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무라카미 하루키 (村上春樹) | |
국적 | 일본 | |
직업 | 작가, 번역가 | |
출생 | 1949년 1월 12일, 일본 교토 후시미구 | |
아내 | 무라카미 요코 | |
최종학력 | 와세다대학 문학부 연극 | |
데뷔년도 | 1979년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
목차
1 개요
村上春樹(むらかみ はるき)
무라카미 류와 함께 일본의 한 세대를 풍미하는 작가로서 간주되며, 요시모토 바나나와 함께 해외에서도 유명한 작가이다.[1]
소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로 1979년 군조신인문학상을 받으면서 데뷔하였다. 1987년 발간된 《노르웨이의 숲》이 430만 부 이상 팔린 베스트셀러가 되어 무라카미 하루키 붐이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단편소설, 장편소설을 포함하여 에세이, 논픽션, 기행집 집필 활동도 활발하고 영미 문학 일역가로서도 활동한다.
30대 후반부터는 소설도 소설이지만 세계 각지를 여행하면서 에세이를 많이 쓰기 시작했는데, 바로 옆에 있는 한국은 아직 한 번도 방문한 적이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루키에게 한국이라는 나라가 전혀 관심 밖의 국가인 것은 아니고, 스푸트니크의 연인의 뮤나 1Q84의 다마루가 한국인으로 나오는 등 지금까지 몇 차례 작품에서 언급했다.[2]
나이가 좀 있는 사람이다 보니 보통 한국을 찾는 젊은 일본인 관광객처럼 놀러 올 목적으로 방문하기는 힘들기 때문에, 무라카미 하루키 작품전 같은 업무적인 구실이 있어야 한국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2015년 타임선정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00인 Icon 부문에 선정되었다.(#)
2 생애
2.1 어린시절과 20대
1949년 교토부 교토시 후시미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사립 고요 학원 중학교의 교사로 부임하자 곧 효고 현 니시노미야시의 슈쿠가와로 전학 갔다. 아버지는 교토부 나가오카쿄시 아오의 정토종 니시야마파 고묘지 주지스님의 아들이고 응? 어머니는 오사카 센바의 장사꾼 집안의 딸로 부모 모두 간사이 토박이였기에, "당연하게 간사이 사투리를 쓰면서 지냈다." 또 부모 두 분 다 국어교사라서 책을 좋아하는 부모의 영향으로 독서가로 자라났다.
니시노미야 시립 하마와키 초등학교 입학, 니시노미야 시립 고로엔 초등학교 졸업. 아시야 시립 세이도 중학교를 나와서 효고현립 고베 고등학교로 진학했다. 부모님이 일본문학에 대해 이야기 나누는 것에 진절머리가 나서 서구 번역문학에 심취했고, 부모가 구독하던 가와데 쇼보의 <세계문학전집>과 중앙공론사의 <세계의 문학>을 한 권 한 권 읽으며 10대 시절을 보냈다. 중학교 때부터는 중앙공론사의 전집 <세계의 역사>를 반복해서 읽었다. 고베 고등학교에서는 신문위원회에 소속돼 있었다.
재수를 해서 1968년에 와세다대학 제 1 문학부에 입학해 연극과에 진학했다.[3] 대학교 재학 중에는 연극 박물관에서 영화 시나리오를 탐독하는가 하면 영화 각본가를 꿈꾸며 시나리오를 집필하기도 했는데, 학교에는 거의 나가지 않고 신주쿠에서 레코드 가게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가부키초의 재즈 찻집을 뻔질나게 드나들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1970년대 초에는 도쿄도 치요다구 스이도바시에 있던 재즈 찻집인 "스이도바시 윙"의 종업원이 됐다. 1971년에 다카하시 요코와 학생 신분으로 결혼을 했고, 한때는 분쿄구에서 침구가게를 운영하던 아내의 처가에 세들어 살았다.
2.2 재즈 카페 개업
대학교를 졸업하기 전에 도쿄 도의 고쿠분지 시에서 '피터 캣[4][5]'이라는 커피점(저녁에는 재즈바)을 개업해서 운영하였다.가게 이름은 이전 기르던 고양이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밤에는 재즈바가 되고, 주말에는 라이브 공연을 실시했다. 개점 자금은 500만 엔으로, 절반은 부부가 아르바이트를하고 모은 돈, 나머지는 모두 부모에게서 받은 돈이었다 가게는 아내와 함께 1974년부터 1981년까지 운영했다.
1975년 7년간 재학한 와세다대학을 졸업했다. 졸업논문의 제목은 <미국영화에서의 여행의 계보>로, 이 논문에서 아메리칸 뉴시네마와 '이지 라이더'에 대해 논했다.1977년 '피터 캣'을 센다가야로 옮긴다.
2.3 데뷔와 성공
1978년 4월 1일, 메이지진구 구장에서 프로야구 개막전을 관람하던 중 소설을 쓰자는 생각이 떠올랐다. 1회말 야쿠르트 스왈로즈의 선발 타자 데이브 힐턴이 2루타를 친 순간의 일이었다고 한다. 그 후로 재즈 찻집을 운영하는 한편으로 매일밤 부엌 테이블에서 글을 계속 썼다.
1979년 4월, '군조'에 응모한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가 제 22회 군조 신인 문학상을 수상했다. 이 작품이 '군조' 1979년 6월호에 실리면서 작가로 데뷔했다. 커트 보네거트, 리처드 브로티건 등 미국문학의 영향을 받은 문체로 현대의 도시 생활을 그려내며 주목을 받았다. 그해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가 제 81회 아쿠타가와상 및 제 1회 노마 문예 신인상 후보에 오르는가 하면, 이듬해에는 《1973년의 핀볼》로 제 83회 아쿠타가와상 및 제 2회 노마 문예 신인상 후보에 올랐다. 1981년에 전업작가가 되기로 결심하고 '피터 캣'을 다른 사람에게 넘겼다. 이듬해에는 장편소설 《양을 쫓는 모험》을 발표해 제 4회 노마 문예 신인상을 탔다.
1985년에는 두 개의 이야기가 번갈아 가며 진행되는 장편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를 발표해 제 21회 다니자키 준이치로상을 수상했다. 1986년 10월에 유럽으로 이주했다 [6].
1987년에 "100% 연애소설"이라는 타이틀을 내건 《노르웨이의 숲》을 발간했는데 결과는 초대박. 《노르웨이의 숲》은 상권과 하권을 통틀어 430만 부 이상이 팔려나간 베스트셀러였으며 일본내 소설 최대 발행부수 신기록을 세우는 등 일본 전국적으로 하루키 신드롬이 일어났다.
1989년 10월에는 하루키 소설 중 처음으로 《양을 쫓는 모험》이 영어로 번역되었다. 영어 제목은 Wild Sheep Chase.
2.4 1990년대, 작품관의 변화
1991년 뉴저지 주 프린스턴 대학교의 객원 연구원으로 초빙 받아 미국으로 건너갔다. 이때를 전후로 걸프전이 발발했다. 훗날 하루키는 "솔직히 말해 그 당시 미국의 애국적이고도 마초적인 분위기는 그리 달갑지 않았다"고 술회했다. 그 다음해에 체류 기간 연장을 위해 객원 강사로 취임한다. 현대 일본문학 세미나에서 제 3의 신인에 대해 강의하면서 에토 준의 '성숙과 상실'을 서브 텍스트로 썼다.
1994년 4월에는 '태엽 감는 새 연대기' 제 1부와 2부를 펴냈으며,1995년 6월 귀국. 8월에 '태엽 감는 새 연대기' 제 3부를 간행했다. 이듬해 생애 처음으로 '태엽 감는 새 연대기'로 제 47 회 요미우리 문학상을 수상하였다.
1996년 6월에 '무라카미 아사히도 홈페이지'를 개설했다. 1997년 3월에는 지하철 사린 사건의 피해자들의 인터뷰를 정리한 논픽션 《언더그라운드》를 출판했는데, 그때까지는 오히려 내성적인 분위기로 사회에 무관심한 청년을 그려 왔던 하루키가 사회 문제를 정면에서 다뤄 주위를 놀래켰다. 1999년에는 《언더그라운드》의 속편으로 옴진리교 신자들과의 인터뷰를 정리한 《약속된 장소》를 발표해 제 2회 구와바라 다케오 문예상을 수상했다.
이 시기에 사회적인 사건들을 소재로 다루게 된 것에 대해 하루키 자신은 "커미트먼트"(commitment)라는 단어를 써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commitment(책임감, 헌신)이라는 것에 대해서 요즘 많이 생각합니다. 예컨대 소설을 쓸 때도 저한테 이 commitment라는 게 매우 중요해졌습니다. 예전에는 detachment(관계 없음)가 중요했는데 말이죠.
'태엽 감는 새 연대기'는 저에게는 제 3 스텝에 해당합니다. 우선 아포리즘과 디태치먼트가 있고, 다음으로 이야기를 하는 단계가 있는데, 마침내 그래도 뭔가 부족하다는 것을 스스로 깨달은 거죠. 그 부분에서 commitment라는 것과 관련이 생겨났을 겁니다. 저 자신도 아직 정리가 안 되고 있지만요.- 동상(同上), 70쪽에서
2.5 2000년대
2002년 9월, 처음으로 소년을 주인공으로 한 장편 소설 《해변의 카프카》를 발표한다. 2004년에는 카메라아이와 같은 시점이 등장하는 실험적인 작품 《애프터 다크》를 발표했다. 2005년 《해변의 카프카》의 영문 번역판인 Kafka on the Shore가 뉴욕 타임스의 "The Ten Best Books of 2005"에 선정돼 하루키에 대한 국제적인 평가가 높아졌음을 보여 줬다.
2006년에는 프란츠 카프카상과 프랭크 오코너 국제 단편상 등 국제적인 문학상을 연거푸 수상했다. 프란츠 카프카상은 아시아권 통틀어서 최초로 수상했다. 특히 카프카상은 전년도 수상자인 해럴드 핀터와 그 전년도 수상자인 엘프리데 옐리네크 모두 그해의 노벨문학상을 받았다는 점에서, 하루키가 2006년도 노벨 문학상의 유력한 후보로 꼽히기도 했다. 그해 세계 최대 규모의 배팅업체인 영국 라드브록스의 스톡홀름 사무소는 하루키의 수상 가능성에 34배의 배율을 걸어 18번째 인기마로 올렸다(수상의 영광은 예상 1위였던 오르한 파무크에게 돌아갔다). 2007년에는 배율이 11배, 인기 순위는 6위로 한 단계 더 뛰어올랐다. 게다가 2007년 연수입을 보면 외국에서 벌어들이는 것이 이미 일본 국내 수입을 넘어섰고, 사무소의 작업량도 3분의 2는 외국과 작업하는 것이라고 한다.
2008년 6월 3일 프린스턴 대학은 무라카미 하루키를 포함한 5명에게 명예 학위를 수여했다고 발표했다. 하루키에게 수여된 것은 문학 박사이다.
2009년 1월 21일 이스라엘의 일간지 <하레츠>가 하루키의 예루살렘상 수상을 발표했다. 당시 이스라엘은 가자 침공으로 국제적인 비난을 받고 있었는데, 이 수상에 대해 오사카 시민 단체 등에서는 "이스라엘의 전쟁 범죄를 은폐하고 면죄부를 주는 꼴"이라면서 사퇴를 요구했다.
그럼에도 하루키는 2월 15일 예루살렘에서 열린 시상식에 참석해 기념강연을 영어로 했다. 연설 전문은 즉각 미디어에 의해 중계됐고, 그 내용을 일본어로 번역한 다양한 글들이 온라인에 올라왔다. 『문예춘추』 2009년 4월호에 하루키의 인터뷰 "나는 왜 예루살렘에 갔는가"가 실렸는데, 기념강연 전문(영어와 일본어 둘 다)도 함께 수록됐다. 한편 수상식 때 연설 중반부터 페레스 이스라엘 대통령의 얼굴이 굳어졌다고 전해진다. 예루살렘 연설에 관한 자세한 사항은 밑에 항목을 참고하자,
2009년 5월 장편 소설 《1Q84》 1,2권이 간행되었다. 11월까지 합계 223만 부의 발행 부수를 달성했다. 이 작품으로 매일 출판 문화상을 수상했다. 같은 해 12월 스페인 정부에서 스페인 예술 문학 훈장이 수여되고, Excelentísimo Señor라는 칭호를 받고 대우를 받았다.
2.6 2010년대
2011년 6월, 카탈로니아 국제상을 수상했다. 부상인 8만유로(약 930 만엔)를 동일본 대지진 의연금으로 기부했다. 카탈로니아 국제상 수상 연설에서 일본의 원자력 정책을 비판했다
2012년 9월 28일 아사히 신문 조간 신문에 에세이 '영혼의 오가는 길'을 기고했다. 이 글에는 센카쿠 열도 문제와 한일간의 독도 문제에 의해 동아시아의 문화 교류가 파괴되는 사태를 걱정하였다. 하루키는 “문화의 등가교환은 ‘국경을 넘어 영혼이 오가는 길’이다. 지난 20년간 동아시아 문화권은 한류 열풍 등을 통해 풍부하고 안정된 시장으로 성숙한 길에 접어들었다”,국경선’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이상 ‘불행히도’ 영토 문제는 피할 수 없는 이슈다. 그러나 실무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이슈이며, 실무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이슈가 아니면 안된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특히 “영토문제가 실무과제임을 넘어 ‘국민감정’의 영역에 발을 디디면 그것은 ‘출구없는 위험한 상황’을 초래한다”고 강조했다. 이에 하루키는 영토분쟁을 둘러싼 갈등에 대한 과격한 반응들은 “값싼 술을 마신 뒤의 취기어린 행동에 가깝다”고 했다. 특히 “술에 취하면 사고가 혼란스러워지고 더 난폭해져 잔인한 행동을 한다. 논리는 단순하고 자기반복적이 된다”고 강조했다. 하루가 지나면 물론 취기는 사라지지만 남는 것은 두통뿐이라면서 하루키는 ‘영토문제’에 집착하고 있는 한중일의 정치인들에게 경고했다.
2013년 4월, 장편 소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를 간행. 예약만 50만 부가 팔렸고 발매된지 6일만에 100만부를 돌파. 2013년 종합 베스트셀러 종합 2위를 기록했다.[7]
2014년 11월, 독일의 유력 일간지 '디 벨트'가 주는 '벨트 문학상' 올해의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하루키는 베를린에서 베를린 장벽 붕괴를 거론한 뒤 "세계에는 지금도 인종, 종교, 불관용, 근본주의, 그리고 욕망과 불안이라는 벽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우리들 소설가에게 벽은 뚫고 나가지 않으면 안 되는 장애물"이라며 "벽을 통과할 자유가 있다는 점을 느끼게 하는 이야기를 되도록 쓰고 싶다"고 밝힌 뒤 "이 메시지를 자신들의 벽과 지금 이 순간에도 싸우고 있는 홍콩의 젊은이들에게 전하고 싶다"고 말했다.
2015년 1월 15일 기간 한정 사이트 "무라카미씨가 있는 곳"을 개설했다. 이날부터 1월 31일까지 사이에 37,465 통의 편지가 전해졌고 공개된지 3개월 반 만에 1억 페이지뷰를 기록했다. 이 사이트는 4월 30일에 종료되었고 큰 인기에 힘 입어 단행본으로 나왔다.
안데르센 문학상 시상식 소감에서 "우리에게 맞게 아무리 역사를 다시 써도, 결국에는 우리 자신을 다치게 할 뿐"이라고 말했다.#
3 작품의 특징
3.1 평이한 문장과 난해한 이야기
평이하고 친숙한 문장은 하루키가 데뷔 당시부터 의식하고 있던 점으로, 하루키에 따르면 "낮은 문턱"으로 "마음에 호소하는" 문장은 미국작가인 브로티건과 보네거트에게서 받은 영향이라고 한다. "글에선 리듬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도 하루키가 곧잘 하는 말인데, 그는 이렇게 생각하게 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하여튼 7년 가량 아침부터 밤까지 재즈 가게를 운영했는데, 머릿속에서 계속 엘빈 존스의 하이햇이 울리더라구요."
하루키가 구사하는 은유의 정교함에 대해 사이토 다마키는 "은유 능력을 서로 다른 두 이미지 사이의 점프력이라고 생각할 때, 하루키만큼 멀리까지 점프할 수 있는 일본 작가는 없다"고 평가한다.
반면 문장은 평이한 데 반해 작품의 스토리는 흔히 난해하다는 지적을 받는다. 하루키 자신은 이러한 "스토리의 난해함"에 대해서 독자들에게 "논리"가 아닌 "이야기"로 텍스트를 이해해 달라고 촉구한다. 이야기 속의 이해하기 어려운 사건이나 현상들을 하루키는 "격렬한 은유"라 칭하면서, 영혼의 깊은 부분에 있는 어두운 영역을 이해하려면 밝은 영역의 논리로는 부족하다고 설명한다. 이처럼 "평이한 문제로 고도의 내용을 다루고, 현실 세계에서 비현실의 또 다른 세계로 seamless하게(=이음매 없이, 완벽하게) 이동하는" 작풍은 일본 국내만 아니라 해외에도 소위 "하루키 칠드런"이라 일컬어지는 바 하루키의 영향을 받은 작가들을 배출하고 있다. 또 하루키의 작품은 기존의 일본문학과 대비해 종종 미국적이고 무국적적이라는 평가를 받으면서 세계적인 보편성이 높이 평가되고 있는데, 하루키 본인은 자신의 소설이 어디까지나 일본을 무대로 일본어로 쓴 "일본문학"이며 무국적적인 문학을 지향하는 것은 아니라고 밝힌다. 덧붙여서 하루키가 즐겨 사용하는 모티프는 "연인이나 아내, 친구의 실종"으로, 장단편을 막론하고 거듭 쓰이고 있다.
3.2 작품 간 유사점
대부분 소설 주인공은 1인칭 '나'로 전개되고 '나'는 20대에서 30대 남자로서 부모와 거의 교류가 없으며 형제도 없다. 이것은 하루키의 성장 배경에서 비롯된 듯하나, 근작 《어둠의 저편》, 《해변의 카프카》, 《1Q84》도 일부에서는 3인칭 시점을 시도했으며 주인공을 15세 소년으로 내세우기도 하는 등으로 변화했다.
하루키의 작품에는 성격이 매우 다른 자매, 즉 우수한 언니와 평범한 동생, 쌍둥이[8] ,벽을 뚫고 지나가기, 주인공이 자주 먹는 스파게티, 끝없이 깊은 우물, 연결되지 않는 전화가 소재로서 유난히 반복하여 등장한다.
그리고 섹스가 정말 자주 등장한다. 일부에서는 "야설작가"라고 폄하하기도 하는데, 하루키의 소설에서는 섹스를 통해 해당 주인공의 성장이나 이야기를 해결하는 열쇠가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무라카미 하루키, 어쨌든 결국은 같이 잔 이야기
마지막으로 죽음에 관한 내용도 굉장히 많이 등장하는 편인데, 이는 단편소설에서 짧은 내용으로 인상을 깊게 남기기 위해서는 죽음만큼 효과적인 소재가 없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는 비단 무라카미 하루키뿐만이 아닌, 동화 작가가 아닌 이상 거의 모든 소설 작가들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경향성이다.
3.3 《상실의 시대》의 예외성
하루키의 많은 소설에서는 오컬트 요소와 초현실주의적인 존재(예: 양 사나이)가 빠지지 않고 등장하며 '의식 아래 세계'가 현실 세계와 동시에 진행되는 작품이 많다.
《노르웨이의 숲》은 하루키가 쓴 작품 중 유일하게 이런 오컬트다운 요소가 전혀 등장하지 않는 현실주의 소설이지만, 역설스럽게도 이것이 하루키가 쓴 작품 중 가장 많이 판매된 작품이라는 사정은 유의해야 한다. 작가 자신도 그저 단발성 시도에 가까웠던 캐주얼한 작품이 최고 히트작이라는 사실에 크게 부담스러웠다고 고백한다. 오죽하면 이전 평범한 전업 작가였던 시절에는 사랑받던 느낌이였는데 《노르웨이의 숲》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자 모든 사람에게 미움받는 느낌까지 들었었다고. 백만 부가 팔린다는 건 건방지게 들리겠지만, 자신에겐 정말 기가 찰 정도로 지나치게 높은 판매고라서 감당되지 않았다고 말한다.
3년간 유럽 체류 시절[9]에 쓴 소설이며, 《댄스 댄스 댄스》도 같은 시기에 쓰여졌다.
3.4 장편 소설가
하루키의 저작은 소설 외에도 에세이, 번역, 논픽션 등 다방면에 걸쳐 있고, 이처럼 서로 다른 형태의 작업들을 의도적으로 돌아가며 집필하고 있다. 하지만 자신을 본디 장편작가라고 규정하고 있으며, 단편과 중편소설을 "실험"의 장으로 다루면서 여기서 얻은 것들을 장편소설에 도입한다고 말한다. 또한 이들의 균형을 잘 잡아가며 작업을 진행해야 하므로 원칙적으로 의뢰를 받고 하는 일은 맡지 않는다고.
3.5 종합소설로의 시도
하루키는 1990년대 후반부터 자주 "종합소설을 쓰고 싶다"는 말을 했다. "종합소설"의 본보기로 하루키는 표도르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을 인용한다.
종합소설이란 "다양한 세계관과 여러 가지 관점들을 하나의 이야기 속에 짜넣고 이들을 조합함으로써 뭔가 새로운 세계관이 부상하는" 소설을 목표로 삼는다고 한다. 그리고 "관점을 몇 개로 나누려면 인칭 변화가 꼭 필요하다"고 한다. 이와 같은 시도는 "태엽 감는 새 연대기"(1인칭 안에 편지나 다른 등장인물들의 회상이 삽입됨)와"신의 아이들은 모두 춤춘다"(전부 3인칭으로 쓰임), "해변의 카프카"(1인칭과 3인칭이 번갈아 가며 나타남), "애프터 다크"(3인칭에 "우리"라는 1인칭 복수 대명사가 더해짐) 등의 작품에서 엿보인다.
3.6 작품관 변화: detachment에서 commitment로
1980년대 후반까지 하루키의 모든 소설의 화자는 상당히 깔끔하면서도 담담하고 자폐스러우면서도 감각적인 성격과 취향이 있는 '나'에 국한되어 있었으나 1990년대 이후에는 장기간 미국 체류에 따른 영향, 불혹을 넘긴 나이에 따른 작가의 내면 성장으로 말미암아 타자에서 자발하는 격리(detachment)에서 결속(commitment)으로 변하기 시작한 세계관이 수필집 《슬픈 외국어》에서 보이기 시작한다. 이것은 이후 1990년대 중반·후반 일본을 강타했던 옴진리교 사건 피해자 유가족과 예전 옴진리교 소속자들을 취재한 르포인 《언더그라운드》에서 크게 진보하며, 작가 스스로 어린 시절의 한때를 보냈던 고베에서 일어난 대지진을 모티브로 한 단편 연작 《신의 아이들은 모두 춤춘다》에서는 최초로 3인칭 주인공을 등장하게 하고 마지막 단편 <허니 파이>에서 주인공의 입을 빌려 'commitment'를 대상으로 한 의지를 본격으로 현로하고서 하루키의 작품 세계는 기존 세계관과 인간관에 토대하서도 작중 화자의 스타일을 바꾸어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거나(<해변의 카프카>), 타인과의 연계 / 소통을 희망을 이야기하는(<어둠의 저편>) 태도를 보인다.
4 작가 성향
현대 미국의 문학과 영화에 많이 영향받고 자랐으며 패션 잡지와 영화와 재즈로 대표되는 서구 문화에 익숙하다. 이것은 작품에도 많이 나타나는데 소설에선 지배하는 분위기와 세부 묘사 대상으로, 수필에서는 소재로 사용하며 극단으로는 수필집 한 권 전체를 1980년대의 미국 문화를 이야기할 때 스크랩도 있다.
자유와 인권을 강조하고 조직상·집단상 행동이나 국가주의적인 운동에는 상당히 반발하는 개성이 있다. 자민당의 준 막부 정치가 지속되는 일본 행정부와 일본 사회의 공동체 성향을 향한 비판을 그 사람이 쓴 작품 곳곳에서 목도 가능하지만, 그렇다고 좌파를 두둔하지도 않는다. 그 자신 1960년대 말 전공투의 좌절을 경험하고서 개인주의를 토대로 문학에 입문한 예. 즉, 좌우에 무관히 조직 논리에 기초한 악행이나 이치에 부합한 사유가 결여된 집단 행동을 혐오한다.[10] 예컨대, 미국·일본 안보조약 반대 운동이 있었던 1960년이나 반전운동을 중심으로 대규모 학생운동이 벌어졌던 1969년 같은 해를 두고 가수 모씨가 어떤 노래를 부른 해라는 식으로 거시 담론을 의도로 회피하는 태도를 자주 드러내지만, 이런 회피하는 태도는 예전에는 역설 일종으로 간주됐으나 현 시점에서는 더는 역설로서 의미는 없고 독자는 그저 하루키의 농담을 진지하게 수용할 뿐이라는 주장도 제기되나 이런 성향이 역설스럽게도 은연중 내재된 일본인의 기묘한 피해의식을 조장했다고 (<해변의 카프카>)고모리 요이치 같은 사람들에게는 대차게 까이기도 했으나 특히 언더그라운드 이후 개인이 모여 합력하는 긍정스러운 공동체나 결속을 두고서는 오히려 긍정하는 편. 한마디로 집단 자체를 싫어하지는 않지만, 그것과 별개로 본인이 여전히 집단이나 조직에 잘 적응한다거나 속하기 좋아하지는 않는 성향이라서 일본 우익 세력을 못마땅하게 보는 작가 중 한 명이다. 밑에 언급될 오에 겐자부로만큼 일본 우익 세력에 자주 쓴소리하지는 못하지만, 가끔씩 인터뷰나 기고문을 이용해 일본 우익 세력의 보수성이나 호전성을 부정하는 의견을 피력하기도 했다가 2012년 일본의 우경화를 대차게 깐 기고문 탓에 넷우익들이 하루키를 벌떼처럼 까고 들었다.
7년간 고쿠분지에서 재즈 카페를 경영할 정도로 재즈를 비롯한 거의 모든 음악을 좋아하며 오디오 시스템과 중고 레코드 모으기에서는 오타쿠다운 열정이 있지만, 좋은 음악을 듣고 싶어 오디오 시스템에 투자하지 오디오 시스템 자체를 좋아하지는 않는다고. 본인의 수필을 보면, 이공계 계열 센스는 꽝이라서 자주 이사하는 하루키는 이사 때 복잡한 오디오 배선 연결을 제일 골치 아파한다. 처음 외국에 가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이 그 도시의 중고 레코드 가게 알아보기라니 이미 할 말이 없는 정도. 그 사람의 집에는 음악 감상실이 따로 있다. 특히 재즈에 관한 한 평론가 수준으로 수필집을 내기도 했지만, 음악을 좋아할 뿐 음향 기기를 조작에는 소질이 없다. 이사하면 스파게티 가락처럼 얽히고 설킨 오디오 선을 제대로 꼽는 행위만으도 고역이라고 주장하는데 몇몇 작품을 보면, 스페인계 가수 훌리오 이글레시아스를 '느끼한 목소리'라고 까는 태도라든지 가끔 남들과 다른 독특한 음악관(觀)을 보이는데 하루키는 이글레시아스는 다들 싫어하지 않나? 그런 녀석은 서핑스쿨에 콱 처박아야 하는데. 하긴 그래봤자 곧 교관이라도 돼서 남들을 쥐어박을 테지라고 말한다.
그의 내성적이면서 담백한 성격은 수필집에서 확인 가능한데, 반면 단편 소설집 《밤의 거미원숭이》를 보면 콩트에 가까운 재미난 이야기도 많다. 장편은 진지하게 쓰고 단편은 가볍게 쓴다고 본인도 밝혔다. 장편소설이 본업이자 전력을 경주해 페이스 조절하면서 쓰는 마라톤이라면 단편소설과 수필은 휴식이나 스트레칭으로 생각하고 쓴다고 말한다.
5 하루키가 영향을 받은 작가와 작품
하루키는 자신에게 특히 영향을 끼친 작가로 스콧 피츠제럴드, 트루먼 커포티, 리처드 브로티건, 커트 보네거트, 레이먼드 챈들러 등과 더불어, 프란츠 카프카와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등을 꼽는다.
"이제까지 살면서 만난 가장 중요한 책"으로는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와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챈들러의 《롱 굿바이》 이 세 권을 꼽는다. 요미우리 신문에 실린 《1Q84》에 관한 기자들과의 대담에서는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사적인 언어" 개념에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을 밝혔다.
6 작품 일람
6.1 장편소설
-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1979)
- 1973년의 핀볼 (1980)
- 양을 쫓는 모험 (1982)
-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1985)
- 상실의 시대(원제: 노르웨이의 숲) (1987)
- 댄스 댄스 댄스 (1988)
-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 (1992)
- 태엽 감는 새(원제: 태엽감는 새 연대기) (1994[11], 1995[12])
- 스푸트니크의 연인 (1999)
- 해변의 카프카 (2002)
- 어둠의 저편(원제: Afterdark) (2004)
- 1Q84 (2009)
-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13] (2013)
- 애프터 다크 (2015)
6.2 단편소설
- 중국행 슬로보트 (1983)
- 렉싱턴의 유령 (1996)
- 반딧불이 (1984)
- 빵가게 습격 (1981)
- 빵가게 재습격 (1986)
- 태엽감는 새와 화요일의 여자들 (1986)
- 4월의 어느 맑은 아침에 100퍼센트의 여자를 만나는 것에 대하여 (1981)
- 꿈에서 만나요(= 소울 메이트)[15] (1981)
- 신의 아이들은 모두 춤춘다(단편집) (1999)
- 쿠시로에 내린 UFO (1999)
- 다리미가 있는 풍경 (1999)
- 태국에서 일어난 일 (1999)
- 개구리 군, 도쿄를 구하다 (1999)
- 벌꿀 파이 (2000)
- 밤의 거미원숭이(단편 작품 모음집) (1995)
- 도쿄 기담집 (2005)
- 여자 없는 남자들(단편집)
- 드라이브 마이 카 (2013)
- 예스터데이 (2014)
- 독립기관 (2014)
- 여자 없는 남자들 (2015)
6.3 수필집
하루키가 쓴 소설은 읽기 쉽고 주인공들의 사고방식이나 세계관도 대체로 '쿨'하다는 인상이 드는 작품이 많지만, 그것과 별개로 주제 자체는 우울하거나 무겁고 초현실주의적인 때가 잦은데 하루키가 쓴 수필집은 "소설의 하루키와 판이한 하루키"라고 할 정도로 널리 알려져 있고 재미있으며 위트가 넘치고 읽기도 쉽다. 자신은 '맥주회사가 만드는 우롱차'같은 느낌으로 만든다고 밝혔다. 물론 자신의 이름을 걸고 쓰므로 최선을 경주하지만 본업이라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고. 본래 소설을 집필하는 동안 주간지나 월간지, 문예 계간지에 틈틈이 연재하는 개념으로 수필을 작성하니 소설보다 분위기가 밝고 제시하는 주제도 명확하며 공감할 내용이 많다. 소설을 읽을 때는 잘 이해되지 않았던 부분이 수필을 읽고 확실히 이해되기도 하지만, 외국에서 살았던 이야기를 담은 수필은 일반 짧은 수필보다는 진지하고 작가의 작품세계 이해에 많이 유익하다. 대표작으로는 그리스와 이탈리아에서 1980년대에 한 생활을 녹여낸 <먼 북소리>, 프린스턴대학에서 1991년에서 1993년까 2년간 체류했던 경험을 이야기하는 <슬픈 외국어(원제: 이윽고 슬픈 외국어)>가 있다.
하루키가 쓴 모든 작품은 문학사상사에서 독점 계약 출판하기에 수필도 이 회사에서 언역해 출간한 작품이 많지만, 잡지에 연재했던 1980년대 수필집은 원래 체계와 제목을 무시하고 순서를 뒤죽박죽 섞거나 안자이 미즈마루의 삽화를 제외하고 언역한 때가 있어서 아쉽다.
수필마다 삽화를 그린 화백 안자이 미즈마루의 재치 있는 화(畵)도 볼 만하다.
- 특히 안자이가 그리는 하루키의 얼굴은 not only simple but also real.
하루키가 쓴 어느 수필을 보면, 실물 하루키를 (즉 하루키의 사진을) 본 적이 없는 어느 여성 독자가 길에서 하루키를 알아보고 사인을 요청했다고 한다. 어떻게 자신을 알아보았느냐는 하루키의 대답에 그 여자는 "미즈마루가 그린 삽화와 똑같이 생겨서."였다고 대답했다. 얼핏보면 아기 장난 같은 화풍이 일품. 물론 진짜 장난은 아니다. 달인 경지라고 해야 할까?
백암출판사의 3권짜리 수필집과 <그러나 즐겁게 살고 싶다> / <작지만 확실한 행복>은 내용상 겹치는 부분이 많으며, 동 출판사에서 출간됐지만 시기상 나중에 출판된 <스크랩> 일부 내용은 <그러나 즐겁게 살고 싶다>에 포함되어 있다. 물론 모두 들어 있지는 않다.
6.3.1 수필 일람
작품 제목과 분류는 문학사상사나 국내 여러 출판사의 한국어판 체계를 따라 연대별로 배열.
- 무라카미 하루키 수필집 (1~3, 도서출판 백암)
- 그러나 즐겁게 살고 싶다 (문학사상사)
- 작지만 확실한 행복 (문학사상사)
- 먼 북소리 (문학사상사)
- 우천염천 (문학사상사)
- 스크랩: 그리운 80년대의 추억 (문학사상사)
- 하루키의 여행법 (문학사상사)
- 무라카미 하루키의 위스키 성지여행 (문학사상사)
- 또 하나의 재즈 에세이 (까치)
- 슬픈 외국어 (문학사상사)
- 하루키 일상의 여백 (문학사상사)
- 하루키, 하야오를 만나러 가다 (문학사상사)
- 무라카미 라디오 (까치)
- 오블라디 오블라다, 인생은 브래지어 위를 흐른다 (동문선)
- = 비밀의 숲 (문학사상사)
- 승리보다 소중한 것 (문학수첩)
-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문학사상사)
- 무라카미 하루키 잡문집 (비채)
- 무라카미 라디오 시리즈 (비채)
- 채소의 기분, 바다표범의 키스
- 저녁무렵에 면도하기
- 샐러드를 좋아하는 사자
- 무라카미 하루키 에세이 걸작선 (문학동네)
- <쿨하고 와일드한 백일몽> 을 제외한 나머지는 기존 백암출판사에서 출간한 무라카미 하루키 수필집 1에서 3을 재구성하고 일부 누락된 에세이나 대담을 실은 것. 화백 안자이 미즈마루의 삽화가 대폭 반영되었다는 점이 돋보인다. 기타 백암출판사판에 있던 역자[16] 주가 대부분 삭제되었고 현행 외래어 표기법에 맞게 지명·인명 등 표기되어 있다.[17]
- 코끼리 공장의 해피엔드
- 백암판 무라카미 하루키 수필집 1에 수록된 '코끼리 공장의 해피엔드' 와, 3에 수록된 '랑겔한스섬의 오후' 수록.
- 밸런타인데이의 무말랭이
- 백암판 무라카미 하루키 수필집 1에서 <코끼리 공장의 해피엔드> 를 제외한 나머지 내용 수록.
- 세일러복을 입은 연필
- 백암판 무라카미 하루키 수필집 2와 동일한 내용 수록.
- 해 뜨는 나라의 공장
- 백암판 무라카미 하루키 수필집 3에 수록된 ' 해 뜨는 나라의 공장' 수록.
- 쿨하고 와일드한 백일몽
- 시드니! (비채)
-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현대문학)
- 라오스에 대체 뭐가 있는데요? (문학동네)
6.4 르포르타주
- 언더그라운드
- 언더그라운드 2권 약속의 장소에서
1995년 3월 20일에 일어난 도쿄 지하철 사린가스 살포사건을 주제로 취재한 내용. 현재까지 하루키의 유일한 르포르타주다. 1권은 사린가스 사건의 피해자들을 직접 인터뷰한 내용이고, 2권은 옴진리교 전(前) 신도들의 인터뷰를 다루고 있다. 하루키는 옴진리교가 일으킨 이 사린가스 사건에 지대한 관심을 가진것으로 유명하며, 후에 자신이 쓴 소설의 소재로 써먹기도 한다. 대표적으로 《1Q84》에 나오는 사이비종교인 '선구'.
7 번역가 활동
무라카미 하루키는 창작 활동과 병행하며 많은 번역을 해왔다.1979 년 "카이" 8월호에 게재 된 스콧 피츠제럴드 의 단편 '슬픔의 공작'이 상업지에 발표한 것이 그의 번역 첫작품이다. 하루키는 이에 대해 "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라는 소설을 쓰고 '군조 신인상'을 받고 무엇보다 기뻤습니다. 이것으로 번역을 마음껏 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로 피츠제럴드를 번역 한 것입니다 "라고 말했다. 실제로 '슬픔의 공작'의 번역 발표는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가 '군조' 1979 년 6월호에 게재된 지 불과 2개월 만의 일이었다.
1981년 5월 첫 번역서 《마이 로스트 시티: 피츠제럴드 작품집》을 간행. 1983년 7월 레이먼드 카버의 작품집 《내게 전화를 걸어》를 간행. 2004년 7월 "레이머드 카버 전집" 8권의 번역을 했다.
2003년 이후 미국 현대 문학의 번역을 지속적으로 발간하고있다. 같은 해 4월 《호밀밭의 파수꾼》을 번역하였다. 이 작품을 시작으로 2006년 《위대한 개츠비》, 2008년 《티파니에서 아침을》, 2007년 《기나긴 이별》을 시작으로 2009년 《잘가요 내사랑》, 2010년 《리틀 시스터》, 2012년 《큰 잠》, 2014년 《높은 창문》을 번역했다.챈들러 덕후
소설의 집필과 번역을 번갈아 행하는 작업 스타일을, 무라카미 하루키는 초콜릿과 소금전병이라고 비유했다.
8 주요 수상 경력
- 군상 신인 문학상 (1979 년)
- 노마 문예 신인상 (1982 년)
- 다니자키 준이치로상 (1985 년)
- 요미우리 문학상 (1996년)
- 구와바라 다케오 학예상 (1999년)
- 프란츠 카프카상 (2006년)
- 세계환상문학대상 (2006년)
- 아사히상 (2007년)
- 와세다 대학 쓰보우치 소요 대상 (2007년)
- 버클리 일본상 (2008년)
- 매일 출판 문화상 (2009년)
- 예루살렘상 (2009년)
- 스페인 예술 문학 훈장 (2009년)
- 카탈로니아 국제상 (2011년)
- 고바야시 히데오상 (2012년)
- 벨트 문학상 (2014년)
8.1 노벨문학상 떡밥
2006년 이후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된다. 2010년에도 유력한 수상 후보로 거론되었지만 수상하지는 못한 상태. 2012년에도 후보에 올랐었다. 2012년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모옌이 선정되어 아시아 작가인 하루키는 10년 뒤 쯤에나 노릴 수 있게 됐다[18]. 2013년에도 후보에만 오르고 앨리스 먼로가 수상했다. 한국엔 고은 일본엔... 2016년 하루키 노벨문학상 유력 기사가 떴다. 2위 아도니스(시리아)와 3위 필립 로스, 4위 응구기 와 시옹오(케냐)와 각축이 예상된다. 하지만 모든 예상을 뒤엎고 미국의 포크 락 가수 밥 딜런이 수상하면서 이번에도 물먹었다.
한편 이와 관련해 하루키가 트위터에다 관련 소감을 올렸다는 보도가 나왔으나, 이는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기사 하루키는 트위터를 하지 않는다.
9 관련 인물
- 안자이 미즈마루(安西水丸)
일본의 유명 삽화가. 안자이 미즈마루는 필명이며, 본명은 와타나베 노보루(渡辺昇).
하루키의 수필집은 미즈마루와 콤비를 이루어 한 작품이 많다. 미즈마루의 그림이 없는 하루키의 수필집은 그 가치를 20% 가량 잃는다는 평이 있을 정도. 하지만 그림을 끝내주게도 느리게 그려서 여러 사람 복장을 터지게 한다. 간단한 그림이든 복잡한 그림이든 상관 없이 똑같이 늦게 그리니 신기할 따름. 삼각형 도형을 그리든 작대기 하나를 긋든 둘다 똑같이 시간이 걸린다.
한 번은 하루키가 신문에 칼럼을 기고할 당시, 미즈마루에게 조금 어려운 과제를 내주고자, 한마디로 골탕 먹이려고 '두부 시리즈 연작'을 기고한 적이 있다. 미즈마루가 '기차에서 식당칸에 애완견과 함께 우아하게 돈가스를 먹는 로멜 장군'(...) 같은 복잡한 그림은 의외로 쉽게 그리지만, 단순한 두부는 오히려 잘 그리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 것. 그러나 미즈마루는 이를 비웃듯 별 고민 없이 네모반듯한 날두부 하나만 텅 그려주었다고. 이후 고심을 거듭하던 하루키는 드디어 미즈마루를 골탕먹일 소재를 찾았다면서 기뻐했는데 그 소재가 곤충(...)이였다. 미즈마루는 곤충, 특히 지네류의 털많고 징그러운 쪽을 아주 무서워한다고 하며, 하루키는 이것을 발견하자 바로 호쾌하게 연작 시리즈로 써 주는 대인배 정신(...)을 발휘하였다. 삽화를 보면, 정말 그냥 지네들만 덜렁 그려져 있다.참고 링크 책으로도 출판된 무라카미 수필집에서도 읽을 수 있다.
그림체는 유치원생이 그린 그림같지만 실제로는 일본대학 미술학과 출신에 교수 겸임 및 굵직굵직한 상을 여러번 받은 사람이다. 소설도 쓴다. 국내에서도 하루키의 작품으로 알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 하루키 얘기에 빼먹으면 조금 심심한 인물이다. 2014년 3월 19일 뇌출혈로 쓰러져 향년 71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 시바타 모토유키
영미 문학 번역가 전 도쿄 대학 교수. 하루키가 존 어빙 의 "곰 풀어주기"를 번역했을 때, 시바타가 그 번역문을 감수하면서부터 교류가 생겼다. 하루키가 시바타의 수업에 참가하거나 적극적으로 인터뷰[19]에 왔기떄문에 두 사람의 친분이 생겼다. 또한 하루키의 CD 북의 종합 감수도했다. "무라카미 아사히도 홈페이지"에서 독자들에게 영문법에 관한 질문에 대해 무라카미 대신 대답한적도있다.
2006년 3월에 도쿄, 삿포로, 고베에서 열린 '국제 심포지엄 및 워크샵 하루키를 둘러싼 모험 - 세계는 무라카미 문학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고문 및 사회를 맡기도 했다. 한편, 국제 심포지엄을 기록한 서적 '세계는 무라카미 하루키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의 편집도 실시했다.
- 제이 루빈'
미국 출신의 일본 문학 연구자, 번역가. 하루키 작품의 주된 영어 번역들을 앨프리드 번바움, 필립 게이브리얼과 함께 담당하고 이으며 이중에서 개인적으로도 특히 교류가 깊은 것이 루빈이다. 《태엽 감는 새 연대기》의 번역을 하루키 본인으로부터 의뢰를 받아 실시. 지금까지 장편 소설 4편[20], 단편 소설 24 편을 번역하고있다. 또한 2009 년 2월에 이스라엘에서 열린 예루살렘상 시상식 영문 연설의 영어 번역도 담당했다. 루빈은 자신의 저서 《하루키 문학은 언어의 음악이다》의 참고 문헌으로 하루키의 사진과 강연원고, 무라카미 부부의 미공개 인터뷰와 담화를 많이 이용하고있다. 도쿄 대학 문학부 에서 열린 시바타 쇼지의 번역 연습 수업에도 하루키와 함께 참여했다. 이 때 수업의 모습은 "번역 교실"에수록되어있다.
2006년 3월에 도쿄, 삿포로, 고베에서 열린 '국제 심포지엄 및 워크샵 하루키를 둘러싼 모험 - 세계는 무라카미 문학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에 참가. 같은 해 6월 아일랜드 에서 열린 프랭크 오코너 국제 단편 영화상 시상식[21]에 무라카미에 대리로 참석하기도 했다.
무라카미는 루빈이 번역 한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단편집 「Rashōmon and Seventeen Other Stories」(2006 년)의 서문을 쓰기도 했다. 이 책은 2007년 6월 신초에서 일본어로 간행되었다 [22]
무라카미 류와 비슷한 시기에 데뷔하여 둘다 인기작가가 됐다. 종종 일본에서는 'W 무라카미'라고 불리기도 한다. 사실 무라카미 류는 학창 시절 하루키가 경영하는 '피터 캣'에 다니고 있었으며 데뷔 전부터 아는 사이였다. 한국에서 현재는 절판된 대담집[23]도 내고 하루키에게 고양이를 주는 등, 왕래가 있었다. 무라카미 류는 하루키의 자세와 그가 하는 일을 높이 평가한다. 특히 하루키의 작품이 외국에서 널리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는 점과 하루키가 자기 작품을 해외에 적극적으로 피력한다는 점을 좋게 본다. 시미즈 요시노리는 'MURAKAMI 류와 하루키의 시대'에서 두 사람이 서로의 작품을 의식하며 대항하는 "세션"을 계속 전개해 왔다면서, 각각의 대표작을 비교해 논하기도 했다.하루키는 '무라카미 하루키, 가와이 하야오를 만나러 가다'에서 "처음부터 폭력을 뚜렷하고 예견적으로 쓰는" 점에서 류는 날카로운 감각을 지닌 작가라고 평가한 뒤, 자신은 "거기에 가기까지 시간이 걸린달까, 그와 나는 사회에 대한 접근방식이 다르다"라고 말했다. 무라카미 류가 더 어리지만 데뷔는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로 먼저 했으며, 하루키는 원래 로스 맥도널드 소설의 주인공 이름을 따서 '무라카미 류'로 데뷔하려다가 우연히 같은 이름의 류가 먼저 데뷔해버려서 강제로 본명으로 데뷔했는데 하필 데뷔했을 때가 카도카와 하루키가 한창 위세를 떨치던 때라서 '무라카미 류+카도카와 하루키 이름을 짜집어놓은 펜네임은 너무한 것 아니야' 하는 억울한 소리를 들었다(...)
- 무라카미 요코
무라카미 하루키의 부인으로 그가 대학생 시절 같은 수업을 듣다가 사귀게 되어 대학 졸업 전에 혼인하였다. 여담으로 에세이에서 나오는 하루키와 무라카미 요코간 일화는 《상실의 시대》의 미도리와 주인공과 일화와 비슷한(이라기보다 거의 정황이 똑같은) 부분이 많다. 현재는 전업 주부이나 하루키가 쓰는 여행 에세이의 사진은 대개 요코의 작품으로서 사진 실력은 프로 사진작가 빰치는 수준이다. 수필에서 아내가 필름을 교체할 줄 모른다고 놀리기도 한다.
수필집을 보면 소설가 데뷔 전에 부인이 직장을 다니고 하루키 본인이 집안 살림을 도맡은 시기가 잠깐 있었는데, 장을 보고 요리하고 청소하고 빨래했던 당시 일과를 상술하여 매우 가사에 도가 튼 모습을 현로하기도 했다. 이 경험은 소설 《태엽감는 새》에 반영되어 있다. 하루키는 이 시절을 회상하며 '남자는 한 번쯤은 주부 역할을 해 봐야 좋다. 세상이 생각하는 많은 여성성은 오롯이 주부라는 직업 때문에 생긴다'라고 밝히기도.
- 가와이 하야오
심리학자, 전 일본 문화청 장관, '하루키, 하야오를 만나러 가다'라는 대담집의 공동 저자이다. (1928년 6월 23일~2007년 7월 19일) 가와이는 원로 학식자 중에서도, 무라카미가 유일하게 계속 대담한 인물. 하루키는 "저에게 있어서 '소설의 의미'와 같은 것을 제대로, 종합적으로 이해하고, 정면에서부터 받아준 사람은 가와이 선생님 한분밖에 없었습니다. '이야기'라는 것이 우리들의 영혼에 있어서 얼마나 큰 지유력을 갖고, 또 그와 동시에 위험한 것일 수 있는지에 대하여, 매우 깊은 레벨까지 파악하고 계신 분입니다." "가와이 선생님을 만날 때마다 저는 기운을 얻습니다. 저런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아요." "내가 '이야기'라고 하는 단어를 사용해 말할 때에, 그 의미를 제대로 이해해주시는분은 카와이 선생님 정도 였다" 라고 말한다. 여담이지만 저 대담집은 제목을 보고 하루키x미야자키 하야오라고 생각한 사람도 꽤 있는듯(...)
- 야스하라 아키라
편집자(1939년 4월 29일~2003년 1월 20일). 야스하라는 중앙공론사에서 문예지 '바다'와 '마리 클레르'의 편집을 담당했던 사람이다. 하루키가 운영하던 재즈 찻집의 손님으로,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가 출판됐던 1979년 전부터 교류가 있었다.'중국행 슬로 보트'를 '바다' 1980년 4월호에 게재했던 당시, 하루키의 첫 단편소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야스하라는 일체 고쳐 쓸 것을 요구하지 않았다고 한다. "세세한 실무적 작업은 그분이 바라던 바가 아닌 듯했다"라고 하루키는 말한다. 2003년 1월 20일에 폐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하루키는 2006년 3월 10일에 발매된 '문예춘추' 4월호에 '어느 편집자의 삶과 죽음: 야스하라 켄씨'라는 제목의 에세이를 발표했다. 이 글에 하루키는 자신의 친필원고가 야스하라에 의해 무단 유출돼 도쿄 간다 진보초의 헌책방과 인터넷 옥션 등지에서 팔리고 있다고 썼다. 그리고 "기본적인 직업 윤리에 어긋나는(중략) 것이 아닌가", "그 글들(주: 야스하라에 의해 유출된 친필원고)은 부정한 루트로 반출된 일종의 장물로, 금전적 이익을 얻기 위해 팔린 것임을 여기서 명확히 하고 싶다"라는 말을 덧붙였다.
10 일본 문단과 불화
세계에 걸쳐 명성을 얻은 사람이건만 일본 문단을 대표하는 상인 아쿠타가와상과 인연이 없었다. 초기 작품인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가 제81 회 아쿠타가와상 후보에 올랐으나 오에 겐자부로[24]가 이건 너무 외국소설 일역투라 상 못주겠군요라고 일침해서 수상에 실패했으며[25] 두 번째 소설인 《1973년 핀볼》도 비슷한 이유로 수상에 실패했다. 이후로는 하루키가 중편소설을 쓰는 탓에 아쿠타가와상 후보에 오를 일이 없다. 하루키에겐 이게 못내 상처로 남았는지 《1Q84》에서 신인상 후보 작품을 고쳐써서 아쿠타가와상을 노린다는 소문도 떠돈다. 하루키가 노벨문학상 후보 운운 얘기가 나온 것은 《언더그라운드》 무렵의 일이다. 아쿠타카와상과 노벨문학상 위상을 생각하면 어느 쪽이 더 위상이 높은지는 상식으로 생각해봐도 알 수 있는 데다가 아쿠타가와상은 젊은 작가들에게 수여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헛소문이다.
일본 내에서도 하루키 소설을 대상으로 평은 엇갈린다. 하루키의 아쿠타가와상 받은 사실을 두고 일침한 오에 겐자부로는 무라카미 하루키가 쓴 소설이 지나치게 가볍다고 비판한 바 있고 와타나베 나오키는 자기애 현상에 불과하다라고 신랄하게 말한 바 있으며, 하루키가 쓴 소설에 나오는 여성상과 여성관을 비판하는 시각도 있다. 하루키가 쓴 소설에 등장하는 여성상과 여성관은 논란의 소지가 있긴 하다. 도코 고지는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는 가장 좋아하는 작품중의 하나다. 하지만 무라카미가 아무리 정치적으로 올바른 연설을 하고 자유로운 의견을 에세이에서 언급해도 무라카미의 작품이 성차별적인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라고 언급했다. 물론 하루키가 남성이니 남성의 한계를 감안해야지만... 사이토 미사코는 '무라카미 하루코라는 여성작가였다면 어땠을까?'라는 재미있는 가정을 하기도 했다.
하루키가 쓴 소설을 높게 평가하는 평론가도 물론 있다. 대표적으로 후쿠다 가즈야는 《작가의 값어치》라는 책에서 하루키를 나쓰메 소세키 이후 일본 문학사에 가장 중요한 작가로 자리매김했다"고 평했고, 오노 마사쓰구, 스게 미쓰히코, 스와 데쓰시, 가토 노리히로 등등 하루키 긍정파로 알려저있다.
11 예루살렘 연설
하루키는 2009년, 예루살렘 문학상을 받았다. 예루살렘 문학상은 프란츠 카프카 문학상과 더불어서 노벨 문학상으로 가는 전초로 간주되는데 이 수상식 자리에서 하루키는 높고 단단한 벽에 깨지는 알이 있다면 나는 알의 편에 서겠다라고 연설해서 꽤 논란을 일으켰다. 당시 이스라엘이 가자 지구를 침공하는 사태가 있던 시점이라 하루키가 한 이 발언은 이스라엘을 비판한 내용이 아니냐는 지적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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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접 읽고 판단하자. 연설문 번역
11.1 일본에서의 비판
일본에서는 벽과 알이라는 표현이 너무 모호하다라는 비판하는 견해가 제기됐다. 정말 모호하다. 하루키 자신이 자세히 말하지는 않지만 자신의 최신작인 《1Q84》와 연관해 생각하면, 단순히 벽과 알이 이스라엘을 비판한 것이라기보다는 조금 근본성을 띤 이야기가 아닐까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뭐 그 일을 향한 생각도 조금은 있지 않았을까. 아예 저서인 '잡문집'에서 다원성 의미를 담은 발언이지만 기본으로 벽은 시스템을 의미하고 알은 개인을 의미한다고 보면 된다고 직접 해설했으며 이 말은 갑자기 튀어나온 말이 아니라 본인이 소설을 쓸 때 늘 기초로 까는 생각이라고 주장한다.
작가 사이토 미나코는 아사히 신문에 "달걀을 꽉 움켜쥐어 으스러뜨린 뒤 냅다 던지는 퍼포먼스라도 보여줄 걸 그랬다", "이런 경우에 '나는 벽 쪽에 서겠다'는 뜻을 밝힐 사람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라는 감상을 밝혔다.
작가 다나카 야스오는 아사다 아키라와 한 대담에서, 예루살렘상이 노벨 문학상의 등용문으로 여겨진다는 점에서 "모두가 '달걀이 존귀하다'고 화답하는 국면에 벽 쪽에도 어느 정도 일리는 있지 않겠냐고 굳이 목탁을 치는 것이야말로 소설가로서의 증표라고 한다면" 이라는 전제를 단 뒤, 차라리 솔직하게 노벨상을 달라고 말하는 게 성숙한 장사꾼의 태도일 것이라고 논평했다. 누구나 당연히 힘없는 약자=달걀의 편에 설 때 굳이 벽 쪽=사회체제의 편을 들어주는 것이야말로 소설가라는 거냐, 즉 하루키가 하는 말과 행동은 모순되는 거 아니냐 하고 비꼰것. 하지만 2009년 2월 27일 신당일본의 유튜브 채널에서 다나카는 하루키에게 노벨상에 대한 마음이 있었는지 여부는 묻지 않았다.
작가 아사다 아키라는 다나카 야스오와의 대담에서 벽과 알이라는 비유가 너무나 모호하다고 비판했다.
훗날 하루키는 그 자리에서 할 수 있는 발언으로서는 가장 아슬아슬한 것이었다고 술회했다. 이스라엘 정부 요인들이 모인 무대였기에 그 이상의 발언을 하기는 곤란했고, 그 이하의 발언을 하는 것은 무의미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그 이상의 발언을 할 수 있었을까. 물론 다니엘 바렌보임 등 정권에 비판적인 유대인이 신랄한 발언을 한 예는 있다. 그러나 유대인 동포가 하는 비판과 일본인이 하는 비판은 무척 다르게 받아들여질 것이다. 예루살렘상을 수상하다는 소식을 듣고 많은 "진보적" 미디어가 비판을 했으나, 하루키는 현지에서의 발언에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고 미디어 측에서도 자신의 그때까지의 행동에서 본뜻을 어느 정도 미루어 추측해 주길 바랐다고 말했다.
12 어록
12.1 하루키가 한 말들
저는 그 일(사잔올스타즈)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잘 알지 못해서, 그 일에 대한 의견은 말씀드릴 수 없지만 어디까지나 일반론으로 말씀드리자면 모든 일본인은 어떤 의미에 있어서, 어떤 부분에 있어서 반일이 될 권리 정도는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성숙한 국가라는 것은 그런 겁니다. 성숙한 인간이 반드시 자기부정이나 자기비판을 마음에 품듯이.-사잔 올 스타즈의 반일 논란에 대해 한 여성 독자에 질문에 대한 대답
'어른이란 건 멋진 것이다'라는 생각 자체가 좀 잘못된 것 같습니다. 어른이라고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그릇입니다. 거기에 무엇을 넣을 것인가는 당신의 책임이죠. 무언가를 이루어낸다는 것은 그렇게 간단히 할 수 없습니다. 조금씩 그 주변의 것들을 그릇에 넣어가는 것에서 부터 모든 게 시작됩니다.
나는 고교 시절에 "어느 면도사에게나 철학은 있다."는 서머셋 몸의 글을 읽고 감동했었다. 어른이 되어 술집을 경영하면서도, '어떤 온더록에도 철학은 있다'라고 생각하면서 8년 간 매일 온더록을 만들었다
후회할 거라면 그렇게 살지 말고, 그렇게 살 거라면 절대 후회하지 마라
'자유로워지다'라는 것은 설령 그것이 잠깐 동안의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역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멋진 것이다.
12.2 작품 속 글귀들
"만약 모든 사람들이 읽는 책만 읽는다면, 넌 오직 모든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만 생각할 수 있다."-《노르웨이의 숲》
노력이란 좀 더 주체적이고 목적을 가지고 하는 걸 말한다.-《노르웨이의 숲》
자기 자신을 동정하지마. 자기 자신을 동정하는건 야비한 인간이나 하는 짓이야.-《노르웨이의 숲》
"인생이란 비스킷통이라고 생각하면 돼요. 거기엔 좋아하는 것과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 것이 있잖아요? 그래서 먼저 좋아하는 것을 자꾸 먹어버리면 그 다음엔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것만 남게 되죠. 난 괴로운 일이 생기면 언제나 그렇게 생각해요. 지금 이걸 겪어두면 나중에 편해진다고, 인생은 비스킷통과 같다고."-《노르웨이의 숲》
"난 네가 항상 나를 기억해주길 바래. 내가 존재했다는걸, 그리고 내가 이렇게 네 옆에 서 있었던 걸 기억해 주겠니?"-《노르웨이의 숲》
"추억들은 너를 내면에서부터 따뜻하게 해줘. 그러나 그것은 널 갈가리 찢어버리기도 해."-《해변의 카프카》
"네가 날 기억한다면, 다른 모든 사람이 날 잊어도 상관없어."- 《해변의 카프카》
"내 생각에 넌 아직 날 사랑해. 그러나 우린 내가 너에게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에서 벗어날 수는 없지. 난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을 알았어. 그러니 네가 다른 여자와 사랑에 빠진걸 비난하지 않을게. 화가 난 것도 아니야. 그래야 하겠지만, 아니야. 난 그저 아픔을 느낄 뿐이야. 아주 많은 아픔을. 난 이게 얼마나 아플지 상상 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틀렸었어."-《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
"아픔은 피할 수 없지만 고통은 선택이다."-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삶은 물같지 않아. 인생의 일들은 가장 짧은 길로 당연하게 흘러 가지는 않거든."-《1Q84》
"그자들은 그래, 잊어버릴 수 있어.""하지만 나는 잊지 못해.""역사 속의 대량학살하고 똑같아.""저지른 쪽은 적당한 이론을 달아 행위를 합리화 할 수도 있고 잊어버릴 수도 있어. 보고싶지 않은 것에서 눈을 돌릴 수도 있지. 하지만 당한 쪽은 있지 못해. 눈을 돌리지도 못해. (중략)."-《1Q84》
"난 꿈을 꿔. 가끔은 그것만이 올바른 일인 것 같다고 생각해."-《스푸트니크의 연인》
"사랑에 빠지는 사람은 자신의 잃어버린 조각을 찾는 것이다. 그래서 사랑에 빠져있는 사람은 그들의 연인을 생각할 때 슬프다. 그것은 네가 오래동안 보지 못했던 소중한 추억들이 있는 방으로 뒷걸음질 해 들어가는 것과 같다."-장님 버드나무와 잠자는 여자
"기억을 감출 수는 있지만, 역사를 바꿀수는 없다."
"소설가란 많은 것을 관찰하고, 판단은 조금만 내리는 일을 생업으로 삼는 인간입니다. 왜냐 하면 판단은 독자의 몫이기 때문입니다."- 잡문집
"사랑은 바람이다.분명히 불어오는 것을 느낄 수 있지만 잡으려고 하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마음이란 사용하는것이 아니다. 마음이란 그냥 거기에 있는 것이다. 마음은 바람과도 같아서 당신은 그 움직임을 느끼는 것만으로도 좋은 것이다."
"인간은 나이가 들면 그만큼 자꾸만 고독해져 간다. 모두가 그렇다. 그러나 어쩌면 그것은 잘못된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어떤 의미에서 우리의 인생은 고독에 익숙해지기 위한 하나의 연속된 과정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해야 할 말과 하지 말아야 할 말을 식별하는 능력은 자아의 사회화에 무척 중요한 능력일 터이다. 무엇이든 얘기하는 것이 선이라는 발상은 지나치게 억지스럽다."
"바로 코앞에 자유가 있는데 왜 손을 뻗어 거머쥐지 않는가? 왜 뒷걸음질하는가? 우선 자유를 거머쥘 것, 그리고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것, 그것이 우리가 사는 세계의 원칙이지 않은가?"
"무지라는 것은 현대에 있어서 최고의 사치인 것이다."
13 기타
- 하루키의 팬들은 하루키스트라고 지칭된다.
-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의 열혈 팬이다. 소설가가 된 계기도 야구장에서 찾았는데, 1978년 4월 1일 오후 1시경 메이지진구 야구장에서 스왈로즈의 데이브 힐턴의 2루타 소리를 듣고 소설가가 되기로 결심했다고 말한다.
- 고양이 애호가이며 대학생 시절부터 유럽에서 생활했던 1986년까지 많은 고양이를 키웠다. '고양이'는 하루키 소설에서 중요한 역할을 많이 많다. 직장에서 해외를 다니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현재는 기르는 것을 포기하고 있다고한다.
- 음악과 함께 그의 작품 세계를 지지하는 요소는 규칙적인 생활습관과 달리기이다. 실제로 저녁 9시 취침 - 새벽 5시 기상을 몇십 년째 빠뜨리지 않고 지키고 있으며, 생선과 채소를 주로 먹고 하루에 1시간에서 2시간씩 빠짐없이 달리기한다. 일찍 일어나서 달리고서 오전에 집필, 오후에는 음악을 듣거나 수필, 일역 등 반취미인 작업. 자신은 천재가 아니라 재능보다 규칙과 단련을 믿는다고 말한다. 일단 아무리 기술이 발달해도 장편소설을 쓴다는 건 상당한 체력을 요하니까.
- 달리기를 향한 애정은 실로 대단해서 "나는 머리로 사물을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라 몸을 움직여 파악하는 사람"이라는 말을 할 정도. 보스턴 마라톤 대회를 비롯한 각종 마라톤 대회와 철인 삼종 경기에 수십 번 출전한 달리기의 베테랑이다. 등단 이래 30년간 꾸준히 작품 활동 가능했던 원동력인 셈이다. 최근에는 이와 관련된 수필집을 내기도 했다(《달리기를 말할 때가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가끔 달리기를 예찬할 때 "신체 장애가 있고 스포츠를 못하는 사람도 조금 생각하라."고 지적받으면 '건강한 몸을 갖고 있으면서 그것을 무신경하게 함부로 다루는 사람이 더 문제 있다'고 받아친다. 1998년 6월 호놀룰루에서 열린 시각장애인 마라톤 15km 코스에 어느 시각장애인의 동반자로서 줄 하나를 연결해 마주 잡고 달린 훈훈한 일화도 있다.
- 마라톤에 대한 열정에 대한 예로 아테네의 마라톤 코스를 뛰기도 했고 한번은 100km를 이틀에 걸쳐 달리는 초장거리 마라톤도 완주한 적이 있다.
- 외국어에 능통하고 낯선 환경에 꽤 쉽게 적응하는 성격 덕분에 여러 국가에서 거주하였다. 일본어, 영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스페인어, 그리스어, 터키어를 할 줄 안다. 일역은 영어는 물론이고 프랑스어와 해당 언어로 쓴 문학작품을 읽는 데 지장이 없을 정도. 다만 에세이에서 이방인은 읽는데 말은 못 한다며 아내가 질책하는 장면이 나오기도 한다.
- 대표작인 《노르웨이의 숲》도 그리스와 이탈리아와 영국을 오가면서 완성되었고 《태엽 감는 새》는 미국에 소재한 프린스턴 대학에서 교환 교수로서 일하던 시절 직필했다. 이때 경험을 담은 에세이를 쓰기도 했다. (<먼 북소리>, <슬픈 외국어>)
- 대학 시절 문학 희곡/시나리오을 전공해서인지 다른 작가와 다른 문체를 느낄 수 있고 대사에 비중이 꽤 높아서 독자가 읽기 쉬운데 정작 본인은 "와세다 대학에서 나는 아내만 얻었다"고 말한다.
- 중학생 시절부터 재즈 레코드를 수집을 하고 있으며, 방대한 양의 레코드를 소유하고있다[26]. 음악은 재즈, 클래식, 록 등을 즐겨 들으며. 엘비스 프레슬리와 비틀즈, 비치 보이즈를 비롯한 60년대 가수와 밴드는 물론, 라디오헤드, 오아시스, 벡등의 음악을 즐겨 듣는다고 한다. 최근에는 콜드플레이와 고릴라즈, 스가 시카오의 팬이라고 공언 했다. 항상 새로운 무언가를 향하는 정신이 중요하다라고 하루키는 밝혔다.
- 영화를 좋아하기로 유명하다. 와세다 대학 문학부에서 연극영화론을 전공했고 수업에는 잘 안 들어가는 대신 희곡과 시나리오가 있는 도서관, 명화좌[27]에서 거의 살았다. 본인은 수업은 그리스 고전 비극만 해서 재미없고 테네시 윌리엄스나 사뮈엘 베케트 같은 현대 작가가 쓴 작품을 다루는 수업은 교수가 작가 욕만 해대서 들어가기 싫고(…) 해서, 타협책으로 "난 영화를 공부하는 학생이니까 영화 감상이 공부하는 거야"라고 생각했다고 말한다. 졸업논문도 미국 영화 비평에 관한 내용이지만, 의외로 자신의 작품을 영화화에는 난색을 표해서 하루키의 소설 중 가장 영화화가 용이하다는 평을 듣던 《상실의 시대》도 영화화에 상당히 오랜 세월이 걸렸다.
- 하루키는 첫 작품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가 처음으로 쓴 소설이었는데 이 작품이 당선되지 않았다면 글을 더는 쓰지 않았으리라고 말한다. 한마디로 머리털 나고 처음으로 쓴 소설이 당선된 셈인데 이상하지도 않은 게 이미 어린 시절부터 무라카미 하루키는 소설을 행한 관심이 지대해서, 학창 시절에도 책을 손에 달고 살았다. 심지어 밥을 먹으면서도 책을 읽었다니 말 다했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러시아 원서와 미국 원서까지 찾아 읽었다니 흠좀무. 이미 어린 시절부터 엄청난 독서가였기에 소설을 쓰는 데 큰 도움이 된 셈이다.
- 일본의 TV, 라디오에 출현한 적은 없다. 최근에는 인터뷰 의뢰가 있어도,일부의 신문 & 잡지를 제외하고 적극적으로는 응하지 않는다. 인터뷰가 싫은 이유로 본인은 재즈 카페를 경영하던 시절에 "매일 밤 고객을 상대로 평생 분의 대화를 했다.앞으로는 정말 대화하고 싶은 사람에게만 말하겠다고 맹세했다'라고 말한다. 한편,해외 매체의 인터뷰에는 정력적으로 응하고 있다.그 중 십수편은 번역되어 인터뷰 모음집 《꿈을 꾸기 위해 매일 아침 저는 눈을 뜨는 겁니다》에 수록되었다. 해외에서는 서점 사인회도 자주 한다.
- 평론가가 쓴 자신의 소설에 관한 문장은 일단 읽지 않지만, 인터넷을 통해서 받은 독자의 의견은 전부 읽는다고 한다."저는 옳은 이해라고 하는 것은 오해의 총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오해가 많이 모이면 정말로 옳은 이해가 그것으로부터 생겨나는 거에요"라고 하루키는 말한다.단 예루살렘상 수상에 관한 미디어의 비평은 충분히 읽고 있다고 한다.
- 대학 졸업 후, 무라카미 하루키도 평범한 사람처럼 취직 하러 이리저리 원서 냈다. 어느 방송국에 면접을 보러 갔다가, 면접관이 "ㅉㅉ. 우리 회사는 와세다대학 정도로는 안 돼."라며 면박하는 바람에 엄청나게 기분이 상했었다. 대학 간판과 사람의 능력이 무슨 상관인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어서 결국 취직도 접고 재즈 카페를 차린다. 다른 작가들이 그렇듯이 소설이 잘 팔리기 시작하자 카페를 접고 전업 작가로 돌아선 예다. 장편소설 《양을 쫓는 모험》을 출판할 즈음부터 금전 사정이 좋아져서 전업 작가가 될 수 있었다.
- 생선과 채소를 주로 먹고 붉은 고기는 평소에는 쇠고기 붉은 살만 먹는다. 가끔 스테이크가 땡길 때만 고기를 먹는데 한 달에 한 번 정도라고 한다. 스스로 자기 음식 취향을 노인 스타일이라고 규정해서인지 터키 동부로 여행해서 음식 탓에 고생했다고 수필에서 언급했다. 동부로 가면 생선은 도저히 찾아볼 수 없고 죄다 양고기만 주로 먹으니 고생했다는데 수필에서 한국 요리처럼 터키 요리는 너무 향이 강해서 안 좋아한다고 쓰는데 그리스 시골에서 먹던 빵처럼 그리스 요리는 무척 잘 먹었다고 말한다.
- 방송 출연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같은 성을 가진 작가 무라카미 류가 미디어에 얼굴을 자주 내밀고 이런저런 말하는 태도와 대조적이다. 오죽했으면 무라카미 하루키가 쓴 소설을 좋아하는 팬 중에서도 그 사람의 목소리를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사람이 부지기수일 정도. 그 사람이 쓴 수필집을 읽으면 평범한 사람 사이에 섞여 유유자적하게 살며 이것저것 사물을 생각하는 방식을 좋아하는 성격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하루키는 대학 시절 잠간 머리를 길게 길렀던 적도 있지만, 대학을 졸업하고서 지금까지 계속 짧은 스포츠 머리를 유지한다고 말한다. 일본에서 가장 성공한 작가 중에 한 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만, 성격도 소탈해서 옷이나 자동차 같은 거에 비싼 돈을 쓰지 않는다.
- 이에 관련해서 일화가 있는데 어떤 사람이 하루키에게 "선생은 저명한 소설가인데 왜 이런 차를 타고 다니십니까? 선생 정도면 더 좋은 차를 탈 수 있을 듯한데"라고 하는 말을 무척 못마땅하게 생각한 하루키는 "아니 내가 번 돈을 어떻게 쓰든 니가 뭔 상관?"이라고 반응했다고.
- 대신 자동차를 운전하는 것은 매우 좋아한다고 한다. 특히 수동변속기를 선호하는 편이라 렌터카를 빌릴 때도 늘 수동변속기를 찾는다고 한다. 하루키가 쓴 에세이집을 보면 종종 수동변속기를 찬양하는 글귀를 볼 수 있다. 하루키는 일본 내에서 수동변속기 애호가로 정말 유명하다.
- 하루키가 쓴 소설만 보고 하루키가 여성 편력이 대단할 듯하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는데 하루키는 고등학교 때 조금 놀았다고는 생각하지만 그때를 제외하고는 일탈된 삶을 살지 않았다고 말한다. 고등학교 때 놀았다는 것도 동네 외진 곳에서 모닥불이나 피워 놓고 친구들끼리 술이나 마시는 정도였다고. 다만 어릴 때부터 책을 지독하게 많이 읽어 국어 성적은 늘 좋았다고 한다.
- 아내 무라카미 요코는 신학과를 졸업해서 하루키가 쓴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양사나이도 성경에서 나오는 양의 의미로도 해석을 더할 수 있다고. 신학 지식은 아내에게 많이 영향받았다고 알려져 있다. 아내와 합의하에 무라카미 하루키는 아이를 낳지 않았다. 무리카미 요코는 사진을 찍는 취미가 있어서 종종 아내가 찍은 하루키의 사진이 자신의 책에 실리기도 한다. 하루키는 소설을 쓰면 아내에게 보여주고 이런저런 조언을 듣기도 한다고.
- 몽골 여행을 가서 노몬한 사건(할힌골 전투) 승전비를 보고 일본 극우를 비아냥거린 일로 살인 협박받은 바 있기도 하다. 우습게도 이때 한 몽골 여행이 그 일본 극우 잡지이던 마르코 폴로[28]에서 보내주었다. 하지만,그의 수필 및 기행문 책자에서도 언급하듯이 보내주면 가는 거지. 일절 마르코 폴로의 이념이니 뭐니 신경도 안 썼다.
- 지난 2005년부터 2015년 2월 현재까지 교보문고에서 작가별 도서 판매량을 집계한 결과 고전·현대, 국내·해외, 시·소설(추리 등 장르 포함)·산문집까지 포함한 문학분야 중 지난 '10년간 최다팔린 작가’는 무라카미 하루키라고 한다. 하루키의 책들은 교보문고에서 89만 4000여권 판매를 기록했다. 교보문고의 점유율이 전체 도서시장의 20∼25%라는 점을 감안하면 지난 10년간 국내에서 350만∼450만 권이 나갔다는 것을 예측할 수 있다고 한다.[29]
- 취미는 일역과 영일사전 idiom 암기라고 한다. 일역도 처음에는 취미 겸 생계 유지하고자 시작했다가 직업으로 굳어진 예라서 이제는 어디가서 취미가 일역이라고 말도 못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제 진정한 의미의 취미는 마라톤밖에 남지 않았다고 투덜투덜.
잠깐 마라톤에 관한 책도 내지 않았던가?주로 트루먼 카포티, 팀 오브라이언, 레이먼드 카버 등 미국의 현대소설을 일역했고 그 자신도 이 작가들에게 많이 영향받았지만,가장 좋아하는 소설인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는 쉽게 손대지 못하다가 어느 정도 나이가 먹고서야 일역하였는데 나오자마자 "무라카미 하루키가 일역한 위대한 개츠비 드디어 출간!" 같은 광고 문구가 나붙어 서점에서 불티나게 팔렸다.
- 영화화 자기 작품 《상실의 시대》(2010년 12월 일본 개봉)를 보고 조금은 다른 작품이 된 듯하다고 평가하였다.
- 애니메이션 《스즈미야 하루히의 소실》에서 나가토 유키가 줄곧 읽는 책인 무라카미 하루키가 쓴 소설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는 애니메이션 《하이바네 연맹》의 모티프가 되기도 했다.
- 아무래도 상관없는 이야기지만, 조정래는 한국의 젊은 작가들이 하루키의 영향력 아래 놓인 것에 우려스럽다는 반응을 내비쳤다.# 사소설 대가인 하루키와 사회소설·역사소설 대가인 조정래의 성향이 극단으로 다르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런데 이건 한국 문단의 자업자득이다. 원로급들이 사회소설, 역사소설 장르만 편애해서 기타 장르 쪽에서 원로급으로 크고 영향력을 끼칠 만한 기성작가가 없다.
- 일본 사회의 "자기 책임 회피" 경향을 따끔하게 비판했다. 그는 2014년 11월 3일 보도된 마이니치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일본이 안고 있는 문제들에 공통적으로 자기 책임 회피가 있다.”면서 "태평양전쟁 문제나 2011년 후쿠시마 원전 사고 등에 대해 정말 아무도 책임을 지려 하지 않는다."고 꼬집었다.#
- 2015년 4월 교도 통신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일본의 침략에 대해 피해자가 됐다고 할 때 까지 사과해야한다며 사죄는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고 말했다.#
- ↑ 이 세 사람이 동시대에 나타난 덕분에 일본 문학이 현재와 같은 형태, 즉 극히 사사로운 형태로 알려졌다. 혹자는 이런 현상이 근대다운 의미의 소설이 해체되는 과정에서 당연지사라고 주장한다.
- ↑ 게다가 스푸트니크의 연인은 1999년에 출간한 작품이니 주연 캐릭터를 한국인으로 설정했다는 것은 어느 정도 관심이 있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일본은 90년대까지는 한국에 관심이 거의 없었던 나라이다.
- ↑ 본인 말로는 자신은 재수 생활 때에도 학원에도 등록하지 않고 하루종일 라디오로 로큰롤만 들으며 지내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당시 와세다 대학은 지금처럼 들어가는 게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고.
- ↑ 애초에 결혼 후 새 집을 구할 때 카페도 같이 운영할 수 있는 형태의 가옥을 구했다. 글쓰다 망하면 카페를 해서라도 먹고 살기 위해서라고 하며 실제로 당시 일본 작가들은 이런 식으로 안전빵 부업을 뛰는 형태가 많았다
- ↑ 참고로 저 간판의 삽화는 존 테니얼이 그린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체셔 고양이
- ↑ 주된 체류지는 그리스, 이탈리아, 영국
- ↑ 1위는 《의사에게 살해당하지않는 47가지 방법》
- ↑ 이것은 하루키의 성욕상 판타지(...)와 관계된 부분으로, 쌍둥이 자매와 섹스가 꿈이라고 수필집에서 언급한 적이 있다.
시대를 앞서간 쌍둥이모에문제는 단순히 쌍둥이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행동이 동일해야 하는데 그러면 당장 드라이브할 때부터 골치가 아파진다고 말한다. 둘 중 누구 하나만 전석에 앉히면 이미 한 명만 차별 대우하게 되니까. 그렇다고 둘 다 후석에 앉히면 데이트도 아니게 된다고 한탄한다. - ↑ 그리스, 이탈리아, 런던을 돌아다니면서 생활하고 소설을 썼다. 인간관계에서 벗어나 창작에 몰두하고 싶어서라고.
- ↑ 그냥 '아무 생각이나 기준도 없이 떼로 우 몰려다니며 나쁜 짓하는 거 싫어한다'는 얘기. 군중심리의 부정적인 면이 좋은 예시.
- ↑ 1권,2권
- ↑ 3권
- ↑ 원제는 色彩を持たない多崎つくると、彼の巡礼の年(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의 순례의 해)로, 조사인 '~의'가 반복되지 않도록 조금 제목이 바뀌었다. 또한 '~의'를 형용사처럼 자유 자재로 활용하는 것은 일본식 표현이다.
역습하는 샤아가 아닌 역습의 샤아인 점을 떠올리면 이해가 쉽다. - ↑ 구버전은 번역의 질이 좀 떨어졌다. 예를들어 일본어의 존칭어 '~さん'을 '~씨'등으로 바꾸지 않고 '~상'으로 그대로 번역한 게 대표적.
- ↑ MOTHER 시리즈로 유명한 이토이 시게사토와 같이 집필하였다.
- ↑ 김난주. 백암판과 동일하다
- ↑ 예 : 치바 → 지바
- ↑ 하루키는 이미 평론가 평가 따윈 초월한듯 '노벨상 따위 타 봤자 3년 지나면 아무도 기억하지 못한다. 당신은 3년 전 노벨상 받은 사람을 기억하는가? 어떤 소설가가 여자 천명 정도랑 자본 뒤에 죽는다면 차라리 그게 더 오래 기억에 남겠지.'라고 냉소했다
- ↑ 나인 인터뷰 시바타 쇼지와 9 명의 작가들, 대표 질문 16 인터뷰
- ↑ 《1Q84》는 1권과 2권만
- ↑ 수상 작품은 단편집 'Blind Willow, Sleeping Woman '
-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단편 집"
- ↑ Walk Don't Run, 1981년
- ↑ 1994년 노벨문학상 받은 사람이다.
- ↑ 여담이지만, 오에가 받았어야 할 노벨상을 못 받은 사람과 앞으로 노벨문학상 탈 사람 넷을 뽑았는데, 르클레지오, 오르한 파무크, 모옌, 황석영이 그 사람들. 2014년 현재 황석영을 제외하면 모두 노벨상 수상자이다. 유력한 후보로 매년 거론되는 하루키를 생각하면 묘하게 흥미로운 대목.
내가 깐 사람이 노벨문학상 탈 리가 없어? - ↑ 1997 년 당시 3000개
- ↑ 명화를 상영하는 학교 내 극장
- ↑ 한국에 대하여 씹고 극우답게 일본을 자랑하기나 하던 잡지이다. 그러다가 유대인까지 씹으며 나치와 손잡고 싸운 일본이 잘못이 없다. 그리고 유태인 학살 수효도 부풀려졌다는 글을 싣다가, 미국 내 유대인 단체들의 반발과 보복성 엄포에 놀라 잡지를 폐간했다. 전여옥이
불쏘시개일본은 없다에서도 언급한 바 있다. - ↑