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종(조선)

(자을산군에서 넘어옴)

조선의 역대 국왕
8대 예종 이황9대 성종 이혈10대 연산군 이융
우승우 화백의 성종 어진(상상도)
묘호성종(成宗)
시호
인문헌무흠성공효대왕
(仁文憲武欽聖恭孝大王)
강정(康靖)
능묘선릉(宣陵)
이혈(李娎)
출생지한성 경복궁 동저
사망
장소
한성 창덕궁 대조전
배우자공혜왕후(恭惠王后) → 폐비 윤씨(廢妃尹氏)[1]
정현왕후(貞顯王后)
아버지조선 덕종(의경세자)
어머니소혜왕후(昭惠王后)
생몰
기간
음력1457년 7월 30일 ~ 1494년 12월 25일
양력1457년 8월 19일 ~ 1495년 1월 20일(37년 5개월 1일, 1만 3,668일.)
재위
기간
음력1469년 11월 28일 ~ 1494년 12월 24일(25년)
양력1469년 12월 31일 ~ 1495년 1월 20일.(25년 20일, 9151일.)

1 소개

조선의 제9대 .

조선 전기의 제도 및 문물 정비를 완성시킨 군주로 평가받는다. 실제로 무력을 거의 사용하지 않고 안정적인 유교정치를 실행하였고, 수많은 정치적 유산을 남겼다. 조선 전기에는 세종대왕에 버금가는 위상이 있다. 재위는 25년으로 충분히 길었으나, 38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별명낮에는 , 밤에는 걸주(晝堯舜 夜桀紂).[2]

2 일생

2.1 왕위에 오르기까지

세조의 손자로, 세조의 장남인 의경세자(덕종으로 추존됨)의 둘째 아들. 어머니는 한확의 딸인 소혜왕후(=인수대비) 한씨.

의경세자가 세상을 일찍 떠난 뒤, 어머니와 함께 궁을 나가 사가(私家)에서 생활했다. 군호는 잘산군(乽山君)(혹은 파자하여 자을산군 : 者乙山君)이었다. 조선에서 만들어진 봉호에만 쓰이는 한자이나, 이를 자을이라고 읽으면 더 이상해진다. 성종의 예를 제외하면 다른 예가 없는데, '둘째' 정도의 의미를 가진 군호다.

예종이 20살을 겨우 넘긴 나이에 갑자기 족질(足疾)에 걸려 승하하자, 정희왕후신숙주한명회를 불러들여 후계를 논하게 했다. 중요한 문제라 하여, 흔히 심부름을 하는 내관들이 아니라 승지들이 편지를 전달했는데 이 과정이 여러 차례였다. 누굴 후계로 할지 상당히 오랫동안 고민을 했단 의미다.

결국 결론은, 제안대군은 너무 어리고 월산군은 허약하니, 자을산군이 능력도 출중하고 건강하다는 이유로 조선의 새 국왕으로 지명된다. 왕위에 올랐을 때의 나이가 13세라 아직 친정을 하기에는 이른 탓에, 조선 역사상 2번째로 정희왕후수렴청정을 하게 되었다.

여담으로 성종은 예종이 죽은 당일에 왕이 됐다. 대개 선왕이 죽고 4~6일 정도 시간을 두어 소생하길 기다리는 게 관례인데[3], 취약한 정통성 문제로 서둘러 즉위한 것이다.

야사에는 인수대비가 둘째를 왕으로 삼으려고 술수를 부렸다는 얘기가 자주 나온다. 그런데, 인수대비가 예종을 죽이고 반란을 도모할 작정이었다면 몰라도, 이는 불가능한 얘기다.

2.2 치세와 치적

7년 후, 성인이 된 성종은 친정(親政)을 개시했고, 세종대왕세조의 치적을 계승하여 조선을 발전시키는 데 진력했다. 세조가 편찬을 시작했던 조선의 헌법에 해당되는 《경국대전(經國大典)》[4]을 완성해 반포했고, 《여지승람(輿地勝覺)》, 《악학궤범(樂學軌範)》, 《동문선(東文選)》 같은 서적을 편찬했다. 이런 면모는 세종과 비슷한데, 세조에 의해서 사라진 집현전(集賢殿)을 대체할 홍문관(弘文館)을 새로 창설하고, 독서당(讀書堂)제도를 시행해 인재들의 육성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외적으로도 북방의 여진족 소탕이나 남방의 일본과의 무역 확대 등을 통해, 국력을 크게 진작시켜 전성기를 이루었다. 그런데 여진족 소탕은 여러 가지 문제가 있었다. 아래 문약(文弱)해진 군사력 소항목 참고.

한편으로 훈구파들과 대립 관계에 있던 사림파들을 적극적으로 등용하기 시작했다. 세조에게 “사대부가 잡학(雜學) 따위를 익히면 쓰나요?” 라고 했다가 미움 받아서 중앙에서 밀려났던 김종직이 성종 시절에 중용된 대표적인 사림파다. 이러한 인재등용과 문화발전으로 조선은 안정기에 접어들었고, 임진왜란 전까지의 체제와 문물이 사실상 성종 대에 정비되었다.

그러나 신하들이나 자신의 여자관계에 대해서는 관대하면서도, 부인의 질투와 여성의 재혼에 대해서는 매우 엄격한 잣대를 가지고 있었던 인물이기도 하다. 이를 짐작할 수 있는 사례가 그 유명한 어우동 사건이다. 성종은 어우동에게는 사형을 내렸으나, 정작 그녀와 어울렸던 남성들은 대부분 사면했다.

더욱이 신료들도 반대한 과부 재가 금지법을 통과시킨 것을 보면, 성종의 여성관은 뚜렷해진다. 성종은 '굶어 죽는 것은 작은 일이나 정절을 잃는 것은 큰 일'이라며 과부의 재혼 금지를 《경국대전》에 명시하여 법으로 규정했는데, 이 법은 조선 후기까지 작용한다.

성종 대의 대표적 흑역사는 바로 폐비 윤씨 사건. 공혜왕후 한씨가 세상을 떠난 뒤 원자(元子)를 낳은 숙의 윤씨를 왕비로 봉했지만, 성종이 다른 후궁의 처소를 자주 드나드는 것에 화가 난 중전 윤씨가 투기를 벌였다. 야사(野史)에서는 성종과 중전이 다투다가 그만 중전이 성종의 얼굴에 손톱자국을 내는 바람에, 인수대비의 노여움을 사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그런데 사람들이 잘 모르는 점이 있다. 대비들 중에서 폐비 윤씨를 끌어내리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사람은 바로 정희왕후였으며, 대비들은 초반에는 애당초 윤씨가 중전이 되는 데 적극 찬동한 사람들이라는 점이다. 자세한 것은 폐비 윤씨 항목 참조.

어쨌든 중전 윤씨의 패악이 너무 심해, 1년도 안 되어 폐비론이 대두되었다. 성종은 "그 여자 당장 내쫓아!" 라고 길길이 날뛰었는데, 임사홍이 눈물을 흘리며 세자를 생각하라고 간하여 정국이 바뀌었고, 윤씨는 중전 자리를 지킬 수 있었다. 그러나 불과 몇 달 후 임사홍이 실각하고, 윤씨의 행동은 잠잠해지기는커녕 오히려 더 과감해지고 과격해졌다. 독약을 상비하고 다니는가 하면 "주상의 발자취를 다 깎아버리고 싶구나!" 같은 무시무시한 발언을 하는 등[5], 며느리를 겁낸 인수대비가 수라상 근처에는 아예 얼씬도 못하게 조치를 했을 정도였다. 이래서 결국에는 폐비되고 만다.

폐비 윤씨가 잘못을 뉘우치고 있는데 인수대비가 "나 저년 싫어!" 하고 후궁들과 공모하여 허위 보고를 올려, 성종으로 하여금 윤씨를 죽이게 했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그런데 이는 어디까지나 야사(野史)이다. 실록을 보면 저 일화는 신빙성이 떨어진다. 애당초 성종은 윤씨가 어떻게 지내는지 관심도 없었으며, 윤씨를 예우하라는 상소가 올라오면 콧방귀나 뀌었다. 윤씨의 집에 도둑이 들었는데, 이에 담장을 쌓아주고 이웃들을 조사하라는 상소가 오자, "지가 잘못해서 털린 걸 왜 나보고 난리냐? 이딴 논리면 나라에서 서울의 도둑맞은 집은 다 고쳐줘야 하냐?" 라고 비웃었고, 윤씨가 쫓겨나기 무섭게 윤호의 딸을 중전으로 들이는 등 윤씨의 자리를 완전히 지워버렸다.

그리고 윤씨가 죽은 정황을 자세히 보면, 윤씨의 반성이니 윤씨에 대한 참소(讒訴)니 하는 얘기는 설 자리가 없어진다. 연산군의 나이가 어언 7살이 되자, 경연(經筵) 중에 권경우 등에 의해, "명색이 한때나마 국모였는데 좀 곱게 대우하는 게 좋지 않을까염?" 하는 의견들이 나왔다.

시독관(侍讀官) 권경우(權景祐)가 아뢰기를, "신이 전일에 죄를 지어 외방에 있었다가 조정에 돌아와서도 시종(侍從)의 반열에 참여하지 못하였으므로, 비록 생각한 것이 있어도 감히 상달(上達)하지 못하였습니다. 폐비(廢妃) 윤씨(尹氏)는 지은 죄악이 매우 크므로 폐비하여 마땅합니다만, 그러나 이미 국모(國母)가 되었던 분이니, 이제 무람없이 여염(閭閻)에 살게 하는 것을 온 나라의 신하와 백성들이 마음 아프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떨어진 장막을 버리지 아니함은 말을 묻기 위함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임금이 사용하던 물건은 비록 수레와 말이라도 감히 무람없이 처리를 하지 못하는 것은, 지존(至尊)을 위해서 입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따로 한 처소를 장만하여 주고 관(官)에서 공급(供給)을 하여 줌이 좋을 듯합니다."

성종이 “경들 생각은 어떻소?” 하고 묻자, 대사헌 채수영의정(영사(領事) 겸직) 한명회가, '지존이 썼던 물건도 함부로 안하는 법인데 배우자는 두말할 것이나 있나요?' 라며 윤씨에 대한 예우를 청했다. 한명회가 성종의 옛 장인임을 생각하면, 원칙론에 입각한 발언임에도 상당히 미묘한 발언이다!

채수가 아뢰기를, “윤씨(尹氏)의 죄를 정할 때에 신이 승지(承旨)로 있으면서 이창신(李昌臣)과 더불어 궁내에서 나온 언문(諺文)을 번역하여 그의[6] 죄악상(罪惡狀)을 길이 후세에까지 보이도록 청하였습니다. 그래서 신이 윤씨의 죄악상을 알고 있습니다만, 그러나 이미 지존(至尊)의 배필(配匹)로서 국모(國母)가 되었던 분인데, 이제 폐위되어 여염에 살게 하는 것은 너무나 무람없는 듯하니, 온 나라의 신하와 백성들이 누구라도 애처롭게 여기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또 금년은 흉년이 들었는데, 아침저녁으로 공급되는 것이 또한 어찌 넉넉할 수 있겠습니까? 신은 처음 폐위를 당하였을 때에도 따로 처소를 정하여 공봉(供奉)하기를 청하였었습니다.”
하니, 한명회는 말하기를, "신 등은 전일에는 이러한 뜻을 아뢰었습니다. 대저 지존께서 쓰시던 것은 아무리 미소(微小)한 것이라도 외처(外處)에 두지 못하는데, 하물며 일찍이 국모가 되었던 분은 어떻겠습니까?"

꼭지가 돈 성종이, "이것들이 윤씨의 신하냐? 내 신하냐? 윤씨가 나한테 뭘 했는지 알아? 백성들이 윤씨를 불쌍하게 여겨? 어떤 새낀지 나오라 그래! 그리 불쌍하면 너네들 녹봉으로 예우를 하든가!?" 라고 일갈(一喝)했다.

임금이 언성을 높여 말하기를, “윤씨의 죄는 이루 다 말할 수가 없다. 당초에 그의 시비(侍婢)를 치죄(治罪)하였을 적에, 내 마음에는 폐비를 하고자 하였지마는, 대신(大臣)들의 말이 있었기 때문에 억지로 참아서 중지하고 그가 허물 고치기를 기다렸다. 그런데도 오히려 허물을 고치지 않으므로, 내가 삼전(三殿)에 품지(稟旨)하여 위로는 종묘(宗廟)에 고하고, 아래로는 대신들과 의논하여 폐출(廢黜)시켜 외처로 내보낸 것이다. 내가 어찌 사사로운 노여움이 있어서 그러하였겠느냐? 옛적에는 참소(譖訴) 때문에 폐비를 한 것이 있으니, 여희(驪姬)가 야반(夜半)에 운 것[7]과 같은 일이 이것이다. 나도 전고(前古)의 일을 약간 알고 있으니, 어찌 감히 털끝만치라도 사사로움이 있어서 그렇겠는가? 만일 국모(國母)로서의 행동이 있었다면 마땅히 국모로서 대우하였을 것이다. 이미 서인(庶人)이 되었는데, 여염에 살게 하는 것이 어찌 무람없다고 하겠는가? 그런데 경들이 어찌 국모로서 말을 하느냐? 이는 다름이 아니라 원자(元子)에게 아첨하여 후일의 지위를 위하려고 하는 것일 것이다.”
"윤씨가 나에게 곤욕을 준 일은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심지어는 나를 가리키면서 말하기를, ‘발자취까지도 없애버리겠다.’고 하였다. 그러니 나를 어떠한 사람으로 여기기에 이러한 말을 하였겠는가? 또한 차고 다니는 작은 주머니에 항상 비상(砒礵)을 가지고 다녔으며, 또 곶감(乾柿, 건시)에 비상을 섞어서 상자 속에 넣어 두었으니, 무엇에 쓰려는 것이겠는가? 만일 비복(婢僕)에게 사용하려는 것이 아니라면, 반드시 나에게 쓰려는 것일 텐데,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이 어찌 편안하였겠는가? 나는 당중종(唐中宗) 과 같이 됨을 거의 면하지 못하였을 것이다.[8] 지난번 삼대비전(三大妃殿)에 문안하였더니, 대비께서 말씀하기를, ‘이제 윤씨와 비록 거처를 달리하고 있으나 마음은 편하다’고 하였다. 부모 된 마음으로도 이와 같은데, 그대들의 마음만 유독 어찌 그러한가? 그대들의 말이 이러하니, 나를 당중종(唐中宗)처럼 만들려는 것이냐? 또한 윤씨는 내가 거처하는 곳의 장막을 가리키며 말하기를, ‘소장(素帳)이다.’[9]라고 하였으니, 그의 부도(不道)함이 이런 유(類)인데 목숨을 보전한 것만도 다행이다. 이제 내 나이 젊으나 사람의 장수(長壽)와 요사(夭死)는 알기 어려우니, 만일 일찍이 계책을 도모하지 아니한다면, 한(漢)나라 여후(呂后)나 당(唐)나라 측천무후(則天武后) 같은 화(禍)가 없겠는가? 그러니 후일의 화를 미리 헤아릴 수는 없다. 공자(孔子)가 아내를 내쫓았는데, 그가 죽자 이(鯉)가 통곡하였는데, 공자가 그르게 여겼다. 원자(元子)도 효자(孝子)가 아니라면 그만이지만, 효자가 되고자 하면 어찌 감히 어미로 여기겠느냐? 비록 나의 백세(百歲) 뒤에라도 저를 어찌 감히 내가 거처하던 집에 살게 하겠는가?"[10]
"(중략)…윤씨의 죄악에 대하여 마땅히 대의(大義)로써 단죄(斷罪)해야 하겠지마는, 내가 참고 그를 단죄하지 않았으니, 그가 목숨을 보존한 것만도 다행이다. 그런데 공봉(供奉)하고자 함은 어째서인가? 그대들이 만일 그 가난하고 헐벗음을 불쌍히 여기는 것이라면, 어찌하여 그대들의 녹봉(祿俸)으로써 공급하지 않는가? 윤씨가 궁(宮)에 있을 때에 항상 가난하지 않다고 말하여 호부(豪富)함을 자랑하였으니, 어찌 굶주리고 헐벗는 데에 이르렀겠느냐? 그대들은 경연관(經筵官)으로서 나의 뜻을 알 만한데도 말하는 것이 이와 같으니, 그대들은 윤씨의 신하인가, 이씨(李氏)의 신하인가? 나는 알지 못하겠다. 이는 반드시 윤씨의 오라비 등 불초(不肖)한 무리들이 붕반(朋伴)을 인연하여 서로 퍼뜨려서 말하기 때문인 것이다."

이렇게나 강하게 윤씨에 대한 적의를 드러내 보인 다음에, 윤씨가 살아있다간 이런 얘기가 또 나올 것이고, 윤씨 성격상 자신이 죽은 이후에 조정이 고요할 리가 없다고 판단, 신하들과 며칠에 걸쳐 논의한 후, 8월 16일에 이세좌를 보내서 사사(賜死)시켜버렸다. 《성종실록》의 1482년 8월 11일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성종이 자신의 짧은 수명을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임금이 모화관(慕華館)에 거둥하여 열무(閱武)하고, 드디어 경복궁(景福宮)에 나아가서 삼전(三殿)에 문안하고 궁으로 돌아왔다. 영돈녕(領敦寧) 이상 의정부(議政府)·육조(六曹)·대전(臺諫)들을 명소(命召)하여 선정전(宣政殿)에 나아가서 인견하고 말하기를,

"윤씨(尹氏)가 흉험(凶險)하고 악역(惡逆)한 것을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당초에 마땅히 죄를 주어야 하겠지만, 우선 참으면서 개과천선하기를 기다렸다. 기해년(己亥年)에 이르러 그의 죄악이 매우 커진 뒤에야 폐비하여 서인(庶人)으로 삼았지마는, 그래도 차마 법대로 처리하지는 아니하였다. 이제 원자(元子)가 점차 장성하는데 사람들의 마음이 이처럼 안정되지 아니하니, 오늘날에 있어서는 비록 염려할 것이 없다고 하지만, 후일의 근심을 이루 다 말할 수 있겠는가? 경들이 각기 사직(社稷)을 위하는 계책을 진술하라."

하였다. 정창손(鄭昌孫)이 말하기를,

“후일에 반드시 발호(跋扈)할 근심이 있으니, 미리 예방하여 도모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고, 한명회(韓明澮)는 말하기를,

“신이 항상 정창손과 함께 앉았을 때에는 일찍이 이 일을 말하지 아니한 적이 없습니다.”

하였다. 정창손이 아뢰기를,

“다만 원자(元子)가 있기에 어렵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만일 큰 계책을 정하지 아니하면, 원자(元子)가 어떻게 하겠는가? 후일 종묘와 사직이 혹 기울어지고 위태한 데에 이르면, 그 죄는 나에게 있다.”

하였다. 심회(沈澮)와 윤필상(尹弼商)이 말하기를,

“마땅히 대의(大義)로써 결단을 내리어 일찍이 큰 계책을 정하셔야 합니다.”

하고, 이파(李坡)는 말하기를,

“신이 기해년(己亥年)에는 의논하는 데 참여하지 못하였습니다만, 대저 신첩(臣妾)으로서 독약을 가지고 시기하는 자를 제거하고, 어린 임금을 세워 자기 마음대로 전횡(專橫)하려고 한 죄는 하늘과 땅 사이에 용납할 수 없습니다. 옛날 구익부인(鉤弋夫人)은 죄가 없는데도 한무제(漢武帝)가 그를 죽인 것은 만세(萬世)를 위하는 큰 계책에서였습니다. 그러니 이제 마땅히 큰 계책을 빨리 정하여야 합니다. 신은 이러한 마음이 있는 지 오래 됩니다만, 단지 연유(緣由)가 없어서 아뢰지 못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후일에 그가 발호(跋扈)하게 되면 그 후환이 어찌 크지 않겠느냐? 측천무후(則天武后)가 조정의 신하들을 많이 죽였던 것은, 자기 죄가 커서 천하(天下)가 복종하지 않을 것을 알았기 때문에 자기의 위엄을 보이려고 한 것이다.”

하였다. 이어서 좌우에게 묻기를,

“어떻게 하여야 하겠느냐?”

하니, 재상(宰相)과 대간(臺諫)들이 같은 말로 아뢰기를,

“여러 의견들이 모두 옳게 여깁니다.”

하였다. 이에 곧 좌승지 이세좌(李世佐)에게 명하여 윤씨를 그 집에서 사사(賜死)하게 하고, 우승지 성준(成俊)에게 명하여, 이 뜻을 삼대비전(三大妃殿)에 아뢰게 하였다. 이세좌가 아뢰기를,

“신은 얼굴을 알지 못하니, 청컨대 내관(內官)과 함께 가고자 합니다.”

하니, 조진(曺疹)에게 명하여 따라가게 하였다. 이세좌가 나가서 내의(內醫) 송흠(宋欽)을 불러서 묻기를,

“어떤 약(藥)이 사람을 죽일 수 있는가?”

하니, 송흠이 말하기를,

“비상(砒礵)만한 것이 없습니다.”

하므로, 주서(注書) 권주(權柱)로 하여금 전의감(典醫監)에 가서 비상을 가지고 가게 하였다. 저녁이 되자 전교하기를,

“이세좌는 오지 말고 그 집에 유숙하라.”

하였다.

그리고 추가로 베푼 예우라 해봐야 군인들을 보내 관 나르는 것이나 돕게 하고, 4년 후 무덤이 무너져 여우들이 몰려와 뼈를 갉아먹는 지경에 이르렀다기에, 무덤 보수와 사당 건립을 허용한 정도다.

한가지 주목할 점은, 연산군은 이때 세자의 자격으로 이 결정이 내려질 때 현장에 있었다는 것. 과연 연산이 무슨 생각을 했을지… 여하튼 이 일이 조선 왕조의 가장 어두운 시기를 촉발시키는 갑자사화의 동인(動因)이 된다.

폐비 윤씨가 용안(龍顏)에 손톱자국을 냈다는 이야기도 일견 이해가 간다는 의견도 있다. 성종의 부인은 폐비를 포함해서 무려 12명이었다. 자녀는 12남 16녀(28명)로 자녀 복 많은 조선 군주 랭킹 3위. 외척들의 세력 확장을 막기 위함이었다는 말도 있지만, 정실부인의 입장에서는, 유달리 성격이 모나지 않다 해도 웃으며 넘어가기는 힘들다. 실제로 랭킹 1위인 태종은 정실(正室)인 원경왕후 민씨와의 사이가 무척 안 좋았다고 한다.

폐비 윤씨는 죽으면서, 자신은 "엄 귀인과 정 귀인의 모함 때문에 죽는다"고 했지만, 현대에 와서는 사실 그 책임은 엄 귀인이나 정 귀인이 아닌 성종과 인수대비에게 있었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또한 남성은 자유롭게 여색을 즐기나, 여성에게는 조금의 질투도 허용되지 않았던 유교사회 가부장제 이데올로기의 모순에 책임이 있다는 주장이 현대에 와서는 많이 대두되고 있다.[11][12]

그러나 윤씨에 대한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살펴보면, 윤씨의 당시 행적이 역모(逆謀)죄를 물어, 심한 경우는 가문이 멸문(滅門)당해도 할 말이 없을 정도였던 것이 사실이다. 여성으로서의 조신한 덕목을 강조하는 《내훈(內訓)》을 쓴 인수대비의 눈에는 더더욱 곱게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단순히 질투만 하는 것이었다면, 원경왕후정종이 두둔했던 것처럼 동정론이라도 있었을 텐데, 그걸 넘어서 역모나 다름없다고 해도 좋을 언행까지 했으니…[13]

2.3 유교정치의 실현

성종 치세는 총 3개의 기간으로 나뉜다. 1기는 수렴청정과 세조 때 임명된 수많은 공신들을 주축으로 구성된 원상제(院相制)[14]로 인해 왕권이 약해진 시기다. 이때 대신의 세력이 세조 이래로 최고점을 찍으며, 정난(靖難)[15], 좌익(左翼)[16], 익대(翊載)[17], 좌리(佐理)[18] 공신1등인[19] 한명회를 일빠로 훈구세력이 등장한다.

허나 김범 저(著)의 《사화와 반정의 시대》에서 지적하듯이, 사화(士禍)는 훈구와 사림의 대립이 아니라, 대신(大臣)과 대간(臺諫)의 대립이었다. 1970년대 식민사관 탈피를 목적으로 역사연구가 활발해졌을 때, 사학자들이 사화를 사림과 훈구의 대립이라 규정하였으나, 같은 집안에서 배출된 대간과 대신이 서로 대립하였다는 것을 볼 때, 특정 집안이나 학파의 갈등이라기 보단, 해당 직무의 역할과 권한의 대립으로 보는 게 보다 타당하다.

2기는 성종7년 친정(親政)을 시작하면서다. 이 시기에는 원상제를 혁파하고, 경연에서 대신의 참여를 줄이고, 사헌부(司憲府)와 사간원(司諫院)의 대간(臺諫)을 적극 활용해 대신을 견제하였고, 실제로 큰 소득을 얻었다. 여러 구조적 문제가 해결되었으나, 대간의 권세가 커지면서 새로운 폐단이 드러났으니…

3기는 성종이 지나치게 커진 대간의 세를 누르고, 위축된 대신의 입지를 늘리는 데에 집중했다. 대간의 권세가 커지면서 근거 없이 상대의 인격을 문제 삼아 대신을 탄핵하였고, 영의정마저도 대간이 무서워 국정운영에 대해 발언하기를 꺼려했다. 하여 경연에서의 대신 참여 비중을 높이고 대간의 탄핵을 받아들이지 않는 등 여러 노력을 하였으나, 결국 근본적으로 그 폐단은 해결되지 못했다.

2.4 문약(文弱)해진 군사력

사실 폐비 윤씨, 사림파 등용 등에 묻히기 쉬운데, 성종 때 조선의 군사력이 약해지기 시작했다.

윤필상[20]이 장수들이 진법을 모르고 있다고 상소를 올리기도 했고, 성종 때 왜구 토벌 성과가 약해지고, 보루각의 관리가 소홀해졌으며, 6진이 약해져 있었고, 병선을 조운(漕運)으로 쓰는 등, 군사력이 약해지는 현상들이 있다.[21]

그리고 성종의 업적(?)들 중 하나인 여진족 토벌은 그 내막을 자세히 보면 심각하게 어이없다. 여진족을 토벌하려 병사 4만을 모았는데, 대간(臺諫)은 군량이 부족한 초겨울이라며 이에 반대하였으나, 성종은 이 말을 듣지 않고 허종에게 명을 내렸다. 허종이 이끄는 토벌대가 여진족 토벌을 위해 출정했는데, 만난 여진족들은 200명. 조선의 군대는 4만임에도 불구하고 여진족 겨우 4명만 사로잡았다.

이후 여진족의 마을에 쳐들어갔지만, 마을엔 사람이 없었다. 결국 거기서 여진족을 토벌하려고 진지를 세웠으나, 병사들이 얼어 죽고 군량이 부족해서 아사하고 탈영이 일어나는 막장사태가 발생했다. 결국 허종은 후퇴하고 전과(戰果)를 위조했다. 이에 대간이 허종의 논공행상을 반대하기도 했다. 이것과 비슷한 피로스의 승리인 제2차 대마도 정벌은, 승리라고 보기엔 애매하긴 해도 왜구를 많이 잡았으며, 왜구들의 침략을 완화시켜주는 성과라도 있었는데, 성종의 여진족 토벌은 그런 것도 없다.

결과적으로는, 성종의 변명 불가 실책들 중 하나다.

2.5 믿는 도끼에 발등?

성종 하면 단연 사림(士林)을 어엿한 정치 세력으로 부상시킨 인물이고, 김종직을 비롯한 이들을 중용했으며, 대간(臺諫) 세력을 크게 키워 조선식 비판 정치를 활성화시킨 인물로 유명하지만, 정작 자신이 키운 대간 권력에 의해 거의 죽기 일보 직전으로 스트레스를 받았다.

조선 초만 해도 대간은 미래의 대신들이고, 대신들은 과거의 대간들로 이해관계가 상당부분 일치해 정계와 언론계가 유착해서 초장부터 싹이 노랬는데 세조 때는 정청(政廳)에서 관이 벗겨지고 상투를 잡혀 끌려 나가는 등 대우가 매우 처참해서, 거의 구실을 못 하던 상황이었다. 이에 성종은 사림들을 대거 등용하여 대간을 채웠고, 유명무실해진 사헌부, 사간원의 권력을 회복시키며, 새로이 홍문관에게도 비판 기능을 부여하여 비판을 활성화시켰는데, 초기에는 대간이 대신들을 견제하며 깨끗한 정치를 불러일으키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런데… 대간들이 하는 언행이, 성종이 아니었다면 거의 살아남기 힘들 수준의 것들이 대단히 많았다. 대간들의 자질이 부족하여, 간언의 내용이 너무나 비논리적이고 불합리한, 비판을 위한 비판으로 변질되어버렸다.

활을 쏘거나 시를 쓰면, 취미에 빠져 나랏일 팽개칠 징조라고 태클, 창경궁에 구리통으로 수조를 만들었더니, '너 사치하는구나!' 라고 태클을 걸었다. 그래서 구리통 수조를 뜯어내고 석재 수조를 만들었는데, 전자보다 후자에 든 비용이 더 많았다. 또 성종의 무신(武臣) 등용 정책에는 '온 조정을 군인들로 채울 생각이냐?' 라고 태클을 걸었다. 그 바람에 무신 등용 정책은 대실패로 돌아갔고, 중종반정의 주도자인 박원종을 마지막으로, 무신 출신으로 힘을 썼던 사람들은 반정공신이라서, 신경진까지 합쳐도 없다… 거기에 중종 시기, 박영문 신윤무 등이 무신의 난을 꾸몄다는 혐의로 죽으면서[22] 무신의 힘은 안드로메다로… 또 역관, 의관에게 동, 서반 직을 주려 했더니, '위아래도 없는 왕이구만' 하고 태클을…

심지어 말년에는, 다리 셋 달린 이 태어나자, "요물이 태어나는 것은 왕이 여자의 말을 들어 정치를 한 탓이라고 옛말에 있으니, 왕이 여자의 말을 들었구나!" 라고 몰려와서 왕에게 반성을 요구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성종이 "이 미친 놈들이 미신을 가지고 왕을 핍박하네? 내가 잘못을 했어야 반성을 하지, 하지도 않은 것 가지고 반성을 하라니 어쩌라고?" 라고 항변하자, 대간들이 "하라는 반성은 안 하고 어디서 말대꾸예요?!" 라며 막무가내로 물러서지 않았다. 성종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지만, 그렇다고 대놓고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인지라, "오냐, 요즘의 재이(災異)는 다 내가 불러들였다, 이것들아!" 라고 신경질적으로 대꾸하는 일까지 있을 정도였다.

비슷한 시기, 성종이 대간들의 터무니없는 요구를 자꾸 거절하자, 대사헌(大司憲)이 "요즘 우리 말이면 다 물리치네?" 라고 불평을 했다나?

영조의 경우에는, 아니 되옵니다 한 마디만 상소에 있어도, "저 새끼 당장 섬으로 유배 보내버렷!"이라고 외치는 것이 다반사였는데, 성종은 짜증은 낼지언정, "오냐, 내가 잘못했다"면서 끝내 양보를 해버렸다.

그래도 유학적 수양을 잘 갖춘 성종이었기에, 대간들의 말을 수용 않는 경우는 있었어도 그들을 처벌하지는 않았기에, 대간들은 아무 말이나 하면서 권세를 누릴 수 있었다.[23] 하지만 대간의 이런 행동은 분명 정도(程度)를 넘은 것이었고, 이후 연산군의 철퇴를 맞게 된다. 특히 성종에게 제일 딱딱거렸던 정성근 등은 끔살당한다.

2.6 인물됨과 일화

학문을 좋아했다. 통역이 마음에 안 든다고 직접 중국어를 배워버렸다…[24]

또 백성들의 삶을 돌아보기 위해 미행(微行)을 많이 했다고 알려져 있다. 야사(野史)에는 성종의 미행과 관련된 이야기들이 여러 전하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어우동과의 이야기. 성종이 어우동을 만나려고 미행을 했다는 야사와 소문이 전할 정도면, 성종이 꽤나 미행을 많이 했다는 것은 사실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25] 다만 정사(正史)에서의 성종은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어우동에게 단박에 교살형을 내렸다.[26]

또한 미행 중에 한 군졸이 왕에게 보내는 상소 비슷한 것을 쓰는 걸 보고, 그 군졸에게 큰 상을 내리고 벼슬을 주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물론 사실인지는 알 수 없다.

항목 서두에 언급한 별명이 나온 이유는, 정치는 잘하고 학문에 뛰어나며 영민(穎敏)하지만, 여색을 밝혔기 때문이라고 한다. 성종은 25년의 재위기간 동안 총 12명의 왕비와 후궁 등에게서 16남 12녀를 얻었다. 물론 자식의 숫자로는 조선 왕들 중 첫째가 아니다. 태종이 18년 재위하며 슬하에 12남 17녀를 두어 1명이 많다. 세종, 중종도 자식이 20명이 넘는다. (“성군(聖君)? 성군(性君)?”, 두 얼굴의 왕 성종(成宗) 바로가기)

놀라운 것은, 성종은 38세라는 이른 나이에 승하했는데, 그 나이에 28명의 자식을 얻었다는 것은, 시대적 상황을 감안한다 해도, 태종을 제외하고 이 분야에서는 권위자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공식적으로 거느린 여인은 성종 12명, 태종 12명, 세종 6명, 중종은 10명이다. 성종 때는 일종의 교조주의(敎條主義)[27]가 팽배해, 서예[書], 활쏘기[射] 같은 육예(六藝)[28]도 나라를 올바로 다스리는 데에 방해된다며 대간들이 상소를 올렸을 정도였다.

한번은 현판을 친필로 써서 내린 적이 있었는데, 대간들이 잡기에 빠져 나라 망치게 한다고 상소질해서, 이에 열 뻗친 성종이 현판을 뜯어 불태워 버린 적이 있을 정도. 심지어 성종은 매사냥을 좋아했는데, 대간들 등쌀에 하지도 못 하고 뒷간에서 대간들 몰래 조용히 매 날리기나 해야 했다고 한다. 그러니 술과 여자 말고는 무엇 하나 제대로 즐길 수 없었던 처지에 몰린 것이다. 게다가 왕의 호색(好色)은 곧 후사(後嗣)를 많이 볼 수 있는 결과가 되기에, 연산군 같은 경우가 아닌 다음에야, 그 이전부터 왕조국가라면 대부분 장려되는 덕목이었다. 그러니 대간들 등쌀에 울화통이 치민 성종으로서는, 대간들도 장려하면 했지 태클을 걸지는 않던 그런 쪽, 즉 여색(女色)으로 울화를 풀거나 할 수밖에 없었을 거라는 해석도 충분히 근거를 가진다.

어머니 인수대비에게 눌려 살았다는 말들이 많은데, 애당초 폐비 윤씨 사사는 성종이 주도한 일이었고, 성종은 인수대비가 거의 거품을 물고 길길이 날뛰며 반대한 금승법(禁僧法)[29]을 통과시킨 왕이었다. 불교에 매우 심취했던 인수대비가 아들을 마구 주무를 수 있는 어머니였다면, 성종 대(代)에 조선 시대 사상 가장 혹독한 숭유억불 정책이 시행됐을 수 있었을까?

동물을 유달리 좋아했는지, 궁궐에서 동물들을 많이 기르기도 했다. 고양이, 사슴, 노루, 는 물론 심지어 백조원숭이까지 길렀다고 한다. 성종 때가 성리학적 유교정치의 전성기였던 만큼, 이는 당시 정계에 진출하고 있던 사림 간관들에게 크게 비판받기도 했고, 성종이 간관들과 이 문제로 설전을 벌인 기록도 있다.

특히 성종의 원숭이류큐 왕국에서 보내온 원숭이였는데, 이 원숭이에게 옷을 입히는 문제로 좌부승지와 설전을 벌였다. 좌부승지 손비장은, "원숭이에게 입힐 옷 한 벌로 하나의 백성을 추위에 떨지 않도록 할 수 있습니다" 라는 논리로 공격하자, 성종은 "외국에서 바친 것을 추위에 떨게 하는 것은 도리가 아니니 불가능하다"며 반박했다. 그러나 신하들의 융단폭격을 버티지 못하고 결국 놔준 동물들도 많다고 한다. 실록에서도 사슴이나 매를 놔주었다는 기록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이 동물 문제로 시비를 걸 때마다, "난 원래 동물 안 좋아하니까 괜찮다"라는 말을 빼놓지 않았다고…

연산군 시절에도 일본에서 원숭이를 보내온 적 있었는데, 연산군이 말하길, "선왕(先王) 시절, 저놈들이 앵무새 따위를 바친 적이 있었는데, 돈만 들지, 백성들의 삶에 도움이 된 거나 있었는가? 그냥 돌려보내거라" 라고 하여, 폭군으로서의 연산군만 아는 사람들로서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고 할 정도로 훌륭한 발언을 한 적이 있었다.

풍류를 좋아한 사람답게 술도 좋아했는데, 할아버지 세조처럼 신하들과 술자리를 자주 가졌다. 그런데 최악의 술버릇이라고 하는, 아랫사람에게 술 먹이기를 성종이 즐겨 했다고 전해진다. 특히 할아버지처럼 신하들에게 벌주(罰酒)를 먹이는 것을 좋아했다고 하며, 신임 관료들을 불러 신고식을 하는 것 마냥 술을 먹이고 신임 관리들을 조롱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성종은 겨우 38세에 세상을 떠났는데, 간단히 말하면, 2016년을 기준으로 이효리, 김종민과 같은 나이에 죽은 셈이다. 실록에 의하면 천식이 낫지 않아 고생하던 터에 배꼽 밑에 갑자기 종기가 생겼고, 이게 급격하게 악화되었다고 한다. 이에 인수대비는 "주상의 환후가 깊어지니 종묘에 가서 제사를 지내라"고 명했고, 대규모 사면령을 내리는 등의 조치를 취했지만, 별 효과는 없었다.

이후 성종은 약간 상태가 나아지자 신하들을 불러 이야기를 나누었다. 성종이 신하들에게 "며칠 먹지 못 해 좀 야위었소" 라고 하자, 신하들이 "걱정하지 마십시오. 곧 나아질 것입니다" 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상태는 계속해서 악화되었고, 결국 운명을 직감한 성종은 연산군에게 대리청정을 명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 그런데 그 아들도 30살에 세상을 등진다. 둘째 아들은 장수하지만.[30][31]

3 사후

그가 죽은 후 묘호를 정하는 데에 약간의 소요가 있었는데, 성종(成宗)과 인종(仁宗)이 경합했다. 오히려 "시법에 '백성을 편하게 하고 정사를 바로 세운 것'을 成이라 하는데, 이걸론 대행왕의 성덕을 다 표현 못합니다" 라든지, "成은 仁에 미치지 못하옵니다" 라는 발언이 속출하는 등, 인종으로 하자는 여론이 매우 우세했다.

정승들의 "중국의 묘호를 범하는 것[32]은 옳지 않으며, 성종도 뜻 자체로는 훌륭한 이름입니다" 라는 의견과, "내 찾아보기로 인종이라는 묘호가 처음 쓰였던 건 송나라이던데, 송나라 인종은 물러터져서 오랑캐의 화를 겪었다더라. 그게 울 아빠의 성덕에 견준다고 생각해?" 라는 연산군의 의견이 맞아떨어져 결국 성종으로 결정되었다. 그런데 막상 성종은, 묘호는 황제만이 쓸 수 있는 것인데, 제후국인 조선이 묘호를 쓰는 것은 참람하다고 생각하여 선왕들의 묘호도 삭제하려고까지 했던 적이 있었다.

당대는 물론 후세의 선비들에게 군주의 모범으로서 굉장히 높이 평가받았다. 하다못해 조선 중기 이후 간관(諫官)들의 주무기들 중 하나가 "세종대왕과 성종대왕의 예를 본받으소서"였을 정도. 오늘날까지 이 평가는 이어져서, 그의 치세기간을 조선의 제도가 완성되었고 국력도 전성기였던 태평성대로 평가되곤 한다. 성종의 인품과 능력을 칭송하는 야사가 여럿 전해지는 것을 보면, 백성들이나 재야 선비들의 인식도 좋았던 모양이다. 세종 대(代)에는 천재지변도 있었고, 아직 나라의 기틀이 완전히 다져진 것이 아니었기에, 자연 토목공사 등이 많아서, 현대 한국인들이 생각하는 태평성대와는 약간 거리가 있었다.

다만 조선 정치체제의 문제점이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한 시기도 바로 성종 대(代)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성종은 의지와 능력을 고루 갖춘 임금이었기에, 그 문제점이 표면화된 것은 아니었지만, 그 뒤를 이은 연산군의 실정 이후, 조선의 문제점은 더욱 노골적으로 드러나게 된다.

신하들에 의해 추대된 중종은 신하들의 눈치를 살펴야 했고, 강력했던 형이 쫓겨나는 꼴을 본지라 왕권 강화에 집착하여, 조광조, 남곤, 심정, 이행, 이항, 김안로 등을 번갈아 내세우고는, 이후 차례로 숙청하기를 반복했다. 뒤를 이은 인종은 1년도 재위 못하고 승하했고, 명종은 문정왕후가 꽉 잡고 있어서 제대로 된 정치를 하지 못하다시피 했다.[33] 선조가 즉위 후에야 이이 등이 주도가 되어서 이런저런 중기적 문제들을 고쳐 나아가고 있었으나… 남쪽에서 왜군이 침략해왔다.

박시백의 성종에 대한 평가를 요약해보면, 성종은 비록 사림이나 선비들에게 높이 평가받기는 했지만, 선비들의 평가처럼 세종에 비견되는 군주로 평가받을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그러나 본래 수성군주는 화려하지 않은 법이며, 권력화한 대간들의 지나친 잔소리를 대할 때의 스트레스를 삭이면서, 힘으로 밀어붙이고 싶은 유혹을 억제하고 제도를 범하지 않은 것은 한편으론 높이 평가해줘야 할 대목이다.

여담으로, 성종실록편 작가 후기를 보면, 성종이 "세종 할아버지와 비교해서 부족하지 않은 임금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 라고 말하는 그림이 있다.

정현왕후의 릉

능은 서울특별시 강남구 삼성동에 위치한 선릉(宣陵). 서울 지하철 2호선선릉역은 이 능에서 역명을 따 왔다. 흔히 옆에 있는 중종의 '정릉'과 묶어서 '선정릉'이라고 부른다. '선정릉'이라는 명칭은 분당선서울 지하철 9호선의 환승역이 될 선정릉역의 유래가 되었다. 이곳에는 '삼릉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계비인 정현왕후 윤씨와 동원이강(同原異岡)[34] 형식으로 묻혀 있다. 할아버지 세조는 검약을 강조해 자신의 능에 병풍석(屛風石)을 설치하지 않도록 했지만, 성종의 능은 병풍석이 설치되었다. 선릉은 유난히 수난을 많이 겪었는데, 임진왜란 때 정릉과 함께 파헤쳐지는 수난을 당하기도 했으며 인조 때에는 화재를 2번이나 겪기도 했다.

4 사극에서

5 기타

우연의 일치이겠지만, 고려성종(고려)과도 비슷한 점이 상당히 많다.

우선 아버지가 왕이 아니었으며, 위에 형을 둔 상태로 왕위에 올랐고, 사후에 받은 묘호도 같고, 특히 유교를 바탕으로 한 정책을 펼쳐 나라의 기틀을 잡았다는 공통점도 있으며, 심지어는 사망했을 당시의 나이도 같다.(38세). 맹꽁이 서당에서도 이를 가리켜 신묘한 우연의 일치라고 표현했다. 그리고 덤으로 사후에 암군이 즉위해 나라 꼴이 막장이 되었다는 것도(...)

6 관련 항목

  1. 연산군이 제헌왕후(齊獻王后)라고 추숭했으나 중종반정 이후 삭탈되었다.
  2. 그런데 밤의 걸주라는 설 자체가 거의 야사에만 의존한 기록이라 신빙성이 의심된다. 성종은 유학적으로 완벽한 군주가 되어야 한다는 대간의 압박으로 거의 죽을 맛인 삶을 살았다. 웃기는 건 대간을 육성한 게 성종 본인이다. 그 탓인지는 몰라도, 실제로 성종은 문종보다도 일찍 죽었다. 다만 성종의 경우, 소년기에 왕위에 올라 재위기간이 제법 길었기 때문에, 또 아들인 연산군이 어느 정도 장성한 상태였기에 부각되지 않는 편이다. 술을 많이 마시고, 여색으로 인한 정기 고갈로 피를 자주 토했다는 기록이 전한다.
  3. 무지나 미신 같은 것이 아니다. 현대의학에서도 아직 살아있는 사람을 사자(死者)로 판명하는 경우가 있으며, 옛날에는 죽었다고 판단해 관에 넣어 매장하는 과정에서 살아나는 경우도 많았다. 이런 경험이 영향을 미친 듯한 관습들이 세계 각지의 문화권에 존재한다.
  4. 악명 높은 과부재가금지법(寡婦再嫁禁止法)이 여기에 포함되었다. 신료들이 삼가(三嫁)금지법, 즉 3번 결혼하는 것을 금지할 것을 주장하고, 재가(再嫁)금지는 대부분 반대했는데도 불구하고, 성종이 밀어붙여서 통과되었다.
  5. 야사에서도 윤씨를 옹호하는 말만 많은 것은 아니다. 윤씨가 평소 투기가 심해, 평소 궁녀들에게 "누구든 상감을 모시는 날에는 나에게 죽을 줄 알아라"는 말을 하곤 했다고 한다.
  6. 여기서의 "그"는 오타가 아니다. 근현대 이전까지 우리말에서는 남자나 여자나 다 "그" 라고 칭했었다. "그녀"라는 표현은 사실 억지로 끼워맞춘 표현으로, 어법상으로도 맞지 않는 말이다.
  7. 진나라 헌공의 첩으로, 자신의 아들을 태자 삼으려고 다른 자식들을 모함을 해, 신생을 죽이고 중이(진문공)을 내쫓은 것을 말한다.
  8. 항목을 보면 알지만, 당중종은 아내 위황후와 딸 안락공주에게 독살당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 비유는 성종이 윤씨가 자신을 독살할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뜻이다.
  9. 장례를 치를 때 을 덮는 흰 천을 말한다(!). 죽이고 싶다는 뜻과 다름 아니다. 이는 심각한 죄로서, 대역죄로 처벌받아도 딱히 할 말이 없다.
  10. 채수는 이에 대해, "쫓겨난 어미라면 범인(凡人)들도 오히려 어미로 여기지 못하는데, 하물며 원자이겠습니까? 다만 신 등은 특별한 처소에다 높이 받들려는 것이 아닙니다. 예전 금(金)나라의 임금 (亮)은 천하의 폭군(暴君)이었습니다. 금나라의 임금 (雍)이 즉위하였을 적에 양은 실지로 원수의 사람이었지마는, 양의 후비(后妃)인 도단씨(徒單氏)에 대하여는 또한 배고프고 헐벗게 하지 아니하였습니다. 근자에도 이영(李瓔, 금성대군에 연류(連類)되어 죽은 화의군)과 이준(李浚, 구성군)은 죄가 종묘·사직에 관계되었으므로 국가에서 외방에 추방을 하였지마는, 또한 그에게 옷과 음식을 공급해 주었습니다. 그러니 이제 윤씨도 유폐(幽閉)시키되 옷과 음식은 공급함이 좋겠습니다" 라고 답했다. 하지만 성종은 또 디스.
  11. 반론이 만만치 않다. 사실 이런 풍조는 역사적으로도, 세계적으로도 유사한 양상을 보인다. 마리 앙투아네트와 함께 유명한 루이 16세는 왕비인 마리 앙투아네트 외의 여자들에게 별로 눈을 돌리지 않았다. 그러나 애처가라는 등의 찬사는커녕 많은 조롱을 받은 바 있으며, 급기야 앙투아네트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을 부추기는 결과를 낳았다. 요약하면, "왕비가 오죽 드세고 못됐으면 왕이 눈치가 보여 후궁 하나 못 들이겠는가"였다. 이는 많은 나라에서도 대동소이(大同小異)했었다. 우리나라의 경우, 일반 반가(班家)에서 남편이 부인 외에 첩이 없으면, 부인이 악처라서 저렇다는 비난을 받기 일쑤였고, 남편의 출세에 걸림돌이 되는 경우까지 있어, 부인 쪽에서 남편에게 으로 여자를 골라주는 게 미덕 비슷하게 인식된 적도 있었다. 당시의 문화적, 시대적, 지역적 환경 등을 배제하고, 현대의 특정 이데올로기, 특정 사조(思潮)에 입각하여 역사를 재단하면 곤란하다.
  12. 그러나 이 반론이라는 것도 결국은 남성의 입장이다. 애초에 조선 후기에 통용되던 소설들을 보면, 분명 여성들에게 있어 남성의 축첩을 허용하는 것이 미덕처럼 인식되지만, 실질적으로 그네들의 마음이 결코 그렇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이는 사씨남정기를 비롯하여 수많은 소설들에서 질투심으로 분란을 일으키는 여성 인물들이 항상 나타나는 것을 통해 단적으로 알 수 있다. 물론 이들이 징벌을 받거나 마음을 돌이키는 식으로 결말이 나긴 하지만, 반대로 그러한 인물들이 항상 나온다는 것은 당대 사람들(특히 여성들)의 마음 속에는 남성의 축첩을 고깝게 보는 시각이 분명히 있었음을 보여준다.
  13. 윤씨는 왕을 죽이고 싶다는 식의 언행과, 독살(毒殺)을 염두에 둔 듯한 행동을 한 게 사실이다. 근대 영국이나 유럽 각지에서도 아내의 남편 살해는 화형(火刑)으로 처벌한 경우가 많으며, 현대의 법률에서도 배우자의 살인을 계획하거나 교사(敎唆)하면 최고 사형까지 받을 수 있다. 거기다 상대는 왕이었다. 윤씨가 왕의 얼굴을 손톱으로 긁어 상처를 냈다는 게 야사(野史)에 기록되기까지 했을 정도로, 윤씨의 패악은 지독했던 것이다. 그런데도 윤씨의 목숨을 붙여준 채 내쫓기만 한 성종은 정말 대단한 아량을 베풀었다 볼 수도 있다. 왕의 옥체(玉體)에 상처를 내는 건 대역죄(大逆罪)에 준하는 처벌을 내리는 게 당연하던 시대였다.
  14. 원상(院相)이란, 즉위한 국왕이 너무 어리거나, 유고(有故) 등으로 직무를 제대로 이행할 수 없을 때, 재상들이 왕을 보좌하여 국정을 돌본 것에서 유래한 임시관직이다. 성종 초기 실제 국정운영은 수렴청정을 통해서가 아닌, 원상(院相)을 통해서 운영되었다.
  15. 단종1년 계유정난(癸酉靖難) 성공 후 수양대군의 의지로 책봉
  16. 단종이 물러나고 세조가 왕이 되자 책봉
  17. 세조 붕어 후 병조판서 남이의 역모를 진압했다는 명분으로 책봉
  18. 성종 옹립 후 이에 일조한 이들에게 책봉
  19. 조선역사상 4개의 공신에 모두 1등으로 책봉된 이는 한명회 외에 전무후무하다…
  20. 연산군갑자사화에 희생당한 대신들 중 하나
  21. 현대적으로 말하면, 군함을 화물선으로 쓴 셈이다. 다만 판옥선 등장 이전에 조선의 주력 병선인 맹선(猛船)은 원래가 조운 겸용이었다.
  22. 둘 다 정국1등공신인데도 이 지경이니 나머지는 더 이상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23. 사림(士林)을 군자의 도를 추구한 선비, 혹은 청렴한 선비집단 등으로 생각하는 경우를 많이 본다. 그러나 역사를 자세히 보면, 사림은 경쟁에서 밀려났기에, 후일 기회를 봐서 권력에 도전할 속셈으로 우린 열심히 학문을 닦는 사람들이라는 티를 내려고 애쓰던 무리들이 모인 집단일 뿐이라 해도 그리 틀리지는 않는다. 사림의 공격대상이 된 훈구(勳舊)세력, 특히 관학파(官學派)에는 탐욕은 있었을지언정 경험과 실무능력을 갖추고, 요즘 말로 하면, 일종의 과학기술, 즉 잡학(雜學)에도 일가견이 있거나 긍정적인 사람들이 많았다. 그에 비해 사림은 실무능력과 경험이 모자라고, 학문을 깊이 닦았다는 근자감으로(그 학문이 그저 현실과는 너무나 거리감이 큰 성리학...), 현실을 모른 채 내 생각이 옳다는 고집만 센 사람들이 많았다. 사실 사림이 권력의 중심이 된 후, 조선이 점점 더 엉망이 되어간 것은 사실이다.
  24. 역관(譯官)이 양반 아래의 중인계급으로 분류되기도 했었던 시대상황을 감안해보자. 다만 당시 양반들도 중국어를 포함한 외국어를 배우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굳이 왕이 중국어를 배울 필요는 없었다. 역관이나 중국어를 아는 관리들이 옆에서 해석해주면 그만이었다. 왕은 한문만 읽고 쓸 줄 알면 사신이랑 필담을 나눌 수 있었다. 게다가 왕이 사신을 만나는 것은 그리 일상적인 상황은 아니었다. 조선시대에 외국어를 배우는 것은, 지금처럼 문법을 배운다기보다는 음운을 습득하는 것이 주목적이었다. 세종만 하더라도 중국어 음운습득을 위해 자제들을 모아 중국으로 보내려 했을 정도였다.
  25. 성종이 대간들의 횡포에 시달린 탓에, 그 스트레스를 여색을 탐하는 것으로 풀었다고 한다면, 그리 많이 미행을 나갈 시간이 있었을지는 의심스럽다는 의견도 있다.
  26. 판단은 각자의 몫이겠지만, 어떤 판단을 내린다 해도, 증거가 부족하기에 추측의 범주를 벗어나지는 못 한다는 것에 주의하자. 옛 역사를 당시의 시대적 상황 등은 보지 않고, 현대적 시각으로만 재단하여 옳다 그르다 판단하는 경우가 적잖이 있다. 그런 시각을 성종에게 적용시켜보면, 분명한 증거불충분이다. 그리고 현대의 법률에서는 증거불충분인 경우, 피고에게 유리한 쪽으로 판단하는 것이 원칙임을 덧붙여둔다.
  27. 현실 등을 배제하고 원리, 원칙만을 고집하거나, 종교나 종파의 교조(敎條)를 맹목적으로 믿고 따르려는 것.
  28. 육예(六藝)란 고대 중국에서부터 내려온 6가지 덕목(德目), 예(禮), 악(樂), 사(射), 어(御), 서(書), 수(數)의 육학(六學)을 말한다.
  29. 승려가 되는 것을 금하고 승려를 환속(還俗)시킨다는 법률. 거의 불교말살정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30. 성종은 학문과 정치에 너무 지나치게 부지런했으며, 더구나 운동같이 건강관리는 전혀 하지 않았으며 성종이 너무 여자를 좋아한 것도 영향이 있어서 성병에 시달렸을 만큼 건강이 좋지 않았던 면도 있다.
  31. "그까짓 종기?" 라고 하지는 말자. 항생제의 등장 이전까지, 전 세계적으로 종기 때문에 죽는 경우는 정말 많았다.
  32. 명나라 4대 황제 홍희제의 묘호가 인종.
  33. 문정왕후가 섭정을 거둔 이후부턴 윤원형을 조지는 모습을 보이지만, 역시 왕권 강화와 외척 약화를 빼고는 이렇다 할 게 없는 편이다.
  34. 홍살문(紅箭門)이나 정자각(丁字閣)을 위시한 부속시설을 짓지 않고, 광중(壙中)의 자리만 둘로 나눠서 만든 능. 왕과 왕비를 합장할 때 쓰이기도 했다. 세조가 석실의 무익함을 강조하며 비용을 줄일 것을 강조한 데서 비롯되었다고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