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전쟁범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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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 War crimes of Imperial Japan, Japanese War Crimes, Japanese War Atrocities, Asian Holocost
중국어 : 日军战争罪行, 日本战争罪行
일본어 : 日本の戦争犯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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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매장 당하는 사람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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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저우에서 학살당한 중국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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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년에 일본군에게 참수당한 호주군 레나드 시플릿(Leonard Siffleet)[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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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마철도에서 학대당한 연합군 포로들. 일본군 포로 수용소에 갇힌 연합군 포로들의 삶은 말 그대로 지옥도 이보다는 낫겠다 싶을 정도였다. 물론 물자가 부족한 탓에 그런 경우도 있었지만 대부분 포로를 사람 취급하지 않은 일본군의 문화를 그대로 적용한 결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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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아오모리 포로수용소에서 사망 직전에 발견된 미국인 포로의 모습...

사진으로 남은 것이 이 정도다. 사진기가 없는 곳에서 무슨 일이 더 있었을지는 상상에 맡긴다.

1 개요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중반 일본 제국이 저지른 전쟁 범죄들.

아시안 홀로코스트라는 명칭도 존재한다. 그러나 홀로코스트의 의미는 군대에 의한 학살을 뜻하는게 아니라 인종주의에 기반해 유대인에 대한 산업적이고 조직적인 대량살상을 뜻하므로 아시안 홀로코스트란 단어는 성립될 수 없다.

일본 우익들은 최대한 뜻을 좁혀서 말한다.[5] 일례로 미군 포로들을 술안주 취급한 치치지마섬 식인 사건도 오가사와라 사건으로 축소해서 부르고 있을 정도다.

1998년 미국 히스토리 채널에서 일본군의 전쟁범죄에 대한 다큐멘터리가 방영되어 미국인들과 전세계인들에게 큰 충격을 줬다# 대한민국에서도 이 다큐멘터리가 우리말로 번역되어 시청자들에게 방영되어 국민들에게 큰 충격을 줬다.
국가기록원 다큐멘터리, 태양 아래서의 학살(한국어 번역본)

한국에서는 일제강점기를 겪었고 일본군 위안부와 강제징용 등이 지금도 사회적으로 이슈다. 중국 역시 난징 대학살 사건신멸작전 당시 어마어마한 사상자가 나왔다. 사실 일본군의 만행은 나치 독일 같은 근대적인 문명 국가의 조직이 관료적으로 했다기보다 오히려 관료제의 부실한 부분들이 봉건적인 조직문화와 시너지를 일으킨 병크에 더 가까우므로 정치, 사회학 관련 연구자들에게 집중할 대목이 적다.

매우 철저한 악당들이 냉철한 계산 아래 조직적으로 저질렀느냐[6], 매우 멍청한 악당들이 아무 생각없이 저질러댔느냐 하는 차이이다. 그러나 나치 독일이 철저했다는것은 어디까지나 홀로코스트의 이야기이고 독소전쟁을 보면 둘다 거기서 거기다. 독소전쟁에서는 히틀러가 우생학을 근거로 대놓고 제네바 협정을 무시하도록 명령하자 그냥 독일군이 미쳐 날뛰면서 마구잡이로 광기를 발산했다.

이러한 사실은 오히려 후자의 악당들에게는 자신들의 만행이 그리 크지 않았거나 소수 사례에 국한된다, 내지는 아예 그런 일이 없었다고 주장하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7] 그러나 이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일본 제국의 전쟁범죄는 나치 독일 이외에는 비교할 만한 대상이 없을 만큼 심각한 수준이었다. 역시 소울메이트

2 포로 대우

일본군의 연합군 포로 대우는 개전 초기부터 매우 잔인했고[8] 대다수의 포로들이 교량 건설, 기지 건설 등의 노동에 동원되었다. 이 과정에서 일본군은 단순한 재미로 이들 포로들 중 아무나 지목해서 처형이라면서 죽이기도 했다. 유명한 사진으로 나온 오스트레일리아 군인에 대한 참수 장면은 빙산의 일각.

이 때문에 일본군에게 사로잡힌 포로들의 생존 확률은 서유럽에서의 포로 생존률과 비교해서 너무나 낮은 수치를 보였다.[9][10]실제로 일본 해군 소속 잠수함 I-8의 경우에는 포로로 잡은 미군을 갖은 도구를 사용해서 죽이거나 함정 밖에 세워놓고 잠항하면서 이들을 죽여버리는 짓을 당당하게 했다. (잠수함 I-8에 대해서는 항목 참조.)

또한 버마 철도에서 전쟁포로들이 받은 대우 역시 마찬가지이다. 과거 여기서 포로생활을 했던 군인들이 아우슈비츠굴라그와 비교 했을 정도다. 다만 생산력을 최대로 착취하는 굴라그는 그 자체가 인종말살을 목표로한 나치의 수용소보다는 상대적으로 좋다는 것이 역설. 사실 굴라그는 먼 나라에만 있었던 것도 아니고 대규모가 아닐 뿐이지 우리나라의 삼청교육대나 그와 유사한 인권유린적 수용시설을 생각하면 딱 적절하다.

어디까지나 상대적이지만 중립국이나 적십자를 통한 지속적인 문제제기가 가능했던 서구 연합국 포로들에 비해서 중국이나 만주에서 잡힌 항일 게릴라나 중국군은 거의 대부분 극심한 고문을 당한 뒤 살해되는 것이 운명이었고 그것은 한동안 서구에서도 제대로 연구되지 않았다.

2.1 포로학대

중일전쟁난징 총사령부의 참모대위인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11] 대위는 어느 날 병사들이 중국군 포로를 향해 총검술을 시전하려고 하자 깜짝 놀라서 당장 훈련을 취소시켰다. 그래서 의아해하는 장교 한 명이 물었다.

젊은 대위: "전하, 전하께서는 왜 병사 훈련을 막으시는 겁니까?
다카히토 대위: 그걸 몰라서 묻는가? 왜 포로를 가지고 총검술을 연습하나? 저기 나무허수아비도 있는데 말일세!
젊은 대위: 전하. 이렇게 훈련해야 병사들의 두려움을 없애는 데 효과적입니다. 전하께서는 실전을 안 나가서 잘 모르신가 봅니다.

그 말을 들은 다카히토가 어이 없어 하다가 이렇게 말했다.
다카히토 대위: 그런가? 그럼 내가 그 훈련에 하나만 더 추가하지. 자네가 80m에서 일본도를 들고 달려와 내 목을 치게. 그러면 나는 이 권총으로 30m 정도 왔을 때 사격하지, 한 번 해보겠나? 뭐 일본인이 일본 황족을 죽여도 죄가 되지 않는 절호의 기회이기도 하고 말일세.

그 말을 들은 그 대위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어느날 오노 소위가 말했다.

"너희는 지금까지 아무도 죽이지 못했으니 오늘은 사람 죽이는 연습을 해야겠다. 중국인을 사람으로 생각하지 말고 고양이로 여겨라. 용감해져라! 사람 죽이는 연습을 할 사람은 앞으로."
아무도 움직이지 않자 소위는 자제력을 잃었다.
"이런 비겁한 놈들 같으니! 그러고도 너희들이 대일본 제국의 군인이냐? 그럼 내가 지목하겠다! 오타니, 후루카와, 우에노, 타지마!"
세상에 내 이름도! 나는 떨리는 손으로 총에 총검을 꽂고 소위의 신경질적인 명령에 따라 공포에 질린 중국인 앞에 섰다. 그는 자신이 판 구덩이 옆에 서 있었다. 난 속으로 그에게 용서를 구하며 눈을 질끈 감고 소위의 욕설을 들으며 불쌍한 중국인을 향해 돌진했다. 눈을 뜨니 중국인 포로는 구덩이 속에 떨어져 있었다.
'살인자!'
나는 스스로에게 욕을 퍼부었다.
「역사는 힘있는 자가 쓰는가」본문 中 학살의 숨은 동기들 - 88페이지/아이리스 장[12]의 저서


잠은 얕고 긴장되는 일이었다. 우리는 언제든지 점호 때문에 정렬하거나 특별 작업반에 뽑히거나 매를 맞기 위해 오두막에서 쫓겨날 수 있었다. 지독하게 아픈 환자라도 집합에는 무조건 나가야 했다. 집합은 몇 시간 동안이나 한나절, 심지어는 밤새도록 계속될 수도 있었기에, 아픈 환자들이 죽어 나갔다.
― 잭 초커, 싱가포르에서 포로가 된 영국군 포병.

1943년 3월 19일... 내일 철도 작업을 위해서는 600명이 필요하다... 신발이 없는 사람들도 똑같이 일을 견뎌 내야 한다. 이것은 살인에 버금가는 짓이다. 일본인들은 여기(수용소)와 싱가포르에 엄청난 인력을 갖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들은 이 작업을 하면서 생명이나 건강은 눈꼽만큼도 고려하지 않고, 오직 사람들을 망가뜨리려는 온갖 의도만 드러내고 있을 뿐이다. 이것은 분명히 계획적인, 냉혹하고 무자비한 반인륜적 범죄라 간주할 수밖에 없다.

1943년 5월 17일...요즘 각기병에 걸려 부풀어 오르고, 니코틴산 결핍증이나 이질, 말라리아에 걸리거나 구역질 나는 종기에 시달리며 점차 여위고 가없은 몰골로 변해가는 사람들을 보노라면 일본인에 대한 증오심이 불타오른다. 구역질나고 증오스러운 원숭이들. 목숨이 붙어 있는 한은 이 짐승들에게 항복해선 안 됐다는 것이, 우리 모두가 얻은 쓰라린 교훈이다.

1943년 6월 22일...말라리아 증세로 몹시 아픈(그는 일하다가 실신했다) 할렘 하사는 병실에서 끌려나와 기관병 하사와 다른 일본인들에게 엄청난 매질을 당했다. 놈들은 이런 짓을 했다. 주먹으로 때리기, 얼굴과 머리를 나막신으로 내려치기, 소방관처럼 어깨로 들어올렸다가 땅바닥에 심하게 메치기, 배와 사타구니와 늑골을 발로 차기, 대나무와 나무 그릇으로 머리 때리기... 이 역겹고 잔인한 짓은 몇 시간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할렘 하사는 열이 39.7도까지 오르고 얼굴과 목, 가슴, 사지에 심한 찰과상과 타박상을 입은 채로 완전히 실신했다.

1943년 6월 26일...할렘 하사는 상처 때문에 죽었다. 그는 으로 쏜 것보다도 더 확실히 저 일본인 사디스트들에게 살해당했다.

호주군 에드워드 던롭 중령, 포로 수용소에서 몰래 남긴 일기 中


"너희는 잡석이나 다를 게 없는 것들이니까, 뒈지면 시체는 철로를 놓을 때 잡석과 함께 밑바닥에 깔아버릴거다."
― 제임스 노블, 일본군 포로가 되었을 때 콰이 강의 다리 건설 현장에서 받았던 협박에 대한 회상

...목적은 미국과 영국의 전쟁 포로들을 조선에 억류함으로서, 대부분의 조선인들이 마음속에 품고 있는 유럽아메리카 숭배 사상을 박멸하기 위한 심리적 선전 활동에 기여하는 것 뿐만 아니라, 조선인들에게 우리 제국의 힘을 확실히 깨닫게 해 주는 것입니다.
조선군 사령관 이타가키 세이시로, 총리 도조 히데키에게

일본군에게 붙잡힌 미군 포로가 이렇게 말했다

"제네바 협정에 따르면 내가 당신에게 말할 수 있는 전부는 내 이름과 계급, 군번이 전부입니다."
그러자 일본군 심문관은
"뭐? 제네바 협정?! 우리는 전쟁 중이야! 그걸 몰라?!"
"제네바 협정에는 분명 포로에 대한 규정이..."
닥쳐! 우리는 어디에서나 우리의 규정대로 한다!!"
뺨을 때리며 말을 잇는 심문관.
"한 가지 더 말해두겠는데, 오늘 오후에 널 죽일 수도 있어. 그래도 누가 죽였는지 아무도 몰라. 알겠나!!"
그리고 그 심문관은 그 병사들을 무자비하게 고문한 뒤, 사형에 처했다.
그리고 훗날... 그 심문관은 연합국에게 가장 먼저 포로가 되자
"이보시오! 나는 포로요! 제네바 협정을 지켜주시오!"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 연합국 장교는
"포로가 된 주제에 부끄럽지도 않느냐!!!"라고 고함을 친 뒤, 그 심문관을 함선 프로펠러에 던져버렸다.

구타와 더불어 일본군의 사디스트적인 면이 잘 나타나는 것이 바로 포로학대이다.

일본군은 1930년대 중일전쟁 시기부터 포로에 대한 가혹행위로 악명을 떨쳤다. 일단 난징 대학살을 저지른 명분은 난징 시민들 중에 중국군 잔당이 숨어있다는 것이었다. 저항 없이 항복한 중국군 병사조차도 처리하기 귀찮아서 학살하기 일수였고 포로를 이용한 인체실험도 거리낌 없이 했다.

이는 태평양 전쟁 때에도 마찬가지였는데, 진주만 공습 이후 처음으로 치른 웨이크 섬 전투에서 잡은 포로를 배로 수송하다가 포로가 허락 없이 일어섰다는 이유만으로 즉석에서 목을 베는 만행을 저질렀다. 그리고 필리핀 전투 이후 대규모로 미군-필리핀군 포로를 잡자 이들을 포박한 채로 식량이나 물도 없이 수백 km를 행군시켜 아사하거나 낙오자의 즉결처분으로 만 명이 죽게 하였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바탄 죽음의 행진이다. 이 때 포로를총알이 아까워 총검으로 찔러서 즉결처분했다고 한다.

전후 통계에 따르면 유럽에서 독일군에게 잡힌 서방연합군 포로의 사망률은 대략 1.8%였던 반면 일본군은 무려 약 37%에 달하는 포로 사망률[13]을 보여주었다.[14] 다 게다가 더 섬뜩한 건 저 37%도 개념인 항목의 군인들이 있던 포로 수용소 사망률을 합한 수치다. 대개 개념인으로 취급되는 일본군 지휘자가 데리고 있던 포로 수용소 사망자 수치는 대략 추정치로 0.09%다. 그러니까 만약 개념인 군인들의 포로 사망자 수치를 빼면 무려 88%로 올라간다. 물론 독일군에게 잡힌 연합군 포로의 사망률이 낮은 건 어디까지나 서유럽 한정이고 동유럽의 사망률은 70%가 조금 안 되는 수치다.

포로 수용소에서도 식량보급 없이 중노동에 종사시켜 연합국 포로 수만 명을 죽였고, 사소한 규칙 위반을 이유로 참수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유명한 콰이 강의 다리 건설 현장에서만도 인간이 생존하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음식과 의료 지원도 없었다. 거기다 끔찍한 작업 환경과 거주 시설, 그리고 말라리아, 뎅기열, 이질, 콜레라 등 온갖 전염병이 창궐했다. 결국 약 1만 2천 명의 연합군 포로들과 현지에서 징발당한 9만 명의 강제 노역자들이 죽은 것으로 추정된다. 더욱이 이런 야만적인 포로관리를 조선인들에게 맡게 하여 전후에 전범으로 몰려 연합국이 처형한 조선인[15]들도 꽤 많다.

1945년 항복 직전에도 일부 항복 반대파들은 자국 내에 있는 연합국 포로들을 모조리 처형하여 일본의 의지를 보이자정신나간 소리도 쳤다. 물론 이 때 덴노가 무조건 항복을 받아들여 더 이상 이런 미친 짓은 안 했다. 만일 해당 소리를 덴노가 받아들였다면 분노에 찬 연합군에게 덴노도 절대 무사하진 못했을 것이다.

일본군부는 이런 미친 짓을 무사도로 포장해서 포로는 불명예스럽게 항복을 했으니 비겁하고 한심한 군인이라는 인식을 심었다. 하지만 이거야말로 진짜 일본군들이 착각하는 내용으로 사무라이는 사실 항복 자체를 불명예로 여기지 않는다. 정확히 말해서 싸우지도 않고 항복하는 걸 불명예로 여겼다. 심지어 사무라이가 최고로 명예롭게(?) 죽는 할복도 센코쿠 시대 시미즈 무네하루가 부하들 항복 후 목숨보장을 해주기 위해 할복을 한게 그 시초다. 당연하지만 이건 어느 나라나 비슷하다. 하지만 일본군은 항복 자체를 불명예로 여긴게 문제였다.[16] 게다가 더 웃긴 건 정작 군인답지 못한, 남자답지 못한 비겁하고 한심한 얼간이들을 비웃던 놈들이 정작 그 상황에서 자기네들이 군인답지 못한, 남자답지 못한 비겁하고 한심한 얼간이들이 되어서 살려달라고 애걸복걸이나 했다는 것이다.

정작 진짜 무사도를 지킨 사람들은 다름아닌 일본군 개념인 항목의 군인들이었다. 이들은 사관학교나 각군 대학에서 배운 내용 중[17] 손자병법의 내용을 제대로 숙지했고 심지어 생명 존중이나 도덕을 굉장히 중요하게 여겼다. 그 때문에 항복하더라도 개념인들 눈에는 군인답지 못한, 남자답지 못한 비겁하고 한심한 얼간이들이 아니라 정당하게 싸워서 그 대가를 얻는 현명한 군인들로 보였다.[18] 이 때문에 전자는 항복을 하더라도 자기네들이 포로들에게 했던 학대를 되돌려 받았고 후자는 정당하게 포로 대접을 받았다.

3 학살강간

여자들이 가장 고통을 받았다. 나이에 관계없이 그녀들은 모두 강간당할 운명을 피할 수가 없었다. 우리는 더 많은 여자들을 붙잡기 위해 (중략) 석탄 트럭들을 도시 중심가와 마을로 보냈다. 그리고 트럭마다 강간을 하기 위해 15명에서 20명씩 군인들을 배분했다.

우리가 그녀들을 강간하기만 했다면 차라리 다행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다행이라는 소리는 못하겠다. 우리는 항상 그녀들을 칼로 찔러 죽였다. 죽은 자는 말이 없기 때문이다.
난징 대학살에 가담했던 일본군 114사단 퇴역병 아즈마 시로 등의 증언 中


우린 달아나는 여자들을 바로 죽이지 않았다. 어느 정도 달아나면 그제야 등에 총을 쐈다. 강간할 때는 여자로 보였고 죽일 때는 돼지로 보였다.
― 다코코로 코조 114 사단 병사

전투를 할 때 가장 재미있는 것은 약탈인데, 상관도 제 일선에서는 보고도 못 본 척하니 마음 내키는 대로 약탈을 하는 자도 있었다. 어느 중대장은 "볼 일이 다 끝났으면 문제가 일어나지 않도록 돈을 쥐어 주든지, 아니면 귀찮은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니 그냥 죽이도록 해라."며 몰래 강간을 한 뒤의 처리방식까지 가르쳐주었다. 전쟁에 참가한 군인을 하나하나 조사했더니 모두 강도살인, 강도강간의 범죄자들뿐이다.
― 1939년 2월 육군성 비밀문서 제 404호, '사변지에서 귀환한 군대와 군인의 상황' 中

중국 전선에서 맛봤던 그 맛을 도저히 잊을 수가 없었다.
― 연쇄강간살인마 고다이라 요시오, 전후 7명의 일본인 여성을 강간살해하고 경찰에 체포된 뒤 한 진술에서

러일전쟁까지만 해도 일본군양민학살은 잘 드러나지 않았으나, 실제로 이것이 문제가 된 게 일본군이 러시아 혁명을 저지하기 위해 적백내전에 개입해서 시베리아에 출동한 1917~1921년 이후였다. 이를 일본에서는 자신에게만 유리한 명칭인 "시베리아 출병(シベリア出兵)"이라고 지칭하고 있으나 실제로는 연해주 지역에 일본의 괴뢰정권을 세우려고 했으므로 명백한 침략이었다.

하지만 일본군은 험난한 시베리아에서 고전을 했고 시베리아 현지 사정상 유흥 같은 것은 생각도 할 수 없었으므로, 민간인들을 대상으로 학살극을 벌이거나 강간을 일삼았다. 특히 강간이 문제였는데, 일본군 수뇌부는 강간이 도덕적으로 나쁘다는 생각보다는 성병을 옮겨 병사들의 전투력을 저하시키고 군기에 악영향을 주어 작전능력을 떨어뜨리는 점에 주목했다. 심지어는 시베리아 출병에 참가했던 병사의 50%(!!)가 성병에 걸렸다니, 일본군이 얼마나 막장이었는지 알 만하다.

이것의 해결책으로 내놓은 것이란게 그 유명한 일본군 위안부. 그러나 일본군은 그 이후에도 양민학살강간을 일삼았으며, 막장 전설은 "시베리아 출병" 이후로도 지속되어 만주사변, 중일전쟁, 태평양 전쟁까지 지속된다. 특히 난징 대학살 당시에는 미쳐 날뛰는 일본군들이 무려 8만 명에 달하는 중국 여성들을 강간했다. 이 때문에 지금까지도 영어난징 대학살을 가리키는 또 다른 명칭이 난징강간(The Rape of Nanjing)일 정도다. 이는 중국계 미국인 아이리스 장(1968-2004)이 쓴 책의 제목이기도 하다. 그녀의 부모는 난징 대학살을 피해 중국을 떠나 미국으로 이주했다. <난징의 강간>은 베스트 셀러가 될 정도로 큰 반응을 불러일으켰으나, 아이리스 장은 일본 극우들의 끊임없는 협박을 받아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이래서 쪽바리새끼들이 문제라는거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1943년에 파푸아뉴기니의 Kavieng에선 독일인 목사 약 10여명과 독일인 수녀들을 학살한 일이 있었다! 그것도 매달아 놓고 기관총으로 쏴 죽였다. 이유가 걸작인데, 연합군이 상륙하면 같은 백인이니 협력자가 될 것[19]이라는 것이 이유라고# 게다가 당시 현지에 민간인들이 몇 명 정도 있었는지 대충 파악하고 있던 호주군이 전후 민간인들이 어디로 갔는지 샅샅이 조사하다가 2년만에 학살을 밝혀냈고, 이때 체포된 일본군 장교들은 전부 다 책임회피하고 서로 떠넘기기에 급급했다고 한다.# 일본의 전쟁 범죄 문제에 왜 독일의 전쟁범죄가 있는거지?

또한 1945년 필리핀 전투 당시 격전지 중 하나였던 마닐라에서도 친추축국인 스페인의 영사관에서 민간인들을 살해했다. 이를 미군의 무차별 학살이라는 거짓말을 하며 해명했지만, 당연히 프란시스코 프랑코가 뿔난 것은 안 봐도 비디오였던 스페인은 일본과의 국교를 단절했다.# 당시 스페인은 형식상 중립국이었지만 스페인 내전 당시 프랑코 세력이 독일이탈리아로부터 지원받은 인연 때문에 추축국과 관계가 매우 좋았다. 당연히 일본과도 공식적으로 동맹 관계만 아닐 뿐 매우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다. 이런 스페인이 단교를 해버릴 정도였으니 당시 일본군이 얼마나 막나갔는지 알 수 있다.

현재도 일본 정부는 당시 모든 일을 부정하려고 들거나 혹은 인정해도 어쩔 수 없는 일 등으로 감추려 하나, 그들이 전선에서 공식적으로 위안소를 운영하거나 공개적인 잔혹행위를 장려한 국가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4 식인

일본군은 포로들을 선별하여 매일 1명씩 죽인 후 먹었다. 나는 직접 그 광경을 봤는데, 일본군은 그곳에서 100여명의 포로를 먹었다. 나머지 포로들은 약 80km 떨어진 다른 장소로 데려가 그 곳에서 10명의 포로들이 병사하였다. 거기서 일본군은 또 다시 포로들을 선별하여 먹기 시작했고, 선택된 포로를 오두막으로 데려가 산 채로 살을 몸에서 도려내었다. 그 후 나머지 몸을 구덩이에 버렸고 포로는 구덩이 안에서 죽어갔다.
인도인 포로인 랜스 나익 하탐알리의 증언

산에서 퇴각하는 일본군의 대부분은 약탈자였습니다. 먹을 게 전혀 없었어요. 그래서 우리는 제비뽑기를 하기로 했어요. 진 사람을 죽여서 잡아먹기로 한 거죠. 그러나 진 사람이 도망치기 시작해서 우리는 그를 쏘았어요. 그는 결국 잡아먹혔어요. 당신은 아마도 우리들 중 다수가 현지 여자들을 강간했다고 생각할 겁니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의 굶주림을 채워줄 대상으로 생각되었어요. 우리는 성욕이 없었어요. 강간을 하는데는 힘이 너무 많이 듭니다. 우리가 꿈꾼 것은 먹을 것뿐이었습니다. 나는 사람의 팔과 다리를 가져가는 군인들을 산에서 만났습니다. 우리가 두려워한 것은 게릴라가 아니라 일본 군인들이었습니다.
일본 해군 헌병 대장 노기 하루미치 회고록

우리 부대는 시체를 빼내기 위해 파견되었는데, 희생자의 소지품으로 보이는 3세트의 호주군 웹장비, 부츠 2켤레, 옷 2벌, 다른 잡동사니를 발견했다. 추가 수색으로 00에 의해 00의 것으로 쉽게 인지되는 두피를 찾아냈다. 창자는 통나무에 걸쳐져 있고, 불에 탄 살 조각, 탄약갑에는 간으로 보이는 조각들이 있었다. 300야드 정도 떨어진 오두막 밖에서 불에 탄 뼈가 발견되었다. 100야드쯤 떨어진 다른 오두막 밖에서 다리, 허벅지, 어깨뼈 등이 사람 살덩어리와 함께 발견되었다. 또 다른 오두막 밖에는 00의 머리가 있었다. 두피를 벗긴 머리와 등뼈로만 구성된 그 시체는 바닥에 놓여 있었다. 이 잔해 옆에는 타서 숯이 된 손목과 손이 놓여 있었다.
― A.B.카슨 중위

우리는 300마일 덜어진 곳에 끌려가 하루 12시간 작업을 했죠. 먹을 게 거의 없었어요. 포로들은 풀과 나뭇잎을 먹었는데 뱀, 개구리, 그리고 다른 곤충들까지 먹었어요. 여기서 일본군은 매일 포로 1명을 잡아먹었어요. 약 100명의 포로가 일본군에게 잡아먹혔어요. 나머지는 50마일 떨어진 곳에서 10명이 병으로 죽었는데, 일본군은 또 포로를 고르기 시작했어요. 선택된 포로는 오두막으로 데려가서 산채로 살을 잘라내고는 그대로 도랑에 버렸어요. 선택된 포로에게서 살이 잘려 나갈 때, 버려진 뒤 도랑에서 고통에 못 이겨 내지르는 비명과 울음소리가 들려 왔어요. 울음소리는 점점 희미해졌어요.
― 1942년 2/15 파키스탄 군인 하탐 알리-43년 뉴기니 마노콰리 비행장 건설에 투입.[20]

일본군과 대만인은 따로 식사를 준비했다. 일본군은 고기를 개고기라 주장했다 그는 섬에서 개를 본 적이 거의 없던지라, 매일 개고기를 공급하는 일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PW[21]가 본 고기는 껍질이나 털이 거의 없었다. 그가 아는 개고기는 껍질이 두텁고 털자국이 빽빽하게 나 있는 것이었다. 그는 사람 고기는 구워서 먹어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1944년 6월 PW와 다른 13명의 대만인이 연합군에 투항하러 가는데, 신원을 알 수 없는 약 100명의 일본군이 이들을 가로막았다. 대만인 8명이 죽었는데, 그가 죽은 척 하고 있는 동안 PW는 일본군이 죽은 대만인에게서 빼낸 창자를 자기 음식 그릇에 넣는 것을 보았다. 일본군은 곧 떠났다.[22]

"연합군의 인육을 먹는 것은 허락하지만, 아군의 인육을 먹는 놈은 엄중히 처벌한다."
1944년 12월. 제 18군 사령부 (1946년 12월 11일 도쿄 재판 기록)

식량 부족으로 사람을 잡아먹는 행위는 극한 상황에 몰린 군대에서 아주 흔하며, 일본군의 식인 행위의 원인 또한 식량 부족이 때문에 일어난 것은 사실이다. 실제로 일본군 보급 문제를 보면 알겠지만 보급이 굉장히 어려워졌고, 이로 인해 식인 행위가 많이 일어나게 되었다. 밀리환초 학살사건이 대표적인 예.

다만 너무도 임팩트가 엄청난 한 식인 사건 때문에 이러한 보급 문제가 있다는 점은 거의 잊혀지는데, 관련 사건으로는 1945년 2월 23일에서 25일 사이에 벌어진 치치시마섬 식인 사건이 있다. 이 사건은 사기 진작 차원에서 현지 지휘관이 직접 나서 식인을 한 것이니. 실제로 미국 병사를 잡아먹은 사례가 있고 게다가 아군까지 술 안주로 잡아먹었다. 이는 공문서로도 남아있다. 다치바나 요시오 항목 참조.

미국에서는 일본군식인을 고발한 책이 나왔다. 책의 제목은 <Sorties into Hell: The Hidden War on Chichi Jima>이다. 책의 내용을 간단하게 정리하자면 추락한 미군의 조종사들을 일본군이 살해하여 먹었다는 내용이다. 주로 간과 허벅지 살을 먹었다고 하며 군의관이 해부를 했다고.# 사건이 벌어진 곳은 오가사와라 제도의 '치치시마'라는 섬이다.[23]

아버지의 깃발로 유명한 제임스 브래들리도 이와 관련한 책을 낸 적이 있다. 제목은 <플라이 보이스>.Sorties into Hell: The Hidden War on Chichi Jima, 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1516421 관련서적

5 인간 방패

일본군사이판 전투, 오키나와 전투 등에서 민간인을 인간 방패로 세우는 만행을 저질렀다. 영문 위키피디아 인간 방패 항목 참조.

6 조선인 및 아시아 각국 강제징용 노역

태평양 전쟁 중기가 되면서 조선인들을 강제징용에 동원했는데, 태평양 전선에서는 태평양 해군기지 건설, 내지에서는 석탄 다산지에서의 탄광업, 탄약 및 무기 부품 제조에 동원시켰다.

1947년 일본 대장성 관리국에서 작성한 ‘일본인의 해외활동에 관한 역사적 자료’라는 문건에 따르면, 1934년부터 패전 직전까지 조선인 징용자는 총 612만 6,180명으로, 당시 조선인 전체 인구의 20%에 해당하는 엄청난 인원이 강제로 징용되었다.

징용된 인원들 중 한반도 안에서 강제징용을 당한 사람들은 그나마 다행이였지만, 약 15만명의 인원이 강제로 사할린으로 징용되어 석탄 채굴 등의 강제 노동을 해야 했으며, 심지어 사모아와 같은 적도 근처에 있는 섬까지 조선인들이 강제징용되기도 하였다.

흔히 알려진 교과서적인 내용에 따르면, 이들에 대한 대우는 아우슈비츠 저리가라 할 정도로 매우 박했고, 반항자나 굶어죽거나 산업재해로 죽은 사람이 생기면 갱도 구석에 몰아다가 불태워버리는것은 기본이었다. 징용된 조선인들은 일본, 남양 군도[24], 버마, 사할린으로 끌려가 탄광, 군수공장, 토목공사장에서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으며 하루 12시간 이상의 노동에 시달렸으며, 엄청나게 강도 높은 강제노동과 구타로 조선인들이 처참하게 죽어나갔다. 일본은 공사가 끝난 평양 비행장의 공사장에서는 보안 유지를 이유로 조선인 징용노동자 800여 명을 집단으로 학살했고, 지시마 열도에서도 5,000여 명의 징용노동자를 역시 기밀누설 방지라는 이유로 학살했다. 남양 지방의 섬에 끌려간 조선인의 경우에는 일본군이 후퇴하자 조선인들을 동굴 속에 가두어 무참하게 학살당한 사례도 있으며, 히로시마·나가사키 원폭 투하 당시에는 광산 노동 중에 있던 수많은 조선인이 사망하기도 했다.

또한 맛있는 고기라면서 무언가를 대접해줬다는데 그것이 죽은 동료의 인육이었다는것도 이쪽 생존자 증언담의 클리셰중 하나. 이 경우 밀리환초 학살사건에서 실제로 이런 증언이 나왔다.

물론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일본이 침략한 아시아 각국의 사람들 및 전쟁포로들은 강제 노역을 해야 했다. 중국인의 경우 무려 1천만 명 가량이 강제징용을 위해 동원되었고. 강제징용된 사람들은 미쓰비시와 같은 전범기업이 운영하는 탄광에서 고된 노동을 하거나 일본군 밑에서 노역을 해야 했다. 약 4백만 명에서 1천만 명의 강제징용자들이 일본군 밑에서 강제 노동을 하였는데, 물론 노동은 무척 고된 작업이였고 10만명의 포로들이 미얀마에서 철로 건설 중 사망하기도 하고, 다른 일본군의 점령지로 전출된 27만 명의 인도네시아인들 중에서 고작 5만 7천명만 살아 돌아왔다. 대만도 마찬가지라서 86만명이 넘는 강제징용자가 끌려나가사 40만명이 살아오지 못했다. 그밖에도 대만 원주민들도 12만명이 끌려나가 절반은 돌아오지 못했다.

게다가 일본군은 계속되는 전쟁으로 병력이 부족하게 되자 사람들을 총알받이로 쓰기 위해 한국인 청년들을 전쟁터로 끌고 나갔다. 그렇게 학도병제와 징병제 등으로 21만 명의 조선의 젊은이들이 전쟁터로 끌려나갔고, 그 대다수가 총알받이가 되어 전사했다.

7 일본이 저지른 범죄와 학살들

  • 관동대학살[25]
  • 뤼순 대학살

청일전쟁 당시 일본군이 뤼순을 함락하고 패잔병을 제압한다는 명목으로 관민 2만명을 몰살시킨 사건이다. 당시 일본군은 시체를 파묻기 위한 36명만을 살려두었으며 일본 정부는 이하의 사건들과 마찬가지로 해당 사건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있지 않다.

난징 대학살에 묻힌 감이 있어서 그렇지, 이쪽도 난징 못지 않았다.

정식명칭은 버마 대학살. 그러나 burma massacre라고 검색할 경우, 다른 학살이 나오니 주의바람. 주범은 기무라 헤이타로. 그가 이끄는 군대에 의해 100만여명(최대추산)의 미얀마인이 떼죽음을 당했다. 게다가 잔혹하기로는 위의 마닐라나 난징조차 쌈싸먹는 수준이다.[26] 기무라의 적반하장이 가관인데, 상세는 기무라 헤이타로 항목 참조.

  • 베허호 사건

토네급 중순양함 1번함 토네가 연합국 상선 베허호를 침몰시키고 선원들을 참수한 사건. 자세한 내용은 토네급 중순양함 항목 참조.

사이판의 민간인 중 상당수가 미군에게 투항하지 않고 자살했으며, 일부는 일본군에게 사살당했다. 이런 참극이 벌어진 원인은 쇼와 덴노가 사이판의 민간인들에게 칙명을 내려 자살을 권유했기 때문이다. 자세한 내용은 사이판 전투 자료 참조.

중국식 명칭인 삼광 작전으로 더 알려져 있다.

츠지 마사노부가 주도적으로 행한 학살 사건이다

1930년 타이완 섬에서 일어난 대만 원주민들의 항일 봉기를 무자비하게 진압한 사건

단 민간선박을 격침 시키는 일은 일본만 한 일이 아니고 독일군은 물론이고 미군을 비롯한 연합군도 있기는 하다. 아, 물론 책임이 없다는 말은 절대 아니고

  • I-8의 상선격침, 승무원 학대 후 살해 사건
  • I-177의 호주 병원선 AHS 센터우르 격침사건 참고 자료

공식적으로 태평양 전쟁의 개전이다. 문제는 선전포고가 안 된 상태에서 공격을 먼저 했다는 것.[27]

문자 그대로 사람을 잡아먹은 사건이다. 같은 추축국인 독일은 물론이고 같은 일본군의 장성들 조차도 미친짓이라고 했을 정도이다. 다른 식인과 달리 이건 순전히 재미로 식인을 했기 때문.

라바울 일대에서 벌어진 미네카제급 구축함 아키카제 승무원들에 의한 민간인 학살사건. 학살 이유는 "연합군에게 협력할 가능성이 있다"는 애매한 이유에서였다. 피해 민간인들의 국적도 다양했는데 여기까지 쓰면 흔한 일본의 전쟁범죄겠지만, 어이없는 것은 이들 중 적지 않은 숫자가 독일 국적의 민간인이었다는 것이다. 아무리 민간인이라고는 하지만 동맹국 민간인까지 눈에 뵈는게 없다. 원출전은 다나카 유키의 <히든호러>. 자세한 내용은 영문 위키피디아 아키카제 참조

8 관련된 일본군들

8.1 관련 단체

9 관련 인용구

" 로드 파셸 : 그들은 강한 인종주의에 빠져 있었습니다. 일본군들이 교육받은 것은 그들이 백인들보다도 우월하다는 것이었지요. 인도인들이나 그리고 남향에 사는 여러 민족인들 인도차이나인들 그리고 중국인보다도 말입니다. 그들은 또 백인들이 결국 일본인들을 주인으로 섬기게 될 것이라고 배웠습니다. "
" 사변이 해결되지 않는 근본 원인은 일본인이 진정한 일본인으로서 행동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약탈 폭행을 저지르면서 무슨 일본군이냐. 현지의 일반 민중을 괴롭히면서 성전이란 또 뭐냐. 대륙에서 일본 관민이 이런 식으로 살면서 폐하의 마음에 합치한다고 생각하는건가?"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가 참모대위시절 장성 영관급이 참석한 '전쟁이 끝나지 않는 이유를 찾는' 검토회를 열었을 당시 했던 말.[32]

" 미군필리핀에 진격해 들어오면서 또 다른 일본군의 만행이 발견되었다. 마닐라에서 10만 명의 무고한 인명을 학살한 것이다."
"일본군들은 미쳐 날뛰었어요. 그들은 궁지에 몰리게 되자 정말 미친 사람들처럼 흥분을 해서 죽이고 파괴를 하는데 마치 정신병자들이었죠. 일본군들은 어린애들을 찔러 죽이고 길거리에 나와 있는 부녀자하고 노인들을 총으로 쏴 죽이고 또 집집마다 불을 지른 뒤 안에 있던 사람들이 뛰쳐나오면 그들에게 마구 총격을 퍼부어 대었죠. 그들은 또 엘리베이터에서 소녀들을 떼거리로 잡아서 메이거 호텔로 데려갔는데 전 그 아이들이 강간당하는 날 비명소리를 들었어요."
" 로드 파셸 : 731부대나 100부대 같은 세균전을 담당하는 특수 부대가 있어서 탄저병이나 기타 다른 여러 가지 질병들을 옮기는 세균들을 분무액으로 만들어서 중국인 마을이나 부대에 살포했습니다. 만주국 핑판에 있었던 특별한 의료시설에서 일본군들이 수용한 포로들에 대한 생체 실험은 나치 독일생체실험을 능가했다. 그들은 포로들을 마루타 즉 통나무라고 불렀다. 살아있는 사람들을 폭격이나 총격에 노출시켜 군의관들에게 상처를 연구하게 하면서 탄환의 성능을 실험했다. 사람을 얼려 죽이며 동상치료에 대한 연구를 했고, 살아있는 사람을 산 채로 해부해서 견습 의사들에게 살아 움직이는 인체 기관을 관찰시켰다. 또 매독에서 장티푸스 온갖 출혈열까지 가능한 질병들을 포로들에게 감염시켜 3천여 명의 생명을 빼앗아 갔다."
" 프랭크 푸. 후지타 포로 : 원자폭탄은 모든 전쟁포로들의 생명을 구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미 적이 진주해 들어오기 전에 모든 전쟁포로들을 처형하고 또 모든 흔적들을 없애버리라는 명령들을 이미 하달 받은 상태였으니까요. 그렇게 악질이든 사람들이 원자탄 이후로는 얼굴을 바꾸고는 있죠. 죄 값을 청산해야 할 시간이 다가오면서 그들은 증거가 될 만한 서류들을 산더미 같이 불태웠고 악질 감시병들에게는 잠적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생체실험부대에 있던 포로들과 노무자들은 모두 학살했고 질병에 걸린 쥐들은 모두 풀어 주었다."
"수술대에 눕혀진 포로들에게 마취가 진행됐고 옷이 벗겨졌다. 팔에 꽂은 주사기를 통해 투명한 액체가 몸속으로 흘러 들어갔다. 도노 옹은 “나중에야 그게 바닷물이었으며 혈액 대용으로 주입됐다는 걸 알았다”고 했다. 그 다음 광경은 더 끔찍했다. 포로 몸에서 장기가 하나씩 적출되는 것이 아닌가. 지켜보고 있던 일본 군인 1명이 갑자기 “이놈은 일본을 무차별 폭격했다. 총살을 당해야 할 놈이란 말이다”라고 외쳐댔다. 자신들이 저지르고 있는 일이 정당한 일이라는 변명이었다.[33]"

10 일본의 전쟁범죄를 다룬 작품들

10.1 일본

  • 바다와 독약
엔도 슈사쿠의 소설과 동명의 영화. 큐슈 의대 전쟁포로 생체실험 인육사건을 다뤘다. 영화판은 베를린 영화제에서 황금곰상을 받았다.
  • 악마의 포식
추리소설가 모리무라 세이이찌의 731부대 관련 르포.
작품 전개 중 난징대학살을 묘사한다. 다만 전쟁범죄를 주로 다룬 작품은 아니고, 30~40년대 시기 일본을 배경으로 한 픽션.
일본의 전쟁범죄를 묘사하며, 일본의 전쟁범죄가 궁극적으로 덴노의 탓임을 고발하는 만화.
작중 악당 히카와 쇼고731 부대처럼 생체실험을 하던 전범이였다. 만화판에선 더 자세히 나오는데 만주국을 그리워하며 온갖 생체실험하던 기억을 추억한다. 또한 일본 도쿄에 비스트를 풀어넣어 자위대가 치안유지를 하게 쇼를 벌인다. 또한 자신을 도와주며 정치계에 제일 영향력있는 거물로 나오는 인물 역시 역시 일제침략과 전쟁범죄에 중요 관련자로 나온다.

10.2 일본 밖의 국가

난징대학살을 소재로 한 중국[34] 영화이다. 입장과 국적을 떠나 거대한 사건에 휘말린 다양한 인간들의 모습을 보여주고있다. 중국인들의 애국심을 자극하는 묘사가 조금 있지만, 중일전쟁 시기를 다룬 다른 중국 영화에 비하면 거의 없는거나 마찬가지. 사실상 국가가 미디어를 통제하는 중국의 현실을 감안하면 이해되는 수준이다. 되려 인간적으로 묘사된 일본인 장교 캐릭터가 있어 중국에서 시비가 되기도 했다. 비뚤어진 애국심에 휘둘리지 않으면서도 난징대학살 사건의 참혹함을 잘 전달하여 해외(특히 서구권)에서도 평가가 아주 높다. 로튼토마토에서 무려 93% 스코어를 받았다.
난징대학살 중 많은 중국인을 구한 독일인 욘 라베를 주인공으로 다룬 작품. 독일, 프랑스, 중국의 합작 영화이다. 욘 라베의 당시 행적에 대해선 다른 어느 영화보다 자세히 다루고 있다. 주인공이니 당연한거 아닌가 욘 라베를 재조명하였다는 장점이 있으나 <난징!난징!>에 비해 완성도면에서 일부 비판 하는 의견도 있다.
  • 금릉십삼채(진링의 13소녀) (영화)
난징 대학살을 다룬 중국의 영화. 그 유명한 장예모가 감독하고 크리스챤 베일이 출연했다. 장예모 답게 영상미는 뛰어나지만, 중국군의 애국심을 너무 강조하고 항일의식에 기반한 애국심을 자극하는 것 외에는 별 내용이 없다. 그러다보니 해당 사건의 당사국이 아닌 외국(특히 서구권)의 평가가 박한 편이다. 게다가 주제가 주제이다보니 거의 유일한 장점인 뛰어난 영상미마저도 내용상 어울리지 않는다는 비판이 있다.
731 부대를 다룬 한국 소설.
중국이 제작한 위와 731부대의 마루타 실험을 다룬 영화 시리즈. 해당 항목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마루타를 소재로한 고어영화나 다름없다. 마루타 실험의 끔찍한 실태를 그대로 보여주려는 취지는 좋았지만, 실험자의 해부 장면을 실제 시체 해부 장면을 넣는 등 너무 적나라한 묘사의 영화라서 문제가 되었다. 그러면서도 정작 영화 감독은 역사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해서 또 문제.(...)
  1. 출처: [1]
  2. 출처: [2]
  3. 시플릿 중사가 특수부대원으로 적의 후방에 잠입해 사보타지 및 교란공작을 벌였기에 교전권 없는 스파이일 뿐이라고 볼 수도 있다. 사실 특수부대원은 엄연한 정규군이지만 특전사나 그린베레 등이 펼치는 각종 공작은 교전권이 인정되는 행위라고 보기에 어려운 것들이 많다.
  4. 제네바 협약에 의하면 간첩은 교전권이 없는 존재이므로 즉결처분이 가능하다는 것은 천부당 만부당한 오해이다. 애초에 제네바 협약은 인권존중을 위한 국제규약 중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규약이다. 인권이 존중되는 사회라면 정당방위나 긴급피난 등의 사유가 아니라면 즉결처분이란 말 자체가 말이 되지 않는다. 전쟁 중이라도 다를 것은 하나도 없으며(어떤 경우라도 사형을 집행하려면 약식이라도 법에 따른 재판절차는 필수이다. 미군이 빈라덴을 교전 중에 사살했다면 문제가 없지만, 제압 후에 처형했다면 크게 문제가 되는 것이 그 때문이다. 진실은 저 너머에 교전권이 있고 없고는 포로대우를 받을 수 있느냐를 결정할 뿐이며, 설령 포로대우를 받지 못하더라도 범죄자 대우는 받을 수 있다. 즉 기본적 인권보장은 물론 형사절차에서 범죄자가 가질 수 있는 권리는 엄연히 존재하게 된다. 따라서 일본군처럼 야만적인 방법으로 벌인 처형은 말할 것도 없이 흉악한 살인에 전쟁범죄지만, 기계적으로 간첩을 색출해서 즉결처분하는 것도 전쟁범죄이다. 실제로 미군으로 위장하고 교란 공작을 펼친 독일군들을 미군 헌병이 즉결처분하는 사진도 많은데, 그것도 얄짤없이 전쟁범죄 맞다. 전쟁 중에 전쟁범죄는 워낙 흔하게 일어나는 일이라서 그러려니 할 뿐인 것이고, 또 하나는 똑같은 짓을 해도 승자인 연합국 쪽의 전범들(특히 수뇌부)은 처벌받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현실적으로 잘 지켜지냐는 둘째 치고,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이 인권유린을 결코 정당화시켜 줄 수도 없고(오히려 더 엄격해져야 한다), 국제법에서 그것을 허용하지도 않는다.
  5. 의도는 당연히 범죄행각에 대해 축소, 왜곡을 위해서이다.
  6. 이전에는 우생학적 논리로 저질렀다고 서술되어 있었지만, 우생학은 전혀 논리적이지 않다, 오히려 제국주의자들이 전문가도 아닌 주제에 스스로의 입맛에 잘맞게 이것저것 끼워넣은 탓에 상당히 허점이 많다, 그중 대표적인게 "어떤 생물이 이러이러하게 진화했으므로 다른 생물보다 우월하다", 그렇게 따지고 보면 매우 빠르고 간단하게 분열 생식을 하는 미생물은 일일이 성행위를 하고 10개월 동안 임신 상태로 있어야 하는 인간보다 훨씬 우월하다. 고작 미생물도 이렇게 인간보다 우월한 점이 있는데 같은 인간끼리 서로 누가 더 우월한가를 따지는건 남을 짓누른다는 가학적 만족감을 얻는것 이외에는 아무 의미가 없다.
  7. 비슷한 사례로 나치 독일독소전쟁에서 저지른 범죄도 홀로코스트에 다소 묻혀 있었다.
  8. 당초 제네바 협약을 준수한다고 공언했지만 그걸 지킨 적은 없다고 봐도 좋았고, 또한 전쟁이 진행되던 중에 쇼와 덴노중국군 한정으로는 의무 준수 폐지를 승인해버렸다. 그리고 나중에는 군부에서 영국미국은 악마들의 국가라며 세뇌를 시켜버려서 영국군미군 포로 또한 인간 이하의 대우를 받게 된다.
  9. 일본군의 잔인함에 더하여 태평양 전쟁의 주 무대가 된 중국동남아, 북태평양, 적도 일대의 섬 등의 자연조건이 매우 가혹했다는 점도 크게 작용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 데 일단 이들의 주장에 의하면 일본군부터가 전투 과정에서의 사상자보다 전염병에 걸리거나 열대기후에 적응하지 못해 사망하거나 부상당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물론 이러한 점이 일본군의 잔인한 행위를 정당화할 수는 없으며 더욱이 일본군의 포로 대우는 이런 환경 때문이 아니라 애시당초 포로는 사람이 아니라는 전제 하에서 이뤄진 것이다.
  10. 사실 독소전쟁 당시의 소련군 포로 생존률은 이것보다 더 낮았다. 하긴 이 경우는 거의 인종전쟁에 가까우니.
  11. 다이쇼 덴노와 데이메이 황후의 4남 중 막내. 쇼와 덴노의 막내동생.
  12. 중국계 미국인. 난징 대학살을 널리 알리는 데 힘썼다. 일본 우익의 지속적인 협박을 당하다 권총 자살을 했다.
  13. <2차대전의 숨은 영웅들> P.370쪽에도 언급되어 있다.
  14. 물론 그렇다고 해서 '어? 독일군일본군보다 훨씬 착했네?'라는 착각은 하지 말 것. 독소전쟁에서 독일군이 저지른 만행들은 그야말로 악마스러움 그 자체이며, 포로 사망률은 일본군의 포로 사망률을 뛰어넘는다.(520만명 중 360만명이 사망해서 대략 70%의 사망률)
  15. 물론 이렇게 처형당한 포로관리자가 전부 선량한 조선인이라는 보장은 없다.
  16. 사실 전국시대에도 용감하게 싸우다 결국 백기를 들고 항복해도 칭찬을 받는 경우가 많았다.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도쿠가와 이에야스.
  17. 해군이건, 육군이건 성적이 높건 낮건 상관없이
  18. 근데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군인들은 부하나 적군이 항복하는 건 정당한 댓가라고 생각하지만 정작 자기 자신은 항복하는 것이 불명예라고 생각했나 보다.
  19. 전쟁이 한창일 때 일본 내에서는 동맹국인 독일의 음악조차도 못 듣게 하였다.
  20. 알리도 오두막으로 끌려갔지만 도망쳤고 그는 15일간 정글을 돌아다니다 호주군에게 구조되었다.
  21. 이니셜임
  22. 107 비행장 측량 및 건설부대 2중대, 대만인 노동자 PW, JA는 1944년 8/28 보로키에서 미군에 투항.
  23. 이 때 잡힌 미군 조종사들 중 유일한 생존자가 조지 부시였다. 바다를 표류하다 미군 잠수함이 구조.
  24. 하근찬의 수난이대에서 만도가 끌려간 곳이다
  25. 1923년 간토 대지진 직후에 일본정부가 민심을 달래기 위해 조선인들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약탈과 방활르 일삼는다는 거짓 보도를 하여 수십만 가까이의 죄없는 조선인이 살해된 사건. 다른 사건들과 차이점이라면, 다른 사건들은 일본 정부나 군대가 주도적이었다면 관동대학살은 민간인 자경단이 주도했다는 것. 구체적인 내용은 관동대지진항목 참조.
  26. 그리고 가장 큰 차이. 마닐라의 경우 같은 일본군임에도 학살에 끼들기는커녕 학살을 막고 오히려 대민지원을 한 부대가 있었다. 일본군 삼대오물 중 하나로 유명한 도미나가 교지 휘하의 제4항공군. 게다가 난징대학살의 경우 최고지휘관이 부재중인 상황에서 그 부하들이 멋대로 저지른 학살이었고 나중에 사실을 알게 된 최고지휘관은 그 부하들을 엄하게 질쳑했다.
  27. 사실 선전포고를 하려고는 했다. 다만 암호화 등 여러가지 문제가 겹쳐서 결국 진주만 공습 이후 선전포고를 하는(…) 일본군다운 병크가 일어났다.근데 추축국중에서 선전포고 제대로 한 나라가 있기는 한가?
  28. 버마의 도살자 이 놈을 단적으로 표현하는 말이다.
  29. 치치시마 섬의 식인귀 살아 있는 사람을 술안주 삼아 잡아먹은 사건의 주동자.
  30. 바로 아래 항목의 731부대 책임자다.
  31. 그의 부하들이 독단적으로 저지른 것도 많았지만, 상당수의 전쟁범죄를 묵인하거나 국가원수로서 허가하기도 했다.
  32. 이렇게 말하자 거기에 참석했던 장군이나 장교들이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실전도 안 나간 주제에 소장 계급을 받은 사람보다 멍청한 일본군 장군 하긴 초등학생보다도 멍청한 군대인데... 말 다했지...
  33. 1945년 일본 규슈대학 생체해부 사건’ 목격자 도노 도시오의 인터뷰
  34. 이 영화를 비롯하여, 이하 소개하는 작품들이 제작된 국가에서 '중국'이란 '중화인민공화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