기 은퇴하면서 아카호시의 번호를 준영구결번으로 지정했다.
- 6. 가네모토 도모아키 : 연속이닝 출장경기는 물론, 한신 타이거스의 2000년대 중흥기를 이끈 공로를 기리기 위하여 2012 시즌이 끝나고 영구결번을 지정하기로 했으나 가네모토 본인이 고사하면서 일단은 준영구결번으로 지정됐다. 참고로 한신의 6번은 나름 의미있는 번호인데, 한신의 역사를 빛낸 교타자인 후지타 타이라와 와다 유타카가 썼던 번호이기도 하다.
둘 다 감독으로서는 안습.
13.2.2 출신 선수들
- 가네다 마사야스 (1942 - 1944, 1946 - 1957)
- 오창정 (1944, 1946 -1949)
- 미야케 히데시 (1953 - 1967)
- 코야마 마사아키 (1953 - 1963)
- 에나츠 유타카 (1967 - 1975)
- 타부치 코이치 (1969 - 1978)
- 에모토 타케노리 (1976 - 1981)
- 후지타 타이라 (1966 - 1984)
- 나카무라 카츠히로 (1972 - 1982)
- 마유미 아키노부 (1979 - 1995)
- 한신 타이거스의 전설의 클린업 트리오 : 랜디 바스-카케후 마사유키-오카다 아키노부
- 와다 유타카 (1985 - 2001)
- 야기 히로시 (1987 - 2004)
- 세실 필더 (1989) : 프린스 필더의 아버지. 일본프로야구에서 홈런왕을 차지한 뒤 메이저리그에서도 홈런왕을 차지한 특이한 경력의 소유자.
- 신조 츠요시 (1990 - 2000)
- 토마스 오말리 (1991 - 1994) : 랜디 바스, 맷 머튼 다음 가는 커리어를 자랑하는 한신 용병타자. 은퇴한 뒤에도 한신에서 스카우트, 타격 코치 등 여러 자리를 맡아 맷 머튼을 발굴하는 등의 성과를 거뒀다.
- 히야마 신지로 (1992 - 2013)
- 시오타니 카즈히코 (1993 - 2001) : 2006년 SK 와이번스에서 뛴 적이 있다. 한신 시절에는 실패한 타자 유망주였다.
- 야부 케이이치 (1994 - 2004)
- 이마오카 마코토 (1997 - 2009)
- 하마나카 오사무 (1997 - 2007)
- 이가와 케이 (1998 - 2006)
- 야노 아키히로 (1998 - 2010) : 2000년대 한신의 홈플레이트를 굳건히 지킨 안방마님.
- 벤 리베라 (1998 - 1999)
- 후지모토 아츠시 (2001 - 20009)
- 사쿠라이 코다이 (2002 - 2011)
- 시모야나기 츠요시 (2003 - 2011)
- 제프 윌리엄스 (2003 - 2009) : 후지카와 ,쿠보타와 함께 막강 계투진 JFK(한신)를 형성한 호주 출신 좌완.
- 이라부 히데키 (2003 - 2004)
- 쿠보타 토모유키 (2003 - 2014) : JFK(한신)의 일각을 이루었던 우완 투수.
- 라이언 보겔송 (2007 - 2008)
- 카네무라 사토루 (2008 - 2009)
- 아롬 발디리스 (2008 - 2009)
- 맷 머튼 (2010 - 2015)
- 마리오 산티아고 (2015)
13.3 구단출신 메이저리거[63]
- 신조 츠요시 (뉴욕 메츠-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뉴욕메츠): 월드시리즈에 출전한 최초의 일본인 선수다.
- 야부 케이이치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 이가와 케이 (뉴욕 양키스 - 일본 복귀 후 오릭스 버팔로즈)
- 후지카와 큐지 (시카고 컵스)
- 오승환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64]
13.4 흑역사
- 루퍼트 존스 : 원조 "바스의 재래". 랜디 바스의 공백을 메꾼답시고 데려왔지만 53경기동안 2할 5푼의 타율에 8홈런을 때리는 데 그쳤다.
- 마츠나가 히로미 : 한큐 브레이브스의 호타준족 스위치 히터 3루수였으나 한신에게는 강렬한 먹튀. 1992 오프시즌에 대형 트레이드로 데려왔으나 부상으로 부진한 성적을 거둔 뒤 이적한 지 1년만에 일본프로야구 최초의 FA 선언 선수가 된다. 여기에 팀을 떠나면서 "고시엔은 유치원의 모래밭"이라는 한신 디스 발언을 남겼다...라는 보도가 나와 한신 팬들을 분노하게 하기도 했다.(나중에는 오보로 밝혀졌다.) 게다가 그의 대가로 한신에서 오릭스로 보낸 우완 포크볼러 노다 코지는 이적 첫 해 17승 5패 2.56 209탈삼진으로 맹활약했으며, 1995년에는 1경기 19탈삼진의 일본 최다기록을 세우기도 하는 등 5년 가까이 오릭스의 주축 선발투수로 활약하며 95, 96년 리그 우승에도 공헌하였다.
- 마이크 그린웰 : 불과 8경기 뛰고 몸에 공을 맞은 후 신이 야구를 그만 하라고 계시를 했다는 말도 안 되는 이유만 남기고 귀국해 버렸다.
- 케빈 멘치 : 텍사스 레인저스에서 박찬호와 한솥밥을 먹었던 적이 있는 거포. 중심타자로서의 활약을 기대하고 데려왔지만 24경기밖에 뛰지 못했다.
- 브룩스 콘래드 : 그 많고 많던 외인 타자 중 유일하게 단 한 타점도 기록하지 못한 타자.
- 에가와 스구루 : 한신 입단할 뻔 했던 투수.
- 오승환 : 활약은 뛰어났으나...
14 역대 감독
한신 타이거스 역대 감독 | |||||
대수 | 성명 | 일본어 | 재임기간 | 연수 | 비고 |
1 | 모리 시게오 | 森 茂雄(もり しげお) | 1936년 봄 - 여름 | 4개월 | |
2 | 이시모토 슈이치 | 石本 秀一(いしもと しゅういち) | 1936년 가을 - 1939년 | 3년 6개월 | |
3 | 마츠키 켄지로 | 松木 謙治郎(まつき けんじろう) | 1940 ~ 1941 | 2년 | 1차 |
4 | 와카바야시 타다시 | 若林 忠志(わかばやし ただし) | 1942 ~ 1944 | 3년 | 1차 |
5 | 후지무라 후미오 | 藤村 富美男(ふじむら ふみお) | 1946 | 1년 | 1차 |
6 | 와카바야시 타다시 | 若林 忠志(わかばやし ただし) | 1947 ~ 1949 | 3년 | 2차 |
7 | 마츠키 켄지로 | 松木 謙治郎(まつき けんじろう) | 1950 ~ 1954 | 5년 | 2차 |
8 | 키시 이치로 | 岸 一郎(きし いちろう) | 1955 | 2개월 | 중도해임 |
9 | 후지무라 후미오 | 藤村 富美男(ふじむら ふみお) | 1955 ~ 1957 | 2년 6개월 | 2차 |
10 | 타나카 요시오 | 田中 義雄(たなか よしお) | 1958 ~ 1959 | 2년 | |
11 | 가네다 마사야스 | 金田 正泰(かねだ まさやす) | 1960 ~ 1961 | 2년 | 1차 |
12 | 후지모토 사다요시 | 藤本 定義(ふじもと さだよし) | 1961 ~ 1965 | 5년 | 1차, 팀 최초의 1962,1964년 센트럴리그 우승 감독 |
13 | 스기시타 시게루 | 杉下 茂(すぎした しげる) | 1966 | 4개월 | 중도해임 |
14 | 후지모토 사다요시 | 藤本 定義(ふじもと さだよし) | 1966 ~ 1968 | 2년 4개월 | 2차 |
15 | 고토 츠구오 | 後藤 次男(ごとう つぐお) | 1969 | 1년 | 1차 |
16 | 무라야마 미노루 | 村山 実(むらやま みのる) | 1970 ~ 1972년 4월 21일 | 2년 4개월 | 1차 |
17 | 가네다 마사야스 | 金田 正泰(かねだ まさやす) | 1972년 4월 22일 ~ 1974년 | 2년 8개월 | 2차 |
18 | 요시다 요시오 | 吉田 義男(よしだ よしお) | 1975 ~ 1977 | 3년 | 1차 |
19 | 고토 츠구오 | 後藤 次男(ごとう つぐお) | 1978 | 1년 | 2차 |
20 | 돈 블레이싱게임 | Don Lee Blasingame / ドン・ブラッシンゲーム[65] | 1979 ~ 1980 | 2년 | 팀 역사상 유일한 외국인 감독 |
21 | 나카니시 후토시 | 中西 太(なかにし ふとし) | 1980 ~ 1981 | 2년 | |
22 | 안도 모토오 | 安藤 統男(あんどう もとお) | 1982 ~ 1984 | 3년 | |
23 | 요시다 요시오 | 吉田 義男(よしだ よしお) | 1985 ~ 1987 | 3년 | 2차, 팀 유일의 1985년 일본시리즈 우승 감독 |
24 | 무라야마 미노루 | 村山 実(むらやま みのる) | 1988 ~ 1989 | 2년 | 2차 |
25 | 나카무라 카츠히로 | 中村 勝広(なかむら かつひろ) | 1990 ~ 1995년 7월 23일 | 5년 7개월 | 역대 한신 타이거스 최장수 감독 |
26 | 후지타 타이라 | 藤田 平(ふじた たいら) | 1995년 7월 24일 ~ 1996년 9월 11일 | 1년 2개월 | |
27 | 시바타 타케시 | 柴田 猛(しばた たけし) | 1996년 잔여시즌 | 1개월 | [66] |
28 | 요시다 요시오 | 吉田 義男(よしだ よしお) | 1997 ~ 1998 | 2년 | 3차 |
29 | 노무라 카츠야 | 野村 克也(のむら かつや) | 1999 ~ 2001 | 3년 | |
30 | 호시노 센이치 | 星野 仙一(ほしの せんいち) | 2002 ~ 2003 | 2년 | 2003년 센트럴리그 우승 감독 |
31 | 오카다 아키노부 | 岡田 彰布(おかだ あきのぶ) | 2004 ~ 2008 | 5년 | 2005년 센트럴리그 우승 |
32 | 마유미 아키노부 | 真弓 明信(まゆみ あきのぶ) | 2009~ 2011 | 3년 | |
33 | 와다 유타카 | 和田 豊(わだ ゆたか) | 2012 ~ 2015 | 4년 | 팀 최초의 2014년 클라이맥스 시리즈 우승 감독(시즌 순위는 2위) |
34 | 가네모토 도모아키 | 金本 知憲(かねもと ともあき) | 2016~ |
- ↑ 2014년까지는 토라키 시즌 엠블럼이 따로 있었다.
- ↑ 가장 왼쪽에 있는 호랑이 마스코트이며, 호랑이를 뜻하는 일본어인 토라(虎)와 '행운(lucky)'을 합친 이름이다.
- ↑ 가운데에 있는
꼬맹이작은 호랑이 마스코트. 한신의 어린이 팬을 상징한다. - ↑ 가장 오른쪽의 분홍색 모자를 쓴 호랑이 마스코트, 토라키의 여친이다.
- ↑ 양대리그 출범 이전
- ↑ 사실 이렇게 표현해도 맞긴 맞다. 한신(阪神)은 모기업명이기 이전에 오사카(大阪)-고베(神戸) 일대의 칸사이 지방을 말한다. (阪神을 음독으로 읽으면 한신이다.) 교토(京都)까지 붙여서 케이한신(京阪神)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모기업명에 지역명이 있어 별도로 연고지를 언급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케이스. 지역명 우선표기 전 K리그에서 다른 팀은 몰라도 포항제철 아톰스의 모기업만 봐도 '아, 포항시 연고구나' 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 ↑ 스즈미야 하루히의 우울의 배경이 된 그 니시노미야 시 맞다. 참고로 니시노미야 시는 상당한 부촌이라고 한다.
반대로 옆집 아마가사키는…. - ↑ 전국 고교야구 선수권대회 시즌 한정.
- ↑ 사실 효고현의 동쪽 끝은 아마가사키시이다.
- ↑ 하지만 노란 유니폼을 쓰는 일은 잘 없다. 이는 주황색이 팀컬러인 원수 구단 자이언츠도 마찬가지다.
- ↑ 심지어 한국 영업중인 한큐한신토호 계열사에서도 한신 타이거즈로 부른다(…). #
- ↑ 일본에서도 고급 주택가이고 오사카에서도 가까우며 치안도 좋아 살기 좋은 동네이다. 하지만 경기 있는 날 한신고시엔역을 필두로 한 한신고시엔구장은 헬게이트.
- ↑ 1924년은 십간십이지 상으로 갑자년이기 때문에 여기서 이름을 따왔다.
- ↑ 3일마다 옮겨다니는 것과 본거지와 아주 살짝 먼 곳이지만 1주라도 정착해 있는 것은 체력적으로 천지차이다. 그래서인지 홈개막전을 고시엔이 아닌 교세라 돔에서 치루는 일도 적잖다.
- ↑ 한때 메이지진구 구장의 홈팀인 야쿠르트 스왈로스의 인기는 안습 수준이어서 원정팀인 한신 굿즈 매장이 홈팀 야쿠르트 굿즈 매장보다 먼저 들어왔다고 알려져 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자세한 내용은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 참고.
- ↑ 공식 가사에는 당연히 빠져 있는 부분이다. 오히려 야쿠르트 공식 응원단에서는 지나치게 공격적인 가사 때문에 이 부분을 부르지 말아달라고 요청하고 있다.
하지만 그런 말을 들을 팬들이 아니죠 - ↑ 위에가 한신 마스코트 토라키. 아래가 자이언츠 마스코트 쟈비트.
벤클 5분전 - ↑ 요미우리 마스코트를 바닥에 끌고 다니고 있다(...)
- ↑ 그러나 롯데와는 비교하기 힘든 게, 시원치 않다라고 하더라도 한신은 평소 센트럴 리그에서 그나마 잘하는 축에 들어가는 팀이다.
롯데 더 지못미 - ↑ 자세한 사정은 2014년 일본시리즈 항목을 참조.
- ↑ 대표적인 게 2014 일본시리즈에서 소프트뱅크 나카무라에게 끝내기 쓰리런 맞은 경우, 2014년 7월 요미우리와의 홈경기에서 대타로 나온 다카하시 요시노부에게 역전 홈런을 맞았던 경우 등
- ↑ 사실 강성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이런식의 선수 취급은, 딱히 한신만의 문제도 아니고 일본만의 문제도 아니고, 야구만의 문제는 더더욱 아니다(...)
- ↑ 퍼시픽 리그는
전통의 한신 폭도도 혀를 내두르는치바 롯데 마린즈.33-4자매구단 팬들하고 닮았다. - ↑ 한신이 오랜 기간 칸사이를 대표하는 센트럴 리그 구단이었던 것도 있지만 오사카 부근의 다른 야구 구단들이 다른 지방으로 옮겨가거나, 아예 해체되어 역사 속으로 사라지거나, 연고지나 구단명을 왔다갔다하는 등 밉상짓을 하거나 해서 지역 야구팬들의 관심이 집중된 탓도 있다.
- ↑ 농담이 아니다. 이 두 지역 사람들 성질이 비슷한 것은 물론이고 부산 사람들과도 성질이 비슷하다.
- ↑ 엄밀하게는 노무라가 취임하고 한신팬들에게 희망고문을 시작한 시기부터 이 정도였고, 그 전에 막장 OB감독들이 지휘권을 잡던 시절에는 고시엔의 절반이 빈 자리였다.
- ↑ 보통 큐브보다 정가가 1만 엔 가량 비쌌다.
- ↑ 그런데 닌텐도는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한정 닌텐도 64를 판 적도 있었다. #
- ↑ 여담이지만 이곳은 그 한큐 브레이브스, 즉 현재의 오릭스 버팔로즈가 있던 곳이기도 하다.
- ↑ 애초 최대 라이벌이 자이언츠인데다 한교센이 사라지면 그만큼 인기를 보장하기는 힘들게 된다.
- ↑ 심지어 리그 우승도 먼저다!(전신인 다이요가 1960년, 근데 한신은 1962년;;)
- ↑ 현존하는 일본 구단들 중에서 비교적 빨리 일본시리즈 우승한 어린 구단과 함께 가장 적다.
- ↑ 참고로 이 해 우승은 일본 항공 123편 추락 사고로 유명을 달리한 전 구단 사장 나카노 하지무의 영전에 바치는 선물이기도 했다.
- ↑ 그나마 요코하마는 1960년, 1998년 두 번 한 리그 우승에서 두 번 다 일본시리즈 우승을 차지해서 한신보다 일본시리즈 우승 횟수가 많다.
신생아와 더불어 일본시리즈 우승률 100%. 우승하지 못한다면 나가지도 않는다 - ↑ 히로시마는 총 6회. 1975, 1979, 1980, 1984, 1986, 1991.(볼드체는 일본시리즈 우승년도)
- ↑ 정식 제목은 '한신 타이거스의 노래'(阪神タイガースの歌). 이 곡이 처음 나왔을 당시 제목은 '오사카 타이거스의 노래(大阪タイガースの歌)'였는데, 1962년에 팀 이름이 한신으로 바뀌면서 자연히 제목도 한신 타이거스의 노래로 바뀌었다. 다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식 제목보다는 곡의 시작부분 가사에서 따온 '롯코오로시'라는 통칭을 사용한다. 여담이지만 이 곡의 작곡자인 故 코세키 유우지는 다름아닌 영국동양함대궤멸의 작곡자이기도 하다. 심지어 이 사람은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응원가인 "투혼을 담아(闘魂こめて)" 의 작곡가이기도 한 사람이다(...)
- ↑ 예전 노무현 전 대통령 사망 당시 어느 사람이 잘가라 노무현(さらば盧武鉉)이라는 고인드립 게임을 제작, 그 동영상을 니코동에 올린 적이 있었는데 이 때 BGM이 이 노래의 가사를 노무현, 한국에 대한 조롱이 담긴 가사로 바꿔 부른 버전이었다. 제작자가 한신 팬인지 여부와는 별개로 사실 한신이 위치한 오사카의 경우 재일 한국인이 많이 살고 있는 도시인만큼 혐한도 적지 않기에 해당 니코동 영상도 이런 분위기에서 나왔을 가능성도 있다.
- ↑ 멀게는 후지무라 후미오, 가네다 마사야스 항목 참조.
- ↑ 참고로 1970~1972년에도 플레잉 매니저(감독 겸 선수)를 맡은 바 있다. 그러나 성적 부진을 이유로 1972년 선배 가네다 마사야스에게 감독직을 넘기고 그해를 끝으로 선수로서도 은퇴했다.
- ↑ 한신-오릭스에서 감독이나 프론트 직을 맡으면서 맡은 트레이드나 FA, 외국인 선수 영입 등에서 재미를 본 적이 거의 없고 오히려 내보낸 선수들이 맹활약하는 것으로 악명이 높다. 그래서 일본에서의 별명은 이름 '카츠히로'를 비튼 '마케히로'(...) 이 정도로 한심한 감독임에도 의외로 팀 역사 상 가장 긴 임기를 기록한 최장수 감독이다. 2015년 9월 23일 급성 심부전으로 사망했다.
- ↑ 사실 그 해 우승팀 야쿠르트의 성적은 69승1무61패로 우승팀 치고는 그리 좋은 성적도 아니었고(그래도 일본시리즈에서는 세이부를 상대로 7차전까지 가는 접전 끝에 준우승을 했다.) 1위와 최하위간의 게임차가 9.0게임밖에 나지 않았다. 1위 야쿠르트와 4위 히로시마와는 3.0경기차였고 히로시마조차도 66승64패의 성적으로 우승을 노릴 정도로 대 난전이었다. 이 해 한신도 67승 2무 63패로 2위팀 치고는 승률이 높은 편도 아니었다. 그나마 그 2위도 요미우리하고 공동 2위였다. 참고로 이해 감독은 나카무라 카츠히로. 그리고 이 성적이 나카무라가 무능함에도 불구하고 5년 7개월이라는 팀 역사상 최장수 임기를 기록한 결정적인 이유였다.
그러나 다음해부터 다시 폭망여담으로 괴짜가족의 작가 하마오카 켄지의 작품인 4학년 1반 차렷!에서 소재로 썼는데, 그 해 센트럴리그 우승 팀을 응원한 캐릭터는 11권 단독 표지 출연이란 상이, 꼴찌 팀을 응원한 캐릭터는 1달간 출연 정지라는 벌칙이 걸렸다. 참고로 주인공 카나가와 켄은 한신을, 반장은 야쿠르트 스왈로즈, 키요시는 요미우리 자이언츠를, 부는 요코하마 타이요 훼일즈를, 히데노야 분타는 히로시마 도요 카프를, 코지는 주니치 드래곤즈를 응원했다. 참고로 분타는 오사카 출신인데, 한신은 역시 무리라면서 카프를 응원했다. - ↑ 하지만 노무라 감독 시절에도 3년 연속 꼴찌(666)를 찍을 정도로 성적은 썩 좋지는 않았다. 결국 이
똥같은성적과 아내 노무라 사치요의 탈세혐의로 인한 체포 등이 악재로 겹치며 노무라는 2001년을 끝으로 감독직을 사임했다. 그러나 이 3년 연속 꼴찌 대신의 리빌딩이 막장이던 팀을 재건시켰다고 재평가받으며 최근 평은 그닥 나쁘지 않다. - ↑ 일본시리즈에선 요미우리 자이언츠 OB이자 영구결번 No.1 오 사다하루의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에게 3승 4패로(2연패-3연승-2연패..) 패배하고 말았다.
- ↑ 승률 5할에 근접한 4위가 뭐가 안습이냐고 할 사람도 있겠지만 2011년의 한신은 시즌 전 전문가들의 예상에서 거의 만장일치의 우승후보였다. 게다가 이미 한신이 그 요미우리를 제치고 팀 연봉지출 1위까지 먹은
요미우리더러 돈지랄이라고도 할 수도 없는상황이었다. 그런데 지리멸렬한 경기 내용으로 4위에 그쳐 시즌 막판에는 고시엔에서 열리는 홈경기에서 관중동원 2만명 대를 찍는 등 팬들의 불신도 커진 상태였다. 한마디로 2011년의 두산 베어스 비슷한 상황이었던 것. - ↑ 참고로 라이언 보겔송의 아내인 니콜은 한신 타이거스 구단 CF에도 출연했다.
- ↑ 그 외에는 팀에서 수석코치를 한 번 역임했으며 2010년까지 2군 감독으로 2군팀을 우승으로 이끈 한신의 프랜차이즈 유격수 스타 히라타 카츠오가 강력한 후보로 물망에 올랐다. 하지만 이쪽도 구단 OB이고 외압에 의해 2군 감독에서 강제로 물러나야만 했다.
그래도 한 주에 6일씩 예능을 찍어댄 마유미보단 나을 거 같은데? - ↑ 지금의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 ↑ 최근 설문조사에서 한신을 응원하는 팬수가 요미우리를 앞질렀다고 한다. 요미우리가 그동안 저질렀던 병크도 있고 요미우리를 떠난 팬들도 있기 때문에 그렇다고...
- ↑ 올해야 말로 우승이라던 한신 팬들은 충격과 공포에 빠졌고, 33-4라는 아름다운 스코어는
05년 한신의 약진을 시기하던타 구단 팬들에게 한동안 놀림거리가 되었다. 어떤 선수의 방어율이 3.34이거나 타율이 0.334거나, 어떤 경기의 경과시간이 3시간 34분이거나, 3년만의 34회째 센트럴리그 우승이라거나 여튼 한신이든 아니든 야구 관련해서 334라는 수열이 들어가면 なんでや!阪神関係ないやろ!(머꼬! 한신 상과읎다카이!)라고 달아주는 식.8888577 - ↑ 합스부르크 가문 문장과 BV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구단의 엠블럼 역시 같은 형태다.
셋 다 DTD 테크를 탄 적이 있다는 특징이 있다. - ↑ 그것 말고도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돈지랄에 실망해 반 요미우리 성향이 강한 한신 타이거스 팬이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한신도 돈지랄은 똑같이 하잖아! 히로시마 팬들이 화낸다... - ↑ 업무중 실수를 해서, 보고를 하다가 혼날 걸 걱정하는 다른 사원에게 각각 한신이 대승했을 때와 대패했을 때를 골라서 보고를 하라고 조언해 준다. 결과는 대승으로 기뻐해서 그런 사소한 일은 관대하게 넘어가는 것과 충격적 대패로 인한 허탈감에 그딴 사소한 일에 열 낼 기력도 없다였다.
자기회사 이익에 관계되는 일을 그딴 사소한 일로 치부하는 한신팬의 팬기 - ↑ 대표적으로 이승엽의 한일통산 400호 홈런의 희생양이 되었다. 또한 이승엽이 일본에서 가장 많은 홈런을 뽑아낸 상대팀이 한신 타이거스.
- ↑ 양국 언론에서도 묵직한 직구위주의 투구를 하는 둘을 동일시 취급하는 경우가 많으며 두 선수도 서로에 대한 언급을 몇 번 한 적이 있다.
- ↑ 1985년 한신 일본시리즈 우승멤버로, 한신 팬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던 코치였다. 차기 감독 후보이기도 했고.
- ↑ 중간에 0-0 무승부가 있어 3연속 완봉승에는 실패했다
- ↑ 전북 현대 모터스가 대전 시티즌에게 털린다고 상상해보라. 그런 충격이다. 물론 히로시마는 과거에는 몰라도 2013년 현 시점에서는 엄밀한 의미의 시민구단은 아니지만.
하지만 돈이 없는 것은 사실이다. FA 영입 선수가 현재까지 단 한 명도 없다. - ↑ 참고로 나카타, 츠루오카 신야, 스탠드리지 세명 모두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로 이적했다.
- ↑ 다만 2015년 시점에서 보면, 이와타 미노루, 이와자키 스구루, 고졸 또는 대졸 신인들이 나머지 선발 두 세자리를 메우는 식으로 운용 중이다.
- ↑ 일본 현지팬들 기준으로 봤을 때 오승환이 한신에 있던 지난 2년 동안 가장 상성이 좋은 포수 취급 받았던 선수. 베테랑 선수이며 1포수답게 출장 기회가 많았으나 14시즌에 한신이 아래에서 설명할 공수에서 좋은 활약을 보여주고 있는 루키 선수 우메노 류타로에게 출장할 기회를 만들어주고 있어 츠루오카의 출장 기회가 전보다는 줄어들었다. 하지만 앞서 거론한 듯 오승환과 호흡이 가장 맞는 포수라는 사실을 벤치 또한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츠루오카가 아닌 다른 선수가 선발 출장했을 경우 리드상황에서 9회가 되면 오승환 등판에 맞춰 선발 포수를 빼고 츠루오카로 포수 교체를 했다.
- ↑ 원래 포지션인 포수보다 내야수로 많이 출장했다. 2015 시즌까지만해도 한신 타이거스 공식 홈페이지 선수단 소개를 보면 포수 포지션으로써 소개 되었지만 2016년이 되어 리뉴얼 된 공식 홈페이지를 보면 포수에서 내야수로 확실하게 포지션 변경 한 듯 보인다.
- ↑ 일본 야구는 야수의 공격력보다는 수비력을 높이 사는 부분이 있어 일본 야구팬들 같은 경우엔 선수의 타격 능력이 빈약하다고 해서 딱히 비웃음거리로 여기진 않는다.
- ↑ 세실 필더는 한신에 오기 전에 토론토 블루제이스에서 메이저리그 경기에 출전한 경력이 있으므로 제외한다.
- ↑ 다만 2015 삼성 라이온즈 원정 도박 사건으로 인해 한신 팬들 사이에서는 흑역사로 취급되는 분위기인 것 같다. 도박 자체보다는 조직폭력배와 연루되었다는 사실 때문에.
- ↑ 일본에서는 돈 블레이저(Don Blazer)로 줄여서 불렀으나 본명이 블레이싱게임이다. 따라서 이 분만 영어 스펠링을 같이 표기한다.
- ↑ 바로 위 후지타 타이라의 해임으로 인한 대행이지만 일본어 위키에서는 정식 대수로 세고 있다. 따라서 대행이 아닌 27대 감독이 되는 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