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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월 23일 (월) 01:02 기준 최신판
{{틀:한국의 역사}}
한국의 역사 | ||||
성읍국가 한반도 역사 기록 시작 | → | 고조선 / 부여 / 진 | → | 원삼국시대 |
고조선 | ||
단군조선 | 기자조선 | 위만조선 |
고조선 古朝鮮 | ||
width=100% | ||
존속기간 | ?[1] ~ BCE 108 | |
위치 | 한반도 북부 일대 및 남만주.[2] | |
수도 | 요동 일대 → 왕검성 | |
정치체제 | 군주제 | |
국가원수 | 단군(檀君) → 후(侯)(?) → 왕(王)[3] | |
언어 | 고대 한국어 | |
종교 | 한반도 토착 종교 | |
종족 | 예맥, 한족[4], 한족[5], 숙신 등 | |
성립 이전 | 부족 사회(성읍국가)[6] | |
멸망 이후 | 한사군, 옥저, 동예 |
목차
1 고대의 국가
지금의 한반도 북부와 중국의 동북지방(요동, 쑹화강 유역)에 걸쳐 존재한 고대 국가. 《삼국사기》에서는 등장하지 않으며, 《삼국유사》에서 신화적 인물인 단군이 세운 한민족 최초의 국가로 등장한다. 중국의 사서 중에서는 사기(역사책)와 정사 삼국지, 한서, 후한서 등에 고조선에 대한 내용이 일부 수록되어있으며, 삼국유사에서도 위만조선에 대해 다룰때 이들 중국 사서를 인용하고 있다. 본래는 조선(朝鮮)이라 불렸으나, 《삼국유사》 에서는 위만조선과 구분하기 위해 기자조선과 단군조선을 따로 고조선으로, 그리고 일연의 시대에는 아직 이성계의 조선왕조가 없었으므로 위만조선을 그냥 조선이라고 일컬었다. 현재는 기자조선설을 부정하여 위만조선을 기존의 고조선과 연속된 실체로 파악하려는 취지와 14세기 말에 고조선 계승을 표방한 조선과 구분하기 위한 목적으로 고조선을 쓰는 용법이 정착되었다.
고조선의 영향력 혹은 문화권을 추측하게 해주는 유물로는 비파형 동검과 미송리식 토기가 있다. 다만, 현재 단군조선의 실재를 직접적으로 확인할 만한 유물은 아직 출토되지 못하고 있다. 사실 특히 남한에 남은 고조선의 유적이라고 해봐야 고조선의 유적인지 아닌지에 대해 의문이 많은 마니산 참성단 정도나 남아있는 실정이고,[7]그렇다고 고조선 시대로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설화나 전설도 그리 많이 전해지는 것도 아니어서 단군신화를 통해서 고조선 사회가 어떻게 돌아갔는지에 대해서 대략적으로 알수있기는 하지만, 구체적으로 고조선이 어떻게 성장했으며 어떤과정을 거쳐서 쇠퇴했는지에 대한 이야기들이 후세에 제대로 전해지지 않아 고조선의 역사 전체를 알아낼수없기에 문헌의 부족이라는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일단은 한국인들의 한민족의 역사의 시작이자 시초지만 남아있는 기록이 그리 많지 않아서[8] 오랜 연구가 이뤄졌음에도 여전히 의문점이 많고 일단 고조선의 것으로 추측되는 유적들이 발굴되면서 일부 의문점들이 해소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왕궁이 발견된다거나 한건 아니기 때문에 그 실체가 아주 뚜렷하게 밝혀진건 아니다.
1.1 출현 시기
강역 논란과 함께 고조선에서 가장 주목을 받는 논란. 이것에 따라 한국의 역사 길이가 좌지우지 되기 때문이다. 참고로 학게에서는 전근대 시기에 단군조선으로 보던 시기에 고조선(혹은 고조선의 전신으로 추정되는 성읍국가들)이 형성되지 않았다고 보며 전근대 시기에 기자조선이 다스리던 시기 에 와서야 고조선 혹은 고조선의 전신이 되는 국가가 형성되었다고 보고있는것이 대세이다.(물론 그와 별개로 기자동래설은 후세의 창작으로 보는것이 대세이다.)
1.1.1 기원전 20세기설
일단 널리 알려진 기원전 2333년이라는 년도는 동국통감의 기록에 등장하는 년도다. 삼국유사는 중국의 요임금이 즉위한 지 50년 되던 해에 고조선이 건국된 것으로 기록하는데 이를 서양 역법으로 환산하면 기원전 2308년이 된다. 성종 16년에 편찬된 동국통감에는 고조선 건국년도를 '당요 무진년'이라 기록하는데 여기로부터 송나라 소강절이 지은 '황극경세력'에 나오는 상원갑자법(上元甲子法)에 의해 단기의 시작점을 기원전 2333년으로 산정한 것이다.
문제는 단군 신화 자체가 역사 기록이라기보다 구전된 설화에 가까우며, 요임금 시간대로 건국의 시기를 묘사한 것도 신빙성이 떨어진다는 점이다. 애초에 요순시대가 동아시아 한자문화권에서 이상적으로 여기던 시대라 이 시기를 건국년도로 언급했을 가능성이 크며, 요임금 자체도 전설의 인물이라 요순시대로 건국년도를 설정한 여말선초의 기록은 신뢰하기가 힘들다.
2007년 개정된 과거 국정 국사 교과서에서는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응하여 고교생들에게 민족주의적 역사인식을 제고하기 위해 한국의 청동기 기원을 기원전 10 ~ 15세기에서 기원전 20세기로 수정, 철기 시대를 기원전 4세기에서 기원전 5세기로 수정했다. 교과서의 설명에 따르면 청동기 시대에는 국가의 성립이 시작되었고 고조선은 이러한 소규모 국가를 통합해 등장한 것이므로, 실질적으로 고조선의 연대 또한 올라간 것이다. 고조선 성립에 대한 정확한 자료는 사실상 없고 사료라고 남아있는 몇 가지 자료들도 신화와 역사가 혼합된 형태이기 때문에 서술이 매우 모호하며 청동기 연대만 올려도 고조선 연대까지 올라가는 것 또한 이러한 경향 때문이다.
사실 한국의 청동기 시대의 연대가 올라간 것에는 동북공정뿐만 아니라 일본 사학계의 자극이 크게 작용하기도 했다. 일본에서 기원전 10세기 경의 각목돌대문토기(덧띠새김무늬토기)가 발굴되자, 일본 사학자들은 이것이 한반도와는 관계가 없이 일본 문화가 청동기까지 발전한 증거라고 말했다.[9] 이 토기가 조몬 문화와 야요이 문화의 연관성을 알려주는 유물이라며 야요이 시대의 기원을 기원전 3세기에서 10세기까지 끌어올리는 학설도 제기되었다. 그리고 그 뒤 한국에서 기원전 20세기 ~ 15세기의 덧띠새김무늬토기가 발견되었다. 한반도 전역에서. 당연히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문화가 건너갔다는 설은 더욱 공고해졌고, 일본이 차려 놓은 연대 인상 밥상은 고스란히 한국 사학계가 먹어치웠다. 일본 안습 물론 덧띠새김무늬토기를 신석기 후기의 토기로 보는 시각 또한 많으며, 양국 사학계를 제외한 사학계에서는 후자의 시각이 더 강한 듯 보인다. 결국 연대를 올리고 싶었던 두 동아시아 국가의 국뽕합작 대표적으로 영어로 한국 청동기를 일컫는 용어는 Mumun Pottery Period(민무늬 토기 시대)다.
물론 청동기시대에 대한 연구 성과가 한국 사학계에 호의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비파형 동검의 발굴 범위가 넓어지면서 '비파형 동검 문화권'이 실제로는 고조선만의 문화권이 아닌, 한반도 북부부터 북만주까지 넓게 펼쳐진 문화였음이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며, 여러 공동체들이 비파형 동검 문화를 공유했을 가능성이 높다. 물론 "고조선의 문화권"과 "한반도 북부부터 북만주까지"가 다른 것인지 또는 같은 것인지에 대한 연구가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환빠들은 단순히 '비파형 동검이 나온다'는 말에 열광해 고조선이 요서를 영유했다느니, 하북에 진출했다느니 운운하지만, 요서 지역에는 산융-동호가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되며, 북만주 지역에는 숙신이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토기 양식이나 금속기 주조 방식에 따른 구분으로, 이외에도 예, 맥 등의 문화권과 황해도 북부 ~ 대동강 남쪽 인근의 팽이형 토기 문화권을 별도로 산정하게 되면 고조선의 문화권은 요동 반도에서 평안도 북부 사이로 다시 좁혀져야 한다. 더 정확히는 어느 정도는 영유권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한반도에서도 발견되지 않은 유물군이나 문화에 대해서는 고조선과 연결되는 것을 꺼린다. 만일 고조선의 영역 전체가 현재의 중국 땅에 있었고, 한반도에는 나중에 들어온 것이라면 초기 고조선의 역사는 중국의 역사로 중국에서는 해석할 것이고, 동시에 중국 문화가 한국에 전래되었다는 것이 되어서 타율성론의 문제까지 부활될... 뭐 이런 식의 문제가 나오기 때문이다. 한국사의 경우는 속인주의가 기본이면서도, 은근히 속지주의의 영향을 받은 부분이 기저에 깔려있는데, 이런 부분이 대표적이다.
1.1.2 기원전 10~15세기설
또한 전라남도 영암군 장천리의 집터 유적과 경기도 양평군 양수리의 고인돌 유적 등에서 출토된 유물 등이 기원전 20세기까지 분포한다는 주장이 있으나, 연대의 신뢰성은 둘째 치더라도 고인돌만으로 고대 국가 성립을 비정할 수 없다는 점 때문에 긍정할 수 없다. 보통 국가 체제의 성립은 많은 지역에서 신석기 말기에 이루어진 반면, 청동기가 아니라 철기 시대라도 국가 체제를 이루지 못한 지역 또한 많다. (전세계 고인돌의 절반 이상 약 40,000여기가 한반도에 위치한다.)
게다가 한반도의 청동기 유물들은 실제로 청동기가 아니라 청동기와 함께 출토되는 토기, 석기류를 포함하기 때문에 실제 청동 제품이 나오는 연대는 생각보다 짧은 편이다. 한반도 내에서 청동기의 발굴 연대는 보편적으로 기원전 10세기 경 정도를 상한으로 보고 있으며, 고조선의 성립 지역으로 유력하게 보는 요령 지방에서는 기원전 12세기 경으로 잡히고, 빨라도 기원전 15세기를 넘기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청동기 유물의 수량이 매우 적거나 다른 유적에서 청동기와 병행되는 토기 등만 출토되는 것을 청동기로 편입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실제로는 한국 고고학계 내에서 신석기 후기와 청동기 전기의 구분이 모호한 상태다. 때문에 최근에는 청동기 시대라는 단어 대신 토기를 기준으로 삼아 민무늬 토기 시대라고 부르는 경향이 있다.
이에 근거해 대략적인 연대를 산출해 보면, 요동 반도 지역에서 청동기가 나타나는 기원전 13 ~ 12세기 경이 '한국의 청동기시대'에 직접 영향을 미쳤을 문화권의 형성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한반도에 유입되는 것은 기원전 11 ~ 9세기 경 정도가 된다. 다수의 북방식 고인돌의 연대가 이쯤에 위치하는 것도 국가 형성 시기를 추론하는 근거가 된다. 아마 이 때부터 삼한과 같은 소국들이 나타났다가, 춘추전국시대쯤 되면 중국에서도 문헌 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국체를 마련하기 시작했을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이것 역시 가설 중에 하나일 뿐이며 고조선 성립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사학계 내에서 여러 논쟁이 계속 일어나고 있다. 국사 교과서에 수록된 20세기경에 초기 고조선(혹은 그 원형이 되는)이 형성되었고 자체적인 발전과 다른 문화권에서 영향을 받아 국체를 마련하기 시작했을 것이라는 설이 중론이나 그 반대 여론 역시 꽤 있는 상황. 애초에 그 당시의 문화권을 보면 이때부터 도시국가의 성립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그것이 고조선이었는지를 증명할 방법이 없다. 애초에 한국고대사 자체가 절망적일 정도로 사료가 없어(유적, 유물, 사서 모두 다) 그 당시의 사서나 유물이 발견되지 않는 이상 이 문제는 한국 역사학계가 끊임없이 가져가야 될 짐이다.
1.1.3 기원전 9~8세기설
근래 학계에서 고조선의 등장 시기로 가장 유력하게 떠오르고 있는 시기.[10][11]
최근 요서지역의 십이대영자문화(기원전 9세기~8세기경 발호)를 고조선 문화로 보자는 견해가 고고학계에서 뜨거운 감자로 떠오르고 있다. 기존의 요서지역 문화와 다른 석곽묘 형태와 비파형 동검, 잔무늬 거울등 초기 고조선 문화와 관련이 깊은 유물들이 다수 출토되었기 때문이다. 초기 1960년대 이 유적이 발견되었을 시기에는 그저 동호적의 유적이겠거니 했는데, 공반되는 유물의 특성상 동호족보다는 고조선 문화의 특성을 띠고 있어, 고조선의 뿌리가 되는 집단일 가능성이 충분하기 때문이다. 다만 아직도 찬반논쟁이 팽팽한 상태로[12] 조금 더 지켜봐야 할 것이지만, 기원전 3세기경 갑자기 연 문화가 투영되면서 사료 기록과도 맞아떨어져서 가능성은 상당히 높다. 덧붙여서 이곳 유적에 주목하면서 동시에 고조선의 초기 중심지가 기존 학설이 제창한 요동보다는 요서쪽에 무게를 두는 시도가 이어지고 있다.
이외에 한국 학계의 요하 일대의 청동기 문화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면서 한국 청동기 문화와 관련짓는 학설이 점차 힘을 얻고 있다 (청동기시대 항목 참조.). 한편 기원전 7 ~ 8세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강상무덤 및 누상무덤에 100 ~ 200명이 순장되었다는 과거 북한 고고학자들의 주장이 받아들여져 국가 출현에 대한 희망적 시각이 두드러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가운데 무덤 주위의 무덤을 순장묘로 생각하던 정황과 달리, 최근에는 순장묘가 아닌 시기차에 따른 무덤 배치로 보는 시각이 강해졌다. 다만 이곳에서 비파형 동검 등 기존 한국 사학계의 학설과 연관성이 높아 보이는 유물이 출토되어 한국 사학계를 고무한 바 있다. 말하자면 동북공정에 대한 대응으로 연대를 올렸다는 느낌이 강하지만, 고고학적으로도 고조선에 대한 긍정적 암시가 있었다는 이야기다.
1.2 역사적 활동
기원전 2세기 이전의 상황은 아닌 게 아니라 긁어모아도 A4지 1 ~ 2장을 채우기 힘들 정도로 중국 사료에서 겨우 이름만 나오는 정도라 구체적인 것을 파악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며, 연나라와 제나라의 역사책을 태우라고 한 진시황과 이사가 개객기인 것이다[13] 따라서 고고학 유물에 전적으로 의존해야 하는 상태다. 고조선에 대한 대규모의 기록이 남은 것은 사마천이 지은 『사기』 조선열전에서부터이며,[14] 『삼국지』 위서 동이전 한 조에서도 『위략』을 인용[15] 하여 제법 많은 양의 기술을 남기고 있다.
1.2.1 역사 속의 등장
기원전 11세기 경에 기자가 조선 지역에 와 법과 예절을 가르치고 다스렸다는 기자조선설이 있어 한때 보편화되었으나 현재는 사실상 사장된 상태다(관련 내용은 기자조선 항목 참고.).
고구려에서 기자에게 제사를 지내기도 했는데 아마 중국 사서에 등장하는 기자 기록을 고구려가 받아들여서 자기들 방식으로 제사를 지낸 것으로 보인다.
고조선이 직접 언급된 것으로는 기원전 7세기의 인물 관중이 지었다고 전해지는 《관자》가 가장 오래된 사료이다. 단 저자가 관중이라고 전해지기는 하지만 실제로 '관자'는 관중 본인이 쓴 것이 아니라 관중의 언행을 기록한 것이며, 춘추전국시대를 거치면서 계속 수정되었다. 현재의 판본은 한나라 시대의 유향이 정리한 것이다. 때문에 연대를 신뢰할 수 있느냐는 의문은 계속해서 제시되는 상태. 학설에 따라서는 이 단락 전체를 날릴 수도 있다. 다만 춘추전국시대 보배조개를 매개체로 랴오둥 반도 ~ 묘도 열도 ~ 산둥 반도에 이르는 교역이 수행된 것이 확인되면서 호의적인 의견도 나름대로 근거가 생겼다.
桓公問管子曰:「吾聞海內玉幣有七筴, 可得而聞乎?」. 管子對曰:「陰山之礝䃉, 一筴也, 燕之紫山白金, 一筴也, 發朝鮮之文皮, 一筴也, … (중략) … 此謂以寡爲多, 以狹爲廣. 天下之數, 盡於輕重矣.」(제나라) 환공이 관중에게 말하기를, "내가 듣기로 해내(海內)에 옥폐(玉幣)를 얻는데 7가지 길이 있다고 하던데, 들어볼 수 있겠는가?" 하였다. 관자에 대답해 말하기를 "음산의 옥돌(을 얻는 것)이 한 가지요, 연나라 자산(紫山)의 백금을 얻는 것이 한 가지요, 발조선의 무늬 있는 가죽을 얻는 것이 한 가지요, … (중략) … 이것들(7가지의 옥폐)을 일컬어 적은 것으로 많은 것을 당한다고 하고, 좁은 (곳에서 나는) 것으로 넓은 (곳에서 나는) 것을 당한다고 합니다. 천하를 셈하는 법이 경중을 다하는 데 있습니다. - 『관자』 규도편
桓公曰 四夷不服 恐其逆政 游於天下 而傷寡人 寡人之行 爲此有道乎。 管子對曰 吳越不朝 珠象而以爲幣乎。發朝鮮不朝 請文皮毤【他臥切 落毛也。】服而以爲幣乎。 … (중략) … 一豹之皮 容金而金也 然後八千里之發朝鮮可得而朝也。 … (중략) … 故物無主 事無接 遠近無以相因 則四夷不得而朝矣。(제나라) 환공이 말하기를, "사방의 오랑캐가 복종하지 않아, 천하를 거스르는 정치를 하여 과인이 해를 입을까 두렵다. 과인의 행함에 길이 있는가?" 관자가 대답하여 말하기를, "오나라와 월나라가 입조하지 않으면, (그들의) 구슬과 상아를 보물로 대우해주십시오. 발조선이 입조하지 않으면, 무늬있는 털가죽【발음은 타(他)와 와(臥)의 반절이다. 낙모(落毛)를 말한다.】과 옷을 청하여 보물로 대우해주십시오. … (중략) … 하나의 표범 가죽을 값지게 받아들여 준 후에야 8000리 밖의 발조선에게서 입조를 받을 수 있습니다. … (중략) … 물건에 주재하는 바가 없고, 일에 접하는 바가 없고, 멀고 가까운 곳이 서로 관계하는 바가 없으면, 사방의 오랑캐가 입조하지 않을 것입니다.- 『관자』 경중 갑 편
이때 조선은 무늬있는 가죽이라는 특산물의 이름을 날리고 있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한편 조선의 앞에 꼭 '발(發)'이라는 글자가 붙어 등장하는데, 다른 문헌에서 단서를 찾을 수 있다.
方五千里 至于荒服南摭交阯北發 西戎析枝渠廋氐 羌 北山戎發息愼東長鳥夷 四海之內 咸戴帝舜之功。사방 5000리를 정복하여, 황복(荒服)에 이르러 남쪽으로 교지와 북발을, 서쪽으로 융과 석지와 거수와 강과 저를, 북쪽으로 산융과 발과 식신을, 동쪽으로 장이와 오이를 위무하였다. 사해의 안에 모두 제순의 공이 미쳤다. - 《사기》 오제본기
위에서 황복(荒服)이란 중국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바깥 지역. 중국은 공간적으로 오복(五服)의 세계관을 설정하였다. 왕기(王畿)와 함께 전복(甸服)이 존재하고, 그 밖에 제후국인 후복(侯服)과 빈복(賓服)이 존재하며, 그 밖에는 만(蠻), 이(夷), 융(戎), 적(狄)의 땅인 요복(要服)과 황복(荒服)이 존재하는데, 순 임금의 덕이 그까지 미쳤다고 찬양하고 있는 구절이다.
이 기록은 직접 조선이 등장하는 기록은 아니지만, 앞서 『관자』에서 등장한 발(發)이 산융과 식신의 사이에 등장하고 있다. 다만 『사기』 오제본기는 역사서로서 가치가 다소 떨어지지만, 적어도 연원이 제법 오래된 세력임을 확인할 수 있다. 이를 바탕으로 발(發)이 고조선을 구성하는 집단이었다고 보는 것이 통설이다. 김한규 등은 이를 맥과 통한다고 보기도 한다. '발'과 '맥'이 서로 통한다는 근거라면 후대의 고구려를 토번에서는 무쿠리, 돌궐에서는 뵈클리라고 표기했는데 무쿠리와 뵈클리 모두 '맥고려'의 음차일 것이라고 언어학계에서 추정하는 데 있다.
發人麃麃者 若鹿迅走。【發 亦東夷 迅疾。】발인이 씩씩하여, 사슴과 같이 빠르게 달린다. 【발은 또한 동이로, 빠르고 날래다.】- 『일주서』
이와 같이 발은 독립적인 존재로 나타나고 있다. 『사기』의 기록과 합하면 중국의 동쪽 혹은 북쪽에 위치하므로, 우리가 짐작하는 고조선의 위치(요서~요동)와도 대략 합치한다. 더불어 가죽이 특산물인 것이나 사슴과 같이 빠르다고 한 것을 보면 아마도 수렵 민족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을 것이다.
1.2.2 전국시대
좀 더 뚜렷하게 흔적이 나타나는 것은 연나라와 접한 기원전 4세기경의 기록이다. 서한 말의 유향이 정리한 《전국책》에서 고조선은 유세객 소진이 연나라 주변의 여러 국가들을 열거하면서 등장한다(아래 단락 참고). 이 즈음 연은 제에게 크게 영토를 상실한 상태였는데, 마침 조선도 나름대로 대부 등의 관직을 두고 왕을 칭하는 등 성장하여 연과 맞섰다.특히 왕이라는 칭호는 본래 주나라 천자의 칭호로, 전국시대 당시에는 참칭하는 왕조가 늘어나기는 했으나 상당한 지위를 갖고 있는 칭호였다는 점을 감안할 때 의미가 크다. 때문에 최근에는 고조선의 중앙 집권화에 주목하여 이 시기를 중요한 기점으로 보는 시각도 늘었다.
昔箕子之後朝鮮侯 見周衰 燕自尊爲王 欲東略地 朝鮮侯亦自稱爲王 欲興兵逆擊燕以尊周室。其大夫禮諫之 乃止。使禮西說燕 燕止之 不攻。옛 기자의 후예 조선후가 주나라가 쇠약해진 것을 보고, 연나라가 스스로 왕이 되어 높이고 동쪽의 땅을 공략하려 하자, 조선후도 스스로 왕을 칭하고 병력을 일으켜 거꾸려 연을 치고 주 왕실을 받들려 하였다. (그러나) 그 대부 예(禮)가 간언하여 멈추었다. 예를 보내 서쪽으로 연을 설득하게 하여, 연도 그만두고 공격하지 않았다. - 《위략》
그러나 기원전 4세기 말부터 3세기 초반까지 이루어진 연 문후와 소왕의 개혁으로 연나라는 반전에 성공한다. 이 시기 연은 제나라와 함께 진개의 활약으로 동호, 조선에게서 각각 1000리와 2000리의 땅을 얻었다고 한다. 대체로 동호 원정과 조선 원정은 비슷한 시기에 이루어져 두 세력에게서 탈취한 지역에 5군을 설치했다는 것이 중론이다. 조선이 잃었다는 이 2000리가 옳은 서술인지는 논란이 많으나, 어쨌건 고조선에게 막대한 타격을 안긴 것임은 분명하다. 근데 이 즈음의 기록들은 하나같이 1000 단위로 끊기는 걸 보아 대강 어림잡은 것 같다.
其後燕有賢將秦開 爲質於胡 胡甚信之。歸而襲破走東胡 東胡卻千餘里。與荊軻刺秦王秦舞陽者開之孫也。燕亦築長城自 造陽至襄平。置上谷﹑漁陽﹑右北平﹑遼西﹑遼東郡以拒胡。그 뒤에 연에 현명한 장수 진개가 있어, 호(胡, 동호)에 인질로 갔는데 호가 그를 지극히 신임했다. 돌아와 동호를 습격하여 깨뜨려, 동호가 1000여 리를 물러났다. 형가와 함께 진왕을 찔러 죽이려 한 진무양이 진개의 손자다. 연은 또 장성을 쌓아 조양에서 양평에 이르렀으며, 상곡, 어양, 우북평, 요서, 요동군을 두고 동호를 막았다. - 《사기》 흉노열전
後子孫稍驕虐 燕乃遣將秦開 攻其西方 取地二千餘里 至滿番汗爲界 朝鮮遂弱。그 자손이 점점 교만하고 포악해지자, 연은 이에 장수 진개를 보내어 그(고조선의) 서방을 공격하여 땅 2000여 리를 취하고 만번한에 이르러 이를 경계로 삼았다. 이에 조선이 약해졌다. - 《위략》
自始全燕時 嘗略屬眞番朝鮮 爲置吏 築鄣塞。
이후 조선은 세력권 상으로 크게 위축되어 있던 것으로 보인다. 연은 요동까지 군현 지배를 확립한 것으로 보이며, 문화권의 차원에서도 중국계 청동기 및 철기 문화가 뚜렷한 세죽리-연화보 문화권이 한반도 북부까지 나타난다. 이 시기부터 명도전 등 중국계 화폐를 매개로 교역이 이루어지는 것이 확인이 되고 후대에도 화폐로 계승된다.
1.2.3 진한 교체기와 위만의 찬탈
조선에도 연에게 패퇴한 뒤 반 세기 정도가 지난 뒤에는 진이 중국을 통일했다. 그 크기만으로도 압박이었을 중국의 통일 국가는 요동에 무언의 군사적 압력을 가한 것으로 보이며, 조선은 이에 스스로 '복속'하는 길을 택했다. 조공을 바친다 해놓고 찾아가지도 않은 걸 보아 눈치를 보고 있던 것 같다. 『염철론』에서는 조선을 멸했다고 말한다. 두 나라 사이에는 안전이 보장된 근거인 공지(空地)가 있었고, 그러나 진에서 발생한 대혼란으로 초한지 시작 우왕 ㅋ 굿 ㅋ 오히려 부자 세습이 이루어지는 등 이 시기에 조선이 힘을 비축해 나가는 듯한 모습이 보인다.
及秦幷天下 使蒙恬築長城 到遼東。時朝鮮王否立 畏秦襲之 略服屬秦 不肯朝會。否死 其子準立。진이 천하를 병합한 후에, 몽염을 보내 장성을 쌓아 요동에 이르렀다. 이때 조선왕 부가 즉위했는데 진의 공습을 두려워하여 복속하였으나 조회에는 나가지 않았다. 부가 죽자, 그 아들 준이 즉위했다. - 《위략》
秦旣幷天下 東絶沛水 幷滅朝鮮 南取陸梁 北卻胡 狄 西略氐 羌 立帝號 朝四夷。진이 이미 천하를 병탄한 뒤에, 동쪽으로 패수를 끊어 조선을 병탄하여 멸망시키고, 남쪽으로 육량(백월 세력)을 취하고, 북쪽으로 호와 적을 물리쳤으며, 서쪽으로 강과 저를 약취했습니다. 황제의 이름을 세우고, 사방의 오랑캐에게 조공을 받았습니다. - 《염철론》 주진편
그러다가 진한 교체기에는 조선이 다시 재도약의 기회를 잡았다. 이 시기 고조선은 공백이 생긴 서북쪽으로(정확히는 패수까지) 다시 영토를 회복한 듯하다. 패수 위치에 대한 설은 다양하지만 요동군이 있는 요하 인근은 한이 장악하고 있었고, 청천강이 조선이 위축되었을 당시의 경계로 비정된다고 보면 압록강 설이 유력해진다. 단 이 경우를 떠나면 패수는 고대 한반도 북부 관련 기록에서 원체 다양하게 나타나기 때문에, 강 이름이 패수라기보다는 아예 '패'가 강을 뜻하는 일반명사가 아니냐는 설도 있다.
그런데 이 기사 자체가 이민족의 침탈을 강조하는 기사로서 고조선의 능동적인 움직임을 알 수 있는 정확한 근거라고 보기는 어렵다는 주장도 있다), 연 · 제 · 조 등의 유민을 받아들이면서 성장한다.
大夫曰 往者 四夷俱强 幷爲寇虐 朝鮮踰徼 劫燕之東地 東越越東海 略浙江之南 南越內侵 滑服令 … (후략) …。대부가 이르기를 "지난 날 사방의 오랑캐가 함께 강해져, 나란히 노략질과 포악을 저질렀습니다. 조선은 요새를 넘어 연의 동쪽을 겁박했고, 동월은 동해를 넘어 절강의 남쪽을 약탈했습니다. 남월이 내침하여 복령을 어지럽혔습니다. … (후략) …" - 《염철론》 비호편
漢興 爲其遠難守 復修遼東故塞 至浿水爲界 屬燕。한이 일어나자, 먼 곳을 지키기 어려우므로 요동의 옛 요새를 다시 고쳐 패수에 이르러 경계를 짓고, (조선을) 연에 속하게 했다. - 『위략』
二十餘年而陳 項起 天下亂 燕 齊 趙民愁苦 稍稍亡往準 準乃置之於西方。 及漢以盧綰爲燕王 朝鮮與燕界於浿水。20여 년 뒤 진승과 항우가 봉기하고 천하가 어지러워지자, 연 · 제 · 조의 백성들이 괴로움을 겪어 서서히 준에게 망명하니, 준은 이에 이들을 서방에 거처하게 했다. 한 대에 이르러 노관이 연왕이 되자, 조선과 연은 패수를 경계로 하게 되었다. - 《사기》 조선열전
그런데 한 고조 시기 연왕 노관의 난을 틈타 조선에 망명해온 연나라 사람 만이 중국 유망민 세력을 결집했다. 위만은 사기에는 만이라고만 하고, 위략에서는 위만이라고 한다. 위(衛)는 성씨가 아니라 관직일 가능성이 있는데, 이는 남해군위(南海郡尉)였다가 남월을 건국자가 된 조타가 위타(尉陀)로도 불린 것에서 유추한 것이다.
위만이 중국 유망민 세력을 결집한 것은 조선이 중국의 혼란기에 획득한 공지에 만을 책봉하고 중국 유망민을 배치하여, 결과적으로 신흥 세력의 결집이 쉬웠던 것이 작용했던 듯하다. 만은 한이 쳐들어온다는 거짓말로 준을 속인 후 준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뒤 수도를 왕험(검)성으로 정했다. 준왕이 바보라는것은 아니다. 그당시 고조선은 철기를 생산할 기술력이 없었는데, 중국에서 들어온 위만이 철기를 생산할 기술력을 가지고 있었기에 받아들였던 것이다.
1.2.4 위만조선의 운영과 멸망
위만은 즉위 직후 한과 외신(外臣)의 약조(約)를 맺고 중국에서 철제 농기구 및 무기, 가축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이를 통해 위만은 주변 소국들을 정복하였고, 손자 대인 우거왕 대에는 한반도 남부의 나라들이 한나라에 입조하는 것을 막고 한의 유망민을 끌어들였다.
會孝惠 高后時天下初定 遼東太守卽約滿爲外臣 保塞外蠻夷 無使盜邊 諸蠻夷君長欲入見天子 勿得禁止。 以聞 上許之 以故滿得兵威財物侵降其旁小邑 眞番 臨屯 皆來服屬 方數千里。 傳子至孫右渠 所誘漢亡人滋多 又未嘗入見 眞番旁衆國欲上書見天子 又擁閼不通。이때는 효혜제와 여후의 때로 천하가 처음으로 안정되어, 요동태수가 곧 만과 외신의 약조를 맺어 요새 밖의 오랑캐를 지켜 국경을 도둑질하지 않게 하고, 여러 오랑캐의 군장들이 천자를 보고자 하면 막지 않도록 하였다. 천자도 듣고 허락하였다. 약조를 통해 만이 군사의 위세와 재물을 얻고 그 방면의 소읍을 침략해 항복시켜, 진번 · 임둔이 모두 복속하여 사방 수천 리가 되었다. 아들을 지나 우거왕에 이르러서는 한의 유망민을 끌어들인 것이 많았고, 입조하지 않았으며, 진번 방향의 여러 나라가 상서를 올려 천자를 뵈려고 해도 막아 통하지 못하게 하였다. - 『사기』 조선열전
이렇게 주변을 복속시켰다고 하였으나, 아래의 마한 왕과 관련된 기록에 따르면 마한과는 마찰이 있었고, 후에 전쟁을 할 때도 주변국의 원조 같은 것이 전혀 없는 것으로 보아 복속은 위기 상황에서 도움이 될 정도로 강력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사실 내치 또한 불안한 면이 있었다. 예의 군장 남려가 이끄는 창해군이 이탈을 시도했고, 토착 군장 세력으로 추정되는 상(相)들 중에서도 이탈하는 사람이 생겨났다(역계경).
한편 한의 성장도 문제였다. 한무제가 제위에 오르면서 중국 대륙 주변국에게 엄청난 압박을 가하기 시작하고 중국 중심의 세계 질서가 강요되기 시작했다. 흉노 제국 원정으로 시작하여 남월이 원정 대상이 되었고, 조선도 그 운명을 피하지 못했다. 더불어 『사기』 위현전에서는
東伐朝鮮 起玄菟 樂浪 以斷匈奴之左臂。西伐大宛 並三十六國 結烏孫 起敦煌 酒泉 張掖 以鬲婼羌 裂匈奴之右肩。 單于孤特 遠遁于幕北。동쪽으로 조선을 정벌하고 현도와 낙랑을 세워 흉노의 왼팔을 끊었다. 서쪽으로 대완을 정벌하고 36국을 아우르며 오손과 관계를 맺고 돈황(敦煌) · 주천(酒泉) · 장액(張掖)을 세워 야강을 막아 흉노의 오른팔을 찢었다. 선우는 홀로 고립되어 멀리 막북으로 돌아갔다.
이러한 기록을 남겼다. 조선과 흉노 사이에 어떠한 연결고리가 존재했음을 암시한다는 설도 있으나, 중화사상적 관점에서 보면 다 똑같은 오랑캐라서 그랬을 가능성이 더 높다. 사실 이렇다 보니 중국에서는 서로 손을 잡고 중국을 친다는 어처구니 없는 망상을 종종 했다. 임진왜란 때도 조선과 일본이 손을 잡아 명을 친다는 주장이 나올 정도였으니...
전쟁의 계기는 조선과의 외교 관계에 대해 불만을 제시하기 위해 파견되었던 섭하가 교섭에 실패하자 조선의 장군을 살해하고 도망간 사건이었다. 그런데 한은 도리어 섭하를 요동도위에 부임시켜 공을 치하했다. 이는 조선과의 전쟁을 유인하는 미끼 작전으로 평가되는데, 과연 고조선이 군사를 파견해 섭하를 살해하면서 한과 고조선 사이의 전쟁이 개시되었다. 수군과 육군의 양동 작전이 이루어졌으나, 수군이 지지부진하고 고조선은 장기 항전 체제를 갖추는 데 성공했다. 전쟁이 지연되자 한의 장군 측에서는 평화 관계를 제안해 왔으나, 한나라가 태자에게 호위 무장 없이 국경선인 패수를 넘으라고 요구한 것을 고조선 측의 태자가 거부하여 전쟁이 다시 개시되었다.
이후 고조선은 1년 간의 항전에 나섰으나, 장기화된 전쟁으로 조선 상(相) 세력이 이반하여 니계상 삼 혹은 참(參)에 의해 우거왕이 살해당했다. 이후 성기에 의해 항전 세력이 수습되었으나, 끝내 한군에 의해 고조선은 멸망하였다. 고조선의 멸망 이후 평양의 낙랑군을 포함한 한사군이 설치되었으며, 산하에 존재했을 예, 맥 그리고 한계 국가들이 대두되면서 한국사는 새로운 장을 맞이했다.
1.2.5 준왕의 남하
한편 준왕은 삼한 지역으로 망명하여 왕위를 이었으나, 삼국지의 시대에는 그 대가 끊어져 있었다. 삼국사기에는 기원전 1세기부터 기원후 1세기 경 '마한 왕'이 백제 및 신라에 압박을 가하는 모습이 나타나고 온조왕이 이를 멸한 것으로 되어있는데, 아마도 이 왕가일 것이다. 다만 삼국사기의 초기 기록에 대한 불신론도 강하기 때문에 '마한의 멸망'은 고이왕 때나 근초고왕 때라는 주장도 있다.
將其左右宮人走入海 居韓地 自號韓王。魏略曰 其子 及 親留在國者 因冒姓韓氏。準王海中, 不與朝鮮相往來。其後絶滅 今韓人猶有奉其祭祀者。(준왕은) 그 좌우 궁인들을 거느리고 바다로 도망가 한(韓)의 땅에 살면서 스스로 한왕(韓王)이라고 칭했다. 위략에서 이르기를, 기자와 그 친족들이 나라에 있으면서 한씨를 사칭하였다. 준왕은 바다 가운데 있으면서 조선과는 서로 왕래하지 않았다.그 후손은 끊어졌으나, 지금 한(韓)인들 중에 그 제사를 받드는 사람이 여전히 있다. - 《삼국지》 위서 동이전 한 조
三十八年 春二月 遣瓠公聘於馬韓。 馬韓王讓瓠公曰 辰卞二韓 爲我屬國 比年不輸職貢 事大之禮 其若是乎。 對曰 我國自二聖肇興 人事修天時和 倉庾充實 人民敬讓 自辰韓遺民 以至卞韓樂浪倭人 無不畏懷 而吾王謙虛 遣下臣修聘 可謂過於禮矣 而大王赫怒 劫之以兵 是何意耶。 王憤欲殺之 左右諫止 乃許歸。재위 38년(기원전 20) 봄 2월에 호공을 마한에 보내 예방(禮訪)하였다. 마한왕이 호공을 꾸짖어 말하였다. "진한, 변한 두 나라는 우리의 속국인데 근년에 공물을 보내지 않으니, 큰 나라를 섬기는 예의가 이와 같은가?" (호공이) 대답하였다. "우리 나라는 두 성인이 일어나서부터 인사(人事)가 잘 다스려지고 천시(天時)가 순조로워, 창고는 가득 차고 백성은 공경하고 겸양할 줄 압니다. 그래서 진한의 유민으로부터 변한, 낙랑, 왜인에 이르기까지 두려워하는 마음을 품지 않음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임금님은 겸허하게 신하인 저를 보내 안부를 묻게 하였으니, 예가 지나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대왕께서는 크게 노하여 군사로써 위협하니 이것이 무슨 마음입니까?" (마한)왕이 격분하여 그를 죽이려고 하였으나 좌우의 신하들이 간언하여 말리니, 이에 돌아갈 것을 허락했다.
三十九年 馬韓王薨 或說上曰 西韓王前辱我使 今當其喪 征之其國 不足平也。上曰 「幸人之災 不仁也。 不從 乃遣使弔慰。39년(서기전 19) 마한 왕이 죽었다. 어떤 사람이 임금을 달래어 말하였다. "서한의 왕이 지난번에 우리의 사신을 욕보였는데 지금 상을 당하였으니 그 나라를 치면 쉽게 평정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임금이 말하기를 "다른 사람의 재난을 다행으로 여기는 것은 어질지 못한 일이다."하고는 따르지 않고, 사신을 보내 조문하였다. - 『삼국사기』 박혁거세 본기
二十四年 秋七月 王作熊川柵 馬韓王遣使責讓曰 王初渡河。 無所容足 吾割東北一百里之地安之 其待王不爲不厚 宜思有以報之 今以國完民聚 謂莫與我敵 大設城池 侵犯我封疆 其如義何。王慙遂壞其柵。재위 24년(6) 가을 7월에 왕이 웅천책(熊川柵)을 세우자 마한 왕이 사신을 보내 나무라며 말하였다. "왕이 처음 강을 건너 왔을 때 발디딜 만한 곳도 없었으므로 내가 동북쪽의 100리의 땅을 떼어 주어 편히 살게 하였으니 왕을 대우함이 후하지 않았다고 할 수 없다. 마땅히 이에 보답할 생각을 하여야 할 터인데, 이제 나라가 완성되고 백성들이 모여들자 나와 대적할 자가 없다고 하면서 성과 못을 크게 설치하여 우리의 영역을 침범하니 그것이 의리에 합당한가?”왕은 부끄러워서 드디어 목책을 헐어버렸다. - 『삼국사기』 온조왕본기
二十六年 秋七月 王曰 馬韓漸弱 上下離心 其勢不能久 儻爲他所幷 則唇14)亡齒寒 悔不可及 不如先人而取之 以免後艱。冬十月 王出師 陽言田獵 潛襲馬韓 遂幷其國邑 唯圓山 錦峴二城 固守不下。
재위 26년(8) 가을 7월에 왕이 말하였다. "마한은 점점 쇠약해지고 윗사람과 아랫사람의 마음이 갈리어 그 형세가 오래 갈 수 없을 것 같다. 만일 남에게 병합된다면 순망치한의 격이 될 것이니 후회하더라도 이미 늦을 것이다. 차라리 남보다 먼저 (마한을) 손에 넣어 훗날의 어려움을 면함만 같지 못할 것이다."
겨울 10월에 왕이 군사를 내어 겉으로는 사냥한다고 하면서 몰래 마한을 습격하여 드디어 그 국읍을 병합하였다. 다만 원산성(圓山城)과 금현성(錦峴城)의 두 성만은 굳게 지켜 항복하지 않았다. - 『삼국사기』 온조왕본기
1.3 위치와 강역 논란
고조선의 강역에 대한 문제 또한 사학계의 꾸준한 떡밥이다. 기존의 사서 기록 및 평양 지역에 남은 다수의 설화, 그리고 일제강점기 본격화된 발굴 작업으로 인해 평양에 고조선의 수도가 존재했다는 평양 중심설이 주류설이었다. 다만 일찍이 신채호는 '삼조선설'을 제시하여 고조선의 범주를 확장했으나, 삼조선설 자체가 사료의 오독에서 비롯되었고 고고학적 근거보다는 본인의 추측에 의거하여 설을 전개하는 경향이 커 현재는 사장된 상태이다.
해방 이후 한국의 고대사가들에게는 비파형 동검과 미송리식 토기, 북방식 고인돌, 거친무늬 거울 등의 출토지역을 중심으로 고조선의 영역을 파악하는 태도가 있어왔으나, 비파형 동검 자체가 하나의 문화권에서 사용되는 양식이 아니었으며, 토기 양식 또한 특정 문화의 파급정도는 알 수 있어도, 국가의 영역을 파악하는 척도로 활용하기에는 어렵다는 지적이 이어지고 있어, 최근의 학자들은 이에 부정적이다. 애당초 비파형 동검 자체가 분명하게 구별되는 세 가지 이상의 양식으로 나뉘어져 있다. 때문에 복식 등 기존과는 다른 방식으로 고조선의 영역을 추측하려는 시도 등도 존재하지만, 이러한 방식으로 밝혀진 고조선의 영역은 실제로는 고조선을 중심으로 한 '문화권'에 가까울 것으로 보인다. 우리 땅이 아닌 중국에도 한인 타운이 있지 않은가
한편 1960년대 이후 사료와 고고학적 발굴 등이 종합되면서 북한학계에서 요령 인근설이 제시되었다. 이후 한국 사학계도 이를 받아들였으나, 평양 중심설 또한 부정하기에는 많은 사료가 이를 지지하고 있기 때문에 다소 혼란상을 보였다. 고조선의 위치를 요령 인근으로 옮기는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던 자료 중의 하나가 기원전 4세기 『전국책』 연 조에 등장하는 고조선에 대한 기록이다.
蘇秦將爲從 北說燕 文侯曰, 燕東有朝鮮·遼東, 北有林胡·樓煩 西有雲中·九原 南有呼沱·易水, … (생략) …。소진이 합종책을 위해서 북으로 가 연나라 문후에게 말하기를, "연의 동쪽에는 조선 · 요동이 있고, 북쪽으로는 임호 · 누번이 있고, 서쪽으로는 운중 · 구원이 있고, 남쪽으로는 호타와 역수가 있습니다. … (중략. 조나라와의 동맹이 필요하다고 설득함) …" 하였다.- 『전국책』 연책편
현재 하북성 근처에 위치한 연의 동쪽에 있다고 하여, 조선의 위치가 보다 뚜렷하게 드러나는 사서다. 다만 '조선 요동'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 논란이 많다. 다른 방위의 서술을 따져볼 때 조선과 요동을 별도로 해석하는 것이 설득력이 높지만, 조선은 국체이고 요동은 지명인데 둘이 병렬되어 있는 것이 이례적이라 해석을 놓고 논란이 많다. 이를 놓고 '조선의 요동'이라고 해석하는 경우도 있고, 요동 지역에 별개의 공동체가 존재했으리라는 가정을 하기도 한다. 아니면 요서 지역이 고조선의 중심지였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어찌되었건 연의 가시권에 들어올 정도로 조선이 분명히 인식되었다는 점을 알려주며, 조선과 요동과 병렬되어 고조선이 요하 인근에 위치했을 것이라는 주장을 강화해주는 사료 중 하나다.
한편 앞서 인용한 『사기』 오제본기에서도 약간의 단서가 주어진다. 조선의 구성원으로 추정되는 발(發)은 중국 기준의 북방에 존재했으며 산융과 식신 사이에 나타나는데, 산융이 요서 인근에서, 식신(숙신)이 동만주 일대에서 활동했음을 감안하면 대략 그 사이에 존재했을 것이다. 대략 중국의 동북방이므로, 이는 발을 동이로 파악한 『일주서』의 기록과도 어느 정도 합치한다.
이외에 고조선이 요하 인근(요서~요동)에 위치했을 것이라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사료로는 연대 미상의 『산해경』이 있다. 다만 『산해경』은 굉장히 판타지한 서술 때문에 사료의 신뢰성이 그다지 인정받지 못한다는 점은 알아두자.
朝鮮在列陽東 海北山南。 列陽屬燕。조선은 열양의 동쪽에 있는데, 바다의 북쪽이며 산의 남쪽이다. 열양은 연에 속한다. - 『산해경』 해내북경
東海之內 北海之隅 有國名曰朝鮮天毒 其人水居 偎人愛之。동해의 안, 북해의 모퉁이에 나라가 있어 이름을 조선 천독이라고 한다(?). 그 사람들은 물에 살고[16] , 서로 아끼고 사랑한다. - 『산해경』 해내경
각주에는 '지금의 낙랑현이며 기자가 책봉 받은 곳'이라고 하고 있으나, 평양에 고조선이 위치했을 경우 '바다의 북쪽이며 산의 남쪽'이라는 서술과 어긋나게 된다. 이 때문에 발해만 인근(요서~요동)에 고조선이 위치했으리라고 보는 주장의 주요한 근거가 된다. 해내경에서는 '동해의 안, 북해의 모퉁이'라고 해 확인사살도 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동해', '북해'라고 하는 것이 꼭 '동쪽의 바다', '북쪽의 바다'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이는 중국의 주변이 '사해(동해, 서해, 남해, 북해)'로 둘러싸여 있다고 보는 고대 중국의 세계관에서 비롯된 표현이므로, 그냥 일반적인 '동방', '북방'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다만 해내경의 구절은 뜬금없는 천독(天毒) 때문에 해석에 논란이 많다. 후한서 지리지에 의하면
昌遼, 故天遼, 屬遼西창료현(昌遼, 교려, 창려), 옛 천료(天遼)이며 요서(遼西)에 속했다.
라고 했고, 선비족이었던 모용황이 이곳 출신이라는 이유로 조선공에 임명되는 일도 있었다.
또 한서지리지에
臣瓉曰王險城在樂浪郡浿水之東此自是險瀆也신찬이 말하기로는 왕험성은 낙랑군 패수의 동쪽에 있었다. 그래서 험독이다.
라고 하는 구절이 있다.
이외에 조선이 '요하' 인근에 위치했다는 추정에서 시작해, 『산해경』 해내경에서 '潦水出衛皋東, 東南注渤海, 入潦陽(요수가 위고의 동쪽으로부터 나서, 동남으로 흘러 발해 방향으로 흘러 요양으로 들어간다)'이라고 한 것을 근거로 조선이 '동남쪽으로 흐르는' 대릉하 인근에 위치한다는 재야사학의 주장이 있으나, 이는 '潦水出衛皋東'에 달린 각주 '出塞外衛皋山. 玄菟高句驪縣有潦山, 小潦水所出. 西河(南)注大潦, 音遼(새외의 위고산이다. 현도(군) 고구려현에 요산이 있어 소요수(小潦水)가 나온다. 서쪽 강이/서남쪽으로 대요(大潦)에 물을 대는데, 음을 '요(遼)'라고 한다)를 잘라먹은 것이다. 즉 해내경의 요(潦)는 소요수로 대요(大潦), 즉 요(遼) = 요하의 지류이며, 발해 방향으로 흐르다가 요양에서 합쳐지는 지류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렇게 고조선을 요령에 비정할 경우 고조선의 수도를 평양으로 지목하던 기존의 사료들이 붕 떠버리게 되는데, 이를 해결하기 위해 제시한 일종의 절충설이 중심지 이동설이었다. 이동설에 따르면 이렇게 요령 지역에 존재했던 고조선이 평양을 중심으로 옮겨가게 된 계기는 앞서 말한 연과의 충돌이었다. 이는 후대에 나온 설이니만큼 양측 설과 고고학 유물에 따른 세력권에 대한 포괄이 가능해 많은 지지를 얻었으나 학설 내에서도 연의 세력이 어디까지 미쳤는가에 대한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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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번한은 문현과 번한현을 연칭한 것이 만번한으로 보인 것입니다. 문현의 위치는 지금의 계주지역으로 보는데 이론을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번한현이 어디있냐 했을 때 문현과 번한현은 소위 인접한 지역으로 상정이 됩니다. 그렇다면 번한현의 위치도 청천강 유역에서 찾기 보다는 오히려 요동반도 쪽에서 찾는 것이 옳다고 봅니다. 번한현은 성경통지에 의하면 대체로 지금 해성 지역으로 보입니다.” - 서울대 노태돈 교수 |
이동설은 연이 조선을 쳐 강역 2000리를 빼앗았다는 기록에 의거하며 이는 청천강 이남으로 제한된 세형 동검의 출토 범위, 한반도 북부까지 진출한 연의 흔적(연화보-세죽리 문화권)과도 대강 합치한다. 이는 연이 최종적으로 획득했다는 '만번한'을 평안북도 박천에 비정한 이병도 이래 통설이었으나, 2000리가 과장된 표현일 것으로 추정하며 연의 세력이 청천강 북쪽까지 미쳤다는 것은 무리라는 설도 있다. 연이 고조선 땅을 쭉 밀어버리고 한반도 북부까지 쭉 진출했다기보다는, 요동 반도의 해안을 중심으로 진출해 제와의 교점을 끊는 것이 주요 목적이었고, 그 해안 인근의 중요 거점이 만번한이었다는 것.
2011년에 들어 연군현에 해당하는 요서~요동 일부의 일대의 미안구유형 유적과 주변의 연군현에 해당하지 않는 요동지역 중앙지역의 유적/유물간 비교 조사를 통해 요하 일대의 고조선과 연의 국경을 최대한 확실하게 알아보고자 하는 연구가 이루어져, 기존의 문헌과 추측에 의존한 연구에 비해 정확한 연구결과들이 나오고 있다.[17] 위 논문을 기초로 만들어진 지도 링크. 연나라의 영역이 대동강 근처까지 뻗어있지만, 동시에 요동 지역 상당수를 토착 집단이 지배하고 있다. 어째 고조선 영역 관련 설 전체를 그럭저럭 만족시키는 것 같은 느낌이다?
한편 일부 사료를 들어 후기 고조선의 수도가 평양에 존재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경우가 있는데, 대표적인 것으로 『한서』 지리지의 요동군 험독현 기사와 『수경』의 기록이다. 그러나 살펴보면 설명이 불가능하지 않기 때문에, 일반적으로는 전기 고조선의 수도가 요서와 요동 사이에 있었으며 후기 고조선의 수도가 평양이라는 설의 설득력이 좀 더 높은 편.
險瀆【應劭曰朝鮮王滿都也依水險故曰險瀆。 臣瓉曰王險城在樂浪郡浿水之東此自是險瀆也。 師古曰瓚説是也浿音普大反。】험독【응소가 말하기를 조선의 왕 (위)만이 도읍한 곳으로, 물이 험하여서 '험독'이라고 했다. 신찬이 말하기를 왕험성은 낙랑군 패수의 동쪽에 있었다. 이곳은 마땅히 험독이다. 안사고가 말하기를 신찬의 말이 맞다. 패는 '보'와 '대'의 반절이다.】- 『한서』 지리지 요동군 험독현 조 주석
이 구절은 기본적으로 한서 지리지 요동군 험독현의 주석이므로 이미 본문에서 험독현이 요동군에 있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곳을 낙랑군이라고 본다면 일관성을 해치고 본문의 내용과 충돌하게 된다. '(요동군의) 험독은 마땅히 (원래부터) 험독이다'라고 해석하는 쪽이 자연스럽다. 참고
浿水出樂浪郡鏤方縣 東南過臨浿縣 東入於海。패수가 낙랑군 누방현에서 나와서, 동남으로 임패현을 지나고, 동쪽으로 바다로 들어간다.
6세기의 역도원은 위와 같이 읽고 자신이 들은 내용을 주석으로 달았는데 이것이 수록된 책이 『수경주』이다. '서쪽으로 흐르는 대동강이 패수가 될 수 없다. 따라서 패수는 난하나 대릉하다'라고 주장하는 배경이 되었다.
【許慎云 浿水出鏤方 東入海。 一曰出浿水縣。《十三州志》曰 浿水縣在樂浪東北 鏤方縣在郡東。蓋出其縣南/逕鏤方也。 … (중략) … 至其孫右渠 漢武帝元封二年 遣樓船將軍楊僕。 左將軍荀彘討右渠 破渠于浿水 遂滅之。 若浿水東流 無渡浿之理。 其地今高句麗之國治 余訪蕃使 言城在浿水之陽。 其水西流逕故樂浪朝鮮縣 即樂浪郡治 漢武帝置 而西北流。 故《地理志》曰 浿水西至增地縣入海。又漢興 以朝鮮為遠 (循)'脩'遼東故塞, 至浿水為界 考之今古, 於事差謬, 蓋《經》誤證也.】【허신이 말하기를 '패수가 누방현에서 나와 동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일설에는 패수현에서 나온다고도 한다.'고 하였다. 《십삼주지》에서 말하기를 '패수현은 낙랑군의 동북쪽에 있고, 누방현은 동쪽에 있다.'고 하였다. 아마도 그 남쪽에서 나와 누방을 지나는 것이다. … (중략) … 우거왕 대에 이르러 한 무제 원봉 2년에 누선장군 양복과 좌장군 순체를 파견하여 우거를 토벌하였는데, 패수에서 우거를 격파하고 추격하여 멸하였다. 만약 패수가 동쪽으로 흐른다면, 패수를 건너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그 땅이 지금 고구려가 다스리는데, 내가 번국의 사신에게 물어보니 성이 패수의 남쪽에 존재한다고 하였다. 그 물이 서쪽으로 흘러 낙랑의 조선현을 지나가므로 낙랑군의 치소가 있던 곳이며 한 무제가 설치한 것이다. (따라서 패수는) 서북으로 흐른다. 그러므로 (《한서》 지리지)에서 이르기를 '패수가 서쪽에서 증지현에 이르러 바다에 들어간다.'고 했던 것이다. 또 한이 흥할 때 조선이 멀었다고 하여 요동의 옛 요새를 고쳐 패수를 경계로 삼았다. 지금과 옛 것을 고증해보면 차이가 있고 그릇된 것은, 아마 《수경》의 틀린 증명이다.】
(참고)
즉 고구려 사신에게 물어본 결과 《수경》이 틀렸다는 것이다. 이미 6세기부터 낙랑군 조선현의 위치를 고구려의 수도인 대동강 유역에 비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낙랑군과 직접 싸웠던 고구려가 틀릴 가능성은 매우 낮다.
일부의 주장으로는 동쪽으로 흐르면 모순이 생기고 서쪽으로 흐르면 모순이 안생기냐면서 역도원을 비난하기도 하는데, 여기에는 오해가 있다. 일단 허신이나 십삼주지에서 말하고 있는 패수는 명백히 북쪽에서 남쪽으로 흐르고 있다. 그러나 역도원 당시에는 이미 패수는 다른 하천을 지칭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에 와서는 아예 패수란 명칭을 가지는 하천 자체가 없어졌다.) 역도원 당시의 패수는 한반도 부근의 강을 지칭했던 것 같다. 따라서 한반도의 강이 동쪽으로 흘러가면, 굳이 강을 건너가지 않아도 되고, 서쪽으로 흘러야만 강을 건너서 가야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것을 고구려 사람들에게 확인했고 그래서 수경이 틀렸다고 확신했던 것이다.
한편 정약용은 끊어 읽기를 다르게 하여 해석을 달리 했다.
浿水出樂浪郡鏤方縣 東南過臨浿縣東 入於海。패수가 낙랑군 누방현에서 나와서, 동남으로 임패현의 동쪽을 지나 바다로 들어간다.
띄어쓰기의 중요성 어렵지 않게 풀린다. 이외의 설이나 이 부분의 내용은 이쪽을 참고.
대동강이 흐르는 지역에서 동남쪽으로 흐르는 부분을 입해지로 보기도 한다.
환빠들은 중국의 랴오닝성에서 '임둔태수장' 봉니가 출토되었다면서, 평양 일대에서 낙랑군의 봉니가 출토된 것을 낙랑군이 평양에 있었다는 근거로 삼으면서 랴오닝성에 임둔군이 있지 않았다고 하는 것은 모순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는 기본적으로 봉니라는 것 자체에 대한 이해가 결여된, 무지에서 나온 주장에 불과하다.
봉니는 기본적으로 문서를 봉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다. 특정 지역의 대부분의 문서는 그 지역 관청에 보관되지만, 일부 문서는 다른 지역으로 전달되기도 한다. 따라서 그 지역에 보관되는 문서를 위한 봉니는 그 지역에 남게 되고, 다른 지역으로 보내지는 문서를 위한 봉니는 다른 지역으로 보내지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컨대 낙랑군의 봉니라면 대부분은 낙랑군에서 출토되겠지만 일부는 다른 지역에서도 발견될 수 있는 것이다. 당연히 중국에서의 봉니의 출토도 이러한 양상이었다.
따라서 평양 지역에서 낙랑군의 봉니가 대거 출토된 것은 낙랑군의 소재지가 평양이라는 중요한 증거 중 하나가 되지만, 랴오닝성에서 임둔군의 봉니가 소수 출토된다고 해서 랴오닝성이 임둔군의 소재지라는 것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봉니의 출토 숫자와 그 양상을 고려하지 않고 봉니가 출토되었다/아니다의 이분법으로밖에 접근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러한 잘못된 주장이 나오는 것이다.
1.4 문화
비파형 동검, 미송리식 도기, 북방식 고인돌 등을 특징으로 하여 요서 지역, 요동 반도, 남만주부터 한반도 북부에 걸쳐 있는 문화권을 기반으로 세워졌을 것으로 생각된다. 기원전 4 ~ 5세기에는 중국의 철기 문화를 수입하기 시작했으며 기원전 2세기 경에는 한과의 약조를 통해 철기를 본격적으로 수입한 것으로 보이지만, 한반도 전체로 철기의 제작이 확대되는 것은 원삼국시대까지 기다려야 하는 일이었다.
건국 신화로는 단군 신화가 존재하나, 그것이 고조선 시대부터 전하던 것인지 아니면 고조선 이후 어느 시점에 만들어져 삼국유사 등에 기록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삼국유사에서는 고기(古記) 및 『위서(魏書)』라는 출처를 명시했으나, 고기의 정체는 불분명하고 『위서』 또한 어느 위나라의 문서인지 알 수 없다. 심지어 『위서』의 '위'가 위(魏)로 적힌 것과 삼국유사에서 '위만'이 '魏滿'(반면 위략에서는 衛滿)으로 기록된 것으로 보아 당대에 위만조선에 대한 역사 의식을 표방한 독립적인 사서가 존재했다는 주장도 있으나, 『잠부론』 등에서도 '魏滿'이라고 했으므로 근거는 빈약한 편. 한편 동명왕편을 지으며 이규보는 『위서』와 『통전』의 기록을 읽어보았으나 중국의 기록이라 그런지 기록이 자세하지 못하다고 했는데, 이 『위서』가 일연이 읽은 것과 같은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더욱이 현재 단군신화가 기록된 문헌들도 삼국유사와 제왕운기, 묘향산지 등의 기록이 조금씩 다르다.
고조선에서 자체적으로 남겨진 기록은 존재하지 않으며 단지 고조선 멸망직후에 적힌 사기나 후대의 염철론, 삼국지같은 서적에서 고조선에 대해 나오기는 하지만 중국의 입장에서 적힌데다가 그다지 상세하게 적히지 않아 이것만으로 고조선에 대해 많은 정보를 알아내기에 한계점이 분명하다. 그리고 명도전, 반량전, 오수전 등의 화폐와 진에서 수입된 진과(秦戈)의 명문 등 극소수의 한자 유물을 제외하면 고조선에서 문자가 사용되었다는 증거는 없으며 고조선 후기에 중국으로부터 유민들이 들어오면서 본격적인 문자의 사용이 시작될수도 있지만 이것 또한 불확실하다. 덕택에 현재까지 고조선에 대한 연구에 크나큰 장애물로 남고 있다. 다만 미흡하나마 왕, 장군, 대부, 상, 비왕 등의 관직 제도가 확인되기 때문에, 중국식의 관료제에 관한 문화를 수입했을 가능성은 존재한다. 또한 황해도의 점제현 신사비가 고조선 계통의 신앙 구조를 반영한 것이라면, 산신(山神)에 대한 숭배가 존재했을 수 있다. 삼국사기 동천왕본기 21년 조에서는 '평양은 본래 선인(仙人) 왕검(王儉)이 살던 곳이다(平壤者本仙人王儉之宅也)'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고려 중기 김부식이 덧단 기록일 가능성이 크나 후에 고조선이 신선 사상과 관련하여 연결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고조선 멸망 이후에도 한의 법률은 시행 흔적만 보이고, 독자적인 8조법이 유지되었다. 초보적인 법률의 모습을 보이며, 강한 강도의 처벌법으로 평가된다. 노비제의 출현이니 인명의 존중이니 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국사와 한국사 시간에 배우는 내용이니 여기서는 생략. 기자에 의해 8조법이 만들어졌다는 주장이 있으나, 이는 사료의 오독으로 전하게 된 것이다.
『한서』의 箕子去之朝鮮, 敎其民以禮義田蠶織作. 樂浪 朝鮮民犯禁八條 …(기자가 조선으로 가 그 백성들에게 예의와 전잠, 직조를 가르쳤다. 낙랑 조선 백성의 범금 8조는…)를 『후한서』 등에서 箕子去之朝鮮, 敎其民以禮義田蠶織, 作樂浪朝鮮民犯禁八條(기자가 조선으로 가 그 백성들에게 예의와 전잠, 직조를 가르쳤으며, 낙랑 조선민에게 범금 8조를 가르쳤다.)로 오독하였고, 이것이 후대의 사서에 답습되면서 벌어진 오해다.
다만 후에는 한의 상인 등이 유입되면서 사회 생활이 복잡해지고 60여 개의 법 조항으로 늘어난 것으로 보인다. 이로 인해 낙랑군에는 한의 법률이 시행되지 않았다는 것이 중론이었으나, 최근 한의 법률이 담긴 목간의 발굴로 재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다.
樂浪 朝鮮民犯禁八條, 相殺以當時償殺, 相傷以穀償, 相盜者男沒入爲其家奴, 女子爲婢, 欲自贖者, 人五十萬. 雖免爲民, 俗猶羞之, 嫁取無所讎, 是以其民終不相盜, 無門戶之閉, 婦人貞信不淫辟. 其田民飮食以籩豆, 都邑頗放效吏及內郡賈人, 往往以杯器食. 郡初取吏於遼東, 吏見民無閉臧, 及賈人往者, 夜則爲盜, 俗稍益薄. 今於犯禁窾多, 至六十餘條.
낙랑 조선 백성들의 범금 팔조는 서로 사람을 죽이면 죽임으로써 갚고, 서로 상해를 입히면 곡식으로 갚으며, 서로 도둑질하는 자는 남자는 함몰하여 가노(家奴)로 삼고, 여자는 비(婢)로 삼는다. 스스로 속죄하고 싶으면 한 사람당 50만 전을 내야 한다. 비록 면하여 일반 백성이 되더라도 습속으로 오히려 차별하여, 혼인하고 싶어도 짝을 찾을 수 없었다. 이 때문에 백성들은 서로 도둑질하지 않아 문을 닫는 자가 없었고, 부인은 정숙하여 간음하지 않았다. 밭 가는 백성들은 변두(제사 그릇처럼 생긴 그릇)에 음식을 담아먹고, 도읍의 관리들은 (중국) 내군의 상인처럼 하여 왕왕 술잔 같은 그릇으로 식사한다. 낙랑군은 처음에 관리를 요동군에서 데려 왔다. 관리들이 백성들이 문을 닫지 않는 것을 보고 상인들과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밤이면 도둑질하여, 풍속이 점점 박해졌다. 지금은 범금이 늘어나 60여 조가 되었다.
위에서 50만 전은 상당히 비현실적인 액수인데, 사마천이 사형 혹은 궁형을 면하기 위해 지불해야 했던 돈이 50만 전이었으나 마련하지 못했다. 본 고조선 시기에는 없던 조항이었으나 나중에 멸망하고 난 뒤 중국인들에 의해 덧씌워진 기록이다.
당시 고조선 사회는 이미 상당한 정도로 계급 분화가 진행되고 있었다. 8조의 법금(法禁) 중 현재 전해지는 3개 조항에서, 화폐 개념과 노비의 존재, 그리고 사유 재산에 대한 보호 조치를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시기 지배층의 무덤에서 출토되는 화려한 부장품들은 계급 분화의 모습을 여실히 보여준다. 그러나 촌락에선 공동체적 관계가 여전히 작용하고 있었다.
이외에도 『한서』 지리지를 통해 고조선의 풍습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으며, 위만의 입국 기록을 볼 때 상투를 틀었으며 중국과는 다른 복식을 갖췄음을 알 수 있다.
공무도하가(공후인)가 고조선의 음악으로 알려져 있다. 다만 문헌을 읽기에 따라 고조선인 백수광부의 아내가 지었다는 설, 지나가던 뱃사람 곽리자고가 지었다는 설, 곽리자고의 아내 여옥이 지었다는 설로 나뉠 수 있다.
7세기 경의 『토원책부』에 인용된 『위략』의 내용이 발굴되었는데, 이에 따르면 흔히 동예의 제천 행사로 알려진 무천이 고조선의 풍속이었다고 한다. 또한 소를 잡아 발굽의 형상으로 점을 치는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 # 이는 전형적인 예 계통의 풍습으로, 신뢰할 수 있는 자료라면 고조선의 구성 인구에 대한 하나의 단서가 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1.5 현 중국 학계의 관점
출처는 바이두 백과 古朝鮮
(해석)
고조선은 한무제 당시 설립된 한사군(기원전 108년)이전, 고대한반도 북부국가의 명칭이며 단군조선 및 기자, 위만조선 3개 왕조를 포함하고 있다.
고조선을 다루는 개념은, 기타국가(타국)의 학자와 남북한학자들의 이해가 다르다. 기타국가의 학자들의 주요핵심어는 신사(信史 : 기자, 위만 그리고 한사군)생성이전, 한반도지역의 고대문명이다. 그리고 북한과 한국이 말하는 고조선, 대부분 합쳐 부르길 단군조선과 위만조선이고, 기자조선의 존재는 승인하지 않는다. 13세기말 고려왕조사기 삼국유사엔 기자조선, 위만조선을 말하고 있다. 근거로 한사지리지에 적힌 현만, 낙랑, 한무제시기에 선립, 이름 조선, 예초(더러운 담비), 구려만이(구려오랑캐)등 이곳을 조선과 고려로 합쳐 불렀다. 고조선과 고구려 당시를 두 곳을 별개의 부족군체로 설명하고 있다. 후한서 고구려전에 따르면, 고구려남부와 조선은 상접해있다. 고구려당시 고조선을 영유하지 않다고 설명하며, 고조선은 고구려에 포함하고 있지 않다고 한다.
전설
고려시대 승려 일연이 집필한 사서인 삼국유사와 이승휴가 집칠한 제왕운기에 기록된 것을 근거로, 제석환인(환인즉제석, 제석천, 별도의 명칭으론 환인)의 얼자환웅이 인류와 함께 생활하기를 원했다. 환인의 동의를 얻은 후, 환웅은 약 3000명을 거느리고 태백산에 강림,신시를 건립한다. 데리고온 풍백, 우사, 운사등을 제외하고도, 환웅은 법률과 불규, 그리고 강종각양의 예술과 의학, 그리고 농업기술을 인류에게 알려준다.
이를 근거로, 당시 산동(중국의 산동지방)중의 호랑이와 곰 한마리씩이 와 환웅에게 인간으로 변하게 해주기를 권한다. 환웅은 그들에게 20편의 쑥과 마늘을 건네준 뒤, 백일동안 이것을 먹으며 태양을 보지말고 살라고 일러준다. 호랑이는 견디지 못하고, 이로인해 인간이 되지 못한다. 곰은 21일째 되는날 여자로 변신하는데 성공한다. 웅녀는 남편이 없음으로, 신단수 아래에서 재차 환웅에게 자식을 달라고 기도한다. 환웅은 웅녀의 기도를 받아들여 웅녀를 처로 받아들인다. 서오로 삼는다. 후에 웅녀가 아이를 낳자, 그것이 바로 단군왕검이다. 단군은 신화전설 중에 산신이 된다. 그러나 현재에 이르러, 민족의식과 애국심을 높이기 위해서, 단군이 조선을 건국한 전설을 북한과 한국교과서 중엔 쓰여지고 있다. 단군은 중국역사교과서를 근거로하면, 단군조선은 역사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일본의 교과서안에서 역시 단군조선의 기록은 없다.
조선과 한국학자들이 말하길, 단군조선전설 중 조선정권이 존재함이 가능하다, 그러나 만일 이를 이를 들어 말하자면, Willian T. Sanders와Barbara J. Price이 제안하는 4단계인 유단, 부락, 족장제(酋邦), 국가, 그리고 국가형성에 필요한 2개의 논술인 (1)혈연관계의 국가조직상 피지록관계와 그 치환, (2)합법적무력을 가짐, 등단군조선문화는 부락혹은 족장제문화일 가능성은 있을지언정 국가가 아니다. 일단 발전된 농업과 초보적인 수공예, 그리고 그것을 표현할 민족문자와 없거니와 한자(汉字 : 동시에 한자는 이미 발전이 성국해져있다.)의 사용등이 있다. 그러나 중국동북지역에 출토도는 많은 수의 상은주초기 시대 청동기와 아후(亚侯 : 제후국),기후아실(其侯亚矢), 연나라 제후국(匽侯 즉 연후燕侯)등이 세겨져있다.
북경대학동북아연구소소장, 세계사연국소소장, 원북대역사계부계주임, 역사학자송성유교수가 소개한, "한국역사가가 강조한 국사, 한국역사가 가지는 5천년에 대해, 고조선건국신화가 근원을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는가?"의 신화중 천신단웅이 하늘에서 내려와 태백산산정의 신단수아래에 건립한 하나의 신지세계며, 그(환웅)와 웅녀가 낳은 아이 단군, 즉 인간이창건한 고조선, 조선의 시조왕의 탄생이다. 1910년 일본이 한국을 삼킨 후, 한국의 역사학자들이 중국에 망명하였고, 침략에 반항하기 위해 민족주의를 내세웠으며, 그 역사학자들은 힘을 흡수하여(합치며) 한국의 독립성을 강조, 후에 이르러 한국역사계중 민족사학이 유파가 된다.
1948년 대한민국성립후, 민족사학들은 한국교단사학의 삼대유파 중 하나가 된다. 또한 재야사학이라 불리는 비학자민간인사들(환빠), 신화이야기를 좋아하고 민간전설과 평서강의와 진실의 역사를 혼란에 빠뜨리게되어, 사회안에서 크게 유효한 힘을 발휘하게 된다.
불교용어중 환인은 제석환인으로 약칭되어 제석천으로 이르며 그때문에 제석환인은 약칭제석혹은 석제등으로 불릴 수 있다. 환인은 즉 제석의 관념에서 나온 불교사상이며, 원천은 법화경, 그 이야기는 관불삼미해겨으 화엄경등 불교경전중 자주등장하는 우두전환(소머리 괴물이다.) 또한 등장하는 천왕과 부인등은 종교용어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소수림왕본기에 의거하면 372년 전주후진이 보낸 견사(사신)및 부도(사탑 혹은 승려)가 불상, 경문등을 보냈다, 374년 승아도래(승려가 오다), 375년 소수림왕 : 소문사를 창립이 매우 순조롭다. 이불람사를 역시 도달해 해동의 불법이 시작하였다. 일반적으로 한반도의 불교는 372년부터 시작, 단군왕검신화는 적어도 공년 4세기이전엔 불가능했을 것이다.
단군신화중 태백산에 대하여
고려승려인 일연(1206~1289)삼국유사의 설명에 따르면 태백은 곧 소향산이라고 한다. 신승동국여지승람에선 소향성, 부동130리, 일명태백산이라고 하며, 후세학자역시 대부분 태백산을 초기엔 소향산으로 생각했으나, 대략 18세기말 조선인의 시작을 태백산정립을 백두산 혹은 장백산이라고 했다. 그 대표인물은 안정복(1712~1791)의 동사강목 태백산고 에서 신라문인 최치원의 상태사시중태의 고구려의 남은 사람끼리 끼리끼리 모여 있여(残孽类聚), 북은 태백산아래에서 국호를 발해라고 설명함을 근거로 들고 있다. 이 사람이 해설하기를 태백산은 백두산 혹은 장백산, 그후 줏대없는 사람들이 모여 들고 있다(附和者渐众) 현재에 이르러 많은 사람들이 그르치고 있는데, 단군신화의 태백산은 장백산과 동일함으로 오늘날의 중국동북시각에선 고조선은 중국의 강역(지배지)에 속한다.
1.5.1 현 중국 학계측 관점의 문제점
매우많은 문제점들이 산재해 있다. 가장 큰 것은, 국가의 성립을 오로지 단순한 씨족, 부족, 족장제, 국가 등 어딘가(이집트나 중국)에서나 있을 법한 국가체계만으로 설명하고 있다. 로마의 경우에도 처음 전설 상의 인물인 로물루스 이야기나 스파르타의 건국시조라는 헤라클레스 등을 생각해보자. 이들을 씨족, 부족, 족장제, 국가 등으로 나누기란 쉽지 않다. 그리스 도시국가와 과거 바이킹족과 같이 국가를 건립하는 과정에서 이 4개 과정을 생략한 나라는 충분히 있다. 유대국가 역시 마찬가지. 도리어 땅을 어디서 부터 얻었는지 생각하면 더욱 혼란스럽다.(모세나 다윗) 어찌 보면 민족국가라는 특이점일 것이다. 또한 굳이 체계적이지 않다 하더라도 고대국가 중 특히 한반도의 고구려, 신라, 백제 등이 거의 마을 촌단위에서 국가를 칭하면서 성장했음을 생각해보자.(Ex. 박혁거세신화) 이는 한국고유의 생성과정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런 도시국가 연합은 수만 가지로 갈려서 전국시대 등을 걸친 중국이 할 말은 아니다. 중국과 전쟁을 수차례한 고조선을 합법적인 무력이 없는 국가로 만드는 것도 웃긴 일이지 않을 수 없다. 이는 국가적 기능이 없음을 알리려는 개드립으로 밖엔 볼 수 없다.
또한 자신들의 문자를 사용하고 있으므로 국가적인 능력이 없음을 시사하고 있다. 베트남 또한 한자를 예전에 사용한 바 있고 일본 또한 한자를 사용하는 와중에서 그런 식으로 판단하는 것은 큰 잘못이다. 일본이나 벨기에 같은 나라가 국가적인 능력이 없다 말할 수 있을까? 특히 민족문자로 국가의 성립을 논한다면 문자가 없던 국가들은 무엇이 되는가?
우리 역사가들이 고조선을 역사로 올리는 이유가 민족주의 때문만은 아니다. 분명 우리나라 고대 국가들이 고조선을 정신적으로 계승했다고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1.6 후대에 미친 영향
이성계가 세운 조선과 구분하기 위해 현재는 고조선(古朝鮮)이라는 명칭을 쓴다. 일부에선 더 이전에 존재한 국가에 고(古)를 붙이는 것은 잘못된 용법이라는 의견도 있다. 그렇지만 고려시대에 이미 위만조선과의 구분을 위해 삼국유사에서 단군조선을 고조선이라고 불렀기 때문에 이러한 용법의 유래가 퍽 깊다.
고조선의 멸망 뒤, 조선왕조가 등장할 때까지는 이 이름을 쓰는 작위나 명칭을 쓴 사례는 고구려 멸망 후에 고구려의 마지막 왕인 보장왕이 당으로부터 조선왕(朝鮮王) 봉작을 받았다거나, 고려 시대에 이자겸이 조선국공(朝鮮國公)이라는 작위명을 사용했던 기록이 있다.
중국 기록에 고구려의 제사 중 기자에게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으나, 중국 문헌에는 음사로 기록되어 있다. 고려시대에는 숙종 이후 평양에 기자 사당이 세워졌고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황해도 구월산에는 환인, 환웅, 단군을 제사 지내는 삼성사가 존재했다. 조선 초에 나타난 『삼성당사적』에 따르면 9세기 초반에 세워졌다는 패엽사와의 갈등이 그려져 있어 연대를 그만큼 소급할 수 있겠으나 신빙성은 의심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이후 이성계가 나라를 세우면서 한반도 전체의 숭배 대상이 될 수 있는 대상으로 한국사 최고(最古)의 국가인 조선 계승 의식을 폈다.
한편으로 고조선 후기와 멸망시기에 걸쳐 많은 고조선 유이민들이 남하하면서 한반도 남반부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18] 고구려는 부여계승의지를 표명했지만 낙랑군을 멸망시키고 평안도 일대 지역을 차지한 이래 기자에 대한 제사를 지내오며 고조선에 대한 계승의지를 강조했다.[19] 그렇지만 대놓고 식으로 고조선을 강조하지는 않았고 조상국가로 여긴듯하다. 다만 고구려에서도 기자에 대한 제사를 지낸점과 함께 백제에서도 고조선의 후예 국가인 마한을 멸망시켰다는 기록이 있지만[20] 어찌되었건간에 고조선을 자신들의 뿌리국가중 하나정도로 인식했던걸로 보이고, 신라도 고조선 유민들이 내려와서 건국했다는 얘기도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통해 언급된다. 즉, 삼국 모두 고조선이 자기들 국가의 뿌리국가 중 하나라는 점은 인지하고 있었던 셈.
다만 남아있는 기록이 너무 없고 대놓고 식으로 고조선에 대한 계승의지를 표명한것도 아니기에 현재로서는 알수 있는게 그리 많지 않을 뿐이다. 고려도 발해와 마찬가지로 고구려 계승 의식을 표방했고, 고조선에 대해서는 궁궐내에 조선궁을 두었기는 했지만 서경일대를 제외하면 그저 최초의 국가라는 점 정도의 인식이 고작이었는데, 12세기 이후에 혼란을 겪게 되기시작하면서 백제와 신라의 부흥 운동을 겪기도 했으며, 이를 극복하기 위해 몽골 침입 이후 한반도 전체의 민족 의식이 성립되면서 의미가 부각된 고조선에 대한 인식을 이용한 것이다. 한반도 최고의 국가라는 명분 외에도 고조선 세력권인 북방과 준왕이 왕위를 찬탈당한 이후 내려가 장악했다는 남방을 포괄할 수 있는 국가로 의미가 있었고, 고려 후기들면서 이성계가 왕위에 오르면서 국호를 조선으로 바꾼 이후에 고조선에 대한 의미 부각도 더욱더 강해져 이전보다 고조선을 자세히 기록한 역사서의 편찬 및 제사 의식으로 한동안 부각되었다. 조선시대에는 기자 - 단군 - 동명왕을 한 곳에서 모시는 제사를 평양에서 지냈지만, 위만은 찬탈자로 취급하여 제사를 지내주지 않았다. 한편 단군을 평양에 배향하면서 삼성사는 잠시 훼철되었으나 성종 대에 삼성사가 복원되었다. 이곳을 계승한다고 하는 곳이 바로 현재 지리산의 삼성궁이다. 한편 양반 사이에서는 기자 8조법에도 노비제가 있다고 하여 노비 제도를 정당화하는 근거로 쓰인 모양이다. 안습. 이외에 8조법 중 전하지 않는 5가지는 분명히 오륜일 것이라고 억측을 하기도 했다.
조선 후기에는 소중화 의식 및 자국 의식이 높아지면서, 단군과 기자에 대한 연구 및 추숭 작업이 활발해졌다. 16세기부터는 아예 기자조선 시대의 계보도가 작성되는 등 존숭을 위한 일종의 역사 왜곡이 행하지기도 하였고, 17세기 후반부터는 단군조선 또한 본기(세가가 아니라 본기인 것은 중국과 대등하다는 의식화이기도 하다)에 포함되는 등 권별, 허목, 홍만종 등에 대해 역사화 작업이 진행되었다.
20세기 들어서 한국 민족주의의 핵심이 되기도 하였으며, 신채호 등의 민족사학자들에 의한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었으나 기존에 있던 한국 측 사료가 빈약하고 근대에 발견된 사서들은 학계에서 위서 논란이 일어나는 경우가 많아 고조선에 대한 학문적 진전이 많이 더뎌진 상태다.
1.7 고조선을 소재로 한 작품
고조선을 다룬 작품은 아니지만 고조선이 등장한다. 한민족의 시조국가답게 우방타워랜드 방어전(...)이 주 전략인 국가. 타워가 좋고 성직자 생산비용이 저렴해서 타워로 방어와 공격을 하면서[21] 성직자들로 적의 고급 유닛들을 아군으로 바꾸는 전략이 주를 이룬다. 여기에 장검병/군단병이 보너스 체력+80이라는 점과, 노포가 대부분의 업그레이드가 된다는 점 때문에 예상외로 강한 국가.
고대 시대는 고조선을 모델로 한 것으로 추정. 한국을 선택하면 나오는 국가 지배자 이름 중에 단군이 있다.
1.8 관련 문서
- 아사달
- 단군조선
- 기자조선 - 기자, 부왕(혹은 비왕), 준왕
- 위만조선 - 위만, 우거왕
- 청동기시대
- 철기 시대
- 삼
- 성기
- 조선
- 쥬신
- 단군신화 - 환인 - 환웅 - 단군 - 웅녀
- 공무도하가
- 한사군
- 마한
- 목지국
- 단군
- 기자
- 위만
2 최순실 게이트로 생겨난 신조어
사실 헬조선의 조선은 근세 조선왕조가 아닌 고조선의 그 조선이었다 카더라.
- ↑ 일부에서는 단기력을 근거로 2333년을 건국 연도로 표기하지만 이 시기는 고고학적으로 후기 신석기 시대로 여겨지고 있고 성읍국가의 형성이 이루어지기 이전이라고 보고 있기 때문에 삼황오제나 요순처럼 신화 또는 전설로 여겨지며 학계에서는 단군 신화의 내용이나 발굴되는 유물들을 토대로 실질적으로 청동기 시대에 건국된 것으로 보고 있으나 정확한 건국 연대를 측정하기는 힘들고, 남아있는 도시나 마을 유적, 고인돌 등을 토대로 추측하고 있는 수준에 머물고 있다. 그래도 나름대로의 성과는 나오고 있는 중.
- ↑ 고조선 관련 한국 문헌, 중국 문헌을 보면 고조선의 남부 영역이 한강 이북(경기도 북부), 강원도, 경상도 북부 지역을 점유하고 있었다고 나온다. 제왕운기, 사기에도 고조선의 영역이 진한 땅과 접하고 있었다고 나온다. 때문에 고조선의 영역을 한반도 중남부까지 소급할 수 있다고 봐야 한다. 중국 사서(사기, 후한서)에서는 예에 해당하는 영역을 전부 고조선의 영역으로 간주하고 있다.
- ↑ 고조선의 군주가 단군이라고 불렸다는 직접적인 기록은 없지만 단군 신화를 통해 추측이 가능하다. 후(侯)와 왕(王)의 경우는 중국의 기록에서 연나라를 따라 고조선의 군주가 후(侯)에서 왕(王)을 칭하였다고 서술되어 있다. 그런데 후와 왕이란 호칭은 중국에게만 사용하고 내부에선 계속 단군이라 했을 수도.
- ↑ 韓족
- ↑ 漢족, 춘추전국시대와 진한교체기, 위만조선기에 유입
- ↑ 대략 기원전 12-9세기를 전후해서 요동 지역과 평안도 지역에 걸쳐서 비슷한 문화권의 수많은 성읍국가들이 형성되어있었으나 대략 기원전 6-5세기 경을 전후해 남동쪽으로 확장을 거듭한 고조선을 중심으로 통일되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다.
- ↑ 사실 고조선의 영역이 현재의 요동-북한 지역으로 추정되는 만큼 이는 당연한 얘기지만) 그나마 유적이 많이 있을 것이라고 추정되는 북한 지역에 대한 탐방이 현재로서는 불가능하며(물론 북한에서도 고조선 유적에 대한 발굴이 진행되고 있고, 이미 1960년대에 고조선의 수도가 평양에 있었다는 연구 결과를 내놓을 정도였지만 1960년대 중후반에 고고학계에 한 차례 숙청 바람이 분 이후에 여러 문제로 신뢰성이 낮다.), 요녕성과 그 근처 지방에서 고조선의 것으로 추정되는 유물이나 유적이 나오기는 하나, 문자 기록이라고 해 봐야 동전이나 약간의 문자 정도나 나오는 수준에 그치고 있고(그나마 제나라 등 중국 동부에 위치한 국가들과 무역이 이루어졌다는 걸 확인할 수준은 되기는 하다.)
- ↑ 춘추전국시대 각국의 역사서를 없앤 진시황의 분서갱유도 고조선과 관련한 서적 부족에 한몫 한다. 당장 고조선과 치고받았던 연나라가 집필한 사서 대부분이 분서갱유로 소실됐다.
- ↑ 당시 국내에서는 덧띠새김무늬토기가 발굴되지 않았다.
- ↑ 고고학적으로 보나, 사료적으로 보나 가장 가능성이 높다
- ↑ 기원전 2333년에 비하면 매우 늦은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해방이후 과거의 역사학계에서는 애초에 삼국 초기도 역사시기로 안봤었다. 그것에 비하면 우리 역사학이 과거사 복원에 꾸준히 노력한 결과 이곳까지 이르게 된 것으로, 굉장히 장족의 발전이라 봐야 할 것이다.
- ↑ 대체로 원로교수나 서울대쪽 교수들이 부정적이고, 젊은 교수들이 긍정적이다.
- ↑ 물론 분서갱유의 목적은 사상의 통제이기는 하지만 결과적으로 고대 사서가 대거 불에 태워지게 되면서 고대사에 대해 많은 부분이 알기 힘들어지게 되었다.
- ↑ 하지만 사기 조선 열전도 그나마 고조선에 대해 자세히 적힌책이라고는 실제 기록은 간략하기 짝이 없어서 기원전 3세기 이전의 일은 기록되어 있지 않고 위만조선에 대한 기록만이 남아있으며, 자료조사가 미비한 모양인지 위만이 언제 죽었는지에 대한 기록과 위만 조선의 2대왕에 대한 기록, 우거왕이 언제 즉위했는지에 대한 기록등이 빠져있다. 애초에 사마천이 살던 곳이 고조선과 가까운 곳이 아닌데다가 사기에서도 이민족의 역사는 부차적인 차원에서 다루워지고 있다는것이 가장 크지만.
- ↑ 부왕-준왕 관련 최초 기록이 『사기』에 나와 있다고 잘못 알고 있는 사람도 있는데, 사실 준왕과 부왕에 대한 기록은 『위략』에서 처음으로 나온다.
- ↑ 현재까지 드러난 고조선의 영역을 추정해보면 요서부터 랴오둥 반도, 한반도 북부 황해도와 강화도까지 보하이 해와 황해를 중심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를 근거로 생각해보면 산해경의 이러한 진술은 해상 중심의 국가였음을 지칭한다고도 말할 수 있다.
- ↑ 관련 논문 : 기원전 3세기 요령 지역의 연나라 유물 공반 유적의 제 유적과 연문화의 관계/오강원, 한국상고사학보/2011년
- ↑ 특히 고조선의 통치체계와 고구려, 백제, 신라의 초창기 통치체계를 비교해볼때 유사성이 상당부분 발견된다.
- ↑ 사실 이전의 400년 정도를 중국에 복속된 낙랑군 주민들을 고구려로 효과적으로 결속시키는데에는 적어도 춘추전국시대 이전시기부터 존재했던(혹은 추정되는) 고조선을 강조하는것이 가장 먹히는 방법이기는 하다. 그래서 기자에 대한 제사를 국가주관으로 지냈던 것이다.
- ↑ 목지국이 고조선의 후예국가로 추측되는데 준왕이 남하해서 세운 국가라고 한다. 중간에 왕조가 바뀌었다는 얘기도 있고 준왕의 대가 끊겼다는 얘기도 삼국지에 언급되지만 자세한건 불명이다 어쨌든 백제가 고조선과는 연관이 없다고 말하기 힘든건 사실이다.
- ↑ 참고로 이때는 마을회관에 전투력이 없었고, 성은 존재하지 않았다.
- ↑ 개천절특집으로 고조선을 소재로 다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